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8

종교 인성 교육 - 오강남이 말하는 종교학의 역할

종교 인성 교육 - 오강남이 말하는 종교학의 역할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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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추계 한국종교학대회

종교, 인성, 교육

기조연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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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성, 교육

- 종교학은 오늘 한국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사

(생략)


인성이 사라진 한국 사회

1) 한국 사회의 건강상태

1990년 대 중반 “한국병”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발견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태를 지적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진단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어떻게 하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오늘 이런 한국병이 많이 호전되었는가 물어보면 얼른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저는 한국이 오히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고 봅니다. 그 근본 원인 중 하나가 미국에서 들어온 천민자본주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이 지금 경제! 경제! 하면서 ‘경제’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참된 의미의 경제가 아니라 천박한 미국식 경영 기법에 의한 축재 기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저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1831년 쓴 편지라고 합니다. “미국 민의 국민성을 깊이 파들어가면,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오직 단 하나의 질문, 즉 그것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올 것인가에 대한 답에서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미국을 지탱해 온 것은 맹목적으로 개인의 부를 축적하려는 개인주의적 집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금주의 사상이 현재 ‘경제’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먹구름처럼 덮고 있는 아닌가 여겨집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모든 것을 금전적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의 수입이 얼마인가가 중요한 기준이 되고, 결혼 상대를 구할 때도 상대방의 경제력을 중요한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이나 형제자매 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고, 극단의 예이기는 하지만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배금주의가 가져온 비극입니다.

이런 비뚤어진 경제제일주의 때문에 한국은 지금 OECD 회원 국가 중 자살률 1등으로 회원국 평균 자살율의 2.6배, 터키 자살율의 17배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회원국에서는 자살률이 줄어드는데 반해 한국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 문제로 인한 노인들의 자살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행복지수 최하위, 불만지수 상위, 부패지수 1위라는 통계까지 나와 있는 형편입니다.

삶은 본래 괴로움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두고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마 11:28)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이 지닌 이런 실존적 한계상황에 덧붙여 한국 사회는 더욱 절박한 현실적 아픔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2) 소인배 공화국에서의 비인간화

저는 이제 이 문제를 이번 종교학대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의 이런 부조리한 현상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이 ”인성”의 실종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사람됨(humanity)”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깐 유교(儒敎) 용어를 빌리면 한국이 “소인배(小人輩)” 공화국이 되었고, “비인간화”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자(孔子)님은 인간으로서 해야 마땅한 올바른 일, 곧 의(義)를 위해 사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고, 자기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 곧 이(利)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세계가 거의 의(義)보다는 이(利)를 좇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부하다는 신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경제지수(GNP)에만 신경을 쓸 뿐 이른바 "행복지수(GNH)" 같은 것은 거의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계적 추세이기는 하지만, 지금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렇게 경제적 이(利)를 추구하려는 의욕이 더욱 극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은 사랑하고 물질은 이용하라는 기본 원칙과 반대로 물질은 사랑하고 사람은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제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경제를 위해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라는 신(神)을 섬기며 그 신의 표정 하나하나에 따라 희비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대의(大義)를 위해 사는 군자나 대인의 나라이기 보다 모두 경제적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올인하는 "소인배 공화국"인 셈입니다.

맹자(孟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자님이 양나라 혜왕을 찾아갔더니 왕은 “선생께서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이(利)를 주시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이에 맹자님은 왕을 향해 왕이 이(利)를 말하면, 지금 말로 해서, 장관·공무원·국민들이 모두 이(利)를 좇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하면서, 왕은 어찌하여 인의(仁義)를 말씀하지 않고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라 했습니다.

맹자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은 모두 ‘네 가지 실마리(四端)’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맹자님은 우리에게서 이 네 가지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결하게 되면 우리는 “非人也(인간이 아니다)!”고 단언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지금 남의 아픔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저를 포함하여 일반인들은 물론 정치인, 종교인, 경제인, 사회지도자들 중 진정으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함”(compassion)의 마음을 지닌 이들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마음은 또 어떻습니까? 국회 청문회를 보면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도 별로 없고,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그렇게 반칙이나 편법으로 사는 것을 ‘능력’이라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보면, 거의 모두 “양보는 곧 죽음이다.”하는 식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끼어들고, 이런 신념을 아침저녁 출·퇴근하면서 실천하고 확인합니다. 이런 운전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양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놓고 우리 스스로를 냉철히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금 모두 비인간화(非人間化)된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 아닌 인간, 좀비들인 셈입니다.

