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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이호재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 - 에큐메니안
풍류신학에 ‘풍류’는 있는가?한국 토착화 신학의 성과와 한계(1)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2.04 

청년 변찬린은 어릴 적부터 받은 한문 교육으로 유가 경전에 익숙하였고, 중학교 때 캐나다 장로교 계통의 신앙에 입문하여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한다. 청년 시절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 라인홀드 니버의 『비극의 피안』, 에밀 부르너의 신학, 알버트 슈바이처의 『문화철학』 등 서구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청년기를 보내면서 한국 교회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고 서구 신학의 한계를 인식한다. 스스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세계 종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겠다는 종교적 목표를 세운다. 이때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토착화 담론이 촉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토착화신학의 발전

한국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조성된 토착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4년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국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가 개최되어 『사목』 발간과 1987년 설립된 한국사목연구소가 토착화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2007년 주교회의 결정으로 『사목』 폐간과 한국사목연구소가 해체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토착화에 대부분 냉담한 실정이다.(1)

개신교는 서구 교회전통에 근거를 둔 교파교회가 설립되고 서구에서 신학적 사유체계를 배운 신학자에 의해 교파 신학의 지형이 공고화된다. 이를 유동식은 태동시대(1885-1930), 정초시대(1930-1960), 그리고 전개시대(1960-1980)로 구별하면서, 길선주와 박형룡 등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윤치호와 김재준의 사회 역사 참여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 그리고 최병헌과 정경옥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한국 신학의 광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합동), 한국기독교장로회(한신-기장)과 기독교대한감리교(감신-감리교)의 학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흡영은 여기에 신정통주의의 이종성을 거론하며 한국 최대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통합)을 대변하는 장신(광나루)학맥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을 수립했다기 보다는 서구신학을 한국의 종교적 토양에 이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신학적 환경에서 감신과 기장을 중심으로 한 토착화 신학자와 조직신학자는 상당한 신학적 성과물을 내었다. 유동식의 ‘풍류신학’,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 서남동·안병무·함석헌 등의 사상이 응축된 ‘민중신학’, 성(誠)을 실천적으로 해석한 김광식의 ‘언행일치신학’,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를 촉발한 변선환의 ‘대화신학(?)’, 김흡영의 ‘도의 신학,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 이정배의 ‘생명신학’ 등이다.



이 가운데 풍류신학은 토착화 신학의 큰 성과물이며, 민중신학은 세계신학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알려졌으며, 김흡영의 도의 신학과 박종천의 상생의 신학도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은 이미 낡은 신학적 주제이고, 주요 계승자들은 ‘문화신학’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신학적 사유를 확대하고 있다. 어찌 보면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와 ‘이해지평’에서 융합하지도 못한 채 ‘토착화의 개념’조차도 정립되지 못하고 방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토착화 신학은 개신교 내에서조차 토착화 신학의 성과물이 한국 교회에 주류담론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한국 종교지평에서 토착화 신학이 수용되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라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오히려 토착화 신학이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하는 미완성의 신학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2) 예를 들면 한민족의 고유한 ‘하늘님’(3)을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하며 신의 이름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한국의 하늘님을 분열시키고 있다. 푸코가 말한 ‘언어와 권력’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굳이 상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종교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찬린의 한국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

이런 토착화 신학에 대해 1982년 변찬린은 신약 사건과 인물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하)』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가 논의되어 메스콤의 파도를 타는 듯 하더니 판소리 찬송가 몇 편을 부르는 행사로 끝났다. 구미 신학자들이 부는 마적魔笛에 놀아난 우리들은 꼭두각시의 춤을 추었을 뿐 한국인의 심성, 그 깊은 곳에서 흥겹게 울려 나오는 가락과 신들린 춤사위를 우리는 이날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갓 쓰고 양복을 입은 몰골로 어릿광대의 춤을 춘 모습이 우리들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었다.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녹아든 노래 가락은 판소리의 한맺힌 가락과 흥겨운 서도민요西道民謠, 구성진 남도창南道唱의 신들린 선율과 농악이지 바그너의 가극과 베토벤의 교향곡과 헨델의 할렐루야가 아니다. 마늘과 된장 냄새가 우리들의 체취이지 치-즈나 뻐터의 누린내가 아니다.(4)


풍류학자로서의 변찬린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뿌리내리지 못한 서구신학의 한국화를 비판하며, 한민족의 종교적 근본어인 ‘풍류’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0년대 전후하여 ‘풍류’를 메타-언어로 하여 궁극적 인간을 ‘풍류체(風流體)’, 화쟁하고 회통하는 인식체계를 ‘풍류심(風流心)’, 자유자재하고 원융무애한 삶을 사는 인간을 ‘풍류객(風流客)’이라고 하며 그의 종교적 상표로 사용한다. 유동식이 풍류신학을 말하기 전인 10여 년 전의 일이다.

변찬린의 ‘풍류’해석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한국 기층종교 문화인 선맥과 무맥의 대척점에 있으며, 또한 풍류(도)라는 창조적 영성이 화랑도라는 제도조직과 팔관회 등의 국가의례에서 발현되는 것인가 하는 핵심질문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서의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가 ‘이해지평’에서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만난다면 어떻게 만나는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풍류’를 가지고 성서와 한국 종교문화를 동시에 고찰한 두 종교인은 종교비평되어 한국 학계에 새로운 담론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풍류신학에 대한 이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짧은 지면에 풍류신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풍류신학은 유동식의 신학적 상표로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무교로 보고 한국 종교문화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토착화시키려 한 신학이다. 풍류신학의 풍류(風流)는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浪碑序」에 출전을 둔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가르침이요, 무위하게 일을 대하고, 말함없이 가르침을 배푸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으뜸가는 가르침이요, 모든 악을 짓지않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닌 이는 측건태자(석가)의 교화다.


풍류는 이두식 한자로 우리 말의 불(夫婁)이며, 광명, 태양과 관련되는 뜻을 가진다. 또한 풍류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희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의미와 유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풍류신학은 「난랑비서」에 담긴 풍류의 개념을 세속을 초월한 종교적 자유와 삶에 뿌리내린 생동감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멋’이라고 보며, 또한 유·불·선을 다 포함하는 포월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의미를 ‘한’이라고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사람다운 사람을 되게 하는 풍류도의 효율성을 ‘삶’이라는 우리 말로 개념화한다. 풍류는 ‘멋진 한 삶’ 혹은 ‘한 멋진 삶’으로 현대화하여 신학의 골격을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원시 종교적 표출인 무교(고대)를 토대로 불교(신라, 고려)와 유교(조선)와 그리스도교(기독교)가 교체하며 전개되어 온 역사”라고 한국의 종교사상을 개괄한다. 또한 “멋진 한 삶”이라는 풍류도의 기본 구조로 “무교는 원시적 형태의 멋의 종교요, 불교는 철학적 한의 종교요, 유교는 윤리적 삶의 종교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종교문화사는 민족의 꿈인 ‘멋진 한 삶’의 실현 과정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 문화사적 위치로 보아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명은 분명해진다.”고 말하고 있다.(5) 이런 풍류적 사유를 통해 1983년부터 ‘풍류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신학 체계를 정립하고 있다.

