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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2

일선님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농장 방문 1991년

 나단청

친구요청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정보가 페이스북에 별로 없어서..

자진 신고합니다.😊

저는 유상용씨와 동갑내기 이면서 산안농장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경상남도 진주에 살고 있고 지리산 고운동에서 이남곡 선생님과 인문 수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산안 농장 있을때 선생님 어머님께서 농장으로 7박8일 특별강습연찬회 오셨지요.

캐나다에서..

오래전 일이지만 열정이 대단하신 할머니로 기억 됩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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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nt Yesterday at 11:09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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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

You sent Today at 11:57

저의 어머니 일선님이 산안농장에 가신 것이 몇년도였던가요? 어머니 일기에서 한번 찾아보려고요. 그리고 그때의 어머니 기억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을 조금 더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아 잘 모르는 어머니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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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나단청

단청 sent Today at 15:02

1991년경인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멀리 토론토에서 ?  를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그게 '행복'  이었는지 '자유'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강습연찬회 감상문이 아직 남아있는지 유상용씨가 농장에 연락해본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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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nt Today at 15: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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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6

유상용 [마을에서 공부하기 ㅡ 진동 마을인문학]

Facebook: 유상용 tcS4p5onmsorsegde 

유상용
tcS4p5onmsorsegde  · 
[마을에서 공부하기 ㅡ 진동 마을인문학]
6월14일(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열릴 예정인 진동의 마을인문학 강좌는
‘진리를 찾아 먼 길 떠나지 않아도’ 

동네에서 함께 읽고, 묻고, 탐구하는 가운데
보통의 동네에서 보통의 우리들로서, 
삶과 행복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강사도 동네사람,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며 성장하는 마을의 공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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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 도덕경 – 안성균 (양도지구살림 대표) 
6/14, 6/21, 6/28 7/5
전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지혜의 보고,
덜 소유해도 만족하며 행복을 찾아가는 법, 남과 비교하지 않고 경쟁을 넘어 자기다움을 사랑하는 법을 전하는 <노자>와 욕심을 내려놓고 최선을 다하며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삶을 위한 안내서 <노자 도덕경>을 만납니다. 

2 동경대전 – 황선진 (밝은마을 대표) 7/12, 7/19, 7/26, 8/2
코로나19, 기후위기 등 너머에서 이리로 오고 있는 세상. 그 새로운 세상을 이끌 철학은 무엇인가? 일찍이 160여 년 전, 새로운 문명을 예견했던 수운 최제우 선생. 수운선생의 육필 <동경대전>! 동경대전에 담긴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3 ‘우리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 노광훈 (산마을고 교사) 8/16, 8/23
글쓰기는 자기를 찾고 자기 말을 찾고 자기 삶을 찾는 가장 좋은 공부다. 자기를 돌아보는 힘은 자기 삶을 정직하게 쓰는 글쓰기에서 나온다. 글은 왜 쓰고,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보자. 자기 이야기를 자기 말로 쓴 글을 함께 나누면서 글을 보는 눈을 기르고, 글다듬기는 어떻게 하는지 공부해 보자.
1차시 : 글은 왜 쓰나? 무엇을 어떻게 쓰나?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글쓰기 다섯 단계. 
2차시 : 생활글(10줄 일기) 쓰고 글 합평하기. 글 다듬기.

4 빅히스토리 – 백영민목사 
9/6, 9/13(바뀔 수 있음)
화가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근거’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물음에 어떠한 답을 가지고 있나요? 그 답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의 답을 ‘빅히스토리’로 떠나는 마을 인문학에서 함께 찾아보면 어떨까요?

5 내가 만난 세상의 공동체마을들 ㅡ  유상용 (진동 대표) 
10/4, 10/11(바뀔 수 있음)
1. 일본 야마기시공동체 / 미국 에미서리공동체 등 
2. 영국 브루더호프공동체 / 한국 성미산마을 등
: 공동체, 뭐 특별한 것 있을까? 좀 더 따뜻한 가족의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 실수해도 서로 웃으며 보아주고 무슨 일이 있는지 하고 서로 관심 가는 것, 살면서 조금씩 더 안심하고 편안해지는 사람들 사이. 경제도 마음도 같이 해결해가자! 혼자서 외롭게 나두지 않는 그런 사이 사이 사이.
진동은 어떤 공동체로 되어가고 싶은 지 함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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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무너미 다녀와서 쓴 글  


지난 4월 17일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렇게 먼 길을 가보기는 8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것도 기차를 타고 가게 되어 혼자서 괜히 설레이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기차 타는 것도 18년 만입니다.
  처음에 무너미 글쓰기 모임에 노미화 선생이 전화로 꼭 와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건성으로 "예, 예." 대답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준이네 아부지가 이오덕 선생님 병세가 많이 나빠졌다는 말에 서울 김경희 선생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둘이서 억지로 끌고 가더라도 병원에 모셔 가자고 한 거지요.
  기차로 무극까지는 순조롭게 잘 갔습니다. 그런데 무극역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어쨌든 무너미까지 혼자서 간다는 욕심으로 택시를 탔는데 여태까지 잘 온 길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노광훈 선생이 마중 나온 것도 모르고 아까운 택시비만 마 천이나 냈으니까요. 안동에서 제천까지 4천 5백원, 제천서 무극까지 1천 5백원 합쳐서 6천원인데 택시비는 거의 갑절이 되었으니까요. 돈도 아까왔지만 노 선생한테 많이 미안했습니다.

  어쨌든 글쓰기 선생님들 만나 좋았습니다.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노광훈 선생은 머리를 깎아 흡사 영화 '유리'에 나오는 박신양이 같았고, 황금성 선생은 앞으로 외무부 장관이 됐으면 싶었고, 황시백 선생은 가장 노릇 잘 하는지 좀 의심스러웠고, 주중식 선생은 더 젊어진 것 같고, 이상석 선생은 언제나 착한 아저씨 같고, 원종찬, 김신철 선생 두 사람에겐 겨레아동문학선집을 받고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엔 주중식 각시가 운전하는 차를 여섯 사람이 타고 왔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려도 아무도 방귀 한 번 뀌지 않아 차 안 공기가 깨끗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닷새 동안 끙끙 앓고 나서 오늘 겨우 이 글을 냈습니다. 조용명 선생 몸 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상준이네 어머니께서 힘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4월 24일 권정생) ▣ (한국글쓰기연구회,『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제45호, 1999년. 5월)





2020/01/18

12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 인터넷 강화뉴스
일본 스즈카의 도시공동체를 방문한 강화의 딸들

유상용
승인 201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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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실현을 위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에서 18년을 살았다. 2009년 강화로 이주해 현재는 양도면 삼흥리에서 펜션을 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2월,

20살 전후의 강화의 딸들 4명이 약 2주간 일본 미에(三重)현의 스즈카(鈴鹿) 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인 'AS ONE COMMUNITY'를 다녀왔다. 내가 ‘강화의 딸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친구들이 강화에서 나고 자라거나 20년 가까운 강화 지역사회 만들기의 혜택을 받고 자라난 첫 세대로서 ‘강화의 딸들’이라고 불릴만한 대표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여군 목사의 딸 승민이, 밝은마을 이광구 이사장의 딸 나리, 산마을 고등학교 노광훈선생의 딸 해원이, 장진영 화백의 딸 해인이, 네 명은 스즈카에서의 체험을 강화에서도 살려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스즈카 시의 AS ONE COMMUNITY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경영을 지향하는 회사, 생활과 가계 등 인간생활 전반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창조하는 지역 사회, 개인의 지적 정서적 건강을 지원하는 심리센타 등이 네트워킹된 ‘도시 공동체’이며 사회활동체이다. AS ONE COMMUNITY는 성인들을 위한 인생탐구학교인 ‘사이엔즈 스쿨’과 인간-사회 연구를 위한 ‘사이엔즈 연구소’와 연결되어 PIESS 란 NPO단체의 한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오랜 친구인 이광구 군과 지역 분들께 청년들의 체험의 장으로 소개한 것은, 이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이 내가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던 곳과 이어진 일본공동체 출신들이고, 생활공동체의 한계를 넘어 본질을 사회 전반에 보편화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10년을 모색해 온 결과 이제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로서는, 인간사회 전반을 향한 거대 담론이 사라진(?) 요즘, 사람과 사회의 이상적인 존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한국의 (지역)사회운동의 방향을 찾는데도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특히 다음을 준비해갈 청년들이 미리 맛보기를 바라며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번 교류는 작은 일이지만 가기까지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나대로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써본다. 앞부분은 나의 사적인 과정인데 ‘강화를 공동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나의 생각을 적어보았고, 뒷부분은 애즈원 공동체를 체험했던 청년들의 교류체험기를 싣는다.



