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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4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목회와 신학, 1995년 11월호)

섭리와 경륜 :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氣사상 어떻게 볼 것인가

기 사상의 열풍

기 사상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 서서히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는데 90년대 이후 최근에는 이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대중화가 더욱 주목되고 있다. 그러한 징후로서 단전호흡이나 기공(氣功)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많이 출판되고 있다. 서점에서 '기(氣)', '단(丹)', '선(仙)', '기공(氣功)'이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책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옛날의 도교(道敎) 고전들이 새롭게 번역, 조명되어 출판된 것도 많다. 기 사상과 연관된 풍수지리설 등의 운명술에 관한 책들, 한의학과 관련된 건강비법에 관한 책들이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었다. 기 사상 혹은 소위 '선도(仙道)'와 관련된 민족사학(史學)을 통해서 한민족의 우월성과 밝은 미래를 제시하는 책들도 유래없이 많이 보이고 있다.
길거리에서도 기 사상에 대한 관심의 열기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전호흡이나 기공을 수련하는 도장(道場)임을 나타내는 '기공', '단전호흡'이라는 문구를 건물들의 창문에서 발견되는 것은 예사 일이 되었다. '선(仙)', '기공(氣功)', '단(丹)'에 대한 강좌 개설을 알리는 광고 포스터를 길거리에서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번화한 거리에 서있거나 걸어가노라면 금방 사람이 와서 "도(道)에 대해서 들어보셨냐"고 물어본다. 회사나 관공서에서도 건강에 좋다는 명목으로 단전호흡을 수행하게 하는 곳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아무런 의식없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기 사상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목회와 신학'이 기 사상에 대한 특집을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기 사상에 관심이 고조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의 쇠퇴와 전통적 가치관의 상실 등은 동양의 "신비로운" 사상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뉴에이지 운동이라는 형태로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뉴에이지 운동의 과학적 분야인 신과학운동(New Scientist Movement)의 확산도 주목할만한 원인이다.
현대철학의 사조 중에 두드러진 현상이 현대물리학과 분석철학의 성과에 힘입어 형이상학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즉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을 골자로 하는 현대물리학은 고전물리학에 상응하는 데카르트 식의 기계론적 우주관을 오래 전에 폐기처분하였고, 분석철학은 고전물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형이상학의 논리들을 분해시켜서 무의미한 명제들의 무더기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신과학 운동 측의 과학자들은 현대물리학에 상응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건설하기 위해서 동양의 사상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신과학 운동의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하였으며 대학교수들 중에서도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빛의 입자-파동설에 고무되어서 정신과 물질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는 '기' 개념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엄밀성을 자랑하는 과학자들이 '기' 개념 앞에서는 그 개념에 대한 엄밀한 고찰도 없이, 비과학적 비약의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둘째, 한국에서의 경제적인 성공은 단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질높은 건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성장지향적이고 경쟁적인 한국 사회에서 스트레스 관리의 문제가 심각해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80년대에 들어와 경제 개발의 가시적 성과로서 이전에 비해서 윤택한 삶이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건강에 대한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매우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시설물들, 그리고 건강에 대한 서적류 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바탕으로 기 사상에 근거한 전통적인 '양생술(養生術)'인 '기공', 혹은 '단전호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또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들어올 때 그 효능이 과장된 것처럼 한의학에 대한 효능이 과장되는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급속히 변화되어가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그 결과 기(氣)와 주역(周易) 사상에 입각한 여러가지 운명술들, 이를테면 풍수지리설, 사주, 관상, 작명, 궁합 등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는듯 이러한 운명술에 관한 서적들도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셋째로는 한국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있다. 경제 개발의 성과로 인하여 민족적 자존감이 높아졌고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높아진 민족적 자존감으로 인하여 민족 전통의 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책들이 8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 유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주로 새롭게 조명된 한민족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한민족 전래의 "심오한" 사상을 알리는 "새롭게 발굴된 비전(秘傳)"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책들은 주로 단군(檀君)과 그에 관계된 고대사 및 고대 사상에 관한 것들로서, 이러한 "비전(秘傳)"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낙관하고 우리나라를 세계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나라로 부각시키려는 예언서들도 많이 나와있다. 이러한 "고대의 비전(秘傳)"들은 '선(仙)'이나 '기(氣)'의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많다.
민족의 자존감을 고양하고 민족 웅비의 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용기와 포부를 심어주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책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 민족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선민의식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세계의 무대에서 활개치는 민족 중에 그러한 선민의식이 없는 민족은 없다. 자기 민족의 국민성과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민족적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전(秘傳)"의 예언이나 인종적 우월성을 토대로 선민주의에 빠지는 데에는 반인류적 국수주의의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의 기(氣) 사상의 전개

원래 '기'(氣)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중국 사상사에서 '기' 개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범주 개념이라고 하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중국사상사에서 '기'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중국사상과 중국인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기' 개념은 자연과 사람, 사회, 도덕정신의 모든 영역에서 그 기초를 제공하여 주는 매우 포괄적이고도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氣'자가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은(殷), 주(周)(B.C.1200-1000)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 이다. 이 글자는 구름의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로서 ' '로 표기되었고 ' '를 거쳐서 '氣'자로 정착되었다.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라고 하는 고대 사전에서는 '氣'의 원래 의미를 '운기'(雲氣)로 규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기'가 순환하여 바람도 일으키고(風氣), 비도 뿌려서(水氣), 초목과 곡식도 자라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로써 '기'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을 구성하는 정미한 물질을 나타낸다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또 사람의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과 사람의 몸 안에 유통순환하는 혈기도 '기'라고 생각이 덧붙여졌다. 나아가서 사람의 도덕, 정신이나 자연의 기상도 '기'의 범주 안에서 설명해보려는 발전이 있었다. 중국에서 '기' 개념은 각 시대를 거쳐가면서 더욱 풍부해지고 포괄적이 되어갔으며, 모든 존재와 현상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인 개념이 되어갔다. '기' 개념의 보편화로 인하여 '기' 개념은 유교와 도교 등의 거의 모든 중국 전통 사상들에 공유되는 개념이 되었으며 외래 종교인 불교도 기 개념을 수용하고 활용해야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 '기' 개념이 유입된 것은 유교, 도교 등의 전래와 흐름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원시유교가 전해진 것은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한사군(漢四郡)의 영향으로 고구려는 한대(漢代)의 유교를 수용했다고 하겠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고구려가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을 설치하기 이전에도 유교는 사설 서당에서 널리 교육되었다. 백제의 경우도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제도를 통해서 유교가 널리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문물에 있어서 다소간 후발국이었으나 통일신라의 초기에만 해도 최치원(崔致遠857-?) 등의 뛰어난 유학자들을 두고 있었다.
도교 사상은 유교보다 훨씬 늦게 유입되었다. 유교 사상에도 '기' 개념이 나타나지만 노장(老莊) 사상이나 도교 사상에서 '기'의 개념은 더욱 유력한 개념으로서 사용되었으므로 한국에서의 기 사상은 도교의 유입과 함께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도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것은 영류왕 7년, 624년에 당고조(唐高祖)가 도사(道士)를 보내어 도덕경(道德經)을 강론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도교였으며 노장 사상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었다고 추측된다. 백제의 경우에 노장 사상이 근초고왕(近肖古王) 이전에 이미 유입되어 있었다. 신라의 경우도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신라의 풍류도가 삼교(三敎)를 포함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휠씬 이전에 도가 사상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설의 경우도 신라 말에 선사(禪師)인 도선(道詵)에 의해서 들어왔다고 하나 사실은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에 들어와 있었다고 추측된다. 풍수지리설은 도교에 속한다고 할 수 없으나 기 사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 개념이 우리나라 대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불교가 매우 흥왕했으나 유교나 도교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고려조의 왕건 뿐 아니라 조선조의 이성계도 그들 왕조의 도읍을 정하는데 있어서 풍수지리설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불교가 성행했던 시기에도 기 사상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고려말에 성리학이 유입되고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기 개념은 철학적인 이기(理氣)논쟁으로 더욱 세련화되고 정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이 발생했으며 최한기(崔漢綺)와 같은 경험주의적 기론(氣論)도 생겨났다. 조선 조의 국시는 성리학이었기 때문에 도교 계통의 사상들은 외적으로는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민중의 저변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동학(東學)이나 증산교(甑山敎) 등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의식에 내재된 기 개념

20세기에 들어와서 기 개념은 '개화'나 '근대화'에 밀려서 대중의 주된 관심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사회주의적 '양생'(養生)의 개념에 연관되어서 기공(氣功)과 주역(周易)에 대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유무(有無) 이전에 '기'(氣)라는 개념은 매우 일상적인 용어를 통해서 한국인의 의식에 깊이 침투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신적인 의욕이나 정신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또 몸이나 건강의 상태,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신체적인 측면을 포함한 전인(全人)에서 느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데도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게다가 '기세(氣勢)를 올리다' 등 어떤 힘이나 활동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나 '소금기', '기름기' 등과 같이 어떤 느낌이나, 감지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데도, '공기(空氣)', '대기(大氣)' 등과 같은 물질적인 기체와 연관되어서도 사용된다. '곡기(穀氣)' 등의 개념은 신진대사의 물질로서 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기(磁氣)', '전기(電氣)' 등은 물리적인 힘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볼 때 기(氣)는 정신적, 생물적, 물질적인 모든 영역에서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는 그 개념적 성격으로 볼 때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근세 서양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에 익숙한 서양의 동양 사상 연구자들은 '기'라는 개념을 번역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서양의 이원론적 개념들에 입각해서 물질, 질료, 에테르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결국 기는 정신도 물질도 아닌 무엇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기의 중국 발음 그대로 '치'(ch'i)라고 사용하였다. 최근에 기를 번역한 용어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에너지'라는 개념이다. 많은 학자들은 '에너지'라는 개념이 기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 우리 말에 나타나는 기 개념들의 용법은 에너지나, 에너지의 상태, 그리고 에너지의 감지 상태를 나타낸다 해도 무난하다. 그러나 기의 사상은 아직까지는 물질적 에너지에서 생체적 에너지로 그리고 정신적 에너지로 상호 변환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신과학 운동(New Scientist Movement) 측의 과학자들이 이러한 에너지의 변환 과정에 대해 설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은 과학적 체계라기 보다는 정신 에너지와 생체 에너지, 그리고 물질 에너지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가설에 입각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불과하다.
기는 하나의 단순한 개념이지만, 그 적용의 영역이 넓으며 포괄적으로 많은 사실들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단지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어떤 사상의 포괄성, 단순성, 경험성이 곧 그 사상의 진리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사상은 논리적 합리성과 포괄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어떤 사상이 결정적으로 한 사람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사상이 그 사람의 실존적 경험들을 얼마나 잘 설명해주느냐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해주는 사상 체계가 가장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다르게 설명하는 다양한 사상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상의 합리성과 포괄성, 경험성 만으로는 그 사상이 진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기 사상은 신인(神人) 동일철학

우주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들도 논의해 온 것이다. 희랍 철학자들은 우주의 본질을 '아르케'( )라고 불렀다. 우리가 기를 우주의 아르케로 간주한다고 해서 안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몇가지 경험적 사실 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험적 사실에 대하여 다른 이론적 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의학의 효능은 곧 '기'의 실재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학도 마찬가지지만 한의학도 과학이기 전에 임상경험에 입각한 기술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임상경험적 효능이 곧 기의 존재 입증이나 음양오행론의 과학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의 실재성에 대한 증명은 좀 더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의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된 기 사상이 어떠한 논리 구조를 가지며 궁극적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를 에너지로 규정하는 것은 일종의 무신론적 사고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기 사상에서는 무(無)로 부터 유(有)가 창조된다고 하는 식의 유신론적 사고는 있을 수가 없다. 사실 우주에 존재하는 것 중에 에너지체가 아닌 것은 없다. 에너지, 곧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체는 에너지가 아닌 것에서 나올 수가 없다. 에너지는 오직 에너지에서만 나오며, 물질의 생성이나 소멸 등은 단지 에너지의 변환에 의한 에너지 형태의 차이일 뿐이다.

기 사상에서 이러한 에너지의 법칙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 사상에서 모든 존재는 에너지의 연속체로서 일자(一者)이며, 이 연속된 일자(一者)를 벗어난 초월적인 비에너지체는 가정되지 않는다. 만일 신(神)이 일종의 에너지체로서 존재한다면, 그 신도 에너지의 연속체인 '전체적 일자'(全體的 一者) 안에 속하며,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실재들과 본질적으로 대등한 존재 중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神)은 이미 창조주로서의 유일신이 아니다. 그는 시공의 제한에 묶여 있는 여러가지 잡다한 신(神)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 사상은 기본적으로 범신론적인 사고 체계이다. 기 사상에 의하면 기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모든 사물에 내포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기로 되어 있으며, 기를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실재할 수 없다. 물론 기로 되어 있지 않은 초월적 신이 있어서, 무(無)로 부터 기(氣)를 창조하고 그 기로써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한다면, 유신론과 기 사상은 반드시 배치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기 사상들 가운데서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기 사상에 있어서 기는 유기체적이며 전체적 일자(全體的 一者)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결국 기 사상에서는 우주 자체가 신적(神的) 궁극자이며 따라서 기 사상은 범신론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기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유기체의 유지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인간은 우주의 궁극자인 기의 질서, 즉 우주 에너지의 질서에 자기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에 내재한 궁극자인 기가 우주의 궁극자인 기와 동일화될 때 인간은 완성되며 궁극적인 존재로서의 자각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 사상이 '인간이 곧 하나님'(창3:5)임을 주장하는 신인(神人) 동일(同一)철학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기와 음양 오행
기 사상은 음양(陰陽)이나 오행(五行)의 개념을 수용하여 더욱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음양은 원래 주역(周易)에 나타나는 개념이고 오행은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에 나타나는 개념으로서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농경 사회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즉 농경사회에서는 해와 달의 변화가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람들은 해가 뜨면 활동을 시작했으며 해가 지면 활동을 마치고 쉬었을 것이다. 밤은 낮보다 더욱 위험하고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음(陰)보다 양(陽)에 가치적 우위를 두는 사고 방식은 이러한 원초적 생각으로 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또 인간은 물, 나무, 쇠, 불, 흙의 다섯 가지 물질이 인간의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물질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다섯가지 물질이 만물을 이루는 기본적인 원소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위력을 실감했으며 해와 달의 순환을 아는 사람이 더욱 안전하며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을 살펴 그 변화를 알고 인간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아내는 것은 부귀와 영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하늘을 관찰하던 인간은 다섯 개의 중요한 별을 발견하고 다섯가지 물질의 이름을 그 별들에게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가지 별들은 다섯가지 물질이 가지는 속성을 가지며, 지상의 물질들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계의 다른 존재와 구별하여 "소우주"로 간주하고, 인간의 구조와 대우주의 구조가 상응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오행의 개념은 인간과 연관하여 더욱 발전하였고, 그 결과 오장(五臟), 오관(五管),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음(五音), 오상(五常), 오륜(五倫) 등의 개념이 생겨났다.
음양과 오행은 기의 성질을 나누는 일종의 범주(範疇 category)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개념만으로는 기의 여러가지 다양한 변화를 설명하고, 각각 다른 성질의 기 상호간의 작용과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기의 성질을 좀 더 세분화하는 범주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범주 개념에 입각하여 기의 변화와 운동 법칙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음양은 천지(天地), 부모(父母), 열한(熱寒), 청탁(淸濁), 장부(臟腑), 수화(水火), 주야(晝夜) 등 대립적인 사물, 성질, 경향, 특성을 의미한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음양이라는 두가지 기(氣)의 대립과 통합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오행은 수, 목, 화, 금, 토의 상극(相克)과 상생(相生)을 통해서 사물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한다. 상생은 사물을 변화 발생시키는 것이고 상극은 사물의 변화와 발생을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극은 목극토(木克土), 토극금(土克水),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 등의 서로 거스르는 관계를 나타내며, 상생은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등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氣)나 음양, 오행 등의 개념을 우리의 세계관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단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여 세계관을 전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사용해서 형성된 사상 체계가 성경적 권위와 세계관에 도전한다는데 있다. 우리는 기 사상이 전개되면서 풍수지리, 점성술, 운명술, 신선술 등 성경이 금하는 것을 배태시킨 것을 본다. 그러므로 혹시 기, 음양, 오행 등의 개념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검으로써 잘못된 사상들과 이 개념들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야 한다. 만일 기의 개념적 성격상, 성경이 금하는 이러한 술수들(術數)과 불가피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기 개념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공과 초능력
기공은 원래 도교(道敎)에서 사용하는 수련법의 일종으로서 도인(導引), 토납(吐納), 행기(行氣), 포기(布氣), 내단(內丹)이라고도 한다. 기공이라는 말은 청대 말(淸代末) 무도가(武道家)의 일부에서 사용하였는데, 1956년 하북성 북대하(北戴河)에 기공요양원을 연 유귀진(劉貴珍)이 고전(古典)에 나와 있는 많은 용어를 조사한 뒤 새로이 학술용어로 정한 것이라 한다.
기공은 크게 경기공(硬氣功)과 연기공(軟氣功)으로 나눈다. 경기공은 무술기공으로서 기를 단련하여 초인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다. 연기공은 의료적인 기공으로서 기를 가다듬어 병을 고치거나 건강을 촉진시키고,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다. 연기공은 내기공(內氣功)과 외기공(外氣功)으로 나누어지는데 내기공은 자기 내부에서 기를 돌리는 것이고 외기공은 자신의 기를 몸 밖으로 방사하여 타인을 치료하는 것이다. 경기공이 생체 에너지로써 물질 에너지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연기공은 정신 에너지로써 생체 에너지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공은 초능력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초능력을 특이공능(特異功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초능력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같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왜 초능력을 개발하고 활용하고자 하는가의 문제이다.

