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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함석헌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고, 22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서울에서 그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을 마쳤다. 그래서 오는 3월 13일은 그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110주년이 된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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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강연회였다. 전두환이 총칼로 광주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권을 쥐고 있던 터라 사회분위기도 험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사복을 입고 강의장으로 향했다. 벌써 강의실 앞엔 많은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사복전투경찰인 백골단이나 '짭새'들이 캠퍼스에 많이 잠복했던 터라 주최 측 학생들은 강의실 입구에서 종이에 적힌 명단과 강의 수강자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머리가 짧아서 학생들이 나를 '짭새'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 앞 학생신원을 확인하는데 어깨 너머로 보니 종이에 이름을 확인하고 X표를 긋고 있었다. 흘끗 보니 '철학과 황OO'이라는 이름에 아직 X표가 없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철학과 황OO"라고 뻔뻔스럽게 소리쳤다. 학생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강의실에 입장 시켜 주었다. 진짜 철학과 황OO 학생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을 느낀다.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되다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학생들 열기로 가득 찼다. 2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나는 그날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흰수염, 흰두루마기 차림을 해 신선같이 보이는 함석헌 옹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강렬한 전기처럼 내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감전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그날 그 순간은 내 생애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미칠 대상'을 찾았다. 그는 곧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고, 나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매순간 이끄는 영감과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노벨평화상 후보자였다.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허나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바닷가 조약돌만큼이나 많다. 아마 그의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 한반도에 남긴 영향이 무엇인가가 아닐까.

함석헌은 무엇을 남겼나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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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가지 이념이나 사상은 ▲ 유교 ▲ 일본제국주의 ▲ 공산주의 ▲ 기독교다.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와 매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함석헌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그 희망의 빛을 우리는 '자유'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포용성'이나 '다양성 존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이 추상명사들이 오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혼신을 다한 고통과 열망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혹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과 열망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들을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함석헌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나는 함석헌이 크게 세 가지 그 삶의 흔적을 한반도에 남겼다고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체성 발견

첫째, 20세기 전반부 한반도를 지배한 암울하고 어두운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비전이라는 진액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1930년대 아시아의 슈퍼파워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의 숨통을 조르며 역사를 왜곡하고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을 때, 그는 조선인의 자아 찾기, 즉 정체성 발견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를 강의하고 저술한다. 당시 함석헌의 친구이자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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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본 호(성서조선)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당시 드문 지식인 김교신의 충격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 받은 충격도 상상 할 수 있다. 후에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필화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데 그들을 취재하던 일본형사의 안목도 상당하다. "그냥 무력항쟁을 하는 놈들보다 500년 후를 내다보고 조선정신과 얼을 교육하는 너희 놈들은 훨씬 악질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 점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희망'이라는 무기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나 민족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고난을 극복 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일을 개척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선역사>는 1965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되었고 2009년 아시아명저 100선에 선정된다. 함석헌 사후 22년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혼혈을 기울여 쓴 책에 대한 인세는 매년 2천만 원이 넘는다.

권위주의 정권기, 민주화 운동가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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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황국신민의 잔재라고 여겨지는 '국민'이나 친북좌경으로 몰릴 수 있는 '인민'이라는 단어보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씨알'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썼다. 그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장준하가 만든 <사상계> 잡지에 글을 써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고 대항하여 옥고를 치르고 매를 맞았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 하에서 <사상계>가 폐간되자 그는 70세에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관주도 하의 거대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간다. '한계레신문사' 초대 대표 고 송건호는 박정희 독재정권 기간 중 함석헌의 두려움 없는 활동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아무도 독재적인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감히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언론인, 대학교수, 지식층도 감히 박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만이 박정권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비판했다. 지금도 나는 함 선생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씨알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 하는 씨알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박정희정권 하에서 나온 거의 모든 시국성명서 앞부분엔 항상 함석헌의 이름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장준하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함석헌은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동대문운동장 선거유세 연설 중 함석헌은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외쳤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열렬하고 헌신적인 그의 분투 덕분에 장준하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옥중 당선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이다.

종교적, 이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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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4일 함석헌은 '대선언'이란 시를 발표한다. 이 시에서 그는 장로 대통령 이승만을 향하여 이렇게 직격탄을 날린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함석헌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편애주의 정책에 대항해(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다른 종교도 내 종교와 똑같이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종교적 보편성을 강조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것이다.

