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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최현민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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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10-03-23 1

김지하 시인의 <화엄개벽의 모심>을 읽고....

-2009년 5월 크리스찬아카데미 김지하 발표문에 대한 논평문--

최현민 (서강대)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넘나들며 섭렵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접하면서 그의 사유와 고뇌의 흔적을 본다. 시공의 역사 안으로 녹아들어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해법을 제시함을 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으로서 현실을 깊이 통찰치 못한 채 살아온 나 자신을 만난다. 김지하 시인의 사유를 다 따라가지 못한 체, 그저 공감된 부분을 중심으로 나의 성찰과 함께 토론해 볼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1. 일상 안에서의 ‘모심’을 향한 회심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문화혁명에 대해 말한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화두, 이 복잡한 현실문제를 풀어갈 해법은 ‘모심’ 한마디에 있다는 것이다. ‘화엄개벽의 모심’에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묘수(妙修)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 사회문제의 해법으로 김지하 시인이 제시한 ‘화엄개벽의 모심’에 대해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김지하 시인은 ‘모심(侍)’을 동학본주문의 첫 글자, 곧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이진각지불이자야(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로 풀어 말한다. 그는 여기서 내유외유(內有外有)를 떼이야르 드 샤르댕이 말한 ‘우주진화 내면에 의식의 증대와 외면의 복잡화’로, 각지불이(各知不移)를 ‘현생인류가 화엄세계(不移)을 각자 제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함’으로 풀이한다.
이를 떼이야르 사상과 비교해보면 떼이야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출현이 지닌 가장 큰 의미를 ‘반성의 능력’으로 본다. 우주는 반성이전의 단계를 몇 십 억 번 시도한 후 인간 곧 반성력을 출현케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됨의 정체성이 반성의 능력 곧 ‘회개’할 줄 아는 능력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 곧 자각해야 하는가?
김지하 시인의 사유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각지불이(各知不移)’ 곧 각자 제 나름으로 화엄세계를 깨달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겠다. 그 세계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 속에서 회개와 하느님 나라가 지닌 불가분의 관계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한다. 그 징표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바로 그 섬김의 세계, 모심(侍)의 세계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심(侍)이나 섬김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섬김(모심)을 현실 문제를 풀어갈 해법으로 제시하려면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섬김(모심)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삼보일배, 촛불, 오체투지의 대외적 모심이 현실 안에서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 마음자리,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섬김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가정과 직장,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와 사회 안에서의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엄개벽의 모심’이란 허울 좋은 슬로건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모심이 어려운 까닭은?



2.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 회복

김지하 시인은 개벽을 실천할 모심의 참 주체로서 ‘여성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여성성을 1만 9천 년 전 파미르고원 마고성의 창조신인 여신, 그 잉태의 힘에서 찾고 있다. 마고라는 여신의 표상이야말로 여성성으로 드러난 비로자나의 화엄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 여신 모성의 전통을 상실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기 전 고대역사 안에 엄존해온 모권제의 사상적 근원에 있는 여성성인 모성을 김지하 시인은 모심의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을 모심과 살림의 참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남성을 여성에 의존하도록 길들이는 것도 아니며, 남성과 여성의 자리를 바꿈으로서 이루어지는 개벽세상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남성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여성은 자신 안의 남성성을 재발견하여 균형있는 참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남녀로 이분화된 한 쪽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상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성적 원리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性을 넘어 존재 안에 드리운 바로 그 여성성을 회복해감이 중요하리라 본다. 섬김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은 온전한 인간성 회복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공동체에서 우리 모두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장애되는 요인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3. 영성적 차원과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필자는 ‘모심’을 구체화함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모심의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말함에 있어 장애요인이 무엇인지 숙고해볼 것을 제안했다. 두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영성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다.

1) 영성적 차원

영성적 차원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왜 내 삶의 자리에서 ‘모심’이 어려운지 그리고 모심의 주체로서 여성성을 실현해감에서 무엇이 장애가 되는지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모심’이 어려운 것은 내 자존심을 버리기 싫기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자존심의 실체는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나인지, 나의 정체성인지, 아니면 나의 허상인 거짓자아에 불과한 것인지를....
내가 참된 주체로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모심’의 삶에 있다. 모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이 말한 ‘모심’은 회개를 첫 가르침으로 삼은 예수의 언표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회개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함은 예수의 가르침의 정점인 ‘섬김(모심)’을 사는데 있기 때문이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道元, 1200-1253)은 “불도(佛道)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正法眼藏』「現成公案」)라고 한다. 도겐의 표현대로 자기를 잊는 것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그 길이 곧 모심의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