초능력 신봉자들은 모든 인간에게 신적(神的)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도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신적 능력의 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초능력이 모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초능력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여부조차 논란이 될 정도로 은폐되어 있다면, 거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기공 외에도 선이나 요가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초능력자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림이나 환각, 망상, 자살, 불안, 의심, 수면장애, 우울, 공포, 주의불능 등 정신질환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소위 "초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담은 모든 다른 피조물을 관찰하고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직통으로 교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타락한 죄인이 초능력을 가지고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마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초능력을 갖는 것은 마치 극악무도한 범법자가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약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강하게 되기를 갈망한다. 초능력은 강해지기를 원하고 세상의 고통을 부정하기 원하는 인간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능력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이 곧 신적 존재"라는 생각에 젖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잠재된 초능력을 개발한 초인(超人)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물론 성경은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고 있었고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므로 어쩌면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 가졌던 모든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와 대결했던 애굽 술객들의 능력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능력을 능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출8:18,19), 예수의 기적에는 초능력자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즉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초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한해 놓으신 것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사단에게 속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단의 힘을 빌어서 초능력을 구하는 것이 된다. 사단은 호기심 많고 연약한 인간에게 초능력을 경험케 하는 미끼를 던지면서 서서히 자신의 올무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실제로 초능력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초혼(招魂)과 같은 심령술이나 점성술 등을 지지하고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초혼, 점성술 등을 하나님이 어떻게 엄격히 금하였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신18:10-11, 17:3, 4:19, 사47:13-14)

물론 초능력을 현상을 소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초능력이 반드시 심령술 등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氣) 사상의 체계에 따른다 해도 초능력과 심령술은 서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는 귀신도 일종의 기로 된 존재이며, 따라서 기를 흡입하는 기공이나 단전호흡의 수행 과정 중에 귀신이 들락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공의 수행을 통한 초능력 현상에는 신접, 혹은 귀신들림의 현상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사단과 귀신들이 있다. 사단은 인간이 성공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단은 결코 아무런 댓가 없이 우리가 초능력을 갖도록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사단의 잔당까지 완전히 결박하고, 우리의 육신이 영광스럽게 변하여(빌3:21) 영생을 누리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마 그 때에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능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화된 육신과 소위 "초능력"을 갖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능력의 추구는 '인간은 모두 죄인'(롬3:23)이라는 사실로 부터 '인간은 모두 신적 존재'(창3:5)라고 하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돌린다. 초능력의 체험은 사람들을 교만과 죄악에 붙잡아 놓고, 결국은 죄사함과 구원을 얻지 못하는 길로 인도한다.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단(丹)과 선(仙)
단전호흡은 원래 도교(道敎)의 단정파(丹鼎派)에서 말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양생술(養生術)의 하나였다. 단정파는 한나라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유황, 수은, 등 약물을 화롯불에 주련하여 만든 단사(丹砂)를 복용함으로써 장생하고 나아가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외편(外篇)에는 단(丹)을 만드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포박자에서는 구전금단(九轉金丹)이라는 단약을 먹으면 하늘을 날으는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금을 체내에서 축적함으로써, 몸의 노화를 막아 장수하고 나아가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수은 중독과 같은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에 점차 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체내의 단전(丹田)이라는 곳에 외부에서 끌어당긴 기를 쌓고 정(精), 기(氣), 신(神)을 길러서 장생 불사의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한말(漢末)의 위백양(魏伯陽)은 전자를 외단법(外丹法), 후자를 내단법(內丹法)이라고 구분하였다. 이 내단법은 태식(胎息), 토납(吐納), 도인(導引)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식물(食物)을 주셨으며(창1:30, 2:16, 3:19, 9:3),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체를 유지하거나 연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음식물 외에 다른 생체 에너지를 흡입할 필요가 없다.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시 영생을 약속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욕심을 내어 스스로 영원히 살기 위해서 우주의 기, 즉 소위 "생체 에너지"를 흡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성경은 이처럼 인간적 방법으로 영생하는 길을 하나님이 막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은 원죄를 가지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지 단순히 인간이 영원히 사는 것에 배가 아파서 그러셨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먼저 처리되지 않고 영생하는 것은 영원한 재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영생할 수도 없고 영생해서도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영생의 길이 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만일 죄 문제의 해결 없이 영생을 추구한다면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이며, 결국은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이 영원히 살기 위하여 단약(丹藥)을 복용하다가 오히려 수은 중독으로 단명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의학이 나갈 방향
기 사상들 가운데 가장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인간의 생활에 도움을 주어왔던 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한의학은 인간을 대우주에 상응하는 소우주로 간주하는 유기체론에 입각해 있으며 국부(局部)적 해부학의 발전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과는 다른 발달의 경로를 거쳐왔다. 물론 한의학도 수많은 임상(臨床)경험을 통해서 형성되었겠지만 이론적으로는 기와 그 범주 개념인 음양, 오행의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한의학은 단지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한의학은 경험과학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서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서양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의학의 형이상학적 특성으로 인하여 한의학이 자연과학적 실증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저해되어 왔고, 따라서 과학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서양의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은 치우친 감이 있다. 사실 한의학은 서양의학에 못지 않은 풍부한 임상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의학에서는 인체 내에 기가 흐르는 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곧 경락이라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경락의 이상을 질병의 본질로 보며 경락의 이상 상태를 개선하는 것을 치료로 간주한다. 경락은 침구의학의 토대이며, 침과 뜸은 경락의 이상 상태를 개선하는 방법이다. 한의학에서는 내장의 생리와 병리는 항상 경락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외부의 변화와 영향은 항상 경락을 통하여 내장에 전달된다고 본다.
한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이 신체 외부의 기와 신체 내부의 기가 감응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나쁜 기(氣), 즉 외사(外邪)가 몸 속에 침입하여 음양이 평형된 올바른 기의 운행을 저해함으로써 병이 발생한다고 본다. 내부의 원인으로 인하여 올바른 기가 결핍된 상태를 '허'(虛)라고 하는데 이때 외사가 침범하면 병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허할 때에는 기를 보강해 주는데 이를 '보'(補)라고 한다. 또 몸 안에서 올바른 기가 외사(外邪)와 저항하는 것을 '실'(實)이라 한다. 이 때에는 외사를 쫓아내는데 이것을 '사'(瀉)라고 한다. 그러나 내부에 허사(虛邪)가 없으면 외사(外邪)와 감응하지 않아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의학의 의서(醫書)이면서 도교의 고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기(氣)가 막히는 것이 병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간주된다. 그리하여 양생(養生)의 방법으로서 호흡법, 즉 정기(精氣)를 몸 안으로 모아들여 몸 속에서 빠짐없이 돌리는 "도인행기"(導引行氣)의 방법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한의학은 단순히 의학에 머물지 않고 도교류의 단전호흡술 및 신선술 등과 연결된다. 그러나 설령 기(氣)가 실재하고 체내에 기의 통로인 경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우주의 기를 끌어당겨(導引) 신선(神仙)을 추구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의학은 기 사상과 연관되어 있는 신비주의와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면 안된다. 한의학은 결단코 경험의학으로 남아야지 소위 "도"(道)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비술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생명의 길은
우리는 어떠한 인간적 노력이나 도(道) 닦는 수련을 통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인의 상태로 영생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창3:24)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2023/05/03

Amazon.co.jp: いつでも死ねる: 帯津良一: Japanese Books

 いつでも死ねる (幻冬舎単行本) eBook : 帯津良一: Japanese Books 

언제든지 죽는다 (환동사 단행본) Kindle Edition
오츠 료이치 (작가) 형식: 킨들 에디션


별 5개 중 3.8개 37 등급

”상식의 두근두근”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심하지 않는」 것. 암 치료의 명의가 진행하는 인생의 극의.

【제1장】좌절을 아는 사람일수록, 오와의 꽃을 피우는 ◎좌절은 보물. 사람의 고통을 아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외 
【제2장】 포기하지 않는, 고집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죽는다」각오가, 살 수 있는 힘을 강하게 한다. 그 외 
【제3장】날마다, 설레게 사는 ◎약점을 드러내면, 자신이나 주위의 상황이 바뀌어 온다. 그 외 
【제4장】 능숙하게 사랑하는 「멋진 사람」◎모든 곤란은, 자신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그 외 
【제5장】린으로서 늙은◎ 때에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인생이 잘 되기도 한다.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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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설명

내용(「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좌절해도 좋다. 불안정하고 좋다. 무섭고 좋다. 그래도 사람은 린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50 년 이상 암 치료의 최전선에서 "생명"과 마주 온 명의 가 전수 하는 ,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해지는 삶의 극의 !
저자 정보
의학 박사. 오오츠 산케이 병원 명예 원장. 1936년 사이타마현 출생. 도쿄 대학 의학부 졸업 후, 동대 병원 제3 외과, 도립 고마고메 병원 외과 등으로 암을 치료. 1982년, 카와고에시에 오오츠 산케이 병원을 개설. --This text refers to the tankobon_hardcover edition.

저자 약력 ( "BOOK 저자 소개 정보"에서)
오오츠 / 료이치
의학 박사. 오오츠 산케이 병원 명예 원장. 일본 홀리스틱 의학 협회 회장. 일본 동종 요법 의학회 이사장 등을 겸무. 홀리스틱 의학의 첫 번째 사람. 1936년 사이타마현 출생. 도쿄 대학 의학부 졸업 후, 동대 병원 제3 외과, 도립 고마고메 병원 외과 등으로, 암을 치료. 1982년에 한방과 침구, 기공 등의 중국 의학도 도입한 치료를 하기 위해 향리·가와고에시에 오오츠 산케이 병원을 개설. TV의 건강 프로그램, 전국에서의 강연, 강의, 집필에서도 정력적으로 활약. 저서 다수 (본 데이터는 이 책이 간행된 당시에 게재된 것입니다) --This text refers to the tankobon_hardcover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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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세부 정보
ASIN : B073WV8C3H
Publisher ‏ : ‎환동사 (July 25, 2017)
발행일 : 2017년 07월 25일

인쇄 길이 : 151 페이지Amazon Bestseller: Kindle Store에서 #75,924 ( Kindle Store에서 상위 100위 참조 )삶의 이론 449위
철학 부문 1,490위 (Kindle Store)고객 리뷰:
별 5개 중 3.8개 37 등급



겐 엄마

별 5개 중 5.0개 나를 구해준 책! !작성일: 2022년 12월 10일 일본
확인된 구매

굉장히 우울해 괴로웠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제목에 끌려(이 제목에 끌린 자신의 정신 상태는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것입니다. 도서관 쪽이 내밀렸을 때, 역시 빌리는 것을 그만둘까 헤매었습니다. 그런데 목차를 보면 긍정적인 것뿐. . 문장도 읽기 쉽고 무엇보다 저자의 따뜻함이 전해져 왔습니다. 울의 약을 마셔도 개선되지 않았던 내 마음을 구해준 책입니다. 이번에, 고민하고 있는 지인이 조금이라도 건강해져 주셨으면 하고 선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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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고객

별 5개 중 3.0개 메인 테마는 자기 긍정작성일: 2020년 11월 3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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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에서는 철학적인 내용을 연상하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읽어 보면 인생에 대한 부드럽게 낙관적인 사고가 계속되고 있는 지남서였습니다. 쉬운 문장으로 단번에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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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고객

별 5개 중 4.0개 언제든지 죽는 각오로, 날마다 힘껏 살아간다는 것일까.작성일: 2018년 8월 8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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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영적이지만 매우 자유롭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생과 죽음을 의식해 살고 있다고 굉장하네요. 저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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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 남성

별 5개 중 5.0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작성일: 2019년 10월 25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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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읽기 쉽고, 그래서 마음에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을 설레고 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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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다

별 5개 중 5.0개 제목보다 부드러운 내용2018년 7월 30일 일본에서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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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죽음과 마주해 왔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단지 저자의 업무, 건에 특화하고 있거나, 개인적 생각에 치우친 곳도 있을까라고 느꼈다고 본문에 비해 후기가 어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긍정적인 소중한 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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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남편

별 5개 중 5.0개 삶의 팁2017년 8월 5일 일본에서 검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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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건강 진단 결과가 나쁘고, 앞으로 의사에게 가기 전에 읽었습니다. 앞으로의 자신의 삶이 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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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고객

별 5개 중 1.0개 저자 처지에서 설득력을 느끼지 않는다2017년 8월 19일 일본에서 검토됨

오오츠 씨는 다른 책에서도 일부이지만 같은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읽고 나서 구입해도 좋을까 생각합니다.

