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문선명 통일교.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문선명 통일교. Show all posts

2022/08/11

통일사상의 출현배경 - 이상헌원장 (1914- ) 「새 共産主義비판」1968

통일사상의 출현배경 - 이상헌원장

통일사상의 출현배경 - 이상헌원장

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by 갓골 2010. 1. 6.
 

本人이 統一敎會에 入敎하여 어떤 動機에서 그리고 어떻게 文鮮明선생님의 思想인 統一思想을 執筆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小題目을 가지고 干證하기로 합니다.

① 草創期時代의 命令의 方式

② 入敎까지의 個人의 路程

③ 入敎 當時의 선생님의 모습과 나의 決心

④ 勝共理論 實力養成의 指示와 使命의 自覺

⑤ 執筆과 單行本의 發行

⑥ 學界의 公認

 

1) 草創期時代의 命令의 方式


나는 1956년 5월에 統一敎會에 입교했습니다. 그 때는 바로 統一敎會의 草創期에 해당합니다. 入敎 當時에 느낀 것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의 하나는, 文先生님(以下「先生님」)은 절대로 個人을 향해서 命令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印象的이었던 것입니다.「金某 이렇게 하시오. 李某 이렇게 하시오.」라고는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命令하실 것이 있으면, 集會나 禮拜때에 대중을 향하여「統一의 食口들은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直接 명령한다는 것은, 直接主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미완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므로 이런 미완성의 사람은 직접주관하지 않는다는 原理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적인 면에서는 직접 명령하여 그 사람이 명령대로 행하면 되지만, 만일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條件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조건에 걸려서 그것이 一生동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將來 悔改하여 나아졌다 하더라도 復歸上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汚點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직접주관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命令하시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象徵的 표현을 하십니다. 그 一例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대학교수가 入會하여 자기의 훌륭함을 여러 가지로 자랑하였습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先生님은 컵에 밀가루를 가득히 넣고 거기에다가 물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물은 모두 밖으로 넘쳐흘렀습니다. 왜 선생님은 저런 일을 하시는가 하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으면 다른 것은 더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眞理를 받으려면 마음 속을 전부 비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우지 않고 자기의 지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하늘의 眞理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직접 말해서는 듣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象徵的으로 표시하여 알 수 있는 사람만이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또 假言的, 未來的인 표현도 자주하셨습니다. 그것은「만일 …… 이라면」하는 표현 방식인 것으로서 英語의「if……」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金某란 권사에게 선생님이 명령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金 권사가 만일 傳道를 나간다면, 훌륭히 해낼 것이야」라고 합니다. 이것 자체는 명령은 아닙니다. 후에 나는 그 金권사를 만나, 선생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그것은 전도하라는 명령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象徵的으로 혹은 假言的으로 또 未來的으로 말씀하시지만, 이것은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뜻합니다.
 
왜 본인이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統一思想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未來的인 표현으로 명령하신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는 것을 고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958년 群山(나의 入敎地)에 순회오셨을 때, 7~8명의 식구가 모인 장소에서「未來에 統一主義時代가 온다」,「統一思想의 時代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상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이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도 물론 들었을 것이지만 여하간 그 말씀이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그 말씀대로 그러한 時代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나, 나는 그 당시 지방에 있었으므로 서울 協會本部에서 간부님들이 전부 하나가 되어 선생님의 指導下에 열심히 노력하여 그러한 統一主義時代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에 직접 관련된 事項이라고는 전연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入敎까지의 個人路程

나는 儒敎의 家庭에 태어났습니다. 나의 先親은 유교학자였는데 3·1運動때의 萬歲사건으로 日本 관헌에게 逮捕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五~六개월쯤 후에 출옥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滿 5세였습니다. 출옥한 先親은 다분히 분해하는 얼굴로 日本人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을 때, 한국의 皇帝 高宗은 和蘭의 헤이그에서 개최되고 있던 國際平和會議에 李俊이라는 밀사를 보내서 일본의 침략이 不法이라는 것을 공개하려고 하였는데, 日本의 방해로 성사하지 못하자 그 밀사는 거기서 激墳하여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친은 그 후에도 가끔 나에게 民族的敎育, 反日敎育을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幼年時부터 反日思想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10세 때 國民學校(그 당시의 公立普通學校)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큰 兄은 나보다 十歲 年上이었으나 선친은 日本의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여 兄을 중국의 北京大學에 留學시켰습니다. 나는 國民學校를 졸업하고 16세 때, 高等普通學校(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것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거기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光州學生事件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男學生이 한국의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導火線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확산되었습니다. 이때 학교마다 학생그룹이 있어 가지고 스트라이크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도 그 학생 그룹에 들어가서 삐라를 뿌리면서 데모에 가담했습니다. 말을 타고 칼을 찬 일본의 경찰관은 위세를 부리면서 순찰하였으나 쉽사리 데모를 저지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運動은 民族主義者와 共産主義者의 쌍방에 의해서 지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을 학생들은 몰랐습니다. 특히, 슬로건이 서로 같은 反日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는 組織力이 弱하고 공산주의자는 조직력이 强하였기 때문에 나는 결국 공산주의자의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共産主義=民族主義」라는 느낌이 들어 공산주의 속에만 民族이 사는 길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민족을 救하는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反日의 정열에 불타있었으므로 스트라이크 때 마다 참가하였으며 드디어 학교에서 退學을 당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학교에 補缺試驗을 쳐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또 左翼運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은 또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몇 번이나 逮捕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경찰은 세계에서 가장 심한 拷問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 죽어간 사람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일본과 싸우다가 25~26세쯤 되어 고문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情熱的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대체로 30세 미만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고문으로 말미암아 너무 괴로울 때에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혀를 깨물고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民族의 獨立을 위해서 싸우는 길은 죽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몽둥이로 쳐서 어느 정도 고문에 견딜 수가 있는지 시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심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나는 共産主義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책을 열심히 읽어서 資本主義社會의 缺點이나 問題點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反日的이 되었고, 鬪爭的이 되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나의 이름은 형사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을 때, 형사가 일주간에 한번이나 두 번, 하등의 예고도 없이 와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不穩文書나 書籍이 있지 않나 하고 검색했습니다. 내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에도 나의 책상이나 장롱을 열고 전부 뒤졌습니다.

세 번째로 들어간 학교는 普成高等普通學校였습니다. 그곳의 교장이나 교원은 전부 民族主義者로서 나와 같이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또 체포되어 몇 개월간 경찰서의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그럭저럭 그 학교를 졸업하고 22세 때에 세브란스 醫科大學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심경은 대학입학 전에 20세부터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당시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民族愛와 人類愛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항상 뜨겁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民族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다」,「人類를 위해서 죽는다」라는 구호가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民族愛란 무엇인가, 人類愛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唯物論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에서 進化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인간에게서 민족애나 인류애가 나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나의 마음을 대단히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족애나 인류애의 當爲性이 論理的으로 명백해지면 그 사랑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出處가 애매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좋을 것을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공산주의가 참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民族愛. 人類愛는 唯物論에서는 合理化되지 않습니다. 동물에도 사랑은 있으나, 자기의 生命까지 희생하면서 다른 동물을 살리는 사랑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살리는 前提條件下에서 다른 動物(예컨대 자기의 새끼동물)도 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희생하면서 他人을 위하는 인간의 사랑은 동물의 사랑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것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唯物論 혹은 공산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人間을 동물로 規定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공산주의를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唯物論으로써는 사랑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根源을 알기 위해서 종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나 유교나 불교에 관한 책도 읽어 보았으나 어떤 종교의 敎理도 이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여러 가지 思想이나 哲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러 가지 의문이 구름같이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보아도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산다는 문제(「生」의 問題)입니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만물은 왜 살고 있는가, 새를 볼 때, 새는 왜 살고 있는가, 벌레나 곤충을 보면, 이 벌레나 곤충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따위의 의문이 끝없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슨 意義가 있는 것일까, 거지를 보면, 그는 왜 거지가 되었으며, 그 거지의 신세이면서 왜 살려고 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生物을 살리고 있는 生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도 어린아이처럼 별은 왜 있을까하고 자문해보곤 하였습니다. 宇宙 속에서 地球는 대단히 작은 별인데 그 작은 별인 지구의 存在理由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동물에는 存在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았으며, 따라서 동물에서 進化한 것이 人間이라면 인간의 존재이유도 없지 않은가. 또 하나의 의문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男性과 女性이 있으며, 동물에게는 수컷과 암컷이 있는가. 부부가 되는 것, 결혼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남녀의 결합 때문에 수많은 가정의 비극이 생기고 있는데, 왜 그러한 결혼을 해야 하는가, 결국 비극을 낳기 위한 결혼이 아닌가. 아이를 낳는 것도 결국 悲劇의 주인공, 고통의 주인공을 낳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兄이 둘이 있었으나 둘 다 16세 때에 결혼하였습니다. 나도 17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結婚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때는 공산주의의 영향도 있고 해서 早婚엔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가 되어 人生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에 부모가 또 결혼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이번에는 결혼의 不必要性을 강력히 고집하면서 「絶對로 結婚하지 않겠습니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父母에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는 공산주의를 버렸을 때였습니다.

