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관음.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관음. Show all posts

2022/03/16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휴심정조현이만난사람

문광스님,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가야

등록 :2022-03-15
조현 기자 사진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9)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상


탄허학 박사 1호인 문광 스님.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 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아홉번째 멘토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인 문광(51) 스님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 ‘코로나19’의 극성도 새벽의 징조일 수 있다. 한민족이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듯이. 잠자는 나무와 꽃들을 깨우는 꽃샘추위와 함께 비가 촉촉하게 내린 14일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문광 스님을 만났다. 자신이 근무하는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달려 나온 문광 스님이 봄바람처럼 맞는다.

그는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학·석사, 동국대 선학과와 불교학과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를 거친 불교학자이자 국학자이다. 통광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아 경허-한암-탄허-통광으로 이어지는 전통 강맥을 이었다. 조계종 종정이었던 혜암 스님이 열반하기 전 마지막 시봉자였던 그는 참선 수행에 매진한 수좌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설법하는 문광 스님. 문광 스님 제공

그뿐이 아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퇴계학파인 유학자 부친에게서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힌 그는 또래에서 드물게 일찍이 유(학)·불·도(학)의 경전들을 쉽게 섭렵할 수 있었다. 그가 유·불·도뿐 아니라 주역·정역·성경까지 통달했던 탄허(1913~1983) 스님을 사숙(私淑·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한 것은 그 박람강기(博覽强記·동서고금의 책을 널리 읽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함)와 통섭에서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탄허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탄허학 박사 1호인 그는 <탄허선사 사교회통사상>에 이어 최근에도 <탄허학>(조계종 출판사 펴냄)과 <탄허사상특강>(도서출판 교림 펴냄)을 동시에 출간했다. 탄허 스님은 한국전쟁 이후 강원도 산골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를 이끌면서도 불교 역사상 전무한 역경과 저술 작업을 통해 초인적 성과를 이룬 인물이다. 탄허 스님은 새벽 1~2시쯤 일어나 신선법과 참선으로 하루를 열었다고 한다.

문광 스님도 참선에 연구에 강연까지 눈코 뜰 새 없어 보이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는 선가(禪家)의 보물이라는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선문염송 요칙>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도 늘 아침에 통기법(通氣法)이라는 몸 푸는 체조 같은 것을 하고 바로 좌선을 한다. 그것이 바쁜 일상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가는 건강 비결이다. 통기법과 좌선을 하루도 끊김 없이 이어온 지 6000일이 넘었다고 한다. 햇수로 16년이 넘은 셈이다. 그는 “운동이든 수행이든 한꺼번에 많이 하는 것보다 이처럼 끊기지 않게 습관을 들이는 게 가장 좋다”며 직접 지은 신조어인 ‘최귀연공’(最貴連功·끊기지 않고 단련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을 늘 불자들에게 강조한다.

특히 그는 스트레스 해소와 정서 안정을 위해 선(禪)을 최고의 비법으로 제시한다. 미래에 대한 예지와 예언으로 미래학의 지평을 연 탄허 스님이 “변화무쌍한 미래엔 변화 자체보다 두렵고 놀라서 해를 입는 사람이 더 많다”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참선을 권유한 것과 같다. 일문일답이다.





# 근심·걱정·스트레스가 없는 마음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선(禪)과 명상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에게 왜 선이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선은 생각이 끊어진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선과 명상을 하면 본래 일 없는 무사(無事)하고 평화로운 자리로 들어가서 스트레스를 떠날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 ‘심체리념’(心體離念)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원래 생각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근심과 불안의 실체는 본래 없는 것이니 자꾸 생각 끊어진 마음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정신수양법과 마음관리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한국이란 땅은 수행하러 태어나는 곳인 것 같다. 불교 수행은 삶에 깊이 녹아 있고, 도교 또한 국선도 등 마음 닦는 법이 이어져오고, 유교의 정좌법(靜坐法)도 있다. 유교의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원리는 ‘마음을 일념으로 해서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으로, 유불선(儒佛仙)의 원리가 동일하다. 일례로, 퇴계의 ‘중화탕’(中和蕩)은 한국 유학의 심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생각에 삿됨이 없는 ‘사무사’(思無邪), 선행을 실천하는 ‘행호사’(行好事),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막기심’(莫欺心), 시기 질투하지 않는 ‘막질투’(莫嫉妬), 탐욕을 경계하는 ‘계탐’(戒貪) 등 30가지 약재를 함께 달여서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중용의 마음이 최고의 약이라는 은유인데 멋지지 않은가.”



―한국 사상의 해답을 탄허학에서 찾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원효에서 탄허까지 내려오는 회통의 정신은 한국학의 중요한 특질이다.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 도교, 기독교를 회통한 탄허학을 21세기 한국학의 새 지평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특징인 융복합과 융섭의 경향이다.”





# 탄허 스님이 미래 예지는 힘든 세상을 살아낼 중생들을 위한 연민의 발로

―통상 불교 고승들은 역을 점치는 것이라며 멀리했는데, 왜 탄허 스님은 주역과 정역을 중시하고, 미래를 예지했나?

“중국의 근대철학자 모종삼은 <중국 철학의 특질>에서 동양사상의 핵심을 역학의 ‘우환의식’으로 보았다. 중생들에 대한 연민심의 발로였다. 힘든 세상이 온다는 것을 법력으로 알았으니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야 할지 미리 알려주고 싶었던 보살정신에서다. 역학의 예지는 성현의 무심(無心)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미래학이 많다. 미륵불이라든지, 관음·지장보살에게 중생제도의 사명을 준 것도 미래예지였다. 삿된 욕심에서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과는 경지가 다른 것이다.”



―탄허 스님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역학적 정치사상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본 까닭은?

“동양이 정신적이라면 서양은 물질적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물질과 소유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물질은 삶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는 없다. 역학은 그 중심을 항상 마음과 정신으로 설명한다. 동양 고대의 정치사상은 바로 인간의 마음과 정신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심학적 정치사상이기 때문에 결국 물질적 풍요가 충족되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동양의 정치사상을 말했던 것이다.”



―탄허 스님은 지구의 미래, 갈등이 어떻게 될 것으로 보았는가?

“동양과 서양, 좌파와 우파의 갈등은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북극과 남극은 있어도 동극과 서극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중요한 기점이 된다고 했다. 한국의 통일은 지구적으로 볼 때에도 큰 사건이라고 했다. 인간의 문제보다도 기후위기, 지진, 화산 같은 지구 자체의 격변과 변화를 많이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말고 참선하라는 것이다. 선업을 짓고 남을 도우면서 말이다.”



문광 스님이 사숙한 탄허 스님. <한겨레> 자료사진


# 세계인을 사로잡은 한류 드라마는 영웅이 아니라 바른 마음을 가진 개개인이 주인공

―한류 영화와 드라마가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데, 어떤 점이 어필한다고 보나?

“미드(미국 드라마)는 영웅이 나와서 해결한다. 히어로물이 대세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엔 그런 영웅 대신 깨어 있는 개개인이 있다. 인간의 근본 마음을 가진 상식적인 휴머니즘의 ‘마음’이 바로 한국 장르의 특징이다. 심학(心學)이다. <오징어 게임>도 그렇고 <지금 우리 학교는>이라는 좀비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얘기하고 있다. ‘최고의 영웅은 바른 마음 아니겠어?’라는 질문을 세계에 던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누구나 존중하라는 거다. 결국 불교의 불성과 유교의 심성이 한류의 기저라고 볼 수 있겠다. 배트맨, 슈퍼맨 같은 초능력적인 ‘맨’(man)이 아니라 그냥 ‘휴먼’(human)이라는 보통의 ‘맨’이 영웅인 것이다. 왜 영웅인가? 근본 마음, 순수한 심성이 있으면 영웅인 것이다. 그래서 감동이 있고 정(情)이 있다. 한국적 신파가 단순한 신파로 끝나지 않고 세계적인 신파로 엄청나게 세련된 방식으로 문화화되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관통할 테니까.”

==
세계의 종교·사상·철학을 결론 맺을 땅은 우리나라

등록 :2022-03-16 
조현 기자 사진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9)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하

문광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 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아홉번째 멘토는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초빙교수인 문광(51) 스님이다.


탄허학 박사 1호 문광 스님―상’에서 이어짐.

―탄허 스님이 30~40년 동안 평생 <천부경>을 연구한 노인에게 가서 현토를 배우고, 천부경을 주역에 앞선 역의 원조라고도 한 이유는?

“<천부경>은 81자로 된 역학의 축소판인데, 그것이 단군시대이니 중국의 요 임금 때라고 보면 중국의 <주역>보다 <천부경>이 앞서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의 고대사 문헌을 많이 없애고서 실증사학이라 하여 증거가 없으니 거론하지 말라는 식의 식민사관 때문에 <천부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그러한 일본인의 생각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해볼 때 고대역사에 대해서 우리처럼 무기력한 경우가 없다. 조그마한 근거만 나와도 정사(正史)로 공론화하는 중·일에 비해 과한 자기폄하다. 탄허 스님이 <천부경>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러한 민족적 자긍심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읽어보면 <천부경>이 얼마나 위대한 문헌인지 알 수 있다. <주역>의 종주국도 한국이라고 탄허 스님이 말했다. 중국은 없는 역사를 만들고, 일본은 엄연한 역사를 속이는데 한국은 버젓이 있는 역사도 챙기지 못한다. 스님도 그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탄허 스님이 인도와 동남아 등 불교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 인터뷰에서 ‘한국 불교는 세계의 중심이며, 한국이 세계 불교의 종주국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불교의 진수인 불교 교리와 선 사상을 그 어느 나라보다 제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서다. 특히 고려대장경의 보유만으로도 한국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인도에 범어로 된 대장경이 나란다대학의 화재로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 티베트대장경 역시 수적으로 적으니 세계에서 우리가 보유한 한문 대장경이 최상의 불교 원전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전통을 말살했고, 일본은 대처를 해서 삼보 가운데 승보가 무너졌다. 탄허 스님은 늘 한국의 모든 전통과 문화를 긍정했고, 국민들이 자존감을 갖기를 바랐다.”

―탄허 스님이 주역의 64괘와 불교의 근본 자리가 같다고 한 이유는?

“주역의 64괘와 태극은 불교 <기신론>으로 볼 때 생멸문과 진여문이라는 거다. 만유를 수렴하면 일심(一心)이 되는데 이것이 태극이고, 펼치면 모든 복잡한 생멸문의 괘상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 이치가 같다고 보았다. 스님의 진정한 회통의 저력이 이런 설명에서 나온다고 본다.”



서울 잠실 불광사에서 설법하는 문광 스님. 문광 스님 제공

# 한국 문화는 세계의 단전이어서 세상 사상 철학 종교의 결론을 맺을 것

―한국의 사상 철학 종교 문화는 세상의 사상 철학 종교 문화의 결론을 짓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는 까닭은?

“한국 문화를 ‘단전성(丹田性) 문화’로 설명하고 싶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이 단전이다.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나라라는 것이 저의 주장이다.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여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듯이 단전은 그러한 것이고 한국이 바로 그런 요충지이다. 그 특성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다 모여서 정리되고 결론을 내고, 새롭게 다시 퍼져나가도록 시작도 하는 곳이다. 한국은 동북방의 간방인데 만물을 시작하고 만물을 마무리한다는 역학적 의미가 있다. 이것을 저는 ‘단전성 문화’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한다.”

―탄허 스님은 미국이 핑퐁외교로 중국과 수교를 하기도 전에 우리나라와 중국이 통하게 된다며, 제자들에게 중국어를 배우라고 강조한 이유는?

“그것은 정역 8괘에 입각해서 미리 안 것이다. 정역 8괘가 실현되기 전에 문왕 8괘가 완성되는 것인데 문왕 8괘에 진(震)과 태(兌)가 동서를 대표한다. 중국이 미미했을 때에도 이미 중국이 미국만큼이나 성장할 것을 미리 알았고, 중국이 성장하면 당연히 한자문명이 다시 한번 빛을 볼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남방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법산 스님에게 중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법산 스님은 대만으로 유학을 다녀오셔서 퇴임시까지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일반적으로는 관상 같은 것은 승가에서 하찮게 보는 술학인데 탄허 스님이 다르게 평한 까닭은?

“‘6신통 가운데 타심통은 불교의 관상학이다’라는 말씀도 했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이 부처님의 신통력이었다는 것이다. 공자, 맹자, 노자 모두 각기 사람을 보고 그를 판단하는 고유의 관찰법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해운거사의 <관상학> 책에 쓴 서문에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인 김재규에게 총살 당할 줄 몰랐다는 것은 관상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슬쩍 스쳐 지나치면서 인연이 되기도 하는데 한 눈에 그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제대로 된 인재도 양성할 수 있고 남에게 속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했다. 물론 생각 끊어진 무심자리를 증득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결국 불교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광 스님이 사숙한 탄허 스님. <한겨레> 자료사진

# 이 땅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적 구원관을 폭발시킨 씨앗은 전통적인 미륵신앙

―원효대사의 미륵상생경종요에서는 미륵을 맞이하는데도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가 있다는데, 어떻게 다른가?

“출가해서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 미륵사상이었다. 삼국시대엔 미륵사상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 연구했던 미륵에 관련된 내용들을 이번 <탄허학 연구> 책에 화엄학과 연관하여 많이 수록했다. 그중의 하나가 원효의 미륵사상 해석이었다. 하근기는 미륵이 하생하길 기다리고, 중근기는 미륵이 계신 도솔천으로 10선법을 닦아서 올라가려 하고, 상근기는 <미륵성불경>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이 수행하여 성불해서 미륵처럼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과연 원효는 위대한 한국 사상의 새벽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계는 언젠가 ‘종말’이 오고 ‘심판’이 있는데 이때 예수가 재림하여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특히 우리나라엔 기독교 계통의 ‘종말론’이 등장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는 이런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의 뿌리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의 세계니까 구원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이 해결되지 않는 한 영원한 인류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좀 강한 양상을 보인다. 저는 그것을 한국인의 종교 심리 구조 때문이라고 본다. 미륵하생이 예수재림으로 변한 것이다. 한국엔 ‘구원불인 미륵이 와서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강력한 미륵하생신앙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잠시 유교사회에서 신앙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서학이 들어오면서 예수재림으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패턴은 유사하다. 그래서 ‘한국인의 종교 심리 구조’라는 표현을 써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비티엔> 유튜브 갈무리

# 1700개 화두가 모두 타파되어야 견성

―선가의 보물로 알려진 고려 진각혜심국사의 <선문염송> 해설서를 곧 낼 예정인데, 수많은 조사어록과 비교해 선문염송의 특징이 무엇이고, 가장 깊게 천착한 내용은 무엇인가?

“저는 선 사상에서도 한국학의 관점으로 보았다. 중국에 <전등록> 30권이 있다면 우리에겐 고려 송광사에 진각혜심의 <선문염송> 30권이 있었다. <전등록>에 비교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저는 <선문염송>을 중심으로 조사의 어록을 보았다. 과거 7불이 없고, 경전에서 화두를 뽑아서 불법승 3보를 갖춘 체계를 구성했다. 제가 이 책을 열심히 본 것은 화두참선을 저의 수행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의경전으로 꾸준히 본 것이다. <선문염송> 전체를 본 뒤에 제가 모르겠는 향상구 화두들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었다.”

―스님이 <비티엔>에서 선문염송 1463 화두공안 가운데 16화두의 염과 송을 강의하는데, 그중 14개가 향상구 공안이다. 향상구 공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화두는 모두가 같은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신변사(法身邊事)의 진리가 있고, 법신향상사(法身向上事)의 진리가 있으며, 그 사이에 해당하는 여래선의 경지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난해한 공안들이 향상구(向上句)이다. 공부가 처음 열리면 누구나 법신변사가 열리게 된다. 온세상이 한 덩어리이고, 불이(不二)이며, 주객이 끊어지는 체험을 한다. 법신변사의 공안도 모두 동일하지 않다. 경계가 다 다르다. 하지만 법신변사가 완전히 투득되어도 향상구의 화두는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다. 제가 향상구에 막혀서 앞이 캄캄했던 체험을 했기 때문에 <선문염송 요칙>이라는 책을 엮어서 향상구 공안을 중심으로 역해해서 누구나 자신을 점검해볼 수 있도록 하게 된 것이다. 조그마한 진리를 알았다고 공부가 끝났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향상구 공안에 막힘이 하나도 없다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재참(再參)해야 한다.”

