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1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 씨알의소리(1970-1981)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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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소리(1970-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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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소리(1970-1981)

? |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작성자 바보새 14-05-18 01:54 조회541회 댓글0건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퀘이커 세계대학생들과 이야기
아침 예배 모임에 참석하려고 버스를 탔을 때 나는 언젠지 모르게 또 전날 밤부터 하던 생각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이란 10월 30일 토요일인데, 그날 오후 2시부터 일본 동경서 온 퀘이커 세계대학 학생들이 만나자고 해서 신촌에 있는 퀘이커 모임 집에서 만났었다. 인솔자가 한 사람 있었고 학생은 여덟이었는데 그중 둘은 일본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서양 사람들이었다.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난 곳은 반도의 서북 구석 압록강 어구에서 가까운 농사와 어업을 겸한 지극히 외진 곳이었지만, 외졌기 때문에 인심은 순박했고,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있으면서도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자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화로운 전통적인 농촌자치 생활 속에 거의 “제력(帝力)이 하유어아재 (何有於我哉)리오.”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위기 속에 살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그때에 벌써 일본의 정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약장사라고 하며 종종 오는 일본 사람들이 있었고, 이따금 파선했노라고 하면서 표착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게 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나라 형편을 살피러 왔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내 집안에 아저씨 되는 분이 하나 한학자였는데 어느 때 일본 중이라는 사람이 하나 찾아와서 필담으로 이야기를 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후에 청일전쟁이 나자 일본 군대가 의주로 지나가게 됐는데 그 진중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아무 때에 갔던 중 아무개가 지금 장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노라고 한 일이 있었다.
 
