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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0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성산기획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성산기획

[조성환] 나에게 주어진 새길



나에게 주어진 새길

–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 숭산 박길진의 일본 유학과 대학 경영 –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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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 – 일본으로 떠나는 숭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숭산 박길진(1915~1986)은 유학 길에 올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교단도 어려운 상황인데다 종교가 아닌 철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세상을 넓게 보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다. 숭산은 철학에 심취했던 배제고등학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생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 이때부터 나는 안으로 나 자신 인생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데 귀결되었다. 그래서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철학개론과 논어, 맹자, 중용에 이르기까지 독파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그 방향의 공부에 집중하였다. (숭산종사 추모기념대회: 아, 숭산종사, 2004, 43쪽)

숭산이 유학의 목적지로 동양대학(東洋大學)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양대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 있다”는 건학이념을 내건 ‘철학대학’이었기 때문이다. 동양대학을 창시한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도 숭산과 비슷한 나이에 동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1881년, 24세). 입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숭산 역시 원불교 역사상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숭산이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쓴 「새로운 출발」(1937)이라는 시에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새로운 출발

험악하고 무서운 길이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갈 때 자기 이욕(利慾)을 만족시키려는 고부라진 마음을 주의할지며,

모둔 동지와 선배들과 같이 우리의 사명과 의무를 끝까지 이행하리라.

아는 내 개체를 불에 던지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용기승천의 세력으로

재출발을 부르짖는다.

언이행난(言易行難)의 인간이다. 배움이 있고 앎이 있고 실행이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배우고도 모르고 실행없는 인물은 무용지물이다. 실행 있는 충실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활기있게 말과 정신과 실제의 덩어리를 한 뭉치로 만들어 전신에 걸머지고

육해산상(陸海山上)으로 날뛰며 한 마디의 호령으로 잠든 강호를 깨우치리라.

도덕이 쇠퇴한 사회다. 나에게 원천을 준 위대한 삼강령팔조목과 사은사요이시여,

이제 나는 ‘당신’의 품안을 떠나지 않고 위대한 정신을 받아 혼란한 사회를 위하여

영원히 땀과 피를 아끼지 않고 정의도덕을 위하여 분투노력하여서

불만을 느끼는 ‘당신’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를 띄게 하리라.

이 시를 보면 당시 숭산은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유학의 장도에 올랐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서시」의 주인공 윤동주(1917~1945)도 이듬해인 1938년에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쓴다. 그 역시 연희전문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에 남긴 작품이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이 두 시에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공부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한국 청년들의 비슷한 감성이 담겨 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 각오를 다지고 미래를 꿈꾸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구도 : 동양대 유학 생활

숭산은 일본에 공부하러 가는 대신 교단으로부터 커다란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귀국 후에 교육 기관을 하나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박길진이 아닌 공인 박길진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한 목적은 인재를 양성할 교육 기관을 하나 맡을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을 다닐 때 벌써 ‘불교전수학원’ 원장의 발령장이 날아오기도 했었다.”

(원보 17호, 1983.02.01.)

“총부에서는 졸업식도 하기 전 내게 「불교전수학원」이란 발령장을 보내왔다.”(숭산문집, 64쪽)

교단의 사명을 지고 떠난 유학이었기에 각오는 남달랐지만, 막상 일본에 도착해보니 유학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산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몸 불편하고 돈도 한 푼 없으면서 무엇을 가졌길레 기운은 그리 살았오.

그뿐인가 땅 한편 없고 집 한간도 없오. 가진 것이 있다면 희망 하나 뿐이오.”

(「희망」, 일본 수학시, 일원상과 인간의 관계, 316쪽)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것일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었던 것 같다.

“읽을 틈이 없다고 한탄치 말고, 볼 능력이 없다고 서러워 마라. 우리는 아직도 욕심을 억제할 여유가 있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힘이 있지 않는가. 힘과 여유가 한 가지 있건마는 될 일은 아니하고 안 되는데 구하더라.” (「구본(求本), 회보 54, 1939년 5월 1일, 42쪽」

비록 외국생활은 어려웠지만, 유학시절은 숭산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양과 구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일(渡日) 후 동양대학에 취학하면서부터 나는 전일(前日)에 범한 사고의 극단을 정리하면서 순수한 학문 세계에서만 골몰하였다. 즉 독서와 사색에의 건전한 태도로 종교가로서 일체를 준비하는 한편, 저명한 불교학자며 일반 종교들과도 자주 상종하면서 우리 한국을 불교의 나라로서 발전시켜야겠다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1958.10.25. 학보 8호.)

이처럼 숭산은 일본에서 단지 철학을 ‘배우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와 폭넓은 교류의 경험을 쌓았다. 그것은 하나의 새길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세계적인 사회운동가인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를 찾아가 ‘신(神)’에 대한 문답을 나누기도 하였다.

나는 그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신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신데 그 신이 어딘가는 계실 것입니다.

제게 지금 그 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얼마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런 후 정원수의 나뭇잎 하나를 따서 나에게 주고는 “이게 신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신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

“나뭇잎이 신이다”는 카가와 도요히코의 말은 “새소리가 하늘님의 소리다”는 해월 최시형의 설법이나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원불교의 교리와 다르지 않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천지만물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위기의 시대에는 이 가르침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지덕(智德) : 숭산의 교육이념

숭산이 다녔던 동양대학의 건학이념은 ‘철학대학’과 ‘지덕겸전(智德兼全)’이었다. ‘철학대학’이란 “모든 학문의 중심에는 철학이 있다”는 뜻이고, ‘지덕겸전’은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인재를 기르겠다는 생각이다. ‘철학대학’이라는 건학이념은 ‘철학공원’의 건설로 이어졌다. 동양대학을 창시한 이노우에 엔료는 동경의 나가노구에 거대한 철학공원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인류의 사대성인을 모신 ‘사성당(四聖堂)’이라는 건물도 있다. 사성당은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 서양 근대철학의 종합자 칸트, 불교의 창시자 석가, 유교의 창시자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지금도 매년 11월 첫 번째 토요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흥미롭게도 원광대학교 안에도 사대성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성당과 다른 점은 칸트 대신 예수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숭산 박길진이 철학뿐만 아니라 종교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원불교 정신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원광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지덕겸수(智德兼修), 도의실천(道義實踐)’이다. ‘지덕겸수’는, ‘지덕겸전’과 마찬가지로,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다는 뜻이고, ‘도의실천’은 도덕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다. 동양대학이 철학이라는 지성의 훈련에 강조점이 있다면, 원광대학은 종교를 통한 도덕의 실천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거울 : 숭산의 인생철학

숭산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소지품 중에 ‘거울’이 있다. 그가 거울을 중시한 이유는 1985년에 쓴 「숭산법어 : 거울의 교훈」이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거울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산에 비치면 산이 다 비쳐지고, 바다에 비치면 바다가, 천체(天體)에 비치면 수 많은 별들까지 다 그 거울에 들어가 버린다. (…) 그것은 거울 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순무(純無)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무(無)의 심경(心境)을 가져보면 한량없는 넓은 마음이 되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게 될 것이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보(院報) 23호, 1985.05.30.)