작년 4월초였다

나는 밝은마을의 황선진 선배 덕분으로 양사면에 있는 빈집을 빌려 우선 필요한 짐만을 옮겨놓고 강화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자리를 잡는 대로 여름까지는 다 같이 이사를 올 생각을 하고 아직은 꽃샘추위가 남아있는 봄 4월의 강화에 선발대로서 왔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곳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일명 산안마을)라고 하는 곳으로 7가족 30여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이다.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일본 각지에는 30 군데 정도의 공동체가 산재하여 서로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60년대 후반에 농촌운동의 하나로 소개되어 유정란 양계의 보급을 위주로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공동체를 결성하여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기가 지나갈 무렵 그간의 10년을 돌아보며 나는, “사람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뿌리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겠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그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태주의, 공동체, 자연농업 등의 관련 책을 읽고, 실천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탐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경기도 발안에 위치한 산안마을을 만나게 되었고 28살의 청년으로 마을에 합류하여 결혼하고 아이 기르고 여러 활동들을 해오다 18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작년에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초기에 시작한 분의 생각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대들의 뜻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반 이상의 식구들이 1년 사이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누구의 생각을 옳다하고 맹신하여 따르거나, 자신의 생각도 고정하여 굳어지지 않고 ‘무고정 전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물심양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한 야마기시즘도 다시금 고정의 길로 접어 들어가 더 이상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원인은 역시 그 것을 구성하는 사람의 ‘질’을 높이는데 실패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고 그것이 야마기시즘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라는 해묵은 인간문제에 당면하여 우리들 역시 좌초한 것이다.

산안마을을 나오기 전까지의 5~6년간 나는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청년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인데 하나는 물론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 성장과 차세대의 육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산안마을에서 해오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더욱 유연하면서도 목적에 맞는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또 하나 개인적인 관심으로서 한일-아시아 교류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앞으로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의 관점이 국경의 울을 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류가 많은 산안마을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된 활동이 본 괘도에 오르자 나는 야마기시 씨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가장 소중히 한다.’ ‘기구와 제도를 잘 정비해 놓고 그 다음은 사람의 성장에만 힘을 쏟으면 사람의 성장에 따라 사회의 성장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된다.’ ‘ 어떠한 속박도 규제도 없이 무수히 이합집산하고 무한히 성장하도록 장치한다.’ 등이다. 야마기시가 본 세계는 개인과 사회, 정신과 물질 등이 대립이 아닌 조화 - 합일된 세계이고,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즘’이란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1900~1963) 씨의 사상으로서 한국에서는 산안마을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이나 유정란 양계의 생산방식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지적, 정신적 각성을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변혁하여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려는 혁명사상이다. 60년대 후반부터 40년 정도 한국사회에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일반에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도 일부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동안은 자신도 그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얕고 체험으로 터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고,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방식으로 하자면 야마기시즘이란 ‘후천개벽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인류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진리적 사회구성방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 종교사상의 가장 큰 주제인 후천개벽이란, 지구와 인류가 일정단계의 성숙기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발달시켜온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정신의 계발이 더욱 진전되어 물질과 정신이 고루 발달한 참된 문명사회가 이룩된다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 사상들은 그 ‘실현방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종교로 되었으나 야마기시 씨는 “이상은 방법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여 ‘사회실천 사상이며 활동’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2000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의 산안마을에서 40대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오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2000년도 일본에서도 ‘실현지’ ‘야마기시즘’ 등에 대한 고정된 생각에 의문을 가진 40대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가 그 제안들이 당시의 리더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결국 대거 실현지를 나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가족을 포함하여 약 200명 가량 되는 많은 인원이 실현지 주변이나 대도시 토쿄에 살면서 사람과 사회에 관한 실험들을 지속해 왔었고, 그 중에서도 ‘스즈카’라고 하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카 시는 일본에서는 F1 자동차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혼다자동차의 부품공장이나 근처에 파나소닉 TV 액정공장이 있다. 농업도 발달하였고 북쪽으로는 스즈카 산맥이 자리를 잡고 동남으로는 일본 동해안이 인접해있다. 그래서 일자리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도시이고 자연조건도 좋아서 최근에는 시정의 방향이 지속가능한 생태친화형 복합도시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즈카에 모인 일단의 사람들은 ‘야마기시 공동체’가 굳어지고 변화의 힘을 상실하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함께 모여 연구-연찬하는 기회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초기 5년간은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시도해보았지만 제대로 줄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2005년 즈음이 되어서 ‘고정’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서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런 정신적인 진척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연구소, 성인들의 의식계발 역할을 하는 교육센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실험의 장이 되는 몇 개의 회사, 그리고 스즈카 지역에 점재해 있으면서 서로 네트워킹하여 이루어가는 가정과 개인들이 모인 커뮤니티 등으로 점차적으로 활동을 넓히게 되었고 2008년 겨울 즈음부터는 이것을 사회에다 내놓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스즈카 지역의 지인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의 12월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즈카의 사람들이 “한국 실현지의 40대들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연락을 해볼까?” 하던 그 무렵에 전화를 했다. “모시 모시! 오노 상?”



다시 강화의 이야기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6월 24일이었다. 이삿날 기억에 남는 것은, 며칠 전부터 이사올 집 2층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날에 제비집도 완성이 되어서 함께 입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전 주인도 전셋집 때문에 아직 이사를 못가서 전 주인, 새 주인, 제비부부 세 식구가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동체 생활의 꼬리가 길구나.” 하고 웃었다.

4월부터 석 달간,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데는 강화지역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고 있는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우선의 거처를 마련해준 황선진 님은 마침 마리학교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살 곳을 찾아야하는 내 상황과도 맞아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강화에 자리잡은 친구 이광구 군과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있어서 내가 강화생활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산안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나왔으니 강화지역 전체를 나의 공동체로 삼아 오랜 시간을 두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자.”는 것과 “지역에서 자라고 배출된 청년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갈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무소유 일체생활’을 지향하여 소유도 분배도 따로 없이 모든 물자와 생활을 공용으로 해가는 산안마을의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나는 생활비와 돈 계산도 해보지 않았고, 은행통장이나 카드도 사용해본 적이 없고, 더구나 몇 억이 넘는 집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간의 새로운 생활에서 가장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문제였다. 사는 데도 거액이 들지만 전세를 얻는 데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든다는 게 새롭고 놀라웠다.

