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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7

Hyun Ju Kim [파격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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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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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하는 여인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룻기 4장 13-17절]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 지점은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학자들의 해석에 앞서 역사적 예수의 혈통이 담긴 족보에 있다. 족보에는 유대인들이 익히 들어 온 조상들의 이름이 있다. 우리도 족보가 있지 않은가! 유대인은 경전에 적힌 족보를 읽으며 ‘거기에 나도 있다!’라고 느끼겠지. 친구 이름, 아버지 이름, 내 이름을 따온 그 이름들이 거기 있잖아. 외국인 중에 존, 피터, 마크, 죠슈아, 아브라함, 제이콥... 같은 아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 왠지 자신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성경은 족보라는 틀에 이야기를 담는 형식으로 경전과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낮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라성같은 구약의 영웅들이 도열한 예수의 족보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두 족보는 혈통과 무관하다. 마태복음은 우선 아브라함에서 시작한다.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천명하고 유전자가 전달되는 과정을 전향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아브라함의 유전자는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에게 전달되고 예수는 도리어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온다. 이렇게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자손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누가복음 족보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메시아로 데뷔하는 장면에 이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라는 겸연쩍은 말로 시작한다. 사실은 아버지 없는 아이였지만 요셉이 아들로 삼았으니까,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아니라도 요셉의 아들로 치자며 족보를 적기 시작하여 마침내 하나님까지 끌어올린다. 사실은 가짜라면서 진짜 같은 서사를 이어붙인다. 막판에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낯설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낳았다니, 낳는다는 말은 내가 아는 그런 뜻이 아닌가? 성경에서 나오는 아들과 아버지라는 말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뜻도 있는가 보다. 
오벳은 독특한 위치에 있는 아이다. 오벳의 아버지는 보아스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의 족보에서 오벳은 보아스의 아들이자 이새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서 역사적 예수에게까지 흘려보낸 유전자는 없다. 아마도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낳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출산이 틈을 메웠을 것이다.
한편 오벳의 어머니는 룻이다. 룻은 모압 사람이다. 모압은 아버지를 역강간한 롯의 큰딸이 낳은 아들이다. 아브라함만큼 대단한 부족은 아니어도, 모압과 암몬은 역사에 남았다. 아버지를 범하면서까지 무언가를 남기고자 주체적으로 행동한 여성들은 수동적인 아버지 대신 이름을 남겼다. 신명기 저자는 모압과 암몬을 구속사에서 배제하지만(신 23:3-6), 룻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다윗의 파란만장한 출세기와 마침내 메시아의 족보에서도 모압은 면면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룻기 마지막에서 오벳의 모계는 어머니 룻이 아니라 외할머니 나오미로 연결된다. 나오미는 죽은 남편과 아들을 대신하여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 오벳을 받아 그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여기서 보아스는 정자공여자처럼 보인다. 이를 확인하듯 이웃 여인들이 와서 아들을 낳은 나오미를 축복한다. 그렇다면 룻은 자궁대여자잖아. 오벳은 나오미의 아들이 되어서, 보아스의 아들이자 이새의 할아버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이지만, 동시에 룻에게는 아들 겸 시동생이 되었다.

콩가루... 복잡해... 여기서 내가 얼마나 부정(父精)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족보는 원칙적으로 부계를 기록하지만 의미 있는 사건은 모혈(母血)이 끼어드는 파격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오벳의 복잡한 가계도를 그려보노라면 족보의 초점은 부정이나 모혈에 있지 않고 상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요약하면, 성경의 족보는 기업을 잇는 일을 혈통에만 맡기지 않고 입양이나 불륜이나 근친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손을 낳아 흔적을 남기고 싶은 동물적 본능을 충족하는 일에 여성보다 열등한 남성은 반수체인 정자가 온전한 씨앗이라는 오개념을 가지고 여성을 자궁이라는 도구를 가진 존재로 전락시키는 남성 중심적 질서를 구축했다. 남성을 위해 남성에 의해 기록된 예수의 족보는 여성을 끼워 넣는 파격으로 남성 중심의 질서를 깬다. 성령의 저술이라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정점에 신의 아이를 낳은 처녀가 있다. 참 생명이 태어나는 일에 씨앗은 필요가 없다. 여인의 정신과 몸이 전통을 파격하면 새로운 족보가 기록된다. 그래서 오벳은 룻의 아들이면서 나오미의 아들일 수 있었다. 
이 마을 남성들은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고 나오미 가문의 땅을 보아스가 대신 상속하는 일에 재정증인이 된다. 젊은 아내를 맞은 보아스에게 샘이 났는지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는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그리 나이 차이가 컸나? 아들이며 동시에 손주였던 부끄러운 쌍둥이처럼 되라고?  

그리고 이웃 여인들은 룻이 아들을 낳자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축하하며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나오미가 룻이 낳은 아들을 데려다가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엘리멜렉의 재산을 오벳에게 물려준다는 이유가 가장 컸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굳이 여인들이 축하하고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서술은 이 장면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작동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룻이 둘째를 낳았다는 말은 없지만 한참 성욕이 왕성한 나이에 부자 남편 보아스와 둘째 셋째를 낳지 않을 이유가 없지. 더군다나 오벳은 나오미가 맡았으니. 하물며 보아스에게 다른 아내들과 자식들이 없었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보아스는 오벳의 아버지로 기록되었다. 그래야 이새가 나오고 다윗이 나올 수 있는 결정적인 부자지간이다. 거기에 보아스가 오벳을 낳는 생물학적인 출산과 나오미가 오벳을 낳는 사회적인 출산이 겹쳐 있다. 이 이상한 사건에 룻과 나오미는 물론 그들과 함께 한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고 그 끝에 그리스도가 있다. 나는 이 콩가루 같은 족보 이야기를 들여다보느라 진이 좀 빠졌다. 2021/11/07

알라딘: 박석 명상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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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4.
  • [국내도서] 하루 5분의 멈춤 - 박석교수가 전하는 바라보기 명상 
  • 박석 (지은이) | 예담 | 2007년 10월
  • 13,800원 → 12,420 (10%할인), 마일리지 690원 (5% 적립)
  •  (3) | 세일즈포인트 : 266
하루 5분의 멈춤 - 박석교수가 전하는 바라보기 명상   
박석 (지은이)예담2007-10-11
 8.7 100자평(1)리뷰(2)
- 품절 확인일 : 2017-03-08
새상품 eBook 중고상품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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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현대인들은 항상 숨가쁘게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격무에 시달려 몸이 지치고 머리가 아프다. 지은이 박석은이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루 5분만이라도 멈춰서서 명상할 수 있는 여유를 찾을 것을 권한다. 그는 기존의 명상과 다른 '바라보기 명상'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몸을 다스리는 방법에서부터 생각, 감정, 욕망,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까지 다루었다. 바라보기 명상을 통해 읽는이들은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부록으로 가수 한경애,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이 참여한 명상음악 CD가 수록되었다.
목차
프롤로그_나비를 꿈꾸며 오늘도 살아가리
1장. 잠시라도 숨 고르고
가쁜 숨을 고르고
눈은 감고, 어깨에 힘은 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라
바라보기 명상은 삶의 에너지를 높이고
잃어버린 꿈에 채색을 해보자
따라하기_ 숨 바라보기

2장. 몸으로부터 출발하라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부드러운 것은 생명의 무리다
고요는 활동의 뿌리임을
일깨우기와 거두기를 자유롭게 하라
몸을 알면 마음이 보인다
따라하기_ 몸 바라보기

3장. 생각을 다스리는 길을 찾아서
생각의 힘은 키우고, 무게는 줄여라
생각의 뿌리를 깊이 내려라
생각을 흐리게 만드는 것을 찾아보자
경직된 사고에 유연성을 주는 길
배후의 생각, 생각의 배후를 꿰뚫어라
따라하기_ 마음 바라보기

4장. 감정의 주인이 되어라
감정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라
기쁨은 숨어 있으니 찾는 수고를 해야 한다
슬퍼하지 못하는 것이 슬프구나
화를 내야 할 때는 참지 말고 화를 내라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마라
따라하기_ 감정 바라보기, 소리 바라보기

5장. 욕망을 멋지게 펼쳐라
욕망, 그 새로운 발견의 힘
당신의 욕망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기본 욕망부터 제대로 다루어라
통찰력과 집중력, 그리고 끈기를 길러라
행복하려면 더 큰 욕망을 가져라
따라하기_ 식사 명상, 단식 명상

6장. 세상과 관계 맺기
삶은 나와 세상과의 관계다
부모와 자식, 모든 관계의 기초임을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길을 떠나리
꿈과 짐의 현장, 직장에서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이끌어라
따라하기_ 걷기 명상, 설거지 명상

에필로그_즐거움은 즐거움을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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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들숨, 날숨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머리에 맴돌던 생각을 모두 내려놓아라. 그러고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편안하게 기다려본다. 생각이 훨씬 자유롭게 숨 쉬고, 창의적인 생각이 자기 모습을 살짝 내밀 것이다.-p112 중에서

천천히 꼭꼭 씹어가면서 혀에 마음을 모으고, 미각을 잘 알아차려라. 처음에는 잘 못 느끼지만, 점차 여러 가지 곡식에서 우러나오는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다음, 계절에 맞는 신선하고 담백한 나물 무침을 먹으며 자연의 맛을 가만히 알아차려 보아라.-p204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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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차원의 지성을 밝히는 환한 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일 러뷰 박석 교수  구매
swryu64 2009-01-0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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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명상은 눈감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 
 책도 유행에 민감하다. 한 때 웰빙이라는 유행어가 있었고 관련 서적이 홍수처럼 나온 적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관련서적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 중 명상과 관련된 서적도 다수였다. 수많은 명상서적들의 공통점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참된 나를 실천하고 사색과 사유를 통한 이상주의적이고 관조적인 삶을 주장한다. 즉 내면에의 침잠을 강조한다. 
 이 책 <하루 5분의 멈춤>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내면의 침잠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현실세계와 괴리되기 쉽다. 대부분 은둔하는 삶속에서 느껴지는 평화, 영혼의 감성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들은 맑고 깨끗해서 잠시 청량제의 역할은 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저자가 현직 대학교수이면서 건전한 명상보급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임이 수긍된다. 즉 명상을 전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과 명상을 병행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사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자가 독자중심의 관점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배경이다.
 이 책은 명상에 있어서 삶의 아주 작은 비용으로도 명상을 통한 효과적 삶의 즐거움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바로 ‘바라보기 명상’을 통해서다. 바라보기 명상은 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호흡으로 시작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숨, 몸, 마음, 감정을 바라보고, 식사명상(단식명상), 걷기명상(설거지명상) 등 일상에서의 명상을 통한 즐거움으로 세상과 부드러운 관계 맺기를 말한다. 다른 명상과는 특이한 방법이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거나 난해하거나 강요 하는듯한 정형화된 명상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책속의 실례를 넘어 독자스스로의 명상법 탄생의 여지를 고대한다. 저자가 오랜 기간 터득해온 자신만의 명상법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독자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다.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몸으로부터 출발하라, 생각을 다스리는 길을 찾아서, 감정의 주인이 되어라, 욕망을 멋지게 펼쳐라, 세상과 관계맺기 등이다. 다른 명상서적과 달리 글의 내용은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오는 부조화를 날카롭게 논리적으로 파헤치며 명상의 필요함을 역설한다 가령, 학교, 직장, 가정 등의 문제를 국가사회적 시각으로 원인을 밝히기도 하는 점이다. 이는 일상과 접목된 바라보기 명상의 특징이다. 독자들이 충분히 수긍하고 동조하는 데에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라보기 명상의 실례는 각 장의 끄트머리에 자세하게 그 방법을 적시, 처음부터 명상에의 집착을 권유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아 독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고급 학생부터 활발한 직장인 등에게 권유할만한 책이며, 읽기 쉬운 평이한 책이다. 행간의 여백도 충분하며, 다양한 삽화도 들어있어 시각을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시키게끔 한다. 252페이지의 분량이 많게 느껴진다면, 책의 부록으로 딸려온 명상음악CD를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다만, 명상법의 해설시 자세한 삽화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방관이 거리를 두고 강 건너의 물을 보는 것이라면, 바라보기는 껴안을 수 있는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지요”(책 첫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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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gul 2007-11-16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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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국내도서] 명상 길라잡이 
  • 박석 (지은이) | 도솔 | 2003년 12월
  • 8,500원 → 7,650 (10%할인), 마일리지 420원 (5% 적립)
  •  (1) | 세일즈포인트 : 152
마이리뷰
명상세계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 
인간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라고 할수 있는 의식, 마음의 세계. 이 무한의 영역을 계발하기 위해 이미 수천년간의 노력이 있어왔고 이책은 그 노력들을 아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 무한한 영역의 계발을 통하여 질병의 극복 역시 이룰수 있다고 믿기에..한의학도로서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제목처럼 가볍고 단순한 '길라잡이' '소개서' 정도의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저자는 자신의 치열하고도 솔직한 경험을 토대로 여러 명상의 세계를 지나칠 정도로 솔직히 풀어냅니다.
요가,단전호흡, 화두선, 위빠사나에서 유대교 기독교의 명상까지... 혹시 명상이 가만히 앉아서 기약없는 이상세계인 '깨달음'을 향하여 정신집중만 하고 있는... 그런 고리타분한 수도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책을 한번 보시고 명상의 세계가 어떤것이고, 왜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의 세계에 빠져드는지... 느끼실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opchang 2004-01-1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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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요약
무여 2019. 8. 30. 12:34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sy945&logNo=221633350731# 2/22