종교학, 그리고 종교학이 할 수 있는 일

오늘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라면 모두 힘을 합해 이렇게 배금주의가 팽배한 사회를 참으로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휴머니즘의 사회로 변화시키는 일, 소인배공화국을 군자공화국 내지 대인공화국으로 바꾸는 작업, 비인간화된 우리 스스로를 다시 인간이 되게 하는 인간화(人間化) 과업에 힘을 합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종교학이, 혹은 종교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종교학이 무엇인가 간단하게나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종교학이란

아시는 바와 같이 종교학을 독일어로 “Religionswissenschaft”라고 합니다. 종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라는 뜻입니다. 종교학을 시카고 대학에서는 “History of Religions”라고 합니다. 종교를 이해하는데 각 종교 전통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영국에서는 주로 “Comparative Religions”라고 하는데, 여러 종교 전통들을 비교함으로 종교의 기본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자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강조점을 종합적으로 엮으면 종교학이 대략 무엇을 어떻게 하는 학문인가 어렴풋하게라도 그 윤곽이 그려지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종교학은 첫째, 신앙 고백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현상을 자기 개인적 신앙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왜 번개가 치는가 하는 질문에 하늘이 진노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은 종교학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고백적 설명이 아니라 기상현상은 기상학적 원리에 따라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종교현상을 연구할 때도 엄격한 과학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느 종교를 연구할 때 그 역사적 문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연구할 때 현재에 나타난 현상 뿐 아니라 그 종교의 역사적 맥락을 캐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종교학은 적어도 두세 가지 종류 이상의 종교 전통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서로 비교하면서 종교현상의 더 깊은 차원, 더욱 보편적 구조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오늘 특별히 마지막 세 번째 특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종교학의 창시자라고 인정받고 있는 맥스 뮐러(Max Müller)는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중략)


2) 종교학의 공헌

위에서 언급된 종교학의 특성을 생각하면서 종교학이 한국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종교학은 여러 종교를 체계적으로, 역사적으로 비교 연구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를 깊이 연구하다가 얻을 수 있는 결론 중 하나가 바로 종교는 “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변화(transformation)”입니다. 전통적인 용어로 하면 해탈, 깨침, 새사람이 되는 것, 눈을 뜨는 것,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 완전한 상태로 이행하는 것, 해방, 자유, 놓임입니다. 종교란 우리가 이런 상태로 나가도록 하는 수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종교학자는 직접 종교 지도자가 되어 종교인들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종교학자는 각 종교 전통 속에서 이렇게 “변화를 위한 수단”을 발견했으면 이를 종교지도자들이나 일반 종교인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각자 자기들의 종교 안에서 이런 변화를 경험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를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를 듭니다. 종교학자는 사람들을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로 직접 인도해 가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듣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연구해서 그들이 어떤 장비를 가지고 어떤 루트를 통해서 어떻게 올라갔는가 하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잠옷 바람으로 슬리퍼를 신고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듭니다. 종교학자는 환자들을 직접 치료해주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훌륭한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써주어 효험이 많았다고 인정된 처방전을 많이 보고 나름대로 분석해왔습니다.그리고 어느 처방전이 치료에 더욱 효과가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식을 습득하였으면 병을 고치겠다고 하는 환자가 돌팔이 의사가 처방해주는 잘못된 약을 복용하겠다면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잘못된 처방을 하는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검증된 약들이 포함된 처방전을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환자보다 돈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위험한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런 의사들의 위험성을 환자들에게 알려 줄 수도 있습니다.

종교학자가 오랜 세월 여러 종교를 연구하고 종교가 “변화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변화와 관계없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 심지어 변화를 방해하거나 더욱 악화시키는 일을 자행하는 종교가 있다면,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사형 당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가 한 말입니다. 미친 운전기사가 난폭 운전을 하면서 길 가는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으면 신학자는 그 죽은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에 만족해야만 하는가. 그 자동차에 직접 뛰어들어 운전사를 밀쳐내야 하는 것 아닌가.

종교학자도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논의해야 할 문제이지만 적어도 종교학자가 개인적으로 종교 현상을 이해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어야 하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가르주나(龍樹)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대승기신론󰡕이 중국 위작인가 아닌가? 삼위일체 교리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종교학의 영역인가 하는데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종교 전통들이라는 무궁한 광맥에서 찾아낸 진수들을 널리 알리고 일반 종교인들이 이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종교학, 그리고 종교학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의무요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되풀이 됩니다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인구의 50퍼센트 가까이가 종교인이라는 한국에 왜 이런 부조리한 현상이 상존하는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답은 오늘 한국 종교가 전반적으로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이제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종교학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각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자기반성이나 자기비판을 통해 자정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개별 종교는 그 근본 성격상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격의 종교를 그냥 방치할 수만은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대전체, 사회전체의 종교다. 종교로서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서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3) 종교의 심층화 과정

