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0

원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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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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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일본 교토 고산사의 원효 진영
출생617년
신라 금성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입적686년 (70세)
혈사(穴寺)
속명설사(薛思)
아명(兒名) : 서당(誓幢) · 신당(新幢) · 모(毛)
저작《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해심밀경소》
《열반경종요》외
칭호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 복성거사(卜性居士) · 서곡사미(西谷沙彌) · 백부논주(百部論主) · 해동법사(海東法師) · 해동종주(海東宗主)
배우자요석공주
자녀설총(아들)
부모아버지: 설담날, 어머니 : 조씨 부인
친척잉피공(친조부)
설을신(형)
태종무열왕(장인)
문무왕(처남)
웹사이트경주 순창 설씨 대종회

원효(元曉, 617년 ~ 686년)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학자, 사상가, 작가, 시인, 정치가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諍)이다.

그는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라 불렸다.

원효는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었다.

고려 숙종에 의해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내려졌다.

원효 스스로 지은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한국에서는 보통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

생애[편집]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집근처인 상주(湘州)[1] 경산현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조씨는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원효를 낳았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그곳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2]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

원효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원효는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출가와 수행[편집]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다.

영취산의 낭지(郎智), 흥륜사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고려 大覺國師 義天이 남긴 詩에 의하면 원효는 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孤大山으로 옮겨 간 普德和尙의 講下에서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삼국유사」智來雲條에는 원효가 좌高寺에 있을 때 靈山 都木匠의 智가 그로 하여금「初章觀文」과 「安身事心論」을 쓰게 하였으므로, 원효가 그 글을 지어 智에게 전달하면서 그 글 끝에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岩前……' 이라 하여 자신을 사미라 낮추고 상대방인 낭지를 上德으로 높이고 있으니, 이로 보아 원효가 낭지에게 師事하였거나 단순히 學德높은 老和尙으로 존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삼국유사』의 釋惠空傳에는 원효가 혜공에게 問學한 사실을 보이고 있다. 즉 당대의 神 혜공이 그 만년 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諸經疏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였다는 것이다.[3]

당나라 유학 시도와 깨달음[편집]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원효는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그는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4]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5]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3]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로 돌아온 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르며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뒤 원효는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6]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했다.(삼국유사4)

혼인과 아들 설총[7][편집]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 했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는데,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입적(죽음)[편집]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혈사(穴寺/경주시 양북면 소재 골굴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사상[편집]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화쟁(和諍)사상과 일심(一心)사상[편집]

그는 불교 사상을 연구함에 있어 어느 一宗,一派에 구애됨이 없이 “萬法이 一佛乘에 총섭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大海 중에 일체 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금강삼매경론)고 하여 大·小승, 性·相,頓·漸의 상호대립적인 교의를 다 융회하여 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유論들을 和會시킨다”(열반경종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和諍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이 화쟁 방법 내지 사상은 근원적으로는 석가 이전 인도의 베다 사상(Ved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 철학의 碩學 라다크리슈난 (Radhakrishnan, S.)에 의하면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안 (Aryans)의 종교는 처음부터 광범하고, 자기 발전적이고, 관대하여 성장해 감에 따라 그가 만나는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는 광신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사유 경향이 印度佛敎에서 和의 사상을 있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석가는 당시 수많은 사상체계들이 서로 대립, 충돌을 일으키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논쟁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했을 뿐, 베다의 권위를 배척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다.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모두가 상대적이고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교에 있어서의 和의 원리는 이처럼 실천 원리를 중시하는 석가에서 그 싹이 나타난 셈이고, 이는 대중 교화에 뜻을 두어 眞俗一如를 주장한 대승 불교 후기에까지 면면히 지속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석가 이후 1200여 년 만에 신라통일기에 나타난 원효가 실천을 중시하면서 和諍 사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석가 이후 대승에 이르기까지의 和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 내지 재창조라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이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眞俗不二의 사상을 나타내려 한 대표적인 것으로 「대승기신론 소」 「대승기신론 별기」를 들 수 있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는 탓으로 印度撰述인가 中國撰述인가가 논란되어 오기도 하지만, 대승불교 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중 가장 뛰어난 논서로 알려져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 사상, 즉 中觀派와 伽(唯識)派의 사상을 지양 · 화합시켜 眞과 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迷汚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人格(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한편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染汚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眞俗一如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대승기신론」을 만나자마자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種의 연구서를 냈고,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 소」 「대승기신론 별기」는 일찍부터 중국의 불교 학계에서까지 높이 평가되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대승기신론」(이하 「기신론」이라 약칭함)에 대한 연구로는 일찍부터 慧遠, 元曉, 法藏의 주석서를 三大流로 지칭하고 있으나 혜원의 것은 僞撰이라는 說과 함께 質로나 量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分科와 語句解釋에 있어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원효의 「기신론 소」 「기신론 별기」야말로 최고의 기신론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원효의 기신론관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신론 本文의 구조와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신론은 因緣分, 立義分, 解釋, 修行信心分, 勸修利益分 등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因緣分에서는 이 논을 짓게 된 이유를 말하였고, 立義分에서는 이 논의 대의, 즉 一心, 二門, 三大를 제시하였다. 解釋分은 앞서의 입의분에서 제시한 一心, 二門을 구체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기신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顯示正義,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의 셋으로 나뉜다. 우선 正義를 드러냄에 있어서 -心(衆生心)을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의 둘로 크게 구분하였다. 心眞如門에서는 如實空, 如實不空 등을 말하여 마음의 淸淨한 面을 묘사하였으며, 心生波門에서는 阿黎耶識의 覺과 不覺의 二義와 薰習 등을 말하여 마음의 染淨緣起를 밝혔다. 다음으로 邪執을 對治함에 있어, 人·法 二執의 對治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發心 修行하여 道에 나아감을 분별하는 상에서는 信成就發心, 解行發心, 證發心의 세 가지 발심을 말한다. 修行信心分에서는 앞서의 해석분 중의 발취도상이 不定聚衆生중의 勝人을 위한 설명임에 비하여 여기서는 부정취중생 중의 人을 위하여 四信, 五行 및 他力念佛을 설한다. 마지막 勸修利益分에서는 이 논을 믿고 닦으면 막대한 이익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였다. 이상의 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원효의 기신론관에서 특징적인 것 몇가지를 들고자 한다.