[출처] 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요약>, 명상|작성자 휴먼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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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마당 ; 요가 와 탄 라

1. 요가와 탄트라의 차이점
- 요가의 어원 : yuj(유즈) ‘묶다’ 감각이나 사고활동을 통제한다.
전체성과 개체성, 브라만과 나를 하나로 묶는다.
궁극적으로 ‘凡我一如’인 것이다
- 탄트라의 어원: tan(탄) 넓히다. 정신적인 지식을 넓힌다.
에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마음을 확장시켜 무한한 우주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
- 같은 점
둘 다 인간 內面의 완성을 위한 冥想法이다.
- 다른 점
주로 修行을 하는 태도나 분위기에서 나타난다.
요가는 태체로 우리의 육체 감각을 소극적으로 통제한다
탄트라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육체 감각을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요가는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 방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탄트라는 처음부터 감성적이고 전체적인 사고 방식을 추구한다.
요가는 대체로 점진적이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편이다.
탄트라는 매우 급진적이다. 다소 비합리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요가는 전반적으로 사회 윤리, 사회생활의 규범을 중시한다.
탄트라는 비일상적이고 파격적인 요소가 많다.

2. 자아와 우주 의식을 하나로 묶는 요가

가. 진리에 이르는 네가지 길- 지혜, 사랑, 행동, 자아다스림
(1) 지나나 요가- 지혜의 요가
진리의 비인격적이 측면을 강조한다. 냉철한 지혜를 요구
(2) 박티요가- 사랑의 요가
진리의 인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무조건 믿는 것을 추구
(3) 카르마 요가- 행동의 요가
(4) 자아를 다스림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길 - 현실 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성향을 지닌 요가. 구 체적인 테크닉 위주의 요가. 일반적으로 요가라고 하면 이 요가를 지칭한다.

나. 다양한 테크닉의 요가들- 몸, 마음, 소리, 도형, 에너지
(1) 하타요가 ‘하’는 해를 ‘타’는 달을 가리킨다. 즉 음양을 상징
우리 몸의 양기와 음기를 서로 조화시킨다는 의미
(2) 라자요가 ‘라자’는 왕을 지칭. 즉 왕의 요가. 의식 각성법을 위주로한다.
(3) 만트라 요가 ‘만트라’는 진언 내지 주문을 뜻한다.
진언의 반복을 위주로 하는 요가이다.
(4) 얀트라 요가 ‘얀트라’는 도구, 도형이라는 뜻. 특정한 형태가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
(5) 쿤다리니요가 ‘쿤다리니’는 우리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원초적인 힘이다 쿤다리니는 우리몸의 항문과 성기사이인 회음 안쪽에 나선형의 모양으로 숨겨져 있다.(serpent power)
다. 요가의 단계- 감각적인 욕망의 통제로부터 삼매까지
- 파탄잘리 ; 고대 요가학파의 집대성자. <요가경>에서 요가수행을 여덟 단계
로 나누었다
①야마 - 사회적 계율 . ②니야마 - 내면적 계율. ③아사나 - 체조
④프라나야마 - 호흡법. ⑤프라티아하라 - 감각 통제
⑥다라나-집중. ⑦디아나 - 명상. ⑧ 사마디 - 삼매
사마디는 요가의 최고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요가 수행자 들은 바로 이 사마디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체험하는 삼매는대부분 초월적인 감각의 각성과 초월적인 기쁨이 같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이 사마디는 앞에서 말한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있다. 최근의 인도 성자 가운데 가장 깨달음의 경지가 깊다고 하는 라마나 마하리쉬만 하더라도 여덟 간계의 수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마디를 체험하였고, 그 이후로는 항상 사마디의 상태에 있었다
각 문파마다 서로의 관점이나 입장이 조금씩 다르고 사람마다도 체질이나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이 삼매 상태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면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모든 요가 수행은 삼매를 위한 방법이며, 또한 그 삼매를 더욱 깊게 하고 시간적으로 더욱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삼매가 과연 궁극적인 경지인가 하는 것이다.

3. 마음의 우주적 확장을 추구하는 탄트라

가. 힌두 탄트라 - 순수정신과 원초적 힘의 만남

- 철학적 배경 : 우주는 ‘시바’와 ‘샥티’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시바는 순수 의식이고 정지된 상태이다
샥티는 순수한 에너지 상태 창조의 원초적인 에너지로 동의 상태 절대자로서의 신의 양면
성을 가리킨다.
시바와 샥티가 우리 인간에게도 내재되어 있다.
시바는 정수리의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숨어 있고
샥티는 쿤다리니 형태로 성기 근처의 물라다라 차크라에 숨어있다. 1
시바와 샥티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완성이라고 본다.
- 성에너지늘 통하여 쿤다리니를 각성시키고자 한다.

나 불교 탄트라 - 업보의 뿌리인 몸,입,마음을 해탈의 방편으로

- 이 현상 세계 자체가 바로 열반이라고 생각
몸과 입과 생각은 열반에 이르는 비밀이 담겨 있는 훌륭한 방편으로 보았다. 몸에 숨겨져있는 비밀을 身密, 입에 숨겨져있는 비밀을 口密, 생각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意密이라고 하였다.
- 意密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비밀스러운 우주의 모습을 형상화한 만다라를 사용, 구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비밀스러운 우주의 진동음이 담겨있는 진언을 사용, 신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비밀스러운 무드라와 아울러 남녀의 성적 교합을 사용.

4. 요가와 탄트라, 짚어 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요가 - 다양한 길과 황홀한 체험이 있다, 그러나 몽롱하다.
- 요가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 그리고 육체보다 좀더 섬세한 몸등의 전반에
걸쳐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 인도는 왜 성자의 나라인 동시에 거지의 나라인가.
다. 탄트라- 현대성과 심오함이 있다. 그러나 미신과 유치함도 있다.
탄트라의 큰 장점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 긍정하는데 있다.
의식이 일정수준 이상 성숙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점은 수행 방법이 지나치게 번거롭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라. 명상과 섹스, 새로운 차원의 성문화를 향하여
- 육체적인 에너지나, 정신적인 에너지는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속으로는 하나이다.
- 들끓는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기 힘들다. 

● 제 2마당 ; 단학 과 도교

1. 도가,신선가,도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도가: 춘추전국시대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은자의 무리
이들은 주로 유가의 인위적인 문화 제도에 반대하여 무위자연의 경지와 초월적인 도를 추구하
- 신선가:신선방술을 추구하는 무리로서 흔히 仙家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이래 유행 한 것으로 주로 육체적인 불로장생을 추구. 고대의 신선가는 方士라고 불렸는데 方術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방술이란 불로장생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수런볍이다.

- 도교: 후한 말기에 등장. 도가는 사상, 도교는 하나의 종교
태평도와 오두미교가 주술적이고 무속적인 민간의 잡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노자를 교주로 받들고 도가 사상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종교 교리에 편입시켰고 불로장생술도 끌어들였다. 당나라 이후 전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게 됨 1

이들은 철리적인 면에서 노장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불교 이론도 대폭 수용하였다. 그리고 수행법에 있어서도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주술, 부적, 푸닥거리 의식 외에도 선가의 연단술을 모두 포괄하여 방대한 체계를 형성하였다.
- 명상법의 관점에서 도가,신선가,도교의 차이점
도가는 순수한 정신적인 깨달음과 자유를 추구
신선가는 육체적인 불로장생을 추구~의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
도교는 불교에 대항하는 중국의 민족종교. 도가와 신선가의 장점 모두 흡수

2. 불로장생의 신선을 추구하는 단학

가. 불사의 신약 만들기에서 단전호흡으로
단학에 쓰이는 용어들 자체가 초기의 외단술의 흔적을 보여준다
‘화후’~ 불의 세기을 조절하던 것 - 호흡을 가리키는 말로 바뀜
나. 단학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단학수련법 ; 오류종(오충허와 류화양이 만든 것) 불교 선종의 이론을 많이 흡수함 철학성을 보충
0 精氣神 - 기는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 정은 그 생명에너지가 보다 구체화되고 유형화된 것, 신은 의식작용으로 기보다 본질적이고 무형화된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 丹田 - 불로장생의 영약인 단약을 일구는 밭
0 經絡 - 기가 흘러가는 통로. 경맥과 낙맥을 합친 말
0 經脈에는 12개의 正經과 8개의 寄經이 있다. 단학에서는 기경을 중시
0 經穴 - 경락선상의 주요 지점. 鐵路에 비유하면 驛이다.
단학의 주장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神이 氣로 바뀌고 氣가 精으로 바뀌어 이것들을 다 낭비하면 죽게 다고 한다. 이것은 보통의 자연섭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학 수련에서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精을 氣로 바꾸고 다시 氣를 神으로 바꾸면 不死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류종에서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세단계로 나눈다.
練精化氣 :정을 기로 바꾸어 온 몸에 돌리면서 자유자재로 구사
練氣化神 :기를 신으로 바꾸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단계
練神還虛 ;신을 다시 순수한 허공과 하나가 되게끔 만드는 단계

(1) 연정화기 :첫째 단전에 기를 모으는 작업. 기가 정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다
단전호흡이 필요하다. 運氣를 한다. ~ 소주천과 대주천이 있다.
(2) 연기화신
十月養胎: 채약을 완성하고 이를 보다 순수한 형태의 陽神으로 만드는 과정
道胎出神: 陽神을 백회혈을 통하여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단계. 道胎란 陽神과 같은 말이다. 陽神은 보통 자기의 모습과 같다.
(3) 練神還虛 :자신의 양신을 완전히 허공으로 돌려보내는 것. 허공은 부모로 부터 몸을 받기 전의 자기 本來面目이요 이 우주의 근원이다. 1


일반적인 단학의 마지막 단계는 역시 道胎出神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소주천과 쿤다리니는 집단주관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
- 요가에서는 7개의 차크라를 제시: 단학의 3개의 단전과 불일치
- 쿤다리니라는 것은 단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요가에는 소주천이나 대주천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 氣니 經絡이니 하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소산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다. 다만 현대 과학 이 아직까지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 이러한 차이점은 미세한 몸 자체가 원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 권의 집단주관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3. 巫俗의 세계에서 나온 道敎

가. 도교의 神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도교의 최초의 신은 노자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면 무척 복잡해진다.
불교와 이전투구하면서도 불교의 신들이 대거 도교의 신들에 편입됨
송나라 이후에는 옥황상제가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신으로 등장
증산교에서 자신들의 교주를 옥황상제의 化身으로 모심
세계의 모든 신들은 사람들의 觀念의 所産物이다.
사람들의 觀念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神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주위에서 기도하다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은총으로 혹은 약사여래나 관세음보살의 자비로 병을 치유받거나 재난에서 구원을 받는 경우를 간혹 본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관념의 투사체인 신들이 힘을 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 그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리의 의식 저 밑에는 무한한 우주적인 힘이 숨어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 속에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사용할 줄도 모른다. 그러다가 신이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하여 신념의 힘이 강화될 때 사람들은 그 뒤에 숨이 있는 우주적인 생명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힘을 사용하는 비결은 바로 믿음에 있기 때문이다.
나. 푸닥거리,도장,거울,칼,그리고 주문과 부적신들 자체가 인간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신들에게 허물을 고하거나 복을 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초 의식이 효험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나 집단 최면에 의하여 영험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만약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진행되었을 리가 없다.

