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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8

알라딘: 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알라딘: 신의 언어

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은이),이창신 (옮긴이)김영사2009-11-20
원제 : The Language of God: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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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100자평(8)리뷰(7)

 The Language of God: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Paperback) Paperback
[절판] The Language of God (Paperback, Large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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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93년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이끌어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해독한 프랜시스 콜린스의 화제작.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시대에서 이 둘의 세계관을 냉정하고도 정직하게 통합하기 위한 경로를 탐색한다.

이 책은 과학자가 어떻게 초월적 신을 믿는가에서 시작하여, 과학과 종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논리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와 과학의 갈등 속에서 보통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하거나, 양 쪽 모두 부정하거나, 둘을 아예 분리하는 등 딜레마적 상황을 맞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저자는 엄격한 과학자가 되는 것과, 하느님을 믿는 것 사이에 상충되는 요소는 전혀 없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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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 사람들은 왜 마지막 순간에 차선을 바꾸는가

머리말

1장 과학과 신앙의 간극
1. 무신론에서 믿음을 갖기까지
불가지론에서 무신론으로 | 인간이기에 갖는 도덕법 | 과학자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
2. 세계관 전쟁 한가운데
신은 단지 욕구 충족을 위해 만들어진 희망사항이 아닌가? | 종
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그 모든 해악은 어찌하려는가? | 자애로
운 신이 왜 세상의 고통을 내버려둘까? | 이성적인 사람이 어떻
게 기적을 믿을 수 있는가?

2장 인간 존재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
3. 우주의 기원
대폭발, 우주의 시작 | 대폭발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우
주먼지로 만들어진 인간 |‘인류 지향적 원칙’의 경이로움 | 과학
과 믿음 사이의 조화
4. 미생물, 그리고 인간
지구 생명체의 기원을 찾아 | 유기체 간의 유연관계를 보여주는
화석 | 진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 DNA를 향한 경외감
5. 신의 설계도 해독하기
유전질환 연구를 시작하다 | 중대한 프로젝트 앞에서 | 게놈을 처
음 해독했을 때의 희열 | 의학도 진화론을 피할 수 없다 | 결국
인류 진화의 의미는? | 진화, 이론인가 사실인가?

3장 과학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6. 창세기, 갈릴레오, 그리고 다윈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 | 갈릴레오에게 배우는 교훈
7. 첫 번째 선택, 무신론과 불가지론
무신론을 말하다 | 불가지론을 말하다
8. 두 번째 선택, 창조론
절반의 선택 ‘젊은지구창조론’| 신은 위대한 사기꾼인가?
9. 세 번째 선택, 지적설계론
지적설계론이 대체 무엇이기에 | 지적설계론에 대한 과학적 반론
| 지적설계론에 대한 신학적 반론
10. 네 번째 선택, 바이오로고스
‘유신론적 진화’란 무엇인가? |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의 존재는?
11. 진리를 찾는 사람들
신의 존재에 대한 개인적 심증 | 자연 앞에, 그리고 신 앞에 무릎
꿇다 | 종교인을 향한 간곡한 부탁 | 과학자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

부록
생명윤리학, 과학과 의학의 도덕적 실천
의학유전학 | 개인 맞춤형 의학 | 도덕법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윤리 |
포유동물이 최초로 복제되던 날 | 체세포핵치환, 윤리와 이익 사이에
서 | 의학을 넘어서 | 인간 개선 | 결론

저자와의 인터뷰
옮긴이의 말
후주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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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33 아가페, 즉 사심 없는 이타주의는 진화론자에게 가장 큰 과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환원주의자의 이성에는 적잖이 충격적인 사건이다. 개인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영원히 살아남을 목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사랑은 인간을 희생으로 이끌고, 그 희생은 별다른 이익도 없이 개인의 고통이나 부상 ... 더보기
P. 91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의 복잡함이 그것인데, 분별력 있는 관찰자라면 지적인 설계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과학은 이제 이마저도 완전히 뒤집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른 두 가지 주장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과학을 부정하기보다는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생명의 복잡성 뒤에 숨은 정교함은 경외감을 느끼고 신을 믿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다윈이 나타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끌었던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는 곤란하다.  접기
P. 111 과학적이고 영적인 증거를 모두 고민한 많은 사람은 창조적이고 인도적인 신의 손길이 여전히 작용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생명의 본질에 관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환멸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생명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정교한가! DNA의 디지털적인 정확함은 얼마나 명쾌한가! RNA를 단백질로 번역하는 리보솜에서, 유충이 나비로 변하는 탈바꿈과 짝을 유인하는 공작의 기막힌 깃털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모든 요소가 지닌 미적 호소력과 예술적 장엄함은 또 어떠한가!  접기
P. 133 염기서열을 밝히던 나는 태아 헤모글로빈을 생성하는 여러 유전자 중 어느 한 유전자의 바로‘위쪽’지점에서 C 대신 G가 놓인 사실을 발견한 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태아 프로그램이 성인 프로그램으로 바뀌는 까닭은 바로 이 글자 하나의 변이에 있었다. 나는 짜릿하면서도 동시에 몹시 지쳐버렸다. 인간 DNA 암호에서 바뀐 글자 하나를 찾는 데 무려 18개월이 걸리다니!  접기
성경의 신은 동시에 게놈의 신이다. 그 신은 예배당에서도, 실험실에서도 숭배될 수 있다. 신의 창조는 웅장하고 경이로우며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불완전한 우리 인간만이 그러한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직 우리만이 그 싸움을 끝낼 수 있다.-213쪽 - 이로운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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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프랜시스 S. 콜린스 (Francis S. Collins) (지은이) 

세계적 권위를 지닌 유전학자이자 과학자로서, 오랫동안 생명의 암호가 숨겨진 DNA를 연구해왔다. 예일 대학에서 생화학을 연구한 후, 미시간대학에서 의학유전학자로 활동하면서 낭포성섬유증, 신경섬유종증, 헌팅턴 병과 같은 불치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결함을 발견하는데 기여해 왔다. 93년, 세계 6개국 2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대학 시절에는 열렬한 무신론자였으나, 유전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달은 후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부터 종교적 신념의 진정한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접기
최근작 :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믿음 Belief>,<신의 언어> … 총 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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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신 (옮긴이) 

대학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번역을 전공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그동안 《팩트풀니스》 《생각에 관한 생각 프로젝트》 《생각에 관한 생각》 《마인드웨어》 《욕망하는 지도》 《하버드 교양 강의》 《기후대전》 《정의란 무엇인가》 《창조자들》 《목격》 등 4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최근작 : … 총 61종 (모두보기)
Editor Blog현장 MD가 뽑은 올해의 좋은 책 2009 l 2009-12-28
어느덧 시상식의 계절입니다. 연예대상, 가요대상, 연기대상 등 화려한 시상식은 차고 넘치는데, 왜 어디에도 책 관련 시상식은 없는 걸까요? 리영희 선생이 평생공로상을 받고, 카라가 축하 공연을 하는 '도서대상'을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일까요? 아쉬운 마음에 여기, 현장MD로 살았던 2009년의 기억을 남깁니다. 조금 편파적이고, 아이돌 그룹의 축하 공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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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DNA는 신의 설계도이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편견과 선입견에서 비롯되었다!

인류 최초로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해독, 우리 몸의 지도를 완성한
세계적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의 화제작! 게놈 지도의 완성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콜린스 박사의 과학과, 신의 존재, 인간 본성에 관한 재미있고, 놀랍고, 설득력 있는 통찰

93년 세계 최초로 시도된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전히 해독한 프랜시스 콜린스의 화제작!《신의 언어》는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시대, 과학적 세계관과 신앙적 세계관을 냉정하고도 지적으로 정직하게 통합하기 위한 경로를 탐색한다. 그는 진정한 과학자가 어떻게 초월적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믿음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정치한 구성과 논리로 풀어내고 있다. 무신론자에서 신앙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여정에 독자를 이끌고, 현대 과학을 돌아보며 물리, 화학, 생물이 모두 신과 성경에 대한 믿음과 잘 들어맞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주론, 진화론, 인간 게놈이 함께 이야기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엄격한 과학자가 되는 것과, 하느님을 믿는 것 사이에 상충되는 요소는 전혀 없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인류 최초로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해독, 우리 몸의 지도를 완성한
세계적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의 화제작!
생명의 암호가 작동하는 완벽하고 정교한 질서 속에서
“인간을 창조할 때 사용한 신의 언어를 발견했다!”

게놈 지도의 완성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콜린스 박사의 과학과, 신의 존재, 인간 본성에 관한 재미있고, 놀랍고, 설득력 있는 통찰