김경재는 풍류신학에 대해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이란 부제가 붙은 『해석학과 종교신학』이란 책에서 복음이 한국 종교문화에 토착화될 때 네 가지 모델을 언급하면서 풍류신학이 접목모델로서 바람직한 문화신학의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이정배도 유동식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신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신학으로까지 확장된 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풍류신학에 대한 한국 종교학계의 평가

그럼 한국 종교사의 지평에서 풍류신학은 어떻게 자리매김이 가능할까? 최준식은 풍류신학은 한국 전통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완성된다는 성취설을 바탕에 둔다고 비판하며(6), 김상근은 유동식의 종교적 정체성을 종교학자 혹은 토착화 신학자로 보지 않고 선교신학자라고 본다.(7)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한국 종교문화가 성취되어야 한다는 선교신학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평가이다.

과연 한국 종교문화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풍류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2002년 8월 30일 유동식, 김경재, 이정배, 최인식이 연세대학교 알렌관에서 풍류신학을 주제로 한 좌담회에서 최인식은 “저는 유 선생님께서 어떤 조직신학을 쓰고 성서를 주해하고 체계화시키지는 않으셨지만, 일생을 한국 신학을 위한 틀 짜기, 그것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이룩해 주셨다.”고 한다.(8) 또 허호익도 풍류신학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시되지 못하고 수사적인 작업에 머물렀다고 평가한다.(9)

김광식은 근본적인 평가를 한다. “1960년대 토착화 논쟁을 거쳐서, 1970년대에의 무교문화론을 낳았고, 1980년대 이후로 풍류신학 즉 복음의 무교적 예증이 시도되어온 것이다”라고 말한다.(10) 이 말에는 그리스도교 복음이 한국의 종교원류인 무교에 의해 왜곡되며, 한국 종교문화의 본류를 무교로 보는 신학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에 이진구도 동일한 논지를 전개하며 유동식의 무교문화론이 보수적인 기독교가 지닌 무교에 대한 미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였지만 무교를 한국종교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하고 있다.(11)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이 가능한가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풍류신학의 한국 종교문화에 대한 해석은 성과라고 평가하지만, 풍류신학으로 성서해석에 적용이 가능한 신학인지를 반문한다. 반면에 우리는 한국 종교지평에서 성서해석에 적용이 되지도 않는 풍류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 즉 선교신학으로 한국 종교문화를 재단하지 않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선교신학에 바탕을 둔 토착화 신학은 한국 종교문화를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초는 아닐까?

이런 상반된 평가의 공통점은 ‘풍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며, 한국의 기층 종교문화가 선맥(僊脈)이냐 혹은 무맥(巫脈)이냐를 둘러싼 한국종교의 중핵을 판단하는 핵심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한국종교와 한국신학』을 발간기념으로 유동식, 김경재, 김광식, 이정배가 참석한 좌담회에서 풍류신학의 풍성한 신학적 성과를 평가하면서 나온 말이다.
유동식 : [중략] 전에 누가 이런 말을 합디다. 성서에서 “道”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仙)”맥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이죠. 선맥이 흐르는 것 그것을 보지 못하면 성서를 제대로 못본다는 거예요.
김경재 : 선맥(仙脈)이 무슨 뜻입니까?
유동식 : [중략] 유·불·선에서도 말하는 … 하나의 새로운 존재, 그것을 요한이 제시해 준 것이거든요. 도성인신이라고 하는 그 표현 자체부터 … 결국은 우리가 “도”를 통해야 하늘나라에 가는데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말은 방법과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동양적 인식입니다.(12)


‘도’만이 아니라 ‘선맥’을 찾아라

유동식은 누구에게서 “성서에서 ‘도’만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선맥”을 찾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까? 변찬린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로 선(僊)과 선맥 등의 도맥(道脈)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비조(鼻祖)이다. 1979년에 “성경 속에 뻗어내린 대도(大道)의 정맥(正脈)은 선맥[僊(仙)脈]이었다. 성경은 선僊을 은장한 문서이다. 에녹과 멜기세덱과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로 이어지는 도맥(道脈)은 이날까지 미개발의 황금광맥이었다”고 1979년 『성경의 원리 (상)』 머리말에서 말한다.

세계 신학자 가운데 동방의 신선사상과 선맥을 성서해석에 적용한 자가 없었다. 변찬린이 세계 최초이다.(13) 심지어 변찬린은 ‘풍류는 선(僊)’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서 “변찬린의 선맥신학과 유동식의 풍류신학”을 주제로 대화하기로 한다.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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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심상태, 「새 50주년을 위한 토착화 신학 진로 모색」, 『신학전망』177, 30-64,
(미주 2) 길희성, 「한국 개신교 토착신학의 전개와 문제점들」, 『종교·신학 연구』1, 347-35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 82, 1993, 113-124.
(미주 3) 필자가 하늘님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과 구별한 한국의 고유한 지고신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미주 4) 변찬린, 『聖經의 原理』下(서울: 도서출판 가나안, 1982), 1.
(미주 5) 유동식의 저술은 『素琴 柳東植 全集(10권)』(2009)에 간행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미주 6) 최준식, 「한국의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 본 기독교 토착화 신학」, 『신학사상』82, 1993, 115-116.
(미주 7) 김상근, 「1980년대의 풍류신학과 21세기 선교 신학」, 『신학사상』, 『한국문화신학회논문집』10, 2007, 164-183.
(미주 8) 소금 유동식 전집 간행위원회, 『素琴 柳東植 全集(10권)』, 한들출판사, 2009, 476-477.
(미주 9) 허호익,「단군신화의 기독교 신학적 이해」『단군신화와 그리스도교』, 대한기독교서회, 2003, 253.
(미주 10) 김광식, 「샤마니즘과 風流神學」, 『신학논단』 21, 1993, 59-81.
(미주 11) 이진구, 「샤마니즘을 보는 개신교의 시선」, 『기독교사상』, 2017, 59-61.
(미주 12) 소금 유동식 박사 고희 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한국종교와 한국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3, 126-127.
(미주 13) 김상일, 「한국의 풍류사상과 기독교를 선맥사상으로 융합한 사상가의 복원」, 《교수신문》 6면, 2017.12.18.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장영호 2021 논평자 이수호 김말순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0930

장 영 호(전 씨알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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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석헌의 신앙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다/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리라.1)

함석헌의 시 <대선언>의 일부 입니다. 젊은 날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함석 헌 선생님이 기독교를 떠났나보다 했습니다. 함선생님의 말씀과 독서의 시간이 얼마 간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기 시작 했습니다. 풍류신학자 유동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불교, 유교, 기독교 세 종교가 들 어왔는데, 각 그 종교에서 나왔으나 경계를 넘어선 이가 원효, 율곡, 함석헌이라 하였 습니다. ‘넘어서다’라는 우리말은 참 묘미가 있는 어휘입니다.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 시 연구서,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에서 명쾌한 풀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파주의 또는 교파주의 안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 봄직 하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애독해온 불후의 고전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고침 글인데, ‘대선언’의 전후 시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보입 니다.

