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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1

Philo Kalia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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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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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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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testerSpoiday rtlSlcahtmutn so1famgre7:td1cod3  · 
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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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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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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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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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7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0g:od38  ·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이 말씀은 맹목적 믿음과 안심을 키우는 엉터리 상담자의 확언이 아니라 길들여진 사유를 도전하게 하고 현실의 속면을 파고들어 파열하게 만드는 메시아적 메시지이다. 현실은 생명을 해치려는 세력으로 득실거린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생명의 각축장 안에서 그것을 善으로 바꾸는 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힘이 보이는가?
이 힘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적인 것”으로 이어지며 크게 자란다. 메시아적인 힘이고 메시아적인 시간이다. 시간의 종말(끝)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그 시간은 영원을 현재에서 폭발시키는 시간이며, 그 시간은 현실 안에서 현재에 현실태와 다른 線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善은 현실태와 다른 線으로 분할되는 그 순간, 그 지점일 것이다. 생명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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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일
그림 :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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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6g:od39  · 
다윗은 수금(하프) 연주가이며 우선 시인,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 23:1)이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詩人이란 사실이 얼마나 복된 전통이며 위대한 유산인가! “예술의 본질은 詩다”라고 하이데거가 좀 세게 발언했지만, 성경에 시편이 있고, 그리스에는 철학이 시작되기 전 시인들의 무대였고, 중국에는 시경이 있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음악과 함께 미술 그리고 시와 시적 언어가 지배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신성한 것과 하나님을 합리적 사유와 논쟁적 논리를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시는 사물을 분석하기 전에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음미하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시학적 신학(Theologia Poetica)을 적극 수용해야 하며 그 원조는 다윗이다. 고-중세의 영성가나 수도원 신학자들, 경건주의적 기독교의 언어는 시이다. 찰스 웨슬리는 시와 음악으로써 감리교 운동을 전개했음은 잘 알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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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08g:od42  ·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창 45:8)
형님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생각했다가 대상(隊商)에게 팔았다. 얼마나 마음의 의도가 고약하고 비인간적인가? 사람들도 요셉이 이집트에 보내진 것은 요셉의 형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요셉의 생각과 고백을 통해 현상적 사실에서는 감추어진, 사실의 인과관계만을 보는 눈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실제를, 아무리 그 사실을 인과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분석해도 일절 알 수 없는 속면을 감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고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용인으로서의 형님들은 부정된다. 형님들 행위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신 것이…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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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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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2s3od:mrcecd29  · 
예술신학
1.예술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예술신학이라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성서와 교회전통을 신학의 규범과 자료로 삼지만, 각 시대의 철학과 긴밀한 대화 속에서 신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과학과의 대화를 뜨겁게 진행 중이다.기독교 윤리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학문과 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예술 및 대중문화와 대화하면서 신학을 전개한 경우는 앞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양이다.
2.예술신학은 예술의 모든 장르 및 대중문화, 놀이와 여가와 대화할 뿐 아니라 오감의 활동을 중시한다. 음악신학, 미술신학이란 말을 써서 특정 예술 분야와의 만남을 부각하듯이, ‘감각신학’이란 말을 쓸 수 있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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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chan Lee
공부과정에 학생으로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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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pdated his profile picture.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7od:mrcecd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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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란
비장함이 느껴지는 포즈---어울림!
2 w
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3od:mrcecd53  · 
요한복음은 예수 사랑의 신비를 유월절 축제(요한 13장) 이후에 시작되는 수난 이야기의 이야기 배치와 독특한 문학구조를 통해 표현한다. 요한복음의 최고의 과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그 무능력으로부터 해방하여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깨우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에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이 말씀은 예수의 사랑을 읽는 요한복음의 시각이다. “자기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εἰς τέλος ἠγάπησεν αὐτούς)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저술 동기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의 말씀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에서 완성된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축제일인 유월절의 시작은 말씀이 육신이 된 참된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끝까지 사랑할 때를 더욱 속 깊게 다지는 시간이다.
누가복음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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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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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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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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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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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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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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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testerSpoiday rtlSlcahtmutn so1famgre7:td1cod3 ·



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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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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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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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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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u7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27 ·



당신의 영혼을 환한 하나님께 맡긴 허심(虛心)한 춤사위다. 성령의 산들바람을 타고 허허(虛虛)롭게 된 몸은 십자가에 붙박일 수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힌 몸의 리듬을 통해 생동한다. 뼈와 근육 그리고 살에서 어떤 긴장이나 아픔도 느낄 수 없다. 신기(神氣)와 같은 생명의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결처럼 흐른다.
십자가라는 가장 거칠고 황량하고 까슬한 외재적 물질세계에 구애됨 없이 풀려나 무궁한 우주적 생명세계에로 들어가려는 춤이다. 춤추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다. 그것은 너무나 허허롭고 무욕(無慾)하며, 바람타고 나는 무애(無碍)한 연(鳶)의 자유로운 헤적임이요, 물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유영(遊泳)하는 물고기의 즐거움 같아서 보는 이의 눈길을 더욱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보면 볼수록 그림은 보는 사람의 해맑은 마음을 움직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의 춤에 합류하게 한다.
[유튜브 실시간 강좌예고]: 2월 1일(월), 오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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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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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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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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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

















2020/02/03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8)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1860년 4월 5일, 최제우는 경주의 용담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최제우는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라고 부르는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다시 묻는다. “그럼 당신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와 같은 분입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기를, “그렇다. 천도는 같다.” 그러자 최제우는 다시 묻는다. “그럼 제가 서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다. 너는 조선 땅에서 태어났으니, 서학이 아니라 동학을 하라. 서학의 이치와 동학의 이치는 다르다.”


그렇게 하여 동학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 이야기를 필자가 약간 풀어쓴 것이다. 최제우의 이 신비체험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동학이 섬기는 하느님과 기독교가 섬기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다. 다만 그 하느님을 설명하는 신학이 서학과 동학으로 서로 다를 뿐이다. 즉 동학과 서학은 서로 다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부모에게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형제랄까?

