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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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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25 조회1,3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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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18장은 기타 철학 전체의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말해온 전체를 대충 보자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을 알려면 이 책 16장을 보라. 1장에서부터 죽 말해오는 것을 보면 아르쥬나가 전쟁하기를 포기하려는 순간에 그를 달래어 자기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전쟁은 아르쥬나의 태어난 신분으로 하면 마땅히 당해야하는 운명적인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크게 될 출발점인 것이었다. 아르쥬나는 자기가 만일 존장들을 죽이는 그런 악을 행한다면 축복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꽉 차 있었다. 그러므로 제 2장 첫머리에서 인생의 두 가지 길이 제시된다. 하나는 즈나닌들 즉 성자들이 받아들이는 길, 다시 말해서, 삼캬(내버림)이고, 또 하나는 카르마 요가(즉 요가)다. 그리고 결론은, 해탈을 얻는데 둘 다 꼭같이 유익하지만, 둘 중에서 카르마 요가가 더욱 뛰어나다는 것이고(5: 2), 카르마 요가의 길에 의하면, 이 둘 중에서, 이성의 쪽이 더욱 뛰어나다고 한다. 이성이 확고하고 안정되기만 하면 카르마(행동)가 누구를 잘못되게 하는 일은 없다. 아무도 카르마로부터 도망할 수는 없고, 아무도 카르마를 내버릴 수도 없다. 결과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기만 하면 족하다. 아ang든지 카르마는 이행하여야 한다.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아니면 저 자신을 위해서. 사람의 이성이 순수하기만하면 지식이 카르마와 충돌되는 일은 없다. 옛 전통을 생각해보면, 쟈나카나 그외의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이런 것과 또 그밖의 논리적인 토론이 제 3장으로부터 제 5장에 이르기까지에서 나온다. 그 다음은 카르마 요가를 성공케 하는 이성의 평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카르마 요가의 길을 따르는 동안 어떻게 해탈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성의 평정을 얻으려면 감각을 통제하는 힘을 얻지 않으면 아니되고, 그리하여 만유를 꿰뚫는 오직 한 분의 지고자(至高者)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체험하여야 한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해 제6장에서 감각의 통제를 다루었고, 제7장서부터 17장에 이르는 동안에 ① 카르마 요가를 닦는 동안 어떻게 해서 지고자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② 그 지식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중에서 제7장과 8장에서는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jnana-vijnana)의 ① 가변(可變) 또는 불변의, ② 인식할 수 있는 또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다루었다. 그리고 제9장으로부터 12장에 이르는 동안에 지고자의 인식할 수 없는 모습이 비록 인식할 수 있는 모습보다 더 높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을 예배하면서도 오직 한 분의 지고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면, 그것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지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13장에서는 몸과 아트만(ksetra-kstrajna-vicara)에 대한 이치를 설명해주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가변과 불변을 말하는 데 있어서 아뱍타(avyakta, 인식할 수 없는 것)라 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아트만(atman, 자아. 영 혼)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14장에서부터 17장에 이르기까지에 아 주 자세한 설명으로 세상의 갖가지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생긴 것과 각양각색의 세계가 생긴 것이 프라크리티의 구성으로 된 것임을 말해준다. 그 제목은 사실은 가변과 불변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해서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에 대한 해설을 완성한다. 그러나 간 곳마다에서 아르쥬나에게 주는 오직 하나의 교훈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정적인 교리를 선언한다. 일생을 카르마 요가의 길, 즉 지고자에 대한 예배의 길, 모든 행동을 순결한 마음으로, 제 신분에 따라,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지고자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실로 인생에 있어서 최선의 길이라고. 그와 같이 하여서 카르마 요가를, 지식에 기초를 두고, 열심있는 신심이 그 뛰어난 속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설명한 다음, 바로 그 종교를 결론짓는 것이 이 제 18장이다. 그리해서 아르쥬나는 가르침을 받아 자의로 전쟁을 하게 된다. 이 길에서는,「기타」에 의해 최선의 길이라고 선포된 이 길에서 아르쥬나는 인생의 넷째 길, 즉 내버림의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은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금욕주의자(nitya-sannyasin)라고 했다(5:3). 그러므로 아르쥬나의 그 다음 질문은, ① 때때로 제 4 의 인생길, 즉 금욕의 길을 취하는 것과, ② 글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내버리는 주지가 카르마 요가의 길 속에 들어 있느냐 들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들어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포기(sannyasa)와 내버림(tyaga) 두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억센 팔을 가지신 이여, 저는 포기와 내버림의 참 뜻을, 참으로, 흐리쉬케샤시여, 그것을 따로따로 알고 싶습니다. 오, 머리털 흐트러진 귀신 죽이시는 이시여!

포기(sannyasa) 이욕(離欲), 행동울 아주 아니함.

내버림(tyaga) 이과(離果), 행동의 결과를 바라지 않음.

억센 팔을 가지신 이, 흐리쉬케샤, 머리털 흐트러진 귀신 죽이시는 이 모두 크리슈나를 가리킴.

「기타」는 행동을 내버리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욕망을 버리고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참 포기이다. 이 절에서는 산야사는 모든 행작(行作)을 버리라는 뜻으로 탸가는 모든 행작의 결과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카르마로도 아니요, 결과나 가멸음으로도 아니요, 오직 탸가, 즉 단념에 의해서만 해탈은 얻어진다.”(「Taittriya Aranyaka」, X, 10. 3).「기타」는 해방된 영혼은 해방된 후에도 계속 봉사생활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고 권함으로써, 모든 행동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지혜가 생기면 행동을 그쳐버린다는 의견에 반대하고 있다.「기타」의 스승은 행동하는 사람은 얽매임 속에 있는 것이고 자유를 얻은 사람은 행동 할 수 없다는 견해는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질문의 뜻은 그 말들의 자전에 있는 뜻에만 있는 것 아니다. 산야사니 탸가니, 혹은 그것이 어떻게 서로 다르니 하는 것들. 그 두 단어의 근본뜻은 다 같이 ‘내버린다’는 뜻이다. 아르쥬나가 그것을 몰라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거룩하신 주는 어디서도 행동을 버리라고 한 일은 없다. 그리고 제4장에서도 5장, 6장에서도, 언제나 내버림에 관해 말할 때는 반드시 탸가 즉 결과를 바라는 그리고 모든 행동을 파라메슈바라(지고자)에게 바쳐버리는 산야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만일「우파니샤드」를 본다면 거기 내버림의 길을 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행동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이런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버림으로써, 즉 글자대로 모든 행동의 탸가를 행함으로써 해탈을 얻었다” “산야사의 요가로 정결함에 도달한 금욕주의자들이 그것을 모든 행동의 포기의 형식으로 했다” “우리가 우리의 아들들이나 손자, 그외의 후손들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같은 것들이다. 아르쥬나가 듣기에, 거룩하신 주가 말할 때에, 산야사와 탸가의 두말을 경전에 지정되어있는 인생의 네 단계 중의 하나인 내버림에 적용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뜻에서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싶어서 그 질문을 했던 것이다. ―틸라크

