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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3) 이호재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 에큐메니안



성경은 대도(大道)의 문서이다빛의 구도자 다석 유영모와 빛의 전도자 한밝 변찬린(3)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0.04.28 


변찬린 : 성경은 어느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 『성경의 원리』가 새 종교의 새벽을 예고하는 예루살렘의 홰쳐우는 닭소리가 되길 바란다. 빛은 동방으로부터 비칠 것이다.

유영모 : 대개의 종교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


독창적인 한국의 종교적 영성이 보편적인 우주적 영성

두 종교인을 그리스도교의 선교신학과 성취론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한국의 독창적인 종교적 영성과 종교(신학)사상이 서구 그리스도교 문화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보기론(補基論)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두 종교인의 사유체계는 그리스도교를 포월(包越)한 새로운 종교사상의 지평을 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종교와 세계 종교의 지평에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변찬린은 유영모, 김교신 등 주체적인 성경해석을 한 종교인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토착화 신학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그리스도교 신종교 계통의 종교사상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한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핵심은 희랍적 이원화로 형성된 서구 신학을 극복하려는 역사적 자의식으로 한국의 종교적 영성으로 『성경의 원리』 4부작을 저술하여 세계 종교 지평에서 보편화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서를 18개로 범주화하여 조직신학적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1979), 구약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중)』(1980), 신약의 주요인물과 사건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하)』, 그리고 사후에 발간된 『요한계시록 신해』(1986)순으로 발간하고, 2019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개정신판으로 전면 재발간되었다. 『성경의 원리』(1979 초판, 1988 재판, 1992 삼판, 2019 개정신판)는 “Principles of the Bible”로 영역(사진 참조)되어 하버드대 등 영미권의 주요 대학과 저명한 신학자에게 배포되었다.

▲ 변찬리, Principles of the Bible, 1995. ⓒ이호재 원장 제공


김상일 교수에 의하면 성서의 부활과 변화의 도맥에 대해 변찬린 만큼 시종일관 깊이 있게 해석한 것은 세계 신학계에서 최초라고 평가한 것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또 한국종교문화 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 이사인 윤승용은 변찬린의 한밝 성경해석학을 ‘한국기독교’의 해석 틀을 정초한 해석체계라고 평가하며 윤성범, 변선환 등 문화신학 그룹, 유영모 등과 같은 주체적인 성경해석 그룹, 영통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교계 신종교 그룹 등의 종합된 신학 사상이라고 소개하며 “우리의 삶의 현장을 고려한 주체적 신학담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래 인류의 생명과 문명을 고려한 생명신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 신학이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대비하는 인류 미래신학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한다.(1)

한편 유영모에 대해서는 이정배 교수가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2009), 『빈탕한데 맞혀놀이』(2011)라는 저서를 통해 유영모 신학을 재구성하여 세간에 선보였다. 김흡영 교수는 세계 신학계에 한국신학의 자리매김을 위해 『가온찍기』(2013)로 다석신학을 조명하며 ‘도의 신학’의 한 사례로서 다석신학을 영미권에 소개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 철학자대회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이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종교인은 성서 및 동서양의 경전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변찬린은 “성경은 특정 종교의 전용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런 바탕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다종교적 경전과 간텍스트적 해석, 다학제적 방법론을 성서해석에 적용한다. 또한 유영모는 “내 말은 이 세상에 쓸모가 없다”, “예수만이 말씀으로 된게 아니다. 개똥조차도 말씀으로 되었다. (중략) 나는 말씀밖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기독교만 말씀이 아니다. 불교도 마찬가지 말씀이다”라고 하며 말씀 중심의 깨달음을 『다석일지』와 강의록으로 남기고 있다. 두 종교인은 한국의 경전읽기 독창성을 바탕으로 우주적 몸으로 경전을 회통하여 보편성을 가진 언어로 재창조해 낸다.

유영모의 『다석일지』와 강의는 김흡영 교수가 말하듯이 “다석의 독창적인 신학 사상을 현대 조직신학의 범주와 잣대에서 체계화systematize 하는 작업 자체가 범주착오적 오류일 수 있다”는 선교신학적 오류를 잘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영모와 변찬린의 경전읽기는 성서해석이라는 관점에 국한해서만 이해하더라도 이미 서구신학을 극복하고 한국의 독창적 영성으로 새로운 경전읽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김흡영 교수는 세계신학계를 향해 핫지슨(Peter C. Hodgson)의 구성신학적 방법(2)을 이용해 조직신학적으로 다석신학을 재구성해 냈지만(3) 변찬린은 성서텍스트를 다종교적 언어, 간텍스트적 해석과 다학문적 방법을 이용하여 당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선교신학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그럼에도 다석의 제자이자 개신교 목사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김흥호의 『다석일지』 해설서인 『다석일지공부』는 김흥호의 직관적인 깨달음의 해설과 그리스도교의 환원적인 사유적 해석의 입장에서 다석을 해설하고 있다. 김흥호는 『다석일지』를 이렇게 평가한다.
우리는 지금 『다석일지』에 적힌 삼천 수나 되는 시나 시조를 읽으면서 (중략) 이 시조들이 성경 어느 말씀과 연관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한이 된다. 성경 말씀을 읽고 한 말들이니 다시 이 말을 생각하여 성경 말씀까지 찾아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성경』 말씀의 변형이 선생의 시와 시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의 한국화(韓國化)가 『다석일지』이다.(4)


유영모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경전을 읽었으며, 그 깨달음을 한시와 독창적인 한글 언어 등으로 『다석일지』에 기록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신교 목사로서 호교론적인 사유가 『다석일지』의 해설서인 『다석일지공부』에 선 반영되어 있음을 후학은 경계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또 다른 제자 박영호와 대척점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영호는 “김흥호가 목사가 되고자 신학을 공부하러 가다니, 어미 닭이 오리 새끼를 깬 것과 같이 어이가 없었다”라고 평한다. 스승 유영모와 제자 김흥호와 박영호의 사유체계의 차별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정배 교수의 제안대로 불교에 중점을 둔 교토학파를 염두에 두고 유영모를 중심으로 함석헌, 김흥호와 박영호, 이기상 교수 등 다석연구자로 ‘다석학파’를 형성하려 한다면 선교신학의 입장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유영모와 함석헌을 균형 있게 연구한 결과는 박재순 교수가 있을 뿐이다. 아직도 유영모의 직계 제자인 박영호가 정확한 기억력으로 유영모를 증언하고 있다. 제자가 생존해 있을 때 이런 종교신학프로젝트가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가 참가하여 성공리에 진행되기를 바란다.

유영모와 변찬린은 그리스도교의 사유체계를 포월(包越)하여 한국적 지평에서 인류 정신문명사에서 보편화할 수 있는 ‘포월적 상생’의 사유점을 발견하였다. ‘이 포월적 상생’의 준거점이 변찬린의 언어로는 한민족의 종교적 원형인 ‘선맥과 풍류’의 발견이고, 유영모의 언어로는 ‘가온찍기’를 하고 ‘빈탕한데 맞혀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포월적 중심은 ‘선맥의 가온찍기’이고, 상생의 큰 원은 ‘풍류로서 빈탕한데 맞혀놀이’을 하는 우주적 궤적이다. 이 지점을 놓치면 한국신학의 세계화 작업은 중심없이 원을 그리며 서구신학의 대리전을 치르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유영모의 바른소리치김(正音敎)

‘바른 소리’와 ‘정음(正音)’에 대해서는 유영모 연구자가 상당히 주목하고 있지만 “바른소리치김(正音敎)”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유영모는 자신의 가르침을 ‘정음교(正音敎)’로 불러주기를 바란 적이 있으며, 함석헌도 ‘새 시대에는 새 종교’가 나와야 한다는 탈 그리스도교적 사유를 하고 있다. 유영모의 직계제자인 박영호는 유영모가 이미 특정 종교에 얽매인 사유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자, 유영모의 종교사상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말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대개의 종교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5)


필자는 2015년 변찬린과 유영모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박영호 선생을 종로 5가에서 처음 만난 후 수년 간 여러 차례에 걸쳐 ‘정음교(正音敎)’의 실체가 학술정보로서 가치가 있는지 다각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박영호 선생은 의식하였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유사한 질문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한 결과를 처음으로 에큐메니안에 공개한다.

▲ 2019. 12. 5, 필자와 대담 중 ⓒ이호재 원장 제공


박영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1년경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역임한 전덕용은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가 1, 2호 발간되고 폐간된 후 (함석헌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전덕용의 초청으로 구기동에 사시는 유영모 선생을 모시고 광화문 근처에서 20여 명의 청중에게 『정음설교(正音說敎)』를 주제로 한 강연을 하였다. 다음은 그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6)
필자 : 선생님, 유영모 선생께서 생전에 자신의 종교를 ‘바른소리치김’이라고 한 사실은 있는지요?
박영호 : 아 그럼요. 문화일보에 썼듯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라고 해 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했지요
필자 : 일전에 선생님이 무슨 종교를 만든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지만 하나의 제도종교의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있는 거네요.
박영호 : 1971년경에 「정음설교」라는 글이 『다석일지』에도 보이고 심지어 ‘정음교의 신자’라고 하기도 한 적이 있지요!
필자 : 네 선생님, 수차례 문의드렸지만 이 부분은 유영모 선생의 종교적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문의드리는 겁니다.
박영호 :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유영모 선생은 이미 특정 제도의 틀을 벗어나신 분인데 김흥호 선생의 글만 보고 신학자들이 유영모 선생을 크리스챤이라고 하는데 정양모 신부는 기독교의 교리를 훨씬 벗어나신 분이라고 다석학회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필자 : 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종교학자 강돈구 교수는 유영모가 “자신의 사상을 ‘正音敎’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 대문에 “참을 찾고자 하거든 문을 두드리시오”라고 할 정도로 종교사상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종교가로서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 (중략) 종교의식과 종교조직, 그리고 경전을 만들려고 하지 않은 유영모의 종교는 소위 ‘구도자求道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7)

유영모는 종교간(내)의 대화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기존의 제도종교의 경전을 회통해 내고 있다. 이런 지점이 종교학과 신학이 서로 대화를 하여야 하는 다학제적 이해지평이다. 또한 이 지점이 바로 서구 그리스도교의 단속(斷續)과 한국 종교적 영성을 디딤돌로 비약(飛躍)하여 세계 종교 지평에서 ‘포월적 상생’을 하는 풍류의 심성이다.

미주
(미주 1) 윤승용, 「한밝 변찬린, 새 축 (軸) 의 시대 ‘한국적 기독교’ 해석 틀을 만들다」, 『뉴스레터』 (504), 2018.1.10.
(미주 2) 영미권에서는 1994년에 “Winds of the Spirit”로 출간되어 2000년에 『기독교 구성신학』이라고 국내에 소개되었다. 구성신학은 폴 틸리히의 상관관계 방법론을 기초로 하여, 성경과 전통, 문화사와 신학, 종교적 전통, 문화적 콘텍스트(상황, 자리),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구성 자원으로 사용할 것을 핫지슨(Peter C. Hodgson)이 제안한 바 있다.
(미주 3) 김흡영, 『가온찍기』(서울: 동연출판사, 2013), 6-29.
(미주 4) 김흥호, 「나의 스승 유영모」, 『다석강의』(서울:현암사, 2006), 967.
(미주 5) 박영호, 『多夕 柳永模의 생각과 믿음』(서울: 현대문화신문, 1995), 52.
(미주 6) 박영호는 필자와의 교류에서 ‘바른소리치김(正音敎)’를 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직접 확인해 주었다. 2020년 3월 23일 전화통화에서 인터뷰 내용이 사실과 다르지 않음을 최종 확인하고 사진과 함께 공개하는 것을 동의하였음을 밝힌다.
(미주 7) 강돈구, 「유영모 종교사상의 계보」, 『종교이론과 한국종교』(서울: 박문사, 2011), 484.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2020/03/29

14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





soombat.org/wwwb/CrazyWWWBoard.cgi?db=article&mode=read&num=576&page=1&ftype=6&fval=&backdepth=1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해암신학연구소, <교회와 신학>2호, 20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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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암신학연구소20140930]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목차-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2. 한국 진보신학의 특징
3.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의 현황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1. 한국 '진보신학'의 호칭문제

주어진 논제는 '한국 진보신학의 오늘과 내일' 이다. '진보신학' 이라는 표현대신에 '진보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신학' 이라는 표현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진보신학'이라는 짧은 표현을 쓰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호칭은 한국 기독교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신학의 경향성인 통칭 '보수신학'과 비교하는 일반적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불과하지만, 호칭이란 어휘의 개념이 지닌 상징성과 그 어휘가 사용되는 언어공동체 안에서의 '전이해'(前理解) 때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국 기독교계에서 보수주의 계열은 '보수신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진보신학'과 차별화 하면서 기독교 정통신학을 지키는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어휘와 '보수신학'을 동일시하려 든다. 그리고, '진보신학'은 통칭 '자유주의신학' 혹은 심할 땐 '인본주의신학' 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쉽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신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또렷이 하려는 의도로서 '복음주의신학'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경우에,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하는 신학운동과 신학자들은 '비복음주의적'이라는 신학적 가치판단을 암묵적으로 주입시키는 독선적 입장이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한 분파로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순복음교회'라고 교회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서,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등 여타의 다른 교단소속 교회들은 '순복음'을 신앙하는 교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휘의 선택과 그 오남용은 보다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임이 한국기독교사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부 보수주의 교단의 목회자들이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을 '자유주의신학, 신신학, 인본주의신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세계 신학의 역사 혹은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에 입각한 공정한 사고가 아니다. "계시된 경전의 권위와 정통교의를 무시하고 신학을 신학적 규범에 제약을 받지않고 멋대로 자유롭게 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아닌가?"라는 판단은 소박한 생각이다. 세계 각국의 신학계에서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엄정한 역사적 기간동안 형성되었던 유럽에서의 신학운동에 대한 전문적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신학'이란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이 사상계 전반을 강타한 이후, 19세기의 유럽 종합대학교 신학부의 신학자들의 반응으로서 슈라이에르맛허, 리츌, 하르낙 등으로 대표하는 신학사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은 세계신학사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이 비판하는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니버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의 신학운동은 18세기 '신교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동시에 극복하려는 신학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의 혼동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어떤 신학적 입장, 혹은 신학함의 경향성과 특징들을 공유하는 신학인가를 먼저 개념정리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의 '진보신학'이라고 할 때 다음같은 5가지 특징, 입장, 혹은 경향성을 지닌 신학운동을 의미한다.