 

여하간에 이 시기는 나에게 있어서는 方向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고민과 고통만이 연속되는 暗黑의 期間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地獄과 같았습니다. 장시일에 걸친 고뇌의 기간은 건강을 해치고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너무도 괴로워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심장의 고동은 격심해지고, 두통이 심해 잠이 오지 않았으며, 식욕도 없고, 소화도 되지 않았습니다. 체력도 날마다 쇠약해져 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過量의 수면제 약을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는 먹고 죽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는 意義가 없을 바엔 가는 곳은 어차피 墓地이므로 빨리 가는 것이 合理的이라는 思考方式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하나의 固定觀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괴로워하는 것 그 자체가 꼭 찾을 수 있는 것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으므로 더 찾아보기 위해서 죽는 것을 좀 더 保留하고, 살아보자는 觀念이 나의 生命을 하루하루 연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 대학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학생활에서 心境이 좀 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던 父母가 대단히 불쌍하게 생각되어졌습니다. 부모에게 너무 불효를 해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부모가 그렇게도 바라시던 結婚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宗敎에 本格的으로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暗黑期를 거쳐 求道期에 들어서게 된 셈입니다. 人生問題의 해결에 있어서 宗敎(기독교, 유교, 불교)나 哲學의 無力함을 개탄하고 있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丈人으로부터 생명의 實相(日本의 新興宗敎「生長의 집」의 경전)이라는 책을 入手하였습니다. 丈人이 내가 인생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알고 꼭 읽어보도록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의외로 많은 인생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나의 기쁨은 컸습니다. 그리하여 바로「生長의 집」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하여「生命의 實相」의 12권짜리 全帙과 매월 발행된 잡지「생장의 집」도 구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서로 하나님의 아들로 보라는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역사관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에는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공산주의사회가 온다는 것을 역사관으로써 論證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은 정열을 불태우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미 버렸기 때문에 思想的 기반이 사라졌으니 大地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不在狀態에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면서 종교를 찾기도 하였지만 종교 교리만으로써는 만족할 수 없었으며 나에게는 역시 歷史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共産主義는 지상에 공산주의사회가 반드시 실현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언젠가 지상에 理想世界가 到來한다는 약속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되어졌지만,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유교에도 그런 역사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장의 집」은 지상에 神國이 실현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역사관이 없습니다. 즉 역사가 그 방향을 향해서 必然的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論理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생장의 집은 나에게 그때까지의 최고의 宗敎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에서는 아무도 장담 못하는 지상의 理想世界의 실현을「생장의 집」은 신념을 가지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地上의 神國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生長의 집」에도 하나의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장래, 일본의 천황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統一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그 점이 受容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罪 나 惡은 본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불교적인 認識이었습니다만,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回避로 보였던 것입니다. 罪는 반드시 그 起源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죄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죄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罪는 본래 없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외의 주장은 대부분 肯定的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敎祖인 谷口先生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靈的으로 再臨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재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惡에서 떠나면 그때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재림하셔서 인간은 神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나쁘게 보지 말고 신의 아들로 보고 숭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사람을 숭배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소위 大東亞戰爭에서 패하기 직전에「생장의 집」이라는 잡지가 廢刊되었습니다. 출판하려해도 종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폐간되는 마지막 號「생장의 집」의 서두에 비장한 권두언이 실려 있었습니다.

 

「잡지가 출판되지 않더라도 信仰만을 잊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랄만한 말 한마디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肉體를 가지고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말한 바와는 전혀 다른 再臨觀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谷口先生의 말을 믿어온 나로서 이 肉體的인 再臨도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 시일이 흐르는 동안에 그러한 肉身再臨의 문제는 뇌리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求道期를 그렇게 지낸 후 약 10년간 여러 난문제를 지닌 채 自立期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을 거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956년, 42세에 傳道되어 입교하였습니다. (註)

 

入敎할 때까지 그동안 지니고 있던 중요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입교 당시 나는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지만 돈벌이는 제2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內部로부터의 누를 수 없는 所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생문제를 함께 고뇌하고, 함께 對話할 수 있는 동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진을 부탁받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갔습니다.

 

거기의 환자의 주변에 내가 찾고 있는 진정한 人生의 同志가 혹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환자가 부르거나 知人이 부르거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서 談話하고 나면 항상 실망하곤 하였습니다. 전부 돈 벌려는 이야기이며, 財産, 名譽, 出世 등에 관한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넓은데 人生行路의 同志는 이렇게도 찾기 힘든 것인가 하고 혼자서 탄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1956년에 傳道되어 統一敎會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무렵 新聞에는 통일교회의 評判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교회에 내가 입교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신문을 보고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가르침 그 자체가 眞理이냐, 아니냐가 문제다 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人生의 깊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전도자의 말을 듣고 통일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統一敎會 本部에 안내되어 劉孝元 協會長으로부터 통일원리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나는 一方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싫었으므로「이제 劉선생 말을 들었으니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理論이 있으니 나의 말도 좀 들어주시오」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5분정도 말하면 나도 그것에 대하여 나의 意見을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강의가 잘 진행되지 않게 되자 劉협회장은「李先生, 잠깐 내 말을 들어주세요, 이선생도 宗敎에 대해서 一家見을 갖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에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統一原理를 듣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까?」「그렇다면 전부 들어보신 뒤에 좋고 나쁘고를 결정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의심이 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말에 同意하고 그 날은 밤 3시까지 그의 강의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 후 5일간 통일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原理講論이라는 책이 없었고, 일부의 식구들이 100面 程度의 노트에 펜으로 필사한 원리를 갖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經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청강 기간 중 나는 그 노트를 갖고 있는 한 식구에게서 그것을 빌려서 소중히 다루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原理는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원리를 다 듣고 3일쯤 되었을 때, 벌써 나의 대부분의 難問題가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唯物史觀을 알고 있었으므로 復歸原理를 들으면서 이것이 통일원리의 역사관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이만 저만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도 바라던 歷史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3) 入敎 當時의 선생님의 모습과 나의 決心

그와 같이 하여 나는 통일교회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難問題들의 기본 骨格은 모두 해결되었지만 여러 가지 세부적인 문제는 原理만으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선생님에게 직접 질문하여 해답을 받기도 하고, 또는 집회 때나 私席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해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식구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방에 모여 있을 때 전체를 향하여 말씀하시면서 실은 나의 疑問을 풀어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그 내용이 思想的인 말씀이므로 일반 식구는 잘 모르지만 나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자리에서 내가 직접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授受作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너무도 상세하였기 때문에 나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授受作用에도 여러 가지 形態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후 그것을 統一思想에다 실제로 體系化한 것이, 授受法의 第一型, 第二型, 第三型, 第四型, 第五型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배웠으며 그 때마다「이분에게는 이런 훌륭한 次元높은 思想이 있구나」하면서 감탄하였습니다. 그렇게도 어려운 미해결의 문제를, 이렇게 명쾌히 해결해 주시는데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個人的 指導를 자주 받은 것입니다. 감격한 것은 인생의 난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여 주시는 것뿐만은 아닙니다. 民族이나 人類에 대하여 또 역사상의 많은 聖人이나 義人, 豫言者들에 대하여 한없는 憐憫의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데 대해서도 감격하였습니다. 예컨대, 설교 중에 말씀이 민족이나 인류에 미칠 때, 또는 迫害로 고통 받는 義人들에 미칠 때, 그 憐憫의 情이 극에 달하여 통곡하시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6천 년간 인류를 救援하기 위하여 고생하여 오신 하나님을 품으시고, 통곡하시는 모습도 자주 뵈었습니다. 역사 이래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생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山川草木 등 모든 만물들까지도 그것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슬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天上 天下에 충만되어 있는 모든 慘狀과 悲劇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민족과 인류와 만물을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救하기 위하여 全生命을 바쳐가면서 저렇게도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눈에 비친 선생님의 모습은 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분은 놀라운 智慧의 寶庫와 한없는 憐憫의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성자이며 受肉된 神이며 인류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한마디 한마디는 실로 구슬처럼 보배로웠습니다. 이 귀한 구슬들을 그냥 두면 흩어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라는 말대로 나는 선생님의 사상을 체계화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59년의 어느 날 선생님께「先生님의 사상을 배우면서 硏究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몰래 결심하였던 것은 첫째로 이 분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에 알려서 이 분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나와 같이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고민에서 해방되었으니 이러한 사람들도 빨리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슬을 꿰듯이 記錄으로 남겨서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장차 고민할 사람들에게 전해서「이 思想으로 고민을 푸십시오」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抑制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통일원리와 선생님의 사상을 체계화함으로써 통일교회의 出現의 目的達成에 寄與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통일원리를 상세히 배움으로써 통일교회가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첫째로 聖書의 難問題를 명백히 해결함으로써 기독교의 全敎派들의 派爭을 和解시키는 것, 둘째로 모든 종교를 화해시키는 것, 셋째로 宗敎와 科學을 통일하는 것, 넷째로 모든 사상을 化合統一시키는 것, 다섯째로 많은 문명을 화해시켜서 통일하는 것, 여섯째로 地上世界와 영계를 통일하는 것 등입니다. 통일교회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원리 뿐만 아니라 통일원리에 나타나 있지 않은 많은 선생님의 그 놀라운 思想을 체계화하여 일반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라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또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것도 나를 통하여 人類에게 眞理를 전하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나뿐만아니라 他人에게도 해당됨은 물론입니다. 그리하여 가르침을 들을 때는 머리에 하나하나 메모하여 새기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입교 후 수년이 지나서 나 나름대로 은밀한 가운데 선생님의 사상의 체계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장래 統一思想을 선생님의 직접 명령으로 이와 같이 발표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 勝共理論 實力養成의 指示와 使命의 自覺

나는 1956년에 入敎한 후 6년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반공이니 승공이니 하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분이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순수한 종교지도자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공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셨기 때문에 이 분을 반공지도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共産主義運動을 하나 나의 과거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생각도, 필요성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信仰生活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 음력 1월 6일 선생님의 탄신일축하연에서 선생님은 많은 食口들 앞에서 나에게 干證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그날 오후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중 예감이 이상해서「부디 나에게만은 干證을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마음으로 기도한 바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타인의 간증을 듣는 것은 대단히 恩惠스러웠지만 자기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전부터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날 오전 중에는 몇 명의 은혜스러운 간증을 듣고, 오후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모였을 때, 뜻밖에도「이상헌, 일어서」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21일간의 禁食을 干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순종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간증을 하였습니다. 21일간의 禁食이란 1959년 12월 1일부터 행한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心情을 體驗하기 위하여 어떤 식구의 권유에 의하여 한 것입니다. 당시 선생님은 자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天國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식구는 나와 같은 비판적인 인간은 담판기도를 하지 않으면 쉽사리 하나님의 심정의 체험이 어렵다고 하기에 결사적으로 금식을 행하여 본 것입니다.