앞서 말한 영성적 차원이 개인적인 면에서 성찰한 것이라면, 탈중심적 소공동체 차원이란 그 영성이 현실 안에 구체화되기 위해 영성의 지속적인 연대성을 유지해감에 필요하다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김지하 시인은 ‘촛불’을 지도자도 조직도 강제도 없이 그때 그때의 합의에 의해 도달한 ‘집단지성’이라고 본다.1)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들 마음마다에 드리운 ‘천지공심의 씨앗들’이라고 풀이한다. 김지하 시인이 말했듯이 촛불이 ‘영을 동반한 생명사건’이라면 그 생명력은 지금도 계속 피어오르고 있는가? 또한 그 촛불의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무리 생태문제 등 일련의 현실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도, 영성이 부재한 정부 정책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거대한 정책과 맞서기 위해선 우리의 영성을 공유하고 나누며 표출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가정, 교회, 사찰, 직장, 서클, 지역)가 그런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를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았으면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례전(예배, 미사, 예불 등)에 우리의 변형된 의식을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우리의 가정이 영성적 통합의 장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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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2일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이하여 촛불집회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낸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촛불집회는 시민의 재발견이었다,” “거대한 정치 교육장이었다,” “10대 촛불소녀들을 통해 몸에 체화된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 "자신의 계층과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고 촛불집회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아무리 주장이 옳아도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민주주의의 기능은 국가 기본 법질서의 메커니즘을 보완할 수 있을 뿐 대체할 수는 없다. 스스로의 한계와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법천지의 약육강식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피력하기 위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부정의 소리들도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평가 이외에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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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창]  / 최현민 수녀
발행일 : 2015-01-04 [제2926호, 23면]
 

최근 들어 행복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삶의 여유가 더 생기면서 행복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데, 국가별로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면도 있지만, 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7위라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이 드러났다.(2013년기준)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지수는 그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우리의 욕구 변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혈연중심의 친족주의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주의와 배상주의가 상호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이나 배상주의는 좀 새로운 개념인 듯 싶다. 이는 현대와 같이 과열경쟁 사회에서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난에 대해 대가를 되돌려 받기를 갈망하는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주의나 현세기복주의,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지복의식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명절인사에서의 ‘복’이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염원하는 복은 재산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운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행복의 가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과열된 경쟁사회, 악성 서열주의 문화 속에서는 점점 더 채워지기 어렵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행복감이 낮다고 드러난 게 아닐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지니는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행복관이 기복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우리는 삶에 드리운 고통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고통을 ‘신비’라 표현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리라.사실 불행이나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드리운 어려움과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그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지 싶다.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음을….이렇듯 행복과 불행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기에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 새해를 열고 싶다.

코헬렛이 말하듯 우리에게 다가올 그 모든 다양한 ‘때’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어진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그 순간들에 충실한,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며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한다.
최현민 수녀(씨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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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산다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구름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어드는 눈부신 햇살. 감나무에 달린 익어가는 감들, 오늘 아침에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우리는 가끔 자연에서 태초의 그 무엇을 힐끗 보고 느낄 때가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노래한 시다.
보통 서양 철학에서는 기분이나 감정은 세계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고들 말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늘 어떤 기분 속에 살아가지 기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위 시에서처럼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감정 때문이리라.
성녀 힐데가르트는 자연은 우리에게 녹색생명력을 준다고 했는데 자연속에 머물다보면 이 말이 참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자연을 통해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을 받곤 한다.
가끔씩 감성이 예민해지면 우리 주위에 자명하게 존재해온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런 경이의 기분이 들 때  종전에 보지 못했던 광채를 느끼기도 하는데 아마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서 존재의 신비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존재의 신비를 접하는 것은 내가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게 되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실상이 지닌 경이로움에 눈뜨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이로움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우울이나 허무감에서, 고독감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는 이미 허무나 고독, 무력감을 극복할 잠재적 능력이 깃들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잠들어 있을뿐. 그 잠들어 있는 존재의 빛이 드러나도록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빛이 나와 너를 비추게 된다.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를 사는 자를 ‘현존재’라 했다. 불가에서는 이를 깨달은 자 곧 각자(覺者)라고 하고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눈뜨고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서 자유로와져 여기에 마음을 다해 살 때 우리는 존재의 경이로움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자는 사도바울이 말한 “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