돈, 지위, 명예, 인간 관계의 거의 모든 것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질의 식사, 의료를 언제든지 받는다. 그렇게 매우 축복받은 분이 언제든지 죽으면 조언받아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오오츠씨의 병원은 건 전체에서 보면 매우 소수입니다. 요 전날 죽은 의사, 히노하라 씨는 죽어가는 분들의 전문 병원을 만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설득력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타치바나 타카시씨는 죽음을
과학적으로, 다각적, 본질적으로 저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옵션에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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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동양포럼 김태창 노철개벽 일기 / 10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4 |: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6.07 21:08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24 20:17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1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5.10 19:4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26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9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4.12 20:1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8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3.22 19:28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7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20.01.12 20:07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6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22 19:26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5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2.08 20:33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4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24 19:56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3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1.10 21:12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2 이미지기사 동양포럼 동양일보 2019.10.27 20:12

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으로 철학하는 나날1


동양포럼 노철개벽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 10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20.04.26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9월 7일 토요일

나는 문재인과 그의 정치적 동지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남북통일이라는 구실로, 무조건 아부하는 태도가 역겨운데, 북한 쪽의 오만과 대응이 반감을 증폭시킨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당시에는 6.25남침이라고 불렀다.─ 때 피난을 못가서, 반년 정도 북한 지배하의 생활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아도 입만 열면 이데올로기 타령을 하고, 과격한 선전 선동에 신물이 나는 나날이었다. 지금 TV 화면을 통해서 보는 오늘의 북한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국은 자주 동서남북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고, 교수・ 학자들이나 관료들과 공공철학의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다언무실(多言無實=말은 많은데 내용이 없다)이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소감이다. 자기주장만 장황한 반면 남의 말을 경청하려는 자세가 미흡하다. 러시아는 과거의 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에는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현재의 러시아에는 몇 번을 가보았으나, 전연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문재인 정권과는 국제 감각이 아주 다른 것 같다.



9월 8일 일요일

나는 문재인 정권이 언제나 어디서나 소리 높여 강조하는 공명・공정・정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 가치를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수용할 수 없다. 문재인이 주장하는 바를 잘 살펴보면 정의를 전적으로 공권력=국가권력의 행사를 통하여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독재=정의가치 실현을 위한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은 정의는 개개인의 자유(自由)와 자성(自省)과 자제(自制)가 그 기본전제가 될 때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적 사태발전 때문에 개개인의 자유와 자성과 자제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게 될 때에 한해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법적 절차에 따라서 적절하게 대처하여야 하는 것이다.

공권력의 행사는 집권세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행사되면 사권력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공권력은 자의적인 인치(人治)의 위험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법치(法治)의 원칙을 충실하게 준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는 이러한 의미의 법치감각이 희박한 것 같다.



9월 9일 월요일

조동삼 교수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준 이원오의 ‘황혼(黃昏)-3’이라는 시(詩)가 마음에 든다.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이 않고

方向感覺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질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不安한 마음에

멍하니 窓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好奇心과 希望이 있었고

젊어서는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팡이가 切實하고

애틋한 親舊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보면

或是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老慾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봅니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所望하면서

黃昏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丹楓처럼

해돋이보다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9월 10일 화요일

외국에 와 있는데도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보통사람의 상식적 판단과 너무나 어긋나기 때문에, 국내외의 조롱과 비아양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나라사랑이 입은 상처가 심하게 아리다.

온갖 비리와 부정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을, 절대적 다수의 반대를 묵살하고 법무장권에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국민이 극심하게 분노하고 있다. 대한민국 ‘法務部’가 무법자의 장관임명으로 말미암아 ‘法無部’로 전락되고 말았다는 데에 대한 분격이다.

법질서 위반자를 법질서에 따라 심판대에 세우는 일은 검찰총장의 몫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겪게 되는 비상사태가 발생되었다. 현역 법무장관이 현역 검찰총장과 정면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조국과 절대로 갈라질 수 없는 아주 특수한 공동이해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합리적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능력과 책임수행 여부가 우리 모두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9월 11일 수요일

일본인의 한국 인식은 원래 별로 좋지 않다. 배용준・최지우 주연의 ‘겨울연가’라는 드라마가 한때 일본 여성들의 뜨거운 열중물입으로 한일관계와 대 한국인식을 상당한 정도까지 개선시켰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천황이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이 있을 후에, 급격히 냉각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비우호적 대일 태도 때문에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미국의 끈질긴 종용에 의해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국가가 기본양해가 이루어져 약간의 호전을 보이는가 싶었는데, 문재인 정권의 극단적인 반일감정 외교로 인해서 더 이상의 우호국이 아닌 적대국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한국을 비아냥하고 비판・ 매도・ 악담・ 냉소・ 무시・ 경멸하는 책자도 많이 나왔고, 잡지나 주간지의 기사도 넘쳐난다. 염한・ 반한을 쓴 것이면 무조건 잘 팔린다는 출판사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근의 염한론의 홍수는 비정상적이다.



9월 12일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우메다 3번가 17층의 우메노마라는 일식식당에서, 후지가미 회장, 우에모토씨, 야마모토 사장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 담소하였다. 우선 토비오카 켄씨를 만나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는 데에 대하여, 나도 그분에게는 도움을 많이 받았고 배운 바도 많았던 잊을 수 없는 일본인의 한 사람이라고 호응했다.

코마쓰시와 코마니 회사의 협력 사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국제도시 코마쓰 10년 계획이 양쪽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추진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노년철학과 제론토피아 구상도 포함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도 있었다.

야마모토 사장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미래공창신문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데 공감을 나누었다.

노년철학 대화모임을 확장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방자치단체들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구체적인 협조방안을 강구해 보겠다는 말도 있었다.



9월 13일 금요일

일본에 있는 동안에 즐길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에 신선한 여러 종류의 야채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소금버터식빵, 치즈, 소시지, 그리고 밀크 티가 모두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맛이 있다. 양질의 마도 갈아먹는데, 모든 것이 선도가 높고 가격이 저렴하다. 한국보다 싸다.

점심에는 연어, 고등어, 가자미, 도미가 맛있게 구어 포장된 것도 그냥 사다 먹으면 되는데, 내 입맛에 딱 맞는다. 시금치나 무나, 특히 양배추와 두부를 넣어서 만든 된장국이 구미를 돋운다. 낫또와 일본간장의 배합, 거기에 약간의 와사비를 섰으면 그야말로 진미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모즈크라는 해산물이 있는데, 그것도 나는 좋아한다.

저녁에는 가볍게 소화 잘되는 것을 먹는데, 우메보시나, 쓰케모노류를 발효보리를 섞은 밥과 함께 먹는다. 식사 때마다 식후에 아마자케(甘酒)와 요캉(羊羹)을 먹는데, 한국의 감주나 식혜 그리고 양갱과는 아주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일본 것이 더 맛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있을 때는 일본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먹고, 한국에 가면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먹는다.



9월 14일 토요일

오사카의 우리 집은 작은 아파트지만 살기에 편안하고, 여러 모로 편리해서 좋다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전차역이 걸어서 2분 정도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온갖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갖춘 슈퍼마켓이 여러 곳에 있으며, 다양한 전문분야의 병원이나 진료소, 약국 그리고 나이 들면 때때로 찾게 되는 정골원, 지압과 안마와 침구의 시술소 등등이 모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특히 내게는 그 어느 것보다 꼭 있어야 되는 크고 작은 서점들이 가까이 있어서 아주 좋다. 그때그때의 신간서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서점에서 점검할 수 있고, 더 깊고 넓은 정보, 지식, 지혜를 위해서는 전차 타고 15분 정도를 가면 규모가 크고 구색도 충실한 대형서점이 여러 개가 있어서, 한 바퀴를 돌아보고 오는 것도 힘은 들지만 내게 있어서는 더 없이 행복한 일과가 된다.

세계에 여러 나라들의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지만, 언제나 제일 먼저 찾는 곳은 예외 없이 서점이었다. 서점이 없는 도시는 내게는 사막처럼 느껴진다. 좋은 서점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었다.



9월 15일 일요일

오사카의 우리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조촐한 행복은 아침 일찍─계절마다 다르지만, 요즘은 오전 5시 30분에서 6시 사이─ 일어나 세수, 세면, 세족, 세심을 마치고, 왕복 1km의 오솔길을 걷는 것이다. 한쪽에는 넉넉한 흐름이 심신을 정화시켜주는 강이 있고, 또 한쪽에는 곳에 따라 키 작은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혼과 영을 미화시켜주는 강변의 소로다. 길은 더 멀리까지 펼쳐 있지만 내 체력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500미터를 돌아온다. 아침걷기를 하는 동안에 하루를 시작하는 몸과 마음과 얼을 정리하는 귀중한 1시간이다.

젊은 남녀, 중년의 남녀, 그리고 노년의 남녀가 한결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산책하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더러는 인사말을 나누고, 더러는 말없이 목례를 나누고, 더러는 그냥 조용히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모두가 이른 아침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청신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고 심・신・혼을 말끔히 정화시키는 것 같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기쁨이 불특정다수 타자들의 기쁨과 어우러지는 묘미를 충분히 음미하는 철학의 오솔길이 바로 가까이 있어서 오사카의 우리 집이 좋다.



9월 16일 월요일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에 상관없이 새벽 3시 전후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올리브유로 입안 청소를 하고─25분간─, 양치를 하고 온수(+레몬즙) 두 컵을 마신다. 1시간 후에 계피+생강+코코아+레몬+오리고당차. 또 1시간 뒤에 프로바이오틱스 한 알. 세수, 세면, 세심을 통하여 심・신・혼을 세척한다. 평균 3회 배변과 배뇨.

말끔히 비워진 몸과 마음과 얼에 새날의 새 공기를 한껏 채우고, 낡고 상한 공기를 남김없이 밖으로 내보내는 나 나름의 호흡조절운동을 한다. 험한 날이면 방안에서, 그러나 웬만한 날씨면 되도록 밖에 나가서 바깥공기를 호흡하도록 한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초미세먼지와 공기의 질 좋다, 보통이다, 나쁘다는 둥의 기상정보를 일일이 확인해야하기 때문에 대단히 번거롭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걱정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하루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오늘 오후 7시 50분발 제주항공 편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는 한국 나름의 삶을 통해서 노년철학 대화를 계속한다. 한국에서 찾는 행복은 일본에서 찾는 행복과 같을 수는 없지 않는가?



9월 17일 화요일

다시 한국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새벽 2시 40분 잠에서 깨었다. 이것은 오늘의 아침을 나열한 것이지만 보통 매일 나의 아침은 이런 루틴으로 시작된다.

깊은 심호흡으로 하루 시작─내장 깊숙한 곳까지 새 공기가 들어가서 묵은 공기를 밀어내고 내장 안팎의 공기순환을 열 번 반복한 다음, 스트레칭─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시에 움직이고 밤새 굳어진 것을 연화시키며 허리를 좌우로 흔들고 팔다리를 위로 펼쳐 올렸다 내렸다 열 번씩 되풀이했다.

그러고 나서 기상!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로 입안을 청소, 소금으로 양치, 곧바로 섭씨 60도의 온수+레몬즙 두컵, 내장상태에따라 3~4회 배변과 배뇨, 몸안과 마음속을 말끔히 비우고 씻어내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면) 계피가루+생강+코코아가루+레몬즙+올리고당을 섞어 만든 계피차 한컵을 마시고 40분 정도의 신문, 유튜브, TV, 프로바이오틱스 한알

오전 6시 오늘은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상태가 좋고 맑은 날씨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집밖으로 나가 1 km정도의 아침산책 후, 샤워하거나 세수, 세면, 세족을 끝내고 세심(마음을 씻음)

오전 7시 요쿠르트+견과류+사과 반쪽

오전 7시 30분 기주떡 한조각+야채+식혜 한컵

85세의 내게 있어서 하루의 시작은 다소 복잡하고 주의 깊은 매일 진행되는 루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병원신세 안지고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현재의 노년기 문제인 배변과 배뇨의 이중 장애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양생실천이고 천천히 좋아지는 것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부작용 없이 노년철학대화활동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이 소박한 일상의 행복이며, 이런 삶을 오늘 이 순간까지 이어오게 된 것에 그저 감사 할 따름이다.


2023/03/09

** 수도원리, 방법, 계제의미 & 국내외 도의 단계 - 자천의학

수도원리, 방법, 계제의미 & 국내외 도의 단계 - 카페 이용하기 - 자천의학

수도원리, 방법, 계제의미 & 국내외 도의 단계
작약 12.05.24 
1,507


하늘공부하기


우리는 자천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이미 자천하고 있기 때문이죠
자천이란 수도나 수련, 수행을 말하는데 제가 나름으로 생각한 것이 었어서 굳이
자천이라고 말을 만들었어요
이말은 내가 나를 하늘이 되게 해야하고 또 다른 사람과 삼라만상들도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수도라는 것이 자기 돌봄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자기를 돌보는 것이죠 누구도 나를 돌보지 못해요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돌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아, 즉 삶의 궁극적인 측면을 말해요. 우리는
결국은 혼자라는 고독을 떨쳐버리지 못해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각을 하자마자 외로움의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데 이런한
내면의 심리적 고통을 타인이나 외부의 사물에서 위로를 받으려 다가는 근본적 해결은 아님을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나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해결도 내가 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이 세상에 생존하는 과정중에 첫 시험이면서 첫 관문이 바로 이
시점이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이고 압도적 자아발견의 성장이면서 그 한계와
두려움도 함께 알게 되어요

이것이 인도나 불교등에서 말하는 고통의 시작이며 원인일 거에요
생로병사가 고라고 했지만 이 말이 생로병사 자체가 고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내 자아의 삶의 고됨을 말하는 것이에요
생로병사가 있든 없든 뭐가 문제에요 다만 내가 그것을 겪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니 이 자신의 발견에서 죽는 것과 삶의 역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개인적
처지를 힘겨워 하는거죠 그래서 이 자아를 고집하고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세상은 고통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나친 자아집착을 풀고 여유를 가지고 넓고 현명한 판단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가지 더 말해보면 굳이 내가 겪는 외로움과 생로병사나 인생의
역경을 고라고 할 필요는 없어요 이런 것이 힘듬이고 고통인 것은 맞지만 이렇게
고통을 고통이라고, 힘듬을 힘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힘듬과 고통과 내가 그것을 세상이나 삶이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구분할수 있어요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힘들기도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지나가요
생각해보면 이런 감정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런 변화를 지켜보는 또 다른 감정도
있어서 어떤 것이 자아인지 의아스럽기도 해요
여기까지 알면 자천이 상당히 되엇다고 하죠
나라고 말을 강조한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고 나로인해 성취되는 시종일관 나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요

하늘이라는 것은 신이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신이나 하느님이 되는
을 말한다고 해도 될 거에요 
이때 신이 된다는 것은 그 무소부지나 전지전능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세우고, 
세운 뜻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그 자존을 말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늘이란 독각자인데 홀로 깨우친 자입니다.
혼자 스승이나 도움 없이 깨우친 것이 아니라 아까 말한대로 우린 홀로 살고
홀로 수도하는 것이며 자기가 자기를 수도시키는 그것이며 스승과 도반과
주위의 여러 도움과 또 한편으론 모든 세상의 연관속에서 수도하는 것이어서 이
모두가 소중하지만 결론적으론 수도는 나의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뭘 깨우쳤냐가 또 관건이 되는데 자천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고 될것도 아니며
호흡이나 주문이나 명상이나 이런 방법적인 것을 오래한다고 될 것도 아닙니다.
자아확립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머리와 가슴과 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가치관과 윤리관,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에요
나만의 가치관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없는 가치관을 내가 새롭게 만드는
것이냐면 꼭 그럴거 까지는 없어요 해도 되지만......
근원적인 면에서는 우린 보편적으로 사람이면서 비슷한 윤리관이나 가치관이
있지만 또 제각각 나름의 것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이런 보편적인 것이든 나름의 것이든 내가
검토하고 증명하면서
자기 것으로 다시 확고히 결정해가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이란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도둑질, 강간, 살인등과 같은 것은 누구나
나쁘다고 하는 것들이고 나름의 것은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가지게 되거나 사소한 것들의 여러 차이나는 선택 들이겠죠 하지만 이렇게
단순히 쉽게 구분할 수 없는 더 많은 것과 근본적은 원리 이해와 관념규정을
해가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바로 자천 입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든 스스로 가진 가치관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심사숙고 해야 하고
비판적이고 현명한 방법을 통해야 하고 또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가치관만 고집하고 고착화하지 말고 항상 다시 검증하고 검토해서 새로운
사고나 변화에 적응 하기도 해야합니다.
정말 중요한건 윤리관이든 가치관이든 이것은 내 자아의 모습이 드러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행동, 생각이나 판단, 말과 같은 내 삶의 하나 하나가 절실하고 진지한
근원적 발현이 자아이고 가치관과 윤리가 됩니다.
이것을 알고 신중히 자기만의 여러 관점, 즉 관법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자천이고 수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고한 자기관이 있는 것이
하늘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영향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가는 것을
의미하며 또 남과 세상의 만물을 그렇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게 하는 하늘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천원리