2. 한국 진보신학 흐름의 특징

첫째, 한국 개신교권 안에 앞으로 소개할 다양한 진보신학운동의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공통적 특징으로 '성경연구에서 비판적 연구방법 수용'이라는 특징을 제일 먼저 들수 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보수신학 진영'과 '진보신학 진영'의 장점을 아우르려는 소위 통전신학 , 중도신학, 중제신학에 해당하는 신학자들을 '보수신학 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인지 진보신학 진영에 속한 다고 분류할 것인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로교신학대학 총작직을 수행했던 이종성교수나 현재 총작직을 수행하는 김명룡교수를 보수와 진보 어느진영 신학자라고 분류할 것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이 글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에 속한다고 분류할 것이다. 왜나하면 신학계나 정치계에서 흔히 '진영논리'에 입각한 패가름을 필자도 아주 싫어하지만, 그 두분의 조직신학은 현대20세기 성서학계의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열린 맘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무리 사회참여와 현실비판적 역사참여 활동을 펼치더라도, 그 분의 성서관이 20세기 성서학계가 이룬 '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보수신학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수용'이라 함은, 소위 학계에서 고등비평이라고 총칭하는 비판적 연구방법들 예들면, 문헌비판 〮역사비판 〮편집비판 〮 전승비판 〮수사비평 연구등 모든 비평적 성경연구태도를 "신구약 상경이 전하려는 복음의 참 본질을 밝혀내기 위하여" 연구방법으로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계의 소위 '보수신학' 일명 '복음주의신학'이란 성경무오설 교리를 가장 중요한 근본교리로 삼는 토대주의 신학인 것이다. '보수신학' 계열안에도 다양할 편차가 있겠지만 공통적 특징은 앞서 언급한 현대 20세기 세계신학계가 연구하는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성경무오설' 이라는 근본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거부하고,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며, 현대사회윤리의 상황적 응답을 반복음적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 글에서 한국신학계의 진보주의 신학 특징으로서 현대문명의 위기적 ‘삶의 상황’에 복음적 입장에서 대답하고 복음을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변증법적 신학’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초, 소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로서 촉발된 일명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과 보다 더 자유로운 신학운동은 모두 강렬한 ‘변증적 신학과제’를 인정하고 그 책임을 수행하려는 학문적 운동이었다. 구미 신학자들을 예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루돌프 불트만, 에밀 부룬너, 본 훼퍼등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활동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변증접적 신학’ 을 수행했다.

‘변증법적 신학 방법’이란 두가지를 함의한다. 그 한가지는 계시적 성경진리를 인간 삶의 정황을 무시하고 변함없이 ‘계시적 진리’로서 선포만하지 않고, ‘상황’과의 상호대화 속에서 기독교진리를 새로운 인간상황 안에 증언한다는 점이다. 또다른 한가지는 변증법적(dialogical) 신학방법을 수행하면서 복음의 구원과 진리를 옹호하는 적극적 과제 즉 복음진리의 변증(apologetic)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어느 신학 교육기관에서 혹은 신학자가 현대신학의 방법적 특징으로 ‘변증법적 신학’을 수행했던, 앞서말한 20세기 초 신학거성들을 비롯하여 진화론적 신학, 종교다원론적 신학, 생태여성신학, 아시아의 빈곤신학등 세계신학계 운동에 긍정적으로 경청한다. 예들면, 신학자 떼이야르 샤르뎅, 죤 캅과 죤 힉, 인도의 사마르타와 대만의 송천성, 영미 여성신학자들 로스마리 류터나 맥 페이그를 강의실에서 자유롭게 논의 할수 있는 신학이 아니라면 진보신학 기관이거나 진보신학자라고 할 수 없다.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이란 포스트모던니즘과 대화하고 포스트모던니즘 안에서 복음을 변증하려는 적극적 신학을 의미한다.

셋째,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이라 함은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오늘의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신학 정신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속칭 ‘에큐메니칼 신학’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신학계에서 그 신학교육기관 혹은 신학자가 ‘진보신학’인가 여부를 가늠하는 쉬운 기준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강조하는 교회의 일치연합 운동,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강조, 타계적-미래적 구원만이 아니라 ‘오늘-여기’에서 구원을 강조하는 상황적 신학운동을 지지하는가의 입장으로서 구별된다.

넷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신학을 하나님 백성들의 순례자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하여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에 긍정적으로 복무하는 공통특징을 지닌다.

보수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박사가 보수신학은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적 정통신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을 신학자의 기본 입장으로 삼았다면, 진보신학은 ‘순례자의 신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변증하는 ‘신학들’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상대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신학체계를 절대불변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학문적 시도로서의 ‘신학 ’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반복음적 피혜를 초래한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진보신학’은 우리들에게 많은 좋은 점들을 가져다준 구미신학들, 예들면 라틴적 스콜라신학,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영미신학, 독일신학,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등이 필요하고 귀중하듯이 동아시아의 신학과 한국신학이 필요하고 당연하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동아시아-한국적 삶의 자리와 토양 속에서 주체적으로 ‘한국신학’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섯째,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신학은 21세기 지구적 상황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기존의 ‘십자군의 영성신학’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영성신학’의 재정립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신학의 ‘패러다임전환’을 공통적으로 지향한다.

‘십자군의 영성신학’이라 함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일환으로서 진행하는 신학함의 태도에 있어서, 타문화및 세상 정복적 태도와 교회의 무한성장 번영을 복음적 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말한다. ‘십자가의 영성신학’이란 정복이 아닌 섬김, 성장번영이 아닌 낮춤과 비움, 금관의 예수가 아니라 가시관의 예수를 더 주목하는 신앙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대로, 이 글에서 말하는 한국 신학운동 흐름에서 ‘진보적 신학들’이라고 분류하는 기준을 5가지로 삼았다. 다시 정리하면 ① 비판적 성경연구 방법수용 ②변증법적-변증적 신학입장 ③ 에큐메니칼 신학정신 ④ 한국적 우리신학 정립 ⑤ 십자가의 영성 강조, 이상 5가지 이다.

위에서 말한 진보신학 특징들을 감안하여 필자는 다음장에서 아래의 다섯그룹을 한국의 진보신학계 현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등이다.

이상의 5가지 그룹의 한국 신학계 ‘진보신학 운동들’의 현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신학자 이름들은 그 분야의 특징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선택한 신학자 이름들 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 신학계는 이 글에서 지면관계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귀중한 신학자 지성집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구약 성서신학자들의 활동은 『신학과 교회』창간호와 이번호 특집에서 각각 자세하게 다루는 전문적 연구논문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신학자 명단 언급은 하지 않는다.

3.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현황

(1)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의 첫 번째 흐름의 특징을 명시하기 위하여 필자는 ‘통전적 조정신학’(integrating modulation Theology)이라는 어휘를 일부러 만들어 쓰려한다. 이 어색한 신조어 명칭에서는 ‘통전’(integration, 統全)이라는 단어와 ‘조정’(modulation,調整)이라는 두 개의 어휘가 이 진보적 신학지성 집단의 특징을 지시한다. 통전(統全)은 본래 교육심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한인격체가 원만한 성숙성을 가지고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측면에서도 균형과 통합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조정(調整)은 본래 음율, 음색, 음조등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리도록 조절하는 일과 많이 관련되는 단어이다.

신학의 특징을 ‘통전적 조정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극단적인 진보나 보수적 사고를 통전하고 조정하려는 신학이며,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부분적 진리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들을 종합(synthesis)하여 보다 ‘건전하고 온전한 형태의 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을 말한다. 이러한 ‘통전적 조정신학’ 작업에 특별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한국 신학자로서 장로회신학대학장을 오랫동안 맡아 수고하셨던 이종성 박사의 신학작업을 예로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신학 저작물들은 ‘독창적 새로움의 신학’ 이 아니지만, 길게는 그리스도교 신학사 전체를 섭렵하고 짧게는 20세기 세계신학운동의 다양한 흐름들을 이해 한후에, 그 나름대로 ‘통전적 조정신학 체계’를 저술물 속에서 서술하였다.

짧은 한국 개신교 역사 안에서 불행하게도 보수와 진보라는 두 신학진영이 갈라지고 서로 각각의 ‘진영논리’에 갇혀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을 노정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통적적-조정신학 운동’은 건전한 신학지식을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일부 급진적 진보신학자들 중에서는 이종성박사로 상징되는 중도적 신학을 통전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진보신학의 범주’에 어떤 신학운동을 포함할 것인가에 대항 5가지 조건중에서 적어도 4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성서비평학 수용, 변증법적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과학신학에도 긍정적 입장을 가지므로, 이종성교수의 신학을 ‘보수신학’이라고 부른다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지금 생존하신 한국 신학계 원로 신학자들 중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 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신학자로서 예들면 해암 이장식 박사를 비롯하여 조종남, 김성수, 민경배, 강근환, 박근원, 선한용, 황승룡, 이형기, 정장복, 서정운, 이원규, 송순재, 윤응진, 박종천, 최인식교수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조정신학 운동’의 대표적 신학자는 조직신학 영역에서 김균진교수, 김명룡교수, 오영석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균진 교수는 『기독교조직신학』(1권-5권)을 완성함으로서 20세기 전세계 진보적 신학흐름을 총정리했으며, 특히 말년에 집필한 『죽음의 신학』이라는 명저를 집필했는데, 긍정적 의미에서의 ‘통전적-조정신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신학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김명룡교수는 선배 이종성박사의 뒤를 이어 학문적으로나 신학교육 행정면에서 한국 신학계의 ‘통전적-조정신학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그와 김균진 교수와의 공동 노력에 의하여, 20세기 후반기 유럽 조직신학계의 대표적 학자 율겐 몰트만의 중요한 저작들이 10여권 번역되어 신학계와 일선 목회자들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오영석교수도 그의 저술물을 통해서 바르트-몰트만 신학계보의 개혁파신학의 흐름을 건전하게 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국 진보신학 흐름중 첫 번째 운동으로서 ‘통전적-조정신학’은 칼빈의 개혁신학 전통, 루터의 종교개혁전통, 웨슬레 신학 전통의 본래성과 그 오늘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이어가려는 신학운동이다. 성서비평학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사회의 도전들에 열린맘으로 응전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성서적 신학’이 전승해주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굳게 지키려는 심정을 공유한다. ‘복음과 상황’이 만날 때 대등한 관계의 해석학이 아니라 복음 우선적이며, ‘기독교와 이웃종교’가 대화할 때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유일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통전적-조정신학’은 충분히 그리고 철저히 변증법적 해석학 공리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통보수적 신학’의 연장이 아닌가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2)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필자는 한국 진보신학운동의 둘째번 흐름으로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을 언급하고자 한다. 복음운동은 주기도문의 핵심화두 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신앙고백이요 삶이요 운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언은 래세적이고 역사초월적 측면 못지않게 현세적이고 역사 내재적 측면을 지닌다. 엄밀하게 말해서 “종말론적이 아닌 신학은 기독교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정치적 증언을 소홀히하는 신학은 충분히 기독교적 신학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은 한국적 삶의 총체적 자리안에 하나님의 정의, 자유, 평등, 평화가 온누리에 실현되어 실질적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요10:10) 일에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힘쓰는 신학이다.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모두 민중신학회 회원도 아니고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리 복음이 민중지향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먼저 한국신학계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힘을 쏟는 신학운동의 현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민중신학운동을 살피려고 한다. 두 그룹은 대체로 중복되지만 구별된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사회정치신학’의 래디칼한(radical) 한 신학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정치신학의 본격적 태동은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 이후, 군부세력의 집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군사정부가 추진하는 반민주주의적, 반인권주의적, 경제성장 제일주의적 정책의 강행이 성서가 증언하는 복음의 자유, 인간 존엄성, 정의로운 평화,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비젼에 심각하게 위배되고 충돌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정치신학 운동에 동참했던 선구자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지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12:1)이 있다. 고인이 되신 분들로는 김재준, 김정준, 박대선, 서남동, 문익환, 안병무, 김관석, 현영학, 김찬국교수 얼굴이 떠오른다.