그의 책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하며 쓴 아래 글에도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보편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1961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셋째 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함석헌,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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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함석헌은 소외된 자, 약자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보았다. 그는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서민과 소수자, 패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을 갖고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함석헌의 추종자들 또한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힘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유럽인들도 우리보다 더 많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강자독식과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사자가 토끼를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주의인가? 오늘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함석헌이 살았던 길은 결코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고 수탈할 때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의 횡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결코 함석헌이 주장한 '같이살기운동'의 길이 아니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현실에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강자와 재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이 경제의 틀에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단연코 함석헌을 따른다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강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앞장서는 가짜 씨알 쭉정이의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도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씨알의 소리', '약자의 대변자' 함석헌을 생각한다.


[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3. 28. 

함석헌과 에머슨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을 철학의 이름으로 생각하게 된 동기를 내게 처음 제공한 것은 미국의 에머슨(1803-1882)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에머슨은 그와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후학 소로우와 더불어 미국적인 학문의 터를 닦았다. 한때 함석헌과 에머슨의 글을 동시에 읽기도 하면서 내린 결론은 두 사상가 사이에 유사함이 많다는 것이고, 그 유사함의 일부는 철학적이란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살았던 시대도 달랐던 두 사상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결론만을 도출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두 사람을 연결해보는 이유는 함석헌이 서구사상과 맺은 인연이 주로 에머슨과 같은 낭만주의의 사상가들과의 교감 속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함석헌이 자주 언급하는 서양의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해보면 알 수 있고, 이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에머슨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미국의 사상에 끼친 영향,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유럽의 정신적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상적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던 그의 역할이 바로 함석헌이 한국 사상의 독립을 위해 자처했던 역할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미국 내에서 에머슨의 그런 역할이 미국학문의 전통을 가능케 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함석헌이 남긴 정신적 유산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에머슨에 대해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주로 동시대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에머슨과 콩코드라는 마을에 함께 살았던 소로우와 함께 언급된다. 함석헌이 소로우의 유명한 <시민불복종>이란 글을 한국어로 번역까지 한 것에 비하면 에머슨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함석헌은 이 세 사람을 미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들로 이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함석헌의 글에는 미국의 정체성을 이들과 연관 지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에머슨, 소로우, 휘트먼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미국의 어떤 면이 가능했고, 미국을 가능케 만든 사상적인 조건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또 에머슨은 빠졌지만 <월든>을 쓴 소로우와 <풀잎>의 저자 휘트먼이 없었으면 ’미국은 더 썩었을 것’이란 주장도 했다. 큰 맥락에서 에머슨의 이름을 포함하여 이해해도 무리는 없어 보이는 주장이다. (함석헌이 미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했기에 그들의 사상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더 썩었을 것이라 했는지는 다른 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함석헌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이들이 야인이라면 함석헌과 추구했던 인간성에 부합하는, 즉 함석헌적인 인물들이 된다.

