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이 책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나치의 폭정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했던 4명의 유대인 여성들의 삶과 생각에 관한 저술이다. 이 글을 썼던 저자 역시 미국에서 활동한 히브리 문학 교수로서 유대인 여성이다. 50세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었던 에디트 슈타인(53세), 런던에서 곡기를 끊고 아사했던 여성 철학자 시몬 베이유(34세), 네덜란드의 한 수용소에서 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던 안네 프랑크(15세), 그리고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은 에티 힐레슘(29세)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히틀러의 폭정에 맞서 자서전 및 일기의 방식으로 묵시록을 남긴데 있다. 이들 모두는 유럽에 동화된 유대인으로서 나치 출현 이전까지는 ‘유대인’이란 정체성(자의식) 없이 살았던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남긴 글들- 슈타인의 <유대인 가족의 삶>, 베유의 <영적 자서전>, 프랑크의 <일기>, 힐레슘의 <일기>- 모두는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보편적 휴매니즘에 근거했다. 정도 차가 있겠으나 기독교에 대한 친화성도 이들 모두에게 중요했다. 기독교가 유럽 계몽주의의 지평을 확대, 재탄생 시킨 종교라는 확신도 이들 몫이었다.

슈타인은 현상학자 훗설의 제자로서 가톨릭 수녀로 살았고, 베유는 기독교 신비주의자가 되었으며, 힐레슘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이들은 자신도 알지-의식하지- 못했던 유대인 정체성과 심하게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저자는 나치의 비인간화에 대한 이들 저항이 기독교 휴매니즘 차원에서인지, 유대인 희생자로서인지, 아니면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의 관점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묻고 답하고자 했다.

주지하듯 이들은 히틀러 폭정에서 이들은 인종적/종교적 정체성 위기를 새삼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려는 영적 투쟁, 하느님이 사라진 현실에서 믿음을 위한 투쟁을 통해 인류에 새길을 냈던 존재들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여성으로서의 이들 자의식이 이런 저항에 어찌 작용했는가도 여실히 살피고자 했다. 물론 이들에 공통점만 있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슈타인과 베유의 여정을 대비시켰고 힐레슘의 하느님 사유의 독특함을 부각했다. 

1.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세상에 대한 의무를 걸머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네 여성 간의 공통분모가 있으나 저마다 다른 답을 알려준다. 파괴된 세상 속에서 도덕적, 영적 회복에 대한 기대와 책임을 버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분석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와의 종교적, 민족적 연결고리를 끊고 살았던 유대인이었다. 서유럽 정신세계에 온전히 동화된 까닭이다.

당시 유럽은 유대인 개인에게는 모든 것을 허락했으나 민족으로서 유대인에게는 일체를 불허했다. 그 시절 유대인들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살던 배경이다. 유럽 정신에 근거하여 이들 네 여성은 역사가 만든 불안과 좌절을 자기 내면의 성장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테러에 굴복 내지 도피하지 않고 계몽된 인간으로 살아보겠다는, 나아가 시대를 구원하겠다는 의무감을 드러냈다. 집단의 폭력에 대해 개인의 도덕적 행위로 저항하는 차원에서다.

하지만 이런 서구 정신은 나치의 출현에 속수무책이었고 무력했다. 성서의 묵시가 그렇듯이 저항할 수조차 없는 파괴의 논리에 맞서는 비논리적 저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서 비롯한 도덕적 의식 대신 저자는 타인의 초월성에 대한 발견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후술하겠으나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의 시각에서 이들의 저항 의식의 본질을 분석, 평가한 것이다. “주체성의 매듭은 나를 향한 타자의 움직임에 개의치 않고 내가 타자에게로 가는데 있다.” 여기서 저자는 특히 힐레슘의 경우를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을 실현시킨 범례로 여겼던바 이 역시 후술하겠다.

2.