과거부터 성명쌍수등으로 해왔는데 저는 두가지로 나누지 않고 세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성으로 머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보나 지식을 뜻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자천하기 전에 여러
전문서적들과 스승이나 선배나 도반들에게 듣고 배운것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각종 자천법들의 설명을 읽고 듣고 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두 곳이나 방법을 고집하기보다 전체적 원리와 의미파악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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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며 시일이 꽤 걸리는 것이니 쉽게 생각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자천하려고
고르지 말고 수도도 학문이고 공부이니 전문적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견성처럼 어떤 각성을 이루어지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이건
쉽지도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는 묘한 것이니 욕심 내기보다 각성의 진짜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지식을 알게 되면 정보가 하나 늘어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보는 양처럼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쌓는 것이라고 보면 지식은
사유체계 같아서 하나의 이치를 알게 되면 그 이치로 그 이전의 사유체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뛰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즉 전체 사유형태와의 관계에서
알아가는 것이 지식입니다.
이 과정이 철저할 수록 높은 지식을 얻은 것이고 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을 과거부터 신비화와 의미화 하면서 과대포장했지만 내가 변하는 것을
말하며 그중에 사고방식의 변화를 말한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은 가슴, 즉 의지와 신념과 지조같은 감정적인 작용을 말해요
우리의 학교 교육과 일상생활에서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습관
들어서 잘 이해가 안될 것인데 가슴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쩌면 생각의 강도나 깊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헐리우드 영화에 형사
가제트를 보면 과학자가 로봇발을 뇌와 연결해서 움직이는 것을 실험하는데
실패를 하다가 실수로 성공하면서 생각이 아니라 의지로 움직여야 한다고
소리지르며 좋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글자막이 그랬는데 영어의 본래
의미가 그런지는 잘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의지로 생각하거나 생활하는 것을 이해하면 쉬운데 자천을 의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내 진짜 모습이라고 전 보기 때문이며 이것이 나이니 내가
변할려면 의지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천이 이루어지면
자신이 이 가슴으로 행동하고 사유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그뿐 아니라
신이나 초월적 세계의 존재들도 이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관들이나
상위존재들의 이런 존재방식을 모르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많습니다.
무극이나 열반처럼 또는 신이나 환허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이론적 논리로 보거나 자신의 욕구불만과 고통의 해소로 보거나 권력에
소속되고 도피처로 삼으려는 공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의 실천이 배제된 공부는 결코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식으로 생각하고 우리식으로 공부하고 자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현실도피하며 자기의 안위만 위하고 초월을 추구하는
비뚤어진 심리에서 넘어 굳건하게 자기의 두발로 서고 내 손으로 할 일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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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해야할 일을 찾고 나와 인류와 세상을 위한 현명하고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었야 합니다. 이것을 목표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다른 종교나 수련법에서 말하는 것중에 자신만의 하늘이나 불성이나 신성을
다시 찾아 수도성공하라고 하며 여래가 되고 신선이 되고 뭔가 이루어 진다고
하기보다 그저 우리 민족이 고대에 꿈꾸던 나만의 거대한 내적 영토와
광활한 대지에 우뚝 서라고 하고 싶습니다. 오래사는 비열한 탐욕과
자신만 위하는 저급한 심리와 초월을 하려는 난삽한 의식에서 분연히
일어나 오직 시간적, 공간적 무한 자유와 이상을 견지하는 깊은 눈을
가지라고 하고 싶습니다.
난 배달을 말하고 한웅이나 그 이전의 사람들의 무용을 말하면서 퇴행해서
과거가 나았다고 말하기보다 앞으로 더 위대한 인물들이 이 땅 이 대지에 올
것이고 지금 이곳에서 크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말 과거에 위대했다면 그 증거를 보이세요 지금 이글을 읽는 그대가 그
웅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만큼 어두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마지막은 배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순서이고 규율입니다.
자천에도 순서가 있어서 단전이 돌고 이 돌림이 내주천이 되고 이 내주천이
중심이 서는 중맥을 열고 하늘에 이어지는 그 순서를 밟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으로 행동하고 실천적으로 사는 모든 일상이 곧 자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이 중요한데 이치를 알고 견성을 하고 인식의 확장을 했어도 이
배공부가 안되면 소용없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변하고 지식이 상승되었으면 그
지식이 몸도 변화시켜야 합니다. 관념과 몸을 따로 보는 것이 과거의 불교나
도학자들의 병폐이고 이것이 심해서 성명쌍수라는 말이 있는 거겠죠. 거기다
이상하게 수도에선 의지, 즉 마음을 중요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이부분이
없다는게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일부러 빠트린 것처럼 머리와 몸은 있는데
마음이 없어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게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성향이 있다보니 유식함이나 형이상학적 공부를 우월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 부류는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몸공부나 자기와 다르게 하는 것을
배타적으로 탄압하고 멸시하는 못된 성격도 있기도 합니다.
아직 공부가 덜 된 이런 사람이 힘과 부가 있다면 그 사회는 더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배공부가 안되면 어떤 학문과 수련과 공부도 헛된 것이 됩니다. 뭔가 이루었으면
자기 것으로 획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 작용입니다.
또 이 배공부만 하는 단전호흡이나 기수련은 근래에 일어나는 병폐입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나 관념적 이치추구도 과거나 지금이나 많은 지식인들이
가지는 흉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것인데 마음공부나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을 많이
하지만 어떻게 해야하고 무엇이 마음공부인지 가르치는 것이 없고 가르쳐도
황당할 뿐입니다.
가치판단과 의미판단과 선택은 마음이 하지 않나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차이는 마음이 만들지 않나요? 마음이 없다면 생각을
왜 하고 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한데도 수련하는분들이 왜 마음을 다루지 않고 기나 각성이나 초월적인것만
관심갖고 있을까요? 참 어이없다고 보는데 그래서 난 어떤 수련단체든 3-4단이
한계라고 봅니다. 이것도 가끔 나오는 천재들을 기준으로 한거고 대개는
단전이나 내주천이 다입니다. 내주천에서 좀더 나가면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거룩함의 교만에 빠지는 어이없는 상황이 됩니다.
설명하다보니 또 가슴공부를 말하고 있는데 배공부는 대의련법의 체법이상은
설명을 피합니다.
머리, 가슴, 배순으로 더깊고 높은 경지의 자천법이 되는 방법도 과거부터
있어왔습니다. 여기서 체법은 제욉니다. 진정한 배로하는 방법은 공개불가
입니다.
의지나 뜻이 없이 자천하는 것이 얼마나 우숩고 잘못인지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더이상 가르치기 곤란합니다. 한마디 더하면 서원 세우거나
홍익인간이나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적 환상에 빠지는건 습관적 발상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오니 또 그렇게 하라고 하니 생각없이 의무감이나 주제넘은
근거없는 망상일 뿐입니다. 진정성이나 절실함이 없이 하는 것은 차라리 안
하는만 못합니다.
사고도 미숙하고 도의 의미도 관심없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사고방식의 흐름이 반영되어서 상당히 황당한 이론과 간결함만을
추구하는 수도가 우려를 하게 합니다.
자천은 의식과 심리와 실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그 하나하나의 정확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기형적인 현상이고 성공도 보장 못합니다. 항상
명심하길 바랍니다.

자천하는 방법들

우선 의식 두는 곳부터 정해야 해요
뱀이 꼬리를 물고 도는 그림을 혹시 본적 있나요?
우라보로스뱀이라고 하는데 수미상접 시켜서 이으면 기운이 돌고 돌아 심력이
생깁니다.
심력은 의지로써 내 심지가 강화되며 살아가는데 큰힘이 됩니다. 이것이 자천의
효과입니다. 삶의 편리와 이로움을 위한 것으로 시작해서 함께사는 세상을 위한
힘과 지혜를 기르는 것입니다.
의식을 하단전에 두어서 육체와 의식을 서로 맞물리게 하는 것이며 꼬리를 무는
뱀으로 되어 돌고 도는 주천이 되는 것입니다. 
배에선 생의 운행이 그리고 내주천이 돌아갑니다.
이것이 하단전에 의식을 두는 이유이며 이 행동을 항상하고 어떤 자천에서든
기본으로 깔고 하는 기초 방법입니다.

 
하단전의 위치는 정확히 한점을 찍듯이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곳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난 별로 필요성을 모르겠어요. 그냥 털난데와 배꼽 그 중간 언저리쯤으로
어림잡아 합니다. 의식을 아랫배로 은근히 두면 됩니다.
조금은 여기에 의식을 두면서 일상생활 하는 요령도 터득해야 한다.
너무 강하게 집중하지는 말고 은근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장소에 뭉치듯이
기운을 모으거나 구슬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둥글게 말려있어
하나의 원으로 있는 것이 온전한데 이것이 팔다리로 몸이 만들어지고
길어지면서 떨어진 나머지 반을 의식으로 이어서 약해진 기운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행위이다.
이런것을 우리삶의 바탕이 되도록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토대위에 반성이나 뉘우침과 회개나 참회를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사건과 과거의 잘못만 되새기며 따지고 후회하지 말고 이렇게 자기의 내면도
같이 보면서 합니다.
물론 좋을때나 기쁠때 내가 자랑스러울때 뿌듯할때 등등의 긍정적인 마음에서도
자기의 내면을 보면서 활력을 상승시키면 됩니다.
또 겸손과 수치심과 양심이 이러한 내면의 흐름을 기초로 해서 항상 나를 보고
나를 이해하는 와중에 생기는 바른 마음입니다.
남을 보고 비교하면서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이기려고 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고 비추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규율이며 마음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자신을 바르고 힘있고 능동적으로 생활해가는 적극적인
활동의 바탕이 되게 해야 합니다. 너무 수동적이고 나만 바라보는 것에서 밖으로
나가고 보고 이해하면서 내 의지를 보이고 관철해가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사유하고 현명한 판단을 위한 지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학문과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독맥과 임맥의 운행을
강화합니다.
이 주천이 일어나고 힘이 있으면 내 의지가 강화되고 옳은 길을 가기위한 뜻을
세움에 뒤받침 됩니다. 멀고 힘든일도 헤쳐나가고 굳은 결의가 있어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요
과거엔 무릎을 꿇고 앉게 하는 공부가 있었습니다. 훈계하기 위해, 꾸지람과
기죽이는 잘못된 이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훈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를 위한 나쁜 의도로 사용할 뿐 진짜의미나 순수한 훈계는 별로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더 그렇습니다.
무릎을 끓고 앉으면 단전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대맥이 돌고 독맥으로 흘러
임맥으로 돌아와 내주천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아이나 인간의 성장을 위한 이유로 이렇게 앉게 하였던 것입니다.
알려주려면 알고 해햐 겠지요 두발의 엄지 발가락이 닿듯이 해서 앉고 손을
합장해서 허벅지 사이에 둡니다. 너무 꽉 손바닥을 붙이지는 않아도 되고 또
붙여도 되고 꼭 손끝은 붙입니다.
더하고 오래하며 자천된다고 믿으면 중맥과 전신으로도 주천 됩니다.
자세가 발이 아프고 불편할 수 있으니 짧게 자주 앉는 방법을 해보심이
좋을듯하고 방석이나 두꺼운 이불을 깔고 하면 더 나을거에요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복종과 비굴이 아니라 자신의 웅지를 강화하는 바른
자세였던 것입니다.
함부로 무릎 꿇게 하면서 훈계하지 말고 그 뜻을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자천법중에 호흡을 하는 이유는 호흡은 육체적 단련이라 몸이 따뜻해지고
혈액순환과 생리활동이 좋아져서 건강해지고 몸이 편해지니 마음도
부드러워진다.
항상 육체와 연관 해서 단련하니 집중의 요령이 생겨 조절을 하기 쉬워 육체나
마음, 정신의 제어가 다른 자천법보다 수월하고 특별한 것이 있게 된다. 저는
자기호흡을 하라고 하는데 방법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주문을 하는 경우엔 집중적인 수도 방법이고 마음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
강력하고 본의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자기가 원하는 그
수도의 종류나 목적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봅니다.
다음은 명상인데 방법이 편하고 따로 해야 하거나 신경쓸일이 없어 저는
좋아합니다. 그리고 삼매나 선정에 들어가는 상태와 제일 비슷해서 선정을
유도하기 쉽고 명상자체가 선정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자천법들은 제각각 특성과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해보고 자기가 원하고 해야 할거라고 생각하면 하면됩니다.
시킨대로나 이유나 원리 생각없이 하면 안되고 자신의 책임과 선택에 따라 하고
학교 교육처럼 선생님이 일일이 가르치고 준비된 과정이나 학습방법이 정해진
것이 아니니 이런것도 생각하면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가기를 바랍니다.
여러 자천법들을 하는 것과 동시에 지혜 자천법으로 학문과 다양한 지식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며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방법까지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즉 통찰력을 얻고 지혜를 가지며 실천하는 덕으로 나가야 합니다.
또 자천하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현상들의 변화와
체험들의 해석과 의미 이해를 위해 또다시 책을 보고 사유하면서 자신을
이해하기위해 자천을 이해하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경우 자천 체험들이 항상 모든 원인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고
확정 지어 지식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섣불리 답을 찾아 일반화
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이해를 위해 열어두고 관심 갖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적성찰이 자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말해야 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가르쳐야 하며 사회에서 행하거나 실천하기 위해서 그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하기위한 것이며 또 그러면서 다시 되돌아와 내관하며 나를
성장시키고 성장된 만큼 세상에 돌려주기위해 방법을 찾고 의미를 알기위한
것입니다.

다음은 뜻입니다.
자천에 시작 할 때 제일 처음 해야하고 또 끝까지 해가야 하는 것이 이 뜻을 세우
고 관철하기 위한
인내와 노력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이 꿈이 의지가 되며 의지를 기르고 펼쳐가는 것이
자천이 됩니다.
이러니 자천에서 뜻이 없으면 자천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 무엇 때문에..
자천을 하는지 정해야 합니다.
한번 정한다고 끝이 아니라 더 자세히 더 현실적이고 확실한 성공을 위해 계속
탐구하고 수정하면서 확고히 해갑니다.