숭산에게 있어 거울은 장자(莊子)의 개념을 빌리면 허심(虛心), 즉 ‘텅 빈 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종교는 이러한 허심을 기르는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은 ‘영성’의 다른 말이라고 보아도 좋다.

“머리는 텅 비워버려야 한다.” (원보 12호, 1981.05.)

“이러한 한가한 마음을 양성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 (원보 13호, 1981.06.)

이렇게 보면 숭산에게 있어서는 원불교의 ‘원’은 텅 빈 거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속에 아무 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본래 마음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수덕호의 사대성인상도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세울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 종교의 진리에 열려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개벽 : 마음을 비우는 수양

숭산에게 있어 ‘정신개벽’이란 ‘마음을 거울처럼 비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만 장자와의 차이는 물질개벽 시대에 허심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에 드러나 있다. 이 표어에서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물질과 정신의 대비이고, 다른 하나는 개벽이다.

1900년 전후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서양철학이 수용되는데, 당시 서양철학을 이해하는 큰 틀은 유물과 유심, 물질과 정신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수양’ 담론이 시작된다. ‘수양’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들이 여러 권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서 ‘정신수양’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문제는 일본의 수양론이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교육이나 국민윤리의 일환으로 수양론이 개발된 것이다.

반면에 한반도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 우주론적이고 문명론적인 차원에서 수양론이 전개된다. 서구 근대의 ‘물질’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신적 주체, 영성적 인재를 길러내자는 취지의 수양론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1917년에 천도교 사상가 이종린이 정신수양이라는 책을 쓰고, 1927년에 원불교 최초의 교재인 수양연구요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수양론이 개벽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1930년대에 천도교에서 ‘정신개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도 이러한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구 : 사회병에서 지구병으로

숭산은 원불교의 대종경을 해설하면서 ‘도덕문명’을 말하였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은 발달하였으나 많은 사회병을 안고 있다…이러한 때일수록 정신문명, 도덕문명의 선행이 절실히 요청된다.” (대종경강의 「제2 교의품」, 65쪽)

“물질문명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국한되지만, 도덕문명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필요하다. 물질문명은 인류에게 유익한 반면에, 혹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마는 도덕문명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피해를 주는 바가 하나도 없다.” (대종경강의 「제2 교의품」, 62쪽)

숭산이 살았던 시절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불교가 탄생했던 시절은, 한국사회가 근대화와 산업화에 매진한 시대였다. 그것을 숭산은 ‘사회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구병’을 앓는 상황이 되고 있다. 친족윤리와 국민도덕을 넘어서 지구도덕, 지구윤리가 요청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숭산이 지향한 도덕대학과 정신개벽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에드가 모랭의 개념을 빌리면, “야만적인 과학기술문명”에 의해 초래된 지구위기를 탐욕을 비우는 정신개벽으로 극복해서 “지구문명”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세 시대에 “인류에게 주어진 새길”이 아닐까?

 

2021/10/23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 조성환·허남진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 지구인문학

[지구인문학연구소 칼럼]
by 소걸음Oct 17. 2021

조성환·허남진

지구인문학연구소 연구원/소장 겸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원


1] ‘지구화’ 개념의 대두

1990년대부터 서양학계에서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상어가 되다시피 한 ‘globalization’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기술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globalization’은 처음에는 ‘세계화’라는 번역어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때 ‘세계화’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의 세계적 전파다. 김영삼 정부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세계화’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있다. 이 중에서 특히 후자는 ‘국제화’라는 용어와 상통하고, 이를 위해 영어교육이 강조되었다.1

그러다가 ‘지구화’라는 번역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울리히 벡의 <Was ist Globalisierung?>(1997)가 아닐까 싶다. 영어로는 “What is globalization?”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우리말로는 <지구화의 길>(2000)로 번역되었다. ‘세계화’가 아닌 ‘지구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globalization을 ‘세계화’라는 좁은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globalization의 자본주의적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globalization은 정보, 문화, 통신 등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자가 당시에 익숙한 ‘세계화’라는 말 대신에 ‘지구화’라는 표현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세계화’가 지구화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경제적인 면이 강조된 개념이라면, 울리히 벡이 말하는 지구화에는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위험이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위험의 지구화”(globalization of risk)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1986년의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부터 제기하고 있다. 우연하게도 이 해에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바람을 타고 미국 동부까지 날아갔다고 한다.2 반면에 한국에서는 산업화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2] 지구화의 연구 분야

지난 20여년 동안 서양에서는 ‘지구화’라는 주제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가장 최근의 연구로는 맨프레드 스테거(Manfred B. Steger)의 <Globaliz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University Press, 2020)을 들 수 있다. 2003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전 세계 20개국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올해에는 제5판이 나왔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지구화의 연구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알 수 있다.

  • What is globalization? (지구화란 무엇인가?)
  • Globalization in history (역사 속의 지구화)
  • The economic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 The polit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
  • The cultur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문화적 측면)
  • The ecological dimension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생태적 측면)
  • Ideological confrontations over globalization (지구화를 둘러싼 이념적 대립)
  • The future of globalization (지구화의 미래)

여기에서는 지구화라는 하나의 주제를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생태의 각 분야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각각을 “지구화의 경제적 측면”, “지구화의 정치적 측면”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에 이것들을 하나의 ‘학(學)’으로 독립시킨다면 지구경제학(global economics), 지구정치학(global politics) 등이 될 것이다. 실제로 역사분야에서는 최근 들어 ‘지구사’(global history)라는 새로운 영역이 확립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를 넘어서서 ‘지구’를 단위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지구역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구화로 인해 일어나는 지구적 이슈를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구학(Global Studies)’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미 지구학을 연구하는 지구학 센터나 지구학과, 또는 지구학회 등이 조직되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조지형 교수에 의해 2008년에 설립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가 대표적이다. 국내의 ‘세계사’ 연구가 여전히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지구적 조망과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지구사’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편 서강대학교의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연구소의 영문 이름이 'Critical Global Studies Institute(CGSI)'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구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지구적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3] 세계사에서 지구사로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의 설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세계사’(world history)와 ‘지구사’(global history)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종래의 ‘세계사’가 서구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보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지구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대표적인 지구사가인 세바스티안 콘라드(Sebastian Conrad)는 그의 <What is Global History?>(Princeton University, 2016)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구사’는 그동안 역사가들이 과거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도구들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에서 탄생하였다. (…) 특히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 ‘태생적 결함들’이 우리로 하여금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이 결함들의 기원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근대 학문의 형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 결함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탄생이 (국민)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 역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국사(國史)에 한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결함은 근대 학문분야가 지극히 유럽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 국가, 혁명, 사회, 진보와 같은 분석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유럽의 경험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언어의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 지구사는 근대 학문의 두 개의 불행한 반점(=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pp.3-4).