민중신학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뚜렷한 한국의 ‘진보신학’ 계열로서 한국적 사회정치신학(Korean socio-political Theology)운동에 힘쓴 신학자들로서 현존하는 인물을 예로 든다면 박순경, 손규태, 노정선, 김창락, 박명철, 황성규, 임태수, 김성재, 유석성, 채수일장윤재, 정재현등을 예로 들수 있다. 현존하는 민중신학자로서는 원로신학자로서 서광선, 김용복교수를 비롯하여 임태수, 권진관, 김은규, 강원돈, 김진호, 류장현, 최형묵, 김영철, 방인성, 김희헌등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뜬다. 한국 진보신학계열에서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려는 신학적 관심을 아래에서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독교복음의 본질파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리얼(Real)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서연구에서 정치사회적 조명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본다. 복음이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인간구원과 해방’이 정치사회적 차원에 머문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한 해석은 관념적이고 반복음적이 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순복음교회가 강조해왔던 소위 ‘삼박자 축복의 구원론’과 ‘성장과 풍요의 교회론’을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은 ‘공의로우심’(정의)과 ‘긍휼하심’(사랑)인데, 특히 예언자적 성서전통에 의하면 “가난한 자와 눌린자와 포로된자들”(루가 4:18)에게 자유, 해방, 평등, 평화를 선물하는 ‘민중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민중신학의 강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장소가 성경, 예배당, 수도원, 크리스챤 형제공동체 못지않게 ‘고난당하는 민중현실’에서 만나라고 강조한다. ‘오클로스 민중론’을 예수와 특별관계로서 세계에 제시함으로써 민중신학은 국내보다도 세계에서 훨씬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다.

셋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이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구조적 죄성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구조적 정치경제 악의 실체에 맞서서 ‘선한 싸움’을 하자는 것이다. 현재 전체 지구촌을 덮고 있는 소위 ‘신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당연한 것이거나 피 할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프란체스코교황이 강조하듯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사회 전반에 ‘정의의 실현’을 요청하고 힘써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넷째,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이 ‘오늘의 신학적 아젠다’로서 제시하는 것들은, 철저한 민주주의 실현, 남북의 무기경쟁중단과 외세의존 탈피, 남북 민족의 주체적 화해와 평화통일, 소외된 사회계층에 대한 배려,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 회복 강조등이다.

(3)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

한국 진보신학의 세 번째 그룹은 ‘한국적 종교문화신학’을 형성하려는 신학자 그룹이다. 흔히 줄여서 ‘한국문화신학’라고 부르는데 이 신학캠프는 ‘한국민중신학회’와 쌍벽을 이루면서,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국의 진보신학을 견인해가는 신학운동이다.

일찍이 폴 틸리히는 1920년대초 그가 독일 학계에 데뷔하는 베르린학회에서 「문화신학의 이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 논문발표에서 그는 문화종교신학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같이 피력한바 있다: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형식(form) 이다”. 다시말해서 문화의 다양한 장르들 법률, 예술, 문학, 이념, 건축, 그리고 심지어 과학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인간의 의미있는 활동의 “깊이 차원”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사람생명체에 비교한다면 ‘종교’는 정신과 영혼이며 ‘문화’는 신체와 활동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문화신학의 발아지역은 장로교보다 감리교 였다. 일찍이 탁사 최병헌목사가 기독교에 접한 이후 한국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성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주체적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부터, 소위 ‘복음의 토착화론’에 선구적 역할을 감리교신학교수단 에서 했고,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교수등 용기있는 개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대체로 한국의 장로교회 교단은 칼빈주의의 강력한 영향으로 ‘복음의 토착화론’에 소극적이거나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3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들을 조명하면서 ‘복음’과 ‘한국전통문화’와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과제를 갖는다.특히 이웃종교들과의 바른 관계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둘째, 한국인 크리스챤으로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의 문화, 예술, 삶의 표현형식으로 조형(造型)하고 증언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의미한다. 예배 전례상의 상징적 표현들, 건축과 미술과 음악의 한국토착적 표현들, 기독교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설, 연극, 시 작품창작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셋째, 2,000년 그리스도교신학과 동아시아 영성전통과 만남으로서 제3천년 시기의 ‘제3의 눈’의 신학 형성을 지향한다. 헬라적 교부신학, 라틴신학, 게르만 독일신학, 영미신학이 있었듯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정신토양 속에서 형성된 ‘제3의 눈’의 신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은 종교문화라는 폭넓은 관심영역 때문에, 문화신학학회 정회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전문 분과 학자들이 참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서신학자, 여성신학자,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정치신학자들이 고루 고루 참여하고 있다. 한국 종교문화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술물도 남긴 학자들중 그 일부만 열거하면 유동식, 유재신, 심일섭, 이계준, 김광식, 김경재, 박재순, 이정배, 김영일, 서창원, 김흡영, 이정구, 송성진, 허호익, 이찬수, 손호현, 박일준 교수와 여성신학자로서 특히 차옥숭교수의 무교연구와 이은선교수의 유학연구, 오정숙박사의 다석연구가 돋보인다. 여성신학자들 활동은 ‘여성신학’운동의 항목에서 별도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문화종교신학계를 지난 30년간 이끌어온 대표적 학자는 유동식 교수이다. 그의 학술적 공헌은 매우 독창적인데 대표적 저술물로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풍류신학』, 『신학과 예술의 만남』이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유동식교수가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끼친 독보적 공헌의 의미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종교심성 바탕에 깔려있는 무교 혹은 무속연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종교사에서의 ‘무교’를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바알신앙’과 동일시해왔던 오해와 갈등을 상당부분 해소 시켰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민의 종교심성의 영성적 원형바탕을 ‘풍류도’로서 밝힘으로서 기독교신앙의 한민족에 수용과정에서 선교과제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셋째, 특히 말년엔 ‘예술신학’을 제창하면서 신학의 최고경지가 예술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묵상에서 꽃핀다는 것을 밝혀준다.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사에서 변선환목사에 대한 감리교단의 ‘파문’은 감리교단의 역사내 부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신학사에서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변교수가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파문죄목의 중요한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변교수가 의미하는 내용과 교단의 보수적 정통 교권주의자들의 의미하는 내용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본다. 변선환 교수에게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구원받은 종교인들의 생명현상학에서 세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자기중심적이던 이기적 실존이 실재(Reality)중심의 해방된 존재로 자유인이 된다. 둘째, 자유인이 된 종교인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 셋째,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내용에 다양성이 있으나, 공통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죽음을 넘어선 승리적 삶을 산다.

유동식, 변선환교수의 선도적 문화신학의 과업을 이어받아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문화신학 운동을 젊은 세대들과 호흡을 맞추며 크게 활동한 학자는 이정배교수와 감신대를 중심으로한 그 선후배 동료신학자들이다. 『문화와 신학』 정기 학술지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으며 『한국신학, 이것이다.』(한들출판사, 2006)와 『한류로 신학하기』(동연,2013)를 간행하여 한국문화종교신학회의 과거정리와 미래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범을 보였다. 이정배, 김흡영, 박재순 박사를 비롯한 문화신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종교유산의 토양에 뿌리 박은 한국신학을 정립하려는 역저를 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적 종교문화신학 운동에서 특히 불교와의 대화가 학자들간에는 열매를 조금씩 거두어간다. 우선 한국교수불자연합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공동주관으로서 붓다와 예수를 상대편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보는가를 시민공개강좌로서 갖고 『인류의 스승으로서 붓다와 예수』(동연, 2006)라는 표제의 단행본으로서 출판된 것은 특기 할만한 일이다. 기독교 학자로서 불교와 기독교 상호관계연구 결실로서 종교학자이면서도 제1급의 신학자인 길희성교수의 연구서는 신학계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불교계의 전문 학술지 『불교평론』에서 기독교신학자들의 글을 싣는등 학문적 대화는 종요히 계속되어 가고 있다.

천도교, 원불교, 유교, 전통민족종교들과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는 그동안 타종교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는 보수적 교회들의 배타적 태도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선교전선의 약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진보적 기독교 목회자들이 ‘종교간 대화모임’에 열린자세로 임하며, 특히 생태환경운동이나 사회정의 구현에서 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성탄절과 석탄봉축일에 서로 경축하는 따뜻한 마음은 조금씩 증가되어가는 추세여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우주적 보편종교이다. 양대 종교사이의 대화와 협력은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흡수통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양대종교의 특징과 진리증언의 길에 서로 경청하면서 보다 성숙해지려는 것이다. 개신교의 종교신학은 결코 종교혼합론이 아니며 도리혀 종교혼합론은 이웃종교 종교배타론 만큼 위험하고 성숙하지 못한 독선과 독단론이라고 본다.

(4) 여성신학 운동

한국신학계의 진보적 신학 운동의 현황소개에서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 만큼 눈부신 활동과 엄청난 학문적 기여및 사회실천적 공헌을 한 지성집단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보다 자세한 여성신학의 역사와 현황소개는 여성신학협의회에서 간행한 훌륭한 단행본 및 논문들이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 교계와 신학계를 막론하고 소위 ‘보수, 진보’를 구별하는 확실한 판단도 그 교회,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에서 일어난 ‘여성신학 운동’과 1980년대 초기에 그 반응으로 태동한 ‘한국 여성신학’의 소리들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받아드리는가의 태도로서 여부로서 구별이 가능하다. 그만큼 진보적 여성신학 운동은 전통적 한국보수교회 안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전통 비판적 주장과 래디칼한 문명비판적 주장들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신학계에서 여신학자 협의회가 정식 결성된 해는 1984년이어서 어느듯 30년이 되었지만,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활동현황을 살펴보기 전에 ‘여성신학’ 이 지향하는 일반적 특징을 아래의 몇가지로서 먼저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여성신학은 기독교문명사회와 교회공동체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인권억압이 가부장적 성서해석에 있음을 주장하고 새로운 성서해석을 시도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 주제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여성의 ‘해방’이다.

경전으로서 성경의 문자무오설과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보수적 신학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겠지만, 여성신학자들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자체의 형성과 편집과 전승이 ‘가부장적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태생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성서를 ‘억압과 차별’의 경전으로서가 아니라‘해방과 평등과 자유’의 원천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신구약 성경의 완성자이신‘예수의 마음자리’에서 성서를 읽고, 성서문자에 메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려는‘살리는 영’으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가 엮은 『새롭게 읽는 성서의 여성들』(1994), 구약신학자 이경숙의 『구약성서의 여성들』(1994), 신약학자 최영실의 『신약성서의 여성들』(1995) , 그리고 최만자의 『성서와 여성신학』(1995)등이 여성신학자들의 새로운 성서해석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둘째, 여성신학은 교회안에서와 사회에 편만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부당한 억압구조와 사회와 문명의 성차별적 가부장적 문화구조 해체를 통한 양성평등의 새로운 인간공동체 구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핵심주제는 여성의 평등권을 담보하는 ‘정의’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제반 활동영역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무능한 존재, 지배받고 남성에 의해 계도(啓導) 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는 일체의 허위의식 지배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양성 평등 문명사회를 요청하고 투쟁한다. 한국의 여성신학계는 서구사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국사회에서의 여성폄하적인 노동의 임금차별, 직장의 진급제약, 여성에게 가하는 성의 상품화, 가사노동의 집중과부하등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비인간화 현실을 극복하려는 ‘실천적 여성신학 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여성의 ‘해방과 평등’의 아젠다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여성신학은 민중신학과 파트너쉽을 가지고 발전해가고 있다.

셋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생태계의 위기상황에 주목하고 ‘생태학적 여성신학’의 과제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중심 주제는 ‘생명의 평화’ 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해방’모티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계, 여성의 ‘평등’ 주장을 하는 정치사회 인간문명의 맥락을 넘어서, 기독교 여성신학은 오늘날 인류문명이 직면한 자연파괴,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기가 성경을 포함한 가부장적 인류종교경전의 잘못해석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지성계는 인류문명이 당면한 자연환경 오염, 기후붕괴, 생태계의 위험문제가, 다른 어떠한 주제들 예들면 경제발전이나 우주과학실험이나, 신무기 개발경쟁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여야한다는 점에 한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여성의 비하와 억압은 자연(대지)에 대한 무한 공격적 개발과 관련되고, 생태계의 조화와 순환원리를 무시하는 남성적 문화의 ‘바벨탑 건설 본능’과 관련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여선신학계의 원로이셨던 고 이우정선생의 고희기념논문집 책이름이 『여성,평화,생명』(경세원,1993)이었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여성신학의 지향성을 잘 나타낸다.

넷째, 한국의 여성신학은 외국의 여성신학과 다른 독특한 한민족의 분단상황, 동족간 상잔, 전쟁위협과 무기경쟁을 극복하고 모성의 심정으로 민족의 화해, 협력, 평화통일의 과제를 신학적 의제로 진지하게 삼는다. 중심주제는 ‘한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모성’이다.