첫째, 원효는 그의 「기신론 소」 「기신론 별기」에서 기신론의 성격을 中觀思想과 唯識思想의 止揚·綜合이라고 판석한다. 즉 「기신론」은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中觀사상과 마음의 염오한 면을 주로 밝혀 은 유가사상을 잘 조화시켜 眞俗不二의 뜻을 밝힌 것이라 본 것이다. 이는 「기신론」이 一心을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의 둘로 크게 나눈 후, 심진여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고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염정연기를 밝히고 있는 데서 매우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기신론」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 사상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도 부응하는 것이다.

원효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법장은 이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기신론」을 如來藏緣起宗이라 판석하였다. 원래 여래장 사상은 중국 화엄종의 선구인 地論宗 南道派들에 의하여 성하게 연구되어 왔던 것으로, 화엄종의 第3祖인 법장은 이들 지론종 남도파의 영향에 의하여 「기신론」을 여래장 연기종이라 판정한 것이다. 또한 「기신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법장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기신론」을 여래장 연기종설로만 알고 있고, 심지어는 법장설에서 일보 나아가 여래장 연기 종파가 역사상 실재했다고까지 주장하는 학자(勝又俊敎)도 있다. 그러나 漢字를 모르는 인도의 불교 학자나 歐美의 학자들은 여래장 연기종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며(高崎直道), 또 일부 일본 학자중에는 중국 화엄가들의 「기신론」이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柏木弘雄).