사실 레비나스 개념으로 이들 정황을 서술하는 일이 적합한지 살짝 의문이다. 하지만 일단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겠다. 그가 인용하는 레비나스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동료애는 타인과 타인의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이는 자기 자신의 초월이다”. 저자는 슈타인과 프랑크에게서 상호주체적 경험에 근거한 공감 능력을 봤고 베유에게선 타인의 고통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부과하는 자기 포기를 포착했다. 고통하는 타자에 대한 이타적 연민으로 상황에 저항코자 한 것이다. 힐레슘의 경우도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무제약적 책임이 핵심이다. 실제로 수용소 탈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타자의 고통이 눈에 밟혀 그 기회를 포기할 정도였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비울 때 저항이 가능할 것이란 믿음이 그녀들의 공통 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베유의 경우 나치 박해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누차 적시했다. ‘희생양 제안’에 근거하여 묵시적인 현실 고통과 하느님의 화해를 개인 차원의 희생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인간 고통 물음을 보편적 하느님 물음과 연계시킨 것에 의미를 두었다. 여하튼 이 책의 주인공 네 사람에게 유대인 정체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말했듯이 족보상 유대인이었지만 서구에 동화된 존재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인 종족학살을 목도 하면서도 기독교를 매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끄 마르탱의 말대로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적인 것을 더불어 생각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상황에서 유대인의 하느님도 기독교의 하느님도 무력했다. 베유가 고민했듯이 하느님 이해가 도전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들 네 사람의 유대인 정체성 인식 여부다. 수녀였던 슈타인의 경우 유대인과 기독인의 정체성을 함께 지녔고 베유는 프랑스 시민이자 기독교인의 정체성만을 유지했으며 힐레슘과 프랑크의 경우 유대인 희생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해나가는 점진적 방식으로 유대적 정체성을 수용했다고 저자는 생각했다. 여기서 힐레슘이 유대, 기독교적 신관을 넘어 자연으로까지 의미를 확장, 보편화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베유의 연장선상에서 힐레슘이 각별한 이유이다.

3.

그럼에도 이 책에서 끊임없이 대조되는 인물은 슈타인과 베유이다. 전자는 가톨릭 수녀로의 개종 이후 유대인 정체성을 수용했고 후자는 유대교와의 단절을 선포하고 프랑스 시민으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까닭이다. 슈타인이 독일과 유대인 모두를 위한 구원에 관심했던 반면, 베유는 유대인이 세계사 속에 범한 죄악사를 잊지 않았다. 그들 존재가 기독교 영성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강변했다. “나의 전통은 그리스도교 전통, 프랑스 전통, 그리스 전통뿐이지 히브리 전통은 내게 낯설다.” 슈타인이 기독교인이지만 유대인의 운명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인식, 수용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베이유가 기독교 세례를 받지 않은 사실을 중히 봐야 한다. 세례가 반유대인의 징표로서 생존의 유효한 도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교회보호를 스스로 거부했다. 교회와 유대교의 역사적, 계시적 연결성을 부정한 결과였다. 그녀는 기독교가 계시와 무관한 여타 종교들을 무시하는 일에도 저항했다. 이런 생각을 주류 기독교인들은 거부하겠으나 오히려 그녀에게 이것은 자유를 좀먹는 ‘철학적 난관’이라 여겼다. 유대교의 선형적 역사관이 전체주의, 자본주의, 식민제국주의, 종족주의의 근본 원인이란 점도 베이유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듯 유대의 종교, 역사적 유산에 대한 그녀의 비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 되는 일-세례-에 방해가 되었다. 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해체 시키는 방식으로 하느님과의 재결합(재창조)을 이루고자 했다. 자기소멸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자율성을 다시 하느님에게 되돌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이란 말을 자기 존재 전체의 상실과 소멸이란 말과 같은 뜻이라 봤다. 가장 피폐한 자가 될 때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 까닭이다.

여기서 저자는 베유가 홀로코스트 유대인 고난에 대해 침묵한 결정적 이유를 찾았다. 감각과 욕망을 소멸시키는 인간 고통에 대한 미화 내지 과한 의미 부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육체 부정이 유대인 정체성 부정으로 이어졌고 마지막 부분에서 재론할 주제로서 여성성의 부정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물론 저자는 이를 긍정적으로 살피기도 했다. 폭군적 지배에 굴복하기보다 세상에 대한 반역자 혹은 신비주의자로서 스스로 세상과의 단절을 통한 저항을 선택한 존재로서 베이유를 의미화했다. 그렇지만 이런 존재 방식은 자신의 과거 자아(유대인)를 거듭 인정하면서도 자기실현을 지속했던 슈타인과 대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그렇다면 프랑크와 힐레슘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체성과 하느님을 찾는 일에 관해서 이들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들 두 여인은 ‘재앙의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수용했다. 민족과 자신의 운명을 같게 본 것이다. 이들 역시 동화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정체성을 간과치 않았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 민족을 버린 적이 없었다. 시대를 거쳐 항상 유대인이었고 그 모든 시대를 거쳐 유대인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프랑크).