또 내가 난 그 촌락에서, 바다 가운데로 한 10리만큼 나가면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가 부동항(不凍港)이 될만하다 하여서 벌써 합병이 되기 여러해 전부터 매년 겨울이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압록강의 얼음 흘러내리는 상황을 조사하 곤 했다. 이런 따위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런 외진 곳에 보잘게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 교회를 통해 기독교와 겸해 민족주의와 서양 문명과 세계 형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생각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해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가던 이야기, 유영모 선생님한테 우치무라(內村) 선생의 일화 하나를 얻어들은 것이 깊이 인상에 박혔다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됐던 이야기, 그와 한 학교 출신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 稻造) 박사는 일본 퀘이커 창시자라는 이야기, 내가 무교회 신앙이다가 퀘이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7년 봄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현동완(玄東完) 선생으로부터 첨으로 양심적 거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전쟁은 죄악이란 것을 알게 됐고, 퀘이커에 대해 처음에는 주로 평화사상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간디에 대해 고쳐 읽기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너희가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것 아니냐
그리고 난 다음 어느 학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에 좀 내 생각하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서 1962년 펜들힐에 갔을 때에 했던 말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책임으로 알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야 한다는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으나, 또 다른 한편 6.25 전쟁 때에 미국의 도움이 컸던 것을 모르는 것 아니나, 미국인으로서는 자연 그럴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지만, 한국 문제에 대한 자기네의 책임은 너무 모르는 듯이 느껴지는 때가 많다. 그래서 퀘이커만한 사람들은 솔직히 말을 하면 알겠지 하는 생각에 어느 날, 학생과 선생 앞에서 아주 찔러서 말을 한 일이 있다. 한국지도를 봐라! 남북으로 등뼈 산맥이 있는데다가 38선을 그으니 그것이 십자가 아니냐? 소련은 두 팔을 잡고 미국은 두 다리를 잡고 중공은 옷을 벗겨 우리 엄마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 아니냐? 그리고 그 ‘시크렛 플레이스’를 너희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38선이 어찌 우리 국경이냐? 너희 국경 아니냐? 이제 잘린 허리를 다시 고치지 못한다면 너의 데모크라시, 너의 서양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는데, 그날은 그 이야기를 다는 아니하고 다만 민주주의가 둘은 아니니 너희가 정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한국 원조한다는 심리로는 아니 된다, 언제나 너희 일로 알거든 그대로 해라, 지금 군사원조 말이 있지만, 군사원조는 참 원조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물건도 들어오면 산 관계를 그르친다, 나라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군사원조도 있으면 그것은 물질이 한 원조지 미국인이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는 인간 미국 씨이 이 나라의 씨을 참으로 이웃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다 헤어지고 나서 생각을 하니 그중에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물론 언제나 사람을 의심하면서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요 비밀이 있어 가지고는 참 사회운동은 될 수 없다는 주의이므로 언제나, 내 속에 확신하는 바를 사람 차별을 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로 노력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배드리려 할 때 형제가 네게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선 가서 화해부터 하고 오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힘을 쓰고 있고, 간디가 암살당할 직전에 주위의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오니 몸 검색을 하자고 했을 때 사람의 몸 검색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반대했던 것을 과연 장한 일이라고 흠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하여도 마음에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여야 하는 우리 사회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사람이서 무슨 모임을 해도 거기는 반드시 이질분자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차 누구도 빠짐없이 생각하는 사회, 이것은 무슨 사회냐? 생각할수록 슬프다. 일본의 정탐이 끊임없이 오던 그 망국기에도 우리는 그런 일은 없었다. 합병이 되어 그 말기에는 다소 그런 걱정도 했지만도 오늘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다. 살기를 그만둘 생각도 없다. 메뚜기도 아니하는 생각을 사람인 내가 어찌 할 수 있을까?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런 생각을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하다 잤고 아침에 깨어서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그날만 아니라 근래는 이것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공산당이 들어오면 버티다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고치느냐? 그래서 아침에도 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신촌을 가려고 버스를 타니 자연 또 그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 모르게 명상에 빠졌다. 버스를 타기만 하면 나는 그 소위 음악인가 뭔가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이 많아서, 한 두 주일 전에도 성경모임에서 명상에 때한 주의를 말해주며 명상은, 적어도 훈련이 되기 전에는, 사람 많은 데서는 하지 말라 했다. 왜냐하면 사람 많은 데서 명상을 하려면 자연 남이 이상하게 보지 않나 하는 등등 생각으로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혹시는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신경조직에 이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더러 그런 데서는 하지 말라 한 나인데, 어떤지 나 자신이 음악을 했는지 아니했는지, 사람들이 잡담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고 나는 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쑥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다, “네 할 것을 어서 해라!” 하시는 그 말씀이다.
그러니 마음이 참 시원했다. 기뻤다. “이것이 절대 승리법이다”했다. 그래서 모임에 가서 예배 시간에 그것을 증거 했고 오후 모임에서도 다시 그 말을 했고, 장자 모임에서도 노자 모임에서도 했다. 이 한 주일은 그 말씀으로 살았고 이 앞으로는 또 그 얼마 동안 양식이 되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감히 나 같은 것이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 길을 가노라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셨던 것을 조그마치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상한 것은 왜 늘 유다와 관계가 될까? 1970년 이맘 때, 이보다 조금 더 늦어 펜들힐에 첫눈이 내리던 저녁, 나의 이성은 아닌 줄을 뻔히 아는데도, “저기 쭈그리고 앉은 것이 가롯 유다 아니냐” 하는 속봄을 하다가 얻은 말씀이 일찍이 「대화」(펜들힐의 명상)라는 제목으로 쓴 글인데, 또 유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게 됐다.
그때에 내게 알려주신 것은 열둘이 하나인 문제인데, 왜 제자들이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만 생각을 해서 “주님 저입니까?” 하기만 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은 그렇게 여지없이 깨어진 하나 됨을 예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하셨나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간 데마다 유다가 있다. 그 의미에서 죽은 사회다. 몸은 여럿이지만 영은 하나다. 그 하나가 깨지면 죽는다. 그것을 살려야한다. 목사님, 신부님, 신학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나 나는 「요한복음」13장 21절에 “마음이 몹시 산란해지셔서”란 말은 이 깨어진 하나 됨 때문이라고 밖엔 해석할 도리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것을 아시는” 이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지만, 유다 하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본래 열둘의 의미는 열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새로 하나인 생명체를 이룬 데 있었다. 이제 그것이 깨졌다. 유다 하나가 문제 아니다. 물론 그 개인도 불쌍히 여기지만 그로인해 열 하나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상태를 놓고는 자기 가실 길을 갈수 없다. 그러므로 몸소 제자의 발을 씻으신 것은 단순히 봉사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는 그 산산 부서짐으로 더러워진 마음을 다시 씻어 깨끗이 하기 위해서다. 상처는 씻지 않고는 합창이 아니 된다. 독성균을 씻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발을 씻음으로 그것을 상징하신 것이다.
직감으로 유다의 속을 아시지만 사랑에는 버리는 사람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내쫓을 수는 없다. 모든 벌은 인간이 스스로 제가 받는 것이다. 스스로 하는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참는다.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시는 말씀도, “너희 중 하나가 나를 잡아 줄거다” 하시는 것도, “빵을 적셔서 주신 것”도 다 이제라도, 이제라도 하고 기다려서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빵을 먹지 못하고 나가는 데 스스로 자기 벌을 받는 길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가 어둠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나간 뒤에 예수의 태도는 일변한다. 마치 막혔던 동이 터지고 폭포가 쏟아지듯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됐다”는 말로 시작되는 은혜의 말씀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하나 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간 곳마다 유다가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하지 못하고 의심의 독균이 끼어 죽게 된 것이라면,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최후 만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결이 회복되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결정적인 말이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말씀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너 할 것”이라 해서 생명의 근본원리인 스스로 함을 자극하신다. 죽어도 네가 죽고, 살아도 네가 산다. 선도 네가 하는 선이요, 악도 네가 하는 악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 속에 자유의 정신을 넣어주신 하나님이다. 벌하는 권위는 하나님께 있으나 그것을 취하는 것은 인간 제게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이요, 도덕을 기초로 하지 않은 위에 영은 자라지 못한다. 우리끼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 사람을 내쫓을 권리는 없다. 내쫓으면 나 자신이 죄다. 얼마나 많은 죄가 교회라는 이름, 나라라는 이름, 진리라는 이름 아래 지어질까? 모든 혁명은 거짓 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독립의 기초를 거의 다 놓고도 정권을 쥐지 않은 간디가 과연 참을 찾는 이 답게 한 것이다. 예수는 유다를 정죄하시지도, 회개하라 책망하시지도 않으시고 그보다 더하신 것을 했다. 악은 거기 못 견디어 스스로 저 갈 곳으로 갔다. 만일 제자들이 의분을 발해 내쫓았다면 세상적 혁명은 됐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 됨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우리 크리스천이라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이 악과 싸우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참으로 정결을 회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영의 힘의 모자람 때문 아닐까?
 
