2019/03/12

알라딘: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알라딘: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최준식 (지은이) | 시공사 | 2015-05-22

 품절 확인일 : 2023-04-26





정가 14,000원
판매가 12,600원 (10%, 1,4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마일리지


반양장본 | 296쪽 | 152*223mm (A5신) | 535g | ISBN : 9788952773777



9.1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무의식에 귀 기울여라!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는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의식에 귀 기울일 것을 강하게 제안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잃는 이유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내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방향을 잃을 일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바로 우리가 얼마나 비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 짚어본다. 저자는 심리학이나 인접 학문 분야의 실험과 이론들을 인용하여, 우리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휘둘리는지 또 그것을 의식하는지 보여준다. 후반부는 최면의 역사와 원리, 실제 최면의 진행 과정 등을 보여준다. 최면에 관한 수많은 오해들을 풀고, 우리가 이 최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바로 무의식에 다가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는 것이다.





들어가며

1장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앵무새 같은 사람들 | 인습적 인간과 후인습적 인간 | 비본래성 | 자신은 물론 남까지 흔들어대는 사람들 | 무모한 간섭이 가져오는 나쁜 결과

2장 최면을 통해 본 우리의 모습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 | 인간은 모두 최면에 걸려 있다 | 사회가 우리의 생각을 결정한다 | 자극과 의식 | 마음은 물리적 법칙을 초월한다

3장 심리학 실험을 통해 본 우리의 모습
애시의 동조 실험 | 자아를 무력화하는 세뇌의 진실 | 사이비종교의 생명이 오래가는 이유 | 우리의 고정된 마음

4장 권위에 터무니없이 약한 우리의 모습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 | 외부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들 |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 독재자 | 히틀러도 사실은 소심한 인간일 뿐 | 전쟁과 복종 | 짐바르도의 죄수와 간수 역할 실험 | 최면과 역할 | 비주체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5장 진짜 나를 찾기 위하여
인본주의 심리학의 탄생 |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순수한 행복을 찾는 방법

6장 무의식에 다가가기
무의식으로 가기 전에 |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 | 융과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 | 마음의 구조 | 무의식은 지혜의 창고다

7장 최면, 그 오해와 진실
최면에 대한 이미지는 왜 좋지 않을까 | 최면을 정통 의학으로 인정하는 미국 | 프로이트와 최면 |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는 최면법 | 최면은 수면이나 무의식 상태가 아니다 | 최면은 위험하지 않다 | 그 밖의 오해들

8장 최면의 역사
최면의학의 역사 | 최면의학계의 도인, 밀턴 에릭슨 | 에릭슨의 상담 이론

9장 최면과 무의식
의식과 무의식 | 무의식 탐색 수단으로서의 최면 | 에릭슨이 제시하는 최면의 과정 | 에릭슨식 최면치료법

10장 최면의 진행
최면감수성을 측정하는 방법 | 최면의 단계들 | 유도 단계 | 탐구 단계

11장 실제 최면 현장을 찾아서
내담자의 증세에 대한 일차적인 판단 | 네 번의 최면 | 무의식으로의 초대

마치며







P.31~32
왜 우리는 항상 남에게 호기심을 갖고 잡담만 일삼을까? 그것은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보려면 지혜와 용기 등이 있어야 한다. 지혜와 용기 같은 덕목을 갖추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고역이다. 아니 아예 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존하지 못한다. 무엇을 하더라도 남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아서 항상 남에게 기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것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독존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혼자만 ‘중뿔난’ 그런 독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조하되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그런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 범부들은 이와 같은 양식으로 독존하지 못한다. (…)
어디선가 익명의 바람이 불면 자기도 모르게 바람이 부는 대로 눕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이유도 잘 모르면서 왔다 갔다 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고 슬퍼하면서 산다. 한평생을 이렇게 갈팡질팡하며 살다가 어느 날 황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게 보통의 우리들이 사는 삶이다. ■ 1장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_ 비본래성
P.55~56
예컨대 우리 한국인들이 장례식장에서 보이는 반응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주 흡사하다. 우는 소리나 외마디 소리, 그리고 동작까지 매우 닮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외가 없다. 장례식장에서 한국인들이 보이는 태도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의 그것과 대단히 다르다.
상을 당한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긍정적으로 보면, 이런 태도는 인간이 슬픈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관례를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너무나 슬픈 나머지 자신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례를 따라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사실 인간은 어떤 표현을 하든지 그것은 사회에서 학습된 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남(혹은 사회)이 자신을 대신 해서 사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슬픔을 표현하다가 자신의 진실한 내면적인 감정을 만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삶의 끝까지 사회에서 정해준 관습대로 간다. 그게 편하고 무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철저하게 남을 내 속에 넣고 살고 있다. ■ 2장 최면을 통해 본 우리의 모습_ 사회가 우리의 생각을 결정한다
P.82~83
이렇게 세뇌당한 것은 나중에 지우려 해도 잘 안 된다. 그러니까 프로그램된 것을 ‘디프로그래밍deprogamming’하는 것인데 이것이 생각 같아서는 쉬울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이미 세뇌 내용이 피실험자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서 이것을 풀어버리려고 하면 당사자가 큰 저항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한번 세뇌당한 사람들은 그것을 풀어버리기보다는 그냥 간직하고 살게 된다.
우리는 주위에서 한번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이 그 종교가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켜 괴멸된 다음에도 그 종교를 계속해서 믿는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가 해당 종교를 계속해서 믿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령 그동안 이 종교에 함몰되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했던 터라 사회에 재적응하는 데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 종교의 교리가 너무나 강하게 프로그램되어 있어 그것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전의 가치관을 계속해서 고수하는 것이다. ■ 3장 심리학 실험을 통해 본 우리의 모습_ 사이비종교의 생명이 오래가는 이유
P.160~161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은 프로이트 당대부터 시작된다. 이를 첫 번째로 시도한 사람은 칼 융이었다. 융은 프로이트가 제기한 성욕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융이 바라본 인간의 무의식은 성욕 이상이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가 바라본 무의식은 인류 지혜의 보고이자 원천이었다. 그는 집단무의식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집단무의식이란 융이 착안한 것으로서 개인적 무의식보다 더 심층에 존재하는 것이다.
융에 따르면 인간의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생긴 이래로 전승되어 내려온 수없이 많은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그동안 인류가 경험한 것들이 모두 이 무의식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의식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특히 인류가 지금까지 터득해온 최고의 지혜가 있다.
예를 들어 이 무의식 안에는 융이 말하는 원형, 즉 아키타입archetype이라는 이미지 혹은 개념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개념인데 거칠게 말해서 인류의 생각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 6장 무의식에 다가가기_ 융과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
P.173~174
최면의 대가인 밀턴 에릭슨Milton Erickson?신프로이트학파의 대가인 에릭 에릭슨이 아니다?의 주장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에릭슨은 최면학계에서도 매우 독특한 인물로 전통적인 최면기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능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런 자원들의 많은 부분이 실제의 경험으로부터 해리되어dissociate 있어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자원들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무의식에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에릭슨에 의하면 무의식은 창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의식과는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 개인의 심리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 에릭슨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당신의 의식적 마음은 매우 지혜롭지만 당신의 무의식은 더욱 지혜롭습니다.” ■ 6장 무의식에 다가가기_ 무의식은 지혜의 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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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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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한국사)을 전공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종교학 박사). 199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폭넓은 공부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국제한국학회’를 만들어 김봉렬 교수(2018년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나 고(故) 오주석 선생 등과 같은 동학들과 더불어 한국 문화를 다각도로 연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사단법인 ‘한국문화표현단’을 만들어 우리 예술문화를 공연형태로 소개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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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무의식에 귀 기울여라!
무의식이 알려주는 당신의 진짜 마음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가 무의식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프로이트, 융은 물론 20세기 세계 최고의 최면치료 전문가 밀턴 에릭슨의 연구를 통해, 의식과 분리된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문득,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니 원하는 게 있기는 한지, 말하자면 ‘내가 나를 잃었을 때’ 말이다.
그렇다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일단 태어났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기왕이면 행복하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책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의 저자 최준식은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의식에 귀 기울일 것을 강하게 제안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잃는 이유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내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방향을 잃을 일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것.
이 책의 전반부는 바로 우리가 얼마나 비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 짚어본다. 저자는 심리학이나 인접 학문 분야의 실험과 이론들을 인용하여, 우리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휘둘리는지 또 그것을 의식하는지 보여준다.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평소에 우리가 하는 생각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해 형성된 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 달리 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나 일은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라기보다 주위에서 그런 생각이나 일을 하라고 부추겼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면, 주위의 간섭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무의식이 깨어나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생각하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최면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최면의 역사와 원리, 실제 최면의 진행 과정 등을 보여준다. 최면에 관한 수많은 오해들을 풀고, 우리가 이 최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바로 무의식에 다가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는 것이다.
이 책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제 무의식에서 진짜 나를 찾아보자.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가 말하는
‘나’를 찾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저자는 우리가 지금처럼, 자신이 자신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려 살면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취해 살면 노이로제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이로제는 주체성이 심하게 훼손 혹은 침해되었을 때 걸리는데, 이렇게 되면 심하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남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고, 자꾸 자신이 신경 쓰인다. 자기 자신이 자꾸 의식되는 것은 자기가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노이로제의 증상들은 바로 이렇게 빼앗긴 자기를 찾아오라는 지시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 같은 것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이에 저자는 일반인들도 쉽게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면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바다를 보면 그 표면은 파도가 항상 출렁거리고 있다. 그래서 저 바닷속이 잘 안 보인다. 이때 출렁거리는 표면이 바로 우리의 의식 세계를 나타낸다. 우리의 의식 혹은 생각은 언제나 남에게 휘둘리고 있고 잡념이 많아 출렁이고 있다. 보통 때에도 이렇게 출렁이고 있어 그 속이 잘 보이지 않지만, 흥분이라도 하면 격랑에 휩싸여 우리의 깊은 마음속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그것을 알려면 의식이 평온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밑에 있는 무의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면은 현재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실 최면은 인류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와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써온 방법이다. 최면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들지도 비용이 많이 들지도 않고, 약간의 지식과 전문가의 도움만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최면에 들어가 자신의 무의식과 조우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최면은 간단하게 보면 3단계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순서대로 보면 ‘유도?탐구(혹은 암시)?각성’의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인 최면 유도는 내담자를 서서히 무의식으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도는 내담자의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주 많이 사용하는 최면유도법 중에는 강한 암시를 주어 손을 올리고 내리게 하는 것이 있다. 이때 최면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도문을 제시한다. ‘손이 풍선처럼 가벼워진다?가벼워지면 손이 올라간다?손이 올라가면 몸이 편안해진다?몸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는 식인데, 이것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점진적으로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면 유도가 끝나면 최면사는 내담자와 소통을 하면서 간접적인 암시나 직접적인 암시를 준다. 이 과정에서 양자는 내담자의 무의식 등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를 같이 탐구한다. 이때 내담자를 최면에 들게 한 다음 상상으로 영화를 만들게 하는 방법도 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암시를 주면 내담자는 의식으로부터 제약을 받지 않고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마음껏 스크린에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방법을 써보면 내담자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기의 모습이 나올 수도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최면치료의 본론에 해당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최면에서 깨어나게 하는 각성의 단계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최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얼마나 깊은지는 논쟁 중에 있지만, 중요한 것은 최면이 자신도 잘 몰랐던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죽음이 임박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면, 또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저자의 조언에 귀 기울여보자.