불가지론자에서 무신론자로, 다시 신의 존재를 믿게 된
세계 최고 유전학자가 본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프랜시스 S. 콜린스는 세계적 권위를 지닌 유전학자이자 과학자로서, 오랫동안 생명의 암호가 숨겨진 DNA를 연구해왔다. 예일대학에서 생화학을 연구한 후, 미시간대학에서 의학유전학자로 활동하면서 낭포성섬유증, 신경섬유종증, 헌팅턴병과 같은 불치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결함을 발견하는 데 기여해왔다. 93년, 세계 6개국 2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10년 만인 2003년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 대학 시절에는 열렬한 무신론자였으나, 유전학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달은 후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뒤부터 종교적 신념의 진정한 힘을 주목하게 되었다. 최첨단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인 동시에 하느님과 성경을 믿는 독실한 신앙인인 그는 신이 우리 인간을 돌보고 인간의 삶에, 드물게는 기적의 형태로 간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콜린스는 모든 생명체가 공통된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증거를 직접 발견하기도 했지만, 많은 다윈주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유물론적, 무신론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이 책은 신을 믿으면서 과학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딜레마를 해결할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는다. 신에 대한 믿음과 과학에 대한 믿음은 얼마든지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하나의 세계관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가 믿는 신은 기도를 들을 수 있는 신이며 우리 영혼을 보살피는 신이다. 그가 발전시킨 생물학은 그런 신과 얼마든지 조화가 가능하다. 콜린스가 보기에 과학은 성경과 대립하지 않는다. 대립은커녕 성경의 토대가 된다.
저자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의 견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생명의 암호를 밝히는 유전자를 매진해 왔으며, 이성과 믿음을 한데 섞은 이 역작을 내놓았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세세히 소개한 《신의 언어》는 신을 옹호하는 이야기이며 과학을 옹호하는 이야기다. 그는 무신론에서 젊은지구창조론에 이르기까지, 불가지론과 지적설계론을 포함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본다. 그는 신앙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과, 과학의 진실을 터무니없이 거부하는 종교인의 주장들을 반박한다. 그는 진정한 과학자가 어떻게 초월적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믿음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정치한 구성과 논리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무신론자에서 신앙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여정에 독자를 이끌고, 현대 과학을 돌아보며 물리, 화학, 생물이 모두 신과 성경에 대한 믿음과 잘 들어맞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신이 없다는 과학의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서로의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또는 이해할 마음조차 없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신앙에 회의를 품는 비종교인들에게 잘못된 ‘사람’을 보지 말고 참된 ‘하느님’을 보라고 말한다. 그는 종교로 인해 저질러진 해악을 설명하는 데 물이 담긴 녹슨 그릇의 비유를 든다. 또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과학에 거부감을 느끼는 종교인들에게는 과학을 하느님에 대한 ‘도전’으로 보지 말고 하느님의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예일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때만 해도 과학자라면 무신론자여야 한다고 믿었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하면서,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보게 될수록 자연의 법칙은 과학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 비밀이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을 동원해도 풀리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과학적 법칙에 따라 극도로 정교하고 완벽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를 설명하려면 ‘자연스럽다’거나 ‘우연’이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과학자들이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경우도 대개 이 때문이며 반대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에 더욱 신을 믿지 않기도 한다.
저자는 과학계에서 이제까지 발견한, 그리고 유전자 연구를 통해 직접 알아낸 사실들을 열거하며, 독자들에게 과학과 신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볼 것을 권한다. 가령 인간은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우주의 대폭발을 알아냈지만, 그것에 얽힌 신비를 풀다보면 단순히 ‘거듭된 우연’으로만 해석하기에는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지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도 우주의 대폭발에서 ‘종교적 암시’를 읽었고 ‘초자연적 존재’를 상상했다. 생명체의 미세한 유전자를 연구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구성하는 31억 개의 글자 중 한 글자의 위치가 바뀌거나, 한 글자만 틀려도, 치명적인 불치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병에 걸리지 않는 정상인의 유전자 지도가 얼마나 완벽하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체계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는 “하느님이 생명을 창조할 때 사용한 DNA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며,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으로 설명되는 다윈의 진화론은 신의 놀라운 설계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법’이다. 저자에게 도덕법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케 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오스카 쉰들러와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도덕법을 삶속에서 실천한 인물들로 그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이타적 사랑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것은 진화론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지구상의 생물 중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이 과연 가능할까?

이 책은 “현대 과학에 대한 이해가 신에 대한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은 저자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은 후 10년간 수많은 갈등을 극복하고,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과정이기도 하다. 과학 선진국인 미국에서, 전 국민의 3분의 2가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하거나 판단을 유보했다. 저자는 모든 생명과학의 토대가 되는 진화론을 하느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일부 종교인들의 태도는 제 무덤을 파는 몰상식한 행태라고 지적한다. 또한 창조론, 지적설계론도 어설픈 근거로 유신론을 옹호하는 바람에 무신론자들의 비판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과학을 부정하든 과학을 적극 이용하든, 이들 모두가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과학과 종교 간의 불필요한 불화를 조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랜 시간의 통찰과 경험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다음 여섯 가지의 전제를 제시한다.
1. 우주는 약 140억 년 전에 무에서 창조되었다.
2. 확률적으로 대단히 희박해보이지만,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적합하게 짜여졌다.
3. 지구상에 처음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생명이 탄생한 뒤로는 대단히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와 자연선택으로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생겨났다.
4. 일단 진화가 시작되고부터는 특별한 초자연적 존재가 개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5. 인간도 이 과정의 일부이며, 유인원과 조상을 공유한다.
6. 그러나 진화론적 설명을 뛰어넘어 정신적 본성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도덕법(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고 역사를 통틀어 모든 인간 사회에서 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그 예가 된다.

이 여섯 가지 전제를 인정한다면, 얼마든지 있을 법하고 지적으로 만족스러우며 논리적으로 일관된 통합체가 탄생한다. 이런 견해는 과학이 자연계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모든 사실과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또 세계의 주요 일신교들과도 양립 가능하다. 물론 유신론적 진화라는 관점 역시 다른 어떤 논리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신을 믿으려면 항상 신앙이라는 도약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종합적 견해는 신앙을 가진 수많은 과학자에게 만족스럽고 일관되고 영양가 있는 관점을 제공하며, 이로써 과학적 세계관과 영적 세계관이 우리 안에서 즐겁게 공존한다. 이 관점은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을 지적으로 충만하고 정신적으로 생기 있게 만들며, 신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신의 창조물이 지닌 놀라운 신비를 벗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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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정말 잘 쓴 책이다. 저명한 과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그가 왜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 그러면서 영적 세계에 끌리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_데즈먼드 투투 주교

“명쾌한 과학적 설명과 개인적 사색이 어우러진 콜린스의 이야기에는 지적, 영적 솔직함이 녹아있다. 종교적 신념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과 화해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 현대 과학이 종교적 신념의 심장부를 강타한다고 걱정하는 사람,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룬 수준 높은 토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한번 읽기 바란다.” _윌리엄 D. 필립스, 199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문화 전쟁으로 얼룩진 오늘날의 세계에서 과학자가 신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기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하물며 그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과학과 영성을 결합한 명쾌하고 호소력 있는 증언은 과거 전례가 없다. 『신의 언어』는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책꽂이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할 책이다.
_로버트 H. 슐러 박사, 크리스탈교회 설립 목사

“지난 10여 년간 나는 성실한 가족 구성원이자 사람들을 사로잡는 재치를 지닌 재능 있는 음악가 프랜시스를 존경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 책이 주장하는, 지적 진실을 담고 있고 영적 세계에 기반을 둔 신과 과학의 화해는 우리가 고민하는 심오한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깨우친 바가 크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서가 분명하다.” _나오미 주드, 가수

『신의 언어』는 세계적인 과학자의 호소력 있는 신앙고백이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독자들에게 믿음과 이성을 아우르는 지식의 통합을 요구한다. 그가 증명해 보이듯 믿음은 과학적 이성의 적이 아니라 완벽한 보완물이다. 인간게놈프로젝트 총감독인 그가 들려주는 호소력 있는 개인적인 증언은 어떤 이에게는 놀라움을, 어떤 이에게는 기쁨을 줄 것이다.
_케네스 밀러, 브라운대학 교수,『다윈의 신을 찾아서』의 저자

시기적절하고 예리하다. 콜린스는 진화론을 이해하면 믿음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우주가 더없이 독창적이고 오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_폴 데이비스제,『5의 기적 : 생명의 기원』의 저자

호전적 무신론에서 창조자를 향한 절대적 믿음을 지닌 영적 세계관으로 옮겨가기까지 자신의 감동적인 여정을 공개한 탁월한 책이다. 내면에서 과학과 신앙이 어떻게 화해하게 되었는가를 더없이 간결하고도 명료한 언어로 설명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다. _아맨드 니콜라이,『루이스 VS 프로이트』의 저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세상에는 변증론의 여지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신이 단지 존재할 뿐 아니라 활발히 활동한다는 세계관의 과학적 정당성을 대단히 읽기 쉬운 글로 설명한다.
_토니 캄폴로, 이스턴대학 교수,『내 마음을 고백하며』의 저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신과 과학의 공존 가능성을 아주 특별한 개인적 증언으로 이야기한다. DNA가 신의 설계도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개인적 믿음은 가슴에 와 닿는다.
_뉴트 깅그리치, 정치인

세계 최고의 유전학자가 과학에 대한 열정과 개인적 신앙 이야기를 풀어놓은 뛰어난 책이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슴에 와 닿을 이야기다.
_알리스터 맥그래스,『도킨스의 신』의 저자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과학과 신앙의 대립이 가져오는 혼란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신앙과 과학이 서로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 손에 쥐어진 연필’인 그는 대립의 전장에서 이해와 화해를 써내려간다. _더글러스 코, 종교지도자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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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분포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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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가 진화는 사실임을 알려줬다면 콜린스는 진화론이 무신론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나와 신학에선 입장차가 있는듯하나 매우 훌륭한 저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할 수 없는건 슬프다.  구매
황회장 2013-01-04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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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에서 유신론적 진화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한 유전학자의 담담하고 진솔한 신앙고백  구매
ferrone 2019-09-0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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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적 진화론자인 저자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하면서 책을 읽을 수있었다.  구매
거북이 2015-06-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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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시각 그리고 신앙의 풍부함  구매
aratumdei 2017-02-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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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정서적 공감이 아닌 인지적 공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책임  구매
ㅅ 2011-01-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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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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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과 젊은지구창조론자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신의 언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 성경 등과 같은 종교 경전일 것이다. 혹은 경전이 아니더라도 방언등과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책 제목만 보면 이게 종교관련 책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랜시스 S 콜린스의 <신의 언어>는 이런 종류의 것과는 다르다. 그가 말하는 신의 언어는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 우리의 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의 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바로 유전자와 게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과학적으로 엄청난 일을 해냈으니, 바로 인간 게놈을 밝혀낸 일이다. 인간의 몸을 설계하고 있는 인간의 설계도를 밝혀냈다는 것 만큼 대단한 일이 또 있을까? 그리고 이런 게놈프로젝트를 전두지휘한 인물인 콜린스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보통 과학자와 종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리차드 도킨스이다.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종교는 바이러스라고 주장하는 인물인 이 양반은, 어찌보면 현대인들의 머리속에 고정관념으로 박혀있는 사실, 과학=무신론을 제일 잘 대변해 주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콜린스는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철저한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무려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돌아서는 꽤 보기드문 경우를 가진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근 27년간을 무신론자로 살다가 유신론자로 개종한 경우인데, 그 이유도 지금까지 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신론자로 있는 것이 과학자로서 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찾아보니 신은 존재하더라~~ 라는, 실로 과학자스러운 방법으로 종교인이 된 경우이다.