여기에서 콘라드는 근대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은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하였는데, ‘국민국가의 탄생’과 같은 유럽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지구사는 국가 중심과 유럽 중심이라는 두 가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구사 연구자들이 ‘세계(world)’라는 말 대신에 ‘지구(glob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세계’와는 달리 ‘지구’는 서구중심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국제적(international)이나 초국가적(trans-national)과 같이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3

4] ‘지구인문학’의 제안

콘라드의 비판을 더 밀고 나가보면, 종래의 사회과학 중심의 ‘지구학’도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구성(Globality) 개념에는 인간을 제외한 비인간 존재들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의 역사가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지구화 담론이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여기에서 차크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국가 중심의 근대적 인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적 차원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학문을 이 글에서는 ‘지구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구인문학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여 인문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구인문학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출발하며, 인간 중심이 아닌 지구 중심의 지구화를 학문적 모토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표적인 지구인문학자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1914~2009)이다. 자신을 ‘지구학자’(Geologian 또는 Earth Scholar)라고 자칭한 토마스 베리는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모두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의 목적을 위해 지구를 연구할 때가 왔다고 제창하였다. 지구를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사귀어야 할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5

아울러 인간 이외의 존재들의 생존권도 보장해주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의 필요성을 제안하는데, 이 제안은 최근 들어 현실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017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는 세계 최초로 ‘강’에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였다. 왕거누이 강의 오염을 우려한 뉴질랜드 의회와 원주민 마오리족이 합작해서 지구법을 통과시킨 것이다.6

최근에 한국에서도 지구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중심으로 <지구를 위한 법학 :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중심주의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가 출간되었다. 또한 인류학 분야에서도 종래의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beyond) 지구적 차원의 인류학이 시도되고 있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차은정 번역)가 그것이다. 원제는 “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으로 2013년에 나왔다. 부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는’ 인류학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인류학도 지구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인류학’(Global Anthrop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1910년에 나온 뤼시앙 레비브륄(Lévy-Bruhl)의 “How Natives Think”(원주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원용한 것이다(한글번역은 김종우 역 <원시인의 정신세계>). 레비브륄이 ‘이성’이라는 사유능력을 유럽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면,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서도 ‘사유’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 인류학을 넘어서고(beyond) 있다.

이처럼 현대 학문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지구인문학의 분야도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지구살림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지 ‘문사철’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지구법학이나 지구인류학, 또는 지구민주주의나 지구종교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5] 한국철학 속의 지구인문학

이와 같은 지구인문학적 문제의식은 한국철학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추만 정지운과 퇴계 이황은 중국의 <태극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천명도>를 제작하였다. <태극도>가 태극에서 만물이 생성분화되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그린 일종의 ‘음양오행도’라고 한다면, <천명도>는 우주를 하나의 ‘원’으로 도상화하고, 그 안에 인간과 만물을 배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베리가 제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도상화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천명도>를 고도로 추상화시켜 ‘원’ 하나만 남겨 두면 원불교의 ‘일원상’과 상통한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지구구형설과 지구자전설 등을 주장하면서, “세계의 중심은 없다”는 탈중화주의를 선언하였다. 그 뒤를 이은 최한기도 <기학(氣學)>(1857)이나 <지구전요(地球典要)>(1857) 등에서 사유의 중심을 중국에서 지구로 전환하고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현대 서양의 지구학이나 지구인문학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었다고 한다면, 조선후기의 실학이나 개벽학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동학에서 시작하여 천도교, 원불교에 이르는 근대 한국의 개벽종교에서도 지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구적 상상(global imaginary)’이나 ‘지구적 의식’(global consciousness)과 같은 개념을 찾을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의 “천지부모 만물동포” 사상, 소태산 박중빈의 ‘일원’과 ‘사은’, 정산 송규의 ‘한울안’과 ‘삼동윤리’, 천도교와 원불교의 사해일가(四海一家)나 세계일가(世界一家)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인간과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구공화’(地球共和)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94년에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문화는 숙명인가?>(Is Culture Destiny?)에서 동학이나 불교와 같은 ‘아시아적 가치’를 언급하면서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 개념을 제창하였다. 그가 말하는 ‘지구민주주의’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도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1927~1898)이 제시한 경물(敬物) 개념을 연상시키고,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생태민주주의’7나 ‘지구법’과도 상통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구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인간세’ 또는 ‘인류세’에서 지구 중심, 생명 중심의 ‘지구세’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지구적 전환(地球開闢, Global Transformation)과 지구적 연대(地球共治, Global Governance)가 동반되어야 지구화로 인해 파괴된 지구시스템을 본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20년 8월 28일에 원광대학교에서 발표한 조성환·허남진, 「코로나 시대의 지구인문학」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발표 원고는 다음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www.wth.or.kr/modules/bbs/index.php?code=pds&mode=view&id=49& M_ID=31

1. 이문재, 〈일그러진 YS 정권의 ‘세계화’〉, 《시사저널》, 1998.01.15.

2. 유철종, 〈(체르노빌 참사 30주년)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재앙은 진행형〉, 《연합뉴스》,

3. Dominic Sachsenmaie, Global History, Global Debates, in: Connections. A Journal for Historians and Area Specialists, 03.03. 2005.
<www.connections.clio-online.net/debate/id/diskussionen-582>

4. Dipesh Chakrabarty, “The Human Condition in the Anthropocene”, The Tanner Lectures in Human Values, Yale University, February 18–19, 2015, pp.141, 165-167.