사실상「바가바드기타」는 17장에서 끝난 것이고, 이 18장은 위에서 설명했던 모든 문제들을 최종으로 요약해 말하기 위한 보충적인 것이다. 모든 장에서 크리슈나는 인생의 구경의 목적이 지극히 높으신 신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같은 점을 이 18장에서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길이라고 지적한다. 처음 여섯 장에서는 진실한 예배를 강조한다. “모든 요가 수행자 혹은 초월주의자 중에서 언제나 속에서 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최고”라고 말했다. 다음 여섯 장에서는 순수한 예배와 그 성격과 활동이 어떤 것임을 설명했고, 그 다음 세번째 여섯장에서는 지식과 내버림, 물질적 성격의 활동과 초월적 성격의 활동, 신심 깊은 예배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장에서 크리슈나를 가리켜 말할 때에 흐리쉬케샤(Hrishikesha), 케쉬니 수다나(Keshinisudana) 두 이름을 쓴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흐리쉬케샤는 모든 감각의 주로서의 크리슈나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정신적인 평정에 들어가도록 도와준다. 아르쥬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요약하여서 정신적 평정에 이르게 해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의심나는 것들이 있었다. 의심은 언제나 마귀에 비유된다. 그래서 그는 크리슈나를 부를 때에 케쉬니수다나라고 불렀다. 케쉬는 아주 무서운 마귀였는데 크리슈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아르쥬나는 이제 크리슈나에게 그 의심의 마귀를 죽여주기를 원한 것이다. ―스와미 프라부파다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성자들은 애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행작을 그치는 것을 포기라 알았고, 모든 행작의 열매를 내버리는 것을 지식있는 이들은 내버림이라 했느니라.

비행(非行)이 이상적은 못된다. 사욕이나 이득의 기대 없는 행동을 내가 능동자는 아니요, 내 몸을 보편적인 자아에 내맡길 뿐이라 하는 정신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이다.「기타」는 행작의 완전한 포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행작을 니슈카마 카르마(nishkama karma), 즉 무욕의 행동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나 샴카라는, 여기서 말하는 탸가(내버림)는 다마 카르마 요가 수행자에게만 적용할 것이고, 즈나나 요가를 닦는 이는 행동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식은 행작과 같이 설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라다크리슈난

 

3. 어떤 지식 있는 이들은 행작은 악으로 알고 버릴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또 희생과 보시와 고행은 버리지 말 것이라 했느니라.

 

4.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내버림에 대한 나의 결론을 들어보아라. 사람 중의 호랑이야, 내버림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느니라.

라마누자(Ramanuja)는 내버림을 세 가지로 나눈다. ① 결과의 내버림, ② 자기가 동인(動因)이요 따라서 집착의 동인이란 생각의 내버림, ③주님이 모든 행동의 주인인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기가 모든 것의 동인이란 생각을 내버림. ―라다크리슈난

 

5. 희생, 보시, 고행의 행동은 내버리지 말고 잘 행하여야 할 것이니, 희생과 보시와 고행은 어진 사람을 정결케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이 파바나(pavana).

 

6. 그러나 이 행작들도 결과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해야 하느니라. 오, 프리다 부인의 아들아, 이것이 나의 최종 결정의 의견이니라.

이것은 카르마 요가에 대한 최종결론이다. 이때까지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카르마의 결점은 카르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바라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해왔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결과를 기대함 없이 욕심없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다.「기타」는 산야사론의 모든 행동은 잘못이므로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찬성하지 않는다.「기타」는 다만 카먀(욕심 없는)의 산야사(내버림)만을 권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즉 경전이 제정한 모든 의식과 예식은, 욕망에서 오는 것이므로 카먀이며, 그러면 다 버려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다면 야즈나, 즉, 희생의 바퀴가 끊어지고 말지 않느냐, 그러면 세계는 멸망되고 말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거기에 대해「기타」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경전에서 하늘에 이르기 위해 비록 희생, 보시, 고행을 하라고 제정했다 하더라도, 그 행동들이 바로 욕심 없이, 또 전체의 복이 되게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런 생각에서다. 즉, 희생을 바치거나 보시를 베풀거나, 고행을 하는 것은 이 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모든 욕심없이 하는 행동을 각 사람의 신분에 따라하듯이, 희생도, 보시도, 고행도 이생에서의 제 신분에 따라, 결과를 기대함 없이, 집착 없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언제나 늘 파바나(pavana, 마음을 정결케 해주는)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여서 이 행동들은 결과의 기대를 내버리고, 오직 진실한 신심에서, 모든 것을 지극히 높으신 주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바퀴는 끊어짐 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이의 마음속에 이미 결과를 기대함이 없으므로 그 행동들은 해탈을 방해함이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안정 된다. ―틸라크

 

7. 타고난 의무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무지로 인하여 그것을 버리는 것을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8. 어떤 일이라도 단순히 고통스럽다고 해서, 또는 신체의 아픔을 두려워해서 포기한다면 그것을 동성적인 포기라 하는 것이니 그는 결코 그 포기의 결과를 얻지 못하느니라.

 

9. 그러나 아르쥬나야, 주어진 일을 오직 의무로 알고 집착을 버리고 결과를 기대함 없이 행한다면, 그것을 선성적 포기라 하느니라.

 

10. 언짢은 일이라 해서 싫어하지도 않고 좋은 일이라 해서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선성으로 가득 차 있는 내버림의 사람이니, 그는 어질고 모든 의심이 사라진 사람이니라.

 

11. 사실로 몸을 가지고 있는 이로서 행작을 온전히 버리기는 불가능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행작의 결과를 버린 사람을 내버림의 사람이라고 하느니라.