고향 평북 용천에서 어린 시절 장로교회를 다닌 함석헌은 13살까지는 순박한 기독교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2)

삼일만세운동 사건을 뼈아프게 겪은 이후,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함석헌은 생 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과 동서양의 명품서적 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교회에 점점 비판적이 되어 멀어져 갔으리라 보입니다.3)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김교신의 소개로 그는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 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아니고도 믿을 수 있다고 한 우치무라의 신앙 을 세상에서는 무교회주의라 불렀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형태로 성경과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신앙관이 특색입니다.4) 그러나 함석헌의 무교회 신앙도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주장에 집착하여 교파 아닌 교파가 되어가는 모습에 함석헌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1) 대선언, <<수평선 너머>>, 일우사(1961), 170~171

2) <씨의소리> 1970년 4월호. 함석헌전집4.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207~8.

3) 위 책, 214.

4) 위 책,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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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 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5)

우치무라의 신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제 제자가 선생과 같 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그를 스승으 로 대접하는 도리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을 두고 말 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고귀하다. 그러나 진리 는 더욱 고귀하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로 몰려 죽음의 순간을 겪었던 함석헌은 동료와 제자들의 도 움으로 1947년 극적으로 월남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해 미국에서 갓 돌아온 현동완 선생이 주도하는 목요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퀘 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를 놀라움 속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고, 무교회에서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6) 시련과 고독 속에서 맞은 1960년은 함석헌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준 한 해 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 았다. 누가 조금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원망은 아니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 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더라.7)

칼릴 지브란의 글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힘써 번역한 <<예언자>>, <<사람의 아 들 예수>>가 함석헌에게 신생의 빛을 비춰 주었다면, 1961년 겨울, 한국의 첫 퀘이커 이윤구님의 권유로 퀘이커 서울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또 하나의 출구였습니 다. 훗날 영국과 미국 퀘이커 친우봉사회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나 추천 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함석헌의 평화운동이 세월을 딛고 끝내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위 책, 219~220

6) <<퀘이커 300년>>, 함석헌전집15, 352

7) <<예언자>>, 함석헌전집16. 213


2. 퀘이커(Quaker)신앙과 함석헌

1956년 1월호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 는 외침은, 2천 년 전 예언자 요한이 빈 들에서 외친 소리의 데자뷰로 들려옵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비만해질 대로 살찐 초대형교회의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 고 있지 않습니까?

“퀘이커는 개방적이야요,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란 말을 꼭 해야 되나 하 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1983년 봄, 함선생님이 어느 잡지기자와 인터뷰에서 하신 말 씀입니다. 저는 1979년 매주 함석헌의 <노자 모임>을 다닌 인연으로 퀘이커 모임이 한국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따른 기간은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이었습니다. 서울 신촌에 자리한 ‘퀘이커 모임’에서 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시간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고요예배(silence)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늘 꼿꼿 이 앉은 자세로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젖어 계십니다. 함께하던 이들 모두 고요 속으로 흐를 무렵, 선생님은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감화(vocal ministry)를 하셨 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관해 일러주신 도움말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면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하니, 그럴 땐 넘어가는 해를 연상하면 도움 이 될 거요.” 선생님은 예배를 마치면 당시 어지러웠던 시국에 관련해서 성경말씀 풀 이를 해주심으로써 모임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제 퀘이커 신앙에 관해 간략히 설명해 보렵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영국에 머물렀던 기간(172728)에 작성한 서신 가운데에, 퀘이커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지 무려 네 차례나 퀘이커에 관한 편지(On the Quakers)를 모국의 지 인들에게 보냈습니다.

퀘이커 같은 특수한 집단의 교리와 역사는 생각 있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내게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영국 내에서 널리 알려진 퀘이커 한 사람을 만나보러 갔다. 나는 우선 가톨릭 신자들이 신교도들에게 늘 해온 질문부터 던졌다. “선생님, 세례는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나의 친우들도 모두 받지 않았어요.”라고 그 퀘이커 는 말했다.

“저런,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기독교 신자이고 또 좋은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지요. 하지 만 기독교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고 소금을 약간 뿌리는 것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 요.”

나는 이 불경한 말에 화가 나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 어버리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퀘이커교도는 온화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요한 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는 않았지요. 우리들은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8) 이미 여러분들이 보았겠지만, 퀘이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에 의하면 첫 퀘이커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종교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부패하 기 시작하여 천 육백 년 동안 타락한 채로 남아 있었으나,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소수의 퀘이 커들이 은거하면서 신성한 불꽃을 보존해오다가, 마침내 1642년 영국으로 이 빛이 퍼져나갔다 는 것이다.9)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가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낡은 제도에 붙들려버린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함선생님과도 인연이 깊은 미국의 퀘이커 신학자 하워드 브린튼(H. Brinton)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의미 깊은 주장을 펼칩니다. ‘내적 체험에 근 거를 둔 신앙 신비주의’와 ‘교리와 상징으로 신앙을 표방하는 신학자’ 간의 싸움이라 는 것입니다. 그는 <<퀘이커 3백년>>에서 ‘미래에 살아남을 종교가 있다면 그래도 퀘 이커와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라고 예견하였습니다.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 Fox, 1624-1691)를 선두로 퀘이커 신앙이 싹틀 무렵 신비주의는 초미의 관심사였습 니다.

처음 기독교는 사도행전에 보이듯이 오순절 성령과 더불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퀘 이커 신앙이 단지 신비주의에만 머물렀다면 ‘기독교 제3의 형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쿰란공동체처럼 세상 사람들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새 힘과 빛을 얻는 신비체험을 긍정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체험이 개인에게만 머물러 버 린다면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리라 봅니다.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야지요. 그래 서 퀘이커 신앙은 개인 신비주의를 넘어 단체 신비주의(group mysticism)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지 폭스는 말합니다. “참 신앙이란 각 개인의 체험이자 모험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영과 만나는 일입니다.”