그러면 종교가 제 구실을 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종교학, 혹은 종교학자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물어보게 됩니다. 저는 종교학자들이 현재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표피적이고 표층적인 종교성을 심화시키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 예가 신학자이면서도 세계종교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종교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애쓰는 한스 큉(Hans Küng, 1928~ )의 제안입니다. 그는 지난 1993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 회의(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에서 공자님의 말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論語󰡕 「衛靈公篇」)나 예수님의 말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고 하는 뜻의 황금률이 모든 종교의 핵심이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를 “지구적 윤리(global ethics)”로 삼을 것을 선언하고 모든 종교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 “지구적 책임(global responsibility)”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런 일에 종교학자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큉의 제안도 훌륭하지만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로 종교학자는 각 종교에서 가르치는 더 깊은 심층을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각 종교에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표층과 심층의 차이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논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한 가지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표층 종교는 지금의 나, 류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제나, 몸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종교이고,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참나(眞我), 큰나(大我), 얼나를 찾으므로 참된 자유를 얻으려는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표층 종교는 종교적 행위가 지금의 내가 잘되기 위한다는 목적 하나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연히 기도나 헌금 등 모든 종교행위가 모두 내가 잘되기를 위한 수단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주의에 입각한 행동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복종교입니다. 요즘 그리스도교의 경우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입니다. 그러나 심층 종교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대로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자각 아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추구하려고 노력합니다. 부처님의 무아(無我, anātman)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껍데기 나, 자기중심주의, 욕심을 버리고 내 속에 있는 신성(神性, Divinity)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성이 궁극적으로 나의 인성(人性, humanity)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가장 간결하게 가르치고 있는 종교 전통으로 저는 동학(東學)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신성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가르침은 내 속에 있는 그 신성이 바로 나의 참 나, 대아, 진아, 얼나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나만 신성을 모시고 있고 나만 한울님이 아니므로 내 이웃을 한울님 섬기듯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에 이르게 됩니다. 인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가르침입니다. 제가 최근에 알게 된 성덕도(聖德道)도 현세의 물질적 유익 같은 것을 구하거나 비는 일이 없이 오직 “자성반성(自性反省)”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청정심(淸淨心)을 찾아 인간성을 완성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성회복을 위해 뭔가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이 두 가지만을 소개했지만, 이런 가르침이 거의 모든 종교 심층에 깔려있는 기본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학자들은 종교 전통들 속에 감추어진 이런 금광을 캐내어 시간이나 기타 조건의 제약 때문에 직접 캐는데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더욱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참다운 신성 내지 인성을 발견하게 되면 떳떳하고, 당당하고, 늠름하고, 의젓하고, 의연하고, 꿋꿋한 인격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청복(淸福)이고 이런 청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가시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교육

마지막으로 교육에 대해 한 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하버드 대학은 학부과정 모든 학생들에게 “윤리적 사유(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부정한 거래, 불의한 범법 행위, 환자보다는 돈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의사들, 자기들의 연구 자료를 날조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수없이 들려오는데, 그 엉터리들 중 더러가 바로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 과목을 설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과목 중 하나가 신학자 하비 콕스가 맡았던 「예수와 윤리적 삶(Jesus and Moral Life)」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존 스튜어드 밀, 데카르트 등을 가르치는 과목과 함께 개설된 이 과목은 한 학기 수강생 수가 7,8백 명이 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각 급 학교에서도 세계종교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인류의 정신적 길을 밝혀준 종교적 지도자를 가르칠 종교과목의 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종교학과가 있어서 세계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한국도 아무 종교도 모르든가 한 종교만 알고 있는 종교 문맹이 줄어들 수 있도록 학교에서 종교의 뜻을 살필 수 있는 교육이 필수적이라 믿습니다.

“필요의 계층(hierarchy of needs)” 이론으로 유명한 휴머니스트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목표를 자아실현(self-actualizing) 내지 자아 초월(self-transcendence)이라고 보고 이를 실현한 사람은 절정체험(peak experience)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이런 절정체험도 본질적으로 종교적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고매하고 이상적인 목표인지 모르지만, 지금 교육이 입시와 취업, 경쟁과 출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현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1986)도 특이한 교육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설립하고, 참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힘썼는데, 그에 의하면 참된 교육이란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알아내고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계발하는 창조적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만족감과 열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성공’이라고 보았습니다. 명예, 돈, 성공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것을 바라는 욕심이 우리를 괴로움과 슬픔으로 내몬다고 역설합니다.

결국 교육 부면에서도 인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종교학 내지 영성적 통찰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인성이 되살아나서 한국이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도록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것이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전문가 분들을 비롯하여 의식 있고 양심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 과제라 생각합니다. 인성을 이야기하면서 종교적인 면을 등한시할 수 없다는 것, 그러기에 종교를 연구하는 분들의 사명이 막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