5. 토마스 베리 저, 이영숙 옮김,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6. 〈뉴질랜드, 자연 훼손하면 상해죄…'지구법', 한국은?〉, 《중앙일보》(온라인), 2017.04.15.

https://news.joins.com/article/21478072

7. 가령 Roy Morrison 저, 노상우 역 생태민주주의, 교육과학사, 2005; 구도완, 생태민주주의 : 모두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 한티재, 2018.


2021/10/17

인류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인류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인류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창비 주간 논평] "한반도 인류세의 문제는 평화의 문제"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  2019-08-22 08:46:23  |  2019-08-22 08:46:46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보다. 그동안 봐야지 벼르던 전시를 막 내리기 직전에 보았다. 'Dear Amazon: 인류세 2019'(일민미술관 2019.5.31~8.25)는 비서구권 중 인류세 논의가 가장 활발하다는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꾸려졌고 한국의 예술가와 환경운동가들도 참여했다. 세계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그 이름만 들어도 떠올리게 되는 생태 위기를 직접 묘사한 작품도 있지만 전시의 의도가 단순한 고발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보다는 인간의 반복된 행동이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세계 속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위치는 어디인지, 다양한 비인간 종들과 어떻게 공존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보라고 주문한다.

인류세라는 주제에 압도되어 전시장에 들어섰지만, 찬찬히 볼수록 소소한 재미도 있다. 브라질 하면 흔히 떠올리는 풍부한 천연자원, 즉 광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상 <기이한 광물이야기>(마베 베토니코 감독)는 광물의 발견과 채굴, 이용의 역사뿐만 아니라 광석이라는 물질 자체가 다양한 매체 속에서 어떻게 상상되고 재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크립토나이트라는 광석에 가까이 가면 힘이 빠지는 슈퍼맨의 고향 크립톤 행성은 자원개발로 황폐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지구별 인간들은 20세기 중반부터 우주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지치지 않고 이어오는 중이다. 한편 강에서 갓 낚아 올린 물고기를 가만히 안고 다독거리며 예의를 다하는 원주민들을 담은 작품도 있었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에 빚지고 살 수밖에 없으되 그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그들의 품위도 인상적이었지만, 사실 더 눈에 띈 것은 그 큰 물고기를 펄떡거리지 못하게 제어하고 있는 팔뚝의 힘이었다. 이 물고기를 꼭 잡아야 내가 산다는 비장함도, 잡힌 물고기를 대하는 고요한 의례의 시간도 TV 속 '도시어부'에게는 없는 것이다.

사실 전시의 개별 작품보다 흥미로운 건 한국 사회에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가 확산되어가는 방식과 속도일지 모른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상승하는 것보다 인류세 담론 관련 행사가 증가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 같다고 말한 학자도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여러 매체가 연이어 다루면서 인류세라는 용어가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인류세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자연환경에 미친 영향력과 자취가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2000년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약 1만 년 전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시작된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현생 인류의 활동의 결과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지구에 남긴 흔적들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농업이나 건설을 통해 엄청난 퇴적층을 유실시켰는데 이는 바다, 바람, 강 등 자연이 가진 침식력의 10배 이상이었다.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기후변화는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종(種)의 멸종을 가속화한다. 또한 전반적인 기온 상승으로 전염병과 산불이 증가하고,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올라가는 중이다. 해양의 산성화로 해양 생태계가 붕괴되는 한편 강물을 포함한 담수가 부족해지고 있다. 무엇 하나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인류세라는 용어 자체는 현생 인류의 활동이 지구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라는 뜻이지만, 그것이 종말론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올여름 더위가 작년보다는 견딜 만했다고 하지만, 사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연근해에서 잡히는 어종부터 내륙에서 재배되는 작물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반도에서도 기후 변화의 영향이 심각하다. 그뿐만 아니라 미세먼지와 방사능, 녹조로 가득 찬 강물, 미세플라스틱과 쓰레기 문제까지 우리의 삶이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는 이미 차고 넘친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4차산업혁명 시대'처럼 자의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유행어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류세'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학계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는 데는 이렇듯 먹고 입고 버리고 싸는 인간 일상의 모든 행위가 지구적 재앙에 기여한다는 실감에 힘입은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인류세 담론이 현 문명의 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점도 있다. 일단 인류세라는 위기의 시대를 만든 책임의 정도가 모든 인류에게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지적하지 않는다. 자연을 자원 취급하면서 파헤쳐 이용하고 화석연료를 엄청난 규모로 소비하는 행위는 여전히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며,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이용하고 광물을 채취하기 위한 개발행위에 저항하는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은 아직도 미발전 상태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무시된다. 1조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지만, 브라질 정부는 지금도 아마존 우림 지역에 새로운 개발 허가를 내주고 있고, 바로 지난 7월에는 원주민 지도자가 금광을 개발하려는 광부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세계 경제가 불안해서 세계 금 가격이 치솟는 중이라니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저항을 누르고 개발을 강행하려는 움직임은 거세지면 더 거세졌지 약화될 것 같지 않다.

북미 대륙에서도 동남아에서도 자원 채굴이나 개발을 강행하려는 세력들과 거기에 대한 저항 소식이 들려오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제주, 밀양, 성주 소성리, 4대강 사업으로 농사짓다가 쫓겨난 사람들까지, 한국 안에서도 주민을 밀어내고 상전벽해를 만들어내는 바람은 여전히 드세니까 말이다. 사실 막연하게 인류세를 성찰한다고 하면 근사하게 들리지만 내 집 앞, 내 고장의 개발 문제가 되면 이해관계가 얽혀서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런 구체적인 상황 인식과 정치적인 해결책 모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인류세 담론은 결국 한때 그럴듯했던 논의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실 파고 들어가면 한반도 평화와 노동문제까지 안 걸리는 것이 없는 게 바로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제주 강정을 들락거리는 핵잠수함의 문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확장되고 있는 군사시설의 문제를 보면 한반도에서 인류세의 문제는 평화의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2110 인류세 시대의 종교- 지구종교론을 중심으로 허남진

 인류세 시대의 종교- 지구종교론을 중심으로

허남진(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Ⅰ. 들어가는 말

요즘 인류세(Anthropocene) 논의가 여러 학문분야에서 눈에 띄게 논의되고 있다. 포스트휴머니즘, 신유물론은 대표적인 인류세 인문학의 흐름이다. 인류세는 지구시스템 과학자와 지질학자들이 인류의 활동이 지구 환경 변화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의미하기 위해 제안된 용어이다. 

