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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함석헌의 평화사상 - 정지석 - Daum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함석헌의 평화사상 - 정지석 - Daum 카페









 함석헌의 평화사상



정지석 (기사입력: 2006/07/31 10:52)  메일보내기



서론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 역사속에서 민족운동가,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 평화통일 운동가이자 평화사상가였다. 그는 1차 세계 전쟁이래 세계 평화운동을 이끌어 온 미국의 퀘이커 평화본부(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로부터 '한국의 간디'로 평가되면서 1970년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는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실천가였다. 종교인이면서 사회 운동가였다.



그는 20세기 후반 한국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인물로는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민중신학자 안병무, 역사가 김동길, 여성운동가 이태영, 이우정, 통일운동가 문익환, 언론인 송건호, 지명관, 김용준, 장기려, 한완상, 김용준, 서영훈, 오재식등을 비롯해 대통령 김대중도 그 자신 영향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7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이문영은 김대중의 선민주 후 통일론과 이후 평화 통일론은 함석헌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외에도 20세기 후반기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끼친 그의 투철한 민중주권 민주주의 사상, 반전 반군사주의 평화사상과 비폭력주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 자주의 평화통일 사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의미있는 사회 사상으로 살아있다. 그래서인가. 탈냉전 시대 여전히 이념 갈등속에 헤매는 우리 사회속에서 한완상은 '우리 시대에 참다운 원로는 함석헌뿐이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함석헌은 기성 교단(특히 기독교)에 의해 종교적 이단자로 낚인 찍혔고, 사회 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서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요 선동가로 매도됐다. 잠시 한신대에서 동양사상을 특강하긴 했으나 학위를 가진 학자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학계에서건 종교계에서건 주류에서 배제당했다. 2001년 그의 출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문화관광부가 3월의 인물로 선정했고, 정신문화연구원이 그의 사상을 다루는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KBS등 주요 언론들이 그의 삶과 사상을 다뤘다. 그의 사상을 다룬 논문은 주로 신학계에 20여편의 석사논문이 있고, 그외에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 2-3편의 석사논문이 있다. 해외 박사 논문으로는 1998년 영국에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다룬 논문(김성수)이 나왔고 2003년 필자 또한 영국에서 함석헌의 평화 사상을 다룬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현재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격월간으로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고 있으며, 함석헌 연구자들이 매월 모이는 '씨알 사상 연구회'가 활동중에 있다. 그리고 매년 3월 그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연례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평화론은 무력 사용의 문제를 두고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평화를 위해서는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고 또는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력 사용을 배제하거나 거부함으로 평화는 이뤄진다는 입장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정치 현실주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사회에서는 힘(무력)에 근거한 정치 현실주의 평화관이 지배적이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힘이 없어(혹은 약하여)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겪고 또 20세기에는 식민지를 겪고, 해방이후 미소의 분할 통치등 외세에 의해 많은 고난을 겪은 나라에서 평화의 문제는 곧 부국 강병론과 직결된다. 평화주의에서 말하는 무력배제의 평화론은 순진한 이상론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평화는 특별한 시련을 겪은 말이기도 하다. 남북 분단 현실에서 무력 통일론은 주창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등의 독재 정권은 평화를 북한 이데올로기로 간주하여 그 용어 사용조차 억압했다. 권력자들이 쓰면 괜찬고 민중이 쓰면 불온한 것이 되던 말이 평화였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반독재, 반 외세 투쟁이 높여지던 시대에서 평화는 투쟁력을 약화시킨다하여 한동안 왕따가 된 말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상황에서 무력배제의 평화주의 사상에 근거한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이 가졌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를 찾는 것이 본 글의 목표가 될 것이다. 동시에 함석헌 평화론이 지난 세기 과거의 사상이 아닌 오늘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사회 사상임을 밝히고자 한다.



또하나 문제제기는 그의 평화사상을 민중론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더욱 희귀한 사상이었으나 서구 사회속에서도 평화주의 사상은 소수 입장으로 존속했다. 20세기들어서 평화 개념은 다양하게 확장되고 복잡해졌다. 제국의 평화는 피압박 민족의 평화와 다르다. 강자의 평화와 약자의 평화가 같을 수 없다. 평화주의가 무력 사용에 반대하는 점에서는 공통의 사상적 기반을 갖지만 그것이 펼쳐지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 상황에서 다른 색깔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은 피압박 민족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의 민중 평화론는 평화의 주체, 목적이 민중임을 밝힌다. 평화운동의 주체로서 민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을 이해하기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의 민중론을 살펴봐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억압과 착취의 구조적 폭력 상황속에서 평화주의는 과연 사회 변혁 사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도 찾아가기로 한다.



이 글은 먼저 함석헌의 민중론을 살펴보고, 민중 평화론을 구성하는 주요 사상으로서 비폭력주의와 반전 평화주의를 다룬다.



1. 함석헌 민중론



1-1. 민중론의 사회학적 배경



함석헌의 민중론은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그가 살았던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며,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 운동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상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 사회 사상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상이라고 믿는다.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조선말의 사회적 격동기였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1910-1945), 해방과 함께 온 미. 쏘 열강의 남북한 분할 통치, 남북한 정치 엘리뜨들의 이데올로기 갈등과 분단(1948), 한국전쟁(1950-1953), 분단시대에서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으로 점철되어 있다. 세계사적으로도 20세기는 두번의 세계전쟁과 자본주의대 공산주의 체제간 냉전의 시대로 점철된 전쟁의 세기로 평가된다.



함석헌은 한반도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았다. 그 자신 고난의 역사속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살았다. 일제시대 해직, 두차례 투옥되는 고난을 겪었으며 해방후에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월남한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평화통일론을 펴다가 끌려가 50여일간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고,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수없이 체포 연행 연금당했으며, 전두환 정권아래서는 80세 넘은 노인의 몸으로 끌려가 수치를 당하기도 했다.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주요 전환기마다 함석헌은 고난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은 고난받는 사람들을 민중이라 불렀다. 고난은 함석헌의 민중론을 이해하는 핵심어가 된다.



함석헌이 태어난 평북 용천은 이씨 조선시대 '상놈'이라 차별대우 받던 평안도 지역에서도 더욱 천대받던 곳이었고 그런 까닭에 그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양반 상놈간 신분 차별을 모른 채 모두 똑 같은 신분으로 평등하게 살았다. 함석헌은 이런 출신 배경이 자신의 민중 사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나는 양반 상놈이란 말은 들었지만 양반도 상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종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타고난 민주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함석헌 전집 4: 206).



함석헌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20세기 초는 일본의 식민지 강점 야욕이 노골화되어가던 중이었고 이에 저항하는 전 민족적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민족자강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고 함석헌도 이런 분위기속에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즉, 사람들은 기독교를 강대국 서구의 종교로 이해했고,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길을 강대국종교인 기독교에서 얻고자 했다. 동시에 부패한 유교 신분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으로서 만인평등과 의료 교육등 신분에 관계없이 펼쳐지는 선교사들의 사회선교는 그동안 조선사회의 오랜 전통 종교였던 유교와 불교에 염증을 느끼던 민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다. 당시 기독교는 민족 구원과 사회개혁의 종교로서 조선민중들에게는 받아들여졌다.



이런 기독교 수용은 다른 제 3세계에서 기독교가 서구의 식민지 개척의 척후대 역할을 한 것으로 비판받는 것과는 다른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사와 마사히코 1997: 82-83) 최근들어 비대화하고 보수화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러시아 출신 한국학자 박노자는 이런 싹이 이미 초창기 기독교 수용당시 기독교를 강대국의 종교로 받아들였던 바로 그때부터 트고 있었다고 비판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본다. 즉, 당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민중의 열망이 힘센 종교로서 기독교를 믿는 신앙관이 오늘날에 와서는 기독교 권력으로 출현했고, 현실 권력의 한 부분이 된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적 성곽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주류사회로부터 버려진 땅으로 소외되고 무시된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남으로서 함석헌은 인간평등의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되고 민족주의 기독교 신앙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런 요인들은 그의 민중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함석헌의 민중론을 이해하는데 종교는 매우 중요한 요인인데 특히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함석헌에게 기독교는 나라를 구하는 종교로서의 동기가 강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서구 선교사들은 일본 식민권력과의 마찰을 원치 않아 정치와 신앙은 분리라는 원칙론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선교활동을 용이하게 위해 일본식민 권력과는 상호불간섭 원칙아래 타협적 태도를 지키고 있었고, 이는 기독교를 통해 나라를 구해보고자 했던 민중들의 애국적 열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신앙과 애국신앙과는 겉도는 상황이었고 이런 분열된신앙생활에 청년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 자체에 회의감을 갖게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함석헌은 일본 유학시절 우찌무라 성서강좌에 참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교리를 믿던 신앙에서 자신의 내적 체험의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을 경험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교리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을 삶의 종교, 즉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후 기독교 신앙을 민족해방운동의 신념으로 삼게 된다. 이런 민족 해방운동의 신념을 압제자 일본의 사상가로부터 영향받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점 때문에 후에 함석헌 김교신등의 무교회 운동이 한국 기독교 주류로부터 친일적이란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무교회 운동그룹이 신앙적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로인해 투옥되는등 고난을 겪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함석헌은 10여년간 재직하던 오산학교 역사 교사직에서 해직당하고, 1940년대 초 두 차례에 걸쳐 각 1년씩 옥고를 치뤘다. 무교회 신앙 동지였던 김교신은 노동자 운동에 투신했다가 병사한다. 무교회 신앙은 무교회라는 이름에서와 같이 교회 제도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경전으로서 성서를 중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대속신앙을 강조하는 매우 영적이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 이중 십자가 고난사상은 함석헌의 민중론 형성의 종교적 기초가 되었다.



1-2. 함석헌 민중론의 기본 구조와 인식



함석헌의 민중 사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30년대였다. 당시 오산학교 역사교사로서 함석헌은 일제 식민지아래 신음하고 있던 한국 민족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데 적합한 역사관의 빈곤을 절감했다. 일본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나 또는 이에 맞서 민족적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터무니 없이 과장된 민족 영웅사관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혁명사관을 좋다 여긴 것도 아니었다. 함석헌은 스스로 한국 역사를 쓰기 시작했고, 그의 주 관심은 일제 억압 아래 한국민족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모아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의미가 있드시 한국 민족의 고난에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기독교 고난사관에서 쓴 한국 역사를 '성서의 관점에서 본 조선 역사'라 제목 붙였다. 여기서 그는 일제 치하에서 고난받는 한국 민족을 민중이라 불렀다.



한국민족(민중)은 제국주의 권력의 억압아래 고난 당하지만 그들의 고난은 의미없는 고난이 아니라고 보았다. 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고난당함으로서 만인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였드시 민중의 고난도 그런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드시 매우 기독교적인 해석이며 이런 기독교 고난사상을 통해 함석헌은 한국 민족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민족의 고난에서 종교적 의미를 찾은 것은 식민압제의 암울한 현실속에서 고난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임으로 독립 의욕을 상실하고 절망과 자포자기로 빠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고난의 적극적 의미를 찾음으로 새로운 삶의 의욕과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할 수 있기를 의도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이렇게 역설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이런 기독교 고난사상이 한국 민족의 고난을 찬미하는 것이 되어 고난을 극복하려는 사회 정치적 노력을 포기하고 결국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없는 건 아니다. 바로 이런 오해의 소지 때문에 함석헌은 민중 고난의 두차원, 정치 사회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난의 종교적 이해는 고난을 새롭고 진보된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본다. 또 기독교 고난 사상은 자기 희생을 통해 타인을 살린다는 대속적 고난을 의미한다. 반면에 정치 경제 사회적 고난은 극복되고 벗어나야 할 악이다. 고난을 초래하는 모든 행위, 제도, 구조는 개혁 또는 제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함석헌 민중론은 고난에 대한 이 두 차원 - 종교적 차원과 정치 사회적 차원 - 을 동시에 포착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함석헌의 민중 사상은 종교적 차원과 사회 정치적 차원의 융합적 사고를 통해 고난받는 민중 (한국민족)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함석헌 민중론의 독창성이다. 요약하자면 고난받는 민중은 사회 밑바닥층에서 고난을 당함으로 온 세상을 살리는 대속자가 되며, 고난을 통해 스스로 정화되고 새로운 삶으로 진보함으로 역사를 변혁해가는 주도자가 되며, 다른한편 고난을 초래하는 불의한 사회 정치적 구조악과 투쟁하는 주체세력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민중을 국민, 인민, 시민, 백성, 프롤레타리아란 말과 구별된것으로 썼다. 민중은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과 함께 종교적 차원을 담아 안은 역사의 주체요 실체이기 때문이다.