흥미로운 것은, 동학을 심도 깊게 연구한 김상일 교수는 그의 책 『동학과 신서학』(2000)에서, 동학이 비판한 19세기 서학이 이제는 새로운 신학적 발전을 이뤄 ‘신서학’(新西學)이 되어 동학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졌다고 주장한 점이다. 특히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같은 신서학은 신관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동학과 상당 부분 유사해졌으므로 형제애로 서로 연대하며 협력할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조선말 많은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통해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개입으로 3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 동학혁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3·1독립운동이다. 특히 이때 동학은 기독교와 비로소 하나의 형제가 되어 대한독립을 외치는 위대한 ‘연대’(solidarity)를 이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의 연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마중물이 된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동학과 기독교의 위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과로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동학과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얼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모판이 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동학의 인내천 정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였고,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정신과 합류하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재폭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4·19혁명과 5·18광주항쟁 그리고 6·10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하늘과 같은 고귀한 존재인 국민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동학과 기독교 정신은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서 독재와 비민주적 정권의 타락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4·19, 5·18, 그리고 6·10사건의 깊은 심연 속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을 토대로 한 민본의 혁명은 거의 실패하였거나 미완의 혁명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의 혁명이었고, 3·1독립운동 역시 실패의 외침이었다. 4·19와 5·18, 그리고 6·10민주화운동 역시 절반의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혁명이 있은 후, 완전한 민주정부를 탄생시키지 못한 채 군부의 탄압과 기만으로 군부정권이 연장되는 비운을 겪었기 때문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恨)의 역사이다.

하지만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의 위대한 승리가 얼마 전 쓰였다. 바로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특히 지난 2016년 촛불혁명은 필자가 보기에 첫 번째 온전한 동학 정신의 성공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1894년 동학혁명 이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인내천의 혁명이 2017년 대선을 통해 비로소 첫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탄생은 단순히 민주당 정부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승리요 또 인내천 사상을 설파한 동학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혁명의 승리를 통해 불기 시작한 인내천의 기운은 이제 놀랍게도 한반도 전체로 번져 평화와 통일의 횃불이 되고 있다. 70년 이상 분단되고 또 적대관계였던 남북한이 드디어 인내천의 정신으로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하늘의 이 뜨거운 기운을 막을 수 있겠는가? 최제우가 1860년 설파한 인내천의 정신이 이제 비로소 한반도에서 온전한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너무나 가슴 설렌다.

따라서 과거 3·1운동에서 한 형제로 피를 나눈 동학과 기독교는 이제 다시 하느님의 한 형제로서 연대의 공동체가 되어 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실현을 위해 씩씩하게 서로 협력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시 85:10), 이제 동학과 신서학이 한 형제임을 자각하며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함께 뜻을 모으는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3호』 (2018/06/12)




68Paul Dongwon Goh, Sunghwan Jo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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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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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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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
한울안 한이치....한형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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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넵!!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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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books.google.com.au/.../Su_un_and_His_World_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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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GOOGLE.COM
Su-un and His World of SymbolsSu-un and His World of Symb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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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ytu.edu.au/.../prof.../paul-beirne-ma-mdiv-dmin-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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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U.EDU.AU
Paul Beirne, MA, MDiv, DMin, PhDPaul Beirne, MA, MDiv, DMin,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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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고박사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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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적극 동감.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 세력이 이런 인내천 평화 화해 정신에 역행하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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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Kang-nam Oh 공감 감사합니다.ㅎ 그러게요 저도 한국교회의 미래가 많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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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내가 Beirne의 동학 영부 해석을 비판하고 새 학설 제기했지요. 내 책 2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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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Kyoung Kim 인내천 사상과 요한복음 비슷하지유. 이런 비슷한 성서해석을 1998년에 써서 출판되었지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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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Park 아 너무 좋습니다 공유합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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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수운의 상제 체험에 대한 너무 기독교적인 해석^^. 천도교나 증산교나 원불교에서는 수운의 체험을 그렇게 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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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 February at 07:16 ·



내가 꿈꾸는 교회(64): 계시의 공동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해명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이 문제를 ‘계시’와 연결하여 설명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과 유한한 우리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먼저 자기를 제한시켜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선성 곧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베일을 벗는다(revelum; to unmask)’는 의미에서의 계시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 ‘완전히’ 마치 벌거벗은 누드처럼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러한 계시는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언급하였다.(요 1:18a)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인 직접적인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것을 일컬어 신학에서는 ‘계시의 간접성’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등만을 보여주신다.(출 33:20~23)

그리고 예수께서도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 14:9~11)라고 말씀하시며 의심하는 제자 빌립을 꾸짖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의 등(back)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가 행한 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실천(praxis)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등’이 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등을 뵙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분의 얼굴을 뵐 것이요”(마 5:8)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청결하게 닦은 뒤 우리의 영적인 눈을 활짝 떠서 그 분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시의 간접성은 어떻게 달리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계시의 다양성과 함께 하나님의 자유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계시의 다양성이다. 계시는 세상의 무언인가를 ‘매개’ 혹은 ‘매체’(media)로 한 간접적인 계시란 점에서 다양성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마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주장하는 맥루한 같은 매체학자들의 언급처럼 미디어의 다양성은 신의 메시지의 다양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매개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것을 폭로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래서 계시는 이 세계의 탈은폐 사건이다. 곧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서로 낯선 게토화된 타자들 사이의 열린 의사소통, 그리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해방되는 진정한 자유의 사건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떼제의 노래는 계시의 간접성을 제시한 아주 좋은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오는 노랫말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매개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전제되지 않은 매체들은 단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히 11:6)

하지만 우리가 신앙으로 모든 매체들을 바라볼 때, 산은 산이 아니고 또 물은 물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의 현존을 중재하는 ‘성례전적 존재’(sacramental being)가 된다. 이와 같이 아주 작은 매개조차 신적 계시의 통로로 인식될 때 이 세상은 신성이 가득한 아름답고 거룩한 신의 정원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이 여러 매개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신다고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자, 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기꺼이 사용되기를 염원하는 계시의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바라는 신앙공동체의 자기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계시의 어원이 ‘베일을 벗음’ 혹은 ‘탈은폐’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와 다름 아니다. 진리를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세이아(aletheia)’는 ‘탈은폐’ 곧 ‘망각을 벗어남(a-letheia)’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계시와 진리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계시자로서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리고 계시자에 의해 전해진 진리는 해방의 효과가 있다고 언급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이처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계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의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숨겨져 있는 거짓과 무지 그리고 망각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진리 추구의 과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진리의 빛에 우리의 영혼이 환하게 조명될 때 인간은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된다. 아,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런 점에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바로 이런 계시의 공동체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추구의 공동체요 동시에 참 자유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4호』 (2018/06/19)




53Paul Dongwon Goh, Kwon Sun Phil and 5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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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참으로 아름다운 진리의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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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22:31 ·



<감사> 레페스심포지엄 및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출범

1. 한 개신교인에 의해 훼불된 김천 개운사 불당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이 있은 지 만4년이 지났다. 그 결실로 레페스심포지엄이 만들어졌고, 또 그 모임이 발전하여 이제는 아시아평화를 함께 논의하는 국제학회로 발전하였다. 감회가 새롭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분명 있는 것 같다!