담판기도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금식기도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1일째 되는 날 밤, 나는 한없는 사랑을 가지시면서 인류를 救하기 위해서 한없이 고생하고 슬퍼하시는 불쌍한 하나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으며, 나는 이 체험을 통해서 역사상의 하나님의 심정은 한없는 슬픔과 한없는 고통의 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하나님이 너무나 불쌍해서 痛哭하였습니다. 또 人類나 萬物도 대단히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 때에 비로소 선생님이 왜 그토록 슬프게 痛哭하시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또 부르시기에 일어섰더니「過去에 共産主義運動을 하였지, 그것을 干證하라」고 지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여러 식구들 앞에서 간단히 간증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내가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그와 같은 간증을 나에게 시키신 것일까,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疑問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절대로 攝理와 관계없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나는 선생님의 言行에 관해서 많은 것을 연구하여 왔습니다. 硏究하여 보니 선생님은 그 분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여도 그것은 전부 그때 그때의 하나님의 攝理와 관계가 있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섭리적으로 意義가 없는 무의미한 말씀이나 行爲는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두 번씩이나 干證을 시킨 이상, 무엇인가 섭리적인 意義와 內容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선생님은 어떻게 아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干證시킨 理由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그 후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2년, 先生님의 탄신일 前夜의 일입니다. 밤 12시(0시)부터 탄신일이 시작됨과 함께 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1시부터 2시 사이에 36家庭이 모인 가운데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중에「이제부터 幹部들은 共産主義理論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養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선생님에게 反共的인 측면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衝擊이었습니다. 나는 전부터 사물을 여러모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아무리 共産主義가 나쁘다 하더라도 宗敎家로서 과연 공산주의를 미워해서 좋을 것인가」라고 항상 생각해 온 터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통일교회에 입교한 뒤 더 뚜렷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앞으로는 反共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나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공산주의자일지라도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宗敎의 精神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까닭이 있을 것으로 알고 原理的으로 그 이유를 나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던 것입니다.

 

즉 원리적으로 볼 때, 歷史의 종말에 있어서는 반드시 가인·아벨의 對立關係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관계는 결국,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思想이나 理念이 없다. 통일교회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地上에 실현하시는 분이심으로 공산주의까지도 사랑하심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攝理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부득이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共産主義者에 대한 사랑의 문제와 공산주의와의 사상싸움의 문제는 別個의 問題다」라고 나 나름대로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은 거의 徹夜를 하고 좀 쉬었다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劉協會長이 나에게 「어제 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李先生밖에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선생은 이전에 공산주의운동을 하여 공산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勝共關係는 역시 이선생이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선생님이 2년 전에 나에게 간증을 시킨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간증을 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내가 공산주의자의 經歷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前提 위에서 공산주의 비판을 간접적으로 명령하셨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선생님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명령을 하시지 않습니다. 一般人에게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 개인이 자기의 責任分擔이라고 느끼고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이 당시의 攝理의 施行方法입니다. 최초로 간증을 시켜서 유협회장 등의 간부들이 나의 履歷을 알도록 해놓고 그런 여건 하에 승공의 실력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원에 대하여, 즉 一般人(36家庭)에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으로서 이것을 들은 사람, 특히 유협회장은 책임자로서 이 명령을 施行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執筆하지 않으면 안되니 누구에게 시킬까, 이선생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나에게 선생님이 간증을 시킨 것은 역시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위한 攝理였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4년 전인 1958년경「未來에 統一思想 시대가 온다」고 하신 것도 결국 나에 대한 명령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 때서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미래적으로 명령하신 것으로 알고 그 때부터 분명한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책임을 지고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5) 執筆과 單行本의 發行

 

그리하여 共産主義의 批判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공산주의에 관한 책이 한권도 없었습니다. 韓國은 당시 5·16혁명이 일어나서 반공이 제일의 國是가 되고 있어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일체 없애는 시대였으므로, 공산주의 책은 쉽사리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해방직후에는 공산당원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한국전쟁 후) 共産黨은 非合法化되어 한국에 공산주의자는 법적으로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공산주의 비판을 위해서 공산주의 서적을 찾고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알고 책 두 권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레닌의「唯物論과 經驗批判論」과「哲學辭典」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쟁도중 어떤 공산주의자가 도망갈 때에 땅속에 숨겨둔 것을 우연히 찾아낸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여러 서점을 돌다가 尹元求氏의 「마르크스主義의 批判的克服」이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본론의 가치론만을 비판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사서 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어 보니 以前에 알고 있던 내용들이 많이 마음에 소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勞動價値說은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으나 唯物論과 辨證法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협회장에게 부탁하여 日本에 있던 어느 식구를 통하여 겨우「모리스 콘포스」의「唯物論과 辨證法」,「史的 唯物論」,「認識論」등을 입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책이 없었으므로 그 정도의 책들을 읽으면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해 12월에 선생님께서 대전에 오셨습니다. 그때 가서 찾아뵙고 反共理論을 구상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빨리 써서 책을 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에게 직접 명령하시지 않음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벌써 나의 마음이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아시고, 直接的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963년 8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執筆하기 시작하여 1964년 3월 20일에 脫稿했습니다. 그리고 3월 20일에 원고를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文獻引用이나 자료의 수집이 대단히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攝理의 時宜에 맞추기 위해서 선생님은 1966년 8월에 柳光烈 文化部長에게 그 출판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후 1년 6개월만인 1968년에「새 共産主義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드디어 출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統一原理가 아무리 위대하여도 지금까지 역사상에 나타난 사상 중에 제일 우수하다고 看做되어온 공산주의의 思想體系를 批判하여 代案까지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상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병원도 운영하고 있는 의사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환자의 진료를 등한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 치중하면 집필의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환자를 되돌려 보내는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더욱 어려웠던 일은 비판이나 대안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하여 전연 방도를 모를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하늘에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直感的으로나 靈感的으로 착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즉시 메모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때 무렵에는 매일 아침 4시 또는 5시에 일어나 성지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는데 기도할 때에 비판이나 대안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기도한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서울까지 가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을 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병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서울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울에 가더라도 항상 바쁘신 선생님을 뵙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간신히 시간을 얻어서 뵈옵고 말씀드리면, 시간을 쪼개서 여러 가지로 또 상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선생님은「기도에는 靈的으로, 질문에는 實體的으로」지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곡절을 거쳐서 원고는 거의 완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최종적으로 완료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提起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本人으로서는 이것이 선생님의 사상을 터로 한 것이 분명하고 또 영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선생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이 분명하지만 第三者가 그것을 인정해 줄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첫째로 식구들이 그것을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비록 식구들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일반 사회의 知性人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선생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언젠가 지방에 오셔서 선생님이 자신을 간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의 요점은 이 원리(原理講論)의 내용은 하나님의 啓示로서 깨달은 人生과 우주의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는 象徵과 比喩에 의한 계시였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아무리 지식으로서는 바른 해석인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내용은 반드시 영계의 여러 敎祖들(예수, 공자, 석가, 마호멧 등)의 공인을 받고 최종에는 하나님의 공인까지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40일간 금식하시면서 영인체로서 영계에 가서 뭇 靈人 (敎祖)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받은 그「啓示의 해석」의 내용을「옳습니다」라고 공인을 받는데 성공했으며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간 후, 루시엘(사탄)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공인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地上에서 통일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후에 이 干證을 상기하고「선생님으부터 배운 眞理도 이것을 應用할 경우에는 第三者의 證據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승공이론도 타인으로부터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즉 먼저 식구들이 인정하고, 다음에는 일반 사회인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外國의 교수들까지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증거를 얻지 못하면, 하늘이 認定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하늘의 사정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冊을 출판하기 이전에 나는 원고를 프린트하여 十數人의 原理講師들에게 보내서 원리로 보아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꼭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두 강사가 이러한 점은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는 화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을 모두 原稿에 수용했습니다. 하여간 식구들이 인정하였다는 조건이 일단 세워진 셈입니다. 비록 선생님이「책을 출판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도 그것은 출판되어서 실지로 세계적으로 읽혀질 것인지 아닌지는 별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원고를 여러 차례 재검토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잘못되어서 하늘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죄를 범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參考書籍도 다시 읽어보면서 그 精髓를 정확하게 파악하였는가를 점검하곤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68년 2월에 승공이론 책이 출판된 것입니다. 그 후 이 승공이론은 통일식구들의 승공운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많은 反共關係의 인사들에 의해서 그 설득력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공이론은 실제로 통일사상의 骨格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그 기분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승공이론이 출판된 후에 이번에는 통일사상을 정리하여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1972년 8월에 일본에서 韓日敎授親善세미나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의 명령으로 나도 참가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세미나에 참가하는 目的뿐이 아니고 일본에 가서 일본 간부들에게 통일사상을 傳한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하였더니 마침 統一思想에 관심이 깊은 4~5명의 멤버가 모여 있었기에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때의 강의는 存在論, 本性論, 認識論, 價値論, 倫理論, 敎育論, 歷史論, 藝術論 등이었습니다(倫理論도 되어 있었으나 그때는 강의하지 않았음). 그러므로 통일사상의 골격은 거의 그때 이미 체계화 되고 있었습니다. 學生時代부터 오랫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니면서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내용이 텅 빈 그릇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통일사상을 전부 담은 것이 통일사상의 體系化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은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李相憲이가 자기의 사상을 선생님의 사상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 않는가하고 이렇게 오해한 식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에 대하여 나는 何等의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상헌의 사상에 불과하다면 하늘은 이것을 使用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정말 선생님의 사상이라면, 반드시 하늘은 이것을 채택하실 것이므로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으며, 가만히 시간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강의를 해보니 식구들은 대단히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크게 鼓舞되어서, 돌아와 선생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일본에서「講義해보았더니 대단히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식구들은 이것을 일본어로 빨리 출판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한국에서 먼저 출판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統一思想硏究院을 창립하라는 명령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73년 3월말에 집필을 완료하고, 同年 6월 1일에「統一思想要綱」第一版을 발간하였습니다. 일본에선 한국어판을 번역하여 그 다음해의 2월에 일본어판의「통일사상요강」이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6) 學界의 公認

