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8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27)신뢰와 유대 깨진 시대, 공동체 소생시킬 ‘사회적 자본’에 주목하다 - 경향신문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27)신뢰와 유대 깨진 시대, 공동체 소생시킬 ‘사회적 자본’에 주목하다 - 경향신문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27)신뢰와 유대 깨진 시대, 공동체 소생시킬 ‘사회적 자본’에 주목하다
기사입력 2016.09.27 21:02
최종수정 2016.09.27 21:06
ㆍ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구성원의 신뢰와 유대가 사라져 공동체 참여가 결여되고, 사회적 자본이 심각하게 쇠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구성원의 신뢰와 유대가 사라져 공동체 참여가 결여되고, 사회적 자본이 심각하게 쇠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이후 지구적 차원에서 큰 주목을 받은 사회과학 개념의 하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사회적 자본은 지식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에서도 빈번히, 그리고 즐겨 쓰여 왔다. 우리나라에선 2011년 이 개념을 타이틀로 한 TV 교양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졌다.

사회적 자본이란 개념을 학문적으로 정착시킨 이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콜먼이었다. 이들의 연구에 기반을 둬 이 말을 더욱 널리 알린 이는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1941~ )이었다. 퍼트넘은 1995년 ‘나 홀로 볼링’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부제가 ‘미국의 쇠퇴하는 사회적 자본’인 이 논문은 즉각 미국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2000년 그는 이 논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저작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Bowling Alone: The Collapse and Revival of American Community)을 발표해 지구적 관심을 다시 한번 끌어모았다.

<나 홀로 볼링>에 앞서 퍼트넘에게 정치학자로서의 명성을 안겨 준 저작은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원제: Making Democracy Work, 1994)였다. 이 저작에서 그는 남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비교를 통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발전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이 미국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분석인 논문 ‘나 홀로 볼링’과 저작 <나 홀로 볼링>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주목할 것은 퍼트넘의 이론이 미국사회를 넘어서 다른 사회에 던지는 함의 또한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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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퍼트넘의 대표저작 <나 홀로 볼링>.
로버트 퍼트넘의 대표저작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자본이란 무엇인가

<나 홀로 볼링>은 총 5부로 이뤄져 있다. 미국사회의 변화를 다룬 제1부 ‘서론’에 이어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자본의 변화 경향’(제2부), ‘사회적 참여의 쇠퇴 원인’(제3부), ‘사회적 자본의 기능’(제4부), ‘무엇을 할 것인가’(제5부)가 탐구된다.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은 사회적 자본이다. 퍼트넘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이란 개인들 사이의 연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reciprocity)과 신뢰의 규범을 의미한다. 사회적 자본은 다양한 모습들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가족과 친족을 합친 확대가족, 교회의 주일학교, 통근열차에서 포커를 하는 단골 회원들,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 회원으로 가입한 시민단체, 인터넷 채팅 그룹, 주소록에 적혀 있는 직업 관련 인물들의 네트워크 등이 그것들이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과 이와 연관된 시민적 참여가 미국에서 20세기 첫 60년에는 발전해 왔지만, 이후에는 점차 쇠퇴해 왔다고 분석한다. ‘더불어’가 아니라 ‘나 홀로’ 볼링을 친다는 책 제목은 사회적 자본의 쇠퇴에 대한 은유다. 그는 이러한 쇠퇴의 원인으로 세대교체, 텔레비전, 장거리 출퇴근, 맞벌이 부부 등을 지적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의 등장에서 볼 수 있는 세대교체다.

주목할 것은 퍼트넘이 사회적 자본을 ‘결속형’과 ‘연계형’으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결속형이 혈연·지연·학연과 같은 내부지향적이고 배제적인 유형을 말한다면, 연계형은 공적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외부지향적이고 포섭적인 유형을 지칭한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연계형의 사회적 자본이 증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퍼트넘에게 사회적 자본이란 시민적 참여를 증가시키고 삶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결론에서 그는 미국에서 쇠퇴한 사회적 자본을 소생시키기 위한 역사적 교훈과 현실적 방안을 탐구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선 학교에서 매스 미디어를 거쳐 정부에 이르는, 개인은 물론 제도를 포괄하는 사회 전체에서의 변화다.

■‘사회적 자본’을 둘러싼 논쟁

‘나 홀로 볼링’은 저작에 앞서 논문으로 먼저 출간됐다. 이 논문에서 제시된 주장, 즉 시민사회가 허약하면 시민적 연대 및 사회적 신뢰가 약화된다는 견해는 즉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시민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것은 시민사회 이론가들이 즐겨 강조하는 명제다. 하지만 강한 시민사회가 강한 민주주의로 귀결되기 위해선 이 둘 사이에 정당을 포함한 성숙한 정치제도가 매개돼야 한다. 미국 정치학자 셰리 버먼은 1920~1930년대 독일의 경험을 사례로 강한 시민사회의 존재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제도가 취약한 탓에 오히려 나치즘의 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버먼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간의 복합적 관계를 주목함으로써 ‘나 홀로 볼링’의 단선적인 논리를 비판했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저작 <나 홀로 볼링>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비판이 공존했다. 긍정적 시각에서 <나 홀로 볼링>은 사회적 자본에 초점을 맞춰 미국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쇠퇴를 일목요연하게 분석했다는 평가가 이뤄졌다. 하지만 부정적 관점에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사회적 자본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과도한 경쟁에 있다는 비판 또한 제기됐다.

지성사적으로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이론은 시민적 습속과 문화를 중시하는 토크빌적 시민사회론의 전통에 놓여 있다. 이 전통은 자본주의와 계급관계를 중시하는 그람시적 시민사회론의 전통과는 상이한 흐름이다. 토크빌적 전통이 주목하는 자발적 결사체와 시민문화는 강한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연대와 협력의 성숙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이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강하고 성숙한 시민사회를 어떻게 구축 또는 재구축할 것인지는 미국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들에서도 매우 중대한 과제다.

■한국어판 저작은

<나 홀로 볼링>은 정치학자 정승현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이탈리아 사례를 분석한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안청시 등에 의해 번역됐다. 





■한국에서의 ‘사회적 자본’ 논의 - 외환위기 맞물려 관심…2011년엔 TV 프로그램에서도 조명

사회적 자본에 관한 국내 연구를 주도한 이들은 사회학자들이었다.

김용학 연세대 총장(사회학),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 이재혁 서강대 교수(사회학), 박찬웅 연세대 교수(사회학) 등은 사회적 자본과 신뢰에 관한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고, 한국 사회 분석에서 이 이론이 갖는 의미를 분석했다. 이들의 연구는 1998년 외환위기 발생과 맞물려 학계 안팎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강수택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사회적 신뢰를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이뤄진 연구들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논문 ‘사회적 신뢰에 관한 이론적 시각들과 한국사회’(2003)를 발표했다. 그는 루만의 체계이론, 콜먼의 합리적 선택이론, 웨이젓 등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바잇커스의 사회현상학, 기든스의 역사사회학, 후쿠야마와 퍼트넘의 이론들을 비교하고, 앞서 언급된 국내 사회학자들의 연구들을 평가했다. 강 교수는 생활세계에서의 신뢰 상실을 주목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공감적 상호주관성에 기반을 둔 신뢰 형성을 제안했다.

2011년 11월 방송된 KBS 특별기획 3부작 <사회적 자본>.
2011년 11월 방송된 KBS 특별기획 3부작 <사회적 자본>.


사회적 자본 이론이 미친 영향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있다. 2011년 한국방송공사(KBS)는 특별기획 3부작 <사회적 자본>을 방영했다. 황진성·조영중 프로듀서가 만든 이 프로그램은 사회적 자본의 이론과 현실을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제1편의 제목은 ‘모든 것을 바꾸는 한 가지, 신뢰’, 제2편의 제목은 ‘승리자의 언어, 소통’, 제3편의 제목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변신, 협력’이었다.

이 기획은 <트러스트>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너 오스트롬 인디애나대 교수, 행동경제학 전문가 찰스 플롯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의 인터뷰를 싣는 등 TV 프로그램이 갖는 장점을 잘 살렸다.

무한경쟁·승자독식과 같은 이기심을 넘어선 신뢰·소통·협력을 중시하는 이타심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본이 미래 발전의 원동력임을 3부작 <사회적 자본>은 강조했다.

최근 들어 사회적 자본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과거만은 못하다. 그 까닭은 이 이론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기보다 그 설득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퍼트넘이 강조하듯이 사회적 참여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삶과 사회적 제도에 결코 작지 않은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9272102005&code=210100&med_id=khan#csidx311403c6bb66c5c8ad0e8bd4b187b0d 

2016/09/27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연찬문화연구소를 열며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연찬문화연구소를 열며



[열린 진보] 연찬: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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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글

[인간의 역사를 대긍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류사는 자유확대의 과정입니다. 평화적인 발전은 물론이지만,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보이는 것마저 어떻게 보면 거칠게 정(正)반(反)합(合)으로 진행되는, 끝이 열려 있는 나선형 진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거칠게 나아가는 과정은 인류라는 종(種)의 멸망까지를 내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엄청난 행위능력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과거 성인에게나 가능했던 대화, 소통, 진리탐구와 실천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 속에,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 속에 현현(顯現)되어야하는 시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물질적 진보는 이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계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인간의 최고의 의식을 무아(無我;에고로부터의 해방)에서 찾고, 그것이 모든 고등종교의 목표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이제는 그것을 사회화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무어라 이름 붙이기가 어려워 연찬(硏鑽)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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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이라하면 무슨 무슨 연찬회라는 이름의 모임들도 많지만, 아마도 우리가 사용하려는 의미는 20세기의 걸출한 인물인 일본의 야마기시에 의해서 정의(定義)된 연찬과 가장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위(零位)에서의 철저(徹底)구명(究明)”을 말합니다.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 그리고 단정(斷定)이 없는 가운데, 진리를 철저히 밝혀 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 야마기시 사후(死後)에 많은 사회적 물의마저 일으킨 실현지 중심의 실천 방법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는 권하기 힘든 특수한 소통 내지 의사결정 그리고 탐구와 실천의 방법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연찬(硏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연찬방식이라는 것은 야마기시의 독창적 창조물이 아니고, 이미 저 빛나던 축(軸)의 시대 모든 성인들에 의해 창시된 이래 계속 진화해 온 인류 지혜의 축적된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보편적인 내용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 명칭을 그냥 사용하기로 했습니다.(더 좋은 이름이 있다면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원효, 야마기시와 최근의 일본 스즈카에서의 실험들 그리고 제가 접한 것만 해도 파커 파머, 에크하르트 톨레, 바이런 케이티 같은 서양 사람들에 의해서도 끊임 없이 발전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따지는 지금의 토론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하고 함께 탐구하는 연찬문화로의 진보는 평화롭게 새로운 세상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초석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회를 넘어서려는 마을공동체운동이나 협동운동의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것에서도 여실히 보여지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 운동이 그 고질적인 분파주의를 넘어서 진정으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그 바탕이 ‘내(우리)가 옳다’는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근거없는 확신에 바탕을 둔 토론 문화가 아니라, ‘내(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나(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파악된 것을 나(우리)의 뇌가 저장하고 있는 정보에 의해 판단한 것일 뿐으로, 진실 그 자체와는 별개“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한 연찬 문화에 의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찬이라는 방식을 여러 운동 나아가 삶 속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아 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연찬문화연구소 |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펌)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펌) - Daum 카페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펌)|자료실

남곡|조회 349|추천 0|2015.03.08. 09:41http://cafe.daum.net/nshumanschool/SJEp/41





[인터뷰]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

                                                                                전병근 기자



입력 : 2015.03.07 08:00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보수와 진보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격렬히 충돌한다.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인류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리 모두가 독선적인 위선자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런 자각 위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진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미남의 이 중년 학자는 답변도 깎은 듯 매끈했다. 우수 강의 교수로 대학에서 상을 받았다든가, TED 강연 동영상이 수백만 조회를 기록했다는 전언이 틀림없는 사실 같았다. 미국에서 각광받는 진화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52)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 하지만 국내 독자들에게는 얼마간 설명이 필요한 학자다.



우리 귀엔 훨씬 더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에서부터 소개를 시작하면 어떨까. 샌델이 2009년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2012년 후속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시선을 사로잡을 무렵이었다. 미국에서는 또 다른 교수가 도덕에 관한 화제작으로 청중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니 그가 하이트다. (맥주 브랜드 ‘Hite’가 아닌 ‘Haidt’라고 쓴다.)



사람들은 왜 저마다 내가 옳다고 우기나? 보수와 진보는 왜 맨날 저렇게 싸우나? 보수/진보 성향은 날 때부터 결정이 되나? 왜 어느 쪽이 됐건 뭉칠수록 비이성적이 되나?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 건 또 뭔가? 종교는 망상일 뿐인가? ….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봤을 법한 의문들이 그의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웅진지식하우스 번역출간)’에는 보란 듯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런 불편한 질문들에 대해 저자는 조금도 피해가지 않고 조목조목 답을 댄다.





[인터뷰]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 그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책이 나오기도 훨씬 전이었다. 2008년. ‘진보와 보수의 도덕적 뿌리’라는 제목의 18분짜리 TED 강연이 입소문을 타더니 유튜브에 오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조회수 202만)



이후 ‘종교, 진화와 자기 초월의 행복’(95만)에 이어 ‘공동의 위협이 어떻게 공통의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는가’(53만)까지 후속 강연도 연달아 화제였다. 세 동영상의 조회 수는 합쳐서 350만 회가 넘는다.



2012년 미국 국제시사잡지 ‘포린 폴리시’가 그를 ‘세계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은 데 이어,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도 2013년 ‘세계의 사상가’ 반열에 포함시켰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그를 따로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그는 아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다. 아빠와 엄마를 섞어 닮은 여덟 살 아들, 다섯 살 딸과 함께 가족 동반 여행을 왔다고 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가족들 ▲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가족들-한국은 처음인가?



그렇다. 안식년을 맞아 3개월 동안 동아시아 쪽을 돌아보는 여정 중이다. 미국 대학은 6~7년마다 1년씩 강의 부담 없이 큰 주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나라들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 그 전에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인도는 가봤는데 동아시아는 처음이다.



-한국어판 서문에 아내가 한국계라고 소개했던데.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장인 내외가 1950-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들었다. 장인은 부친을 일찍 잃었지만 자립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혼자서 영어를 배워 미군 부대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그때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대학에 장학생으로 유학 왔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이었다. 버지니아주의 작은 기독교 대학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따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가 됐다.



-국내에 번역된 책의 원제목이 ‘The Righteous Mind’다. 무슨 뜻인가?



도덕(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유독 내 관심을 끈 게 있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뭔가를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늘 남을 판단한다. 어떤 기대를 하고 거기에 부응하는지 여부를 평가한다. 또한 남이 나를 판단한다는 사실도 의식한다. 그럴 때면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단죄)한다. 그처럼 도덕적으로 옳은 체하고 비판과 판단도 잘하는 성향이 ‘옳다는 마음’이다.



이것은 좋지 못한 심성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초 벽돌이 되기도 한다. 인간만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보여주는 미스터리 중 하나는 혈연 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협력에 아주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신과 나만 해도 처음 만나지만 서로 믿고 협력할 수 있다. 그런 점들을 다 제목에 담고 싶었다.