더욱이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이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것이 내 눈에는 헛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청년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출발하려 할 때 최소한의 바탕이 되고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큰 주제로 “대안교육은 있어도 대안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지역의 대안학교를 출발하여 그 지역에 살려고 하거나 뜻을 가지고 지역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실적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 세대들이 능력을 기르고 마음을 바쳐 살만한 지역사회의 대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이광구 군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리를 스즈카에 보내보면 어떨까? 강화지역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지역사회 만들기에도 뜻이 있으니…,” 하고 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고, 얘기가 진척되는 중에 “강화에서 함께 자라온 아이들을 같이 보내서 함께 체험하도록 하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전개되어 방학기간을 이용한 2주간의 교류체험을 4명이 함께 가는 것으로 정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역공동체를 체험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강화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강화를 선택하고 자신과 모두를 위해 마음도 물질도 풍성한 사회 만들기를 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또 그 과정에서 부모들도 다시금 자신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 참된 사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AS ONE COMMUNITY'는

몇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시작한 사업들은 이사, 리모델링, 설비 등을 하는 ‘ 애즈원 홈’, 지역의 안전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들고 배달하는 도시락 가게인 ‘오후쿠로상 벤토(어머니도시락)’, 도시락 자재 공급을 위한 농장인 ‘애즈원 팜’ 등이었고, 점차 인재파견사업, 부동산업과 소규모 건축업 등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그 사업들은 어느 것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내용을 지향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목적은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풍성하고 쾌적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람을 회사에 맞추지 않고 사람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위하고 사람의 심리, 생활적 필요에 사회가 맞추어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실태는 이상과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과 전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사회의 과제에 어느 정도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2주일간의 교류기간 동안, 때론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으며 때론 농장에서 채소 가꾸기를 하며 일에도 참가하고, 주말에는 지역의 청년들과 관광을 가거나 가정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지역 사람들을 느끼고 공동체의 의미도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뿌려진 씨앗들이 아이들 각자의 생활에서도 예쁜 싹을 틔우기를 바라고, 강화지역의 풍성한 삶으로 꽃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2주간 본 일본 - 이나리



처음 간 곳은 이곳의 시작점이었다. 안 되는 일본어로 이것저것 얘기 들어보니 음식물 쓰레기 관련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가장 궁금했지만, 일본어로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대답을 해석할 용기도 없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를 만들고 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많이 얻었을 것 같다. 처음이란 것은 피곤함과 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실패와 재도전,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제대로 된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 다음은 미유키 상이 일하는 회사. 이곳의 중심인 것 같은데, 이때만 해도 일본 초창기여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가까운 곳의 ‘오후쿠로상 벤또’! 이름 뜻을 듣고선 할머니들이 만들어 보자기로 싸주는, 그런 소박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하러 가서,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박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담고, 그것을 배달하고, 그릇을 닦고,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 종일 일하지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도 아니다. ‘요리는 역시 즐거운 것이고, 노동이란 건 정말 즐거운 것이고, 그 중에 최고는 역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내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강화에 돌아가서, 농번기 때 바쁜 농민들과 독거노인을 위한 도시락 배달을 하는 건 어떨까? 예전에 엄마를 따라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을 간 적이 있다. 아주 작은 거지만, 그리고 잠시지만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는데 마음이 따뜻했다. 그 후에 도시락 싸는 걸 도와주러 갔는데, 그 넓은 강화의 독거노인 도시락을 단 두 분이서 만들고 있었다. 그 분들과 함께, 독거노인들과 농민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은? 가끔 마을회관이나 넓은 들에 배달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쌀도, 야채도, 고기도, 모두 다 강화 것으로! 아아- 그래도 역시 문제는 요리구나.

그리고 ‘농장’. 커다란 토마토 하우스, 아직은 잠자고 있던 넓은 밭, 그리고 마트. 농장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겨웠다. 우리 집 사랑방은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처음에 불을 붙이기 위해 나무와 종이를 공기가 통하도록 쌓는다. 이것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꾸깃꾸깃 구긴 종이에 불을 붙여 부채질도 하고 나무를 다시 쌓아주기도 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한다, 불이 붙을 때까지.

이름에 ‘코’가 들어가는 농장팀은 나무와 종이를 적절히 쌓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 불이 붙고 공기가 드나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되거나 유상용 아저씨를 통해 듣게 될 땐, 지금의 인원보다 몇 배는 불어 있겠지. 코니시 상 공책은 빼곡할 테고, 코스케 상은 앨범을 하나 더 냈을까? 어쩌면 사랑스러운 채소들의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갯벌의 생물들을 보면 흥얼흥얼거리게 되는 걸.

농장과 도시락가게, 이 두 커다란 바람을 타는 중간에도 바람은 계속 우리를 이곳저곳에 데려다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초대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의 식성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널리 퍼졌다. 하하하. 그리고 이 바람은 내게 물을 듬뿍, 햇살도 듬뿍 주었다. 바람은 우리에게 마을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었다.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미유키 상이 첫 날 우리에게 이것저것 보여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 와보지 않고 말로만 들었더라면, 갸우뚱 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노동으로? 공동체를 중요시 하는 곳에서 개인을?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한국의 공동체들이 왜 망한지 알 것 같았다. 마을 공동체든, 학교든, 무조건 ‘공동체’만 외쳤다.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보다, 공동체란 산을 가꾸는데 온 힘을 다한 것 같다. 산의 생태계보다 산의 땅을 전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사람처럼. 공동체란 이름 아래 독재정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넓다. 식물도 동물도, 플랑크톤도 같은 류라고 해도 전부 다르고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도 서식지도 먹이도 전부 다르고, 그들이 모여 생태계를 만든다. 그 중 한 가지가 빠져도 혼란이 찾아온다. 왜 이렇게 간단한 걸. 그래서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는 건 내 마음에 콕 박혔다. 얘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이곳처럼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고 공부하려면 우린 얼마나 걸릴까.

괜찮아. 내 주위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씨를 아끼고, 거름을 주고, 키워 나가야지! ‘무엇보다 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자, 진심으로.’라고 하던 테루코 상의 말처럼.

그래서 나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라이프 센터가 생긴다고 해서 반가웠다. 건물도 새로 짓고! 알면 알수록 부러워진다. 아이들도 부모도 전부. 다음 번에는 제대로 공부하러 와야지.

그 동안 내 안의 씨는 빗물을 따라 지하에도 가보고 논과 밭도, 바다에도 가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언젠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내 씨를 심을 것이다. 이게 내가 바람을 타고 일본에서 배워 온 이야기다.



스즈카에서 보낸 2주 - 윤승민



지난 2월에 나는 내 스무 살의 가장 특별한 기억 중 하나가 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의 스즈카 시로 다녀온 교류 여행. 태어나서 처음 가 본 해외여행도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으로 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 번 더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영 아니었고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처음과 달리 정말 기억에 남는 경험도 많이 하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세 번째의 일본은 아예 출발 목적부터 돌아온 후의 느낌까지 그 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것들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써 보고 싶다.

첫 번째,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다. 이것은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하고, 가장 깊이 되돌아봐야 할 주제다. 이번 교류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이 적은 상태에서 외국에 머무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함께 했던 유상용 아저씨를 제외하면 근처에 한국인이라고는 늘 우리 네 명뿐이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스즈카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에 방문하는 내용을 보았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도 일본 사람들과 교류를 해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고 특히 스즈카에 다녀온 일이 있어서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제일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신경 써주신 모든 분들이 사진과 함께 기억에 남아있다.