1973년부터 大學敎授를 대상으로 통일사상세미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단히 감명되어서「통일사상이 없으면 미래세계는 救援될 수 없다」,「韓國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이것은 꼭 필요하다」는 감상문이 참가자로부터 많이 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교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外國敎授들까지도 받아들여서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내가 아는 외국교수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1974년 일본에 가서 40일간에 걸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회의 식구들에게 통일사상을 강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동경에 돌아오니 어떤 분이 한 老學者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학자는 富土山의 산록에 살면서 仙人으로 알려진「仲小路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개인과 함께 그곳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그는 키도 적은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얼굴은 紅顔이고, 대단히 靈的이라는 느낌이 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철학과 종교를 30년간 연구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새 共産主義批判」과 「統一思想要綱」을 내놓고「이것을 당신이 썼습니까. 대단히 잘되었습니다. 이 내용이 모두 그대로 일본에서 성취됩니다. 또 세계에서도 성취됩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이름하에 반드시 통일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나는 引用文이나 參考書籍도 대단히 불충분해서 학술로서는 빈약합니다」고 했더니 그는「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이 훌륭합니다」라고 하면서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이것은 文선생님의 사상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선생님이 감옥에서 출발하신 초기시대의 상황 등을 간증해 주었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동행인 하나가「李先生은 21일간 禁食하였다」고 알렸더니 「그러면 그 말씀도 꼭 들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는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간증을 끝냈는데도「좀 더 할 말씀이 없습니까」라고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모두 교회식구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함께 마치고 어두워질 때까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분이 선생님의 사상을 증거하는 세례요한격인 인물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가를 부르고 내가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뜻과 연결시키고자하는 기분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日本의 한 學者로부터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다음은 미국에서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證據하는 사람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8년 7월 한국에서 超敎派基督敎協會가 주관하는 국제세미나가 있었을 때에「마제크」라는 神學者가 同세미나에 참가하여, 한 分科의 강연에서 통일사상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통일사상의 훌륭함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강조하면서 신학의 통일이나 사상의 통일은 반드시 統一思想이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통일사상이 이제야 條件的으로나마 세계적으로 공인되기에 이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로 선생님께서 공적으로 승인하시는 여부의 문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979년 11월 4월에 소집되었던 한국간부의 合同會議席上에서「전 세계의 統一食口는 전부 統一原理와 統一思想, 勝共理論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통일사상에 대한 하늘의 공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는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후 명령에 의하여 한국과 일본의 간부 및 일부 서양의 간부들에게 승공이론과 통일사상에 대한 특별강의가 正式으로 개시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명백히 하여 둘 것은 선생님의 勝共理念이나 統一思想 그 자체는 완벽하지만 그 體系化는 반드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장래 훌륭한 學者나 後輩가 나타나서 先生님의 사상을 선생님의 지도아래 보다 더 완전히 體系化하여 주실 것을 절실히 바라마지 않으며 이 사실을 先生님께 이미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以上으로 統一思想의 執筆의 動機와 배경을 모두 끝마칩니다. *

 

 

(註)

入敎 前 1955년 12월 31일 밤, 나는 밤을 새면서 고민하였습니다. 언제까지 나는 기다려야 하는가? 나에게 있어서 人生問題의 해결은 영영 不可能한 것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無意味한 생애를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할 것인가? 이렇게 밤새 괴로워하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두 시간쯤 후에 아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 오래간만에 닭이 알을 일곱 개나 낳았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번쩍 잠을 깨어보니 1956년 1월 1일이 된 것입니다. 밖을 내다보니 간밤에 흐렸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개이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한없이 상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때 마음의 구름까지 활짝 개이고, 幸運이 곧바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금년에 어떤 聖者를 만나서 나의 問題가 풀릴 것 같은」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7數 完成數다. 오늘부터 나에게 새날이 온다」라고 (生命의 實相」에서 7數를 完成數로 보고 있었음), 이때의 감격적인 벅찬 희망을 붓으로 남기기 위하여「직원에게 告함」이라는 글을 써서 소책자를 만들어서 직원에게 배포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1개월쯤 지나서「李先生이 고민하는 인생문제, 철학문제, 종교문제를 상세히 풀어주는 한 指導者가 있으니 꼭 와서 들어보시라」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통일교회의 한 전도자의 편지였습니다. 이것이 機緣이 되어서 결국 나는 同年 5월 21일 統一敎會에 入敎한 것입니다.

 ===
새 공산주의 비판
이상헌 지음 | 성화출판사 | 2017년 05월 01일 출간
총 4 중4 10.0 (리뷰 2개) 클로버 리뷰쓰기
==
쪽수 326쪽
책소개
===
이 책이 속한 분야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사상 > 마르크스주의
이 책의 주제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유물론
====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통일사상에 입각한 대안을 제시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의 원조는 마르크스이고 그것을 보완한 사람은 레닌, 스탈린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주요부분은 그의 경제학과 유물사관이다. 그의 경제학은 그의 노작(勞作)인 자본론(資本論)으로서 장황한 이론이지만 그것의 기초가 되는 것은 가치론(價値論)이다. 따라서 가치론과 유물사관(唯物史觀)은 공산주의 이론의 2대 무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론에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 唯物論)으로서 철저한 무신론이요, 반종교적 사상이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이 세 이론에 관하여 그 요점을 소개하면서 비판을 가하고 통일사상에 입각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머리말 중에서)

저자소개
저자 : 이상헌
이상헌(李相軒 1914.9.5~1997.3.22) 

약력
- 국제승공연합 이사장
- 통일사상연구원 원장
- 세계일보 사장
- 선문대학교 석좌교수

주요 저서
- 새 공산주의 비판
- 통일사상 요강
- 김일성 주체사상 비판
- 공산주의의 종언(일어판)
- Communism : A New Critique and Counterproposal
- Unification Thought
- Explaining Unification Thought
- The End of Communism 닫기

목차
머리말

제1장 마르크스시대의 환경과 마르크스주의의 성립
제1절 마르크스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제2절 마르크스의 인간성
제3절 마르크스주의의 성립

제2장 마르크스의 가치론 및 그 비판과 대안
제1절 마르크스의 가치론의 수립 동기
제2절 노동가치설 비판
제3절 잉여가치론 비판
제4절 자본주의 붕괴론 비판

제3장 변증법적 유물론 및 그 비판과 대안
제1절 공산주의 유물론
제2절 공산주의 유물론의 비판과 대안
제3절 변증법

제4장 유물사관 및 그 비판과 대안
제1절 사회발전의 합법칙성
제2절 생산관계
제3절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관계
제4절 생산력의 발전
제5절 국가와 혁명
제6절 사회발전과 생산관계의 여러 형태
제7절 통일사관 개요
제8절 유물사관의 비판과 통일사관에 의한 대안

결 론
====
Klover 리뷰 (2)
 10.0 /10
좋아요잘읽혀요정독해요기발해요유용해요기타
===
dd**9dan 2020-08-22 00:46:07 총 4 중4 구매 좋아요
공산주의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조금 어렵다.
===
nj**35 2018-06-27 18:04:11 총 4 중4 구매 유용해요
공산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해주고 있다

통일사상 - 서문 (序文)

통일사상 - 서문 (序文)

통일사상 - 서문 (序文)
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by 갓골 2010. 1. 6. 

서문 (序文)

지난 2, 3년간은 세계가 일찍이 없었던 대격변을 경험한 기간이었다. 세계적화를 표방하면서 20세기의 세계를 뒤흔들던 소련 제국이,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소련의 사멸이라고 하는 충격적인 사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을 인수한 러시아 공화국 옐친대통령은, 1992년 6월 미국을 방문한 후 상하양원에서 가진 합동연설회에서 `공산주의는 사멸했다'고 선언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 해방된 구 소련은 아직껏 가야 할 방향을 상실한 채 혼란과 경제적 파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국가에 있어서는, 경제의 개혁과 개방을 목표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제도와 공산당독재를 견지한다고 하는 모순을 지닌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 세계의 기수인 미국은 걸프전쟁의 승리의 영광은 잠시였을 뿐, 방대한 적자경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급속히 그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땅에 떨어지고, 민주주의 세계에는 강력한 리더가 없어진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는 민족과 종교의 대립에 의한 분쟁, 경제마찰 등이 분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혼란을 틈타고 각종 형태의 복고주의마저 대두하고 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AIDS의 만연, 소말리아 등 후진국에 있어서의 빈곤과 기아가 심화되고 있어서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와 같은 혼란과 불안속에서 세계는 지금 인류를 이끌 새로운 이념과 지도력을 절실히 요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문선명(文鮮明)선생님 내외분이 추진하시는 통일운동 및 여성해방운동이 유일한 희망의 빛으로서 인류 앞에 찬연히 빛나기 시작하였다.



통일사상(統一思想)은 문선생님의 사상으로서 통일운동 및 여성해방운동의 이념인 바, 하나님주의 또는 두익사상이라고도 불리운다. 하나님주의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라는 뜻이며, 두익사상(頭翼思想)이란 우익도 아니요, 좌익도 아니며, 더 높은 차원에서 양자를 포용하는 사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애타정신으로써,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부터는 증오심, 투쟁심 및 물질주의를 제거하고, 우익사상인 민주주의로부터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해서 대립하는 양자를 화해시키고, 공동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숙원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양자를 이끌기 위한 사상이 바로 하나님주의이며, 두익사상이며 통일사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통일사상은 인류의 부모요, 모든 종교를 설립한 최고의 중심인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의하여, 대립하는 여러 민족과 여러 종교를 화해시켜서 인류 대가족이념을 실현함과 아울러, 인류의 모든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참사랑에 의한 이상세계를 창건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상이다. 따라서 어떠한 난문제라 하더라도 통일사상(하나님主義)을 적용한다면 쉽게 또 근본적으로 풀리게 된다.