여기서 잠깐 다시 보통 사람의 고정관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과학자이면서 종교인, 그것도 기독교인이라면 젊은지구 창조론자가 아닐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매일 보는 기독교 과학자라고는 어디서 허튼 수작을 하고 다니는 양반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 콜린스의 입장과는 틀리다. 그가 창조론자라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창조론자, 즉 유신론적 창조론을 믿고 있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 광활한 정보가 넘쳐난다는 인터넷에서 지금까지 만나본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는 딱 2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외의 사람들은 철저한 무신론적 진화론자이거나, 혹은 철저한 젊은지구창조설자이거나 둘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뛰어난 과학자가 스스로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 책을 쓰다니...


책의 내용은 자신의 자서전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니면 기존의 과학서적에 종교적인 관점의 성찰이라고 해야할까... 여기서 밝히는 과학적 내용은, 자신의 게놈프로젝트가 어찌어찌 시작되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유전자란 뭐고 dna란 무엇이라는 등의, 어찌보면 많이 볼수 있었던 내용이다.(내가 이렇게 간단하게 쓰는 이유는 그 부분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런거는 결코 아니다... 정말로.) 하지만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른 점이라면, 우선 무신론=과학이라는 공식을 타파하면서 동시에 창조론자들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하는지 종교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지적설계론을 창조론과 별개로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인상적인 부분이다(물론 지적설계론이 왜 과학과는 거리가 먼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만약 자신도 종교인인데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관련 과학자들만 보기에 괴롭다면, 콜린스의 저서 <신의 언어>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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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스 2010-04-11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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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를 읽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어?"

"하나님이 만드셨지~"

"에이, 그건 교회에서 하는 소리고, 실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어?"

"......"

  몇년 전,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그 아빠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진화론을 배우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은 과학과 거리가 먼 옛날 이야기 취급을 받습니다. 화가 나는 일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아니라고 소리높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학적 증거라는 것을 들고나오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이대봐야 웃음거리만 되지요. 

  어느날, 창조과학회라는 곳이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인 과학자들이 모여서 성경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완벽하게 맞다고 주장하면서 지구의 역사는 6000년 정도이고, 방사선 동위원소니 하는 것도 오류투성이이며, 진화를 입증할 수 있는 화석의 연결고리는 없다고 주장했지요. 책을 쓰고 교회를 다니며 강연을 하고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단체로 관람을 가고 (특히 학생들을 보냈지요.) 설교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창조과학회에서 한 이야기를 인용해서 성경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면서 목소리를 높이셨지요.

  그런데, 솔직히 저는 창조과학회의 주장들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더 많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주장이 명확하고 과학적 증거가 확실한데 왜 아직도 진화론이 대세인 것일까요? 정말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난 것일까요?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모두 창조과학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구과학자나 생물학자 중에는 크리스천이 없다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확실히 믿지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창조를 믿으면서도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말하는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는 길이가 다르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진화를 이용하셔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의견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의견을 펼치는 책입니다.

  2003년, 10여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프로젝트를 맡아서 지휘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프랜시스 S. 콜린스박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크리스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진화를 거의 다 인정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창조과학회의 의견만 옳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보시기에는 가짜 크리스쳔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과 신앙의 가깝고도 먼 관계를 따라가면서 현재 나타나 있는 의견들을 요약하고 반박합니다. 간단하게 분류해보자면 - 1. 무신론  2. 창조론  3. 지적설계론  4. 바이오로고스(유신론적 진화론) 입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바로 무신론으로 연결될 수는 없으며 따지고 보면 무신론이 가장 불합리한 주장이라고 외치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거들을 너무 무시한다고 공박합니다. 지적설계론에 대해서는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지요. 저자는 결국 유신론적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인데요, (용어 자체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유신론이면서 진화론을 인정한다구요!)  저자가 지지하는, 지구 및 생물 탄생에 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우주는 약 140억년 전 무에서 창조되었다.

 2.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3. 지구에 처음 생명이 나타난 메카니즘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생명이 탄생한 후에는 대단히 오랜 세월을 걸쳐 진화와 자연선택으로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생겨났다.

 4. 일단 진화가 시작되고부터는 초자연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다.

 5. 인간도 이 과정의 일부이며, 유인원과 조상을 공유한다.

 6. 그러나 진화론적 설명을 뛰어넘어 영적 본성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도덕법(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고 역사를 통틀어 모든 인간 사회에서 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그 예가 된다.

  어휴.. 너무 쇼킹하지요? 기독교인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니요! 결과적으로 이 진화론적 유신론은 창조론과 무신론 양쪽에서 얻어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요.

  그럼, 저자는 어쩌다가 크리스천이 된 것일까요? 모태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지울 수 없어서 과학에 억지로 하나님을 붙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대학생때까지는 오히려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그의 논리에 굴복합니다. 그 논리란 도덕법이었습니다. 즉,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 마음 속에는 이상하게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비슷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진화론이나 문화적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결국 아마도 우주의 밖에 있는 신이 우리 내부에 심어놓았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접하고서 저자는 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덕법으로 추정해 보건대 그 신은 신성하고 정의로운 분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런 생각이 들자 이제 그의 내면에서 두가지 감정이 싸우게 됩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절망감이었지요. 그리고 이제 '죄인'이라는 말이 자신에게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방황하며 성경, 특히 복음서를 계속 읽어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결국 어느날 아침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저자는 신앙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주장과, 과학의 진실을 터무니없이 거부하는 종교인의 주장을 모두 반박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믿음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그리고 마침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진화(?)하는 영적 여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 탄생이나 생물진화에 대해 저자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우주니 생명이니 하는 영역은 너무도 방대하고 심오해서 아직도 밝히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계속해서 연구하고 입증하는 것이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과학과 신앙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과학과 신앙을 아예 분리시켜서 생각하거나, 과학을 부정하고 신앙만 인정하면서 살았거든요. (사실,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몇년 전에 어떤 전도사님에게 비슷한 책을 추천했다가 '쓰레기같은 책'이라며 펄펄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있거든요.)

 

  책 말미에서 저자는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영적 세계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권유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을 잘 이해도 못하면서 과학적 관점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고는 과학과 영적 세계 사이의 전쟁에 휴전을 선포하고 위대한 진리를 지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두루 만족스럽게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찾아보자고 제안합니다.

  이제 조금 더 편안하게 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학과 신앙을 굳이 배타적으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과학적 세계관과 영적 세계관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대답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서로를 보완하는 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두 개의 세계관을 통합하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과학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밝히는 작업이니까요.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의 아빠에게 이 책을 권해야겠습니다. 아이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라구요. 설마, 또 '쓰레기책'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겠지요? ^^

capduck 2014-08-12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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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메세지는 우리의 몸 그 자체이다..


신의 언어 [THE LANGUAGE OF GOD, Francis Collins 2007]

인류 최초로 31억개의 유전자[DNA]서열을 해독, 우리 몸의 지도[게놈: Genome]를 완성한 세계적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의 화제작!
철저한 무신론자 과학도가 인간의 DNA를 연구하며 얻게 되는 신[神]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흥미로운 과정.
이 책이 출간된 후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무신론자 Richard Dawkins는 "프랜시스 콜린스와 같은 모범적 사례를 볼때, 종교와 과학의 공존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찬조출연 :내 친구 E.T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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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2012-03-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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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신의 언어 새창으로 보기 구매
[신의 언어](프랜시스 S. 콜린스, 김영사)

내가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까지 성경을 신화로 이해했다.-파울러의 [신앙의 발달단계]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는 신화,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냥 이야기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성경을 이야기로만 가르치는 교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새벽나라] QT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청소년 QT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아빠가 [예수님이 좋아요]라는 초등학생용 QT책을 종종 사주셨는데, QT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QT책을 그저 읽기만 했던 터였다. 그렇게 친구를 통해 [새벽나라]를 알았고, 직접 구매해서 읽었다. [새벽나라]에는 창조과학회에서 다룰 만한 내용을 다룬 꼭지가 있었다. 욥기에 나오는 큰 하마가 공룡이라는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성경을 신화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난 것 같다. 그 꼭지를 읽으려고 [새벽나라]를 구매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야후에 있었던 ‘창조론과 진화론‘ 게시판에서 활동했다. 고등학생 때까지의 성경지식과 과학지식으로 진화론 옹호론자들에게 반박(?)했다. 내가 알던 지식의 깊이가 얕아서 제대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도 다음 카페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토론(?)을 잠깐 했다. 이번에는 곧 시들해졌다. 깨달은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대학생 때 ESF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실존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give&take‘의 하나님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평에서 내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책의 독서모임 때문이다. 독서모임에서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 때문에 교회를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를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이유만 그렇게 댄 것뿐일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간에. 다른 예로, 신유의 은사로 병고침을 받아 믿은 사람은 그 문제로 다시 신앙을 버릴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질병‘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로렌스 크랩을 보는 듯하다. 크랩이 신앙과 상담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렁, 콜린스도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이오로고스라는 말을 써가며. 그리고 글쓴이는 유전학으로 신의 존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가 궁금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지금껏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나는 ESF에서 [길]을 공부하며 그 방법들을 배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적설계론, 글쓴이가 서술하고 있는 인간에게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신이 있다고 증명하는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고,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사용해가면서까지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었는지 글쓴이의 의도가 궁금할 뿐이다. 170-171쪽에서 굴드의 서평을 인용하며, 유명한 과학자 중에서 반은 신을 믿고, 반은 안 믿는다고 적었는데, 유명한 과학자를 언급한 것은 인간 이성에 호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보다 인간 이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내가 보기에는 편협한 하나님이다. 신앙과 과학을 섞으려는 시도를 하며 성경을 과학과 같은 급으로 생각했다. 성경이 세상의 학문과 섞일 수 있는 학문의 일종인지 묻고 싶다. 인간 이성 수준이 그렇게 높은 걸까. 성경과 과학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보는 것은, 성경을 과학책으로 읽으려는 시도 아닐까?
또, 이 책은 일반은총의 영역만을 다룬다. 즉,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개신교가 아니라도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서 범신론적인 분위기도 자아낸다. 현 시대는 신의 존재를 믿기만 해도 믿음이 있다고 여긴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게 따지면, 다른 신을 믿어도 똑같지 않나?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책은 독이 든 성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이 있다. 또, 심리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접하는 학문 중에 신앙과 대치되지 않는 학문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 점에서, 과학이 유난히 신앙과 부딪히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성과 신앙은 부딪히게 되어 있다. 믿음은, 그 이성을 뛰어넘는 일이다. 물론, 맹목적인 믿음은 배격한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유난히 동성애에 과격하게 반응한다.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려면 모든 죄에 민감해져야 하지 않을까? 성 문제가 있는 목회자의 뉴스를 쉬쉬하고, 우리가 평소에 저지르는 수많은 죄들은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 일쑤면서, 동성애가 제일 큰 죄인 양 반응하는 게 참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과학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부분만 보는 시각이 아쉽다. 모든 학문(세계)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관점이 정리되어 있다면, 굳이 진화론에만, 동성애에만 국한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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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an 2021-10-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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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프랜시스 S. 콜린스 저, '신의 언어'를 읽고.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히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66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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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주석에 나타나는인용 모음 주석법의 재해석* 나혜숙**

 인도철학제46집(2016.4),75~100쪽

http://krindology.com/db/docs/03.ip46_NHS.pdf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주석에 나타나는인용 모음 주석법의 재해석*


나혜숙**


Ⅰ들어가는 말. 