지구 시스템 과학의 대표적인 연구결과가 바로 ‘인류세’이다. 이렇게 지구시스템 과학의 등장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발시켰다. 지구 시스템 과학의 사고체계는 생태적 사고에서 지구적 사고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 이렇게 지구 시스템 과학은 지구가 인간의 미래를 논의할 때 고려해야 할 하나의 실체로 드러나게 하는 등 지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이제 지구는 지구위기라는 상황과 대면하면서 학문적 성찰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한 여러 연구들의 공통된 견해는 ‘지구’에 대한 성찰의 촉구와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와의 관계 재 정립의 요구로 집약된다. 지구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을 인간 이외의 존재들과 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서 지구 시스템을 고려하여 인간 삶의 방식과 사회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류세는 환경위기, 기후변화 등 부정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인류세 논의에 등장하는 ‘지구역사(geohistory)’, ‘행성적 위기(planetary crisis)’,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재앙 (catastrophe)’ 같은 용어는 기존의 지구 환경 변화와 지속가능성 논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력 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구 행성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지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롭게 지구와 인 간의 관계를 사유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류세는 성찰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처럼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던 우리의 복합적 거주지와의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 인 차원도 있다. ) 

인간중심주의적 습관의 결과가 지구를 전지구적 환경 위기로 몰고 가버린 현재 인류세의 시대에, 최 근 ‘지구(earth)’라는 수식어가 붙은 용어들이 학계에서 눈에 띄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 다. 생태학이 생물학적 연구에서 차츰 다양한 학문적 영역으로 확대된 것처럼, 지금까지 지구는 자연과학 중심으로 분석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통합적 지구학이 시작된 것이다.3) 

종교영역에서도 지구에 대한 성찰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구종교(Earth Religion)’, ‘지구신학(Theology of the Earth/ Theology for Earth)’이다. 본 발표는 지구종교론 이 출현하게 된 배경과 그 특징을 통해 인류세 시대 종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인간의 조건과 지구소외

대지 혹은 지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일찍이 하이데거, 니체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니체는 이 원론적 자연관을 거부하면서 지구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토대이며 생성의 법칙이 지배하는 장 소로 이해했다. ) 그러나 지구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관계는 점차 이루어진 상업주의, 산업화, 기술 화를 거쳐 전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를 통 해 대지는 인간의 삶의 근거로부터 점차 인간을 위한 거대한 재료로 전락하게 되고, 지구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점차 부정되고 왜곡되며, 망각되어 온 것이다. ) 

데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지구’를 인문학의 범 주로 등장시킨 인물로 소개한다. ) 하이데거는 지구를 철학적 범주로 설정하면서 자신의 존재론과 연결시켜 지구를 성찰한다. 그에게 ‘지구(Erde)’는 흙과 지구 모두를 담고 있는 함축적 의미로서 생 명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다. ) 그는 지구를 “어딘가에 퇴적된 질료 덩어리 로서의 지층이라든가, 혹은 천체에 대한 천문학적 관념과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어 생 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인간이 거주하려는 시도의 근거였음을 강조한다. ) 그래서 세계는 지구로부터 떠날 수 없다. 세계와 지구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 다 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거주’란 인간이 지구 위에서 땅을 딛고 실제로 존재하는 양상을 의미한 다. 이를 지구, 하늘, 신(성스러운 것), 인간이라는 ‘사방’(das Geviert)개념을 통해 논의한다. 여기 서 지구는 “하천, 암석, 식물 그리고 동물을 돌보고 보호하면서 건립하며 떠받치고 있는 것, 즉 자 양분을 공급하며 열매를 맺게 해주는 것”으로 만물의 어머니로 사유되고 있다. ) 그는 사방은 유기 적 관계로 사방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이 거주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구를 보살핀다는 것은 지구를 구원한다는 것이며, 이는 지구를 지배하지 않고 또한 지구를 복종케 만들지도 않는 것이다. ) 이처 럼 하이데거에게 지구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사유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인간의 조건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지구소외로 이어진다. 1957년 10월 4일, 인류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우주를 향해 발사하였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의 서론에서 “1957년 인간이 만 든 지구태생의 한 물체가 우주로 발사됐다”면서 ‘스푸트니크 1호’발사를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인 식했다. 그녀는 “기독교가 비록 지구를 눈물의 계곡이라 부르고 철학자들이 육체를 정신이나 영혼 의 감옥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지구를 인간 육체의 감옥으로 생각한 적 도 없으며”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던 근대의 인간해방이 이제 모 든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아렌트에게 지구는 인간이 별다른 노력없 이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 

아렌트는 인간과 지구 사이에 생긴 거리(distance)에서 지구소외를 포착한다. 이제 인간은 인공 위성을 통해 지구를 대상으로 떼어 내어 보는 시점이 가능해 졌다. 지금까지 일체화되었던 상태에 서 관점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가 생겼다는 점에서 소외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지구 에 묶여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고 아르키메데스적 관점으로 지구 밖에서 지구에 묶여 있는 자연을 생각하고 다루게 된 것이다. ) 이를 아렌트는 “우리는 항상 자연을 지구 밖 우주의 한 점의 관점에서 다룬다. 아르키메데스가 서 있기를 희망했던 점에서 실제로 서지 못하고, 인간의 조 건 때문에 여전히 지구에 구속되어 있는 우리는 아르케메데스적 점에서 지구를 자유롭게 다루는 방 법을 발견했다” )고 말한다. 여기서 아렌트는 인간이 지구에 묶인 존재임에도 ‘지구소외’를 통해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하고 언젠가는 지구 자체도 파괴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바로 지구 와 자연은 인간의 탐구․분석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다시 말해, 인간은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 어머니인 지구에서 벗어나 이제 지구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15)

Ⅲ. ‘ 위기의 지구’ 와 ‘ 지구’ 에 대한 성찰

주지한 바와 같이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우주적 관점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 주시대 개막과 더불어 지구의 위기에 대한 의식 역시 심화된다.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주장한 ‘인간 의 조건’이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1963년 레이철 카슨은 침묵의 봄 출간을 통해 인간이 만든 화학 물질인 DDT가 지구를 죽음의 행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경고했고, 1970년대 인류의 화석연료 소비 증가로 인해 지구가 뜨거워져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자연스럽게 전 지구적 환경운동으로 이어졌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희의”는 ‘오직 하나뿐인 지구’를 슬로건으로 열린 최초의 환경회의였다. 

