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05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 신동아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 신동아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김용옥이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며 진리 깨쳤소”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
2005-07-11 
  • 오직 땀 흘리고 농사지으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온 사람. 20대 시절 책에서 얻은 생각을 평생 순결하게 지켜온 사람. 은둔 철학자, 박영호. “모든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온다”고 설파하는 그는 평생을 바친 다석사상의 최고 권위자로 우뚝 섰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처음듣는 이야기로 시작하자. 아주 신기해서 역시 공부하는 사람은 눈이 맵기가 예사 아니라고 자꾸 감탄케 하는 이야기다.

“고독할 때 외로울 고(孤)가 아들 자(子) 변에 외과자(瓜)가 들어가지요? 영어의 멜론(melon)도 me 뒤의 lon이 외롭다(lone)는 뜻이지요? 우리말 ‘참외’ 의 ‘-외’도 외롭다는 뜻 아닐까요? 그게 왜 그럴까 생각해본 일 있습니까?”

바싹 다가앉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갖기는커녕 숱하게 그 단어를 발음하면서도 거기 주목해본 적이 없다. 참‘외’와 메‘LONE’과 고독할 ‘孤’에 나오는 ‘瓜’라!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참외밭을 유심히 뒤적거려봤습니다. 그랬더니 참외는 한 덩굴에 하나씩만 열리더군요. 참외 하나에 이파리 하나가 이렇게 덮여 있어요. 개체는 외로운 거죠. 단독자인 인간도 태어나면서부터 참외처럼 고독할 수밖에 없어요. 전체인 ‘한아님’이 내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고독하지 않게 되는 거지요”

여윈 몸매에 형형한 눈매를 지닌 박영호(朴永浩·72) 선생을 만났다. 지치는 낯빛 없이 일곱 시간을 이야기했다. 일어서 보니 시간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흘러가 있었다. 그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의 두 명뿐인 제자 중 한 분이다. 김흥호 교수가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강의했다면 그는 스승의 뜻대로 오로지 이마에 땀 흘리고 농사짓는 삶을 살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왔으니 유일한 제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 다석 선생에게 ‘마침보람’이라 적힌 봉함엽서를 받은 적도 있으니 일종의 졸업증서를 수여받은 셈이다. 그걸 받은 사람은 이제껏 박영호가 유일하다니 하나뿐인 제자라고 말해도 과장된 건 아닐 거다.

“다석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일원다교(一元多敎)라고나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다석 선생은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알려지기를 원치도 않았다. 그저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지만 독특한 신관(神觀)과 인생관을 가진 철학자로 사후에야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함석헌 사상은 그저 다석의 갈비뼈 하나를 풀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 사이의 통설이라 한다.

“‘오똑앉을 궤’라는 글자가 있어요. 발족(足) 위에 위험할 위(危)자를 쓰는 글자인데…. 서울 구기동 집으로 다석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그런 자세로 앉아 계셨어요. 수행법의 하나죠. 52세 되던 해 널을 한 감 짜서 널 밑판(그러니까 칠성판이죠)을 깔고 그런 식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전에 힘을 주고 앉아 계셨어요. 우리는 선생님 앞에 30분만 마주앉아 있어도 몸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죠. 하루 일식만 하시고 널 위에서 주무시고 가족들 모아놓고 해혼을 선언하셨죠. 해혼요? 결혼의 반대죠. 맺을 결(結)이 아니라 풀해(解)자 해혼. 동거는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진 않는다는 뜻이에요.”

톨스토이로 맺은 인연

그럼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어찌 만나 제자가 되었나? 역시 6·25전쟁이 거기 가로놓여 있다. 이야기는 절실하고 핍진(逼眞)하고 뜨거웠다.

“우리집은 대구 팔공산 너머 마을인데 6·25전쟁 때 격전지였어요. 안동, 의성, 대구가 전선의 마지막 라인이었잖습니까. 낙동강전투가 고향마을을 중심으로 벌어져 한 달을 밀고 밀리면서 싸웠으니 주변이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였어요. 인민군과 국군의 시체가 서로 섞여 썩느라 냄새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인민군은 노새에다 보급품을 실어 날랐거든요. 제공권을 뺏겼으니 비행기로는 물자를 실어 나를 수가 없어 그랬겠지요. 그 노새가 숱하게 죽어나자빠져서 또 다른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요.”

눈앞에서 즉결처분하는 것도 수시로 목격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 공업학교에 다니다 말고 헌병대에 배속되어 장총을 하나 얻어 메고 군복을 얻어 입었다. 근방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군인들의 가이드 노릇을 했다. 죽이는 사람과 죽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그는 신경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오열(五列·간첩)이 넘어왔어요. 헌병은 쫓아오고 오열은 도망가는데 더는 갈 데가 없으니까 우물 안으로 들어가버려요. 거기다 총을 갈기니 우물이 온통….”

그런 장면이 떠올라 밤이 돼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이 무슨 투시경이 된 듯 사람이 걸어다니면 그 안에 든 해골이 훤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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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면 그 안에도 해골들이 죽 앉아 있는 겁니다. 겁은 나고 잠은 오지 않으니 디립다 책만 읽어제꼈어요. 당시 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가 유행했는데 그건 아무 소용없었고,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으면서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 걸 느꼈습니다. 톨스토이가 50세에 우울증을 앓았는데, 거기에 자살하게 될까봐 총도 치우고 노끈도 치우는 장면이 나와요. 그럴 때 하느님만 찾으면 평화를 얻는 걸 보고, ‘아, 하느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처음 알게 됐지요.”

톨스토이 전집을 몽땅 구해 읽었다. 소설보다 50세 이후에 쓴 ‘예술론’ ‘인생론’ ‘우리가 어찌할꼬’ 같은 글들이 좋았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나니 어떤 관점이 생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톨스토이안이 된 것이다. 특별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일부러 찾아가보았다. 마침 그때 부산 피난지에서 발간되던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었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함 선생도 톨스토이안인 걸 금방 알겠더군요. 요즘 말로 하면 ‘코드’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석헌 선생의 주소를 알고 싶다고 사상계에 편지를 썼지요. 답장이 왔더군요. 잊지도 않아요. 그 주소! 원효로 4가 70번지. 물론 함 선생에게 다시 편지를 썼지요. 나는 톨스토이 영향으로 일생 농사짓고 살려는 사람이다. 한번 만나고 싶다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숭배

박영호 선생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디테일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함 선생을 처음 만난 식당 이름, 먹은 음식, 오갔던 말들을 50년이 넘도록 그는 선명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 날 대구 YMCA에 강의하러 내려가니 그때 만나자는 답장이 왔어요. 서두에 ‘나도 톨스토이 영향 받은, 작은 한 사람이다’라고 쓰셨더군요.”

대구에 가서 함 선생을 만나 강연을 듣고 다음 목적지인 대구보육원까지 따라갔다.

“보육원에서 함 선생을 아주 잘 대접합디다. 전쟁 직후인데 신선로가 나왔어요. 나는 그날 신선로라는 음식을 처음 봤어요. 침대에서도 처음 자봤고. 함 선생이 두루마기를 벗을 때 보니까 양가죽 조끼를 입고 계시데요. 그날 다석 선생님 이름을 처음 들었지요. 공경 경자(敬)를 말하는데 그게 구차할 구자 옆에 씌어 있다면서 구차함 속에서 공경이 나온다는 얘기 중이었던 것 같아요. 함 선생이 그날 내게 ‘톨스토이처럼 농사지으며 공부하는 공동체 생활을 해보고 싶은데 농장이 마련되면 같이 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어요.”

마산요양소로 가는 함 선생을 배웅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40~50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강원도 평창 산꼭대기에 땅이 500마지기가 났다는 소식도 오고, 가봤더니 추워서 안 되겠노라는 연락도 왔다. 마침내 중앙신학대학에서 구내 이발소 하는 사람이 충남 천안에 있는 땅을 함 선생께 내놓았다는 편지가 왔다. 그 땅에 과수를 심었는데 거름 줄 일손이 필요하다, 똥 풀 사람은 박영호밖에 없다, 그러니 하루빨리 오라고 했다.

“아주 기뻤어요.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살러가는 벅찬 걸음인데 어찌 방자하게 차를 타고 갈 수 있겠나 싶데요. 한 걸음씩 걸어서 가기로 작정했어요. 마침 그때 함 선생님이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 산다’란 글을 발표하신 게 있었어요. 정치적 혁명을 하자면 난리 나니까 그 말은 않고 정신적 혁명을 해야 한다는 글이었는데, 굉장한 암시를 담고 있어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한 내용이죠. 그걸 복사해서 가방에 한아름 넣었어요. 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거 한 부씩 나눠주는 거예요.

구미 지나 안동 지나 문경으로 올라갔죠. 막 문경시멘트 공장이 생겼더군요. 충주 달천을 지날 때는 일부러 임경업 장군 사당을 찾아가 하룻밤 묵었어요. 함 선생님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임경업 장군을 크게 칭찬한 걸 읽었거든요. 집을 나선 지 일주일 만에 천안에 도착했어요. 거지꼴이 돼서 선생 계신 곳을 찾았더니 마당가 위에서 주무시다가 반기며 일어나시더군요.”

이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숭배가 있나. 그 시절은 비할 데 없이 행복했다. 중앙신학대학 학생이 몇 와 있어 농장 식구가 다섯쯤 됐다. 강당에 모여 같이 기도하고 찬송했다. 성경과 톨스토이와 사서삼경과 고문진보와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했다. 물론 주된 일은 천안 시내까지 달구지를 끌고 가서 똥을 퍼오고 발이 세 개인 이북식 호미로 간작한 고구마 밭을 매는 농사일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뿌듯하고 충만했다.

“소낙비가 올 때 밭을 매면 마음이 급해지잖아요. 입은 다물고 호미질만 급히 하노라면 흐린 하늘 아래 호미소리만 들리죠. 선생님이 문득 호미를 멈추고 ‘들어봐라,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음악소리 아니냐’ 하신 적도 있었죠.”

벅차게 살았다 한들 외로움이야 왜 없었을까. 똥을 담은 지게를 지고 천안시내를 걸어오면 눈앞으로 교복 입은 여고생이 지나가곤 했다. 눈물이 푹 솟는 날도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싶기도 했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에고(ego·자아)를 죽이는 것이잖아요. 기독교의 ‘날 버려라’, 불교의 고집멸도(苦潗滅道), 공자의 극기(克己), 노자의 무사(無私)가 다 에고를 죽이라는 말인데 나는 천안농장에서 어지간히 그 연습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려면 에고를 죽일 수밖에 없어요. 에고는 거짓 나죠. 그게 죽는 자리에 참나가 들어서는 겁니다. 천안역 앞에서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거지가 천사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손이 하늘나라 시민증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손을 내밀면 천국시민이고 외면하면 아닌 거죠. 김용옥은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면서 큰 가르침을 얻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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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선생은 금요일엔 서울로 갔다. 자신의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다. 함 선생만 해도 그에게는 하늘 같은데, 그 선생님의 선생님은 도대체 누굴까 싶었다. 그때 다석 선생은 매주 금요일 서울 YMCA에서 기독교 사상을 강의하고 있었다.

“성도 안 붙이고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해요. 유 선생님이라고 하면 유달영 선생인 거지…. 함 선생님이 ‘일주일에 우리 선생님만치 정신생산 하시는 분은 역사상 드물 거라’고 하시는데 그 분이 누군지 늘 궁금했지요.”

함석헌과의 결별과 재회

그 무렵 함석헌 선생은 서울시경에 붙잡혀 갔다. 사상계 6·25 특집 칼럼으로 ‘평화통일을 하자, 이북과 화해를 해야지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된다. 북한동포가 남으로 내려올 때 총이나 쐈지 얼싸안은 사람 한 명이라도 있느냐, 사람 죽인 게 무슨 자랑이라고 훈장을 달고 그러느냐’는 요지의 글을 썼으니, 당시로서는 뒤집어질 소리였다. 농장 식구들도 가까이 있던 특무대에 다들 잡혀갔다.

“우리 함 선생님이 신의주 학생 의거에 참여했다 소련군으로부터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니 김일성 뱃속에 집어넣다 꺼내도 빨갛게는 안 될 사람인데 간첩으로 의심한다니 말이 되냐고, 평화통일 하자는 게 선각자적 소리지 자꾸 싸우자고 해야 되는 거냐고 막 따졌지요. 정 의심스러우면 내가 지금까지 써온 농장일지가 있으니 조사해보라고 했더니 일지만 받고 우린 풀어주더군요.