사실 퀘이커 신앙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것’ 이란 주장처럼 반대를 받아 온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의 예정설 과는 서로 상치됩니다. 퀘이커 반대자들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 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고 하면서 반박했지만, 18세기 가장 탁월한 퀘이커 신학자 로버트 바클레이(R.Barclay)는 “나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은 문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체험에 의한 깨달음에 있습니다.”라고 변호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이때에는 ‘깨달음’의 복음인 <도마복음>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8) Voltaire, Philosophical Letters, (New York : The Liberal Arts Press,1961), 3~4 9) 위 책, 11

우리는 빛을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단순히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 다. 몸은 동물적이고, 마음은 이성적이나, 속에 있는 빛은 신(神)적 입니다. 진리의 빛 은 그 이성을 지도해야 하고, 이성은 본능을 도와 올바르게 정돈된 살림을 하도록 해 야 한다는 것이 초기 퀘이커 신앙의 꽃이라 하겠습니다.

속 빛’(light within, inner light)은 화해와 일치의 근원입니다. 이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이며, 이 빛에 가까이 이를수록 사람들은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입니다. 조지 폭스의 이상은 평화와 조용함(quietness) 이었습니다. 퀘이커 평화사상 의 토대는 어디까지나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요한 14:27). 퀘이커들은 두 길을 통해서 평화주의의 입장에 도달했는데, 하나는 우리 양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이 며, 또 하나는 신약성경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 많은 힘 가운데 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여러 힘을 하나로 통일하는 근원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땅 위에 실현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퀘이커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는 보편 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학적인 추상론도 띠지 않은 단순성에 있습니다. 이 단 순성을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에 최근 서양 또는 아시아 지역에서 특정 종교의 벽을 넘어선 이들(가톨릭 퀘이커, 불교인 퀘이커)이 함께 평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조지 폭스 시대의 퀘이커 운동이 탈자적(ecstatic), 신비적 운동으로서 시대를 가로지른 급진적인(radical)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10)

이젠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수년 전 저는 한국 기독교회에 관한 우울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가나안 기독교인’이라는 제하의 글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서 지명의 ‘가나안’이 아니라 ‘안 나가’를 거꾸로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조가 놀랍게도 함석헌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게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풍이 교회 안을 채워버렸고 그러니 가나안의 소망이 ‘안 나가’의 현상 유지로 타락해버렸다. 이상하게도 ‘가나안’이 거꾸로지면 안 나가가 되지 않나?11)

10) Paul Tillich,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315

11)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함석헌전집3. 33~34

종교는 비판을 거부한다. 비판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이기도 하나 그렇지만 신성불가침은 비 판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양심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절대권을 대표하느니만큼 도리어 끊임없는 자기반 성이 필요하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12)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것이지 민중의 종교 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 다.13)

이런 연유로 선생님은 종교도 늘 거듭나야 한다며, 새 종교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끝으로, 새겨둘 만한 퀘이커 일화 한 토막을 올리며 마칩니다. 미국 초창기 펜실베이 니아 지역을 거룩한 실험(HolyExperiment)으로 이끌었던 장군 윌리엄 펜(W. Penn) 이 어느 날 퀘이커 집회를 마치자 조지 폭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답니다. "내가 칼 을 차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보기에 어떻습니까?" 폭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 불편하다고 느낄 때까지만 차십시오.”

12)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전집3. 35~36 13) 위 책,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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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열린강좌 제6강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2021.9.30.(목) 논평자 이수호

“퀘이커를 기다립니다.”

오늘 훌륭한 강의를 해 주신 장영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제 소개를 간 단히 드리면, 저는 초등학교 교사로 지난 2015~2016년에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에 연수파견을 갔었는데,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름 교 회와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 는 갈증과 의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함석헌의 글은 몇십년의 간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백이자 절절한 외침으로 다가왔습니다. 논문 준비를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함석헌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무교회와 퀘이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 와 도봉구 함석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앞서 퀘이커를 경험하신 정지석 목사님, 김조년 교수님 등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대전에 몇 번, 신촌에 한 번 정도 밖에 참석해 보지 않았으나, 기회가 된다면 퀘이커를 집중 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에 대해 핵심을 잘 소개해 주신 장영호님 의 강의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평소에 궁금했던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함석헌이 민주화 투쟁에 직접 나섰던 인생 후반기의 기간이 퀘이커를 만나 도움을 받고 교제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입니다. 김성수 박사님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09.)”라는 논문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 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 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함석헌이 당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무 나 누릴 수 없었던 해외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미국 펜 들힐과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석방을 위해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 해 주었고,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해 주는 등 아무도 함석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위상을 높여준 것이 영미 퀘이커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이미 성숙기에 이르렀던 함석헌의 씨사상과 300년 전통의 퀘이커 신앙이 서로 깊이 공감하고 공명하였다는 차원을 넘어서, 씨사상과 전체론의 깊이가 완성되는 데 서구 퀘이커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함석헌을 만든 것은 사실상 퀘이커였다고 하 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둘째, 함석헌 사후 한국 퀘이커의 현황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보수교회에서 도 중고생과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어 10여 년 후에는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 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퀘이커도 새로운 회원들이 증가하기보다는 기존 회원들 이 고령화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신앙 유산을 우리 자녀들과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함석헌에 대한 물심 양면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부 부유한 퀘이커 회원만의 노력이 아닌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보통 회원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도 도움 이 절실한 이들을 찾아 지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최소한의 조직은 갖추 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시대 에 퀘이커를 찾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또 해외 퀘이커의 현황은 어떠한지 최근의 기록과 통계를 알 수 있을까요?

셋째, 누가 퀘이커인가, 퀘이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퀘이 커모임을 후원했다거나 펜들힐에 다녀온 분들이 있었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을 수 있으나, 내가 퀘이커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퀘이커 회원이지만 지금은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지 않거나, 자신이 퀘이커라는 정체성을 굳이 외부에 드러내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퀘이커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퀘이커 신앙에는 공통적인 신조나 교리가 없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만큼에서만 퀘이커를 설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퀘이커주의에 공감하고 혼자서도 나름대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퀘이커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요? 세계의 다른 퀘이커들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가나안 성도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 찬가지일까요? 씨사상에 공감하면 함석헌을 기리고 계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이상 제가 가지고 있던 소소한 생각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이 자리에 참여하신여러분들과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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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

-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에 대한 논평 -

김말순


먼저 논평을 맡은 제 소개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원도 사상가도 아닙니다. 그냥 모태신앙으로 초대 교회 신앙인 창조의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죄사함에 대해 성경을 아주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강의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신촌 퀘이 커모임집에 살게 되면서 예배모임에 참석하고 퀘이커에 대한 공부 를 하게 되었고 [함석헌기념사업회]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회에 나오게 된 것도 선생님을 좀 배워서 알아야겠다는 욕심으로 2016년부터 모임이나 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누구의 글이나 강의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서울종교친우회(퀘이커) 회원이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읽으면서 논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함 석헌 선생님에 대해 많은 서적들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고 장영호 친우님의 강의 내용에도 잘 설명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단지 선생님의 진면목이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누구인가?” 하고 인터넷에 물어봤습니다. 아주 명쾌한 답을 알려 줬습니다.