둘째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시는 데서 그 사람과 행위를 구별하셨다. 우리는 “그 행위를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를 이론으로는 알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은 할 것을 어서 하라 하셨으므로 그 다음 잡으러 왔을 때 “친구여” 하실 수가 있었다. 자기를 잡아주는 행동이 죄인 것은 아시나 그것으로 유다를 미워하시지도 벌을 선언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 사회국가가 어찌 되어 갈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점이 믿음 없는 데다. 이 세상이 이 세상대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늘 피를 피로 씻는 일에 그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뽑으려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셨다. 우리 생각에는 꼭 뽑아야 할듯한데 그러면 곡식까지 해친다고 했다. 노자(老子)도 벌하는 것은 하늘에 있지, 사람에 있지 않다 했다. 사람에 있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 제가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벌의 길을 자취할 때까지 참으신다. 인간의 고통을 지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제 뜻으로 판단해서 죽이고 나서는, 이것은 하늘이 하신 것이다 하는 것은 거짓이요 교만이다.
우리가 사탄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 신학으로 설명해도 망발이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로 둘 것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무엄하게도 나는 하나님이 돌아서시면 사탄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고 말해본 일도 있지만, 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잠잠한 것이 가장이다. 사람이 지혜를 내어 선악 시비의 판단을 한 결과가 오늘의 세상 되지 않았는가? 요순(堯舜)에서부터 천년 후에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일이 시작됐다 하는 장자(莊子)의 말이 옳지 않은가?
그러므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속에는 나는 너를 끝까지 믿는다. 네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너를 사랑한다 하는 뜻이 있다. 이 세상이 만일 악한데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어딘지 한 마음이 무한히 용서하며 무한히 참으며 믿는 싸움이 하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
이것이 속는 길이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많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도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으면 몰라도 믿는 이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이 군비 없는 헌법을 제정했다가 실지로 군비를 두지 않은 까닭으로 적국에게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자기는 만일에 그런 일이 있다면 차라리 일본 전체를 번제로 드리면서라도 그 헌법을 지지하고 싶다고 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 박사를 나는 흠모하고 싶다. 그런 정신이 있으면 나라 절대로 망하지 않을 거다. 나라 망하는 근본원인은 적국 때문이 아니고 스스로 제 국민 사이에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 불신풍조다. 믿지 못하면 서로 죄를 만들어내어서 싸운다. 다른 사람은 모르나 내가 감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설혹 누군지 모르는 유다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네 할 것을 어서 하라”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겁이 없어진다. 선악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겁이 없어지는 일이다. 상당한 분별력과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 아주 선의의 사람이면서도, 무력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불의의 세력을 보고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있어야 겁을 대지 않기도 하지만 또 겁을 내지 않도록 힘을 써야 정신의 힘이 자라기도 한다.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이요, 기일즉지동(氣ᅳ則志動)이다. 그러므로 힘쓰려 하지 않고 입으로만 하는 기도, 기도 아니다. 저절로 겁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하나님을 믿고 겁을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노력해야 정말 기도다. 그런데 겁을 내지 않으려면 “그래 무슨 일을 네가 하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서 하라. 내가 다 당하마” 하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서 겁을 제해 버리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이 평안하면 점점 더 깊은 명상과 기도에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전보다 좀 더 분명한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지난 3월 이래 과거 70년 동안에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너 할 것을 어서 하라”고.
 