4. 단학과 도교, 짚어 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단학 - 실용성은 높다, 그러나 목표에 문제가 있다.
- 건강 면에서 단학이 요가보다 우수하다.
단학이 요가에 비해 건강을 더욱 중시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요가의 동작들이나 호흡법들은 그 목적 자체가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는 실용적인 차원보다는 종교적인 차원에 더 많이 있다, 그들은 아사나와 호흡법을 통하여 육체와 氣를 정화하고 나아가 고행과 금욕을 통하여 자신의 靈魂을 정화하여 마침내 우주 의식과 합일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는다.
단학은 그 목적 자체가 처음부터 不老長生이었다.
단학은 일단 효과가 빠른 만큼 부작용도 많다.- 주화입마
단학은 수련법이 너무 번거롭고 문파 또한 지나치게 다양하다.
단학의 수련법은 요가와 마찬가지로 일단은 기에너지를 각성시켜서 그것을 바탕으로하여 무한성과 전체성에 이르는 것인데 그 중간 과정은 몰라도 궁극적인 경지는 요가에 뒤떨어진다.
단학의 최고 경지는 양신을 허공으로 돌려보내는 연신환허의 과정인데, 이것은 원래 단학에는 없던 것으로 후대에 와서 불교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단학의 최고 경지는 역시 신선이 되어 불로장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삼매에 들어 개체성을 완전히 녹여 우주와 하나가 되는 요가의 범아일여의 경지보다 차원이 낮다.
나. 과연 우리 것이면 무조건 좋은가
우리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中華史觀에 의해, 일제 植民地史觀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고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나친 국수주의에 의해 모든 것을 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다. 도교 - 간단하고 강력하다. 그러나 체험의 질이 문제다
가장 큰 장점은 일단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빨리 효과를 볼수 있다는 것이다. 단학 수련법은 일반대중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서 식자층의 사람들은 단학수련에 관심을 가졌지만 일반 민중들은 부적이나 주문을 이용하는 수련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 셋째 마당, 유식 과 선종
1. 唯識과 禪宗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가
가 유식은 色卽是空의 한계를 넘어서 왔다.
- 說一切有部 : 모든 것은 有라고 주장하는 학파
- 中觀學派 : 든 것은 空이라고 주장. 眞空妙有-공속에 다양한 현상이 존재
- 唯識學派는 모든 것을 有로 설명하려는 설일체유부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공으로 설명해 버리려는 중관학파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有도 空도 아닌 識으로 이세상을 설명하려고 ‘萬法唯識’이라고 말하였다 즉 이세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니 공이니 식이니 하는 말들은 사실 모두 석가모니의 육성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세계관을 緣起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諸法無我 : 모든 법에는 내가 없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리
킨다.
諸行無常 : 실체가 없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변
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

“분명히 현상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착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계를 실재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분명히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공이고, 그러므로 더군다나 나라
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꼬집으면 아픔을 느끼고, 배가 고프면 힘이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슬프고, 꼴보기 싫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괴롭
다. 본질적으로 공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다양한 현상들이 생기는가?” 유식학파는 그것을 보
다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본질은 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그 무엇을 바로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식이라는 것은 삼라만상은 오
로지 식의 투영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나 선종은 불교 중국화의 종착역이다.
진리는 결코 문자로는 전할 수 없다는 不立文字 사상과 마음의 본체를 알면 단박에 깨칠 수 있다
는 頓悟思想은 선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인도 불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중
국 불교의 다른 종파에도 없는 선종만의 특징이다. 이것은 사실 중국 고유의 사상인 老莊思想에서
온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종은 불교의 중국화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선종에는 다른 불교 수행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염
화미소나 28조설을 거론하면서 정통성을 주장하지 않아도 선종의 명상법과 깨달음은 너무나 소중
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대인들이 그러하였지만 특히 당시 중국인들에게 정통
성은 반드시 필요했다. 교종과 같은 확실한 소의경전이 없는 선종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란 이러한 전설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마음의 구조를 탐구하는 유식

가. 유식은 명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정밀한 심리학이다.
선종이 지나치게 논리를 무시하는 데 비해 유식은 매우 논리적으로 우리 마음의 구조에 대해 설명
한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 용어나 개념들이 너무 번잡하고 딱딱하지만 만약 우리가 유식을 정
확히 이해하여 그것을 오늘날의 감각과 개념에 맞게 고치고 서구의 심리학과도 비교, 정리하여 재
창조할 수 있다면 그 논리의 정연성과 객관성으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팔식설
① 眼識, ② 耳識, ③ 鼻識, ④ 舌識, ⑤ 身識 - 前오식, 五俱意識
⑥ 意識 - 제육식, 不俱意識
⑦ 末那識 - 제칠식. 말나의 어원; 산스크리트어인 ‘마나스(manas)'의 음역으로 원래의 뜻은 이것
저것 따져서 분별한다는 뜻. 이는 전오식과 제육식 뒤에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기 중심성의 필터로 작용하는 識이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우리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다. 물론 대체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본다. 올바른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칠식을 소
멸시켜 나가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작용중 5가지 중요한 것.
㉠ 我痴 :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나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
㉡ 我見 : 나 중심적인 견해
㉢ 我慢 : 나 잘 낫다는 생각 1
㉣ 我愛 : 나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
㉤ 慧 : 자기중심적으로 요모조모 헤아린다.

⑧ 아뢰야식 - 제8식 산스크리트어 ‘알라야(alaya)'의 음역이다. 이 말은 저장한다는 뜻으로, 이 때
문에 흔히 아외야식을 藏識이라고도 한다. 앞의 전오식과 육식, 칠식 등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인식과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들이 저장되는 곳이 아뢰야식이다. 이 인식과 행위들은 그냥
저장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나의 인식이나 행위는 과거에 뿌려졌던 인식이나 행위의 결과이고
동시에 미래의 인식이나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원인이 결과가 될 때까지 즉
하나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 四分說 : 識을 相分, 見分, 自證分, 證自證分 으로 나눈 것. 三分設 뒤에 나온 학설로서 자증분에
다 증자증분을 더한 것. 자증분을 인식의 자기 확인이라고 하였을 때, 즉 자증분이 견분을 확인하
는 더 깊은 차원의 인식 작용이라고 하였을 때는 이 자증분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증자증분이라고 한다.

- 이분설 : 우리의 식을 ‘보는 자(견분)’와 ‘보이는 대상(상분)’으로 나누는 것
- 삼분설 : 상분과 견분에다 자증분을 더한 것. 자증이란 말은 ‘스스로 안다’, ‘자기가 자기를 증명
한다’는 의미이다. 혹은 자체분이라고도 한다.
나. 유식 명상법은 인식의 허상을 타파한다.

- 유식 수행의 단계
① 自糧位 ~ 명상의 여정을 떠나기 위해 양식을 준비하는 단계
② 加行位 ~ 본격적인 수행을 더하는 것
③ 通達位 ~ 眞如를 알게되는 단계 = 見道의 단계
④ 修習位 ~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두터운 업장을 녹이는 단계
⑤ 究竟位 ~ 깨달음을 완성하는 단계
※ 一水四見 -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 ① 사람에게는 마시는 물, ②고기에게는 자기들의 생활 공간, ③ 천상의 존재에게는 수정이나 유리와 같은 보석, ④지옥의 존재에게는 고름과 피로 보인다는 것이다.
유식수행의 핵심은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세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세계를 인식하는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온전히 바로 알기 위해서는 물론 단순한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명상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우리의 언어와 개념의 허상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훌륭한 수행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마음의 본체를 찾는 선종

가 선종의 깨달음은 노장에서 나왔다.
- 禪자는 여덟 단계 요가 중 칠단계인 ‘디아나’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생각의 교란됨이 없이 하나의 대상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1
- 선종특유의 양상 : 不立文字를 강조하는 성향
單刀直入을 중시하는 성향
깨달음 이후의 日常性을 중시하는 성향
나 화두선에서는 왜 수수께끼와 같은 말장난을 하는 것일까.
- 선종의 禪은 후대에 크게 話頭禪과 黙照禪으로 나누어짐
화두선은 인도적인 흔적이 전혀 없는 중국 선종 특유의 수행법
화두선 또한 일단의 집중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라고 하는 한 가지 의문에만
몰두하면 평소 여러 가지 잡다한 관념들과 이미지들로 산만하게 흩어진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그
런데 화두선 일반적인 의식 집중법과 다른 것은 그 집중 대상의 차이에 있다. 일반적인 집중법은
대개 시각적 대상이나 청각적 대상 혹은 기나 자기 몸의 일부에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두선에서는 의문에 대해 집중한다. 그 의문은 물론 이 세계와 마음의 참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이다.(추상적 본질적)

4. 유식과 선종, 짚어 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유식 - 명상과 논리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장황하다.
- 장점 - 세계와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비교적 명쾌하게 알 수 있다.
우리의 인식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미세한 착각들을 타파한다. 즉 명칭에 대응하는 사물이
있다는 착각을 타파하라고 한다. 모든 대상 세계가 이 모습 이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의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난 다음에는 사물들이 실재하는 것
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 마음 또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라고 한다.
- 단점 ; 이론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번거롭다는 것이다. 또한 수행 방법들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일
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행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수행단계도 너무 장황하고 수행 기간도 황당하게 길게 잡고 있다.
우리 마음 본체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넓다. 어떤 심오한 깨달음으로도 우리
마음의 본체 그 자체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다만 최선을 다해 수행
하는 과정뿐이다. 어떠한 깨달음을 얻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 수행해 나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닐까?
나. 선종 - 단순함과 심오함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모호하다.
- 장점 ;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간단함에 있다.
깨달은 이후에 다시 일상성의 세계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 단점 ; 불립문자에대한 지나친 강조
단도직입의 과장이 지나치다.
다. 깨달음은 과연 모든 주관의 틀을 넘어선 것인가.
- 인도 성자들의 깨달음인 삼매의 가장 큰 특징은 초월적인 감각과 무한한 기쁨을 중시한다는 것
이다. 1

- 중국의 선사들은 대체로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직관적인 통찰력이 위주를 이룬다. 대부분의 선사
들이 초월적인 감각의 각성을 거치지 않거나 거친다 하더라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 넷째 마당, 사마타와 비파사나 - 止法과 觀法
1.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사마타(samatha) ~ 고요하다. 내적,외적대상으로 인해 산란하게 흩어지는 우리의 마음을 한곳
으로 모아 고요하게 만들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비파사나(vipasana) ~ ‘비’는 ‘여러가지’ ‘파사나’는 ‘관찰하다’라는 뜻 즉 여러 가지를 관찰한다
는 뜻.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 남방불교는 비파사나를 우위에 둔다.
-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가장 큰 차이
사마타가 집중을 통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아가 깊은 삼매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비파사나는 여러 대상을 관찰을 통해 그것들의 공통점이라고 할수 있는 어떤 본질적인 측면, 즉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三法印을 확실하게 꿰�어 보아 본질적인 지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데 있다.
※ 三法印 :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 모든 것은 덧없고, 모든 현상에는 실체가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는 뜻
나. 북방불교는 지법과 관법을 동등하게 본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止(사마타)는 모든 경계의 상들을 멈추어 버리는 것.
觀(비파사나)은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든 상들을 분별하는 것
경계의 상이란 인식 작용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라는 뜻이다. 경계의 상들을 멈
추어 버린다고 하는 것은 외부의 대상 세계에 대한 내부의 모든 개념과 이미지를 끊는 것을 말한
다.
천태종은 지관법에 대하여 가장 많이 관심을 기울였다.
- 지와 관을 응용한 실제 수행법
實辭觀 ~ 실제의 일을 보는 것 같이 본다는 뜻
假想觀 ~ 마음속으로 상상을 하여 본다는 뜻
- 지 수행법에서는 관 수행법과는 달리 모든 현상을 부정하고 오직 한결 같은 본체를 꿰�어 볼 것
을 강조한다.
다. 저자의 지법과 관법에 관한 주관
- 지법은 마음에 대한 통제나 집중을 중시하는 명상법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의식의 더 깊은 면
을 체험할 수 있다.
0 양미간에 있는 아지나차크라에 마음을 모으는 방법
0 만트라를 외우거나 만다라를 보면서 의식의 집중을 시도하는 것 1