 

12. 바람직한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 둘이 섞인 것, 내 버림을 하지 못한 자의 죽은 후의 행작의 결과는 이와 같이 세 가지니라. 그러나 내버림의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13. 억센 팔을 가진 자야, 모든 행작의 완성을 위하여 내게서 삼캬의 교리에서 가르치는 다섯 요소를 배워라.

삼캬(samkhya) 수론(數論).

여기서 말하는 삼캬는 베단타(Vedanta)를 의미한다. ᅳ라다크리슈난

 

14. 행동의 장소, 행동자, 감각기관, 각종 노력, 최고의 주재자 이것이니라.

장소(adhisthana) 소의(所依)

행동자(karta) 능작(能作).

감각기관(karana) 작구(作具).

최고의 주재자(daiva) 주신(主神).

 

15. 사람이 그 몸으로나 말로나 마음으로 그 어떤 행동을 했든간에 옳고 긇고를 물을 것 없이, 그 동기는 다 이 다섯 가지에 있느니라.

 

16. 사실이 이런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충분한 이성적 판단이 부족한 탓으로, 자기를 단 하나의 행동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참을) 보지 못한다.

행동자는 다섯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유일의 행동자로 알았을 때 그는 오해한 것이다. 샹카라는 “순수한 자아를 행동자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가 만일 그 행하는 힘을 순수자아에 돌린다면 그는 사실을 오해하는 것이다. 에고(ego, 小我)를 보통 행동자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인간 행동의 주된 한 결정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인간 행동이란 모두 다 자연의 산물이다. 에고란 그런 것인 줄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얽어매는 힘에서 벗어나서 보편적인 자아(大我)의 보다 큰 지식 속에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자아관(self-vision)에서 볼 때 모든 행동은 다 프라크리티(prakrit, 자연)의 산물이다. ―라다크리슈난

이 다섯 가지로 갈라서 하는 설명은 분명치 못하다. 그리고 여러 주석가들의 가지가지 설명이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일반적으로 공통되는 것은 다만 이런 것들이다. 아디스다나(所依)는 몸을 의미하고, 카르타(karta, 能作)는 마음이며, 카라나(karanas,作具)는 감각기관이고, 체스타(cestas)는 들숨 날숨이고, 다이바(daiva)는 문제가 많다.

지극한 사람은 저란 것이 없고, 검스러운 사람은 제 힘이란 것이 없으며, 거룩한 이는 이름이 없느니라.(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

 

17. 스스로 나다 하는 생각이 없고, 그 이성이 더럽게 물들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상 사람을 죽이더라도 죽인 것이 아니요, 또 거기 얽매이지도 않는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한다. 그는 아주 무서운 행동도 어떤 이기적인 목적이나 욕심 없이, 다만 그것이 주어진 의무이기 때문에 한다. 그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하는 정신이 문제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면 사람을 죽인 것이지만, 참의 자리에서는 죽인 것이 아니다. 이 절의 뜻은 우리가 벌받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큰 영적 의식 속에 사는 사람은 어떤 악을 행하고 싶은 생각을 느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악한 행동은 무지와 분리주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초월적 자아와의 하나됨 의식에서는 다만 선한 것이 나올 뿐이다. ―라다크리슈난

 

18. 지식과 지식의 대상과 아는 이는 행동을 일으키는 세 겹의 충동이요, 감관과 감각과 행작자는 행작의 세 모음이다.

지식의 대상 소지(所知).

아는 이 능지(能知).

충동 동기적 원소(原素).

행작자 능작(能作).

모음(集成) 결과적 원소.

 

19. 지식과 행동과 행동하는 자는 특성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 말하는 세 가지이니 그것을 자세히 들어야 할 것이다.

 

20. 만유 속에서 오직 하나의 무너지지 않는 존재를 보고, 차별 속에서 무차별을 보는 지혜는 선성적이라 알 것이니라.

 

21. 가지가지의 만물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를 알아보는 지식이 있으니 그것은 동성적이라 알 것이니라.

 

22. 그러나 하나의 결과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전체로 알며, 그 원인도 그 참뜻도 모르고 좁은 생각만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암성적이 라고 알 것이니라.

 

23. 신앙으로 내 할 일이다 결정된 일을 아무 집착 없이, 또 좋아하고 싫어함도 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이 한다면 그것은 선성의 행동이라 할 것이니라.

 

24. 어떤 일을 자기를 나타내자는 강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 결과를 노리고 힘을 써서 한다면 그것은 동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25. 그저 무지한 생각에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떤 결과가 오겠는지도, 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손해나 상처가 나겠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하는 행동은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6. 어떠한 집착도 가진 것이 없고, 나란 내 것이란 말을 하는 일이 없으며, 일이 성공되건 실패되건 흔들림이 없이 굳센 뜻으로 성실과 노력으로 일하는 사람은 선성의 사람이니라.

 

27. 열정적이어서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마음을 많이 쓰고, 탐욕과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며, 속이 정결치 못하고 기쁘고 슬픔에 변덕이 심한 사람은 동성의 사람이니라.

 

28. 마음에 통일이 없이 야성적이고, 완고하고, 사기적이고, 사납고, 게으르고, 비관에 잘 빠지고 느림보인 사람은 암성적이니라.

 

29. 자연의 양태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가멸음의 정복자야, 하나하나 남김없이 말할 터이니, 잘 들어두어라.

 

30. 프리다의 아들아, 움직임(動)과 안 움직임(靜), 함(爲)과 안함(無爲),두려움(畏)과 두렵지 않음(無畏) 얽맴(繁縛)과 풀어 놓음(解脫)을 아는 이성은 선성적이니라.

 

31. 프리다의 아들아, 법(法, 다르마)과 비법(非法), 마땅히 할 것과 해서는 아니 될 것을 똑똑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은 동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32. 프리다의 아들아,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어서 비법을 법으로 믿고, 일체의 사물을 뒤집어 보는 이성은 암성이라 할 것이니라.

 

33. 프리다의 아들아, 흔들림 없는 굳센 뜻을 가지고, 요가에 의하여 마음과 정신과 감각의 작용을 제어해가는 사람은 선성적이라 할 것이니라.

 

34. 그렇지만 아르쥬나야, 집착을 가지고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법(의무)과 쾌락과 재물을 지켜가는 그러한 견고는, 오 프리다의 아들아, 그것은 동성적이니라.