勝又 등 일본 학자들의 여래장 연기 종설은 재론할 가치도 없거니와 「기신론」을 화엄가의 管見으로 본 法藏의 여래장 연기 종설 또한 원효의 판석보다 보편성이 적은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원효는 그의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우리의 迷妄한 마음, 즉 無明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 즉 진여를 훈습하여 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난 無明業相, 이 무명업상 즉 極微한 動念에 의하여 所緣境相을 볼 수 있게 되는 轉相, 그리고 이 전상에 의하여 境界를 나타내는 現相 등 세 가지 미세한 마음, 곧 三細識이 아라야식 (Ãlayavijñāna)位에 해당된다고 주장하였다. 원효의 이 三細·아라야식설은 「기신론」 본문에 직접적으로는 明示되어 있지 않지만 주의깊게 精讀한다면 「기신론」 자체의 논술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拙稿, 원효의 三和·아라야식설의 創案 참조) 이는 법장에 의하여 그대로 답습되었고 그 뒤 일본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찬·반의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는 터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기본구조인 一心 二門에서 먼저 二門 중 心眞如門을 中觀學派의 주장으로, 心生滅門을 유가학파의 주장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 二門이 一心으로 귀결되는 데서 「기신론」의 성격을 중관·유식의 지양·조화 내지 眞·俗을 別體로 보려는 고집을 꺾는 것이라 단정한 것 같다. 다음, 「기신론」에 心生滅門내에서 自性淸淨한 如來藏의 不生滅心이 生滅心과 和合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非一非異) 아라야식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이 아라야식에는 覺義와 不覺義의 義가 있게 된다고 한 것에서 원효는 이 아라야식의 二義性을 앞서 一心二門의 구체적 표현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이러한 二義和合識으로서의 아라야식에 三細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한 것은 唯識家에서의 아라야식이 막연한 潛在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기신론」의 아라야식은 세 가지의 미세한 마음으로 구체화되었음을 밝혀 놓은 것이다. 또 유식가의 아라야식은 異熟識으로서 輪廻의 주체일 뿐, 깨달음의 淨法을 낼 수 없는 生滅識일 뿐이지만, 「기신론」의 아라야식은 和合識으로서 그 중의 不覺 즉 生滅分인 業相, 轉相, 現相이 除滅되면 바로 그 자리가 不生不滅分 즉 自性淸淨心이 되어 覺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가 三細라고 하는 還滅의 구체적 단계를 제시한 것은 心源 즉 깨달음의 경지로 환멸해 가는 修行面에 있어 보다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이 三細·아라야식설은 중관·유식학파의 양대 주장의 조화라는 「기신론」의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셋째, 원효는 아라야식의 覺義에 의하여 자성청정한 覺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本覺의 성격 즉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에 대하여 自利와 利他의 두 가지 면으로 배대시킴으로써 心源에 도달한 覺者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安住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함(利他)을 역설한다. 이것은 俗 가운데에서 眞으로 향해 가는 길(上求菩提)을 명시했던 앞서의 三細·아라야식설에 비하여 이제는 眞으로부터 俗으로 돌아와 중생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下化衆生이다. 그의 이러한 自利·利他의 兼修 즉 眞俗不二의 사상은 그의 力著이며, 「기신론」의 이론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저「金剛三味經論」의 全篇에서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不住涅槃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원효가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眞俗一如, 不住涅槃의 사상이었으니, 이는 出世間的 自利만이 불교의 진의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깨달음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利他)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또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彌陀淨土說과 「十念論」 등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이 보다 쉽게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 하였고, 종국에는 집필의 붓을 꺾고 下化衆生을 위한 실천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에서 이론면에서나 실천면에서 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구현한 한국의 뛰어난 求道者 원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3]

대중 교화를 통한 실천[편집]

스스로 실계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

원효는 淨無二, 眞俗一如라는 그의 학문적 이론을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 대중과 함께 몸소 실행에 옮겼던 드문 실천가였다. 당시 신라 사회는 圓光과 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의 受容面에서 왕실을 中心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아직도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惠空, 惠宿, 大安 등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킴으로써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街巷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無得박을 두드리고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 길로 生死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佛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이처럼 서민 대중의 교화에 나선 것은 입당 포기 후 心法을 깨달은 후이며, 요석 공주와의 失戒로 스스로 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진다. 또 그가 스스로 小姓居士라 부른 것은, 失成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 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 교화의 선구자인 惠空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街卷에서 大醉 歌舞한 것이나, 大安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銅鉢을 치면서 “大安,大安”외친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대중 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 화상으로 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3]

유교와 경학[편집]

원효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하여 그가 불교학 전반에 걸쳐 서뿐만 아니라, 「논어」나 「노자」, 「장자」 등 유가서와 도가서에도 정통하고 있음을 볼 때,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그의 修學經歷을 짐작할 수 있다.[3]

명상법[편집]

7세기 원효는 3세기 용수가 만든 대승불교의 승려였다. 그러나 12세기 중국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개발한 것이기에, 원효는 전통적인 불교 명상법인 수식관을 익혔을 것이다. 또한, 화랑이었기 때문에 도교의 조식법을 익혔을 것이다.

오늘날 간화선이 지배하는 한국 불교에서 원효가 별로 논의대상이 아닌 것은, 명상법이 달라서라고 할 수도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7세기 당나라 육조혜능을 헌법에 명시하여 중요시하는데, 7세기 신라의 원효는 오조 홍인대사 때의 승려이다.

삼국통일에 미친 영향[편집]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당대 가장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신라에서 살았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삼국통일에는 당나라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원효는 당시 많이들 읽는 모든 불경에 대해 각각 해설서를 편찬할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했고 통달해 당시 당나라 고승들이 원효대사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의 왕은 최고의 고승을 국사, 왕사로 두어 각종 정책결정에 권고를 받았었다. 오늘날,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수입해 한국화 한 화엄사상과 더불어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평가 받는다.

저서[편집]

그 연구 범위도 小·大승, 경·율·론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다 망라하고 있어 그야말로 초인간적인 學解와 저술활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大乘起信論疏」와「金剛三味經論」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의 석학들마저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3]

원효는 100여 종의 240여 권 (또는 85종의 170여 권)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諍)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현존하는 것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계[편집]

원효는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8] 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는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말(奈末, 육두품 출신이 맡는 제11등급 관직)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이다.

원효의 조부인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원효를 금성 사람이라고도 한다.[9]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1명인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원효는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다.