원신(元身)

원신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야하고 구분해서 이름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헷갈리고 복잡해서 하는데
더 어렵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우리가 자연의 구성물질에서 오랜세월 지나면서 신령스러움이 서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물질이란 존재한다는 뜻이고 존재는 자신의 성장을 추구합니다.
어떤 물질도 모두 이러하니 그 안에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 내적 성숙이고
사물에서 이것이 서리는 것을 [융]이라 하고 이렇게 생긴것을 [정령]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렇게 정령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이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때
이 정령이 사람의 모습을 할때 이것을 [원신]이라고 하고 이 원신 이전의 형태는
[원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혼이나 백도 원신의 일종으로 사람의 융이 된 것입니다. 즉 사람
정령이죠
이렇게 사람으로 살아가던 원신(혼, 백)은 또 다른 성장을 하게되고 결국 자신의
존재자각을 하는데 이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입니다. 환희와 행복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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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야하는 결정적 상황인데 분명 고통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라는
것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충격 그자체 이니까요
그래서 이때 또 이후에 신이나 법이나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고 소속되려는
사람은 퇴행한거거나 도망친거거나 잘못공부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자신의 존재 자각은 이제 삶의 시작이고 이 세계에서 독립하는 그 위업을
이룬것인데 이것을 못하면 이미 끝난 것이지요 무한 자유와 무한 세계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 자각을 하고 자각한 만큼의 성장을 또 해야하는데 이것이 자천의 한
길입니다.
그렇게 자각한 몸을 만들어 내면 바른몸이 됩니다.
자각을 하면 자각한 자신의 손과 발과 몸을 확인하고 또 행동하고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른몸입니다.
이것이 생성되면 그전에 있던 혼과 백과 육체를 바른몸에 융합시키는 고통을
겪습니다.
두통, 가슴아픔, 몸살과 심리적 고통등등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이러면 온전히
바른몸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몸에서 하나의 원신이 나가는데 이 나가는 것을 새로 이름 지으면 [애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애라가 나가는 것을 자주하다보면 애라를 따라 다니고 애라를 보는
내가 있게 되는데 애라의 눈으로 보기도하고 애라를 보기도 하는데 이 또다른
보는자를 [마하]라고 합니다.
이중에 수시로 몸을 들고 나는 것과 의식적으로 하는 애라가 있는데 이 사이를
왕래하기도 합니다.
애라와 마애가 있는데 이둘의 사이를 왔다갈 수도 있습니다.
애라로 나가서 마애로 하고 난 내몸으로 돌아오거나 반대로 마애가 나가 있는데
내가 의식접촉을 해서 애라도 되기도 합니다. 애라와 마애의 차이는 간단히 내
의식이 접촉된건지 아닌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나가는 이유는 그전에는 우린 살기위해 노심초사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계획하고 불안해하며 최선의 방법과 이롭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렇게
의식적으로 하는 것에서 이제는 의식넘어에서도
이런 것을 하고 있는 마애가 있게 됩니다.
간단한 것은 미리 내가 갈 장소를 사전답사하거나 만날사람을 미리 만나보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복잡한 것이나, 내가 뜻이 있다면 그것과 관련해서 내가
앞으로 할일이나 세상의 변화에 맞게 살아
가는 많은 일을 계획합니다.
이 마애의 움직임과 하는 일을 전부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영감, 투시, 현묘한
꿈, 문득 드는 생각, 무언가 미리 느끼는 감정, 기시감,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마애의 하는 일을 감지하지만 항상 온전하게 알 수는 없는데 이건 하나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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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얼마나 자세히 알 수 있을지가 의문이고 접근 방법이나 설명하는 방법과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한 것을 내가 원하는대로만 알려는 것에서부터 이미 서로
대화가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고 나의
현재 감정과 편견이 마애의 일을 모두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며 마애도 자세히
아는 것의 필요성도 생각해야하고 마애는 뇌로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사고
방식의 차이도 있고 또 많은 힘의 균형과
운의 흐름을 전부 자세히 알기도 사실 어렵습니다. 마애라고 만능은 아니라서요
아무튼 많은 이유로 인해 마애의 일을 모두 알지 못하는것이 사실이니 그런가
하고 살뿐입니다.
수련서나 전설에서나 그리고 지금의 수도하는 사람이 본다는 또는 봤다는 것이
대개가 이 마애입니다.
어떤 이유로 제자나 사람들의 꿈이나 현실에서 보이게 하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뭔가 알려고 간 것이고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애라는 의식을 나가고 들이는 방법인데 내가 몸을 떠나서 천원계를
돌아다느며 할일을 하는 것이다. 난 육체를 가사상태로 두고 혼이 분리되는 것은
안하는데 이유는 아무때고 원할때 일상의 생활에서 자주해야하고 낮이든 밤이든
길거리든 사람을 만나는 곳이든 어디서든 해야하기 때문이며 눈뜨고 아무렇게나
해야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하는 이유는 나에게 접근하는 신관이나
어떤목적으로 오는 타존재와의 접촉을 하고 다른 존재나 기타 내가 해야할일을
하기위해서 이것을 한다.
이런것을 연습하고 자신의 영역확보와 자천에 광역구축을 해가는 것이다.

거대자아(마하라)

인간은 욕망으로 자아를 확인하고 이 욕망이 나이며 욕망을 바라보는 또다른
나도 역시 나이다. 우린 욕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욕망한다. 나는 나를
보고 또 보면서 자기의 상황을 항상 알려고 한다. 그리고 움직이고 머무는 것이
상대적이라 서로가 인지가 된다.
즉 , 욕망이 일어나면 일어나기전의 무언가가 일어나는 그 욕망을 본다.
그리고 욕망이 일어난후에 그 일어난 욕망에서 또다른 욕망이 일어나 그 이후에
일어나는 욕망을 본다. 거꾸로 그후에 일어나는 욕망이 보고 있기도 할 것이다.
가슴에서 욕망이 일어나면 머리에선 의식이 일어난다. 이것을 따로 보거나
한쪽만 보기도 하는데 우리몸은 한부위가 움직이면 온몸의 각부위는 나름으로
반복하며 같은 형상을 일으킨다.
머리에서 일어난 것은 가슴에서도 배에서도 다리나 손이나 아무데나 다
일어난다.
다만 부위적 특성이 그것을 다르게 작용할 뿐이다.

하나의 의식이나 하나의 욕망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세상엔 확실한 것은 없어보여서 자기 나름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또 욕망의 일어남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인지못하는 부분에서 또다른 작용을
하지만 이것을 알기는 어렵다.
욕망이 일어나야 내가 존재하게 된다. 욕망이 일어나지 않으며 나의 확인이
안되며 생각도 욕망이라 모든 것이 이 무언가의 일어남으로 시작한다.
일어남이 있으면 자아가 있고 없으면 없다.
그래서 자아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일어남을 느낄때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도 일어난지 모를
정도로 미세한 것도 있이며 사람마다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 누구는 약한
단계에서도 느끼지만 누구는 좀더 강력해야 느끼기도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서 욕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성향이 모두 다른 것일거다
그리고 이것은 자천을 함으로써 변형이 일어나며 좀더 미세할때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민해지는 거겠죠
하지만 욕망을 느끼기 전에도 자아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뜻이나 의지라고 한다. 목적이라고 해도 된다.
뜻은 시간을 정하는 것도 되어서 어느정도의 시간에서 나의 의지가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10년, 100년, 10000년의 의지를 정한다. 그러면 이 의지가 내가 욕망을 하지
않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그 저변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의지와
관련된 어떤 원인이 있다면 욕망으로 올라온다. 대의련법의 관찰중 시간성찰을
읽어보면 좋구요...
그리고 또 의지에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개의 의지가 있는데 그래서 항상
무언가의 욕망은 일어나게 된다. 의지가 있고 의지를 이루기위해 욕망은
일어난다.
그래서 자기의 욕구를 관찰하면서 그 욕구의 이면에 어떤 의지가 있는지 봐야
한다. 어떤 욕망이 욕망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지, 욕망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야지 진짜 관찰을 했다고 하고 자기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성이나 불성이나 순수의식이나 태허나 태극이나 우주정신이나 하는
식의 상위개념으로 한다지만 이건 지나친 일반화이고 욕망의 이면에는 나의
시간범위가 다른 또다른 욕망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의지라는 것이다. 즉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욕망이나 쉽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있고 오랜세월의 경과로 인해서 은근히 알고 있는
자기의 저변에 흐르는, 느낌은 약하지만 내인생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며
결국은 내 삶을 이끌고 있는 저력이 있는 욕망을 알게된다. 이것이 의지이다. 즉
거대의지라고 한다. 우리말로 마하라 입니다.
이것이 의지이고 뜻이며 목적을 설정하는 이유이다. 이 거대의지(마하라)는 내가
언젠가 정한 것이고 한순간의 강한 결단력으로 하거나(이게 서원이나 뜻을
정하는 것이다.) 대개는 오랜세월의 바람으로 정해진 것이다. 오랜세월의
바람은 지금 자기의 살아온 세월이나 경험에 비추어볼때 가장 바라는 소원이나
진정으로 원하는 그 무엇이 계속 내 마음속으로 침잠되며 한이 되거나 진정으로
자기의 목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이 대개는 무의식적으로 살면서
서서히 일어나는데 이것을 자천자는 자기의 관찰로 무엇이 응어리지고 있고 ,
무엇을 내가 원하고 있는지 알고 그것을
바람직하고 올바른 욕구나 의지로 변화시켜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거슬러 사유하면 내가 어떤 의지로 살고 있는지 과거, 전생에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정한 시간속에 내가 정한 공간에서 내가 정한 그 어떤 뜻을 위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은 이런 것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위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자천이며
자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뜻을 정하기이다.
이 뜻이 거대 자아가 되어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며 이뜻에 맞는 욕망이
일어나 그런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두가지가 있다 지금의 욕망을 느끼고 알고 행하는 현재적
자아이고 그리고 이렇게 긴시간의 범위을 한정하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고 있는
저변의 거대한 자아이다.
그래서 자아란 내가 정하는 것이고 정해가야하는 것이며 그안에서 나가
살아가는 바탕이 되는 것이고 나의 홀로섬이다.
그래서 전생의 의지가 지금에 이르고 미래로 이르게 될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한 의지가 앞으로의 목적이고 미래의 삶이 될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서 잠자든 기절하든 난 깨어나고
살게 되며 죽지를 못하는 것이고 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과거 어느시점에서 정한 것이다.
이 거대한 자아를 알면 그이면에 또다른 의지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의지를 정해온 시간이 다르고 또 알고 한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것도 많다. 단순의지 외에는 없는 사람이 더많기도 하다.
즉 누구를 원망하거나 뭔가 단순한 한의 욕심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뜻이라고 하기 뭐한 것이
많다. 이건 전생에 돈에 욕망을 가지고 이것을 채우는 것이 좋은거라고 강하게
생각했다면 이것이 이생의 의지가 되며 욕망의 가장 근저에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돈에 해당하는
것이 주위에 보이고 거기에 생각과 감정이 일어난다. 어떤식으로든지.. 잘살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또다른 작용이 있는 것이고 그런 어떤 성향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사람의 자아일 것이다. 사는 이유이고...
그래서 대개는 한두개의 거대의지가 전부이고 그 이면에는 내의지가 아니라
세상의 의지가 있다고 본다.
그 세상이란 자연일 수도 지구일 수도 태양계일 수도 있으리라 어디까지
내려갈수 있을지 모른다. 역시나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음미

음미라고 하니까 탐닉이 생각나는데 같은걸거에요
다만 음미는 자천법이지요
나를 관찰하는것, 보는것, 내가 나를 보는것, 무슨생각 하는지, 어떤 감정이 일어
나는지,
무슨 행동하고 있는지 이런 것을 음미해요,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음미하는 거에요
생각을 음미하고 행동을 음미하고,,,
어디까지 음미가 가능할까요? 어떤 것까지 음미가 가능하구요?
음미하면 증폭도 되요
즐거운것은 음미하면 더 즐거워지고
슬픈것은 어떨까요? 슬플때 슬픈 음악을 듣는 거 같겠죠
난 그러는데 그러면 더슬퍼서 오히려 후련해요
내가 나를 음미해요
자아나 마하라도 음미하면 좋죠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평소에 관찰하나요? 이것을 음미해보세요 생각나는
것에 따라 감정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음미하면서 따라가요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가는지 나오고 사라짐을 음미하죠 느낀다고 해도 될거에요
과장과 증폭이 되니 감정을 지연도 시켜보고 생각도 그러고
자천하면서 경험하는 여러 현상들도 음미하면서 더 증가시키고요
천부경 해설에 쓴거 처럼 일어나는 자신의 순간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의
일어나서 돌아와
사라지는 것을 차근히 음미하죠 평소에도.....
카페 이용하기
그중에 마하라를 느껴야해요
이 마하라를 음미할 수 있으면 이것이 자천이 되죠 음미가 자천이니까요
음미자천이라고 할까요
자신의 내면을 음미하면서 사는 것이니 아무때고 할 수 있죠 누구나 자기를
음미하고 탐닉하면서 즐기자나요
그럴려면 긴시간을 염두에 두고 전체적으로 음미해야죠 그러한 마하라를
음미하면 먼가 뿌듯하죠
그리고 미래의 어떤 것이 음미가 어렵거나 뭔가 잘 안되면 마하라가 없다는
것이니 그런일은 안 일어난다는 것도 되어 이런걸 음미하면서 미래를 알 수도
있죠
사실 자신의 운명과 멀고 먼 미래를 이렇게 음미하면서 가늠하는 것이죠
그리고 외부의 것도 음미하면서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나 뭐가 일어나는지 어떤
것이 다가오는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음미하죠 그것보다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음미하면서 자기
가슴으로 생각하고 알려는 그 작용입니다. 가슴으로 인지하기죠
마하라는 마음 가라앉기와도 비슷해요
가라앉은 만큼 의지를 세운것이니 그것이 마하라로 작용하겠죠
가라앉고 마음의 무게나 평온함을 음미하죠 그러면 다 된거죠 더더 실생활에서
음미를 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알겠죠
생각나는 것들...

▶ 언어와 말은 머리의 해석 작용이며 언어 이전은 가슴의 욕구가 있다.
가슴의 움직임을 머리는 언어로 해석하려한다.
즉 개념을 규정하려 한다.
인식하려 하며 명확히 하고 싶어한다.
가슴에 말로 안해도 아는 가슴으로의 교류도 있다.
전이나 직관이나 전해오는 그 감응이 있다.
가슴 이전도 있는데 몸의 반응이 있다. 다양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몸짓과 행동이
나도 모르게
일어난다.

▶ 서양식 찰학과는 달리 우리 자천학은 몸으로 직접 행동하며, 즉 자천하며
공부하는 것이다. 이성으로, 이치로, 논리로, 따져가는 것을 몸이 체득하고 이룬
상태에서 하는 것으로 몸의 진행과 이성의 진행이 비슷해야 한다. 이론만
앞서가면 오해와 알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된다.
보편개념과 본체개념도 공을 알기위한 설정이다.
공을 안다고, 한순간에 뭔가 안거 같다고 각성해도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 깨달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멀게는 아주 오래전의 자아인식을 한 이후
쌓여진 관념과 경험체계를 모두 지금 새롭게 깨우친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
너무도 오래 걸리는 것이다.
만약에 전에 주역을 공부한적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 공의 어떤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고 했을경우
다시 주역을 공부해서 그전에 인정하거나 배운 지식을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
있어야 하며 그 잘못된 부분도 알아야 한다. 즉 자신의 학문, 지식, 관점의 밑바닥부터 다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니다. 때론 그 학문자체의 한계마저도 알아야 공을
각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든 과정인데 자신이 어떤 의미체계를 자기고 있는지
알기도 힘들고 밑바닥까지 가기도 힘겹습니다. 이 기간이 평생이거나 몇생이
걸린다고 봅니다.
그리고 문제는 각성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해야 합니다. 한번 뭔가 각했다고
다 된듯이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각성할 것도 깨우칠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또다시 깨달으면
또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해야하는 반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근본부터
재구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님들은 무엇을 얼마나 깨우쳤고 또 그것을 실현시켰습니까?
저도 진행중인데 언제나 끝날런지....

▶심층의식이나 내적 깊이나 심역의 깊이가 무한히 깊어지며 영역도 무한하다.
불교의 유식학처럼 말나식이나 아뢰야식으로 근원으로 들어가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광활하고 확대되어야
할 이해불가의 세계가 끝없이 있다.