힐레슘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유대인 박해사를 수용하며 유대교와의 연대를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그들은 공히 ‘티쿤 올람’(Tikkun Olam)이란 말로 자신들 역할과 사명을 선포했다. 유대인 대량 학살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세상을 고쳐 보겠다는, 무의미함을 떨쳐 내겠다는 열망이 바로 ‘티쿤 올람’의 뜻이다.

어렸지만 프랑크는 모든 유대인이 박해받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안전에 죄책감을 느꼈다. 자기 죽음이 불가피했으나 절망을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치욕스런 피해자 입장을 스스로 거부할 용기를 <일기>에 적어 놓았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내면의 면역체계를 갖출 목적에서였다. 글을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상상, 창조할 수 있는 인식패턴을 갖추고자 함이었다. 묵시적 종말의 무력감을 내면의 힘으로 극복하길 바라서였다. 이를 위해 프랑크는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어찌 이것만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지탱할 수는 있어도 희생자들을 도울 수 없는 현실과 마주했다. 종래의 하느님 이해와의 씨름이 여기서 비롯했다. 섭리하는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현 상황을 해결할 신은 부재했다. 그 대신 프랑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유지, 존속시키는 하느님을 소환했다. 일종의 계몽주의적 보편적인 신론을 요청했다고 볼 수 있겠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믿음의 근거는 자연이었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는 부재하나 자연 속에서는 언제든 현존하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속 욥기가 적시하듯 말이다. 우리 각자를 치유하고 긍정하는 하느님을 프랑크는 자연 속에서 만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다.

프랑크가 상상을 통해 자연 속에서 구원의 힘을 찾았다면 힐레슘의 경우 내면으로 침잠했다. 묵시적 종말 상황에서 그녀는 타자를 도울 수 있는 길을 간구한 것이다. 여기서 힐레슘은 하느님 이해의 대 전환을 이뤘다. 자신을 구할 수 없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세상에 남겨진 그 흔적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돕고 보호하겠다고 발상을 전환시킨 것이다.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으나 우리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도울 것이며 당신 거처를 방어하겠습니다.” 인간을 강하게 이끌어 가는 하느님 대신 고통받는 이들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한 하느님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제 그는 신으로 남기 위해서 고난받는 개인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되었다. 지구적 재앙을 막아주는 하느님은 결단코 없다. 오히려 하느님 생존 문제는 우리 인간 개개인의 손에 달려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난 개개인의 자기 초월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발견이 곧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럴수록 고난으로부터 이격시키는 능력이 필요한바, 이를 위해 이들 4명의 여성은 모두 자전적 글쓰기에 몰두했다.

5.

그렇다면 자전적 글쓰기가 저항을 어찌 가능케 했을까? 글쓰기가 어떻게 신을 대신할 용기를 인간에게 부여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저마다 상이했겠으나 언어 및 말의 힘을 믿었을 것으로 본다. 믿을 ‘신’자가 인간의 언어를 뜻하는 한자어인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그 의미뿐 아니라 타인에게 도달하는 행위도 포함한다. 포함하는 사람은 말한 것의 의미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말 자체와 함께 침묵의 존재로 남는다. 언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비폭력적 사회유대이다.”(에디스 위스코그로드).

저자에 따르면 자전적 글쓰기는 개인과 집단 주체성 간의 상호 의존성 회복을 목적한다. 작가 자신이 탈주체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말대로 ‘인간은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인간 세상에 밀어 넣으며 살기’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비인간화 폭정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의 글쓰기는 현대판 묵시록이라 말해도 좋다. 물론 프랑크나 힐레슘처럼 글쓰기가 자기 성장을 위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에 더해 슈타인의 경우에서 보듯 적대적인 타락한 세상에 흔적이(을) 될(남길)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들 여성에게 있어서 글쓰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 더 부언해 볼 필요가 있겠다.

6.

이들 글쓰기의 공통점과 차이는 무엇일까? 슈타인의 자서전 <유대인 가족의 삶>은 가톨릭 수녀로서의 정체설 박탈이란 곤경에서 비롯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불식시킬 목적에서 썼다. 카톨릭에로의 개종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당시 상황에서 개종이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했던 자신의 의도를 난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그녀는 기독교인 됨의 정체성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만큼 슈타인의 글쓰기 목적은 분명했던 것이다. 반면 베유는 유대교와의 절연은 물론 기독교를 비역사적으로, 즉 신비적으로 이해했고 영적 자아를 추구하는 글을 썼다. 유대교는 물론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반목한 결과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 공포에 맞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세상과 소통했던 슈타인과 베유와 달리 프랑크와 힐레슘의 글에는 내면적 목소리가 담겼다. 당시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언어가 없었음에도 그런 끔찍함을 표현해내려는 내적 욕망을 드러냈다. 세계와의 환상적 대화, 홀로코스트 현실에서 하느님을 찾는 탐색을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묵시 종말론적 파괴의 모방적 재현이라 일컬었다. 즉 이들의 글쓰기는 희생자를 침묵-죽음 의식-으로 몰아넣는 시련과 맞서는 용기이자 위로였다. 언어의 소통력과 해방적 기능으로 인함이다.