최미순 2015-12-10
최준식 교수의 다른 책들(사후생.전생.죽음학개론 등등) 사서 봤을때 나름 유익했다...원래 무의식에 대한 다른 책 사려다가 이 책이 우연히 눈에 보였는데 저자 이름이 같길래 동명이인인가??했더만 같은 분인걸 알고 내용이 호기심이 나고 궁금해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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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 기준은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빙혈 2015-06-20


무의식이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정신 영역의 일부입니다. 이성과, 이성에 기반하여 인간의 모든 정신, 행동, 선택, 결단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합리주의가 서구의 사조를 휩쓸 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이 사람들이 무의식에 대해 취한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무시하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이들만이 집착하는 미성숙한 "태도"의 일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S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이란 엄연히 우리 정신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며, 해당 영혼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모아졌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오히려 기라성 같은 현인들에 의해, 무의식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된 바 있습니다. 다만, 저자 최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대로, "집단 무의식 외 개인 무의식이 주목되지 못한 탓에" 프로이트 같은 선각자 한 사람의 기여만도 못한 진도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인간이 주위와 잘 융화하고, 내면의 자아와도 불화하지 않으며(이것이 잘못되면 온갖 정신질환과 신경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아가 언제나 맑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 무의식의 균형을 잘 잡는 게 필수적입니다. 다만 그 무의식이, 불건전한 집단 동조 현상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마치 좀비와도 같이, 양심 실종, 죄의식 부재, 타인에의 책임 전가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무의식적 동조(confirmity)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예증하기 위해, 한국 일각에 만연한 사이비 종교 집단과,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의 악행을 들고 있습니다. 사이비종교 집단이라고 해서, 저학력, 저소득, 취약 계층 출신만 모인 건 아닙니다. 직장에서 멀쩡히 제 기능 잘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일상의 일을 처리할 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도 있죠. 사이비 신념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반사회성향이 강할 듯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수가 더 많습니다. 이들 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자기들 종교 집단끼리만 모여 있을 때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그것도 조직을 갗춘 상태의) 다수인들이 전부 특정 방향의 행동을 취하니, 그게 보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특수 집단도 소(小) 사회라고 보았을 때, 이들은 지극히 "사회적 성향이 강한" 성원들이 되어 "질서"를 충실히 따릅니다.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죠. 공감무능력은커녕, 이들은 자신이 속한 소집단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인류 보편의 대의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밀접 관계를 맺고 있는 네트웍에 대해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는 데에 연원합니다. 이들도 아마,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하여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려는 자국 내 소수자(본회퍼 목사님 등)에 대해서는, "공감무능력자"라며 마녀사냥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소위 "대세"라는 것에 대해 이를 진정한 권위로 착각하여, 그 앞에서 아무 도덕성이나 이성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인간이 무의식보다 의식에 의해 자신을 매 순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런 역사적 우행을 저지르는 함정에서 얼마든지 벗어났을 것입니다.



저자는 한국전 당시 미국포로들이 플랭카드까지 들고서 "북침으로 벌어진 6.25"라고 주장하게 세뇌되었던 사례를 들며, 인간 정신 작용에서 의식,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낮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세뇌가 되었다 해도, 이를 "디프로그래밍"한 후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엄청난 강도로 혹사를 당한 후 이른바 "demonic angel"에 의해 달콤한 어조로 주입된 생각, 사상, 아이디어는, 이후 이 사람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강철 같은 의지로 영악하게 자신의 행동과 신념을 일일이 통제하는 "이성적 인간"의 관념은, 이런 뚜렷한 실증 앞에 허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인간이 건전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능한 한 최고 수위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면, 자신의 행동과 기호, 생각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어느 사무라이와 사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집단 무의식의 수레에 끌려가며 썩은 의식으로 정체(停滯)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라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 행동이 남의 행동을 무턱대고 모방하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과 준칙에 의해 이뤄지는 건지, 언제나 반성해 보는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아이를 과도하게 지배하여 자신의 (좌절된) 이상을 투사하려 드는 부모의 engulfment 심리/증상도, 결국 부모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지 못한 여한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려는 비극적인 시도입니다.



이런 자기 성찰 습관이 몸에 밴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유연하게 자신의 방침을 수정해 가면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인간일수록 마지막 자존이나 되는 양(혹은 누릴 걸 못 누린 불우한 처지라 이런 데서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듯) 자기 스타일을 조금도 고치지 않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오히려 양보를 하고, 전혀 타의 기준 노릇을 못할 사람은 자기 영향권을 더 늘려 가니,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퇴보를 거듭하는 게 다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의식의 세계로 첫발을 디디게 된 프로이트,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이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던 융의 입장을 재미있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개인 무의식"의 세계를 이론적으로 처음 해명하여, 인류가 무지의 장막 뒤에 불안스럽게 감추고 있던 거대한 영역을 우리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성욕 일원론적인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반대하는 편이며, 오히려 (개인 영역이건 집단성이건) 무의식을 "지혜의 보고(저자의 규정입니다.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되더군요)"로 규정한 융의 세계관이 더 너른 효용성을 지닌다고 간주합니다.