함 선생 별명이 ‘글쎄요’였어요. 암만 확실해도 ‘글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지, 글처럼 절대 힘차고 결연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조봉암이 함 선생께 도와달라고 찾아왔더래요. 함 선생이 거절했답디다. ‘조봉암 사건이 터졌을 때 가담했으면 나도 죽었을 걸’ 하시던 게 기억나요.”

대구형무소에서 탈옥한 죄수 강오원도 잊을 수 없다.

“다섯 겹 형무소 담을 뛰어넘은 사람인데, 그의 변이 ‘한국은 스케일이 너무 좁아 도망갈 데도 없더라. 만주벌판 같았으면 내가 마구 날아다녔을 텐데…’였거든요. 함 선생이 그 뉴스를 듣고는 ‘우리, 대구로 강오원이 면회 한번 갈까’ 하시는 겁니다. ‘이성계 그릇이 강오원이보다 못하니까 만주를 뺏겼지’ 하고 안타까워하시면서….”

농장에서 3년을 땀 흘리며 신성하게 살았다. 그때쯤 순결한 청년 박영호의 귀에 스승 함석헌의 스캔들이 들려왔다. 상상하기도 싫은 소문이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조차 인정하기 싫었어요. 너무 어려서 그랬겠지요. 스캔들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어느 날 밤 남들 잠든 후에 선생님 방에 찾아가서 물었죠. 사실이냐고?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한참 입을 다물고 계시더니 선생이 사실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는 집안 고모하고도 내외하는 법도를 지키던 사람인데 한번 여자하고 사귀니까 사타구니가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겠더라’ 그러면서 ‘너는 나처럼 되지 말고 비노바 바베(인도의 구도자)처럼 되라’ 하시더군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 선생이 오직 하나의 님이었는데 그 님이 무너져버렸으니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 후부터는 선생이 무슨 말을 해도 교회식으로 말해서 은혜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말할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선생을 너무 우상화했던 게 문제였어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함 선생 곁을 떠났다. 공식 모임에서는 가끔 만났지만 개인적인 대화는 싹 끊었다. 그가 함 선생과 화해한 것은 함 선생이 임종하기 직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무렵이었다. 함 선생은 다석 선생의 한시를 박영호가 해설한 책 ‘씨알의 말씀’에 꼭 서문을 써주고 싶어 했다. 병이 위중해지는 와중에도 퇴원하면 그것부터 쓰겠다고 하더니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함 선생을 떠난 그는 고향에 내려가서 천안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받던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금요일이면 예전 함 선생이 하던 대로 YMCA에 나가 유영모 선생 강의를 들었다. 그걸 들을 목적으로 서울에 온 셈이었다. 일은 물론 농사였다.

“십계명보다 땀 흘리는 노동이 먼저라고 톨스토이가 말했거든요. 양심적으로 참되게 살아야 하는데 농사를 안 짓고 어찌 참되게 살 수 있겠나 싶었지요.”

‘농사짓는 사람이 예수다’

다석은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따로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 3대 무식할 각오하고 농사지으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직접 북한산 비봉 아래 구기동 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집으로 찾아가면 널판 위에 곧추 앉아 한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1955년에 YMCA에서 처음 선생님을 뵙고 댁으로 갔을 때 대뜸 하시는 말씀이 ‘생각이 나느냐?’였어요.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난다’고 했더니 ‘그러면 됐다’고 하셔요. 선생님은 누구를 만나든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이런 건 절대 물어보는 법이 없어요. 대신 하느님하고 영통(靈通)하는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인 ‘생각’이 나느냐고 물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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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선생은 닭이 날마다 알을 낳듯이 날마다 글을 썼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은 아니었다. 생전의 저술이 하나도 없고 오직 일기식의 다석일지만 남겼는데 거기 담긴 한시가 1300수, 시조가 무려 2000수다. ‘우리 역사상 그만한 시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하며 그는 스승을 우러른다.

그의 집과 논은 시흥에 있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시흥이 서울에 편입된다고 하자 그는 서울시민이 되는 것이 싫어 경기도 의왕으로 농장을 옮긴다. 값이 싸서 땅을 좀더 넓힐 수 있었다. 삽을 여러 개 부러뜨려가면서 논밭 6000평을 개간한다. 농사짓는 짬짬이 책을 읽고 유영모 선생 강의를 듣고 집에 찾아가 다시 말씀을 듣는 나날이었다. 1965년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기동에 갔더니 선생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제 날 찾아올 생각이 안 나야 되고, 편지할 생각도 안 나야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씨앗이 뭉쳐 있는 것보다 땅에 흩뿌려져야 하는데, 이젠 혼자 독립해서 살아보라는 거였어요. ‘나는 8자를 좋아한다’고도 하셔요. 자꾸 갈라질 수 있는 숫자라서 좋아하신다는 거죠. 날더러 박형이라고도 하고 박 선생이라고도 했는데, ‘이젠 박 선생이 혼자 생산해서 살아가라’는 거였어요. 충격이었죠. 두말도 않고 돌아 나왔어요. 나오는데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요. 이젠 집앞을 지나가셔도 쳐다도 안 보겠다 결심하고 집에 와 생각하니 선생님이 옳은 것 같아요.

이를 악물고 5년간 혼자 생활했지요. 처음에는 막막해서 선생님 말씀이 그립기 짝이 없었으나, 나 혼자뿐이니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요. 자가생산을 해야 하는 거였지요. 함석헌 선생이 늘 ‘지음이 먹음이다’고 하셨거든요.”

물질 생산도 그렇지만 정신 생산도 자기 창작이 자기 양식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석 선생과 ‘단사’를 경험하고 혼자 제 생각을 기록한 것이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이다.

새 시대의 신앙은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선언한 책이다.
 1. 미에서 선에서 진으로,
 2. 역(力)에서 지(知)에서 신(信)으로, 
3. 부(父)에서 사(師)에서 천(天)으로!

“1번은 서양철학에서는 일반화된 개념인데 파스칼의 팡세 맨 끝에 정리되어 나오죠. 2번은 나중에 알고 보니 키에르케고르도 그런 소리를 했더라고요. 3번만이 내가 독창적으로 생각한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무렵 아내가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책이 나온 걸 기뻐해서 문병 오는 사람에게 한 권씩 나눠주던 아내였다. 힘들었다. 바깥과는 단절하고 집안에서 지냈다. 다석 선생이 풍문에 소식을 듣고는 한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봄에 못자리 할 무렵에 사람이 와 추석 때 구기동으로 찾아갔어요. 냉수마찰하신다고 하며 웃으시는 걸 보니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5년 만에 굉장히 늙으신 거지요. ‘나는 은혜라는 말은 싫으니 힘입어서 잘 사시오’ 하셔요. 축복이지요. 그렇게 고별인사를 하시려고 날 부르신 거였습니다. 내 책을 이미 읽으셨어요. 장하다고 칭찬하시고는 ‘합(合)’과 ‘동(同)’을 혼동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셨어요. 합은 형이상학을 말할 때, 동은 형이하학을 말할 때 구분해서 쓰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선생님과 정식으로 단사를 했습니다. 5년 전엔 그냥 나왔는데 정식으로 큰절을 올리고 물러났어요.”

이번에는 감개무량했다. 정신적 독립을 인정받은 것이다. 집에 왔더니 그 봉함엽서, ‘마침보람’이라 적힌 졸업증서가 우편으로 배달돼 있었다. 다석 유영모 제자 박영호로 인가가 난 것이다.

“토인비는 어려서부터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해서 시상이 영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떠오른다지요. 선생님도 한문에 능통하셔서 시상이 한문으로 떠오르는 분이시죠. 그러나 웬만하면 한자를 안 쓰셨어요. 우리말을 찾아 쓰거나 없으면 만들어 쓰셨죠. ‘마침보람’도 그렇게 만든 말이었고 ‘한님’도 ‘씨알’도 다 선생님만의 조어였어요.”

유영모는 한아님을 한님이라고 썼다. 란 지극한 우(上)란 뜻으로 ‘님을 머리우에 인다’는 말이다. 임(任)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아님을 머리 위에 이고 설 때 사람은 실존하는 단독자가 되고, 뼈가 시린 단독자가 된 후에야 제 안의 한아님을 깨닫게 된다고 가르쳤다. 예수도 석가도 키에르케고르도 맹자도 공자도 진공 속 같은 외톨이가 되고 난 후 비로소 자기 안의 큰 힘을 발견해낸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오산학교에서 쫓겨나다

유영모는 서당에서 맹자를 배우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맹자를 팽개치고 당시 애국지사들이 몰려들던 YMCA로 달려온다. 1890년생이니 만 15세였다.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이던 김정식의 권유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고 경신학교에 다닌다.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정주 오산학교 선생으로 갈 때까지 그는 정통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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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에는 이미 춘원 이광수가 와 있었고 단재 신채호, 신간회 멤버이던 여준 선생도 교사로 있었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학생들에게 기독교뿐 아니라 불경과 노자, 장자를 가르쳤다. 성경은 톨스토이가 4복음의 기적 부분은 다 빼고 한 권으로 만든 이른바 톨스토이 복음을 가르쳤다. 곧 남강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됐고, 이어서 학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선교사는 오산학교 안에 이상한 기류가 번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정통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사들을 다 내쫓아버린다.

“다석이 오산을 떠날 땐 이미 비정통으로 돌아선 후였어요. 그걸 오산의 아이러니라고 하죠. 춘원도 쫓겨났죠. 바이칼을 거쳐 나중에 서울로 왔지요. 함석헌은 그때 오산학교 3학년 학생이었어요.”

다석에겐 3남1녀가 있는데 자식을 제도교육의 질서 속에 집어넣지 않았다. 많이 배우면 착취나 일삼는 귀족이 되어 씨알(民) 앞에 거들먹거릴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매는 것도 원치 않았고 재산을 움켜쥐는 것은 더욱 금했다.

“사모님이 순종형인데, 두 가지만은 선생님께 항의했대요. 하나는 아이들을 공부는 안 시키고 농사일만 시킨 점이고 또 하나는 천안광덕에 있던 과원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냥 농사짓던 사람에게 줘버린 거라지요.”

그러나 큰아들 유의상씨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영역하고 6·25전쟁 때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통역관을 지내다 휴전회담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그 현장에 참여한 인재가 됐다.

無, 空, 靈이신 한아님

다석의 훌륭함은 중국고전, 서양사상, 불경, 인도철학, 베다경전에 두루 능통했고 
생활 속에서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는 점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신관(神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다석의 신관, 나아가 함석헌과 박영호의 신관에 나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한심한 질문에도 그는 맹렬한 열의로 대답해줬다.

“지금까지 말한 게 다 소용없네, 아이구 답답해” 하면서도 스승이 말한 한아님, 자신이 찾아낸 ‘참나’를 이런저런 비유로 알려주기 위해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곤 했다. 은사(隱士) 유영모는 제 손꼴을 노트에 베낀 후 ‘무명소자(無名小子) 되와 세 가지 걸림 없이 영원히 아버지께 이루어지이다’라고 썼다.

다음은 거기에 대한 박영호의 해설이다.

“세 가지 걸림이란 엄지가 상징하는 밥(富), 검지가 상징하는 힘(貴), 중지가 상징하는 빛(名)이다. 이 세 가지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세 가지가 뿜어내는 행복이란 신기루에 홀려 인생을 갈팡질팡 헤매게 된다. 뒤늦게 마음의 눈을 떠 뉘우쳤을 때는 때가 이미 늦다. 이 셋을 잡고자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만시지탄을 토하기를 ‘원래 세계엔 두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정신과 칼이 그것이다. 긴 눈으로 보면 칼은 반드시 정신에 굴복한다’고 했다. 마음의 눈을 뜬다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이다.…(중략)…

46억년 동안 다듬어온 지구에 300만년 전에 유인원이 나타났다. 2000년 전에는 손(手)이 나타나서 (절대)을 가리켰다. 은 그대로 한아님을 일컫는다. 중국에서도 상제(上帝)라 하고 일본에서도 우에(上)를 신(神)이라고 읽는다. 을 가리킨 손은 검지인 예수를 비롯하여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다. 그 다섯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인 틈은 손가락 사이의 뜨임(距離)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손이 가리킨 이 생명의 뿌리요 목적이요 가치인 아버지 한아님(天)이요 니르바나(Nirvana)요 브라흐마(梵)요 자연(自然)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다섯 손가락)이 가리키는 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을 보지 않고 손가락에 매달리는 사람일수록 손가락에 대한 시비가 많다. 다섯 손가락이 똑같지 않고 다 다르듯 예수 석가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는 다 다르다. 그러나 가리키는 곳은 한곳이다. 무(無)이고 빔(空)이고 얼(靈)이신 한아님이다.”