0 기도를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힘을 얻는 것
0 그외 대부분 종교의 명상법은 지법에 가깝다.
- 관법은 통제나 집중보다는 육체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중시하는 명상법이다. 관
법을 통하여 자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잡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떠오
르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
지법을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도 있고, 본인이 원하는 어떤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 반면 관
법을 하면 자기 마음의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알 수 있고, 나아가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력
을 얻을 수 있다. 지법을 통해서는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고, 관법을 통해서는 자아와 세계에 대
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다.
지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신통력이나 여러 가지 영적인 감화력은 얻을 수 있으나 전반적인 지혜
가 부족한 흠이 있다. 이에 비해 관법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와 통찰력은 얻을 수 있으나 구체적
인 의식의 힘이나 영적 감화력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다.
지법과 관법은 당연히 상호 보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겸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
직하다. 이를 겸비하기 어려울 때는 관법을 먼저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마음의 힘을 갖추는 것
보다는 자기의 마음과 세계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2. 석가모니가 가르친 명상법, 思念處觀
- 비파사나의 창시자는 석가모니다.
비파사나의 핵심은 四念處觀에 있다. - 身觀, 受觀, 心觀, 法觀
가.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몸에 대한 관찰을 하기 위하여 먼저 제시되는 명상법이 호흡관이다.
요가나 단학의 호흡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가나 단학의 호흡법은 호흡을 조절하거나 통제
하지만 호흡관은 조절이나 통제보다는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
호흡관의 단계<안반수의경에 의함>중 두가지 단계
數息觀 ~ 마음속으로 숨을 세는 단계
隨息觀 ~ 숫자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만 보는
단계. 본격적인 호흡관이다.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단계 ~ 일체의 상황에서 항상 자기의 몸에 대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감각을 그대로 지켜보는 방법이다. 비파사나의 핵심은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에 대해 아무런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대
부분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거기에 무언가 마음의 덧칠을 입힌다.
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우리는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에 빠지고 즐거움이 있을 때 즐거움에 빠진다. 특히 분노가 일어 1

날 때는 앞뒤를 돌이켜볼 여유조차 없어지는데 그것을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
는가?
그러나 쉬운 호흡관부터 꾸준히 수행하다 보면 관의 힘은 점점 더커지고 나중에는 어떠한 상황에
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된다. 이렇게 관의 힘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사랑과 미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보다 근원적인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
라. 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 수행의 다섯가지 장애(탐욕, 분노, 나태, 걱정, 의심)의 생멸을 알아차림
- 다섯가지 쌓임(五蘊)인 색수상행식의 생멸을 알아차린다.
- 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사이에서 발생하는 번뇌를 관찰
- 七覺支와 苦集滅道와 八正道
- 법에 대한 관찰 가운데는 몸, 감각, 마음에 대한 관찰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자체 내에
서도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실로 번거롭기 짝이 없다.
※ 저자 의견 : 법에 대한 관찰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원래 경전이란 권위를 먹고 사는 것이다. 이
로 인해 경전의 언어는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적당한 과장과 신비화가 가미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복잡하고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경전에 대한 信心이나 권위는 높아지겠지만 내용의 구체성은 점
점 떨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경전에 나와 있는 설명에 맞추어 그대로 수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3. 현재 남방불교에서 가르치는 비파사나
가. 비파사나의 기본단계
(1) 앉아서 호흡의 출입을 바라보기
콧구멍에 마음을 모은다. 또는 윗입술에 의식을 집중한다.
인위적으로 호흡을 빨리하려 하거나 느리게 할 필요는 없다.
호흡의 통제가 아니라 호흡에 대하여 예민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잡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가만히 지켜 본다.
(2) 걸어 다니면서 발의 느낌을 바라보기(徑行瞑想法)
가급적이면 천천이 걸어야 효과가 좋다.
눈은 내리깔아 자신의 발에서 약 1미터 남짓 앞의 지점을 보아야 한다.
(3) 일상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바라보기
아침에 눈을 뜨고 난 뒤부터 계속하여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관찰을 한다.
(4) 마하시 사야도의 배의 움직임 바라보기
숨의 출입에 따른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한다.
편안하게 앉은 자세에서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은다.
미얀마와 스리랑카, 태국 및 서방에도 많은 선원이 생겼다.
(5) 비파사나의 고급 단계
수행중에 환시나 환청 등의 환각 현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아뢰야식 속에 숨
어 있던 것들이 현재 의식의 통제가 완화되면서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을
좋아할 필요도 없고 거부할 필요도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내 아뢰야식의 업식이 드러난 것임을 그대로 알아차릴 때 이것은 사라진다. 1


# 깨달음의 경지 (불교의 경전) ~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4. 비파사나, 짚어 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비파사나는 보편성과 일상성을 지니고 있다.
나. 지금의 불경은 진정 석가모니의 가르침인가. ; 최초의 불경이 석가모니 열반후 200년 뒤에야
나왔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육성과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없다.
대부분 원전은 사라지고 후대에 새로 가필하거나 윤색한 것들이다.
다. 비파사나의 깨달음도 집단주관적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파사나를 수행하면 반드시 三法印을 확실히 깨치고 해탈에 이른다는 기본틀 자체가 바로 남방
불교의 집단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집단주관의 틀 속에 있는 사람은 비파사나를 하면 반
드시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동남아인이 아니더라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러한 틀
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들이 그렇게 성스럽게 생각하는 수다원, 사
다함, 아아함, 아라한의 경지라는 것 또한 이 집단주관의 틀 속에서의 약속이지 실지로 그러한 경
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볼 때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
비파사나는 지금까지의 명상법 가운데 자아와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본적인 세계관을 바꾸고 몇가지 세부적인 방법들을 개선하면 비파사나야말로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과학적인 명상법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시대의 명상법으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이다.

5. 관법에 대한 나의 체험과 견해
가. 나는 관법을 이렇게 수행하였다.

홍소 테크닉(hong-sau technic) : 홍소는 산스크리트어 ‘ham-so'의 영어식 표기로 ’나는 당신이다‘라는 뜻. 당신은 우주의 절대자를 지칭
숨을 흡하면서 마음속으로 ‘홍’이라고 말하고 호하면서 ‘소’라고 한다. 이때 호흡은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것은 호흡관을 하면서 자신이 절대자와 하나임을 계속 확신하는 수행법이다.
육체의 정화를 위해서는 요가 아사나를 계속함.
思念觀 ~ 잡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지켜보는 방법
관법을 통하여 자신의 단점을 많이 고칠 수 있다. - 말더듬 수정
나. 단식 중에 관법과 화두선을 통하여 완전한 현재로 돌아오다.
마하무드라 명상법 ~ 탄트라의 대성자인 띠로빠가 나로빠에게 가르친 최후 최고의 행법으로서 어떠한 인위적인 긴장도 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것은 깨어서 바라보려는 의지마저 버리고 그냥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명상법이다.
나라는 것은 오감이나 사고작용을 일으키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감이나 사고 작용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이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여 동일시하고 이 육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의 이름이나 신분, 지위 등을 나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수행이란 바로 이 그릇된 동일시를 타파하고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인 것이다. - 이뭐꼬 화두를 통하여 마침내 그 주인공을 찾다.
남방불교의 비파사나에서는 온갖 것을 관찰하지만 관찰하려는 그놈을 관찰할 줄은 모른다. 관찰하려는 행위 또한 하나의 인식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짜 완전한 관법을 하려면 관찰하려는 그놈을 또한 관찰해야 한다. 나는 관찰하려는 그놈을 바로 볼수 있게 되었다.
다. 사념처관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
- 사념처관중 법관은 문제가 많다.
법관의 대상을 五障碍, 五蘊, 六處, 七覺支, 사성제, 八正道라고 한다.
- 오장애(탐욕,분노,나태와 졸음,동요와 걱정, 회의)는 마음의 한 상태다.
따라서 이것은 心觀에 해당하므로 굳이 법관에 집어 넣을 필요가 없다
- 오온,육처,칠가지,사성제,팔정도는 법으로서 불교 교리의 핵심에 해당.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의 개념들이다.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으 작용이다.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것은 심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 진짜 법관의 대상은 무엇인가?
법(다르마)의 의미
․불법승의 법 = 불교의 가르침 ․색성향미촉법의 법 = 의식의 대상
․법을 구한다고 할 때의 법 = 깨달음 내지는 진리 ․제법무아의 법 = 현상
․법관이라고 할 때의 법 = 자증분. 자신의 깨달음을 다시 관하는 것.
법관의 방법(저자의 주관)
첫째 ; 자신의 체험 속에 남아 있는 미세한 주관성을 벗어 던지고 더 깊은 체험으로 나아가야 한
다.
둘째 : 자신의 내면적인 깨달음을 외면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끊임 없이 점검해야 한다. 그리하여
외면의 삶도 다듬어 완성해야 한다. 참으로 묘하게도 내면과 외면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
로 연결되어 있다. 안으로 끝까지 가보면 다시 밖으로 돌아오게 된다.

● 다섯째 마당, 유가 와 도가
1. 공자와 노자 다시 보기
“축의 시대” ~ 칼 아스퍼스. BC 5,6C를 전후하여 세계의 주요 문명권 곳곳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정신 문명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형성된 정신 문명이 그 뒤로 각 문
명권의 기본 틀이 되었다는 것.
가. 인도: 석가모니- 새로운 차원의 종교를 개척
나. 중국: 공자,노자 _ 중국 사상의 기본 틀을 제공
다. 아랍권: 조로아스터 - 세계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 선의 궁극적이 승리를 주장하는 조로
아스터교를 창시
라. 그리스: 탈레스를 필두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탄생, 서구의 합리성과 논리성의 기초를 다졌다.
숲에서 홀로 즐기는 깨달음보다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깨달음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자기를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나누는 깨달음 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깨달음
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공자의 깨달음은 노자의 깨달음

보다 한 수 위이다.

2.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묶는 유가

가. 유가 명상법의 핵심은 끝없는 내면의 省察에 있다.
- 心法 : 요 - 순 - 우임금에게 전달 <서경>에 나오는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쉽고, 도의 마음은 미미하니, 오로지 정성을 다해 하나로 모을 때 진실로 가운데를 잡을 있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 신유가는 겉으로는 유가, 속으로는 불교이다.
명상법에 있어서는 주로 불교에서 많이 차용하였다.
신유학이 확립된 남송 이후에는 유학이 중국 사상의 주도권을 장악
程朱理學 ~ 정이와 주희가 주축. =성리학, 주자학. 我國에 지대한 영향
陸王心學 ~ 육상산과 왕양명이 주축
정주리학의 명상법 : 居敬窮理가 핵심. 경을 主一無適이라한다. 主一이라는 말은 하나에 전념한다는 뜻이고 무적이란 다른 것으로 나아감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마음을 한군데로 모은다는 뜻이다.
궁리는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가 바로 궁리의 방법임을 강조. 격물치지란 사물에 나아가 앎에 이른다는 뜻

3. 깊고 오묘한 자연의 도를 추구한 도가

도가는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춘추전국시대 한 무리의 은자들의 사상이다.
가. 노자의 현묘한 명상의 3단계
-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는다
- 그 날카로움을 꺽고 그 얽힌 것을 푼다.
-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속세와 하나가 된다.
이것을 현묘한 도와 하나 됨이라고 한다.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1)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다. - 養生法
구멍은 감각기관으로 추정, 문은 생명에너지인 氣가 나가는 곳
수련의 핵심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연함을 중시하는 것이다<도덕경>
“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단단해진다. 초목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
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명상을 깊게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
게 된다. 육체적 이완은 결국 마음의 이완과 연결되어 있다.
(2) 날카로움을 꺽고 얽힘을 푼다.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모난 부분을 꺽어 다듬어 둥글게 하고 얽히고 설킨 부분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풀어 나간다고 볼수 있다.
결국 마음을 이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1

(3)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와 하나가 된다.- 和光同塵

초월적인 상태에 취해 있지 않고 다시 평범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묘
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 현동
나. 장자는 정신의 절대 자유를 추구하였다.
- 대표적인 수행법 ~ 心齋, 坐忘, 朝徹
心齋 ; 의식의 집중을 통하여 감각의 굴레를 벗고 나아가 관념과 이미지에 매여 있는 마음의 굴레
를 벗고 사물의 보다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기를 느낄 것을 강조
坐忘 ; 사지와 몸을 떨쳐버리고, 총명함을 쫓아 내고, 형태를 벗어나 앎을 떠나 대우주와 하나 가
되는 것.
朝徹 ; 천하만물을 다 잊고 생사와 시간마저 잊고 난 뒤에 근원의 그 자리에 들어간 것

4. 유가와 도가, 짚어 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유가 - 전체적 통찰력은 높다, 그러나 깊이가 부족하다.
-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묶게 될 경우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 중의 수행이 중시된다.
공자는 이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윤리를 택하였다.
- 유가의 한계라고 하면 우선 깨달음의 영역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즉 유가는 일상의
현실 생활에 필요한 윤리나 인격 도야 등에 대해서는 잘 갖추어져 있지만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도
에 대해서는 미진한 편이다.
- 유가는 외형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복고를 너무 강조한다는 점이다.
나. 공자의 깨달음은 포스트모던적이다.
- 공자의 깨달음과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으로는 우선 끝없는 배움과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
천의 조화를 들 수 있고 세계의 어떤 성자의 깨달음이나 삶보다 탈신화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다. 도가 - 깊은 예지가 있다, 그러나 넓이가 부족하다.
- 수행에 있어서 부드러움의 중요성을 발견한 점이 장점이다.
- 노자의 화광동진은 우리 의식의 나선형적인 운동법칙을 설명하는것.
고원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다시 완전히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와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
해야 한다. 그러할 때 깨달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화광동진
의 의미이다.
라. 노자의 깨달음은 21세기의 미학을 담고 있다.
- 大巧若拙 ~진짜 큰 기교는 마치 졸박한 것과 같다. 화광동진의 원리. 