2. 이번 행사는 3박4일 일정(1.30-2.2)으로 일본의 나고야에서 개최되고 있다. 일본측 종교인들과 교수님들의 융숭한 환대 속에 심도깊은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어 넘 기쁘다. 종교분야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평화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는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일본 종교 지식인들이 보여준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사죄의 표현들은 새삼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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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7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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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gatzschev Muhschienn 와우~~ 세계로 뻗어가는 손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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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1 reply


민성식 돌아오시면 사진과 기사자료 보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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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혁 창립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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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n Paul Joo 사건이 발아하여 이제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앞으로 귀하게 자라고 열매맺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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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08:23 ·



내가 꿈꾸는 교회(63):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의 공동체

지난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해 어느 때보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컸었다. 특히 2016년 말 한국사회에 강하게 불었던 촛불혁명과 그에 따른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적폐청산’(積弊淸算)의 주장들은 그대로 한국 교회에 전이되어 한국 교회의 적폐청산에 대한 요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으로서 한국 교회가 직면한 적폐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개신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자며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 적폐청산을 제대로 완수하였는지 검토하는 일이다. 따라서 먼저 한국 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얼마나 잘 청산했는지 그 성적표를 검토한 후,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적폐청산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로 표상되는 ‘면죄부’(혹은 면벌부)를 거부하면서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그리고 개신교의 3대 ‘오직’(sola) 교리로 불리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개신교의 문을 열었다. 특히 1520년 종교개혁 관련 3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구체적인 적폐가 무엇이고 그 대안적 방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우선,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을 통해 교황권의 절대권력을 적폐로 간주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교황이나 사제에게만 독점적으로 있다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저항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모든 신자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소위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을 통해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성례전을 신비주의적으로 오용하였는지를 또 다른 적폐로 지적하면서 성례전의 바른 이해와 활용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성례전을 성례전답게 만드는 것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개개인의 믿음뿐”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성례전의 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끝으로 세 번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논문을 통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곧 신앙과 삶의 관계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잘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과 책임으로’ 다가가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에 저항하면서 개신교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루터의 후예인 한국 개신교회는 루터의 적폐청산의 노력에 얼마나 부응하여 그 개혁을 잘 완수했을까? 특히 만인사제설과 성례전의 참 의미의 회복,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이란 기준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적폐청산에 얼마나 성공했을까?

필자의 주관적인 입장이기는 하나 한국 교회의 성적을 매긴다면, 그 성적은 낙제를 간신히 면한 수준인 약 70점 정도 곧 C학점 정도이다. 너무 인색한 점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은 아직 ‘미완의 개혁’으로 파악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이 왜 아직 미완의 개혁일까? 루터의 세 논문을 중심으로 반성해 보면, 우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루터가 비판했던 ‘성직자 중심주의’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 중심적인 목회자의 절대권력이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 세습 논란이나 여성안수의 문제 등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명실공히 만인사제설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안에 구현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차별을 철폐하고 교회를 더욱 개방적이면서도 평등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성례전을 바르게 회복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찬을 너무나 극단적인 화체설을 통해 신비화한 것이 문제였다면, 한국 교회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상징적 의미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찬을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례전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지는 성찬예배가 일 년에 겨우 서너 번밖에 시행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잘 발견된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도 오직 죄의 용서란 측면에서만 강조될 뿐, 리마예식에서 강조하는 ‘성부께 감사’,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대’, ‘성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식사’ 등의 통합적 의미는 거의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매주 성찬예배로 예배의 구조를 바꿔야 하며, 성찬의 다양한 의미를 균형 있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한국 교회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역설한 영혼의 자유와 이웃사랑의 실천이 결코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점을 많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지향하는 기복적 신앙에 집착한 나머지, ‘세월호 사건’이나 ‘생명-평화-민족분단 극복’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이란 사회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다 깊이 성찰하면서 교회의 정신과 틀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운동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을 완수하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루터 종교개혁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protestant)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5호』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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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you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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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2):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의 공동체

필자는 몇 년 전 한국 개신교의 개혁과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염원하면서 『테오프락시스교회론』(동연, 2011/소망학술상 수상)이란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 그 책에서 필자는 건강한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몇몇 대표적인 적폐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당면한 대표적인 적폐들은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를 숙고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가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무비판적으로 추구해온 ‘교회사유화-재벌기업화’의 적폐이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란 철저하게 교회가 ‘공교회성’(public church)을 잃어버린 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사유화되거나 이익집단화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의 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무한한 이기심에 편승하여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이웃과의 연대성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을 뜻한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로 표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교회세습’과 ‘재벌형’ 대형교회를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작금의 한국 교회 최대 적폐는 교회의 자본축적과 세습이다. 최근 급속히 늘어나는 신자들의 탈교회 현상, 곧 가나안신자의 증가현상은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확대와 자본의 축적 그리고 세습이 낳은 결과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 사건은 ‘명성교회의 불법세습’과 ‘사랑의교회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사랑의교회는 수천억 원을 들여 매우 화려한 교회당을 지으면서, 수많은 스캔들로 논쟁의 한복판에 아직도 서 있다. 특히 담임목사의 학위부정 논쟁과 교회당 신축 중에 발생한 불법적 건축설계 변경,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송사 등은 한국 교회의 재벌형기업화가 낳은 슬픈 자화상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교회의 ‘사유화’와 ‘재벌기업화’의 적폐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작은 공적인 교회를 향해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잡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제국주의적-문화폭력적 선교방식의 적폐이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이유인 ‘선교’(mission)를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게 하는 문제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요 또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맥락에서 교회는 늘 선교하는 교회였고, 또 앞으로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 선교방식에 있어서 여전히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사용하던 폭력적이고 자문화 중심적인 형태를 고집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약 10여 년 전(2007)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팀을 보낸 샘물교회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샘물교회는 단기선교팀을 선교현장에 보내는 과정에서 무자격 선교사를 불법적으로 보내고 또 이슬람국가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선교방법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슬람 단체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여러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그 유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는 필자와도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 2016년 초에 있었던 개신교 신자에 의해 이루어진 김천 개운사 불당훼불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한 필자는 기독교 대학에서 불법적으로 파면 처리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의 방식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타자와 이웃종교를 배제의 원리로 접근하는 대신 오히려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소위 ‘종교대화적 선교방식’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래 전부터 WCC에서 강조해 온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나 최근 선교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고 있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그 나름 의미 있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교회 연합기관의 아노미와 남성-권위주의적 교회의 적폐이다. 이것은 1989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동안 한기총이 보수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보수적 정권과 깊은 유착관계를 맺으면서 불법선거와 금품살포 등 수 많은 권력형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한기총 해체운동’ 등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특히 최근에는 한기총 해체의 수순 속에서 한기총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으로 분열되었고, 또 개신교의 주요 교단장들의 모임인 ‘한국교회교단장회의’를 발전시켜 또 다른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조직이 현재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교회 연합기관의 수명이 기껏해야 수십 년도 채 못 가는 이데올로기화된 연합 기구가 한국 교회에 필요한가?” 이런 맥락에서 무의미한 교회 연합기관을 해체하는 일, 특히 남성중심적인 권력기관화된 교회를 갱신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따라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 기구화된 연합기관과 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평등적이고 유기적인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와 같은 적폐들을 청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적폐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바탕으로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公共)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6호』 (2018/07/09)