―스님도 간화선 수행을 한다고 했는데 스님의 간화선 수행 경험이나 체험은?

“조계종 제10대 종정이셨던 혜암 스님의 마지막 시봉행자였는데 스님께 ‘만법귀일’ 화두를 받았다. 스님이 입적하기 2달 전의 일이다. 은사 스님께서 한문을 볼 줄 아니 너는 동국대에 가서 경율론을 모두 한번 보라고 했다. 하지만 저는 대학 가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라고 버티다가 결국 스님 뜻을 따라 동국대에 입학을 했다. 대학원 석사를 수료하고 출가해 참선이 하고 싶었는데 동국대 학부를 다니게 되었으니 생식을 하며 독하게 참선했다. 큰스님께 받은 화두를 5년 만인 2006년에 타파하게 되었다. 정말 박살이 나는 특별한 체험이었고 그 뒤에는 교학적으로 잘 모르겠던 교리들이 환해졌다. 지금 유튜브에 올라 있는 화엄사법계라든지 선지(禪旨)들은 그때 터져서 알았던 내용들이다. 그렇게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1년을 지내다가 동국대 백상원 기숙사에 대중공양으로 나눠준 진제 스님의 법어집 <고담녹월>을 보았는데 처음부터 모르는 공안들이 여러개가 이어서 나왔다. 나는 분명히 화두가 타파가 되었는데 왜 이 공안들은 모르겠는지 궁금했다. ‘덕산탁발화’, ‘마조일할’ 이런 공안이었다. 그 뒤에 최고의 선정에 들어가서 향상구 공안이 타파되어야 이 공부가 끝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제 스님을 찾아 뵙고 법거량을 하고 화두를 다시 받아서 봉암사 선원과 해운정사 선원에서 수좌로 정진을 했다. 깊고 깊은 선정에 들지 않으면 향상구 공안은 타파되지 않는다. 1700공안 가운데 단 하나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견성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기본규칙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21/11/07

환생,신과학,아나키즘

환생,신과학,아나키즘



환생 + 신과학 + 아나키즘 = ?

김강주의 홈 페이지를 찾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에는 환생, 신과학, 아나키즘, 고대 한일관계사 등의 관련 문서와 사이트가 실려 있습니다.



제가 작성하거나 찾아 놓은 몇 가지 문서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제 소개)
환생의 과학성 (환생을 위한 변론)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이샤 우파니샤드
환생을 믿은 서양인들


명상과 선
책소개 "도솔천에서 만납시다(백봉 김기추 거사 법어집)" 99.6.16
책소개 "박석 교수의 명상 길라잡이" 98.8.8
책소개 "박석 교수의 명상체험여행"

환생
책소개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
책소개 "영혼의 탐구"
책소개 "삶 이전의 삶"
책소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책소개 "전생의 나를 찾아서"
책소개 "누구도 윤회를 부정할 수 없다"
책소개 "윤회의 진실"
책소개 "윤회의 비밀"
책소개 "김영우와 함께 하는 전생여행"
책소개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책소개 "브라이언 와이스의 전생요법"
책소개 "커밍백"
책소개 "윤회체험"
책소개 설기문 교수의 "최면과 전생퇴행" 98.10.18

신과학
새로운 과학, 새로운 기술 98. 11. 14 
책소개 "아인슈타인은 틀렸다" 빅터 샤우버거 이야기 98.8.8
책소개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98.8.8
책소개 "살아있는 에너지" 빅터 샤우버거의 삶과 아주 색다른 과학이야기 98.8.8
책소개 지구를 구하는 "21세기 초기술" 98.10.18
책소개 "꿈의 신기술을 찾아서" 98.10.18
책소개 "신과학으로 풀어보는 피라미드 에너지" 99.4.24
책소개 "반중력의 과학" 99.4.24

아나키즘
책소개 "아나키즘"
책소개 "아나키'환경'공동체"
선언문(신채호)

한일관계사
임나일본부는 실재했다

* 방명록 내용 소개

영문 금강경 Diamond Sutra
영문 신심명 Hsin Hsin Ming
영문 조주무자(무문관 제1칙) Chao-chou's Dog
영문 도마복음서 Gospel of Thomas
영문 아가 Song of Solomon
영문 이샤 우파니샤드 Isha Upanishad
책소개 "REINCARNATION : The Missing Link in Christianity"
책소개 "ONLY LOVE IS REAL: A Story of Soulmates Reunited"
The Gospel Truth? (4/8/96 Time Domestic Version)
The secret lives of Jesus Christ (4/8/96 Time)
Could the Gospels really be eyewitnessers? (4/8/96 Time)


여기에서 당신도 제가 좋아하는 곳들을 여행하실 수 있습니다.

새문명 아카데미
시민정보사회 커뮤니티
해인사 고려대장경 연구소 Haein-sa Monastery
부다피아
Reincarnation 환생
Past Life Regression 전생요법
JSE(New Age Journal) 뉴에이지 저널
Edgar Cayce 에드가 케이시
Zen Buddhism 선불교
The Kwan Um School of Zen 관음선종회
Ramana Maharish 라마나 마하리쉬
Osho Rajneesh 오쇼 라즈니쉬
The Gospel Of Thomas Homepage 도마 복음서 홈페이지
The Ascended Masters 영적인 스승들의 가르침
Anarchist Library 아나키스트 문고
Anarchist Archive 아나키스트 문집

남기고 싶은 말 (방명록)



hanmiru1004@hanmail.net
1999년 6월 16일 수정
1998.1.1 이후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것은 위의 자료들과 사이트들 중 제 뜻과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다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들일 뿐입니다.

2021/10/16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 종교와 젠더연구소

종교&성평등소식 1 페이지 | 종교와 젠더연구소


212 [불교계 젠더 프리즘] ‘치마불교’ 오명 속 종단 운영은 남성 몫

211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⑤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

210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④ 티베트 국왕의 수행 스승 ‘락쉬밍까라 공주’

209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③ 모순된 현실 속 보살의 길은 살림여성주의

208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② 여성은 왜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수 없나

207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① '손 없는 여자'

206 모든 생명의 평등함을 위하여,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 강의 후기 / 이규린

205 살아가게 만드는 일, 살림에 주목하다, <살림의 정신은 보살, 살림 페미니즘> 후기 / 이규린

204 공존하며 억압에서 해방으로,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강의 후기 / 이규린

===

공존하며 억압에서 해방으로,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 강의 후기


지난 11월 25일,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에서 세 번째 강의인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가 진행되었다. 종교와 젠더 연구소에 옥복연 소장이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불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한 불교페미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불교페미라는 용어는 아는 단어와 아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불교와 페미니즘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의 역할이 유일신을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면 종교와 인권운동은 얼마든지 융화될 수 있다.

불교의 교리와 페미니즘은 일맥상통한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해방과 평등’이라는 같은 정상을 바라본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는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며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인간평등과 깨달음을 통하여 고통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해방사상이 있다. 이는 성으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되고 성평등을 이루고자하는 페미니즘과 유사하다.
이들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다. ‘억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변화가 가능하다’라는 믿음이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억압으로서의 해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생명의 존귀함에 주목하며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 실천하고 끊임없이 탐구한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생명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평등을 성취하기 위한 실천이론의 양상을 띤다.

그럼에도 불교는 페미니즘적이다

해방과 평등의 사상이 배어있는 불교에도 부정적인 여성관이 존재한다.
‘여성업설’에서는 전생에 업이 많아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니, 선업을 해서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야 한다’고 하며, ‘여성불성불론’에서는 ‘여성은 성불을 하지 못하니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상은 여성 신도의 깨달음에 장애물을 만들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성 신도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경법인 ‘팔경계’는 ‘비구니(여성)는 비구(남성)를 욕하거나 꾸짖지 못하며, 또 비구(남성)의 파계, 파견, 파위의 등을 비방하지 못한다’ 와 같은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지위가 지극히 낮던 인도사회에서 여성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팔경계’를 만들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팔경계’의 원칙들은 엄연히 여성억압의 성격을 띤다.

불교에도 여성을 하등시하는 내용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도 페미니즘적으로 유의미하다.
마라의 세 딸들을 통하여 여성이 유혹자로 나오는 반면, 땅의 여신 스타바라를 통하며 여성이 부처의 가르침을 증언하는 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이 있는 반면, 여성과 남성은 똑같이 본래 부처이며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태아라고 말하는 ‘여래장’이 있다.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부처의 가르침은 인간의 해방과 평등이다. 여성의 억압은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여성불성불론과 같이 여성과 남성에 차별을 두는 사상은 따르지 않고, 여래장과 같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하는 사상이 퍼져야 한다. 과거에 쓰여진 경전에 어떠한 여성혐오적인 관점이 포함되었는가에 주목하기보다, 그 경전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추출해내며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페미는 아직 작은 불씨다

강의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어느 한 청자가 “불교 내 불교페미의 인식은 어떤가”라고 질문하였다. 옥복연 소장은 그에 대해서 “아직 불교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여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 않다.”라고 답하였다.
최근 들어 불교의 여성 신도 수는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기존의 여성 신도가 타 종교로 이동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옥복연 소장은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교는 와해된다”고 말하였다. 사회가 페미니즘에 물들고 있는 현재, 불교도 페미니즘에 물들어 변화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과 불교는 인간의 평등과 해방이라는 똑같은 곳을 바라보니 공존할 수 있다. 불교와 페미니즘이 공존하여, 억압에서 해방으로 변화하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http://cafe.daum.net/bsge/dyOc/60?svc=cafeapi

==

살아가게 만드는 일, 살림에 주목하다, <살림의 정신은 보살, 살림 페미니즘> 후기

/ 이규린

지난 12월 2일,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에서 세 번째 강의인 ‘살림의 정신은 보살, 살림 페미니즘’이 진행되었다. 김정희 가배울 사단법인 대표가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살아있는 것을 살게 만드는 살림과 살림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살림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살림’은 ‘죽임’의 반댓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칸트의 정언 명령이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게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이고, 살림의 정언명령은 ‘살아있는 것을 살게 하라’이다. 또한, 살림의 의미는 단순히 가사노동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살림은 경영의 의미를 내포한다. ‘나라살림’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살림 페미니즘은 여성과 동물을 착취하는 억압의 연쇄에서 벗어나 먼 선사시대 여성들의 집단적인 깨달음 이자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인 ‘살림 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살림 페미니즘은 집단 영성인 ‘살림 얼’을 우리 모두가 내재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전개된다.
각자도생을 추구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갖고 있는 ‘살림 얼’이 인도하는 길에서 종종 벗어나기도 한다. 살림 페미니즘은 ‘살림 얼’로 다시 회귀하기 위해 성찰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자하는 방향성을 품고 있다.

이원론을 따르지 않는 살림 페미니즘

우리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익숙하다. 인간과 자연,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백인과 유색인, 여성과 남성. 양극단의 것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서 육체는 정신의 속성을 갖지 않고, 정신은 육체의 속성을 갖지 않는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차별을 만들기 쉽다.
근대사회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따랐던 시대인 만큼, 성차별적인 시대였다. 이는 근대 철학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여성은 이해를 잘 못하고 감정과 분노에 쉽게 따르는 경향이 있다. 또 대부분 예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그에 대한 재능은 찾아 볼 수 없다.”

여성을 감정적인 동물로 치환하며 예술에서 배제하는 이 발언은 누가하였을까? 진보적인 성향으로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남긴 말이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철학을 펼쳤으나, 이원론적인 세계관 하에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다.

“여자가 정부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국가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여자는 보편적 요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일시적 기분과 우발적 의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위의 말은 독일의 이상주의 철학에 매듭을 지었다고 평가 받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발언이다. 모든 여성을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결정을 내리는 비합리적인 존재로 표현하며, 여성의 정치 참여에 반색을 표했다.
이러한 성차별적은 발언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차별적 편견을 쉽게 형성한다. 이원론적 세계관 안에서 여성과 남성은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며 남성은 이성적이다. 이원론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면 차별은 쉼없이 탄생한다.
반면에 살림 페미니즘은 전일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살림 페미니즘은 불교의 교리 중 하나인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를 긍정한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명구는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실체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살림 페미니즘의 세계관 속에서는 세상이 모두 하나의 유기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인도의 생태철학자 사티쉬 쿠마르의 어머니가 했던 말처럼 말이다.

“애야, 너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단다. 네 안에 너의 영혼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 울창한 상수리나무를 갖고 있는 도토리처럼 말이야.”

살림에 주목하라

가부장제는 예로부터 살림을 하등시해 왔다. 살림을 여성만의 것으로 떠밀고, “너를 희생해서라도 가문과 자식을 살려라”라고 명령한다. 살림의 몫을 여성만의 것으로 두지 말고,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살림 페미니스트인 김정희는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의 가해자 조주빈에 대해서 ‘그러한 악인은 육아를 받지 못했기에 탄생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혜성처럼 등장한 악인이 아니다. 악을 방치하는 사회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악심은 서서히 자라고, 이윽고 미성년자 여성을 협박하여 성을 착취하고 ‘죽임’으로 내모는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성장과정을 조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악인이 다시는 탄생하지 않도록 ‘살림’에 신경 써야 한다.
우리는 살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타인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엄연한 생명으로 여기며 함께 살림의 길을 걷는 건 어떨까.



http://cafe.daum.net/bsge/dyOc/62?svc=cafeapi

==

모든 생명의 평등함을 위하여,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 강의 후기

/ 이규린

지난 11월 25일,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의 마지막 강의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가 진행되었다. 현경 미국 유니언신학대 교수이자 관음젠스쿨 불교법사 겸 살림이스트가 진행하였다. 현대 문화에서 쉽게 버려지는 자연에 관한 이야기와 여성과 자연의 공통점,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시간을 갖었다.


페미니즘이 불교에게, 불교가 페미니즘에게

현존하는 모든 종교는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다. 모든 생명이 이어져있음을 인정하고, 평등을 쫓고자 하는 불교마저도 가부장제를 피해가지 못했다. 전생에 덕을 쌓으면 남자로 태어나고, 전생에 덕을 못 쌓으면 여자로 태어난다는 ‘여성업설’,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하지 못한다는 ‘여성불성불설’등, 불교는 불평등적인 사상이 내재하였다. 평등을 가르침으로 삼는 불교가 어째서 이러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현경 교수는 해외의 스님이 한국에 입국하였을 때 통역을 맡았다. 스님은 한국의 절에서 방문하였고, “비구니들은 일어서서 비구들에게 절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해외의 스님은 비구를 향해서 절하기를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옆의 비구니들이 절을 하니 따라서 절을 하고는, “이것이 한국 불교인가요?”라고 현경 교수에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같은 불교이더라도, 비구를 향해서 절을 하는 문화는 국가에 따라서 공통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현경 교수는 이에 대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는 한국 불교라기보다는, 한국의 가부장제였다.” 비구니가 비구에게 예를 갖추어야 되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받드는 전통의 연장선이었다. 즉, 이것은 ‘한국식 불교 전통’이었다.

평등을 가르침으로 삼는 불교에 불평등한 사상과 문화가 잔존하는 이유는 종교는 각 나라의 문화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국가가 갖고 있던 문화적 전통, 추가로 덧붙여지는 남성 중심의 해석이 불교에 개입되며 불교의 불평등적인 전통을 만들어낸다. 불교의 오랜 역사만큼, 불교 속 가부장제는 차곡차곡 쌓여왔다.

“불교가 입고 있는 오래된 때를 벗겨주는 이태리 타올이 페미니즘이다.”

현경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페미니즘은 불교가 입은 가부장제라는 때를 벗겨줄 것이고, 불교는 페미니즘이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코스모 비전(사회 또는 문명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제공할 것이며, 불교와 페미니즘이 만나면 더 많은 가능성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끊임없이 서로 대화해야하는 파트너”라고 표현하였다. 불교,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은 모든 생명의 존엄과 모든 생명의 평등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상이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만날 수 있는 면적이 넓다.