함께 공동체에 대한 질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그 분들의 모습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유카짱이나 히로토 군 등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이번 교류 여행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낸 것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쉬이 얻지 못할 귀한 보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우리가 했던 일들이다. 우리는 정말, 도와드렸다는 말도 민망할 정도로 도움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하여튼 오후쿠로상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며칠 간 일을 했다. 도시락 가게에서 반찬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고, 농장에서는 식물에 물을 주고 죽순을 캐는 등 정말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아마도 도와드린 것보다는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도시락 가게와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위생에 신경을 쓰고 일하는 태도가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또 한국에서 식품 가공업을 하는 우리 집이나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농사일을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리저리 비슷한 점들을 보기도 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배울 점은 역시나 많았다. 몇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뒤처지는 일 없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번째, 우리가 갔던 곳들. 일정 속에 틈틈이 여러 곳에 갈 기회가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던 일본의 길거리들, 또 무언가를 사러 갔던 가게들(환상적인 북오프!),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함께 갔던 온천! 모두 즐거웠다. 또 교토라던가 나고야 등등,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친절한 분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언니들과 달리 체력이 약해서 막바지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금각사나 일본 전통 정원 등 정말 잊지 못할 곳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대를 받아 갔던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의 집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정말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집에 초대하는 게 한국에서보다 드물고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귀한 기회를 많이 갖게 되어서 좋았다. 지금도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대접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만큼 많은 음식을 먹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었던 정말 한 끼도 빠짐없이 맛있었던 덕에 배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부터 초대받아 간 집에서 먹었던 음식, 또 교토와 나고야에서 사먹었던 음식들까지 어쩜 그렇게 맛있는 것만 2주간 주구장창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한국에 와서 아직도 살 빼느라 고생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아직도 농장의 비닐하우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거리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던 이요다상과 세츠코상의 모습부터 노에짱과 줄넘기를 하던 것, 유카짱에게 장난을 치던 때의 기억까지 어제 일 같다. 한국에 돌아와 첫 대학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스즈카 공동체 분들과 메일도 주고받을 생각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고 나 자신도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좀 노력해 봐야겠다. 어렵게 맺은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스즈카 공동체 마을에서 2주를 보내면서 정말 그 곳에 사는 것처럼 여유로운 마음이 들 때가 있어서 좋았고, 일본어 실력이 좋아진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스즈카 공동체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곳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아, 그 전에 꼭 강화에 오셨으면 좋겠다. 산책하기 좋은 해안도로변의 예쁜 나들길도 걷고 우리 집에 초대도 하고 싶다. 어디에서든,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 노해원







처음 유상룡 아저씨한테 나리, 혜인이와 일본에 갈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일본에 가기 전부터 별에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출발하자마자 공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승민이와 도시락공장으로 출발 하는 첫날 늦잠을 자고, 돈이 모자라 미유끼상한테 돈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서로에게 그동안의 서운함을 이야기하며 울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따뜻함과 즐거움과 추억, 그리고 배움이 있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유상룡 아저씨의 권유 덕분이었다. 나리네 아저씨와 우리 부모님과 유상룡 아저씨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우연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우리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강화에서 만나 함께 자라고 앞으로도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유상룡 아저씨가 계시던 일본 공동체에도 가면 좋겠다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 아저씨도 일본의 공동체와 강화 공동체의 교류를 계획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외국에 다녀 온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에 가기로 정해졌을 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설렘이 제일 컸다. 하지만 유상룡 아저씨와 미팅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마음이 부풀었다.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설을 쇠러 강원도에 가랴, 가방 한가득 짐 챙기랴 새벽까지 짐 싸랴 분주했지만 항상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우리가 가서 하는 일은 어떤 걸까?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어려움은 없을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이 들거나 우리들 사이에서의 문제는 없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 떠난 일본에서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을 미리 연습 해 둔 한국말로 밝게 맞아 주시던 오노상 부부와 앞으로 우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지낼 이요다상 부부를 만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무엇보다 처음 도착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방안에 고타츠가 놓여 있고 목욕탕에서 온천식 욕조를 발견했을 때다. ‘만화에서만 보던 그 고타츠를 앞으로 계속 쓸 수 있다니! 매일 온천 같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니!' 감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세쯔꼬상의 엄청난 요리솜씨, 그리고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타츠와 욕조만큼 스즈까시 사람들이 새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 했다.

우리가 간 곳은 야마기시즘에 한계를 느끼고 스즈까시에 모인 사람들이 에즈원 컴퍼니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도시락공장, 펜션, 농장, 리모델링 등의 일을 나누어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과 농장 일을 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 공장에 가서 일을 돕고 아침에 코우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농장에 가서 일을 도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힘들어 둘씩 짝을 지어 2주 동안 1주일 씩 도시락공장과 농장을 번갈아 가면서 다녔다. 그 외에 저녁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세쯔꼬상이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들의 집에 찾아가 상상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온천도 가고, 쇼핑도 하고, 주말에는 교토와 나고야에서 관광도 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생활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중간에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10분 이상 늦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도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면서 부지런하고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꽉 찬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서두름이나 분주함 없는 여유 있는 생활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 대나무 숲에서 타케노코(죽순)를 찾던 그 상쾌함, 늘 그런 기분 이었다.

도시락공장과 농장에는 우리 또래 고등학생, 아줌마, 아저씨, 동네 할아버지, 뮤지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주머니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에즈원 컴퍼니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 혹은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고 오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후에 이곳 이야기를 더 깊이 나누면서 ‘따로 하는 모임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 전체가 공동체 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공동체라는 경계를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대단하달까? 앞으로 지역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을 하기위해 꼭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도시락 공장의 일회용 용기들이었다. 도시락 통을 사용하기에는 정기적으로 사 먹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비싸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좀 더 환경을 배려해서 잘 썩는 용기나 재활용 용기를 사용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음식 재료도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음식이나 유기농 음식을 사용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일본어를 미리 공부 해 온 혜인이와 열심히 일본 만화를 봐왔던 승민이 말고는 대화의 절반은 정상적으로 오갈 수 없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몸어를 모조리 섞어 쓰거나 혜인이의 도움을 열심히 받았다. 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대화는 적당히 이루어 졌다. 그리고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단점 덕분에 말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많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해결해야 했고 평소 말에 비해 실천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장점은 둘째 치고 생활 대화만 하다 보니 좀 더 전문적인 단어가 필요한 궁금증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이야기 들은 유상룡 아저씨가 오신 뒤부터 해결 됐다.

이곳 공동체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연구, 그 중에서도 인간 성장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중요시 한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에 힘을 쏟으니 좋아졌다고 한다. 스스로의 깊어짐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자신의 행복, 자신과의 소통, 즉 본심으로서의 생활과 소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진실에 대한 탐구, 자신의 실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이 공동체가 가장 중요 하게 생각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후에 있을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과가 아닌 그 때 그 때에 대한 결과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직장을 위한 삶이 아닌 삶을 위한 직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이런 목표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예로, 도시락 공장의 월급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가족상담(예를 들어 가족 수나 개인 사정)을 통해 맞춰준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며 사니 재밌다.’고 말하는 이분들을 보면서 ‘투쟁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런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 )상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공동체는 전체 이념이나 사상에 개인들이 맞추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스즈까시에서 만들어 가고 있는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동체라는 점이 그동안 내가 보아오고 생각했던 한국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가 일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채소 자르기, 다케노코 캐기, 세쯔꼬상께 배운 음식, 좋은 생각 등) 얻어 가는 것들에 비해 한 일이 너무 적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한 가득이다. 늦게까지 잠도 잘 안자는 데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늘 즐겁게 보살펴 주던 이요다상 부부와 오노상 부부, 코우타 아저씨, 오벤또야 사람들, 농장 사람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그 곳에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바로 이런 분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따뜻한 관계야 말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일 첫 번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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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가게에서