43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4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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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이 땅에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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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성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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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베스트셀러가 되셔서 월급되신 맘껏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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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09:24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 및 아트가나안교회 모임

가나안 언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제 본격적인 봄기운이 충만한 2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걱정이 많네요.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번주엔 두 개의 가나안교회 모임이 있습니다. 우선 길위의가나안교회는 씨알순례와 협력으로 진행됩니다. 팀을 이끌며 안내를 맡으신 김영덕 대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See more




51Myung-kwon Lee, Yeo Injo and 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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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진 맛저 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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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9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1): 생명의 공동체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적지 않은 이들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로서 한양대 교수를 지낸 리영희 교수를 꼽는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독재의 시대인 1970~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서전적 대담집인 『대화』(2005)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무신론자로서 종교에 큰 관심이 없지만, 유일하게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꼽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무신론자도 존경하는 한국 최고의 그리스도인, 그가 무위당 선생이다. 위의 인용된 시가 바로 무위당의 시이다. 그의 시에서도 묻어나듯이, 그는 모든 것들을 생명 있는 ‘나’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인내천)라는 의미에서의 나이다. 나는 곧 하늘이니까 너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이고, 더 나아가 하찮은 미물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신 하늘을 품고 있는 하늘 같은 존재로서 나와 다름이 아닌 의미에서의 나이다. 그러니 장일순에게 있어서는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인 셈이다.

사실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동학 제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되었다. 특히 그는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최시형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무위당은 밥 한 숟가락을 뜨면서도 해와 달과 비와 구름과 땅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피를 뽑고 물을 대고 추수를 했을 어느 농부님에게 감사했다. 밥상이 되어준 나무와 밥상을 만든 목수에게 감사했다. 숟가락이 되어준 물질들과 숟가락을 만든 이름 모를 이에게 감사했다. 찰진 밥을 지어준 아내에게 감사했다.

이처럼 해와 바람과 비와 눈과 나무와 돌의 도움 없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나로 대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취지를 확산하기 위해 <한살림>을 조직하여 생명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 그것은 장일순이 꿈꾸는 공동체와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은 미물이라도 하늘처럼, 아니 나처럼 대하는 온전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장일순의 꿈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생명의 존재로, 즉 하늘로, 아니 바로 나 자신으로 볼 것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대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반생명적이다. 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고, 특히 최근에는 4대강 사업으로 강이란 강은 온통 다 파란 녹조로 변해 버렸다. 심지어 공기는 또 어떤가? 미세먼지로 해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이 생명운동이 시급한 때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신학자란 그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씨름하는 자란 말이 있다. 20세기 초 있었던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세계대전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서 인간의 죄성을 폭로했던 칼 바르트가 그랬고, 히틀러의 광기어린 파시즘에 저항하여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본회퍼가 그랬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런 질문 앞에서 서슴지 않고 ‘생명’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더 구체적으로는 생명을 구성하는 ‘물’의 문제요 또 ‘공기’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무위당식으로 더 엄격하게 말하면, 나인 물이 썩어가고 있고, 나인 공기가 숨조차 쉴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과거에 철학과 대화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물과 공기를 연구하는 ‘수문학’(hydrology)이나 ‘대기학’(aronomics)과 대화하면서, ‘생명학’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51) 사실 교회는 지금까지 예수의 이 말씀에 따라 성찬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성찬신학에 근거하여 빵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 교회에 꼭 나오라든지, 혹은 빵이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으면, 즉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등 빵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차별하는 배제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말하자면, 하늘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인 먹거리인 빵으로 오셨다면, 물로는 못 오시며, 또 공기로는 못 오시겠는가?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신학의 논리로써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는 가장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으로도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시며, 또 장차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빵과 포도주 같은 가장 하찮은 먹거리 속에도 계시는 생명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하찮은 미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마치 나로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7호』 (2018/07/17)




62Paul Dongwon Goh, 이호재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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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생명공동체.. 를 꿈꾸는 멋진 목사님...글을 읽게 해주셔서
무한 감사 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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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uou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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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8 January at 07:54 ·



내가 꿈꾸는 교회(60): 예수밥상의 식탁공동체

필자는 교회에서 종종 농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는 절밥보다 맛있는 교회밥의 식탁공동체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절에 한두 번쯤은 모두 다 가 봤을 것이다. 등산하거나 아니면 사월 초파일에, 혹은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사찰의 문턱이 많이 낮아지면서 일반인들도 종종 절에 가서 어렵지 않게 절밥을 먹곤 한다.

오신채로 불리는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의 향신료(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안 쓰는 전통 때문에 싱거워 맛이 없거나 혹 배고프지 않을까 상상도 되지만, 실제로 절밥은 아주 맛있다. 그런데 교회밥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최근 들어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밥은 군대식 짬밥이 되어가고 있고, 밥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한다. 심지어 주일날 교회에서 밥을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깊이 반성되는 부분이다. 종교 간 경쟁의 시대에 교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절밥보다 맛있는 식탁공동체’를 꿈꿔야 하지 않을까?