우리가 또 혹하는 것의 하나는 행동의 결과다. 유다가 배반하는 생각을 가지지만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감은 유다의 재주나 힘으로 되는 것 아니다. 배신한 것과 십자가에 돌아감은 외면으로 원인 결과같이 보이나 그것은 이 둔한 육신의 생각이고, 인간이 선악간 무슨 생각을 했거나 그 결과는 결코 그 사람이 만들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일찍이 잘못 계획한 일도 잘못 싸운 일도 없었지만 비 몇 방울 온 것 때문에 패했고 그래서 유럽 역사가 달라졌던 것같이 언제나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결코 급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수십 백 천이 무고히 고생을 하는데 어떻게 끝없이 기다리느냐 하겠지만 참과 선을 기대하는 사람은 스케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의미는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이 지나간 날의 모든 선한싸움 싸운 이들의 증거하는 것이다. 씨 한 알을 심어서 열매를 얻으려 해도 몇십 년이 필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혼, 한 민족의 역사일까? 모든 악은 다 수천만 년 나이 먹은 악이다. 오늘날 내가 당하는 억울은 몇 백 년 자란 악의 힘이다. 그것이 이 조그만 나의 며칠 몇 해의 기도나 노력으로 쉽게 없어질 리가 없다. 우주는 법칙이 있는 우주이므로 그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 농사가 사시 법칙에 순응하고야 되듯이 역사의 농사도 나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새 본 책에 있는 좋은 말로 너 할 것을 어서 하라는 이 말의 끝을 맺자.
“사티아그라하의 목적은 대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대적을 개심시킴에도 있기 때문이다. (The aim of Satyagraha is not only to confront but also to convert the enemy)” 조지 우드코크
 
씨알의 소리 1976. 11,12월. 59호
저작집; 15- 31
전집; 3- 351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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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바른믿음

믿음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함석헌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내용입니다. 간단히 서술한 것 가져 왔습니다.

1923년 함석헌은 동경에 도착합니다. 그의 동경 생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집 한 칸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빠가야로,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동경고등사범에는 약 50명 정도의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비공산주의계 기독교 학생으로서 급진적인 좌익계 학생 그룹으로부터 질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함흥농업학교 졸업생 김교신(1901~1945)을 만나게 됩니다.
김교신은 1919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와서 1920년 11월부터 1927년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우치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2년에 이곳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김교신은 석헌에게 우치무라의 성경 공부 모임과 일본 무교회 운동 모임을 소개했습니다. 뒤이어 석헌은 우치무라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에 대해 개방 정책을 취하고 근대화 운동을 추진할 당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는 유명한 성서 해석자였습니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기독교 평화주의의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우치무라의 그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우치무라는 스스로는 무교회 원칙에 입각한 기독교도라고 자신의 모임을 칭하였습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운동은 표면적 형식주의와 교회만의 경건함을 부인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 관념을 부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는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는 아니라고 아님을 주장하며,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열망했습니다.
함석헌은 이러한 우치무라와 무교회 운동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석헌은 우치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우치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퀘이커 모임에서 석헌은 별로 뚜렷한 인상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두고 나중에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동경 유학 시절 우치무라가 이끌었던 것과 같은 성경 공부 모임, 무교회 운동 모임을 서울에 만들었습니다.

함석헌도 역시 무교회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잡지의 이름에서처럼 <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즉 하나님의 말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자 한 잡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경찰로부터 <성서조선>은 검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서조선>에 실린 함석헌의 글들을 삭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황국신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 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 학계의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합니다.
1925년 6월에는 그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기에 이릅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총 35권, 전체 2만 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16년에 걸쳐 제작하였습니다. 제작 비용으로는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였습니다. 이 일은 일제에 있어서 조선 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의 국가사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계략 아래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저술하게 됩니다. 석헌은 한국 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려 했습니다.