  • 조부 : 잉피공(仍皮公,? ~ 634년)[10]
  • 조모 : 미상
    • 아버지 : 설담날(薛談捺,? ~ 629년)[11], 자는 건정(建正), 낭비성 전투 때 전사하였다.
  • 어머니 : 포회 조씨(浦會趙氏, ? ~ 627년)[12] - 원효가 어렸을 때 사망하였다.
  • 부인 : 요석궁공주(瑤石宮公主, 생몰년 미상)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딸로 원효를 만날 당시 과부였었다.
    • 아들 : 설총(薛聰, 658년? ~ ?) - 홍유후(弘儒侯), 신라의 문장가
      • 며느리 : 단초 유씨
      • 며느리 : 광주 노씨(盧氏)[13]
        • 손자 : 설홍린(薛洪鱗)
        • 손자 : 설명린(薛命鱗)
        • 손자 : 설호린(薛好鱗)

원효가 등장한 작품[편집]

관계[편집]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을 사제(師弟)로 삼아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기타[편집]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처음으로 중창한 법당의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법명을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의 빛이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또한 불교사상을 통한 한국 사상사의 새벽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 중국 한자를 한국식 발음에 맞춘 이두의 창시자이자 이두 문학의 창시자였다. 설총은 최치원·강수 등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9경(주역·시경·서경·예기·춘추·논어·맹자·주례 등)을 처음 우리말로 해석하여 유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후일 고려시대에 인종때 원효대사의 18대손 설자승(薛子升)은 이자겸의 난 당시 화를 피해, 순창으로 옮겨가 순창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후손인 설귀창의 후손들은 그대로 경주 설씨로 이어갔다.

각승 일화[편집]

바다 용(龍) 또는 임금의 부탁을 받은 원효는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삼매경소를 다 지은 뒤 원효는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이를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를 들은 대안법사(大安法師)가 구경온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고 와서, 소뿔위에 서 있는 붓과 벼루에 종이를 붙였는데 후일 일연은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대처승[편집]

원효를 한국 최초의 대처승[14]이라 보는 관점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과 사찰령을 통한 한국 전통 불교의 파괴 이후 한국에는 대처승이 유행하였다. 한국불교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왜색을 몰아내고 전통을 복원한 역할을 한 이승만의 불교정화운동 당시 대처승들의 승직이 박탈되었으나, 이후에도 대처승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일제의 영향이 빠져나간지 오래인 현대 한국에서 대처승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고려시대에 대처승이 고려에서 일본으로 전래되기도 하였다.

민간신앙[편집]

원효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는데, 그의 사상적 영향과 함께 서민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음을 생각하면 그러한 숭배가 이해된다 볼 수 있다. 숭배의 기제로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을 죽음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작동한다 추정할 수도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2.  일연에 의하면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그런데 승려가 밤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고 종이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밤 한 알이 바가지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한다.
  3. ↑ 이동:      은정희 (1991). 〈해제〉.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일지사.
  4.  남양
  5.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2008년 11월 13일). “원효(元曉)”.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
  6.  원효종(元曉宗)·분황종(芬皇宗)·해동종(海東宗)이라고도 함
  7.  신라십현의 한 사람
  8.  설호진의 18대손이다.
  9.  삼국유사에는 師之行狀云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本下湘州之人 이라 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나라 고승전(唐僧傳)에는 원효가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10.  경주설씨족보에는 이름이 광조(光祚), 일명 승무(承務)로 되어 있다.
  11.  다른 이름은 설이금(薛伊琴)
  12. ↑ 이동:  경주설씨족보
  13.  경주설씨족보에는 노씨(盧氏)가 아니고 단초 유씨(丹草庾氏)로 되어 있다.
  14.  처와 자녀를 거느린 승려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2023/09/19

공공(公共)철학 : 네이버 블로그 오사카에 있는 교토포럼에서 김태창 소장님과 대담

공공(公共)철학 : 네이버 블로그



공공(公共)철학

연산

2012. 3. 7. 
이웃추가


"제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자기와 타자와 세계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행복(私福)과, 일정 생활공간 속에 사는 주민 전체의 행복(公福)과, 양자가 상호보완적으로 세대를 초월하여 계승 생생(生生)하도록 작용하는 '공복(共福)'-공공(公共)의 행복-을 삼차원 상관관계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의 꿈은 중국과 일본과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민족과 문화와 종교와 언어의 벽을 뛰어 넘어,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공공행복의 세계를 공동(共働:人+動) 구축하는 것입니다.이를 위한 지적(知的)전략이 바로 '활사개공(活私開公)'과 '공사공매(公私共媒)'를 통해서 '행복공창(幸福共創)을 지향하는 공공철학입니다."

공공철학 p190-p191






●김태창 소장의 말이다. 그는 '공공행복의 세계를 공동(共働)구축하는 표현에서 動자에 人이 첨부되어 인간미가 흐르는働자를 쓴다.