필자는 오늘날까지 제자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문선명선생으로부터 배운 사상(통일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선생님의 제시와 지도하에 진행해 왔다. 일찍이 수많은 인생문제를 지닌 채 인생의 항로에서 번민해 온 필자는 1956년 입교 후 문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사상) 속에서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놀랍고도 엄청난 진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때 나에게 비쳐진 선생님의 모습은 진리의 보고요, 사상의 용천이셨다. 한번 말씀이 시작되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사상의 샘물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가르치시는 진리의 사상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때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만큼 그 말씀 모두가 나에게는 진실로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그 귀중한 사상도 이것을 듣는 데서만 끝나버린다면, 마치 꿰지 않은 구슬이 분실되기 쉽듯이 귀중한 말씀 한마디 한마디도, 그 보배로운 사상의 한 토막 한 토막도, 그 일부가 기억의 세계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생문제를 고민한 필자가 이 진리의 사상에 의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진리와 사상의 구슬들을 꿰어서 지난날의 필자와 같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슬(진리)의 사슬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중한 보배를 꿰는 심경으로 가르쳐 주신 많은 사상을 홀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72년 여름, 문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일본에서의 한?일교수친선학술대회에 참가하는 기회에 일본 통일교회의 지성적인 간부들에게 그동안 정리한 것을 강의했던 바 의외의 좋은 반응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국 즉시 보고를 드리자 그동안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라고 명령을 내리심과 동시에 5~7개의 분과로 구성되는 통일사상연구원을 만들어서, 말씀을 계속 정리하면서 사상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사상을 다시 재정리하여서 1973년에 친필에 의한 통일사상요강의 표제하에 통일사상연구원의 이름으로 그 제1판을 출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모두가 필자가 초창기때부터 선생님의 사상을 선생님의 지도하에 정리한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이 필자의 명의가 아닌 통일사상연구원의 이름으로 출판한 것은 본서의 내용이 전부 선생님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선생님의 통일원리를 선생님의 지도하에 집필한 유효원(劉孝元) 전협회장이 자신의 명의로 내지 않고 교회(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명의로 출판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첫째로 이 책속에 정리된 체계화 그 자체가 통일사상이 아니라 선생님의 사상 자체가 통일사상이며, 체계화는 선생님의 사상의 기술형식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이때까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상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많았으면서도, 능력의 한계 때문에 필자로서는 표현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던 것이며, 그 때문에 출판된 내용들 중에는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통일사상은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문선명 선생님의 이론체계이기 때문에 사상에 관심있는 학자들이 반드시 읽어 볼 필요가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몇 사람의 외국인 학자들에게 영역한 책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저자(著者)의 이름이 없는 책이란 독자에 대해서 실례일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표에 있어서 때 때로 일기 쉬운 논쟁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님께 선생님의 사상을 학자의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학자들이 읽어 줄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틀린 표현이나 문장에 대한 책임(文責)을 져야할 당사자로서 부득이 임시로 필자의 명의로써 출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그 후 일본어판(統一思想解說과 統一思想槪要)과 영어판(Explaining Unification Thought와 Fundamentals of Unification Thought)은 모두 필자의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전연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서언속에 이 책의 내용은 모두 문선명 선생님의 사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소개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책의 내용이 필자의 사상인 것처럼 오해하는 학자들이 적잖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필자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 후 최근에 이르러 선생님의 사상을 전공한 제자들이 여럿이 탄생되었다. 즉 선생님의 사상을 계승한 통일주의 학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서 통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게까지 되었으며, 또 통일사상에 관한 논쟁도 이 학자들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게까지 에 이르렀다. 즉 책 출판에 있어서 문책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필자의 이름을 표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자를 선생님으로 한다는 것도 적당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독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책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본서의 내용은 하늘의 사상인, 선생님의 심오한 사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또 그 일부나마라도 하늘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대필되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상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는 한 사상부문을 체계화할 때 그 부문에 관한 종래의 학자들의 사상을 비교 검토하여 그들의 사상보다도 통일사상이 우수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인 바, 이 작업 또한 완벽하게 되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리강론을 쓰신 유효원 전협회장이, 그 내용이 모두 문선생님의 통일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명의로 발행할 수 없었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원리강론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처럼 통일사상을 서술한 본서(통일사상요강)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서 초판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사상연구원(統一思想硏究院)의 이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단 이번에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서명밑에 부제(頭翼思想)를 붙이기로 하였다. 통일사상요강의 초판이 나온 후, 선생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더 깊은 진리를 알려 주시곤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것을 정리하여 사상의 체계속에 삽입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 발간된 신판은 초판에 비하면 그 내용이 크게 증대되었다.



통일사상은 모든 사상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그 사상의 전개 순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에 따라서 배열되었다. 즉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론으로서 맨 처음 원상론(원상론)을 다루었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인간보다 만물이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에 관한 이론으로서 존재론(存在論)을 다루었다. 만물 다음에는 인간이 창조되었다. 따라서 제3의 부문은 본연의 인간에 관한 이론인 본성론(本性論)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짐승과 새들을 아담에게 데리고 가셨다(창2:19~20). 아담은 이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인간이 그 때 만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인식하고 사고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4, 제5번째에 다루어지는 부문은 인식론(認識論)과 논리학(論理學)이다. 그리고 아담과 해와는 3대축복을 완성해야 했는데, 그것은 창조이상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이상의 세계는 이러한 인격을 완성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중심의 가치관이 실현된 세계이다. 따라서 제6의 부문은 가치론이 된다.



아담과 해와가 책임분담을 다하여 완성하면 성장기간(成長期間) 중의 그들의 체험을 자녀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자녀들은 가벼운 책임분담으로 성장하여 제1축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교육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7의 부문은 교육론(敎育論)이 된다. 그런데 제1축복은 제2축복, 제3축복과 함께 3대축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육론은 제2 및 제3축복의 교육적 측면도 아울러 다루고 있다.



인간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창조본연의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따라서 8번째는 가정의 규범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윤리論)을 다루게 된다. 다음은 만물주관이다. 인간은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하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를 돌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9번째는 예술론(藝術論)을 다룬다. 그런데 주관이란 자연만물의 주관 뿐만 아니라 실천항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모두 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통일사상은 아직은 정치, 경제 등을 취급하고 있지 않으나 이들의 시대적변천의 측면인 역사는 이것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10번째는 역사론(歷史論)이 된다.



이상의 모든 분야에 일관해서 작용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의 이론이 11번째의 방법론(방법론)이다. 방법론은 그 성격상 원상론의 다음에 삽입되어야 할 것이나, 기존 사상의 방법론과 비교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일 나중에 넣었다. 이상이 통일사상의 11개 부문의 배열의 본래 순서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인식논과 논리학은 종래의 인식론이나 논리학도 다 함께 다루고 있어서 초심자에게는 좀 난해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편의상 이것을 뒤로 돌려서 방법론의 바로 앞에 넣기로 하였다.



다음에 겸해서 한 말씀 하고자 하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본서의 내용은 이때까지 발표된 문선명(文鮮明) 선생의 사상의 주요 부분을 정리한 것뿐이며, 선생님에 의해서 앞으로 더 깊고 더 새로운 진리가 속속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하여 필요하면 선생님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그 새로운 부문은 그때그때 추가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자가 세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필설로 표현키 어려운 박해 속에서 그 일생을 바쳐 오신 문선생님의 사상을, 보다 더 깊게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 여러분께 일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서언(序言)을 마치기로 한다.

참부모님 소개 동영상

참부모님 소개 동영상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참부모님 소개 동영상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천일의 창 

by 갓골 2010. 5. 27. 20:51

본문

 

 

 

관련글

문선명 선생, 그는 누구인가?

문선명 선생, 그는 누구인가?

 

 

 

 

 

[통일교] 천성경 219 원리강론 67 원리 본체론 76 원리원본 41 원리해설 45 통일사상 74

원리원본 - 第一編 總論 - 第一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천성경 219
원리강론 67
원리 본체론 76
원리원본 41
원리해설 45
통일사상 74

동영상 0
가져온 글 0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원리원본 - 第一編 總論 - 第一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by 갓골 2013. 1. 7. 11:36


第 一 編 總論


第一 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태초는 하나이시다. 이 하나가 즉 태초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즉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의 존재야말로 무한소에서 무한대의 존재에 근본이다. 이 하나의 근본이 전체의 근본이요 또 전체의 중심의 근본이요 또 전작용의 외력에 대한 평형의 기본지점이다. 우리가 현과학 시대에 처하는 생활과정에서 수학을 떠나서는 그 기본발전의 궤도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현실사회의 구성의 기초로 수의 단위인 하나를 중심하고 그 중심을 주로삼고 전개시켜 대수의 실체를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무슨 존재의 기본을 세우기 위하여는 하나의 존재의 확정적 존립이 중대한 것이다. 이 존재가 결정되면은 다시금 하나로부터 증수의 중대요소를 가감조합하여서 나가는데 발전이 있는 바이며 발달이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의 근본을 추측하려 할적에 하나되는 단위적 근본이 절대 중요 요구요소이다. 이 요소의 결정은 우리가 중대 중대관계를 시작케하는 외부적 동작을 결정하는 기인이 되는 것이다. 이 근본이 즉 외부의 동작을 자유궤도로 옮겨주는 중심점이다. 이 중심점이 공식의 기본단위며 타사물체에 미처주는 제일존재다. 이 존재가 제이존재까지 도달케하는 결정적 중심점으로 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이존재의 중심요구는 무엇인가

인간 문선명 선생님은 누구이신가 - 박보희 선생 간증

인간 문선명 선생님은 누구이신가 - 박보희 선생 간증


인간 문선명 선생님은 누구이신가 - 박보희 선생 간증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천일의 창

by 갓골 2013. 1. 25. 

인간 문선명 선생은 누구이신가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왜 나는 이 제목 ‘인간 문선명 선생’을 두려워 했을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내 소견으로 다룰 수 없는 엄청난 제목인 까닭이다.