▶ 우리는 자신을 위하는 존재이고 자신을 위주로 행하는 존재이다. 나를
위함이 때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있는데 그 행위가 악이라 할 수 없고
자신의 행위만을 위하고 남의 처지를 이해못하는
배려가 부족함이 문제인데, 이것은 그 사람의 질적 낮음의 결과이다. 누구가
선함을 이해하지만 막상 행동은 그러지 못하고 행동도 그럴듯하지만 그 깊이가
다르다면 이런것도 역시 그 사람의 성숙의 문제이다. 이 성숙되어 가는 것이
생을 이어가고 수도를 하는 이유이며 방향이다.
그래서 윤회는 좋은 것이다. 내가 더 성장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을 포함한 존재들은 선이나 악으로 말할 수 없고 다만 아직
미성숙으로 인한 견해와 행동의 미치지 못함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윤회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항상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너무도
소중한 것이
자신이니 자신을 위해 항상 공부하고 노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살아가야
한다.
부족함을 알고 더 나아지려는 의지를 가져야하며 항상 부족함을 느끼니 겸허한
것이다.
이렇게 나의 성숙은 쉬지않고 매순간 이며 이렇게 성숙이 이루어지면서 내가
변해가는 것이 지식이다. 지식이란 나의 변화가 고정되는 것이다. 
이고정도 더나아질려고 하는 의지에 따라 또다른 것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보편도덕이 어려운데 우린 시작도 다르고 지금 있는 성숙의 시간적
과정의 수준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규율을 지키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규율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과 원리와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을 알려주면 하나를 겨우 알거나 그것도 모르는 경우와 둘, 셋
그이상을 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됨을 알 수
있다. 이런것은 배워서가 아니라 시간과 오랜 숙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자천하다보면 어느때인가 부터 쉽게 감정전이이지만 단순히 이런것이
아니라 머리의 의식에서 가슴의 자아로 내려오는 의식의 하강현상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글을보든 대화하든 연상하며 떠올리든 상대의 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주의점이 몇가지 있는데 느끼기전에 혹은 느끼면서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화가 났을 것이다.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즐거울 것이다. 걱정할 것이다.
등등 이런 의식적 판단을 미리 할 경우 감정전이도 왜곡되어 집니다.
내가 판단한 그것대로 감정이 전해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글이나 대화의 단어나 문맥이해로 미리 단정지어 상대를 이미 분별하는 실수를
하는 것도 됩니다.
이러면 자천자는 자신의 감정의 느낌을 더 신뢰하며 상대를 평가하고 인식하는
잘못을 하게 됩니다.
자천하는 사람이 이러면서 더 많은 오해와 편협함을 가지는데 자천의 결과로
생긴 능력으로 얻어진 정보를 지나치게 맹신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전이 같은 것도 평가하고 점검하며 합리적 판단과 소급하여 원인을 명확히
알기전에는 다만 가능성으로 아니면 판단중지를 하시길 바랍니다.
또 한편으론 사람은 감정으로나 내면에서는 여러 다양한 심리과 욕구가 오르고
내려가며 요동치고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 감정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구가
나온다고 무턱대고 행동하거나 욕구나 감정을 신뢰하고 그것이 내것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욕구도 내가 선택하고 분별하면서 그중에 옳은 방향으로 이끌거나 긍정적으로
행동하기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이 나이지만 여러 나 중에 하나이고 그중에 또다른 내가 그 여러
선택할 수 있는 욕구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것이 욕구하는 나와 선택하는
나인데 그래서 감정이 일어나도 그 감정을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즉 , 분노가 일어난다고 그 분노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전이가
있어서 상대의 감정을 그 사람의 실체라고 인정하고 선입견을 가지면 안됩니다.
다양한 시각과 접근법으로 사람을 알아가야 합니다.
이런 것은 상식인데 다만 자천하면서 감정을 조금 느끼기 시작하는 그하나로
심리적 방황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만 보다가 그 내면의 감정까지
보게되면서 그 불일치나 그 심리적 느낌 자체도
너무 힘들고 혼란이 커서 그렇습니다. 현명하게 판단하고 조심해서 인간 관계를
하기를 바랍니다. 잘못하면 외롭고 힘겨운 생이 될 수 있습니다.

▶ 객관세계는 분명 중요하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관법이 있을 뿐인데, 나도 자천하면서 또다른 객관을 타인에게 제시하는 것도
된다.
내가 살아야하고 자천으로 수도하고 덕행하는 곳이니 또 중요하다. 다만 객관도
그 무엇인가의 주관이라는 것도 있어서 어려운 뿐이다.

▶ 목적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든지 그건 살아가는 본인의 결정이니 참견할 것은 아니다.
다만 자천을 하려면 어떤식으로든 목적을 정해야한다.
그래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얼마나 했고 누구이고 왜이러는지 알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한 목적에 비추어서 자신을 이해하는 근거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내가 해야 하는 것이지 남이나 신이 할일이 아니다.
내가 나자신을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럴려면 그 의미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또 목적이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가 된다. 억지로 그럴듯하게 정하는 것은
거짓이고 대화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내면의 진짜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의 근기를 보기도 한다.

▶ 자천의 모든 진행과정 그 초월적 효과는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은 자신의
내면의 욕구와 자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진행의 더디고 빠름도 내 생각과 마음의 원인이 있고 보여지고 겪는 것들도
결국은 내 욕구의 투영일 뿐인듯 합니다. 가면 되돌아오고 또 아무리 밀고
나가고 외부로 치달아도 역시 돌아오는 곳은 내 욕망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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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보여도 내가 부른 것이고 내가 만든 상이며 그럴듯한 경험도 내가 원했고
내 심층의식의
현란한 시나리오였습니다.
수도가 더디어 고민해도 알고보면 내가 막고 있고 잘못알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오해와 무지가 진행을 못하게 한 원인이었으며 퇴보도 마찬가지로 내 욕망의
잘못인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다가오고 무엇이 느껴지는 그러한 것들도 내가 각색하고
내가 그림그리고 조합하는 나만의 무대연출인 것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뭐든지
추구해보면 내안으로 회귀하는
근원회귀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추악하고 비겁하며 음울함이 드러나는 것이라서 외부로 투
영하는 또다른
욕구이며 빠뚤어진 짓임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근원회귀는 인정하기가 너
무 어렵지만 보이는 것을 어쩌지도 못해요

결어

대의련법이나 자광신도법이나 이 글들은 지금껏 내가 나 자신을 관찰하면서 내
생각, 감정이나 행동을 연구한 것을 쓴 것입니다.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원인과
원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감정이 일어나며
그 유래는 어디까지 알 수 있고 , 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 뭘 원하나? 하는
것을 고민했구요 행동의 여파나 결과가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나오는지를 항상
알려고 했으며 이러한 나의 전체적 분석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이글을 보고 자천도 하겠지만,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구요, 즉 님은 누구 이던가요? 어떻게 하고 있던가요?
전 이러네요...


===

★ 계제의 의미_도의 각 단계적 설명 중 10단 까지

초단_기단

초단은 의미가 있다. 명부와 현문에 기록되며 수도인으로써 인정받는 것이다.
여餘기가 이루어져 단전이 확보되고 이것은 앞으로의 수도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수련을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1년이 지나면 기가된다.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기의 수준에 이른것이다.
무엇인가 내안에 들어오고 무엇인가 나가며 오고 가는 것중에 내게 필요한것을
내안에 잡아두어 몸이 전체적으로 화평해지고 우리 몸을 수련하는 몸으로
만들기위해 끊어진 기를 잇고 부족한 기를 채우는 것이다. 하단전에는 많은 길이
있는데 이것을 조화시켜 그와 같은 효과를 얻는다.
이 초단에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 견성같은 각성이다.
각성을 하면 바로 초단으로 인정받을 수 잇다. 이는 이제야 길을 잡고 해야
할바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체의 상태와 정신의 상태가 어울리며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인만큼 몸이 변하면 머리도 변하여 지적능력의 향상이 있게된다.
반대로 인지능력이 향상되면 그에 따라 몸도 변하며 또 그렇게 유도해야 한다.
가끔은 이에 만족하고 점차 퇴보를 하여 신체와 조화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서구의 인식의 확장이나 견성이면 모든것이 끝나듯이 생각하는 부류가
그것이다.
이러면 수련은 퇴보하고 명부의 등록도 취소된다. 불퇴전의 의미는 확실히
중요하다. 끝없이 긴장이 있어야 하고 깨달음에 안주해서는 안되고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에는
깨달음이 있는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원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오직 그
뿐이다.

수승화강

상부의 열이 아래로 내려와 아랫배로 가니 마음도 따라 내려간다.
발상의 전환이나 심리적 편안함같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전에 대한 많은 경험을 한다. 너무도 다양한 현상을 한두개나 몇개로 요약할
수 없다.
한 예로 보살을 보는 경험이 단전이 형성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사람도 보았다.
기수련한다고 단전에 기덩어리를 느끼듯이 하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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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어리는 물질적 개념으로 마음의 응어리처럼 뭉친 것 뿐이다.

심리전환

처음 수련할때 호흡과 주문이나 명상을 하지만 이때 사고 전환이 있습니다.
학문적인 연구나 독서나 수련에 대한 글들이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전에 모르던
것을 이해해가고 지적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를 알면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다가 비약적 이해가 오는데 이때를 인식의 확장이나 격물치지나 견성이라고
합니다.
깨우침이나 각성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견해가 넓혀지는 현상입니다.
지적추구가 재미있고 알고 싶고 하는 사람들은 빨리 오고, 억지로 하거나
학교에서 처럼하거나 의무감에서 하거나 다른 이유로 한다면 또는 너무
조급하게 이런 것을 경험하려고 한다면 더딜거라 생각합니다.
조금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될거
같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전환을 경험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하고 있었나?
이런 생각하면서 살았구나!
이럴때 화를 내는구나! 내가 너무 내 위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까지 악착같이 할 필요가 있나?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나 하는 행동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경험들이
이외에도 많겠죠
그리고 세상과의 이질적인 경험 심리적, 감정적 전환이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강하게는 세상이 일체적으로 보이며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자연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거나 정신이 나가서 돌아다닌듯한 경험, 사소한듯한 신비체험에서 확연한
신비체험, 작은 마음의 편암함에서
굉장한 황홀경까지 내가 나를 보고 남도 보고 세상도 보고 하는 신비한 듯한
체험들이 있습니다.
자천하다보면 몸사라짐이나 삼매같은 것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술이나 커피나 감기약처럼 어떤 신체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느끼며 묘한
경험도 해당합니다.
즉 자기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 상태에 접어드는 그 상황을 알아챈 것 입니다.
이렇게 감성적적인 사람이 쉽게 할 수 있을거 같은 체험도 있습니다.
물론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이거나 하는 것은 초기에 대강 구분해 본거구
나중에는 어느정도
모든 분들이 경험 할거 같습니다.

2단_광단
임독이 열려지면 2단이라 하지만 중맥이 열려야 진정한 계제로 인정한다. 이후
선계가 열리기 까지이다.
몸이 빛으로 화한다. 이는 기가 빛으로 변하게 된다.
임독맥 운행으로 몸에 있는 탁기와 독기를 빼내고 근육과 뼈, 살을 근저에서부터
재구성하여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많은 고통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며 정신적, 육체적시험, 현실 비현실의
혼란으로 사람의 근본부터 변화를 이루어간다.
포기하거나 낙오하는 사람이 많고 잘못된 길로 빠져가는 사람도 너무 많다.
포기는 아니지만 별 진전없이 다른 일거리로 외면하며 사는 사람도 많다.
진전없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의식적으로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른 사이 마음이 닫아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과 도반들의 손길이 필요하며 강한 신념과
의지가있어야 한다.
기간도 오래 걸리고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다. 또 편법이나 다른 어떤
도움으로 지나간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 단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확실하게 거치면서 힘들고 괴로워도 참고 견디며
어떤 유혹도 이겨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하늘주천을 이루고 바른몸을 이루는 것은 순서적으로 밟아가면 저절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운명적 일체로 이루어진 개인과 이 나라,
이 지구. 이 우주 전체와의 긴밀한 작용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이
단계가 중요하다, 이러한 나의 위치를 알고 때가 되고 모든
구비조건이 완비되는 것을 참고 기다리면서 희망을 갖고 자천해야 한다.
각성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결단이나 반성을 해야한다.
집착,,, 자천이나 근본에 대한 신념을 버려야한다. 이 말은 공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통적으론 언어의 한계를 알고 개념과 관념체계의 공을 알아야 한다.
즉, 과거에 역이론이나 유교나 불교나 지금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모든 학문이나
우리의 지식이 하나의 설정이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수도를
위한 안내이지 진리나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스승이나 지금 공부하는 가르침도 부정할 수 있고 이것도
방편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어리고 몰라 이런 고집이나 잘못된 신념이 없으면 천행이다.
이런것을 하지 못하면 다음단계로 가는것이 요원하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론 중맥이 열리고 시간이 흘러 몸이 변하고 적응되면 이
다음에 나를 넘어 전체와 하나되는 경험을 해가야 한다. 주위 환경과 물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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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합일, 몸사라짐, 피부호흡, 신비체험, 의식전환, 세상과 하나되기, 천인합일,
무호흡, 삼매, 무아경험, 이러한 나를 버리거나, 사라지거나, 없어지거나, 죽이는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해야한다. 이런것이 일종의 원심력으로 밖으로 퍼져가는
것이고 중맥을 중심으로 내가 외부로 확대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천자가 이 단계에서 신비한 체험이나 별별 경험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한계를 넘어 세상에, 외부에 마음을 확장하는 큰사람이 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면 구심력이 작용하여 삼단전에 단이 생겨난다. 안으로 수축하며 새로운
기의 질을 넘어간다. 이후는 기라고 안하고 '올'이라고 한다.
이렇게 원심력과 구심력이 항상 같이 작용하는 것이고 원심력을 신인합일이라고
할 수 있고
구심력을 회광반조라고 할 수 있다.