함석헌이 저술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한국 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이 책을 통해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써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직하여 일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드는 '신도주의'를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사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사 자리를 사임해야 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사임한 함석헌은 한동안 오산학교 인근의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3월 함석헌의 후배인 김두혁은 자기가 경영하던 평양 근교 송산 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함석헌에게 부탁합니다.
석헌은 이를 받아들여 교육, 경영, 관리, 농사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모두 밖에 나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세 가지 분야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육, 기독교 신앙, 농사일' 그런데 1940년 8월 김두혁이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경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이 일하던 농사학원 역시도 일본 경찰로서는 공산주의 성격의 학교로 인식되었습니다. 게다가 함석헌은 1940년 2월부터 일제의 의해 시행된 '창씨개명'에도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1940년 8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함석헌을 대신해 김교신, 송두용 두 친구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결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함석헌은 석방됩니다. 그러나 그 후 1942년 3월 <성서조선>은 15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당합니다. 그리고 두 달여 후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성서조선의 발행 관계인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려, 유달영 등을 포함한 <성서조선>의 독자들 역시도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감옥 내에서 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특히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반야경, 법화경, 무량수경, 금강경 등 다양한 불경들을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도관에게 읽을 만한 책을 달라고 하니 그 교도관이 불교도였던 터라 불교 서적 등을 건네주어 불교 서적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감방 대학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나름의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년의 감옥 생활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점차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은 이후 1940년대 초반에 와서 자신의 생각과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크게 3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습니다.

△ 첫째 그는 무교회 모임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화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함석헌이 보기에 무교회 운동에서 회원들은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나 세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했습니다.

△ 둘째,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관한 이해가 '우치무라 간조'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 우치무라의 속죄론이었습니다. 반면 함석헌은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즉 속죄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의 인격적 일치 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신앙의 대상으로 주님을 그저 믿기만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내적인 신앙심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이나 특정 종교 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예수와 독창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셋째,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점령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경 대지진 직후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 운동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당시 함석헌이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고전 철학은 노장사상이었습니다.
특히 석헌은 노장사상의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정념의 순화 같은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장사상의 영향인지 함석헌은 종교 혹은 사상의 지나치게 기교적인 체계화 그리고 첨예하게 조직화한 힘이나 제도화된 인위적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한 힘이나 첨예화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습니다.
( 독자 비평 ; 그러나 한민족은 조직화가 안되서 힘이 없엇고 그것이 당파싸움으로 이어져 침략을 받는 동기가 됬습니다 )
그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인류의 모든 주요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힘썼습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석헌에게 노장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에서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까지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네 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야가사키의밖에서일본을보다] 일본국 헌법과 기독교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

[야가사키의밖에서일본을보다] 일본국 헌법과 기독교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



[야가사키의밖에서일본을보다] 일본국 헌법과 기독교

기독교 종파 중에 퀘이커(Quaker)라는 단체가 있다. 퀘이커는 기독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설립된 종교단체이다. 퀘이커라는 것은 주로 신의 말에 떨었다는 것에서 붙여진 속칭이다. 그들의 특징은 철저한 평화주의로 폭력을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즉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을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철저한 비폭력의 퀘이커와 일본의 관계가 흥미롭다. 

이미 맥아더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선교사의 성격이 더 강해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점령 하의 헌법 개정 작업이 맥아더 한 사람만의 재량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맥아더가 일본 점령의 최종 책임을 지는 미국 정부의 의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미국은 1942년 시점에서 일본의 패전을 상정하고 일본처리안을 입안했었다. 미국 국무성 소속으로 대일점령정책을 입안한 인물이 바로 휴 보튼(Hugh Borton)으로 그는 퀘이커 신자였다. 

야가사키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보튼의 평화주의가 ‘일본국 헌법 9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헌법 9조의 일본 측 당사자였던 시데하라 키주로(幣原喜重郞) 수상이 기독교 신자였는지에 대해 밝혀진 바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아내가 퀘이커 신자였으며, 학회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시데하라의 아들도 미국의 퀘이커 학교로 유학까지 보냈다. 이러한 점에서 추측하건대 시데하라는 적어도 퀘이커와 공존할 수 있는 사상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맡으며 일본과 미국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한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도 퀘이커 신자였다. 또 현재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어린 시절 미국인 가정교사였던 바이닝 부인도 퀘이커 신자였다. 퀘이커가 일본과 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점령군은 여러 국가의 헌법을 참고로 했는데 일본법 중에서는 기독교 사상에 깊이 심취했던 우에키 에모리(植木枝盛)의 메이지 헌법 초안 ‘일본국 국헌안’(1881)을 참고로 했다. 메이지 헌법 제정 시에는 무시됐던 그의 헌법 초안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눈에 띄게 돼 맥아더의 초안에 포함된 것이다.