“취래원 농사꾼 황보윤식 농부(함석헌평화연구소 소장)”님의 “함석 헌 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 9. 1) “함석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 함석헌의 사상은 무지개 사상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 보-로 색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색의 경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 게 무지개의 본질이다. 함석헌은 무지개처럼 뚜렷한 한 가지 사상 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분명 우리 시대에 “사상의 무지 개”를 놓고 간 분이다. 다양해져 가는 열린 시대에 필요한 융합철학의 무지개를 놓고 간 사상가다. 

▷서양의 그리스도 사상(퀘이커) 을 기본으로 동양의 불교사상, 공맹사상, 노자사상, 양명사상 그리 고 다시 서양의 실존주의 사상과 아나키즘까지 융합하였다. 

그래서 함석헌은 무지개 사상을 만들어냈다. 함석헌의 무지개 사상은 문화 의 다양성 강조와 하나의 인류를 지향해 가는 곧 미래사회의 세계 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의 귀감을 보이면서 세계 주의를 실천해갔다. 

세계주의는 곧 평화주의 사상이다. 세계평화는 전쟁이 종식 되어야만 가능하다 전쟁종식을 위하여 합법을 가장한 국가폭력을 반대해야 한다. 곧 국가(정부)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를 검색했을 때 위의 글을 읽고 깜짝 놀 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아!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과 퀘이커의 만남”을 좀 더 깊이, 많이 알고 논평 을 맡은 입장에서 답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엮으신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를 읽었고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빼놓고 요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300년”의 옮긴이의 말]을 전해 드리는 것으로 논 평을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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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 9~12 9)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 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을 주셨다

※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 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종교친우회=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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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을 옮긴이의 말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 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 때 사람 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 마다 활발 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 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 병령을 반대하고 나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 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 주는 법령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 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 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 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찌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 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 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 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애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가 있었는 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 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걸어오기는 하지만 그 영상은 아직 태평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형상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서울에서 그들 을 만나는 날이 왔습니다,

무슨 팔자로 그랬는지 은혜로 그랬는지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태어났 으면서도 이날 껏 전쟁을 몸으로 당해 보지는 못했는데 6・25전쟁이 터 져 3년 동안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먹고 손으로 만지며 그 악독하고 끔찍한 맛을 속속들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다시 돌아오니 내 한 말이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전쟁 전 YMCA 큰 강당에서 주일마다 말을 했는데 언젠가 똑똑한 내 정신을 가지고 “이놈의 서울이 남대문서 동대문까지 환히 내다뵈도록 확 타버렸음 좋겠다.” 한 일이 있 었습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정말 그대로 된 꼴을 보니 부 르르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말이 꼭 그대로 들어맞을 만한 무 슨 힘이 있다는 생각은 감히 터럭만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말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정수리에 칼이 박히듯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는 김명선 박사의 고마운 뜻으로 지금은 없어진 세브란스의 에비슨관을 빌려서 주일 모임을 계속했는데 그 어느 날 거기 퀘이커가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아더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내가 퀘이커를 본 처음입니다. 그는 그 때 우리 모임에 나오던 이윤구 님의 소개로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보다 전에 미국 퀘이커 봉사회에 서 전쟁 후의 한국을 돕기 위해 30명 가량으로 된 구호대를 보내어 군 산 도립병원의 복구 사업을 맡아서 했는데 그 때에 이윤구 님은 그들을 만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퀘이커가 되었고 자기 생각에 나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해서 내게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레지 날드 프라이스, 플로이드 슈모어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제 나는 평화주의나 양심적 거부만이 아니라, 퀘이커라는 사람들을 ‘친구(friend) 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때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에 몇 번 나간 일이 있었고 아주 나가게 된 것은 1960년 나의 주일 모임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였습니다, 그래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매우 좋다 생각했지만 나는 나의 생각하는 바를 고쳐야 할 어떤 필요도 아직 느끼지 않았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만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무슨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미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하게 됐으므로 마침 기회가 좋다 해서 필라 델피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퀘이커 수양기관인 펜들힐에 요청해서 공식 여행을 마친 후 6월 부터 연말까지 일곱달을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했 습니다. 그리고는 밝는 해 1월부터 석 달을 또 영국 버밍햄에 있는 같은 성질의 학교인 우드브룩대학으로 가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의 대 체의 모습을 좀 짐작하게 되었고 흥미를 더욱 느껴 돌아올 때는 책도 더 러 구임해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퀘이커가 되자는 생각은 역시 없었습 니다. 나는 어느 기성교파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퀘이커의 회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노드캐롤라이나 길포드대학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퀘이커대회 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태평양 연회모임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 니다. 그런 변동의 동기는 본래 말로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떠냐?” “그렇다. 퀘이커가 됐담 된 것이고 안됐담 안된 것이다.” 합니다마는 그 중의 중요한 점을 말한 다면 나는 그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 정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 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 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 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 됐습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합니다.

퀘이커라는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넓으면서도 회원이라 할 때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절대로 회원 되는 것을 권하는 일 없습니다. 퀘이커 는 전도 아니하는 종교입니다. 그 점은 다른 종교와 참 다릅니다. 그것 은 그들의 직접적임과 체험과 자유를 극단으로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입 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별이나 차별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회원이 되는 데는 크게 책임감을 가집니다. 강권하지 않으니만큼, 차별 하지 않으니만큼, 도리어 더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나도 후에는 그 생 각이 옳다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정말 자유요 참 민주주의며 그들이 신 비파 운동에서 일어나기는 하면서도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 의 주관주의에도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 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고 비교적 건전히 중간노선을 걸어오게 된 까닭이요, 또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도 발언권을 가지는 까닭입니다.