법, 쾌락, 재물, 사람들은 여기다가 모크샤(해탈)를 넣어서 이를 인생 의 네 가지 목적이라 한다. ―힐

 

35. 프리다의 아들아, 만일 어리석어서 잠, 공포, 걱정근심, 비관, 방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견고 같은 것은 암성이니라.

 

36.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이제 내게서 세 가지 안락을 들어보아라. 그것을 꾸준히 닦으면 즐거움을 얻어 고통이 끝나는 데 이르느니라.

 

37. 그 처음에는 독약 같고, 그 나중에는 감로 같으니, 그것은 자아를 뚫어 깨달음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그것을 선성적인 것이라 하느니라.

 

38. 감관과 그 대상의 접촉에서 오는 즐거움이니, 그 처음은 감로 같고 그 나중은 독약 같다. 그런 쾌락은 동성적이라고 전해오느니라.

 

39. 그 첨에 있어서도 나중에 있어서도 자아를 혼미케 함으로써 잠, 게으름, 방탕 속에서 나오는 쾌락인데, 이는 암성적이라고 일러오느니라.

행복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한가지로 바라는 목적인데, 다만 우리의 성격을 그 어떤 것이 지배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 암성(타마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폭력, 게으름, 맹목적, 거짓으로 만족하게 되고, 라자스, 즉 동성이 우세하게 되면 돈, 권력, 자랑, 교만, 명예를 행복으로 알게 된다. 인간의 참 행복은 그러한 외적 물건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마음과 혼의 보다 고상한 것을 충족시켜 우리 가장 깊은 속에 있는 내적인 것을 발전시켜가는 데 있다. 그 같은 고통스럽고 억압당하는 것 같지만 구경에는 우리를 즐거움과 자유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지식과 덕행의 행복에서 영원한 평안과 환희에 이를 수 있다. 즉 영적 아난다(ananda of the spirit)이다. 그때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아(self)와 만물과 하나가 된다. ―라다크리슈난

참 즐거움은 즐거움 없음이다(至樂無樂). ―장자

 

40. 땅 위에 있어서나, 하늘 위의 신들 사이에 있어서나 프라크리티(자연)에서 나오는 세 가지의 특성을 벗어난 이는 하나도 없느니라.

 

41. 대적을 혼나게 하는 용사야, 브라만과 크샤트리야와 바야샤와 그리고 수드라까지도 그 하는 일은 자성(自性곧 自然)에서 나오는 세 구나에 의하여 분배되는 것이니라.

브라만(brahmanas) 범족(梵族). 바라문(波羅門).

크샤트리야(kshatriyas) 왕족, 찰제리(刹帝利).

바이샤(vaishyas) 농상족(農商族), 비사(毗舍).

수드라(sudras) 노예족, 수다라(首陀羅).

구나(gunas) 특성, 덕.

이 네 가지 구별은 힌두사회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고, 세계 어디에도 적용된다. 그 구별은 인간의 성격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네 계급에는 각각 분명한 특성이 있다. 물론 그것은 서로 배타적은 아니다. 반드시 늘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기타」를 가지고 현존하는 사회조직을, 그 딱딱하고 서로 혼잡해져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려고 할 수는 없다. 「기타」는 그 네 계급론을 그 범위와 의미를 확대해서 보고 있다. 사람의 외면적 생활은 내적 생활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 표면은 그 깊이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각 개인은 그의 타고난 성격, 스바빠바(svabhava)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그는 그의 생애에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의 의무다(svadharma). 각 개인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초점이요, 거룩하신 이의 한 부분이다. 그의 목적은 이 거룩한 가능성을 그의 생애 속에서 실현하는 데 있다. 우주의 한 영(The Soul)이 세계의 허다한 혼(souls) 들을 낳았다. 그러나 거룩하신 이라는 이념은 우리의 본질적인 성격이요, 우리 존재의 진리이다. 우리의 스바빠바이지, 구나의 기구가 아니다. 구나는 나타냄의 한 중개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 만일 제게 적당한 일을 한다면, 그가 만일 제 생의 원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즉 자기의 수바다르마를 다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그 인간의 자유의지 속에 나타내실 것이다.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아무런 충돌 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이 어떤 사건을 처리하려고 나설 때, 전체의 계획을 다 아노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지상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가 우리의 성격에 따라서 일을 하는 한 우리는 옳은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우리의 행동은 영적 완성의 한 부분이 된다. 개인 속에 있는 거룩한 것이 완전히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불멸의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인간의 생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문제는 우리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고, 또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천성에 반대하는 죄를 짓게 된다. 스바빠바 교훈의 요점은, 인간은 하나의 개인으로 대할 것이지 무슨 형(型)으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르쥬나에게 해준 말의 요점은 하나의 무사로서 용감히 싸우는 것이 지혜로운 평화에 대해 성숙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의 넓은 성격이 있는데, 거기 맞추어가려면 네 가지 사회적인 생활양식이 있다. 네 계급은 출생이나 피부 빛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어떤 임무를 다하는 데 우리에게 가장 맞는 심리적인 특성으로 되는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하늘은 누구를 특별히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저 늘 착한 사람과 더불어 한다. (天道無親 常與善人) ―노자

 

42. 가라앉음, 스스로 다스림, 고행, 맑음, 넓은 마음, 곧음, 지혜, 지식, 신앙, 이것은 자성에서 나와 브라만들이 하는 일이요,

 

43. 날쌤, 알참, 참고 견딤, 재주, 버팀, 보시, 지도력, 이런 것은 자성에서 나오는 왕족들의 행작이니라.

 

44. 농경, 짐승치기, 상업, 이런 것은 자성에서 나와서 하는 바이샤의 하늘 행작이요, 받들어 섬기는 일들은 자성에서 나와서 하는 수드라의 행작이니라.

 

45. 사람은 제 의무에 마음을 다함으로써 자기완성에 이를 수 있다. 이제 어떻게 제 의무를 마음 다해 함으로써 자기완성에 이르는가를 들어보아라.

 

46. 만유가 그에게서 전개되었으며, 일체가 그것으로 편만 되어 있는 이, 그이를 섬기기를 제 의무로써 다함으로 하여 사람은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느니라.

 

47. 불완전하게라도 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빛나게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를 다하는 사람은 죄에 물드는 일이 없느니라. (3장 35절 참조)

 

48. 타고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는 비록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 것이니 모든 경영(經營)은 다 결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연기에 싸여 있듯이.