1-3. 민중해방론 민중 휴머니즘



민중은 자기 고난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고난이 주는 적극적 의미를 깨닫기에 고난을 극복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근본적(radical)인 태도를 취한다. 즉, 억압자 - 피억압자간의 이항대립에서 억압자 타도에 목표를 두기보다는 둘 모두의 동시 해방을 목표로 한다. 억압자는 억압함으로, 피억압자는 억압당함으로 비인간화 된다. 그러므로 둘 모두 해방을 필요로 한다. 피억압자가 억압자를 타도함으로서 해방되는가? 억압과 피억압의 근본적인 사슬을 끊음없이 피억압자가 억압자 타도를 통해 해방의 길을 구한다면 어제의 피억압자가 오늘 억압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억압 - 피억압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다. 결국 억압의 구조를 종결시키는 길은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동시에 해방됨으로서이다. 사회정치적으로 피억압자가 억압자를 타도함으로서 억압의 사슬을 끊고 종국에는 억압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피억압자의 사회정치적 해방투쟁은 필연적으로 폭력적 방식을 동반한다. 폭력적 억압과 이에대한 폭력적저항은 폭력-대항폭력이란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러나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은 피억압자로서 민중이 억압자와의 동시 해방을 구하기 때문에 비폭력주의를 택한다. 뒤에 상술하게 될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그의 민중 평화론의 핵심 내용이 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함께 해방되는 길을 함석헌은 어떻게 제시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의 민중 휴머니즘을 살펴보아야 한다. 함석헌의 민중 휴머니즘은 후에 그가 민중을 대신하여 사용하게되는 언어, '씨알' 사상에서 더욱 깊어지고 확연하게 나타나는데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낙관적인 인간관에 근거한다(함석헌 전집 14: 362). 이 선한 본성은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선물로 부여된 것이다 (함석헌 전집 1: 398). 적은 내 행동으로 물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으로 변화된다. 이는 모든 인간 생명은 적이든 친구간에 똑같이 소중하다는 보편적 인도주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적은 우리와 같은 양심을 가진 인간 존재로 보여진다. 악인 안에도 인간의 선성이 있으며 이것이 악인을 구하는 것임을 믿는다. 함석헌이 국제적인 협동정신을 민족주의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선한 양심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민중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다고 본다.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주의 상황속에서도 함석헌은 민중의 이런 인간에 대한 믿음이 결국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한다고 한다. 함석헌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제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서로 저쪽의 잘못을 과장 선전하며 감정을 일으켜 싸워 이기려던 것은 옛날 이야기고, 이 앞의 역사는, 그보다도, 서로 싸우기는 하면서도, 서로서로 사이에 숨어 있는, 일을 극단의 참혹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서로 믿고 돕는 그런 정신, 그런 힘을 너와 나 사이에 찾아내어 기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서도 세계를 위하여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성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저희도 사람이지 하고 믿을 때는, 그보다 먼저 그 인간성을 다스리고 있는 도덕의 법칙을 믿어야 한다. 사람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믿음이다. 사람은 정의의 법칙에 복종하고야 말 것, 곧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대적을 이기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대적 속에도 있는 정의 그 자체다. 도덕률 그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다 (함석헌 전집 17: 90).



함석헌의 민중 휴머니즘 사상은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전체 생명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씨알에서 함석헌은 하나의 유기체적 몸, 즉 전체와 개체가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를 보았다. 그러므로 만약 개인이 죽는다면 그때 전체도 죽는다. '씨알은 지극히 작다 지극히 작은것 속에 전체가 있다'(함석헌 전집 14: 372).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간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 심지어는 이기적이고 사악한 정치인들도 구원된다는게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함석헌은 이런 생각을매우 상징적인 종교적 언어로 표현했다. '유다의 구원이 없이는 나 자신의 구원도 불가능하다'(전집 9: 290).



이기주의 집단주의 정치가들만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세계는 세계대로 살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세계는하나의 유기체다. 하나의 인격이다. 하나의 전체다. 그러므로 부분이 죽으면 전체도 죽는다. 하여간 히틀러를 히틀러대로 망하게만 두고는 인간은 구원되지 않는다. 우리 정신 연령이 어릴 때 우리는 전체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구원을 믿어서 좋았으나 이제 인간은 그보다는 더 자랐다 (함석헌 전집 9: 389-90).



함석헌은 이 전체 사상에 근거하여 1972년 '함께 살기운동'을 제창했다. 이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서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함석헌의 씨알운동을 친공산주의 운동으로 억압했으나 함석헌의 제자로서 역사가였던 김동길은 함께 살기운동은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기에 공산주의 운동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함석헌 전집 14: 370). 함석헌의 전체 사상은 건강한 정치 변혁을 위한 실천적인 것이었다. 1979년 박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함석헌은 주장했다: '어떤 혁명도 씨알 전체에 동원령을 내리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한다. 지배자가 두려워 하는 것은 오직 전체 뿐이다. 지배자의 힘은 죽이는데 있지만, 전체는 죽일 수가 없다'(함석헌 전집 17: 96).



함석헌은 그의 민중론에서 고난받는 사람으로서 민중은 고난을 통해새 인간성, 새 사회를 탄생시키는 존재로 보았다. 민중은 사회 정치적 투쟁성과 함께 종교적 영성을 가진 존재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것, 이것은 종교적 영성의 본질이며 힘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피억압자인 자신과 함께 억압자를 모두 해방시키는 존재가 된다. 함석헌의 민중 휴머니즘은 종교사상에 의해 강화되고 심화되었는데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사상을 민중신성론으로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1-4. 민중 신성론 (民衆 神聖, Minjung Divinity)



앞서 언급하였드시 함석헌 민중론의 고유한 점은 민중을 다만 사회 정치 경제적 존재로만 아니라 종교적 존재로 보았다는 점이다. 함석헌의 민중론은 점차 민중안에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민중신성론으로 발전했다. 필자는 민중안에 하나님이 존재하며 민중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함석헌의 사상을 민중신성 사상이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신인 일체사상은 인간평등, 인권존중의 혁명적 사회 사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령 우리 근대사에서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유교 신분제 사회를 갈아 엎으려는 동학혁명의 사상적 기초였다. 함석헌은 억눌린 밑바닥층 사람인 민중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종교사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특히 기독교의 신-인 동형론, 성육신, 성령의 내적 임재 사상에 기반한다. 이와 같은 사상은 간디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간디는 <영 인디아>에 쓴 글에서,'나는 모든 인간은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느끼는 축복받고 말로 표현키 어려운 무죄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매일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나 우리는 그분의 여전히 작은 소리에 우리의 귀를 닫고있다고 믿는다'(간디1955: 45, 47)고 말하면서 모든 인간안에는 신성이 있어 다 똑같이 존귀하다는 인간평등사상을 강조했다. 이는 간디의 비폭력주의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함석헌의 민중 신성 사상은 민중 불멸사상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님이 불멸이드시 민중도 불멸하다는 사상이다. 그가 후에 민중을 씨알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도 민중의불멸성, 즉 씨앗이 본질상 불멸하드시 민중도 불멸한다는 그의 민중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은 이 민중신성 사상과 불멸사상위에 근거한다. 함석헌은 말하길 '민중이 스스로 자기 생명이 불멸체임을 인식하게 되면 그럼 이제 자기 스스로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깨게 될 수 있을 게다' (함석헌 전집 14: 383).



민중 신성 사상은 민중의 인권과 사회적 평등의식을 일깨운다. 역사적으로 지배 계급에 의해 물건이나 노예처럼 취급되어 왔던 민중은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자각하게 된다. 동시에 민중은 그들 자신이 희생당하는 전쟁을 거부한다. 민중신성 사상은 그러므로 민중의 인권을 존귀하게 하는 민중 휴머니즘과 민중의 생명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민중 평화주의의 사상적 신앙적 근거로 작용한다. 1957년 쓴 글에서 함석헌은 이런 사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잇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딸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그 민중을 더럽다 하고,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아프게 하는 자다. 발은 땅을 꽉 디디고 서야하고, 머리는 하늘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요 나라일수록 민중을 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함석헌 전집3: 147).



함석헌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민중 신성 사상의 사회 사상적 의미는 세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민중 인권 사상의 고양이다. 특권층의 민중학대는 하나님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불경스런 일이 된다 (함석헌 전집 3: 287-8). 동시에 민중은 민중 억압과 학대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각하고 평등의식 갖게된다. 둘째, 민주주의 사상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민중은 하나님 계시의 통로가 됨으로서 민중의 목소리는 곧 하나님의 진리를 동시대에 전달하는 메세지가 된다 (함석헌 전집 2: 54). 그러므로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이다. 함석헌은 특권계급이 아닌 민중이 다스리는 민중 주권의 나라를 대망했고 이 사상위에서 반군사 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셋째, 평화 통일론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한국 전쟁이후 이승만 정권은 군사력을 동원한 북진 멸공 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했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모두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무력통일론을 반대하고 평화통일론을 줄기차게 주장했는바 이는 민중신성론에 기반한 민중 평화주의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민중도 다 같은 민중이며 무력통일론은 전쟁을 유발하며 그결과 희생을 치루는 것은 남북 민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었지만 50년대 이래 80년대까지 평화통일론은 적어도 남한 사회에서는 매우 위험한 금기시된 사상이었다. 이런 민중론의 사회사상사적 의미는 함석헌의 민중평화론에서 좀더 상세하게 다뤄진다.



2. 민중평화론



2-1. 반전 평화주의



2-1-1. 함석헌의 반전 평화 사상의 종교, 철학적 배경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동서양 종교와 철학 사상들의 영향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 기독교와 노장 사상이 주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여지며, 근대 사상가로는 톨스토이와 간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A. 기독교와 노장의 평화주의

함석헌 반전 평화주의 사상은 성서적 평화주의 (Biblical pacifism)에 기반한다. 그는 산상수훈과 예언자 이사야의 평화 사상을 통해 평화가 성서의 핵심 진리임을 강조했다 (함석헌 전집 14: 126). 함석헌에게 예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을 지지하는 교회는 잘못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1983: 4).



함석헌이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에 처음 눈을 뜬 것은 퀘이커 평화주의(QuakerPacifism)에 의해서였다 (함석헌 전집 14: 371). 1947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YMCA 현동완 총무로부터 2차 세계전쟁속에서 양심적 병역거부(Quaker Conscientious Objection)과 이로인해 감옥에 들어간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퀘이커들의 집단적인 평화운동(Quaker Peace Testimony) 이야기를 듣고 함석헌은 크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이 실제로 역사속에서 실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초 무교회 신앙을 신봉하던 시절, 영적 평화에 근거한 기독교 평화주의 신앙의 일단을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함석헌 스스로 고백하드시 그때까지도 기독교 신앙이 전쟁을 거부해야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이런 고백을 통해 우리는 함석헌의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평화주의 사상이 퀘이커 평화증언과 운동을 통해 비로서 각성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와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구호와 봉사활동을 펼친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을 만나게 되면서 함석헌은 퀘이커를 평화의 종교로 인식했으며 이는 그가 퀘이커 운동에 가입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 (함석헌 전집 3: 151; 안병무 2001: 386; 김영호 1991: 286). 1960년대부터 퀘이커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함석헌은 특히 그들의 평화운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함석헌 평화사상에 있어서 퀘이커 평화사상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본다.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은 노장 사상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 졌다. 1940년대초 함석헌은 노장 사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이는 2차 세계전쟁이후 도래 할 새로운 문명은 서구적인 것에서가 아닌 동양적인 것에서 찾아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함석헌 전집 20: 13-23). 그는 기독교 서양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사상으로 노장 철학뿐만 아니라 불교등 동양경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경전의 독서를 통해 그가 도달한 것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깨달음이었다. 이는 당시 함석헌의 주된 관심이 사회적인 것 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모아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례로 앞서 언급했드시 한국전쟁 전후 시기까지만 해도 함석헌의 주된 관심은 세계와 사회의 평화문제라기보다는 종교였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함석헌은 대선언을 발표하면서 노장사상과 불교등 동양종교와 기독교를 모두 아우르는 보편적 신앙, 무교회주의와의 공식적인 결별, 기독교 신자에서 종교 사상가로 전환하는 면모를 보였다. 함석헌의 반전 평화주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종교 사상의 토대위에 서는 것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상황속에서 표현되고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의 노장사상 공부가 그의 반전평화주의 사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한국전쟁이후 쓰여진 그의 글들속에서이다. 함석헌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후에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한다'는 노자의 말을 빌려 한국전쟁후 공적을 자랑하고 군인을 영웅시하는 남한의 군사주의적 사회분위기를 비판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14: 118). 또 1970년대 쓴 글에서 그는 노자 장자를 절대 평화주의자들로서 칭송했다 (함석헌 전집 20: 31). 함석헌의 비폭력사상도 노장 사상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전두환 군사쿠데타와 광주 대학살을 경험한 이후 함석헌은 정치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즉, 노장 사상의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점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경직된 정치현실로부터 현실도피주의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함석헌은 노자 장자가 정치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지켰던 것은 진정한 힘의 근원인 진리와 지혜를 구하고자 했기때문이라면서 자신의 입장을 노장 사상에 견주어 설명했다 (함석헌 전집 17: 409). 전두환 군사정권이 폭력적 탄압을 하던 1983년에도 그는 다시 폭력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은 무저항이라는 노자의 사상을 역설하고 있다 (함석헌 전집 12: 62). 노장 사상은 함석헌의 평화사상에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노장의 평화주의 사상을 통해 역사속에서의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던 함석헌은 평화를 궁극적으로 종교적 진리의 빛에서 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새 종교의 출현을 갈망했다.