힐레슘은 ‘한 줄의 시가 떠오르기’를 언제든 소망했다. 비현실적 현실을 기록할 목적에서다. 시인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라 생각했다. 힐레슘에게 언어는 종종 망치에 비유되었다. 벼리고 두들겨서 이야기를 만들고 생명이 끓어오르는 증언을 탄생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그들 세계관과 이념에 따라 저마다 달랐다. 이에 더해 저자는 이들의 젠더의식이 저항의 양식을 달리 만들었다는 사실도 찾아냈다.

7.

짐작하듯 이들 피해자 여성들의 젠더의식은 제각각이었다. 여성성을 도덕적 개혁의 동력으로 여겼던 슈타인, 여성성에 대한 부정에 무게를 실은 베유, 여성의 독립성을 강조한 프랑크 그리고 선험적 한계성을 인정하면서도 넘고자 했던 힐레슘에게서 각자의 독특성을 엿볼 수 있다. 나중 두 여성의 경우, 유대인이 먼저였고 여성성은 부차적으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젠더의 정체성 문제가 홀로코스트 유대인 참사에 대한 다른 반응을 낳았다. 거듭 말하지만 슈타인은 자신을 유대인 여성으로 확신했고 베유는 유대인 부정과 연계시켜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했으며 프랑크와 힐레슘은 자신의 여성성을 지속적으로 극복하며 개방적 존재가 되고자 했다.

여기서 슈타인과 베유의 경우를 다시금 대비시킬 수 있다. 앞사람은 유대인 여성의 자기 내러티브를 강조했던 반면 뒷사람은 사회주의자로서 유대인과 여성 정체성 모두를 거부하며 노동자 계급을 위해 헌신했다. 전자는 남녀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상호 보완적 차원에서의 평등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남녀의 본질적 차이를 말하며 젠더 불평등, 곧 여성성에 내재한 선천적 조건의 열등함을 적시했다. 슈타인의 경우 여성에 대한 현실적 불평등을 에덴 질서의 왜곡이라 보지만 베이유는 이것을 성별 간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저자에겐 유대인 고난에 대한 베유의 침묵과 여성의 사회적 억압과 착취에 대한 침묵이 다르지 않게 보였다. 베유의 경우 그리스도 본질-고난의 신비주의-에 집중한 나머지 여성성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성의 포기를 통해서 남성 영역으로 인정되는 성스러움- 신비적 일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베유가 온전히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베유에게서 여성혐오와 유대인 혐오가 상호 교차, 연결된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남성성’을 여성의 자기파괴(부정)와 일치시키는 논리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여성 속의 내재적 가치들이 세상을 구원하고 속량한다는 슈타인과의 대별을 목적하여 과장된 표현인 듯하여 추후 다시 살필 주제로 남겨둔다. 베유의 반역사적인 신비주의적 기독교의 이해도 보편적 차원에서 부각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마지막 장에 이르러 베유 사유에 대한 긍정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8.

저자는 유대인 4명의 여성을 예외 없이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홀로코스트 상황에서  정서적 성숙을 이룬 존재로 서술했다. 여기서 인용하는 책이 프로이드의 《문명 속의 불안》이었다. 문화적 발전이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책이다. 공동체를 교란, 파괴하는 인간 공격성과 자기파괴 본능을 적절하게 억제하는 기능의 유무가 문화발전을 정의하는 척도라고 했다. 이 점에서 베유는 지나칠 만큼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진정한 사람은 죽은 자가 되는 것, 소유의 욕망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며, 그래야 거리를 두고 사물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일체 욕망을 부정하는 베유를 보며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한 다석이 생각났다.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인간에게 요청한 까닭이다. 베유와 다석 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여지를 이후 생각, 서술할 것을 작정한다. 이에 견줄 때 슈타인의 경우 자기부정 기제보다는 상호주관성이 강조되었다. 힐레슘과 프랑크 역시 슈타인의 선상에서 여성이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들 모두는 인류의 미래가 여성성과 연루될 것이란 사실을 확신한 것이다. 여성들의 방식으로 언표 불가능한 현실과 맞서 저항의 힘을 드러낸 까닭이다. 단지 베유의 경우 여전히 토론할 여지를 남겼다. 여성을 섹슈얼리티에 의존적 존재로 묘사했으니 말이다.