지난 22년을 모시고 따라왔고 최근 10년 동안은 미국에서 이 어른을 모시고 전세계와 미국의 50개 주를 누비면서 모든 말씀과 강연을 통역했으면서도 이 제목을 놓고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몰라 고민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22년을 모시고 따랐다 하지만 사실은 이제야 겨우 문선명 선생을 알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영어에 "Scratch the surfac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깊은 속을 아는 것은 고사하고 겨우 손을 댔을 뿐’이라는 뜻이다.22년간 문선명 선생을 모시고 따르면서 겨우 나는 문선명 선생의 인격에 "Scratch the surface"한 것처럼 그 겉을 만져본 격이라 하겠다.

산이 너무 높거나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산의 높이를 측정하기가 어렵다. 또 측정하는 데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 자는 재는 물건에 상당한 자라야 한다. 예를 들어 태평양의 물속을 재는데 30센티 자를 가지고서는 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마치 문선명 선생을 태평양 바다에서 비교한다면 이를 재보려하는 나는 30센티 자에 불과하다. 도저히 이 일은 불가능한 과업이다.
나는 이 어른을 모시면서 항상 역사에 이런 분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해 마지 않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지 2천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분의 인격을 다 알았다 할 자가 없다고 본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이분을 연구하여 박사학위의 논문을 썼지만, 아무도 그 인격을 다전파한 사람은 없다.

석가모니, 공자, 맹자 나아가 마호멧트도 같은 대열에 속할 것이다.
오늘날 나는 문선명 선생을 논하라면 이 기준에서 비교나할까. 이 어른은 60세 당대에 한국 사람으로서 단군 할아버지 이래 처음으로 세계 역사에 충격을 주었으며 이 어른은 앞으로 백년, 천년, 수천년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서 역사에 남기는 그 충격이 보다 커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분의 사상과 철학과 인생관은 벌써 우리 세계에 사는 오색인종의, 그 언어와 문화의 배경을 막론하고 수백만의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인격적 변화는 앞으로 이 어른께서 이 땅 위에 생존하시는 당대에 수천 수억의 인류에게 영향과 충격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감히 예언할 수 있다. 이런 어른에 대하여 그 생활을 통해 보고 느낀 인격적인 모습을 쓰라고 하니 나로서 감당하기 힘들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번 이분의 60회 회갑을 맞이하여 가까이 모신 어린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몇 마디를 적으라고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고 또 기적이 일어나서 한국에 2일을 더 체류하게 되어 별 수 없이 이를 시도해 보려 하는 것이다.



1. 선생님의 이상은 ‘하나님 해방’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집약해 본다면 ‘하나님 해방’이라고 표현하고 싶다.우리는 해방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런데 그 해방이 하나님의 해방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당황한다.인류의 해방, 어떤 억압에서의 해방, 빈곤에서의 해방, 질병에서의 해방, 식민지에서의 해방, 다 멋있는 해방이라는 말이요, 뜻이 통하지만, 갑자기 하나님의 해방이라는 것을 논하게 될 때는 도대체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어떤 철인도 어떤 종교가도 하나님 해방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으며 책에 쓴 일도 없다. 그런데 문선명 선생께서는 흔히 그의 설교 가운데 설교의 결론으로 하나님의 해방을 부르짖고 나선다. 이것은 새로운 말이며 새로운 사상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으로부터 해방하자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문선명 선생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을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하자! 그 자식들이 마치 병석에 신음하는 부모를 병고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하나님을 해방하려고 몸부림 치며 사시는 분이 문선명 선생이시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논의해 본 적이 없다. 2천년의기독교 역사도 하나님의 슬픔과 그분의 고통에 대하여 설파하지 못하였다. 하나님 하면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완전무결한 분으로서 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축복을 내리고 계시는 분으로 우리는 늘 알아왔다.우리는 문선명 선생에 대하여 이제까지 인류가 아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아신 분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래서 문선명 선생께서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믿는다는 단어는 실증을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준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엄연한 사실을 놓고는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오늘날까지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어 왔다. 그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엄연한 사실로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선명 선생은 역사 이래 처음으로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선언하고 나선 분이시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을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했다. 문선생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말한 그 예언의 실현이다. 하나님을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보시는 분이 문선명 선생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속속들이 알고 하나님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알고, 하나님의 심정 속에 뛰어들어서 알고 보니 그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계시는 기쁨과 존귀와 평화의 하나님이 아님을 아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창세 후 오늘날까지 이루 형용하기 어렵고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사정 속에서 신음하시며 고통을 겪으면서 애통해 하고 계시는 하나님인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발견이며, 최초의 발견이다. 하나님을 알고 보니 그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영광의 하나님도 아니셨다. 마치 자식을 잃고 그 죽은 자식을 얼싸안고 우시는 그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하나님을 문선명 선생은 발견한 것이다.
부모되신 하나님께서 자식된 인간들이 서로 투쟁하여 상극하고 있는 실상을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은 비참한 하나님임에 틀림없다. 고통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역사는 애통해 하는 역사였다. 영어에 "heart broken God"이라는 말이 있다. ‘심장이 깨어진 하나님’그 하나님을 그 아무도 초상화로 묘사해 보지 못했다. 역사에 처음으로 문선명 선생이 아셔서 그 하나님의 참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보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초상화를 온 세계에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한다는 운동을 제창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선명 선생의 하나님 해방 운동인 것이다. 그 운동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통일교회의 운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해방하자고 하시는가?

타락한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가지고 완성의 영역으로 이끌어가는 길만이 하나님을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해방하는 길이다. 이 운동이 바로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이요, 통일교회의 운동인 것이다.하나님을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해방해 드린다는 말은 결국 이 땅 위에 본연의 지상천국 이념을 실현해 드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 보실 때 환희와 기쁨으로서 너털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세계로 되돌려 놓자는 것이다. 이 운동은 바로 문선명 선생의 사상을 집약한 내용이며,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해방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이렇게 역사상 처음으로 본연의 하나님을 철저히 아시는 분이 나타났기 때문이요, 그렇게 철저히 아시는 터 위에서만이 이와 같은 주의와 운동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사랑에 미치신 분


‘하나님을 위해 철저히 미치신 분’이라고 하면 표현이 점잖치 못한 것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이상 더 정확한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나는 굳이 이 말을 쓴다. 성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일 큰 계명 가운데 ‘너희는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계명이 있다. 뜻과 성품과 마음을 다한다는 말을 영어로 하면 "All your mind,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마음과 심정과 영혼을 다하여 너희 주 하나님을 사랑해라이다. 그러면 이 말을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데 적용해 보자.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뜻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했다면, 또 영어에서의 표현처럼 마음과 심정과 영혼을 다하여 사랑했다면 그는 그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을까! 또 요즘 흔히 한 여성이 한 남성을 그렇게 사랑했다면 흔히 우리가 할 수 있는 표현은 그 여성은 그 남성을 위해서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에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수준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미치신 분이다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고 피땀 흘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온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고 보니 그 하나님 아버지가 슬픔의 아버지요 고통의 노예가 된 하나님인 것을 안 까닭에 그 하나님의 슬픔을 역사에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분은 하나님의 해원이란 말을 즐겨 쓰신다. 아마도 이 역사상에 그 누구도 그 하나님을 위해서 문선명 선생 이상 눈물을 흘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일화를 듣는다. 통일교회의 초창기에 있어서 우리 선생님께서는 그 많은 시간을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기도생활로 하루를 보내셨다. 한번 무릎을 끊고 앉으시면 열시간도, 14시간도, 때로는 17시간도 진실로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 하나님의 울음을 울어줄 분이 또 있을까? 그는 너무도 엎드려 기도하는 까닭에 무릎과 팔굽에는 굳은 살이 박히었다.

기도가 시작되면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다. 식음을 잊으시고 잠자는 것도 잊으신다. 이것은 문선명 선생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선생님의 생활원칙인 것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통역관을 통해 설교하심에도 불구하고 아침6시에 설교 말씀이 시작되었는데 오후 다섯시에 끝났으니 장장 11시간동안 설교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설교를 끝내고 나서 ‘이제 점심때쯤 됐나’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어른은 사람들에게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위해서 미쳐서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 돈, 이성, 명예, 학문보다 하나님을 위해 미쳐보라고 말하신다. 또 2년 전에 이 어른은 일년 간 표어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미치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위해 미치는 그 인생은 거룩한 인생이요 보람있는 인생이다. 그렇게 쏟은 피와 땀의 가치는 영원히 지워질 수없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몸소 실천하시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앞서 실행하시는 분이 선생님이시다.
한때 미국의 어떤 고위 정치인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었다. 물론 준비없이 대화로부터 시작된 이 자리에서 감동받은 이 미국의 정치인은 마지막 결론으로 하는 말이 ‘레버런 문은 하나님에게 미치신 분 이구요. 어디를 찔러도 하나님의 말씀만 나옵니다.‘고 평했다. 그 말은 참 재미있는 말이다. 선생님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철두철미 미치신 분을 나는 보았다.