이상의 점으로 보아 일본국 헌법의 중심축에 기독교 사상이 있음은 명백하다. 중심축을 천황에 둔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일본은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것은 민족의 중심축을 아시아와 세계에 두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과오였다. 이에 비해 현행 헌법의 배경에는 기독교사상이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 근본을 이루는 존재를 궁극의 존재라 부르건, 하느님이라 부르건 그 존재는 공간적으로는 세계적 보편성, 시간적으로는 역사적 영원성을 갖춘 존재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헌법 개정은 9조의 문제가 주로 거론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이 중심축 문제가 아닐까.

야가사키 선문대 교수·국제정치학

무사도 정신은 근대에 만들어진 날조로 밝혀져.

원숭이 사냥꾼 카피사루





무사도 정신은 근대에 만들어진 날조로 밝혀져.

http://enjoyjap.egloos.com/1768228

 무사도는 전쟁 미화할려고 창작해낸 애국심 고취용 단어



중앙일보 "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뻥이다"

1957년에 나온 영화 ‘콰이강의 다리’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희 놈들이 부시도(武士道)에 대해 뭘 알아!”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사이토 대령이 영국군 포로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작업을 거부하는 영국군 장교들을 사살하려는 장면에선 이런 말도 나온다.

“비무장한 사람을 살해하는 게 일본군의 행동규율(부시도)입니까?”

포로가 된 미국 군의관의 항의다. 이 말에 사이토가 움찔한다. 영화 내내 사이토는 부시도로 무장한 일본 군인으로 묘사된다.

사이토가 보여주려던 부시도는 사무라이, 즉 무사계급의 규율이자 윤리다. 충의, 예절, 용기, 명예, 신의, 검약을 중시한다. 일본인들의 자긍심이 응축된 정신세계로 확대 해석되기도 한다. 일본인 특유의 미학으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너무 빠져들진 말자. 그걸 진짜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부시도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실체가 아니다. 신화나 상징 조작에 가깝다. 심하게 말해 ‘뻥’이라 할 수도 있다.

부시도를 처음 체계화한 이는 일본의 농학자이자 교육자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다. 미국과 독일에서 수학했고, 미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지낸 일본 근대의 국제적 지식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그의 초상은 5000엔짜리 지폐에 사용됐다. 그가 1899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한 책이 『BUSHIDO:The Soul of Japan』이다.

서문엔 집필 동기가 간단히 나온다. 그는 “종교교육을 하지 않는 일본에선 도덕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라는 벨기에 학자의 질문에 답이 궁해진 적이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본 결과 그는 일본의 부시도 정신이야말로 일본인의 도덕규범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도덕과 윤리 체계가 있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듯이 일본엔 부시도가 있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책을 썼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서양의 기사도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참고로 어릴 때 어렴풋이 듣던 유교적 덕목이나 사무라이 전설들을 버무려 만든 것이었다. 니토베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는 얘기다. 부시도라는 게 정말 일본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면, 왜 하필 사무라이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그것도 서양물 먹은 청년의 손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먼저 쓰였겠는가.

그런데 이 책은 나오자마자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인은 모두 부시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서양인도 많았다. 서양에서 유명해지자 곧 일본어로도 번역됐다. 부시도가 일본에 역수입된 게 바로 그때였다. 그 뒤 부시도는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자기네 고유의 도덕규범이나 미덕으로 각인됐다. 때마침 불어 닥친 군국주의 바람도 집단최면을 거든 듯하다. 이거,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굳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도 부시도는 일본인의 의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보수층이 중시한다. 국격을 높이자, 국민의식을 고양시키자, 하는 논의에서 꼭 나오는 게 부시도의 함양이다. 굴절된 자아도취다.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할 때 방위청 간부가 “부시도 나라의 기개를 보여주라”고 훈시한 적도 있다. 코미디다.

니토베는 자신의 책에서 ‘용맹과감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서 ‘의(義)’를 부시도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시도를 숭상하던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을 보면 부시도가 허구였다는 게 잘 드러난다. 지금의 보수우익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인색한 그들에게 도대체 부시도의 풍모를 찾을 수 있는가. 원래 없었던 것이니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일본의 보수우익은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에겐 아직도 아쉬운 내용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적 역사관’으로 매도한다. 부시도를 숭앙하는 보수세력일수록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침략을 반성하기보다 패전을 반성한다. 이러니 무사의 체취를 느끼기는커녕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얍삽해 보이는 거다. 부시도를 (말로만) 숭상하는 일본의 보수우익들이여, 니토베의 책은 아예 찢어버려라.