    실제 에머슨과 소로우가 없는 미국의 사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함석헌이 19세기 중반에 완성된 이들의 사상이 미국의 본질적인 모습을 담아낸, 미국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던 인물은 존 듀이(1859-1952)였다. 듀이를 에머슨과 소로우나 휘트먼 같은 인물의 반열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잠시나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완성시켰고, 진보적인 사회개혁에도 큰 관심이 있었고, 실험적인 학교까지 세워 교육이론을 펼쳤던 듀이는 함석헌의 사상적이고 실천적인 행적과도 괘를 같이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듀이는 함석헌이 미국을 처음 방문하기 10년 전에 이미 사망했지만, 그의 명성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것이었다. 듀이는 동아시아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1919년 봄 두 달간 일본을 방문해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그 내용은 <철학의 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중요한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듀이는 일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그의 콜롬비아 대학 제자였던 호적의 초청을 받아들여 중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2년이란 긴 시간으로 보내면서 많은 강연을 했고, 특히 5.4운동으로 고조된 중국의 사회개혁과 교육개혁을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 가운데 그의 존재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19년 북경에 머물던 듀이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했었다. 미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미국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함석헌이 듀이를 몰랐다고 보긴 힘들다. 함석헌은 1962년 첫 미국 방문 때 하버드 대학의 은퇴 교수였던 철학자 Ernest William Hocking을 만났다. 그는 윌리엄 제임스의 제자였고 훗날 듀이와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고, 한때 듀이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란 평가도 받았던 사람이다. 큰 틀에서 듀이와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의 시각으로 유럽의 철학과 대화를 이어갔던 미국의 철학자였다. 함석헌은 Hocking 교수와의 만남과 소감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만약 듀이가 그때 살아 있었다면 미국 국무성에서 함석헌과 듀이가 만나 미국의 정신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할 수 있다. 듀이에 대한 함석헌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상가로 듀이가 아니라 에머슨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미국의 실용주의에 대한 함석헌의 판단일 수도 있다. 특히 실용주의가 기술주의로 흐르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가능성이 생긴다. 20세기 중반 미국이 썩었다는 함석헌의 판단도 에머슨과 소로우가 꿈꿨던 이상적인 미국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기술과 폭력의 문화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에머슨과 듀이를 좀 더 연결시켜 보자. 미국 내에서도 최근까지 에머슨의 학문적 유산을 철학적인 것이라 보는 시각은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낭만주의 학풍의 에세이 형식의 글을 썼고, 자립적인 인간이해를 통해 미국의 독립정신을 표현해냈고, 시를 쓰기도 했고, 미국 실용주의의 동기를 제공했고, 당시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등의 이력이 그를 이해하는 주된 관점이었다. 문학적인 사상가로도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부각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머슨을 니체와 하이데거와도 연결시키며 독창적인 철학적인 작가로 부각시킨 사람은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이라는 미국의 철학자다. (지식사의 사적인 연결점들에 대해 비교적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니체가 에머슨의 책을 항상 들고 다녔고, 반복해 읽으며 밑줄을 긋고 여백에는 극찬의 감탄사까지 남겼을 뿐 아니라 글의 스타일까지 모방하려 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에머슨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부각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존 듀이였다. 1903년 시카고 시절 그는 “Emerson: the Philosopher of Democracy”(에머슨: 민주주의의 철학자)란 글을 썼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을 어떤 철학으로 이해했을까?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는 함석헌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듀이의 글을 들여다보자(이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듀이는 에머슨의 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를 잘 알고 있었다. 듀이는 에머슨에 대해 철학적이라고 하기엔 논리가 약하다는 평가를 논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비판했다. 듀이에게 논리는 논증의 도구만이 아니라 직관의 반응을 구하는 논리가 있을 수 있었고, 침묵마저도 논리의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에머슨은 ‘말’이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침묵이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들에서 사유의 동기를 찾았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방법론을 묻거나 그가 발전시킨 논리의 형식을 묻기 전에 그의 글에 담겨 있는 그만의 논리와 방법을 깨달아야 했다. 또 에머슨을 철학자라 부르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에머슨이 철학 이상의 학문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머슨은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시인으로 철학을 했고, 반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유를 했다. 이성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사유를 했던 에머슨에게 철학은 ‘아직도 거칠고도 기초적인’ 상태에 있었다. 에머슨은 미래의 철학을 시인들이 가르칠 것이라 예고했다. 그에게 철학자는 믿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시인은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철학자와 시인 사이의 분쟁은 고대 희랍의 철학과 함께 시작했다. 형이상학과 예술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내는 글을 써온 에머슨은 그 분쟁을 19세기에 재현해냈다. 에머슨에게 철학과 문학의 방법론적인 구분은 인위적이고 유치한 것이었다. 에머슨이 문제 삼은 것은 정신이었다. 그 정신의 본질은 새로움에 있었다. 이전 시대의 지치고 낡은 원칙의 한계를 파헤칠 지식인을 찾았고 타성에 젖지 않은 새로운 사유를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했던 철학은 시스템이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고, 삶에 정직하고 일상의 경험에 충실한 철학이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사상이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험을 설명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요구했고, 모든 사상의 대한 판단의 기준이 일상의 삶 속에 있음을 설파했다. 그에게 모든 진리는 일상에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논리의 싸움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철학이나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 시키려는 철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머슨은 교리나 제도, 관습이나 체계적인 것을 싫어했고, 철학과 종교, 예술과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되돌려놓고자 했다. 신학과 형이상학의 기술과 속임수로 인해 감춰진 진리의 단순함을 찾고자 했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했다. 그를 실패한 개혁자, 지혜의 철학자, 또는 덕의 삶을 가르친 선생으로 보는 등 다양한 시각이 있었다. 오늘날 플라톤의 글에서 체계와 논리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해석의 역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듀이는 에머슨 철학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듀이는 20세기가 에머슨에게 그런 역사를 제공할 것이고, 역사는 결국 에머슨을 민주주의의 철학자로 기억할 것이라 예언했다. 20세기에 민주주의가 사상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에머슨에게서 찾을 것이란 예언이었다. 듀이가 말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맛서는 이념적인 제도가 이니라, 일반 대중의 경험이 사유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정신적인 평등이라는 에머슨적인 이상을 말한다.