독보적인 다석사상

이것이 바로 스승 유영모와 제자 박영호의 신관이다. 보수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어느 종교든 결국 다 같다는 것이니 다원주의니 혼합종교니 하며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종교계 내부에서도 서서히 그들의 생각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얼마 전엔 다석학회가 만들어졌다. 서강대에서 쫓겨난 정양모 신부는 “3000명 가톨릭 신부 중에서 1%쯤은 이런 소리를 해도 괜찮아요” 하면서 드러내놓고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있고, 에든버러대에서 다석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명우 목사, 버킹엄대에서 해석학적 다석사상으로 학위를 딴 윤정현 성공회 신부도 있고, 감신대의 오정숙 교수도 다석사상으로 박사가 됐다. 석사논문은 그보다 많아 20편이 좀 넘는다.

“한국외대 철학과의 이기상 교수는 우리 철학을 하신 분을 찾아 박종홍, 김지하, 함석헌을 연구했는데, 그중에서 다석 선생님이 월등하다고 그래요. 왜냐면 인간 정신의 경지는 무엇보다 신관(神觀)이 뚜렷해야 하는데, 그 점에선 다석 선생이 독보적이라는 거지요. 그 다음엔 인성(人性)에 대한 관점이 확고해야 하는데 다석 선생은 세계적인 사상가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합디다.”

격렬한 그의 글을 한 구절만 더 읽자. 비슷하지만 죽음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 부분이다. “얼(靈)을 객관적으로 나타낸 것이 참(진리)이다. 얼을 인격적으로 나타낸 것이 독생자다. 얼을 윤리적으로 말한 것이 한아님 아들이다. 얼을 사회적으로 말한 것이 그리스도다. 일요일에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고 설교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니다. 얼을 위하여 몸이 희생하는 것이 참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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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죽지만 얼은 죽지 않는다. 몸은 상대세계에 있지만 얼은 절대세계에 있다. 상대계의 존재에게는 복귀(復歸), 복명이 중요하다. 절대계에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한아님 아버지께 돌아간다, 석가가 니르바나로 돌아간다, 노자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만 다르지 똑같이 절대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상대계에서 빌린 몸은 돌려주고 절대계에서 받은 얼(불성, 도)만이 돌아간다. 실은 돌아간다는 것도 상대적 존재인 몸이 부스러져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절대인 얼이 오고가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간 공간 인간을 초월한 절대가 가고 오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지금껏 스승 다석 유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왔다. 다석 전기 두 권과 다석사상 정해인 ‘씨알의 말씀’과 다석 한시 풀이와 시조 해설집을 쉬지 않고 써서 스승을 세간에 알렸다.

“선생님에 관한 자료가 망실될 것이 두려워 내가 선생의 둘째아드님 자상씨에게 나중 누구든 선생님 전기를 쓸 수 있게 자료를 모아둬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함석헌 선생님은 평소 강연 중에도 당신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다석 선생은 YMCA 연경반 강의 때도 자신의 이야기는 잘 안 했거든요.

다석 선생의 큰 제자인 함석헌 선생이나 김흥호 교수나 감히 선생님 전기에 대해선 어려워서 말을 못 꺼내고 있었어요. 나는 나이도 어리고 시간여유도 있고 해서 말을 꺼냈던 것인데, 그 편지를 자상씨가 아버님께 보여드렸고 선생님은 또 그걸 김흥호 교수에게 보인 모양이에요. 서울시청 속기사에게 의뢰해 연경반 강의를 속기해둔 자료가 있었는데 김흥호 교수가 그걸 한 짐 지고와 ‘다 도와줄 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줬지요.”

스승을 한 걸음 앞섰나

그리고 3월13일 (유영모와 함석헌은 생일이 같다. 돌아간 날은 하루 차이다.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아놓는 바람에 함 선생이 하루를 더 산 거라고 여기고 있단다) 선생 생신에 구기동에 가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틈틈이 쫓아가 묻고 또 물었다. 다석의 일기를 빌려 필사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아나갔다.

‘선생이 읽은 책을 나도 독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금강경, 아함경, 논어, 맹자, 주역을 다시 읽었다. 1971년에 준비하기 시작한 다석전기는 1984년에 책으로 나왔다. 꼬박 13년이 걸린 작업이다.

“10년은 자료를 모았고 원고는 선생님 돌아가시던 1981년에 쓰기 시작했어요. 쓰는 데만 만 3년이 걸렸어요. 다석 사상은 굉장히 과학적인데 그러면서 신비해요. 다석 한시 해석을 읽은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다석이고 어디부터 박영호냐?’ 묻곤 하지요.”

내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생 스승에 매달려온 박영호는 다석을 한 걸음 앞서갔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만약 내가 부가가치를 붙인 게 있다면 보디(body)와 마인드(mind)와 솔(soul)을 구분하는 용어를 만든 것 정도일 겁니다. 보디와 마인드는 ‘몸나’와 ‘맘나’로 에고(ego)에 속한 거고, 솔(soul)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변치 않는 ‘참나’이고 ‘얼나’거든요. 인간은 원래 동물이지만 탐진치(貪瞋痴)가 없어지면 짐승냄새가 안 납니다. 내가 다석 선생께 그렇게 경도된 이유도 그분에게선 짐승냄새가 나지 않은 데 있지요. 요한복음 12장 2절에 나오는 ‘만백성을 거느리는 권능’이란 말도 제 마음속 탐진치를 거느린다는 소리예요. 예수가 12제자도 못 거느렸는데 무슨 만백성이 있었겠습니까. 한아님을 모르고는 도저히 부처님이 될 수 없어요. 금강경이 무슨 소리인지 막연하더니 축소판 팔만대장경을 다섯 번쯤 읽고 나니 니르바나가 곧 한아님이라는 걸 알겠더군요.”

예수나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그는 말한다. 대신 우리가 배울 건 예수나 석가의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젊어서 생긴 늑막염으로 기운을 쓰지 못해 그는 10·26이 나던 1979년 아쉽지만 농사를 접었다.

토지는 헐값에 화물기지로 수용되고 그 변두리 자그만 터에 집을 짓고 지금껏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았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아내의 제자였던 이와 재혼도 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않고 대개 집에서 책을 읽지만 일주일에 두 번은 외출한다. 수요일은 경기도 안성 미리내 성지 곁의 베드로의 집에서, 화요일은 유달영 선생이 하는 서울 여의도 성천 아카데미에서 다석사상을 강의하며 제자를 기른다.

“다석 선생이 1910년부터 가지고 있던 신약성경을 1971년에 제게 주셨어요. 그 성경을 얼마 전 내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줬습니다. 아들에게 물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니 그분도 누군가 전해줄 사람을 만나면 나처럼 물려주는 거겠지요.

지금 한국 교회는 한아님이 오신다면 질색을 하게 변해버렸잖아요. 부처님도 절에 가보시면 ‘이거 내가 가르친 거 맞나’ 하고 깜짝 놀라실 걸요. 21세기의 혼란은 다석사상으로 충분히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다고 나는 믿어요. 아마도 21세기에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기독교의 좋은 점과 불교의 좋은 점을 제대로 가려내서 저렇게 매치시켜 놓으신 분이 다석 선생님이죠.”

삶의 완성은 ‘얼’과의 만남

크지 않은 체구의 그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20대에 책에서 얻은 생각을 평생 순결하게 지켜온 사람. 그도 이제 일흔이 넘었다. 삶의 목적과 완성은 저마다 제 마음속에 실존하는 참 생명인 ‘얼’을 만나는 것이라고 그는 거듭 말한다. ‘그 밖의 다른 일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허랑하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다들 ‘그 밖의 다른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참 나는 어디 있나? 참외처럼 외롭고 멜론처럼 고독한 단독자, 우리는 바로 지금 제 마음의 알갱이를 고요히 들여다봐야 한다.






17 박재순 다석 유영모



알라딘: 다석 유영모




다석 유영모
박재순 (지은이)홍성사2017-03-13































미리보기


정가
19,000원
전자책
11,400원

432쪽
148*210mm (A5)
58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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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이 쓴 다석 사상 개론서이다. 다석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가 버려야 했던 전통 사상을 거두어 동서양 사상, 과학 정신, 기독교 신앙과 융합한 사상가이다. 다석 사상은 그 독창성, 주체성, 심오함 등으로 최근에서야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생각과 삶은 그 깊이와 높이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 박재순 소장은 다석과 그의 제자인 함석헌에 대해 연구해 온 전문가로서 독자들을 위해 가장 간명한 언어로 다석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2008년 기출간된 내용에서 뒤바뀐 각주와 오류들을 바로잡고, 줄였던 내용을 되살렸으며, 다석의 삶과 사상의 변화 과정을 더 깊이 진전시켰다.

다석은 평생 본격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없으며 일기 형식의 《다석일지》와 기고문 등만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글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석 사상은 책상물림하며 만들어 낸 철학이 아니라, 다석이 자신의 몸, 혼을 담아 펼쳐낸 사상이다. 다석은 160센티미터가 안 되는 키에 서민적 모습으로,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앉아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으며, 늘 무릎을 꿇어앉고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삶을 실천하였다.

아주 먼 거리가 아니면 늘 걸어 다녔으며 얇은 잣나무 판에 홑이불을 

이 책은 다석의 사상을 먼저 그의 삶에 따라 크게 개괄한 뒤에 ‘삶과 죽음’, ‘하루살이’, ‘밥 철학’, ‘가온 찍기’, ‘생각’, ‘숨’, ‘우리말·글’, ‘예수 그리스도’, ‘회통’, ‘귀일’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주제별로 꿰뚫어 보고 있다.


목차


머리글
1판 머리글
들어가는 글 ― 한국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1장 다석 사상의 변화와 시기 구분
2장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
3장 하루살이: 하루를 영원처럼
4장 밥 철학과 깨끗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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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가온 찍기’와 무등(無等)세상
6장 생각: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름
7장 숨과 영성: 숨은 생명과 얼의 줄
8장 우리말과 글의 철학: 천지인 합일과 인간 주체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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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예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함
10장 기독교·유교·불교·도교의 회통: 빈탕한데 맞혀 놀이(與空配享)
11장 하나로 돌아감(歸一):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 종합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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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글 ― 다석 사상의 성격과 의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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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재순 (지은이)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한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한신대, 성공회대에서 연구교수와 겸임교수로 가르쳤다. 함석헌 선생을 만나 성경과 동양고전을 배우고 씨알사상을 공부했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씨알사상연구회 초대 회장, 씨알재단 상임이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으로서 씨알사상을 다듬어 내는 일에 애쓰고 있다. 저서로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생명의 길, 사람의 길》,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이상 홍성사) 등이 있다.


최근작 : <참사람 됨의 인성교육>,<다석 유영모>,<민중신학에서 씨알사상으로 (반양장)> … 총 3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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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1. 편집자가 소개하는 《다석 유영모》

학문과 기도를 통합시킨 그리스도인 선비, 다석 유영모

다석의 삶과 생각을 다석 자신의 말로 풀이한 독보적 연구서!
《다석 유영모》는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이 쓴 다석 사상 개론서이다. 다석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가 버려야 했던 전통 사상을 거두어 동서양 사상, 과학 정신, 기독교 신앙과 융합한 사상가이다. 다석 사상은 그 독창성, 주체성, 심오함 등으로 최근에서야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생각과 삶은 그 깊이와 높이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 박재순 소장은 다석과 그의 제자인 함석헌에 대해 연구해 온 전문가로서 독자들을 위해 가장 간명한 언어로 다석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2008년 기출간된 내용에서 뒤바뀐 각주와 오류들을 바로잡고, 줄였던 내용을 되살렸으며, 다석의 삶과 사상의 변화 과정을 더 깊이 진전시켰다.
다석은 평생 본격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없으며 일기 형식의 《다석일지》와 기고문 등만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글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석 사상은 책상물림하며 만들어 낸 철학이 아니라, 다석이 자신의 몸, 혼을 담아 펼쳐낸 사상이다. 다석은 160센티미터가 안 되는 키에 서민적 모습으로,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앉아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으며, 늘 무릎을 꿇어앉고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삶을 실천하였다. 아주 먼 거리가 아니면 늘 걸어 다녔으며 얇은 잣나무 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잤다. 이러한 삶에 깃든 뜻과 기개는 그의 사상 형성과 뗄 수 없이 붙어 있다. 이 책은 다석의 사상을 먼저 그의 삶에 따라 크게 개괄한 뒤에 ‘삶과 죽음’, ‘하루살이’, ‘밥 철학’, ‘가온 찍기’, ‘생각’, ‘숨’, ‘우리말·글’, ‘예수 그리스도’, ‘회통’, ‘귀일’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주제별로 꿰뚫어 보고 있다.