자연과 여성, 그리고 연기론

자연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은 생명이 아닌 물질로 여겨지는 등, 매우 유사한 형태를 취해왔다.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과 자연이 비슷한 처지라는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 속에서 남자는 문화로 비교되었고, 여자는 자연으로 비교되었다. 비물질적인 것은 고상적이며, 육체적·지구적·여성적인 것은 하등한 것으로 분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모든 존재는 다른 가치를 갖고 있다며 ‘존재의 사다리’를 제시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치는 신, 남자, 여자, 아이들, 노예 남자, 노예 여자, 노예인 아이들, 동물, 식물, 광물 순으로 높다. 자연의 일부인 광물은 존재의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있는 죽은 존재였다.

에코페미니즘의 눈으로 보면, 이원론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는 불교의 사상 ‘연기론’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매우 유익한 세계관이다. 이원론 속에서는 인간의 문명과 자연은 별개의 것이기에, 자연이 죽어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생명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 것이 생명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이 죽는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기에 이것도 사라지는 연기론의 세계관이 현실 속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더 가깝고, 자연과 인간에게 더욱 유익하다.

우리는 자연을 착취할 정도로 무분별한 탐욕의 자본주의,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타인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전쟁이 존재하는 ‘죽음의 문화’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생명을 착취하며, 점점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생명의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남성의 세상에서 남성과 평등해져 똑같은 파이를 받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여성을 향한 억압과 자연을 향한 억압이 모두 부서지고, 모든 생명이 생명으로서 존중 받는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 또한 우리의 미래에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http://cafe.daum.net/bsge/dyOc/65?svc=cafeapi

==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① '손 없는 여자'
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20-12-24 

▣ 최형미 여성신문 특집 칼럼 (5회에 걸쳐 연재)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①이다감 박사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
세계 곳곳서 발견된 ‘손 없는 여자’ 민담
여성이 손을 잃어가는 단계는
가부장제 사회에 편입되는 모습


[인간평등과 해방을 주창한 붓다의 가르침과 성평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과의 필연적인 만남으로 탄생한 불교 페미니즘. ‘성평등불교연대’가 주관하는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 강좌’는 가부장성에 오염되고 왜곡된 교리들을 불교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강좌 내용을 축약해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출처 : 여성신문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422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손 없는 여자’

최형미 여성학자
승인 2020.11.27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①이다감 박사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
세계 곳곳서 발견된 ‘손 없는 여자’ 민담
여성이 손을 잃어가는 단계는
가부장제 사회에 편입되는 모습


[인간평등과 해방을 주창한 붓다의 가르침과 성평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과의 필연적인 만남으로 탄생한 불교 페미니즘. ‘성평등불교연대’가 주관하는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 강좌’는 가부장성에 오염되고 왜곡된 교리들을 불교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강좌 내용을 축약해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프랑스 영화 ‘GIRL WITHOUT HANDS’ 포스터.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 강좌’ 첫 번째 강의는 지난 11월 18일 열렸다. 첫 강좌는 서울 불교대학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다감 박사의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강의에서 소개된 ‘손 없는 처녀’ 이야기는 듣기도 생소하지만 섬뜩한 느낌마저 있다. 상담심리사이며 구룹 투사 꿈작업 안내자인 이 박사는 여성들이 ‘손이 잘린 꿈’을 꾼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꿈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손 없는 처녀’ 민담이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 걸쳐 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손 없는 색시’라는 이름으로 인형극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것을 여성의식단계를 보여주는 ‘원형’으로 해석하고, 이를 여성 정체성 발달 단계라고 표현했다.

종, 십자가, 초, 향, 연꽃, 구유는 종교적 상징이다. 희생, 깨달음, 맑음, 그리고 소박한 영성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손을 영성과 연결한 사람이 있었을까? 중세시대에 죽은 성자들의 뼈다귀, 손톱, 머리카락 등이 성물로 거래된 적은 있었다. 성자의 몸 일부분을 간직하며 그의 정신을 되새기는 상징이었을 뿐, 사람의 특정신체를 영적인 것으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몸과 더 멀어져야 영적으로, 이성적으로 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를 가둬버린 이원론의 굴레는 몸을 부정하는데 뿌리를 둔다.
유럽의 ‘손 없는 처녀’ 설화를 담은 일러스트. ⓒPhilipp Grot Johann



이 박사는 “손을 가슴에 얹어보세요”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따뜻한 손은 긴장한 마음, 일에 쫓기는 급한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기도하는 손, 절하는 손, 합장하는 손 등. 손은 우리 삶 전체에 영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손이 잘려나가는 꿈을 꾸는 여성은 누구일까? 그는 루마니아의 ‘손 없는 처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방앗간 주인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 자기 딸을 팔아버렸다. 딸은 슬퍼 울었지만, 아버지에게 순종했고 결국 악마에게 손을 잘라준다. 그 후, 딸은 보호해 주겠다는 부모를 떠나, 그를 사랑한 왕을 만나 결혼을 하고 은손을 선물 받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모략으로 아이와 함께 숲으로 쫓겨나고, 아이와 7년간 숲에서 살아가며 신의 은총으로 진짜 손이 자라난다. 그리고 재생된 손으로 남편을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된다.“

이 박사는 여성이 손을 잃어가는 단계를 가부장제 사회에 편입되어가는 여성의 모습으로 해석했다. ‘노(No)’ 할 수 없는 여성, 폭력과 편견에 대항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을 모두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잘라준 희생적인 여성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며, 여성적인 것을 잘라버리고 남성적 가치를 따르는 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적인 여성도, 남성처럼 지배적인 여성도 손 없는 처녀라고 보고 있다. 페미니스트 영성가 도요다는 영성과 창조성을 잃어버린 현대 여성을 손이 잘린 여성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모습이다.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 강좌’ 첫 번째 강연자로 나선 이다감 박사가 ‘여성의 손의 상징과 영성의 관계’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형미



‘손 없는 처녀’는 부모를 떠났지만, 타자의 도움으로 잠시 가짜 손을 갖는 반쪽짜리 독립을 한다. 그러나 결국 주변의 모략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돌봐야 할 아이만 데리고 숲으로 버려진다. 직장을 잃은 여성, 폭력과 마주 선 여성, 낙인찍힌 여성, 노인 여성, 장애 여성, 어머니가 된 여성, 여성들은 얼마나 쉽게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외면당하는지.

이 박사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손 없는 처녀’는 신의 은총으로 아이를 기르고 나무를 껴안을 수 있는 손이 자라 왕비처럼 고귀한 존재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결론은 얼핏 보면 급하게 낙관적이고 논박 불가능한 신을 끌어들여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존할 것이 없는 여성, 바로 그들이 세상의 권력과 조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 빨리 깨닫고 더 깊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여성학자 press@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② 여성은 왜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수 없나
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20-12-24 

- 최우혁 / 여성신문 특집 칼럼 (5회에 걸쳐 연재)



“불교는 과연 여성 친화적인가?” “불교가 페미니즘과 어떻게 결합이 가능한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평등불교연대’가 마련한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라는 강좌의 두 번째 강의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20년 11월 25일 종교와젠더연구소 옥복연 소장이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이 사간에는 불교, 페미니즘, 그리고 불교 페미니즘의 “상서로운 만남”의 과정과 성격, 그리고 전망을 깊고 넓게 펼쳤다.

먼저 옥 소장은 불교사에서 위대한 세 명의 여성 영웅, 즉 붓다의 어머니 마야왕비, 양모 고타미, 아내 야소다라의 삶을 분석하며 붓다는 페미니스트라고 결론을 내린다. 2600여년 전 땔감 한 묶음과 딸을 바꿀 정도로 남성중심사회에서 마야왕비는 깨달음의 단계에 들고, 고타미는 비구니승가의 대표로 ‘아라한’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했고, 야소다라도 최상의 지혜를 갖춘 비구니가 됐다.

출처 : 여성신문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4743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여성은 왜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수 없나 - 여성신문

=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여성은 왜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수 없나


최우혁 가톨릭여성신학자, 서강대 강사
승인 2020.12.08 

바다에서 용을 타고 나타나서 어려움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불교는 과연 여성 친화적인가?” “불교가 페미니즘과 어떻게 결합이 가능한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평등불교연대’가 마련한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라는 강좌의 두 번째 강의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20년 11월 25일 종교와젠더연구소 옥복연 소장이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이 사간에는 불교, 페미니즘, 그리고 불교 페미니즘의 “상서로운 만남”의 과정과 성격, 그리고 전망을 깊고 넓게 펼쳤다.


먼저 옥 소장은 불교사에서 위대한 세 명의 여성 영웅, 즉 붓다의 어머니 마야왕비, 양모 고타미, 아내 야소다라의 삶을 분석하며 붓다는 페미니스트라고 결론을 내린다. 2600여년 전 땔감 한 묶음과 딸을 바꿀 정도로 남성중심사회에서 마야왕비는 깨달음의 단계에 들고, 고타미는 비구니승가의 대표로 ‘아라한’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했고, 야소다라도 최상의 지혜를 갖춘 비구니가 됐다.

마야왕비 등 불교사 여성 영웅 많지만
성차별 만연… 불교페미니즘 탄생

위대한 여성 영웅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여성의 몸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며 여성 비하와 성별 위계를 일상화하고, 뛰어난 여성들의 역사는 왜곡·축소되거나 무시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교단 내 성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 불교를 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불교페미니즘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고 옥 소장은 분석한다. 즉, 1990년대 신자유주의 이후 여성 내부의 다양함과 차이를 인정하며 등장한 불교페미니즘은 인간(여성) 해방을 주창하고, 인간(여성) 변화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인간(여성)행복을 위한 실천을 강조하는 등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호 변증법적인 통합으로 탄생했다고 본다.

옥 소장은 불교는 페미니즘에 탈이분법적이고 탈유일신적인 인식과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공하고, 페미니즘은 불교에 성평등한 관점과 성평등한 사회로의 변혁을 위한 실천이론을 제공하면서 성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고 본다. 특히 고정불변의 실재는 없으며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 의존적이라는 불교의 공성사상, 모든 인간은 불성(깨달음의 DNA)을 가진 존재, 그리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보살과 자비 사상 등 불교의 기본 가르침 그 어디에도 성차별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타라보살상.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겠다며 서원을 세우고, 고통에 빠진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 한쪽 발을 옆으로 빼고 앉아있다.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붓다 가르침, 기록·전승은 ‘비구’ 몫
여성출가자 규범·처벌도 남성이 정해

특히 티베트불교는 여성을 지혜의 상징으로 중시하는데, 남성적인 자비와 여성적인 지혜의 결합을 인격화한 남녀교합상(남녀가 성적 행위를 하는 듯 끌어안고 있는 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티베트불교에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신자들에게 추앙받는 타라보살이 있고, 여성 부처로 인정받는 예세 초겔도 있다니, 이처럼 여성성을 중시하는 불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여성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거나, 100세 비구니라도 갓 출가한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비구니 팔경계가 오늘날까지 적용되고 있을까?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단에서 여성 출가자는 왜 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등 지도자적 지위에 오를 수 없을까? 옥 소장은 그 원인을 “제도적인 실패”로 규정한다. 예를 들면 붓다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기록, 암송, 전승하는 이 모든 과정은 남성출가자인 비구들의 몫이었고, 여성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나 처벌도 남성이 정했다. 여성들은 사회, 교단, 그리고 여성 스스로 내면화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별받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라진 비구니승단을 복원하고, 여성의 관점으로 경전을 재해석하며, 위대한 여성들을 발굴하여 널리 알려 불교여성들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이전을 회복하는 상서로운 만남인 동시에, 가부장제 이후를 열어가는 상생으로 함께 전개될 것을 기대해본다.

혁 가톨릭여성신학자, 서강대 강사 press@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여성은 왜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수 없나

최우혁 가톨릭여성신학자, 서강대 강사
승인 2020.12.08 18:28

바다에서 용을 타고 나타나서 어려움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불교는 과연 여성 친화적인가?” “불교가 페미니즘과 어떻게 결합이 가능한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평등불교연대’가 마련한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라는 강좌의 두 번째 강의에서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020년 11월 25일 종교와젠더연구소 옥복연 소장이 ‘불교, 페미니즘에 물들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이 사간에는 불교, 페미니즘, 그리고 불교 페미니즘의 “상서로운 만남”의 과정과 성격, 그리고 전망을 깊고 넓게 펼쳤다.


먼저 옥 소장은 불교사에서 위대한 세 명의 여성 영웅, 즉 붓다의 어머니 마야왕비, 양모 고타미, 아내 야소다라의 삶을 분석하며 붓다는 페미니스트라고 결론을 내린다. 2600여년 전 땔감 한 묶음과 딸을 바꿀 정도로 남성중심사회에서 마야왕비는 깨달음의 단계에 들고, 고타미는 비구니승가의 대표로 ‘아라한’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했고, 야소다라도 최상의 지혜를 갖춘 비구니가 됐다.

마야왕비 등 불교사 여성 영웅 많지만
성차별 만연… 불교페미니즘 탄생

위대한 여성 영웅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여성의 몸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며 여성 비하와 성별 위계를 일상화하고, 뛰어난 여성들의 역사는 왜곡·축소되거나 무시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교단 내 성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 불교를 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불교페미니즘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고 옥 소장은 분석한다. 즉, 1990년대 신자유주의 이후 여성 내부의 다양함과 차이를 인정하며 등장한 불교페미니즘은 인간(여성) 해방을 주창하고, 인간(여성) 변화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인간(여성)행복을 위한 실천을 강조하는 등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호 변증법적인 통합으로 탄생했다고 본다.

옥 소장은 불교는 페미니즘에 탈이분법적이고 탈유일신적인 인식과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공하고, 페미니즘은 불교에 성평등한 관점과 성평등한 사회로의 변혁을 위한 실천이론을 제공하면서 성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고 본다. 특히 고정불변의 실재는 없으며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 의존적이라는 불교의 공성사상, 모든 인간은 불성(깨달음의 DNA)을 가진 존재, 그리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보살과 자비 사상 등 불교의 기본 가르침 그 어디에도 성차별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타라보살상.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겠다며 서원을 세우고, 고통에 빠진 중생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 한쪽 발을 옆으로 빼고 앉아있다.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붓다 가르침, 기록·전승은 ‘비구’ 몫
여성출가자 규범·처벌도 남성이 정해

특히 티베트불교는 여성을 지혜의 상징으로 중시하는데, 남성적인 자비와 여성적인 지혜의 결합을 인격화한 남녀교합상(남녀가 성적 행위를 하는 듯 끌어안고 있는 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티베트불교에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신자들에게 추앙받는 타라보살이 있고, 여성 부처로 인정받는 예세 초겔도 있다니, 이처럼 여성성을 중시하는 불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여성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거나, 100세 비구니라도 갓 출가한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비구니 팔경계가 오늘날까지 적용되고 있을까?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단에서 여성 출가자는 왜 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등 지도자적 지위에 오를 수 없을까? 옥 소장은 그 원인을 “제도적인 실패”로 규정한다. 예를 들면 붓다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기록, 암송, 전승하는 이 모든 과정은 남성출가자인 비구들의 몫이었고, 여성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나 처벌도 남성이 정했다. 여성들은 사회, 교단, 그리고 여성 스스로 내면화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별받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라진 비구니승단을 복원하고, 여성의 관점으로 경전을 재해석하며, 위대한 여성들을 발굴하여 널리 알려 불교여성들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이전을 회복하는 상서로운 만남인 동시에, 가부장제 이후를 열어가는 상생으로 함께 전개될 것을 기대해본다.