최근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밥상공동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필자는 이런 예수의 밥상공동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혼자 종종 예수가 차린 밥상의 풍경을 상상해 보곤 한다. 예수의 밥상에도 누군가 배제된 차별이 있었을까? 아니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평등의 밥상이었을까?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혼술’이나 ‘혼밥’이 회자되고 있는데, 혹 예수는 혼밥에 익숙했을까 아니면 공동체 식사에 익숙했을까? 또 그 밥상의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생선이나 고기뿐만 아니라 혹시 한국인들이 오래전부터 건강식으로 즐겨먹었던 잡초요리는 없었을까? 예수는 어떤 내용으로 식사기도를 하였을까? 등등에 대해 상상해 본다. 물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성서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대안적 교회를 추구하는 우리도 종종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의식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예수밥상에 대한 풍경을 상상해 볼 때, 우리는 적어도 한두 가지 예수밥상의 특성을 그려보게 된다. 하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밥상이란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실천한 ‘만나’ 공동체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만나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은총으로 내려주시는 그날에 꼭 필요한 먹거리 곧 일용할 양식을 뜻한다.

주지하듯이 만나란 말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광야에서 먹어야 할 먹거리가 부족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다. 여기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지?”(what’s this?, manhu)라고 물었던 것이다.(출 16:15)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놀라움이요 감사였다.

필자는 여기서 만나 곧 일용할 양식으로 권포근과 고진하 목사부부가 최근 『잡초치유밥상』(2017)이란 책을 통해 연구하며 알리고 있는 ‘잡초요리’를 언급하고 싶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낯선 음식! 하지만 가장 흔하기에 귀한 음식 ‘잡초요리’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잡초를 보고 약간 당황하며, “이게 뭐지? 이런 것도 먹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만나?”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잡초는 보관도 만나처럼 짧고 저장할 수도 없는 풀과 같은 음식이지만, 그 안에 보약 같은 생명이 가득한 음식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코셔(kosher)나 이슬람교의 할랄(halal)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만나 곧 ‘잡초요리’를 생각하면 어떨까?

또 하나는, 예수의 밥상은 자유식탁과 만인평등의 밥상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예수에게 붙여진 그의 별명 속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마 11:19a)

여기서 ‘마구 먹어대는 자’와 ‘포도주를 마시는 자’에 대한 옛 번역은 ‘먹보’요 ‘술꾼’이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번역으로, 예수께서 음식에 대해 ‘자유로운 음식’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죄인들과 서슴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밥상이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초대되는 ‘죄인들의 식탁’이요, 또 어떤 음식도 허용되는, 심지어 술이든 고기이든 모두 허용되는 자유음식 식탁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지하듯이 후에 베드로의 보자기 음식환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유대적 전통을 넘어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발전하였다.(행 10:11~16)

결국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밥상이란 평등과 자유음식의 밥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어떤 동물이든 우리가 먹어도 되나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람도 청소년 시절에 죽으면 한(恨)이 된다는 말처럼 동물도 자신의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물건처럼 대량생산되고 또 일찍 희생되어 사람의 밥상에 올라온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따라서 필자가 꿈꾸는 교회는 만나인 잡초요리를 기본 베이스로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는 생명밥상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든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식탁에 환대하는 완전 평등의 식탁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8호』 (2018/07/24)




112Myung-kwon Lee, Chee Youn Hwang and 1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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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최 [건강한 식탁]이 그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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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박순영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밥 상에.... 잡초가 아니라
생명초 ~ 냉이.쑥.달래.미나리.씀바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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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아멘!
글을 대하며 잠시라도 일용할 양식 범위내에서 섭생을 잊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의 식탁은 어류, 육류, 곡물, 엽채·근채로 채워지는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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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Lee 글이 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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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7 January at 08:37 ·



내가 꿈꾸는 교회(59):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얼마 전 문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톨스토이의 언덕을 넘으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큰 산이 다가온다.” 이 말은 러시아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주지하듯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거장들이다. 톨스토이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인간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강조한 사상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연의 어두운 부분을 매우 적나라하게 잘 파헤침으로써 은폐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폭로시킨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첫 페이지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말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소설의 주인공인 카라마조프가의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수도사로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을 지도한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수도생활의 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도생활은 마치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수도원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수도생활은 무의미한 고립적 삶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 좋은 예가 소설 속에서 진정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등장한 조시마 장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수도자였다가 “속세에 머물라.”는 스승 조시마 장로의 권고에 의해 수도사를 그만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일종의 재가수도자가 된 소설 속 주인공 알료사의 삶 또한 그렇다.

이처럼 수도원 안에서 수도하든 아니면 수도원 밖에서 재가수도자로 생활하든 중요한 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힘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보면,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그 이야기 역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톨의 밀알 비유와 비슷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옛날에 참 못되고 못된 한 아줌마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었다.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를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녀를 변호할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양파 한 뿌리를 기억해 낸다. 아줌마는 과거 어느 날 딱 한 번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수호천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양파를 갖고 아줌마에게 가서 그 아줌마가 양파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양파를 들고 지옥에서 그것을 아줌마에게 내밀었고, 아줌마는 그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양파를 같이 잡고 오르려고 하였다. 그 때 아줌마는 그 양파는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밀치자, 그만 양파는 끊어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아줌마는 끊어진 양파와 함께 영원한 불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수호천사는 슬피 울면서 아줌마 곁을 떠났다는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양파 한 뿌리 같은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인간을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말하자면, 양파 한 뿌리는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알에 비견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선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주일학교에서 종종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믿음으로 가는 나라>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어여뻐도 못 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과연 맘 착해도 가지 못하는 나라라는 말은 맞을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마 25:31-46) 양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롬 2:14-15) 말하자면, 그들은 양파 한 뿌리 같은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선행의 삶을 산 자들이다.

선행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과 양파 한 뿌리 같은 착한 일, 그것은 수도원에서 고독을 씹으며 인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일 수도 있고, 혹은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떠 주는 아주 작은 선행일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작지만 자신도 살리고 또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일일일선’(一日一善)이란 말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착한 일을 도모함으로써 그것으로 존재양식을 삼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한 톨의 밀알이나 양파 한 뿌리 같은 작은 선행일지언정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9호』 (2018/07/31)




68Myung-kwon Lee, Hyun Kyung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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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행함은 존재의 변화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분리해버려 행함은 믿음이 없는줄로 착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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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잊어 버렸던 세계명작 그....
다시 봐야 겠네요
상황에 따라 달리 느껴질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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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6 January at 10:07 ·



내가 꿈꾸는 교회(58):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

필자의 스승인 유동식 교수(1922~ )는 신학자이기 이전에 화가이다. 그는 화가로서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채화로 그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소위 ‘관상화’(觀想畵)로 불리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관상화란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깊이 관상한 미적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뜻한다.