특히 여성신학의 제1세대들 박순경, 이우정은 여성신학운동의 본질적 과제가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임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자들이 여선신학의 긴급한 주제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의제로 삼는것은 단순히 한국의 일반학계 정치학, 외교학, 군사학등에서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여신학자 선언」(1988)에서 천명한바와 같이, 한민족의 분단을 강요하고, 지속하고,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모든 어리석은 국제정치적 행위자체가 따지고 들어가면 인류문명의 가부장적 죄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8-19세기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1,2차 세계대전의 국가주의 발호, 2차대전 후의 세계 냉전체제,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6자회담의 정체가 모두 가부장주의 정치문화의 열매이다. 힘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국가주의 경쟁과 보복의 악순환, 군사문화의 창궐,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구입등등은 그 어리석음을 뿌리에서 비판하여 극복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에 여성신학의 중요 아젠다가 된다.

하나님의 모성적 심성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전쟁으로 인한 인간살상과 긴장갈등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의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서 ‘생태학적 여성신학’과 ‘민족평화 통일 신학’은 마침네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전통적 신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주장한다. 그동안 서구신학이 설명한 ‘하나님론’이 다분히 가부장적, 남성적, 지배적 힘숭배의 관념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반성이다.

한국의 진보적 여성신학운동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온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들’ 예들면 ‘산고의 진통’, ‘기다림과 설득’, ‘차마못하는 마음’, ‘내어줌으로서 만족’, ‘비움으로서 충만’ 등의 속성을 기독교 신관이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 신관은 율법제정자, 질서의 보존자, 인과응보적 심판주, 선악의 재판관, 세계정상의 지배자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관의 혁명은 역동적인 기독교 ‘영성운동’에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의 한 흐름인 여성신학자들의 ‘지성집단’의 힘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더욱 놀라운 결실을 맺을 것이다. 필자의 이글은 여성 신학자들의 활동과 논저를 소개할 목적에 있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구름같이 많은 한국의 에스더들’의 면모를 독자들이 감지하도록 하기 위해 필자의 서재에서 발견되는 여성신학자들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그친다. 물론 미처 소개못하는 인재들이 더 많다. 이우정, 박순경, 손승희, 안상님, 정숙자, 최만자, 선순화, 장상, 김윤옥, 최영실, 이경숙, 박경미, 김애영, 임희숙, 정미현, 이영미, 강남순, 유춘자, 이현숙, 이문숙, 윤수경,한국염, 김순영, 이숙진, 김정수, 권미경, 명노선(무순) 제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5)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다섯번째 캠프는 생태학적 신자연신학 운동이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본질로 하지만, 일반적인 현대 물리학이나 천문학등 과학일반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신학적 응답보다는 그 핵심이 지구촌이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ecological crisis)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자연신학적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한국 진보신학 운동의 한 갈래로서 ‘신자연신학’( new theology of nature)은 다음같은 차이가 있다. 전통적 ‘자연신학’은 계시론과 신 인식론에 관련된 개념으로서, 자연질서와 리성을 포함한 일반자연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이론이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한 초자연적 ‘말씀계시’(성서) 만이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의 또다른 말씀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그 단초를 이룬다.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 체계에서 ‘우주론적 신존재증명’(cosmological arguments)은 전형적인 전통적 ‘자연신학’의 한 사례이다.

20세기 초,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룬너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자연신학 논쟁’도 인간성의 ‘전적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응답능력이 인간성안에 존재하느냐 않느냐의 논쟁이므로 전통적 ‘자연신학’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신자연신학’은 계시론이나 신인식론의 가능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뉴톤-데카르트적 기계론적 자연이 아니라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진화적 자연, 새로움을 생성하고 창발시키는 자연, 자기조직능력과 자기조절능력을 자신 안에 갖춘 유기체적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지와 씨름하는 신학적 통찰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한 갈래로서 ‘생태학적 신자연신학’의 의제와 특성들을 3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적 ‘신자연신학’ 운동은 종교(신학)와 자연과학과의 관계정립에서 상호 배타적 관계모델이나 평행적 독립모델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대화모델과 상호 통합모델까지를 추구한다.

이언 바버(Ian Barbour)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책안에서 인류문명사속에서 자연과학과 종교간의 만남의 관계유형을 4가지로 이론으로서 대별하여 설명하였다: 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이 그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진화론을 부정하고 생명 종들의 독립적 창조론을 주장할 때,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는 갈등모델에 해당한다.

창세기 창조설화를 자연과학 지식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과 근원과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설화로서 이해하고, 객관적 사실세계(fact) 탐구를 주업무로 하는 자연과학과 창조의 궁극적 의미와 뜻을 탐구하는 주관적 가치세계(meaning)를 탐구하는 정신과학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독립이론에 해당한다.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의 거성들(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부룬너, 라인홀드 니버)은 사싱 독립모델의 캠프에 속한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세계 자연과학계와 신학계는 1960년 이후, 이전의 독립이론에 안주 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신학)의 관계성 정립에서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이 활발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 지성계의 흐름을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신진 신학자들은 테드 피터스(Ted Peters)가 엮은 책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을 우리말로 공동번역한 5명의 신학자들이다.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수고했는데, 특히 이분야에서 김흡영교수의 선도적 노력이 컸다. 문화신학자 이정배교수는『기독교 자연신학』을 저술하고 죤 폴킹혼(John Polkinghorne)의 『과학시대의 신론』을 번역하였으며,김흡영교수는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를 저슬했다. 강성열교수는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을 저술했고, 심광섭교수는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대화 곧 신자연시학을 연구발표 하였다.

둘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중 ‘신자연신학’ 운동의 뚜렷한 목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형태이든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계의 ‘창조론’을 극복해야할 21세기 신학적 과제라고 본다.

위 주제를 가지고 특별히 노력을 경주한 진보신학자 신재식 교수는 최근 『예수와 다원의 동행』을 출판하여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기독교신앙이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될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신재식은 이 책에서 기독교신앙과 진화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쟁점들과 이론들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신자연신학을 이끌어가는 한국 진보신학계 중진 신학자로서 면모를 보인다.

신자연신학의 주제중 특히 진화론과 전통적 창조신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돕는 존 F. 호트(John F. Haught)교수의 명저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을 박만교수가 번역하였는데, 그 주제에 관하여 신선한 통찰을 우리들에게 선물한다. 이 책에 관하여 서평자 그리핀이 말하는대로 “ 이 책을 통하여,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며, 창조주는 진화로 인해 제약을 받는 전능하신 설계자가 아니라 가능성과 가치, 새로움, 정보,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 우주적 원천으로 이해된다”.

셋째, 신자연신학 운동은 실천적 시급한 지구촌 문제의식과 더불어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의 새로운 재구성을 힘주어 주장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구가 환경파괴문제및 기후붕괴, 그리고 생태계 교란 등으로 위기상태에 직면해 있다는 의식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응책에 관혀 진보신학이 보수신학과 다른점은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극복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윤리 의식’을 고취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정통적 신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특히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통적 기독교 패러다임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개인윤리적 생활에서, 근검절약, 자원의 재활용, 자연환경보호운동등의 실천으로서만은 않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생태학적 윤리, 혹은 생태학적 영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무엇이 선하고 옳은 일인가의 윤리적 판단기준은 인간과 하나님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정의, 진실, 정직, 평등, 사랑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및 생태계와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는 바른 도덕적 삶, 영적 삶이란 지극히 부분적이거나 심지어 반윤리적, 비영성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국 진보신학계의 생태신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한국교회환경연구소가엮은 책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에서 15명의 신학자들이 세계 생테신학의 동향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책안에서 세계적 생태신학자들 예들면 제이 맥다니엘, 디터 헷셀, 다글라스 할, 샐리 매페이그, 버나드 앤더슨, 로즈마리 류터, 매튜 폭스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생태학적 신학에 관한 한국 기독교계의 각성과 응답을 촉구하면서 여러신학자와 출판사가 노력하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박사의 열정에 힘입어 이 분야의 좋은 논저가 한국 교계에 소개되었는데 그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진보신학의 여성신학운동과 생태신학 운동의 배경에는 현대 기독교 신관에 대한 새로운 재성찰이 요청되는데, 과정신학의 신관은 다양한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과정신학을 한국 진보신학계에 소개한 학자들로서 류기종, 김상일, 장왕식,김희헌, 전철, 정강길 등의 공헌이 있었다.

생태학적 신학운동캠프에 속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한국사회에서 이끌어가는 평신도 크리스챤 과학자인 장회익 교수의 명저 『삶과 온생명』은 특기할만한 저술물로 주목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안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 윤리학을 극복하고 동시에 동양사상이 흔히 빠지는 범신론적 만물동체주의(萬物同體主義)에도 빠지 아니하고, 전체지구를 '유기체적 한 몸'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자리매김은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은유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4.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진보신학의 운동현황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진보신학 캠프안에 흐르는 5가지 색깔을 그 신학적 지향성과 특징들이 무엇인지 대략살펴 보았다. 한국 진보신학의 내일의 과제라는 것은 앞으로 10년 혹은 30년 을 내어다 보면서 미래의 과제를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언제나 현제 속에 이미 다가오고 있는 것이며, 내일의 과제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특히 힘써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미쳐 수행하지 못한 신학적 책임을 각성하자는 의미에서 내일의 과제라고 말한 것 뿐이다. 진보신학의 개념규정과 그 현황 흐름을 각각 5가지 언급했으므로, 내일의 전망과 과제도 5가지를 간추려 살피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은 아직 교회론을 충분하게 담론화 하지 못했으며, 21세기 세속화 물결과 포스트모던사회 속에서 새로운 교회론의 치열한 담론화가 요청된다.

기독교 신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믿는 바를 서술하고 세상에 증언하며 새로운 세상 상황 속에서 변증하는 과제를 지닌다. 줄여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봉사하는 책임을 갖는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교회공동체의 공동작업인 것이지 개인 신학자의 기독교에 관한 소견이거나 특정 지식인 집단의 기독교철학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들은 1960년대 이후, 급진적으로 변화된 시대상황과 한국적 ‘삶의 자리’에서 보다 복음적이고 책임적 신앙고백과 실천적 참여를 하는 과제앞에서 일차적으로 기존 전통신학의 굳어지고 시대착오적 신학틀과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과제에 복무하지 않으면 않되게 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운동을 펼처갔던 신학자들은 ‘굳건한 정통신학’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충분하게 설득하지 못하고, 기존교회 울타리 밖에서 그리고 진보적 신학집단들 학회활동 안에서 주로 신학운동을 펼쳐간 것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교회’, ‘선교의 아방가르로서 교회’, ‘민중운동으로서의 교회’, ‘전위적 제자직을 수행하는 교회’, ‘평신도중심의 만인 사제직 교회’, ‘자연과 세속사회를 제단으로 삼는 범성례전적 교회’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제도적 전통교회의 형태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감성과 윤리성과 지성이 아울러 충만한 <21세기에 걸맞는 영성적 제3교회> 시대를 아직 열지 못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 과제이다.

둘째, 진보신학의 다음과제는 신학을 진보적 신학자들 집단의 전유물로서 생각하거나 전문적 신학써클 안에서만 논하는 학문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진보신학 운동의 대중화, 소통강화’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대중화는 학문성의 하향조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교회의 적지않는 지성인 신도들은 기존교회의 설교와 신학내용에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진보적 신학서적 독서를 통하여 신학적-영적 갈증을 메꾸어오고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열린강좌’가 시대의 흐름이듯이 ‘감성과 지성이 함께 숨쉬는 열린 신학강좌’를 기획하여 귀중한 한국진보신학 써클이 지닌 집단지성을 ‘생명의 떡과 포도주의 잔치’로 펼쳐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통은 세상의 다른 학문들과 학제간 소통, 기독교 안에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과의 소통을 과제로 갖는다. 평화통일 신학은 남북한의 역사적 경험이 융합된 소통의 신학을 요청한다.

셋째, 한국의 진보신학만이 아니라 세계신학의 최대화두는 계몽주의 시대 인간 역사의 경험, 아우슈비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지구촌의 생태계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 이해’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신학은 학문이름 그대로 결국은 ‘신론’이 중심을 이룬다. 기독교의 위기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위기이거나 ‘예언자와 사도들이 증언한 성서적 진리’의 위기가 아니라, 그 해석과 이해의 틀을 새롭게 재해석하지 못하고 기존교리에 안주하는데서 오는 위기이다. 적어도 “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안에 계시는 한 하나님”(엡4:6) 고백에 걸맞는 새로워진 하나님론을 말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다시말하면,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신관은 만유를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 들꽃과 고난당하는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내재적 하나님, 그러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창발하면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과정적 하나님 체험이 동시에 살아나는 신관을 요청한다.

넷째, 한국의 진보신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신학 원리의 총체적 메타크리틱’ 과제를 숙제로 갖는다.