함석헌에게 새 종교의 특징은 핵 시대에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3: 224-25; 김영호 1991: 283). 1955년 '새 시대의 종교'란 강좌에서 함석헌은 역사를 형성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종교의 힘을 강조했고 새 종교란 국가권력, 교리, 제도와 피안주의 신앙으로부터의 벗어나 영적으로 갱신되고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종교임을 강조했다 (함석헌 전집 3: 218-22). 함석헌은 이러한 새 종교의 가능성을 간디의 삶과 현실에서 발견했다 (함석헌 전집 7: 9-16). 정치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국가권력에 얽매여 노예 노릇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권위를 갖고 정치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종교를 새 종교의 모습으로 보았다. 평화는 새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 점에서 간디와 퀘이커 평화주의는 함석헌에게 새 종교의 영감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민족주의와 교파주의를 초월하여 오직 '진리'를 따라 살고자 했던 것은 그의 새 종교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4: 354). 함석헌은 평화주의를 축으로 기성 제도종교 (함석헌은 종종 이를 역사적 종교라고 부르기도 함)의 한계를 직시했고 또 진리의 종교로서의 새종교를 갈망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은 통렬했다.



B. 톨스토이와 간디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주목할만한 사상가는 톨스토이(1828-1910)와 간디(1859-1948)이다.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 있어 영향을 미친 많은 사상가들중에 이 둘을 주목하는 것은 함석헌 평화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이 두 사상가의 평화 사상간의 유사점과 차이가 도움이 되기때문이다. 함석헌이 이 두 사상가들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나이 20대때부터이며 이후 이들에 대한 함석헌의 관심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성(善性)을 믿었고 산상수훈을 '완전을 향한 인간진보의 이정표'로 신봉했다 (Tolstoy 1960: 120-21). 그는 기독교(카토릭, 개신교, 정교회)가 제도화 정치화 되면서 자신의 본질적 사명인 사랑의 법을 배반해왔다고 비판했다 ( Tolstoy 1960: 4; Brock 1981: 72).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는 '모든 강압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근거했다 (Hershberger 1953: 188). 평화 역사가인 브록 (Peter Brock)은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와 평화주의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가는 사람의 대적이다. 다른 무정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력과 동의위에 사회가 이뤄지길 원했다. 전쟁이란 인간을 가장 참혹하게 만드는 무력 행사이므로 전쟁 반대는 톨스토이의 실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Brock 1981: 73).



톨스토이가 무정부적이고 정치에 거리를 두는 평화주의를 표방했다면 간디는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비폭력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간디가 톨스토이의 비폭력정신과 무저항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이며 이러한 평화주의 사상이 둘 모두 산상수훈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Hershberger 1953: 187-88). 톨스토이와 간디는 서신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사상을 교류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자신의 비폭력주의 이상의 역사적 실천으로서 주목했던 톨스토이는 간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의 법을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현실 생활속에서는 폭력을 인정하고 필수적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을 모순된 현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Tolstoy 1944: 303). 평화역사가(peace historian) 피터 브록(Peter Brock)과 나이젤 영(Nigel Young)은 톨스토이와 간디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이들의 영향을 받고있는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하다.



간디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서구사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톨스토이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의 사상의 날카로운 면들은 간디에게서 부드러워졌다. 간디는 현존하는 사회를 증오심을 갖고 거부하기보다는 사랑의 정신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톨스토이와 달리) 정치적 영역과 비정치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정치적 행위를 통해 비폭력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톨스토이가 사해동포주의자였다면 간디는 충실한 인도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둘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유사성을 인정했다 (Brock and Young 1999: 73).



함석헌은 그의 글에서 톨스토이의 이름을 빈번히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무저항주의, 기독교 비판과 무정부주의에 기반한 반 국가주의, 인도주의 사상등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반영한다 (김성수 2001: 120; 안병욱 1991: 35). 톨스토이와 간디처럼 함석헌의 평화주의도 성서의 산상수훈에 기반하고 있다.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에 나타나는 무저항,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톨스토이와 유사한 점이라면 평화주의를 남북 통일문제에 적용하고 또 정치적 행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구했던 참여적 실천적 면모는 간디와 비슷하다. 함석헌은 세계 평화운동의 중심에 간디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간디를 흠모했으며 간디를 배움으로 인류는 어떠한 차별없이 평화롭게 살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함석헌 전집 7: 14). 함석헌의 반전 평화 사상은 톨스토이와 간디의 유사성과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철저한 무저항주의적 태도, 국가주의 비판과 비정치적 태도를 보이는 다른 한편에 정치적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평화통일론등 정치적 행동은 함석헌의 반전 반군사주의 평화사상에서 보이는 두가지 면모이다. 이 점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2-1-2.함석헌 반전 평화 사상의 이해



함석헌은 전쟁을 인간의 고질병이긴하나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싸운다해도 평화로운 수단으로 싸우는 길을 찾아야 하며, 무기를 갖고 싸우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2: 255). 함석헌은 기본적으로 전쟁은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 즉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으며 이런 인식 때문에 그는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중시했다(함석헌 전집 2: 231-32).



1958년 한국전쟁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은 글에서 함석헌은 그의 반전 평화주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함석헌 전집 14: 109-20). 함석헌은 말하길, 한국전쟁이란 남북의 동포, 즉 아버지 아들, 형제들이 서로를 적으로 알고 싸운 것인데, 지금와서 반성되기는 설령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얼싸 안으려 하진 못하고 왜 서로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14: 117). 이런 생각은 무저항 평화주의 사상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념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함석헌은 무저항주의의 원천으로서 종교적 진리 체험을 통한 영적 힘을 강조했다 (함석헌 전집 14: 117). 그는 말하길, 평화주의는 총을 포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혼이 각성되어야하며, 물질적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 혼일때만이 죽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 길외에 어떤 다른 길이 없다고 단언했다 (함석헌 전집 14: 127).



함석헌의 이런 주장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무력 통일론을 뿌리로부터 뒤흔드는 것이 됐다. 더욱이 당시 북한은 평화통일론을 내세우고 있었고 남한에서 평화통일론은 주창하던 조봉암은 사형당하던 때였다. 이런 정치 사회적 상황속에서 함석헌이 무저항 평화주의 사상을 주장했으니 이승만 정권이 가만둘리 없었다. 그의 주장은 이념적으로 반국가적이고 친 북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다행이 함석헌은 그가 북한에서 겪었던 공산주의에 의한 박해 이력때문이었던지 공산주의자로 몰리지 않고 50여일만에 경찰에서 풀려나왔다. 그리고 다시 쓴 자신의 기본입장을 해명한 글에서 그의 무저항 평화주의 사상의 종교적 근거를 재삼 설명하고, 현실속에서 패배주의나 군대의 폐지를 선동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적의 공격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4: 126). 이런 태도는 그뒤 1976년 다시한번 표현되었는데, 남북이 대치된 분단상황에서 평화주의를 주장한다면 북한 공산주의가 공격해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을 하는 함석헌은 남한체제에 해로운 반역자이거나 망상가가 아니겠냐는 검사의 비판에 대해 함석헌은 대답하길, 그것은 오해이며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해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다면 그 자신 몽둥이라도 들고 맞설 것이라고 했다. 덧붙이길 영적 체험이 없이 평화주의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함석헌 전집 14: 384).



이러한 함석헌의 무저항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상이 산상수훈의 사랑의 법을 그대로 따르려는데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함석헌 전집 17: 25-6).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적일지라도 그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를 선택할 것'(Brock 1981: 73)이라고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입장과 유사하며 또한 노자의 사상과 유사하기도 하다. 이점에서 함석헌은 평화주의의 가장 긴요한 요소로서 종교적 진리 체험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종교적 신앙과 이성을 똑같이 존중하며 추구하는 종교인이었던 그는 정치적 영역과 종교적 진리 사이에 있는 현실적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즉, 산상수훈과 적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 평화주의자였던 함석헌은 그러나 이 세상에서 평화주의 이상을 완전한 실현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순진무구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함석헌은 약자와 희생자를 보호하기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싸울 수 있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그러나 이를 정치적 당파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종교적 진리, 기독교 신앙으로 말하자면 핵심인 사랑의 법을 따라 행동하려는 실천적 평화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함석헌은 절대적 반전 평화주의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를 신봉해서 그런 것이 아니며, 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이상론자였기에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절대평화주의는 이성적인 현실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들어 함석헌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가 전 창조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에 절대적으로 전쟁을 반대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함석헌은 세계 현실을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앞서 함석헌을 망상가로 비난하던 검사로 대변되는 정치 현실론자들은 북한을 현실적 위협으로 강조하면서 한국상황에서 평화주의는 망상일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북한의 위협을 막기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길이 오히려 서로 망하는 길로 가는, 그러기에 그런 현실론이 망상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즉,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의 길을 가는 것이 참된 현실주의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앞의 정치 현실주의자들의 평화론을 현실주의 평화론이라 한다면 함석헌의 평화론은 평화 현실주의로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 함석헌은 오늘날 평화란 성자들이 갖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과학적 사실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2: 283). 그는 평화의 현실적 정치적 방안으로서 제 3세계 민중들이 주축이 되는 세계평화기구의 구성을제안하기도 했다 (함석헌 전집 12: 283-84). 그는 교리나 원리원칙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절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남북한 분단 현실속에서 평화적 통일의 정치적 방안을 제시했던 참여적 실천적 평화주의자였다.



2-1-3.민중 평화주의



함석헌은 민중은 평화를 사랑하며 전쟁을 미워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판단은 함석헌의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라기보다는 민중에 대한 그의 종교적 체험적 이해에 근거한다. 함석헌이 보기에 민중이 전쟁과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언제나 전쟁과 군사주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민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전쟁과 폭력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게끔 되어있다. 필자는 이러한 민중의 본 마음을 '민중 평화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반면에 정치 경제 권력자들은 민중의 평화지향을 왜곡시키고 민중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인간본성 의식을 조성하고 그결과 민중들간에 전쟁을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함석헌은 민중이 전쟁의 희생자가 되기보다는 평화운동의 주체가 되기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각성되어서 권력자들의 조작과 세뇌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러한 민중각성을 위해서 새종교의 출현을 갈망했다. 이것이 함석헌의 민중 평화주의의 사상적 틀이다.



함석헌은 민중을 하나님의 모습을 간직한 사람, 조작될 수 있는 사람, 평화 창조자등 다양한 면으로 이해했다. 첫째 민중은 신적 모습, 예를들면 양심을 가진 이로서 이해된다. 함석헌은 민중은 영적인 존재로서 아무런 억압없이 양심에 따라 살 때 평화는 실현된다고 믿었다 (함석헌 전집 9: 293-294). 그의 씨알 불멸 사상은 민중평화주의 사상을 강화시킨다.



괜히 학자들이 전쟁이란 불가피한 거라 이 따위 소리를 해서 이날까지 왔는데 씨알로서 생각할 것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사실 전쟁을 하면근본적으로 생각할 때 이는 누가 봤고 해는 누가 봤나? 그러면 이야 소수의 지배자들이 본 거고 생명을 내놓고 희생이 된 것은 민중이 희생이 됐지 뭐 있어. 그건 뻔한 건데 그걸 개중의 어떤 놈에게 상을 조금 주어 가지고 분리시키는 바람에 민중계열에서 이탈해 가지고 배반을 하고, 지금은 그것을 계획적으로 하고 있지 않소? 그런데 민중이 그 점에 자각만 하면 전쟁을 없어지고 그만둘 수 있어요. 씨알은 불멸체거든.씨알 그 자체는 영원히 불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뭐 영원불멸이라고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영원이라 그런거요. 하나님이 영원이라 그러지만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계시다는 걸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경험하는 것은 씨알에게서 보지 다른데서 보는게 아닌데 그러면 민중이 스스로 자기 생명이 불멸체임을 인식하게 되면 그럼 이제 자기 스스로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깨게 될 수 있을 거예요 (함석헌 전집 14: 383)



평화주의라면 몰라서 우습게 여겨서 그렇지 사실은 힘중에 이런 힘보다 더 큰 힘이 어디있어요? 그거는 칼 하나 안쓰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이런 무서운 정신력을 가지는 씨알은 불멸체라 그말이오. 불로 태울 수도, 물에 빠뜨릴 수도, 칼로 찍을 수도 없는 것이 씨알이라 그말이오. 우리 민족의 제일 과제인 남북통일도 그 외에 길이 없다고 나는 그래요(함석헌 전집 14: 386).



민중이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천부적으로 평화적이라면 왜 민중은 서로 싸우는가? 이 대답은 함석헌이 민중을 조작될 수 있는 대중이라고 규정한데서 찾아질 수 있다. 함석헌은 민중 신성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민중을 숭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중은 정치권력자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취약한 대중이라고 보았다. 좀더 상세히 말하자면 함석헌은 강대국의 호전적 정치인들과 군수 산업가들과 무기 상인들을 비롯한 약소국의 지배자들 또한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들로 보았고 이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민중을 세뇌시키고 조작한다고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4: 383; 17: 67). 전쟁이 일어나면 결국은 민중끼리 싸우고 희생당하는 것이지만 민중이 본래 호전적이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자들과 전쟁 기업가들의 조작과 강압 또는 속임수에 걸려 싸우게 된다는 것이 함석헌의 설명이다.