    19세기 미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상가였던 에머슨과 20세기에 그 역할을 맡았던 듀이의 관계는 미국의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듀이의 사상에 에머슨이 얼마나 어떻게 반영됐는지, 에머슨의 사상에서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의 뿌리를 얼마나 찾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듀이가 에머슨의 사상을 철학으로 이해하고 옹호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듀이는 에머슨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해석의 역사를 직접 참여했다. 듀이에게 미국의 철학은 미국이 추구해온 가치나 이념과 분리될 수 없었고, 에머슨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미국의 철학이 논리의 놀이터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와 함께 발전한 정신사의 산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머슨에 대한 듀이의 평가를 함석헌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듀이의 글 곳곳엔 에머슨 대신 함석헌의 이름을 넣어도 이해가 될만한 문장들이 있다. 듀이가 제시한 논리와 방법의 한계, 시와 철학의 경계에 대한 성찰, 일상의 경험이 기준 되는 철학은 분명히 함석헌의 철학을 위한 논변으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듀이는 에머슨의 철학을 말했지만, 그 내용을 철학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 작업은 앞서 언급한 스탠리 카벨이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해왔고, 카벨의 이름은 앞으로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함석헌과 에머슨 사이에 비교가 가능한 부분을 몇 가지 언급해보자.

    약 10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지구 반대편에서 각각 태어난 두 사람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다. 에머슨은 교회의 낡은 교리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양심의 이유로 3년간의 목회를 그만두었다. 특히 교리나 관습에 따라 성만찬을 집전할 수 없다는 게 사임의 직접적인 이유였다. 함석헌은 예수의 대속이란 교리를 자유로운 인격이 받아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이단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발전시킨 사상은 ‘스스로’, ‘자기 신뢰’, ‘자유로운 인격’과 같은 인간이해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인간은 그들에게 제도와 관습이 묶어놓을 수 없는 생각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에머슨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자아를 찾았고, 함석헌은 문명에 가려진 야성의 영성을 찾았다. 에머슨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생각의 사람’(Man Thinking)이었고, 함석헌은 좀 더 집단적인 ’생각하는 백성‘이었다. 철학의 사유를 “창백한 생각”(Pale cast of thought - 에머슨이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햄릿 대사)에서 벗어나 생각의 조건인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리려는 노력도 하나의 공통점이다. 자연과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함석헌은 한국의 정신을 가로막는 숙명적인 세계관이 있음을 경고했고 이를 극복할 삶의 자세를 믿음이라 했다. 에머슨이 미국을 약속과 미래와 새로움의 언어로 이해한 이유는 미국이 유럽의 낡은 제도와 교회의 교리가 낳는 억압적인 자아의식을 극복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두 퀘이커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 힌두교에 심취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퀘이커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공중기도를 싫어했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생각할 근거를 말하면서도 기억해야 할 차이점이 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에머슨과 개인과 전체가 긴장관계 속에서도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했던 함석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또 에머슨이 당시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했다고는 할 수 없는 반면에 저항과 참여정신을 배제한 함석헌의 사상은 생각할 수 없다. (함석헌과 에머슨을 함께 읽는 글은 1회 더 쓸 계획이다).