3.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신분


세상 모든 일을 책임지려고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선명 선생은 철두철미 그 생활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산다는 책임감에 넘친다. 하나님은 무형이시다. 그 무형의 하나님에게 유형의 몸을 제공하신다고 생각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은 하나님의 군과 귀 그리고 입을 대신한 것이요, 선생의 몸은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다고 생각한다.
문선명 선생은 종교지도자라고 해서 오직 종교에만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세상 만사에 관심을 쏟으신다. 그 일이 경제의 일이건 정치의 일이건 산업의 일이건 문화의 일이건 관계치 않는다. 선생은 완전히 자연인이시다. 선생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신다. 어디서 지진이 일어나면 그것을 염려하며 밤을 세우신다. 어디서 기근이 있다 하면 그것을 염려하며 밤을 세우신다. 어디서 기근이 있다 하면 그것을 염려하여 기도하신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다보시려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들의 만사에 관심을 갖는 분이시다. 부모가 집안의 모든 일을 관여하시듯 세상 모든 일을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의 아버지요. 그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그 하나님과 같이 우리도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책음을 져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선생은 철두철미 이 세상은 내가 아니면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신념에 차 있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자나깨나 세상의 되어지는 일에 고통을 느끼실 뿐 아니라 책임과 아픔을 느끼신다. 미국에 가서는 미국을 책임지려 하신다. 이것은 세계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는 온 세계에 되어지는 일에 책임을 지려 하신다. 오늘날 민주세계가 공산주의의 침범을 받아 불난집과 같이 되어지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공산주의 문제라고 설파하신다. 공사주의가 세계 제패를 완성한다면 그것은 곧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땅위에 공산주의를 어떻게 몰아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는 하나님이실 것이다. 또 그 하나님을 참말로 아는 사람일진대는 하나님께서 공산주의에 대해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신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그의 어깨로 세계 공산주의 문제를 책임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공산주의는 문선명선생과 더불어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선명 선생은 승공이념을 이 땅위에 펴시었다. 이것은 역사에 처음으로 공산주의의 거짓됨과 그릇됨을 폭로하는 것이요, 공산주의가 궁극에 있어서 인류의 적일 뿐 남 아니라, 하나님의 적인 것을 폭로하는 주의이다. 이제 이 승공이념 앞에 공산주의는 역사에 처음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다. 오직 공산주의를 이기는 참다운 길은 진리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온 세계에 들어내는 데서부터 출발된다. 하나님이 안계신다 하는 주의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주의가 이길 때에 분명히 망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고 있다. 그들이 지금까지 60년동안 공세를 거듭하여 세계의 3분의 1을 집어 삼켰다. 그러나 한국이 낳으신 문선명 선생이 주창하시는 승공이념은 비로소 공산주의를 수세로 몰고 간다. 나는 단언한다. 이제 우리 조국 한국에 세계 공산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무기가 탄생할 것이다. 그것이 문선명 선생 자신이요, 그것이 문성명 선생의 사상인 것이다. 이 사상으로 무장하면 한 국가는 물론이요, 나아가서는 자유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는 데까지 전진해야 할 것이다. 공산세계까지도 마지막에는 해방시켜줘야 할 책임을 느끼시는 분이 문선명 선생이시다. 공산주의의 심볼이 되는 모스크바가 워싱턴 머뉴먼트 다음 대회의 집회목표라고 하는 것은 선생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고 보겠다. 어떻게 보면 선생은 온 세계 공산주의를 없애고 나아가서는 이 땅위에 지상천국을 이룩하는 혁명군을 모집하고 계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바로 그 혁명의 사상이, 이 지상천국을 이루어 드리려는 그 혁명의 사상이 결국은 메시아 사상이라고 하겠다.

나는 선생을 모시고 영국에 간 일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거의 10여년 전이다. 영국에 통일교회 교도들이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선생이 가신다고 하니까 영국의 신도 약 25명이 한 방에 모여 앉아 선생을 환영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느닷없이 질문하시기를 ‘너희들 가운데 자기 혼자 영국의 구원을 책임 지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다. 영국의 구원을 혼자 책임 진다는 엄청난 과제 앞에 그 누구도 손을 번쩍 들어 대답하는 청년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 몇 명의 구세주를 필요로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도 대답을 못하니까 선생님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2쳔년 전에 몇 명의 메시아를 이 땅위에 보내셨지?"하고 물으셨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모두들 대답했다.

다시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이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데 하나님은 한 분의 메시아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이 조그마한 영국을 구원하는데 과연 메시아적 사명을 할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겠느냐? 너희들이 진실로 메시아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메시아의 인격을 본받아서 메시아의 사명을 다하려고 하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명이나 필요하겠느냐‘고 재차 물으시면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면 여기 모인25명도 많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용기를 얻어 모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선생은 웃으시면서 영국에는 25명의 메시아가 있으니 너무 많지 않으냐고 말씀하시었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구원하고 남는다는 결의를 가지고 나가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4. 진실로 소박한 분


놀라울 정도로 ‘문선명 선생은 소박하고 자상하신 분’이시다.
한때 미국에서 야외집회가 있었다. 모처럼 야외에 나가셔서 신도들 앞에 설교하신다고 하니까, 미국의 유명한 ‘people"이라는 잡지사의 사진반과 기자들이 대거 출두해서 선생의 말씀과 그 장면을 기사화했다. 그때 그 기사의 서두에서 선생님께서 입으신 복장을 묘사하기를 영국에서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양복에다 보석으로 장식된 수만불짜리 시계를 차시고, 그 구두는 역시 미국제가 아닌 영국에서 특별 주문한 수백불 짜리 구두이며 하는 식으로 와이셔츠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전체 의복을 황금으로 뒤집어 쓴 것 같이 묘사해서 기사를 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과는 달리 그 날 선생께서 입으신 양복은 한국의 어느 양복점에서 만든 허름한 라사지의 양복이요, 시계는 그분의 아드님으로부터 생신 선물로 받은 40불짜리 시계며, 구두는 미국에서 산 싸구려 40불짜리 신발을 신고 계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밖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선생의 생활은 참 소박하고 간결한 생활을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분을 모셔오면서 한번도 이분께서 음식을 놓고 탓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맛있게 드신다. 또 절대로 호화식이나 식도락을 싫어하신다. 특히 많은 미국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 이유중의 하나가 미국의 대중음식점으로 알려진 소위 ‘맥도날드’라고 하는 햄버거점에 선생님 내외분께서 자주 출입하신다. ‘맥도날드’라고 하는 음식점은 어린아이들이나 서민들이 들어가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연쇄점인데 거기서 파는 햄버거는 대체로 1불 미만이고 조그마한 햄버거는 40∼50센트이다.
선생은 언제든지 자녀들을 거느리고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드시는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한 나머지 기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았다. 미국 50개 주를 누비면서 강연을 하실 때는 항상 강연이 끝나면 수고한 젊은 이들을 데리고 가서 그 간소한 햄버거를 같이 드시며 그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시곤 한다. 선생의 이러한 소박한 생활은 미국 젊은 신도들의 전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생께서 1974년도에 50개 주의 강연을 40일 동안에 누비시면서 순방하실 때는 프리머스라고 하는 허름한 차를 타시고 밤낮없이 여행을 하였는데 그때 내가 모시는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식사를 너무 거칠게 하시는 것이었다. 항상 거리에 차를 세우고 수퍼마켓에 들어가서 빵봉지 하나에다 오이 김치 한 통과 고기 내장으로 만든 스프 한 봉지를 사가지고 그것으로 식사를 때우면서 40일간을 순방하시었다. 그분이 미국에서 입으시는 옷은 기성복집에 가서 바지 하나에 9불, 한 벌을 사도 30∼40불이면 해결되는 그런 옷을 사서 입으신다. 그러면서 이분은 또한 공금에 대하여 그렇게 철저하실 수 가없다. 항상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하늘의 돈을 함부로 한푼이라도 썼다가는 하늘 앞에 도둑이 되는 줄 알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가르치시며 그분 스스로가 먼저 실천하시는 어른이시다. 또 이분은 남을 위해서 돈 많이 쓰기에도 세계 제일의 기록을 세우시는 분이 문선명 선생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 제자들이 항상 감명받는 일화가 있다. 선생께서 이북공산당의 감옥에서 고생하실 때 그곳에서 주는 밥덩이 가지고는 도저히 연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만이 생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선생 께서는 남들이 배고파 죽어가는 그 판에 자기 몫으로 받은 거칠은 보리밥 한 덩어리를, 그것을 다 먹어도 양이 차지 않는데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서 동료들에게 주고 자신은 그 절반을 드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밥을 꺼내 먹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처참한 환경 가운데서도 선생께서는 사랑을 베푸셨고, 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다. 그러한 인생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통일교회 신도들이 물질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5. 무한히 크고 섬세하신 분


선생은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인이라고 하는 그 범주를 벗어난다. 선생은 완전히 세계인이시다. 선생을 만나 말씀을 듣는 자마다 느끼는 것은 이분이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웅대하고도 엄청난 꿈과 사상과 철학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분은 제자들과 같이 앉으면 세계를 논하고 천주를 논한다. 이 지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저 영적인 세계를 철저히 설파하신다.
결국 선생은 이 땅 위에서 모든 악과 죄악을 무찌르는 싸움을 시작하시기 전에 벌써 그 싸움을 영적인 세계에서 싸워 이기신 것이다. 그 세계를 평정해 놓고 그 세계의 통일을 이루고 나서 결국 잔여 병력을 소탕하는 것과 같은 싸움을 지상의 싸움이라고 설파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전략을 논하고 천주의 세계를 설파하시는 그 스케일이 얼마나 큰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느끼게 하시는 것이다. 22년간 따르면서 아무리 들어봐도 새롭고 아무리 통역을 해봐도 항상 새로운 말씀이시다.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예지가 있고, 진리가 있고 기쁨이 있으며 소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주의, 주장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선생은 이와 같은 엄청난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것이 허무맹랑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정확한 실천이 뒷받침된다. 섬세하게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또 이렇게 크신 어른이 어쩌면 그렇게 섬세하시고 작은 일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것에 놀라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선생께서 옷 입는 것을 많이 보아왔지만 단추 하나 흐트러 놓는 때가 없다. 넥타이를 매더라도 언제나 반듯하게 핀을 꽃아 정확하게 매신다. 선생께서 항상 바쁜 일과를 보내시면서도 옷깃 하나 흐트러짐 없는 섬세한 면을 보여주신다.
나는 또 한 가지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께서 1950년대의 한국동란 이전 이북 흥남감옥에서 근3년간을 공산당 밑에서 형을 치르던 세상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절박한 가운데서도 한 올 두 올 주워 모은 실을 가지고 젓가락집을 손으로 짰다고 하는데 얼마나 섬세하게 잘 짜여졌는지 모른다고 하는 말을, 일찍이 선생을 따르던 제자들을 통해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선생께서는 아무리 긴박한 가운데서도 여유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솜씨 또한 놀랍다고 하겠다. 글씨도 잘 쓰실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신다. 미국에서는 젊은 신학생들에게 그물을 짜는 법도 가르치시고 고기 잡는 일도 가르치셨다. 그물 짜는 선생님의 솜씨를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선생님은 여행을 하실 때 난 그 가방 속을 보고 깜짝 놀랐다. . 그 가방 속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어야 할 곳에 딱딱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생님의 평소 생활 모습이 언제나 흐트러져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선생은 자리에 앉으면 언제나 몸을 곧게 가지시고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시다.. 절대로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시다. 이와같이 외형적으로 섬세함을 보여주시는 선생의 일면일면은 그분의 내적인 섬세함을 또한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6. 목표는 최고의 정상에 둔다.