이미 미국에선 의학협회, 이후 정신과 의사 단체에서 요법 중 하나로 공식 인정한 "최면"에 대해, 저자는 여러 챕터에 걸쳐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점 중 첫번째 것은,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최면술사 한 마디에 바로 최면에 빠져들어, 무려 "전생"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의 "쇼"가 일반인들에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 최면에 절대 안 빠지는 이도 있고, 반대로 유명한 허버트 스피겔이 마주한 어느 군인처럼 단 한 마디로 최면에 죽은 듯 빠져드는 아주 드문 타입도 있다는 거죠. 주문 한 마디에 줄줄이 표준 체질의 성인이 최면에 빠져들 수는 없으며, 하물며 최면에 걸린 채 무의식이 털어놓는 스토리가 "전생 사연"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지적합니다. 전생을 믿고 안 믿고, 또 그것이 실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최면 중 발화와 전생(의 기억)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여튼 "꿈"은, 분명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대화를 나누는 장(場)입니다. 이런 채널을 적절히만 활용하면, 개인의 무의식과 의식이 균형을 잡게 도우므로 아주 유익하다는 지적인데요. 한 예로 말레이의 세노이 족은, 범죄 발생률이나 정신질환자 유병률이 거의 0에 가까워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아이들이 꿈을 꿀 때, 원로들이 자상하게 상담해 주며 "다음 번 꿈을 꿀 때는 이러이러하게 (꿈 속에서 과감히)행동해 보라"고 조언해 주는 게 오랜 관행이라는군요. 이렇게 어려서부터 "정신 요법"을 생활처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서를 유지한다는 게 저자의 소개입니다. 참 귀가 솔깃해지는 토픽이 아닐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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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다윗 2015-05-26


인간은 누구나 남을 의식하고 산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일까. 바로 인생을 ‘선’이라 여기고 남들이 옳다고 말하는 그 선의 인생을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인생은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문득,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니 원하는 게 있기는 한지, 말하자면 ‘내가 나를 잃었을 때’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일단 태어났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기왕이면 행복하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행복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잃는 이유는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이자, 인간의식연구센터 대표인 최준식 박사가 무의식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프로이트, 융은 물론 20세기 세계 최고의 최면치료 전문가 밀턴 에릭슨의 연구를 통해, 의식과 분리된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해 설명한다. 바다를 보면 파도가 항상 출렁거리기 때문에 바닷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때 출렁거리는 표면이 바로 우리의 의식 세계를 나타낸다. 우리의 의식 혹은 생각은 언제나 남에게 휘둘리고 있고 잡념이 많아 출렁이고 있다. 보통 때에도 이렇게 출렁이고 있어 그 속이 잘 보이지 않지만, 흥분이라도 하면 격랑에 휩싸여 우리의 깊은 마음속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그것을 알려면 의식이 평온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밑에 있는 무의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실 최면은 인류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와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써온 방법이다. 최면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들지도 비용이 많이 들지도 않고, 약간의 지식과 전문가의 도움만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최면에 들어가 자신의 무의식과 조우할 수 있다.



사람이 최면에 걸리게 되면 자신의 통제력을 잃게 된다. 최면에 걸리면 자신은 의식을 잃고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 최면사의 명령에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최면은 본인이 걸리지 않겠다고 저항하면 결코 걸리지 않는다. 최면이란 최면사가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면 시 피최면자가 원하면 결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자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 상태에서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기 힘들지만 무의식 상태가 되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최준식/ 시공사/ 2015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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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아트로포스 2015-07-22



인간은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이나 고난의 한치앞도 모른채 살아가곤 한다. 그러다 그 어려움을 맞닥뜨리는 순간 정신적인 혼돈을 느낀다. 때론 그 충격에 흔히 말하는 정신줄을 놓기도 하고 어떻게든 가지고 있던 낙천적인 기질로 헤쳐나가곤 한다. 나또한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참 자식농사라는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것이로구나싶다. 심리상담도 약도 그때뿐인 것 같아서 도대체 이 무기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신에게 매일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함께 상담하고 이야기를 해보는데도 매일 아침만 되면 되풀이된다. 학교도 가기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실상은 이런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환경문제인지 유전인 것인지 아이가 어렸을때 잘못된 육아에서 비롯된 것인지..아무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학대나 방치처럼 심한 경우가 아닌데도 이런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열정페이니 대학생들이 대학에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취직을 위해 공부하는 곳이라는 둥 연세대를 나와도 갈 곳이 없다느니 이러한 암담한 미래상이 부모의 걱정섞인 대화와 매일 학원에 가야만 하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해야하는지 모르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러한 것들이 무기력한 아이들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암튼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여러가지 심리서들을 찾게 된다.



그 중에 이 책은 의식 연구의 권위자인 최준식 교수가 쓴 양질의 책이다. 왜 맨날 엄마만 잘해야 하는가 왜 엄마이어야만 하는가. 딸이라면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부정하고 내 잘못이 아니야 라고 부인하고 살고 싶었지만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오전엔 누워있다가 아이들이 오는 시간에 다다닥 집안일을 하고 간식을 주고 저녁을 차려주고 공부를 봐주면 나의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우울감에 뭔가 나의 영역에서 제대로 작은것 하나 도와주지 않고 대충 하는 남편에게 다다다 잔소리를 하거나 짜증섞인 하이톤의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아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엄마들이 진정으로 변화해야하고 무엇보다 본인의 우울감에서 벗어나 본인이 행복하고 에너지를 가지고 살아야 아이들도 변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나 부모교육이나 아이와의 상담교육을 통해서 한결같이 깨닫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하루아침에 좋아지거나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나의 우울감에서 벗어나 비폭력대화법을 익히고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도움이 되었다. 사회가 우리를 결정한다는 것,여러가지 예를 통해서 자극과 인식적인 면에서 우리는 최면아닌 최면에 걸려있다는 것, 세뇌에 빠지는 것, 우리의 고정적인 습관과 인식,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 독재자, 어느새 비주체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 책을 읽음으로서 많은 것을 인식하게 되고 깨닫게 된다. 내가 무엇을 중요시 하는 사람인지 무엇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내가 벗어나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무의식에서 나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은 그래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선결과제인 것이다. 최준식 교수가 쓴 글은 공감이 잘 되었고 예를 통해서 다름 사람의 사례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무의식에 귀를 귀울여야 함을 깨닫는다. 그러면 그저 눕고만 싶고 회피하고만 싶은 마음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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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서지연 2015-06-16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거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 나를 이입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진정한 내가 그 어디에도 없다. 인간망의 관계 속에 휩쓸려 다니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책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는 결코 자신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의식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최준식 교수는 그 답을 무의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인간은 왜 살고 있을까를 필두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행복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올바른 답을 내놓기 어렵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거기에는 참된 나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

진정한 자아 찾기는 자기 주체의 실현이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굉장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라는 존재는 나름의 주관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나'의 생각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예를 들어 종교인, 정치인, 운동권에 소속된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바른 일을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갇혀 다른 이들에게 언제나 자기의 주장만이 올바르다고 말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힘 또는 강압, 강요까지도 할 수 있다.

?

저자는 이와 함께 부모의 역할도 말한다. 인간은 사회라는 제도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회를 경험하게 되며 그때부터 자신의 부모를 통해 세상에 대한 선입견과 더불어 부모의 사고체계를 답습하게 된다. 세뇌라는 말이 아이러니컬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습관, 사고 방식, 인간관계 등을 그들의 부모에 의해 기준잡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회에 나가 자신보다 많이 알고 있거나 자기보다 강한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종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집단 속에 머무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기 이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그것을 수긍만 한다면 그 삶을 편하게 느끼며 편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차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았던가..그런 생각들이 자기 자신을 사회 속에서 인습적인 인간으로 살게 만드는지 모른다.


저자는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유한한 존재'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말한 '비본래성'에 주목하였다. '비본래성'이란 세상의 통념대로 휘둘려 사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내 삶의 주체가 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익명의 주체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산다. 익명의 주체들은 언제 어느 때고 나를 공격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대도 불구하고 타인의 상처를 헤집고 핡퀴고 그들을 간섭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기를 아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제대로 직시할 때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게 진정한 삶이었는지 신은 누구인지와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맞이한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한 주체의 삶이란 언젠가는 죽지만 그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죽음이 오기 전에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진정한 삶에 대한 성찰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산다. 내가 잠시라도 괴롭거나 불행하다 느낄 때면 주변에서 듣는 말이기도 하다. 말이 쉽지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할 때가 많다. 오히려 직면한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히기 보다는 돌아가는 편이 많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을 열고 좋은 답을 찾을 수 있는 지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지만 사실은 자유로부터 도망치려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자유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게 힘든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얻게 되는 집단의 힘과 권력을 무자비하게 이용한다. 그들은 누군가 책임져 줄 사람이 뒤에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죄스런 감정조차도 갖지 않는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들이나 2차 세계대전에 패하고도 전쟁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은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상부에서 지시받은 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지키느냐만이 중요한 것이다.

?

이를 보면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세계관, 공동 의식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한 무리들에 속하면서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참된 주관인냥 행세한다. 저자는 이런 것들이 모두 집단 최면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오로지 커다란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생각은 그것들에 맞춰 움직일 뿐이다. 순간 애국심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국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건 애국심이다. 국가는 개개인의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라는 집단에 소속된 사명감을 가진 인간만이 존재하며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다. 애국심이라는 명분으로 만행하는 책 속의 갖가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서 도대체 그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 든다.