-‘righteous(옳다는)’라는 단어는 ‘right(옳은)’와는 어떻게 다른가?



‘옳고 그름(right or wrong)’은 인간의 언어에서 아주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범주다. 그에 비해 ‘옳다는(righteous)’은 그보다 더 미묘한 개념이다.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되는지 모르겠지만, 영어에서는 ‘self-righteous(자기가 옳다고 믿는·독선적인)’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나?



‘옳다는 마음’은 혈연이 아닌 타인들과의 협력을 가능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집단 내 갈등을 낳기도 한다. 서로 옳다는 도덕적 성향이 상호 충돌을 야기한다. 그래서 에티켓 책자 같은 데서도 가급적 도덕과 정치, 종교에 관한 대화는 피하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나 종교는 모두 우리 심성 근저에 자리잡은 ‘옳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런 도덕적 심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다면 서로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결집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도덕과 정치, 종교적 대립에서 일어나는 편 가르기와 과열, 분노를 좀 가라앉히고, 대신 그 자리에 경외심, 놀라움, 호기심으로 채우는 것이 내 목표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샌델 교수는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신의 접근법은 샌델 교수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장의 논리가 삶의 다른 영역까지 점점 잠식해 들어가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도덕적 직관도 도전받고 있다. 샌델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도덕적으로 이상하거나 추한 상황을 따져보게 한다. 가령 교도소 수감자가 돈을 주면 더 편한 감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을 허용할지를 두고 쟁점을 따진다. 그에 반해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믿는 도덕적 직관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탐구한다.



어떤 도덕적 사안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책을 통해 인간의 도덕 심리를 이해하면 도덕적인 사안에 대한 서로간의 논의가 한층 수월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가령 샌델이 제기한 많은 질문들에 대해 좌우파는 서로 답이 나뉘면서 강하게 대립한다. 왜 그렇게까지 충돌할까. 내 책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쟁점이 무엇이든간에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그 근저에는 언제나 똑같은 도덕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 교수는 도덕철학자인 반면 당신 전공은 사회심리학, 진화심리학이다. 도덕에 대한 접근법이 전통적인 윤리학이나 도덕철학과는 어떻게 다른가?



사회 심리학은 아주 넓은 분야다. 그 중에서 나는 문화 심리학, 진화 심리학, 긍정 심리학, 도덕 심리학을 연구한다. 도덕철학이나 전통 윤리학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 행동의 도덕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철학자는 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반면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심리를 모르고 도덕적 질문을 논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 위에서 논의를 진행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이 도덕적 의무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믿는 가정 같은 것이 그렇다. 어떤 개인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도덕률은 이성을 따르는 것이었다.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도덕률을 이성 위에 세웠고, 공자를 비롯한 동양 사상가들도 인륜을 이성과 결부시켰다. 당신은 다른 입장인 것 같다.



도덕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따져봐야 한다. 관련 증거들을 검토해 보면, 도덕적 판단이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성보다는 직관이나 감성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이나 심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종종 비현실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이론을 내놓게 된다.



가령, 칸트의 유명한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치가 문을 두드리며 유대인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건 터무니없는 요구다. 나는 그런 도덕적 명제는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이성주의자의 착각(rationalist delusion)’이란 표현까지 썼는데.



인간의 도덕적 성향은 사람들을 결속(bind)시키지만 눈을 멀게도(blind) 한다. 종교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종교적 열정은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 신앙을 중심으로 뭉쳐서 적에 맞서 싸우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 같은 급진적인 ‘신 무신론자(New Atheist)’들은 종교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들도 종교를 대적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또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거다. 이들의 ‘신’이 바로 이성이다.



무엇이든 하나의 운동이 되면 뭉치는 동시에 눈이 멀게 된다.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진실을 찾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 ‘이성적’ 사고에도 숱한 결함이 있는데도 이성을 완벽하다고 믿는다. 착각이다.



물론 인류는 이성적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에서 가능한 게 아니라, 제도를 아주 잘 구축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과학이 단연 좋은 예다. 과학이 이성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과학자 개인들이 대단히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다. 실제로는 안 그렇다. 과학자들도 자기 이론을 너무 좋아한다. 자기 이론은 반박하려 들기보다 확증하려고 애를 쓸 뿐이다.



하지만 과학 제도 전체로 보면 다르다. 다른 과학자들이 동료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하려고 노력한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동료 리뷰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합리성이 발현된다. 따라서 사회가 이성적이 된다는 것은 개인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상호 토론과 검증을 통해서 보다 이성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뒤집어서 직관(감정을 포함)과이성을 각각 코끼리와 기수 관계에 비유했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 위에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올라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기수에 해당하는 이성은 코끼리와 같은 직관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먼저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애써 사후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내 연애 시절을 예로 들겠다.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 받는데, 헤어지라고 했다. 그는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어리석게 굴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언하기는 쉽지만 막상 따르기는 어렵다. 그 무렵 나는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 부처의 어록 중에 “기수가 코끼리를 길들이듯 마음을 길들여라”라는 말이 있었다. 이미 부처는 충동적인 마음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도덕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다. 또 “우리 모두는 직관적으로 정치인”이라고도 했다. 왜 그런가?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결속을 맺는 것이다.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도덕은 서로가 어떤 원칙 위에서 행동하기로 결속하는 것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서로 어떻게 보이느냐에 신경을 쓴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글라우콘이 이런 주장을 한다. 자기 모습이 안 보이게 하는 반지(기게스의 요술 반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들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나는 그이 말이 맞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도덕률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평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이란 사회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진화해온 심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도덕의 핵심은 정치적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 진화 과정에서 소규모 집단에 속해 생활해 오면서, 다른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느냐 여부가 생존을 좌우했다. 지금도 우리는 인간 관계의 파트너로서 서로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끊임없이 평가하고 평가받는다. 그점에서 우리는 도덕철학자라기보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에 가깝다는 뜻이다.



-편 가르기 현상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속한 팀을 지지하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썼는데.



무슨 일이든 우리는 맨처음에 어떤 (직관에서 나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 그것을 뒷받침해 줄 증거들을 찾는다. 우리 인지 심리가 작동하는 과정이 그렇게 돼 있다. 판단을 먼저 내리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 증거를 메워나가는 식이다.



미국에서 아직도 오바마의 출생지를 인도네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그런 증거를 찾아낸다. 더욱이 오늘날 인터넷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지지 증거를 찾아준다. 믿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당신은 도덕 원리에 있어서 다원주의자라고 했다. 보편타당한 하나의 도덕률은 믿지 않는다는 얘긴가? 그런 입장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허무주의나 ‘보편타당한 절대 기준은 없다’는 상대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내가 말하는 다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하나의 단일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어떤 도덕 원리도 믿지 않는다는 입장은 아니다. 인간이 집단을 이뤄 지내는 이상, 도덕적 원칙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도덕 없는 사회나 언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다만 모든 사회가 하나의 도덕 원리를 갖는지, 다양한 원리를 갖는지는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문제다. 대체로 어느 사회를 보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공정성, 충성심, 신성함, 자유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나는 이런 도덕 원리가 무엇이며, 우리 본성에 무엇이 내재하는지에 관한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본다. 모든 사회가 도덕 원리를 쌓기 위해 사용하는 기초 벽돌(인간의 기본심리)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도덕 원리 중 어느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도덕적인 성향을 입맛에 비유했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도덕률을 6가지 범주로 나눴는데.



도덕성은 여러 면에서 미각과 비슷하다. 맹자도 도덕을 맛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도덕과 의리가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동물의 고기가 우리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각 문화권마다 전승돼온 도덕적 기호도 진화의 산물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오랜 시간 위협과 기회를 맞아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도덕적 미각 수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미각의 매트릭스는 대체로 여섯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배려/피해, 공정/부정, 자유/압제,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다. 여기서 보수적인 사람은 공정, 자유,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측면을 다 중시하는데 비해, 진보적인 사람은 배려, 공정의 실현에 유독 적극적이다.



같은 공정성에 관심을 갖더라도 보수(우파)는 비례의 원칙으로 이해하는 반면 진보(좌파)는 평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도덕적 취향에 대한 호소력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보다 낫다고 썼다. 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진보주의자들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정/부정 같은 몇 가지 기반에 강하게 좌우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다섯 가지 기반을 모두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좌파의 도덕성은 한두 개의 미각 수용체를 활성화하는 반면, 우파는 충성심, 권위, 고귀함까지 아우르며 더 폭넓게 미각 체계를 자각하는 셈이다. 결국 보수파가 다수 유권자들의 도덕적 취향과도 연결될 여지가 더 많다는 얘기가 된다.



한 사회의 부가 증가하고 교육 수준 및 도시 밀도가 높아지면 전통이나 권위, 종교적 가치에 대한 존중감은 떨어진다. 이런 경향은 진보 쪽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사회의 다른 다수 시민은 아직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보주의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수는 여전히 전통이나 충성심, 연장자 우대, 신성성, 순결 같은 가치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소홀히 한다.



미국의 예를 들면, 1990년대에 좌파(진보)는 동성애 권리와 결혼을 주장했다. 당시 좌파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주장이 당시 국민 다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했다. 나아가 좌파는 종종 국가 전체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싸잡아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을 ‘억압적인 국가’라거나 ‘너무 상업적’이라거나 심지어 ‘식민주의적’이라고 했다.



이런 주장이 보수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격분시키는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좌파의 그런 주장이 우파 입장에서는 ‘반역’처럼 들렸다. 이런 류의 실수를 좌파들은 자주 범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와 진보적 성향은 태어날 때부터 나뉘나? 인간 본성에 대해 흔히 ‘천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를 두고 대립하는데.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natural)이면서 또한 양육된다(nurtured). 인류도 동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면에서 다른 영장류와 유사하다. 하지만 10만~80만년 전 사이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문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통해 문화 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문화도 그 자체는 생물학적인 적응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번 생겨난 후에는 문화 자체의 논리를 갖고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할 때 본성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해서도 함께 관찰해야 한다.



더구나 문화는 유전자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아주 역동적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서로 유전적으로는 비슷해도 문화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본성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개인의 도덕/정치 성향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출생과 성장 과정을 보면 된다. 우선 유전자가 뇌를 만들고, 뇌는 특정한 기질을 만든다. 기질에 따라 어린 시절 주변에서 접하는 사람과 경험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때 알게 된 사람과 경험들이 아이의 특정 경험을 더 심화시키고, 10대 후반이 되면 정치·사회 이슈에 눈을 뜨면서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가게 된다.



초기에는 부모들 영향이 아주 크다. 하지만 점차 진학하면서 정체성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 중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택하고 수용하게 된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어떤 경험이 기존 생각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도전받기도 한다.



사람의 정치적 정체성은 대단히 안정적이지만 간혹 변하기도 한다. 가령 내가 그렇다. 좌파에서 무당파로 옮겨갔다. 또 비즈니스를 하면 보수적이기 쉽지만 해외 출장을 많이 하고 세상의 다른 것을 많이 접하다 보면 점차 진보적이 된다. 요컨대 유전자와 환경, 그 속의 역할, 자신이 택하고 받아들이는 정치적 서사(narrative)가 주 요인이 되겠다.



-“인류는90%가 침팬지, 10%가 꿀벌”이라고 썼다. 무슨 뜻인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침팬지와 아주 유사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침팬지의 성향을 보면 순전히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공감력과 상호성이 있고 위계 질서가 있다. 그러니까 인간처럼 도덕을 구성하는 벽돌에 해당하는 심성을 갖고 있다.



집단 내 개인과 개인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의 어떤 관계도 형성되고 도덕성이 생긴다. 그런 사회 관계에 유능한 개인이 번성한다. 우리가 90% 침팬지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다. 우리의 도덕성은 침팬지의 도덕성과 똑같이 설명될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인간 본성에는 좀 더 최근에 생겨난 외피로서 집단성도 자리잡고 있다. 심성의 10%는 꿀벌 같은 군집성을 띠고 있다. 어떤 종이든지 집단과 집단이 경쟁할 경우 개체가 집단을 우선하는 선택 압력이 작용한다. 이른바 집단 선택의 원리다.



인간 본성도 엄청난 집단주의 성향을 보인다. ‘원 포 올, 올 포 원(One for All, All for One)’을 지향하게 된다. 집단 선택 이론은 현재 사회과학에서 큰 쟁점 중 하나지만, 이런 집단성은 개인 수준의 선택 이론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특정 조건 하에서 집단 선택의 압력이 실제로 작용하며, 인간도 그런 환경 속에 있다고 본다. 그 특수 환경 중 하나가 종교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동시에 도덕 질서를 유지한다. 또한 무임승차자의 출현을 막고 집단에 이로운 행동을 권장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마음에 ‘군집 스위치(hive switch)’가 있다고 한 말이 그것과 관계가 있나?



그렇다. 인간에게는 나(개별적인 자아)를 잊고 거대한 무엇에 빠져들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군집 스위치라는 것은 인간이 개인으로 사는 데도 아주 능하지만, 동시에 한시적으로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 양쪽을 순간적으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진화 과정에서 소규모 친밀 집단을 이뤄 지내 왔고 오랫동안 그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집단에 속했을 때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후, 특히 산업혁명 이후 거대한 부가 축적되면서 개인적인 삶이 일반화됐다. 현대인 대다수는 혼자 살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혼자서는 뭔가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돈과 시간을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는 데 쓴다. 스포츠에 대한 열광도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팀의 일원이 되어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하는 데 열광한다.



-종교를 ‘팀 스포츠’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 종교인들이반발하진 않을까?



글쎄,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미국 종교계 저자들도 대체로 내 책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신론자이기는 해도, 종교의 존재 의의나 의미까지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종교를 어떤 바이러스나 어리석음, 근절해야 할 해악에 비유하는 학자들(앞에서 말한 신 무신론자들)과는 달랐다. 즉, 우리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진화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종교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입장이다. 적어도 미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주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유대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무신론자다. 더 젊었을 때는 나도 종교를 혐오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 심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인류 역사에서 사회에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됐다. 물론 아주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신은 믿지 않고 종교도 없지만, 종교적이라는 얘긴가?



종교적인 느낌(feeling)은 갖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무슨 뜻인가?



살다 보면 이따금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아름다우며,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전개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와 같은 경외(awe)의 순간에 이끌린다. 그런 느낌은 중독성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붕 위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다. 지붕이나 높은 건물 위, 혹은 깊은 숲 속을 가거나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느낌을 종교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이런 것은 내 안의 자신을 끄집어내는 느낌이지만, 고독한 체험이기 때문에 ‘군집 스위치’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차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를 깎아내리는 문화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잖은 현대인들이 그런 느낌을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말하기도 한다.



그게 바로 뉴에이지 정신주의자들인데. 내가 두 번째 TED 강연 무대에 섰을 때 청중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3-4명밖에 없었다. TED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아주 세속적인(=비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영적(spiritual)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더니 아주 많은 사람들 손이 올라갔다. 본래 사람들이 그렇다. 영적인 본성은 수십만 년 이상 오래된 거다.



반면에 조직화된 종교는 기껏해야 4000-5000년 전에 생겼다. 우리에게는 본래 영적인 군집성이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서 춤추고 하던 데서 점차 (제도적인) 종교를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 그러다 이제는 도시화와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들은 점차 종교를 넘어서게 된 거다. 어떤 면에서 이제 우리는 다시 (제도 종교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특정 종교는 없이 영성을 가진 사람들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인류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썼는데?