함석헌의 독창적인 민중평화론은 이런 이유에서 정치인들, 전쟁산업가들, 그리고 제 3세계 독재자들을 전쟁 주범으로 인식하며 반면에 민중은 전쟁의 희생자로서 옹호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함석헌은 권력 게임을 하는 정치인들이 개입하지 않는 한 민중들간에는 결코 전쟁은 없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민중을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기업가나 정치인들과 구별했다(함석헌 전집 14: 383). 그는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될 때 전쟁은 없어지게 될것이라고 믿었다. 민중이 다스리는 정치란 무엇을 어떤 정치 체제를 의미하는가? 이것은 현실적인 정체제도로 볼 때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이 말한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정치는 어떤 체제론적인 것이기보다는 현실 국가주의 비판에 주안점이 두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제자인 안병무는 함석헌을 무정부주의 사상가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함석헌이 점차로 노장 사상에 깊이 빠져간 것은 이런 반국가주의 민중 주체의 정치 이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암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좀더 연구되어야 할 주제로 남는다.



함석헌은 정치를 불신했다. 정치인들은 필연적으로 권력숭배로 빠진다는게 그의 인식이었다(함석헌 전집 9: 288). 이 또한 함석헌의 정치 비판이 매우 종교적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의 정치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함석헌이 경험한 정치란 오직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하길, '정치인들은 민중을 나라의 주인으로가 아니라 노예로 생각한다'(함석헌 전집 10: 19-20). 안병무는 함석헌의 민중사상은 억압정치에 대한 그의 경험의 소산이며 그런까닭에 강렬한 저항의식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안병무 2001b: 69-70).



그렇다면 왜 민중은 쉽사리 정치와 경제 권력자들에게 조작되는가? 함석헌은 민중에게 있는 인간적 부정적 본성, 즉 많은 수준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요인으로서 예를 들자면 이기심과 권력욕에서 그 대답을 찾았다. 특히 정치인들은 민중을 조작함에 있어서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했다. '전쟁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있는 한 없어질 수 없다'(함석헌 전집 12: 287); '배타적 민족주의는 역사진보의 장애물이다'고 함석헌은 강조했다(2: 363-64).



함석헌은 국가주의의 핵심은 권력이라고 보았다. 국가주의적 관점에서는 평화는 권력균형으로 보여진다. 함석헌은 이런 종류의 평화를 '도덕적으로 빈곤하고 현대국가의 내재적 한계'라고 비판했다(함석헌 전집 9: 211). 이 점에서 함석헌은 맹자의 옳은 통치의 정치를 주장했고 큰 나라보다작은 나라, 세계정부, 근본적인 정치혁명을 강조했다(9: 211).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선상에서 함석헌은 세계평화에 대한 장애물로서는 무기와 신기술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강대국들의 정치인들을 지목했다 (함석헌 전집12: 286). 그는 2차 세계전쟁이후 냉전과 세계 도처에서 수없이 진행되는 지역 전쟁들이 강대국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한다. '강대국들은 전면전을 피한다제국주의의 더 나쁜 형태이다'(함석헌 전집 12: 285).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한국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주요인이면서 동시에 세계전쟁을 일으키는 악한 이데올로기들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민중사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철저하게 맞섰다 (안병무 2001b: 75-78; 진덕규 2001: 45).함석헌은 민중안에 있는 권력과 군사주의를 추구하는 인간본성에서 전쟁의 요인을 보면서도 다른한편으로 그런 악한 이데올로기들을 극복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역사적으로 책임적인 존재로서 민중을 보았다. 그런 까닭에 함석헌은 민중 각성과 교육을 특히 강조했고 이 점이 함석헌 민중평화주의 사상의 핵심요소가 된다. 함석헌이 민중각성과 교육에서 종교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었고 참된 종교의 필요성을 줄곧 강조했다. 그의 일생동안 지속되었던 종교적 진리에의 추구는 민중의식을 각성시키고 증진시키는 길로서 종교를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민중운동들 특별히 민중신학과 통일신학의 형성에서 함석헌의 민중종교사상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함석헌은 민중이 각성될때에 평화운동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50년대 함석헌은 민중의 각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반전 평화주의 사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것이라 봐야한다. 일례로서 그는 주장하기를, '만약 자유로운 민족 정신 민중 정치가 이뤄졌다면 한국 전쟁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전집 14: 116-7).



2-1-4.한국 상황속에서 전개된 함석헌 평화주의 사상의 실천과 의미



무엇보다 먼저 함석헌의 절대 평화주의는 남북한 분단 상황속에서 줄기찬 반전 반 군사주의적 평화 통일론으로 나타났다.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이 주장해 오던 무력통일론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통일이 아무리 중요한 과제라도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절대적 반대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교훈은 군사적 통일의 무용성이라고 역설했다 (함석헌 전집 14: 118). 전후 남북한 간에는 여러 차례 전쟁위기가 있었다. 일례로, 1968년 북한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공겪했을 때 박정희 정권은 통일전쟁의 불가피성을 선전하며 무력증강책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때도 함석헌은 절대 반전, 반군사 평화주의에 입각해 민중은 결코 전쟁을 원치 않으나, 오직 소수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전쟁을 기

도할 뿐이라며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0: 25).



1960년대 그는 평화적 통일의 길을 세 단계 방향으로 제시했다. 첫째는 남북한 간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호군축이며 셋째는 평화를 국가 정책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당시 남북한의 정치 군사적 대결 상황과 매우 경직된 남한의 군사정권아래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이명현 1991: 276). 그러나 함석헌의 평화주의 통일론은 후에 7.4 남북 공동성명의 평화 원칙으로 나타났고 1980년대 기독교 에큐메니칼 진영의 민주화 통일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남북간 평화적 관계형성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두번째, 함석헌의 평화주의는 군사주의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비판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60년대 이후 그의 신념에 찬 반군사정권 투쟁에서 잘 드러났다. 함석헌이 박정희 군사쿠데타를 비판하고 그후 줄기찬 반군사정권 투쟁을 벌인 것은 군인정신 갖고는 결코 참다운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때문이었다 (함석헌 전집 10: 43). 함석헌의 예언대로 박정희 군사정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재를 하려했고, 특히 1970년대 초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고 무력증강책등 공포정치를 조장할 때 함석헌은 단호하게 군대란 폭력의 노예일 뿐이며 영웅주의를 부추기면서 독재를 정당화하려 한다고 저항했다 (함석헌 전집 12: 36). 이는 함석헌의 일관된 반군사주의적 평화주의에 근거한 정치적 행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점에서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은 민주주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듣고 나서 크게 감동했고 한국전쟁이후 남한에서 병역거부가 확산되기를 바라면서 이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전집 4: 73). 간디의 아쉬람을 본 딴 '씨알 농장'을 설립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설파했는데 그 결과 당시 징집 연령에 있던 홍명순이 영향을 받아 병역거부를 실천했다 (홍명순 1993: 3; 김성수 2001: 163). 함석헌 스스로도 자신이 젊었다면 병역거부를 했을거라고 말하곤 했다 (함석헌 전집 9: 394).



남한에서 종교적 병역거부를 실천해온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이다. 이들의 병역거부는 병역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하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신앙을 위한 병역거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종말론적 신앙을 신봉하면서 세상과 자신들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세속사에 초연한 신앙적 삶을 강조한다 (Cross and Livingstone 1997: 865).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는 비록 나타나는 결과는 같다할지라도 동기에 있어서는 세상안에서의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하는 퀘이커의 양심적 병역거부와는 차이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Brock 1991: 270). 함석헌은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비사회적인 종말론적 신앙에 근거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보다는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신앙에 근거한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재화된 종말론의 신앙적 태도를 갖는 퀘이커 입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퀘이커처럼 함석헌은 개인의 양심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의 핵심요소로 보았다.



함석헌은 군대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군인이란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므로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함석헌 전집 17: 139-40). 궁극적으로 군대란 폐지되어야한다는게 함석헌의 믿음이었다 (김조년1991: 111). 그러나 앞서 언급했드시, 함석헌이 군대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창한 것은 아니며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종교적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다. 즉, 그는 종교적 양심의 각성에 의해 군사주의가 거부하게 되길 희망했고 이런 목표를 갖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강조했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사회적 평화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촉매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함석헌에게 평화주의 신앙은 종교적 진리, 즉 기독교 신앙의 본질의 회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강제징집제를 유지해 온 남한에서는 별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 운동은 사회 평화운동으로 사회적 관심을 얻어가고 있다. 한국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이미 반세기전에 함석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 오늘의 시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함석헌의 평화주의 사상은 그의 기독교 비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함석헌은 인간의 영적 삶의 왜곡, 본능과 충동에 이끌리는 물질주의적 삶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종교의 역할을 중시했다 (함석헌 전집 2: 231). 1959년 평화주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잘못을 조명한 글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전쟁의 주범 또는 국가의 전쟁을 정당화시키며 타협했던 카토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를 통렬하게 비판하고있다 (함석헌 전집 2: 232-33). 초대 기독교는 세속권력에 맞서 싸우며 순교를 통해 신앙을 지켰으나 그 이후 기독교는 세상 권력에 무릅을 꿇었고 그 결과 군사주의가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는 새 문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신적 영적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전쟁참여와 군사주의에의 동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1968년 한국정부가 베트남에 파병하기로 결정했을 때 단식을 하며 이를 저지하려고 맞섰다. 이 당시 한국 정부의 베트남 파병에 행동적으로 저항한 사람은 함석헌 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도 침묵했다. 그는 한국정부의 베트남 파병을 민족의 도덕적 수치라고 보았고, 이런 민족의 잘못을 훈계하지 못하고 단지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는 한국군의 승리와 안전한 귀국을 기원해 주는데 그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함석헌 전집 14: 18). 함석헌은 국가주의로부터 교회의 해방, 즉 초대교회에서 보여졌던 자유로운 영적 힘의 회복을 오늘날 종교개혁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함석헌 평화주의 사상은 현실 종교비판 사상과 연결된다.



2-2. 비폭력주의



함석헌 민중 평화론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평화사상은 비폭력주의이다.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크게 세가지 영향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장배경이며,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고, 셋째는, 간디의 비폭력주의이다. 함석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평화로운 가정 분위기와 마을 환경이 자신의 평화 애호 성격 형성에 많은영향을 끼쳤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좀더 깊은 사상적 영향으로는 기독교 사상이 원초적인 것으로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함석헌은 기독교 성서에서 산상수훈을 특히 좋아했다(함석헌 전집 4: 186). 산상수훈은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예수의 가르침인데 기독교 평화주의자들, 특히 비폭력 무저항주의자였던 톨스토이가 신봉했고, 기독교 신자가 아닌 비폭력 저항운동의 기수였던 간디도 기독교의 진리중 진리라며 좋아했다 (Tolstoy 1960: 120-121; Hershberger 1953: 187-188). 함석헌도 그 자신 어릴 적부터 산상수훈을 좋아했고 평생 자신의 평화사상의 기독교적 기초로 삼았다.



후에 그가 20대때인 1920년대 중반 일본 유학시절, 함석헌은 민족 독립을위해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길을 택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을 때, 결국 기독교 신앙의 길을 통한 민족 해방운동을 하기로 결심하는데, 그가 사회주의의 정신에는 경도되면서도 그 길을 자신의 길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사회주의가 수단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Ham Sokhon 1969: 10).



함석헌의 비폭력주의가 정치 사회적 실천론으로 활발하게 나타나게 된 것은 1950년대에서부터이며 이때 결정적영향을 끼친 이가 간디이다. 함석헌이 간디를 처음 읽기 시작한것은 오산학교 학생시절(1921-23)이었으니 비교적 일찍 간디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간디를 처음 알게된 이후 간디의 <영 인디아>를 구독해 읽는등 함석헌의 간디에 대한 관심은 매우 깊었던것으로 나타난다. 그도 그럴것이 1920년대 30년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구했던 함석헌으로서는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구하고 있었던 간디에게 공동운명의식을 느꼈을 것이며 간디의 추구하는 방법이 매우 종교적이면서도 민중과 함께 하는 운동이었기에 같은 길을 추구하던 함석헌에게는 더 없이 조은 모델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가 영국 치하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는데 비해 함석헌은 <성서 조선>誌에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글을 발표하고 오산학교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일외에 사회운동으로서 간디와 같이 비폭력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오산학교에서 해직 후, 평소 그가 신념으로 갖고 있던 민족운동의 길로서 농촌(농사), 신앙, 교육을 함께 어우르는 활동을 하고자 농촌지역에서 공동체 학교를 시도했으나 이또한 민족해방운동 관련 조직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당함으로 좌절되고 출옥후에는 고향 농촌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함석헌이 간디를 다시 발견하고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속에서 간디의 사상을 적용하고자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간디의 갑작스런 암살이 있었던 1948년부터였다. 간디의 죽음을 접하면서 함석헌은 간디를 한국 상황에서 다시 고쳐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당시 함석헌은 개인적으로 그의 사상에 큰 흔적을 남기는 두가지 의미있는 경험을 하는데 하나는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억압의 경험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 평북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함석헌은 신의주 학생 운동을 옹호하다가 소련 공산당에 끌려가 구금과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급기야 1947년 월남하는데, 이 경험 이후 함석헌은 사회주의의 인간 평등 정신은 높게 평가하면서도 현실 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하게 된다. 같은 해 남한에 살던 함석헌은 세계 YMCA 대회에 참석차 미국에 다녀온 서울 YMCA 현동완 총무로부터 세계 2차 전쟁당시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벌였던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이야기를 듣게 된다.