흔히 종교개혁의 3대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오직 성서만, 오직 은총만’의 신학원리를 강조한다. 본래적인 의미에서라면 언급한 종교개혁 정신의 3대원리는 항구적 진리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종교개혁이 3대원리는 많은 신학적 문제를 제기해왔다는 것을 개신교 교회사에서 증명한다. 특히 개신교 교회안에 영성수행의 약화, 성례전 신학의 약화, 성서해석상의 분파주의,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공공성의 약화를 초래했다.

다섯째, 세계신학사 지평에서 볼 때, 한국 진보신학은 동아시아 정신적 영성토양에 뿌리내린 ‘동아시신학’(East-Asian Theology)을 형성하여 세계 그리스독교 신학사에 공헌한 과제와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의 역사는 짧고 각각의 관심영역으로 분화되어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구미신학의 역사가 각각 위대한 복음진리를 그들 시대와 문화역사적 토양 속에 육화시켜 독특한 신학전통을 창출해 냈다면, 동아시아 문화역사 토양에서 그 가능성은 훨씬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는 불교, 유교, 노장철학, 한국의 종교등과 더불어 아시안인들의 고난경험과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등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실패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진보신학은 그 과제를 피할수 없는 세계신학사적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다. (탈고 2014.9.23)


[논문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한국의 진보신학의 동향과 그 과제를 개론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진보신학’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교계나 신학계에서 ‘보수신학’이라는 표현에 대비하여 사용하는 호칭을 일컫는데 다음같은 신학함의 경향성을 공통으로 한다: (i)세계 신학계의 비평적 성경연구 방법의 수용 (ii) 복음과 상황과의 변증법적 관계 (iii)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운동 참여 (iv) 토착적 한국신학 형성추구 (v) 십자군의 영성을 지양한 십자가의 영성을 추구함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계에서 진보적 신학운동으로서는 다음같은 다섯가지 신학써클을 통하여 진보신학의 현황과 미래과제를 살펴보았다: (i) 통전적 조정신학 운동 (ii) 민중지향적 사회-정치신학 운동 (iii) 종교-문화신학 운동 (iv) 여성신학 운동 (v) 생태학적 자연신학 운동이 그것이다.
한국의 진보신학 운동들이 안고 있는 내일의 과제들은 진보신학에 걸맞는 교회론의 강화, 진보신학운동의 대중화, 21세기 지식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론의 새로운 정립,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의 근본적 재성찰, 그리고 세계신학계에 공헌해야 할 동아시아 영성신학 정립으로 보았다.
(중요 어휘) : 성서비평학, 오늘의 구원, 생태학적 여성학, 우주신인론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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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영문요약]

This essay is a bird's eye view of Korean Progressive Theology, which is a common title in contrast to Korean Conservative Theology. In a broad sense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shows some marked trends toward doing theoloy : acceptance of biblical criticism , dialectical method between gospel and situation, commitment to the ecumenical movement of WCC, through investigation into indigenous theology, and pursuit for spirituality of crucifixion.
For making a general survey of Progressive Theology in Korea, this essay classifies Progressive Theology of Korea into five large groups: (i) theology of modulation (ii) minjung oriented socio-political theology (iii) indigeneous religio-cultural theology (iv) feminist theoloy (v) eco-theology of nature. And some specific chracters and tendencies of each theological movements are described comprehensively.
At the end of this treaties, the urgent tasks of Progressive Theology for today as well as future are suggested to theologians of five groups above mentioned: formation for update ecclesiology corresponding to post-modern world, driving of progressive theology to win a public support, proposal of new doctrine of God overcoming a supernatural God of orthodoxy protestants, and shaping of new christian spirituality deep rooted in east-Asian fertile soil.

(key words) Biblical criticism, liberation, salvation of Today, eco-feminism, cosmotheandric spirituality.



2020/02/03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8)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65): 동학과 신서학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

1860년 4월 5일, 최제우는 경주의 용담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최제우는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라고 부르는 하느님이다.”

최제우가 다시 묻는다. “그럼 당신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와 같은 분입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기를, “그렇다. 천도는 같다.” 그러자 최제우는 다시 묻는다. “그럼 제가 서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또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다. 너는 조선 땅에서 태어났으니, 서학이 아니라 동학을 하라. 서학의 이치와 동학의 이치는 다르다.”


그렇게 하여 동학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 이야기를 필자가 약간 풀어쓴 것이다. 최제우의 이 신비체험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동학이 섬기는 하느님과 기독교가 섬기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다. 다만 그 하느님을 설명하는 신학이 서학과 동학으로 서로 다를 뿐이다. 즉 동학과 서학은 서로 다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부모에게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형제랄까?

흥미로운 것은, 동학을 심도 깊게 연구한 김상일 교수는 그의 책 『동학과 신서학』(2000)에서, 동학이 비판한 19세기 서학이 이제는 새로운 신학적 발전을 이뤄 ‘신서학’(新西學)이 되어 동학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졌다고 주장한 점이다. 특히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같은 신서학은 신관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동학과 상당 부분 유사해졌으므로 형제애로 서로 연대하며 협력할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최제우의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조선말 많은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통해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개입으로 3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 동학혁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3·1독립운동이다. 특히 이때 동학은 기독교와 비로소 하나의 형제가 되어 대한독립을 외치는 위대한 ‘연대’(solidarity)를 이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의 연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마중물이 된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동학과 기독교의 위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과로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동학과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얼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모판이 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동학의 인내천 정신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였고,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정신과 합류하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재폭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4·19혁명과 5·18광주항쟁 그리고 6·10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하늘과 같은 고귀한 존재인 국민이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동학과 기독교 정신은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서 독재와 비민주적 정권의 타락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4·19, 5·18, 그리고 6·10사건의 깊은 심연 속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을 토대로 한 민본의 혁명은 거의 실패하였거나 미완의 혁명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의 혁명이었고, 3·1독립운동 역시 실패의 외침이었다. 4·19와 5·18, 그리고 6·10민주화운동 역시 절반의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혁명이 있은 후, 완전한 민주정부를 탄생시키지 못한 채 군부의 탄압과 기만으로 군부정권이 연장되는 비운을 겪었기 때문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恨)의 역사이다.

하지만 인내천과 자유와 평등사상의 위대한 승리가 얼마 전 쓰였다. 바로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특히 지난 2016년 촛불혁명은 필자가 보기에 첫 번째 온전한 동학 정신의 성공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1894년 동학혁명 이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인내천의 혁명이 2017년 대선을 통해 비로소 첫 승리한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탄생은 단순히 민주당 정부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승리요 또 인내천 사상을 설파한 동학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혁명의 승리를 통해 불기 시작한 인내천의 기운은 이제 놀랍게도 한반도 전체로 번져 평화와 통일의 횃불이 되고 있다. 70년 이상 분단되고 또 적대관계였던 남북한이 드디어 인내천의 정신으로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하늘의 이 뜨거운 기운을 막을 수 있겠는가? 최제우가 1860년 설파한 인내천의 정신이 이제 비로소 한반도에서 온전한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너무나 가슴 설렌다.

따라서 과거 3·1운동에서 한 형제로 피를 나눈 동학과 기독교는 이제 다시 하느님의 한 형제로서 연대의 공동체가 되어 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실현을 위해 씩씩하게 서로 협력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시 85:10), 이제 동학과 신서학이 한 형제임을 자각하며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함께 뜻을 모으는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3호』 (2018/06/12)




68Paul Dongwon Goh, Sunghwan Jo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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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Young Kim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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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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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듯이~
한울안 한이치....한형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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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넵!!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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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books.google.com.au/.../Su_un_and_His_World_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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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un and His World of SymbolsSu-un and His World of Symb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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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Dongwon Goh https://ytu.edu.au/.../prof.../paul-beirne-ma-mdiv-dmin-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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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Beirne, MA, MDiv, DMin, PhDPaul Beirne, MA, MDiv, DMin,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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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고박사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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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적극 동감.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 세력이 이런 인내천 평화 화해 정신에 역행하여 소란을 피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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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Kang-nam Oh 공감 감사합니다.ㅎ 그러게요 저도 한국교회의 미래가 많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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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내가 Beirne의 동학 영부 해석을 비판하고 새 학설 제기했지요. 내 책 2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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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Kyoung Kim 인내천 사상과 요한복음 비슷하지유. 이런 비슷한 성서해석을 1998년에 써서 출판되었지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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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 Park 아 너무 좋습니다 공유합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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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수운의 상제 체험에 대한 너무 기독교적인 해석^^. 천도교나 증산교나 원불교에서는 수운의 체험을 그렇게 보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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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 February at 07:16 ·



내가 꿈꾸는 교회(64): 계시의 공동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해명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이 문제를 ‘계시’와 연결하여 설명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과 유한한 우리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먼저 자기를 제한시켜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선성 곧 하나님의 ‘주도권’(initiative)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자신을 세상에 보여주실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베일을 벗는다(revelum; to unmask)’는 의미에서의 계시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 ‘완전히’ 마치 벌거벗은 누드처럼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러한 계시는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언급하였다.(요 1:18a)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인 직접적인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것을 일컬어 신학에서는 ‘계시의 간접성’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등만을 보여주신다.(출 33:20~23)

그리고 예수께서도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 14:9~11)라고 말씀하시며 의심하는 제자 빌립을 꾸짖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의 등(back)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가 행한 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실천(praxis)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등’이 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등을 뵙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분의 얼굴을 뵐 것이요”(마 5:8)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청결하게 닦은 뒤 우리의 영적인 눈을 활짝 떠서 그 분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시의 간접성은 어떻게 달리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계시의 다양성과 함께 하나님의 자유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계시의 다양성이다. 계시는 세상의 무언인가를 ‘매개’ 혹은 ‘매체’(media)로 한 간접적인 계시란 점에서 다양성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마치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주장하는 맥루한 같은 매체학자들의 언급처럼 미디어의 다양성은 신의 메시지의 다양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매개를 통해 세상에 숨겨진 것을 폭로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래서 계시는 이 세계의 탈은폐 사건이다. 곧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서로 낯선 게토화된 타자들 사이의 열린 의사소통, 그리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해방되는 진정한 자유의 사건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떼제의 노래는 계시의 간접성을 제시한 아주 좋은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오는 노랫말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매개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앙이 전제되지 않은 매체들은 단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히 11:6)

하지만 우리가 신앙으로 모든 매체들을 바라볼 때, 산은 산이 아니고 또 물은 물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의 현존을 중재하는 ‘성례전적 존재’(sacramental being)가 된다. 이와 같이 아주 작은 매개조차 신적 계시의 통로로 인식될 때 이 세상은 신성이 가득한 아름답고 거룩한 신의 정원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이 여러 매개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신다고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자, 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기꺼이 사용되기를 염원하는 계시의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노래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바라는 신앙공동체의 자기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계시의 어원이 ‘베일을 벗음’ 혹은 ‘탈은폐’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와 다름 아니다. 진리를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세이아(aletheia)’는 ‘탈은폐’ 곧 ‘망각을 벗어남(a-letheia)’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계시와 진리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즉 계시자로서 예수께서는 바로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리고 계시자에 의해 전해진 진리는 해방의 효과가 있다고 언급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이처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계시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진리의 인식을 통해 자유를 얻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숨겨져 있는 거짓과 무지 그리고 망각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진리 추구의 과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진리의 빛에 우리의 영혼이 환하게 조명될 때 인간은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된다. 아,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런 점에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바로 이런 계시의 공동체로서,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추구의 공동체요 동시에 참 자유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4호』 (2018/06/19)




53Paul Dongwon Goh, Kwon Sun Phil and 5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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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참으로 아름다운 진리의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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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22:31 ·



<감사> 레페스심포지엄 및 아시아종교평화학회 출범

1. 한 개신교인에 의해 훼불된 김천 개운사 불당회복을 위한 모금운동이 있은 지 만4년이 지났다. 그 결실로 레페스심포지엄이 만들어졌고, 또 그 모임이 발전하여 이제는 아시아평화를 함께 논의하는 국제학회로 발전하였다. 감회가 새롭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분명 있는 것 같다!

2. 이번 행사는 3박4일 일정(1.30-2.2)으로 일본의 나고야에서 개최되고 있다. 일본측 종교인들과 교수님들의 융숭한 환대 속에 심도깊은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어 넘 기쁘다. 종교분야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아시아의 평화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였는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일본 종교 지식인들이 보여준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사죄의 표현들은 새삼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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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7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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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gatzschev Muhschienn 와우~~ 세계로 뻗어가는 손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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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1 reply


민성식 돌아오시면 사진과 기사자료 보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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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혁 창립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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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n Paul Joo 사건이 발아하여 이제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앞으로 귀하게 자라고 열매맺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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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1 January at 08:23 ·



내가 꿈꾸는 교회(63):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의 공동체

지난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그 해 어느 때보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컸었다. 특히 2016년 말 한국사회에 강하게 불었던 촛불혁명과 그에 따른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적폐청산’(積弊淸算)의 주장들은 그대로 한국 교회에 전이되어 한국 교회의 적폐청산에 대한 요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으로서 한국 교회가 직면한 적폐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개신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자며 등장하였기 때문에 그 적폐청산을 제대로 완수하였는지 검토하는 일이다. 따라서 먼저 한국 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얼마나 잘 청산했는지 그 성적표를 검토한 후,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적폐청산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로 표상되는 ‘면죄부’(혹은 면벌부)를 거부하면서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다. 그리고 개신교의 3대 ‘오직’(sola) 교리로 불리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그리고 오직 성경”을 주장하면서 개신교의 문을 열었다. 특히 1520년 종교개혁 관련 3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구체적인 적폐가 무엇이고 그 대안적 방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우선, 루터는 <독일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을 통해 교황권의 절대권력을 적폐로 간주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교황이나 사제에게만 독점적으로 있다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저항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모든 신자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소위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을 통해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성례전을 신비주의적으로 오용하였는지를 또 다른 적폐로 지적하면서 성례전의 바른 이해와 활용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성례전을 성례전답게 만드는 것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신자 개개인의 믿음뿐”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성례전의 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끝으로 세 번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논문을 통해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곧 신앙과 삶의 관계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잘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과 책임으로’ 다가가야 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적폐에 저항하면서 개신교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루터의 후예인 한국 개신교회는 루터의 적폐청산의 노력에 얼마나 부응하여 그 개혁을 잘 완수했을까? 특히 만인사제설과 성례전의 참 의미의 회복,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이란 기준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적폐청산에 얼마나 성공했을까?