◆◆

우리들은 왕왕 수단으로 삼는 눈앞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오해하고 인간 존재의 본래적 목적을 잊어버린다. 그날 저녁 나는 시미즈 사카에(淸水榮) 교수, 이노우에 키도(井上希道) 선사와 함께 인생의 목적, 의미 등의 문제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 했다. 이 토론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시켰다. 즉 자신의 국한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사욕이 없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뜻을 함께 하고 길이 합치되는 사람을 모아서 함께 진동하고 함께 울리는 대화 가운데에서 인류를 위해 미래의 길을 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통된 인식은 <교토포럼>의 출발점이 되었다.

1989년 11월 3일 [문화기념일] 국립교토 국제회관에서 <교토포럼>이라는 비영리 민간조직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회장을 맡은 시미즈 사카에 선생은 교토대학의 명예교수였다.

(중략)

일본 철학자 다니카와 데쓰조(谷川徹二)에 의해 ‘아인슈타인 원칙’이 라고 일컬어진 이념은 ‘전체 인류사회 멸망을 피하는 목표의 실현은 기타 어떤 목표에도 우선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이것은 또한 교토포럼의 원칙이기도 하다. 교토포럼은 과학과 종교 이 양대 영역에서 인류사회가 전체멸망을 부를 수 있는 요소에 대해 외재적 지구 환경의 파괴와 내재적 인간 정신의 파괴 두 방면에서 충분한 토론을 진행한다.

양심적 각성을 지향으로 삼고 인류사회 미래의 행복을 공동의 인식으로 삼아 닫힌 자아, 닫힌 사회로부터 점차적으로 자아의 개방, 사회의 개방을 향해 교토포럼은 매우 작은 범위에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디었다. 사람의 양지를 일깨우고 뜻을 세우는 것[立志]에서부터, 자신의 국한을 초월하여 사욕이 없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는 사람을 모아 더욱 높은 목적 인식과 가치관을 추구하기 위해 함께 진동하는[共振] 대화 가운데에서 인류의 천추만세를 위한 태평사업의 길을 열어 놓는다. 교토포럼은 위에 언급한 목표의 실천과 체험의 장소를 실현하는 것이 되었다.

<실심실학>p360-p362







일본 연수 첫째 날 오사카에 있는 교토포럼에서 김태창 소장님과 대담을 하고 책 두권을 선물 받았다. 동방의 빛에서 출간한 상생과 화해의 공공철학(김태창 편저, 조성환 번역:2010년 12월 10일 초판 발행))과 실심실학(야자키 카츠히코 지음, 정지욱 번역)이다.

일본어판 시리즈 공공철학은 1기 전10권(2001-2002)과 제2기 전5권(2004), 제3기 전 5권(2005) 총 20권(김태창 편저)이 나와 있고 중국어판 제1기 전 10권이 나와 있다고 한다.

철학에 대해서 모르는 내가 공공철학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80세(1934생) 고령에도 공과 사와 공과 공과 사와 사를 맺고, 잇고, 살리고자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길을 이론만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시는 소장님을 만난 것이 큰 복이었다







그는 서구에도 공공철학이 있으나 그가 생각하는 공공철학과는 다르다고 한다. 공과 공공의 차이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이렇게 말한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공'은 'state-centric publicness'나 'governmental publicness' 혹은 official-bureaucratic publicness' 로, '공공'은 'citizen-centric publicness'나 'common-mediating publicness' 혹은 '서로 화(和)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mutually softening publicness'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정치제제로서의 공화제의 '공화(共和)는, 그 작용면에서 보면 다름 아닌 상화(相和) 간화(間和) 호화(互和)에 해당합니다. 한편 영어권 일부에서는 최근 'public-commo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래의 'public'이나 'common'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공공철학 p246










"동아시아의 전통사상- 특히 중국사상과 한국사상- 의 맥락에서는, 이것이 '동(同)'과 '화(和)'의 '사이'의 문제로서 오랫동안 사유되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동'은 기본적으로 동일률 또는 모순율적인 사고에 기초합니다. 그에 반해 '화'는 동일율과 모순율의 사이- 대립, 갈등, 분쟁- 를 완화시키고, 화해시키고, 가라앉힘으로써 맺고, 잇고, 살린다고 하는 발상이자 작동이자 과정입니다. 결국 '화'란 - 특히 '상화(相和)라고 이해하면- 양자의 공립(共立)을 가능하게 하는 '공매율(共媒律)'이라고 하는 새로운 논리가 되기도 합니다. 동일율과 모순율의 중간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하는 논리라는 의미에서 '포중율(包中律)'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간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공매율'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이'와 '화'의 공공철학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것은 행복공창(幸福共創)- 함께 행복해지는 것. 즉 공복실현(共福實現)- 을 지향합니다. '화', 특히 '상화'는, 세계를 보편일원화(普遍一元化)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다원차이화(多元差異化)시키는 것도 아니며, 다양, 다원, 다중의 차이성, 독자성, 개별성을 사이의 문제로 재인식하고, 각자가 설정하는 경계, 영역, 구분을 횡단매개하는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는 부드러운 역동입니다. 저는 그것을 'transversality'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trans(횡단)+ vers(向)+ ality(性)'의 합성어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횡단매개성'입니다. <논어>의 '화이부동'이나 <국어>의 '화실생물(和實生物), 동즉불계(同卽不繼)'라는 명제를, '화'의 횡단매개적인 역동으로 읽는 것입니다. '사이'를 '동'으로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가지고 '다(多)와 '이(異)'를 살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이'와 '화'의 실심실학으로서의 공공철학의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공공철학 p248-p249