퀘이커들은 기독교 평화주의 신앙을 신봉하는 평화교회에 속한 기독교 종파인데 이들은 기독교 평화주의 신앙에 근거해 세계 1,2차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대안적 봉사활동을 실천했다. 앞장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함석헌은 퀘이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고 국가간 전쟁에 항거할 수 있구나' 라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은 그동안 국가주의의 노예가 되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종교가 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 특히 국가간 전쟁 와중에서 오직 자국 승리의 기도에 열중할 뿐인 軍神의 종교로 전락한 기독교에 대한 절망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또 해방직후 치열한 남북간 이데올로기 갈등, 사회내 각 정파간 다툼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함석헌의 평화에 대한 갈증과 관심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이런 사회상황과 개인적 경험들을 겪으면서 함석헌은 1948년 간디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평화의 관점에서 간디를 다시 고쳐 읽기 시작했다고 적고있다.



함석헌이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두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간디 비폭력주의 운동이 단순히 정치 전략적 운동이 아닌 (종교적) 진리를 구하는 사상운동이라고 본 것이다. 함석헌은 비폭력주의는 단순히 정치 투쟁의 한 방법론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의 변혁을 동반하는 인간혁명이자 사회혁명의 길이라 믿었다. 둘째는, 함석헌은 간디 비폭력 운동이 민중의 각성 운동이며 민중의 참여로 이뤄지고 있음에 크게 동감했다. 진리를 구하는 구도적 사상성과 민중성, 이 두가지 점에서 함석헌은 간디를 높게 평가했고 그를 깊이 따르고자 했다. 그가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나라를 재건하는 길로서 간디의 길을 따르자고 주창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함석헌은 그 자신 간디의 정신과 운동을 실천하고자 1957년 간디 아쉬람을 본따 '씨알 농장'을 세우고 청년 교육을 시도하며, 이듬해엔 간디연구회도 만들기도 했다.



함석헌의 비폭력주의 사상의 사회사상사적 의미는 몇가지로 평가될 수 있다. 첫째,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평화적 민주혁명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재평가 되고 주목되어야 한다. 함석헌은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서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선도적 인물이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 모든 지성인들의 침묵을 깨고 군사 쿠데타의 비도덕성을 질타한 이는 함석헌이었다(송건호 1991: 202). 1961년 군사쿠데타 직후 사상계에 쓴 글에서 그는 5.16 쿠데타는 무력을 동원한 것이기에 4.19 학생혁명보다 도덕적으로 낮은 것이라고 비판했다(함석헌 전집 17: 129). 더 나아가 무력을 본질로 삼는 군인은 정치에 참여해선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렇게 그 첫 시작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질타했던 함석헌은 그 이후 반 군사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데, 그의 군사정권 비판의 본질은 무력의 사용 즉, 폭력의 정치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의 반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은 정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사회를 민주주의 정신위에 세우려는 사회운동이요, 정치 전략적 운동이라기 보다는 신념과 사상운동이라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함석헌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비폭력주의를 일관되이 지켜 나갔고 또 민주화 운동 그룹에게도 비폭력 정신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정권으로 영구 독재를 꾀하면서 학생운동권과 재야 운동권을 폭압적으로 탄압할 때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폭력적 투쟁 주장도 나왔으나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배경에는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의 호소가 있었다. 당시 이를 잘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백기완은 함석헌의 비폭력주의에 매우 심기가 불편해 하면서 함석헌 영감은 다 좋은데 그놈의 비폭력 주장이 문제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 비폭력 민주혁명사에서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높게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민중운동의 진보이다. 함석헌이 비폭력주의를 주창한데는 민주화 운동이 소수 각성된 엘리뜨 운동이 아닌 민중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민중의 운동이 될 때 민주화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은 3.1운동이다. 함석헌 그 자신이 직접 참여한바 있는 3.1 독립만세 운동은 조선 민중이 처음으로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각성하고 세계 만방에 외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함석헌은 평가한다(함석헌 전집 17: 74). 그동안 나라는 '이씨'의 나라였지 민중의 나라는 아니었다. 왕과 귀족들이 나라의 주인이었고 민중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라를 잃고나서야 나라의 참 주인이 누구인가가 증명되었는데 그것은 나라를 찾겠다고 나선 민중들이며, 그 증거가 된 사건이 3.1 독립 만세운동이다.



함석헌은 3.1운동이 민중의거국적 참여로 힘차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비폭력운동이었기때문이라고 본다. 이 점은 사회학자 신용하도 동의하며 주장하는 점이다. 신용하는 만약 3.1운동이 폭력을 동반한 독립운동이었다면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신용하 2001: 213-214). 태극기외의 아무런 무장을 할 필요없이 참여할 수 있는 비폭력 만세 운동이었기에 일반 민중들이 비교적 쉽게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 점을 그의 민중평화론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조선민중이 아무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민족 독립을 청원하고 나선 것은 민중이 국제정치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적이라도 그들 안에 선한 양심이 있다는 믿음에서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더 나아가 세계 민중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해 그리 했다는 것이다. 양심을 일깨울 때 참된 변혁은 일어난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민중은 비록 적일지라도 그의 양심을 움직이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며 바로 이 점이 비폭력민중 운동의 핵심정신이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핵심도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실현하는 운동이 되는 것이다. 민중이 믿는 바대로, 민중이 조아하는 민중적 방식으로 일어난 운동이 3.1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운동이었기에 3.1운동은 비록 독립 쟁취는 못 이뤘으나 그렇다고 실패한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한 운동이었다고 한다. 함석헌은 한국 민중운동의 성공적 모범으로 3.1운동으로 드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 자신 3.1운동 참여의 경험을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함석헌 전집 4: 126). 반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도 3.1운동 같이 나라의 주인이 민중임을 밝히는 운동이어야 하지 단순히 정권 타도 운동으로 격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함석헌의 소신이었다.



민중 주권이 실현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본연의 목적이며, 그런까닭에 민주화 운동은 민중이 각성되고 주체가 되어 참여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폭력의 사용은 안되며, 민중의 선한 양심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비폭력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힘석헌의 기본 생각이었다.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이와 같이 민중 주권의 참된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혁명, 민중 본성인 양심을 일깨우는 인간혁명 사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의 비폭력주의는 그의 민중 평화론의 핵심요소가 된다.



결론



우리는 함석헌의 독창적인 민중론을 검토하고, 민중 평화론를 구성하는 주요사상으로서 반전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20세기 후반기 한국사회에서 함석헌 민중평화론이 갖는 사회 사상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함석헌의 민중 평화론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부각되는 평화운동의 사상적 기초와 방향을 얻게 될 것이다.



1) 함석헌 민중 평화론은 오늘날 반전 평화론의 사상적 기초이며 평화운동의 사회적 실천방향을 잡아준다. 우리 사회에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는 전에 없는 일이다. 미국 영국의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운동도 전에없이 거센 사회운동으로 일어났다. 30여년전 베트남 파병당시와 비교해 봐도 현격히 다른 현상이다. 당시에는 함석헌 홀로 단식으로 베트남 파병의 비도덕성을 질타하고 한국 정부의 결정에 저항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최근에 와서이다. 종교적 신앙에 입각해서 병역과 집총거부를 해온 이들은 있지만 병역거부 문제가 반전 평화의식과 연관되어 일어난 것은 최근에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운동도 전에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소위 통일운동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전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른 남북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의 수는 수만명씩 되며 남북 경제교류는 10억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우리네 밥상위에 함경도 북어가 오르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이 금강산으로 수학여행가는 시대가 되었다. 북한 신문을 자유로이 보게 된 것은 이미 십수년전부터의 일이며 김정일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고 하니 남북민간에 자유로이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시대도 곧 오리라 짐작된다. 이런 변화의 다른 한편으로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과 갈등은 또 예측불허이다. 서해상에서 꽃게잡이철만 되면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며 양측간 해상 전투로 인해 남한측만 수십명의 사상자가 난 것이 배로 엊그제이다. 북핵 위기론으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으나 다행히 6자회담에서 극적인 타협으로 전쟁의 고비는 넘겼다. 남북민간의 경제 교류와 방문은 진전하는데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여전한 것은 왜일까? 이것은 함석헌의 민중평화론에서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아직도 남북간 관계가 정치적 이해관계, 즉 정치 권력자들의 패권주의아래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정치권력자, 군수 산업가가 한반도의 운명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정치적 주권을 확보하는 일, 미국이란 강대국의 정신적 예속, 물질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중요한 과제이다.



2) 남북관계를 보는 관점도 기존의 통일 당위론에서 점차 평화 현실론(공존 공영론)으로 변해가는 추세이다. '평화가 통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주장이 최근 참여연대 부설 참여 사회연구소가 개최한 해방 60주년 기념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연사와 좌표' 심포지엄에서 최장집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OhmyNews 2005, 10,22). 최장집은 '통일을 한국민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면 남북한 간 일방적인 사회 경제적 차이로 인해 폭력적인,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하게 불평등한 두개의 사회를 통합하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수반할 것' 이라면서 북한 사회를 경제적 저발전과 전체주의적 병영국가 체제로 규정하는 반면 남한을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엔 충분히 발전된 민주주의를 갖지 못한 사회'로 규정하여 자신의 논거를 세우고 있다. 사실 통일논의에 있어 평화가치의 우선성은 이미 거론되어 온 것으로 최장집의 주장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 분출로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갈등은 창조적 진보를 위한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갈등들을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 아직 미숙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회가겪고있는 사회 갈등 현상은 다양한 각도의 진단이 요청되는 새로운 사회학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 오랜 군사독재 시대를 지나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를 거치면서 오는 사회 집단간, 이념간, 세대간 갈등이면서 동시에 탈냉전이후 세계화, 정보화의 흐름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과 환경 생태 탈권위 평화지향 가치중심의 삶과 기존 삶의 패러다임의 갈등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런 갈등이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되는 문화가 아니라 사회발전과 진보를 향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비폭력 평화 문화의 길을 구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우리는 함석헌의 비폭력주의 사상과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 사상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3) 평화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평화를 구조적 문제로 인식할 것을 요청하면서 평화의 정의를 전쟁의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개념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문제의 해결등 정의로운 사회 구조 형성으로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로 설명한다 (Galtung 1996: 2-9). 정치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는국가안보와 연결되며 군사력 증강론은 평화의 필수조건으로 간주된다. 평화를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군사력 증강론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선 옹호된다. 그러나 군사력을 통한 전쟁억제론은 소극적 평화에 한정되며, 군사력 증강은 결국에는 전쟁을 초래하는 전쟁준비일뿐이라는 비판은 평화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된다. 평화란 개념은 이렇게 역설적이며 모순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부국강병론에 찬성하는 비율은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 달 중앙일보가 조사한 한국인 의식구조에서보면 국가안보를 위한 군사력 증강론에 찬성하는 비율이 72.7%에 이르고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비율도 66.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중앙일보 2005. 10.14). 한마디로 군사력을 가져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의식이 우리 사회일반의 다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 평화 번영론, 동북아 평화의 균형자론을 제안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도 자주국방을 강조하면서 첨단 무기 매입을 위해 군사비를 증액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일, 그리고 남북한간의 평화관계 형성을 통해 동북아 평화 균형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다른한편으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첨단 무기 매입을 위해군사비를 증액하는 자주국방론을 펼치고 나서는 앞뒤가 안맞는 모순적인 태도라 할 것이다.



즉, 한국이 첨단 무기로 군사력을 증강할 때 북한 또한 이에 걸맞게 군사력을 증강해야 할 것이며, 주변국인 일본 또한 손 놓고 가만 있을리라 없다. 이는 또 일본이 꾸준히 시도해 오고 있는 군국주의화 경향과 최근 들어 부쩍 노골화되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군사 대국화 기도에 정당성을 제공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대국이며 일본 또한 당장이라도 핵무기 수백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동북아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동북아 평화 균형자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과 군사력 증강을 통한 자주국방의 길을 추진하는 것은 어떤 일관성이 있는가? 역사상 많은 외침과식민지를 경험했던 민족이기에 자신을 지킬 힘(군사력)의 필요성에민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선제 공격론(preemptive attack)을 공공연하게 외친 부시정권을 제외하곤 모든 국가의 군사력 증강론은 자위용이지 공격용을 천명하는 국가는 없다.



국가안보를 위한 군사력 증강론이 이웃 나라에게 군사적 위협이 되고 결국엔 국가간 군사적 긴장과 전쟁을 초래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는 무한정한 군비경쟁을 초래하여 사회발전에 역행한다. 우리가 동북아 강국들 사이에서 평화의 균형자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평화주의의 길을 과감하게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동북아 민중들의 신뢰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이점에서 미국의 무기 구입 강요를 물리치고 무기 구입 비용 10억달러를 빈곤퇴치 예산으로 돌린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시도는 본받을 만 하다. 그는 말한다.



매년 수백만명을 희생시키는 기아는 대량 학살 무기들중에도 가장 최악의 무기이다. 기아와 빈곤과 싸우고 발전을 증진시키는 일이야말로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참으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다. 가난을 극복하지 않는한 평화란 없으며 사회불의가 있는한 세계 평화란 있을 수 없다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 2005).