필자의 주관적인 입장이기는 하나 한국 교회의 성적을 매긴다면, 그 성적은 낙제를 간신히 면한 수준인 약 70점 정도 곧 C학점 정도이다. 너무 인색한 점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은 아직 ‘미완의 개혁’으로 파악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이 왜 아직 미완의 개혁일까? 루터의 세 논문을 중심으로 반성해 보면, 우선 한국 교회는 여전히 루터가 비판했던 ‘성직자 중심주의’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성 중심적인 목회자의 절대권력이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목회자 세습 논란이나 여성안수의 문제 등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명실공히 만인사제설이 실제적으로 한국 교회 안에 구현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차별을 철폐하고 교회를 더욱 개방적이면서도 평등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성례전을 바르게 회복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찬을 너무나 극단적인 화체설을 통해 신비화한 것이 문제였다면, 한국 교회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상징적 의미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찬을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례전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지는 성찬예배가 일 년에 겨우 서너 번밖에 시행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잘 발견된다.

그리고 성찬의 의미도 오직 죄의 용서란 측면에서만 강조될 뿐, 리마예식에서 강조하는 ‘성부께 감사’,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대’, ‘성도의 교제’, ‘하나님 나라의 식사’ 등의 통합적 의미는 거의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제 매주 성찬예배로 예배의 구조를 바꿔야 하며, 성찬의 다양한 의미를 균형 있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한국 교회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역설한 영혼의 자유와 이웃사랑의 실천이 결코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점을 많이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지향하는 기복적 신앙에 집착한 나머지, ‘세월호 사건’이나 ‘생명-평화-민족분단 극복’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이란 사회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다 깊이 성찰하면서 교회의 정신과 틀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운동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적폐청산을 완수하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루터 종교개혁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개신교적 저항(protestant)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5호』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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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you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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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2):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의 공동체

필자는 몇 년 전 한국 개신교의 개혁과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염원하면서 『테오프락시스교회론』(동연, 2011/소망학술상 수상)이란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 그 책에서 필자는 건강한 한국적 교회의 형성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몇몇 대표적인 적폐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당면한 대표적인 적폐들은 무엇이 있을까?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를 숙고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가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무비판적으로 추구해온 ‘교회사유화-재벌기업화’의 적폐이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란 철저하게 교회가 ‘공교회성’(public church)을 잃어버린 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사유화되거나 이익집단화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의 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무한한 이기심에 편승하여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이웃과의 연대성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을 뜻한다.


교회의 사유화-재벌기업화로 표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교회세습’과 ‘재벌형’ 대형교회를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작금의 한국 교회 최대 적폐는 교회의 자본축적과 세습이다. 최근 급속히 늘어나는 신자들의 탈교회 현상, 곧 가나안신자의 증가현상은 대형교회의 문어발식 확대와 자본의 축적 그리고 세습이 낳은 결과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 사건은 ‘명성교회의 불법세습’과 ‘사랑의교회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사랑의교회는 수천억 원을 들여 매우 화려한 교회당을 지으면서, 수많은 스캔들로 논쟁의 한복판에 아직도 서 있다. 특히 담임목사의 학위부정 논쟁과 교회당 신축 중에 발생한 불법적 건축설계 변경,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송사 등은 한국 교회의 재벌형기업화가 낳은 슬픈 자화상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교회의 ‘사유화’와 ‘재벌기업화’의 적폐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작은 공적인 교회를 향해서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잡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제국주의적-문화폭력적 선교방식의 적폐이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이유인 ‘선교’(mission)를 진지하게 다시 성찰하게 하는 문제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요 또 예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맥락에서 교회는 늘 선교하는 교회였고, 또 앞으로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 선교방식에 있어서 여전히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사용하던 폭력적이고 자문화 중심적인 형태를 고집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약 10여 년 전(2007)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팀을 보낸 샘물교회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샘물교회는 단기선교팀을 선교현장에 보내는 과정에서 무자격 선교사를 불법적으로 보내고 또 이슬람국가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선교방법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슬람 단체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여러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에서 그 유사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는 필자와도 관계가 있는 사건으로, 2016년 초에 있었던 개신교 신자에 의해 이루어진 김천 개운사 불당훼불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한 필자는 기독교 대학에서 불법적으로 파면 처리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의 방식에 있어서 큰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타자와 이웃종교를 배제의 원리로 접근하는 대신 오히려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소위 ‘종교대화적 선교방식’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래 전부터 WCC에서 강조해 온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나 최근 선교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고 있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그 나름 의미 있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교회 연합기관의 아노미와 남성-권위주의적 교회의 적폐이다. 이것은 1989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동안 한기총이 보수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보수적 정권과 깊은 유착관계를 맺으면서 불법선거와 금품살포 등 수 많은 권력형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한기총 해체운동’ 등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특히 최근에는 한기총 해체의 수순 속에서 한기총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으로 분열되었고, 또 개신교의 주요 교단장들의 모임인 ‘한국교회교단장회의’를 발전시켜 또 다른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조직이 현재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교회 연합기관의 수명이 기껏해야 수십 년도 채 못 가는 이데올로기화된 연합 기구가 한국 교회에 필요한가?” 이런 맥락에서 무의미한 교회 연합기관을 해체하는 일, 특히 남성중심적인 권력기관화된 교회를 갱신하는 일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따라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 기구화된 연합기관과 교회의 적폐를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평등적이고 유기적인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와 같은 적폐들을 청산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비로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적폐의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바탕으로 적폐청산에 앞장서는 공공(公共)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6호』 (2018/07/09)




43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4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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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이 땅에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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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성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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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Cheul Oh 베스트셀러가 되셔서 월급되신 맘껏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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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30 January at 09:24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 및 아트가나안교회 모임

가나안 언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제 본격적인 봄기운이 충만한 2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걱정이 많네요.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번주엔 두 개의 가나안교회 모임이 있습니다. 우선 길위의가나안교회는 씨알순례와 협력으로 진행됩니다. 팀을 이끌며 안내를 맡으신 김영덕 대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See more




51Myung-kwon Lee, Yeo Injo and 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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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진 맛저 하시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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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9 January at 10:56 ·



내가 꿈꾸는 교회(61): 생명의 공동체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적지 않은 이들이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로서 한양대 교수를 지낸 리영희 교수를 꼽는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독재의 시대인 1970~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서전적 대담집인 『대화』(2005)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무신론자로서 종교에 큰 관심이 없지만, 유일하게 존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꼽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무신론자도 존경하는 한국 최고의 그리스도인, 그가 무위당 선생이다. 위의 인용된 시가 바로 무위당의 시이다. 그의 시에서도 묻어나듯이, 그는 모든 것들을 생명 있는 ‘나’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욕심을 부리는 이기적인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인내천)라는 의미에서의 나이다. 나는 곧 하늘이니까 너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이고, 더 나아가 하찮은 미물도 하늘을 품고 있는 나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신 하늘을 품고 있는 하늘 같은 존재로서 나와 다름이 아닌 의미에서의 나이다. 그러니 장일순에게 있어서는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인 셈이다.

사실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동학 제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되었다. 특히 그는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최시형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무위당은 밥 한 숟가락을 뜨면서도 해와 달과 비와 구름과 땅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피를 뽑고 물을 대고 추수를 했을 어느 농부님에게 감사했다. 밥상이 되어준 나무와 밥상을 만든 목수에게 감사했다. 숟가락이 되어준 물질들과 숟가락을 만든 이름 모를 이에게 감사했다. 찰진 밥을 지어준 아내에게 감사했다.

이처럼 해와 바람과 비와 눈과 나무와 돌의 도움 없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나로 대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취지를 확산하기 위해 <한살림>을 조직하여 생명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 그것은 장일순이 꿈꾸는 공동체와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은 미물이라도 하늘처럼, 아니 나처럼 대하는 온전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장일순의 꿈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생명의 존재로, 즉 하늘로, 아니 바로 나 자신으로 볼 것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대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반생명적이다. 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고, 특히 최근에는 4대강 사업으로 강이란 강은 온통 다 파란 녹조로 변해 버렸다. 심지어 공기는 또 어떤가? 미세먼지로 해서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이 생명운동이 시급한 때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신학자란 그 시대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씨름하는 자란 말이 있다. 20세기 초 있었던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세계대전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서 인간의 죄성을 폭로했던 칼 바르트가 그랬고, 히틀러의 광기어린 파시즘에 저항하여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본회퍼가 그랬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런 질문 앞에서 서슴지 않고 ‘생명’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더 구체적으로는 생명을 구성하는 ‘물’의 문제요 또 ‘공기’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무위당식으로 더 엄격하게 말하면, 나인 물이 썩어가고 있고, 나인 공기가 숨조차 쉴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과거에 철학과 대화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물과 공기를 연구하는 ‘수문학’(hydrology)이나 ‘대기학’(aronomics)과 대화하면서, ‘생명학’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51) 사실 교회는 지금까지 예수의 이 말씀에 따라 성찬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성찬신학에 근거하여 빵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 교회에 꼭 나오라든지, 혹은 빵이신 그리스도를 먹지 않으면, 즉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등 빵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차별하는 배제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말하자면, 하늘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인 먹거리인 빵으로 오셨다면, 물로는 못 오시며, 또 공기로는 못 오시겠는가?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신학의 논리로써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는 가장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으로도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시며, 또 장차 다시 오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 짓는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빵과 포도주 같은 가장 하찮은 먹거리 속에도 계시는 생명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하찮은 미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마치 나로 대하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7호』 (2018/07/17)




62Paul Dongwon Goh, 이호재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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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생명공동체.. 를 꿈꾸는 멋진 목사님...글을 읽게 해주셔서
무한 감사 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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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uou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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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8 January at 07:54 ·



내가 꿈꾸는 교회(60): 예수밥상의 식탁공동체

필자는 교회에서 종종 농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는 절밥보다 맛있는 교회밥의 식탁공동체이다.”라고 말이다. 사실 한국인으로서 절에 한두 번쯤은 모두 다 가 봤을 것이다. 등산하거나 아니면 사월 초파일에, 혹은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를 통해 사찰의 문턱이 많이 낮아지면서 일반인들도 종종 절에 가서 어렵지 않게 절밥을 먹곤 한다.

오신채로 불리는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의 향신료(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안 쓰는 전통 때문에 싱거워 맛이 없거나 혹 배고프지 않을까 상상도 되지만, 실제로 절밥은 아주 맛있다. 그런데 교회밥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최근 들어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밥은 군대식 짬밥이 되어가고 있고, 밥도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한다. 심지어 주일날 교회에서 밥을 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깊이 반성되는 부분이다. 종교 간 경쟁의 시대에 교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절밥보다 맛있는 식탁공동체’를 꿈꿔야 하지 않을까?

최근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밥상공동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필자는 이런 예수의 밥상공동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혼자 종종 예수가 차린 밥상의 풍경을 상상해 보곤 한다. 예수의 밥상에도 누군가 배제된 차별이 있었을까? 아니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평등의 밥상이었을까?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혼술’이나 ‘혼밥’이 회자되고 있는데, 혹 예수는 혼밥에 익숙했을까 아니면 공동체 식사에 익숙했을까? 또 그 밥상의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생선이나 고기뿐만 아니라 혹시 한국인들이 오래전부터 건강식으로 즐겨먹었던 잡초요리는 없었을까? 예수는 어떤 내용으로 식사기도를 하였을까? 등등에 대해 상상해 본다. 물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성서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대안적 교회를 추구하는 우리도 종종 고민해 볼 만한 문제의식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예수밥상에 대한 풍경을 상상해 볼 때, 우리는 적어도 한두 가지 예수밥상의 특성을 그려보게 된다. 하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밥상이란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실천한 ‘만나’ 공동체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만나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은총으로 내려주시는 그날에 꼭 필요한 먹거리 곧 일용할 양식을 뜻한다.

주지하듯이 만나란 말의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광야에서 먹어야 할 먹거리가 부족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다. 여기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지?”(what’s this?, manhu)라고 물었던 것이다.(출 16:15)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놀라움이요 감사였다.