예컨대 신학자인 화가가 한 폭의 관상화를 그렸다면, 그 그림은 단순히 외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하여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신학적인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는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유동식 교수의 관상화 중에 ‘무궁화 기독교’로 이름 붙여진 그림이 하나 있다.(아래의 그림) 이 그림은 좌우 대칭적 구도로 되어 있다. 왼편의 위쪽에는 기하학적 도형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아름다운 빨간 장미가 여러 송이 피어난 모습이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편에는 한 보살이 물가에 한 발을 늘어놓고, 다른 발은 반가부좌 자세로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다. 그 아래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왼편 쪽의 장미와 오른편 쪽의 보살을 두 원이 이어주면서 그 접점에 무궁화가 한 송이 피어 있다.

필자는 언젠가 스승에게 위 그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왼편 상단의 그림은 성서의 세계를 함축하여 표현한 성서계 만다라입니다. 그리고 왼편 아래에 있는 장미는 아가서 2:1에 나오는 ‘샤론의 꽃’ 혹은 ‘샤론의 장미’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가(89장)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왼쪽의 그림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뜻합니다.

한편, 오른쪽에 그린 보살은 13~14세기 고려시대에 많이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 관음보살의 모습을 따온 것입니다. 관음보살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로서, 그 자비심은 마치 하늘의 달이 여러 맑은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여 ‘수월’(水月)로 표현됩니다. 관음보살 아래의 연꽃은 아름다운 불국토를 이상화한 것입니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의 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써,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한국불교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오른편의 그림은 한국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나는 장미의 기독교문화와 연꽃의 한국문화가 이제 두 원이 서로 만나 교집합을 이루듯 새롭게 만나 새로운 꽃을 피우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궁화 기독교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한반도에서 장미와 연꽃이 만나는 모습, 그리고 두 꽃이 만나는 지점에서 제3의 아름다운 꽃인 ‘무궁화’가 피어나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서구에서 들여온 장미의 기독교만 풍성할 뿐이다. 그리고 연꽃의 한국문화를 우상시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장미와 연꽃의 문화를 넘어서, 제3의 새로운 꽃인 ‘무궁화’ 꽃을 피워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으로 무궁화의 특성을 상상하며 세 가지로 제안하고 싶다.

첫째, 무궁화 기독교란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그래서 ‘늘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의 의미는 말 그대로 끝없이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무궁화만큼 오래 피는 꽃은 거의 없다. 7월에 피기 시작하여 10월까지 거의 4개월 동안 계속해서 피니 말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무궁화는 매일 꽃이 떨어지고 다음 날 새로운 꽃으로 새로 핀다는 점이다. 마치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말한 것을 실증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워진 한국인의 한 멋진 삶의 영성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진정한 한국적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을 ‘치료하는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는 그냥 꽃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약재로 사용된 꽃이다. 한방에서는 4~6월에 무궁화 껍질을 벗겨서 햇빛에 말려 해열·해독제로 사용한다. 특히 동의보감에 따르면, 무궁화는 사혈을 멎게 하고, 설사 후의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시면 효험이 크다고 한다.

이처럼 무궁화는 치료의 꽃으로서 ‘여호와 라파’(출 15:26,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를 지닌 무궁화 기독교를 암시한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가? 특히 한국병으로 불리는 불신과 분열, 그리고 노예의식과 평화를 깨는 분단의 질병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의 병을 치료하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치료의 공동체를 뜻한다.

끝으로 무궁화 기독교는 어떠한 고난도 굴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내의 기독교’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궁화의 약점으로 진딧물이 많이 끼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궁화는 절대로 진딧물로 죽는 법은 없다고 한다. 즉 무궁화는 진딧물을 비롯하여 그 어떠한 질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는 꽃이다.

더욱이 무궁화는 영하 20도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고 잘 견디며 살아남는 인내의 꽃이다. 이것은 수 천 년의 역사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난을 슬기롭게 잘 이겨온 한국의 역사를 상징하며 동시에 한국인의 꿋꿋한 근성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서양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시켜 세계가 깜짝 놀랄 제3의 창조적인 문화의 꽃을 피우는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0호』 (2018/08/07)




78Chee Youn Hwang, Myung-kwon Lee and 7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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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이야기도 홍천의 무궁화 동산, 찬송가 5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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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1 reply


Huyn Jang 하근동백..다도용어입니다.

여름에는 무궁화 겨울에는 동백이란 뜻입니다.무궁화는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떨어지고 동백은 예쁘고 고울때 떨어집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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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52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씨알순례 모임

●모임일시: 2020. 2. 1(토) 오전9시50분
●모임장소: 종로3가역(1,3,5선) 탑골공원 팔각정....See more




45Myung-kwon Lee, Duk Jin Hong and 4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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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45 ·



<공지> 가나안교회 모임 안내

1. 경자년 설을 맞이하여 모든 가나안 언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교회에 깊은 관심과 응원 감사드립니다.

2. 본래 내일은 <스팀가나안교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하지만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의 교회를 방문하거나 혹은 가족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는 것도 좋을듯 싶어 이번주일은 쉽니다. 보람찬 설날 되시길 바랍니다. 대신에 스팀가나안교회는 월요일(1/27) 점심 때 친교모임을 갖을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바라며, 자세한 것은 최승언 언님께 문의바랍니다....See more




52Myung-kwon Lee, 이강인 and 5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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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새해
가나안 교회 모임
더욱…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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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Yoo 새해 공동체 모든 분들 가운데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혜가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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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36 ·



내가 꿈꾸는 교회(57): 깨달음 추구의 공동체

기독교는 지금까지 '믿음'의 종교로만 이해되었다. 여기서 믿음이란 소위 ‘적색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자칫 ‘값싼 은총’(cheap grace)으로 잘못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그래서 최근 많은 신학자들은 적색은총에 대비되는 소위 ‘녹색은총’의 중요성을 말한다. 여기서 녹색은총이란 좁은 의미에서 생태신학적 복음 이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수행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소위 ‘깨달음’의 측면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분은 다름 아닌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선생이다.