3단_공단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다.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고 방법적인 것도 아니다. 영의
무르익음과 삶의
체계, 굳은 의지, 실천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자천자체의 공부보다 오히려
자천외적인 일상적
생활이 좌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 깊은 곳 진정한 나의 참모습이 밖으로
나오며 형체를
이루는 것인데 이는 겉으로 보여지는 내가 아니라. 안보이는 진짜 모습이다.
숨길 수 없는
진정한 욕망이다. 욕망이 참되면 이룰것이지만 어두운 욕망만 있다만 성공을
장담하지 못한다.
나아가 실존적 당위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개체적 존재로서의 지금까지의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세계, 다른 존재로의 재탄생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이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 존재의 당위성을 나에게 스스로
증명하며 남이 있다하여 있고 없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이다. 또
나에 의해 세상을 증명하지만, 내가 전부는 아니며 일부도 아닌 공이다.
하늘주천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제 하늘과 섞이는 것이다. 하늘주천은 선계
와 연결된 것을 말하며
외부에서 오는 것이 모두 같은 기는 아니다. 이것은 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
다. 자천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것이 들어온다. 질이 다르며 그 질에 맞는 내 몸도 이미 일반의 몸은 아니
다. 하늘주천은 분명
천기이며 이것은 신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이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2단에서 그
렇게 힘든 과정을
카페 이용하기
거쳤고 이제 그 결과를 증득해야 하는 단계이다. 허락은 내 마음에서 나오며 내
가 준비된 그 정신적
성숙이다. 하늘이 외부의 신이나 신성 따위는 아니다. 이것은 원천의 의미를 알
아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들어오는 하늘을 내가 받을 수 있는가이다.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천기는 분명 들어온다. 하지만
들어올 뿐 그 무엇도 만들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금빛단(정상삼화가 되고 더 나아가 천일합일을 조금 경험 하게되면)이 만들어지고 바른몸(법신)을
탄생시킬 '태'가 만들어지며 그 안에 '바른몸'이 이루어진다. 시간이 흘러 내
모습과 같아지면 이제는 완벽한, 한 수도자로써 인정받는다.
이 때 아직 미숙한 바른몸을 뽑아내는 자천을 차이나에서 책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위험하며 잘못하면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있다 내 것이 어떻게 빼앗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고단자의 능력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보는 것 만으로도 상대의 크기, 도의 단계, 수준의 고저를 알아볼 수 있다.
얼마든지 속여 천사, 신선, 절대자의 모습으로 현혹시킬 수 있다. 이는 도의
높낮이로 하는 것이다. 언제나 위험하고 흔들리지
않는 단계는 없다.강자의 힘은 항상 위험하다.
전진교의 그 책들은 그 목적으로 유포하였다. 지금 왕중양이나 그 추종자
는 그 벌을 받고 제거 되었으며 능력이 이르면 확인해 보기 바란다. 그러니 여
기에 안주하지 말고 더 높은 과정으로 나아감이 옳다고 본다.
4단_영단
이는 또 다른 경지이다. 내 심장에서 나오는 올이 몸밖으로 확장해 나오고 내
몸을 감싼다. 내 몸을 막처럼 감싸면서 이것이 점점 확대되어 간다.
그러다가 10m, 20m, 30m로 내 몸 바깥의 사물이 내 일부인양 느껴지기도 하며
내 의식이 멀리
나아가듯 어떤일이든 할것 같다.
이제부터 몸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머리, 몸통 , 팔, 다리의 일반적 몸은 나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다. 내 몸의
전체적 크기는 그 보다 훨씬 크고 원형을 이룬다. 이 전에는 밤톨만한 작은 것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도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이제는 그것이 300m 정도의
크기로 자라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도 이렇지는 않을것이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다.
많은 수도인이 이 경지에 많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겨우 몸밖으로 나온 완주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나오는 것은 어떻게 했지만 확장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 유명한 성철도 이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 모습이 회오리치며 강력한 영의
줄기가 불꽃처럼 타오르지만 이 모양이 안타깝게만 보이는 것은 
그의 수련의 집념이 이렇게도 강하건만 커지지 않고 한으로 남는 것이 아닌가 해서이다
대개의 자천법도 여기가 아닌가 한다. 연허 합도이며 허공분쇄가 나는 이렇게 내
주위 허공으로 확장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닌가 한다.
봉우님은 원광호신이라고 한거 같다. 보살이나 부처그림의 방광을 그린 것처럼
몸을 감싸다가
이것이 점점 커지는데 이것이 내 몸 자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완주가 가는
곳까지 내 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차이나식으로 기수련적인 이해로 자천한 사람은 좀 힘들거라고 본다.
주천을 한다고 될것도 아니고 호흡이나 명상이나 주문을 아무리해도 된다고
보장 못한다.
사실 나는 자천법 자체가 없다고 본다. 최소한 세간에 알려진 자천중에 이
이상을 가게 하기위한
방법이 없다.
차이나의 수련서에도 오직 돈법 뿐이라고 했다.
몸으로 했던 호흡이나 주문이나 명상으로 하는 것은 이제는 부수적인 것이고
무얼 원하고 서원이 무엇이고 뜻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처음에 이것을
명확하게 정한 분은 잘나가지만 아직까지
확실치 않다면 명확하게 해야 한다. 즉 뜻을 정해야한다. 이 말은 마음, 즉
의지나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할것인가가 수도의 길을 가게 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수도 했다면 쉬웠겠지만 요즘은 이걸 잘 못한다. 멀리보고 넓게 보는
그런 큰 마음이 있어야 쉽다. 이타성이나 세상에 내가 무엇인지를
항상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애라유를 경험한다.
인위적으로 차이나 처럼 할 필요가 없고 이때가 되면 어떤식으로든 경험한다.
아주 다양하게 하기 때문에 책에서처럼 된다고 일부러 하다가는 오해가 되기도
한다. 애라유는 경험해 보면 안다.
자신이 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가는 방법은 모두 다르니 마음의 여유를 두고
자신을 잘 관찰해야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의식과 심리가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면서
인위적 애라유도해보고 다른 것들도 연습해가면 된다.
이렇게 커지다가 어느 단계에서 내 머리 위에서 있던 환명 그 한참 위에 또 다른
환명이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지며 엄청난 영역을 흡수하고 강력한 수축과 확장을 반복한다.
이러면 대단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5단_대단
여기 온 사람은 이제는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스스로 개파조사가 될지언정 남의 학설이나 도에 굴하지 않는 자신감과 능력이
얻어진다.
맹자가 여기서 부동심을 말했고 여기가 중용이 말하는 미발,이발의 묘용이 있는
것이다. 대인이다.
마음의 지평이 넓어져 아무것도 나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일상적
탐욕, 성욕같은 오욕칠정이 사라진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이 때를 지나
익숙해지면 명에 따라 다시 생긴다. 왜냐하면 욕구가 없는 것이 바른 수도가
아니고 아무리 도가 깊어져도 욕구는 없어지지 않는다.
욕구는 존재의 근간이고 삶이며 도가 곧 욕구이다.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욕도 없어진다고 하지만, 이것은 그런 사람도 있지만
모두 그런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특히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데 교리의 독특한 특성이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오장의 욕망, 근원적 욕망은 내 몸의 구성이고 나의 또 다른 모습이지
제거하고 없애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 바로 이곳이고 여기서 알 수 있다. 대개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이고
이곳이 하나의 커다란 문턱이다.
마음 깊은 곳 그곳에 힘이 있고 그것이 분출하던 욕망을 잡고 있는듯하다.
이것이 무게로 느껴지며 유혹을 이기는 중심을 만든다. 그래서 욕망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나는 시간차를 경험한다. 이것이 미발과 이발이며 감정에 이끌리어
대의를 그르치는 한계선을 넘지 않아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는 애써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는 행동을 무심히 바라보게 된다.
어찌보면 무의식을 느낀다. 그 전에는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했던 깊은 욕망과
습관적 행동, 생각이 즉 무의식적인 것이 알아지는데 의식과 무의식의 일치가
느껴진다. 이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더욱
깊은 곳에서 더 근원적인 곳에서 일어남을 느낀다. 그래서 생각을 뇌가 아니라
가슴에서 한다고 했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느끼는 욕망이 더 밀접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미발과 이발을 상대적 동정으로 본 것이고 절대적 동정은 자천에서 있을
수 없다. 많은 사실이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천지창조론이 아니라 인간행동원리를 말한다. 천지의 창조와 운행의
절대적 객관성을 역시 인정할 수 없다. 주관적 객관성을 말하며 주관화한 정도를
수도의 깊이로 본다. 점점 천지를 먹어 치운것이 도의 진보이다. 이것 역시
주관성이다.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의 것은 나와의 관계속에서 이해될
뿐이고 행동할 뿐이다. 세계를 객관화하는 것은 나약함의 표시이다. 신명들도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지 세상의 위대함은 관심 밖이다. 신이나 상제들은
나의 이용대상이지
내가 복종할 그 무엇도 아니다. 그들의 객관적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
나에게 그 무엇이 될 뿐인 나와의 직접적 관계속에서 파악될 뿐이다.

처음부터 이곳 이상에 뜻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죽~~~ 오면 되지 단전이나
여러주천 따위를 생각하거나 바른 몸이나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오면된다.
이것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
이 단계에서부터 분신이 생긴다. 하나뿐이던 애라가 두개, 세개 계속 늘어난다고
하는데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개 세개 그 이상도.. .
그리고 내 빛이 지구의 남극과 북극으로 뻗어간다.
북극신과 남극신이 와서 확인하기도 한다.

6단_종단
5단에서는 세간의 학설이나 도를 근거로 자신의 관념을 형성하고 새로운 창조를
하지만 이제는 전혀 세상의 도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진리에 근거해
구할 뿐이다.
없는 진리를 구하는 것의 모순을 알고 그 당위를 안다.
그래서 오히려 방황을 할 수도 있다. 땅과 하늘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만의 것을 찾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5단은 땅이고 자신에 관심있다. 6단은 7단의 하늘에 관심있고 땅에도 관심있어
이 둘에 조화를 이룬다.
세상에 이로움을 주고 원하는 것을 나눠주며 작은 것에도 의미를 두고, 큰
것에도 의미를 두어 세상의평가가 극과 극일 수 있다.
소강절은 미신을 조장하는 말도 했고 남다른 논리로 세상을 놀라게도 했다.
서경덕도 몇몇의 술수를 만들고 획기적 이론도 만들었다.
과거의 유학에서 여기를 아성이라고 했다.
7단부터 성인이고 그 바로 아래라서 그렇다.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 치열하고 간교한 사회가 염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내안에 천지를 두고 궁구하며 남모르는 능력을 키우는 듯하다.
자신의 내실로 자신감과 당당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잘 되어야 실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7단_천단

천 곧 하늘이다.
또 다른 하늘이 탄생한 것이다. 그대는 이제 하늘이다.
세상에 또 다른 하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주자가 여기서 성리학을 창조해 세상을 지배하는 하늘이 되었다.
최제우도 바로 여기서 상제의 계시를 받고 동학을 세웠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이 되었다.
이제마도 한의학에서 우리만의 한의학 이론을 만들어 세상에 군림하고 또
할것이다.

왕수인의 양명학도 여기이다.
이렇게 이 자리는 많은 사람이 세상창조의 힘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어설픈 서양철학과 이데올로기에 우리만의 하늘
체계를 보여야 한다. 바보처럼 저들의 말하는 것이 진리인양 혼을 팔아 치우고
얼을 넘겨주는 짓은 그만 두어야한다. 관법이 있다. 같은 사실, 사건도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하며 거친 일반화된 일류학, 철학사조가 너무 많다.
나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그들의 이론은 엉성하고 빈틈이 많다. 환원주의 폐단과
보편화의 무자비성, 통제의 엄밀성은 세상이 무섭게만 보인다.
자신이 스스로 구하는 것이지 누가 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기대듯이 외부의 작용과 내부의 의욕이 함께 만나야 한다.
법이 나의 지침이 되는 것은 굴욕적이고 타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자율적
도덕성은 분명 새로운 세대에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이 자리에 와야 하늘에 비교하고 땅에 기대어도 자신의 도덕은 유일하다.
부끄러움을 이기는 것은 자신이 옳은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바르고 ,, 난 바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이 서서히 내면을 울린다.

8단_혼단
혼이다
하늘에 있지만 보이지 않고 근거로서 하늘이 의지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의지하여 자신을 돌이키고 학문을 세우며 검증을 했다.
말없이 모든 사물을 응시하며 무언의 조화를 이룬다.
여성적 원리가 있는듯 품에는 세상의 경륜을 가지고 있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만
하나씩 하나씩 꺼내주며 무엇이 있는지 전부는 안 보여주는 은밀함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개념치 않으며 세상사람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여유와 관대함이 있다.
정명도가 그랬고 가까운 곳에 권태훈님도 그랬고 그러고 보면 이 자리의 사람은
역사에 그리 이름이 안 보인다. 그것은 무심하기 때문이지 업적이 없어서는
아니다.
업적을 남에게 넘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오자서가 여기인데
예외인가 아니면 손무(6단)에게 많은 것을 주었는가
조선의 정기룡은 비운의 룡일런가.....
남이 안하면 내가 한다.
그리고 항상 하고 있다.
하지만 남들은 쓸데 없다고 한다.
그 겉으로 보이는 성과보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남모르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우직함이 있다.

9단_신단
여기다! 여기가 신이다. 오직 신이다.
스스로 책임지며 어떤것에도 의뢰함이 없이 외롭고 고독한 자리이며 자신의
역량을 나눠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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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싶고 퍼주고 싶은 마음은 넓고 한량 없지만 알아주는 사람도 보아주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실망함이 없이 어디에서인가 어느곳에서인가 제 일을 하고
있으며 홀로 모든것을 감내하고 이후의 사람과 현재의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풍요와 안락을 위해 적극적으로 희생하며 알아주지도
않는, 나중에 기적이라고 찬탄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며, 그들의 사업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준이
되어져 있지만 조명은 재빠른 자가 가로채가는 억울함도 웃으며 산다.
서산대사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마음을 움직이는 한숨이 있다.
주염계는 몇 자 안되는 무극론으로 지금껏 성리학의 기준이 되고 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가며 신으로써 인류의 앞날을
책임지는 거대한
어깨가 있다.
우리나라에 좌도방이나 우도방의 방주가 여기였고 지금은 그 구분을 없애고
있는데 나관중의
후신이 이 일을 맡고 잇다.
사람들과 세상 만물의 최후의 보루이고 마지막 정점이다.
이는 구심점이고 중심이다.
기준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축이다.
그 축이 있어야 일이 생긴다.
그러니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우러름을 받아야 한다.
어쩌면 여기가 마지막 자리이겠죠 이후는 격이 다르고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지는 힘의 끝이구요
결국 어떤 자도 아무리 세상을 뒤엎을 듯한 능력을 행사해도 이 계제의 힘일
뿐입니다,
여길 넘어 50단이든 100단이든 그 이상이든 이 세상에서는 9단의 힘
정도입니다.
왜냐면 힘은 자기의 신체나 가진 능력이 아니라 이 땅이 허락한 만큼 감당하는
만큼이기 때문이죠
그럼 그게 얼마만큼이냐면 일반인이 아는 전설적 신화적인 것들이죠
물론 그 이상의 능력을 하는 편법도 있죠 이건 우리나라만 있죠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거라서요
근데 이 계제에 오면 다 그런 능력이 있냐면 아니죠 그건 다른거죠 능력에 대한
이해를 못한거죠
여기서 딱 잘라 말하지만 능력행사는 없습니다. 과거 했던 많은 얘기는
가짜이거나 잘못 이해한
겁니다.
시간과 신화적 이해를 모르는거죠 판타지에서 벗어나요 안 그러면 도의 증진은
물건너 갑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구요? 알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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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사람들이 보고자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되겠죠 도의 능멸과 기만은
사라져야 합니다.
신단자는 책임자이구 어떤 한 방면에 우두머리입니다 분명 이 계제에 오면 그
권리가 있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신묘함인데 그 사람이 신묘하고 세상의 신묘함을 압니다 알아야
여기 옵니다.
그래서 신묘한 일을 하는거고 그 능력이 있는겁니다. 능력상의
최고봉입니다. 오고가는 것을 알고 있고 없는 것을 알고 살고 죽는것을
압니다. 창조와 소멸을 압니다. 아는 것은 행한다는 것이구요
결국 시작과 끝을 알고 행한다는 것이 신이구 이 단계가 그겁니다. 다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설계자이겠지요
아하 덧붙이자 능력이 다르다는건 그러니까 음~ 어떤 신단자가 산을
들어 던질수 있다 하자
적이 또 9단이고 근데 이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냥 신단일 뿐 별볼일 없다.
그래서 그 구단을 산을 들어 던져 죽이려면 가능하냐 안되요 안죽어요 어떻게든
살아요 왜요?
절대로 비슷하거나 위단계자에게는 아무것도 안통해요 정면대결 외에 암것도
안되죠 정면대결이란
내 정신과 상대 정신의 크기로 인한 힘의 집중이죠 검은 은빛 몸과 거대한
신체의 힘을 구사하는
강력한 투지 그 시합을 보아야죠 아~~ 무시라!!!
그외의 능력은 이땅과 이생의 인연으로 하는 일시적 현상이죠 본인의 순수함은
아니죠
능력은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그런 무기가 안되요
이건 주관적이고 제약이 심한 것이지 만능도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어떤 인연적
원리가 있다.
무엇보다 이건 하찮은 능력이고 진짜 능력은 따로 있다 이능력은 그 각각의
계제자는 모두 가지는 일반적인 것으로 이것이 진짜다.
이외의 것은 난 인정하지도 관심도 없고 그런자는 필요없다