필자는 여기서 만나 곧 일용할 양식으로 권포근과 고진하 목사부부가 최근 『잡초치유밥상』(2017)이란 책을 통해 연구하며 알리고 있는 ‘잡초요리’를 언급하고 싶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낯선 음식! 하지만 가장 흔하기에 귀한 음식 ‘잡초요리’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잡초를 보고 약간 당황하며, “이게 뭐지? 이런 것도 먹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만나?”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잡초는 보관도 만나처럼 짧고 저장할 수도 없는 풀과 같은 음식이지만, 그 안에 보약 같은 생명이 가득한 음식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코셔(kosher)나 이슬람교의 할랄(halal)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만나 곧 ‘잡초요리’를 생각하면 어떨까?

또 하나는, 예수의 밥상은 자유식탁과 만인평등의 밥상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예수에게 붙여진 그의 별명 속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마 11:19a)

여기서 ‘마구 먹어대는 자’와 ‘포도주를 마시는 자’에 대한 옛 번역은 ‘먹보’요 ‘술꾼’이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번역으로, 예수께서 음식에 대해 ‘자유로운 음식’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죄인들과 서슴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밥상이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초대되는 ‘죄인들의 식탁’이요, 또 어떤 음식도 허용되는, 심지어 술이든 고기이든 모두 허용되는 자유음식 식탁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지하듯이 후에 베드로의 보자기 음식환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유대적 전통을 넘어 세계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발전하였다.(행 10:11~16)

결국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밥상이란 평등과 자유음식의 밥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어떤 동물이든 우리가 먹어도 되나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람도 청소년 시절에 죽으면 한(恨)이 된다는 말처럼 동물도 자신의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물건처럼 대량생산되고 또 일찍 희생되어 사람의 밥상에 올라온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따라서 필자가 꿈꾸는 교회는 만나인 잡초요리를 기본 베이스로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는 생명밥상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든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식탁에 환대하는 완전 평등의 식탁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8호』 (2018/07/24)




112Myung-kwon Lee, Chee Youn Hwang and 1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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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최 [건강한 식탁]이 그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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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박순영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타자의 밥 상에.... 잡초가 아니라
생명초 ~ 냉이.쑥.달래.미나리.씀바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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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아멘!
글을 대하며 잠시라도 일용할 양식 범위내에서 섭생을 잊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의 식탁은 어류, 육류, 곡물, 엽채·근채로 채워지는되...…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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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k Lee 글이 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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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7 January at 08:37 ·



내가 꿈꾸는 교회(59):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

얼마 전 문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톨스토이의 언덕을 넘으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큰 산이 다가온다.” 이 말은 러시아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주지하듯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거장들이다. 톨스토이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인간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강조한 사상가라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연의 어두운 부분을 매우 적나라하게 잘 파헤침으로써 은폐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폭로시킨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인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첫 페이지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말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소설의 주인공인 카라마조프가의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수도사로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을 지도한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수도생활의 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도생활은 마치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과 단절된 채 수도원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수도생활은 무의미한 고립적 삶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 좋은 예가 소설 속에서 진정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등장한 조시마 장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수도자였다가 “속세에 머물라.”는 스승 조시마 장로의 권고에 의해 수도사를 그만두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일종의 재가수도자가 된 소설 속 주인공 알료사의 삶 또한 그렇다.

이처럼 수도원 안에서 수도하든 아니면 수도원 밖에서 재가수도자로 생활하든 중요한 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 힘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권에 보면, “양파 한 뿌리”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그 이야기 역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톨의 밀알 비유와 비슷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옛날에 참 못되고 못된 한 아줌마가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게 되었다.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를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녀를 변호할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양파 한 뿌리를 기억해 낸다. 아줌마는 과거 어느 날 딱 한 번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수호천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양파를 갖고 아줌마에게 가서 그 아줌마가 양파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양파를 들고 지옥에서 그것을 아줌마에게 내밀었고, 아줌마는 그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양파를 같이 잡고 오르려고 하였다. 그 때 아줌마는 그 양파는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밀치자, 그만 양파는 끊어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아줌마는 끊어진 양파와 함께 영원한 불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수호천사는 슬피 울면서 아줌마 곁을 떠났다는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양파 한 뿌리 같은 아주 작은 선행이라도 인간을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말하자면, 양파 한 뿌리는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알에 비견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선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주일학교에서 종종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믿음으로 가는 나라>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어여뻐도 못 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과연 맘 착해도 가지 못하는 나라라는 말은 맞을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마 25:31-46) 양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롬 2:14-15) 말하자면, 그들은 양파 한 뿌리 같은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이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선행의 삶을 산 자들이다.

선행과 믿음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땅에 떨어져 썩는 한 알의 밀알과 양파 한 뿌리 같은 착한 일, 그것은 수도원에서 고독을 씹으며 인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일 수도 있고, 혹은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떠 주는 아주 작은 선행일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작지만 자신도 살리고 또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일일일선’(一日一善)이란 말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착한 일을 도모함으로써 그것으로 존재양식을 삼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한 톨의 밀알이나 양파 한 뿌리 같은 작은 선행일지언정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59호』 (2018/07/31)




68Myung-kwon Lee, Hyun Kyung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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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행함은 존재의 변화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분리해버려 행함은 믿음이 없는줄로 착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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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잊어 버렸던 세계명작 그....
다시 봐야 겠네요
상황에 따라 달리 느껴질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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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6 January at 10:07 ·



내가 꿈꾸는 교회(58):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

필자의 스승인 유동식 교수(1922~ )는 신학자이기 이전에 화가이다. 그는 화가로서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채화로 그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소위 ‘관상화’(觀想畵)로 불리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관상화란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깊이 관상한 미적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뜻한다.

예컨대 신학자인 화가가 한 폭의 관상화를 그렸다면, 그 그림은 단순히 외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재현하여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신학적인 이념을 화폭에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는 불교미술의 ‘만다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유동식 교수의 관상화 중에 ‘무궁화 기독교’로 이름 붙여진 그림이 하나 있다.(아래의 그림) 이 그림은 좌우 대칭적 구도로 되어 있다. 왼편의 위쪽에는 기하학적 도형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아름다운 빨간 장미가 여러 송이 피어난 모습이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편에는 한 보살이 물가에 한 발을 늘어놓고, 다른 발은 반가부좌 자세로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다. 그 아래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왼편 쪽의 장미와 오른편 쪽의 보살을 두 원이 이어주면서 그 접점에 무궁화가 한 송이 피어 있다.

필자는 언젠가 스승에게 위 그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왼편 상단의 그림은 성서의 세계를 함축하여 표현한 성서계 만다라입니다. 그리고 왼편 아래에 있는 장미는 아가서 2:1에 나오는 ‘샤론의 꽃’ 혹은 ‘샤론의 장미’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가(89장)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왼쪽의 그림은 서구의 기독교 문화를 뜻합니다.

한편, 오른쪽에 그린 보살은 13~14세기 고려시대에 많이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 관음보살의 모습을 따온 것입니다. 관음보살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로서, 그 자비심은 마치 하늘의 달이 여러 맑은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여 ‘수월’(水月)로 표현됩니다. 관음보살 아래의 연꽃은 아름다운 불국토를 이상화한 것입니다. 수월관음도는 화엄경의 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써,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한국불교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오른편의 그림은 한국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나는 장미의 기독교문화와 연꽃의 한국문화가 이제 두 원이 서로 만나 교집합을 이루듯 새롭게 만나 새로운 꽃을 피우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궁화 기독교입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한반도에서 장미와 연꽃이 만나는 모습, 그리고 두 꽃이 만나는 지점에서 제3의 아름다운 꽃인 ‘무궁화’가 피어나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서구에서 들여온 장미의 기독교만 풍성할 뿐이다. 그리고 연꽃의 한국문화를 우상시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장미와 연꽃의 문화를 넘어서, 제3의 새로운 꽃인 ‘무궁화’ 꽃을 피워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필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무궁화 기독교의 모습으로 무궁화의 특성을 상상하며 세 가지로 제안하고 싶다.

첫째, 무궁화 기독교란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그래서 ‘늘 새로운 한국적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의 의미는 말 그대로 끝없이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무궁화만큼 오래 피는 꽃은 거의 없다. 7월에 피기 시작하여 10월까지 거의 4개월 동안 계속해서 피니 말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무궁화는 매일 꽃이 떨어지고 다음 날 새로운 꽃으로 새로 핀다는 점이다. 마치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말한 것을 실증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워진 한국인의 한 멋진 삶의 영성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진정한 한국적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을 ‘치료하는 기독교’를 뜻한다. 무궁화는 그냥 꽃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약재로 사용된 꽃이다. 한방에서는 4~6월에 무궁화 껍질을 벗겨서 햇빛에 말려 해열·해독제로 사용한다. 특히 동의보감에 따르면, 무궁화는 사혈을 멎게 하고, 설사 후의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시면 효험이 크다고 한다.

이처럼 무궁화는 치료의 꽃으로서 ‘여호와 라파’(출 15:26,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를 지닌 무궁화 기독교를 암시한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가? 특히 한국병으로 불리는 불신과 분열, 그리고 노예의식과 평화를 깨는 분단의 질병은 매우 심각하다. 따라서 무궁화 기독교는 한국인의 병을 치료하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치료의 공동체를 뜻한다.

끝으로 무궁화 기독교는 어떠한 고난도 굴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내의 기독교’를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궁화의 약점으로 진딧물이 많이 끼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궁화는 절대로 진딧물로 죽는 법은 없다고 한다. 즉 무궁화는 진딧물을 비롯하여 그 어떠한 질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는 꽃이다.

더욱이 무궁화는 영하 20도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고 잘 견디며 살아남는 인내의 꽃이다. 이것은 수 천 년의 역사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난을 슬기롭게 잘 이겨온 한국의 역사를 상징하며 동시에 한국인의 꿋꿋한 근성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서양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시켜 세계가 깜짝 놀랄 제3의 창조적인 문화의 꽃을 피우는 무궁화 기독교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0호』 (2018/08/07)




78Chee Youn Hwang, Myung-kwon Lee and 7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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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이야기도 홍천의 무궁화 동산, 찬송가 5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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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1 reply


Huyn Jang 하근동백..다도용어입니다.

여름에는 무궁화 겨울에는 동백이란 뜻입니다.무궁화는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떨어지고 동백은 예쁘고 고울때 떨어집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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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52 ·



<안내> 길위의가나안교회+씨알순례 모임

●모임일시: 2020. 2. 1(토) 오전9시50분
●모임장소: 종로3가역(1,3,5선) 탑골공원 팔각정....See more




45Myung-kwon Lee, Duk Jin Hong and 4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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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5 January at 11:45 ·



<공지> 가나안교회 모임 안내

1. 경자년 설을 맞이하여 모든 가나안 언님들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가나안교회에 깊은 관심과 응원 감사드립니다.

2. 본래 내일은 <스팀가나안교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하지만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의 교회를 방문하거나 혹은 가족들과 함께 주일을 지키는 것도 좋을듯 싶어 이번주일은 쉽니다. 보람찬 설날 되시길 바랍니다. 대신에 스팀가나안교회는 월요일(1/27) 점심 때 친교모임을 갖을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바라며, 자세한 것은 최승언 언님께 문의바랍니다....See more




52Myung-kwon Lee, 이강인 and 5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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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새해
가나안 교회 모임
더욱…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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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Yoo 새해 공동체 모든 분들 가운데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혜가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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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36 ·



내가 꿈꾸는 교회(57): 깨달음 추구의 공동체

기독교는 지금까지 '믿음'의 종교로만 이해되었다. 여기서 믿음이란 소위 ‘적색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자칫 ‘값싼 은총’(cheap grace)으로 잘못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그래서 최근 많은 신학자들은 적색은총에 대비되는 소위 ‘녹색은총’의 중요성을 말한다. 여기서 녹색은총이란 좁은 의미에서 생태신학적 복음 이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수행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소위 ‘깨달음’의 측면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분은 다름 아닌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선생이다.


그렇다면 유영모가 깨달은 바는 무엇이고 또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여기서 모두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없이 계신(빈탕) 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그 없이 계심을 본받아 ‘몸나’에서 ‘얼나’ 곧 ‘참나’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영모는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유영모가 ‘빈탕 한데 맞혀 놀이’라고 말한 그 깨달음의 현장 내지 도량(道場)을 일컬어 ‘심우소’(尋牛所)라고 부른 점이다.

우리가 불교사찰에 가게 되면 대웅전의 외벽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여기서 심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길을 찾아 나서는 10가지 그림이다. 그것은 길들이지 않은 소를 찾아 나서서, 궁극적으로 소를 찾아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까지를 그린 10단계의 길인데, 그것을 일컬어 종종 ‘십우도’(十牛圖)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10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 소를 찾아 나섬(尋牛)--> 2. 소의 발자국을 찾음(見跡)--> 3. 소를 발견(見牛)--> 4. 소를 붙잡음(得牛)--> 5. 소를 길들임(牧牛)--> 6. 소를 타고 집으로(騎牛歸家)--> 7. 소는 없고 사람만 있음(忘牛存人) --> 8. 사람도 소도 없음(人牛具忘)--> 9. 본래의 자리로 돌아옴(返本還源)--> 10. 거리로 나섬(入廛垂手)이다.