하여간 나도 그들의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시비를 들을 각오를 하고 퀘이커의 회원이 됐습니다. 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 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 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 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 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나니 퀘이커를 더 잘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하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연회 초청여행으로 태평양 연안 산디에이 고에서 포틀런드에 이르는 여러 퀘이커 모임과 가정방문을 마친 다음에 다시 5년 전에 일곱 달 동안을 이날까지의 내 생애에 가장 행복스런 대 목이라고 하면서 지났던 그 자유와 평화의 동산을 다시 봤을 때의 감격 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 누 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 의사를 충분히 발표도 못하 면서도 아무 부자유도 불안도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조용히 맘대로 생각 하고 거닐었던 것입니다. 5년 전이나 5년 후나 아무 변함이 없었습니다. 도서실의 책이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있고 강당 구석에 있던 어항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갔던 아들이 어머니 품 으로 돌아온 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머물러 있던 방에 가니 바로 어제 있었던 듯했습니다. 5년 전 내가 그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창 밖 능 금나무 가지에 철새란 놈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쳐서 손으로 만질 거리 에 있어서 날마다 대화를 했었는데 그 새둥지가 비바람에 부서는 졌지만 그대로 옛 모습을 짐작할 만큼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갔던 새끼인 듯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갔던 새끼가 돌아온다면 자라서 올 것인데 나도 자랐을까? 가지가지 생각이 풀려나는 내 가슴속에서는 용천 옛 집에서 어머님이 넘어가는 저녁볕 밑에서 잣던 물레에서마냥 평화의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그러한 속에 있으면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한 것이 이 책 읽기와 우리 말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이 책을 저자인 선생님 손 에서 받았고 때마침 그 일본말의 번역자인 다까하시 여사도 있어서 그 일본말 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도 선생님을 존경아니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의 사상・지식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 알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습 니다. 그 인격과 믿음도 여러 십년을 미국, 독일, 일본에서 가르치고 봉 사하고 한 경력을 살펴보면 자연 짐작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에 왔을 때 도 이미 여든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아주 건강해 깊고 조리 있는 강의를 했고 아침 예배시간이면 그 허연 머리털과 길다랗게 뻗친 흰 눈썹 밑에 광채를 쏘는 눈을 빛내며 앉은 모습이 성자다왔고 이따금은 뜻 깊은 감 화를 주곤 했었습니다. 5년 후 이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와서 각별한 결심으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그가 아버지처럼 생각됐습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그것은 꼭 내 이야기같이 생각됐습니다. 어쨌든 내 생각의 역사를 다 알기나 하는 듯해서 어떻게 내 소리를 썼을까 싶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선생님을 뜰에서 만나면 “선생님, 그거 제 이야기 같습니다”했습니다. 나만 그렇겠습니까? 남도 그런 사람이 많 을 것입니다. 그만큼 참입니다.

그래서 첨에는 내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것이 다시 생각하니 서울 있 는 모임의 벗들에게 이것을 읽도록 해야겠다, 그뿐 아니라 일반 다름 사 람에게도 읽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퀘이커주 의만 아니라 일반 신앙의 참고로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퀘이커는 본래 식학이 없지만, 이 책도 신학 토론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실지로 신앙 살림을 해가는 데 많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community)에 관한 이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 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 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 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 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 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담 또 한 가지는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 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 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가장 오랜 모임집에 가보았는데 모일 때마다 기록한 회록이 300년 전 시작하던 맨 첨에서부 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체제에 같은 글씨로 기록되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변해가는 세상바다의 거친 파도에서 제 자신을 가누어가기에 미처 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들 얼마 아니 되는 퀘이커만이 수세가 아니라 공세입니다. 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자 선생님 말씀대로 미래의 종교가 반 드시 퀘이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미래를 건져가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 은 퀘이커 같은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하는 종교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 됩니다.

펜들 힐에 있을 때 이미 거의 절반이 옮겨졌었는데 그 후 나라에 돌아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제 와서야 겨우 인쇄에 부치게 돼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해에 부인을 앞서 보내셨고, 건강도 한때는 퍽 걱정들 을 했는데 요새 많이 회복되셨다는 소식이 와서 기쁩니다. 다만 진심으 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말씀은 한국판이 나오기를 위해서 내가 감히 말씀도 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자진 노력하시어서 출판자금을 얻어 주셨는데 이날까지 이렇게 무책임하게 늦게 만들었고, 더구나 한마디 편 지도 직접 못 드려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자유로 쓸 줄 알았다면 벌써 몇 십 장도 편질 드렸겠습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제 마음을 그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 옮겨놓은 글도 의심하실는지 모르나 읽기와 쓰기는 다릅니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가지고 했으 니 안심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본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 지 않았나 해서 두려운 마음 많습니다. 있거든 알려지는 대로 고치겠습니다.

이 책이 보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또 우리미래 역사의 설계와 작업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되는 점이 있으 시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1970년 5월 9일 함 석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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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지은이)아카넷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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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45,000원
판매가
924쪽

책소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목차


머리글 7
I. 영적 휴머니즘
1. 두 가지 휴머니즘 29
2. 영적 인간관 95
II.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
1. 유일신신앙의 종교와 형이상학적 종교 144
2. 예언자 정신 151
3. 형이상학적 신관의 대두 159
4. 유일신신앙의 의의 167
5. 역사의 하느님 신앙과 신의 섭리 175
6. 토마스 아퀴나스: 신앙과 이성의 종합 223
7. 유명론과 종합체계의 붕괴 229
8. 오컴,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근대의 태동 239
9. 계시와 이성에서 신앙과 과학으로 243
10. 유명론, 도덕실재론, 목적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 247
11. 위기에 처한 성서적 신앙 269
12. 스피노자와 칸트 이후의 신학 283
13. 세속주의의 종교비판 293
14. 다원화된 현대세계와 종교다원적 신학 299
III.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
1. 두 가지 창조론 335
2. 새로운 신관의 기본 구도 351
3.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 신의 양면적 본성 379
4. 창조 개념과 인과성의 문제 429
5.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구원 459
6. 무(無)로부터의 창조? 489
7. 악과 신의 섭리 문제 519
8. 특별섭리와 신의 행위 539
9. 부활신앙과 부활사건 563
10. 진화적 창조의 의미 591
11.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 607
12. 신론 후기 643
IV.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
1. 10가지 극한적 질문들: 세속화된 근대 이성을 넘어 675
2. 새로운 영성 745
3. 영적 휴머니즘의 길을 배우다: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 837
부록: 심도학사 개원 강연문 857
참고문헌 869
찾아보기 887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P. 30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
다. 접기
P. 118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접기
P. 161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즉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견해 ―를 제시하게 될 것임을 여기서 미리 말해 둔다. 접기
P. 214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접기
P. 319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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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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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 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간 그리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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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9

20 신화 표절한 성서...문자적으로 하느님 말씀 될 수 없어 : 오피니언 : 베리타스

최승언
25 Jun 2020  · Public  · 나도 같은 생각이라면 뭐라고 내게 말할까?