10단_허단

허이다.
이는 사람도 신도 아니다. 그런 구분이 없다.
이 지구이다. 일체이며 모두이고 또 아무도 아니다.
하나의 행성, 하나의 의미로만 보며 우두머리 지배자의 의미는 필요없다.
우주의 한 별로써 구분하며 , 그래서 인정하는 부류가 다르다.
공자가 여기이고 조여적이 여기이고 크로노스도 여기이다.
이들은 이 지구에서 절대적이며 만능이다.
배달도 여기서부터 인정하며 또 다른 수도의 문턱을 넘는 발판이다.
그래도 여기는 존재이고, 지구라는 행성의 의지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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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 11단부터는 존재가 아니며 시공간 모두를 넘어 하나의 흐름이고
그때 그때에 따라 시공을 정하며 작용하고 사라지는
있으면 그이고 없으면 그래도 그이다.
세상에 책임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일도 없다.
왜냐하면 10단이 그것이고 세상이고 의미이고 일이다.
더이상 자신의 일에 자기가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이켜 바르면 세상은 바르다. 그렇다.
여기까지 명부에 기록된다. 이후는 현부에 기록 된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는 자는 7단 이하이다.
7단부터는 스스로 알고 명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그전에도 가능하지만 원할때 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이때 부터이다.
백단까지 나누었었다. 이후 얼마전에 오십단까지만 하기로 천중과 협의했었다
. 그래도 우선
백단까지 썼는데
황당하다는 반응이 있다. 그리고 터무니없게 이런 몇십단의 계제를 우습게
보는 상황도 생긴다.
10단 이상을 가는 사람은 내가 이생에서는 못보았고 우리나라에 조선
중기 이후 없는 것으로 안다.
꿈은 크게 가지라고 했지만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허황된 꿈이고 더불어 말할 수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비난은 괜찮다.
그리고 계제를 단순히 태권도 단 따는것 쯤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쉬움이 크다.
높을수록 좋지만 겸허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합당한지 곰곰히 그리고 냉철히
생각해 보아야한다.
숫자가 편하고 현대는 이것이 일반적인 것같아 사용했지만 그 오해가 더 큰
듯해서 다시 숫자보다는
원래의 말로 다시 돌아갈까 한다.
그리고 이 허단이 끝이다 이 이상은 논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경솔
하다.
또, 숫자는 어디쯤인지는 알아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게 하는 반바보
로 만든다.
반은 바보라는거다.
그래서 이렇게 또 한마디를 하게된다. 허,,,,,
허가 무엇인지 알고 이에 그것이 되는 것인데
말은 입으로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문으로 강력한 힘이 있다.
말을 주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일까? 말의 무서움
과 의미를 모른다.

아직 이걸 아는 사람은 못보았다.
이건 문제가 있다. 수련을 이해 못
한다는 것인데 이러고도 수련이 된다면 왜 그럴까?
이 부분이 점점 근심이 된다.
의지의 표현이고 목적을 지향하며 절제와 결단을 한다. 자신이 말을 깨우치지
못한다면
남에게 묻기는 창피하니 스스로 자숙하고 생각하면서 알게 될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허를 알면 허단이 된다. 허단이 되면 허를 안다.
그래도 광활한 편인 우주에서 하나의 존재로써 인정되는 것이 이곳인데 이유
는 하나의 개체가 되어진다.
우주에서는 이정도는 되어야 보인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미약하여 그저 그럴
뿐이다.
그래서 이 이전에 우주를 논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제를 알라고 말하고 싶다.
우주는 그대를 모릅니다.
그대까지 알 정도로 그대는 중요하지도 않고 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작은거 하나도
알거라는
착각은 버려요 약자의 변명입니다.
영이 움직이면 사람 모습을 한다.
하지만 본래의 형상은 원형인데 영단부터 이것이 되고 허단부터 우주의 구성
원이 된다.
도덕경의 허이불굴(맞나몰라?)은 아래에서 허의 큼을 말한 것이다.
위에서 보면 작지만 아래에서 보면 크다.
허이니 무한해 보이기도 하다. 자신이 작은 것인데...
태허라고 말하나를 더 붙여 다르게 말하지만 그래봐야 이 다음의 무단을 말한
것이다.화엄경도 여기까지이나 아쉬움이 있어 무단을 논하기도 한다.
지은이의 능력을 넘은 말이다. (부처를 말하는것이 아니다.)


추가.

도의 단계는 1-100단 까지이다.
이것은 배달의 전간을 근거로 한 것이다.
100단까지인 이유는 우주와 동등하여 크기가 같고 이 이상은 이 우주에서
수련이 어렵다.
80단부터는 우주 바깥과 함께하는 것인데 100단 부터는 이 우주의 몸의
체계와는 다른 것으로 본인에게 이득이 없다.
100단이 넘은 우주인은 이 우주 본인과 이 우주를 만드신 분과 증산님
인정상관님 이들 네분 뿐이다.

 
과거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으니 다음과 같이 했다.
0단 의-기 마음을 정하기
1단 기-빛 임독유통이나 중맥이 열리기 전까지
2단 빛-공 중맥이 열려 정계와 교류할 때부터 선계가 열리기 전까지
(대주천전까지)
3단 공-영 선계가 열려 금빛이 있고 바른몸이 완성될때까지
4단 영-대 심장의 빛이 밖으로 나와 보호막처럼 나오고 그리고 300m 정도의
크기로 될때까지
이를 완주(完珠) 라고 한다.
모계가 열린다.
5단 대-종 완주가 우리나라 두배정도 크기까지,, 천계가 열린다.
6단 종-하늘 지구3분지 일까지,, 허계가 열린다.
7단 하늘-혼 3분지이,, 인계가 열린다.
8단 혼-신 지구와 같은 크기,, 대인계
9단 신-허 대기권 반정도까지,, 방계
10단 허-무 지구권역전부------ 100단 해-서
이런 식이었으며 1단은 기, 2단은 빛등등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 계제의 단서가
있는 말이다.

1단은 기수련이고 ,2단은 빛수련이고, 3단은 공을 각해야한다.
명부에서 10단까지 기록되고 그이상은 현부에서 한다.(현부와 천부는
통합되었다.)
현문에서도 어떤 목적을 두고 한다.
옛 선조들의 계제를 나열하면
최제우 7단으로 생을 마감 이후 선계에서 14단까지 수련 지금은 명부책임자
이제마 7단으로 생을 마감 이후 선계에서 14단까지 수련 지금은 제주도 천신
권태훈 8단 나관중 10단
송구봉 22단 나철 7단
남명 44단 정약용 5단
남사고 7단 달라이라마 5단
서경덕 6단 2대 단군부루 25단
북창 5단 을보륵 20단
47대 단군 고열가 7단 유위자 13단
왕검 40단 지금은 마고(79단)의 뒤를 이어 우주신임
부처 99단 을지문덕 9단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22단 주자 7단
라즈니쉬 9단 왕양명 7단
이율곡 1단 평강공주(원경왕후:조선) 9단

퇴계 3단 정도전 9단
서산대사 9단 사명당 7단
한당 5단 제갈량 7단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11단 밀라레빠 8단
앙산 20단 조주 14단 동중서 18단 황벽 18단
아미타불 18단 관세음보살7단
서왕모 9단 계백 9단 문정왕후 5단 인현왕후 5단
김시습 9단 이준경 6단 태고 보우 7단
이갑룡 3단 마하 가섭 7단
야곱(이자가 성경의 신 야훼이다, 창세기의 신은 아니다) 5단
예수 4단으로 생을 마치었고 얼마전에 8단으로 승격되어 북남미 대륙의 신으로
성철 4단 숭산 4단->3단 크로노스10단 제우스 8단 공자 10단
조여적 10단

무진장사오 유우중군상
언세송용강 새절소수호
요전몬손하 주후문고제
임성열구인 자산옹조묘융......
(여기 50단까지 적혀있다. 11단은 무단 12단은 진단 13단은 장단 ....)

배달도 그렇고 이 계제를 보이고 또 다른 역대 고단자들을 조금 알려준건 꿈을
꾸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누구는 자기도 몇십단의 고단자가 될거라고 하고 그들과 비교하면서 관심을
보이기도 하는데 또 말이지만 허영이다. 공단부터 이룬 다음 오라고 하고싶다.
대단이 넘으면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다. 자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냉철하고 묻고 싶다.
또 부처의 계제나 맘에 안드는 분도 있나보다. 아마 자신이 숭배하는 분의
계제가 생각보다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정도의 계제라야 만족 할런지
모르겠다.
그래봐야 남의 계제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지 않나? 자신의 계제나 신경쓸
일이다.
자기의 스승이나 숭배자의 계제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도움될
일도 없다. 자기 길은 철저히 자기 길이다.

========

국외 도계

이홍지... 종단->의단 : 법륜공
왕력평... 광단
곽종인... 종단 : 차이나 화산파 장문
달라이라마 ...대단
틱낫한... 의단
칭하이 무상사... 기단
에크하르트 톨레... 의단 : 서양 영성가
조상정 ...기단(내주천) : 화산 남천문23대 장문
김대식...광단 : 천기도법
라마나 마하리쉬...공단
디팍초프라...기단(내주천) : 초프라 행복센터
끼란바바...기단 : 오쇼제자
켄 윌버...의단 : 초개인/자아초월심리학자
엄신...의단 : 중국기공사
남회근...의단 : 중국학자
요가난다...대단 : 인도 요기(크리야 요가)
헬레나 블라바츠키...의단 : 신지학
헨리 스틸 올코트...기단 : 신지학
애니 베산트...의단 : 신지학
리드비터...의단 : 신지학
바하 울라...의단 : 바하이교 창시
u,g크리슈나무르티 ...의단 : 인도 구루
무묘앙 에오...의단 : 일본 영성가
니사르가닷따 마하리지...의단 : 인도 구루
아난도...기단 : 오쇼제자
묵타난다...기단 : 인도 구루
조곡쉬...의단 : 프라닉힐링
다카하시 신지...의단 : 일본 영성가
구르지예프...의단 : 러시아 영성가
라마크리슈나...의단 : 힌두교 수행자
비베카난다...의단 : 힌두교 수행자
마(maa)...의단 : 수행자
제임스 레드필드...의단 : '천상의 예언' 저자
닐 도널드 월시...의단 : 신과 나눈 이야기
해리 팔머...의단 : 아바타프로그램
데이비드 호킨스...의단 : '의식혁명' 저자
제이지 나이트...의단 : 람타깨달음 학교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기단(내주천) : TM명상
담석청(잔스추앙)...기단 : '도교와 여성' 저자
다스칼로스...영단->공단 : 키프로스 신유가
바바지...천단 : 요가난다 스승
만탁 치아...의단 : 힐링타오
다니구찌 마사하루...의단 : 일본승려(책'생명의 실상' 저자)


국내계 카페 이용하기
국내 도계

박현... 신단 : 바나리
이승헌... 기단 : 단월드
문화영... 의단 : 수선재
김충규(도백)...공단 : 도화재(석문도문)
허경무(도운)... 영단 : 세계 국선도 연맹
허천우... 공단 : 한단회(한국단전호흡수련회)
최병주... 공단 : 금선학회
민정암... 광단 : 태극기공회
이동호(순일) ... 기단 : 원음종
청월스님... 의단 : 청심선원
박석... 기단(내주천) : 교수
마덕스님... 기단(내주천) : 붓다마을
유종열(원아)... 의단 : 봄나라
정도령... 의단 : 단군성전, 대천우주성
유인학...기단(내주천) : 세계국선도 연맹
윤홍식...의단 : 홍익학당
죽림(천선자)...광단 : 도인학교
게이트(신종현)...광단 : 붓다필드
김성갑...광단 : 고신도(한국 선도회)
현동 ...기단(내주천) : 태극선법
한바다...기단(내주천) : 해피타오인터네셔널
비로영우 스님...기단 : 불가기공
임경택...기단(내주천) : 국선도
조규일(칠통)...기단(내주천) : 수행자
김열권...의단 : 법사(위빠사나 수행자)
김일훈(인산)...영단 : 신약본초 저자
우혈...의단 : 혈기도
김준원(한울)...기단 : 기회로
류시화(안재찬)...의단 : 시인, 명상가
홍신자...의단 : 무용가, 명상가
손민규...기단 : 번역가, 명상가(명상나라)
장두석...기단 : 코미디언, 명상가
박준동(상월원각)...의단 : 천태종 중흥조
손규상(회당)...의단 : 진각종 개종조
김대거(대산)...의단 : 원불교
이광정(좌산)...의단 : 원불교
장응철(경산)...의단 : 원불교
박장식(상산)...의단 : 원불교
박중빈(소태산)...의단 : 원불교 개종조
송규(정산)...의단 : 원불교
송도성(주산)...의단 : 원불교
송순현(봄날)...기단 : 정신세계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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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준(사수)...기단(내주천) : 순천도 창시자
박한진...의단 : 수행자
홍태수...기단 : 생체에너지 이론
임동창...의단 : 피아니스트
탄허...의단 : 스님
김원기(무일)...의단 : 수행자
김춘식(현성)...의단 : 오행생식
장휘용...의단 : 가이아 프로젝트
대행스님...공단 : 한마음선원
이용복(봉천)...의단 : 기회로
법정...의단 : 스님
현각...의단 : 스님('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저자)
명재욱...의단 : 회전무술 창시자
윤대현...의단 : 아이키도
안운산...의단 : 증산도 종도사
안경전...의단 : 증산도 종정
최시형(해월)...의단 : 동학
손병희(의암)...의단 : 천도교
전봉준(해몽)...의단 : 동학
숭산...영단->공단 : 스님
강대성...의단 : 갱정유도회
고경민(청산)...영단 : 국선도창시
김기추(백봉)...공단 : 불교거사
이상룡(최출룡자)...의단 : 수운교창시
허해구...의단 : 공무원
천명일(설원)...의단 : 전통침구학자
송현달(죽천)...의단 : 심성수련학교
함창국...기단 : 기치료사
김도향...의단 : 가수
이한우...의단 : 명상까페운영자
주종석(일송)...기단(내주천) : 기치료사
손정은(만월)...의단 : 선불교
혜민...의단 : 스님
도현...기단(내주천) : 도현산방
박종간(곤모)...의단 : 단법숭조회
법륜스님...의단 : 정토회
고순녀(대각심)...의단 : 스님
김지하...영단 : 시인
김종업...의단 : 한국정신과학학회 이사
수월...대단 : 스님(경허스님 제자)
황도존...의단 : 한국정도 대정원
김홍경(금오)...종단 : 한의사
이채송(일풍)...의단 : 화산재
이용태(단암)...천단 : 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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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명...의단 : 한국 힐링타오
윤태현...공단 : 혜성당도원
최도선(해강)...의단 : 자연선도
김정구...의단 : 한국사회교육원
이경숙(벽운)...의단 : 구름타운
이재경...의단 : 명상 태극권 수행자
박사규...의단 : 기천문 문주
진정...의단 : 영성인
구선...대단 : 스님
김영기...공단 : 법사, 퇴마사
의단이란.. 단전생성전의 단계, 의지를 내서 수련하는 단계
<편집자 주 : 광룡정 현일 박재봉님의 이론과 점검 결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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