2016/09/27

풀뿌리운동사례 -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풀뿌리운동사례 -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by 풀뿌리자치연구소 posted Jan 14, 2010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야마기시즘, 공동체와의 우연한 만남
지난 해 말까지 몇 사람과 공동으로 풀뿌리운동 활동가 교육 관련 보고서를 내기로 했었다. 시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화도의 한적한 펜션에 처박혀 합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틀 정도 밤샘 작업을 하면 대충 일이 마무리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곳에 위치한 펜션을 찾아가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 때 잠깐 펜션의 주인장이 고구마를 들고 우리가 일하는 방을 찾아왔다. 그래서 인사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주인장은 한국의 야마기시(山岸) 공동체, 즉 산안(山岸) 공동체에서 18년간 생활하였고, 현재는 야미기시 사상을 보다 잘 실천하기 위해 그 산안 공동체를 나와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분리된 일단의 공동체 식구들이 스즈까 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자신이 새롭게 추구하는 공동체의 모델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 다음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그 정도에서 마무리지었지만, 야마기시 공동체와 야미기시즘에 대한 기존의 관심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 자리에 함께 했던 YMCA 연맹의 이필구 팀장이 얼마 후에 이 분을 인터뷰 하기로 약속을 잡아 함께 강화도를 다시 방문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매우 지대한 편이다. 이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때로는 그 내용보다는 단지 공동체라는 이미지로만 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공동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무수한 논의가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회자되는 데에는 공동체가 가진 그 의미 또는 그 이미지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공동체가 시도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공동체는 단순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태(現實態)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해 온 사례들은 종교계의 수도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로 그 공간적 범주를 한정시키면 더욱 그렇다. 물론, 최근 생태공동체라는 지향으로 다양한 농촌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역사는 아직 일천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공동체의 모델로 많이 거론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있는데, 흔히 야마기시 공동체라고 하는 산안 공동체 바로 그 것이다. ‘산안(山岸)’은 야마기시의 일본 한자를 우리 이두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이는 산안 공동체가 일본에서 수입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산안 공동체는 실제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가 한국에 수입되어 정착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8년간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생활했던 유상용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물론, 인터뷰의 목적은 야마기시 공동체와 야마기시즘, 그리고 최근의 야마기시 공동체의 새로운 흐름 등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이 글은 야마기시즘에 대한 유씨의 최근 생각과 그로 인한 산안 공동체와의 결별, 일본 스즈까라는 도시에서 행해지는 야마기시 공동체의 실험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글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도만으로도 풀뿌리운동에 대한 여러 시사점이 발견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터뷰와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인터뷰를 진행한 필자가 이해한 정도와 방향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즉, 이 글은 인터뷰에 응해주신 유상용씨와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사실이지만, 화자(話者) 중심이라기보다는 필자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 글의 내용이 유상용씨의 입장과는 약간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다.

야마기시즘에 대하여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 공동체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야마기시 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상, 인생과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한 생각, 철학 등을 의미한다. 야마기시는 어린 시절 자신이 던진 돌에 맞은 어른이 불 같이 화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왜 화를 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 의문이 후에 야마기시즘의 출발이라 할 수 있겠다. 야마기시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나 분노와 대립보다는 호혜에 바탕을 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일본 공안에 쫓기던 시절, 한 농가의 양계장에 숨어들었다 닭들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고 닭들을 통해 이상사회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야마기시 공동체가 양계로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서 연유된다. 그 후, 전쟁이 끝나자 1954년부터 인간 사회에 대한 실험으로 넘어갔고, 1961년에 여러 실험들이 모여서 야마기시 실현(實顯)이라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야마기시즘은 그 사상을 실현하는 실현지로서 공동체를 제안하였고, 그 공동체를 통해 대안적인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인류 전체가 참된 사회로 진입하도록 하는 사상이다. 야마기시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야마기시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 ‘일체(一體)’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물질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의 문제가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 이 핵심적 사상을 조금만 더 풀어 설명해 보자.
무소유는 자연계가 원래 소유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유라는 것은 사람들의 집착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나 사람의 상태를 자연의 것으로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소유라는 본래의 자연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공용(共用) 또한 자연의 원래 상태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물은 본래부터 공용이었다는 것이다. 무소유는 ‘누가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고, 공용은 누가 써도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소유와 공용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일체는 삼라만상 우주가 하나로 이어져있고, 본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야마기시즘은 바로 이러한 핵심사상을 인간 사회에도 적용시키자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도 인간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인간사회도 자연의 진리와 상통하도록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야마기시의 깨달음은 진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적절한 방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현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시대에 맞는 방법을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진리와 이상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도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야마기시즘의 핵심적 방법은 ‘연찬(硏鑽)’에 있다.
‘연찬(硏鑽)’이란 무엇을 고착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고정함 없이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실천해 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인이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회 및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즉, 고정과 단정이 판을 치게 되면서 도그마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회적 소통은 점차 사라진다. 소통의 소멸은 고정관념과 폐쇄적 도그마를 더욱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과 사물과 사회의 내면 즉 진실한 실체는 사라진다. 진리가 감추어진 사회인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갈등과 대립이 점점 더 자신의 관성에 의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사물을 대립적으로 것으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배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는 가능하지 않다.
야마기시즘은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회, 세상을 기존의 사회적 통념으로 바라보지 않고, 새롭고 창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즉, 어떠한 사물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서 대하고자 하며, 그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연찬을 제안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야마기시즘은 결론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대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연찬은 이를 제안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는다. 이 둘은 상호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함께 가기 때문이다.