이어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구정상회의(Earth Summit)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서 삶의 터전인 지구의 통합적이며 상호의존적인 성격에 기초한 ‘리우선언’이 발표되었고, 이 ‘리우 선언’은 초기에 ‘지구헌장(Earth Charter)’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유엔인간환경회의”가 ‘하나뿐인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회의였다면, 리우정상회의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실천적 방 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처럼 1990년대 무렵 지구 자체가 파멸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 1992년 급진적 생태운동 단체인 지구해방전선(Earth Liberation Front)이 설립된 것도 궤를 같이 한다. 

당시 미국의 전 부통령이자 환경운동가인 앨 고어(Al Gore)는 위기의 지구에서 지구위기를 지 구와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한 세 가지 변화 즉 인구증가, 과학과 기술의 혁명, 환경과 인간의 관계 설정에 대한 사고방식 등으로 인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17) 이렇게 서구에서는 지구위기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흐름이 지구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었다. 

지구 그리고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베리이다. 대표적인 지구 신학자로 평가되고 이후 지구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18) 그는 지금까지의 학문들은 모 두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구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에 대한 재성찰을 주장했다. 지구의 꿈에서 지구와 생물 그리고 인간이라는 지구의 모든 구성원이 친밀한 지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면서 상호증진적인 인간과 지구의 관계의 확립을 촉구했다.19) 황혼의 사색에 서는 본격적인 지구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 인간은 지구시스템을 온전히 보존해야 하며, 지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구에 대한 경외감을 발견할 것을 주장했다.20) 토마스 베리에게 지구시스템은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말했던 인간의 조건과 다름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는 지구에 대한 성찰을 통 해 착취의 대상이 아닌 사귀어야 할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생태대(Ecozoic Era)’라 는 새로운 시대 개념을 제안하였다.21)

주지한 바와 같이, 토마스 베리는 지구위기를 지구에 대한 경외감의 상실에 찾았다. 토마스 베리에게 영향을 받은 래리 라스무쎈은 “내게 새로운 시대의 종교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가 말하는 새로운 시대의 종교는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Earth-honoring Faith)’이다.22) 바로 이 지점에서 ‘지구종교’ 혹은 ‘지구신학’이 출발한다.

Ⅳ. 지구종교론의 양상

1. 시민종교로서 ‘ 테라폴리턴 지구 종교’ (terrapolitan earth religion)

행성(planetary)은 ‘cosmos’, ‘cosmopolitan’, ‘earth’, ‘world’ 등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며, 최근에는 가이아영성처럼 환경운동에서, 코스모폴리턴주의(cosmopolitanism)와 연관되어 테라폴리턴(terrapolitan)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23) 한 예로,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는 ‘행성’이 ‘글로브’를 대체하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글로벌의 주체가 아니라 행성적(planetary) 주체, 세계(worldly)의 존재가 아니라 행성적 피조물로 볼 것을 주장했다 ‘글로 브’(globe)라는 용어는 그 안에 있는 생명체들의 다양성을 단일화하는 개념으로 쓰이는 반면, ‘행 성’(planet)은 개별적인 생명체 고유의 ‘다름’(alterity)과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행성’이 보다 적합한 용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최근에 서구에서 ‘지구화시대’보다 ‘행성시대(planetary age)’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화현상의 비판적 고찰, 인문과학연구39, 2020, 189-190쪽.

17) 앨 고어, 위기의 지구, 삶과 꿈, 1994, 2쪽.

18) Anne Marie Dalton, A Theology for the Earth: The Contributions of Thomas Berry and Bernard Lonergan, University of Ottawa Press, 1999.

19) 토마스 베리, 지구의 꿈, 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16-17쪽.

20) 토마스 베리, 메리 엘블린 엮음, 황혼의 사색-성스러운 공동체인 지구에 대한 성찰, 박만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155-162쪽.

21) 토마스 베리· 토마스 클락,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김준우 옮김, 에코조익, 2006, 68쪽.

22) 래리 라스무쎈,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윤리, 한성수 옮김, 생태문명연구소, 2017, 15-17쪽.

23) Christian Moraru. Reading for the Planet: Toward a Geomethodolog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5, p. 40


북미 종교학자 브론 테일러(Bron Taylor)는 현재 지구 종교성(Earth Religiosity)은 급진적인 환 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지구종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 다고 말한다. 테일러는 야생의 법(Wild Law) 저자 코막 컬리난(Cormac Cullinan)의 ‘지구이데올 로기(Earth ideology)’와 ‘지구민주주의(Earth democracy)’를 주장하는 생태여성학자 반다나 쉬바 (Vandana Shiva)의 ‘지구중심적 사고(Earth-centered thinking)’를 일종의 지구민족주의(earth nationalism)와 시민 지구종교(civic earth religion)로 보았다. 

테일러는 이러한 지구종교를 어두운 녹색 종교(dark green religion)로 개념화한다. ) 그가 지구 종교를 ‘어두운 녹색 종교’로 개념화한 이유는 지구중심적 사유가 어스 퍼스트(Earth First)와 지구 해방전선과 같이 인간예외주의(인간혐오)로 확장될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정치학자인 대니어 듀드니(Daniel Deudney)가 제안한 ‘테라폴티턴 지구 종교 (terrapolitan earth religion)’에 주목했다. ) 듀드니는 지구헌법(Earth constitution)과 지구 민족 주의(Earth nationalism) 그리고 가이아 지구종교(Gaian Earth religion)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 듀드니는 주요 환경문제의 출현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국가중심의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 다고 지적하면서 테라폴리턴(terrapolitan) 주권을 제안한다. 지구촌의 정치적 연합의 중심적 기반 은 지구(earth/terra)이어야 하며, 지구촌(global village)의 새로운 구성에 적합한 정치적 연합은  지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테라폴리턴을 주장한다.. ) 왜냐 하면 지구는 모든 인간의 공 동의 집이라는 장소성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지구민족주의(Earth nationalism)와 함 께 그 공동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로서 가이안 지구종교(Gaian Earth religion)제안 한 다. 듀드니의 가이안 지구종교는 토크빌의 주장에 따라, 공화주의 정치 질서에는 특정한 형태의 종 교가 필요하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칼 세이건이 우주시대 개막은 지구를 정치적 국경이 없는 하나의 통일된 행성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켰다고 말한 바와 같이  ), 그는 우 주에서 촬영한 지구의 정치적 메시지는 지구가 완전히 통합된 생명영역이며 모든 인간의 집이라는 경험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서 지구민족주의와 지구애국주의의 가능성을 본 것이 다. 듀드니는 지구민족주의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전체 지구(whole Earth)와 지구본(globe)을 비교 한다. 즉, 지구본은 국민국가를 표현하는 인공적인 정치적 경계선이 있지만 전체지구에서는 이러한 국민국가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30)