다석 사상의 시기 구분과 열쇳말들

《다석 유영모》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다석의 삶을 네 시기(1890~1913, 1914~1939, 1939~1943, 1943~1981)로 구분하여 각 시기마다 특징을 요약하여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다석 사상은 시대 변화나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체험과 성찰에 따라 뚜렷하게 변화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2~4장은 다석의 죽음관, 하루살이의 철학, 밥 철학을 조명한다. “몸은 죽고 얼은 영원히 산다”는 결론에 이른 다석의 죽음관은 “죽음을 통해 다시 산다”는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체득한 데서 나온 결론이다. 어제에 매이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늘 하루를 영원처럼 산 다석은 일식(一食), 일언(一言), 일좌(一座), 일인(一仁)을 지키며, 생존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해 밥을 먹는 밥 철학대로 살았다.
5~11장은 ‘가온 찍기’, ‘생각’, ‘숨’, ‘우리말·글’, ‘예수 그리스도’, ‘회통’, ‘귀일’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다석 사상의 알짬을 정리하였다. ‘가온’은 가운데를 가리키는 우리말로서 가온 찍기란 지금 여기의 나를 한 점으로 찍어서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하루살이를 넘어 지금 여기의 삶을 붙잡고 가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나아감은 생각을 통해서 가능하다. 다석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참으로 있는 것은 ‘나’가 아니라 ‘생각’이라고 하였다. 생각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다석은 생명을 숨으로 보았다. 숨이 깊고 편하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도 잘 소통한다고 보고, 앞무릎을 붙이고 두 다리를 벌려 엉덩이를 대고 앉는 자세로 늘 지냈다.
이전의 한국 사상가들과 다석이 크게 다른 지점은 우리말과 글로 철학을 한 것이다. 다석은 평생 말을 탐구하면서 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 애썼다. 오늘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한국인의 심성으로 예수를 받아들인 다석은 우리 정신문화와 기독교 정신을 역동적으로 수용하여 세계적인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으로,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다석 사상의 중심에 있는 사상은 ‘하나’이다. ‘하나’를 찾고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상생하는 문명을 이루는 철학의 원리를 제시한다.

2. 편집자가 뽑은 문장

다석은 생각을 이성적 자아의 기능으로 본 데카르트와는 달리 생각을 자아를 불사르는 일로 보았다. 생각하는 일이 곧 자아를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다. 다석에게 생각은 몸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생각과 몸이 통전되어 있다. 생각에 대한 다석의 이러한 이해는 생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해와는 다르다. 데카르트는 “사유(思惟)하고 연장(延長)이 없는 실체”로서의 정신과 “사유하지 않고 연장을 가진 실체”로서의 물체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에 반해 다석은 마음의 생각과 몸의 생리작용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말하였다. 마음과 몸은 하나의 큰 틀 속에서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연속되어 있다. 다석은 몸 속 깊은 데서 몸 전체의 생리작용으로부터 생각이 우러난다고 하였다. _117면, 2장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에서

다석은 금식을 자주 하고 하루 한 끼 먹는 일중식(日中食)을 하였다. 일중식도 금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안 먹으면 죽으니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되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다석은 오랫동안 두 끼 먹고 살다가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니씩만 먹었다. 석 달이 지나서 여느 때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다석은 엄격히 하루 한 끼만 먹고, 간식, 군것질을 일체 하지 않았다. 최원극에 따르면 다석의 일일 일식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5시간 이상을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엄격한 것이었다. 다석이 금식과 일중식에 힘쓴 것은 밥을 줄임으로써 육으로만 살지 않고 정신으로 살고, 저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공(公)과 전체(全體)를 위해 살자는 것이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함으로써 다석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해져서 하늘의 뜻대로 신령하게 살고자 했다. _145-146면, 4장 ‘밥 철학과 깨끗한 삶’에서

다석은 우리말과 글을 닦아 내고 살려 내려고 힘썼다. 이 점에서 다석은 이전의 한국 사상가들과 비교된다. 조선왕조의 실학자들도 한문으로 생각하고 표현했다. 19세기의 민중종교 사상가들조차 한문과 한자로 생각을 표현하고 전했다. 동학의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되었고 용담유사는 한글로 표기되었으나 한자어를 한글로 옮겼을 뿐이다. 주문이나 부적의 글도 다 한자로 되어 있다. 강증산도 한자어를 주로 사용했고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도 초판은 국한문 혼용체로서 한자어를 주로 사용했다. 대종교의 경전들조차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철학적 자각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민중의 삶 속에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각이 생겼다. 이 점에서 유영모는 민주의식을 가지면서 우리말과 글을 철학적 언어로 다듬어내고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펼쳤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말년에 다석은 자신이 평생 말을 탐구했으며, 말마디 속에서 하나님의 이르신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였다(1972년 1월 22일 일지). _251-252면, 8장 ‘우리말과 글의 철학: 천지인 합일과 인간 주체의 철학’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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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행동의 본을 살다간 다석 유영모


대구 이성철입니다 다석 유영모 서평을 올립니다 부족합니다 잘 다듬어 주세요

다석 유영모
박재순 지음, 홍성사, 2017.3.6 초판 1쇄 인쇄, 2017.3.13 초판 1쇄 발행
ISBN 978-89-365-0344-4
2017.5.26(4.19) 복상 제5차 온라인 서평 이벤트에 3인 중에 뽑혀 증정받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37)"

신앙의 인물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제게 또 다른 레퍼런스를 제공합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실로 제겐 엄청난 신앙인들을 알아가고 있으며 또 그 연장선상에 복음과 상황이 있고 이 책 '다산 유영모'가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재수를 했지만 서평 이벤트에 겁없는 도전은 저 자신을 채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자이신 박재순 선생님께서도 시도해보셨다가 결국 주위의 만류로 그만 두셨다는 다석의 삶! 우리는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해야 하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결코 안된다고하는 길은 아닌 길을 걷고있는 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부자 청년도 못되지만 그래도 성도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말이 아닌 행위로 당신 표현대로 33,200일(91세)! 살다간 다석의 삶이란 예수를 단지 믿음의 대상으로서만 보지 않고 그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신앙의 선배의 삶을 반쪽이라도 살아내는 흉내라도 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37)

철학이란 자기나라 사람이 자기나라 고유 언어로 자기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고를 주장하고 토론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한때 동양과 중세 철학 시간에 선생님을 통해 철학의 정의 한 모퉁이를 접했었습니다. 우리나라 철학의 시작을 이시기 즉 구한말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매 한가지이지만 그때는 구체적으로 어느 분을 그 시작점으로 봐야하나 논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이 책의 본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다석과, 김교신, 함석헌 등과 같은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으로 접하는 다석의 철학은 처음부터 제게 부담감을 넘어 숨막힘까지 주었으며,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가온찍기, 바탈, 씨알 등과 불교와 도교, 중용, 동학, 형이상/하학, 칸트, 데카르트 등 동양과 서구철학과 기독교에 이르는 여러 사상의 바탕들이 시시로 넘나들며 새로운 단어, 즉 궁신지하(하나님을 탐구하는 궁신이 종교라면 자연만물의 변화를 알아가는 지화는 과학이다. 206)라는 생전 처음 접하게 된 단어들과 인간은 신이나 절대자가 아니다라고 했다가 신이란 말로써 인간의 본성에 깃든 정신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을 나타내기도 한다. (210)고 하다가 결국 인간이 결코 절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언한다라는 어정쩡한 말씀을 하심으로 결국 독자의 편의상 결론을 유보하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1943년 북악마루에서 천지인 합일 체험을 하시고 그 사상체계의 획을 그으셨으며, 한때 삼일철학이라는 학문에도 깊이 심취하시고, 동양철학에 기독교 사상을 접목시켜 당신만의 한국철학을 제시하시며 동양문명의 뼈에 서양문명의 골수를 넣는다고 말하는 문맥에서 다석은 예수와 주일을 관련시켜 자신의 주체적인 동양적 예수 이해를 제시하시고 계시기도 합니다. 예수는 역사속에서 계속 완성되어 가는 존재이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 예수는 완성되어 가는 존재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며(100), 당신이 죽을 날을 이미 정해 놓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육체의 살과 피를 희생했고, 희생한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신 예수를 본받고자 하셨습니다(113). 그런 살을 살아내기 위해 삶의 목적은 얼의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며, 얼의 생명을 일으키려면 혈육으로는 죽어야 하고, 결국 삶은 죽는 연습이다 라고 말씀하시며(114), 단식과 단색을 강조하시고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위해 끈임없이 자신을 내어 놓으셨으며, 예수를 믿는 삶에 머물지 않고 예수를 따르려 했고, 예수를 따르는 삶에 머물지 않고 예수와 함께 예수의 삶을 살고 예수의 길을 가려고 했으며, 예수가 졌던 십자가를 스스로 지려고 했습니다. 다석은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뭇 사람들과 함께 참 생명의 길을 가시려 하셨습니다(115).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지난 해부터 나라의 소란과 새로운 정부의 탄생과 아직도 강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찌보면 하루 하루를 숨죽이며, 눈치를 봐야하는, 그러나 주체적으로 우리의 대한국인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당면한 현실 앞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상대업과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어떠한 기준에 맞춰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항상 따라 다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걷고 있는 그 걸음을 먼저 걸어가셨던 신앙의 선배들의 치열한 질문과 대답들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그러나 최소한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시고, 그 말씀을 최대한 자의적이면서도 성경적으로 해석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의 옷을 입고 그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시고자 했던 그 분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과연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하는 질문에 더러는 답을 희미하게나마 얻을 수도 아니면 다시 오리무중 미궁으로 빠질 수도 있지만 결국 제가 내리는 제 나름의 결론은 이러한 고민은 지금의 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했던 선배들도 있으며 그들의 교훈을 받아 내가 누리고 우리의 다음세대에 어떠한 유산을 물려 줘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질문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제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매 장이 끝날때마다 1~2페이지에 걸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인 저자에 의해 씌어진 한국 사상가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이 정도의 주석이 달릴진데 다른 학문도 아닌 절대자를 다루는 신학의, 그것도 경전을 일반성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로 바꿔 기록한 주석책 류에서 매우 심각한 표절이 발생한다는 것은 저자의 가치관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그러한 내용을 몰랐다면 몰라도 전해들어 알았다면 그러고도 외려 옹호하고, 구입해서 읽으면 어떻냐고 하는 행태나, 여하튼 세상의 호갱이 아니라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는 신앙에 대한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함을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박재순 선생 인터뷰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47&aid=0002147445

19 조헌정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 (1-5) - 에큐메니안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 - 에큐메니안


“없이 계신 하느님” 다석 유영모(1)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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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선생은 1890년에 태어나 1981년 92세까지 우리 민족의 근대와 현대를 걸쳐 사신 분으로 흔히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석강의>라는 책 표지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석은 천문, 지리, 서양철학, 동양철학, 불경, 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요 한글철학자이다.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조만식선생의 뒤를 이어 평양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되어 30년이 넘도록 연경반 강의를 하였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동안 성서를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서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하였으며, 노자를 알리는데 큰 공을 이루었다. 순수한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여 우리말이 들온말(외래어)에 밀려 없어지거나 푸대접받는 걸 몹시 언짢아하였다.


160cm미터가 못 되는 체구에 서민적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눌변도 달변도 아닌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지가 번뜩이는 시문(詩文)이며 진언(眞言)이었다. 얇은 잣나무 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루에 한 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였는데, 세 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호를 다석이라고 했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맨손체조와 냉수마찰을 평생 동안 했다. 일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만든 손가방에 명상의 일기 공책을 들고 다녔다. 시계도 차지 않았지만,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이 제 먹거리는 제가 장만해야 한다면서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잔심부름을 시키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지켜 밥상을 손수 부엌 마루에 내놓았다. 걸어 다니기를 즐겨 북한산에 자주 올랐고 강의하러 갈 때도 꽤 먼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새벽마다 지구를 사타구니 밑에 깔고 우주를 한 바퀴씩 돌면서 우주 산책을 한다면서 세계의 명산, 깊은 바다의 이름과 높이 깊이를 모조리 기억하였으며, 지구와 별들과의 거리도 외웠다.