릭여성신학자, 서강대 강사 press@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④ 티베트 국왕의 수행 스승 ‘락쉬밍까라 공주’

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20-12-24 13:08 조회753회 댓글0건

▣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④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 불교사’ 조승미 담마학교 대표
:숨겨진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다


티베트 국왕의 수행 스승 ‘락쉬밍까라 공주’

- 이규린 아카마지 회원, 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재학 / 여성신문 특집 칼럼 (5회에 걸쳐 연재)



한국불교에서 여성수행자인 비구니는 독립된 비구니승단을 이루고 남성수행자인 비구와 동등한 교육시스템에서 공부하고, 동일한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하는 등 겉으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비구니는 수계를 받을 때도 비구니승단은 물론 비구승단에서도 계를 받아야 하고, 비구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여덟 가지 계율(팔경계)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성차별적인 현실에서 위대한 여성성취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조 대표는 티베트불교에서 여성성을 매우 중시한다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오늘날 티베트불교 탱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즈라요기니는 여성 붓다로 불린다. 여성적 에너지의 상징이자 모든 붓다의 어머니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성성을 무시하거나 삭제한다면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게 된다. 티베트불교, 특히 딴뜨릭불교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위대한 여성 성취자는 락쉬밍까라였다. 공주 출신으로 높은 수행력을 성취한 그가 딴뜨릭불교에 대해 가르침, 수행법, 계보를 기록한 문헌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출처 : 여성신문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108

=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티베트 국왕의 수행 스승 ‘락쉬밍까라 공주’

이규린 아카마지 회원, 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재학
승인 2020.12.19 08:39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 불교사’ 조승미 담마학교 대표
:숨겨진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다
딴뜨릭불교의 여성 성취자 락쉬밍까라.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지난 12월 9일 ‘2020 나를 정화하는 불교페미니즘’ 4강은 불교학 박사인 조승미 담마학교 대표가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 불교사’를 주제로 진행했다. 조 대표는 불교사에서 지워지거나축소된, 위대한 여성수행자의 역사를 딴뜨릭불교와 선불교에서 어렵게 찾아 소개했다. 불교사를 통해 볼 때, 과연 여성수행자는 남성수행자처럼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는가? 티베트불교와 중국불교에서 여성수행자는 어떤 위치였으며, 그들의 성취는 왜 전해지지 않았을까?


한국불교에서 여성수행자인 비구니는 독립된 비구니승단을 이루고 남성수행자인 비구와 동등한 교육시스템에서 공부하고, 동일한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하는 등 겉으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비구니는 수계를 받을 때도 비구니승단은 물론 비구승단에서도 계를 받아야 하고, 비구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여덟 가지 계율(팔경계)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성차별적인 현실에서 위대한 여성성취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조 대표는 티베트불교에서 여성성을 매우 중시한다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오늘날 티베트불교 탱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즈라요기니는 여성 붓다로 불린다. 여성적 에너지의 상징이자 모든 붓다의 어머니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성성을 무시하거나 삭제한다면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게 된다. 티베트불교, 특히 딴뜨릭불교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위대한 여성 성취자는 락쉬밍까라였다. 공주 출신으로 높은 수행력을 성취한 그가 딴뜨릭불교에 대해 가르침, 수행법, 계보를 기록한 문헌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비구니선사 기원행강(1597~1654)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락쉬밍까라는 딴드릭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당시 국왕이었던 자신의 오빠에게 “왕국의 재산을 포기하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국왕은 권력 암투가 횡횡하는 속세에서 벗어나 출가해 수행을 성취하게 되었다니, 락쉬밍까라는 여동생이 아니라 수행의 스승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중국불교에서도 위대한 여성성취자가 많았다. 특히 명나라말 청나라초 시대는 불교의 쇠퇴기라고 하지만 여성의 눈으로 본다면 황금기였다고 한다. 당시 뛰어난 비구니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선사의 전기 문헌인 『오등전사』에는 비구니선사 50명이 기록됐다. 여성의 어록도 종종 출판됐고, 비구니선사 7명의 어록이 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경전 속에 비구니 이야기도 포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불교사에서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티베트 불교의 여성붓다 바즈라요기니. 제공 성평등불교연대



이처럼 위대한 비구니들의 등장에는 수준 높은 문화와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고학력 여성이 증가하고, 마음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등장이 불교 가르침과 잘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의 해방사상은 성평등 사상으로 연결되고, 교육받은 엘리트여성들이 교단에 들어와 문집을 발행하는 등 비구니들의 활발한 수행의 배경이 되었음을 알 명말청초 여성 상황은 오늘날과도 유사해서, 현대여성들에게도 큰 파동을 전해준다. 유튜브 등 미디어의 혁신적 발달은 문집 시장 발달과 유사하며, 여성의 고등교육도 그렇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위대한 여성들에게서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며 그들의 활동을 따라가다 보니, “여성들에게도 도전과 성취의 역사가 있었구나”라는 자부심을 얻었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21세기에 사는 내가 힘을 얻는다니,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하지만 불교사에서 여성 연구가 여전히 미비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조 대표는 “여성의 눈으로 읽는 불교사는 기초단계”라며 “불교는 부처님만의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하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교 속 여성 이야기는 여남 모두가 함께 발굴하고 그려가야 하는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불교사에 여성이 있다’를 넘어서서, ‘여성들에 의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해석되고 실천됐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사 속 여성들이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다. 이제 여성의 에너지를, 힘을 보여주라고….

==

▣ [불교, 페미니즘과 만나다]⑤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 / 현경

한주영 불교환경연대 사무처장 / 여성신문 특집 칼럼 (5회 연재 마지막)




생태 파괴와 기후 위기의 절박한 상황에서 인류가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멸종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확률이 딱 50%라고 답하며 불교,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오래된 여성 문명의 회귀에 대해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강의를 해준 분은 현경 교수였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 비록 '줌'으로 만났지만, 참으로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그는 미국 유니언신학대교수로 재직 중이기에 신학자로만 알았는데, 미국에서 불교 스승들을 만나서 관음젠스쿨 불교법사 역할도 하고 있으며, 많은 저서를 통해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특히 자신을 살림이스트로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현경 교수는 코로나가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일, 즉 바쁜 일상을 멈추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 환경, 생태 등을 돌아보고, 생명공동체인 지구 살리기에 대한 절실함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코로나여신’으로 명명했다. 마스크가 불편하지만 자신의 호흡을 바라 볼 수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기 자신과 만날 시간이 많아졌다. 이것은 바로 명상 과정과 매우 닮았기 때문에, 그는 강의에 들어가면서 10여 분간 명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주 차분하게 공기, 바람, 나무, 개울, 땅, 하늘을 보며 결국 자신을 만나는 여정을 소개하면서, 폭력, 억압, 분노, 절망 등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제대로 멈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출처: 여성신문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717 

==

HOME 생활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불교, 에코페미니즘, 오래된 여성문명의 회귀

한주영 불교환경연대 사무처장
승인 2021.01.07 10:22

[불교, 페미니즘을 만나다] (끝)
중국 만수선사의 관세음보살상 ⓒ성평등불교연대



생태 파괴와 기후 위기의 절박한 상황에서 인류가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멸종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확률이 딱 50%라고 답하며 불교,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오래된 여성 문명의 회귀에 대해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강의를 해준 분은 현경 교수였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 비록 '줌'으로 만났지만, 참으로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그는 미국 유니언신학대교수로 재직 중이기에 신학자로만 알았는데, 미국에서 불교 스승들을 만나서 관음젠스쿨 불교법사 역할도 하고 있으며, 많은 저서를 통해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특히 자신을 살림이스트로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현경 교수는 코로나가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일, 즉 바쁜 일상을 멈추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 환경, 생태 등을 돌아보고, 생명공동체인 지구 살리기에 대한 절실함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코로나여신’으로 명명했다. 마스크가 불편하지만 자신의 호흡을 바라 볼 수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기 자신과 만날 시간이 많아졌다. 이것은 바로 명상 과정과 매우 닮았기 때문에, 그는 강의에 들어가면서 10여 분간 명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주 차분하게 공기, 바람, 나무, 개울, 땅, 하늘을 보며 결국 자신을 만나는 여정을 소개하면서, 폭력, 억압, 분노, 절망 등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제대로 멈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현경 교수는 불교와 페미니즘의 만남으로 불교를 덮고 있는 가부장성의 때를 걷어 낼 수 있다고 단언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기성 종교들이 인간 해방과 평등을 부르짖으며 등장하지만, 점차 그 사회의 가부장성으로 인해 종교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성 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전파될 때는 종교 본래의 모습을 더 잘 보여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불교가 서구로 유입될 때는 붓다의 가르침, 즉 교리를 강조하면서 서구 문화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서구에서 발전한 페미니즘과 결합되면 불교는 보다 친여성적으로 변화하며 인간 해방이라는 본질에 다가간다고 그는 주장했다.




불교와 에코페미니즘의 결합

전체 인류사를 돌아볼 때, 약 5000여 년 정도에 불과한 남성중심사회는 특히 적자생존, 지배와 종속, 죽임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이전 오래된 문명의 시대로 돌아가면 생명 존중, 돌봄 등 여성 중심 사회가 있었다. 남성 중심의 위계적인 문화가 인류의 종말을 운운하는 이 때, 살림의 문화로 바꾸는 것이 페미니즘, 특히 에코페미니즘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무소유와 연기의 세계관은 에코페미니즘의 주장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기에, 이 둘의 결합은 살림의 지름길이라고 현경 교수는 주장한다.

불교와 에코페미니즘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정복과 파괴의 문화, 무한 경쟁에서 상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남성과 평등해지기를 거부하고, 살림의 문화로 서로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현경 교수는 에코페미니스트라는 말보다 살림이스트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한다. 불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관세음보살은 아픈 환자를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고 쳐다만 봐도 자비심으로 감복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보살은 남자를 만지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나고, 정치를 만지면 민주주의가 살아나고, 경제를 만지면 노사가 연대하는 경제로 살아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신의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인도불교에서 남성이었지만, 중국에 전래된 후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지배와 종속, 심판, 죽임의 아버지의 문화에서, 돌봐주고 안아주는 어머니의 문화로 바뀐 것인데, 이는 누군가의 강요로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민초들에 의해 300년 동안 서서히 변화했다고 한다. 여성의 몸을 한 관세음보살이 가장 강력한 지배남성인 왕을 상징하는 용을 타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모습, 이는 아주 오래된 문명에서 존재했던 여신의 모습이다. 거기에서는 어머니중심의 문화가, 차별이 아니라 평등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 지역 중심으로 의식의 폭발이 일어났던 제1의 축의 시대를 지나 제2의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 지성이, 그리고 지역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의식 폭발이 발생하고 있다. 협력과 연대를 통한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이 때, 살림과 돌봄, 성장과 공존을 위해 불교페미니즘이 앞장서서 그 역할을 해야 할 때다.


한주영 불교환경연대 사무처장 press@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

[불교계 젠더 프리즘] ‘치마불교’ 오명 속 종단 운영은 남성 몫

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21-01-21 12:23 조회672회 댓글0건

[불교계 젠더 프리즘] ① 불교여성, 기복을 넘어 주체로 서다


<불교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불교 교단 내 주요 젠더 이슈들을 살펴보고 성차별적인 교단의 현실을 들여다봅니다. 총 5회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898년 한양 북촌에서 양반가 처자인 김소사, 이소사가 여자도 사람이라며 여성의 교육권, 투표권, 직업권을 요구하는 ‘여권통문’을 발표했다.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며 황성신문 1면에 실렸던 이 최초의 여성인권선언 후 한국여성의 사회 참여는 급격하게 확대됐다. 일제 식민지하 여성들은 단체를 조직해 계몽과 독립운동에도 나섰는데, 당시 불교여성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다. 붓다의 가르침에 기초한 여학교를 세우거나 사찰이나 포교당 등에서 직업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해방운동에 동참하며 중생 구제라는 대승불교 보살의 삶을 실천했다.

하지만 타 종교와 비교하면, 근대 불교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는 승려가 결혼하는 왜색불교를 한국불교에 이식하면서 교단을 탄압했고, 재가여성불자들은 독신의 전통불교를 지원하면서 교단 수호에 앞장서야만 했다. 여학교나 여성단체를 통한 여성 인재 양성에 적극적이던 타종교와는 그 처지가 너무도 달랐다. 물적 토대조차 미약했던 한국불교는 그나마 남성출가자인 비구교육에 전념했기에, 여성불자들은 교리를 공부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하중략...)

출처 : 여성신문, 전영숙 불교여성개발원 불교여성연구소 소장 (2021.1.13)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003&utm_source=dable

==


[불교계 젠더 프리즘] ‘치마불교’ 오명 속 종단 운영은 남성 몫


전영숙 불교여성개발원 불교여성연구소 소장
승인 2021.01.13

[불교계 젠더 프리즘] ① 불교여성, 기복을 넘어 주체로 서다


<불교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불교 교단 내 주요 젠더 이슈들을 살펴보고 성차별적인 교단의 현실을 들여다봅니다. 총 5회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898년 한양 북촌에서 양반가 처자인 김소사, 이소사가 여자도 사람이라며 여성의 교육권, 투표권, 직업권을 요구하는 ‘여권통문’을 발표했다.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며 황성신문 1면에 실렸던 이 최초의 여성인권선언 후 한국여성의 사회 참여는 급격하게 확대됐다. 일제 식민지하 여성들은 단체를 조직해 계몽과 독립운동에도 나섰는데, 당시 불교여성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다. 붓다의 가르침에 기초한 여학교를 세우거나 사찰이나 포교당 등에서 직업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해방운동에 동참하며 중생 구제라는 대승불교 보살의 삶을 실천했다.

하지만 타 종교와 비교하면, 근대 불교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는 승려가 결혼하는 왜색불교를 한국불교에 이식하면서 교단을 탄압했고, 재가여성불자들은 독신의 전통불교를 지원하면서 교단 수호에 앞장서야만 했다. 여학교나 여성단체를 통한 여성 인재 양성에 적극적이던 타종교와는 그 처지가 너무도 달랐다. 물적 토대조차 미약했던 한국불교는 그나마 남성출가자인 비구교육에 전념했기에, 여성불자들은 교리를 공부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지난 2017년 부처님오신날인 5월 14일,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법요식 중 관불의식. 신도 다수가 여성이지만 여전히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뉴시스·여성신문



교단 성차별 비판한 여성들
사찰 떠나거나 냉담 신자 돼

더욱 안타까운 점은 해방 이후 왜색불교의 후유증이 교단 내부 분규로 이어지면서, 중생 구제를 위한 활동보다는 교단 정화가 더 큰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교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그래왔듯이, 여성불자는 교단을 수호하고 독신 출가자를 지원해야만 했다. 198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급격하게 발전하고 여성 정치세력화가 두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불자들의 사회 참여는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고 교단도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일부 여성불자들이 사회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면 수행이 덜 된 사람이나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비난받기도 했고, 교리를 제대로 배울 곳이 부족했기에 기복적인 신행에 머물기도 했으며, 이웃종교처럼 서구의 앞선 여성리더들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조직화도 쉽지 않았다.

똑똑하고 주관이 있는 재가여성불자는 환영받지 못했다. 스님들, 특히 비구스님들은 출가자라는 권위에 도전받기를 원치 않았고, 남성불자들은 남성중심적인 기존의 젠더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여성불자는 자녀들을 절에 데려오거나, 스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르거나, 시주와 봉사를 의무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무리 사회에서 뛰어난 여성리더라 할지라도 교단에 들어오는 순간,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신자가 되어야만 했다. 다수 신자가 여성이며, 법당이나 공양간의 봉사자 또한 대부분 여성이지만, 이들의 신행은 미신적인 기복불교, 치마불교로 비난받으며 종단이나 사찰 운영에서 소외되었다.