인류가 집단을 이뤄 협력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 덕분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종교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근사한 호텔 로비에서 인터뷰를 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명을 쌓아 올릴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당신은 책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진보주의자였지만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좌파(liberal)에서 출발했다. 점차 중간으로 옮겨가서 결국 지금은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비당파(non-partisan)’가 됐다.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마음과 기질은 중도좌파에 가깝지만, 좋은 사회를 위한 운영 원리로 보자면 중도우파라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대학에 있다가 지금은 뉴욕대 경영대학원으로 옮겨서 경영 윤리를 가르친다. 경영 분야로 옮겨 간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학교를 옮긴 것은 우연이었다.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 아내가 둘째를 가졌다. 집필 작업이 아주 더뎌졌다. 물론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했지만 일정이 많이 늦은 상태였다. 2012년 대선 이전에는 책이 나와야 했다. 결국 직장인 버지니아대에 무급휴직을 신청했다.



그러고는 뉴욕시로 갔다. 출간에 맞춰 미디어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버지니아에서 뉴욕을 왔다갔다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누군가가 내게 “이곳으로 와서 비즈니스 윤리 과목을 가르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때마침 내가 학교를 옮기고 나서 3개월 후 월가 점령 시위가 터졌다.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웠다. 경영대학원 내 사람들은 비즈니스에 대해 너무들 좋게 이야기했다. 비즈니스가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풀 기회를 제공한다고들 했다.



반면, 월가 점령 시위대의 목소리는 달랐다. 내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현장에 가봤다. 거기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악이며 거대한 흡혈 문어,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이라고 했다.



도덕 심리학자로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같은 실체를 두고 상반된 스토리를 접하게 된 거다. 비즈니스와 자본에 대해 극명하게 대립되는 서사. 나는 자본주의가 왜 그토록 논쟁거리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주제에 관해 다음 책을 쓰기로 했다. 세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두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옳다는 도덕적 오만은 제외하고 서로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자본주의에 대한 상이한 두 서사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뭘까?



이 역시 도덕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 대체로 좌파는 취약한 집단을 희생시키는 데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특히 어린이나 동물, 이민자들 같은 취약자 보호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볼 경우에는 비즈니스 종사자나 부자, 자본가들을 압제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들 눈에 다른 노동자나 소비자는 희생자로 보인다. 취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위해 정부에 대해 더 많은 규제와 통제를 바라게 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본다.



반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도덕의 초점은 희생자에 있지 않고 개인의 자유에 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선택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부가 개인의 생활이나 거래에 간섭하고 과세하면 강하게 반발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자유시장이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이 과거 종교나 정부의 구속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었다고 본다. 이들은 잘 해야 최소 정부가 최선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가 다음 책 주제라고 했는데, 미리 소개한다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앞의 상반된 두 이야기를 절반씩 절충한 것은 아니다. 두 이야기가 동등하게 옳다는 입장도 아니다. 나는 그 동안 연구 결과,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에 좀 더 가깝다고 보게 됐다.



자본주의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념화하기 시작하면, 자유 시장을 (신처럼) 언제나 완벽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눈이 멀게 된다. 시장의 실패라든가 끊임없는 다양한 착취를 보지 못하게 된다.



대략적인 세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20세기는 악몽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면서 모든 논쟁이 도덕화(이념화)했다. 이제 공산주의는 사망했다. 북한만 빼고. 모두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어떤 자본주의를 원하는지 제대로 고민해 볼 수 있게 됐다. 그런 점에서 악몽에서 깨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가 선입견 없이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역동성 속에서 번영과 전진을 끌어온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둘러보라. 지구상의 가치 있는 것들은 그냥 기도만으로, 혹은 사람들이 그냥 착하게 행동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세계에서 진화가 행한 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비즈니스가 인류 역사에서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좌파의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빈부 양극화의 문제가 있고 이것은 대단히 예측가능하다는 지적 말이다. 어떤 계획이나 조직적인 대응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지적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 대응은 종종 정부에서 나와야 하지만 민간 부분에서 마련될 수도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에 관한 세번째 이야기는 역동성(dynamism)과 관대함(decency)을 결합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결합할지는 각 사회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미국은 역동성에, 유럽은 관대함에 더 기울어 있다. 어느 게 옳고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회든지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떤 도덕적 운동이나 집단적인 포퓰리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논의나 상황을 그르칠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한국 사회도 보수-진보 간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불가피한 걸까?



각국 자료를 보면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 기성세대의 우선 가치는 안전과 번영이었다. 사회가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개인주의적이 된다. 자기 표현과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또한 건국 세대는 외적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국가 이익에 충성스런 경향을 보인다. 반면 그런 경험이 없는 세대는 내부 투쟁에 더 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이 그렇다. 2차 대전 때 참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세대는 공화당과 민주당원도 협력적인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 주도층인 베이비부머 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외부 적과 싸워본 적은 없이 안으로 싸우면서 커온 세대다. 둘 사이에서 극명한 세대차를 보인다.



한국 상황은 잘 모르니까 구체적인 조언을 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체적인 경향과 일반 원칙에 근거해 말하자면, 국가가 당면한 위급 사안에 대해 우선 서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정치 제도적으로 온건한 목소리가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선거법이나 정책을 통해 극단주의의 영향력을 줄이고 온건파를 강화해야 한다.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대개 투표율이 낮은데 이걸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양극으로 갈라진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접촉과 친교를 늘릴 필요도 있다. 그저 한곳에 모아 논쟁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생 공영하는 것이다. 모든 분파의 지도자들이 견해차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느 한 편을 ‘악마’로 내모는 태도에 대해서는 다같이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미국에서 누구 입에서라도 인종주의 발언만 나오면 정파를 막론하고 배격하는 것처럼, 어떤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금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갈등 해소나 완화에 당신 책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나?



빠른 경제 성장에 급속한 도시화를 겪은 사회가 보이는 결과는 공통적이다. 새로운 빈부 격차에 따른 좌우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갈등을 완화하는 데 내 책이 도움되기를 기대한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갈라진 상태에서 대화할 때는 저마다 ‘옳다는 마음’이 작동한다. 이것은 진실과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아주 해롭다. 한국 사회도 분열이 심할수록 똑똑한 사람들이 이해보다는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옳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덕적인 겸양의 태도를 갖게 되면 상대 진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경제 기적에 힘입어 새롭게 바뀐 생활 방식으로 살게 됐다. 빠른 변화로 인한 사회적 해체나 균열, 갈등을 겪고 있다. 그전까지 성공에 필요했던 수완이나 덕목은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필요한 수완이나 덕목과는 다르다. 그 전환에 필요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책이 그런 반성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 첫 책은 정치 상황에 대한 책이었고, 다음 책은 경제 상황에 대한 책이다.



-한국계인 아내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어떻게 만났나?



버지니아대 조교수 시절이었다.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서 친구에게 투덜댔더니 소개를 해줬다. 그 친구가 파티에 아내와 나를 함께 초대했는데 맘에 들어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



-둘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의견 충돌이 없었나?(웃음)



나는 뉴욕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한국계인 아내와 가치 차이는 크지 않았는데 사회적인 행동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교육과 근면, 성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한국인과 달리 유대인은 논쟁을 좋아한다. 심지어 식탁에서 토론하다가 아들이 아버지 면전에 대고 “그건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서슴없이 반박할 수 있다. 아주 직설적이다. 그런 내 모습에 대해 아내는 경악했다.



-자녀의 도덕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를 위해 조언한다면?



양육 과정에서 두 가지를 함께 신경 써야 한다. 한편으로는 일관된 사랑과 따뜻함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체계와 규율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 받는다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는 언제나 (책임질)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듀르켕의 통찰에 따르면, 좌파 사람들은 양육할 때 따뜻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우파는 조직의 규율과 처벌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엔 사랑과 규율 두 가지 다가 아이의 도덕 형성에 필수적이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 1985년 예일대를 졸업한 후 1992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후 과정을 시카고대에서 하면서 인도 오리사에서 연구했다. 1995년부터 버지니아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2011년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진에 합류했다.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도덕성 기반 이론’을 세우고 웹사이트 ‘YourMorals.org’를 공동 개발했다. 시민정치를 증진하기 위한 웹사이트 ‘CivilPolitics.org’도 운영한다.






幸福会ヤマギシ会 - Wikipedia

幸福会ヤマギシ会 - Wikipedia

幸福会ヤマギシ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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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photo Upload.svg画像提供依頼:社会実顕地や供給所の画像、その他ヤマギシ会らしさが出ている画像の画像提供をお願いします。2009年11月
幸福会ヤマギシ会(こうふくかいヤマギシかい)とは、とは農業牧畜業を基盤とするユートピア[1]をめざす活動体(農事組合法人[2][† 1])。 通称は「ヤマギシ会」「ヤマギシ」。1953年(昭和28年)、山岸巳代蔵の提唱する理念の社会活動実践母体「山岸式養鶏会」として発足、約10日後に「山岸会」に改名[4]1995年(平成7年)に名称を「幸福会ヤマギシ会」と変更[5]。 所有の概念を全否定し[6]、「無所有一体」の生活を信条としている。アーミッシュと並べて例えられる場合もある。
売り上げ規模では農事組合法人のトップに位置している[7]。 ヤマギシズム[† 2]社会を実践する場である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が全国に26か所あり、約1500人が共同生活を営んでいる[9]。また、ブラジルスイス韓国オーストラリアアメリカ合衆国タイなど[10]日本国外にも6箇所[9]の社会実顕地があり、社会実顕地に未参画の会員が5万人ほどいるとされる[11]。 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では野菜や果物、家畜などが育てられており[12]、農産物加工品を全国販売している[9]。最近では、「エコビレッジ」の先駆者として評価されることもある[9]

活動

特別講習研鑽会(ヤマギシズムの理念や思想を体験的に知るために参加者全員が車座になってひとつのテーマを深く議論する「研鑽会」が主)と呼ばれる一週間の合宿形式の講座を受講すると会員となることができる[13][† 3]。会員は「研鑽学校」と呼ばれる2週間の講習を受講することで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に参画(入村[15])する資格を得ることができる[16]。実顕地における生活は私財をひとつ財布に入れ[† 4]共に研鑽生活を営むことが柱となっている。
実顕地の経済は、各実顕地で生産された農産物の販売[† 5]による利益が中心である。1988年(昭和63年)に設立したブラジル実顕地では1991年(平成3年)から開拓が始まった1000haに及ぶオレンジ園があり、秋田県大潟村では水稲栽培、80万羽規模の採卵養鶏など大規模農業にシフトしている。経営形態は、野菜や各種畜産から販売を組み合わせた複合農業であり、農事組合法人の形をとっている[2]
ジャーナリストの斎藤貴男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の年商は豊里実顕地だけで、全盛期には約140億円を数えていた[19]。その実態を見ると、全商品の自家生産を謳いつつ、原料や加工を外部に頼っているケースもある[20]
フリーライターの近藤衛[† 6][22]やジャーナリストの米本和広[23]によると、生産物の販売は、会員が運営する講座や農業体験、体験合宿、さらに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へと人々を勧誘するきっかけともなっている[† 7]
真木悠介(見田宗介東京大学名誉教授は自著『気流の鳴る音―交響するコミューン』 (ちくま学芸文庫)のなかの「紫陽花と餅」という項のなかで、自身が特講に参加、ヤマギシ会についてこう述べている。
「学生のころ「ユートピアの会」という研究会で、山岸会という団体の人を招いて話をきいたことがある。私が興味をもったのは、この団体では労働が強制されないということであった。社会的な必要労働をどのように配分するかということは、未来を構想するときの基礎的なネックの一つだ。近代市民社会=資本制社会のように、「飢えの鞭」=生活の必要性をとおしてこれを特定の階級に強制するのか、中国社会主義のように『自民への奉仕』といった道義的規範意識をテコとするのか、あるいはソ連社会主義のように、利潤動機と名誉心、権力による強制とイデオロギー的規範意識等々を組合わせて動員するのか。しかし労働が自発的になされる他は強制されないという世界は、マルクスの終局的なユートピアとしてイメージはもっていたものの、具体的なかたちとしては当時の私の想像をこえるものであった。山岸会は労働を強制しないという神話を打破するために、絶対に働かないという決心を固めて山岸会にいった男が、五十七日ほど釣りばかりしてすごしていたが、つまらなくなってニワトリの世話なぞしはじめという話もきいた。少し出来すぎた話のような気もするが、たとえ事実でなく寓話であるにせよ、そのようなことを、少なくとも原理としタテマエとする集団が実在することを、私は心強く思った。しかし一方その人の話の中には、その当時の私にとってうけいれがたい所説も多かった。たとえば山岸会は、ニワトリの独自の飼い方で有名なのだが、それは一般の鶏舎のように一羽一羽ケージにとじこめる飼い方ではなく、平飼い社会式といって自然に近い飼い方をする。一般の鶏舎でそのまねをすると、強いニワトリが弱い仲間をつついて傷つけたりエサを独占したりして決してうまくいかないのだが、山岸会のニワトリは仲がいいのは、飼っている人間どうしが仲がいいからだ、などといわれる。人間の共同性とニワトリの共同性とのこの因果づけの仕方は、ばかばかしいこじつけとしか思われなかった。結局すぐに行ってみる気にはならずに十年ほどもすぎて、ふとしたことから、一週間の「研鑽」に参加する機会をもった。「強制なき労働」のシステムが存在するのかどうか、はそのときもわからなかった。しつこく調査すれば答えをだすことはできただろうが、そういう関わり方をしたいとは思わなかった。むしろこのとき私が中で体感したことは、私がばかばかしい反面だと思っていた、人間と自然との連動性のようなものの方にこそ、事の本質があるだということだった。人間の共同性とニワトリの共同性とを、それぞれ抽象してとりだしてきて、二変数の関数関係のようにげんみつな因果連関があるわけではない。しかし人間の自然にたいする感触が、他の人間への対応の中に反映し、このような人と人との関係が逆に自然を取扱う仕方にあらわれ、それが植物の育ち方とか動物の相互の関係のうちに反映し、それがふたたび人と人との関係を形成している、そのような連動関係が幾重にも存在すること。「人間がなごやかだからニワトリもなごやかだ」という言い方は、げんみつな因果連関の表現ではなく、自然と人間のこのような連動の総体性の寓話的な表現として納得することができる。殺風景な社会はかならず自己の周囲に殺風景な自然を生み出す。草や木や動物たちとの交歓を享受する能力は、同時に人間の関係性への味覚をしなやかに発達させる。労働が強制されない社会が実在するか否か、私は今でもしらない。しかしもしそのような社会が存在しうるとすれば、すなわち労働がそれ自体よろこびとして、マルクスが書いているように、人間生命の発現としてありうるとすれば、そこでは必ず、人間と人間との関係のみでなく、人間と自然との関係が根本から変わらねばならないだろう。あるいは人間の存在感覚のようなものが、市民社会の人間とは異った次元を獲得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25]