ⓒ 웹진 <제3시대>



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946?fbclid=IwAR0oYggfItZx-EcUGotWWqKivHIWVoZHOp3rx2ak89PovIV7I895W3kAOYg [웹진 <제3시대>]

"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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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 오강남의 함석헌 이야기


나눔회원 1:1 채팅

함석헌

-생명평화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한국의 간디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우리 마음속에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들어가며


다석 류영모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가 함석헌 선생이었고함석헌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류영모 선생이었다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1주기에 다석 선생의 제자들이 다석 선생의 집에 모였을 때 내가 부족하지만 이만큼 된 것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두 분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었다우선 11살의 차이였지만 생몰 일자가 거의 같다똑같이 3월 13일에 출생하고 돌아가신 날도 류영모 선생님은 2월 3일 저녁함석헌 선생님은 2월 4일 새벽으로 몇 시간 차이일 뿐이다그야말로 의미 있는 우연이라고 할까두 분 모두 흰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고수염을 기르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분의 근본 사상이 여러 면에서 같았다는 사실이다두 분 모두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소개되었다필자로서는 류영모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면함석헌 선생은 여러 번 뵙고, 1979년 캐나다 에드먼튼에 살 때 필자의 집에 유하시면서 필자가 근무하던 알버타 대학교에서 교민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시고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담도 하실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은 더 없는 영광이라 생각된다.


대조적인 점은 류영모 선생에 비해 함석헌 선생은 키도 크시고 외모도 출중하셨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류영모 선생이 생의 후반에서 비교적 은둔적이고 금욕적인 면이 강했던 데 비해 함석헌 선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한국 민주화에 직접 참여하시는 등 사회 개혁에도 힘을 많이 쓰셨던 점이라고 볼 수 있다신비주의 전통에서 즐겨 쓰는 용어를 빌리면 함석헌 선생은 행동하는 신비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마침 함석헌 선생이 나는 왜 퀘이커교도가 되었는가하는 제목의 자서전적인 글을 쓰셨는데그것을 토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그의 삶


신천 함석헌咸錫憲(1901~1989)은 (여기서부터 존칭 생략평안북도 황해 바닷가 용천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의 32녀 중 누님 아래 둘째로 태어났다. 5세경 누님이 배우는 천자문을 옆에서 듣고 모두 외었다여섯 살에 기독교 계통의 사립 덕일 소학교에 입학하고 긴 댕기머리를 잘랐다함석헌에 의하면 전통 종교가 창조적인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 전통에 불과할 때 바닷가 상놈의 고장으로 알려진 자기 마을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넣어주었다고 한다그는 기독교 계통 사립 초등학교에서 하느님과 민족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후일 함석헌은 자기가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14세에 양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6세에 졸업한 다음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이것은 나중 의사가 될 목적이었다공립학교에 다니면서 순진성이 많이 없어지고 과학을 배우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고보 2학년 17세에 한 살 아래의 황득순과 결혼했다.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수리조합 사무원소학교 선생으로 일하기도 했다그해 11월 장남 국용이 출생하고 2년 후 장녀 은수가 태어났다그는 모두 2남 3녀를 두었다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집에서 2년 동안을 있노라니 운동 이후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유의 물결과 교육열 속에서 젊은 놈의 가슴이 타올라 날마다 빈둥빈둥 놀면서 썩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21년 21세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4월이라 입학 시기가 지나 어디에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집안 형 되는 함석규 목사를 만나그가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정주 오산학교에 가서 3학년에 편입되었다그해 여름이 지나고 류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9월 개학식 때 함석헌은 처음으로 류영모를 만나게 되었다함석헌에 의하면 그는 류영모의 영향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처음으로 한국이 필요로 하는 뭔가를 찾기 시작하고또 류영모로부터 노자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그 결과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 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더욱이 교회가 점점 현실에서 먼 신조주의信條主義’, 교리중심주의로 굳어지게 되자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다오산학교와 류영모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함석헌은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그해 9월에 난 대지진으로 도쿄시의 3분 2가 타버렸다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한국인들이 폭동을 계획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한국인 약 6천명이 학살되었다이를 본 함석헌은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을까?” 번민하기 시작했다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렇다고 도덕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다오래 동안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한국 형편으로는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일본 유학을 결심한 그 본래의 의도대로 1924년 지금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다가 동갑내기 1년 선배인 김교신金敎臣을 만나고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우치무라는 오산학교에서 류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그 당시에는 우치무라가 생존인물인지도 몰랐는데김교신을 통해 그가 도쿄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함석헌은 존경하는 스승 류영모가 언급한 인물이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치무라의 무교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에서는 별도의 예배형식이 없이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며 해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여기서 함석헌은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 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그러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번민에서 벗어나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8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오산학교로 돌아와 역사 선생으로 일했다그러나 역사 선생이 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역사란 것이 온통 거짓말투성이일 뿐 아니라 한국 역사가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이어서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과 낙심만’ 심어줄 것 같고다른 사람들처럼 과장하고 꾸미려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민에 고민결국 자기에게는 세 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했다첫째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전통을 버릴 수 없고둘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버릴 수 없고셋째 영국 역사가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를 읽고그 영향으로 받아들인 과학과 세계국가주의를 버릴 수 없었다이 셋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이 셋을 다 살리면서 역사 교육을 할 수는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하는 것이었다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용기가 나 역사 교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말하자면 한국 역사의 keynote를 고난suffering’으로 보는 역사관이 확립되고 이런 역사관에 입각해서 한국 역사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했던 유학생들 여섯 명이 귀국하여 성서연구모임을 만들고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는데함석헌은 고난의 견지에서 한국 역사를 새로 조명하는 글을 연재했다이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명작이 되어 나왔다이 책은 나중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이름의 개정판으로 나왔고류영모의 맏아들이 번역하여 영문판으로도 나왔다.