교단 내 성차별에 비판적인 여성들은 사찰을 떠나거나 냉담 신자가 되어 사찰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기에, 여성불자를 조직하고 체계적인 활동을 꾸려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계 불교국가들에서도 도움 받을만한 여성단체가 많지 않았으며, 서구에서 먼저 본부가 꾸려지거나 활동 경험들을 전수받기도 하는 이웃종교 여성단체들과는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동안 한국의 여성불자들은 당면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며 길 없는 길을 개척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20년 1월 8일 불교여성개발원 주최 ‘신년법회 및 여성불자 108인의 날’ 기념식 모습. ⓒ불교여성개발원



여성불자 조직화한 불교여성개발원
인재풀 만들어 네트워크·협업도

이처럼 재가여성 조직화가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최근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불자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스무 돌 성년을 맞이한 재가여성 불교단체가 있으니, 바로 ‘불교여성개발원’이다. 물론 이웃 종교 여성단체들의 긴 역사와 비교할 때 20년이라는 세월은 비교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체의 행보는 한국불교여성운동사 뿐만 아니라 한국을 넘어 다른 나라의 재가여성불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단체는 종단의 포교원 산하단체로 출범했지만 단순히 포교를 넘어 대사회적 이슈로 관심을 확대했고, 소속 사찰 중심 활동의 울타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연대하며 불교의 대사회적 실천을 위한 자발적 단체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1월 8일 불교여성개발원 주최 ‘신년법회 및 여성불자 108인의 날’ 기념식 모습. ⓒ불교여성개발원

불교여성개발원에서 눈여겨봐야 할 활동 가운데 하나는 2003년부터 격년으로 전국의 재가여성불자 중 여성리더 108인을 선정해서 여성지도자 인재풀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전국적 네트워크로 다양한 분야의 여성리더를 연결한 것은 여성운동의 관점에서도 매우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전업주부로 사찰신도회 운영 경험을 가진 회원과 전문직 회원들의 협업을 통해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대사회적 실천의 장을 확대해 나간다. 청소년 교정교화사업, 생명존중운동, 다문화봉사, 군장병 위문, 한부모 가족지원, 건강밥상 지킴사업, 불교여성연구 등 여러 대상을 위한 조직적 활동도 눈에 띈다. 여성불자들의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이 단체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는, 이들이 내딛는 발자취마다 불교여성운동의 역사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교여성개발원 불교여성연구소 소장 press@womennews.co.kr다른기사 보기






2021/07/14

김경일 本願에 대하여

김경일

本願에 대하여


언제부터인가 제 오랜 화두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사람은 왜 태어나나? 우리는 살면서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있다면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만물이 다 존재 이유가 있듯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어떤 까닭이나 목적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확연하지 않았습니다. 늘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명료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명예를 얻고 배우자를 만나 가족을 이루는 등 이런 것 말고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저는 그것이 本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本來誓願이란 말의 줄임말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대 보통 우리는 서원이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이 내는 특별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본원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근본적으로 태생적으로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유정물이 다 동일한 불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유정물은 본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것이 뭘까?
----
어느날 대종경을 읽다가 대종사께서 이동진화 선진을 만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 크고 중한일은 
첫째가 스승을 만나 성불하는 일이고 
두번째가 대도를 얻은 뒤에 창생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 아! 그렇구나! 이것이 우리의 본원이구나" 하는 감각이 들었습니다. 
답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온 몸이 전율이 왔습니다. 큰 고비 하나를 넘은 듯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가 개운했습니다.
-----
그러나 잠시 뒤 " 왜 그럼 본원을 아는 사람이 드물까?" 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숙업에 가려 본원이 어두워질 뿐이지....본원은 영원불멸합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현상계의 오욕에 눈멀어 본원은 알지 못하고 재색명리를 구하는 것으로 소원성취를 삼고 살다가 또 세상을 마치고 다시 왔다가 다시 가고....윤회를 거듭하는구나.

우리는 본디 불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불성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성불제중의 본원을 가진 존재입니다.
성불제중은 특별한 사람만이 갖는 서원이 아닙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든 유정물은 다 이 본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업력에 밀리고 무명에 가려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성불제중의 서원을 내가 의지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완벽하게 갖추어진 서원을 본래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다만 이를 각성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건은 우리 본원을 수행하는데 어떤 조건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내가 농사를 짓든 교수를 하든, 내가 돈이 많든 적든, 내가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몸이 아프면 아픈 몸경계를 가지고 공부하면 됩니다.

지식이 많든 적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이 좋든 나쁘든 성불하고 제중하는데 전혀 방해받지 않습니다.
아니 방해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운명과 조건들은 내게 최적화된 나에게만 주어지는 유일한 비로자나 법신불, 진리부처님의 선물, 퍼펙트한 선물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최고의 선물을 외면하고 따로 공부하기 좋은 조건이 다시없음을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본원을 각성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대도정법의 신앙과 수행의 여정에 오릅니다. 나는 불성의 존재일 뿐 아니라 본원을 갖춘 존재임을 받아들일 때 불보살과 함께 파수공행합니다.

이 길은 신앙과 수행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공부길입니다. 온전하게 믿고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공부가 일승의 법이며 최상승의 법입니다.
본원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면 문득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개벽이 시작됩니다.

내가 늘 원수라고만 여겼던 남편이 내 공부의 최고 자원이고 본원의 동업자이며 
짐으로만 여겨졌던 자식들이 다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는 천사들이고 보살들임을 알게 됩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시집식구들이 내게 서원을 이루는 훌륭한 도우미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현상계의 내 삶을 우리가 다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진리와 법으로 본원을 향해서 공부해 갈 수는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본원을 자각하는 순간 동서남북상하의 모든 부처님들이 나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넘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서 가면 됩니다. 세상의 헛 것에 속지 말고 본원을 향해 나아가면 천지 만물 허공법계는 물론 미물 곤충까지라도 다 나를 지지하고 격려할 것입니다.(1051010감각)



124Namgok Lee, 수지행자 and 122 others
21 comments
====
본원本願
부처가 맨처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때 세운 서원
자신의 깨달음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마음이 우선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남에게 깨달음을 얻게 해주려는 마음도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내용이 더욱 중시되기도 한다. 부처와 보살의 본원은 대부분 중생을 위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아미타불 신앙을 비롯한 관음신앙·미륵신앙·지장신앙 등 여러 신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부처가 가지고 있는 서원은 과거에...
=====
두산백과
본원本願
모든 부처님이 지난 세상에 성불(成佛)하려는 뜻을 낸 인위(因位)에서 세운 여러 가지 서원(誓願).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부처님네의 공통한 본원이니,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고, 별원은 부처님마다 제각기 다른 서원이니, 곧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십이대원(十二大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사십팔원(四十八願) 등임. [유사어] 본서(本誓). 본서원(本誓願). 본홍서원(本弘誓願). 홍서(弘誓).
======
本願 (본원)
1
본래(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큰 소원(所願)

2
부처나 보살(菩薩)이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려고 과거세(過去世)에 발기(發起)한 서원(誓願)

한자사전 결과 더보기
===

102-116
내가 본래(本來-먼 과거) 서원(誓願)을 세우길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동등(同等)하여 차이(差異-어긋나고 다름)가 없게 하리라.』
2-102 ❖모든 부처님의 서원(誓願)이 위의 게송(偈頌)과 같다. 부처님이 서원을 세우신 바에야 중생은 타의(他意-남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남)든 자의(自意-스스로 마음이 일어남)든 성불(成佛)을 하게 된다. 불심(佛心...
2014.09.02.

2021/05/31

도교 - 나무위키

도교 - 나무위키

도교

최근 수정 시각: 

분류

 
attachment/taege...
창시
노자(논란 있음)
성도
시작 시기
기원전 6세기(논란 있음)

1. 개요2. 역사
2.1. 도교의 기원
2.1.1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
2.1.1.1. 원시 종교2.1.1.2. 신선방술(神仙方術)
2.1.2. 도가 사상2.1.3.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
2.2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2.3. 도교의 변천사
2.3.1위진남북조시대2.3.2. 수당 시대2.3.3. 도교의 부흥과 전진도의 등장2.3.4. 근세 도교의 쇠퇴기와 근현대의 도교
3. 도교의 핵심 사상
3.1. 도가와의 차이?3.2. 민간 도교의 모습
4. 도장(道藏)5. 분파6. 한국의 도교7. 일본의 도교8. 기타9. 도교의 신10. 매체11. 같이보기

1. 개요[편집]

 / Taoism

도교(道敎)는 중국의 민속 종교다. 중국 본토는 물론 한국일본동남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도가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엇갈린다.

external/korean....

사천성에 있는 도관(道觀)[1] 청양궁(靑羊宮)의 모습.# 도관 외에도 묘(廟)라 하여 우리나라의 마을 입구의 서낭당[2]이나 일본의 지장보살처럼 일반인들이 간단한 참배와 기도를 올리는 시설도 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종교로서의 유교와 함께 우리에겐 약간 생소한 개념이지만[3] 국외에서는 확실히 종교로 파악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太平道)와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4]를 시초로 하여 남북조시대에 구겸지가 지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실제 자신들을 도교라 지칭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이며 당나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로서 힘이 세지기도 했다. 현대 도교는 크게 전진교(全眞敎)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다.

중국 이외에도 베트남과 화교의 세가 매우 강한 지역에서는 이 종교의 사원을 볼 수 있다. 특히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 많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상할 만큼 기세를 못 펴는 종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재래의 토착 제천신앙/신선 사상과, 이미 토착신앙과 융화를 이루던 불교에 흡수되었고, 일본에서는 음양도와 슈겐도 형성에 일부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도교 자체가 특별히 독립교단으로 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민간신앙에는 의외로 꽤 많은 도교적 요소들이 녹아 있다.

1990년대 말~2000년도에 들어서는 도교 자체를 중국만의 민간 신앙보다는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의 자연주의 사상/토착, 민간신앙과 문화의 교류 측면으로 연구하는 관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문화교류사의 발전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5]

2. 역사[편집]

2.1. 도교의 기원[편집]

external/www.tao...
도관 내부의 모습.#
도교의 시작은 간단하지 않다. 흔히 노자(태상노군)가 창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고, 기본적으로 원래 구성되어 있던 샤머니즘의 토양 위에 도가 사상의 몇몇 내용이 덧붙여져 도교가 발생하고 이후 도가 사상을 지속적으로 흡수해 발전하고, 추가로 유교와 불교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보통 도교의 시작을 오두미도(五斗米道)로 보므로, 오두미도 이전과 오두미도까지를 도교의 기원으로 설명하고 오두미도 이후는 도교의 변천사로 설명한다.

2.1.1. 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편집]

도교의 기원은 크게 중국의 원시 토착 종교와 신선방술(神仙方術), 도가사상의 세 가지로 나뉜다.
2.1.1.1. 원시 종교[편집]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나름대로 자연 현상을 설명해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애니미즘샤머니즘토테미즘과 같은 원시 종교들이 생겨났다. 이 중 도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시 종교 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의 원인을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고, 자연에는 정령 혹은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영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의 이런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팔신제(八神祭) 혹은 강산제(江山祭) 등의 숭배 의식을 치르고 도신(跳神; 굿), 점복(占卜), 금기(禁忌), 조험(兆驗; 재앙이나 큰 사건의 징조를 알아채는 것), 참위(讖緯; 예언), 부주(符呪; 부적과 주문)와 같은 무속문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는 민간신앙에 머무르다가 오두미도의 성립으로 도교에 흡수되어 부록파(符籙派)를 형성했다. 특히 원시 종교에서 비롯된 도교의 부록파의 내용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여 민간도교의 중심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교 부록파의 우리나라 판 베스트셀러(?)는 정감록이다.
2.1.1.2. 신선방술(神仙方術)[편집]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이미 중국에는 신선방술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것을 방선도(方仙道)라고 하고 방선도를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방사(方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선도의 목표는 도교가 형성될 때 도교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또 이런 본능에 충실한(?) 목표 덕분에 도교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할 수 있었고 상류층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목표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늙지도 않으면서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듯. 어쩌면 민간의 백성들에게는 오래사는 것만큼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방선도의 방사들은 크게 두 계파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심선파(尋仙派)와 수선파(修仙派)다.

심선파는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신선을 찾아가서 신선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영약도 전수받자!"는 파벌로, 삼신산 같은 신선들이 모여사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낸 것도그렇게 진시황을 포함한 여러 제왕들을 낚아서 울궈먹은 것도 이들이며 이들은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의 오악(五岳)과 같은 명승지와 심산유곡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어 이들을 찾아 불로장생약과 신선술을 전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선파는 명산대처에 은거한 뒤 스스로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방파이다. 이들은 연구를 통해 도교의 신선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심산유곡에 들어가 각종 광물과 약초 등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하여 신선으로 만들어주는 불로장생약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나 불로장생약 제조법은 이후 중의학(中醫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여러 사상적 보완을 거쳐 외단을 제조하거나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쳐 도교의 단정파(丹鼎派)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심선파와 견주면 여러모로 생산적인 편이었지만, 시대상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지 수은을 불로불사의 약으로 여기고 장기간 복용하다가 단명하기도 했다.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방선도의 방사들은 이후 장생불로(長生不老), 육신성선(肉身成仙;육신을 신선으로 만든다)와 같은 도교적 생명관의 기초를 마련하고 도교의 수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단(外丹)과 내단(內丹)' 개념의 형성[6]과 발전에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당시의 선술은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나, 마왕퇴한묘의 백서(비단에 적힌 글)에 그려진 도인법 그림 등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방선도 측의 이론을 보면 중국 본토보다 삼신산, 봉래산 등 한반도와 만주, 발해만 일대를 포함한 동북방 일대가 성지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방선가들의 주 출신/활동지역이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방선도는 동북방 지역 사머니즘과의 유사성이 짙으며, <태평경>같은 경우 <열선전>에 따르면 조사(祖師)인 백화(淸和)를 요동인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후계자인 간길(干吉)[7], 궁숭(富崇)등도 이민족 문화가 강한 발해만 연안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행적으로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감잡았겠지만, 당시 방선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의사 겸 무당들이었다.[8] 한마디로 '위치닥터(Witch doctor, 주의呪醫)'. 이때에는 신선이란 존재도 방사의 선행과 기도에 응감해 선약을 전해주는 신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신종교 중 특히 증산계가 종교의 성격적/교리/교단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이 강해 종교학계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2.1.2. 도가 사상[편집]

도가 사상은 도교의 교리와도 연결되는 도교의 핵심 사상이며, 도교의 발전과 함께 도교의 개념과 사상은 계속해서 신선의 수련법에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도교가 도교라고 불리는 이유도, 도교가 도가 사상의 세계관이라든가 핵심 사상을 받아들이고 함께 발전해나갔기 때문이다.(물론 도교의 발전 = 도가 사상의 발전이라는 공식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이 덕분인지, 노자(老子)는 도교의 최고 3신인 도덕천존 혹은 영보천존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가끔 원시천존 그 자체로도 여겨진다. 또 장자열자문자항상자 등 도가 철학자들은 도교의 신선 혹은 조사(祖師)로 받들어진다.[9]
도가 사상의 핵심 개념인 (道)는 일단 도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녔으며, 도를 얻으면, 즉 득도하면 신선이 된다. 또 도교의 이론 체계와 신앙은 도가 사상을 통해서 정립되었다.

2.1.3.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편집]

무축도는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황로도는 황로학파와 방선도가 결합한 것인데, 황로학파란 당시 각 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자유롭게 학문을 토론하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생겨난 학파로, 황제(黃帝)의 황과 노자(老子)의 노를 딴 것이다. 도가의 사상에 유가와 묵가의 적극적인 사회, 정치참여 정신을 흡수하여 도가의 소극적인 은퇴사상을 극복한 학파였다. 황로학파는 도가 사상의 원칙에 따른 정치술을 주장하였으나 한 무제 때 유학 위주 정치체제에 밀려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방선도와 영합하게 되어 노자와 황제를 신격화하는 종교인 황로도가 되었다.
그리고, 동한 순제 때에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도(=천사도)를 창시하고, 영제 때 우길의 진전을 물려받은 장각이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본격적으로 도교가 성립하게 되었다.

2.2.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편집]

도교의 시작은 보통 오두미도로 보고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으로 보는데, 태평도가 있음에도 주로 오두미도만을 도교의 근원으로 보는 이유는, 태평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썰리고 썰려서 사라지고 결국에는 천사도(=오두미도)로 흡수되었다.

태평도는 장각이 태평경(太平經)을 얻어 창시했다. 태평경은 도덕경을 계승하여 '도를 천하의 어머니로 삼고, 도는 만물을 낳는다'는 사상과 함께 불로장생의 방술과 신선이 될 수 있는 신선술 그리고 무격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태평경에 언급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를 태현양사(太賢良師)라 칭하였으며 제자나 신도들을 받아들일 때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여 사죄하게 하였고, 부적을 내리고 주문을 외우면서 질병과 재앙을 소멸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렇게 교화를 시작한지 십 수년 만에 수십만 명이 가담하여 조직을 종교와 군사의 합일 조직인 36방(方)으로 만들고 방마다 거수(渠帥)라는 통속자를 두었다. 그 뒤 장각은 교도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10개월 만에 진압되어[10]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사도(=오두미도)에 가담했다.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리웠는데, 태상노군[11]이 장도릉을 삼천법사정일진인(三天法師正一眞人)으로 봉했다고 하여 그를 장천사[12]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오두미도라고 불린 이유는 입교할 때 신도들에게 쌀 다섯 되를 받았기 때문이다.