 

49,그 이성은 언제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고, 그 자아는 정복되어 있어 욕망을 떠난 사람은 내버림에 의하여 최고의 지경 즉 초행작에 이르느니라.

초행작(naishkarmya)은 모든 행작을 초월한 지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이 세상일에서 벗어나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육신으로 살아 있는 한 도저히 불가능하다.「기타」가 주장하는 것은 내적(속으로) 내버림이다. 에고(ego,小我)와 자연은 비슷한 것이므로 해방된 영혼은 브라만이 됨에 따라 순수자아(pure self)는 잠잠하며, 안정되고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지만, 여전히 이 자연의 세계에서 활동한다. 그 자연이란 어떤 것임을 앎으로 하여.

 

50. 쿤티의 아들아, 완성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이니라.

완성의 지경 성만위(成滿位).

 

51.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 버리고,

 

52.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여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이욕(離欲)에 의지 하며,

 

53.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브라만과 하나됨 브라마 부타(brahma-bhuta).

 

54. 브라만과 하나로 되어 마음이 안정에 든 사람은 근심도 바람도 없고, 일체만물을 평등으로 보며, 나에 대한 최고의 믿음에 이른다.

나 크리슈나를 가리킴.

이 절은「기타」에서 볼 때는, 개인이 형태도 없는 절대 속에 녹아 없이지게 되는 것이 반드시 최고의 경지는 아니고, 도리어 변(變)과 불변(不變)을 자신 속에 다 가지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主)를 정성되게 믿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설명이다. ―라다크리슈난

브라만과 신은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쓰지 나오시로

 

55. 정성된 믿음에 의하여 그는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크)며,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참으로 알게 되면 그러면 곧바로 내게로 들어온다.

 

56. 언제나 온가지 행작을 하면서도 그는 나를 의지하고 내 은혜에 의하여 영원불멸의 경지에 들어 갈 것이다.

아타르(Attar)는 이브라힘 아담(Ibrahim)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순례자의 앞에 행복의 문이 열리기 전에 그의 가슴속에서 세 개의 베일이 벗겨져야 한다. 첫째, 그에 대한 영원한 선물로 두 세계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지기 전, 그는 기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어떤 피조물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직도 탐욕이 있다. 그런데 탐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니 주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베일은, 그가 두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려면 설혹 받았다가 그것을 다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섭섭하게 여겨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했다는 증거요, 노했다는 것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째는, 어떤 칭찬이나 호의에 넘어가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속는 사람은 마음이 허수한 사람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사람은 진리는 알아보지 못한다. 순례자는 고상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브라운, A Literary History of Persia)

이 세 절에서 저자는 지혜와 신앙과 행작은 서로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작은 성격, 곧 프라크리티는 하나님의 힘이고 개인은 다만 하나님의 기계일 뿐이라는 지식을 가지고야만 가능하다. 그 뜻을 영원 하신 이에게 꽉 박아놓은 사람은 그의 은총에 의하여 무엇을 하거나, 그는 영원히 그 큰집 속에 산다. ―라다크리슈난

 

57. 마음으로 일체 행작을 내게 맡기고, 나를 최고의 돌아갈 곳으로 알고, 이성의 요가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내게 두어라.

 

58. 생각을 내게 두면, 나의 은혜에 의하여 일체의 고난을 초월할 것이요, 만일 네 아집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할 것이니라.

 

59. 네가 비록 네 아집을 가지고 ‘나는 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그 결정은 소용이 없다. 네 자성이 너를 강제할 것이니라.

자성(自性) 프라크리티, 자연, 본능, 본질.

‘싸우지 않겠다’ 하는 욕망은 다만 그의 옅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의 깊은 존재는 그를 싸우는 편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가 만일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무기를 내던지고 전쟁에서 물러난다면, 그리하여 전쟁이 그 없이 진행된다면, 그리하여 자기의 물러남 때문에 세상이 불행하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는 우주정신인 냉혹한 압력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무기를 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아가 우주진 화에 협력해야 할 것이요, 이를 부정하고 반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는 본질적으로 결정을 맡는 자리에서부터 결정 하는 자리로 가게 될 것이다. 아르쥬나에게 미혹을 일으켜서 자기 존재의 위대한 뜻에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것은 그의 낮은 속이 하는 것이다. 이제 아르쥬나는 그 참뜻을 깨달았으므로, 이기적인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제 제자는 모든 사욕의 겁을 버리고 자기의 ‘속의 빛’에 복종해야 할 것이요, 그러면 그는 그를 이끌어 모든 고난과 장애를 이기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조건을 결정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결과 싸우는데 우리 정력을 소모해서는 아니 된다. 보통 사람은 다 자연적 인간이어서 조그만 일들에 본능적으로 열중하기 쉽지만, 사람은 변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보람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데에만 있다. 성 프랑시스의 유명한 기도가 이것을 한마디로 잘 표시해 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렇습니다, 그저 언제나 그렇습니다.”(Yes Father! Yes, and always Yes!) ―라다크리슈난

 

60. 쿤티의 아들아, 네가 미혹된 생각에 하지 않고자 하는 행동도 네 자성에서 나오는 행작에 얽매여, 네 마음에 없으면서도 하지 않을 수없이 되느니라.

 

61. 아르쥬나야, 자재주는 만물의 마음속에 계신다. 그는 그의 신비로운 힘으로 만물을, 마치 돌아가는 바퀴 위에 올려놓은 듯 돌리신다.

자재주(自在主) 이슈바라를 가리킴.

신비로운 힘 환력(幻力)

 

62. 바라타의 아들아, 너의 온 존재를 다 가지고 그에게로 돌아가라(歸依). 그의 은혜로 너는 최고의 평화, 영원한 집에 이를 것이니라.

 

63. 이처럼 모든 비밀 중의 비밀인 지혜를 나는 너에게 말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한 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나님은 얼핏 보기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그는 결정을 아르쥬나의 선택에 맡겼다. 그가 무관심하신 듯이 보이는 것은 그가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각각 제 자유로운 뜻으로 자기한테 오기를 바라시는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자유로이 자진해 오는 것이야말로 귀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같이하자고 요청을 할 것이지 강제할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이끌 것이지 몰아칠 것이 아니다. 설득을 시킬 것이지 강요할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자기 명령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는 언제든지 맘대로 물리치려면 물리치고 받으려면 받을 수 있다. 완전한 행복은 구도자의 충분한 승낙으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예정론 사이에는 유럽에서도 인도에서도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와 인간의 노력이 주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의지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지 없이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정된 자는 선한 행실과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예정은 확실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정은 피조물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그렇지만 그것들 때문에 예정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을 거절할 자유는 있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오직 제 행실로 그것을 받을 준비를 스스로 해가지고 있는 사람뿐이라고 했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의하면, 의지의 자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결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 할 수 있지만. 또 그것을 멀리할 수도 있다.