흩어지는 공동체 - 다시 세상의 한 가운데로
야마기시 공동체는 공동체 밖 사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일반인들이 야마기시즘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7박8일의 특강과 15일 간의 연찬학교이다. 특강이 야마기시즘에 대해 일회적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연찬학교는 야마기시즘의 핵심인 연찬을 계속해서 습득하는 과정이다. 15일 간의 연찬학교를 통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단정하지 않고 수렴해서 실행한 후 다시 의견을 모아 실행하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한다.
한국에 야마기시즘과 야마기시 공동체가 수입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새마을운동을 준비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 모범사례를 배우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 등이 외국 연수를 다니면서이다. 그러한 선진 연수지 중 하나가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였다. 이 연수단 중 기능이 아닌 야마기시즘이라는 철학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양계기술 보급과 특강을 하였고, 야마기시 공동체를 만들다 실패하는 등의 연속적인 과정을 거쳤다. 그러던 중 1984년에 세 가구가 산안에서 야마기시 공동체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늦게나마 야마기시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 안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양계기술 보급이라는 경험이 크게 작용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산안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는데, 당시 두 가구만 남고 모두 공동체를 떠나가는 등 여러 우역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안 공동체가 다시 활발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에 학생운동을 경험한 80년대 학번, 후에 소위 386세대라 불리우는 이들이 산안 공동체에 대거 유입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다시 10년이 흐른 후 공동체 식구들 중 일부가 다시 공동체를 떠나는 등으로 부침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는 산안 공동체가 아직도 여러 부침을 겪는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공동체가 그러한 부침이 없다면 오히려 연찬의 의미인 고착・고정화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부침의 과정을 꼭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산안 공동체가 이러한 부침을 겪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유씨는 초창기 산안 공동체를 건설하고, 1990년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키던 이들이 초창기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새로 유입된 이들과 입장 차이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유씨가 최근 산안 공동체를 떠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1년 동안 집중적인 연찬을 했지만 그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유씨는 스스로 생각하는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자고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단지 유씨 개인의 결단만이 아니다. 유씨의 생각에 동의하는 비슷한 또래의 몇 가구도 곧 유씨와 행보를 같이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핵심은 실현지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생각에 있다. 유씨 등의 생각은 연찬이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안 공동체의 외부 사회와 교류가 매우 소극적이라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야마기시즘은 사회적으로 야마기시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외부 사회와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다른 접근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즉,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것은 현재 만들어져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식구들이 우리 사회의 각 부분에 들어가 연찬을 행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실현지(산안 공동체) 하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실현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태에서도 그것이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현지에 안주하기보다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 연찬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흥시 복음자리 마을에서 유지되던 복음자리 공동체를 ‘흩어지는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박재천의 생각이나, 정토회의 ‘만인결사’와도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야마기시 공동체 실험 - 일본 스즈까 시 공동체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흐름은 한국의 산안 공동체에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고정된 실현지를 나와 보다 사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연찬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의 최근 흐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공동체 연찬회에서 도시에서도 이러한 실험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제안이 큰 힘을 받게 된 것은 야마기시의 글이 새롭게 공개된 데에 영향을 받았다. 야마기시는 생전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담은 여러 글을 남겼는데, 이 글은 여러 지인들에게 뿔뿔이 흩어져서 남겨졌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야마기시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야마기시의 새로운 글이 공개되면서 야마기시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 즉, 야마기시는 실현지 자체를 만들고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30 가구 전후가 도쿄 혹은 인근의 소도시로 나갔는데, 그 당시 이들의 구호는 ‘마을에서 거리로’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 실험은 도시에서 살다가 휴일에는 실현지로 다시 돌아오는 형태와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실험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도시에서의 새로운 시도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 구체적인 방식을 정하기 못한 채 당위성과 필요에 의해 그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야마기시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실현지 고수파와 새롭게 사회 속으로 더욱 들어가야 한다는 파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는 대립적 분리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개인적 삶의 방식과 사회적 실현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이에 2005년 경에 50가구 정도가 다시 실현지를 떠나 스즈까 시라는 도시로 나가 새로운 공동체 실험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시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연찬의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깨달음은 ‘연찬’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연찬은 사물을 고정 또는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야마기시 공동체에서는 연찬 그 자체가 이미 고정・단정된 구조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연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자는 제안도 있었다. 어차피 연찬이 형식이라면, 굳이 연찬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고수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연찬학교가 가르쳐주는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기존 연찬학교가 가르쳐 주는 깨달음은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을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내 생각이 사실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은 바깥의 사물이 그 자체가 사실이라는 것도 전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매우 유사한 깨달음이다. 색과 공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색을 색이라 하는 것도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현지가 있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이 너무 소중한 것이 되어버리는 고정・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단정이 실현지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집착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후 스즈까 시 공동체는 기존 실현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기존의 공동체조차도 계속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조를 만들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구성원들 중 누구라도 어떤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모임을 만들거나 참여하고 싶으면 그리 한다. 따라서 한 번 공동체를 만들면 그것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스즈까 시에서는 2005년경부터 매우 다양한 실험들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실험들의 핵심은 마찬가지로 연찬에 있었다. 연찬을 어떻게 일상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화두였다. 연찬의 방식도 인생을 알기 위한 연찬회, 자신을 알기 위한 연찬회, 사회를 알기 위한 연찬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야마기시 회, 실현지, 시험장, 연찬학교가 그것이다. 야마기시 회는 야마기시즘을 실천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실현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실현지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야마기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왔다. 시험장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이상적 인간의 생활양식 및 사회적 실현방법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연찬학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찬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교육・훈련 받는 현장이다. 이 네 가지는 하나의 순환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실현지와 시험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스즈까 시로 이주한 이들과 같은 새로운 야마기시즘 해석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인식의 차이를 만들었다. 즉, 기존의 실현지 자체가 하나의 시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야마기시 생존 당시에는 사람들을 교육해서 이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연찬 공동체를 만들려는 생각에 시험장을 만들었으나, 사후 시험장 자체가 실현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스즈까로 이주한 사람들은 연찬으로 네트워킹 하는 사람들(KNI-Kensan Network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였다. 이들에게 실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연찬 커뮤니티이다. 그밖에 연찬과학연구소가 있고, 연찬 라이프 센터가 연찬학교의 역할을 한다.
연찬 커뮤티니 중 일단의 그룹(17명 정도)은 무소유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한 생활공동체로서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수입을 모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만 공유한다. 그리고 이 결합은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이다. 따라서 부부라 하더라도 남편만 이 무소유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으며, 수입 공유는 부부가 합의하여 남편의 몫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식으로 다양한 결합 정도와 형태로 다양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는 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합의 정도는 각자가 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연찬 라이프 센터는 연찬학교와 같이 연차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연찬을 지속적으로 교육・훈련하는 기능을 하는데, 도시에서 새롭게 그 형태가 바뀌었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기존의 직장을 그대로 다니면서,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숙식을 센터에서 하면서 연찬 수련을 받는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서, 수유리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가 떠올랐다. 이들도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도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 처럼 공동체 모임이 있고, 그 구성원 중 일부는 수입을 공유하는 긴밀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공동체 식구들과 공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 모임을 자기 공동체 구성원들로만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는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보다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더욱 발전해 있는 형태가 아닌가 한다.
현재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는 수익사업으로 도시락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체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커뮤티니 구성원들의 생계 및 공동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중 도시락 사업은 안정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3호점까지 냄), 이 성공을 통해 근교농업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즉, 직접 재배한 것을 도시락 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문제와 해답은 사람과 사회 모두에게 있다
일본의 초기 야마기시 공동체는 1970년대까지 농민들 중심이었다. 그 후 전공투 세대인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들어왔고, 이들이 야마기시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그 후에는 야마기시 공동체의 연찬으로부터 감명을 받은 이들이 대안적 교육에 관심을 갖고 야마기시 공동체에 많이 들어왔다.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듯, 이런 과정을 통해 야마기시 공동체 내에서도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그 원인은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기시는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였다. 특정 사회 또는 집단의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으면, 일정 기간 동안에는 사람들 개인의 문제가 특별히 불거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시스템 자체가 하나의 구조로 고착화되고, 사람들도 그에 따라 고착화되거나 그와 정반대로 그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스템과 사람들 각 개인의 에고는 동시에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지도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지도력은 소수가 다수를 이끌어 나가는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야마기즘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즉, 지도자가 권력화 되지 않고 다른 이들의 결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방법, 그러한 지혜로운 길을 터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탐구가 있어왔다. 이는 결국 시스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성숙하고 발전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의 시스템을 이상적으로 만들어가는 것과 더불어 인간들의 내적 연찬을 통해 이상적 질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야마기시즘은 연찬을 통해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성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현지 또는 조직은 없어질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성숙하게 남아있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들이 또 다른 실현지(조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꽃자리 펜션
현재 유씨는 강화도에서 ‘우리 꽃자리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유씨 가족의 생계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이 공간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모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구실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월 중순에 그러한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이 우리 꽂자리 펜션에 모여 4박5일 간의 연찬회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꽃자리 펜션에 대한 홍보를 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펜션 그 자체도 충분히 추천할 만하기 때문이다. 우리 꽃자리 펜션은 강화도에서도 깊숙한 산 속에 위치해 있어,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제격이다. 물론, 바닷가도 조금만 나가면 만날 수 있다. 그 곳에 가면 친절한 미소로 사람들을 맞는 주인장을 만날 수 있다. 방문자가 원한다면, 함께 산책을 하거나 고구마 등을 먹으며 공동체 또는 야마기시즘 또는 새로운 이상적 사회의 모습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을 보내면 주인장의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안 공동체에서 만났다고 한다. 조용하지만 깊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주 귀여운 강아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더 좋다면, 건강하게 뛰어노는 주인장의 귀여운 두 아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꽃자리 펜션: www.cochari.com, 010-3362-3920

2016/09/26

풀뿌리운동 사례 -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풀뿌리운동 사례 -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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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19:09:45

풀뿌리자치연구소*.43.252.165http://grasslog.net/home/30606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야마기시 공동체