천사도, 즉 오두미도의 교조는 노자, 주요 경전은 도덕경이며, 장도릉은 특별히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지어 교리를 정하였다. 노자상이주에서 장도릉은 도는 하나(一)이고 "하나의 형체가 흩어지면 기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이 된다."라고 하여 노자를 '도道의 화신'으로 규정하였다. 또 도서(道書) 24편을 저술하여 천사도의 심오한 뜻과 교도들의 행동강령을 가르쳤다.

교구를 24개 치(治)로 나누고 제주(祭主)를 두었는데, 제주는 한 구역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신도의 교화와 제사 등을 주관하는 법사(法師)의 역할을 했다. 또 그는 정실(靜室)을 설치하여 신도가 재계하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삼았다.

천사도의 1대 교주 장도릉은 122세(!) 되던 해에 교의 최고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천사의 직위를 아들 장형에게 넘겨주고, 더불어 역대 천사는 그의 적손들에게 전승토록 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삼국지의 장로다. 이후 천사도는 용호산을 본산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지만,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대만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명맥을 잇는다.

2.3. 도교의 변천사[편집]

천사도 이후로 도교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했는데, 도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꾸준히 이론을 보완, 발전시켜왔고 유교와 불교의 삼교가 서로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도교의 변천사를 여기에 모두 적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도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로 인한 도교의 변화의 흐름만을 간략하게 적도록 한다.

2.3.1. 위진남북조시대[편집]

천사도 이후 도교가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해나가는 시기다.

위촉오 삼국시대에 오나라에는 갈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태극갈선옹(太極葛仙翁)이라고 불렀다. 그는 천태산(天台山)에서의 다년간의 수련을 통해 득도한 후 상청(上淸), 삼동(三洞), 영보(靈寶) 등의 경전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증손자 갈소보가 영보파(靈寶派)를 창립하였다. 이 세 경전은 이후 여러 후인들에 의해 발전되어 도교의 중요한 맥을 이루었다.

동진 때에 있었던 도교 역사상 첫 번째 여도사이자 여학자인 위화존은 명문가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신선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천사도에 가입했다. 위화존은 도교의 양생이론을 깊게 연구하여 삼단전(三丹田), 팔경(八景), 이십사진(二十四眞) 등 양생이론을 만들었고, 수련 경험을 글로 남겼다. 또 팔색은서, 태상보문, 태동진경, 황정, 치정제귀법등의 경전을 수집, 연구 끝에 일련의 완성된 교리와 교의를 갖추었는데, 후에 모산파[13]는 위화존의 이론을 기초로 삼고 위화존을 자신들의 시조로 받들었다. 위화존 덕분에 도교의 양생술과 여러 수련법은 의학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고, 각 교파의 조사들이 변형하여 다양한 양생법이 세상에 나왔다.

동진 때의 저명한 도학자인 갈홍은 연단과 의학에 정통했다. 그는 종조부 갈현의 호인 갈선옹을 따라 소선옹小仙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스승인 정은에게 연단비술(煉丹秘術)과 갈현의 비법을 남김없이 전수받았다.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14] 나부산에 들어가 득도를 하고 연단과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특이하게도 갈홍은 신선방술과 유가의 삼강오륜을 결합하여 충효와 인을 근간으로 삼아야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그때까지 전해오던 도교의 신선이론과 수련방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연단의 이론과 방법 및 연단의 제조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두어 수나라당나라시기의 연단술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 저술로 포박자가 있는데, 그의 포박자 내편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교이론과 방술을 집대성하여 도교의 신선학이론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남북조 시기에는 장로가 죽고 난 후 천사도가 크고 작은 반란에 연관되어 지배층의 견제를 받자 천사도 조직은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교들이 난립하였다. 하지만 이 때 육수정구겸지도홍경으로 대표되는 도교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중구난방이던 도교의 이론 체계를 재정비하고 도교를 다시 진작시켰다. 사상과 관념, 각종 의범을 제대로 갖추고 미신 등의 사상을 개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천사도가 '북천사도(北天使道)'와 '남천사도(南天使道)'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남북조 시기에 도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로서의 의례 등이 명확히 갖추어지고 신선 이론의 체계적인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마음수련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교에서 이러한 마음의 수련의 비중은 이후 점점 확대되어 전진교나 무당파에 이르러는 외단을 도외시하고 내단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육수정은 남북조 유성 시대의 저명한 도사이자 남천사도의 창립자인데, 어려서 유학을 배웠으나 도교의 장생술을 보고 속세를 등지고 도가 높은 스승을 찾아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는 여산에서 수도하며 제자들을 거두어 포교활동을 했으며, 천사도를 진작시키기 위해 도교 경전의 목록을 삼동경서(三洞經書)로 총괄하여 정리했다. 그는 도교의 제도와 복식, 계율과 의식을 정비하고 등을 정비하고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재초, 즉 몸의 정갈함을 위해 목욕과 금주를 하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음식을 피하고 마음의 정갈함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속세에 얽매이거나 불결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재’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를 중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예배, 송경, 사신의 삼법으로 마음과 행동을 정결히 하면 득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육수정 덕에 도교의 위세가 크게 넓어졌는데, 그가 개혁한 교단을 ‘남천사도’라고 부른다.
구겸지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도를 신봉하였다가 숭산에서 수도한 뒤 위나라의 수도로 가 태무제로 하여금 도교를 위나라의 국교로 삼게 하고 도교를 개혁하였다. 그는 먼저 이전에 있었던 부조리한 법도와 쌀로 세금을 받던 제도를 없애고 신도들에게 계율을 준수하고 열심히 예배하고 수련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도교 신선의 계보를 정리[15]하였고 도교를 개혁하여 사회 각 계층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종교로 바꾸었다.[16] 이렇게 구겸지가 개혁한 교단을 '북천사도' 혹은 신천사도(新天使道)라고 한다.

도홍경은 모산종의 창시자이다. 그는 유불도 삼교의 이론에 정통하였고 불교와 도교의 수련을 모두 실천하며 불교와 도교의 융합을 도모하고, 모산에서 외단과 상청파의 양생술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도홍경은 무엇보다 양생을 위해 마음과 몸의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가 창시한 모산종이 상청파의 중심세력이기에 후일 상청파를 모산파라고도 불렀다.

그 외에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백가도이가도삼황파누관파상청파영보파 등이 주요 도파로 꼽힌다.

2.3.2. 수당 시대[편집]

이 때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여 이론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특히 수나라 이후 당나라 초기까지 연단술, 즉 외단 제조에 대한 이론이 엄청나게 발전했고 덩달아 중국의 화학 기술 수준도 급성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발전한 외단 제조술의 결과인 단약은 수은을 주 재료로 하여 만든 극약이어서 불로장생하겠답시고 단약을 먹어댄 제왕 및 도사들은 불로장생은 커녕 정상적인 수명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도사 소현랑은 외단이 아닌 몸 안의 내단을 키워야 한다는 내단론을 주장하였다.

당나라 때의 도사 소현랑은 스스로를 청하자라고 불렀는데 태역太易과 단도丹道를 발명하여 ‘보장론(寶藏論)’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영지靈芝(=영약=외단=불로장생약)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할 수가 없다고 하자 “영지는 너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외부에서 불로장생약을 찾기보다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 내단內丹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도교의 내단 수련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육체와 마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법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내단수련의 핵심이 됨과 동시에 도교의 수련법을 신체를 단련하는 연형煉形에서 정신을 단련하는 연심煉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도교와 불교는 종교적 주도권을 얻으려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서로에게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한편,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의 이론을 공격하고자 연구를 거듭하게 하였다. 결국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은 불교와 도교 양측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결과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이론 및 체계를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또한 이 때의 논쟁으로 인해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7]

결국 당나라 때 도교는 불교의 이론과 사상들을 대거 흡수하고 도사 소현랑의 내단도內丹道를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나라 때는 손사막, 장만복, 이전, 오균, 두광정, 팽효, 담초 등의 뛰어난 도교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내단이 도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하고 내단의 수련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을 들어 노자를 당나라 황족의 시조로 받들었다. 666년 당고종이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올렸고, 그후 당나라 황제들이 존호를 추가하거나 바꾸다가 754년 당현종이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존호로 바꾸었다.

2.3.3. 도교의 부흥과 전진도의 등장[편집]

수당 시대 이후 송, 원 대에는 도교가 크게 부흥하였고 내단론이 계속해서 발전하여 도교의 주류 이론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발전을 거듭했다.

송나라 대에는 흥억불 정책으로 인해 모산파와 화산파, 천사도가 크게 흥하였고 당시의 유명한 도사 진단은 전통적인 도가 학설을 중심으로 유가와 불가의 사상을 두루 융합하여 체계적인 내단 이론을 만들었으며, 특히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도가의 문화에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였다. 또한, 남송 대에 왕중양은 전진도(全眞道)를 창시하였다.

전진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을 필수 경전으로 삼았는데, 처차식과 부귀공명을 버리고 육식이나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면서 내단을 연단하여 고통스러운 유한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진도는 이전의 도교에서 주장한 육신의 불사를 부정하고 단지 양신(陽神)만이 불사한다고 주장하여 부록[18]을 사용하지 않고 내단의 수련만을 중시하였다. 이후 명나라 대에 이르러 전진도는 쇠락하였다가 청나라 대에 잠깐 중흥하였다.

금나라 초 북방에서 소포진이 창시한 태일교는 부록을 중시하고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고자 했으며, 정명도는 특이하게도 도교의 정명, 불교의 대승, 유가의 충서 등 삼교의 세 가르침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엔 한 곳으로 귀착된다 하여 충효를 실천하고 마음을 맑게 비우면 신과 통하지 않아도 득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원나라 때 숭도 정책은 사라지지 않아 용호파, 각조파, 모산파의 삼산부록파[19]와 전진도, 태일교, 진대도가 일어났으며 여러 유파들이 있었으나 결국 수 많은 부록파들과 천사도를 합하여 만들어진 '정일도'와 '전진도'로 나누어 흡수되어 천하가 양대 도파로 정리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내단 이론도 또한 양호한 발전을 이루었다.

명 대에는 명 태조 주원장부터 도교를 숭상하였으며, 랍탑도인 장삼봉이 무당산에 무당파를 창립하였다. 장삼봉은 전진의 도사였다가 종남산에서 내단을 만드는 비결을 얻고 무당산에서 수련하였다.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내단을 수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武'를 강조했다. 그래서 장삼풍은 무당권법을 창안했으며 육합신권을 수련하여 내가권법(內家拳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수 많은 도교의 이론과 내단 수련법을 무술에 접목한 것이었다. 이후 무당내가권은 크게 발전하여 형의권팔괘장태극권이 만들어지고 이후 수 많은 무술과 유파가 발생하여 그 유명한 중국권법이 형성되었다카더라.

사실은 장삼봉은 시대별로 같은 이름이 여럿 나오는 불분명한 인물이며, 장삼봉과 무당산은 명나라대 정치적 목적으로 국가에서 띄워준 케이스다. 또한 중국무술 운운은 완벽한 후대의 날조다. 소림권이 달마에게 유래했다는둥 XX 전통무술은 고구려/화랑이 익히던 호국무술이라는둥, 기원을 과거로 잡을수록 권위가 선다는 착각에서 비롯한 것. 실제 태극권은 명말 진왕정, 형의권은 명말 희제가, 팔괘장은 청나라말 동해천을 시조로 한다. 내가삼권은 근대에 탄생한만큼 각자 계보를 정확히 밝히고 있으며,[20] 무당산 쪽에서 멋대로 장삼봉 이름을 팔아 사기치는 것이다.전격 대륙의 상술 그런데 실제로 현재 중공에서는 무당산이나 소림사를 무술학원화 하여, 외화벌이에 이용하고 있다. 관광수입과 양성된 무술가들의 무술쇼로.

그러나 명나라는 공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교를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는 나라였기에 비록 황족의 후원이 있기는 했으나 국가운영의 중심사상은 도교가 아닌 유교에 두고 있었고, 불교와 도교를 반반씩 중심 사상으로 잡던 당송 시대와 달리 도교의 힘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때부터 국가 중심의 관방도교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민간신앙에서는 송, 원 시기부터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민간도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옥황상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들이 하부에 위치하는 도교의 신화세계도 이 시기를 거치며 완성되었다.

2.3.4. 근세 도교의 쇠퇴기와 근현대의 도교[편집]

external/1.bp.bl...
예수도 같이 섬기는 도관도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는 원래 자신들이 주로 믿던 불교(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억제하였다. 청 초에는 한인들을 달래기 위하여 정일도를 비호하고 교주를 정일진인으로 임명하여 2품으로 삼았으나, 결국에는 숭불억도 정책으로 인해 천사라는 이름이 진인으로 격하되고 품계도 2품에서 5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포교를 금지하니 결국 도교는 쇠락하게 되었다. 다만, 그래도 도교의 성직자인 도사한테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고, 기존의 상투머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다.[21]

명청 시기를 거치면서 도교는 국가 제초의례 중심의 관방도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민간신앙적이고 주술적 기복 중심의 민간도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개인의 양생을 추구하는 수행도교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단전 호흡기체조 등으로 유명하다)

근현대에 들어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내전으로 도교의 역사에도 한 차례 폭풍이 불어닥친다. 대륙을 차지하고 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해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까지 일으켰는데 증언에 따르면 도교성지였던 노자 강경대(老子講經台)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도사들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강제 환속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많은 도관과 절이 문을 닫았다. 가까스로 연명한 사람들은 타이완이나 동남아 화교 거주지역으로 도망치거나 깊은 산 속으로 아주 꼭꼭 숨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였고, 때문에 지금도 타이완이나 화교 거주지 등 해당 지역들은 현재 이때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도교를 계승하였기에 민간 신앙이 발달하였다.

이후 공산당이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 발전/지원 정책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사라진 도관들을 재건하고 도피했던 도사들이 돌아오는 등 숨통이 어느 정도 트였다. 하지만 중국은 국가(공산당)가 종교의 통제와 관리를 하는 나라이기에 중국의 도교는 학술적인 부분이나 양생학과 관련된 기 수련, 그리고 위에 나온 대로 중국 당국의 돈벌이를 위한 무술쇼만이 발전하였다. 이는 도교 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로, 소림사 항목에도 나오듯 공산당원이 주지를 맡고 사원이 무술학원으로 전락해 버린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도교의 모습은 이 분야에 무지한 서양 다큐멘터리나 무협지 등을 통해 마치 그것이 원형인 것처럼 상품화되어 퍼지고 있다.

대만/동남아로 도망친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다. 그 이전 명청 시절부터 이미 원시 도교 시절의 무축적/기복신앙적 성격이 다시 대두된 민간 도교 시대다 보니 자체적인 교단/교리/경전이 있다고는 하지만.[22] 대부분 우리나라의 무당이나 무속 신앙과 섞인 불교 모습과 하등 크게 차이나지 않고,[23] 사람들의 시선도 그다지 좋지 않아 한국인들이 무당보다 스님이나 사제를 더 수준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24] 이 지역에서도 비슷한 취급이다. 특히 동남아는 동남아시아 자체가 상좌부 불교가 발달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져있다.