Ⅱ 힌두 주석 전통에서 바라본 이 문헌의 연구 가치.

Ⅲ 인용 모음에 대한 기존 해석들. 

Ⅳ 독자의 기타 이해에 초점을 둔 인용 모음. 

Ⅴ 나가는 말.


요약문 [주요어: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주석법, 인용 모음, 해석, 독자]


본 연구는 함석헌(1901-1989)의 바가바드 기타 주석에 나타나는 인용 모음 주석법을 재조명한다.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연구에서는 함석헌이 인용 모음 주석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함석헌은 마치 초횡의 노자익처럼 기타에 대한 좋은 주들 의 요점만 모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추구한다. 이러한 의 미에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기타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함석헌은 기타 본문에는 없는 해제와 서론을 만들었다. 도움 없 이 기타를 읽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 그는, 해제와 서론을 만드는 것은 독자가 기타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셋째, 함석헌은 어려운 단어, 구절, 시구에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한 다. 자신의 인도 철학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해 독자가 읽고 스스로 뜻을 가늠하게 하기 위 해서이다. 넷째, 함석헌은 다른 주석을 인용할 때 논리적인 핵심만 인용 하지 않고 다른 주석가들이 사용하는 인용까지 포함시키는 일이 잦다. 그 이유는 되도록 다양한 인용을 통해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기가 수 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여섯 명의 기타 주석가 가운데 라다크리슈난 의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한다. 라다크리슈난은 문헌을 풀이하고, 동서 양의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중세 힌두 주석가들도 인용하는 주석가이 므로, 기타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소개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이 사실들에 근거를 둘 때, 함석헌의 인용 주석법은 선별한 모음이고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

다.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5S1A5B5A07042502).

**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 rapanda1@hanmail.net



Ⅰ. 들어가는 말


바가바드 기타(이하 기타로 약칭)는 고대 힌두 경전 가운 데 한국에도 잘 알려진 경전이다. 한국에 처음 이 경전이 번역된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영역서(英譯書)1)를 인도학자 박석일이 번역 한 바가바드 기타로 1978년2)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박석일의 번역은 중역(重譯)이기는 하지만 힌두교의 대표적 경전군에 속하 는 기타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번 역서 다음에 출간된 역서는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스크리트 어의 영역서3)를 함석헌(1901-1989)이 번역하고 주석을 단 바가

 

1) Prabhavananda, Swami & Christopher Isherwood, trans.(1st ed. 1944; rep. ed. 1972).

2) 몇 군데에서 초판으로 소개된 1987년 박석일의 바가바드 기타는 중판(重版)이다.

3) 함석헌은 어떤 영역서(英譯書)를 저본으로 번역했는지 서지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주석서 첫머리에 언급한

“에브리맨스(Everyman’s)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함석헌 1996: 56)를

단서로 하고 여러 번역을 대조한 결과, 그가 저본으로 한 기타는 다음의

영역서에 포함된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Nicol Macnicol, ed.(1938),

HinduScriptures:HymnsfromtheRigveda,FiveUpanishads,the

Bhagavadgita,Everyman’s Library, London: J. M. Dent & Sons

Ltd.이다. 이 책은 이미 영역되어 출판되었던 힌두 경전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리그 베다와 우파니샤드는 막스 뮐러(Max Müller)의 번역, 기타는 라이오넬 바넷(Lionel D. Barnett)의 번역이고,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서문을 썼다. 이 1938년 판본은, 로버트 제너(Robert C. Zaehner)가 새로 번역, 편집하고 서문을 쓴 개정판이 1966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기 전까지 꾸준히 인쇄를 거듭했다(1943,

1948, 1957, 1959, 1963. 1965). 이 1938년 판본에 실린 바넷의 기타

번역(책 제목은 Bhagavad-Gita:orTheLord’sSong)은 1905년 첫 출간된 이후 여러 번 증쇄했기 때문에 어떤 판본인지 확실하지 않다.

1906년부터 1982년까지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출판 역사를 편찬한

바드 기타이다. 함석헌의 역주서는 스무 권의 함석헌전집 중 한 권으로 한길사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기타에 대한 많은 번역서, 해설서, 논문이 출판되었다.

기타에 대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간된 역서이자 최초의 주 석서이기도 한 함석헌의 기타 주석에는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이 문헌이 기타에 대한 다른 주석, 힌두교 외 의 종교 경전, 문학 작품의 인용을 모아놓은 방법으로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논자(論者)가 논점을 근거를 들어 전개하 는 쓰기 방식이 익숙한 현대에, ‘주석가가 왜 자신의 주석을 주 (主)로 하지 않고 인용 모음을 주로 하는가?’, ‘이러한 주석법을 어 떻게 이해하면 좋은가?’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함석헌의 주석서에는 이 주석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일체 없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과거에 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한 학자들의 언급을 분석한 후, 함석헌의 주석서를 주의 깊게 읽어 이 질문에 새로운 측면에서 대답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함 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이 기존의 이해들과 달리 ‘독자의 기타 이해’와 관련된 활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함석헌의 주석서 판본 이 세 종류4)이기 때문에, 기타와 그 주석을 인용할 때 독자의 편의상 쪽 표기대신 기타의 장과 절로 표기한다. 선행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의 연구 가치를 논한다.

 

시모어(Seymour)는 1905년 판본인 듯하다고 추정한다(Seymour 2011:

146).

4) 위에서 언급한 함석헌전집 13권(한길사 1985), 이거룡의 해제를 넣은 ‘한길그레이트북스’ 18권(한길사 1996), 이거룡의 해제를 빼고 다시 편집한 함석헌저작집 28권(한길사 2009).

Ⅱ. 힌두 주석 전통에서 바라본 이 문헌의 연구 가치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는 함석헌 연구자나 기타 연구자에게 잘 알려진 문헌이기는 하지만 이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세밀한 연구는 이 문헌이 출간된 후 현재까지 30년이 넘는 동안 거의 전 무하다. 박홍규는 “함석헌의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연구는 없 다” )고 바르게 지적했다. 2013년에 출판된 박홍규의 논문함석 헌과 간디의 종교관 비교: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 로는 중요한 서지 정보가 불분명한 데에 따른 오류가 있기는 하 지만, )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연구의 주요한 한 축으로 삼았 고 텍스트 연구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이 문헌을 가장 비중 있 고 세밀하게 다룬 연구다.

이렇게 이 문헌을 대상으로 한 연구물 수는 턱없이 적지만, 이 문헌은 활발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연구하는 방향에 따라 그 가치를 다양하게 논할 수 있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힌두 주석 전 통에서 바라보는 이 문헌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함석헌은  기타를 주석서 형태로 출간했는데 그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 왜 냐하면 주석서는 힌두 지적(知的) 전통이 전수되는 형태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힌두교 내 교파 간 분쟁은 물리적 이라기보다 주로 지적 논쟁이고, 일반적으로 이 논쟁은 교파의 권 위 있는 근본 경전에 대한 주석과 해석 과정에서 나타난다. 즉, 주 석가는 자신이 속한 교파의 근본 경전을 주석하면서 교리의 입장 에 맞추어 경전을 해석할 수 있음을 입증해내고, 그 해석에 동의 하지 않는 다른 교파에 속한 논쟁자들의 의견을 포함시키고 논박 한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주석에 복(複) 주석이 쓰이고, 그 복 주 석에 또 복 주석이 쓰이는 방식으로 주석 전통이 이어졌다. 그리 고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복 주석들이 붙은 주석은 경전에 준 하는 큰 권위를 얻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 힌두교의 교파 간 철학적, 종교적, 신학적 교류는 전통적으로 주석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7)

함석헌이 노자와 장자의 경전에도 주석했기 때문에 왜 특별히 힌두 경전 기타에 주석을 한 것이 특별한 일일까 생각할 수 있 다. 그러나 힌두 지적(知的) 전통에서 지식이 전수되고 교류된 주 된 방식이 ‘주석’이라는 것은 인도 문헌에 관심 있는 연구자가 아 닌 이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함석헌의 주석서에 대한 기 존 해석과 평가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를 환 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는 주석에서 논쟁자를 포함시키고 논박 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주석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가 힌두 종교와 철학의 면면(綿綿)한 주석 전통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번역서가 아니라 주석서를 남긴 사실에 과대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실 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

 

7) 김호성(2004: 195)은 다음과 같이 힌두 지적(知的) 전통의 특징을 잘 정리해 말해 주었다. “선행하는 원전에 대한 주석/해석으로서 그 철학사가

전개되어 왔다는 점은 인도철학의 한 특징이다. 근현대에 이르러

해석학(Hermeneutics)이 서양의 신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 발전되어 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자기학문의 방법론을 해석학으로서 의식하는 것에는 다소 뒤졌다고 하더라도, 그 哲學史 전체가 해석학적 특징을 躍如하게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정통의(vedic) 인도종교철학에 앞서는 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함석헌은 힌두 사상을 잘 모른다고 겸손해했지만 문헌을 읽어보면 실제로는 많은 인도 주석과 번역을 읽었음을 알 수 있 다. 그가 힌두 주석 전통을 ‘이론적으로’ 몰랐을 수는 있어도, 기 타의 주석 전통이 인도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여러 인도 주석을 읽으면서 ‘실제로’ 맛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지도 의 도하지도 않았겠지만 힌두 주석의 그리고 기타 주석의 전통적 흐름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국내에 기타에 대한 한글 번역서, 해설서, 학술 논문은 적극적으로 출판된 데에 비해, 한국인이 쓴 기타 전체에 대한 주석서는 지금까지도 함석헌의 주석서뿐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주석서에 담긴 주석 내용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힌두 경전 자체가 생소하던 1980년대 국내에 힌두 경전이 주석서 라는 형태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함석헌의 주석서는 국내 힌두 종교와 철학 연구사에서 독특하고, 과감하고, 의미 있 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이 문헌의 가치를 주석서라는 형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논했다. 이제 이 주석서의 여러 주석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고 판단되고 학자들도 가장 주목했던 인 용 모음식 주석법에 관해 기존의 해석들을 각각 살펴본다.