目的

幸福会ヤマギシ会は自らの活動目的を「すべての人が幸福である社会」[5]、「全人幸福社会の実顕」とし[26]、そのための行動原理として「無所有・共用・共活」を内容とする理念ヤマギシズムを掲げる[26]
ジャーナリストの米本和広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は世界を「<無所有一体>の理想社会に塗り替え、世界中の人を幸福にしたい」という目的を有している[27]。近藤衛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は「あと200年後には世界中が地上の楽園〈ヤマギシズム社会〉に革命される」と主張している[28]。幸福会ヤマギシ会は、自分たちが起こす世界革命を「急進Z革命」(Zは、人類最後の革命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と称し、その内容を「ヤマギシズムによる……人間の観念に変革をもたらす頭脳革命であり、全人に真の幸福をもたらす」であるとしている[29]

組織

幸福会ヤマギシ会は自らの組織の性質について、「会員それぞれの自発的自由意志により活動している団体」とし、全体を統率する特定の個人あるいは集団の存在を否定している[30]。会内部の組織も会員が自発的に作ったものであり、本部でさえも意志決定機関ではなく連絡機関、補助的な実務機関であるとしている[30]
ジャーナリストの斎藤貴男は、平等の建前をとり「理念だけが前面に出るヤマギシの組織は、きわめて不透明」としつつ、同会が開催する「ヤマギシズム社会博覧会」において掲示されたポスターをもとに、「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ヤマギシズム社会文化生活)」、「ヤマギシズム世界実顕試験場」、「ヤマギシズム研鑽学校」が一体となって展開するヤマギシズム社会を世に広めるべく活動するのが「幸福会ヤマギシ会」であり、四者の間には上下関係がなく円のように結ばれていると説明している[31]
米本和広は三重県豊里村の社会実顕地を訪れた際、ヤマギシズム社会に命令、服従の関係はなく、「研鑽」と呼ばれる話し合い[† 8]によって組織が運営されるという説明を受けた[33]。米本によると、実顕地内には研鑽を行うための様々な組織(研鑽会)が存在する[32]。しかしながら同時に研鑽会には研鑽会の進行について研鑽する「準備研鑽会」が存在し、さらに準備研鑽会の進行について研鑽する研鑽会も存在する。このように研鑽には階層構造があり、それに伴って会員間にも階層・序列が存在する[34]。また、テーマが予め「○○するには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か」と設定され、「○○できない」と発言すると「あなたの発言は○○するというテーマから外れている」と返されるといった具合に、「テーマそのものが結論」、「命令ではないが実質的には命令と同じ」研鑽が開かれることもある[35]
米本和広によると、各実顕地には役場としての機能を持つ「調正機関」が存在し、それらを統括する「『ヤマギシズム国家』の中央官庁」として「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調正機関本庁」が豊里村実顕地に置かれている[32]。そして、豊里村実顕地の決定に他の実顕地が従う「中央集権体制」が敷かれている[36]。近藤衛は、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元参画者の証言として、「イズム生活推進研」という意思決定機関が存在すると述べている[37]。米本は元実顕地参画者で医師の松本繁世から、「イズム推進研鑽会がすべてのテーマを出している」という内容の告白を、参画していた当時所属していた幸福会ヤマギシ会医療部の責任者から受けたことがあるという証言を得ている[38]
近藤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やその構成員が組織の実情を外部に明かすことはない[39]。さらに会員歴の長いものであっても生活実顕地の組織についてほとんど把握していない[40]。近藤は、幸福会ヤマギシ会の問題は「会の組織自体を検討する機会を与えず、客観的な情報を公開せず、実顕地は常にバラ色の理想社会だと喧伝すること」にあると指摘している[41]

研鑽会

ヤマギシ会では、何らかの意思決定が必要になったとき、みんなが意見を出し合いながら、話し合いを行うが、それを「研鑽会」と呼んでいる。ヤマギシ会では、ものごとのすべてを決めるのは「研鑽」によってである。研鑽とは簡単にいえば、話し合いのことだ。しかし、ヤマギシ会の研鑽には、ヤマギシ会独自の考え方が反映され、研鑽はものごとを決める基本となっている。
宗教学者の島田裕巳は著書『無欲のすすめ』のなかで次のように記述している。 「(ヤマギシ会の)研鑽がただの話し合いと違うのは、真理の存在が前提とされ、研鑽の場に集まった人間たちが個々人の利害を超えて真剣に話し合えば、必ずその真理に行き着くとされている点だった」[42]
富田倫生・著『パソコン創世記』には、研鑽会について次のような記述がある。少し長いが、引用する。
「ヤマギシでは、意見が異なったときは、全員の意見が一致するまで徹底して話し合いが続けられる。だが、もしも、研鑽会が単なる話し合いの会であるなら、どこまで議論を続けたところで全員の意思の一致などそうたやすく得られるものではあるまい。会議とも打ち合わせとも呼ばずに研鑽会と呼ぶ――そこには、はなすに「放」の字を当てたと同じ、意思をまとめていく作業に対する検証が込められている。研鑽会では、自分の意見を主張しながら、同時にその意見をも相対化する機能が働いている。ヤマギシの人は、そうした機能を実現するための個人の態度を「零位に立つ」と表現する。自らの意見に無意識にさまざまな偏見や固定観念が入り込んでくる可能性を自覚し、あらゆる前提をいったん棚上げにして自らも調べなおす。そうした、主張しながらそれ自体をも相対化していく「零位に立つ」とう態度を取り込むことで、研鑽会は全員の意見の一致の実現をしようとする。行動の規範なり基準を固定化してしまうのではなく、絶えることのない研鑽によって、その時点時点での最良の道を探し求めていこうとする意思を、ヤマギシでは、「無固定・前進」という言葉で表す」[43]