나이를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를 하루하루 세었는데, 32,200일을 살았다. 가까이 따르던 사람으로는 김교신, 함석헌, 현동완, 이현필, 김흥호, 유달영 등이 있다. 감탄할 만한 명문장가였는데도 평생 다석일지만 남겼다.


김교신 선생은 류영모 선생을 가리켜 “내가 만나 본 이 가운데 가장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 ‘믿어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류달영 선생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석을 진인(眞人) 또는 성자(聖者)라고 추앙한다. 그의 인격이 참되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그분이 펼치신 다석 사상은 우리 민족의 값진 정신적인 유산이요 인류의 유산이다.”


2011년 8월에 5차 세계 철학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때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로 두 명이 소개되었는데, 한분은 류영모 선생이고 다른 한분은 함석헌 선생이다. 함 선생께서는 당신 스스로 류영모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으니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다면, 류영모 선생이 가장 두드러진 분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함석헌 선생으로부터 류영모 선생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그때는 생각이 짧아 굳이 찾아뵐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한번이라도 찾아 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진한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다. 말씀이 심오하고 사상의 깊이가 있어 선생의 어록이 담긴 책을 가까이 하긴 하였지만, 깊은 공부는 하지 아니하였다.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책을 읽긴 하지만, 단기간에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시험을 앞두고 밤샘 벼락공부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임을 고백한다. 물론 이는 단지 류영모 선생님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았던 훌륭하신 분들의 생애를 간추려 전한다고 하는 것이 실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다. 부족하기에 주저하면서도 이런 일을 시도하는 것은 남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 다석 유영모 선생 ⓒGetty Image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개신교회의 역사는 채 140년이 되지 않는다. 서양의 2,0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서양의 여러 민족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왔다. 우리에게도 우리 문화와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뿌리가 깊지 아니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 개신교는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의 흐름도 있고, SNS라는 새로운 소통방식에 의한 정신문화가 문명의 영향도 있고, 내부 자체의 여러 문제도 있다. 대형교회들의 물량화 선교 거기에 교회지도자들의 영적 신체적 타락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전통문화 뿌리 내리기이다. 불교는 외래종교이지만, 천년이 넘는 동안 우리 문화와 역사 안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가톨릭은 제사문제 등 개신교보다는 앞장서 있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미국의 보수 선교사들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짧은 이해와 오해로 인해 우리 문화를 얕볼뿐더러 죄악시하기까지 하였다. 이제라도 뿌리 내리기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개신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설교에 그런 노력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의 설교는 서구교회가 하는 대로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서구의 삼단논리에 매여 있고, 예화 또한 서양 것을 주로 한다. 그래 예수는 분명 검은 눈, 납작 둥글 코에 검은 곱슬머리, 짙은 갈색의 중동인이지만, 우리의 머릿속 에는 파란 눈, 우뚝 솟은 코에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백인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성서의 인물만큼, 우리 역사에서 예수를 믿고 받아들였던 선배들의 믿음과 삶 또한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오늘 얘기되는 다석 류영모는 으뜸으로 중요한 분이다.


일좌식일언인(一坐食一言仁)


류영모 선생이 예수를 믿었던 16세가 되던 때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강제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뺏었던 해이다. 많은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 마냥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강연이 YMCA에서 있었는데, 청소년 다석이 이곳을 드나들다 총무 김정식 선생의 권유에 의해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교인이 되었고 이후 수년간을 오전에는 연동교회 오후에는 승동교회 저녁에는 새문안교회를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리고 경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정주의 오산학교에 과학교사로 초빙을 받아 가서 매 수업을 기도로 시작할 만큼 기독교정신에 열심이었는데,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었고, 창립자 이승훈 선생 또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석의 영향으로 이승훈 선생이 예수를 믿어 후에 장로가 되었을 뿐더러 오산학교를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해 나간 것이다. 이 오산학교를 통해 함석헌 주기철목사와 같은 민족과 교회를 위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왔는데, 그 근본을 보면 다석의 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석은 2년 후 이승훈 선생이 감옥에 갇히고 대신 평양신학교의 선교사 로버트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생들을 기독교신도로 만드는 일에 교육의 초점을 두자, 이때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고 그러면서 동시에 정통 교회신앙을 버린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하는 교리 신앙, 서구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비주체적이고 탈역사적인 신앙 곧 죽은 신앙을 버린 것이다. 거기에는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톨스토이의 사상과 두 살 아래 동생인 영묵의 갑작스런 죽음들을 통해 얻어진 신앙의 결과였다.


다음 시간에 언급을 하겠지만, 특히 교회가 전하는 대속(代贖)사상 곧 우리의 구원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고 하는 것을 입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이 온다고 하는 문자적 가르침에 의문을 품고 자속(自贖)사상, 우리 자신이 예수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희생적 결단 곧 자속을 통한 대속의 구원의 길을 얘기한 것이다. 예수가 가졌던 신앙을 본받아야지 예수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은 요즘 깨어있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가르침이지만,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에 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의 십자가 신앙을 자속적인 동양의 수행으로 끌어내어 일좌식일언인(一坐食一言仁)을 실천하셨다. 일좌란 무릎을 꿇고 앉아 말씀을 골라 묵상하는 일이며 일식은 하루 한 끼를 먹는 일로서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일언은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끊는 일로서 선생이 50세에 부인과 해혼하여 남매처럼 지낸 것은 유명하며 일인은 언제든 걷는 것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성서를 연구하고 우찌무라 간조나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불교, 유교 그리고 노장의 경전들을 두루 읽어 독특한 사상과 신앙을 세워나갔다. 특히 한글에 깊은 연구를 하시어 한자어를 비롯한 외래어들을 우리말로 바꾸는 노력을 하셨다. 예를 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는 ‘몸나’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나는 ‘얼나’로 그리고 나의 근원이 되는 하느님은 ‘참나’로 표현하고, 거듭난 나는 '솟나'로, 독생자는 ‘한나신 아들’로, 백성은 ‘씨알’로, 근본은 ‘바탈’로, 하느님은 ‘빔’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새롭게 해석하고 깨우치고 만든 단어가 워낙이 많아 다석 사전이 있을 정도이며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보통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시중에 나온 책들은 모두 제자들이 해설을 한 것들이다. 다석은 한시 1천3백수, 우리말 시조 1천7백수를 지었다. 광주가 우리말로 ‘빛고을’이라고 하는 말은 많이 아는데, 이 말 또한 다석이 처음 한 말이다.


한글과 삼재론


다석이 한글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인 삼재론 곧 하늘과 땅과 인간을 중시하는 삼재론과 성서에 드러난 하느님 예수그리스도 성령이라고 하는 삼위일체가 사상적으로 일치한다고 보았고 이 삼재론 사상이 한글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비교학자들에 의하면 중국과 한국은 그 기본적인 문화의 핵심 키워드가 다르다고 한다. 중국은 음양론이 중심이고 한국은 삼재론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음양론은 밟고 어둡고 태양이 있고 없는 농경문화권 속에서는 사상의 중심이 되지만,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시베리아 문명은 농경문화권이 아니라 수변문화권이며 여기에는 음양론보다는 삼재론이 더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함석헌 유영모 장일순 최홍종의 생애와 사상 강좌”, 이정배, 광주YMCA 오방 아카데미 편, 87쪽) 후에 한국과 중국의 문명권이 서로 교류하면서 중국은 ‘음양론 중심의 삼재론’을 펴고 우리는 ‘삼재론 중심의 음양론’을 펴게 된다.


이 삼재론 중심의 음양론 정신이 가장 잘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한글이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할 때 바로 이 삼재론과 음양론의 구조를 조화롭게 조절하여 만든 것이다. 한글의 기초가 되는 ‘아(아래아)·으·이’는 하늘 땅 인간이 우주의 근본이라는 삼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삼재론에 모음과 자음의 음양을 조합한 것이 한글이다.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의보감의 핵심사상도 정기신(精氣神)이라는 삼재론이다. 몇 년 전 유네스코에서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세계의 소수민족에게 가장 적합한 언어는 한글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몇 년전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했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을 것이다. 사실 소리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언어는 한글이 최적이다. 한글은 매우 과학적인 글일뿐더러 거기에는 깊은 사상과 철학이 담겨 있다. 류영모선생은 바로 이러한 한글에 담겨 있는 철학과 사상에 깊은 연구를 하시어 가장 많은 한글 시조를 남기신 분이다.


그분이 남기신 우리 말 시조 하나를 살펴보자. 독자 여러분도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다.



우리 언니들은 싱싱히 댄겨가시압 아멘
힘차신 속알로 힝하니 돌아가시압 아멘
아버지 할렐루야 암 우리 읗님 가온뫼시리



여기서 언니는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을 말하고 읗님은 하느님을 말하고 가온이란 말은 영원절대를 말합니다. (풀이)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이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휭하니 다녀갔듯이, 우리도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어서 빨리 하느님께로 돌아가서 그분만을 영원토록 모시자.(『다석 유영모』, 박영호, 147쪽)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


류영모 선생의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다석은 자신의 생을 년으로 계산하지 않고 날로 계산하여 일기에 그 날수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 32200일을 사셨다. 8년 전에 다석을 따라 저도 한번 계산을 해본적인 있었는데,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 산 날이 2만1천3백9십8일이었다. 저는 그간 궁합이니 토정비결과 같은 신수를 전혀 해보지 않아 제가 태어난 시를 알지 못했는데, 어머님께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더니 정확한 시는 모르고 새벽녘이라는 것만 알았다. 무슨 태몽 같은 것은 없었냐고 하니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간 기간을 햇수가 아닌 날로 계산하는 방식은 참으로 좋은 것 같다. 그건 하루하루를 보다 값지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에 화를 내는 경우는 없다. 덕담만을 한다. 그건 그 해를 보다 보람있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결심의 표시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나이를 날로 계산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매일매일이 새날이 되는 셈이고 태어난 시를 축하하는 습관을 갖는다면 매일매일이 생일이 되는 것이다. 나이를 굳이 햇수로 계산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습관에 불과하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나이를 물으면 40살쯤 먹은 사람이 150살이라고 답을 한다고 한다.


우리와는 다른 저들 나름대로의 계산법이 있는 것이다. 이를 갖고 미개인이다 문화인이다 말할 수는 없다. 굳이 미개인 문화인을 구분한다면 수십만 명을 한꺼번에 살상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수천 발씩 갖고 있는 놈이 미개인이고 야만인이지, 나이를 다른 방식으로 계산한다고 해서 미개인이 될 수는 없다.


필요하다면 우리 나이를 달의 주기에 맞춰 계산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계절로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고, 하루를 둘로 나누어 조석의 때로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백남준 아트홀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작품이 있다.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의 날짜를 태어난 날로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그날 있었던 어머니와의 대화를 ‘태내 자서전’이라는 명목으로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를 들면 첫 작품은 자신이 태어난 날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120일째가 되는 날, 1930년 그날의 뉴욕타임스 신문을 구해서 그 위에다 큰 글씨로 -120 days 라고 매직으로 휘갈려 쓴 다음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Mom, what is tax?’ ‘엄마 세금이 뭐야?’ ‘응, 그건 정부가 국민에게 매긴 바가지란다.’ 태내 자서전이라는 발상 자체도 파격적이지만, 대화의 내용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석은 28세에 이 세상에서 산 날을 세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쓴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살이에 있다 하노라. 하루를 무심히 지내면 백년, 천 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린다. …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無常)한 인생도 비상(非常)한 생명이 된다. 언제나 오늘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런 얘기도 후에 하셨지요. ‘오! 늘--!’



태양을 꺼라!


류영모 선생님의 호 다석(多夕)은 한문으로 보면 저녁 석자 세 개가 모인 것이다. 여기에는 하루에 저녁 한끼만을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서양의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다석의 독특한 동양적 기독교 이해의 출발점이 담겨 있다.


철학자 이기상은 그래서 이 호를 ‘태양을 꺼라’로 해석한다. ‘많은 저녁’이 되려면 태양을 꺼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이라고 하는 것은 빛의 근원이자 밝음의 출발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세상이 있었다.’ 곧 빛은 세상의 출발이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다석은 이 빛의 근원이 되는 태양을 끄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저녁을 상징하는 어둠과 달을 끄집어 낸 것이다.