신화 표절한 성서...문자적으로 하느님 말씀 될 수 없어 : 오피니언 : 베리타스
신화 표절한 성서...문자적으로 하느님 말씀 될 수 없어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
입력 Jun 25, 2020

고대 신화를 표절한 성서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으며, 도덕과 세계관과 가치관의 절대적인 근원이 될 수 있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무작정 그대로 믿으면, 성서는 신화를 표절한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전락한다. 기독교인들이 솔직하고 용감하게 인식해야 할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인류사에서 문자적인 성서는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계급차별이라는 죄악의 근원이 되었으며, 교회 기독교는 성서를 그 죄악들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았다.

오늘도 여전히 문자적인 성서는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추악한 죄악들의 근원이 되고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역에서 보편화되고 있으며, 바이러스 팬데믹의 위기적인 상황에서도 지구촌 도처에서 인종차별과 여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에 반대하는 항의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흑인의 생명도 백인의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Black Lives Matter 항거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미투운동이 전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19세기에 기독교 국가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렸으며 그 결과로 세계 도처에서 원주민들은 참혹한 탄압과 착취로 암흑 속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기독교 국가들은 백인 기독교인들 이외에 타종교의 유색인종들을 야만인으로 천시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 국가들은 식민지 정책의 최전선에 선교사들을 앞장세웠으며 이들은 다른 민족들의 고유 전통과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고, 기독교인들로 개종시키는 선교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했다. 서구 세계의 교회 기독교는 세계복음화 즉 세계를 정복한다는 기독교 제국화라는 몰상식하고 비상적인 행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전세계의 비기독교인들은 식민지정책과 세계복음화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수천년 동안 불교인과 유교인이었던 한국인들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서구의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거짓과 은폐에 속아 넘어가 그들의 죄악을 답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성서근본주의는 성서를 악용하여 죄악의 근원이 되는 괴기망칙한 책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성서와 하느님을 교회로부터 해방시켜야 인류사회가 혼돈과 전쟁과 테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의 성서는 3천년 전에서 2천년 전 사이에 수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1000년에 걸쳐 지리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모음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서 66권 중에서 극소수 기이한 성서구절들이 차별주의와 우월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그 기이한 내용들을 오류 없는 도덕의 근원이자 가치관이라고 맹신하는 신자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혼돈과 분쟁 속에 빠트렸다. 신자들은 성서를 무작정 문자적으로 믿으며 자기 도덕의 근간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오만과 편견의 추악한 죄악들을 뻔뻔스럽고 심지어 자랑스럽게 저지른다.

구약성서는 심층적인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대 신화들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 성서는 신화들의 도움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기가 불가능했다. 사실상 신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심오하고 경이로운 체험과 비전을 서사시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인 수단이다. 성서가 기록된 시기보다 적어도 15세기 이전에 보편화된 신화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은 구약성서만의 독창적인 신화가 아니라, 모두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화를 성서의 창조신화로 변형시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는 몇 가지 작은 차이가 날 뿐, 노아 홍수 이야기와 거의 동일한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스토리 전개의 순서도 동일하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세계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실제 인물이었던 BC 2500년 경의 수메르 우륵 왕조의 5번째 왕인 길가메쉬의 모험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길가메쉬 서사시는 바빌로니아 제국 시대인 BC 700년에 필사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아 홍수 이야기는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흥미로운 이야기이며 또한 교회 기독교의 믿음체계에 대단히 중요한 도덕적 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덕은 끔찍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탐탁찮게 생각했기에 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수장시켰고 거기에다 아무 죄도 없는 나머지 동물들까지 익사시켰다. 스메르 신화를 표절한 노아 홍수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Photo : ⓒpixabay)
▲고대 신화를 표절한 성서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으며, 도덕과 세계관과 가치관의 절대적인 근원이 될 수 있을까?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신자들은 사람들이 성서를 아무 의심과 질문 없이 무작정 문자그대로 직역적으로 믿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화를 낸다. 또한 신자들은 자의반 타의반 노아 홍수 이야기를 비롯해서 성서의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믿는다. 노아 이야기에 문자적으로 세뇌되고 성서의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들에는 무지한 신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무식한 목사들의 책임은 더 크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강압적이고 수동적인 교육때문에 그들은 자연재해와 질병과 사고를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에 대한 징벌로 착각한다. 그러나 세계를 미리 계획한대로 창조하고, 창조한 세계를 멸망시키고, 다른 세계의 내세를 계획하는 소위 신성하고 거룩한 하느님이 대체 왜 인간의 비행 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분명히 이 하느님은 옹졸하고 낡고 추악하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무엇때문에 동성애자들을 그렇게도 혐오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극우 근본주의적 신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이웃들을 미워하고 적대감과 폭력을 휘두르며 사회와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필자는 성서근본주의자들에게 왜 그토록 동성애자들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구약성서를 표층적으로 이해하면서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맹신하는 답변을 들을 때에 그들은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들의 표층적인 변명에 따르면, 하느님이 범죄자가 있는 도시에 자연 재앙을 내릴 경우(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지만) 무고한 시민들이 부수적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바이러스 팬데믹과 지진과 쓰나미와 허리케인과 같은 천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이러한 징조들은 세상의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와 징벌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좀더 표적을 좁혀서 죄인들만을 해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신자들의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차별적이고 우월적인 도덕의 근원이 되는 또다른 신화가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와 대단히 흡사한 신화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소돔과 고모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전설적인 도시들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될 때 유독 정직하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게 된, 노아에 상응하는 인물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었다. 이 야기에서 소위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 롯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천사들을 폭도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남자들을 알지 못한 자신의 딸들을 내어 주어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이야기는 계속되어 롯과 그의 두 딸은 동굴에 피신한다. 어느 날 만취된 롯은 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두 딸을 임신시켰다. 이 일그러진 가족이 하느님의 천벌이 내린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면 하느님의 도덕 기준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 기이한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몰라도, 종교가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확실하게 말해준다.

기이하게도 롯과 소돔 이야기는 판관기에서 섬뜩하게 반복된다. 이름 모를 레위인(사제)이 첩과 함께 여행 중에 한 노인의 집에 묶는다. 어느날 저녁에 도시 남자들이 몰려와서 노인에게 남자 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노인은 사제를 보호하기 위해 롯과 똑같은 말을 했다. 노인은 자신의 처녀인 딸과 손님의 첩을 내어줄테니 욕보이든 마음대로 하고, 그대신 이 남자에게는 몹쓸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도 여성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레위인의 첩은 폭도에게 넘겨졌고, 폭도는 밤새도록 그녀를 집단강간했고, 그녀는 처참하게 죽었다.