?

사회심리학자 애쉬의 실험에서 보다시피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답을 말하는 그룹이 등장하면 그 사람들의 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는대도 불구하고 자신의 답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다수의 의견에 묻혀 소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이런 사례에서도 충분히 나타난다. 그는 구원파 같은 사이비 종교,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같은 모순된 집단이 추구하는 바를 한 인간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얼마나 자신의 주체성이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려준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예를 들기도 하는데 톰 행크스가 열연한 주인공 검프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가 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는 모습을 설명해준다. 주인공 검프는 그냥 뛰는 것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가 어떤 의미를 두고 뛰는 것인냥 한다. 몇 년씩 뛰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를 따라하기 바쁘다. 그런 그가 뜀뛰기를 그만두자 같이 뛰는 의미를 두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흩어진다. 남이 하니 따라했는데 그 주체가 없어지니 자신들도 더 이상 뛰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인본주의 심리학에 대한 설명도 하고 있다. 심리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프로이트가 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는 바로 '무의식'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1차적인 학설이지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무의식의 발현을 성욕에서 출발했다. 이전의 계몽주의자들이 말한 이성적 인간과는 상반된 견해로 인간은 이 무의식이 억압을 받게 되면 정신병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환자들을 상대로 진행되었기에 모든 인간에게 대입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는 이런 문제들을 확장시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에 대한 욕구, 자기존중에 대한 욕구, 자아실현 욕구 더 나아가 자아초월욕구 등으로 단계를 나눠 보여준다. 이 단계들은 어느 하나라도 월단할 수 없고 하나하나 실현해 나가면서 도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다.

?

참된 자아가 자기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장자의 이야기 중 신발이나 허리띠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이 나에게 꼭 맞으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편하지만 꼭 맞지 않으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즐거워 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주체성을 회복하는 순간이지만 자기를 계속 의식한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타자로부터 자꾸만 침범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를 찾기 위해 무의식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첫번째로 국민교육헌장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처럼 우리 각자는 해야할 일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아실현이란 이런 자신의 잠재 가능성을 실현하여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해야하며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는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무의식은 그 자신의 사명, 소명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자아 실현이 안된 아이의 경우 부모의 필터링을 거쳐 아이에게 각인되어 버리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그 가치관이 바뀌기는 어렵다. 사고 체계가 후인습적인 교육체계에 의해 틀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하지 않았던가..진정 우리의 내면,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삶이 좋은 것인지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의 사유보다 무의식의 사유가 크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의식의 사유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문제는 다르다. 저자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로 무의식의 깊이를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성욕의 근간인 무의식 이론을 확장시킨 칼 융의 이론처럼 무의식은 인류 지혜의 보고이자 원천으로 본다. 음양의 조화처럼 무의식의 발현도 의식의 발현과 마찬가지로 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 의식의 심층에는 대극을 합일하려는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융의 해석처럼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현실 세계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무의식은 지혜의 창고이기 때문에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

무의식의 세계를 만나는 방법으로 저자는 최면을 이야기한다. TV쇼 등을 통해 우리는 종종 최면을 접하게 된다. 그런 의식들을 통해 만나다 보니 최면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국에 비해 미국 의학계는 최면을 의술로 인정한다고 한다. 프로이트도 최면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최면법은 권위적이었고 환자와 상생하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하게 된 치료법은 자유연상법이다. 그것은 떠오르는대로 이야기하는 도중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욕망이나 현재의 문제라는 것이다. 최면법은 권위적이었던 프로이트가 최면을 배척하게 되면서 연구가 진전되지 않다가 1960년대 이르러 재조명 받게 되었고 점차 진보하여 다양한 의료 행위와 범죄조사 또는 스포츠, 입시 등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최면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도 많은데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최면의 역사와 함께 최면의 진행 방법, 그리고 최면 현장 예시 등을 소개하고 있어 무의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최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무의식은 정말 깊이를 알 수 없다. 어떤 세계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세계를 통해 진정한 참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인 듯하다. 세상에 휩쓸려 나라는 존재를 잃고 살아가기 보다는 주체적인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일이지 않을까? 우리가 좀 더 지켜보고 연구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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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 융, 밀턴 에릭슨 글고 최면과의 만남...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애서가 2015-06-22


어느 연예인이 안대를 하고 긴의자에 누워있습니다.
글고 방청석에서 방청객들이 진행자와함께 이광경을 지켜봅니다.

그러면서 최면술사가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며 뭐가 보입니까?
무엇이 연상됩니까? 라며 물어봅니다.
?
그러자, 연예인은 뭐가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최면술사는 또 그다음엔 뭐가 보입니까? 계속 묻습니다.
?
이렇게 연예인과 최면술사는 서로가 대화를 합니다.
이윽고 안대를 풉니다.
?
그러자 ?최면술사는 연예인에게 어렸을때의 안좋았던 기억도
얘기해주면서 그 연예인의 과거를 유추설명해줍니다.
?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최면에 잠시 자신의 몸이 빠지면 정말
내가 전생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전생이라는게 진짜로
있는건지 있었다면 왜 기억을 못하는지 궁금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우리는 친구들끼리도 가끔 농담을 합니다.
?
너희들은 전생에 부부였던거 같아~
너희들은 전생에 원수였는데 현세에서 서로 그악감정들을 풀라고
이렇게 형제로 태어나게한거야~

참으로 최면의 세계는 무엇인지 전생이라는게 정말 있는건지
궁금하던차에 이화여대 한국학과교수이자 인간의식연구센터
대표로 계시는 최준식교수님께서 저술하시고 <시공사>에서 출간한
이책 <무의식에서 나를 찾다>을 읽게된건 행운이었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위해서도 뜻깊은 만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
이렇게 독자와 책의 만남도 인연이라는게 있나 봅니다.?

이책에서는 최면에 걸리는 정도를 <최면감수성>이라고 표현하는데
<눈동자굴림 측정하기>, <사시정도 측정하기>등의 가벼운 테스트를
통해 최면에 잘걸릴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먼저 테스트합니다.
?
글고 본격적으로 최면의 단계로 <유도 →탐구 → 각성> 이 세단계로
최면을 유도합니다.?

그리하여 최면술사가 피최면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들도 소개되었는데
저도 지인에게 책에서 나오는대로 읊어보라며 최면의 세계에
빠져볼려고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책을 통해 저는 많은 걸 느꼇습니다.
평소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걸 의식하면서 살고있습니다.
조선시대 519년간의 전형적인 유교사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는?
체면주의, 형식주의, 허례허식, 남들의 따가운 시선, 사회적 지위와 체면
등에 지나치게 민감하며 살고있습니다.
?
심지어는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자신이 진정 원해서 전공을
선택한게 아닌 사람들도 많아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금 사회생활하고있는 직장인들도 진정 자신이 원해서 이직업을
택한게 아니라는 사람들이 엄청난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
그냥 경제적 문제때문에 남들이 어느 정도는 인정하니까 그냥 일이
쉽고 여가시간도 많이 날거 같아서라는 천편일률적인 이유에서
그냥 그직업에 젖어 살고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시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무미건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테두리안에서만 살기에 코쿤족, 캡슐족 등의
신종 계층도 생격나는게 아닌가 생각되엇습니다.
?
이렇게 남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며 사는 삶은 바람직하지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식세계를 잠시 잠재우고 자신이 타인에게서 간섭을
덜받는 무의식의 세계로 침잠해들어간다면 진정 자기자신과 해후할 수
있고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무의식의 세계로 가는 방법으로 최준식교수님께서는 <최면>을
권유하고계시는 겁니다.
?
그리하여 무의식의 세계인 최면을 통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된다면 긋것만큼 중요한건 없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면 된다고 봅니다.
?
스티브 잡스도 스탠포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얘기했듯 <내가 다시
태어나도 이일을 할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자문해보는 그런 시간을
갖고 본인이 진정 하고싶은 걸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글고 이책에서는 프로이드, 융 등의 심리학자들의 이론도 적절히 소개하고
세계 최고의 최면치료 전문가 밀턴 에릭슨의 이론도 설명해주면서 이야기
하기에 더욱 알기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책은 내가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내가 지금하고있는 일이 내가짅어 원해서 하있는 것인지
회의에 빠지신 분들, 매너리즘에 빠져 무미건조하게 지내는 분들께서도
한번쯤 읽어보실 것을 권유드립니다.