● 여섯째 마당,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1. 경전과 교리의 권위에 대하여 - 기독교를 중심으로

가. 과연 어떠한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
- 융 : 신화란 무의식적인 인식과 의식적인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지극히 자연스러
운 중간 단계이다. 그는 집단 무의식 이론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의식 저 깊은 곳에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정신적 유산들이 숨쉬고 있다고 주장.
나. 지금의 경전들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인가.
다. 경전의 진리 자체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인가.
- 언어와 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계 ;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사유체계가 다르다.
따라서 번역을 할 경우 간단하고 표피적인 표현들은 그런대로 오해 없이 전달 되지만 복잡하고 심
층적인 표현들은 결코 제대로 번역될 수 없다.

2. 율법을 넘어 야훼에게 나아가는 길. 카발라

가. 카발라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명상법이다.
- 카발라의 어원 : 구전 즉 진리를 아는 스승이 제자에게 비밀리에 말로 전수해 주는 것을 의미 =
기독교의 묵상, 관상. 이슬람교의 수피즘
- 카발라는 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에 대해 잘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훈련하여 더 높은 차원
의 의식 상태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하여 육체와 외적 조건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내적 자유
를 얻을 수 있고 마침내는 신이 준 잃어버린 낙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티페렛(tiferet) : 의식이 매우 각성 되는 상태를 체험하는 것. 이 상태에서 수행자는 자신의 에고
상태를 꿰뚫어 볼수 있다. 이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이자 내적 낙원으로 들아가는 문이다.이
상태에서 수호천사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 카발라는 신과의 합일을 부정한다.

3. 그리스도를 좇는 길. 기독교 명상법

가. 기독교의 명상법은 靈知主義의 대립에서 나온 것이다.
- 靈知主義(gnosism) : 영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 초기기독교 신비주의. 복음주의와 상반
나. 가톨릭- 묵상, 관상은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 묵상 :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사랑의 체험과정
묵상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목이다.
추리묵상과 감성묵상이 있다.
- 관상 : 묵상보다 한 차원 높이 올라간 단계. 이는 성령의 작용 아래 하느님과 보다 내적이고 직접
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수득관상(능동적)과 주부관상(수동적)으로 나뉜다.
다. 개신교 - 일반적으로 수도보다 복음을 더 중시한다.
- 유영모(동양의 성자)와 이현필(맨발의 성자)

4. 알라를 찾는 고독의 길. 수피즘 1

가. 수피즘은 요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수피란 외딴 곳에서 홀로 고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수피즘은 그노시즘과 초기 기독교의 여
러 가지 명상법들, 중동 지방 고유의 신비주의 및 인도의 요가 등의 영향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특히 요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 수피즘은 비교적 다채롭고 체계적이다.
- 지크르(zikr) : 항상 신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알라외에는 없다”
- 큐브르(qubr):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속의 모든 욕망과 쾌락을 버린 대가로 주어지는 것
- 마합바(mahabba) :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것.
- 화나(fana) : 어떠한 의지적인 노력도 없이 항상 신과 하나임을 알게되는 상태
- 바카(baqa) :최고의 상태. 수행자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영적 상태인 ‘마쾀(ma
qam)'과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영적 상태인 ’할(hal)로 나누고 있다.

5.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가. 세 종교 나름대로 독특하다. 그러나 제약이 있다.

- 카발라의 명상법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지성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에고를 관찰하여 그것의 속성과 그 배후에 갈려 있는 무의식의 힘을 파악하는 명상법은 매우 지성적인 수행법에 해당한다.
-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착각 속에서 객관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나. 유일신교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 고대의 일부 선지자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자신들의 통로를 통하여 신을 인식하였다. 유대인은 유대인의 사유방식대로, 아랍인은 아랍인의 사유방식대로, 인도인은 인도인의 사유 방식대로 신을 인식하고 체험한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종교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종교권에서 불린 신에 대한 여러 이름들과 개념들, 심지어는 무신론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는 불교의 空이나 도가의 道라는 개념조차도 결국은 하나의 진리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 예수,노자,공자,마호메트,석가의 깨달음에 대하여

- 종교다원주의의 문제점 - 모든 성인들의 가름침이 겉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한결같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과연 그러할 것인가?
- 석가모니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르침은 어떠한 깨달음에도 안주하지 않
고 그것을 끝없이 객관화 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라. 21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종교가 존재할 것인가.
- 체험의 양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종교에는 정서적인 고양과 신비한 영적 체험들
이 존재한다. 모든 종교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바로 이 체험들의 힘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종교에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종교의 교리를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벗어
나야 한다. 1

- 지금까지 인류가 믿어 온 기독교, 불교,힌두교,이슬람교 등 대부분의 종교는 집단주관적 착각의
소산이다. 그리고 여러 신흥 종교들을 유지시켜 온 힘도 바로 이 집단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것이
다. 고등 종교와 신흥 종교의 차이는 전자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다 세련 되었음에 비해 후자
는 아직 세련되지 못하였다는 치이가 있을 뿐이다.
- 지금은 지구촌 시대이고 지역간의 교류가 어느 시대보다 활발하다. 이제 편협한 지역주의, 인종
적,문화적 우월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잘못된 종교 윤리가 지역과 사회의 화합을 해치고 분쟁으로
이끄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류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서 이제는 지구촌 시대에 걸맞는 보다
보편타당한 윤리를 모색 할 때이다.
- 21세기에도 종교는 필요할 것이다. 아니 앞으로 종교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 될 것이다. 그러나 2
1세기에는 집단주관적 착각을 절대 진리라고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명상법과 세계
관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지향하는 보다 효율적인 명상법과 보
다 보편타당한 세계관을 모색해야 한다.

 ● 마무리 마당

1. 몇가지 짚어 보아야 할 문제점 들

가. 깨달음과 集團主觀에 대하여
모든 명상법은 제각기 그것을 탄생시킨 그 지역의 세계관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단학에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세계관과 문화가 숨어 있고, 요가에는 인도 사람들의 세계
관과 문화가 숨어 있다. 그것은 명상의 과정뿐만 아니라 명상의 목표인 깨달음에도 나타난다.
아무리 궁극적인 본체를 체험하는 순간에도 주관적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많은 현대 물리학자들은 이 우주는 우리가 관찰하려는 의도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한다. 이렇게 보려고 하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려고 하면 저렇게 보이는 것이다. 진짜 모습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깨달음에도 그가 속한 문화권의 집단주관과 개인주관의 흔적이 약간씩은
남아 있는 것이다. 다만 깨달음이 주는 초월성에 취하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깨달음이라고 불러 왔던 그 체험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주관적 착각
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한 체험을 한다는 것은 그 체험자가 삶의 완성에 더 가까이 다가섰
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
의 삶과 죽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 삶의 완성과 윤회에 대하여
윤회는 원적인 것이 아니라 나선형적이다. 우리는 단순히 삶과 죽음을 반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점차 의식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의 발전을 이루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 그곳은 바로 영원성과 무한성의 바다이
다. 우리는 유한하고 덧없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것
이 우주의 섭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덧없고 유한한 개체 속에는 애당초 영원하고 무한한 전체의 속성이 숨겨져 있다.
이 우주는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하나하나의 부분 속에 거대한 전체의 모습이 숨겨져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들 하나하나의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이미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가 담겨 있는 것이 
다.

다. 명상과 욕망에 대하여

삶의 완성이란 욕망의 완성이다. 욕망은 결코 부정하거나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아주 저급한 생
명체로부터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에 이르기 가지 모든 생명체는 욕망을 추구한다. 욕망은 모든 생
명체의 삶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사실 자연계가 유지되는 원동력은 바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 그 자체가 추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전체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추하게
보일 따름이다.
과정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목적과 과정을 둘로 보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최후의
이원성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삶의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려면 기나긴 삶의 과정에서 지녀 왔던 수많은 욕망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아름답
게 성취해야 한다.
자신의 여러 단계의 욕망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야 한다. 한 쪽이 지나치게 비대한 경우 어느 한
쪽은 억 눌리게 된다. 전체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자연계를 보라 자연계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조
화 때문이다. 제대로 된 명상법이라면 자연계의 섭리를 좇아 조화를 이루는 법을 알려 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욕망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2.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명상에 대하여