●글자 강조는 저 스스로 한 일이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자키 카즈히코







★야자키 카즈히코



1965년 <주>하이센스를 설립하여 전무에 취임

1980년 동사 사장

1987년 동사 대표이사겸 회장에 취임

동년 교토포럼 사무국장에 취임

회사명을 <주>페리시모로 개칭하고 대표이가겸 회장에 취임(미국 프랑스, 홍콩의 현 지 법

인회장 겸임)

1992년 UNCED(환경과 개발에 관한 국제연합 회의) 공식신문인 EARTH SUMMIT TIMES의 공동발

행인

동년 뉴욕에 '장래세대국제재단'을 설립하고 교토에 '장래세대종합연구소'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



※ 지금은 기업 일선에서는 은퇴하여 '인도사막에 나무심기' '중국소수민족 장학사업',등을 하고 있다

함, 우리는 그의 저서 '실심실학' 한국어 번역판을 선물로 받았다.





"실은 저의 공공철학적 발상의 근원은, 한국 근세의 대유학자(大儒)인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1649~1736)의 '실심'에 의한/'실심'에 기초한/'실심'을 밝히는 '실학'이라고 하는 '실심실학'과 한국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불리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백성의 생활에 공헌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하는 '실용실학'의 학문관입니다. ..(중략}..











이 '사이'의 문제는 결국 자기와 타자 사이의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 까지 73년 동안 세계의 여러곳을 다니면서 거기에서 연구하거나 살면서 자타간의 다양한 문제들을 극복해 왔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실패와 실망 그리고 낙담과 좌절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 당시의 실패로부터의 배운 것이 오히려 오늘의 공공철학적 사고와 실천의 원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남은 내적으로 폐쇄된 세계로부터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타자와의 공존(共存)이라는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에 파급된 세계사적 대 변혁과 그것이 요청하는 타자인식을 완강하게 거부한채, 반시대적인 자기인식만 고집 해 온 지도자들과 민중의 무지가 근대 한국의 비극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순자가 '천하의 공통된 우환(公患)'이자 '인간의 커다란 재난(大殃大害)'이라고 규탄한 '고루'한 폐해이지요.









만남은 대화의 출발점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말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상대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도 아닌, 각각의 '사'(성(性), 심(心), 욕(欲), 익(益), 리(利)등)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개신하고 향상시킬 수 있도록 진심을 담은 말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진심이란 곧 실심을 말합니다. 가짜 마음, 거짓 마음, 이름 뿐인 마음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한다면 '실심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심대화는 서로의 마음의 심층에서 공진, 공명, 공감하는 작용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작용이 겉으로 드러나 자기와 타자 사이를 잇게 되면, 여러 형태의 공동을 가져옵니다. 저는 협동(協同)이라는 한자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협(協)'이라는 글자는 뭔가 노골적인 폭력, 무력, 권력을 떠오르게 하고, 그것들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대단히 기분 나쁜 느낌을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動)'에는 인간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인(人)'을 더해서 '동'(働)이라고 쓰고 싶습니다. '공'(共)이라는 한자는 본래 '신에게 올리는 제물을 양손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을 자기와 타자가 함께 손을 잡고 서로를 위해 성의를 담아서 실현해 나가는 것'이 공동(共働)의 참모습입니다. 그래서 '실심공동'(實心共働)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성의를 담은 공동(共働)의 중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심(和心)'='온화한 마음'입니다. 중국 고전인 <국어>에 나오는 '화실생물(和實生物), 동즉불계(同卽不繼)'에서의 화의 작용을 말합니다. 온화함의 힘이 사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적절한 긴장완화는 만물생생의 순환체계를 가동시키는 기점으로, 사이를 활성화시킵니다. 서로가 '강심'(强心), '승심'(勝心), '전심'(戰心)만을 고집하면 사이가 양측의 퇴화, 변태, 공감(共減)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이(間)를 동(同)으로 일원화하는 것이 아니라, 화(和)를 통해서 사이로 부터 공생(共生), 호생(互生), 상생(相生)의 새로운 역동(力働)이 시작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화심이라고 하는 실심(實心)의 공동(共働)입니다. 실심대화가 실심공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실심개신(實心開新)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개신'이란 '새로운(新) 차원, 지평, 세계가 열린다(開)'는 말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차원, 지평, 세계를 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개(開)'가 자동사로도 타동사로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와 공동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개신은, 어느 한쪽에 의한 일방적인 명령, 지시, 설득에 의한 다른 한쪽의 복종, 수용, 납득이 아니라 상호학습, 상호이해, 상호실천이라는 점입니다.