정신적 지도자는 육체적 폭력이나 기적부림, 부적 같은 것으로 우리를 놀리지는 않는다. 참 선생은 거짓 책임을 꾸미지는 않는다. 제자가 설혹 그릇된 방향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조언은 해주지만 강제로 돌이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이 될 때에는, 선생은 제자가 아직 미숙한 때에는, 마치 아버지가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에게 하듯이 해주지만 제 발로 걷게 될 때는 도와주려고 팔은 벌리지만 나가는 방향은 제가 취하도록 제자에게 맡겨둔다.

크리슈나는 다만 차부일 뿐이다. 그는 아르쥬나가 가는 방향대로 따라갈 뿐이다. 그는 무장은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영향을 아르쥬나에게 준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사로잡는 사랑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 사랑엔 한이 없다. 아르쥬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찾아내어야 한다. 그는 습관과 권위자에게서 얻은 단순하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행동해서는 아니된다. 불가피하게 감정적으로 얻어진 불분명한 가정들은 광신적인 고집으로 사람을 이끌어 말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제 신앙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르쥬나는 참된 성실성을 가져야 한다. 그의 생각은 참으로 제 것이요, 스승이 넣어준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가르침은 교리를 머리속에 집어넣어주는 일이 아니다. ―라다크리슈난

 

64. 다시 나의 비밀 중의 비밀인 가장 높은 가르침의 말을 들어라. 너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자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유익한 것을 말해주리라.

 

65. 마음을 내게 쏟고 나를 정성껏 믿으며 내게 몸을 바치고 나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는 내게로 올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네게 약속하노니, 너는 내 사랑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66. 일체의 (종교적) 의식을 버리고, 오직 내게만 의지하라. 내가 너를 일체의 죄악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지어다.

아르쥬나는 전쟁의 결과로 일어날 계급의 혼란, 선조에 대한 불경, 스승들에 대한 불경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다. 크리슈나는 그런 규율, 습관, 의무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그저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기가 하라는 대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아르쥬나가 만일 제 목숨과 행동, 감정, 사고를 다 버리고, 자기를 온전히 들어 하나님께 항복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여 이 인생의 싸움에서 빠져나오게 하실 것이다. 자아를 초월하는 가장 쉬운 길은 항복이다. “아무것에도, 자기의 도덕에조차도 종노릇을 아니하는 사람만이, 거룩하신 이를 명상할 자격이 있다.” ―라다크리슈난

 

67. 너는 이것을 고행을 하지 않는 자에게나, 참된 믿음이 없는 자에게나,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 또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말하지 말지니라.

 

68. 나를 진실로 믿는 자들에게 이 최고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게 최고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내게로 올 것이니라.

69. 인간 중에, 그 사람보다도 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세상에서 그 사람보다도 더 내 사랑을 받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70. 그리고 만일 우리 둘의 이 신성한 (종교적) 대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나에게 지식의 희생을 바치는 것이라고.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71. 믿는 마음으로, 불평함 없이 듣는다면 그 사람도 해탈을 얻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이 가는 청정세계에 갈 것이다.

 

72. 오, 프리다의 아들아, 너는 과연 마음을 한점에 모으고 이 말을 들었느냐? 가멸음의 정복자야, 네 지식의 헤매임은 소멸되었느냐?

 

 

아르쥬나 말하기를

 

73. 불사(不死)의 주이시여, 당신의 은혜로 저의 헤매임은 사라졌사옵니다. 제 (의무에 대한) 기억을 다시 찾았사옵니다. 의혹은 사라지고 튼튼히 섰사옵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대로 하겠사옵니다.

 

산자야 말하기를

 

74. 저는 이 놀랍고 솜털 곤두서는 대화를 바슈데바의 후신(後身)인 크리슈나와 대아(大我)를 가진 아르쥬나 사이에서 들었습니다.

바슈데바(Vasudeva) 바수천왕(婆藪天王).

 

75. 브야사의 은혜로 이 최고 비밀의 요가를 들었습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 자신이 제 면전에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브야사(Vyasa,廣博仙人)는 산자야에게 멀리서 듣고 보는 능력을 주었다.

 

76.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해볼 때마다 더욱더 기쁨을 느낍니다.

 

77.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점점 더 하는 환희와 놀람을 느낍니다.

하리(Hari) 크리슈나를 가리킴.

 

78.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 계신 곳, 한량이신 프리다 부인의 아들이 계신 곳, 거기에는 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번양이 있고, 견고한 통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버림에 의한 해탈의 요가라 이름 붙여진 제18장의 끝이며,「바가바드기타」라 일컫는「우파니샤드」의 끝이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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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9 조회9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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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세 종류의 신앙

 

 

 

 

이와 같이 카르마 요가를 닦음에 의하여 이 세계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사람들과 그와는 반대로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차이가 어째서 생기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나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인 “각 사람의 천성에 의하여서”라는 말을 앞의 제7장에서 했다. 그런데 그 3성, 즉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프라크리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14장에서 했다. 이제 이 장에서는 그 세 성 때문에 어떻게 여러 가지의 신앙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말한 다음 전체의 제목인 즈나나 비즈나나의 설명으로 이 장 끝을 맺으려 한다. 같은 모양으로 제 9장에서 말이 났던, 신앙의 길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왜 나느냐 하는 문제도 이 장에서 하는 말 로 분명해진다. ―틸라크

 

아르쥬나 말하기를

 

1. 오, 크리슈나시여, 성전의 명령을 돌아보지 않으시면서도 믿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경은 어떤 것이옵니까. 선성입니까, 동성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암성입니까.

지경 니슈다(nishtha).

아르쥬나가 이런 의문을 일으킨 것은 앞장 끝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지켜야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니슈다는 정신상태란 말이다.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경지에 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경전을 믿기는 하면서도 모르고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다. 예를 든다면, 무소부재하신 최고의 주재를 예배는 하면서도, 경전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9: 23), “나는 신에게 갈 수가 있다”고 하는 사람, 아르쥬나가 묻는 말은 그런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떤 것이냐 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서 경전과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 즉 귀신바탈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거기 대해서도 이 장에 서는 설명이 있다. ―틸라크

이들은 일부러 경전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렇게 한다. 샹카라는 어떤 사람의 신앙의 성질이 어떠하냐는 것은 경전의 명령을 지키고 아니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인격과 그 하는 예배에 달려 있다고 했다.