깨달음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명상법이라고 하는 것은 천박한 장사술에 지나지 않는다. 단학
계통에 그러한 예가 많은 편이다. 그들은 대부분 약간의 특이한 자세와 호흡법으로 기를 각성 시
키는 정도의 수준 낮은 테크닉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과대 포장하고 그것을 창시한 사람을 은근
히 신비화 시키는 수법을 사용한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의 명상법은 집단주관을 벗어 던지고 삶의 완성으로 이끄는 것인가? 주관적 맹신에 사로잡혀 있
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삶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집단주관을 벗고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명상법은 바로 자아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명
상법이다.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명상법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이다.
특수한 동작이나 호흡법 내지는 정신 집중법을 통하여 기를 체험하거나 황홀한 의식상태를 체험
하거나 초의식을 체험하는 것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요 방편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명상이 깊어
지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에 대한 안목이 없이 그런 현상들을 체
험할 때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집착하여 더 근본적인 것들을 놓쳐 버리게 된다. 그러할 때 그런 특
이한 체험들은 일시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도리어 전체적인 삶의 조화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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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by 박석
https://bizbuddha.tistory.com/227 1/12
비즈붓다 비즈붓다 2017. 7. 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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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내용 ]
ㅇ 명상이나 종교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주관적 착각에  빠져 객관적 사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ㅇ 집단적 틀....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틀....집단주의의 틀...이 집단주관은 명상과 종교
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를 이해해는 데도 매우 중요한 것이
다.
ㅇ 집단 특유의 공통된 의식....인종, 민족, 종교, 문화권, 지역권에 따라 매우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여러 형태
의 주관의 틀을 버리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서구 과학의 위력은 바로 객관화에 있
다.
ㅇ 종교나 명상의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집단주관에 비친 것을 마치 절대 객관적인 진리인 양 착각하는 오류를 범
하고 있다.
ㅇ 자기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와야 한
다.
ㅇ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면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외면의 세계를 소홀히 하는 것
은 삶의 전체적인 효율성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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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21, 1:02 PM 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by 박석
https://bizbuddha.tistory.com/227 2/12
ㅇ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일상의 현실은 현실이다....일상의
삶에는 깨달음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이 많다.
ㅇ 객관성과 전체성이야말로 방대한 명상의 숲을 제대로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주요한 길잡이다.
ㅇ 감각적인 쾌락이란 묘한 것이어서 점점 보다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ㅇ 나는 역사상 이 네 가지 길을 가징 잘 조화시킨 사람음 석가모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초롱초롱한 지혜와 대자대
비한 사랑을 동시에 발휘하였다....선정의 경지에 있어서도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렀고, 그러면서도 깨달음에 안주
하지 않고 한평생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나는 석가모니를 가장 위대한 요가 수행자로 생각한다.
ㅇ 요가 삼매 체험의 가장 큰 한계는 무한한 기쁨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에서는 진리의 속성을 존재
(sat), 의식(chit), 기쁨(anada)이라고 한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특히 기쁨을 추구한다.
ㅇ 요가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내면적인 깨달음을 너무 강조하여 외면적인 일상 세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어
떤 의미에서 요가의 성자들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조자들이다.
ㅇ 힌두교적인 세계관과 요가 철학의 한계......이 현실 세계는 덧없는 꿈이고 내면의 무한한 기쁨만이 진실한 실체이
다......현실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개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ㅇ 한 개인의 과도한 성에너지의 낭비가 개인의 황폐화를 가져오듯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과도하게 성에너지를 낭
비하면 그 사회와 문화를 지탱하는 내적인 지지력이 무너지면서 사회 전체가 황폐화된다.
ㅇ 소주천과 쿤달리니는 집단주관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각기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집단주관이라는 색안경
을 통해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ㅇ 무언가 미지의 생명 에너지 (프라나 or 기...등)가 흐르는 통로나 센터가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대부
분 여러 형태의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통하여 그것들을 보기 때문에 그 실제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ㅇ 동북아의 가장 대표적인 집단주관의 하나인 음양오행.....객관적인 실제가 아니라 단지 이 세계를 해석하는 매개
체의 하나일 뿐....
ㅇ 선민 사상은 당연히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집단주의적인 믿음인 것....유대민족의 편협한 민족신이
었던 야훼는 예수라고 하는 종교적 천재에 의해 갑자기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변모한다. 이후 야훼는 유대민족
의 민족신 수준에서 세계의 신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ㅇ 자기가 체험한 것이 실재하는 세계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얼마든
지 다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은 실재의 세계를 자신들의 개인적 내지는 집단적 주관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므로 완전하거나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ㅇ 나중에 가서는 결국 마음을 닦고 그릇된 세계관을 바로잡는 수행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육체가 기를 다스리
는 수행법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법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ㅇ 단학에는 성자가 없다. 단학으로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지표를 전달 주는 성자를 본 적
이 없다.....그들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주거나 삶의 지표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ㅇ 설령 아득한 고대에는 우리의 것이었다고 하여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사람들에 의해 발전을 하여 중국화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중국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ㅇ 중국의 미가 화려미와 웅장미를 위주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미는 자연미와 조화미를 위주로 하고 있다. 청자의
은은한 맛과 백자의 담백한 맛이 그것을 말해 준다.
ㅇ 주문을 외우면 그 주문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종교적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
른 명상법들도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받지만 주문 명상법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다.
ㅇ 일단은 새로운 차원의 과학 기술이 시급하다....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ㅇ 실체가 없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천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한다.....연기야말로 불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ㅇ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와는 다른 불교, 즉 중국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언어나 개념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구조, 정서, 감각, 생활 양식 등의 문화 전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선종은 보다 본격적으로 중국화된 '불교'라고
할 수 있다.
ㅇ 유식은 명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정밀한 심리학이다.....유식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각광받을 수 있는 불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이 지나치게 논리를 무시하는 데 비해 유식은 매우 논리적으로 우리 마음의 구조를 대해
설명한다.
ㅇ 유식에서는 "삼라만상은 오로지 식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말을 풀이하면 우리가 나의 외부에서 실재한
다고 여기는 대상 세계는 모두 인식의 표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다.
ㅇ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항상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보고, 자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식이 바로 말나식이다.....세
계의 모든 종교나 명상법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자기 중심성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ㅇ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나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없는데도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이 착각
이야말로 바로 제칠식의 가장 큰 뿌리이며, 모든 고통의 뿌리인 것이다.
ㅇ 우리의 눈에 세상의 이런 모습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은 우리 인류 공통의 집단주관에 의한 것을 따름
이다. 즉, 모든 대상 세계가 이 모습 이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내 마음, 즉 견분의 수준에 의해
그렇게 투영된 것일 따름이라는 것....
ㅇ 선종이라 할 때, '선'자는 여덟 단계 요가 중 칠단계인 '디아나'에서 온 것이다... 생각이 교란됨이 없이 하나의 대
상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ㅇ 선종 특유의 양상....불립문자를 강조하는 경향, 깨달음에 있어 단도직입을 중시하는 성향, 깨달음 이후의 일상성
을 중시하는 성향, 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ㅇ 노장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는 도사와 신선가들이 아니라 바로 선사들......선사들은 겉으로는 불교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실제 그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노장의 정수를 이었던 것....
ㅇ 빛이나 소리 혹은 기나 우리 몸의 일부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인 실상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이 세계
와 마음의 참모습에 집중하는 것은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 참으로 막막하지만 제대로만 하면 자기 마음의 근원적인
모습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다.....오로지 본질의 그것만을 추구한다....다른 명상법에 비해 단도직입적으로 궁극적
세계로 들어가는 편이다. 화두선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사들이 화두을 잡는 것이 다른 어떠한 명상법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
ㅇ 내가 보았을 때 가장 뛰어난 화두는 이뭐꼬 화두 가운데서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것
이 무엇일까?"라는 화두이다.....이 화두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들 수 있지만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도 계속 들 수
있는 것이다.
ㅇ 선종- 단순함과 심오함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모호하다.......선종의 거품....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선의 한계는 불
립문자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선조의 가장 큰 특징인 동시에 가장 큰 한계라고 할 수 있다.
ㅇ 선종의 깨달음이 바로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온 정법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한
참 거리가 있다.
ㅇ 선종의  견성뿐만 아니라 모든 깨달음은 유식의 사분설 중의 자증분을 체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궁극
적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각기 미세한 집단주관적이 착각에서 나온 오류이다.......자증분이란 인식 주체
와 인식 객체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오감의 세계와는 차원 자체가 다른 현묘하고도 현묘한 세계라 할지
라도 인식된 것은 반드시 그것을 인식하는 그 무엇인가의 인식 주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ㅇ 진정한 깨달음은 어떠한 의식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
리 깊고 현묘한 것이라 할지라도 미세한 집착에 걸려 있는 것이다.
ㅇ 혹세무민하는 교주나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의 힘이나 영적 감화력은 강할지 몰라도 지
혜가 결핍되어 있다.
ㅇ 비파사나의 장점은 다른 어떤 명상법에 비해 보편적이면서도 과학적이라는 데 있다......비파사나의 핵심은 나타
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ㅇ 비파사나의 또 하나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일상 생활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ㅇ 현재 의식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을러 소나 개나 파리
나 모기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현재 의식이 어떤 궁극적인 세계보다 더 궁극적인 세계라니 !  이 얼마나 절
묘한가?
ㅇ 현재의식을 100% 받아들이는 순간 드라마는 끝이다.
ㅇ 내가 아는 바로는 역사상 현재 의식으로 완전히 돌아온 사람은 오직 석가모니뿐이다. 그 단서는 바로 사념처관
에 있다....기존의 깨달음은 자증분의 경지에 이른 다음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
기 위해서는 자증분 너머의 증자증분을 찾아야 한다.
ㅇ 결국 완전한 진리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태든지 일단 인식되어진 것은 그
속에 미세한 주관의 틀이 개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 진리라고 확신하는 그것도 사실은 때가 지나
면 언젠가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다.
ㅇ 참으로 묘하게도 내면과 외면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안으로 끝까지 가보면 다시 밖
으로 돌아오게 된다.
ㅇ 깨달음의 완성은 결국 에고의 완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존의 성자들과 깨달음 이들 가운데 석가모니
의 삶이 여기에 가장 근접한다.
ㅇ 공자는 결코 노자의 몇 수 아래가 아니었다. 노자와 동등한 수준이거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ㅇ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평범한 자질을 타고난 보통 사람으로서  끝없는 노력에 의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이다.
ㅇ 공자는 위대한 수행자이자 교육자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이자 예술가이다.....내면의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내와
외의 조화이자 전체적인 삶의 성취도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공자는 노자보다 한 수 위인 것이다.....깨달음의
기준을 내면 세계에만 맞추지 말고 삶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맞춘다면 답은 간단히 나올 것이다.
ㅇ 공자의 가르침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기치인....안으로는 심성을 도야하고 밖으로는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천한다는 뜻.....인으로 스스로의 인격을 도야하고 예로써 사회적인 실천을 한다는 뜻...인은 자기를 닦는 도구이고,
예는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도구....
ㅇ 유가에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인은 수기와 치인을 동시에 완성한 사람......공자 자신이 둘을 제대로 완성하
지 못하였다.
ㅇ 화광동진.....수행의 마지막 단계....노자는 이것을 '현동'이라고 하였다. 현동이란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
미함....초월적인 상태에 취해 있지 않고 다시 평범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묘한 도와 하
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ㅇ 공자의 명상법과 깨달음의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끝없는 배움에 대한 강조이다.....배움을 통하여 고정 관념
과 편견과 교만이 쌓여 간다면 그것은 저급한 배움이다. 배움을 통하여 고정 관념을 깨고 편견을 벗어 버리고 진정
으로 더욱 겸손해질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배움이다.
ㅇ 논리나 사유는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 가운데 하나이다. 직관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진다. 논리나 사유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초월적인 감각이나 직관만이
각성될 경우 본인 스스로도 정신 못 차리고 나아가 남들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ㅇ 사유나 논리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식을 부정하였던 노자보다
는 지식을 인격 수양 방편의 하나로 인정하였던 공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ㅇ 공자는 내면적 깨달음은 결국 '예'라고 하는 윤리와 '악'이라고 하는 예술의 형식을 빌려서 구체화.....내면적 수양
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공자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것을 철저하게 사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ㅇ 내면적 수양과 외면적 실천을 하나로 묶으려는 유가의 시도는 결국은 미완성이었지만 그 시도 자체는 세계 어
느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ㅇ 노자의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역시 화광동진의 원리를 들 수 있다. 화광동진은 다시 일상의 현
재 의식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는 것....노자의 화광동진은 동북아에서 나온 사상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으로서 세
계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밝힌 바가 없다.
ㅇ 입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나선형 운동이다. 나선형 운동은 우주 만물의 성장 변화의 원리이다. 우주
는 나선형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나선형 운동은 발전인 동시에 순환이다.
ㅇ 원래 미분화의 전체성 상태에서 이원성의 세계로 들어와 개체성을 지니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원죄의
본래 뜻이라고 생각한다.
ㅇ 내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의식은 본질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대립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눈을 감는 순간
까지 계속 이어진다....어떠한 초월적이고 심오한 경지 속데오 모두 미세한 주관적인 착각이 개입되어 있다.  절대
객관적인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완전한 깨달음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
는 최선을 다해 나아갈 따름이다.
ㅇ 삶의 종점에 이르는 마지막 삶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척도는 내면의 깨달음의 깊이가 아니라 바로 삶의 전체적
인 완성이다.....오랜 세월 윤회를 거치면서 쌓아 왔던 고통과 쾌락, 부귀와 빈천, 기쁨과 슬픔 등이 장엄한 파노라마
를 그리면서 한 생애에 모두 표출된다. 그만큼 삶의 스케일이 크게 나타난다. 그 속에서 오랜 세월 쌓아 왔던 인연
의 매듭들을 다 풀고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지막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삶은 역사와
문명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기준이 내가 이해한 가장 무르익은 삶의 모습이다.
ㅇ 석가모니는 가장 완성에 가까운 삶을 보여 주고 있다. 일단 욕망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석가모니의 삶은 기존
의 성자들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살아 있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두고 많은 칭송을 받은 사람은
석가모니밖에 없다.  이상으로 보아 석가모니는 한 생애 동안 가장 낮은 욕구로부터 가장 높은 욕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두루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ㅇ 삶의 완성도는 깨달음의 완성도와 비례한다. 깨달음의 내용 면에서 보아도 석가모니가 가장 깊다...깨달음의 깊
이와 논리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을 때 가르침의 원형이 비교적 잘 전수된다.
ㅇ 석가모니의 삶과 가르침이 가장 완전성에 가깝다. 안과 밖의 모든 욕망을 성취하고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누려
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목표이다. 아울러 그것을 위하여 눈을 감을 때가지 겸허하게 수행하는 것
은 모든 사람들이 좇아가야 할 모범적인 길이다.
ㅇ 석가모니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르침은 어떠한 깨달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끝없
이 객관화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완성자
에게 통용되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이다.
ㅇ 모든 종교적인 체험들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의식의 힘이다. 하느님이나 알아나 시바신이나 부처님이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느님이나 알라나 시바신이나 부처님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자기 암시와 자기
최면을 걸어 자기 내면 깊숙이 있는 의식의 힘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ㅇ 모든 종교의 힘을 유지시켜 온 것은 신이나 교주의 힘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집단 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의식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ㅇ 윤회는 원적인 것이 아니라 나선형적이다. 원은 단순한 순환이지만 나선형은 순환인 동시에 발전이다.....우리는
단순히 삶과 죽음을 반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점차 의식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ㅇ 의식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영원성과 무한성을 외적 대상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구하게 된다. 
ㅇ  욕망은 모든 생명체의 삶의 원동력이다. 사실 이 우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다.
ㅇ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욕망의 추구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삶의 완성이란 오랜 세월 동안 추
구해 온 그 모든 욕망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내면에 있는 영원성과 무한성을 깨치는 것만이 소중하고 그 이전의 모
든 욕망들은 부질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요, 자신의 삶의 과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ㅇ 과정 자체가 바로 목적이라는 것.....과정이 바로 목적이므로 우리는 과정을 완성시켜야 한다. 즉, 삶의 과정에서
지녀 왔던 수많은 욕망들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ㅇ 과연 집단주관을 벗고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명상법이 있을까? 있다. 바로 자아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
는 명상법이다.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명상법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이다.
ㅇ 자아와 세계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하는 이 세계는 우리 자아의
틀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틀을 바로잡아야 세상을 올바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명상법에서는 우선 자신
의 몸을 관찰할 것을 강조한다. 그 다음에 자신의 느낌과 마음을 관찰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깨달음조차 있는 그대
로 바라보아야 한다.
[ 느낀 점/배운 점 ]
저자가 쓴 첫 책인 '명상체험여행'(1998년)을 읽은 후 저자를 좋아한다.
아래 책을 낸 후 명상 지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도 폐쇄하고 근래에는 전공이신 중국 인문학 쪽 책을
내시는 걸로 보인다.
명상계에는 자칭/타칭 도사, 깨달은 자, 선사 등 등이 많다.
특이 어떠한 체험을 통해 일체의 에고가 없어지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식의 자기 자랑을 하는 분들이 많
다.
이 정도면 친절한 편이고 도대체 무의미한 대화가 무슨 깨달음의 징표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선사들이 지천
이 널려 있다.
부처님의 ㅇㅇ대 제자라는 식으로 의발을 받았다느니 어쩌니.....
이런 명상계의 잡상인들과 저자는 한 차원 높은 횟을 그어 버렸다.
스스로 깊은 체험을 하였고 나아가 체험에 대한 객관화 및 논리적인 검증을 해 본 사람만이 씹어내고 뺕어 낼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집단주의적 착각이란 개념으로 종교를 해석하는 방식이 좋았다.
특히나 욕망의 완성이 삶의 완성이고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설명. 나선형적 순환은 어느 책에서도 보기 어려운 저자
의 독특한 언어이다.
이 세가지 개념이 저자의 책을 읽은 지 어언 15여 년 (2003년 발행)이 지났음에도 새롭게 마음에 새겨 진다.
저자는 "자아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명상법이 완성된 명상법이다.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
라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명상법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이다."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명상가들의 책을 보느라 삶의 낭비하지 말고 아랫 분들의 책을 보는 것이 100대 1,000배 삶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더군다나 위에 말에 동의를 한다면 이 분들이 진정한 명상가일 수도 있다.
수학자 강병균교수가 쓰신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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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도솔)
기자명 김형규
입력 2004.03.29, 법보신문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350
 