저도 제자신과 대화를 하기위해서 시간나는대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고싶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세계> 바로 그곳에서 진정한 제자신을 만날 수 있고
악수할 수 있다고 생각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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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최준식 2009





알라딘: 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최준식 (지은이) | 모시는사람들 | 2009-10-25



정가 10,000원
판매가 9,500원 (5%, 5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208쪽 | 140*210mm | 270g | ISBN : 9788990699787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근저에 기층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는 무교(巫敎)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미신’이자 ‘무속’으로 왜곡되고 비하되어 왔는지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 종교의 기본 코드는 표층의 유교(儒敎)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무교라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종교 전반을 일별한다.

책은 결론적으로 “종교로서의 무교”를 제자리에 복권시킴으로써, 정신세계의 실제(무교)와 현상(외래종교, 기성종교) 사이의 괴리로부터 빚어지는 한국사회 정신문화, 종교문화의 부조리와 파행을 치유하고 무교의 문화적 자산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Ⅰ. 한국의 고유 종교인 무교는 미신인가?

- 무교는 어떤 종교?
무교에 대한 간단한 소개 / 무교의 기본 구조/ 무당은 순전한 사제 / 무당이 되려면? / 후post 내림굿 이야기

- 굿은 어떻게 하나
굿이란 언제 그리고 왜 하는 것일까 / 굿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 굿은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 한국인의 근원 신앙으로서의 무교
굿의 종류에 대해 / 전형적인 문화영웅, 바리공주 이야기 / 무교의 신령은 잡령?

Ⅱ. 왜 한국은 무교의 나라인가?

- 한국 무교 약사
무교는 한국인의 근본 종교 / 한국 무교 약사略史와 그 전개 양상 / 신라 금관 이야기 / 신라 이후의 무교 이야기

- 무교의 현재
무교의 종교사회학적인 의미를 찾아 / 조선 이후의 무교 / 현재의 무교 / 한국인의 근본 종교는 분명 무교!

Ⅲ. 한국인의 종교적인 내면 세계

- 무교에서 바라본 불교와 그리스도교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행信行 구조 / 그리스도교의 경우 / 불교의 경우
불교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초월적인 존재와 정말로 소통하는 것일까? / 맹신 혹은 유치한 신앙의 폐해
-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똑같다
고등종교와 기층 종교의 차이란? / 그저 권력으로 판가름 날 뿐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무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둬라! 한국인은 모두 똑같은 신앙을 가졌다.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근저에 기층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는 무교(巫敎)가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미신’이자 ‘무속’으로 왜곡되고 비하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지은이 : 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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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무의식 연구의 새로운 지평 (반양장)>,<서 북촌 이야기 - 상>,<동 북촌 이야기> … 총 114종 (모두보기)
소개 :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한국사)을 전공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종교학 박사). 199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폭넓은 공부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국제한국학회’를 만들어 김봉렬 교수(2018년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나 고(故) 오주석 선생 등과 같은 동학들과 더불어 한국 문화를 다각도로 연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사단법인 ‘한국문화표현단’을 만들어 우리 예술문화를 공연형태로 소개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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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인터넷과 무선통신이 생활필수품이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우주로 로케트가 날아가는 21세기,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종교’가 엄청난 교세를 확장시켜가는 현대사회에, 무속이나 점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사양산업이 되었어야 마땅할 터.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 무속인(무당)의 숫자는, 최소한 줄어들지는 않고 있으며, 골목과 산기슭을 배회하던 점집이나 귀신이야기는 TV를 넘어 인터넷 속에서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이는 ‘무속’의 이면에 간단히 치부하거나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깊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무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둬라!
저자는 무교야말로 우리 민족의 유일의 자생적 전통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교를 무속으로 비하하고, 그 속성에 대해 오해하거나 편견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무교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동안 힘없고 가난하고 억압당한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아픔을 달래 왔던 핵심적인 종교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기성종교의 신앙행태조차 무교의 속성을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분석한다. 그것은 고스란히 현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기실 무교가 ‘무속’으로 전락한 것은 순전히 무교가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무교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 필요
무교의 복원 내지 복권이 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인가?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혹은 유폐시킨 종교적 정체성을 양지로 드러내서, 표리가 일치하는 정신적인 성숙을 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지금껏 겪고 있는 온갖 파행적 사회문화의 치유와 대안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교의 문화 속에 대단한 문화적 자산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즉흥 연극판이라 할 수 있는 굿판에서 연주되는 음악, 춤, 음식, 복식 등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다. 이렇듯 무교를 연구할 수 있는 시각은 다양하다. 우리가 우리 것을 제대로 보고 연구하지 않으면 외국인도 우리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
셋째는, 한국사회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서 남북 통일이나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 등을 앞에 두고, 한국 정신의 원형을 오롯이 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적 격변에 대응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민간신앙으로서의 무교의 복권이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인은 모두 똑같은 신앙을 가졌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갖든지 기본적으로 무교적인 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어떤 신앙을 갖든지 그 숭배하는 대상이 명목상으로만 다를 뿐 실제의 신앙 구조와 내용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무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음지에서 양지로 복권시키는 데 나름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때, 무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문화세계는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비약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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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13-08-14
우리의 진짜 전통이자 종교-신앙은 바로 무교이다. 우리 조상들과 우리들은 유교와 기독교-서양 문명에 젖어 무교를 배척하지만, 사실은 원초적인 마음 속에서 여전히 무교를 숭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진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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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운산 2009-11-07


민족 고유의 종교로서 중국에 도교가 있고, 일본에 신도가 있다면 우리에겐 무엇인 있을까? 바로 ‘무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도교나 일본의 신도가 그 나라의 민중 종교로써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무교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잊혀져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일까?



이 책 안에는 놀랍게도 현재 무당의 수가 대략 20~30만 명 정도라고 쓰여 있다. 대비하여 신도의 수가 가장 많다는 기독교의 목사가 10만 명이 못된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수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의 제일의 종교는 무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저자는 ‘무교’는 어엿한 하나의 종교이며,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만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어엿한 사제이며, ‘굿’은 엄정한 체계를 갖춘 엄연한 종교의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 안에는 무당이 되는 과정, 굿의 종류와 내용,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령들에 관한 얘기들이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쓰여 있다.








저자는 ‘한국은 무교의 나라’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극성스런 기독교도가 들으면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주장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는 반드시 그 지역의 토속 신앙과 습합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오리지날’을 유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불교와 한국의 불교와 일본의 불교가 부처를 신앙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나라의 토속 신앙과 외래 종교가 섞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외래 종교 역시 우리 토속신앙인 무교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종교의 이름이라는 외피를 벗겨보면 내용물은 오히려 ‘무교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은 거의가 무교의 신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무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것은 ‘주술적인 기복신앙’이라는 점인데, 우리나라의 불교나 기독교를 보면 현세 기복적 특징을 전혀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무교적이다.



우리나라이 기독교는 ‘유독 열광적인 기도와 방언이 중시되는 부흥회 같은 집회를 좋아하는데’(p.140), 여기에서 무교의 굿과 같은 열성과 무아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 책에서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라면 거의가 한다는 새벽기도가 사실은 옛날부터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풍속에서 연유한 것인데, 이 또한 무교적인 것은 아닌가?








우리는 보통 무교를 ‘무속’이라고 하여 불교나 그리스도교에 비교하여 원시적이고 저급하며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긴다. 종교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믿음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는 그 종류와 관계없이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나 자비 등 인간 윤리의 보편성을 교리로 하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 전파할 수 있고, 여기에 교리를 일관되게 체계화하고, 다시 권력과 결탁할 때 이른바 ‘고등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종교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인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교를 우리의 근본 신앙으로 인정해 우리 문화 발전에 유용하게 쓰자는 것’(p.6)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책 말미에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종교적인 정체성을 찾아 표리가 일치하는 정신적 성숙을 달성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가타부타하기는 어렵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모색(摸索)으로써 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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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무교
분노의휘갈김 2015-04-28
무교와는 무관하게 굉장히 무식한 책이다. 쓰레기. 자료도 빈약하고 주장의 논거도 엉터리다.불공평하게 하대받는 무교를 대변하고자 쓴 책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것인데, 이 책으로 인해 무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 마저 정이 떨어질 정도다. 심각하다. 책을 읽다읽다 더는 못 참겠다. 과학적 사고의 부재가 이런 총체적 무식함을 부른다. 인문학이 잉여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런 무식한 책 덕분이다. 과학 교육이 필요한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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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靑竹 2010-03-20
<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저자: 최준식
쪽수: 208쪽
가격: 10000원
출판사: 모시는사람들
초판1쇄: 2009년 10월 25일
참조: 일반 대중이 무속에 대해 접하기에는 괜찮은 편이 아닌가 싶군요. 특별한 필요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이 정도에서 그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몰라도 되는 지식입니다.