이처럼 심우도는 마치 화엄경에 나오는 주인공 선재 동자가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모습과 같다. 혹은 그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주인공이 지옥과 연옥을 구경하고 다시 궁극적인 이상향인 천국으로 순례하는 모습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그런데 유영모는 앞서 언급한 얼나 곧 참나를 깨닫도록 수행하는 현장을 일컬어 심우도의 도량, 곧 ‘심우소’(尋牛所)라 불렀다. 말하자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나를 찾아 떠나는 심우소와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교회는 과연 심우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교회는 심우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다. 빈탕 한데 맞추는 곳이 교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는 빈 곳이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채우려는 ‘욕망소’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눅 19:46)

여기서 기도하는 집이란 유영모식으로 말하면 다른 아닌 심우소이다. 그곳은 인간의 탐진치(貪瞋癡), 곧 탐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세상적인 것의 없이 계신 분(빈탕)인 하나님께 맞추어 그분과 하나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처이다.

그렇다면, 심우소인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서 빈탕 한데 맞히는 놀이를 계속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융심리학이나 자아초월심리학에서는 세상적인 자아(ego)를 초월하여 참자아(Self)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적절한 표현이다. 따라서 심우소인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자아를 찾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을 종종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고전 15:31,36).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그리고 그는 계속 외쳤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

이처럼 참자아를 찾는 작업, 그것은 마치 심우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소(진리)를 찾아 떠나는 길과 같고, 또 소를 찾은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여(如如)하게 그 소와 더불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같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심우도의 마지막 10단계의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10단계에서 소를 찾은 자는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저잣거리로 다시 들어가서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산다. 그것은 성스러운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 중생의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 얼마나 즐거우랴! 교회는 마치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심우소와 같은 곳 말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이런 심우소 같은 신앙공동체로서, 얼나를 찾아 함께 기도하는 집이요, 또 새로운 참자아를 찾은 이들이 더불어 일상을 나누는 입전수수의 현장이다.

<주간기독교>, 『2161호』 (2018/08/21)




122Paul Dongwon Goh, songsoonhyun and 1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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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역시 언제나 스승님의 품 따뜻합니다.
참 나의 자리는 품어줌의 자리겠죠.
그 품어줌을 떠나 나를 찾아가다보면 나는 온기를 잃습니다. 스승님이 열어 놓으신 그 가슴에 지친 마음 살며시 기대어 봅니다.…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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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손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침 제가 십우도 풀이 책 원고를 막 끝낸 터라 더욱 감명깊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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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replied · 3 replies


하중조 성육한 하느님이라 가르치는
근본주의교리에 아직도 목매단
Church of Christ 교단의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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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 이우원 손교수님,현장스님 함께 있으면 참 즐거워요!
차곡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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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4 January at 09:18 ·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PRESSIAN.COM

다주택 임대사업자 세금특혜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1월 14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집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시청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충격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받았을 것이다. 첫 번째 충격은 다주택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세제혜택을 베푼다는 사실이




50박걸, 이은선 and 4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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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9:33 ·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PATHEOS.COM

St. Maximos, The Purpose of Humanity and Universal Salvation
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Many think St. Maximos the Confessor was a universalist, but his texts suggest a more subtle eschatological position.



16Jong Gil Choe, Jong Wan Park and 1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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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3 January at 06:38 ·



내가 꿈꾸는 교회(56): 화해의 공동체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부흥회를 많이 하던 70~80년대에 생긴 속담으로 생각된다. 보통 부흥회에서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정작 부흥회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서는 전혀 성령 충만한 사람답지 않게 이웃과 잘 싸우고, 게다가 화해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한번 싸우면 절대로 화해하는 법이 없다는 말도 여전히 들려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종종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정작 어떤가? 그들은 오히려 문제가 생기면 소주 한 잔 따라 놓고 화해를 청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령이 소주 한 잔만 못하냐?”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할 때마다 심심치 않게 ‘성령’(하나님)이란 말을 종종 들먹이지만, 실제 일상 속에서 잘 화해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한 이야...Continue reading




96Chee Youn Hwang, Byeong Hee Kang and 9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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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K. Joe 역시 목사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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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5:01 ·



내가 꿈꾸는 교회(55): 용서의 공동체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가장 비추(悲醜)한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용서’를 거부한 어느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를 들고 싶다.(마 18:21~35) 왜냐하면 그 결과는 ‘은혜의 철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지우면 ‘일흔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용서의 요구로, 용서야말로 예수 가르침의 핵심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은혜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용서’가 실천되지 않을 경우, 베풀어진 은혜가 철회될 수 있음을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용서의 사건을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경제적인 의미의 ‘빚’(debt)과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뒤에서 언급할 주기도문에서도 그렇다. 지금처럼 예수 당시에도 돈이 매우 중요했던 모양이다.


우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는 한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한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의 15년 치의 연봉에 해당하는 큰 돈이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란 산술계산으로 할 때 그 ‘만 배’이므로 거의 15만 년 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년 치 연봉이 3천만 원이라면, 한 달란트는 약 4억 5천만 원이다. 서울 강북의 집 한 채 값이다.

그런데 그것의 만 배이니, 계산하면 약 45조 원 정도가 된다. 그 부채의 규모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자산에 맞먹는 엄청난 돈이다. 그 큰 부채를 모두 갚으라는 왕의 요구에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에게 애원하는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시켜줬다.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반전이 벌어졌다. 엄청난 돈을 탕감받은 그 종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났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할 경우, 약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종은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독촉하였고, 그가 갚지 못하자 그를 투옥시켰다.

이 소식을 전하여 들은 왕은 노하여, 종을 잡아 형무소에 넘기고 빚진 일만 달란트를 모두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는 예화이다. 이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잊고 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철회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 이처럼 용서의 존재론적 근거는 인간을 향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하나님과 연관된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적 본성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에 참여하는 지름길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철회시킬 수 있는 무서운 심판도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자(孔子)도 ‘용서’가 모든 인륜의 근간임을 강조한 점에서 선행은총적인 용서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논어』에 따르면, 제자 자공은 공자에게 인간이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할 덕목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자공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기서호 기소불욕물시어인).

즉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 여기서 ‘서’란 용서의 마음으로, 너와 나의 마음을 같게 하는 것이다.(如+心) 달리 말해 그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요, 내가 용서받았으면 나도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학의 황금률이다.

한편, 공자의 서(恕)의 황금률은 예수의 황금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황금률이 왜 그렇게 중요한 말씀인지 생각보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황금률에 표현된 ‘대접’이란 말이 한국인들에게 ‘음식’과 연관된 단어로 축소 이해됨으로써, 황금률을 “내가 음식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먼저 음식을 대접하자”라는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이 맞다면, 그것은 자칫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황금률은 ‘기도’와 관련된 말씀에서 나온 가르침(마 7:7ff.)이다. 따라서 예수의 황금율은 ‘용서’와 관련된 말씀으로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 주기도문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 6:12) 여기서 죄란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다름 아닌 ‘빚’(debt)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에서의 특이점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오히려 더 앞서서 누군가 우리에게 진 빚을 먼저 적극적으로 탕감시켜줌으로써 우리가 하늘에 지은 죄를 보다 확실하게 용서받으라고 언급한 점이다.

이처럼 용서는 예수의 사상에서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예수의 황금률을 실천하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3호』 (2018/09/04)

* 사진은 다천 언님의 매화 사진 작품(2020.1.20)




62Paul Dongwon Goh, Chee Youn Hwang and 6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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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2 January at 04:13 ·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HANI.CO.KR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
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옛 소련 고고학자, 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 발해 절터에서 흙덩이 십자가 발굴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 대주교 따르던 신자들 실크로드 타고 동아시아 전파




68Chee Youn Hwang, 주영준 and 6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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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 Jang 경교에서 모신 예수상입니다.

관음의 형상에 이마와 가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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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20 January at 00:13 ·




김근수‎ to 행동하는 예수
19 January at 18:28


5년전 이런 강의 있었는데요...



19박걸, 한양국 and 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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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9 January at 22:04 ·



가나안교회 템플스테이 중^^






Huyn Jang
19 January at 22:01


지혜의 불로. 번뇌를 태우고

장작의 불로 고구마를 굽는다.

가나안 성도들과 오대종교 모임이 아실암에서



28Byeong Hee Kang, Myun-joo Lee and 2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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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jin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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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궁금했어요.언제 소식이 올라오나.ㅎ
마치 마두금 소리 같은
우~~~ 웅웅...소라고둥 악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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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8 January at 09:00 ·



내가 꿈꾸는 교회(54):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

오래전 필자가 섬겼던 교회에서는 특강 강사로 한 저명한 종교학 교수를 초대하여 신앙강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사는 특강 말미에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한국 교회가 ‘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가 소개한 경험담은 이렇다.

그 교수에게는 수십 년 동안 가깝게 지내온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하나 있었단다. 10여 명이 일 년에 서너 번 모이는데, 여느 동창 모임이 그렇듯이 그 모임도 친구들이 서로 허물없이 형제처럼 지내고 의리도 매우 돈독하였다. 1998년 IMF 때 일이다. 사업을 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친구는 부도를 내고 그만 망하게 되었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그 친구는 그만 소위 경제사범으로 구속되어 몇 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의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 어려운 상황을 지켜보던 동창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친구가 출소할 때까지 틈틈이 친구 가족들을 챙겨주었다.

감옥에 갔던 친구는 다행히 형기를 잘 마치고 출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창 모임에도 다시 나왔다. 그런데 그 친구는 모임에 나와서 자기 가족들을 챙겨준 동창들에게 고마움을 전혀 표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 생활 잘 마치게 되었다. 기업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생하게 되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친구의 말을 들은 동창들은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왜냐면 자신이 힘들 때 동창들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전혀 그 고마움을 언급하지도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장 강조하는 ‘전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앞의 예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신앙적 언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통은 아닐까?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참 많이 사용하는데, 정작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위 교수의 친구는 동창 모임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말을 하기 전에 적어도 먼저 벗들에게 진실로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옳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요 양심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에게 비양심적인 존재로 비춰지면서 공분(公憤)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장로의 전통’으로 불리는 모세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매우 엄격히 준수하는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결 예법에 따라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지 않았고, 또 시장에 외출하였다가 귀가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귀가 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은 뒤 음식을 먹었다.(막 7:1-5) 그런데 어느 날 예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일이 발생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 항의하였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막 7:6)

바리새인들의 이 항의는 어쩌면 정당한 항의처럼 보인다. 왜냐면 정결 예법을 지키는 일은 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요, 또 현실적으로 정결 예법의 규정을 떠나서 귀가 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위생상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정결 예법을 어긴 제자들을 옹호하며, 대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는 정결 예법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가 문제 삼은 것은 정결 예법 자체가 아니라 ‘법 정신’이다. 즉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특정 법 조항을 구실삼아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무뎌진 양심을 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중략)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마 7:9-23) 법 정신 곧 사람의 양심을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교회의 전통은 그 나름대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사막기후인 팔레스타인에서는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좋고, 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교회의 언어를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늘이 주신 ‘양심’을 먼저 지키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계명’(막 7:8)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의 전통은 지키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계명인 양심은 저버렸다. 그리고 종교학 교수의 친구 역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기를 도와준 친구들의 은혜를 잊은 비양심적 신자였다.

하나님의 계명 곧 양심은 특정한 법 규정이나 전통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앞서서 늘 법 정신을 물으며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전통에 앞서는 양심의 공동체이다.

<주간기독교>, 『2164호』 (2018/09/11)




63Myung-kwon Lee, 이호재 and 6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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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영 전통에 앞서는 양심공동체..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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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글의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되는데 친구가 동창모임에 나온 것 자체가 친구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은혜가 고통의 현실에 뿌리 내리고 거기서 살아내는 하늘기운, 양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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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국 로너건은 종교적 회심만을 말해 온
전통적 회심이론을 비평하면서 지성적 회심,, 윤리적 회심,종교적 회심을 구분했습니다 젤피는 로너건의 회심 이론에 사회적 책임과 연대 의식을 강조하는 사회적 회심을 ...
저는 티핑 포인트가 얼마남지 않은 이 시대에 생태회심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데...…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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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Lee replied · 2 replies


연창호 양심에 대한 성서구절이 드뭅니다
바울은 성령과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믿음을 강조하고 그 둘을 대립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루터조차 보름스에서 양심을 속일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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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17 January at 07:12 ·



내가 꿈꾸는 교회(53): 유무상자의 공동체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저 세상 곧 ‘내세’에 가는 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혹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교회의 전도 구호는 일종의 ‘내세 비즈니스’ 쯤으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의 이해는 사실 매우 왜곡된 이해이다.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예수께서 전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중심에는 내세보다는 오히려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이 고민하는 문제, 특히 먹고사는 ‘경제’의 문제가 그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사건과 초대 교회의 모습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는 그 증거로 세 가지 정도 성찰해 본다....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