【中央日報コラム】日本の「武士道精神」は誇張(はったり)だ、新渡戸の本は破り捨ててしまえ[08/18]

1 :はらぺこφ ★:2010/08/18(水) 17:50:04 ID:???
1957年の映画「The Bridge on the River Kwai」にはこういうセリフが出
てくる。「お前らのような奴に武士道のことが分かるか!」。日本軍捕虜収容所長の斎藤大佐が英国軍捕虜に
吐いた言葉だ。

作業を拒否する英国軍将校を射殺しようとする場面ではこういう言葉も出てくる。「非武装の人間を殺害する
のが日本軍の行動規律(武士道)ですか?」。捕虜になった米国軍医官の抗議だ。 この言葉に斎藤はびくっ
とする。 映画の終始、斎藤は武士道で武装した日本軍人として描写される。

斎藤が見せようとした武士道は侍、すなわち武士階級の規律であり倫理だ。 忠義、礼節、勇気、名誉、信義、
倹約を重視する。 日本人の自負心が凝縮された精神世界に拡大解釈されたりもする。 日本人特有の美学とし
て包装する人もいる。

しかし深入りはしないでおこう。 それを本当だと信じれば純粋だ。 武士道は歴史的事実を根拠とする実体で
はない。 神話や象徴操作に近い。 ひどく言えば‘はったり’ともいえる。

武士道を初めて体系化したのは日本の農学者であり教育者の新渡戸稲造(1862-1933)だ。 米国と
ドイツで修学し、米国人女性と結婚し、国際連盟事務次長を務めた日本近代の国際的知識人だ。 熱心なキリ
スト教信者でもあった。 数年前まで新渡戸の肖像は5000円紙幣に使われていた。 新渡戸が1899年に
米国で英語で出版した本が『BUSHIDO:The Soul of Japan』だ。

序文には執筆の動機が簡単に出てくる。 新渡戸は「宗教教育をしない日本では道徳をどう教えるのか」という
ベルギー人学者の質問に対し、返答に窮したことがあった。 つくづく考えた結果、新渡戸は日本の武士道精神
こそが日本人の道徳規範だという結論に達した。 日本にもしっかりとした道徳・倫理体系がある、西洋に騎士
道があるように日本には武士道がある…。 新渡戸はこうしたメッセージを伝えようという強い思いを抱いて本
を書いた。

もっともらしく見えるが、実は西洋の騎士道や「ノブレスオブリージュ」を参考に、幼い頃に少し聞いた儒教的
徳性や侍伝説を混ぜ合わせて作ったものだった。 新渡戸の想像力の産物だったということだ。 武士道という
ものが本当に日本の伝統として受け継がれてきたとすれば、何故よりによって侍の時代が終わった後に、しか
も西洋の空気を吸った青年の手で、米国で英語で先に書かれたのか。

ところがこの本が出ると、米国はもちろん欧州でもベストセラーになった。 日本人はみんな武士道に基づいて
行動するものと錯覚する西洋人も多かった。 西洋で有名になると、すぐに日本語にも翻訳された。 武士道が
日本に逆輸入されたのがまさにこの時だった。 その後、武士道は日本人の意識の中に自分たち固有の道徳規範
や美徳として刻印された。 ちょうど吹き荒れていた軍国主義の風も集団催眠を手伝った。 これは日本でも知る
人はみんな知っている。 敢えて持ち出して話さないだけだ。

今でも武士道は日本人の意識で重要な比重を占める。 特に保守層が重視する。 国格を高めよう、国民意識を
高揚させようという議論で必ず出てくるのが武士道の涵養だ。 屈折した自我陶酔だ。 自衛隊を海外に派遣す
る時、防衛庁の幹部が「武士道の国の気概を見せよう」と訓示したこともあった。 コメディーだ。

新渡戸は自分の本で「勇猛果敢なフェアプレー精神」として「義」を武士道の基本と考えた。 しかし武士道
を崇敬していた日本軍国主義の蛮行を見れば、武士道が虚構だったことがよく表れている。 今の保守右翼も
同じだ。 侵略戦争に対する反省と謝罪を惜しむ人たちのどこに武士道の風貌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か。 元々
なかっただけに見えないのだ。