제 2강. 함석헌의 평화사상





정 지 석

평화연구 박사, 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1. 생애와 계승

함석헌(1901-1989)은 20세기 한국 역사 속에서 민족운동가,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 평화통일 운동가이자 평화사상가였다. 그는 1차 세계 전쟁 이래 세계 평화운동을 이끌어 온 미국의 퀘이커 평화본부(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로부터 '한국의 간디'로 평가되면서 1970년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는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실천가였다. 종교인이면서 사회 운동가였다. 그는 20세기 후반 한국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인물로는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민중 신학자 안병무, 역사가 김동길, 여성운동가 이태영, 이우정, 통일운동가 문익환, 언론인 송건호, 지명관, 김용준, 장기려, 한완상, 김용준, 서영훈, 오재식등을 비롯해 대통령 김대중도 그 자신 영향 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7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이문영은 김대중의 선민주 후 통일론과 이후 평화 통일론은 함석헌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 외에도 20세기 후반기를 살면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끼친 그의 투철한 민중주권 민주주의 사상, 반전 반군사주의 평화사상과 비폭력주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 자주의 평화통일 사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의미있는 사회 사상으로 살아있다. 그래서인가. 탈냉전 시대 여전히 이념 갈등속에 헤매는 우리 사회속에서 한완상은 '우리 시대에 참다운 원로는 함석헌뿐이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함석헌은 기성 교단(특히 기독교)에 의해 종교적 이단자로 낚인 찍혔고, 사회 정치적 권력자들에 의해서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요 선동가로 매도됐다. 잠시 한신대에서 동양사상을 특강하긴 했으나 학위를 가진 학자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학계에서건 종교계에서건 주류에서 배제당했다. 2001년 그의 출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문화관광부가 3월의 인물로 선정했고, 정신문화연구원이 그의 사상을 다루는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KBS등 주요 언론들이 그의 삶과 사상을 다뤘다. 그의 사상을 다룬 논문은 주로 신학계에 20 여편의 석사논문이 있고, 그외에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 2-3편의 석사논문이 있다. 해외 박사 논문으로는 영국에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다룬 논문(김성수, 1998)과 필자 또한 영국에서 함석헌의 평화 사상을 다룬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2003). 현재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격월간으로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고 있으며, 함석헌 연구자들이 매월 모이는 '씨알 사상 연구회'가 활동 중에 있다. 그리고 매년 3월 그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연례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함석헌은 학자라기보다는 사상가라고 보는 게 맞다. 체계적인 이론을 펼치기보다는 방대한 동서양 고전과 현대 사상을 두루 섭렵하는 가운데 시대적 통찰과 체험적 직관에 근거한 사상을 전개했던 사상가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독창적이나 중층적으로 나타나므로 한 가지 사상으로 정리하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강에서 태어나 1989년 서울대학 병원에서 임종하기까지 한반도의 20세기 역사를 살다간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가 살았던 한반도의 역사는 조선 말의 사회적 격동기였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1910-1945), 해방과 함께 온 미.쏘 열강의 남북한 분할 통치와 남북한 정치 엘리뜨들의 이데올로기 갈등과 분단(1948), 한국전쟁(1950-1953), 분단시대에서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으로 점철되어 있다. 세계적으로는 1차 2차의 세계전쟁이 있었고, 미쏘를 둘러싼 자본주의 공산주의 체제간 냉전의 시대였다. 함석헌의 평화사상은 이런 20세기 한국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동서양 종교와 철학 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2. ‘타고난 민중 평등 민주주의자'

함석헌이 태어난 평안북도 용강은 이씨 조선시대 서울 중심의 유교 신분질서에서 소외된 버려진 땅이었고 그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양반 상놈간 신분의 차이없이 모두 똑 같은 평민으로 평등하게 살았다. 함석헌은 이런 태생적 환경 때문에 자신은 '타고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어머니의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남녀간 차등의식을 갖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주류사회로부터 버려진 땅으로 소외되고 무시된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남으로서 인간평등의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함석헌의 민중사상은 이런 그의 어릴적 삶의 배경과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수 있다.

3. 기독교 민족주의와 무교회신앙을 거쳐 보편주의 신앙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에서도 개방적이었다. 함석헌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20세기 초는 일본이 식민지 강점 야욕을 노골화시켜가던 중이었고 나라의 전국방방곡곡 남녀노소 할 것없이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애국운동은 두 흐름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민족자강운동과 다른 하나는 유교 신분질서의 부패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회개혁운동이었다. 기독교는 이런 분위기속에서 들어왔다. 러시아 출신의 한국학자 박노자는 이런 싹이 이미 기독교 선교초기 기독교를 강대국의 종교로 인식했던 바로 강대국 선호주의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비판하는데 일리가 있다고 본다. 즉, 당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민중의 열망이 힘센 종교로서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던 그 현실 힘(무력) 증강 논리에 기초한 기독교 종교관이 오늘날 결국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권력을 출현시켰고, 현실권력의 한 부분이 된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적 성곽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기독교 신앙은 크게 세 단계로 발전했다. 첫번째는 그가 어릴적 받은 청교도적 장로교 신앙의 영향이다. 이는 교리의 철저한 준수, 교회, 성서중심의 반듯한 생활윤리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함석헌은 그의 어릴적부터 청소년기까지 이런 영향을 꽤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단계는 무교회 신앙의 영향이다. 이는 함석헌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난 후 교리중심의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을 품고나서부터 받아들이게 된 것인바 그가 20대 중반 일본으로 유학가서 무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성서강좌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난후 새로 시작한 기독교 신앙의 단계이다. 세번째 단계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넘어 기독교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신앙이다. 함석헌이 무교회 신앙의 진수는 그의 평생 지켜갔으나 무교회 신앙이 기독교라는 종교적 틀안에 있는 것으로부터는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계기는 그가 처음 감옥에 들어갔던 1940대 초반 두차례 들어갔었던 감옥에서 동양고전과 경전을 읽으면서 왔다. 불교와 노장 사상을 주로 읽었는데 이후 그가 도달한 결론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였다. 이 단계에 들어가면서 함석헌은 우찌무라 간조의 기독교 중심주의 신앙을 벗어난다. 함석헌이 동양 경전, 특히 노장과 유가 철학을 읽는데 자극과 가르침을 준 스승이 유영모이다. 기독교 보편주의 신앙 단계에서부터 함석헌은 동서양의 기성 종교를 넘어서는 새종교의 출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이 새 종교론은 그의 민중평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4. 민중 평화 사상

19세기까지만 해도 평화란 전쟁에 반대되는 말로서 비교적 단순한 이해가 가능했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평화란 매우 복잡한 개념이 되어왔으며 현재는 반전 반군사주의 문제뿐 만 아니라 인권 환경 민주주의 빈곤문제, 인종차별 종교갈등 문제등을 모두 포함하는 복잡하고 커다란 개념이 되어있다.

함석헌의 민중 사상에서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놓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함석헌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현실속에서는 언제나 객체로 취급되어 왔음을 개탄한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인정되고 역사를 이끌어가게 될 때 세상엔 진정한 평화가 이뤄진다. 이것이 함석헌 민중 평화론의 요체이다. 함석헌의 주장은 비교적 간명하다. 첫째 그의 주장은 민중은 본질상 평화라는 것이다. 둘째, 역사 현실속에서 민중의 평화를 파괴하고 저해하는 장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민중이 각성하여 평화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 민중론의 고유한 점은 민중을 다만 사회 정치 경제적 존재로만 아니라 종교적 존재로 보았다는 점이다. 함석헌은 민중안에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민중신성 사상을 펼쳤다. 종교적 신인 일체사상은 사회적으로 인간평등, 인권존중 사상의 기초가 되고 역사속에서 혁명적 사회 사상으로 작용했다. 함석헌은 '민중이 스스로 자기 생명이 불멸체임을 인식하게 되면 그럼 이제 자기 스스로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깨게 될 수 있을 게다'라고 말한다.

민중 신성 사상은 민중의 인권과 사회적 평등의식을 일깨운다. 역사적으로 지배 계급에 의해 물건이나 노예처럼 취급되어 왔던 민중은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자각하게 된다. 동시에 민중은 그들 자신이 희생당하는 전쟁을 거부한다. 민중신성 사상은 그러므로 민중의 인권을 존귀하게 하는 민중 휴머니즘과 민중의 생명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민중 평화주의의 사상적 신앙적 근거로 작용한다. 1957년 쓴 글에서 함석헌은 이런 사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함석헌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민중 신성 사상의 사회 사상적 의미는 세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민중 인권 사상의 고양이다. 특권층의 민중학대는 하나님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불경스런 일이 된다 (전집 3: 287-8). 동시에 민중은 민중 억압과 학대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각하고 평등의식 갖게된다. 둘째, 민주주의 사상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민중은 하나님 계시의 통로가 됨으로서 민중의 목소리는 곧 하나님의 진리를 동시대에 전달하는 메세지가 된다 (함석헌 전집 2: 54). 그러므로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이다. 함석헌은 특권계급이 아닌 민중이 다스리는 민중 주권의 나라를 대망했고 이점에서 반군사 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셋째, 평화 통일론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한국 전쟁이후 이승만 정권은 군사력을 동원한 북진 멸공 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했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모두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무력통일론을 반대하고 평화통일론을 줄기차게 주장했는바 이는 민중신성론에 기반한 민중 평화주의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민중도 다 같은 민중이며 무력통일론은 전쟁을 유발하며 그결과 희생을 치루는 것은 남북 민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었지만 50년대 이래 80년대까지 평화통일론은 적어도 남한 사회에서는 매우 위험한 금기시된 사상이었다.

민중은 그 본질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민중도 홉즈의 말대로 언제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속에 들어갈 수 있는 무한 욕망의 존재이다. 프로이드 또한 인간의 본능에는 공격적 파괴적 본능이 있어 전쟁과 폭력의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했는바 민중 역시 그런 잠재성을 가진 인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민중은 본질상 평화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이 일어나면 희생당하는 자는 언제나 민중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이를 본능적으로 직감하기에 전쟁을 좋아하지도 일으키지도 않는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민중은 본질상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중은 불멸의 생명을 내포하고 있다. 즉, 민중은 파괴적 공격적 본능에 따라 운명론적으로 살아야하는 가련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영원불멸의 신성이 담지한 창조적이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함석헌의 민중 평화사상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역사속에서 전쟁은 항시 있어왔다. 왜 그런가. 정치 권력자들이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이들은 정치 권력자와 무기상인(군수업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면서 민중을 세뇌하고 민중의식을 왜곡시킨다. 즉, 인간 내면의 파괴적 공격적 본능을 자극시킨다. 그리하여 민중이 흥분하여 전쟁을 지지하고 직접 전쟁에 투신한다. 정치인들이 민중의식을 선동하는데 가장 잘 동원하는 논리가 안보 이데올로기이며, 또 민족주의와 애국심(국가주의)은 민중의 감정을 쉽게 불타오르게 한다. 함석헌은 민중이 가장 쉽게 넘어가는 논리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고 하면서 탄식하곤 했다. 그랬기에 함석헌은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주의자였지만 후에는 민족주의를 초월하여 세계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창했다. 또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함석헌은 정치와 국가주의 사상을 극도로 혐오하는 태도를 일생을 통해 유지하고 반국가주의를 강조했다. 민중이 각성하는 길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어떻게 민중은 각성되어 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까.

첫째, 민중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함석헌의 민중론에 따르자면 민중은 본래 선한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으나 압제자와 착취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오염되었다고 한다. 이를 회복시키고 선한 양심을 증진함에 있어 함석헌은 종교가 그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함석헌이 보기에 종교 역시 타락되어 있고 오히려 민중의 본성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함석헌의 현실 종교 비판은 이 점에서 매우 통렬하며 그런 까닭에 기성 종교로부터 이단자라고 낚인 찍히게된다. 특히 그가 믿었던 기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신랄했다. 그에 따르면 본래 기독교 정신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인데 오히려 세상과 야합하여 권력자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를 함석헌은 역사적 기독교라 불렀고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가진 원(초대) 기독교 (Primitive Christianity)를 참 기독교(True Christianity)로 구별했다. 역사상 기독교는 국가의 시녀노릇밖에 못하는, 그럼으로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상실한 무기력한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 함석헌의 현실 기독교관이었다. 그러므로 민중을 각성시키는 종교로서 함석헌은 새 종교의 출현을 갈망했다. 새 종교는 민중의 종교이며 평화의 종교이며 세상을 변혁시키는 영적인 힘을 가진 종교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의 평화 사상은 필연적으로 현실 종교(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수반하며, 종교 개혁 사상으로 나타난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 사회악과 싸우기 위해 우리가 겨누어야 할 목표는 둘이다' (전집3: 146-47).