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

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特講)とは、幸福会ヤマギシ会管理下の施設で行われる、合宿形式の研鑽会をいう。幸福会ヤマギシ会の説明によると、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において参加者は、「自分の判断が正しいものと信じて疑わない」態度を科学的に見直し、研鑽態度と呼ばれる、「自分の考えも大いに言い、誰の言うこともよく聞いて、あくまでも『本当はどうだろうか』と主体的に検べていこうとする考え方を身につけることを目的とする[44][† 9]。1956年1月に京都府長岡京市の寺院で初めて開催され、後に国内だけでなく日本国外でも開催されるようになった。ちなみに、特講は生涯、ただ一度しか受講できない[46]
幸福会ヤマギシ会は、「決めつける観念、固定する観念」が人と人が仲良く愉快に暮らしていく上での弊害であり、愚行を生み出す原因であると主張し、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に参加することで人間の観念が固定しない状態(真に自由なる観念)へと「急速に大転換」し、「頑固が謙虚な態度に、決めつけの考え方が決めつけのない考え方に、囲いある狭い生き方が、みんなと共に繁栄せんとする広い心での豊かな生き方に転換」するとしている[44]。幸福会ヤマギシ会によると、人々が日常生活の中で身につけた常識や信念は「びっくりするほど根拠のない思い込み」であり、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に参加することでそのことが見えてくるという[44]。近藤衛は、こうした観念を固定しない思考法は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において、参画者の観念を組織の都合に応じて操作するために活用されると指摘している[47]
宗教学者の島田裕巳は、特講について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特別講習研鑽会』は普通、「特講」と略称されるが、これは、与えられたテーマを考えぬく中から、山岸の考え方・思想、つまりは『ヤマギシズム』を体験的に理解していくイニシエーションの機会であった。『特講』の参加者たちは、一週間のプログラムの中で、山岸が青年の時期から考え続けてきた様々な問題に取り組み、その問題に対する解決の方法を見出していく過程を再体験していくのである。また、『特講』が集団的告白の場として、一種の『集団的沸騰』の状態を呈したため、参加者たちに理想社会実現の運動への熱意をかきたてることともなった」[48]
作家の小沢信男は、2001年の朝日新聞夕刊の文化欄に、「一語一会 だれのものでもない」というタイトルで、特講に参加したときの様子と自分の特講に対する印象をこのように書いている。「たしか東京オリンピックのあった年だから、三十七年も昔のこと、山岸会の特別講習会に私は参加した。農業を基盤とする山間の共同体に、一週間泊り込んだのだった。洗面所の歯磨きチューブを置いた棚に、こんな小さな張り紙があった。『だれのものでもない』。なんだいこれは。いかに無所有社会とはいえ朝からお説教かい、反発をおぼえたが、そのうちこれが可笑しみになった。だれのものでもない歯磨きチューブから、朝ごとに必要量を消費して、口のまわりを白くしながらニヤニヤ笑えた。現にいまでもこうして思い出せば、愉快をおぼえる。あの小さな張り紙だけでも私はなつかしい里だ。一週間のうち、初めの三日は腹を立てていた。徹夜で討議したはてに、最初の答えと同じ結論になったりする。あいにく私は町場育ちで気が短い。が、根は愚鈍につき、ようやく気づいた。目から鼻へ抜けるのが理解ではないのだな。だれのものでもないとは、私有の否定だけではなくて、共有でもないのだな。たとえばの話、地球の皮、太初このかたこの地べたが、ほんらいだれかのものであるはずがない。と思えば胸がせいせいしませんか。その私有を忽ち正当化する理論があるならば、眉に唾をつけておこう。私有を廃して国有にしてみても、しょせん五十歩百歩だったという実験にも八十年はかかるのだものね。人間の命もまた、国家や組織や会社なんかに所有されるものではない。とは、こんにちだいぶ自明の理になってきた」[49]
また、哲学者の鶴見俊輔は、「見いだされた共同性」と題して、次のように特講について述べている。「けんさんを私が受けたのは、20年前のことで、それは今も私の考え方の底にのこっている。西洋渡来の学術語を使わなくとも、私たちの生きてゆくための重大な問題をこのようにして語り合う方法があるのか。そういう発見だった。そのようにしてくりひろげられる対話の中から、コロムブスの卵のように自然に、私たちのよりどころとしている共同性が、見いだされた。その共同性をどのように日常生活に生かすかは、むずかしい問題だが、一度見いだされた共同性から、私たちははなれるわけには行かない」[50]
さらに、元東京医科歯科大教授の渡辺一衛は、「他に類を見ないユニークさ」と題して、特講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山岸会の方々とはユートピアの会というサークルをとおして、60年代から交流があったが、私が特講に参加したのは1970年の夏であった。そのときはすぐ又訪れようと思ったのだが、早いもので、もう10年過ぎてしまった。議論は充分盡くせなかったような感じがあるが、なつかしい思い出である。誰でも自由に参加できて、しかもすぐ本質的な議論に入れるという点で、特講は他に類のあまりないユニークで、かつ民主的な形式だと思う。特講の討論のスタイルは、山岸会の中だけでなく、外の世界にももっと広げられて行っていいものと思うが、なかなかそうはゆかないようだ。ともかく貴重な山岸会の財産だと思うのである[51]
近藤は1995年(平成7年)7月に、実際に特別講習研鑽会を受講している。近藤によると特別講習研鑽会では進行役が参加者に対し「嫌いなもの」を問い、回答があると「それは嫌いなものですか?」と尋ねる。それに対しいかなる反応があっても進行役はひたすら「それは嫌いなものですか?」と繰り返し、参加者が沈黙すると次第に語気を荒げて反復する[52]。同様に個々の座布団について「これは同じものですか?」と繰り返し質問するパターン[53]や、「如何なる場合にも腹の立たない人になる」という目標を確認した後、腹が立った経験について語らせ、「で、なんで腹が立つんですか?」と次第に語気を強めつつ繰り返し質問し[54]、延々と、受講者が腹が立たなくなるまで続ける[55]パターン(怒り研鑽)もある。こうした反復は数時間[56]、一昼夜[57]に及ぶ。また斎藤貴男によると、参加者に対し研鑽会終了後も実顕地に留まるよう求め、「残れないのは我欲があるからだ」などと詰め寄る「解放研」と呼ばれるプログラムも存在する[58]
近藤によると、「怒り研鑽」における数時間にわたる反復の中で、怒りを覚えた動機を全面的に否定し、むしろ自分のほうが謝罪したいと涙ながらに語る参加者が現れた。さらに会場内には連鎖反応的に恍惚の表情を浮かべ、「もう腹は立ちません」と語り出す者が現れた。そのような反応に対し、進行役は頷く素振りをみせたという[59]。近藤は「まるで集団催眠にかかったような光景だった」と述懐している[57]。近藤と同じく特別講習研鑽会を受講した経験のある米本和広も、同様に涙を流しながら「もう腹は立ちません。楽になりました」などと語る複数の受講者の姿を目撃したとしている[60]。米本はそうした様を、「神秘的体験、法悦感に通じるような快感に酔いしれているように見えた」と述べている[61]。米本が後に受講者を取材したところ、「怒り研鑽」の最中に観音の幻覚を見、他の受講生の心中が読めるような感覚に襲われたと証言する者、雷鳴が聞こえ、食器が躍る幻覚を見たという者もいた[62]。宗教学者の島田裕巳は「怒り研鑽」を「怒りをなくすための研鑽」であり、「特講の中で一番重要」と位置付けている。島田によると、ヤマギシ会では怒りをなくすことが重要視されており、研鑽を行う上で参加者が腹を立ててしまっては冷静な判断ができないという判断の下で行われている。研鑽の目的は『腹を立てない』ではなく『腹が立たない』心境を作り出すことにある[63]
また、島田裕巳は「怒り研鑽―<私>の場合―」と題し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他の受講者についても同じだった。順番に世話係との問答が繰り返され、<私>と同じように問いつめられ、答えに窮していった。時間の経過とともに、受講者の発言も少なくなり、その分だけ、問いつめ方もきつくなってきた感じであった。問いと答えの繰りかえしは休憩を何回かはさんで数時間に及び、沈黙の続く時間が長くなるにつれて、会場の空気ははりつめた重苦しいものにかわっていった。<私>は途方に暮れていた。彼らは一体何を要求しているのか、皆皆目見当がつかなかった。時計はとっくに真夜中の十二時をまわり、長時間にわたる問答によって精神は消耗していた。 しかし、この状態は永遠に続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時刻がすでに午前二時をまわった頃であった。ある女性の受講者の発言が、脱出口を示してくれたのであった。彼女の発言はおおむね次のようだった。『今、自分が腹を立てたときのことを考えてみると、腹が立たないような気がする。今度、そういったことがあっても腹は立たない』。このひとことは<私>に強い印象を与えた。『ああなるほど、腹を立てることなどないのだ』と感じられた。何か暖かいものがこみあげてくるように思えた。それは一種の解放感であった。そして、そのときの<私>に起こった心理的な変化の中でももっとも明瞭なものは、世話係の繰り返してきた『何で腹が立つのか』といことばが、腹を立てた理由を聞いているのではなく、腹を立てることなどないではないかと訴えかけているように聞こえてきたことであった。世話係の言い方がかわ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私>の側の受けとめ方がかわったのである」[64]
特別講習研鑽会を受講した近藤は自身について、問いに対する答えを考える中で「突然、後頭部で『パチン』と風船が割れたような音」がし、「自分の意識が消し飛ぶような」感覚に陥り、「身震いするような恐怖を覚え」、やがて心地よい浮遊感、昂揚感を覚えるようになったと懐している[65]。近藤はこの経験について、「頭の中が真っ白になる。別の世界に誘われて、とてつもない真理を知ったような気分になる」、進行役の「口にすることすべてが真実であるように聞こえてくる」、「脳裏が白くなってからは、どんな発言が出たのか、まわりの様子がどうったのか、まったく記憶に残っていない。すっぽりと記憶が抜け落ちていた」と分析し、「あの『浮遊感』を体感した受講生ならば、簡単に『ヤマギシズム=真実の世界』と刷り込まれてしまうだろう」と述べている[66]。近藤は、特別講習研鑽会への参加後しばらくは「これは同じものですか?」といった進行役の問いかけが頭から離れず、しばしば気が抜けた状態になったと告白し[14]、ナンセンスな質問の中に「奇妙な『浮遊感』を感じさせる魔法が仕掛けられているようだった」と述べている[67]。後に近藤が他の参加者の経験を調査すると、同様の感覚に襲われた者はごく一部であったが、かつての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参画者でヤマギシ会に反対する立場をとる者の中にさえ「あの瞬間ほど身体全体が興奮したことは、今まで一度もなかった」と振り返る者がいた[68]
精神科医の斎藤環は米本和広がとりまとめた特別講習研鑽会のレポートを分析し、米本を含む受講者が解離状態に陥って「ある時点から自分の感じ方、知覚、感情など体験のされ方が変わ」り、中には解離性同一性障害を発症したと考えられる者もいると指摘している[69]。斎藤は受講者を対象に行ったヒアリング調査に基づき、記憶の喪失、変性意識体験多幸感、「景色が鮮明に見える」など、受講者が証言する神秘的体験と解離性症状との間に類似点が複数みられるという内容の報告を日本社会精神医学会において行っている[70]。斎藤の見解を聞き、さらにともに特別講習研鑽会に参加した者の中に解離状態が継続している者がいることを察知した米本が参加者に注意を促す手紙を送ったところ、手紙を会員に見せて「指示を仰ぐ」者が一人ならず現れたという[71]。米本は特別講習研鑽会の進行役を担当する会員を取材し、「特講によって人間が変わる素晴らしさを感じますよ。どんな人にも本来変わる力があり、それを種だとすれば、特講は水のようなもので、種に水をかけてやれば成長していく」というコメントを得た[72]。米本は特別講習研鑽会を「心の準備をする間もなく、『なんで腹が立つのか』を執拗に問われ続けるという困難な事態に対し、防御反応が働き、諸感覚の入力スイッチが切り替わって、感じ方が変わってしま」う[73]、「解離状態を招く危険な快感セミナー」と定義[74]した上で、「仕掛ける側にも仕掛けられる側にも特講が『洗脳』であるという意識がまるでな」い[† 10]と警告を発している[75]。さらに米本は、地域の会員は様々な形態の「研鑽会」を用意しており、特別講習研鑽会の受講者経験者がそれら研鑽会に参加することで解離状態が継続する可能性があると述べている[76]。幸福会ヤマギシ会は特別講習研鑽会の開催に際し、精神障害にかかったことのある者は受講できないという注意書きを受講者に対し提示する[77]。米本はこの事実と、自身が取材した古参会員の「昔は48時間睡眠なしのぶっ続けで<怒り研>をしていた。その頃はおかしくなる人が大勢いたわ」というコメントから、幸福会ヤマギシ会側は特別講習研鑽会に精神障害を引き起こす危険があることを認識していると指摘している[78]
米本は、特別講習研鑽会の仕組みを以下のように解説している。
  • 嫌いなものを問う研鑽で感情を揺さぶる[79]
  • 「怒り研鑽」で感情神経回路を断ち切る[79]
  • 上記のものをはじめ様々な研鑽を通し「解答なき問いを執拗に繰り返すことによって自我を揺さぶり」つつ、テキストの輪読を並行して行うことで「理想社会のイメージを注入する」[80][† 11]
  • 注入したイメージを絵やビデオの鑑賞によって強化する[83]
  • さらに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訪問によって、注入したイメージと現実を脳内で統合させる[83]
近藤は特別講習研鑽会について、「打ち上げ花火のようなもの」で、「たったの1週間で消えてしまった夢幻花火が忘れられず、一部の人々は社会活動や研鑽学校に参加していく」のだと分析している[84]。近藤によると、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への参画のために受講しなければならないセミナー(研鑽学校)で行った研鑽会では、特別講習研鑽会におけるような「忘我恍惚体験」をすることはなかった[84]。近藤と同じく特別講習研鑽会および研鑽学校に参加した武田修一も、研鑽学校について「期待に反してさほど楽しいものではなかった。それは『怒り研』のような劇的な体験をともなうものではなく、淡々とした研鑽の連続だった」と述べている[85]鶴見俊輔は特別講習研鑽会の手法について、ソクラテス老子といった思想家になぞらえると同時に、「中共洗脳にも似て」いるとも述べている[86]本多勝一は「特講」の手法について「山岸会は民衆のレベルでのソクラテスのようなものだ」と絶賛している[87]。一方、小田実は「特講」の手法について疑問を持ち、「どうしても納得しない村人が出た場合はどうするのか?」という質問をしている[引用 1]。小田が抱いた疑問について米本和広は、社会実顕地参画者が「しつこく食い下がれば、まだ『我執』が取れていない人だという烙印を押され」、「最後まで従わなければ、『振り出し寮』の異名を持つ無期研鑽学校に入ることを<提案>される。ここに入れば一人でいつ果てるともない作業と研鑽を繰り返し、無条件で研鑽の結果を<公意>として受けとめる人間になるまで出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証言を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元参画者から得ている[88]
特講が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であり、洗脳であり、危険であるとする主張に対し、特講を受講した杉本厚夫京都教育大学教授(当時、現・関西大学人間健康学部教授)は、既存の固定化された常識から開放され、その常識自体を再考してみるという点において、近代の社会科学に立脚しているとした上で、「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は、人の観念を外発的に誘導し、固定する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ではありません。逆に、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されている自分に気づき、そこから自分を解放する機能を持っているといったほうがいい」と述べている[89]
米本が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参画者の一人から聞いたところによると、特別講習研鑽会受講者の6%弱が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に参画するという[90]。幸福会ヤマギシ会やその構成員が特別講習研鑽会の内容を外部に明かすことはない[39]。しかし1995年(平成7年)以降、マスコミが特別講習研鑽会の内容について盛んに報道するようになった[91]
ジャーナリストの斎藤貴男は特別講習研鑽会の本質は「どうとでも言える話題を強引に一つの方向に導き、あたかもそれが普遍の真理であるかのように教え込む」ことにあるとし、「緊張と弛緩を巧みに組み合わせた」その手法について自己啓発セミナーマルチ商法感受性訓練との共通性を指摘している [92]
東京シューレ理事長の奥地圭子さんは、特講に参加して、特講中に感じたことと、自分がどのように変わったのか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あの特講は、これまでに出会ったことのない合宿で、自分の生き方、考え方を根底からゆさぶってしまった大変な意味をもつ体験でしたが、しかし(もしかしたらそれ故に)本当に心底楽しかった(正確には楽しくなった)。あの雰囲気は忘れられません。 特講の楽しさは、どこからくるのかな。すぐ理屈で考える癖で、それについて考えてみたかったのだけど、第一に、全国ちがう所から、全く赤の他人が、それも年齢、性別、職業、関心その他すべてちがう様々な37人が集ったというのに、37人の全員に心から親しみを覚える間柄になっ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す。特講がすすめばすすむほど親愛の情を感じ、その中で話したり、生活したりする心楽しさは、特講の土台になって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人間誰とでも、仲良くできるし、それは実に楽しいものだという実感は私にとっては「みんな仲良くしなければ」というたて前をはるかにこえて、目のさめる思いでした。人間関係で面白くない思いをする職場の人だって、一人残らずみんな仲良しになれるんじゃないかという確信をもちました」[93]
さらに、奥地さんはこんなことも指摘している。「第二に考えることの楽しさの発見があります。私は、それまで一人前に、自分はものを考えられる人間だと思っていました。しかし特講の過程で、本当は、何も考えていなかったんだ、一体何を考えてきたんだろうとつくづく感じさせられました。はじめのうち考えるということが、その先何もなくて苦しく感じたこともありましたが、皆で考えていく中で、はっと思う発見がある、今まで思ったこともない考えに考え当る面白さ、というのは、実にそう快な目の前がひらける気分で、それが楽しくて仕方なかった。講師がいて何か教えてもらう会では、ちょっと味わえなかったと思います。特講から帰って、前より一層考えなくてはならない問題がふえたのですが、悩みというより、考えた結果が楽しみで「今度はあのことを考えてみよう」というかんじなのです」[94]
そればかりではない。奥地さんは特講の体験を次のように締めくくっている。「第三に、話し合いの楽しさです。はじめ自分の方でかきねをつくって、こだわったり、反発を感じたりもしていたのですが、いつのまにか、文字通り氷解してしまって、どんなこともすっと話せるようになった。人の話も、たとえ自分にとって否定的な意見もすっと聞ける、そしてどうかな、と素直に考えられる、そこにはきめつけもなければ、こうみられやしないかという見栄やおそれもない、自分の話も(誰の話も)どんなことも、ちゃんと受けとめてもらえる、そんな話し合い、そういう本当の話し合いというのを日常どれだけやっているでしょうか。ああいう話し合いなら、いやな職員会議も、毎日やってもいいくらいで、話し合いというのはこんなに楽しいものかと思いました。七日間も話し合いばかりやっていられるか、と参加前にもった先入観は、すっかりどこかへ消えました。 まだまだあるのですが、この三つを考えただけでも、これらは、ヤマギシズムでいう全人一体、零位に立って、無固定前進の研鑽でいく、という深い考え方だからでき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自分がそのことを体で感じ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のは、かけがえのない経験だったと思うのです。そこで、私は、私の職場である学校でも、この三つだけでもできたら、どんなに楽しい学校になるかと思いました。そして、それは、できるように思えるものですから、時間をみつけては少しずつ話をしています。今まで、仕事以外の話をしたこともなかった事務の人にまで声をかけたくなって、こんな会があるのよ、こんなやり方があるのよ、こんな生き方をしている人がいるのよ、と話しています。誰とでも話ができる自分を感じて、誰かと話をするのが、とても楽しいのです。『二学期になってから、奥地さん、どういうわけか、声をかけやすくなった』と他学年の方から言われて、だいたいはおっかない印象の方が強かった私は、うれしい思いをしているこのごろです」[95]
野本三吉は、こう述べている。「ぼくが、はじめてヤマギシズムに触れたのは、三重県春日山の本部で行われている『特講』(特別講習研鑽会)という一週間の合宿討論会だったが、その時の直観では、東洋思想に潜在している『無』の思想といったものが、クッキリとその中核をなしているように思えた。そして、その『無』の思想が、ぼくに有効に響いてきたのは、話し合いを唯一絶対にして教え込まれた『戦後民主主義』に対する不信感がぼくにあったからなのだが、話し合いを中心にした民主主義の原理というのは、結局は非常に表面的なもの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思いがあって、言葉によってわかりあえるなどというのは、ほんの一部のことであって、もっと本質的な部分は、沈黙の中にあって、それは、論理以前の世界なのではないか――そしてそこに焦点をあてなければ、真の対話はないと考えていたからではないかと思う」[96]

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


ヤマギシズム社会 岡部実顕地(埼玉県深谷市

実顕地内施設(愛和館)の食事風景

実顕地内施設(愛和館)の食事風景
幸福会ヤマギシ会は、「心も物も充ち満ちた真の幸福社会」をヤマギシズム社会と呼び[26]、ヤマギシズム社会を実践する場として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通称「ヤマギシの村」)を33箇所(うち26箇所は日本)運営している[10]。幸福会ヤマギシ会によると、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中では「一体生活」、「『財布ひとつ』の生活」と称する生活が営まれ、農業・畜産・林業等が行われている[10]。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内の生活は原始共産制と評されることもある[6][97]村岡到によると、「ヤマギシ会に参画する人は、『ボロと水でタダ働きする士は来たれ』という呼びかけに心うたれ、共鳴した人」である[98]
作家の富田倫生によると、ヤマギシズムの考える理想社会の実現方法には2つあり、ひとつは既存の組織、既存の社会のなかでのヤマギシズムを浸透させる方法であるが、もう一つの方法、すなわち既存の社会での生活から離れ、ヤマギシズム社会のモデルをつくり、即座に一体生活を始めようとする方法を実現するための実験を行う場が実顕地であるとしている(富田によると、実顕地には他にヤマギシズムを実際に表すという意味もある)[99]
実顕地へ参画するには、2週間のセミナー(研鑽学校)を受講しなければならず[100]、参画決定後は半年間を「予備寮」と呼ばれる施設で過ごす[101]。実際に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に参画した近藤衛によると予備寮で排除され、社会実顕地を去る参画者もいたという[102]