구도 체험으로 각종 명상법 분석단학-위파사나 등 통렬히 비판

붓다는 가장 고차원적 깨달음 실현


여러분은 왜 명상을 하려고 하는가? 건강을 위해서, 즐거운 삶을 위해서, 아니면 참다운 인격 형성을 위해서, 물론 간혹은 성적 욕망을 위해서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대답도 있을 것이다. 치열한 구도 여정과 스승에 대한 끝없는 헌신,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인연. 명상법은 수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요소들이 모두 맞아 떨어졌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명상법은 주변에 너무 흔해서 이제는 백화점의 물건들처럼 선택의 대상이 돼 버렸다. 명상의 목표가 끝없이 하향 조정돼 물욕화, 세속화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의 최종 목표는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깨달음’일 것이다. 혹은 신과의 합일. 우주와 합일 같은 고차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나의 명상법을 얻기 위해, 또는 배우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구도의 노력으로 다가간 궁극이 과연 진정으로 완벽한 깨달음일까? 그리고 예수, 공자, 마호메트, 노자, 석가의 깨달음은 모두 같은 것이었을까?

상명대 중어중문학과 박석 교수의 저서『명상 길라잡이 』(도서출판 도솔)는 명상을 하며 한번쯤 품었음직한 이런 의문에 대해 명쾌하면서도 진지하게 고찰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요가와 탄트라 △단학과 도교 △유식과 선종 △사마타와 비파사나-지법과 관법 △유가와 도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책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명상법을 폭넓게 비교 분석하고 있다. 특히 유대교의 명상법인 카발라, 가톨릭의 명상법인 묵상, 그리고 이슬람교의 명상법인 수피즘에 이르기까지 익히 알려져 있지 않은 서양 종교의 명상법까지 소개하고 있는 점은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 받는 것은 저자의 목숨을 건 구도 체험에 바탕을 둔 독특한 명상법 분석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지나치게 초월적인 요가, 실용성은 있지만 깨달음의 깊이가 없는 단학, 지나치게 염세적인 남방 위파사나 등 각 명상법에 대한 그의 평가는 교조적인 권위에 짓눌려 의문조차 불경시했던 금기들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박 교수는 특히 모든 명상법은 그것을 탄생시킨 그 지역의 세계관과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박 교수는 이것을 집단주관의 틀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만약 신을 상정하는 명상법을 택하면 그는 신과의 합일을 통해 신이 주는 황홀경을 맛볼 것이고, 만약 공을 상정하는 명상법을 택한다면 그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절대 공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 또 에너지의 통로라 할 수 있는 요가의 차크라와 단학에서 말하는 경혈이 전혀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집단주관의 틀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깨달음이라 불렀던 그 체험들은 모두 주관적 착각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박 교수는 이러한 체험을 한다는 것은 그 체험자가 삶의 완성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본체를 체험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주관적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이미 길을 가던 그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또 삶의 완성도는 깨달음의 완성도와 비례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가장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실현하며 가장 완벽한 형태로 전하고, 천수를 누렸던 석가모니의 삶이 가장 완전성에 가깝다는 평가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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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수행이 길’ 걸어온 박석 교수
“명상의 힘은 사회·문명 변화시켜”

2004.08.18(수) 한겨레




박석(46·상명대 중어중문과) 교수는 ‘한다’ 하는 수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명상가다. 그 자신 20여 년 넘게 수행을 했고 그 경험을 모아 <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박석 교수의 명상 체험여행>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 독자들 가운데 그의 ‘한 소식’을 접하고 수행의 자문을 구하거나 강연을 요청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는 주관적인 체험 위주의 수행을 경계한다. 섬김과 맡김을 강요하며 교주로 행세하거나 수행을 방편으로 돈을 버는 잘못된 수행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명상은 사회와 문명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상업 논리에 따른 수행법은 마땅히 사회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1981년부터 명상, 요가 등을 해 온 그는 올바른 명상과 수행 방법을 알리기 위해 애써왔다. 나아가 명상이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3월13일 창립된 ‘미래사회와 종교성 연구원’ 원장을 맡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유럽 사회주의 정부가 몰락한 뒤 새로운 운동의 길을 찾던 운동권 출신들이 만든 모임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모태로 한 연구원에는 종교인, 언론인, 학자 등 5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재화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뤄진 자본주의 문명을 조절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이 바로 영성, 혹은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명상으로 감각의 정화
욕구에서 자유로워져”
“감각기관이 조금만 정화돼도 식탐이나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명상을 통해 욕구를 조절하면 적게 먹고 적게 쓰면서도 더 많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성적 관심과 현실 개혁 의지가 통합되면 엄청난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체험하고 고민한 결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신이 존재하는가, 육체의 모습이 존재의 전부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에 반해 작은 개척교회의 전도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대학(서울대학교 인문대)에 들어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1980년대 초반 대학은 학생과 군부 정권 사이의 전쟁터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회과학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날,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의 권유로 명상요가 동아리를 찾아간 날이었다. 물방울 소리처럼 뇌파를 자극하는 소리가 흐르는 동아리방에서 누군가는 물구나무를 서고 있었고 이상한 동작을 한 채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도 있었다. 선후배 동료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리는 때에 요가와 명상을 한다는 것이 처음엔 “한심해보였다”. 하지만 수련이 끝난 뒤풀이에서 한 선배의 얘기를 듣고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선배는 “명상의 핵심은 이상한 자세가 아니라 자기 속에 들어있는 불멸의 자유와 참 나를 발견하는 것” 이라며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93년엔 토굴로 들어가
깨달음 위해 49일 단식
어린 시절부터 고민해 온 ‘화두’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요가를 비롯해 화두선, 위파사나 등 다양한 수행법을 배웠다. 태극권, 라즈니시 명상법, 국선도, 단학의 수행체계에도 관심을 가졌다. 해인사에서 3천 배를 올린 뒤 성철스님을 만나 요가와 선종의 차이도 물었다. 하지만 오랜 ‘구루 헌팅’에도 의문은 쉬 풀리지 않았다. 그는 궁극의 깨달음을 위해 요가적 수행법을 선택했다. 육체와 정신, 초월적인 기쁨과 일상 생활의 조화를 추구하는 요가난다의 수행법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수행과 생활을 동시에 하기 위해 히말라야로 들어가 수행하려던 뜻을 접고 중문학 교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87년에는 함께 수행하던 동아리 후배를 만나 결혼도 했다. 교수가 된 뒤엔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이룬 듯해 잠시 뿌듯함도 느꼈다. 그러나 존재의 궁극에 대한 고민은 해갈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을 걸고 ‘한판 승부’를 하기 위해 토굴로 들어갔다. 93년의 일이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거짓 나’인 에고를 없애기 위해 ‘이 뭣고’ 화두를 든 채 무기한 단식 수행을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요동쳤다. 구토, 변비, 치질 등 질병이 찾아왔고 수많은 음식이 눈 앞에서 명멸했다. 참다 못해 설탕물과 오렌지 주스를 희석시킨 물을 먹고, 먹은 것을 후회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자살을 떠올리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화두를 든 지 수십 여일이 지나자 출구가 보였다. 적적성성, 몽중일여의 상태가 왔다. 꿈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이 계속됐다. 단식 49일째 아침, 드디어 일종의 깨달음이 왔다. ‘우주의 무한한 공간과 영겁에서 영겁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명멸하는 모든 삼라만상이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드라마요 꿈’임이 그대로 보였다. 하지만 의심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깨달은 것인가, 아닌가, 깨달음은 한 가지인가, 아닌가.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완전한 깨달음은 없고 모든 깨달음은 서로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심오한 깨달음도 완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삶”이라는 ‘현재 의식’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직관적으로 알아챘다.

“완전한 깨달음 없기에
끝없이 수행할 따름”
“수행 과정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내 속에는 맑고 영롱한 것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한 것도 함께 공존하더군요. 그것 또한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수행자들이 흔히 ‘라후라’(장애)로 여기는 자녀들을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로 여긴다. 가정은 “좋은 수행장”이고, 명상을 테마로 조소작업을 하는 아내는 그와 한 몸인 도반이다. 박 교수는 자신과 같은 물음을 가진 이들을 위해 1998년부터 ‘바라보기 명상’을 가르치고 있다. 천천히 움직이며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이 명상법은 종교적 도그마에 빠질 위험이 없고, “부작용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명상법”이다.

“생명은 타자와 소통이고, 우주는 지금도 상호작용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저 역시 삶의 완성을 위해 끝없이 수행할 따름이니까요.”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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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 박석 교수의 바라보기 명상

기자명 조중현 기자
입력 2010.06.04, 원불교신문

숨 쉬듯 '지금 여기' 바라보기
▲ '싱어송 라이터'를 꿈꾸는 박석 교수.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번씩 숨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가쁜 숨을 고르듯 마음을 고르기 위해 바라보기 명상이 좋을 듯 하다. 이를 위해 강화도에 위치한 오마이스쿨을 5월22일 찾았다. 심신을 클리닉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숙소 배정을 받고 주위를 둘러봤다. 정호승 시인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내가 사는게 아닙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 글은 정 시인이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의 한 구절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명상의 핵심이 묻어났다.