둘째, 민중이 각성되는 길은 민중 교육을 통해서이다. 학교교육은 국가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곳이기에 함석헌은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민중교육의 길을 택했다. 함석헌은 민중 교육의 장으로서 공동체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이 민중교육의 장으로 주로 활동하고 중시했던 것은 언론과 대중 강연이었다. 박정희 군사 정권에 들어선 직후인 1963년 군사정권의 부당성을 질타하고 전국 대중 강연 여행은 수만명이 몰려드는 대 성황을 이뤘다. 타고난 수줍음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함석헌의 대중강연은 수많은 민중들의 양심을 깨웠던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권력과 붙어있던 지식인층은 그를 선동가로 몰아 비난했지만 지금도 나이든 민중 층에서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가 민중의 가슴속에 있는 선한 양심을 일깨우고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함석헌이 민중 교육을 위해 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언론이었다. 주요 일간 신문에 함석헌은 글을 기고하면서 많은 민중들의 양심을 깨웠다. 특히 당시 장준하가 운영하던 월간 잡지 <사상계>을 통해 함석헌은 군사 정권, 제도권 종교를 비판했고 민중의식을 일깨웠다. 군사정권이 언론을 탄압하고, 사상계마저 폐간된 후 함석헌은 직접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이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탄압받아야 했다. 함석헌의 말대로 아무런 힘도 없는 일개 촌노가 만드는 이름없는 신생 잡지를 정권이 직접 나서서 탄압한 것을 보면 권력자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민중의식이 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만고불변의 가치이다. 당시 한국 시대상황에서 함석헌의 민중 각성론은 근본적인 혁명사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민중의 각성은 편협한 민족의식 또는 국가주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만인 평등의식, 보편적 세계관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중의식이 국가주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 가야할 진보의 방향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위해 반공 무력 통일론을 내 세웠고 국가 안보이데올로기를 강조했다. 남북 통일문제를 정권 유지의 도구로 이용했다. 한반도는 군사적 충돌이 항존하는, 전쟁 위험 지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상황속에서 함석헌은 일관되이 평화통일론을 주창했으며 군사독재 정권의 퇴진과 민중 주권의 민주주의 실현이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길임을 확신했다. 70년대 민주화 통일운동 진영의 '민주화 통일론'은 이문영이 평가한대로 함석헌이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 함석헌 평화사상의 역사적 사상적 전개





생애

역사적 상황

사상적

종교적 영향

개인적 경험

평화사상의 전개

1901

~1927

조선말기

일본식민통치

(제 1차 세계전쟁)

청교도적 장로교 신앙

서구 휴머니즘,

간디, 톨스토이

무교회신앙

3.1운동참가

오산학교(유영모)

동경유학(우찌무라간조)

기독교 민족주의

인도주의

민주주의

1927

~1937

만주, 중일 전쟁

무교회신앙

오산학교 역사교사

기독교민중사상

영적 기독교

1938

~1945

제 2차 세계전쟁,

민족해방

동양철학과 종교

(노장,유교, 불교)

2차례 투옥(1941~1943)

종교보편주의 사상

1945

~1957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이승만 정권

퀘이커 평화주의

간디

유영모

평북 문교장관-신의주학생운동 동조자로 투옥

월남(서울, 1947)

평화사상 투옥(1957)

간디 아쉬람(씨공동체)

무교회신앙과의 결별

경험적

반공주의

기독교평화주의

간디 비폭력사상

1960~1970

4.19민주혁명

5.16 쿠데타

박정희 정권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퀘이커리즘

(평화의 종교)

간디

퀘이커리즘 공부-미국 펜들힐과 영국 우드부록

박정희군사정권 반대

파병반대 단식

<사상계>폐간

평화주의(반핵)

평화통일 사상(중립화)

비폭력주의

민중(씨) 사상

1971

~1989

유신정권

7.4공동성명

박정희 암살

광주민중민주화운동

88서울 올림픽

노장 사상

<씨>지 발간

비폭력민주화 투쟁

장준하 의문사

투옥(1980.5.18)

88 평화위원장

민주화 평화통일론

비폭력 평화주의

반국가주의

윤리적 신비주의





■ 함석헌 평화사상의 역사적 사상적 전개


생애
역사적 상황
사상적
종교적 영향
개인적 경험
평화사상의 전개
1901
~1927
조선말기
일본식민통치
(제 1차 세계전쟁)
청교도적 장로교 신앙
서구 휴머니즘,
간디, 톨스토이
무교회신앙
3.1운동참가
오산학교(유영모)
동경유학(우찌무라간조)
기독교 민족주의
인도주의
민주주의
1927
~1937
만주, 중일 전쟁
무교회신앙
오산학교 역사교사
기독교민중사상
영적 기독교
1938
~1945
제 2차 세계전쟁,
민족해방
동양철학과 종교
(노장,유교, 불교)
2차례 투옥(1941~1943)
종교보편주의 사상
1945
~1957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이승만 정권
퀘이커 평화주의
간디
유영모
평북 문교장관-신의주학생운동 동조자로 투옥
월남(서울, 1947)
평화사상 투옥(1957)
간디 아쉬람(씨공동체)
무교회신앙과의 결별
경험적
반공주의
기독교평화주의
간디 비폭력사상
1960~1970
4.19민주혁명
5.16 쿠데타
박정희 정권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퀘이커리즘
(평화의 종교)
간디
퀘이커리즘 공부-미국 펜들힐과 영국 우드부록
박정희군사정권 반대
파병반대 단식
<사상계>폐간
평화주의(반핵)
평화통일 사상(중립화)
비폭력주의
민중(씨) 사상
1971
~1989
유신정권
7.4공동성명
박정희 암살
광주민중민주화운동
88서울 올림픽
노장 사상
<씨>지 발간
비폭력민주화 투쟁
장준하 의문사
투옥(1980.5.18)
88 평화위원장
민주화 평화통일론
비폭력 평화주의
반국가주의
윤리적 신비주의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1.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선생의 생애

정리 : 김정연(adorno27@hanmail.net) 
"그의 하는 바를 보고, 그의 의도를 살피고, 그의 습관을 관찰한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과 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 함석헌 전집 20권 등이 있다.



후기

시경(時經) 소아(小雅)편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항상 마음 한 편에 있어 왔기에 이 숙제를 못이기는 척 맡았습니다만 결과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함선생님의 생애를 짧게 요약 정리한다는 것은 저에겐 분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긴 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간단한 글이라기에 어설프게 끝을 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여러분들의 글들을 인용하고 덧붙이는 정도의 수고로움이었습니다. 부실하다 탓하지 마시고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은 함석헌 이라는 인물의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제 사적인 감상입니다. 많은 부분 김성수 박사의 "함석헌 평전"과  "www.ssialsori.net"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유영모.김교신.함석헌을 중심으로

양현혜 | 김성수 | 이동철 | 박경미 | 서현선 | 김진희 (지은이)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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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탐구했다. 자신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민족과 민중의 뼈아픈 경험을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근거를 두고 해석,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세 사상가의 역동적인 삶과 창조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 시대, 이 자리의 한국적 기독교의 의미와 실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과 그 해석의 깊이를 그들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1부 기독교 수용의 한국적 맥락



동아시아의 종교 전통과 한국의 주체적 기독교 수용

- 유영모, 김교신, 함석헌과 유불도 삼교 … 이동철

1. 들어가는 말

2. 동아시아 종교의 기본 성격

3. 유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4. 불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5. 도교의 기본 교의와 그 특성

6. 맺음말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종교적 대안들에 관한 연구 … 서현선

1. 들어가는 말

2. 유영모: 전통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배타적 진리관의 극복 모델

3. 김교신: 기독교적 권위주의 극복의 모델 -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체성 확립

4. 함석헌: 식민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의 극복 모델 - 근대적 주체성을 지닌 씨알 사상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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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적 기독교의 형성



동양사상의 우주론에 입각한 유영모의 신학 … 김진희

1. 유영모는 누구인가?

2. 유영모의 동양적 우주관

3. 유영모의 인간론

4. 맺음말: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접목



김교신, 함석헌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 … 양현혜

1. 문제제기

2. 우치무라의 두 개의 'J'

3. 김교신과 함석헌의 우치무라 사상 이해

4.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의 논리 구조

5. 함석헌의 역사 철학: 창조적 수고자로서의 조선의 사명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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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 김성수

1. 들어가는 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 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한국 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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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론과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1. 들어가는 말

2. 종교와 신앙을 말하는 태도

3. 하나님 이해

4.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해서 본 함석헌의 예수 이해 … 박경미

5. 속죄론에 대한 재해석

6. 맺음말: 그리스도와 하나인 인격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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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부분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에 포섭당했으며, 그 노예가 되었다. 물질주의라는 괴수에 사로잡힌 교회 마케팅의 현장으로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한 배반이다. 그리고 물질이건 권력이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성에 대한 추구는 위의 세 사람의 사상과 실천의 근저에 흐르는 동력이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 교회의 모습에서 예수의 생명과 신앙의 자유를 느끼기 어렵다면, 이 세사람의 삶과 사상, 실천에서는 깊은 믿음과 정신적 자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야말로 그들이 온몸으로 저항해서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지니는 울림은 우리 시대에 더욱 크게 다가온다. -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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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현혜

 최근작 : <김교신의 철학 : 사랑과 여흥>,<윤치호와 김교신>,<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 총 20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윤치호와 김교신》,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김교신의 철학: 사랑과 여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기류민의 신학》, 《야스쿠니 신사》, 《동화의 숲에서 절대자를 만나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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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성수

 최근작 : <함석헌 평전>,<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신진공고, 한국철도대, 방송대 영어과를 다녔다. 졸업 후 철도청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는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는 함석헌의 시신을 본 후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하기를 결심한 그는 1990년에 영국으로 떠났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 영국 에섹스대학(University of Essex) 역사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셰필드대학(University of Sheffield)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 책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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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동철

 최근작 : <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중국철학>,<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 총 19종 (모두보기)

 소개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연수하였다.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고 1997년부터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전과 미래연구소 소장으로서 문헌학, 번역학, 정보학에 근거를 둔 동아시아 고전학을 구상 중이며, 사전학, 도상학, 술수학, 박물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식인과 인문학』(공저), 『인간 동물 문화』(공저), 『한국학 사전 편찬의 현황』(공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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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경미

 최근작 : <행복하여라!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기독교와 세계> … 총 17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신학대학원장,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 없이 예수와 함께: 요한공동체의 문학과 신학』, 『행복하여라! 하느님나라의 사람들』, 『신약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새 하늘, 새 땅, 새 여성』, 역서로는 『갈릴리: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생태학적 치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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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서현선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현재 이화여대 강사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여성신학의 새로운 지평>(공저), <디지털 세대를 위한 기독교>(공저), <여성과 초대 기독교>(공동편역), <여성과 영성 신학>(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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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진희

 최근작 :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소개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Drew University Graduate School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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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백년을 살아보니

알라딘: 백년을 살아보니

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은이) | 덴스토리(Denstory) | 201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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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영원과 사랑의 대화> 저자이자,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로 우리를 일깨우는 시대의 지성이며, 97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저작 및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형석 교수가 스스로 살아본 인생을 돌이켜 깨달은 삶의 비밀들을 인생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들려준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물론 사회생활에서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과제들,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관심까지,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프롤로그

1 똑같은 행복은 없다_행복론

·성공하면 행복할까 ·인격 수준과 재산의 관계 ·일을 하는 이유 ·오래 살면 좋을까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다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2 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_결혼과 가정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 ·재혼을 했으면 더 행복했을까 ·황혼기 이혼에 관하여 ·열심히 싸우는 부부는 이혼하지 않는다 ·무엇이 여성을 아름답게 하는가 ·뜻대로 안 되는 자녀 교육

3 운명도 허무도 아닌 그 무엇_우정과 종교_

·나에게 우정은 섭리였던가 ·내 친구 안병욱 ·현대인에게도 종교는 필요한가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 ·죽음에도 의미가 있는가 ·마지막 선택권은 누구에게나 있다

4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_돈과 성공, 명예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경제적으론 중산층, 정신적으론 상위층 ·자서전을 쓴다면 ·세 동상 ·나에게 ‘감투’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_노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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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장수의 비결이 뭔가요?” ·젊어서는 용기, 늙어서는 지혜 ·취미생활의 즐거움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노년기에는 존경스러운 모범을 ·누구 곁으로 가야 하는가 ·“오래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모든 학교 교육은 입학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전락했다. 교육은 지식 전달로 끝나는 성적 올리기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학생을 키운다는 것은 낮은 위치에 있는 학생을 높은 위치로 올려주도록 돕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을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08쪽)

- 버스를 타고 내릴 때는 기사에게 인사말을 한다. “고맙습니다”라든지 어떤 때는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습관이 되면 전연 어색하지도 않고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러는 동안에 그분들이 맡은 직업의 소중함을 깨달아주길 바란다. 자기 직업이 천박하지만 할 수 없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164쪽)

저자 : 김형석
 최근작 : <백년을 살아보니>,<고독이라는 병>,<어떻게 믿을 것인가> … 총 54종 (모두보기)

 소개 :
철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미국 시카고대학교, 하버드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초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97세의 나이에도 활발한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 철학계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예수』 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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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인생론_ 사랑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네

스무 살에 몰랐던 것을 서른이 넘으면 알게 될 때가 있다. 마흔을 넘기면 인생이 또 달리 보인다. 만약 백년을 산다면 인생은 또 우리에게 어떤 무늬로 그려질까? 그 지혜를 미리 안다면 우리 삶이 조금 더 향기로워지지 않을까?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로 우리를 일깨우는 시대의 지성이며, 97세의 영원한 현역 김형석 교수가 스스로 살아본 인생을 돌이켜 깨달은 삶의 비밀들을 '100세 시대'를 맞아 불안하고 허둥대는 인생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말한다. 사랑 있는 고생이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그것을 깨닫는데 9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국 철학의 대부'가 90의 언덕에서 인생을 바라보니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100세 시대를 맞아 우리는 설레고 기쁘기보다는 불안하고 허둥대기 바쁘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남은 인생을 어떤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인생은 겪어봐야 깨닫는다'고 하지만, 먼저 100세 인생을 산 이의 지혜를 빌린다면 앞으로의 삶이 조금 더 명확해지고 향기로워지지 않을까?