오산학교에 10년간 있었는데그때는 스스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다고 했다그러나 본래 교파를 싫어하여 무교회라는 것이 생겼는데아이러니하게도 무교회도 하나의 교파로 굳어가는 것 같고또 우치무라에 대한 개인숭배 태도가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반감을 느끼고더욱이 중요한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을 깊이하면서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서 죽었음을 강조하는 우치무라의 십자가 대속 신앙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심정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지만그것을 크게 공표하여 부산을 떨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런대로 몇 년을 지났다.


오산에 있으면서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농촌을 살려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가 오산에 온 것도 이를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믿었다그러나 1936~1937년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점점 가혹해지자 함석헌은 죽을 지언정 이에 맞서야 한다고 하였지만 오산학교 행정자 측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그는 평생을 바칠 마음으로 왔던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봄 눈물로 교문을 나왔다.”


교문은 나왔지만 차마 학생들을 떠날 수는 없었다오산에 머물면서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만났다그렇게 2년을 보내다가후배 김두혁이 평양 시외에서 경영하던 덴마크식 송산농사학교를 넘겨주겠다고 하여 1940년 그리로 갔다가자마자 설립자가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에 따라 함석헌도 덩달아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억울하게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1942년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실린 조와弔蛙라는 우화 때문에 잡지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가는 사건이 터져다시 감옥에 들어가 1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이 때문에 나중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될 수 있게 된 것이다출옥 후 다시 농사를 짓고 있는데, 2년 후 해방이 되었다.


함석헌은 이때까지 감옥을 네 번그 후로도 세 번 더 들어갔는데감옥에 있을 때 얻은 것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그는 감옥을 인생대학이라 부르고감옥 속에서 불교 경전도 보고노자장자도 더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다고 한다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를 수도 있었다함석헌은 감옥에서 깨달은 바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누가 받을까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기성 종교는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관련되었기에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마치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나 2000년 전 예수 탄생 때 동방에서 선물이 온 것처럼 지금도 동방에서 새로운 정신적 선물이 와야 한다고 한 토마스 머튼을 읽는 기분이다

 

해방 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임시자취원회 위원장이 되고이어서 평안북도 임시정부 교육부장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밀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소련군정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1947년의 일이다.

월남하여서는 무교회 친구들의 협력으로 일요 종교 강좌를 열어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말로나 글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필자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 그 당시 󰡔사상계思想界󰡕에 실린 그의 글들을 읽었다그의 생각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고그의 무교회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세 가지 주된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부정하고기도하지 않고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다그러나 함석헌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몸소 지는’ 십자가를 강조한 것이고기도도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공중기도를 삼갈 뿐이라고 하고동양 종교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으로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결국 표층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심층 종교로 들어가는 함석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일로 구태여 무교회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무교회를 떠난 결정적 계기는 중대한 사건’ 때문이었다그가 오산 시절부터 간디를 알고 오래 동안 간디를 좋아해 간디 연구회를 만들 정도였는데동지들 사이에서 간디의 아슈람 비슷한 것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만들고 젊은 몇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이때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형세는 돌변했다친구들이 모두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견딜 수 없이 외로웠다그러면서 관념적으로 믿고 있고 감정적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그는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 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되어 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우뚝 서는 돌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이때를 예견한 것인가함석헌은 1947년 월남 이후 지은 그의 시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심정이 토로하고 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救命袋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不義의 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 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스승 류영모마저도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끝내 그를 내쳤다그러나 물론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다석일지󰡕에 보면 함은 이제 안 오려는가영 이별인가” 하며 탄식하는 등 7~8회에 걸쳐 제자 함석헌을 그리는 글이 나온다류영모는 내게 두 벽이 있다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이다고 할 정도였다.