상명대 박석(52) 교수가 중심이 된 바라보기 명상에 참여자들은 무언가 복잡함에서 자유로움을 원했다. 20명은 닉네임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세상의 이름에서 잠시 떨어져 나왔다. '돌봄'님은 "지금껏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삶이었다"고 말했다. 중년의 참가자는 "나이가 50이 되어가니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앞으로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짧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다"고 고백했다. 직장생활을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신다는 '늘 흔들리는 벽'님, 군대를 제대하고 혼란스러움과 팍팍함을 견딜수 없다는 대학교 2학년생 등 모두가 각자의 삶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명상에서 함께 하는 이들을 도반 즉 '길벗'이라고 부른다. 길벗은 같은 길을 가는 벗님들이라는 뜻이다. 길벗들에게 박 교수는 어떻게 길잡이를 할까 궁금해진다. 어떤이는 명상을 '영적인 등산이다'고 표현한다. 등산의 중요도는 길잡이다. 길을 어떻게 안내하느냐에 따라 등산객들을 정상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명상의 첫 만남에서 기타를 들고 나왔다. 명상에 기타는 의외였다. 그리고 조용하고 잔잔하게 오픈송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노래가사는 '어깨에 힘을 빼고, 이런 근심 저런 걱정 모두 내려놓고, 들숨 날숨 그 속에서 내 마음을 느껴봐요. 숨가쁜 생활속에서 나를 잃고 살아가죠. 잠시라도 숨고르고 나를 한번 느껴봐요, 들숨 날숨 들숨 날숨.' 현실의 삶이 녹록히 담겨있다. 참석자들은 하나 둘 그 노래를 자연스럽게 따라 부른다.

박 교수는 "숨가쁜 생활속에서 숨을 고른다는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다"며 "바라보기 명상의 모토는 내 감정, 내 생각, 욕구를 알아차리고 사회속에서 아우를 수 있는 조화로운 삶이 목표다"고 말했다. 이는 무념무상의 대해탈의 경지가 아니다. 현대인들이 사회속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 현대사회는 속도를 가늠하기 힘들만큼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진행하는 바라보기 명상법은 진정한 영성, 진정한 깨달음은 내면적 영성만이 아니라 현실의 삶속에서 인격의 성장, 욕구의 조화, 사회적 실천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 바라보기와 소리 명상

먼저 몸을 바라본다. 몸은 긴장과 이완을 통해 바라보기가 쉽다. 몸 바라보기의 첫째는 척추를 펴는 것이다. 요가로 몸의 구석 구석을 자극 주고 나면 시원하고 맑아진다. 몸의 맺히고 뭉친 부위를 풀어줌으로써 근육 마디 마디가 풀린다. 그러면 마음도 주체적으로 찾아가게 된다.

박 교수는 "호흡에 대해서도 복식(복부) 호흡을 하라"고 권한다. 복식 호흡이 안되면 생각이나 마음도 산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호흡은 몸과 마음 상태를 말해준다. 몸이 가장 잘 느끼는 것은 호흡과 맥박이다. 호흡은 우주와 나의 소통이며 통로다. 감정과 몸의 상태를 뚜렷히 느낄 수 있다. 복식 호흡의 장점은 마음의 편안함을 가져온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때는 여백을 두고 쉬어야 몸이 닫히지 않는다. 몸을 긴장하고 이완시킴으로써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리고 어루만져주게 된다. 귀기울여 바라보게 된다. 특히 소리명상은 낮은 음으로 할수록 깊게 바라볼 수 있다.

저녁 식사후 소리없이 어둠이 찾아오는 오후7시. 맑고 환했던 공간이 회색빛에서 어둠으로 변하는 시간이다. 둥글게 마주 앉은 사람들.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어둠을 받아들인다. 이때 박 교수가 기타줄을 매만지며 분위기에 딱 맞는 노래를 부른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노라' 이어 찬트 명상이 이어진다.

박 교수는 "간절하고 사무치면 진리는 내 앞에 있다"며 "순수한 마음 뜨거운 마음만 있으면 진리는 반드시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속에 체험의 흔적이 묻어났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위해 1993년 단식기도를 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 뭐꼬'를 들었다. 48일째 궁극적인 세계를 체험했다. 그후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심오한 세계를 체험해도 자기 삶 속에서 어우러지지 않으면 관념일 뿐이다'는 것과 '깨달음도 결국 나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과정이고 거름이다'는 것이다. 그는 악기를 다룰줄 모르지만 '싱어송 라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명상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어느새 어둠이 방안을 가득 채울 즈음 푸른 강화도에 비가 내렸다. 길벗들에게 비도 명상음악처럼 들렸다. 어둠은 짙은데 마음의 빛은 촛불보다 밝았다.
▲ '몸은 긴장과 이완을 통해 바라보기가 쉽다'며 요가를 지도하는 모습.

걷기 명상

다음날 아침, 걷기 명상을 했다. 걷기 명상은 정상이 목적이 아니다. 그 과정을 중시한다. 느리게 걸을수록 '지금 여기'를 깊게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몸 바라보기의 핵심은 몸을 긴장 이완시키면서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을 빠르게 움직이지만 건성으로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천천히 움직일수록 깊게 세포 하나하나를 깨워내며 자신과 만나게 된다.

식사 후에는 주로 소리 명상이나 걷기 명상을 했다. 이어지는 노래 '영혼에서 왔으니 영혼으로 돌아가, 시냇물 흘러 바다로 가니 우리도 흘러 영혼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감성을 울리는 노래가 이어진다. 여기서 영혼은 우주의 끝이 아니다. 지금 여기를 가리킨다. 현실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깨어있기를 주문한다. 현실에 좀더 적극적이고 충실과 최선을 다할 때 명상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은 가정과 직장, 사회적 만남속에서 중심을 잡아 가게 한다. 산속의 수행이 아니다. 현실속 호흡이다. 명상이 필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맹자는 궁할때 '독선기신(獨善其身)'하라고 했다"며 "세상이 힘들수록 나를 지켜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바라보기 명상을 통해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의 실체임을 알게 됐다. 그 실상은 개념이 아닌 실체적 체득을 통해 가능하다.

다시 세상 속으로 길을 떠나는 길벗들과 헤어짐의 악수를 했다. 비바람 속에서 푸른 나뭇잎들은 여전히 싱그럽게 살랑이고 있었다.

조중현 기자 jung@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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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길라잡이, 박석교수 서문 | 명상
으라차차 2015. 9. 30. 19:41
http://blog.daum.net/kose1000/206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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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내가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중간에 간혹 나태해져 명상을 게을리 한 때도 있었고 너무 바빠서 명상에 제대로 몰두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명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명상을 하였다.

    한 때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그것을 얻기 위해 현재의 삶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었다. 삶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문득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고 고마워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명상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실한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바로 아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부모님에게 좋은 자식이 되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처자에게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한다. 학교에서 부끄럽지 않는 스승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 사회를 보다 사람 살기에 좋은 사회로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이외의 나의 소박한 꿈이 있다면 내가 체험한 명상과 삶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틈을 내어 사람들에게 명상을 가르치기도 하고 사람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 이야기들을 다듬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내 앞을 살아간 모든 구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내가 구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처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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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준비 마당

1. 명상은 왜 하는가

2. 명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주관적 착각을 주의해야 한다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첫째 마당 - 요가와 탄트라

1. 요가와 탄트라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2. 자아와 우주의식을 하나로 묶는 요가 

      진리에 이르는 네 가지 길 - 지혜, 사랑, 행동, 자아 다스림

      다양한 테크닉의 요가들 - 몸, 마음, 소리, 도형, 에너지

      요가의 단계 - 감각적 욕망의 통제로부터 우주의식까지

3. 마음의 우주적 확장을 추구하는 탄트라

      힌두 탄트라 - 순수정신과 원초적 힘의 만남

      불교 탄트라 - 업보의 뿌리인 몸, 입, 마음을 해탈의 방편으로

4. 요가와 탄트라,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요가 - 다양한 길과 황홀한 체험이 있다, 그러나 몽롱하다

      인도는 왜 성자의 나라인 동시에 거지의 나라인가

      탄트라 - 현대성과 심오함이 있다, 그러나 미신과 유치함도 있다

      명상과 섹스, 새로운 차원의 성문화를 향하여





둘째 마당 - 단학과 도교



1. 도가, 선도, 도교의 차이

2. 불로장생의 신선을 추구하는 단학

      불사의 신약 만들기에서 단전호흡으로

      단학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소주천과 쿤다니리는 집단주관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

3. 무속의 세계에서 나온 도교

      도교의 신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푸닥거리, 도장, 거울, 칼, 그리고 주문과 부적

4. 단학과 도교,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단학 - 실용성은 높다, 그러나 목표에 문제가 있다

      과연 우리 것이면 무조건 좋은가

      도교 - 간단하고 강력하다, 그러나 체험의 질이 문제다

      세기말의 충격적 대예언에 대하여 





셋째 마당 - 유식과 선종



   1. 유식과 선종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가

      유식은 색즉시공의 한계를 넘어 나왔다

      선종은 불교 중국화의 종착역이다

   2. 마음의 구조를 탐구하는 유식

      유식은 명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심리학이다

      유식 명상법은 인식의 허상을 타파한다

   3. 마음의 본체를 찾는 선종 

      선종의 깨달음은 노장에게서 나왔다

      화두선에서는 왜 수수께끼와 같은 말장난을 하는 것일까

   4. 유식과 선종,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유식 - 명상과 논리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장황하다

      선종 - 단순함과 심오함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모호하다

      깨달음은 과연 모든 주관의 틀을 넘어선 것인가

       



넷째 마당 - 사마타와 위빠사나 



   1.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관점의 차이

      남방불교는 위빠사나를 우위에 둔다

      북방불교에서는 지법와 관법을 동등하게 본다

      나는 지법과 관법을 이렇게 본다

   2. 석가모니의 사념처관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감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마음의 있는 그대로 보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3. 현재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위빠사나의 기본 단계

       가. 앉아서 호흡의 출입을 그대로 바라보기

       나. 걸어다니면서 발의 느낌을 그대로 바라보기

       다. 일상생활 중에서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바라보기

       라. 마하시 사하도의 배의 움직임 바라보기

      위빠사나의 고급단계

   4. 위빠사나,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위빠사나는 매우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명상법이다

      불경은 진정 석가모니의 가르침인가

      위빠사나의 깨달음도 집단주관적 착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5. 위빠사나에 대한 나의 체험과 견해

      나의 위빠사나 체험

      단식 중에 관법과 화두선을 통하여 완전한 현재로 돌아오다

      사념처관과 석가모니의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

     



다섯째 마당 - 유가와 도가



   1. 공자와 노자 다시 보기

   2.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묶는 유가

      유가 명상법의 핵심은 끝없는 내면 성찰에 있다

      신유학은 겉으로는 유가이지만 속으로는 불교이다

   3. 깊고 오묘한 자연의 도를 추구한 도가

      노자의 현묘한 명상의 삼단계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다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푼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와 하나가 된다

      장자는 정신의 절대 자유를 추구하였다

   4. 유가와 도가,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유가 - 전체적 통찰력은 높다, 그러나 깊이가 부족하다

      공자의 깨달음은 포스트 모던적이다

      도가 - 깊은 예지가 있다, 그러나 넓이가 부족하다

      노자의 깨달음은 21세기의 미학을 담고 있다





여섯째 마당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1. 경전과 교리의 권위에 대하여

      과연 어떠한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

      지금의 경전들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인가

      경전은 진리 자체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인가

    2. 율법을 넘어 야훼에게 나아가는 길, 카발라

      카발라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명상법이다

      카발라는 신과의 합일을 부정한다

    3. 그리스도의 길을 좇는 기독교 명상법

      기독교 명상법은 영지주의와의 대립에서 나왔다

      가톨릭 - 묵상 관상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개신교 - 일반적으로 수도보다 복음을 중시한다

    4. 알라를 찾는 고독의 길, 수피즘

      수피즘은 요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피즘은 비교적 다채롭고 체계적이다

    5.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짚어보기와 새로운 방향 찾기

      세 종교 - 나름대로 독특하다, 그러나 제약이 있다 

      유일신교와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예수, 석가, 노자, 공자, 마호메트의 깨달음에 대하여

      21세기에도 지금과 종교가 존재할 것인가





마무리 마당



   1. 몇 가지 짚어보아야 할 문제점들

      깨달음과 집단주관에 대하여

      삶의 완성과 윤회에 대하여

      명상과 욕망에 대하여

   2.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명상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