Ⅲ. 인용 모음에 대한 기존 해석들


함석헌의 인용 모음에 관한 학자들의 언급은 함석헌에 관한 글 과 기타에 관한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의견을 네 가지 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장광설 및 온갖 것의 수집으로 본 해석, 둘째, 인용을 나열이라고 성격 지운 후 회통과 종교다원주의로 본 해석, 셋째,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용으로 대체한다는 해석, 넷 째, 인용을 비교 행위로 본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1. 장광설, 온갖 것 수집 심재룡은 기타를 다양한 해탈의 길이 담긴 경전이 아니라 카 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일관된 절대주의 철학의 산물” )로 해석한 다. 그래서 기타를 해석하는 다른 방식들을 비판하면서 “어떤 이들은 이 <노래>에서 석가, 공자, 노자, 예수 등 인류의 온갖 성 인의 말씀을 다 발견하노라고 장광설을 벌이는가 하면” )이라고 말한다. 심재룡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어떤 이 들”에 함석헌이 속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류황태는 “[기타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보이는 번역 서도 거의 없다. 함석헌의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자신의 관점이 명확하지 않다. 세상 온갖 것을 다 수집해 놓은 것 같다.”10)고 말 한다. 본 논문에서는 함석헌이 인용을 모으는 행위를 자신의 지식 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아무 것이나 수집하는 행위로 해석하지 않고, 독자가 기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할 것이다.

2. 나열, 회통과 종교다원주의

이거룡은 인용 모음 주석법에 관해 처음 주목하고 가장 분량 있는 글을 남겼다. 그는 함석헌의 인용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체계도 없이 그저 이런저런 주석가들의 생각을 나열해놓은 듯하 고”, ) “백과사전식의 나열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고 말한다. 그는 무분별해 보이는 나열식 주석법이 부정 적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잘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선생의 나열식 인용은 결코 싸구려 절충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회통(會通)이 아닐까 싶다. 좀 단순하고 투박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종교 경전들을 나란히 인용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것만으로도 각 종교가 서로 배척하지 않고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하여 실로 보기가 좋은 것이다.13) 이후 김영호도 이거룡과 같은 입장에 선다.

꼭 종교학 이론을 세우지 않더라도 여러 종교 경전들을 나열식으로 인용하는 것만으로 그는 종교간의 갈등이 보이게 안 보이게 첨예한 오늘의 풍토에 경종을 주고 종교 다원주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 그것을 학자들은 절충주의(syncretism)라고 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절 충이 아니고 높은 자리에서 감싸안는 ‘회통’(會通)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14)

이렇게 이거룡, 김영호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을 ‘나열’이라고 보 고 나서 회통과 종교다원주의의 긍정적 측면으로 해석한다. 함석 헌의 인용에서 종교다원주의와 회통을 제시(김영호)까지는 아니 더라도 발견(이거룡)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 서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이 무분별한 나열의 성격보다는 선별한 모음의 성격에 가깝고, 회통과 종교다원주의보다는 우선 독자의 기타 이해에 더 관련된 활동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3. 인용을 빌려 자신의 말을 한다.

이거룡은 함석헌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용을 통해 한다고

해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선생의 생각이 담긴 부분이라고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의 주석을 끌어다 쓰는 가운데 스스로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다하는 주석을 내고 있

 

13) 이거룡(1996) p. 51.

14) 김영호(2001) pp. 238-239.

다.15)

‘이러저러한 경전들이 이러저러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에, 기실 자기의 생각을 담아낸다.16)

류황태는 함석헌이 “자신의 맘에 드는, 자신의 판단에 적당한 인용 비교를 해 놓았다.”17)고 말한다. 박홍규도 류황태와 같은 입 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면 함석헌의 바가바드기타 해석서에는 간디를 비롯한 여러 사 람의 해석이 함석헌 자신의 해석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해석 과 달리 타인의 해석을 인용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해석에 찬성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석의 하나로 제시한다는 것인지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해석 중 한두 가지를 인용하고 있 으므로 자신의 의견과 같다고 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18)

인용이란 함석헌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도구이거나(이거 룡), 그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류황태) 자신의 의견과 같은 부분 을 인용했다(박홍규)는 해석이다. 주를 선별하는 행위, 선별한 주 안에서도 인용할 부분을 고르는 행위에는 선별하고 고르는 자의 시각이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가 ‘자신 의 말을 대신 전하는 주’ 혹은 ‘자신의 의견과 같은 주’를 선별해 인용했다기보다는, ‘독자가 기타를 잘 이해하는 데에 적합하다 고 판단한 주’를 인용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점이 함석헌 자신보다는 독자에게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주석서에서 함석헌은 직접 주석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을 굳이 인용을 통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5) 이거룡(1996) p. 49.

16) 이거룡(1996) p. 51.

17) 류황태(2009) pp. 65-66.

18) 박홍규(2013) p. 89.

4. 인용을 비교한다. 기타의 구절과 인용을 비교한다.

함석헌의 인용 주석법에 대해 류황태는 “대부분 관련이 없는, 초점에 맞지 않는 인용 비교를 늘어놓는다” )고 말한다. 그리고 박홍규는 “그의 바가바드기타 해석은 … 그 각 구절을 다른 종 교나 사상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이를 비교종교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 말한다. 류황태는 함석헌이 “인용 비 교”를 한다고 평가했는데, 함석헌은 번역끼리는 비교했지만, 자신 이 인용한 주석, 경전, 문학 작품끼리 비교하거나, 평가하거나, 해 석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주를 선별해 모으는 데 에 관심이 있었고 모아 놓은 인용들끼리 비교하지는 않았기 때문 에 류황태가 말한 “인용 비교”는 성립되기 힘들다. 그리고 본 논 문에서는, 함석헌의 인용법이 박홍규가 말한 대로 기타의 구절 과 다른 사상들을 비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히려 기타의 구절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돕기 위해 여러 인용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 행 위란 모음 행위보다 한 단계 발전된 분석 행위인데, 함석헌이 기 타의 구절과 다른 종교나 사상을 ‘비교한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 가 약하기 때문이다.


Ⅳ. 독자의 기타 이해에 초점을 둔 인용 모음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논문에서는 인용 모음 주석법이 독자 의 기타 이해를 초점으로 둔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섯 가지 근 거를 제시할 것이다. 첫째, 함석헌은 좋은 주들에서 뽑은 요점을 한데 모은다. 둘째, 해제와 서론을 만든다. 셋째, 어려운 단어, 구 절, 문장에 여러 번역을 소개한다. 넷째, 제3의 인용을 포함시킨 다. 다섯째, 동서양의 예시들과 중세 힌두 주석가들을 인용한 라 다크리슈나의 주석을 가장 많이 인용한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본

다.

1. 좋은 주를 한데 모아 편리하다.

함석헌은 기타 주석서에서는 인용 모음에 대해 논한 적이 없 지만, 다른 주석을 모아 놓는 주석법의 장점은 편리함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많은 주석서 중 초횡(焦竑)의 노자익(老子翼)에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노자에 대해서 고래로 주석이 많아요. 옛날 사람은 요새와는 또 달 라서는 노자익(老子翼)이라는 걸 제일 편리하다 하지요. 왜 그런고 하니 각 사람의 주(註)를 다 보려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 렇겠지만, 그럴 새가 있어요? 그런데 초횡(焦竑)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재주도 있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인데, 모든 걸 골라서, 자기 말도 이따 금 나오긴 나오지만, 자기만이 아니고 남들의 좋은 주를 모아서 냈어

요.

이 책의 특색은 본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문을 한 사람이 해석하 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 그래도 누가 누가 했던 주로 좋은 걸로 몇 개 골라서 그 요점 되는 거를 같이 실었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의 해석을 볼 수가 있어 편리한 거야. 이름도 노자익이라 하는데 왜 익(翼)이 라 그랬는고 하니, 새에게 나래가 있으면 잘 날 수 있는 모양으로 이 런 주가 있으면 좋다는 거지요. ‘덕(德)을 우익한다’ ‘호랑이에 나래 붙 은 사람’이라 그러잖아요? 노자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좋은 주를 붙 였다 그런 의미로 노자익이라 그래요.21)

함석헌이 노자에 대한 특정 주석에 관해 쓴 위 인용글에서 그

 

21) 함석헌(2009a) p. 56.

가 주석 활동에서 중시한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여러 해석 을 한데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중시한 점, 둘째, 많은 주석 가운데 좋은 주석을 골라 싣는 점, 셋째, 선별한 주석 중에서도 요점을 싣 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기타 주석에 그대로 적용된다. 함석헌도 여러 사람의 해석을 실었고, 주를 선별했고, 선별한 주 를 다 인용한 것이 아니라 요점이라고 생각한 점을 실었다. 그러 므로 그가 초횡의 주석법을 기타에 도입했다고 볼 수 있고, 그 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기타 주석서를 ‘기타익(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익에 관한 함석헌의 생각을 고려 하고, 또 그가 노자익에 관해 서술한 주석법과 기타의 주석법 이 같은 점을 고려하면, 함석헌의 인용은 기존의 연구에서 쓰인 ‘나열’로 이해하기보다는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함석헌의 주석 의도를 더 잘 살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함석헌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자신이’ 편리하게 기타를 읽기 위함도 있겠지 만, ‘독자가’ 기타에 관한 여러 주석을 한데 모아 편리하게 읽기 위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 해제와 서론을 만든다.