生活のあり方

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では貨幣が流通しておらず[103]、実顕地の中で暮らす者は私有財産のすべてを幸福会ヤマギシ会に「無条件委任」する[17]。近藤衛は参画に際し、ヤマギシズム生活調正機関本庁に宛て「物件、有形、無形財、及び権益の一切を、権利書、証書、添付の上、ヤマギシズム生活調整機関に無条件委任致します」と書かれた誓約書に署名捺印を求められ[104]、さらに脱退(参画取り消し)時にはヤマギシズム生活調正機関本庁に宛て、委任した財産について「今後一切返還請求や、金銭請求をしないことは勿論、何等の異議も申し立てません」と誓約する内容の脱退届に署名捺印したことを明かしている[105]。近藤によると、参画時の誓約書には「本財」として「身」と「命」[† 12]も含まれている[107]。実顕地の中での労働に対し賃金が支払われることもない[17][108][† 13]。しかしながら帳簿の上では賃金が支払われていることになるため、実顕地を去った者には財産が残されていないにもかかわらず、帳簿上の収入に基づき税金が請求されることになる[109]。近藤は、一切の私有財産の放棄が過去の自分と決別し、人生を再生させる解放感をもたらすケースがあると指摘している[110]。米山和広は元参画者から、「財産を多く持ち込んだ人は特別待遇されていた」という証言を得ている[111]。幸福会ヤマギシ会は参画者に私有財産をすべて放棄させる一方、相続人の地位は放棄しないよう通達を出している[112][† 14]
鶴見俊輔はこう指摘している。「山岸巳代蔵は所有権を主張していないんだね。かれはまた、一種の問答をつくったんです。『何が正しいのか』『これはだれのものか』。それが山岸会の研鑽になった。そういうことを通して、今は農産物、酪農の産物について良質ののをつくるようになって、外の社会との関係がいいんですね。この中に入ると、所有がないからお金なしで暮らせる」[114]
近藤衛は、自身が生活実顕地の中で生活を送った1999年(平成11年)2月から12月にかけての住人やその生活の実情について、以下のような分析・考察をしている。
  • 非常に勤勉である[115]が、総じて個性がない[116]
  • 人間関係は表面的には淡白である[117][† 15]。「ヤマギシに友人はありません」という標語が存在し、「オトモダチ」という言葉が揶揄に用いられる[118]
  • 労働環境には厳しい面もある[† 16]が経済的な不安とは無縁でいられる[116]
  • 組織の意思決定のプロセスはもちろん、意思決定プロセスへの参加者も明かされない[120]
  • あらゆる任務から半年に一度自動的に解かれる(自動解任)建前がとられているが、実際には「重任」が存在し、権力が固定されることもある[37]
  • 「ごく日常的な些事」を除いて情報が不足しており[121]、住人の関心事もまた些事に限定される[122]。誤解や迷妄が生じやすい環境にあり、「そこに『理想社会』のバラ色のイメージが重なり、実顕地生活を特別視する」[123]
  • 私有財産制の否定と共有は徹底しており、1980年(昭和55年)以降は衣類にまで至っている[124]。実顕地にパンツを持ち込んだ近藤は、「世話係り」からどうして共用のパンツを履かないのか問い詰められたという[125]
  • 予定を自分で決めることができない場面が多い。「世話係り」との「研鑽」において世話係りが結論のみを伝え、それに「ハイ」と従うことが要求される(ハイでやります)[126]。実顕地内には「私意尊重公意行」というスローガンが存在し、これを遵守することが参画の条件となっている[127]。このスローガンは「みんなの考えでやろうとする私の意志」がまず存在し、みんなの考えにはかった結果(公意)を、私の意志として行動」することを意味する。具体的には「研鑽結果である係りからの公意を、積極的に自分の意志として、その通りやろうとする」ことを公意行と呼ぶ[128]。幸福会ヤマギシ会は公意行こそが真の自由だと説き[129]、住人の側は「どんな指示でもわだかまりなく実行できる」という意味で「何でもやるのが本当の自由だ」と言い、理由説明のない指示に従うことで「真の自由」を感じる[130]。「事実」と「思い」とを分離する思考がとられ、思いは軽視される[131]。「〈思い〉を断ち切る」という意味で「-を思い切りやる」という言葉が用いられる[132]。ただし近藤は、1995年以来の組織の衰退を受け、1998年(平成10年)3月以降、「自分がやりたいことをやる自由」が認められる傾向が生まれたとも述べている[133]
  • 懐疑的な部分がある反面、生活実顕地内のルールや「世話係り」にはきわめて従順である[134]
  • 実顕地内の事柄を善意に解釈する半面、一般社会に対し強い不信感[† 17][† 18]を抱いており、「善と悪の境界」、共同体を外部社会から隔てる心理的境界がうかがえる[137]
  • 住人同士の結婚を統括する機関(結婚調整機関)が存在する[138]。離婚においては、「世話係り」が間に立つ[117]
  • 勤勉な男性には「結婚する〈資格〉」が与えられ、勤勉でないものはいつまでも結婚できずにいる[139]。離婚した男性には再婚の機会が少なからずあるが、中年以上の女性は孤独なままである[140]
  • 夫婦関係については夫唱婦随が説かれ[141]、夫は妻をファーストネームで、妻は夫を姓に「さん」をつけて呼ぶ[142]
  • 夫婦が水入らずの生活を送ることはない[143]。その他、集団の中で誰と誰が夫婦なのか判別しにくい[143]、子供は性別・年齢別に集団生活を送る[142]など、血縁・婚姻関係が希薄となる環境が揃っている[142][† 19]。さらにヤマギシズムに従えば一夫一婦制には必ずしも拘束されないことになり、「三位一体の愛情」を実践した者もいる[138]
村岡到は、実顕地の生活について以下のように述べている[98]
  • 食事は1日2食である。「愛和館」という食堂が午前10時30分から21時まであいており、村人は愛和館がオープンしている間の好きな時間にやってきて、食事をする。自室に料理をもち帰って食べてもかまわない。
  • 豊里実顕地には診療補所がある。診療所には医師がいるが、彼らはヤマギシ会参画者である。病気になれば近隣の病院に通うが、医療費はヤマギシ会が負担する。
  • 住居は、夫婦一組で6畳1室か2室。家賃はいらないし、世間の常識では考えられないが、ドアにカギ(錠前)がない。
  • ヤマギシ会では高齢者のことを、「老いてますます蘇る」という意味を込め「'''老蘇'''」(おいそ)と呼んでいる。村岡到は、「ヤマギシ会は日本が迎えている高齢化社会時代における理想的な〈モデルケース〉とすらいえる」と述べている[144]
米本和広は、一般公開された三重県豊里村の実顕地を訪れた際に受けた印象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 個人の嗜好を満たすものが見当たらない[145]
  • 参画者は、自身に関係しない事柄については「知らないというより関心すらない様子だった」[32]
近藤衛は、住人に割り振られるID番号をもとに1999年(平成11年)までの離村者と離村率を計算している。近藤は発足以降延べ7800名が参画し、500名が参画中に実顕地で死亡したと概算し、1999年(平成11年)時点での参画者が約2150名であることから、離村者を5150名、離村率を約66%と推計した[146]

老蘇の生活

「現在の日本では高齢者問題と少子化が深刻な問題になりつつある。65歳以上はいまや3000万人、24%となっている(2012年9月現在)。さらに、都会では核家族化が進み、一人暮らしの独居老人が増え、孤独死も社会問題化している。また、高齢者の医療費負担も馬鹿にならない。日本全国を見渡してみると、地方によっては過疎化が進み、限界集落といわれる過疎集落も増加の傾向にある。設備や条件の良い老人ホームは入居費や生活維持費が高額で、とてもふつうの暮らしを余儀なくされている庶民には手がでない」[147]
では、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での高齢者たちの暮らしぶりはどうだろうか。「ちなみに、ヤマギシ会では高齢者のことを「老蘇」(おいそ)と呼んでいる。『老いてますます蘇る』という意味が込められているのだ」[148]。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での老蘇の暮らしぶりや生き方を取材して、村岡到・著『ユートピアの模索』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ヤマギシ会は日本が迎えている高齢化社会時代における理想的な〈モデルケース〉とすら言える。日本に存在する自主的な一定の社会集団のなかで、高齢者をこれだけ抱え込んでいる集団は他にはない」[149]

参画者の結婚および出産・中絶

近藤衛によると前述のように、実顕地内には住人同士の結婚を統括する機関(結婚調整機関)が存在する[138]。米本和広が元参画者に取材したところによると、参画者の側から結婚を「提案」したところで「研鑽」・「調正」の結果それが認められることはなく、実顕地内で成立する結婚はすべて担当者からの「提案」による「調正」結婚である[150]。元参画者によると強制ではないが拒絶すると執着があるというレッテルが貼られてしまうという[150]。米本によると担当者がカップルを決める根拠となるのは山岸巳代蔵の著書『世界革命実践の書』であり、同書において山岸は「人種改良」や「悪性遺伝は子孫に不幸を齎す」ことを訴えている。米本は、同書の思想を「優性思想に凝り固まったナチストの科学者が書いたような、障害者全面否定の思想」と批判している[151]
米本の取材に対し担当者は、「提案」される夫婦の組み合わせに対し、「20代前半の女性と30、40歳代の男性というパターンが多い」、「若い女の子の方が優秀な子どもを産む」、「男は何歳でもいい」と回答した[152]。米本によると新規参画者には30、40代の主婦が多いため、結婚の「提案」の対象となる女性はヤマギシズム学園高等部を卒業して2、3年の女性である[153]。米本は、「彼女たちは『我』を主張することを長い間禁じられてきたため、『イヤ』と表現す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いる。……脱走しない限り、女の子たちは中年男性の快楽と『優秀な子』を産む道具と化す」と批判している[153]。米本によると、娘が中年の参画者にあてがわれることを嫌い実顕地を去った参画者もいる[153]。結婚する男性について米本は担当者から、「やはりヤマギシできちんとやれている人がいい」というコメントを得ている[153]。近藤によると前述のように、勤勉な男性には「結婚する〈資格〉」が与えられ、勤勉でないものはいつまでも結婚できずにいる[139]。そして離婚した男性に再婚の機会が少なからずある反面、中年以上の女性は孤独なままである[140]
米本によると担当者の「調正」は出産にも及び、出産の許可が下るとコンドームが支給されなくなる[154]。「研鑽」の結果、担当者が「今回は産まないことにしましょう」と中絶を促すこともあり[154]、高齢の女性については「まず間違いなく中絶ということになる」[154]。中絶手術は参画地外の病院で行われる[154]

豊里ファーム


豊里ファームの店内
ヤマギシ会では、野菜や果物、加工品などを販売する「豊里ファーム」を三重県津市にオープンした。その様子を、「農業共済新聞」(2013年8月28日付)は次のように伝えている。その概略はこうだ。
「農場から食卓へ――野菜や果物、自家農場産の肉や卵、自家工場で加工したパン、牛乳、ヨーグルト、プリンなどを販売する豊里ファーム(ヤマギシズム生活豊里実顕地農事組合法人)が、先ごろ、津市にオープンした。野菜・果物は津市・伊賀市四日市市の畑、約20ヘクタールで生産。商品のすべてを安価で、生産から加工、販売まで一貫して取り仕切っている。以前は、各地域でトラックでの移動販売や農場・農地近くでの月2回程度の販売だったが、津市高野尾町に約550平方メートルの建物を購入したのが始まりだった。その後、みんなで話し合い、「自分たちが育てた食品を消費者に直接提供し、喜んでもらえたら」と考えた。現在は、週間カレンダーがあり、「お値打ち品」の曜日が決められているので、消費者は目当ての食材をさらに安く買える(略)[155]

東日本大震災への対応

福島第一原子力発電所事故に対して、ヤマギシ会は国際NGOのJENを通じて、延べ約800人を送り出し、食材持ち込みで、石巻の中屋敷地区で4月から7月まで毎日300食、鹿妻地区で5月から6月初めに毎日400食の炊き出しをした。人件費をゼロとしても食材の費用は巨額と言える。前記のように8月に子ども楽園村に招いた5人はその縁でやってきた。8月と12月には合わせて309万2220円をJENにカンパした(ほかに豊里などいくつかの実顕地から新聞社などへ500万円カンパした分もあった)。また、三重県ホームページの「東日本大震災に伴う支援に関する情報」の中に、「三重県被災地住民住宅・一時的滞在場所情報提供窓口」として、公営住宅や社宅と並んで「団体集団住宅等」として「津市 共同住宅 6畳間×50部屋(100人程度)、家賃無償、当面3〜6カ月間」と、豊里実顕地と春日山実顕地が紹介された。実際に応募した人はゼロだった(メンバーの親族が一時的に20人ほど避難した)。津市全体でも市営住宅に避難した人は約10世帯だという。実際に応募する人が現れて実顕地で生活することになったら、さまざまな問題が新しく生じると予測されたから、三重県にこの提案をするかどうかについては、反対の意見もあり、かなり討議を要したという。地域に開かれた実顕地をめざす一つの決断だった[156]

ヤマギシ会の農業

『農業が創る未来』の著者である村岡到は、ヤマギシ会の農業について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ヤマギシ会は、日本農業全体が衰退しているなかで逆に着実に実績を積み重ねている。(略)ヤマギシ会は、その年間の売上高が農事組合法人のトップに位置する実績を上げている。この事実はメディアでも取りあげられた。情報誌『FACTA』五月号では小さな記事ではあるが、『農事組合法人のトップに躍り出た「ヤマギシ会」」と見出しをつけられ、「年間売上高は約六六億円、約七五〇人(豊里プラス春日山)のメンバーが共同生活している』[157]
また、村岡はヤマギシ会の農業は、農業関連の業界などで早くから注目されていた、として、「大阪農業ジャーナリストの会」や「現代農業」「米穀新聞」、小松作業の「鳥と人」「環境新聞」「FEEDING」「鶏卵肉情報」「養豚情報」「牧場ガイドブック」(家の光協会)、黒田宣代著『「ヤマギシ会」と家族』などでヤマギシ会の農業が紹介されていることを記している[158]
さらに、村岡はこうも述べている。「ヤマギシ会の農業を研究テーマに設定して全面的に明らかにする労作も発表されている。すでに四半世紀前の一九八八年に、農林水産省の職員・足立恭一郎氏は『有機農業』という視角から、ヤマギシ会の営為に着目した。足立氏は、農林省農林水産政策研究所の雑誌『農業総合研究』で、『「産消提携」による農の自立——ヤマギシ会の営みを事例にして』といして、ヤマギシ会の農業の実態を克明に研究し、そこに日本農業の活路を見出していた」[159]。「足立氏は、ヤマギシ会の農業がこの急成長を可能にしたのは要件として、参加者が『修養の思想』(「研鑽の姿勢」)で事に当たっていることを上げ、彼らの労働観に着目し、その独特の『適期作業』の有効性を分析している。その労働観とは『結果を求めて過程を楽しまず、自分のためだけにする労働は貧しい』と語る心境である。『適期作業』とは、『場に収まって、機に動く』と表現されている、労働のやり方である」[160]
また、村岡はヤマギシ会の農法の特徴について次のように書いている。「ヤマギシズム農法に触れたどの著作にもよく指摘されているのは、ヤマギシ会の農場で飼われている鶏は静かだということである」「実顕地の鶏はほとんど尻つきをしない。騒いで鳴くこともない。鶏にストレスを与えないように育てているからである。豚の場合も同じように、尻尾がついているのが特徴である。普通の養豚では、鶏と同じでストレスによって互いに尻尾をかじる(尻かじり病)ので、生まれるとすぐに尻尾をちょん切ってしまうので、尻尾はないのだという。だから、養豚家がヤマギシ会の豚を見ると尻尾がついているので驚くという」「鶏でも豚でも牛でも糞が発酵作用によって臭気がしない。あるいはきわめて臭わない。また、ヤマギシズムの動物たちは、見知らぬ人(見学者)たちが前に立っても、驚いたり騒いだりすることはない」[161]
「ヤマギシ会では、農業において、家畜の糞も尿も貴重な生産物である、という考え方をもっている。そこで、稲作のワラと糞や尿でできる堆肥との交換が成立する。近隣の農家に堆肥を無料で配り、ワラと交換する。そのワラがエサの材料になる。循環農業である。別言すれば、「自然界の理」に適った農法を追究している。機械については、どう考えているのか。ヤマギシ会の農業では、機械の活用は否定されていない。どの実顕地でも最新の高価な農機具が導入されている。『手抜き作業はいけないが、省力栽培は大切である』としている。だから、農場には機械類が多い。ただ、『能率よりも仕事の質を第一義として』いる。農業をまともに営むためには、稲作などに特化するのではなく、同時に畜産もやることが必要で有効である。ワラと堆肥のような循環を実現できるからである。そのためには、両方展開できるだけの土地の面積が必要となる。各地に広い実顕地をもっているヤマギシ会の優位点がここでも活きる[162]。「この『循環農業』は、広大な一カ所での農地において有効であるばかりか、地域を異にする複数の農地の連携・協力としても威力を発揮する。例えば、現在では、大潟実顕地では米作、岡部実顕地では深谷ネギ、飯田実顕地ではリンゴ、六川実顕地ではミカン、穂別実顕地ではメロン、夕張実顕地ではジャガイモなどとそれぞれが土地に適した作物を育てている。それらがまさに有機的に連携・循環している。損得計算で、儲けが出るところに出荷するという、市場経済の論理を超えてつながっているからである。逆に台風などで実害がでれば、他の実顕地に修理に飛んでいく。(略)ヤマギシ会は、農業と子どもの教育と結合させた。(略)子どもたちは、鶏や豚や牛を育てる担い手になり、そのことを通じて、自然の摂理や人の心について学ぶ。農業と教育を結合できたところに、ヤマギシ会の類い希な独自性と優位性が秘められている」[163]。「ヤマギシ会の農業のもっとも深い特徴は、実は農業という次元を超えた領域に存在していると見たほうがよいようである。(略)大潟実顕地をスタートした直後の一九九二年に『米穀新聞』に掲載されたインタビューでの沖永和規さんの次の発言がうまく説明している。『農業は人を育ている。農の営みで人を育てるという要素が大きい。作物や動物の世話をすることは、思いやる心を育てる。農業における教育後からはずいぶんあると思う。そのために農業を取り入れており、農業そのものが目的ではない。人が育つことで農業も育つ』と語り、その一例として、『例えば、種をまくときには適期がある。自分の都合だけではダメだ。今日が種をまく一番いい時期だとすると、自分がいやでもやらなくてはならない』と話している。『ウチ(ヤマギシズム学園)の子どもたちは、雨が降ったらすぐ畑に飛び出す。(略)『母なる大地』という言葉があるが、そこにしっかりと根づいた人間の生き方を追究するところに、ヤマギシ会の最奥の真髄、あるいは強さが秘められているようである」[164]