1960년대 초대형 베스트셀러 『영원과 사랑의 대화』의 저자이자,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로 우리를 일깨우는 시대의 지성이며, 97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저작 및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원한 현역' 김형석 교수가 스스로 살아본 인생을 돌이켜 깨달은 삶의 비밀들을 인생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들려준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물론 사회생활에서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과제들,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관심까지,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저자는 말한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돌이켜보면 힘든 과정이었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고. 그리고 고백한다. '그것을 깨닫는데 90년이 걸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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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행복이란?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행복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으면 같은 대답은 없다. 행복은 모든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제1부 '행복론'에서 저자는 행복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 보통 사람들은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성공한 사람은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리는 '성공과 행복의 함수 관계'는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달성한 삶은 행복하며, 성공적이다. 그러나 주어진 유능성과 가능성을 다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정성 들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으나 게으른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는 법이다.

'재산과 행복의 함수 관계'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더 명확하다. 저자는 항상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경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고 충고한다. 물론 저자 자신이 주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사는 것이 좋은가. 인격 수준만큼 재산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인격의 성장이 70이라면 70의 재물을 소유하면 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서 90의 재산을 갖게 되면 그 분에 넘치는 20의 재산 때문에 인격의 손실을 받게 되며, 지지 않아야 할 짐을 지고 사는 것 같은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은 운명도 허무도 아닌 섭리

제3부는 우정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1960년대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는데, 당시에는 인생은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둘 다 아닌 또하나가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바로 '섭리'다. 이 같은 깨달음은 친구들을 통한 우정의 사건들에서 얻은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아름다운 친구들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 인생 첫 친구였던 영길이, 초등학교 때 친구 김광윤 장로, 중·고·대학교 때의 허갑과 박치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의 안병욱 교수였다.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렸던 이들은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인 '축복받은 관계'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저자만 홀로 남았다. 두 친구를 보내고 난 후에 저자는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층 더 고독해졌다는 이야기다.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제5부는 노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노년기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보통 65세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와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는 76세 때 '한국인의 가치관'에 관한 책을 내놓았고, 안병욱 교수는 89세까지는 일을 계속했다. 저자는 '나도 60이 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고 인정한다.

저자가 100세에 가까워지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다. 그는 20이 될 때까지는 가족마저 단념을 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50이 되어서야 정상적인 건강에 자신을 찾았을 정도다. 그래서 신체적 과로나 무리는 하지 않고 조심조심 살아왔는데,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장수의 한 비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50이 넘어서는 주3회 정도 수영장을 찾고, 하루에 50분 정도 걷는 운동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이 건강을 유지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저자에게 건강은 일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칸트나 슈바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건강도 유지했다.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후배와 후손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의무도 있다.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노년일수록 존경스러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년기에는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라는 것은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푸대접을 받았어도 상대방을 대접할 수 있는 인품, 모두의 인격을 고귀하게 대해줄 수 있는 교양, 그 이상의 자기 수양이 없다고 노철학자는 말한다.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

1960~70년대 수필, 수상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자는 1980년대 이후 철학과 종교 책에 집중하면서 대중들과 멀어졌다. 그러다가 나이 90고개를 넘기게 되면서 다시 독서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오래 산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위로의 심정에 접했다"고 말한다. 저자의 인생은 고단했고 쓸쓸했으나 솔직했고 아름다웠다. 아내가 20여 년을 병중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저자의 아내가 발병하고 2, 3년 지났을 때였다. 친구인 C교수가 찾아와 조심스럽게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C교수의 아내가 밖에서 저자를 두세 차례 보았는데, 한마디로 홀아비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후 저자는 옷차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항상 미소와 온화한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반성하곤 했다. 자신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면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날 저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언제 어디서나 보여주는 잔잔한 미소'는 그런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

저자에게 건강과 가난은 타고난 인생의 짐이었고,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때까지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역사의 무거운 짐도 져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불행했거나 무의미한 고생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모두 사랑이 있는 고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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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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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ㅣ 2016-10-04 ㅣ 공감(6) ㅣ 댓글 (0)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명제가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93세 되는 가을, 나는 자다가 깨어나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나도 모든 사람이 걷는 인생의 길을 걸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함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물었을 때에 부끄럽지만 내 나름대로의 대답이 있었다. 사랑하기 위해 살았다,는." (49)

"모든 남녀는 인생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후회 없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이다. 사랑이 없는 고생은 고통의 짐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 인생이다." (96)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 (...) 정신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그런 한계가 없다. 노력만 한다면 75세까지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나도 60이 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233)

"80세가 되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나이가 되면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인생이 정착되거나 평가의 대상이 된다. (...)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우리들 각자의 노년기는 어떠할까 반성해본다면, 80쯤의 나이가 평가의 기준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흔히 말하는 대로 '나는 과연 성공했는가? 지금도 행복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래도 존경스러운 삶을 이어왔는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235)

"인생에서 50에서 80까지는 단절되지 않은 한 기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50부터는 80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이러한 삶의 조각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준비와 계획과 신념과 꾸준한 용기를 갖고,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재출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238)

"운동이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면 건강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나에게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운동을 위한 운동은 운동선수들의 몫이다. 건강을 위한 건강은 목적이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건강은 일을 위해 필수적이다. 일이 목적이고 건강은 수단이다. (...) 나는 일이 내 건강을 유지해주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직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은 그 일 때문에, 또 일을 성취해나가는 기간에, 어떤 인간적 에너지 같은 것이 작용해 건강을 돕지 않았는가, 하는 좁은 경험에서 얻은 현실이다." (243~245)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도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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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anji92 ㅣ 2016-09-07 ㅣ 공감(0) ㅣ 댓글 (0)

역시 결혼을 할 땐 내가 이 사람에게 베풀겠단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당
아니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나중엔 정신적으로 이혼한 상태와 같다는 것....
자신의 인격만큼의 재산이 있는 게 적당하다는 말도
인상깊었당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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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압일땐 고기앞 ㅣ 2016-08-26 ㅣ 공감(4) ㅣ 댓글 (0)

김형석 교수님의 깨달음을 젊은이에게 차분히 알려주십니다. 좋은 말은 쓰고 나쁜 말은 달다고 하죠. 하지만 남의 쓴 소리를 들으면 쓴 경험을 덜하게 됩니다. 교수님의 지혜를 통해 여러분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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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의 삶속에 녹아든 인생의 참교훈  새창으로 보기
오반장 ㅣ 2016-08-24 ㅣ 공감(0) ㅣ 댓글 (0)

우리 인생을 100세시대라고 부르게 된것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을정도로 많은 어른신들이 자신의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김형석 교수님은 바른 100세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표본이 될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삶의 멘토로서의 역할을 해주시는데 인생의 어른이 청춘들에게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 좋을것 같다라고 알려주는 좋은 메시지가 많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많은 가치관을 생각해보기에는 아직까지는 이른것 같기도 하고 고민을 해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30대 초반의 인생의 바쁜 시기를 지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에서 들려주는 교수님의 이야기는 아주 편안하게 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가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인생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할수가 있었다.



 교수님 또한 이북에서 태어나서 전쟁을 겪으며 젊은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지내졌는데 살아가면서 물질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가치고 있는 일을 하면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일의 역할을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메시지는 일에 매몰되어서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요즘에는 선택으로 바뀌어가는 트렌드가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만나서 살아간다는 것은 설레는 것이다. 먼저 위해줄수 있는 것이 사랑인만큼 배우자에게도 조금 더 친구처럼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의 편안한 감정을 잘 표현할수 있는 그런 사람과 함께 할수 있다면 인생에 있어서 좋은 행복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내적인 쉬어감이 부족할수가 있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에 이끌려 가듯이 살아가기도 하고 많이 비어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 성숙함이 높아진다고 하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더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시각으로 볼 수 있을것이라고 본다. 교수님은 배움에 대해서 나이를 뛰어넘는 열정을 보이시면서 아직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고 핑계를 가지고 있는 많은 분들이 조금 더 인생의 긴 안목을 본다고 하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수 있는 용기를 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것이고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는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과연 내가 사회의 어른이 되었을때는 내가 그동안 느끼고 경험한것들이 당당하게 누군가에게 한마디 알려줄수 있는 존재가 될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먼 미래이지만 생각하고 나의 인생을 계획해보는 시간이 되어서 편안하고도 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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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새창으로 보기

호시우행 ㅣ 2016-08-23 ㅣ 공감(1) ㅣ 댓글 (0)

이 책에서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고 보내며 인생과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과제들을 모아 정리해보기로 했다.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이론적 설명을 찾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추구해보고 싶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노老 철학자의 인생론



1960~70년대 수필, 수상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자 김형석은 1980년대 이후 철학과 종교 책에 집중하면서 대중들과 멀어졌다. 그러다가 나이 90고개를 넘기게 되면서 다시 독서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가르쳤고, 국내 철학계 1세대 교육자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초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자는 나이 90고개를 넘기게 되면서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즉 과거에 출간했던 책들이 다시 독서계에서 장년층의 높은 호응으로 독자들이 많이 늘어났던 것이다. 심지어 100세 시대를 살게 되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문제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하는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두세 권의 내용을 정리, 집필하여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과제들을 따로 모아 정리했다. 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어쩌면 이 책은 스스로의 인생 길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 같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똑같은 행복은 없다)에선 행복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시하고, 제2부(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이었네)에선 결혼과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며, 제3부(운명도 허무도 아닌 그 무엇)에서는 우정과 종교를 주제로 내세우고, 제4부(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에서는 돈과 성공, 그리고 명예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제5부(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에서는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공하면 행복할까?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나 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성공한 사람은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성공과 행복의 함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달성한 삶은 행복하며, 성공적이다. 그런데, 이를 다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정성 들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실패가 없으나 게으른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는 법이다.

'재산과 행복의 함수 관계'에 대해서 저자는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경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고 충고한다. 물론 이는 자신이 주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갖고 사는 것이 좋을까? 자신의 인격 수준만큼 재산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서 분에 넘치는 재산 때문에 마치 짐을 지고 사는 것 같은 고통과 불행을 겪는다.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



저자는 1960년대에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는데, 당시에는 인생은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둘 다 아닌 또하나가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바로 '섭리'다. 이 같은 깨달음은 친구들을 통한 우정의 사건들에서 얻은 것이다.



책에는 저자의 아름다운 친구들 이야기가 소개된다. 인생 첫 친구였던 영길이, 초등학교 때 친구 김광윤 장로, 중, 고, 대학교 때의 허갑과 박치원이 바로 그들이다. 하나 무엇보다 저자의 인생에서 소중한 인연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난 두 친구, 즉 서울대의 김태길 교수, 숭실대의 안병욱 교수였다. 이들은 '철학계의 삼총사'로 불리며 반세기 동안 사랑이 있는 경쟁을 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인촌 김성수 선생 다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이 두 친구였다고 고백한다.

80대 중반쯤의 어느 날, 안 교수가 "더 늙기 전에 셋이서 1년에 네 번쯤 만나자"고 제안한다. 김태길 교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이유는 "우리 셋이 다 80대 중반인데, 누군가 한 사람씩 먼저 떠나가야 할테고, 그러면 다 보내고 남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멀리서 마음을 같이하면서 지냈고, 저자만 홀로 남았다. 이후 저자는 한층 더 고독해졌다는 그런 이야기다.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노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노년기는 언제부터 시작될까? 보통 65세부터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그런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왜냐하면 노력하는 사람들은 75세까지는 정신적으로 인간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는 76세 때 '한국인의 가치관'에 관한 책을 내놓았고, 안병욱 교수는 89세까지는 일을 계속했다. 저자는 '나도 60이 되기 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다'고 인정한다.

100세에 가까워지면서 저자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다. 그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정상적인 건강을 찾았을 정도다. 그래서 과로나 무리는 하지 않고 조심하며 사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장수의 비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십이 넘어서는 주3회 정도 수영장을 찾고, 하루에 50분 정도 걷는 운동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것이 '일'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칸트나 슈바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건강도 유지했다.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노년일수록 존경스러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년기에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는 바로 '늙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상대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어도 그 상대를 대접할 수 있는 인품, 모두의 인격을 고귀하게 대해줄 수 있는 교양 등보다 더 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은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성장을 포기하는 젊은 늙은이들이 많다. 사십대라고 할지라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마치 녹이 생긴 기계처럼 노쇠하게 된다. 이에 비해 오히려 60대가 되었어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일하는 사람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순 없다. 하지만 성실한 노력과 불굴의 도전을 포기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