이 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야마기시즘, 공동체와의 우연한 만남

지난 해 말까지 몇 사람과 공동으로 풀뿌리운동 활동가 교육 관련 보고서를 내기로 했었다. 시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화도의 한적한 펜션에 처박혀 합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틀 정도 밤샘 작업을 하면 대충 일이 마무리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곳에 위치한 펜션을 찾아가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 때 잠깐 펜션의 주인장이 고구마를 들고 우리가 일하는 방을 찾아왔다. 그래서 인사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주인장은 한국의 야마기시(山岸) 공동체, 즉 산안(山岸) 공동체에서 18년간 생활하였고, 현재는 야미기시 사상을 보다 잘 실천하기 위해 그 산안 공동체를 나와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분리된 일단의 공동체 식구들이 스즈까 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자신이 새롭게 추구하는 공동체의 모델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 다음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그 정도에서 마무리지었지만, 야마기시 공동체와 야미기시즘에 대한 기존의 관심을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 자리에 함께 했던 YMCA 연맹의 이필구 팀장이 얼마 후에 이 분을 인터뷰 하기로 약속을 잡아 함께 강화도를 다시 방문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매우 지대한 편이다. 이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때로는 그 내용보다는 단지 공동체라는 이미지로만 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공동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무수한 논의가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회자되는 데에는 공동체가 가진 그 의미 또는 그 이미지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구체적인 공동체가 시도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공동체는 단순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태(現實態)로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해 온 사례들은 종교계의 수도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로 그 공간적 범주를 한정시키면 더욱 그렇다. 물론, 최근 생태공동체라는 지향으로 다양한 농촌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역사는 아직 일천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공동체의 모델로 많이 거론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있는데, 흔히 야마기시 공동체라고 하는 산안 공동체 바로 그 것이다. ‘산안(山岸)’은 야마기시의 일본 한자를 우리 이두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이는 산안 공동체가 일본에서 수입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산안 공동체는 실제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가 한국에 수입되어 정착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8년간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생활했던 유상용씨와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물4764ee24cde3203c83c931f927eb5fa6.JPG론, 인터뷰의 목적은 야마기시 공동체와 야마기시즘, 그리고 최근의 야마기시 공동체의 새로운 흐름 등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이 글은 야마기시즘에 대한 유씨의 최근 생각과 그로 인한 산안 공동체와의 결별, 일본 스즈까라는 도시에서 행해지는 야마기시 공동체의 실험 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글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도만으로도 풀뿌리운동에 대한 여러 시사점이 발견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터뷰와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인터뷰를 진행한 필자가 이해한 정도와 방향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즉, 이 글은 인터뷰에 응해주신 유상용씨와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사실이지만, 화자(話者) 중심이라기보다는 필자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 글의 내용이 유상용씨의 입장과는 약간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다.

야마기시즘에 대하여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 공동체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야마기시 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상, 인생과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한 생각, 철학 등을 의미한다. 야마기시는 어린 시절 자신이 던진 돌에 맞은 어른이 불 같이 화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왜 화를 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 의문이 후에 야마기시즘의 출발이라 할 수 있겠다. 야마기시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나 분노와 대립보다는 호혜에 바탕을 둔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일본 공안에 쫓기던 시절, 한 농가의 양계장에 숨어들었다 닭들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고 닭들을 통해 이상사회의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야마기시 공동체가 양계로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서 연유된다. 그 후, 전쟁이 끝나자 1954년부터 인간 사회에 대한 실험으로 넘어갔고, 1961년에 여러 실험들이 모여서 야마기시 실현(實顯)이라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야마기시즘은 그 사상을 실현하는 실현지로서 공동체를 제안하였고, 그 공동체를 통해 대안적인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인류 전체가 참된 사회로 진입하도록 하는 사상이다. 야마기시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야마기시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 ‘일체(一體)’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물질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의 문제가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 이 핵심적 사상을 조금만 더 풀어 설명해 보자.

무소유는 자연계가 원래 소유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유라는 것은 사람들의 집착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나 사람의 상태를 자연의 것으로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소유라는 본래의 자연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공용(共用) 또한 자연의 원래 상태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물은 본래부터 공용이었다는 것이다. 무소유는 ‘누가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고, 공용은 누가 써도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소유와 공용은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일체는 삼라만상 우주가 하나로 이어져있고, 본래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야마기시즘은 바로 이러한 핵심사상을 인간 사회에도 적용시키자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도 인간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인간사회도 자연의 진리와 상통하도록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야마기시의 깨달음은 진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적절한 방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현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시대에 맞는 방법을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진리와 이상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도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야마기시즘의 핵심적 방법은 ‘연찬(硏鑽)’에 있다.

‘연찬(硏鑽)’이란 무엇을 고착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고정함 없이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실천해 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인이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회 및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과제이기도 하다. 즉, 고정과 단정이 판을 치게 되면서 도그마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회적 소통은 점차 사라진다. 소통의 소멸은 고정관념과 폐쇄적 도그마를 더욱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람과 사물과 사회의 내면 즉 진실한 실체는 사라진다. 진리가 감추어진 사회인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갈등과 대립이 점점 더 자신의 관성에 의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사물을 대립적으로 것으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배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는 가능하지 않다.

야마기시즘은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회, 세상을 기존의 사회적 통념으로 바라보지 않고, 새롭고 창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즉, 어떠한 사물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서 대하고자 하며, 그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연찬을 제안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야마기시즘은 결론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대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연찬은 이를 제안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는다. 이 둘은 상호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함께 가기 때문이다.

흩어지는 공동체 - 다시 세상의 한 가운데로

야마기시 공동체는 공동체 밖 사회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일반인들이 야마기시즘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7박8일의 특강과 15일 간의 연찬학교이다. 특강이 야마기시즘에 대해 일회적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연찬학교는 야마기시즘의 핵심인 연찬을 계속해서 습득하는 과정이다. 15일 간의 연찬학교를 통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단정하지 않고 수렴해서 실행한 후 다시 의견을 모아 실행하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한다.