함석헌은 해제와 서론을 만들어 싣는다. 그는 말로만 전해 듣던 기타를 부산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해 놀라고 기뻤다고 말한 직후,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라고 말한다. 함석헌이 저본으 로 삼은 힌두 경전들(Hindu Scriptures) )의 한 부분으로 실린 바넷(Barnett)의 기타 영역에는 해설과 주가 있기는 하지만 아 주 적었다. ) 함석헌은 자신이 이 경전을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번역으로 읽을 때 막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기타 영역서 에 포함된 서론과 부록을 선택해 해제용(解題用)으로 번역해 싣는 다. 그는 왜 해제와 서론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왜 자신의 말로 쓰 지 않고 다른 글을 번역해 싣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가 경험해 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해제의 경우]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빌리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 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24)

함석헌이 해제용으로 번역해 실은기타와 마하바라타에는  기타와 기타가 속한 마하바라타의 주요 주제인 다르마 (dharma)가 소개되어 있다. 또기타의 우주론에는 기타의 핵 심 철학인, 상키야(sāṅkhya) 철학의 순수 정신인 푸루샤(puruṣa) 와 근본 물질인 프라크리티(prakṛti)의 이원론이 소개되어 있고, 근본물질에서 23개의 물질이 전개되는 원리가 도표와 함께 실려 있다. 둘 다 기타에 생소한 한국 독자에게 입문용으로 소개하기 에 적당한 자료이다. 또한 원래 기타 본문에는 서론이 없지만 함석헌은 거의 모든 장(열여덟 장 중 열다섯 장)에 인용으로 이루 어진 서론을 넣는다. 이렇게 해제와 서론을 주석에 넣는 것은, 그 가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 니다”,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라고 말한 대로, 독자가 기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 외에는 따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3. 어려운 단어, 구절, 문장에 여러 번역을 소개한다.

함석헌은 기타 본문의 단어, 구절, 시구 전체가 어려울 때 여 러 번역을 제공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우선, 기타 2.66을

 

24) 함석헌(1996) p. 56. 묶음표는 필자의 삽입.

함석헌은 “마음의 통일 없는 사람에게 이성 없고, 마음의 통일 없 는 사람에게 영감도 없다. 영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사람에게 어디서 즐거움이 있겠느냐?”로 번역한다. 이 구절의 단어를 주석하면서 그는 “영감”의 산스크리트어 bhavana(원래는 bhāvanā)를 소개한 후, 이 단어에 대한 총 일곱 가지 번역을 소개한다. 산스크리트어 bhāvanā는 직역하면 형용사로서 ‘존재하게 하는’, ‘일으키는’, 명사로서 ‘생각’, ‘상상’, ‘명상’이라는 뜻으로 이 시구에서는 번역이 까다롭다. 그래서 함석헌은 자신의 번역인 ‘영감’으로 뜻을 결정하면서도, 일곱 번역, 즉 ‘헌신’(간디), ‘집중력’(라다크리슈난), ‘정려(靜慮)’(다카쿠스, 즉 세계성전전집 ), ‘올바른 상태’(데이비스), ‘반성’(힐), ‘지식 추구의 유지’(텔랑), ‘신령 감응’(바넷, 즉 에브리맨스 문고판)을 소개한다.

또 난해하다고 판단한 기타 8.4 )에 대해서는 다섯 명(라다크 리슈난, 다카쿠스, 간디, 스와미 프라부파다, 틸라크)의 번역을 모 두 문장 채로 소개한다. 함석헌이 주석을 길게 인용하는 일은 흔 하지만, 번역가들의 기타 시구 번역을 통째로 인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 시구가 그에게 상당히 난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에 인도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푸루샤’가 들어가자 다 음과 같이 말한다.

… 그중 가장 문제 되는 것이 둘째 구절에 있는 푸루샤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람, 사람 몸, 인류, 개인, 인격, 혼, 초월적 영, 원시 남성 등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인도 철학을 모르는 나로서는 도저히 확신을 가지고 그중 어느 것을 골라낼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여러분들의 번 역을 참조해 독자가 스스로 짐작하기 바란다.(기타 8.4에 대한 함석 헌의 주석 중) 함석헌이 이 시구와 특정 개념을 번역하는 어려움을 밝히고, 그

래서 여러 번역을 제공하고, 독자가 직접 살펴보기를 권하는 모습 을 볼 수 있다. 함석헌이 ‘푸루샤’ 개념을 이해하는 데 겪은 어려 움은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숨은 푸루샤를 말하는 것인데, 물질(prakriti)에 대립시켜서 생명의 씨, 혹은 정신, 혹은 얼, 혹은 인격, 혹은 말씀(로고스)이라 부를 수 있 는 것이므로 여기서 숨이라 해봤다. 어떤 번역에는 원인(原人)이라 하 기도 했다.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해 온 힌두교의 복잡한 교리, 철학, 신화, 우주 론의 뜻을 우리로서는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읽는 데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대로의 한 절을 인용하여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가를 보이기로 한다.(기타 8.22 에 대한 함석헌의 주석)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함석헌은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대로라는 기타 주석서에 나열된 푸루샤의 별칭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푸루쇼타마(Purushottama), 트리비크라마(Trivikrama), 케샤바 (Keshvava), 마다바(Madhava), 아니룻다(Aniruddha), 흐리시케샤 (Hrishikesha), 상카르사나(Sankarsana), 프리쥼나(Pradyumna), 슈리다라(Sridhara), 바수데바(Vasudeva), 다모다라(Damodhara), 자나르다나(Janardana), 나라야나(Narayana), 바마나(Vamana), 파

드마나바(Padmanabha) 등등이다.”

푸루샤는 리그 베다부터 상키야 철학과 베단타 철학을 거쳐 힌두 사상에서 풍요롭고 깊이 있게 발전한 철학 개념이므로, 함석 헌이 주석가로서 겪었을 학문적 어려움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의 주석에서 보이는 훌륭한 점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 번역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언급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확신 있게 뜻을 선택하기 어 려움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밝히고, 여러 번역과 주석을 인용해 독 자가 이들을 참고한 후 직접 뜻을 가늠하기를 권한다. 이것은 그 의 인용 모음이 독자의 기타 이해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 해 준다. “읽는 데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바가바드기타 있는 그 대로의 한 절을 인용”한다고 그가 한 말에서도, 그의 주석 인용 이 독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그가 인용한 주석들의 해석적 시각끼리 혹은 인용한 주석끼리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일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본문의 단어, 구절, 문장 번역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이 사실은 그가 주석가들의 해석과 인용을 비교하는 일보다는 기타 의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더 무게를 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다.

4. 제3의 인용을 포함시킨다.

함석헌은 주석, 경전, 문학 작품을 직접 인용할 뿐만 아니라, 그 가 인용하는 주석가가 인용하는 제3의 인용도 자주 포함시킨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예를 든다. 함석헌은 기타 4.23을 주석하면 서 데사이 )의 주석을 인용한다. 우선 기타 4.23은 다음과 같다.

집착을 떠나 해탈하여, 그 마음은 지혜 위에 굳게 서고, 그 행동, 희 생을 위하는 사람의 행위(業)는 온전히 소멸되어버리느니라.(기타 4.

23)

함석헌은 이 본문에 대한 데사이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

다.

[4장] 19절에서 23절까지는 자유로운 행위의 모든 조건을 묶어서 설명하는 말이다. 3장 9절에서는 희생을 위한 행위는 얽어맴이 없다고 했는데 이 절에서는 희생은 카르마, 곧 업까지도 소멸시킨다고 한다. 업이란 이제 앞으로 열매를 맺을 행위다. 희생은 그와 같이 얽어맴을 예방도 하고 고칠 수도 있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구자라트의 신 비가 나라신하 메다(Narasinha Metha)는 무지한 사람을, “굴러가는 차 밑을 걸어가면서 자기가 그 차를 끌고 가거니 하고 믿는 개와 같 다”고 말하였다. 판디트 살타발레카르(Saltavalekar)는 지혜있는 사람 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했다. “차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이 차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정말 움직이는 것은 차뿐이 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진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찾아 제 몸이라 는 차를 타고 나가는데, 그 몸은 움직이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다.”

(기타4.23에 대한 데사이의 주석)

함석헌이 데사이의 주석을 인용할 때, 데사이가 인용한 두 사람 나라신하 메다와 살타발레카르의 인용은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함석헌은 데사이의 주석적 요점에 더해 데사이가 인용한 부분, 즉 함석헌에게는 제3의 인용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물론 그가 이 비유가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독자가 기타 본문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 함석헌의 주석서에서 가 장 긴 주석인 기타 6.10에 대한 주석은 그 대부분이 라다크리슈 난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기타 6.10은 다음과 같다.

요가를 닦는 사람은 은밀한 곳에 홀로 남아 있어, 몸과 마음을 억제 하고, 모든 욕망과 가진 것을 버리고, 늘 정신 모으기를 힘써야 하느니

라.(기타 6.10)

이 시구에 대해 라다크리슈난은 우선 요가에 대해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를 언급하면서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명상의 대상 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때 구약성서의잠언 을 인용한다. 또 “은밀한 곳”이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마태복 음6장 6절을 인용하고, 오리겐이 은둔자들에 관해 기록한 글을 인용한다. 또한 “몸과 마음을 억제”하는 구절을 주석할 때에는 중 세 힌두 주석가 샹카라를 인용하고, 자기를 억제해 마음이 정결해 져야 하나님과 깊이 교통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서 워즈워드, 릴케 를 인용한다. 또 외계로 향한 마음을 거두어 자신의 혼으로 한데 모음을 설명하면서 플라톤의 메논을 인용한다.