공공철학p238-p240









"대체 '중용'(中庸)이란 무슨 뜻입니까?"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중(中)'을 '중심'으로 해석하고(중심성), 일본인들은 '내면'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한데(내면성), 한국의 한사상에 입각해서 해석하면 '중'은 "중간(=사이)에서 매개하면서 양자를 살린다"는 의미이고 (매중성(媒中性), '용(庸)'은 이러한 매개 작용을 '평소에 실천한다'는 뜻이 됩니다.그럼 왜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가? 그것은 서로를 보충해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럼 왜 보충해 주는가? 그것은 서로를 행복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입니다."



"그럼 <중용>에서 말하는 '중화(中和)'는 또 무슨 뜻입니까?"



"이 경우에 '중(中)'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을 말하고, '화(和)'는 그 감정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그 화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말고 마음 속으로 한번 걸러서, 부드러운 어조로 완화시켜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중화(中和)'가 됩니다."

공공철학 p470-p471





김태창



1934년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주한미국 경제기획보좌관,충북대 사회과학대학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일본동경대학 객원교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경영대학원 객원 교수 등을 역임 했으며 현재 일본 오사까에 있는 공공철학 공동(共働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공공철학, 연구의 현장들

“공(公)과 사(私)를 매개하고 소통시키는‘공공(公共)’이 필요하다”

대학신문 2008년 05월 24일 (토) 21:42:39 이진환 류원식 기자 realung1@snu.kr



교육 자율화와 함께 일고 있는 사교육 열풍, 노동자와 경영자간의 갈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 갈등은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공과 사의 갈등 문제는 항상 논란이 되지만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공과 사의 갈등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공과 사의 관계를 다루는 철학적 논의는 역사가 깊고 내용도 다양하다. 때문에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 해결책 또한 가지각색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도쿄대 ‘공공철학 공동연구회’를 중심으로 공(public)과 사(private)를 이원구도로 파악하는 것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공공(公共)’개념을 재활성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어 주목해 볼 만하다.









서양의 공공철학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접근은 서양철학이 사회를 인식하는 주된 방법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플라톤은 폴리스에서 시민의 정치와 관련된 활동을 공적 영역으로, 가족의 생활과 관련된 부분을 사적 영역으로 구분한다. 가정을 사적 관계망의 핵심으로 바라본 플라톤은 통치자가 가정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부정의 유혹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공공철학 연구자들은 공공성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사유 속에서 이해하곤 한다. 아렌트는 공과 사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대표적 철학자다. 당시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적 권력정치를 경험한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에는 사적 영역에 갇혀있던 경제가 현대에 사회적인 것으로 비대화됨으로써 공공영역을 소멸시켰다”며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적인 활동이 인간에게 가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공적 영역을 회복할 것을 역설한다.

플라톤에서 아렌트까지 이어지는 서양의 공공철학은 공과 사를 이원론(二元論)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그중에서도 공적 영역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홍림 교수(정치학과)는 “사적 경쟁, 사적 논리가 팽배하게 되면 사회가 점점 공공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해 사회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며 “이런 측면에서 서양의 공공철학은 대체로 공적 영역을 더 중요하게 생각 한다”고 설명했다.










동아시아의 공공철학



최근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공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특히 일본의 공공철학공동연구회는 교토포럼에서 공사 관계에 대한 개념을 재해석했고, 도쿄대출판부는 『공공철학』, 『공공철학총서』 시리즈 등을 발간했다. 『공공철학총서』는 법률, 종교, 문화, 예술,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 공공성을 적용해 설명한다. 야마와키 나오시 교수(山脇直司, 도쿄대ㆍ종합문화연구과)는 『공공철학의 고전과 장래』,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저서에서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유교 및 일본 사상을 통해서 공공철학을 살펴보고 있다.