그렇다면 유영모가 깨달은 바는 무엇이고 또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여기서 모두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없이 계신(빈탕) 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그 없이 계심을 본받아 ‘몸나’에서 ‘얼나’ 곧 ‘참나’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영모는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영모가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말한 그 깨달음의 현장 내지 도량(道場)을 일컬어 ‘심우소’(尋牛所)라고 부른 점이다.

우리가 불교사찰에 가게 되면 대웅전의 외벽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여기서 심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길을 찾아 나서는 10가지 그림이다. 그것은 길들이지 않은 소를 찾아 나서서, 궁극적으로 소를 찾아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까지를 그린 10단계의 길인데, 그것을 일컬어 종종 ‘십우도’(十牛圖)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10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 소를 찾아 나섬(尋牛)--> 2. 소의 발자국을 찾음(見跡)--> 3. 소를 발견(見牛)--> 4. 소를 붙잡음(得牛)--> 5. 소를 길들임(牧牛)--> 6. 소를 타고 집으로(騎牛歸家)--> 7. 소는 없고 사람만 있음(忘牛存人) --> 8. 사람도 소도 없음(人牛具忘)--> 9. 본래의 자리로 돌아옴(返本還源)--> 10. 거리로 나섬(入廛垂手)이다.

이처럼 심우도는 마치 화엄경에 나오는 주인공 선재 동자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모습과 같다. 혹은 그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주인공이 지옥과 연옥을 구경하고 다시 궁극적인 이상향인 천국으로 순례하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그런데 유영모는 앞서 언급한 얼나 곧 참나를 깨닫도록 수행하는 현장을 일컬어 심우도의 도량, 곧 ‘심우소’(尋牛所)라 불렀다. 말하자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나를 찾아 떠나는 심우소와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교회는 과연 심우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교회는 심우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다. 빈탕 한데 맞추는 곳이 교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는 빈 곳이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욕망소’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눅 19:46)

여기서 기도하는 집이란 유영모식으로 말하면 다른 아닌 심우소이다. 그곳은 인간의 탐진치(貪瞋癡), 곧 탐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세상적인 것의 없이 계신 분(빈탕)인 하나님께 맞추어 그분과 하나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처이다.

그렇다면, 심우소인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서 빈탕 한데 맞히는 놀이를 계속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융심리학이나 자아초월심리학에서는 세상적인 자아(ego)를 초월하여 참자아(Self)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적절한 표현이다. 따라서 심우소인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을 종종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고전 15:31,3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그리고 그는 계속 외쳤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

이처럼 참자아를 찾는 작업, 그것은 마치 심우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소(진리)를 찾아 떠나는 길과 같고, 또 소를 찾은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여(如如)하게 그 소와 더불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우도의 마지막 10단계의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10단계에서 소를 찾은 자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저잣거리로 다시 들어가서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산다. 그것은 성스러운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얼마나 즐거우랴! 교회는 마치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심우소와 같은 곳 말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이런 심우소 같은 신앙공동체로서, 얼나를 찾아 함께 기도하는 집이요, 또 새로운 참자아를 찾은 이들이 더불어 일상을 나누는 입전수수의 현장이다.

<주간기독교>, 『2161호』 (2018/08/21)




122Paul Dongwon Goh, songsoonhyun and 1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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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역시 언제나 스승님의 품 따뜻합니다.
참 나의 자리는 품어줌의 자리겠죠.
그 품어줌을 떠나 나를 찾아가다보면 나는 온기를 잃습니다. 스승님이 열어 놓으신 그 가슴에 지친 마음 살며시 기대어 봅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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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침 제가 십우도 풀이 책 원고를 막 끝낸 터라 더욱 감명깊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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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하중조 성육한 하느님이라 가르치는
근본주의교리에 아직도 목매단
Church of Christ 교단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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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 이우원 손교수님,현장스님 함께 있으면 참 즐거워요!
차곡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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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18 ·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PRESSIAN.COM

다주택 임대사업자 세금특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50박걸, 이은선 and 4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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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9:33 ·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PATHEOS.COM

St. Maximos, The Purpose of Humanity and Universal Salvation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16Jong Gil Choe, Jong Wan Park and 1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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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6:38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부흥회를 많이 하던 70~80년대에 생긴 속담으로 생각된다. 보통 부흥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정작 부흥회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는 전혀 성령 충만한 사람답지 않게 이웃과 잘 싸우고, 게다가 화해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한번 싸우면 절대로 화해하는 법이 없다는 말도 여전히 들려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종종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정작 어떤가? 그들은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화해를 청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성령’(하나님)이란 말을 종종 들먹이지만, 실제 일상 속에서 잘 화해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한 이야...Continue reading




96Chee Youn Hwang, Byeong Hee Kang and 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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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역시 목사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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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5:01 ·



내가 꿈꾸는 교회(55): 용서의 공동체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가장 비추(悲醜)한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용서’를 거부한 어느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를 들고 싶다.(마 18:21~35) 왜냐하면 그 결과는 ‘은혜의 철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지우면 ‘일흔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용서의 요구로, 용서야말로 예수 가르침의 핵심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은혜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용서’가 실천되지 않을 경우, 베풀어진 은혜가 철회될 수 있음을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용서의 사건을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경제적인 의미의 ‘빚’(debt)과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뒤에서 언급할 주기도문에서도 그렇다. 지금처럼 예수 당시에도 돈이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다.


우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한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한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의 15년 치의 연봉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란 산술계산으로 할 때 그 ‘만 배’이므로 거의 15만 년 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년 치 연봉이 3천만 원이라면, 한 달란트는 약 4억 5천만 원이다. 서울 강북의 집 한 채 값이다.

그런데 그것의 만 배이니, 계산하면 약 45조 원 정도가 된다. 그 부채의 규모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자산에 맞먹는 엄청난 돈이다. 그 큰 부채를 모두 갚으라는 왕의 요구에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에게 애원하는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시켜줬다.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반전이 벌어졌다. 엄청난 돈을 탕감받은 그 종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났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할 경우, 약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종은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독촉하였고, 그가 갚지 못하자 그를 투옥시켰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들은 왕은 노하여, 종을 잡아 형무소에 넘기고 빚진 일만 달란트를 모두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는 예화이다. 이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잊고 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철회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 이처럼 용서의 존재론적 근거는 인간을 향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하나님과 연관된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적 본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에 참여하는 지름길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철회시킬 수 있는 무서운 심판도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자(孔子)도 ‘용서’가 모든 인륜의 근간임을 강조한 점에서 선행은총적인 용서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논어』에 따르면, 제자 자공은 공자에게 인간이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할 덕목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기서호 기소불욕물시어인).