제 견해로는 무속은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흥미를 가지고 파고드는 일은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위험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당을 가리켜 '신이 내린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한 번 무병에 걸리게 되면 거의 대부분(사실상 전부) 무당이 되지 않는 한 낫지 않습니다. 또한 무언가에 씌이는 일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가지지 못하는 오랜 풍속이 현대까지 살아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즉 '무속'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태도는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이렇듯 학문적인 주제와 얽히면 신중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이 글도 좀 그런 면이 있군요. 또한 얼추 부합된다 싶은 근거만으로 '무속을 종교로서 복권시켜야 한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속은 결국 자신에게서 기원한 신앙이 아니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와 같은 널리 퍼져 있는 종교에 비해 위험한 편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대로 어느 종교나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면 굳이 위험을 내포한 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한반도에 기원을 둔 자연종교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을 살리기 위해 무교를 믿어야 한다는 논리는 '국산제품이니까 써야 한다'는 애국심에서 발로한 기업광고와 같습니다. 한국인의 근간이 무교에 있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만(무교는 한국적인 것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은 별개의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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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햇빛 2009-11-28
사람들은 흔히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인생사가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을때 '굿이라도 해야하나' 혹은 '점이라도 보러가야겠다' 라는 말들을 하고는 한다. 물론 나 역시 농담처럼 쉽게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양인들의 문학이나 문화를 보면 기독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 종종 느껴지곤 한다. 그들은 오랜 기간을 걸쳐 자연스레 기독교적인 생각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왔음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부분이 유교적인 관습과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역사인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번성하여 중,의, 예, 효 를 중시하였고 현대 역시 그 큰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 하다.

우리의 동네 골목 골목 마다 찾을 수 있는 점집이나 무당집, 험한 산을 오르고 올라 치성 내지는 기도를 하는 이들을 볼 수가 있는데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한 흔히 무속신앙이라 불리는 무교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책을 만났다.



책에서는 무속이라는 단어의 부당을 설명하는데 무속의 속 자가 저속하다라는 의미가 짙기때문에 무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미신이라 천대하고 비하되고 왜곡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에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속이라는 단어의 저속하다라는 표현보다는 사람들과 그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친근한 종교라 불교에서도 일반 사회를 일컫는 말인 속세(俗世)라는 말 처럼 친근한 종교라 무속이라 불리었고 불리어 왔다고 믿고싶은 마음이다.



무교에대한 오해와 천대가 한국인들의 근본에 깔려있는 무교를 향한 믿음을 저속하고 촌스러운 것, 무시되는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일지도 모른다. 무교란 범위가 워낙에 광범위하고 쉽사리 질서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고 저자가 지적 하는 것 처럼 자생 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자체적으로 통합의 어려움이 있기에 지금껏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또한 그러기에 한국인들의 근본신앙임에도 무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미신이라 비하를 받은것이 사실일 것이다.



저자는 무교에는 많은 문화적 자산이 안겨져 있기에 무교를 복원하여 사회적인 통합과 사회적 성숙을 위한 기틀 아래에에 서게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격변에 대응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 민간신앙으로서의 무교의 복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교를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다른 종교를 빗대어 비하하거나 혹은 저것도 그러한데 이것이 이러한 것 쯤이야 어떻겠느냐 식의 뉘앙스가 무교가 한국인의 근본신앙임을 주장하는 말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너희 나라는 원숭이 골에 달팽이에 무엇 무엇도 먹지 않느냐'

'그럼 우리가 개고기 먹는게 뭐 어때?'하는식의 빈약한 주장으로밖에는 비쳐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개고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원숭이 골이나 달팽이를 트집잡아서는 기대하는 만큼의 설득력을 이끌어낼 수 없기에 우리에게 개고기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사가 있으며 어떤 개고기 문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외려 더 자연스레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닐까말이다.

무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다른 종교의 폐혜를 가지고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무교가 한국인의 근본신앙임을 더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풀어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조금 더 세밀하고 농도 짙은 무교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 보다는 무교에 대한 막연한 생각과 궁금증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울릴만한 책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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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fw6kies 2009-12-13
주변에서 쉽게 점을 본다니, 사주팔자가 어떻다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호기심이 막 쏟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이~ 그냥 미신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지나가곤 했다. 그것을 이 책에서 말하는 것
처럼 무교라는 종교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보통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하여
왔던 무당, 굿, 점 이런 것을 무교라고 하는 하나의
종교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개념이 나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보면 호기심을 일게 만들었다.
정말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국인의 가장
뿌리깊은 신앙은 무교와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변에도 기독교나 불교신자이면서도 정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 찾는것은
어렵지 않다. 평소에는 미신이야 미신 하면서 조금
낮게 치부하는 사람들도 마지막에 찾는 곳은 바로
그런 곳들이다.
정말 억압되어 표현은 못하지만 뿌리깊은 마음속에는
그런게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종교의 개념으로 다시 한번
이런 분야를 새롭게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앞으로 단순히 미신이야 이런
말은 잘 안하게 될 것 같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기독교나 불교 처럼 엄연한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인정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보다 더 친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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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원] 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은 - 성산기획