3. 도교의 핵심 사상[편집]

도교의 목적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불로장생)'에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속세에서의 불로장생은 언제나 실패하였기에 인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인 선인이 되어 그것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좀 어렵지만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도교는 현세의 삶이나 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기독교이슬람 등의 종교들과는 달리 사람을 중시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한줄요약: 살아서 잘되자[25]중인귀생(重人貴生)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하는 성명쌍수[26]의 수련 체계를 통해 역수반원[27]의 성선成仙이론을 확립하였다. 신선은 득도(得道), 도통(道通)하여 영원불멸한 도와 하나가 된 사람으로, 수련을 통해 정기신(精氣神)의 셋을 기신(氣神)의 둘로 되고 기신을 신(神)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 신이 도가 되어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도와 하나 된 상태이기 때문에 불사의 육체를 지니고 장생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몸은 '소우주'이며 우주가 인간의 몸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신들이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교에서는 태양의 신은 오른쪽 눈에, 달의 신은 왼쪽 눈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정결하지 않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 사람의 몸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신들이 인간의 몸을 빠져나가면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신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들의 정精을 받아먹고 사람의 수명을 깎아내리려 한다. 따라서 사람은 정의 공급원인 곡기를 끊어 나쁜 신들을 잠재우고 마침내 기(氣)만을 호흡하다가 마침내는 기를 한 번 호흡하고는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몸에 담아 몸을 보함으로써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 이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잡념을 지우고 무념무상에 빠져들어 마음을 정갈히 함과 동시에 내관(內觀), 즉 자신의 내부를 고요히 관찰하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들과 우주를 보아야 하고 나아가 그 우주를 이루고 작동시키는 현묘한 질서인 도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도를 알게 됨으로써 도道와 하나 되고 우주(宇宙)와 하나 되어 영원불멸한 우주와 같이 사람도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 생겨나는 덕과 지혜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인데, 자연의 삼라만상에 도가 있음에도 도의 현실화된 모습인 덕과 지혜를 내보인다는 것은 도가 도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28]이요, 따라서 그것은 도를 알지 못하는 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자와 장자가 도를 아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도를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여 물과 같아지는 경지에 이르러야(상선약수) 비로소 '득도했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교 성선成仙 수련 방법의 초점은 도교 초기의 천사도부터 당 초까지는 그 방법으로 도인술(道人術 : 일종의 체조 등을 통한 양생법), 선단(仙丹 : 불로장생하는 약,)[29]과 같은 '양생법'을 이용하였는데 썩어서 필멸하는 음식인 곡식이 아닌 영원불멸하는 것인 금속, 그 중에서도 정제된 수은[30]으로 만드는 외단 즉 단약을 섭취하고 곡기를 끊는 육체적인 방법을 통해 영원불멸하고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얻는 명命(육체)의 수련에 맞추어졌었다. 부가적으로 마음의 수련과 윤리의식 고취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양생법, 특히 선단을 이용한 불로장생술로는 신선이 되기 힘들어보였다.죽어서 승천하기는 쉬운 방법들이다.

그리하여 유교/불교와의 끊임없는 교류는 도교의 신선 수련 방법의 초점을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수련 방식보다 곡기를 점차 끊어 내고 기를 호흡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탁하고 음陰한 기운을 남김없이 털어내어 양신陽神을 이루어 도를 얻고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마음의 수련 방식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이후 내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도사 왕중양은 신선이 되면 육체를 버리고 양신陽神 이 빠져나와 불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전진도 이후에는 아예 내단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기의 도교는 언젠가 썩는 곡식으로 만들어진 몸은 썩어서 죽게 되니까 썩지 않는 금속을 먹자!(육체수련 중심, 외단론 중심)이었던 것이고, 후기의 도교는 수련을 통해 우주와 합일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자!(심성수련 중심, 내단론 중심)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후기 도교의 경향으로 인해 민간 도교가 아닌 수련 도교에서는 여러 부적술과 제사 의식 또한 단순히 술법으로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비우고 '좌망'(坐忘 ; 앉은 채로 자신을 잊음)할 수 없을 때에 할 수 없이 몸 안에 있는 신을 바깥으로 불러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요, 이름난 명산을 유람하는 것도 그 곳에 살고 있을 신을 만나 보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3.1. 도가와의 차이?[편집]

도가와 도교는 엄밀히 따지면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도가는 노자 같은 사상가에 의해 나타난 철학사상의 하나지만, 도교는 장각장릉 같은 교주에 의해 확립된 종교들을 출발점으로 본다. 도교가 종교로서 발전하면서 도가사상 등을 끌어들였지만 사상적 지향점은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닐 수 있다. 우선 도가=철학, 도교=종교로 보는 관점부터가 문제가 있다. 과연 철학과 종교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인가? 그것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당장의 불교만 보더라도 불교 교리를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불교 의례를 종교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 역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종교의 이분법에 따라 사고하는 결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도교가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노자/장자의 사상은 애초에 서로 지향점이 다르고[31], 노/장이라는 범주를 억지로 묶어 만든 "도가 철학"의 지향점 역시 신비주의적 수양론이나 영생, 불멸에 대한 의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노자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한 사람들 중에는 물론 도교 사상에 빠진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그 이전에 법가로 흔히 분류되는 한비자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한비자는 노자의 텍스트 내에 나타난 통치술에 대한 비유를 상당히 정확히 꿰뚫어보았으며,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통치에는 무위(無爲)의 도(道)를 따르는 술책으로 민(民)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노자 주해서를 통해 지적했다.[32][33] 즉, 노자의 사상은 외형적으로나 종교적인 사상으로 보이지, 이러한 외형적 비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 지배 체제를 제안한 엄연한 정치철학이다.

그리고 장자의 경우 일단 노자와도 다른 노선을 걷는데, 장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 관념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념에 따르는 국가나 기타 지배 체제 자체를 혐오했다. "어리석은 자(愚者)들이 꿈(夢)을 꾸면서 군왕이시어!(君乎), 종놈아!(牧乎)라고 외치는데, 정말로 고루하다!(固在)"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어리석은 꿈이라 지적한 것이 지배자-피지배자가 구분되는 국가 체제라는 것이 명백해지며, 호접지몽 등을 통해 그가 그토록 깨어나라고 강조한 꿈 역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국가 체제를 피해 도교적으로 혼자 영생을 누리거나 산 속에 은거하는 길을 택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양생"이 어쩌고 하는 신비주의적 목적 역시 국가가 내세우는 통치 이념과 다름없는 헛소리라는 것을 장자 본인이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도교 수행자처럼 혼자 영생을 누리겠다는 목적으로 산 속에서 70년을 신선처럼 산 노인이 하루 아침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우화가 괜히 장자에 수록된 것이 아니다. 장자의 수양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物)과 통(通)하라는 이야기는 국가이념 등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세상의 모든 개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라는 이야기지, 절대 자연 속에 틀어박혀서 신선놀음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물론 전 문단의 의견 역시 특정한 경향의 의견에 불과할 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34] 자세한 것은 스스로 공부해 보고 판단하도록 하자. 2000년대 기준으로 도가와 도교를 분리해 놓고 보자는 주장은 주로 일본 학계쪽에서 보는 시각이다. 반면 중국 학계에서는 도가와 도교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쪽에 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도교 문화 - 행복으로 가는 길" 도록에 수록된 논문 참조.[35]

3.2. 민간 도교의 모습[편집]

도교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도교 수련자는 다음과 같은 생활지침을 제시받았다.
1. 벽곡수행을 하면서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버리고 고기도 삼가며 최대한 소식하고[36]
2. 각종 무술과 단전호흡을 비롯한 여러가지 수련방법으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3. 심산유곡 같이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의 여러 신들[37]을 만나고 도를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몰라도 옛날의 평범한 백성들이 이것을 다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도교는 민간인들에게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도교에서 죽은 사람의 혼은 명부로 가서 재판을 받은 뒤 지옥에서 벌 받을지, 천상계로 가 장생불사의 몸이 될지, 다시 환생할지 결정되는데, 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도 말한다. 다만,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악행을 한 번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다행히도 악행을 많이 했어도 도교의 제의를 통해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면 벌이 감해질 수 있다고도 한다. 보통 사람이 중간에 악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선행을 1200번 연달아 하면 죽어서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신선의 중간급인 지선(地仙)의 경우. 천선(天仙)은 1만 2천 번을 연달아 해야 한다

그 외에 민간 도교는 민간인들이 직접 원하는 기복성이 발달하여, 도교 부록파의 부록술과 여러 의식이 그 뜻이 조금씩 변형되어 복을 부르고 화를 몰아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점복과 참위(=예언) 등으로 민중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으로 불교 등과 섞여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민중 반체제 운동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실 부록파 자체가 민간신앙에서 유래하였기에 변형이라기보다는 원래 형태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맞지만.

4. 도장(道藏)[편집]

도교에도 불교의 대장경에 해당하는 집성된 경전이 있는데, 이를 도장(道藏)이라 한다. 대표적으로는 명나라 시기인 1445년과 1607년에 정통도장(正統道藏)과 속도장(續道藏)이 간행되었으며, 청나라 가경제 시기엔 도장집요(道藏輯要)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5. 분파[편집]

6. 한국의 도교[편집]

external/www.cho...
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
한국의 도교에 대해서는 크게 자생설과 도입설, 중도설이 있다.

자생설은 중국의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체적으로 독립 교단화된 도교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도교서적인 해동이적이나 청학집[38]에서 약간 등장하며, 일제시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서는 아예 이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들이 대부분 국내 문헌 위주의 주장인데다, 문헌 기록 해석에서 지나친 자의주의적 관점을 가진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도입설은 중국의 도교 교단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 도교가 퍼졌다는 주장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조 해동전도록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도교의 성립기에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배제하고, 중국 중심주의적인 해석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 원시도교의 문헌인 태평경이나 포박자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샤머니즘 신앙이 도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 종교학적으로도 원시도교(방선도)는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도교사를 언급할 때는 아직 완전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방선도 부분을 빼버리거나 대충 넘어가고 태평도와 오두미교부터 도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도설은 현재 사학계/종교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으로, 단군신화나 한국 토착신앙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무속신앙/신선신앙/제천의식 등의 원시도교와 유사한 토착신앙이 존재했고, 이러한 신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도교가 융합하여 현재 한국의 민간신앙/신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현재까지 나온 설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뒷받침이 잘되어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 영류왕 때로,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에 의해 기존 고구려 왕실/귀족층과 결합한 상태이던 불교계를 억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고 장려하였으며,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구려 내의 분열을 오히려 부채질하여 고구려 멸망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교적인 신들과 신수들의 모습, 별자리 신앙,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기반으로 그 이전부터 한국에 원시도교적인 토속신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시절의 도교(특히 외단도교)와 관련된 약재/의례용품류의 유물을 전시한 바 있다.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의 발언 기록이나 도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대향로 등 조형물, 도교의 토지신(토백)이 등장하는 무령왕 매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도교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추정은 있으나 고구려처럼 직접적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유입되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하면서 주금사나 도교의 술법인 기문둔갑에 대한 책들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을 통해 고구려 못지않게 도교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동시에 풍류도로 대표되는 토착신앙과의 융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자연히 도교는 독립된 교단이 아니라 불교/토착신앙과 융합하는 형태로 한국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 우리나라 불교와 무속 신앙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성격을 가진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불자들이 애독하는 경전 중 하나인 <북두칠성연명경>[39]을 보면 불경이라고는 하지만 칠성신에게 비는 것은 토착신앙/도교적인 요소며,[40]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아니라 중국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41]이 주연으로 언급된다.[42]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해동이적에서도 '원래 불교와 도교[43]는 주문을 읽고 부적을 쓰는 데서[44] 유사점이 많은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섞여 어느 게 불교고 어느 게 도교인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남궁두에 대한 기록에서 남궁두의 스승이 스님이면서 신선술을 연마한 도사로 기록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도교가 아닌 제초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재초)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의 참성단 초제 정도만이 남게 된다. 이때부터 도/불 융합적인 민간신앙의 발달과 몇몇 지방 양반가에서 가풍으로 내단수련과 선행을 중시하는 이른바 내단파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의 도교의 수행이론 역시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현재 국내의 여러 단학 수련단체에서 중요시하는 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등의 서적이 모두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책들이다.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불교/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45]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및 구세주를 자처하는 민간 반란 세력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46] 유교/도교의 사이에서 심성을 닦고 선행을 중시하며, 삼교의 어느 극단에 치우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47]

이후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 때 들어서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남학[48]정역파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강증산계열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에 상제라는 표현이 나온다.*)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49]과 원시/민간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의 다양한 도교적 관념과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 신종교의 사상은 중국 도교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50]

7. 일본의 도교[편집]

external/www.tao...
일본에 현존하는 도관의 모습.#

일본에 처음 도교가 전래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 주금사(呪禁師)[51]가 있고, 무왕 3년(602)년에는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여러 책을 전했는데, 그 중에 도교와 관련된 역서(曆書), 둔갑(遁甲), 방술(方術)에 대한 책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에 도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서기에 상세(常世)신앙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도교가 흥하게 된 시기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직접적으로 유학승/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중국이 제초도교가 들어와 점을 치고 개인의 구복을 비는 방기주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일본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미신적인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처럼 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도교서적을 수입한 자들도 있었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 화려한 귀족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면서 그 유명한 음양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에 백성들은 귀족들의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을 꿈꾸었고, 도교의 은둔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은 민중들에게도 잘 맞아 민중들과 민간신앙에도 파고들었다. 중앙정부의 관청인 음양료에 속하지 않은 음양사들인 외법사들 역시 많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 교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교의 주술 위주로 일본에 들어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고, 또 그런 집단들이 주류로 인정받는 상황이었다. 외법사들의 경우 통제의 대상이었고, 민간신앙에 흡수된 도교는 일본에 들어올 때부터 기복적인 주술 위주로 들어와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밀교가 발달하면서, 타 종교와의 융합에 있어 한국만큼 널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귀족 중심적이던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본 도교계는 된서리를 맞는다.[52] 항상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사계급들에게 있어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 사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53] 오히려 이들에게는 생사를 초탈한다는 사상을 가진 불교가 더 구미에 맞았고, 당시 일본의 종교계에서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도교보다는 당연히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도교는 귀족들의 몰락과 더불어 주류 무대에서 밀려나고, 궁중의 음양사는 민간에서 떠돌이 주술사로 일하는 박사로 변하였다.[54]

이후 일본의 도교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신토슈겐도)과 불교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이루지는 못한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중국 도교의 경전들과 더불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민간 도교가 전래되나, 이 역시 독립된 교단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도교는 민간 신앙과 불교의 일부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8. 기타[편집]

도교 교세는 쇠퇴하는 중이다.[55] 교리도 경전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아직 원시 종교에 가까운데다 구 영국령인 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는 유럽의 영향으로 신비주의가 대세라 20대 및 30대 청년층과 청소년층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거나 무종교/무신론으로 전향했다. 중화권은 기독교가 한국과 달리 쫓겨나서 아시아에서 가장 무신론 비중이 높으며 유,불,선 3교가 오늘날 한국의 고사처럼 역사에 기록된것이 아직 많이들 남아있어서 홍콩의 소방서는 관우상을 갖다 놓는다. 무신(武神)으로서 경찰이나 소방관 등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이다.

화상이 하는 가게는 어디나 1월1일에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고사를 지낸다. 물론 젊은 층으로 오면 세속주의가 대세라 미신이라고 여긴다. 기껏해야 대만에서만 선전하지만, 이 동네도 도사들이 많이 세속화하여 일본 정토종계 승려들이나 신토의 아르바이트 무녀들처럼 평소에는 일반인으로 살다 초제 요구가 들어오거나 하면 그럴 때만 도사복을 입고 도교의례를 하는 등 수도자로서의 도사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알바 도사 중국 본토에서도 대형 도관들을 소림사처럼 무술공연자 양성 학교로 쓰고 공산당 휘하 조직에서 도관들을 관리하는 등 영 상황이 좋지 않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는 더러 서원 혹은 향교가 국내 각지에 지나치게 많은 현상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중화권 각지에 산재하는 다양한(관운장마조 등) 도교 사원 및 3자균형(三者均衡)의 모습을 동경하기도 한다.

베트남도 도교의 영향이 적지 않아 응우옌짜이응우옌빈키엠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외에도 도교를 배타적 요소가 전혀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대안이 도교라고 인식하는 부류도 있다.

선단을 만드는 기술인 연단술은 아직도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하는 사람이 있다.

도교에서는 신(神)의 대우가 좋지 않은데, 도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신들은 아직 득도를 못해서 수련 중이다. 물론 이들은 도에 대해 평범한 인간보다 엄청 많은 것을 깨달았으며 신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도와줄 수도 있고 인간의 스승이 되어 도에 대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들도 도를 얻지는 못했기에 인간을 득도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물론 득도를 한 사람도 도가 사상에 의하면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줄 수 없긴 하다.) 물론 도교의 모든 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원시천존 같은 고매한 존재들은 이미 그 경지를 훨씬 넘어선 존재들이다. 다만 그만큼 일반인들과의 거리감도 커서 역사적으로도 도사님들을 숭배했고, 민간도교에도 열중이다.

따라서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도사는 마음을 정갈히 하고 부적이나 제사를 통해 신들을 초청해 득도하는 방법을 묻기도 하지만, 결국 나중에 가면 좌망이나 내관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이라는 스승'을 뛰어넘어 우주 전체를 관조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도를 깨우쳐 우주의 질서와 법연을 확고히 하여야한다. 참고로 도교의 사원은 도관(道觀), 남자 수도자는 도사(道師)나 건도(乾道), 여자 수도자는 여관(女冠)이나 곤도(坤道)라 한다. 당나라의 양귀비도 한때 여관이었다.