즉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 여기서 ‘서’란 용서의 마음으로, 너와 나의 마음을 같게 하는 것이다.(如+心) 달리 말해 그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요, 내가 용서받았으면 나도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학의 황금률이다.

한편, 공자의 서(恕)의 황금률은 예수의 황금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황금률이 왜 그렇게 중요한 말씀인지 생각보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황금률에 표현된 ‘대접’이란 말이 한국인들에게 ‘음식’과 연관된 단어로 축소 이해됨으로써, 황금률을 “내가 음식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먼저 음식을 대접하자”라는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이 맞다면, 그것은 자칫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황금률은 ‘기도’와 관련된 말씀에서 나온 가르침(마 7:7ff.)이다. 따라서 예수의 황금율은 ‘용서’와 관련된 말씀으로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주기도문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 6:12) 여기서 죄란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다름 아닌 ‘빚’(debt)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에서의 특이점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오히려 더 앞서서 누군가 우리에게 진 빚을 먼저 적극적으로 탕감시켜줌으로써 우리가 하늘에 지은 죄를 보다 확실하게 용서받으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처럼 용서는 예수의 사상에서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예수의 황금률을 실천하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3호』 (2018/09/04)

* 사진은 다천 언님의 매화 사진 작품(2020.1.20)




62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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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4:13 ·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HANI.CO.KR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68Chee Youn Hwang, 주영준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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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 Jang 경교에서 모신 예수상입니다.

관음의 형상에 이마와 가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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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0 January at 00:13 ·




김근수‎ to 행동하는 예수
19 January at 18:28


5년전 이런 강의 있었는데요...



19박걸, 한양국 and 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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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9 January at 22:04 ·



가나안교회 템플스테이 중^^






Huyn Jang
19 January at 22:01


지혜의 불로. 번뇌를 태우고

장작의 불로 고구마를 굽는다.

가나안 성도들과 오대종교 모임이 아실암에서



28Byeong Hee Kang, Myun-joo Lee and 2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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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jin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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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궁금했어요.언제 소식이 올라오나.ㅎ
마치 마두금 소리 같은
우~~~ 웅웅...소라고둥 악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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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8 January at 09:00 ·



내가 꿈꾸는 교회(54):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

오래전 필자가 섬겼던 교회에서는 특강 강사로 한 저명한 종교학 교수를 초대하여 신앙강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사는 특강 말미에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가 ‘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가 소개한 경험담은 이렇다.

그 교수에게는 수십 년 동안 가깝게 지내온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하나 있었단다. 10여 명이 일 년에 서너 번 모이는데, 여느 동창 모임이 그렇듯이 그 모임도 친구들이 서로 허물없이 형제처럼 지내고 의리도 매우 돈독하였다. 1998년 IMF 때 일이다. 사업을 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친구는 부도를 내고 그만 망하게 되었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그 친구는 그만 소위 경제사범으로 구속되어 몇 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의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 어려운 상황을 지켜보던 동창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친구가 출소할 때까지 틈틈이 친구 가족들을 챙겨주었다.

감옥에 갔던 친구는 다행히 형기를 잘 마치고 출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창 모임에도 다시 나왔다. 그런데 그 친구는 모임에 나와서 자기 가족들을 챙겨준 동창들에게 고마움을 전혀 표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 생활 잘 마치게 되었다. 기업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생하게 되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친구의 말을 들은 동창들은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왜냐면 자신이 힘들 때 동창들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전혀 그 고마움을 언급하지도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장 강조하는 ‘전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앞의 예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신앙적 언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통은 아닐까?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참 많이 사용하는데, 정작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 교수의 친구는 동창 모임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적어도 먼저 벗들에게 진실로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옳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요 양심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에게 비양심적인 존재로 비춰지면서 공분(公憤)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장로의 전통’으로 불리는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매우 엄격히 준수하는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결 예법에 따라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지 않았고, 또 시장에 외출하였다가 귀가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귀가 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은 뒤 음식을 먹었다.(막 7:1-5) 그런데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일이 발생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 항의하였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막 7:6)

바리새인들의 이 항의는 어쩌면 정당한 항의처럼 보인다. 왜냐면 정결 예법을 지키는 일은 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요, 또 현실적으로 정결 예법의 규정을 떠나서 귀가 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상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정결 예법을 어긴 제자들을 옹호하며, 대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는 정결 예법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정결 예법 자체가 아니라 ‘법 정신’이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특정 법 조항을 구실삼아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무뎌진 양심을 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중략)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마 7:9-23) 법 정신 곧 사람의 양심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교회의 전통은 그 나름대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사막기후인 팔레스타인에서는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좋고, 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교회의 언어를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늘이 주신 ‘양심’을 먼저 지키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계명’(막 7:8)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의 전통은 지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계명인 양심은 저버렸다. 그리고 종교학 교수의 친구 역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기를 도와준 친구들의 은혜를 잊은 비양심적 신자였다.

하나님의 계명 곧 양심은 특정한 법 규정이나 전통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앞서서 늘 법 정신을 물으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4호』 (2018/09/11)




63Myung-kwon Lee, 이호재 and 6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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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전통에 앞서는 양심공동체..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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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글의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되는데 친구가 동창모임에 나온 것 자체가 친구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은혜가 고통의 현실에 뿌리 내리고 거기서 살아내는 하늘기운, 양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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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로너건은 종교적 회심만을 말해 온
전통적 회심이론을 비평하면서 지성적 회심,, 윤리적 회심,종교적 회심을 구분했습니다 젤피는 로너건의 회심 이론에 사회적 책임과 연대 의식을 강조하는 사회적 회심을 ...
저는 티핑 포인트가 얼마남지 않은 이 시대에 생태회심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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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Lee replied · 2 replies


연창호 양심에 대한 성서구절이 드뭅니다
바울은 성령과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믿음을 강조하고 그 둘을 대립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루터조차 보름스에서 양심을 속일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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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7 January at 07:12 ·



내가 꿈꾸는 교회(53): 유무상자의 공동체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저 세상 곧 ‘내세’에 가는 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혹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교회의 전도 구호는 일종의 ‘내세 비즈니스’ 쯤으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의 이해는 사실 매우 왜곡된 이해이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예수께서 전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중심에는 내세보다는 오히려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이 고민하는 문제, 특히 먹고사는 ‘경제’의 문제가 그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사건과 초대 교회의 모습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는 그 증거로 세 가지 정도 성찰해 본다....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