일본은 공적 영역을 사적 영역보다 중요시 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을 강조해 왔다.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하는 정신은 역사 속에서 가미가제(神風)특공대나 야스쿠니(靖國)신사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 일본 사회는 ‘멸사봉공’의 정신을 비판하면서 사적 영역이 확대됐다. 사람들은 공적 영역에 무관심 해졌고 이는 탈정치적 현상을 불러 일으켰다. 사적 영역을 강조한 나머지 공적 질서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다. 고희탁 연구교수(고려대)는“일본의 공공철학은 전전(戰前) 국가에 매몰돼 버린 개인과 전후(戰後) 공적 영역에서 사라져버린 개인, 양 측면을 모두 살리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공공철학자들은 서양의 공공철학이 이원론적인 대립구도로 공과 사를 바라보는 데 의문을 제기하고 공, 사, ‘공공’(公共)이라는 삼원론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파악한다. 공과 사 모두를 살리기 위해 서양의 공공철학을 일본의 맥락에 맞게 재정의한 것이다. 그들은 서양의 공(public)으로 ‘공공’을 해석하지 않고 아시아의 ‘공공’으로 공(public)을 해석한다. ‘공공’은 공과 사의 사이를 매개하고 둘의 관계를 소통시키는 영역이다. 공공철학행동연구소장 김태창 박사는 “공과 사 쌍방을 서로 인정해 이 둘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함께 움직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개척하는 동태적인 과정이 ‘공공’의 실질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공과 사를 매개한다는 것은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한차원 높은 수준의 통합을 의미한다. 일본의 공공철학자들은 그 가능성을 공자, 주자 등의 동아시아 전통사상에서 찾는다. ‘같지 않으면서 조화로운 공공성’을 추구하는 방법을 『논어』의 유명한 구절인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찾아낸 것이 좋은 예다. 공공철학은 이질적인 ‘타자’의 존재를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존재로 정의하고 자신과 타자의 ‘화(和)’와 ‘공(共)’을 통해 공공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런 역학관계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관계로 확장된다. 사적 영역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면서 공적 영역을 개방적으로 만들면 ‘공공의 인격’을 갖춘 시민들의 공공세계를 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사상에서 그 원형을 찾는 공공철학은, 같은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중국은 개혁겙낱?이후 일본과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다.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였던 중국은 그동안 사적 영역은 없고 공적 영역만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 경제성장과 함께 사유재산권이 신장되면서 양자 간의 충돌현상이 발생했고, 이런 맥락에서 중국은 공과 사를 아우르는 공공철학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지린(吉林)대학은 지난 2005년 ‘철학과 공공정책의 문제-중국경험의 반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대만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정치적현실 때문에 공공철학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가 중국인인가 대만인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되던 공공철학은 최근 중국 전통 속의 공과 사의 문제를 찾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지난 2004년에는 ‘공사영역의 새로운 탐구-동아시아와 서양관점의 비교’라는 주제로 일본, 대만, 중국의 학자들이 모여 공공철학의 전통에 대해 논의했고, 이날 발표된 눈문은 『동아문명연구총서』로 출간되기도 했다.









국내 연구 현황 및 필요성



한편 지난달 16일(금) 씨알사상연구소는 ‘공공성의 철학과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씨알사상포럼을 개최했다.지난 2003년에는 한국양명학회 국제회의에서 공공철학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공철학에 대한 연구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계에서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의 정치사상에서 공과 사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공공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다. 유홍림 교수는 “외국인의 참정권 문제나 한국정치의 공공성 등 공공철학과 연관된 주제들은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공공철학이 사회철학의 경우처럼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 체계화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공공철학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인식하고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공공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널리 쓰이고 있지 않고, 하나의 학문적 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의 시기 내내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 당면과제였던 탓에 공과 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만한 토대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는 지적도있다. 고희탁 연구교수는 “우리나라 국민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이 강해서 공적 질서 형성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저조하고, 권위주의 등의 역사적 경험을 겪어 공적 영역이나 공공성보다 개인의 자유, 권리를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 사회에 공공철학이 더욱 요구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규창 교수(이화여대·철학과)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 이기적 개인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며 “이질성을 포용하는 공공철학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필요성을 설명했다.

공공철학의 기반은 아직 미약하지만 일각에서는 학자들의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06년 한국윤리교육학회는 ‘공공철학, 공공윤리, 시민교육’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 일본 등의 학자들이 모여 ‘공공철학과 한사상’, ‘유가에서 본 공공사회와 공공윤리 제고론’ 등의 발표를 통해 공공철학을 전통사상 속에서 살펴봤다.

그동안 한국에서 공공철학은 체계적인 제도적곀橘??틀 속에서 연구되지 않았다. 개별적 학문에서 논의되는 공사 문제를 이제는 공공철학이라는 큰 틀 속에서 살펴볼 때다. 이와 함께 공공철학을 한국적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고희탁 연구교수는 “공공철학은 각국의 문화환경에 따라 논의의 초점이 다르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공공철학이 말하는 ‘활사(活私)’뿐만 아니라 활사를 위한 ‘열린 공적 질서’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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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公共)철학재생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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