沿革

創成期

山岸巳代蔵が提唱する理念を実践するための団体(社会活動実践母体)として、1953年(昭和28年)に発足[5]。同年、山岸式養鶏普及会発足[165][166]。山岸巳代蔵は鶏糞による米の増産と、そのころまだ貴重であった鶏卵の増産を目指す篤農家であった。1956年(昭和31年)には「養鶏の秘匿公開」を謳い文句に第1回の特別講習研鑽会が開かれた[167]。巳代蔵は養鶏技術を伝授することに積極的ではなく、むしろ難解な言葉を使って精神論を説くことに熱心であった。そのため離脱者が多く現れる一方、熱心に耳を傾ける者も現れた[168]。巳代蔵から秘匿技術を明かされたという会員の一人によると、巳代蔵が出し惜しみした技術は驚嘆するような内容ではなかったが、密かに伝授された秘密を共有することで信奉者間の連帯感が強まったという[169]。後に秘匿技術を知る者は「理想社会の真髄を知る者」として会の指導者的立場に立つことになる[170]1956年に第一回特別講習研鑽会が開催され、同年および翌年の特別講習研鑽会への参加者はあわせて4500名を超えたという。創成期のメンバーの生活は、「昼食は全員甘藷」「醤油なし、おかずなし」というほどどん底にあえいだこともあったという。その苦悩ぶりを知る証言が、『Z革命集団・山岸会』のなかに記述されている。

成長期


1959年頃の山岸会の活動
1958年(昭和33年)「百万羽科学工業養鶏」構想が発表され28名が参画する。その3ヵ月後には三重県阿山郡伊賀町にて「ヤマギシズム生活実践場春日山実験地」が発足。
1959年(昭和34年)7月、特別講習研鑽会の受講者を監禁したり、ニセ電話で家族を呼び出して強制的に受講させていたとして幹部12名が監禁・脅迫の疑いで逮捕される(山岸会事件[171][172]後述)。この事件はマスコミによって大きく取り上げられ、会のネガティブなイメージが全国に広まった[173]。しかし一方で事件後、左翼系文化人による「思想の科学」の支持を得る[174]。山岸巳代蔵はもともと、アナキズムマルクス主義に影響されたことのある人物であった[175]
1961年(昭和36年)5月、巳代蔵が他界。会の指導者の地位は杉本利治に引き継がれた[176]。同年「ヤマギシズム中央調整機関」、「ヤマギシズム研鑽学校」が発足。その後1968年(昭和43年)頃より始まった全共闘時代にコミューン運動としてヤマギシが捉えられ、従来の農家出身者に代わり、学生運動経験者などの先鋭的な左翼思想を持った若者が多数加入した。特講を受講した哲学者の鶴見俊輔は、ヤマギシ会にベトナム戦争の脱走アメリカ兵を長い間預かってもらったと語っている。
山岸会事件の影響から会は「冬の時代」を迎えたが、1970年代に「自然食品を生産するコミューン」として再び注目を集めるようになり[177]、自然食ブームに乗って生産物の流通体制を整えていった[178]。以降1990年代まで会の経済規模は拡大を続け[179]、その一方で生産に携わる会員は幹部からの指示を全面的に受け入れ、長時間労働することを余儀なくされていった[180]。同じく1970年代には学生運動に挫折した者[181]や「コミューン志向の学生」[182]が会に参画した。ジャーナリストの斎藤貴男によると、1970年前後には革命運動に挫折した全共闘の学生が「最後のユートピア」を求めて大量に流入したという[174]
1980年代には「心あらば、愛児に楽園を」と謳い、子育てや教育への不安や関心を背景に一部の教育者や子供をもつ者からの支持を得、発展を遂げた[183]。1983年から1990年にかけて10の社会実顕地 が新たに建設され[124]、1984年に子供を除き740名であった社会実顕地への参画者は1995年には2270人にまで増加した[124]。その一方、社会実顕地内では1979年9月に食事や入浴の作法など生活の細部にわたる「生活法」が定められ[184]、さらに1980年代に入り「真実の生き方に酒・タバコは必要ない」として禁酒禁煙が言い渡されるなど、規律が強化されていった[124]。「ハイでやります」「よく聞いてその通りやります」というスローガンが掲げられ、規律に従わない参画者は「何故その通りやらないのだ」と昼夜を問わず「研鑽」の対象となった[185]

退潮・内閉

1980年代以降、ヤマギシ会は社会から好意的にみられ[186]1986年以降は百貨店における生産物の販売も始まっている。しかし1994年(平成6年)に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元参画者が「ヤマギシを考える全国ネットワーク」[† 20]を結成し、幸福会ヤマギシ会が抱える負の側面を告発すると[187]、会に対する批判や疑惑を取り上げるメディアが続出した[188](なお、「ヤマギシを考える全国ネットワーク」結成前の1991年8月、4000人が参加した「子ども楽園村」の開催中に幼児が送迎バスのなかに放置されたまま死亡する事故が起こり、マスコミによって報道されている)。1995年以降、同会に対し10件を超える訴訟が提起され、原告側は「被告法人」が「理事・幹部による参画者に対する支配管理」、「監視の常態化」、「日々の研鑽という名目の参画者に対する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によって「参画者の思考停止状態を維持し、物言わぬ労働ロボットを生産している」と訴えた[189]
さらに、「ヤマギシを考える全国ネットワーク」結成と時を同じくしてオウム真理教が起こした事件の捜査が進展し、幸福会ヤマギシ会を同種の危険なカルト集団として批判する風潮が生まれた[190]1994年(平成6年)に500名いた年末年始の特別講習研鑽会(正月特講)への参加者は、1995年(平成7年)に400名、1996年(平成8年)に130名、1998年(平成10年)に20名と減少を続けた[190]。幸福会ヤマギシ会が生産する農産物の売り上げについても、幹部が減少を認めるに至った[191]
加えて1997年(平成9年)には国税局の税務調査を受け、書類上でのみ支給され実際には支払われず組織内の機関にプールされていた社会実顕地参画者に対する給与[† 21]について贈与にあたると指摘され、200億円の申告漏れを理由におよそ60億円の追徴課税が課された[192]
幸福会ヤマギシ会は1998年(平成10年)10月、「村から街へ」をスローガンに、「中高年は20代30代の若者のために、実顕地を出て街で暮らそう」と呼びかけ、40歳以上の参画者を「出精平使」と称し外部社会に送り出す方針を打ち出した[193]。さらに実顕地の中では、「子供が〈学園〉でやれなくなった場合、親は子供と一緒に村を出る」という不文律が布かれ[194]、離村勧告の対象となりうる矯正機関への入所者を増やす[195]など、参画者を増やすよりも減少させる動きを見せるようになった[195]。近藤衛によると、1999年(平成11年)に約2150名だった参画者は、2001年(平成13年)1月には子供を除き1700名にまで減少した[196]。こうした動きについて近藤は、集団農場の経営効率化策だと分析[197]するとともに、会が内閉期[† 22]に入ったと指摘している[199]
村岡到『ユートピアの模索――ヤマギシ会の到達点』によると、外部からの批判を受け幸福会ヤマギシ会は以下のような改善を行ったという[200]
  1. 1998年4月から、学校に通う子どもが朝食を摂れるようになった(それまでは二食)。
  2. 1999年からメンバーに月1万円の小遣いを支給するようになった。
  3. 1999年春からは、「ヤマギシズム学園高等部」に進学した者が通信制高校に入学できるようになり、翌年春からは、全日制高校にも入学できるにようになった。
  4. 2000年2月からは「もっと親が子育てに関わった方が良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になり、夕食は親と一緒にするとか、毎週末には親とともに過ごすようになった。
  5. 飲酒についてもほぼ全面禁酒からほどほどに飲酒する人も増えてきた。(6)脱退者への「返金」についても、出資金に応じて生活準備金を用意するようになった。
島田裕巳は、「ヤマギシ会は日本企業の究極形?」と題して、こう述べている。「ヤマギシ会は無所有の制度を確立し、それを効果的に運用することで、急激な拡大を実現した。無所有の共同体では、組織と個人が融合し、極めて効率的な形で大きな力を発揮する。一般の社会がそうした仕組みで動いていないなか、人材や経済力をもっとも効果的に活用できる仕組みをもつことは、最大の強みだった。しかし、あまりにその発展が急であったために、組織のなかにさまざまな問題が生まれることになった。さらには、外部からの批判も受けるようになる。そうなると、社会とは異なる独自のシステムを採用していること自体が裏目に出て、そのあり方そのものが批判の対象になっていった。 ちょうどそれは、日本社会が急速な経済発展をとげて、世界第二の経済力を身につけた時点で、アメリカ経済摩擦を起こしたのに似ている。日本は、組織と個人を一体化することで極めて効率的な企業組織を作り上げ、生産力を向上させたが、それはアメリカにとって大きな脅威となった。アメリカ企業の雇用に悪影響が及び、日本は批判にさらされることになった。ヤマギシ会は、そうした日本社会のミニ版であったとも言える」[201]

トラブル・事件

山岸会事件


山岸会事件を報じた毎日新聞(1959年7月5日付)
ヤマギシ会が1958年(昭和33年)に三重県に設立した共同体「山岸式百万羽科学工業養鶏株式会社」が、同県阿山郡伊賀町で百万羽の鶏の飼育を目的に開拓を目指したものの難航する中、構成員の知人らを「ヨウアリ、スグコイ」など真意を隠した内容の電報で呼び寄せ、1959年(昭和34年)7月の特別講習研鑽会に参加させた事件。「家族が監禁されて講習を受けさせられている」といった訴えが数多く寄せられ、7月10日に山岸会幹部9名が三重県警に逮捕された[202][203]。山岸巳代蔵にも逮捕状が出たが行方をくらまし[177]、9か月の逃亡生活を送った末に逮捕された[174]。山岸会は「謎めいた思想集団」、「謎の革命集団」として報道された[204]。「春日山50年のあゆみ」によると山岸会事件が実顕地に与えた影響は甚大で、春日山実顕地の財政は逼迫し、食料や衣料にも事欠き、多くの構成員が出稼ぎに出たという[205]。1961年4月28日、逮捕された14人に禁固1年から10カ月、執行猶予2年の判決が下った[205]

ヤマギシズム学園にまつわる問題

1985年(昭和60年)、ヤマギシ会は同会の広告塔であった元早稲田大学教授・新島淳良の提唱により[206]、子供が24時間の集団生活を送る私塾「ヤマギシズム学園」を設立した[207]。ヤマギシズム学園は幼年部(5歳児が対象)、初等部(小学生が対象)、中等部(中学生が対象)、高等部、大学部からなり、入学できるのは会員の子、または親の少なくとも一人が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を受講した者の子のみである[208]。学園は「人間としての基礎的な一般知識・教養については、義務教育である中学校までにしっかりと学習できていれば十分」という考えに立ち、高等部では進学のために必要な授業を一切行わない[209][† 23]。また、大学部は高等部卒業後、実顕地参画を決めた者のために用意された部門である[211]。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参画者の子については学費がかからない[211]。幼年部と高等部の生徒は、実顕地の外に出ることが一切できない[212]。初等部と中等部の生徒は義務教育を受けるために実顕地の外に出ることができる[212]が、非会員と遊ぶことや放課後のクラブ活動は禁じられている[213]。生徒は常に集団行動をとることが求められ[212]、米本和広によると6-10人が一つの部屋で過ごし、2人が一つの布団で一緒に寝なければならない[214]。親との面会が許可されるのは2か月に一度だけである[212]。こうした「子供を親元から離して群れに放つ」方式は、ヤマギシ会が一般家庭の子供を対象に行っている学育イベント「子ども楽園村」でも採用されている[215]。元実顕地参画者の松本繁世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は無所有の概念を子供にも適用し、「子供も誰のものでもない」と考えている[216]
生徒には「作業」として畑仕事や動物の世話が課せられ、時間は中等部生で週25時間、年1300時間[217]、高等部生で1日16時間[218]に及ぶ。米本和広は、「作業が単なる労働だとすれば、児童労働を禁じた労働基準法にも抵触する」と指摘している[218]。さらに米本によると、生徒は実顕地で採用されている間食・夜食・朝食なしの1日2食という食生活を強いられる[219]
1994年(平成6年)、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の元参画者が「ヤマギシを考える全国ネットワーク」を結成し、学園での子供に対する暴力問題を告発した[187]。これを受けて日本テレビ系列のニュース番組『NNNきょうの出来事』が問題を追及し、「包丁を突きつけられて脅される」、「風呂に連れていかれ熱湯をかけられる」、「竹刀で20回も殴られる」、「部屋に呼ばれて裸にされて殴られる」という被害者の証言を報道した[187]
ヤマギシズム学園は学園の目的を「<育ち合いの原理に立つ独自の学育方式>によって子どもたちを<完成人間>に成長させること」とし、「<完成人間>に育っていくための<真の子ども像>」として「実学的姿勢」、「タダ働き」、「異性(男らしさ、女らしさ)」、「明るいのが正常」、「楽しいのが本当」、「研鑽態度」、「我執がない」といった項目を掲げている[220]。学園出身の子どもや学園生徒と接した経験のある教師、さらにヤマギシズム学園事務局から聞き取り調査を行った米本和広は、得られた証言に基づき学園の目的を解釈すると「子どもたちから<我執>を取り除き、<研鑽>で決まったことを実行するロボット的な革命戦士[† 24]に育成する」ということになり、そのために拘禁、正座、暴行といった体罰が用いられている[† 25]と指摘[223]し、「学園で行われていることは、社会的に言えば『組織的な児童虐待』以外のなにものでもない」と批判している[224]
前述のように米本によると、実顕地内では「若い女の子の方が優秀な子どもを産む」、「男は何歳でもいい」という考えのもと、「20代前半の女性と30、40歳代の男性」という組み合わせの結婚が担当者からの「提案」に基づいて多く行われる[152](調正結婚[150][154])が、新規参画者には30、40代の主婦が多いため、結婚の「提案」の対象となる女性はヤマギシズム学園高等部を卒業して2、3年の女性である[153]。このことについて米本は、「彼女たちは『我』を主張することを長い間禁じられてきたため、『イヤ』と表現す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いる。……脱走しない限り、女の子たちは中年男性の快楽と『優秀な子』を産む道具と化す」と批判している[153]
広島弁護士会は広島県三次市のヤマギシズム学園花見山初等部に対して、「憲法や子どもの権利条約で保障された人権が侵害されている」として警告書を提出した。これに対し学校サイドは「子供を預かっている学校が、担任が子供たちを見ているときに、おなかがすいて輪ゴムを食べたりとか、あるいは体が悪くないのに長期に休ませるとか、放課後部活もできない、そういうことを見て、これは子供が普通じゃないんじゃないか」と、広島弁護士会の方に相談し、広島弁護士会も、「平手打ちなどの体罰、あるいは反省させる名目で数時間から数日間も狭い一室に一人で閉じ込めた。また、通学日に朝食を与えず、十八時間も食事をさせなかった、子供の手紙を無断で開封し閲覧した、無断で私物を検査し、取り上げた、家族との交流は月一回に制限され、休日も学園のスケジュールどおりで、テレビ、新聞の視聴、閲覧を制限した」と警告書を出した。同様の事例が過去に岐阜県の武並小学校でもあったと広島弁護士会はしている。岐阜では食事を抜く、雨の中裸で外へ出す、登校させない、会の中での暴力行為がある等が子供たちの様子から感じられて警告書を提出するに至ったとしている。池坊保子はこれらの問題を衆議院予算委員会で取り上げ、両事例において警告書が出されると当事者児童は強制的に三重県へ転校させられた[† 26]と述べている[226]。池坊は、幸福会ヤマギシ会が学校法人設立の要望書を提出した際に行われた子供を対象に行った無記名のアンケートにおいて、8割が暴力を受け、したくない労働をさせられている旨回答したと指摘し、これに対し宮下創平厚生大臣は「大体御指摘のような事実が極めて高い確度で想像され」ると回答している[226]。米本和広によると、地域の学校や教育委員会の中には実顕地で歓待を受け、生徒の保護者を親権者ではなくヤマギシズム学園の担当者にすることを認め、親族が学校を経由して生徒に手紙を渡そうとしてもそれをヤマギシズム学園に手渡してしまうなど、幸福会ヤマギシ会と癒着関係にあるものがある[227]