태양이 서양적 이성의 상징이라면 달은 동양적 감성의 상징이다. 서양인들은 태양을 좋아한다. 해변에 나아가 옷을 벗고 태양을 즐긴다. 반면 동양인들은 옷 벗음을 수치로 여기며 산에 올라 달을 즐긴다. 태양 빛 아래서 시원한 맥주잔을 기우리며 떠드는 것이 서양의 멋이라면 달빛 아래서 시 한수를 읊으며 차 한잔을 나누는 것이 동양의 멋이다. 따라서 어둠과 달을 뜻하는 다석의 호는 서양의 논리의 틀을 벗어나 동양적 감성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영원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석은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대낮에는 살림을 위해서 다니고, 일하고, 배우고, 놀고, 밤에는 그것을 위해 쉬고, 잠자고, 꿈꾸는 것으로 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밝은 것 뒤에는 크게 잊혀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은연중에 통신으로,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저 잠이나 자고 있다. 한낮에만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없는 소리다. 빛을 가리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뛰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을 만들려는 것은 점점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창세기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했고,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 했으니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이 영원한 저녁이 그립도소이다. 파동이 아닌 빛 속에서 쉼이 없는 쉼에 살리로다.”(“저녁찬송”. 「성서조선」, 1940년 8월호)



고로 다석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은 밤에 잠만 자지 말고 세상을 향한 낮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영원하신 하느님 어버이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순우리말로 ‘하도 지낸 저녁’이라 옮겨 쓰기도 했던 영원한 저녁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다석은 ‘있음’ 대신에 ‘없음’에서 참을 찾았다. 여기에서 다석이 자주 얘기하는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없이 계신 하느님


없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인가? 절대자로서 우주의 공간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그런 분을 말한다. 성서에서 하느님이란 말은 엘로힘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말이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인데, 당시 고대 중동에서의 여러 부족들의 신들은 모두 ‘엘’이라고 불리었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부른 신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 ‘엘 엘룐의 하느님’이고,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곧 ‘엘 샤다이의 하느님’이다. 엘로힘은 그러니까 이런저런 신들을 모두 합친 이름이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신의 이름 ‘야훼’는 무엇인가? 이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에 응답하여 모세를 통해 나타나신 분이다. 모세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대답을 기다렸는가 하면, 엘이 들어간 어떤 이름을 기대했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신은 자신을 많은 엘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훼’라고 발음하셨는데, 그 뜻은 그냥 ‘나는 나다.’


사실 우리는 이 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신의 정체성을 설명한 하나의 문장이다.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이다 그런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름을 부정한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규정을 받는다는 말이고 규정을 받는다면 그건 더 이상 진정한 신이 아닌 것이다. 엘은 이름이 있다. 전능하신 엘, 뛰어나신 엘, 치료하시는 엘, 규정이 된다. 그런데 ‘야훼’는 실상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부정한 이름이다.


다석의 글에서 이런 설명은 보지 못했지만,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해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고 신은 절대적 존재이다. 어떻게 상대적 존재가 절대적 존재를 파악(把握)-잡을 파에 집 악-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개미가 인간을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을 나는 손오공이 기껏 날아보았더니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역파악이 신 이해의 바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독자 여러분은 언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부릅니까?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을 부르지 않습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 편리에 따라 신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면 그건 신이 아닌 신하 혹은 노예이다. 성서는 이를 우상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앙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정말 우리가 노예가 되고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관계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실 솔직히 말하면 무한 경쟁과 무한 소유를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신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두 거짓이다.


존재에 대한 서양사상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인간중심의 서양철학과 이성적 논리에 근간한 신학 그리고 그 바탕위에서 과학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반면 동양에서의 존재 파악은 인간 이성에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사람을 표현할 때,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인(人)이라는 하나의 낱말이 이미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이 간을 붙여서 인간을 표현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 거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인간을 개체로 보지 않고 관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시간(時間) 마찬가지다. 시와 시 사이의 관계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空間)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은 비어있다는 말이다. 빔과 빔 사이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인간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존재를 이해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을 주체적으로 놓고 그 존재성을 파악했고 이를 있음이라고 한 반면에 동양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없다. 그저 사이만을 이해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빔 곧 무(無)를 더 큰 존재성으로 이해하였다. 서양에서의 무는 그냥 없는 것인 반면에 동양에서의 무는 마치 도(道)와 같이 그저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지 부정의 의미로서의 비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그 근본을 무 곧 없음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서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지만, 현상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동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다. 성서의 신 이해는 그래서 동양인들이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한다. 하늘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하늘은 그냥 sky이다.


그러나 우리말의 하늘은 무한히 크고 넓다라는 뜻의 ‘한’이라는 단어와 항상 있다고 하는 ‘늘’이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무한공간과 무한시간이 합쳐진 말이 하늘이다. 이 하늘에 사시는 분이 하늘님이다. 곧 하느님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님이라고 고쳐 부르지만, 이는 서양적인 숫자 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단어이다.


저는 우리가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을 고집한다면 유일신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요한이 말한 바,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를 따름으로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한이 없다는 절대무한의 의미에서는 정당하지만, 개신교의 신만이 절대 유일하신 신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은 모두 우상이다라고 하는 배타적인 의미에서 쓴다면 이는 잘못이다. 이는 무한히 크신 님 ‘야훼’를 자신만의 작은 신 ‘엘’로 축소해버리는 곧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오늘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란 인간 중심의 서양의 사고 체계에 대한 동양적 답변이면서 동시에 이는 서양의 신학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신을 믿고 엄청난 규모의 성당과 교회 건물을 짓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방대한 신학체계를 만들어 왔지만, 정작 그것이 하느님을 절대의 신으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님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었냐는 질문이다. 서구 기독교가 세계 역사에서 한 일을 보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여러 약소나라들을 예수 이름으로 정복하여 식민지화하여 단물은 다 빼내어 선진국 행세를 하며 지금도 군사와 경제의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성서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수천만의 죽음을 불러온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지금도 핵무기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를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수익을 얻는 반면 후진국은 이 무기로 서로 간에 죽이는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이 현실이 과연 야훼님이 원하는 일인가? 서양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와 혜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자연재해를 불러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과연 하느님이 시켜서 한 일인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남한 또한 이러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고자 안달이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다. 용산참사나 평택의 노사대결은 선진국이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다석 류영모 선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서구 기독교가 저지른 인간 중심의 성공신화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섬김과 나눔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바로 실천하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세상에 빠진 내가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에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 아들과 딸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마디를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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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독교가 파악하지 못한 하느님 - 다석 류영모(2)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16



없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인가?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로서 우주의 공간 어느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그런 분을 말한다. 성서에서 하느님이란 말은 엘로힘이라는 히브리말을 번역한 말이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인데, 당시 고대 중동에서의 여러 부족들의 신들은 모두 ‘엘’이라고 불렸다.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며 부른 신은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 ‘엘 엘룐의 하느님’이고,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곧 ‘엘 샤다이의 하느님’이다. 엘로힘은 그러니까 이런저런 신들을 모두 합친 이름이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또 다른 신의 이름 ‘야훼’는 무엇인가?






▲ 다석 유영모(사진 왼쪽) 선생님과 그의 제자 함석헌(사진 오른쪽) 선생님 ⓒ한국 위키피디아



이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고통을 호소하자 이에 응답하여 모세를 통해 나타나신 분이다. 모세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대답을 기다렸는가 하면, 엘이 들어간 어떤 이름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신은 자신을 많은 엘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훼’라고 발음하는데, 그 뜻은 그냥 ‘나는 나다.’ 사실 우리는 이 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신의 정체성을 설명한 하나의 문장이다.


본래는 이름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유이다 그런 뜻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이름을 부정한 것이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규정을 받는다는 말이고 규정을 받는다면 그건 더 이상 진정한 신이 아닌 것이다.


엘은 이름이 있다. 전능하신 엘, 뛰어나신 엘, 치료하시는 엘, 규정이 된다. 그런데 ‘야훼’는 실상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부정하는 단어이다.


다석의 글에서 이런 설명은 보지 못했지만,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해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고 신은 절대적 존재이다. 어떻게 상대적 존재가 절대적 존재를 파악(把握)-잡을 파에 집 악-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개미가 인간을 파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을 나는 손오공이 기껏 날아보았더니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역파악이 신 이해의 바름이 아니겠는가?


서구가 잘못 걸어온 길


오늘날 신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언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부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을 부르지 않습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자기 편리에 따라 신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면 그건 신이 아닌 자신의 종일 것이다. 성서는 이를 우상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앙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정말 우리가 종이 되고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그런 관계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실 솔직히 말하면 무한 경쟁과 무한 소유를 부추기는 이 자본주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신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두 거짓이다.


존재에 대한 서양 사상은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인간중심의 서양철학과 이성적 논리에 근간한 신학 그리고 그 바탕위에서 과학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반면 동양에서의 존재 파악은 인간 이성에 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람을 표현할 때,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인(人)이라는 하나의 낱말이 이미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이 간을 붙여서 인간을 표현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 거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을 개체로 보지 않고 관계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시간(時間) 마찬가지다. 시와 시 사이의 관계 그것이 시간이다. 공간(空間)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은 비어있다는 말이다. 빔과 빔 사이 그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인간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존재를 이해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인간을 주체적으로 놓고 그 존재성을 파악했고 이를 있음이라고 한 반면에 동양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없다. 그저 사이만을 이해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빔 곧 무(無)를 더 큰 존재성으로 이해했다. 서양에서의 무는 그냥 없는 것인 반면에 동양에서의 무는 마치 도(道)와 같이 그저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지 부정의 의미로서의 비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그 근본을 무 곧 없음이라고 파악했다.


서구 기독교가 파악하지 못한 하느님


현상을 다루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서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지만, 현상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동양의 존재이해가 우선적이다. 성서의 신 이해는 그래서 동양인들이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한다.


하늘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하늘은 그냥 sky다. 그러나 우리말의 하늘은 무한히 크고 넓다라는 뜻의 ‘한’이라는 단어와 항상 있다고 하는 ‘늘’이라고 하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무한공간과 무한시간이 합쳐진 말이 하늘이다.


이 하늘에 사시는 분이 하늘님이다. 곧 하느님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유일신을 뜻하는 하나님이라고 고쳐 부릅니다만, 이는 서양적인 숫자 개념이 들어가 변형된 단어이다.


필자는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을 고집한다면 유일신이라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요한이 말한 바, ‘하늘님’과 예수가 하나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를 따름으로 ‘하늘님’과 하나가 된다는 이런 의미에서, 곧 하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끝이 없다는 절대무한의 의미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신교의 신만이 절대 유일하신 신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은 모두 우상이다라고 하는 배타적인 의미에서 쓴다면 이는 잘못이라고 본다. 이는 무한히 크신 님 ‘야훼’를 자신만의 작은 신 ‘엘’로 축소해버리는 잘못이요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늘님’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인간 중심의 서양의 사고 체계에 대한 동양적 답변이면서 동시에 서양 신학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다. 신을 믿고 엄청난 규모의 성당과 교회 건물을 짓고,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방대한 신학체계를 만들어 왔지만, 정작 그것이 하느님을 절대의 신으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님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었냐는 질문이다.


다석의 없이 계시는 하느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세계 역사에서 한 일을 보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또한 수많은 약소국가들을 예수 이름으로 정복하며 식민지화하여 단물은 다 빼먹은 결과 지금은 선진국 행세를 하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과연 야훼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수천만의 죽음을 불러온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지금도 핵무기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를 무분별하게 개발하여 수익을 얻는 반면 후진국은 이 무기로 서로 간에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는 이 현실이 과연 야훼님이 원하는 일인가?


서양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와 혜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환경오염과 이로 인한 자연재해를 불러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남한 또한 이러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고자 안달을 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다른 민족의 피를 대가로 했다면 오늘은 우리의 이웃이 피를 흘리고 있다. 용산참사를 비롯한 개발의 희생자들, 김용균 님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농어촌 곳곳에서 저임금에 혹사당하는 이주민 노동자들, 알바를 세 개씩 뛰는 흙수저의 젊은이들이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서구 기독교가 저지른 인간 중심의 성공신화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섬김과 나눔의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바로 실천하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세상에 빠진 내가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에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 아들과 딸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마디를 하고 싶은 것이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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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 하느님의 씨를 키워라 - 다석 유영모(3)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3.23

마가복음이 예수의 수난사를 중심으로 낮아지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을 주제로 삼은 반면에 요한복음은 높아진 그리스도,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는다. 다석은 이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요한복음의 하느님은 역사 안에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또한 이 세상에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思想)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대를 품는 주체적인 신앙인


곧 생각하는 사람 주체적 인간을 강조한 것이다. 서구교회가 말한다고 무조건 믿지 말고,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에 절대를 품고 말씀을 되씹고 되씹는 과정을 통해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상의 것은 거의 전부 훨훨 벗어버리고 ‘하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절대 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다 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생(生)을 가진 자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갑니다. 이 세상이 되고 안 되고는 영원한 님을 찾는 사랑의 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김교신 선생과 달리 류영모 선생은 정통기독교신앙을 버렸다. 정통기독교신앙이란 4세기 말에 바울의 편지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교의신학의 핵심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따르는 신앙을 말한다. 사도신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예수의 육신부활과 동정녀 탄생에 이어,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원죄가 속죄된다는 대속의 속죄교리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속죄교리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요한복음에 따라 진정한 기독신앙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얼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에게서는 예수의 신앙을 배워야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따르기를 넘어 예수살기를 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속신앙만이 주를 이루는 오늘 교회의 현실은 분명 예수께서 바라셨던 일은 아니다. 다석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속 신앙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주체적인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그렇게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보다 큰일을 하여야 한다.