함석헌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적 요점, 즉 외부로 향하는 마음 을 명상의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요점만 인용해도 되었을 텐데, 긴 분량인데도 라다크리슈난이 언급하고 인용하는 다양한 경전, 종교가, 문학가, 철학자를 모두 실었다. 우연히 주석 인용이 이러 한 스타일을 띄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제3의 주석이 포함되는 모습이 일관적이고 사례가 많다. 이것은 함석헌이 인용을 잘라내 기보다는 주석서에 되도록 포함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해준

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왜 제3의 인용을 되도록 많이 포함시키고 싶어 했을까? 종교다원주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독자는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함석헌이 기타의 시구에 나 타난 사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같은 사상이 다른 종교, 사상,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필자는 함석헌이 제3의 인용을 포함하는 이유는 국내 에 생소한 힌두 경전 기타 본문을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독자가 수월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작업이라고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독자가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사고의 개념 틀에 빗 대어 기타 본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논리적이고 딱 딱한 요점만 싣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3의 인용까지 모두 포함시 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거룡은 함석헌의 주석법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양한 언어로 표현될 때 의미가 명확해지는 점을 잘 지적했다. 그는 “어느 한 종교의 사상은 그 종교 자체의 언어로 해석되기보다는 다른 종교 의 언어로 풀어 밝혀질 때 더욱 선명하게 제모습을 드러내”27)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통의 입장에서 함석헌의 주석 모음을 해석하 는 이거룡이 이 문장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 지만, 이 문장은 함석헌이 다른 주석을 인용하는 주석법의 목적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함석헌은 기타 의 언어를 다른 종교들의 언어, 다른 문화들의 언어로 풀어 밝힌 부분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독자가 기타의 언어를 더 잘 이해하 도록 돕고자 했다. 함석헌 자신에게도 생소했을 힌두 경전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그 스스로 연구하여 주석을 달고, 주석가들의 주석 도 인용하고, 해당 시구의 요점을 그 자신도 다른 종교와 문화에 빗대어 생각해 보고, 다른 주석가들이 인용한 부분도 빼지 않고 의도적으로 인용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다.

5. 라다크리슈난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압도적으로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사용 한다. 라다크리슈난(1888-1975)은 대학의 철학 교수, 부총장, 외교 대사를 거쳐 인도 대통령(1962-1967)을 지낸 인물로서 학계와 정 계에서 모두 활동했지만, 인도의 고대 고전(기타, 우파니샤드, 법구경)을 주석한 주석가기도 했다. 함석헌은 기타를 주석하 면서 총 여섯 명의 인도인 주석가(인용 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라 다크리슈난, 간디, 마헤시, 데사이, 틸락, 스와미 프라부파다)를 인 용하는데, 함석헌이 간디를 존경했기 때문에 간디의 주석에 크게 의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간디 의 주석보다 세 배 가량 많이 사용하고, 기타 본문의 모든 장에 빠짐없이 사용한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라다크리슈난의 주에는 산스크리트어가 로마자로 들어가 있고, 각 시구마다 주석이 길지 않고, 단어와 짧은 구절에 대한 주 석이 많다. 또한 간디, 마헤시, 틸락의 주석은 짧은 구절의 주석보 다는 자신의 해설이 주(主)이고 각자의 관점을 담은 사상이 포함

 

27) 이거룡(1996) p. 51.

되는 데에 반해,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은 관점을 담았다기보다는 단어, 구절을 중심으로 문헌 풀이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라다크리슈난은 샹카라(Śaṅkara, 8세기), 라마누자 (Rāmānuja, 11세기), 마드바(Madhva, 13세기), 베단타 데시카 (Vedānta Deśika, 13세기), 마두수다나 사라스바티(Madhusūdana Sarasvatī, 16세기)와 같은 중요한 힌두 중세 기타 주석가들을 자주 소개한다. 산스크리트어를 모르는 함석헌이 주석서들을 직접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중세 힌두 주석가들의 작품을 풍부 하게 담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에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점 은 그가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인용할 때 자주 이 중세 주석가 들의 인용까지 포함시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셋째, 라다크리슈난은 인도 철학과 종교의 가치가 서양 철학과 종교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동양과 서양의 사상에 교류점이 많았 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으므로, 서양의 종교나 문학을 인용하여 인 도 사상과 비교해 언급하거나 인용하는 곳들이 많다. 예들 들어, 기타 11.5에서부터는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간청을 받은 후 자 신을 신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보여준다. 라다크리슈난은 이 종교 체험을 예수의 변모, 사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환상, 콘스탄틴의 십자가, 잔다르크의 환상에 빗대고, 성 힐데가르드의 작품을 인용 한다. 동서양을 이분(二分)하는 틀로 이해한 함석헌에게, 동양 사 상과 서양 사상을 비교하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 경향은 잘 맞았 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주석가들보다 문헌 풀이에 충실하고, 힌두교 안에 서 기타의 주석들을 소개하고, 기타와 힌두교 밖의 사상들을 비교하는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점으로 미 루어, 함석헌이 독자의 기타 본문 이해에 역점을 두었다고 이해 할 수 있다.


Ⅴ. 나가는 말


본 논문에서는 함석헌의 기타 주석에 두드러진 주석법이 인 용 모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주석법에 대해 기존에 행해진 해석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장광설과 온갖 것의 수집이 라고 본 해석, 둘째, 나열이라고 성격 지운 후 회통과 종교다원주 의라고 본 해석, 셋째, 자신의 말을 대신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용 을 사용한다는 해석, 넷째, 인용 간에 비교하거나 기타 구절과 인용을 비교한다는 해석이었다. 이 기존의 해석들과 달리, 본 논 문에서는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은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도 우려는 행위와 관련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다섯 가지를 제 시하였다.

첫째, 비록 함석헌이 기타 주석서에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초 횡의 노자익을 들어 설명한 부분을 참고하여, 함석헌은 기타 를 읽는 이가 좋은 주의 요점만 모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편 리함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타 주석서를 함석헌의 ‘기타익’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함석헌의 인용을 ‘나열’이라기보다는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함 석헌의 주석 의도를 살린 더 적절한 이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함석헌은 기타 본문에는 없는 해제와 서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해제와 서론 없이 기타를 읽기 어려웠던 경험에 바탕을 두었고, 그래서 해제와 서론을 만드는 것은 독자가 기타를 읽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셋째, 함석헌은 힌두 종교 와 철학을 논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드러내 고, 어려운 단어, 구절, 시구에 여러 번역과 주석을 제공한다. 자신 의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여러 번역과 주석을 통해 독자가 읽 고 스스로 가늠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함석헌은 다른 주석 을 인용할 때 논리적이고 딱딱한 핵심만 인용하지 않고 다른 주 석에 담긴 제3의 인용까지 인용에 포함시키는 일이 잦다. 그 이유 는 제3의 인용을 통해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여섯 명의 기타 주석가 중 라다크리슈난의 주석을 압도적으로 인용 한다. 라다크리슈난은 문헌 풀이에 주목하고, 자신의 해석도 하면 서 동서양의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중세 힌두 주석가들도 인용하 는 주석가이므로, 함석헌이 생소한 힌두 경전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 독자에게 소개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에 근거를 두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함석헌의 인용 모음 주석법은 기 존 해석들과 달리, 독자가 한국인에게 생소한 기타를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한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석헌이 독자의 기타 이해를 돕고자 한 이 유는, 그가 기타가 “진리의 말씀” )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 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어 한 것과 관련 있다. “진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밝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전도” )라는 비 유적 표현을 사용할 만큼 기타 독서에서 큰 감화를 받았고 기 타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은 확실하다. 즉, 그는 독 자가 기타를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담 긴 진리를 깊이 있게 이해해 삶에서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자신이 주석 없이 읽을 때 겪은 어려웠던 경험을 살려, 독자가 기타를 더 잘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행위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고백한 힌두 사상에 대한 지식의 한계 안에서, 최 선으로 선택한 주석법이 바로 ‘인용 모음’이라는 주석법으로 나타 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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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interpretation of the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in Ham Seok-heon’s Commentary on the Bhagavad Gītā

Haesook Ra

Sogang University

This study aims at shedding new light on Ham Seok-heon’s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in his commentary on the BhagavadGītā (henceforth Gītā). Although he leaves his own comments, Ham Seok-heon (1901-1989, henceforth Ham) mainly uses a particular kind of commentarial method; that is, he quotes passages from both other commentators’ commentaries and other religious texts as well as works of literature. Previously, several scholars interpreted this kind of commentarial method as a disorderly enumeration of quotations or as based on religious pluralism, and so on. This study, however, argues that it is rather a selected collection of quotations, by which he wants to help the readers of the commented text Gītā understand better. I suggest five reasons for this argument.

First, mentioning Jiao Hong(焦竑)’s commentarial method in the 老子翼, Ham writes that Jiao Hong collected at one place selected good comments from different commentaries. Considering this record, it can be assumed that Ham also desired the readers of the Gītāto read at one place the selected good comments. Second, He makes a preface, which is a translation of two chapters from a dif-

 

 ∙印度哲學제46집

ferent book, to the Gītāand the introductions to almost every chapter of It. Having an experience of reading it almost without any commentarial aid, Ham writes himself that he makes the preface and introductions for the sake of helping the readers understand the Gītā better. Third, he provides the difficult words, phrases, and sentences of the Gītā with various translations and comments. As he reveals that he is not conversant with Indian philosophy, the various translations and comments are for the readers themselves to decide the meaning of those difficult parts. Fourth, he quotes not only the logical and central ideas but also rich citations that other commentators provide. It can be conjectured that Ham wanted to include numerous citations, so that they facilitate the readers’ understanding of the Gītā. Finally, Ham depends most on Radhakrishnan’s comments, which are characterized as annotating the Gītā text, giving abundant citations from both the Eastern and the Western traditions, and quoting the medieval Indian commentators such as Śaṅkara, Rāmānuja, and Madhva. Based on these five observations, this study intends to show that Ham’s commentarial method of collecting quotations was devised in order to help the readers of the Gītā acquire a better understanding of It.

Keywords : Ham Seok-heon, BhagavadGītā, commentarial method, a selected collection of quotations, interpretation, readers.

투고 일자 : 2016년 3월 28일 심사 기간 : 2016년 4월 11일 ~ 4월 28일 게재 확정일 : 2016년 4월 29일








2021/10/31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등록 :2021-08-10 
조현 기자 사진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의 서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종교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또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사회와 남북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갈등과 적개심을 가장 부추기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이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고귀한 인간을 지향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중세적 억압을 넘어 인류 진보가 얻어낸 ‘휴머니즘’과 이상적 종교성인 ‘영성’이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길희성(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펴냄)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지어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지난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길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외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목사와 장로들이 많다. 한완상 교수 등과 힘을 모아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쳤고,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작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썼다. 부드러운 성품과 달리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해와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인 책을 ‘최후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오다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나?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는 외피고 본질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제 종교적 인간보다는 영적 인간을 말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세속적 휴머니즘’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이유는?