현재 중국 도교 종파 중 하나인 화산파 남천문의 장문인은 한국인이다. 곽종인이라는 여성분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절밥처럼 도교 역시 도교 요리라는 고유의 요리법이 있다. 도교의 사상과 목적을 살려 도교 역시 음양과 오행사상을 기반으로 차가운 음식과 뜨거운 음식의 공존과 조합을 만들었다.

9. 도교의 신[편집]

external/open.cy...
▲ 팔선도(八仙圖)는 도교의 깊은 이치를 체득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洞賓)·장과로(張果老)·한상자(韓湘子)·이철괴(李鐵拐)·조국구(曹國舅)·남채화(藍采和)·하선고(何仙姑) 등 여덟 신선을 각기 독특한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인 도교의 사원에는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이 여덟 명의 신선들을 모시는 팔선궁(八仙宮)을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아마도 이들은 남녀노소, 빈천부귀를 대표하고 있는 데다가 그 출신 성분들이 걸인, 도사, 관리, 황제의 친척, 시인 등 각양각색이기에 도교에서 받드는 다른 신선들보다도 인간적으로 훨씬 더 가깝고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10. 매체[편집]

오덕계에서는 의외로 도교의 인기가 높다. 다만 도교 단독이라기보다는 불교, 밀교, 음양도, 신도 (심지어 힌두교까지) 등의 동양 판타지의 일부로 많이 활용되는 형편.

11. 같이보기[편집]

[1] 도교의 사원. 보통 '00관'이라고 쓰지만, 궁관(宮觀)이라고도 부르며 이때는 궁(宮)자를 붙여 '00궁'이라고도 한다.[2] 사실 서낭당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성지(城池)신앙에서 생겨난 성황당(城隍堂)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고. 실제로 성황당이라는 표현과 혼용된다. 산왕(산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뜻인 산왕당(山王堂)이 변했다는 설도 있고, 서낭당의 다른 이름인 천왕당에 근거해 천신 신앙에 기초해 생겼다는 설, 유라시아 지역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적석단에 기초한 민간신앙설, 절충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서낭당 관련 네이버캐스트 링크.[3] 태극기의 도안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한국인의 조상들 중에 도사가 많았거나 혹은 한국 자체가 도사들이 세웠던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며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실화다.(...) 밑의 본문 내용을 쭉 보면 알겠지만, 한국과 도교는 의외로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하다. 물론 태극기의 형성은 도교와는 직접 관련은 없다.[4] 학술적으로는 천사교(天師敎)라 불린다.[5] 물론 중국에서는 아직 자국주의적 관념으로 도교 문화를 연구하는 경향이 짙다. 사실상 중국의 도교학 논문에서는 교류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고, 찾는다 해도 전래/교류보다는 전파를 위주로 보고 있다.[6] 내단의 경우 방선도의 영향에 대해 말하기는 애매한데, 당나라 때 도사 소현랑이 나타나기 전까지 도교는 내단보다 외단을 중요시하였으며, 수련법도 외단(그나마 외단이라는 용어도 소현랑이 내단론을 주장한 뒤에야 외단/내단으로 구분되면서 생겼다.)에 주목하되 마음의 수련도 병행하는 정도이다. 물론 그 전부터 마음의 수련을 중시하는 경향이 점점 대세를 타긴 하지만...[7] 삼국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우길이다![8] 열선전을 비롯한 도교의 주요 도사들을 다룬 기록을 보면 초기의 도사들일수록 우리가 '도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아니라 약사나 의사, 무당 등의 모습이었다.[9] 하지만 노자와 비교하면 넘사벽으로 취급이 낮다. 그나마 장자가 남화노선(南華老仙,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불리고 저서가 남화진경(南華眞經, 남화경 혹은 장자남화경)이라는 이름으로 도장경에 포함된 정도.[10] 물론 황건적의 난이 불과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진압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썰리고 썰리다 탈탈 털렸다' 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일단 황건적의 난 자체는 1년만에 진압되었지만 한나라는 결국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촉발된 국가 멸망 테크를 수습하지 못하고 4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 즉, 황건적의 1년은 400년간 이어져 온 거대 제국에 치명타를 입힌 1년이었다. 그리고 중국사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장각을 중심으로 한 태평도의 반란은 <종교로 결합된 향촌 세력(농민) 반란>의 효시였다는 점 역시 생각해야 한다. 장각은 '종교적 비전을 매개체로 삼아 농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거대 제국이라도 멸망에 몰아넣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후 청말 백련교도의 난에 이르기까지 이 사례에 영향을 받은 무수한 농민의 난들이 대부분 중국 통일 왕조들을 괴롭혔고, 그 중 상당수를 무너트렸으며 몇몇 통일 왕조는 이런 농민 반란을 기반으로 성립했던 것. 여기에 태평도의 잔당들이 유입된 오두미도(=천사도)가 이후 중국에서 종교로서 도교의 기반이 된 점까지 생각하면 (삼국지연의의 전근대적, 영웅주의 사관에 기반한 관점과는 달리) 장각과 태평도가 역사에 남긴 흔적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장악하여 결국 선양의 형태로 제위를 찬탈하려 시도한 > 이나 <일시적으로 일부 영토를 지배했으나 결국 통일왕조에 흡수당한 세력들>보다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셈.[11] 도교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부르는 명칭이다.[12] 여기서 '천사'라는 이름은 천사도의 교주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계속해서 내려온다.[13] 상청파(上淸派)[14] 처음부터 뜻이 없었던 건 아니었고 동진 성립 과정에 여러 강남 호족들과 함께 가병을 이끌고 분전했지만 당시 사실상 동진의 통치를 도맡고 있던 왕도가 서진출신 관료와 사대부만을 중용하자 이에 절망하고 이후로 도교 수련에 힘썼다. 그의 대표작 포박자도 순수한 도교 관련 서적은 아니며 절반 정도는 시국 비판의 내용이다.[15] 도교의 많은 신들의 이름은 거의 이 때 정해졌다고 보면 된다. 세세한 스펙이나 모습 등은 크게 바뀌기도 했지만.[16] 이전에는 기복신앙과 여러 자연신을 숭배하는 부록파 위주인 민간도교와 불로장생약을 만들고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도교 간에 간극이 꽤 있었다.[17] 이전부터 갈홍육수정구겸지도홍경 등에 의해 도교는 계속해서 유, 불, 도 삼교의 이론을 조화시키고 불교와 유교의 이론을 꾸준히 흡수해왔다.(물론 음양오행론을 흡수한 신유학이나 도가사상을 받아들인 선불교처럼 반대도 존재했다.) 이는 이후에 유불도 삼교 중 불교는 지나치게 탈속적이고 유교는 지나치게 세속적이니, 그 중간에서 양자의 이점을 두루 갖춘 도교가 가장 뛰어나다는 도교중정론이 출현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18] 부록파에서 사용하는, 부적이나 신기(神器).[19] 三山符籙派, 모산파를 보면 알겠지만 도교의 부록파를 계승하여 그 쪽 계열로 가장 융성하던 세 교파다.[20] 내가삼권의 정식 계승자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함부로 무당산 운운하다간 고소크리 당한다.[21] 사실 청나라의 이러한 도교 억제는 도사에게 변발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변발을 하지 않는 한족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 한 정책일 수도 있다. 도교가 계속 번성하면 도사의 수도 늘어날 텐데, 그런 상황에서 도사에게 변발을 강요하지 않으면 변발을 하지 않을 특권을 누리는 한족들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반면 불교의 승려는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삭발을 하므로 승려의 삭발은 한족의 전통이 아니라서 만주족의 입장에선 굳이 금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2] 사실 도교의 교리/경전 자체가 후대로 갈수록 불교의 영향이 확실하게 두드러진다. 물론 불교 역시 기복신앙적 면에서는 아주 충실하게 도교를 벤치마킹하지만...결론은 장삼이사[23] 중국 본토의 도교와 비교해 도교 사원의 규모도 비교적 작은 데가 많고, 도사들도 도교 사제로서의 일을 전담하기보다는 평소에는 일반인이다 도사로서 일할 때만 도사복을 입고 초제를 지내는 식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도사인지 일반인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세속화된 일본 진언종 계열의 승려들과 비슷하다.[24] 중국에서 씌어진 책인 <도교문화 15강>의 초반부에 중국인들이 도교를 상대적으로 천시하고 무협지로 인한 잘못된 도교 관념으로 인한 폐해를 비판하며, 동시에 중국 내에서조차 불교학이 도교학보다 더 연구가 활발한 상을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도교가 가장 융성했던 당송 시대조차 도교는 불교에 밀려 콩라인이었는데 뭘 새삼스레(...). 사실 도 계통의 종교가 불교보다 천대를 받는 건 일본도 예외가 아닌데, 창작물에서와 달리 현실의 일본인들은 신토 성직자인 신관과 무녀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25] 이 자세만큼은 도가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덕경, 장자 텍스트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세트로 묶이는 열자, 양주의 발언 등에도 국가의 대의명분에 휘둘리지 말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쉽다.[26] 性命雙修 :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갈고닦음[27] 逆修返源 ; 수련함으로써 근본으로 거슬러 돌아감 도에서 만물이 나왔으므로 만물에서 도로 돌아가는 것을 뜻함[28] 이게 바로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29] 다만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온갖 중금속 덩어리인 경우가 많아 도리어 명을 단축시키기도 했다. 당나라 때까지 천자들도 단약 먹고 여럿 죽어나가서 결국 유교,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송대 이후로는 단약 섭취를 제외한 다른 수행법들이 부각된다.[30] 수은이 다른 금속을 감싸서 녹여버리는 도금 공정, 상온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수은의 특징 등등을 보고 옛 중국인들은 수은이 신선의 현묘한 특징을 닮은 금속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썩어 없어지는 곡식 대신 신선의 성질을 닮은 금속을 먹으면 신선을 닮아 불로장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간이 허하면 간을 먹고 정력이 허하면 해구신을 먹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인 셈이다.이 사고방식 때문에 진시황 시절부터 당송변혁기까지 수은 중독으로 죽어나간 금단술사들이 불쌍하다[31] 쉽게 말해 노자와 장자의 사유 차이는 형이상학vs실존주의국가주의vs아나키즘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지경이다.[32] 만약 노자의 "소국과민" 이나 "병기불상지기" 등의 문장에 혹해서 "노자가 평화롭고 자연주의적인 소규모 공동체, 국가 없는 사회를 꿈꿨구나"라고 생각하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어찌보면 당신도 노자의 통치술에 낚인거다. 노자의 통치술은 민중이 이렇게 생각하게끔 통치자가 도에 따르는 교묘한 술수를 써서 백성의 복종을 받아내야 한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33] 단 이는 한비자의 견해이지 본래 뜻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경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아나키즘부터 전체주의까지 극단적으로 나뉜다.[34] 도가철학을 아나키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신비주의적인 도교에 결코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애초에 아나키스트 중에 반종교적 정서를 지닌 사람들도 있지만 영성(Sprituality)이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요즈음의 반종교적 정서들에 좌파들이 경계심을 가지는 추세인지라...[35] 요새 중국철학이나 불교철학 전공자들 사이에는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을 아예 무시하며, 동양철학의 실용적, 정치철학적 모습만을 크게 강조하기도 하고, 과학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형이상학적, 오컬트적 서양철학 및 종교를 까는 경향도 많이 보인다. 허나 이에 대해 과학주의와 옥시덴탈리즘이 묘하게 혼합된 방어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또 과학주의 맹신자들에게는 동서양 철학 자체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로 취급되기도 하며, 불교의 과학성을 열렬히 주장하는 의견은 유사과학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신비주의를 까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다.[36] 자극적인 음식. 특히 오신채와 고기를 멀리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실제로 오신채와 고기를 금하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은 불교 전래 한참 후에 등장한다.[37] 약 3만 6천 위가 있다고 한다.[38] 단, 청학집의 경우 환인과 헌원의 스승이 둘 다 중국 서방의 공동산의 선인 광성자라고 기록하고 있다.[39] 고려 시대부터 유입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을 주로 사용했는데, 1534년(중종 29년)에 안동 광흥사에서 불공용으로 발행한 북두칠성공양문(北斗七星供養文)에는 칠성청, 불설북두칠성연명경, 칠성하강일, 칠성부(민속에서도 사용하는 부적으로 당나라 때 바라문승이 번역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에 수록되어 있는 부적) 등이 수록되어 있다.(성수신앙의 일환으로서 북두칠성의 신앙적 화현 양상) 링크되어 있는 논문 파일 자료에서는 북두칠설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그냥 일반 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직접 북두칠성공양문의 원문을 보면 "불설" 북두칠성연명경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도 북두칠성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제대로 나왔다.[40] 북두칠성숭배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유서 깊은 토속신앙이지만, 현재의 칠성신앙은 도교적인 요소의 영향이 강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중국과 달리 칠성신을 인간에게 생명과 복을 주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반대로 중국에서 칠성신은 무서운 죽음의 신이다.[41] 노자[42] 사실 이 북두칠성연명경 자체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이며, 노자가 등장하는 점에서 도교의 칠성숭배가 유입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당장 한국 사찰에서 칠성단 예불시 언급되는 존재인 태을신이나 자미대제는 모두 도교의 신이고, 치성광여래는 북극성 신앙과 불교가 혼합된 존재다.[43] 여기서의 도교는 중국식 도교가 아니라 한국의 토착신앙과 결합해 한국화된 도교/도교로 이해된 토속신앙을 말한다. 해동이적이란 책 자체가 중국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신선들의 선맥을 정리한 책인데, 등장 인물들 중 고대의 선인들은 단군해모수 등 초자연적인 권능을 발휘했다고 전해지는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들인 경우가 많다.[44] 엄밀히 말하면 부적을 쓰는 것 자체가 토속신앙의 영향이다.[45] 경신일에 삼시충이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자신이 기생하는 인간의 죄를 일러바쳐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동안 잠을 자지 않는 것[46] 종교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신에 대한 저술이나, 천제를 지낸 유적도 남아있다.[47] 대표적인 내단파 인물인 김시습의 경우 중국 내단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에 대해 장수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고, 정렴이나 권극중 등 다른 내단파의 인물들도 정도나 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중도주의를 추구한다.[48] 다른 이름은 오방불교로 이름은 불교라고는 하지만, 교단의 성격을 보면 도교와 불교, 주역학이 뒤섞인 형태다.[49] 동학에서는 한울님 외에 다른 신에 대해 특별히 다루지 않으나, 증산계의 경우 엄청난 수의 도교계 신령들이 등장한다. 관우, 28수, 28장, 칠성신 등이 모두 도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신격들이다.[50] 참조문헌:<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정재서 저.[51] 주문을 읽어 주술로 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무당 겸 의사(위치닥터)를 말한다.[52] 비슷한 예로 한국의 밀교계가 있다. 한국의 밀교는 비록 순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라 후기/고려시대 동안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나 이후 조선 건국으로 대차게 타격을 입는다. 이후 조선시대에 불교 의례집에 밀교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기는 하나 민간신앙/도교적 요소가 혼합된 현세구복적 잡밀 수준이다.[53] 전국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기독교는 에도막부의 탄압도 겹쳐서 일본에선 널리 퍼지진 못했다.[54] 박사란 활줄을 두드리며 주문을 읽어 재액을 물리치는 일본 주술사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무당도 지역에 따라 박사(博士)라 하나 호칭의 유래와 관련해서 일본의 박사와 관련은 없다. 원래 박사는 옛날부터 전문 지식인에게 주는 벼슬이름이었으니, 나라에 상관없이 존칭으로 붙였다고 보는 게 옳다.[55] 중화권 제외[56] 財神.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신이다.[57] 토지의 신.[58] 메뚜기 떼의 신이다. 중국은 메뚜기 재해가 워낙 대륙 스케일이다 보니 이런 신도 있다.[59] 불교의 비사문천을 도교식으로 받아들였다.[60] 관세음보살을 도교에서 부르는 이름. 낭랑은 여신을 말한다.[61] 사후에 '신선이 되었다'라고 추앙받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