자속의 예수, 대속의 그리스도


흔히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불교는 자력종교, 기독교는 타력종교라고 말한다. 불교는 극기의 훈련과 명상 깨달음을 통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곧 스스로가 부처가 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고 한다. 반면 기독교는 구원은 오로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의 아들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곧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 다석 유영모 선생님과 그의 부인 김효정 선생님 ⓒGetty Image

남한교회가 구원 교리에 있어 가장 강조하는 성서 구절은 로마서 3장 28절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는 사도 바울의 얘기이다. 마르틴 루터 신부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항하여 개혁운동을 펼칠 때에도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다고 하는 sola gratia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바울과 루터 공히 구원에 있어 자속의 노력은 부정하고 대속의 교리만을 외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주장과 사상이 그러하듯이 기독교에서 어떤 특정 교리가 외쳐질 때에는 그 교리를 외쳐야만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오직 믿음에 의한 의인됨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율법 곧 할례법이나 안식일법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폐쇄적인 유대혈통 민족주의’와 ‘예루살렘성전 제사절대주의’라는 부당한 교권 교리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이방인 구원을 가로막는 이러한 법을 타개해야만 했던 상황이 있었다.


루터 또한 중세 가톨릭의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민중을 오도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횡포에 가까운 교권에 대항해야 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나 루터가 신앙의 실천과 행위에 소홀하였던가? 전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신앙 행위에 있어서는 철저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그 역사적 상황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매우 잘못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남한교회의 타락과 그 원인


지금 남한의 교회들이 비판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기적이고 사회 참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에는 열심이지만, 윤리·도덕성이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비난받지 않는 대형교회들이 없다.


성스캔달, 재정비리, 세습, 교권횡포 등으로 인해 세상은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헌금과 같은 종교적 실천만을 강조하고 교회 밖의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아픔은 외면하고 있다. 사회구조 악의 문제에는 눈을 감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되이 지키라는 주일 성수 명령은 본래 쉴 수 없었던 노예와 가축 곧,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계명이었다. 열에 하나를 바치라는 십일조의 계명 또한 과부와 고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계명의 말씀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계명으로 잘못 이용되고 있다.


지금 대형교회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 무엇인가? 만세! 삼창을 본떠 주여! 삼창을 외치고 나서 집단 통성기도를 시작한다. 두 손을 들고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방언기도를 하는 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단적인 열광 속에서 개인의 스트레스나 울분을 토해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 있다.


예수께서 가르친 기도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고’ ‘하루치의 양식을 위해’ 그리고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라’ 등등이 주 내용이다. 공중석상에서 손을 들고 크게 외치는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라고 비판하셨다. 차라리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 TV 방송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댄 래더라는 앵커맨이 ‘당신은 하느님께 기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수녀님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한 앵커는 다시 질문을 하였다. “당신이 듣고 있을 때에 하느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은 답변하기를 “그분도 듣지요.” 남한교회가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예화이다.


작금의 개신교의 성장이 멈추고 감소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10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이 개신교를 가리켜 ‘개독교,’ 목사를 ‘먹사,’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조롱하였다. SNS상에 끊임없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비난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판을 할 때는 그래도 관심이 있었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관심과 참여가 사라진 교회는 미래가 없다. 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신앙 훈련이나 사회 실천과 같은 자속 신앙이 없이 통성기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에 의지하여 구원받으려는 대속 신앙은 한 때 많은 사람들이 마치 밀물이 밀려들어오듯 쉽게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동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 타락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고 교인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떠나가는 주된 이유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피에 대한 설교도 많이 하고 보혈의 찬송을 많이 부르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도 지적이 되었지만, 정작 피해자는 아직 용서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가해자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좁은 길 신앙은 없어지고, 고난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다 지고 갔으니 넓은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대속신앙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신앙의 추를 자속신앙으로 옮겨 신앙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류영모


대속신앙의 대표적인 성서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함을 얻을 것이다.” 100년 전 조선교회는 이 말씀 하나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자주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말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유명했던 류영모 선생과 김교신 선생은 신앙의 길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다. 김교신 선생은 정통신앙을 유지했고, 류영모 선생은 매우 폭넓은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류영모 선생은 김교신 선생이 주관하는 성서연구회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어느 한계를 넘는 말은 일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교신의 간청에 못 이겨 성서연구회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풀이하였는데, 아니다 다를까 류영모가 예상한 대로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웅성거렸다. 이 장면을 김교신은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류영모 선생의 독특한 요한복음관을 듣고 일동의 논의가 분분했다. 류 선생은 특이한 해석을 갖고 계시다. 남의 신앙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자기의 성서관을 쉽게 공표하지 않는 터인데 수년 동안의 간청에 의해 금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명하시니 처음 듣는 이들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67-68쪽)

그날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류달영 선생이 그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1937년 1월 정초 경인선 오류역 근처 송두용 선생 집에서 겨울철 성서연구 모임을 가졌다. 다석은 북한산록 구기리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왔다. 다석은 그 모임에서 김교신의 간청에 의해 성서말씀을 하게 되었다. 말씀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해설이었다. 다석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정통을 자처하는 교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다석의 생각은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했다. 다석은 말하기를 하느님이 사람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성령)을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 주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는 요한1서 3장 9절의 말씀과 상통하는 해석을 하셨다. 사람은 제 마음 속에 하느님의 본성(씨)를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의견이 분분하여 여러 사람들이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김교신 선생이 이를 막으면서 “다석 선생의 성서풀이는 아주 높은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므로 알아들을 만한 귀를 따로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참뜻을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닫기 어려우니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서 오랫동안 새겨보라고 타일렀다.” 여기서 우리는 류영모 선생이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는 모두 요한복음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인 것 같이 우리들도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고(17장 22절), 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4장 12절)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속신앙이 아닌 이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속신앙을 강조한 말씀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당시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조선교회의 지나친 대속신앙적인 성서해석이 가져올 조선교회의 미래를 그때 이미 예감했다고 본다.


따라서 대속신앙의 대표적 성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해석할 때, 그 한 구절에만 매여 좁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리고 3장 16절 이하 말씀인 19절과 20절 말씀을 보더라도 이는 명확하다. 19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행실이 악하여’라고 말함으로 ‘행실’을 강조하고 있고, 20절에서는 “악한 일을 일삼는 자가 빛을 미워하고 멀리 한다”고 말함으로 또한 “악한 일”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처음 선교와 전도를 시작할 때, 신앙행위가 강조된 무거운 신앙을 요구하기는 힘들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하고 명료한 대속신앙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을 때에는 그 교리나 신학은 이제 맞추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는 자속신앙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남한교회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적이고 세계사적인 과제 앞에 서 있다. 개인영혼 구원이라는 전통교리와 대속신앙에 매여 있어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남한교회의 미래를 위해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믿기’를 넘어 ‘예수따르기’와 ‘예수살기’의 신앙에 이르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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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얼 사상 - 다석 류영모(4)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4.06


이번 글이 다석 류영모 선생에 관련한 네번째이다. 워낙 방대한 사상이라 1년을 계속한다 해도 끝이 나질 않겠지만, 중요한 얘기들이 많아 다섯 번까지 할 예정이다.


우리 말과 ‘얼’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인 얼나가 참나다. 하느님 아들 예수는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이 짧은 글 속에 다석 류영모 선생이 즐겨 쓰던 ‘얼’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온다. 얼생명 얼숨 얼나. ‘성령’이라는 한자어를 순수 우리말로 옮긴 단어가 ‘얼’이다.





▲ 구기동 집 주변을 산책하는 다석의 모습(1970년도, 80세) ⓒ다석사상 연구회



요한복음 4장 24절의 ‘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을 다석은 ‘하느님은 얼이시다’로 바꿔 말한다. 하늘나라 또한 ‘얼나라’라고 말한다. 얼은 썩어 없어질 몸의 반대어이며 영원함을 상징한다.


요한 1서 3장 9절의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sperma, 그리스)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씨,’ 곧 하느님을 알게 하고 자라서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도 얼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얼이 빠지다, 얼얼하다는 말이 있다. 얼이 빠지다라는 말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멍청해져서 생각의 알맹이가 없이 정신없이 이소리 저소리 횡설수설하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얼얼하다는 말은 문자의 뜻으로 보면 얼이 가득 찬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쓰임새를 보면 얼이 빠진 경우와 비슷하여 넘어져 몸의 어딘가가 부딪혀 부어올라 신경이 둔하게 될 때, 얼얼하다고 말한다. 생각이 분명하지 못할 때, 머리가 얼얼하다고 말한다.


본래는 좋은 말인데, 실제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얼이 하나만 들어와도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거늘 두 개나 들어왔으니 감당치 못할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우리가락을 들을 때에 흥이 나서 외치는 추임새 중의 하나인 ‘얼쑤,’ ‘얼씨구 좋다’도 얼이 넘치는 상태 곧 너무 흥겨워 ‘신’이 춤추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좀 거친 표현을 쓴다면 너무 좋아 자신의 똥집이 들썩들썩 거릴 때를 말한다.


얼굴이라는 단어 또한 다석은 이를 ‘얼+골’ 곧 얼의 ‘골자구니’에서 나온 말로 설명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얼이 지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깊게 파인 주름에서 인생의 험한 골짜기를 엿볼 수 있고, 눈가를 스치는 여유있는 미소에서 인생의 넉넉한 골짜기를 맛볼 수 있다. 예수님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얼굴을 얼의 골자구니로 풀이한 것은 참으로 깊은 통찰에서 나온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다.


어른과 어린이라는 단어 또한 ‘얼이 온전한 사람’에서 나온 말로 해석한다. “사람이 나이 먹고 시집 장가간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얼과 얼이 얼려야 어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본래 우리말에 상대방을 높이는 말에 ‘언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또한 ‘얼님’ ‘얼을 가진 님’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식당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분을 향해 ‘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근본을 알면 쉽게 사용해서는 안될 말이다.


얼은 알과도 그 뜻이 통한다. 알의 껍데기는 그 생명이 나오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몸 혹은 맘은 모두 얼이 나올 때까지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얼은 곧 태초에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어주신 당신의 숨길, 숨바람, 곧 성령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 얼을 찾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 또한 같은 의미이다. 물은 과거의 죄를 씻어내는 역할을 하고 비어낸 몸을 새롭게 하는 역할은 성령이 담당한다.


남한교회의 일반 성령이해

성령은 우선 하느님 예수와 더불어 동등한 인격체이다. 이 세 분이 하시는 역할은 다르지만, 이 세분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신학이 주창하는 삼위일체론의 핵심이자 남한교회가 매 예배 때마다 반복하는 사도신조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니케아신조가 있는데 그 내용이 사도신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또 다시 사도신조를 새롭게 고백한 이유는 성령님을 하느님이나 예수님보다 하위에 두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를 가보면 강단에 선 목사들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쉿! 쉿! 하는 목쉰 소리를 낸다. 때로는 손을 펴서 성령을 나눠주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마치 성령은 부흥목사의 주머니 속에 있다가 그 목사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이는 참 성령의 모습이 아니다. 한 인간의 명령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영이라면 그건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의 영에 불과하다. 이 영이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품을 내며 넘어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최면사들도 하고 무당들도 하는 일이다. 오히려 무녀나 무당들은 접신을 하면 날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파 부흥사들이 날이 선 작두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초자연적인 기적 사건에만 관련지어 성령의 역사를 말하면 기독교가 뛰어날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교회는 그 선교 역사가 짧아 성령하면 방언과 치유 기적만을 떠올리는 성령 은사주의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다. 사도 바울로가 쓴 여러 편지를 종합하면 성령의 은사는 방언과 치유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 기록되어 있는 은사들을 보면, 거기에는 지도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지혜, 지식, 권면, 방언, 통역, 치유, 예언, 전도, 섬김, 자선, 영분별 등등 30가지가 넘는다.