심정적으로는 그럴지라도 겉으로는 스승으로부터도 버림받아 홀로 된 그에게 퀘이커가 나타났다퀘이커에 대해서는 오산 시절부터 들었지만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한국 전쟁 후 구호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퀘이커들을 만나 처음으로 퀘이커 신도가 된 이윤구를 통해 퀘이커를 접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다. 1961년 겨울이었다이렇게 되어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퀘이커 훈련 센터인 펜들힐Pendle Hill에 가서 열 달 동안비슷한 성격의 영국 버밍엄에 있는 우드브루크Woodbrooke에 가서 석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히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다그러다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에서 열렸던 퀘이커 세계 대회에 퀘이커 친우들이 그를 대해 주는 데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껴서 결국 퀘이커 정회원이 되었다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함석헌은 류영모와 달리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다. 1961년 장면 정권 때 국토 건설단에 초빙되어 5·16 군사 정권이 들어오기 전까지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잡지 󰡔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 사상을 널리 펼치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는데,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8년 만에 복간되었다군사 정권에서는 군사 독재에 맞서서 1974년 윤보선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운동본부의 고문역을 맡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이런 민주화 운동을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9년 췌장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 2월 4일 새벽 5시 28, 87년 11개월 가까이날짜로 33,105일을 사시고 세상을 떠났다함석헌을 따르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박재순 박사에 의하면돌아가시기 전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애쓰셨다는데그것이 스승 류영모가 돌아가신 날에 맞추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한다장례식은 조문객 2 명이 오산학교 강당에 모여 오산학교장으로 치르고 경기도 연천읍 간파리 마차산에 묻혔다가,  200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이에 따라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영원한 들사람에게는 약간 의외의 조치가 아닌가 여겨지는 면도 있다.


그의 가르침


함석헌은 동서고금의 정신적 전통에서 낚아낸 깊은 사상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생명평화민주비폭력 등을 위해 힘쓴 행동하는 신비주의자’, 세간에서 말하는 한국의 간디라 할 수 있다성경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누가복음6:40) 했다󰡔도마복음󰡕이나 󰡔장자󰡕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류영모 선생님의 제자이지만어느 면에서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했다는 의미에서 청출어남이청어남靑出於藍而靑於藍의 경우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함석헌의 사상이 어떻게 세계 종교의 심층곧 신비주의 전통과 통하는가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우리가 살펴본 인류의 정신적 스승들의 사상을 통섭하고 있는가몇 가지 예를 들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경전을 끊임없이 고쳐 해석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아니다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고 한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자라나는 신앙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옛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낡아 빠진 종교다우리들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는 종교는 낡아 빠진 종교이다신학적인 설명을 강요하기 휘해 과학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종교도 역시 낡아 빠진 종교다.”


자라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생명이 없는 신앙이다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바람(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결국에는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도마복음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우리의 의식구조가 변화를 받아 점점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우리 마음속에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가장 본질적인 나라는 뜻에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참 나라 할 수 있다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이런 발견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깨침이라 한다심층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넷째,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믿는 것은 그리스도다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놀라운 통찰이다예수는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혹은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임을 발견한 분이다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예수와 같은 그리스도 의식에 동참하여 그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심층 종교의 기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랑이 이긴다는 가르침이다.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세계 거의 모든 종교 신비주의 심층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이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라고.”


여섯째는 너와 나는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남과 같이 있다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남이 떨어져 있는 한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그러므로 남이 없이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함석헌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늙지도 않고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만물이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가히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다.    


일곱째는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우주의 법칙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장도 모두 다 하느님의 예언자다.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결할 수밖에 없다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자연히 다원적 사고를 인정하게 된다거의 모든 심층 종교신비주의 전통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런 몇 가지 예만으로도 함석헌의 사상이 류영모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세계 신비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아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한다특히 오늘 한국의 종교들이 거의 표층 종교 일색으로 변해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된다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나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가 미래의 종교는 어쩔 수 없이 심층적인 종교신비주의적 종교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류영모·함석헌의 사상에서 미래 종교의 광맥을 보는 듯하다 하면 과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