라마누쟈는 그보다는 좀 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해서,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간, 모르고 했어도 알고 했어도, 경전을 범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2. 육신으로 난 자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세 가지이니, 선성과 동성과 암성이다. 이제 그 설명을 들어라.

육신으로 난 자 인간, 생령.

아르쥬나의 질문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이 장의 뜻의 정말 알기 어려운 점은 크리슈나의 대답이 직접적이 아닌 데 있다. 그의 대답이 너무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샹카라는, 신앙을 가지는 일에 비하면 경전에 대해 무식하다는 것은 별일 아니라는 교리에 따라 크리슈나를 신용했지만, 라마누쟈는 거기 대한 대답을 5절, 6절에서 찾아냈다. 거기에는 아르쥬나가 말한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은 귀신바탈을 택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크리슈나의 견해를 넓은 마음의 것이라고 믿는 점에서 샹카라보다도 더 나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샹카라는 적어도 아르쥬나의 말의 뜻을 “경전의 가르침의 뜻을 모르고”로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신을 예배하는 데 대한 경전의 명령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리낌 없이 제껴놓는 사람들을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다. 아난다기리(Anandagiri)는 거기에 덧붙여 말한다. “그와 같이, 경전은 모르면서도 신앙을 받아가지고 난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그들의 신앙의 성질에 따라, 선성이라 동성이라 암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경전을 등지는 사람을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샹카라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아르쥬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지 못한달 법도 없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대답이 보여주는 주된 요지는 사실, 신앙이 경전을 무시하고도 있을 수 있다는 제자의 생각을 교정해주기 위한 데 있는 듯이 보인다. 16장 마지막 절에서 아주 결정적인 교훈을 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가 의무를 말하는 마당에서 경전을 낮추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기타」의 저자가 감히, 혹은 의향으로나마 그렇게까지 열렬히 비정통적이려고 했다고 가정할 이유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힐

 

3. 바라타의 아들아, 각 사람의 신앙은 그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람은 신앙으로 된다. 무엇을 신앙하든 간 그 신앙하는 대로가 그 사람이니라.

성질 본성, 사트바(sattva).

신앙 슈라다(shraddha).

이 절에서 사트바는 타고난 성격, 이성(理性), 혹은 양심의 의미다. 이 의미로 쓰인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있다……쉽게 말해서, 2절에 있는 스바빠바(Svabhava)와 3절의 사트바와는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성질이란 프라크리티와 다른 것 아니요, 이성이란 것, 나가서는 양심이란 것도 프라크리티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은 베단타 철학에서도 삼캬철학에서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믿거나 그대로 그 사람이다” 하는 원리는 “신들을 믿는 사람은 그 신들에게로 간다” 하는 주장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말들은「기타」7장 20절과 23절, 9장 25절에 나와 있다……모든 사람이 그 욕구하는 바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어떤 특정한 경향 혹은 욕망을 받게 되고 안 받게 되는 것은 프라크리티에 달렸다 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성질을 개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자연 일어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즉, 아트만(atman, 자아, 영혼)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성격은 훈련과 내버림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고쳐질 수 있다…여기서 생각할 것은 신앙의 그러한 차이가 왜, 어째서 일어나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에 따라 신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크리슈나는 이제 설명을 한다. ① 프라크리티 자체가 사트바, 라쟈스, 타마스 하는 세 가지 성(性)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세 종류의 신앙이 나타나게 되느냐 하는 것, ② 그러한 차이의 결과는 무엇이냐 하는 것. 교정해주기 위한 틸라크

(저자는 아마 당시의 신앙, 음식, 희생, 고행, 자선, 내버림, 폐지 등등 여러 가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신앙’은 하나의 신조를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모든 힘을 어떤 주어진 이상에 집중함에 의하여 자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함이다.

신앙은 인간 위에 내리는 영의 압력이다. 인간을 몰아쳐 지식의 계열에서만 아니라 전영적(全靈的) 생명의 계열에 있어서 보다 나은 지경으로 올라가게 하는 힘이다.

진리에 대한 내적 감각으로서의 신앙은, 후에 가서는 더욱 광명한 빛이 비치게 되는 그 목적을 향하고 있다.

어쨌거나, 어떤 종교적 신앙의 궁극의 다룰 수 없는 증거는 그 믿는 자의 혼의 증거다.

누구나 잘 아는 노래의 귀절이 잘 증명해준다. 종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목적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이 그것을 어느만큼 신앙하느냐에 따라 증거가 된다. 「바가바타」(Bhagavata)는, “예배의 열매는 그 드리는 자의 신앙대로 된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인 것은 우리의 과거 때문이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이제와 이제 이후로 또 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우리의 욕망의 경향이나 영혼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 자신도 각각 그대로 된다” 했고, 괴테는 “정성됨만이 인생을 영원으로 만든다”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4. 선성의 사람은 천신을 예배하고, 동성의 사람은 야차나 나찰을 예배하고, 그밖의 암성의 사람은 죽은 망령, 또는 유령의 무리를 예배한다.

천신(天神)데바(deva), 신(gods).

야차(夜叉)야크샤(yakshas).

나찰(羅刹)라자샤(raja놈).

망령(亡靈)인귀(人鬼). 귀신(ghosts).

유령(幽靈)지귀(地鬼), 영(spirits).

 

5. 위선과 교만에 쓸려 성전에서 명하지도 않은 고행을 맹렬히 행하는 사람이 애욕과 집착의 힘에 몰려,

 

6. 어리석게도 몸 안에 갖추어져 있는 원소의 무리들을 학대 하고, 또 그 몸 안에 있는 나까지도 괴롭히니, 그런 것은 귀신 바탈을 택한 것으로 알 것이니라.

원소의 무리들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 기관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5대원소로 되어 있다.