“중세적 신본주의를 깨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 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예수를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스트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자유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자유를 위한 자유가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의 예견대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도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힘차게 외치고 출발한 프랑스 혁명 뒤에 공포정치가 도래한 것을 보라. 도덕과 공정한 정의, 영성을 상실한 근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여주고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인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앙을 유치하게 만드는, 신과 인간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인동형적 사고, 그리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묻지마 신앙’에 빠지거나, 아예 종교에 담을 쌓고 세속적 삶에 자신을 맡긴다. 이 불행한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심도학사 학장인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거닐고 있다. 조현 기자―고뇌는 젊은 날 교회에서 시작됐나?

“그렇다. 영락교회 신자로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전혀 감동이 없었다.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다. 차라리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 낫겠는데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다.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고 ‘아날로지’(유비)다. 그게 신학의 가장 기본이다.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진짜 곰’이라고 한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만, 이성 없는 신앙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욕망과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가 너무 쉽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머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어 신앙과 이성을 종합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적 이성보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기술혁명시대다. 또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 더 서양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불교나 노장사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다원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다.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쳤다.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선 것이다. 길을 잃은 문명의 앞길을 비춰주는 이들이 바로 이런 영적 선각자들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07175.html#csidx6d81bf98077c6628462c4a41b9aef68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지은이)아카넷2021-07-01

924쪽

책소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목차
머리글 7
I. 영적 휴머니즘
1. 두 가지 휴머니즘 29
2. 영적 인간관 95
II.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
1. 유일신신앙의 종교와 형이상학적 종교 144
2. 예언자 정신 151
3. 형이상학적 신관의 대두 159
4. 유일신신앙의 의의 167
5. 역사의 하느님 신앙과 신의 섭리 175
6. 토마스 아퀴나스: 신앙과 이성의 종합 223
7. 유명론과 종합체계의 붕괴 229
8. 오컴,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근대의 태동 239
9. 계시와 이성에서 신앙과 과학으로 243
10. 유명론, 도덕실재론, 목적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 247
11. 위기에 처한 성서적 신앙 269
12. 스피노자와 칸트 이후의 신학 283
13. 세속주의의 종교비판 293
14. 다원화된 현대세계와 종교다원적 신학 299
III.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
1. 두 가지 창조론 335
2. 새로운 신관의 기본 구도 351
3.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 신의 양면적 본성 379
4. 창조 개념과 인과성의 문제 429
5.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구원 459
6. 무(無)로부터의 창조? 489
7. 악과 신의 섭리 문제 519
8. 특별섭리와 신의 행위 539
9. 부활신앙과 부활사건 563
10. 진화적 창조의 의미 591
11.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 607
12. 신론 후기 643
IV.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
1. 10가지 극한적 질문들: 세속화된 근대 이성을 넘어 675
2. 새로운 영성 745
3. 영적 휴머니즘의 길을 배우다: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 837
부록: 심도학사 개원 강연문 857
참고문헌 869
찾아보기 887
-
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P. 30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
다.  접기
P. 118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접기
P. 161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더보기
P. 214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접기
P. 319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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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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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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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 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간 그리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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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지은이)아카넷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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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45,000원
판매가
924쪽

책소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목차


머리글 7
I. 영적 휴머니즘
1. 두 가지 휴머니즘 29
2. 영적 인간관 95
II.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
1. 유일신신앙의 종교와 형이상학적 종교 144
2. 예언자 정신 151
3. 형이상학적 신관의 대두 159
4. 유일신신앙의 의의 167
5. 역사의 하느님 신앙과 신의 섭리 175
6. 토마스 아퀴나스: 신앙과 이성의 종합 223
7. 유명론과 종합체계의 붕괴 229
8. 오컴,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근대의 태동 239
9. 계시와 이성에서 신앙과 과학으로 243
10. 유명론, 도덕실재론, 목적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 247
11. 위기에 처한 성서적 신앙 269
12. 스피노자와 칸트 이후의 신학 283
13. 세속주의의 종교비판 293
14. 다원화된 현대세계와 종교다원적 신학 299
III.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
1. 두 가지 창조론 335
2. 새로운 신관의 기본 구도 351
3.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 신의 양면적 본성 379
4. 창조 개념과 인과성의 문제 429
5.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구원 459
6. 무(無)로부터의 창조? 489
7. 악과 신의 섭리 문제 519
8. 특별섭리와 신의 행위 539
9. 부활신앙과 부활사건 563
10. 진화적 창조의 의미 591
11.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 607
12. 신론 후기 643
IV.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
1. 10가지 극한적 질문들: 세속화된 근대 이성을 넘어 675
2. 새로운 영성 745
3. 영적 휴머니즘의 길을 배우다: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 837
부록: 심도학사 개원 강연문 857
참고문헌 869
찾아보기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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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P. 30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
다. 접기
P. 118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접기
P. 161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즉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 논란을 일으킬 만한 견해 ―를 제시하게 될 것임을 여기서 미리 말해 둔다. 접기
P. 214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접기
P. 319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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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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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 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간 그리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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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삼위일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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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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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라틴어Trinitas 트리니타스[*])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고대 그리스어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1]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2]

기원[편집]

삼위일체 방패(Scutum Fidei). 아버지(Pater)와 아들(Filius)과 성령(Spiritus Sanctus)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나(non est) 한 하느님(하나님)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났고,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문구가 증거되었다.[3] 그러나 신학적으로 정립이 되지는 않았다. 기독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년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사이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비온주의,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제2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4]

기독교[편집]

  • 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 三位)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교리이다.[5]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고 있는 타나크는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인 삼위일체가 나타나며, 신약성경 2고린 13:13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에서 삼위일체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 또 신구파를 막론한 대다수의 기독교는 삼위에 대한 개념이 요한 복음서 등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함(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옴)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기원후 200년경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신을 설명하기 위해 트리니타스(trinitas)라는 말을 만들어낸 게 그 시초다. 그리스도교 찬송가는 주로 삼위일체를 세 행으로 꾸며 성부, 성자, 성령에 각각 한 행씩 배당한다. 구약성서에는 삼위일체의 '예고편'이 있다. 아브라함 족장을 방문한 '사람 셋'은 '주'라고도 지칭되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성자가 예수라는 세속의 형태로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 동방정교회의 화가들은 아브라함과 이 '구약성서의 삼위일체'를 여러 차례 그림으로 표현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윗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시편 110:1의 말씀을 번역본대로 비교한 것이다.

공동번역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
개역한글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개역개정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새번역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야훼 하느님(성부)께서 다윗의 또 다른 주(主)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에배소서 1:20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공동번역)
사도행전 7:56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4:62 예수께서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2:36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스스로,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지 않았더냐? (공동번역)
로마서 8: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신약과 비교해 해석해 보았을 때 주(主)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결정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구절은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1-8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로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이라고 시사하고 있으며, 그 셋은 하나라고 명확히 함으로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기록해 놓았다.

기독교의 경전 중에서 요한의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령의 오심을 설명하여 삼위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사상적 개념으로는 기독교 초기의 환경이었던 유대교, 다신론, 영지주의 등의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졌고, 아들이 이 땅에 존재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후에도 함께하시는 주, 즉 기독교가 고백하는 주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요청되었다. 특히 영지주의의 유출설과 마르키온주의의 이원론은 그리스도론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이 필요했다.[6] 이 새로운 개념은 흔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호모우시우스라는 예수와 성부가 동일 본질이라는 관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논리적으로 체계화 시켜 삼위일체로서 확정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부터 교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던 호모우시우스의 “동질적이고 하나의 실체로 된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념에 도전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한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파문되었다.

공의회의 결정 이전에 1세기 사도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스의 삼위 언급 즉 "하느님의 사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 성령으로"[7]라고 고백하는 문헌과 성육신 이전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있다. 사도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도 이미 존재했던 세례의 문구와 요한복음서를 활용하여 삼위 개념을 언급했다.[8] 2세기를 맞으며 기독교 변증가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틀을 신학적으로 마련하고자 애썼다. 로고스 개념을 활용하여 유스티아누스에서 타티아누스, 안디오키아의 테오필루스로 이어지며 발전하였다. 2세기의 신학자 이레니우스의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등장과 이후 초대 기독교 전승을 기록한 사도전승에서 이미 삼위일체 개념을 따라 서품되는 감독자의 기도문이 있으며[9], 그 후 3세기 신학자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4세기 공의회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일부 종교 학자들은 4세기 즈음에 확정된 삼위일체설은 기독교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고, 또 이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10]기독교 선교 이전 플라톤이 주장하던 성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1] 다른 학자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고대 이집트힌두교를 비롯한 고대 신앙의 영향을 받아 혼입된 교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13][14][15]

현재는 대다수의 기독교 종파들이 삼위일체를 중심적인 교리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 14장에서 설명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통하여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부와 영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성령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하느님은 '절대단독주체 (Absolute Singleness)'가 아니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하나이며 이를 통하여 예수는 삼위일체의 그 자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모든 기독교 종파의 주요 교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전통을 거부하는 회복주의 계열의 일부 교파에서는 비성경적 논리에 불과하다며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찬성 견해[편집]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의 요소는 성부성자성령인데 마태오 복음 11장 27절과 마르코 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 (공동번역)

또한 28장 19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가르쳤고, 요한 복음서 14장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서술하고 있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에는 대구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와 동일함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 (공동번역)

반대 견해[편집]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16]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에서 나오는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라는 구절과 신약성경 마태오의 복음서 4장 10절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라는 구절 등 성서의 여러 면을 살펴보면 삼위일체와 관계되지 않는 듯한 내용도 담겨져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언그리스도아델피안 등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는 이 점 또한 지적하며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의 일부분이었다면 "오직 그분에게만"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 1967년판) 제14권 299면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도 삼위일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위일체 교의는 4세기 후반에 가서야 고안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어떤 면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다. (중략)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으며, 온전히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70년판) 제6권 386면에는 보편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채택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에 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 (중략) 공의회가 발의한 신경에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직접 제안하였다. (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감을 느껴 단지 두 명만 제외하고 신경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며,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혐오하는 반응이 그들의 경전 코란에 나와 있다.(수라 4:171, 5:73) 이러한 유일신 사상이 전투적이며 호전적인 이슬람을 나타내기 위한 기본적인 뼈대로 보기도 한다.[17]

다양한 해석[편집]

  • 삼신론: '세 인격의 세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 양태론(modalism): 하느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적 이론의 일례이다.
  • 종속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 양자론 : 양자론은 하느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전통[편집]

삼위일체가 포함된 신조[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