테일러는 듀드니의 생태학적 상호의존성의 강조, 집으로서 지구와 친족으로서 인간이외의 존재에 대한 정서적 연결은 짙은 녹색 종교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파악한다. 특히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가 보장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 비판한다. ) 

주지한 바와 같이, 듀드니의 가이아 지구종교는 테라폴리티언의 정체성의 원천으로서의 잠재적 역할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 스튜어트 밀, 홉스 그리고 루소 등의 종교와 정치 관계에 대한 분석 의 공통점은 종교를 특정한 정치적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 래서 지구종교를 시민종교로서의 잠재적 역할과 지속가능한 공동 정체성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 또한 지구를 존중하는 행동의 동기를 부여시키는데 지구종교가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 보고 있 다.33) 

애드가 모랭(Edgar Morin)과 안느 브리지트 케른(Anne Brigitte Kren)은 지구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중심(Earth-Centered)적 관점에서 지구시민(citizens of the Earth)과 지구연방(Earth Federation)을 주장한다. 이들 여기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사건과 하나의 지구라는 단위를 강조 한다. 

그들은 지구에 태어난 생명은 지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생태학적 상호의존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이에 따라 지구라는 행성은 모든 인간존재들의 ‘공동의 집’, ‘모태(母胎)’ 나아가 ‘조국’이기 때문에 지구운명공동체를 이루게 된다고 논의한다. )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 하나뿐인 지구’의 위기이다. 기술과학을 지구를 괴롭히는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이 같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지구 연합체가 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서는 지구시민권, 지구시민의식, 지구정치여론 그리고 지구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인류를 지구시민(citizens of the Earth)로 개념화하면서 정치는 인간의 운명뿐만 아니라 지구의 운명과 변화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지구정치학’을 주장한다. 지구정치학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의 우명과 변화까지 책임져야 하는 정치이다. 즉 인간정치, 지구적 책임정치, 다차원적이지만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정치이다. 지구는 물리적, 생물학적, 인류정치학적 복합체이기 때문이다.37) 모 랭과 게른 역시 모든 인간존재와 국가를 연결하고 일치 시킬 수 있는 지구종교(Earthly religion)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연결하고 일치시키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의 어원에 착 안하여 ‘다시 연결짓다’는 종교의 본질에 접근한다. 따라서 그들이 제안하는 지구종교는 지구를 보 존하고 인간의 일체성을 완성시키며, 인간의 다양성을 보존할 수 있는 종교가 된다. ) 이것은 듀드 니의 시민종교로의 가이안 지구종교에 대한 요구와 일치한다.

 

2. 지구를 위한 종교(Religions for Earth)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지구화과정에서 우리의 공동의 집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인 지구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지구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그 역시 지구는 우 리가 서있는 땅,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를 수 있는 땅, 천국과 대비되는 지상 생활의 서식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면서 우리의 집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지구에 대한 성찰을 위해 제임스 러브 록의 가이아론을 끌어들인다. 그는 가이아론은 지구를 신격화하려는 시도가 아닌 인간중심주의를 종식시키고 인류를 지구 체계 전체의 삶에 통합시키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지구를 생명체를 창조하고 다양한 형태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서식지를 만드는 유기체로 이해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 자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지구의 피조 물로 인식한다. 그가 보기에 지구는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닌 오히려 생명을 낳고, 생명을 유지하 고, 생명에 필요한 조건을 만드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몰트만은 ‘세계종교(world religion)’에서 ‘지구종교(Earth religion)’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지구가 존재하지 않으면 세계종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종교가 되어야 하며, 인간을 전체로서 행성 지구 속에 통합 된 요소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잊혀진 생태학적 지혜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재발견하고 지구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지 구종교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논한다. 따라서 원시적인 것으로 경시했던 자연종교를 인정하고 산 업화 이전의 지혜를 산업화 이후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0)

최근 기독교 신학에서는 전 지구적 파멸 위기에 직면하여 지구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구신학’에 논의가 활발하다. 지구를 위한 신학(Theology for Earth)은 1954년 조셉 시틀러 (Joseph Sittler)의 「A Theology For Earth」에서 처음 등장했다.  )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본격적 으로 지구신학이 논의되고 있다. 지구신학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구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관계에서 시작한다. 또한 지구를 생명체와의 관계성에서 생명 의 장소(topos)와 거처(oikos)로, 하느님과의 관계성에서 하느님의 장소와 거처로, 마지막으로 인간 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의 장소와 거처로서 성찰한다.42)

대표적인 지구신학자는 생태여성신학자 셀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이다. 맥페이그는 신학자 의 과제는 기독교 전통의 중심 상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억압받고 있는 지구와 지구에 있는 모 든 피조물들 해방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구신학을 제창한다.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지구 위에 있는 이방인 혹은 여행자가 아닌 땅에 속한 사람 즉 지구적 존재로 이해하며, 하느님을 지구는 물론 우주 전체의 진행과정에 현존하는 분으로 이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신학은 ‘지구를 구원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 

또한 그녀는 지구 위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즉 인간은 지 구의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적 존재한다는 것이다. ) 이처럼 지구의 몸과 더불어 살아가는 몸들이 라는 은유를 통해 지구에 속해 있는 존재라는 인간관을 제시한다.45) 그래서 그에게 지구신학은 사 람들로 하여금 터전인 땅 위에 올바르고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소 외받았던 억압받는 이웃들, 우리 모두를 지탱시켜 주는 지구, 그 밖의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 립하는 신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지구행성의 위기에 적합한 정치신학을 재규정하기 위해 “지구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을 주창한다. 켈러는 지금까지 동등한 존재로 인정되지 않았던 인간이외의 존재들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존재를 회복시 켜주는 정치를 신학적으로 성찰한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의 정치와 경제제도로는 지구적 생태곤경 을 해결할 수 없다는 신학적 비판 속에서 ‘지구정치신학’을 제창한다.46) 

켈러는 인간은 지구행성에서 생태적 관계 속에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들과 공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지구행성과 분리될 수 없는 지구적 존재들(earthlings)임을 강조하면서 지구를 성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구는 그의 정치신학의 공간에 위치된다. 그에게 지구는 우리의 집합성의 영역을 비옥하게 하는 존재이다. 켈러는 예외주의를 비판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영역에서 배제된 서민이하(undercommons) 즉 정치적인 것 밑으로 떠밀어지고 자원이나 욕구, 서비스의 흐 릿한 배경으로 간주됐던 사람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 그리고 ‘지구’까지 ‘서민(commons)’으로 포함 시킨다.47) 이처럼 인간, 자연, 지구 모두를 포함한 지구 행성 전체로 공동체 의식이 확대되어야 함 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몸을 통해 물질세계와 소통하며, 그래서 몸이 속한 지구가 문제가 될 때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몸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정신도 문제 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지구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earth)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이다.48)

3. 지구를 모시는 종교49)

한국 개벽종교의 공통된 특징은 ‘천지’를 부모와 같은 존재로 받드는 ‘지구를 모시는 종교’라는 점에 있다. 해월 최시형은 천지를 부모와 같이 섬겨야 한다는 ‘천지부모론’을 제창했다. 물론 천지 를 부모처럼 인식하는 사유는 역전(易傳)의 ‘건칭부곤칭모(乾稱父坤稱母)’에서 확인 되듯이 고대 중국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잠재적 가능성은 있지만 천지부모를 공경해야한다는 실천적 윤리로 까지는 확장시키지는 않았다. 