[정선원] 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은 - 성산기획



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은

정선원 (계룡중학교 교사/공주동학기념사업회 이사)
동학을 한다는 것은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동학 정신을 가슴에 모시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동학 정신을 항상 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이리라. 종교인로서 동학에 접근하지 않더라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력은 우리 근대 역사에서 인간 평등 사상, 반외세 민족 자주 정신 그리고 생명운동, 환경 운동에까지 미치고 있다.
공주는 내가 고향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주사범대학으로 진학하면서 만난 제2의 고향이다. 1979년 유신 말기에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할 때 공주에는 막연하게나마 동학혁명의 격전지인 우금티(고개 우금치를 공주에서는 우금티로 부른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해방되어 대학에 가면 무엇인가 희망찬 세상을 볼 줄 알았는데, 대학에 입학해도 무엇인가 답답하여 우금티의 농민혁명군들을 비유하면서 공주대학 신문사에 투고를 하기도 했었다.
대학 1학년 때, 여기저기 대학교를 다니다가 삼수해서 공주사대에 들어온 동급생 선배가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1학기 때 수십 명이 모였던 독서 모임이 2학기 들어 정치적 토론도 하게 되면서 많은 친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즈음 ‘김영삼 총재 가처분 사건’, 신민당사에서 ‘YH노조 김경숙 사망 사건’이 생기자 교내에 사복 경찰이 좍 깔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 선배가 한 건 할 것을 제의했다. 네 명이 한밤에 공주사대 곳곳에 “유신철폐”, “정보원 물러가라”는 빨간색 벽서를 감행했다. 그날이 10월 13일이었다. 며칠 뒤 강의실에서 경찰에 잡혀갔고, 경찰서 유치장 테레비에서 부산·마산 항쟁을 보았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한 사람씩 인계되어 석방되었다.
이 건으로 나는 대학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 집으로 가야 했는데, 고향에서 오신 어머니가 멀미가 있어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고 고향 여수로 가기로 하였다. 새벽에 라디오를 트는데(당시 자취방에 티비는 아주 귀했다) 장송곡이 울려 나오면서 ‘박정희 암살 사건’(10.26)을 보도하였다. 그렇게 물러가라고 한 독재자가 암살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구나 하면서 역사의 여러 다양성을 생각했었다.
박정희 암살로 무기정학이 풀려 다음해 3월부터 등교를 했고, 대학가는 박정희 체제 18년 및 유신체제의 독재적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어용 교수 퇴진 등 민주화 운동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였다. 개학 후 ‘유신철폐 벽서파’ 우리들은 독서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군부 재집권 반대 시위로 전국 대학이 들썩였는데 ‘5.17 계엄확대조치’로 전두환 군사 정부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과학 공부 독서 모임에 지도 교수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우리의 독서 모임은 자연스레 비밀 독서 모임이 되었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죄악상 그리고 광주학살사건의 진상을 하나둘 접하면서 이러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독서 모임은 당시 우리에게는 하나의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군사 정권에 대한 분노 때문에 모인 친구들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금강회”라는 단체 이름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었다. “금강회”는 군사 정권과 싸울만한 능력이 있었던 조직이 아니라 분노에 갈팡질팡했던 수준 낮은 모임이었다. 그 노래 가사에는 “우금치 얼 이어받은 금강의 소명, 금강의 흐름은 역사의 생명”이 있었다. 공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당연히 우금치 정신을 잇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회원들이 모여 공주 남쪽에서 동학농민군의 진격로를 상상하며 탄천에서 이인 그리고 우금티 위령탑까지 15km를 걸어 위령탑에 참배하기도 하였다.
81년 3학년 여름이 되면서 “금강회” 회원들에 대한 구속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학생 운동 및 사회 운동 탄압의 하나이어서 “학림”, “부림”, “아람회” 등의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교도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2년 가까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서 나는 나에게 학생 운동을 가르쳐준 공주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공주에서 사회 과학 서점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85년 전두환 정권하의 제적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도투’를 하겠다고 결성한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약칭 충남민청)의 임원이 되어 활동했다. 충남민청은 그 첫 대외 사업으로 4.19 기념 마라톤을 공주대에서 시작하여 우금티 위령탑까지 하기로 하였다.
1985년은 전두환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였다. 충남대, 목원대, 공주사대 학생 운동권 100여 명이 모여 마라톤을 했고, 그리고 사전에 예정한 대로 우금티 위령탑 비문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행사를 진행하였다. 유신 직후인 1973년 공주 우금티에 세워진 위령탑 비문에는 ‘동학혁명’이 ‘5.16 군사혁명’, ‘10월 유신’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또한 위령탑의 몸에 새겨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의 글씨는 박정희가 써서 내려 준 것이다. 공주의 위령탑을 볼 때마다 군사 정권의 역사 왜곡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위령탑을 찾는 모든 양심 있는 인사들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박정희의 동학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은 바로 전두환 군사 정권 비판이었다.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의장 오원진 형은 구속을 각오하고 이 행사를 주관했다. 오원진형은 우금티 위령탑의 역사 왜곡의 비문을 파손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구속은 되지 않았다. 공주에서 행사 실무 준비를 맡았던 나는 철물점에서 산 쇠망치를 찾을 수가 없어서 주위에서 큰 돌멩이를 주워 오원진 형께 교도소 먼저 잘 가시라고 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오원진 형은 유신 때 충남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유신반대투쟁’으로 제적과 강제 징집되었고, 1980년에 복학하여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으나 전두환 정권 반대 투쟁으로 제적, 구속되었다. 그 뒤 충남에서 여러 사회 활동을 하다 92년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위령탑을 볼 때마다 오원진 형을 생각하게 된다.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1990년 들어 학계에서부터 동학혁명 기념행사들이 열렸다. 공주에서는 93년에 우금티 위령탑 근처에 주유소를 세운다고 하였다. 주유소 반대 운동을 하면서 공주에 “동학기념사업단체”가 결성되었다. 94년 들어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 정읍, 전주, 그리고 공주에서 거행되었다. 공주에서 1억 5천만 원의 국가 지원비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시청에서 간부들과 동학기념사업단체 임원들이 회의를 하는데 시청 간부가 ‘동학은 역적인데 왜 기념 사업을 하느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러한 공주의 동학농민혁명 반대 분위기 때문에 공주에서는 93년 이후 동학 기념 사업을 하면서 한동안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인지 공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
공주에서 시민들과 함께 동학 사업을 시도한 일로는 거리 예술제가 있다. 공주 중심 시가지의 사거리 한쪽을 2시간 정도 ‘차 없는 거리’로 만들고 많은 시민 단체와 함께 거리 예술제와 먹거리 나누기 행사 등을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시행했었다. 예술제 현장 한쪽에서는 몇 단체가 나누어 맡아 즉석에서 부침개를 붙여 행사 참가자 및 시장 상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부침개를 담당한 단체는 재료를 준비하고 거리에서 부치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도, 동학 행사는 그렇게 나눠야 되는 것으로 알고 진행했다. 그런데 부침개를 먹던 시장 상인 말씀이 “동아생명에서 부침개 나눠준데!”라고 하신다. 플래카드와 포스터 그리고 방송으로 동학 기념행사라고 홍보를 했어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동아생명”으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94년 10월 29일과 30일에 전국적 규모로 공주에서 동학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인 11월 23일에 공주의 이인면 초봉리 검바위에 “유림의병정란사적비(儒林義兵靖亂事蹟碑)”가 공주노인회, 공주유도회 명의로 세워졌다. 공주의 보수층을 대표하는 몇몇 분들이 94년 6월부터 공주에서 동학혁명 기념 사업 반대 입장의 홍보물을 학교 등에 배포했고 또한 “국가 사적지 지정 취소 촉구서”를 관련 기관에 보냈다고 했다. 위의 비에는 정통성을 가진 조선 왕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을 공주에서 관군 측 유림 의병이 동학군을 패퇴시킨 것을 기념한다고 새겨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이 전국에서 행해질 때 전국에서 두 군데 즉 공주와 경상도 어느 지역에선가 반대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했다. 이러한 민심 때문에 공주에서는 94년 동학 기념행사 뒤 마을 노인회관 곳곳에 기념행사 자료집을 보냈다. 그 뒤로 사무실에 어르신 한 분이 사탕 한 봉지를 들고 찾아와 고생했다고 격려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한다.
공주시는 99년 7월에 2차선의 우금티를 깊게 파서(고개를 낮춰서) 4차선으로 만들겠다고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공주의 동학기념사업단체는 터널 방식으로 하여 우금티 국가 사적지의 원상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미 터널 방식으로 공주터널을 개통하기도 했는데, 왜 우금티는 터널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 후 우금티 고개를 두고 전국의 동학기념사업단체와 함께 성명전을 거듭하였는데 3년 반 정도 지나 결국 문화재청이 우리 단체의 편을 들어 터널로 결정되었다.
공주시청에서 동학 기념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 사건은, 2000년 공주시 체육대회 입장식에서 사적지 우금티가 있는 금학동의 유치원생들이 위령탑의 모형을 앞세우고 죽창과 괭이 모형을 들고 입장했을 때이다. 당시 금학동 동장님이 여성이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2004년에는 동학군이 일본군·관군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던 공주산줄기(공주에서 공주대간이라고 부른다)를 문화관광과 과장과 직원 분들과 함께 답사하였다. 그쯤에서야 공주의 동학혁명을 공주시에서 지역의 역사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2005년에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 일본인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 등 몇 분이 방문하여 공주 회원들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그분들은 2018년에도 ‘한일시민과 함께 하는 동학기행’으로 공주를 방문하여 공주기념사업회와 교류를 하기도 했다. 박맹수 교수님은 평생을, 동학 연구에만 그치고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한살림운동, 생평평화모임 등을 이끌어 오셨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은 일본인이지만 역사 연구를 통해 일본에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 규명, 침략 전쟁 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한일의 양심적인 시민의 교류를 추진해 온 분이다. ‘한일시민과 함께 하는 동학기행’은 2006년부터 시작하여 작년에 13회째를 마쳤다. 동학기념사업을 한국·일본의 진보적 시민운동이 연대하는 국제 교류 사업으로 침략 전쟁 반대와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역할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공주의 우금티 전투가 전라도 농민군이 공주에 와서 일본군·관군 연합군에 학살된 전투라는 인식이 한동안 공주에 널리 퍼져있었다. 공주에서 아직 동학이 불온시될 때, 공주의 구상회, 조재훈 선생님이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구전 조사와 학술 연구를 해 오신 일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일이다. 공주동학기념사업을 계기로 ‘공주 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어떻게 활동했을까?’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공주 지역 구전 조사를 시작했다. 공주 토박이 어른인 구상회 선생님은 이미 구전 조사를 시작하여 많은 자료를 가지고 계셨다.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구상회 선생님을 모시고 공주의 리 단위까지 샅샅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주에서도 싸움터 우금티뿐만 아니라 금강 이남과 이북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이야기를 찾아내었다. 열 분을 동학 참여자로 국가 기관에 등록시켰으며, 2005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 정선원 공저)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2007년에는 지역 신문에 스물한 분의 공주 동학 참여자를 소개하며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박맹수 교수 등 연구자의 연구로 공주에서 동학은 1881년부터 공주 사람 윤상오가 동학에 입도해서 충청도 서부와 전라도에 포교한 것이 밝혀졌고, 최시형 선생은 공주에 비밀리에 다섯 차례 이상 잠입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공주는 1892년 교조신원운동의 첫 출발지이며 1894년에는 3월부터 공주의 동학군이 활동한 사실이 밝혀졌다. 1894년의 동학혁명이 전국적 상황이었듯이 공주에서도 우금티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함께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동학혁명의 계기가 된 인물인 조병갑 집안의 세거지가 공주 신풍면 평소리로 공주와 동학은 매우 깊이 얽혀 있는 곳이었다.