財産返還問題

前述のように、近藤衛によると、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の中で暮らす者は私有財産のすべてを幸福会ヤマギシ会に「無条件委任」し、実顕地の中での労働に対し賃金[† 21]が支払われることもない[17][† 13]。しかしながら帳簿の上では賃金が支払われていることになるため、実顕地を去った者には財産が残されていないにもかかわらず、帳簿上の収入に基づき税金が請求されることになる[109]。さらに近藤は、生活実顕地を去る者について、以下のように述べている。
もし彼らが集団農場を去ることになれば、その末路は暗い。持ち込んだ私財は返されない。仮に数千万円を委任しても、脱退時には数十万円が手渡されるのみだ。
ヤマギシ会はバラ色の理想を掲げる一方で、脱退者をほぼ無一文で外部社会へ放り出してきた。彼らは離村者が路頭に迷おうとも、どんな経済的な辛苦が待ち受けようとも、決して私財を返そうとしない。
— 中野2004近藤2003、4頁。
1995年(平成7年)以降、ヤマギシズム生活実顕地の元参画者が委任した財産の返還を求める裁判が起こされるようになった[228]。弁護士の松本篤周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は入会者に全財産を寄付させた上、退会しても一切返還に応じないという姿勢をとっており、社会問題化している[229]。松本は幸福会ヤマギシ会に入会するにあたっては全財産をヤマギシズムに渡し、退会しても返還されない旨の契約を結ぶ必要があると警告している[229]。米本和広によると、幸福会ヤマギシ会は財産を「無条件委任」させるにあたり、特定の金融機関に個人口座を作らせ、そこに現金や現金化した資産、さらに給与を振り込む手法をとっているが、名義人である元参画者が口座の状況を確認しようとした際に、金融機関が「実質的預金者はヤマギシ会の調正機関である」として要求を拒んだため、返還を求める金額の把握・証明すら困難になったケースが存在する[230]
2004年(平成16年)11月5日、ヤマギシ会の集落を離れた女性が入村時に放棄したとされた財産の返還を求めた裁判において、最高裁第二小法廷(滝井繁男裁判長)は二審東京高裁判決を支持し女性側の上告を棄却した。これで女性が請求した一部の1億円の返還を命じてヤマギシ会を敗訴とした東京高裁の判決が確定した。ちなみに、「この女性(原文ではX)が平成元年六月の参画に際し、自宅及びアパートを含む全財産を幸福会ヤマギシ会(原文ではY)に交付したその総額は、二億九一六四万七九九三円となる」[231]
Xは「平成六年一二月に脱退を申し出て、平成七年始めにはYの同意を得て脱退した。脱退時には、Xは3人の子の分として、少なくとも九三〇〇万円の返還を求めたが、Yは長女の分として四〇三〇万円を返還したにとどまった」[232]
そこでXはYに対し、(1)特講・研鑽学校での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という不法行為により交付した財産相当額の損害賠償、(2)Xの全財産の交付はYへの信託契約・消費寄託契約によるもので、同契約の終了による財産の返還請求、(3)財産の交付の原因となった契約は公序良俗違反・詐欺取消・錯誤で無効として不当利益の返還を請求し」[233]東京地方裁判所に訴えをおこした。東京地裁の一審判決は、「Xのアパート生活の期間中に、Yがこの女性(原文ではX)に支払った生活費などを出資額から控除して、二億四一三四万七九九三円の返還をYに命じた」[234]というものだた。
さらに、Yが控訴した東京高裁の判決は、「脱退時に返還した四〇三〇万円に加えて一億円を返還すべきで、この一億円を返還しない場合は参画契約の不返還特約は公序良俗違反となると判示した」[235]ものだった。「Xは上告受理申立てをしたが、上告棄却された」[236]
東京高裁は、次のように判じている(抜粋)。「本件では被控訴人(Xのこと)の特講・研鑽学校への参加、参画へと続く一連の過程に関与した控訴人(Yのこと)の担当者について、被控訴人が主張する社会的相当性を欠く違法な行為があったと認めることはできず、参画への勧誘等がその目的・手段・結果に照らして違法であるとはいえず、したがって、被控訴人に本件出捐行為をさせたこと自体及びその原因となった本件参画契約自体が公序良俗に違反するということはできないし、本件出捐行為をさせたことにつき控訴人に社会的相当性に欠く行為があったことを前提とする被控訴人の信義則違反の主張も採用することはできない」[237]『本件参画契約のうち被控訴人が控訴人を脱退する場合にいかなる事情があっても被控訴人の出資した財産を「一切」返還しないとする部分(以下「不返還約定」という)は、「一切」返還しないとする点において公序良俗に反するもの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238]
最高裁は、「Xの出えん行為は、Xの脱退により、その法律上の原因を欠くに至ったものであり、Xは、Yに対し、出えんした財産につき、不当利得(〈法〉ある人が法律上の原因なしに他人の財産または労務によって利益を受け、その結果として他人に損失を与えること」[239])返還請求権を有する」[240]としたが、「XがYに対して出えんした全財産の返還を請求し得ると解するのは相当ではない。Xの不当利得返還請求権は、Xが出えんした財産の総額、XがYの下で生活していた期間、その間にXがYから受け取った生活費等の利得の総額、Xの年齢、稼働能力等の諸般の事情及び条理に照らし、Xの脱退時点で、Xへの返還を是認するのが合理的、かつ、相当と認められる範囲に限られると解するのが相当である」[241]と判じている。ただし、最高裁は「Xが出えんした財産の返還請求等を一切しない旨の約定があるが、このような約定は、その全財産をYに対して出円、Yの下を離れて生活するための視力を全く失っているXに対し、事実上、Yからの脱退を断念させ、Yの下での生活を強制するものであり、XのYからの脱退の自由を著しく制限するものであるから、上記の範囲の不当利得返還請求権を制限する部分は、公序良俗に反し、無効というべきである」[242]と判じている。
このような最高裁の判決について、北海道大学藤原正則教授は、「『無所有共用一体社会』の実現を活動の目的としている団体に加入するに当たり全財産を出えんした者がその後同団体から脱退した場合に合理的かつ相当と認められる範囲で不当利得返還請求を有するとされた事例」[243]と題して、次のように評釈している。
「本件でまずXは、Yの担当者の勧誘行為は不法な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であり、不法行為を構成すると主張しているが、本件でのYの不法行為の肯定は困難であろう」[244]とし、さらに、「XのYへの出捐が信託契約・消費寄託によるという主張も、一審・原審で退けられているとおり、出資明細書の文言「権利主張・返還請求等一切申しません」からは、その認定は不可能であろう」[245]
さらに、「返還義務の範囲の決定の考慮の要素は、(略)Yの下での生活が長期化するほど、精算されるべきXの出捐は消尽していく。これは決して偶然ではなく、全財産を出捐して共有し、他の構成員のためにも出捐財産が使用されるという団体への加入は、婚姻関係に近い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その意味で、判示のYの返還義務の範囲の評価は、本件のY団体の特性を十分に考慮した基準だと考える」[246]とし、さらに、次のようにも述べている。「Xの出捐の返還請求権は不当利得というようり契約上の精算、請求だと考えることもできる」[247]
また、藤原正則教授は、出捐を一切返還しないという約定について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やむを得ない事由による組合(ヨットクラブ)の脱退を禁じた規定や、ユニオンショップが公序良俗に違反するという判例を前提とするなら、本件での、Xの出捐を一切返還しない約定は、公序良俗違反と評価されよう。本件では全財産を出捐しており、かつ、返還が拒絶されれば生活基盤が脅かされるという状況にXが陥るとなれば、本件の不返還特約が事実上は脱退を不当に制限しており、公序良俗となるのはむしろ当然である」[248]
なお、この財産返還請求裁判の東京高裁の判決内容等ついては「判例時報」1792号の63頁から73頁に、また、最高裁の判決内容等については「判例時報」1881号の67頁から76頁に、それぞれ詳しい。

ドイツ

1996年(平成8年)、ドイツ連邦政府はすべての州と協力し、パンフレット"ドイツ連邦共和国のいわゆる若いカルトと精神異常グループ"(Sogenannte Jugendsekten und Psychogruppen i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を作成し、当時増加傾向にある新宗教団体などをあげた。その中にヤマギシ会が掲載された[249]。 ヤマギシ会は、「ヤマギシ (スピリチュアルと環境の要素を持った日本の新宗教)」 Yamagishi (Japanische Neureligion mit spirituellen und ökologischen Elementen)と紹介された。

幸福会ヤマギシ会とユートピア

近藤衛は、アメリカの社会学者ロザベス・カンターが19世紀のアメリカで栄えたユートピア集団(シェイカーen:Shakers、ハーモニー、アマナ、ゾアル、ソウノウヒルなど)の特徴として挙げている「脱会しても拠出した財産を返還しない」、「親子が分離して生活する」、「プライバシーの余地がない」など100の項目のうち、およそ90%が幸福会ヤマギシ会についても当てはまると指摘し、ユートピア集団と多くの類似点がみられると述べている[250]
近藤は、幸福会ヤマギシ会を「歴史的にも類をみない特異なユートピア集団」であり[251]、そのような集団を組織できた要因は創始者である山岸巳代蔵の思想にあったと分析している[252]。山岸は、食糧増産のためにと伝授を求められた独自の養鶏技術を「真の幸福社会建設のため」秘匿し、養鶏よりも精神論を説き、精神論に耳を傾ける者にのみ若干の技術を教えた。技術を会得しようとする者は研鑽会を開き、山岸自身の難解な言葉の中から「真理」を得ようと必死になった。近藤は、「秘密」の存在をほのめかすことで山岸が人心を掌握していったのだと分析し[253]、その後も「秘密の呪縛」が組織を維持する原動力になっていると推察している[254]。さらに近藤によると、山岸の言葉には矛盾が多く、後に幸福会ヤマギシ会は山岸の言葉のうち組織運営に都合のいいものを選んで会員の〈観念〉を操作しようとした[255]
近藤は「ユートピア共同体が成立するには、外部社会とその集団を隔てる『境界』が高く設定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256]1998年(平成10年)10月に「村から街へ」をスローガンに40歳以上の参画者を外部社会に送り出す方針を打ち出した[193]ことで幸福会ヤマギシ会と外部社会とを隔てる境界は弱められ、会のユートピア集団としての存立基盤に変動が生じる兆しが出てきたと指摘している[256]
近藤は特別講習研鑽会の中で冒頭部に「宗教に非ず」と書かれたテキストが配布された経験を明かし、「『宗教に非ず』と断ること自体、ヤマギシ会がいかに既存の宗教団体と似ているかを示している」とも述べている[257]。ジャーナリストの斎藤貴男は「その宗教性は否みようもない」としつつ、ヤマギシ会側は宗教を固定観念だと非難し、宗教団体として扱われることに強い反発を示すと指摘している[258]
米本和広は、変性意識状態に陥った山岸巳代蔵が脳内に思い浮かべ、他の人たちと共有したいと願った「現実世界とは異なる『真実の世界』」としてのユートピア社会こそが幸福会ヤマギシ会の本質であると推測し[259]、変性意識状態を他の者にも体験させるために考案されたのがヤマギシズム特別講習研鑽会であり[260]、「『特講』で解離状態になった」ときに脳に浮かんだイメージ上のユートピア社会を、実際にこの世に顕した『村』」がヤマギシズム社会実顕地であるとしている[261]。その上で米本は、幸福会ヤマギシ会を「『イメージ世界』に私たちを引きずり込み、自分たちと同じような脳内回路をもった人間を仕立て上げようとする」集団であると定義する[262]。米本によると、イメージ世界を共有できている者とできていない者とでは物の見え方すら異なる[263]。米本は、「イメージを現実化した村」、「『日本国』のなかにありながら日本とはまったく別の国家内国家」というべき集団が数十年の間発展したことを「驚異」、「正直なところ畏敬の念すら覚える」と述べている[264]
島田裕巳は、「ヤマギシ会の実顕地を作りだしたのは日本人であり、そこには個人を集団と融合させることに価値をおく日本的な価値観が生きている。日本人は、企業経営を行うにしても、それを批判してユートピアを作ろうとしても、最終的には同じような組織、同じような集団を生み出してしまったのだ。ヤマギシ会の成長と繁栄は、実顕地が現在の経済システムにもっとも適合するようなかたちに変化してきた、つまりは企業化してきた結果なのである。ユートピアとは、『どこにもない場所』のことである。古来からユートピアを建設する試みが数多く生まれてきたが、ほとんどは中途で挫折し、場合によっては逆ユートピアを生んできた。これに対して、ヤマギシ会は確固たる経済基盤を確立することによって、繁栄し、その試みは成功したかに見える。しかし、実顕地に生きる人間は、自己を集団に委ねることによって、個人の自由を放棄してしまったのだ。私たち日本人は、やはり自由の放棄という代償を支払うことによってしかユートピアを実現できないのであろうか。私たちがヤマギシ会の実顕地生産物を通して感じるユートピアの味がほろにがいのは、ヤマギシ会が決して特異な集団ではなく、企業などに見られる日本的な集団主義の理想を極限まで推し進めたものだからである」[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