롯에게 삼촌이 있었다. 그는 세 개의 일신교 즉 유대교, 기독교, 회교도의 창시자 아브라함이었다. 그는 족장이라는 지위 덕분에 하느님보다 약간 낮은 역할 모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서는 가능한지 몰라도 교회 밖의 도덕주의자들이 그를 본받고 싶어 할까? 오늘 신자들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두 차례나 속여 팔아넘겨 부를 챙겼다. 처음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두번째는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넘겼다. 엄밀히 말해서 이 이야기는 일종의 인신매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야기의 그런 불쾌한 일화들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희생양으로 살해하려는 일화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며, 힘없는 사람에 대한 핍박이며, 권위에 굴복하여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는 애처로운 변명의 사례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야기는 세 개의 유일신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 된 신화들 중 하나이다.

현대인들은 이 수치스럽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에서 어떤 종류의 도덕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목사들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성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과 이슬람권이 그렇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으면서 도덕을 이끌어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만일 이렇게 성서에서 문자적으로 도덕을 이끌어내는 신자들은 성서의 멋진 부분만 취사선택하고 불괘한 부분은 거부한다. 문자주의 신자들은 어느 것이 도덕적인 것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의 도덕과 현대의 도덕이 단절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성서는 설득력을 잃고 낡은 책이 되었다. 정직한 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도덕적인 기준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배웠든 못배웠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깨끗하든 더럽든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기준이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그대로 도덕적인 것으로 믿는 신자들은 실제로 성서 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기록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 성서를 정직하고 신중하게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서 민수기 15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지된 날에 한 남자가 야외에서 장작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그를 붙잡은 뒤 하느님에게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그를 야영지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다. 오늘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신자들은 이 잔인하고 옹졸한 하느님을 자신들의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악한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한다. 한국과 북미에 그런 성서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안간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혼돈에 빠진다.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거는 이런 말을 했다. 제도적인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전쟁과 테러와 사회적 혼란의 원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악행을 저지른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 국가들의 우월주의적인 식민지 정책과 차별주의적인 세계복음화로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이라는 악행을 세계 도처에 확산시켰고, 성서근본주의가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이라는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오늘날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행동지침인데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예배모임을 갖고 바이러스 확산의 원인이 되는 것은 선행이 될 수 없으며 악행이다.

성서로부터 도덕을 이끌어내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성서가 도덕의 절대적인 근원이라고 맹신하는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신중하게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읽지 않는다. 더욱이 은유적으로 기록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주관적으로 선별한 극소수의 구절과 문자 하나하나를 절대적인 교리로 직역하고 무작정 믿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자들이 드러내는 가장 큰 모순은 성서의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성서 66권은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진실한 책이 된다. 성서는 개인적인 믿음과 사상에 맞추어 특정 구절들을 인용하는 교리책이 아니다. 성서는 차별과 우월과 탄압과 착취와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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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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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ments

  • Jean Kyoung Kim
    걍 떠들게 냅둬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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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철
    표절이란 저작권 개념을 일찍부터 확립했던 서구 관점이죠~고대 근동은 하나의 세계였는데, 역사와 문화를 보는 관점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토라를 누가 썼는가, 안 썼는가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오랜 구전 과정을 거쳤는데, 누구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미 서구에서조차 4대 문서설을 폐기했는데, 아직 거기에 기대어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도 있는 거 같고요~어리석은 한마디 얹어 보았습니다~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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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ul-ho Choi
    생각이야 다 자유겠지만,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지질학자인 이분이 성경을 믿지 못하면서 왜 구태여 성례를 집례하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목사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슨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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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푸르뫼
      Chul-ho Choi 진리를 갈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과학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진리를 찾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종교는, 어떤 종교든, 진리를 상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찾는이에게는 있다는 것이 종점이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입니다. 과학도였던 최승언 목사의 생각을 추론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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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언
      과학 연구는 지금도 하고 있지요. 성경을 바로 본다는 것 자체에 많은 시각이 있는 것도 인정합니다. 지질학자인 그 분은 그 분의 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계시겠지요. 천문학자인 저도 같은 과학도 이기에 공감하는 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와 같은 시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시각을 인정합니다. 제도권 교회에서는 성례와 세례를 목사가 하게 되어 있기에 이러한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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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ul-ho Choi
      신학자인 저로서는, 진리를 탐구코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말입니다. 동서양의 고전, 이를테면 중국의 주역과 노자, 인도의 우파니샤드,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로티노스 같은 이들이 남긴 저술에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 아들이었던 심리학자 칼 융은 그것을 인간의 무의식속에 내재된 인류 역사의 공동기억으로 '원형'이란 개념으로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잘못 말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가 되고 맙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진리에 도달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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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푸르뫼
    믿지않는, 신앙을 갖지않은 과학도보다도 못한 지식을 갖고 있는 "목사"란 껍질만 쓰고 호도하는 먹사가 많은 게 현실이라 생각합니다. 잘 못된 신념-믿음이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먹사들이 있을 때, 교회는 회칠한 무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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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철
    학문 연구는 방법론을 필요로 합니다~신학자가 특정한 과학이론을 검증되지 않은 방법론에 따라 주장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과학자가 허술한 성경 비평기술로 성경에 대해 특정한 결론을 내릴 때 비슷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여러 관점에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야 하고요~하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본 것을 목사의 자격으로 말한다면 자기모순이라고 봅니다~성서를 연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방법론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봐야 하고요~적어도 목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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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ongHee Park
    기독교는 학문탐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자체가 진리이기때문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증명의 대상도 아닙니다. 안믿어지면 안믿으면 됩니다. 뭐가 어떠니 저떠니 그런 얘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너희들 스스로는 결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니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입니다.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성령을 갑없는 선물로 얻으면 성경은 풀립니다. 그렇지 않고 과학탐구,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앞세운 증명의 대상으로 바라보니 다 엉터리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는 한분 하나님, 동일하신 성령이 주시는 한 소망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연구나 서적 해석처럼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경을 문자로 눈에 보이는대로 보면 안된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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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푸르뫼
      Jack Park " 기독교는 학문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초기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끊임없는 연구를 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가운데 성경이 묶여지고, 교리가 정립되고...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들이 존재하는데, 과거는 학문의 대상이었고 현재는 대상이 되면 안된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요즘 소위 먹사들이 신자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논리 아닙니까? 심한 경우, 하나님과도 맞짱 뜨겠다는 먹사같은 분들이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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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래
    Jack Park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성령을
    값없는 선물로 얻지못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소망을 선물로 받아야 성경을 바로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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