오히려 바울로는 방언의 은사나 치유의 은사를 여러 은사 중 하위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한의 많은 교회들은 이 낮은 은사에만 매달려 있다. 바울로가 말하는 최고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의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바로 12장의 은사장 다음에 나온다. 여러 은사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 모두가 사도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은사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선생이 이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을 감추는 사랑의 은사보다는 자신을 드러내주는 방언과 치유의 은사에 더 관심한다. 그래 남한교회에서 성령은 방언과 치유 기적이라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의 산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교권과 광신주의에 갇혀 버린 성령님을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본래의 자유하는 영으로 되살아나 오늘 여러분의 현실의 삶 속에서 이 땅의 탐욕을 줄이는 영원에 대한 소망과 경쟁이 가져오는 죽음의 권세를 누르는 부활의 능력을 되찾기를 고대한다.

성령은 생명의 근원

성서가 말하는 성령님은 ‘생명을 낳게 하는 분’으로 말해진다. 제1성서에서는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라 말하고 제2성서에서는 그리스어로 프뉴마로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흙으로부터 인간을 빗은 후에 그 코에 당신의 입김 루아흐!를 불어넣으시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드신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 프뉴마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 루아흐나 그리스어 프뉴마는 모두 성령으로 번역되지만 동시에 문맥에 따라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변화의 힘을 동반한다. 특히 요한은 단어의 이러한 단어의 이중적인 의미를 이용한 엇갈리는 대화를 좋아한다.

그리스어 ‘ana’라는 부사는 ‘다시’와 ‘위로부터’라는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나야 한다고 하는 질적 태어남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니고데모는 두 번 태어나야 한다고 하는 그래서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양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어 대화가 엇갈리고 있다.

다석 류영모는 어머니 배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생명은 가짜 생명인 몸나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이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참나가 들어갑니다.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은 참나가 아니고 속알(德)의 나, 성령의 나가 참나입니다. 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가 참나입니다. 죽으면 흙 한줌 재 한 줌이 되는 몸뚱이는 참나가 아닙니다.”



다석은 ‘나’라는 단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의 우리 말을 만들었는데, 육신적인 인간을 말할 때는 ‘몸나’ 혹은 제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나’로,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은 ‘얼나’ 혹은 참된 모습의 인간이라는 ‘참나’로, 몸나 혹은 제나에서 얼나 혹은 참나를 체험하는 인간은 ‘솟나’로 말한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다석의 용어로 말하면 제나 혹은 몸나가 얼나 혹은 참나로 거듭나는 솟나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뛰어난 랍비인 것은 알았지만,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 둘 사이의 대화는 거기서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이후 니고데모는 이 예수의 말씀을 곱씹고 곱씹어서 숨은 제자로 남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예수를 변호하기도 하고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니고데모만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가까이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얻어먹자 예수를 저들의 세상 왕으로 받들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신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통해 영원의 떡을 주고자 했지만, 예수의 참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자꾸만 좇아오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여 온 살아있는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떡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6장 51절)


그러자 사람들은 그만 이 ‘살’이라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치 식인종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고는 말이 어렵다고 수군거리고는 다들 떠나간다.(6장 66절) 다만 베드로는 뭔가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고 답한다.(요한 6장 68-69)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어떤 저 하늘 저편에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주기도에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 임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로가 말한바와 같이 육체를 따라 사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의 성령을 따라 사는 그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진 이 땅의 오욕의 역사 속에서 움틀거리는 공의와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 역사의 소리를 듣고 이에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믿는다. 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솟나를 경험한 얼나의 사람은 작게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우릴 줄 아는 사람이요 크게는 하느님의 백성들인 씨알이 주인되는 민의 역사를 믿고 하루하루를 희망의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4.3 항쟁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들이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제주4.3항쟁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30만 전체 도민 중 거의 십분지 일에 해당하는 3만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며 이중 3분지 1이 여성,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한마디로 골육상잔인 한국전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초기에 합의에 의해 소수의 희생자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북에서 내려온 기독청년단과 미군정과 하수인 이승만정권이 손을 잡고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려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인 대학살사건이다. 왜냐하면 당시 미군정이 파악한 남한 사람들의 이념은 70% 이상이 남의 자본주의보다는 북의 사회공산주의 제제를 더 원하고 있었기에 친북 빨갱이 이념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러한 논쟁으로 정적들을 감옥에 가둔 맥카시논쟁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당시 한 달 만에 무려 6천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인 경비대장 박진경을 암살한 기독교인 문상길 중위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증언입니다.


“22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이승만)의 단독 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 하에 한국 민족을 학살하는 한국 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도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류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나와 제나라는 세상 생명을 넘어 하늘 얼나에서 부활 솟나로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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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과 말을 되찾는 운동에 앞장 섰다 - 다석 류영모 (5)
조선교회의 뿌리를 찾아서(8)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
승인 2019.05.25


다석은 일제강점기를 살며 독립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었지만, 총을 들고 직접 싸우기보다는 바른 신앙과 민족의 얼과 말을 되찾는 사상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꾀한 분이다. 다석의 독창성은 순우리말로 생각을 풀어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오래된 뿌리를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오듯이 다석의 글도 곱씹어볼수록 깊은 뜻이 드러난다.


다석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주기도문과 다석의 제자로서 이화여대 교목/교수로 봉직하시면서 선생의 뜻을 펼쳤던 김흥호 목사의 해설이다.


다석의 주기도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길 참 말씀이니이다.
이에 숨쉬는 우리 박는 속알에 더욱 나라 찾음이여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옵고 진 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널리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님께서 하나가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해설) 영원무한하신 생명의 근원에 도달함만이 거룩한 길이요, 참 말씀이다. 아침에 해가 떠올라 온 세상을 밝히듯이, 생각하는 사람의 속알이 깨어나 밝아지는 대로 우리의 나라 찾음은 더욱 확실해진다. 사람이란 자기 속에 자기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힘씀으로써 무한히 발전할수 있다.
사람은 서로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하느님 앞에서 평등함을 느껴야 한다. 하느님과 주님이 하나가 되어 참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랑 속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땅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나무처럼 하늘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산 사람이다. 아멘. (제소리 김흥호)



다석의 민중씨알론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은 그가 학력이 없는 것을 갖고 얘기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력이 없거나 집안의 재정이 없어 일본 유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마치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중국 유학을 포기하였듯이 다석 또한 깨달음 속에서 일본 유학을 포기했던 것이다.






▲ 다석 유영모 선생 ⓒ다석학회



대학 대학 하면서 대학에 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생각하는데, 대학이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대학 때문에 사회악이 조장되지 않아요? 고등교육 받은 사람의 범죄가 더 심해지고, 그런 사회악이 더 눈에 띄지 않아요? 모르기는 해도 오늘날 교육하는 사람 가운데 공부 잘해야 잘먹고 잘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옛날에도 좋은 음식, 좋은 집, 출세 같은 것이 권학(勸學)의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박사논문은 빌어먹을 짓입니다. 나는 대학을 반대합니다. 출세하여 대학교수 된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하는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의 편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식을 취하러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입니다.(『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39쪽)


저도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만, 오늘날 대학입학 박사학위 위주의 교육현실을 감안할 때,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이다.

일제 패망 직후 주위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잠시 은평면의 자치위원장직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를 돌아보며 “나라 장관 자리만 맡으려 할 것이 아니라, 동네일을 볼 마을 이장 통장감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됩니다. 온 나라 이장들이 다 훌륭하면 나라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자꾸 나라 대들보감만 되라고 하는데 서까래도 있어야 합니다. 대들보감만 기르다가 서까래감이 없으면 무엇으로 지붕을 덮습니까? 대들보를 쪼개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대들보가 되는 것만을 성공으로 보는 오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민중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으로 깨어나기를 원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왔다.’(마태 20장 28절)는 말씀을 실천하였다.


다석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성서 말씀을 따라 지금은 서울 시내에 속하지만 당시는 사대문 밖이었던 구기동 일대 임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늘의 세상에서 지각 있는 사람은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지를 않습니다. 농민, 노동자, 이들은 모두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그들의 찔림은 우리 허물로 인함이요, 그들이 상함은 우리 죄악이라고 이사야 53장 5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대중의 고통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왜 고생합니까? 우리 대신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의 중심 생각이고 민중신학이 강조하는 바이다.


현존-하루살이, 오늘살이


류영모 선생은 자신의 산 날을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로 계산하였다. 영원한 시간에 비기면 사람의 일생이란 번갯불이 번쩍 빛나는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짧은 삶의 시간을 알뜰하게 살기 위하여 다석은 오늘살이 하루살이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루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하루살이의 삶이다. 아니 어쩌면 하루로 만족하는 삶이다. 어찌 하루에 만족하지 않고 백일 천일에 만족할 수 있을까? 하루살이, 그건 그날 하루가 자신의 최후의 날인 줄 알아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그 이룬 자리가 어떠하든지 만족할 줄 아는 인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다석은 말한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마중을 나가 기다리는 동안 차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부스러기 시간에도 자기의 사상을 영글게 하는데 써야 합니다. 하루를 무심히 지내면 백 년, 천 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 겨레가 5천 년 동안을 긴장해서 살아왔다면 지금 이 모양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선조나 우리나 모두 하루를 무심코 편안히 지냈기에 지금 요 모양입니다.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한 인생도 비상한 생명이 됩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쉬면서도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일과를 꼭꼭하면 괴로우면서도 기쁩니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데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느님이 시키신 사명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나의 뜻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제나는 죽고 얼나로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허송세월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지나간 것은 찌꺼기라 돌볼 것이 못됩니다. 내일을 찾으면 안됩니다. 내일은 아직 도착되지 않은 손님입니다. 언제나 오늘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오늘 오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 6장 34절)는 예수님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순간순간에 집중하면 기뻐집니다. 살아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래 류영모선생은 강의를 하다가 둥실둥실 춤을 추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얼쑤, 얼이 쑤-욱- 올라갔다 내려오는’ 얼춤을 춘 것이지요. 선생은 말하기를 “목숨은 기쁨입니다. 사는 것은 기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께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391쪽)


얼나 그리스도


다석은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을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생겨난 짐승의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의 얼나로 거듭나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의 깊은 뜻이다. 사람이 삼독(탐貪, 진瞋, 치痴, 욕심과 성냄과 향락)의 죄악에서 구속되어 자유할 수 있는 것도 얼나로 솟나는 길뿐이다. 그러기 위해 내 속에 온 하느님의 씨가 독생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습니다. 얼로 거듭나는 것이 영생입니다. 얼이 참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417쪽)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닌 예수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참 구원의 길이다. 그래 예수님은 당신이 매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부탁하셨다. 곧 대속이 아닌 자속의 길에 참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다석은 매우 독특한 그리스도론을 얘기한다. 民의 그리스도론, 씨알의 그리스도론을 말한다. 메시아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이고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한다. 제1 성서에서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왕들이 다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그들은 모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불리었다. 심지어는 유대인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마저 메시아라고 칭한다.


다석은 이 사상을 이어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이기에 이 성령에 의해 거듭난 모든 사람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류영모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껍질(몸)을 쓰기 전, 또 벗어 버린 뒤에 어찌 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도 거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이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하 206쪽)


다석은 일요일이면 세 개의 교회를 함께 다녔던 두 살 터울의 동생 영묵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그간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고 성공을 한다고 하는 교회의 주장에 회의를 갖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떠난다. 후에 그는 깨달음을 통해 죽음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한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죽음의 연습은 영원한 얼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몸으로 죽은 연습은 얼생명으로 사는 연습입니다.”(박영호 다석 류영모 37쪽) 그래 외치기를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 없는 것인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박영호, <다석 유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237쪽)

죽음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외쳐야 할 마지막 신앙고백이다. 다석 선생은 다시 한번 당부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밖에 개인적인 행복이니 성공이란 다 부질없는 생각이요, 허황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행유예의 처지에 놓인 사형수가 무슨 행복을 찾고 무슨 성공을 한단 말입니까? 개인적인 행복이나 성공이란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행복이 있고 성공이 있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뚜렷이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하, 207쪽)

땅에 속한 제나를 버리고 하늘에 속한 얼나를 통해 언제나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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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다석 유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박영호, 두레, 2000.
『진리의 사람 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2000.
『다석 유영모』, 박영호, 두레, 2009.
『다석 유영모』, 박재순, 현암사, 2008.
『씨ᄋᆞᆯ 함석헌, 다석 유영모, 무위당 장일순,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사상을 돌아보다』, 김경재·이정배·이현주·김한중 공저, 광주 YMCA 오방기념사업회 편찬, 2009.

조헌정 소장(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 choshalo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