자기 몸을 스스로 괴롭히기 위해 머리털 내복을 입는다든가, 날카로운 쟁기로 몸을 찌르는 것 같은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혹시 환각을 일으키는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정신적 환상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몸을 괴롭히는 것을 자신의 단련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석가의 훈계를 들어보라. “금욕이나 고행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고통일 뿐, 아무 가치도 이익도 없다. 해서는 아니 된다.” ―라다크리슈난

 

7. 각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도 세 종류다. 희생도, 고행도, 보시도 또한 그렇다. 그 구별을 들어보아라.

 

8. 선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목숨과, 원기, 힘, 건강, 기쁨,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들이니 구수하고, 부드럽고, 자양분 있고, 입맛이 나는 것들이니라.

 

9. 동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쓰고, 시고, 짜고, 뜨겁고, 맵고, 아리고, 입이 화끈거리는 것들이니 아프고 괴롭고 병이 나게 하느니라.

 

10. 암성의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때가 지난(식은) 것, 맛이 빠진 것, 쉰 것, 썩은 것, 먹다 남은 것, 부정한 것들이니라.

 

11. 희생의 바친 결과를 생각함 없이 의무로 알고,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경전에 지시한 법식대로 바치는 희생은 선성적인 것이니라.

 

12. 그러나 바라타족의 으뜸가는 자야, 희생의 결과를 기대하며 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바치는 희생은 동성적인 것인 줄을 알라.

 

13. 법식에 맞추어 하지도 않고, 드린 음식을 나눠줌도 없고, 찬송(진언)을 부르지도 않고, 헌금을 바치는 것도 없이 하는 희생은 믿음 없는 희생, 이는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음식을 나눠주고 헌금을 바치는 것은 남을 돕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뿐이다. ―라다크리슈난

아스리슈탄남(asrishtannam)을 보통 “음식을 나눠주는 일도 없이”로 번역 하는데, 간디지는 일부러 “거기서는 음식을 생산함이 없이”로 했다. 그렇게 한 것은「마누」(Manu)와「기타」3장 14절에 따라서 한 듯하다. 희생에서 비가 나오고, 비에서 밥이 나온다. 모든 희생은 창조적이 아니면 안된다.

간디지의 아다크쉰남(adakshinnam)의 번역(which involves no 〔dakshina〕 giving up)도 보통의 번역(devoid of prescribed feesto the priests)과 다르다. 정통적인 해석 속에 들어있는 미숙한 이기주의는 그만두고라도, 다크쉬나(dakshina, gift)란 말이 분명히 아주 높은 정신적 의미로「우파니샤드」속에는 씌어 있다. “고행, 자비, 진지, 비폭력, 성실”을 희생으로 바칠 만한 예물(gift)이라고 했다(「Chh Up.」3:17, 4) “내준다, 버린다” (giving up)란 말은 간디지의 번역에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을 내버린다는 의미로 한다. 그런데「우파니샤드」는 한걸음 더 나가서, 희생드리는 자가 위에서 말한 기본적인 맹세를 지켜서 살겠다고 한 그 약속 자체를 바쳐버린다는 뜻으로 보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을 바쳐버리는 순수한 희생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14. 천신, 두 번 나신 이, 스승, 어진 이를 공경하는 것과 깨끗, 정직, 브라마차랴, 아힘사, 이것을 몸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5.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참되고 유쾌하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과, 날마다 베다를 외는 것, 이것을 말로 하는 고 행이라 하느니라.

 

16. 마음의 안정, 인자, 침묵, 자제, 혼의 순결, 이것을 마음으로 하는 고행이라 하느니라.

 

17. 이 세 가지 고행이 마음이 통일된 사람에 의하여 최고의 신앙으로 결과를 기대함이 없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선성적인 것이라 하느니라.

 

18. 존경, 명예, 대접을 받기 위해 허영심을 가지고 하는 고행은 동성적이라 하나니, 흔들리고 튼튼치 못하니라.

 

19. 그릇된 고집으로 자기를 학대하기 위해, 또는 남을 파멸시키기 위해 하는 고행은 암성적이라 하느니라.

 

20. 보시(布施)란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은혜 갚음이 돌아올 수 없는 사람에게 할 것인데, 적당한 곳과 때에 그러한 사람에게 하면 그 보시는 선성적이라고 하느니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여라. ―예수

 

21. 그러나 은혜갚음을 기대하거나, 다른 무슨 소득을 바라면서, 혹은 본의 아니게 하는 보시는 동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2. 적당치 못한 때와 곳에서 적당치 못한 사람에게 예의도 없이 업신여기는 태도로 하는 보시는 암성적이라고 하느니라.

 

23. 아, 타트, 사트는 브라만의 세 가지 이름이라고 한다. 거기 따라 브라민과 베다와 희생이 규정됐던 것이다.

브라민(brahmins) 범서(梵書).

 

3장 10절을 보라.

아옴(aun, 唵)은 브라만(梵)의 절대, 최고 성(性)을 나타내는 것이고, 타트(tat, 彼)는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트(sat, 有)는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다.「타이르리야 우파니샤드」에는 “이것이 사트(sat, 존재하는 것)와 타트(tat, 그 너머)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이 물질적 우주인 동시에, 또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의식의 세 경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깰 때(jagrat), 꿈꿀 때(svapna), 잘 때(susupti). 그리하여 마침내 초월의 지경(turiya)으로 올라간다.「만두캬 우파니샤드」와「바가바드기타」7장 8절과 8장 13절을 보라. ―라다크리슈난

 

24. 그러므로 브라만을 닦는 이들은 늘 ‘아옴’을 부름으로써 「베다」에 규정되어 있는 희생, 보시, 고행의 의식을 시작한다.

 

25. 그리고 해탈을 원하는 사람들은 ‘타트’를 먼저 부르고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 없이 희생과 고행과 보시의 식을 행한다.

 

26. 프리다의 아들아, ‘사트’라는 말은 실재와 선(善)의 뜻으로 쓰이고, 또 칭찬할 만한 행동에 대해서도 쓰인다.

 

27. 희생과 고행과 보시에 굳건히 서는 것을 가지고도 사트라 한다. 또 타트를 위한 어떠한 행작(行作)도 사트라고 한다.

 

28. 어떤 희생과 보시를 했거나, 어떤 고행을 했거나, 어떤 의식을 지켰거나 만일 믿음이 없이 했다면 그것을 ‘아사트’라고 한다. 오, 파르다야, 그것은 현세에서도 아무것도 없음이요 죽은 후에도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아사트(asat) 비유(非有) 또는 무(無).

 

이것이 세 종류의 신앙이라 이름 붙여진 제 17장의 끝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