공주에서도 ‘박근혜대통령탄핵촛불운동’ 시작인 2016년 11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매주 1회 이상 꼬박꼬박 집회를 가졌다. 공주에서는 동학기념사업단체 회원들을 포함해 시민 단체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집회를 조직하고 참여했다. ‘세월호진상규명촛불’에도 함께 했고, 2008년 ‘광우병촛불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94년의 동학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현실의 부정부패와 불의한 정권에도 항거하는 것이었다.
우금티에는 장승들이 서있다. 1994년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공주의 우성 어천리 주민들이 참여해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는 장승을 우금티에 세웠다. 그 자리에 세웠던 장승은 세월과 함께 쓰러졌지만 지금까지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공주 지역 시민 사회 단체들이 모여 각 단체의 이름으로 장승을 세우고 새해 인사를 함께 나누어 왔다. 2017년에는 ‘촛불민심’을 몸에 새긴 장승을 세웠는데 어느 땐가 ‘촛불민심’ 등 장승 몇 개의 몸이 토치램프로 글씨를 알아 볼 수 없게 그을려 있었다. 역사의 진보와 함께하는 문화 행사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에 대해 우리들은 새로운 장승을 계속 세우는 것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1894년 동학혁명의 격전지 우금티가 있는 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 동학기념사업을 한다는 것은 우금티의 동학 정신을 가슴에 지니고 지역의 보수적 민심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해방, 지역의 시민운동,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 운동에도 함께하는 것이다. 매년 공주 지역에서는 정월 보름날 우금티에 모여 새로운 장승을 세우며 민족의 비원을 넘어서는 통일을 갈망하며 새해 새 결의를 다질 것이다.

Death and the Atheist Mystic: Zhuangzi's Last Words | HuffPost

Death and the Atheist Mystic: Zhuangzi's Last Words | HuffPost


Brook Ziporyn, Contributor
Professor of Chinese Philosophy, Religion and Comparative Thought, University of Chicago

Death and the Atheist Mystic: Zhuangzi’s Last Words
11/06/2015 04:52 pm ET Updated Nov 06, 2016


No mind ruling the universe; no guarantee of good triumphing over evil; no spirit surviving the body; no life after life after life—and here comes death. No God, no moral world order, no afterlife, no reincarnation—and here comes death. He is a finite human animal, he is an ancient Chinese philosopher, he may or may not be that butterfly, he is Zhuangzi. Here are his last words, his last joke:


Zhuangzi was dying, and his disciples wanted to give him a lavish funeral. Zhuangzi said to them, “I will have heaven and earth as my coffin and crypt, the sun and moon for my paired jades, the stars and constellations for my round and oblong gems, all creatures for my tomb gifts and pallbearers. My funeral accoutrements are already fully prepared! What could possibly be added?” “But we fear the crows and vultures will eat you, Master,” said they. Zhuangzi said, “Above ground I’ll be eaten by crows and vultures, below ground by ants and crickets. Now you want to rob the one to feed the other. Why such favoritism?”


What is this dying man leaving to his solicitous friends? Is it perhaps a bitter parody of their hopes from one who is hopeless? A fat lot of good it does me, he is perhaps saying, your pious funerals, your coffins and crypts, your ceremonial mourning—I might as well be cast on the ground for the crows. Yet the parody turns around: your rituals are silly, yes, but no sillier than heaven and earth. Is it then perhaps the insouciant chill-out manifesto of an ultra-cool Dude who is shockingly at home in the universe? He is thinking big, in the thrall of the eyeless glory that will engulf him as his final resting place. Yet at the same time his words tuck the cosmos itself into a permanent deathbed: at home, yes, but the home he is at home in is one enormous morgue. Zhuangzi is a joker, but also a cruel and insane master: he is condemning his disciples to watch their beloved teacher and friend being devoured, consumed, dismantled, ground to powder, liquified. Zhuangzi’s more tender-hearted contemporary Mencius, the great Confucian philosopher, tells his disciples that the very reason funerals were invented in the first place was to avoid this kind of thing. Back in the day, says Mencius, everyone just tossed mom and dad by the roadside with the trash, but when they happened by a few weeks later they couldn’t bear to see the festering mom and dad had gotten up to in the meantime, and so folks got the idea of putting them in boxes deep underground to do their festering in private. But here at Zhuangzi’s place there is no escape, the disciples are just sparing their own feelings. In any case he has to go, he has to disintegrate, he has to be consumed. Playful Zhuangzi plays dumb when he plays, offering a willful misunderstanding—you rob one to feed the other, gosh, you guys must really love ants and crickets! But of course this is a shot across the bow at another bias: why this bias for life over death? For one form over the disintegration into infinite forms? Not just for the crickets over the crows, but for me over the crickets and crows, for me alive over me dead?


The issue here, as in so much classical Chinese philosophy early and late, is incompleteness. Bias. One-sidedness. And it is just here that Zhuangzi’s bittersweet dying joke itself is unbiased, at once both a resigned and hopeless surrender to the inevitable and an exultant embrace of the totality of ceaseless transformation that is the world worlding, the bubbling source of whatever joy a self feels in happening to have become a self for awhile, and the weirder joy embedded in the sorrow in having to surrender that self after that little while: as Zhuangzi says elsewhere, what makes my life good is also what makes my death good.


What is it? It is tempting to say that Zhuangzi, like Spinoza, reads simultaneously as God-intoxicated man and the most extreme possible nihilist, an atheist’s atheist. Not God-intoxicated, though: tipsy on Dao. That is perhaps the difference that makes the peculiar double-vision buzz delivered by both Dao and Spinoza’s God possible. It is the unbiased that encompasses both meaninglessness and meaning. The contrast to a personal God could not be more stark. For although this God is sometimes appealed to as a locus of justice and fairness, as the unbiased and encompassing, a moment’s reflection reveals that, as long as God is some sort of mind or personal being or spirit, this unbiasedness is quite limited. God is less biased than the warring parties who might appeal to him, but much more biased than the Godless infinities that he is enlisted to replace. More to the point, his relative unbiasedness is usually imagined as ultimately in the service of a larger ultimate bias, an agenda: he is thought to be temporarily all-accepting only as a preliminary to a subsequent judgment. For a personal being is generally supposed to have some things or states he prefers; that is what it usually means for something to be a someone rather than merely a something, a person rather than merely a thing or a principle or a stuff or a substratum. The essence of the usual idea of God as the ruling mind of the universe is preference, is will, is purpose, is care and concern about how things go—and in Daoist perspective, all of those are just words for bias, for one-sidedness, for incompleteness. Dao is precisely the denial of these, the antithesis of purpose and of bias—Dao, the perfect antonym of God, more not God than matter, more not God than the devil. And it is this God-lessness precisely that is powering Zhuangzi’s laughter at his own helplessness, at his own childlike excitement for the new headless adventure ahead, at his disciples’ pettiness, at the glory of the world as giant coffin, at the scandal of coffin as miniature world. The lack of God, which is the lack of bias at the foundation of the world, is itself what makes his death acceptable. For it is not the getting eaten that rankles; or rather, it is the getting eaten that rankles, but only because getting eaten is a particularly vivid form of being limited, being one-sided, being on only one side of a relation, being finite, fixed, trapped, stuck. Getting eaten is one of the way things flow on from form to form, from state to state, but it is so small a portion of the flow; the solution is not to stop that flow but to augment it, to flow from there into all sides of every relation. That is the vastness of Zhuangzi’s coffin.



People who have gotten used to the idea of God find depressing or even terrifying the idea of a heartless cosmos that doesn’t care about our fate, that has no interest in whether we live or die. But perhaps this really is just a question of having gotten used to something, or, to put it less politely, the withdrawal from an addiction. As Zhuangzi says elsewhere, even the most hot-heated man does not go so far as to break the sword of his enemy, or to curse at an empty boat that collides with him. The world thwarts us, which is bad enough, but what is much worse is the bias, the smirking agenda, the contravening will, the know-it-all overall plan, which we imagine to be locking us willfully into only one position: the eaten, not the eater; the me, not the you; the creature, not the creator. The horror is in having to be one or the other, rather than always being both, or ready to be any.


Bias means limitation. It means finitude. It means non-omnipresence: that this is only happening here, not anywhere else; only going in this direction, not any other direction; only serving this use, not any other use. Pain and death are finitude writ large and stark: rude blares of “No further.” The problem of pain is really the problem of being trapped within boundaries and straining against them. For the atheist mystic, the prospect of death leading only to heaven or only to a particular other life is no better than death leading only to being an inert chunk of matter: the problem in all cases is that we have one transformation that leads to no further transformations. The problem is getting stuck in only one state: that’s what it is to be a mortal, a finite being. What if this one change leads to a million more? What if being eaten leads to being not only the eaten but a million eaters? What if the real problem hidden in these traumatic shutdowns and demolitions that we call pain and death is not that they happen, but that their happening is a stopping, they don’t keep happening everywhere. Or do th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