한국에 야마기시즘과 야마기시 공동체가 수입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새마을운동을 준비하던 박정희 정권 시절, 모범사례를 배우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 등이 외국 연수를 다니면서이다. 그러한 선진 연수지 중 하나가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였다. 이 연수단 중 기능이 아닌 야마기시즘이라는 철학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양계기술 보급과 특강을 하였고, 야마기시 공동체를 만들다 실패하는 등의 연속적인 과정을 거쳤다. 그러던 중 1984년에 세 가구가 산안에서 야마기시 공동체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늦게나마 야마기시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 안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양계기술 보급이라는 경험이 크게 작용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산안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는데, 당시 두 가구만 남고 모두 공동체를 떠나가는 등 여러 우역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안 공동체가 다시 활발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에 학생운동을 경험한 80년대 학번, 후에 소위 386세대라 불리우는 이들이 산안 공동체에 대거 유입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다시 10년이 흐른 후 공동체 식구들 중 일부가 다시 공동체를 떠나는 등으로 부침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는 산안 공동체가 아직도 여러 부침을 겪는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공동체가 그러한 부침이 없다면 오히려 연찬의 의미인 고착・고정화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부침의 과정을 꼭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산안 공동체가 이러한 부침을 겪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 유씨는 초창기 산안 공동체를 건설하고, 1990년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키던 이들이 초창기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새로 유입된 이들과 입장 차이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유씨가 최근 산안 공동체를 떠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1년 동안 집중적인 연찬을 했지만 그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유씨는 스스로 생각하는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자고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단지 유씨 개인의 결단만이 아니다. 유씨의 생각에 동의하는 비슷한 또래의 몇 가구도 곧 유씨와 행보를 같이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핵심은 실현지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생각에 있다. 유씨 등의 생각은 연찬이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안 공동체의 외부 사회와 교류가 매우 소극적이라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야마기시즘은 사회적으로 야마기시가 생각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외부 사회와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다른 접근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즉,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것은 현재 만들어져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식구들이 우리 사회의 각 부분에 들어가 연찬을 행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실현지(산안 공동체) 하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실현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태에서도 그것이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현지에 안주하기보다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 연찬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흥시 복음자리 마을에서 유지되던 복음자리 공동체를 ‘흩어지는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박재천의 생각이나, 정토회의 ‘만인결사’와도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야마기시 공동체 실험 - 일본 스즈까 시 공동체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흐름은 한국의 산안 공동체에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고정된 실현지를 나와 보다 사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연찬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의 최근 흐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공동체 연찬회에서 도시에서도 이러한 실험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제안이 큰 힘을 받게 된 것은 야마기시의 글이 새롭게 공개된 데에 영향을 받았다. 야마기시는 생전에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담은 여러 글을 남겼는데, 이 글은 여러 지인들에게 뿔뿔이 흩어져서 남겨졌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야마기시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야마기시의 새로운 글이 공개되면서 야마기시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 즉, 야마기시는 실현지 자체를 만들고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30 가구 전후가 도쿄 혹은 인근의 소도시로 나갔는데, 그 당시 이들의 구호는 ‘마을에서 거리로’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 실험은 도시에서 살다가 휴일에는 실현지로 다시 돌아오는 형태와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실험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도시에서의 새로운 시도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그 구체적인 방식을 정하기 못한 채 당위성과 필요에 의해 그리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야마기시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실현지 고수파와 새롭게 사회 속으로 더욱 들어가야 한다는 파로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는 대립적 분리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개인적 삶의 방식과 사회적 실현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이에 2005년 경에 50가구 정도가 다시 실현지를 떠나 스즈까 시라는 도시로 나가 새로운 공동체 실험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시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연찬의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깨달음은 ‘연찬’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었다. 연찬은 사물을 고정 또는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야마기시 공동체에서는 연찬 그 자체가 이미 고정・단정된 구조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연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자는 제안도 있었다. 어차피 연찬이 형식이라면, 굳이 연찬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고수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연찬학교가 가르쳐주는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기존 연찬학교가 가르쳐 주는 깨달음은 ‘내가 보고 있는 사물을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내 생각이 사실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은 바깥의 사물이 그 자체가 사실이라는 것도 전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매우 유사한 깨달음이다. 색과 공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색을 색이라 하는 것도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현지가 있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이 너무 소중한 것이 되어버리는 고정・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단정이 실현지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집착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후 스즈까 시 공동체는 기존 실현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기존의 공동체조차도 계속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조를 만들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구성원들 중 누구라도 어떤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모임을 만들거나 참여하고 싶으면 그리 한다. 따라서 한 번 공동체를 만들면 그것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스즈까 시에서는 2005년경부터 매우 다양한 실험들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실험들의 핵심은 마찬가지로 연찬에 있었다. 연찬을 어떻게 일상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화두였다. 연찬의 방식도 인생을 알기 위한 연찬회, 자신을 알기 위한 연찬회, 사회를 알기 위한 연찬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야마기시 회, 실현지, 시험장, 연찬학교가 그것이다. 야마기시 회는 야마기시즘을 실천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실현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실현지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야마기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왔다. 시험장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이상적 인간의 생활양식 및 사회적 실현방법 등을 연구하는 곳이다. 연찬학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찬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교육・훈련 받는 현장이다. 이 네 가지는 하나의 순환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실현지와 시험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스즈까 시로 이주한 이들과 같은 새로운 야마기시즘 해석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인식의 차이를 만들었다. 즉, 기존의 실현지 자체가 하나의 시험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야마기시 생존 당시에는 사람들을 교육해서 이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 연찬 공동체를 만들려는 생각에 시험장을 만들었으나, 사후 시험장 자체가 실현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스즈까로 이주한 사람들은 연찬으로 네트워킹 하는 사람들(KNI-Kensan Network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였다. 이들에게 실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연찬 커뮤니티이다. 그밖에 연찬과학연구소가 있고, 연찬 라이프 센터가 연찬학교의 역할을 한다.

연찬 커뮤티니 중 일단의 그룹(17명 정도)은 무소유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한 생활공동체로서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수입을 모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만 공유한다. 그리고 이 결합은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이다. 따라서 부부라 하더라도 남편만 이 무소유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으며, 수입 공유는 부부가 합의하여 남편의 몫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식으로 다양한 결합 정도와 형태로 다양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는 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합의 정도는 각자가 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연찬 라이프 센터는 연찬학교와 같이 연차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연찬을 지속적으로 교육・훈련하는 기능을 하는데, 도시에서 새롭게 그 형태가 바뀌었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기존의 직장을 그대로 다니면서,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숙식을 센터에서 하면서 연찬 수련을 받는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서, 수유리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가 떠올랐다. 이들도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도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 처럼 공동체 모임이 있고, 그 구성원 중 일부는 수입을 공유하는 긴밀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공동체 식구들과 공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그 모임을 자기 공동체 구성원들로만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는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보다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더욱 발전해 있는 형태가 아닌가 한다.

현재 스즈까 시의 연찬 커뮤니티는 수익사업으로 도시락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체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커뮤티니 구성원들의 생계 및 공동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중 도시락 사업은 안정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3호점까지 냄), 이 성공을 통해 근교농업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즉, 직접 재배한 것을 도시락 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문제와 해답은 사람과 사회 모두에게 있다

일본의 초기 야마기시 공동체는 1970년대까지 농민들 중심이었다. 그 후 전공투 세대인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들어왔고, 이들이 야마기시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그 후에는 야마기시 공동체의 연찬으로부터 감명을 받은 이들이 대안적 교육에 관심을 갖고 야마기시 공동체에 많이 들어왔다.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듯, 이런 과정을 통해 야마기시 공동체 내에서도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그 원인은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기시는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였다. 특정 사회 또는 집단의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으면, 일정 기간 동안에는 사람들 개인의 문제가 특별히 불거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시스템 자체가 하나의 구조로 고착화되고, 사람들도 그에 따라 고착화되거나 그와 정반대로 그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스템과 사람들 각 개인의 에고는 동시에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지도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지도력은 소수가 다수를 이끌어 나가는 힘을 의미한다. 하지만, 야마기즘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즉, 지도자가 권력화 되지 않고 다른 이들의 결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방법, 그러한 지혜로운 길을 터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탐구가 있어왔다. 이는 결국 시스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성숙하고 발전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의 시스템을 이상적으로 만들어가는 것과 더불어 인간들의 내적 연찬을 통해 이상적 질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야마기시즘은 연찬을 통해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성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현지 또는 조직은 없어질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성숙하게 남아있도록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들이 또 다른 실현지(조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동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꽃자리 펜션

현재 유씨는 강화도에서 ‘우리 꽃자리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유씨 가족의 생계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이 공간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모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구실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월 중순에 그러한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이 우리 꽂자리 펜션에 모여 4박5일 간의 연찬회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꽃자리 펜션에 대한 홍보를 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펜션 그 자체도 충분히 추천할 만하기 때문이다. 우리 꽃자리 펜션은 강화도에서도 깊숙한 산 속에 위치해 있어,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제격이다. 물론, 바닷가도 조금만 나가면 만날 수 있다. 그 곳에 가면 친절한 미소로 사람들을 맞는 주인장을 만날 수 있다. 방문자가 원한다면, 함께 산책을 하거나 고구마 등을 먹으며 공동체 또는 야마기시즘 또는 새로운 이상적 사회의 모습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83dc8d45a0be825d33d82c938449d10e.JPG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을 보내면 주인장의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안 공동체에서 만났다고 한다. 조용하지만 깊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주 귀여운 강아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더 좋다면, 건강하게 뛰어노는 주인장의 귀여운 두 아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꽃자리 펜션: www.cochari.com, 010-3362-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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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똘스

2010.01.18 14: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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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은 첫 만남이 이렇게 훌륭한 내용을 남기게 했군요^^ 야마기시가 생각보다 꽤 오랜 역사를 가졌네요. 양계장과의 인연도 재밌고, 무관해 보이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과도 인연이 있네요^^ 스즈까...풀뿌리활동가들이 여유를 갖고 이곳을 찾아가봐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일본에선 우익이 판을 쳐도, 이런 풀뿌리들의 저력은 우리보다 더 넓고 깊게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