해월의 천지부모론은 수운 최제우의 ‘천지은혜론’에 근거하고 있다. 수운은 동경대전 「축문」에 서 “천지가 덮고 실어주는 은혜를 느끼며, 일월이 비추어 주는 덕을 입는다”50)라고 하여 천지의 은 혜를 강조했다. 수운의 ‘천지은혜론’은 해월의 ‘천지부모론’으로 체계화된다. 해월에 의하면 천지(天地)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생존 조건이며, 만물은 천지라는 ‘포태’ 안에서 생장하는 자식과 같고, 그런 의미에서 천지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은혜롭고 공경해야 할 존재이다. ) 해월은 천지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의 조건으로 이해했고, 한걸음 나아가 천지를 부모처럼 섬기 라는 천지공경의 실천윤리까지 설파했다. 이러한 천지부모론은 자연스럽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 재가 동포 즉 ‘물오동포(物吾同胞)’가 된다.

45) 샐리 맥페이그, 풍성한 생명, 장윤재· 장양미 옮김, 이화여대출판부, 2008, 209쪽.

46) 박일준, 공생의 정치신학-캐서린 켈러의 ‘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 한국기독교신학논총116, 2020, 329쪽.

47)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pp. 5-6. ; 박일준, 앞의 논문, 340-341 쪽.

48) 박일준, 앞의 논문, 347쪽.

49) “ 지구를 모시는 종교” 는 필자의 지구를 모시는 종교-동학과 원부교의 ‘ 천지론’ 을 중심으로(원불 교사상과 종교문화88, 2021, 155-183쪽)를 

50) “ 叩感天地盖載之恩, 荷蒙日月照臨之德.” (동경대전, 축문). 이 글에서 인용하는 동경대전의 원 문과 번역은 김용휘, 최제우의 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을 참고하였다.

52) 동학의 천지부모론은 소태산 박중빈의 천지은 교리로 이어졌다. 소태산은 천지은‧부모은․동포은․ 법률은으로 구성되고 있는 사은(四恩)을 설명하면서 천지·부모를 ‘부모 항’에, 동포·법률을 ‘형제 항’ 에 넣고 있는데, 이는 소태산 역시 “천지를 부모로 간주한다”고 하는 해월의 천지부모사상을 공감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원불교에서 ‘천지’는 “그것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은혜로운 존재로 여겨지고 있고, 모든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로 간주되고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천지의 은혜를 입고(피은被恩)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은혜에 보답할 윤리적 책임이 동반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불교에서 말하는 ‘천지보은(天地報恩)’이다. ) 특히 천지의 은혜를 저버리면 벌을 받고, 천지의 은혜에 보답하면 우대를 받는다고 하는 천지배은(天地背恩)과 천지보은(天地報恩)이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천지배은은 최근 프란치스 코 교황이 제안한 ‘생태적 죄’의 요구와 매우 유사하다. 

 해월이 천지부모론과 천지공경을 제시한 것처럼, 소태산은 천지은과 천지보은을 말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이 동학과 원불교의 ‘천지’를 좁은 의미의 ‘지구’로 이해하면, 동학과 원불교는 ‘지구를 모 시는 종교’라고 명명할 수 있다. 

Ⅳ. 나오는 말

 차크라 바르티는 인류세의 위기를 경외감의 상실에서 찾고 있다. 새로운 정치사상의 전통을 재 구축함에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와 우리와의 관계에 경외심의 요소를 결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인간과 지구 그리고 만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 요소를 경외심으 로 보고 있다. 이는 인류세 시대에 종교가 무엇을 모색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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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Docuprime_인류세 1부- 닭들의 행성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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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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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경계를 넘는 지구학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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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경계를 넘는 지구학모색
시간: 2021년 3월 19일 08:00 오전
원불교사상연구원 유튜브 채널 링크:
유튜브 댓글로 의견 및 질문 참여가 가능합니다.
-학술대회 발표 요지-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원장 박맹수 총장)이 오는 3월 19일에 “지구화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국내에는 아직 낯선 개념인 ‘지구학’은 “지구자연과학, 지구사회과학, 지구인문과학”을 통칭하는 새로운 학문 범주로, 20세기 후반에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Global Studies를 확장시킨 개념이다.
<2020년도 한국연구재단 학술대회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기조강연(박치완)을 포함하여 지구형이상학(이원진), 지구정치학(김석근), 지구평화학(원영상), 지구인류학(차은정), 지구종교학(조규훈), 지구재난학(가타오카 류), 지구예술학(오쿠와키 다카히로), 지구수양학(이주연), 지구교육학(이우진), 지구윤리학(허남진), 지구유학(김봉곤), 지구기학(야규 마코토), 지구살림학(조성환) 등 총 14개의 지구학 관련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국내에서 지구학을 주제로 이 정도로 방대한 규모로 학술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2016년에 “근대문명 수용과정에 나타난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 연구”를 주제로 6년 동안 대학중점연구소로 선정되었는데 이번 학술대회는 그 다음 단계의 연구를 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지구인문학 학술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2020년 4월부터 1년 동안 매주 3시간씩 ‘지구인문학 스터디’를 개최하고 울리히 벡의 <지구화의 길>을 비롯하여 조지형 등의 <지구사의 도전>,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 사이토 코헤이의 <생태사회주의>, 김지하의 <생명학>, 혜강 최한기의 <지구전요>와 <기학(氣學)> 등 지구인문학 관련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이번 학술대회가 종래의 인간과 국가 중심의 학문에서 벗어나서 지구와 만물과도 공생할 수 있는 자생적 인문학을 탄생시키는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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