이 책 끝부분에서 저자는 인류가 묵시 종말적 해체과정에 직면했을 때 어떤 힘이 인간성을 지켜줄 것인지를 재차 질문한다. 이것은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존재하지 말아야 하나 존재하는 반(Anti)세계적 상황에서 들려지는 소리란 과연 어떤 것인가? 마땅히 있어야 할 믿음에 헌신하는 행위가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이런 행위를 광기, 유대인의 언어로 ‘미친 미드라쉬’(mad Midrash)라고 불렀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자신만의 글쓰기를 통해 이런 광기를 드러냈고 그렇게 살았던 존재였다. 이 책이 제시하는 결론 역시 이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의 광기는 세계와의 대화를 지속시키는 힘이었고, 레비나스적 방식으로 타인에 초점을 둔 저항- 타자의 고난을 돕는 일이 존재에의 용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을 실현했으며 ‘돌봄’ 혹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정의하는 ‘연결 짓는’ 여성의 특별한 능력이 홀로코스트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나누는 행위는 평상시의 (남성적)정의보다 수백, 수천 배의 중요성을 지니는 까닭이다. 여성들은 역사적 지평에서 하느님이 실종되었으나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베이유의 경우 그가 자기 해체를 통해 신에 도달하려 했던 것도 이런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최종 결론은 ‘연약한 하느님’을 말한 힐레슘의 견해에서 빌어왔다. 그녀는 지금껏 우리가 믿고 알던 ‘전능한 신’의 실종을 선포했다. 인류에 대한 책임은 이제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몫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멈춰 세울 책임을 인간의 책무라 하였다. 하느님이 우리를 책임지지 못하기에 우리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것이 홀로코스트 정황에서 자신 속의 신적 불꽃인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저항의 유산이다.

저자는 이런 신관을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개념으로 조망했으나 정작 힐레슘의 경우 삼위일체 교리의 틀을 훌쩍 넘어섰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의 실종 상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심지어 ‘It(자연)’로 까지- 자유롭게 언급하는 그녀의 신관은 기독교 서구의 어떤 언어로도 수용키 어렵다. 저자는 홀로코스트 이후의 서구를 유대교의 ‘미드라쉬’와 레비나스의 ‘타자로서의 초월 철학’ 나아가 삼위일체 틀을 지닌 ‘십자가 신학’으로 변증코자 하나 충분치 않다. 동아시아의 유산인 공과, 무, 태극 등의 사유가 더 적실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점에서 필자는 기독교 서구는 공(空)을 몰랐다고 비판해 왔다.

짧은 마무리

20세기 신학은 홀로코스트와 JPIC 이후 달라졌고 더 크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전자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고 후자는 분배 정의와 핵무기 그리고 생태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독교 구원(정신)을 말할 수 없다고 봤던 탓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근 1세기가 지났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명제하에 시작된 JPIC 논의도 근 40년이 지났음에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사실적 종말의 위기로 치닫고 있고 이 와중에 극우 기독교가 출현하여 세상을 더한층 혼돈을 부추겨 파괴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의미가 크다. 하느님을 돕는 인간의 출현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연약한 하느님을 도와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고 세상과 지속적인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 속에서 존재의 용기를 얻는 저항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 없다>는 이 점에서 득보다는 해가 큰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취업을 통한 가정의 안정을 지키고자 가상 경쟁자를 죽이는 과정을 블랙 코메디로 꾸민 이 영화가 한국을 대표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성을 지키고 언어로 자신을 타자에게 밀어 넣었던 여성들의 삶을 알게 된 것이 고맙지 아니한가?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꾀하는 여성성의 능력에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서구 신학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싶다. 한 세기가 지났으나 여전히 답보상태인 까닭이다. 자신을 노이무공한 존재로 드러내며 인간을 부르고 있는 무위이화의 신, 일하는 한울님의 발견을 필자가 강조하는 이유이다. 인간 세로 전락한 홀로세의 치유와 구원이 여기서 비롯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한 김준우 박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지인들에게 정독을 권하고 싶다. 필자는 이 책을 동양적 사유로의 전환을 촉발하는 매개라 생각하며 추석 연휴 동안 열심히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