‘무엇이든 최고의 정상을 목표하시는 분’이다. 선생께서 유년시절을 보내신 일화에 대해 그분의 가까운 친척을 통해 들을 때가 많다. 또 선생 자신도 그의 유년시절에 있었던 일화를 가끔 말씀해 주시는 때가 있다. 그런데 그분의 어릴 때나 이제 환갑을 맞으시는 오늘날에 있어서나 항상 그분의 생활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분은 무엇이든지 최고의 정상을 정복하지 않고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이시다 하는 것이다. 이분은 일상 생활에서 역사를 의식하신다.

이분은 일상 생활을 통하여 후대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그 무엇을 항상 생각하신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이 이어받아야 할 전통을 스스로 세우신다. 그 전통은 최선을 다하여 새로운 기록을 깨쳐 가라는 것이다. 한때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생을 살면서 이 세상을 왔다간 사람 중에, 가장 잠을 적게 자고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누구보다도 잠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한 신기록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문선명 선생과 같이 잠을 안자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한 사람은 역사에 없을 것이다. 그분이 12시 이전에 침실로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옛 청파동 초대교회에서 모시는 동안에도 밤을 지새워 한시 두시 세시까지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이 일상 생활이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다섯시가 되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신다. 미국에 가서도 이분은 주무시는 것을 잊으신다. 의자에 앉은 채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날 일로 넘어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생님보다 10세가 아래인 이 필자도 도저히 선생님 앞에서 나는 젊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도저히 선생님의 기록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러하신 선생을 모시는 보좌관으로서, 가장 어려운 점과 소원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로 잠이 모자라 잠을 실컷 자는 것이라 하겠다.

역사에 이분처럼 많은 말씀을 하신 사람이 또 있을까! 또 그 말씀이 철두철미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하나님을 중심한 말씀이고 보니 이것 또한 신기록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선생은 항상 말씀하시기를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요, 형극의 길이지만 감사하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설파하시고 우리보다 더 고통과 슬픔을 참고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그런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이만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불평할 수 있을 것이냐고 반문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찾고 계신다고 설파하시면서 나는 지칠 수 없고 안갈 수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가 가는 길이 보람이 있고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가르치신다.

최근 몇 해 동안은 보스톤 근해 바다에 나가셔서 ‘투나’를 낚으신다. 물론 선생은 직업적인 어부는 아니시다. 그런데 몇 년 간을 거듭하시는 가운데 선생은 이 지방의 유명한 투나잡이의 스승이 되셨다. 선생의 배는 아침 일찍이 출항했다가 밤에 늦게 돌아오시기 때문에 그 배가 돌아오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다. 여름에는 수백 척의 투나잡이 배들이 모여든다. 이 배들은 ‘Sports fishing"에 참여하기 위하여 세계의 보호들이 호화판 배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많이 잡은 사람에게는 상패를 준다. 그런데 문선명 선생께서 이곳에 등장한 이후로는 그 누구도, 30년의 역사를 가진 사람도 선생의 기록을 따르는 자가 없다. 그리고 1979년에 낚으신 것으로서 또 한번 신기록을 세우셨다. 드디어 천파운드가 넘는 투나를 낚으신 것이다. 이제 이 지방에서 문선명 선생의 투나잡이는 신화적인 얘기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께서 가시는 곳에는 반드시 투나가 몰려온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New Hope"라고 하는 선생의 배가 출범을 하면 그 뒤에는 여러 배들이 뒤따라 온다. 선생의 배가 정박하면 그 근처에서 닻을 내리고 고기를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생께서 고기를 낚아서끌기 시작하면 모든 배에서는 어떻게 하시나를 배우기 위해서 쌍안경을 가지고 쳐다본다. 그런데 아무리해봐도 선생의 기록을 따라갈 수 없으니 최근에 와서는 결국 문선명 선생은 바다의 고기까지도 세뇌해서명령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기적은 만드는 것이다. 선생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동시에 철두철미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잊지 않는 분이시다. 그야말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사람의 책임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그 유명한 말을 철두철미 실천하신다.


7. 강인한 투지와 의지의 소유자

“한번 손을 대시면 끝장을 보시는 분”이다. 미국에서는 흔히 선생의 인격을 평하여"Born Fighter"라고 한다. 그 뜻은 투쟁가로서 혁명가로서 태어난 분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보기에도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승리하기 위하여 한 분을 특별히 보내셨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강인한 투지와 의지력의 소유자이시다.
그런데 선생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 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시기 때문에 피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신다.

선생께서 1965년 처음으로 각 나라의 신도들을 순방하시기 위한 비자를 받기 위해 신체검사를 하신 일이 있다. 그때 흉곽 X-Ray를 찍어본 의사는 깜짝 놀라서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언제 늑막염을 앓으신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X-Ray 사진에 나타난 선생의 흉곽에는 옛날에 늑막염을 앓으신 흔적이 지금도 크게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너무도 뜻에 대한 사명에 골몰하시는 동안에 병마가 그 몸을 엄습한 것을 감지할 여유도 없으셨다. 드디어 그 병마는 선생의 강인한 정신력과 철석같은 의지 앞에 굴복을 한 것이었다. 이것이 선생의 생활 모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비록 서투른 통역관을 써서 그 말씀을 가르치신다 하더라도 이와같이 강인한 정신력과 그 의지는 서양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이 약한 사람도 한번 선생의 말씀을 듣게 되면 용기를 얻어 새로운 신념과 각오로서 다짐하고 나서는 것이다. 선생의 말씀에서는 부활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운을 잃고 죽어가던 생명들도 한번 그분 앞에 나와서 한두 시간 말씀을 듣고 나면 완전히 회춘한 새싹 모양 그 생명이 부활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언젠가 신학교에 가셔서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통역관이던 필자가 옆에 없으니까, 내 입이 어디 갔느냐고 고함치며 웃으시는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선생의 입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그이상 영광된 별명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 반문한다. 선생의 입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입이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역하는 선생의 입이 ‘나’라면 이는 사명적인 면에서 영광된 사명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을 통역하지 않는다. 말씀 이전에 숨어 있는 그분의 정신을 통역하는 것이요, 그분의 심정을 통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유능한 유엔총회의 통역관이라도 선생의 통역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선생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은 다만 그분의 말씀 통역에 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적절히 흐르는 하늘에 대한 충성과 효성, 그리고 혁명가적인 투지 "Born Fighter"의 정신, 병마도 불사르고 나가는 강인한 신체에서 흘러나오는 그 정신의 통역은 곧 영적인 통역이요, 인격의 통역이요, 신념의 통역인 것이다. 그래서 말씀에 먼저 감동받는 사람은 바로 통역관인 것이다.


8. 선생은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신다.

마지막으로 결론 맺고 싶은 것은 문선명 선생은 조국 대한민국을 진실로 사랑하시는 애국자라는 것이다. 작년에 한국에 돌아오셔서 한국 지역 사회 개발연구원의 초청에 의해 한국의 저명인사들 앞에서 강연하실 때 그 제목을 ‘조국이여 빛나라!’항상 선생의 심금 속에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잊으시는 날이 없으시다. 그리고 선생은 이 조국을 영원히 세계인들이 선망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시기에 분주하시다. 결국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 사람들의 신앙의 조국으로 만드시려는 것이다. 앞으로 오색인종 세계 1백20개 국의 국민들은 한국을 신앙의 조국으로서 순례할 때가 올 것이다. 불원한 장래에 이 날이 올 것이다. 세계 인류가 한국에서 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쁘게 사랑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우리 조국은 그동안 오랜 역사를 통하여 자랑스러운 역사라기보다는 눈물과 비애와 치욕의 역사를 겪어왔다. 지난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바로 그것이다. 또 오늘날 공산주의에 의하여 1천7백만의 이북동포들이 신음하고 있다. 이같은 한국의 역사는 비애의 역사요 고난의 역사이다. 이 고난과 비애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결심하신 분이 문선명 선생이시다. 이는 우리 조국강토 한반도가 영원히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잊혀지지 아니하며, 영원히 인류 해방사에 기여하는 새 민족으로서 등장하는 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 이 이상 더 애국하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최근에 나는 어떤 신문사 사장을 만나서 대담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최근 한국 개항 백년사를 특집으로 다루기 위해서 한국의 개항 백년사를 연구하다 보니, 그 개항백년의 역사가 치욕의 역사요, 부끄러움의 역사요, 떳떳치 못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마지막 10년 기간에 드디어 통일교회라고 하는 어떤 이념의 단체가 탄생하여 새로운 운동으로서 세계 만민 앞에 한민족의 기개와 한민족의 우수성과 한민족의 박애정신을 높이 외침으로써 세계의 존경과 추앙을 모으게 하였으니 우리 민족 개항 백년사에 있어서 체면이 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께서 하신 그 일은 다만 한국 개항 백년사에 체면을 세우는 정도가 아니다. 단군 할아버지 이래 처음으로 세계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 이념과 한 지도자로 인하여 영원히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역사에 해방국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해방자의 은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위에 계속 되는한 영원할 것이다.
‘조국이여 빛나라!’ 이는 선생의 염원이시다. 그리고 조국을 빛나게 만드는 역사는 우리 당대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영원히 자손 만대에 이어져 나갈 것이다. ‘인간 문선명 선생’ 이분은 대한민국이 산출한 최고의 보물이며, 이분의 이름은 인류 역사의 새 여명이시다. “인간 문선명 선생” 이분은 하나님의 해방자이시다.

* 이글은 박보희 회장께서 수십년간 문선명 선생내외분을 모시고 느끼신 간증의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