日本の保守右翼は菅直人首相が韓日強制併合100年を迎えて発表した談話に反発しているという。 私たち
には今でも惜しまれる内容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だ。 彼らは侵略戦争に対する反省を「自虐的歴史観」と罵倒
する。 武士道を崇める保守勢力であるほど過去の過ちを認めない。 侵略を反省するより敗戦を反省する。
これだから武士の体臭を感じるどころか、無責任で卑怯でずるく見えるのだ。 武士道を(言葉でのみ)崇める
日本の保守右翼たちよ、新渡戸の本はいっそのこと破り捨ててしまえ。


中央日報 2010/08/18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132223&servcode=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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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ㅋㅋㅋㅋ2010-08-19 18:41
    언제나 좋은글 퍼가겠습니다~
  • matercide2010-09-15 00:25
    니토베 이나조 본인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예찬한 일그러진 지식이었습니다. 퀘이커교도(전쟁을 반대하는 개신교일파)이지만 일본의 전쟁을 예찬하고 미국이 원주민을 탄압하는 것을 일본에서도 따라하기를 주청한 사람이죠. 무사도요? 결국 카피사루님 말이 맞습니다. 무사들이 살던 시대에 무사도는 없었어요.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기사도는 기사의 시대인 중세가 지나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럼 유럽의 기사와 일본의 사무라이는 뭐냐고요? 조폭
  • 날조 사무라이~2012-05-13 13:38
    날조된 사무라이 신화와 기사도를 근대에 [ PAKURI ]한 무사도.. 결국 그 때문에 8살 소년이 사무라이 영화를 보다가 자살까지.. http://view.heraldm.com/view.php?ud=20110811000123&cpv=0
  • 고든2013-09-14 22:55
    와...이런건 일본에 널리 퍼뜨려야될 사실이네요
  • 나는이2013-12-23 17:22
    내 http://aigpo.org/ 친구 안녕하세요! 나는이 문서가 작성된 놀라운, 좋은 것을 말하고자하는 약 모든 중요한 infos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소식을 더보고 싶습니다.
  • 누명을 벗는 방법2014-04-05 19:11
    1. 일본 사무라이들의 수양서인 '하가꾸레기끼가끼(葉隱聞書)' 중에서 어느 가난한 홀아비 무사(武士)가 떡장수네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떡집에 가서 놀던 무사의 어린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떡장수는 무사에게 떡값을 내라고 다그쳤다. 무사는 떡장수에게, "내 아들은 굶어죽을지언정 떡을 훔쳐먹을 짓은 절대로 할 아이가 아니오." 하고 말했다. 그래도 떡장수는,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먹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라고 하며 빨리 돈을 지불하라고 계속 따지자 무사는 순간적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자 다짜고짜로 아들을 쓰러뜨리고는 아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지 않았음을 백일하에 입증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떡장수를 핏발 선 증오의 눈초리로 잔뜩 노려보던 무사는 살려달라고 빌고있는 그에게 달겨들어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다. 떡장수의 목이 땅바닥에 수박덩이모양 구르는 것을 지켜본 순간 무사는 정좌하고 앉은 채 두 사람을 죽인 그 칼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에 한일자를 북 그어버렸다. 2. 조선시대 성리학자 윤상(尹詳)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중에서 길가던 나그네가 어느 집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나그네는 숭늉을 마시고 무심코 밖을 내다 보았다. 주인 집 사내 아이가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렸다. 마침 이것을 지켜보던 거위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그 구슬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에 그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가보(家寶)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구슬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온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 뒤져도 구슬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은 식객으로 묵고 있는 나그네에게 도둑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나그네는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는 결박을 당하여 사랑채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을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난 나그네는 다음날 관가로 끌려가지 직전에 주인에게 거위의 똥을 잘 살펴보라고 일렀다. 잃었던 구슬은 거위의 똥 속에서 나왔다. 주인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거위가 구슬을 삼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얘기를 않고 밤새 고생을 했소?"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그 사실을 밝혔더라면 당신은 급한 김에 그 자리에서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게 아니오. 내가 하룻밤 고생한 덕으로 거위는 목숨을 건졌고 당신은 구슬을 찾게되지 않았소?" 한국과 일본의 생명에 대한 인식의 차이...

Classic 2. “무사도”를 읽고 | The Dharmaniac Life of Bruce

Classic 2. “무사도”를 읽고 | The Dharmaniac Life of Bruce



Classic 2. “무사도”를 읽고

이번에 읽은 니토베 이나조의 <武士道>를 읽은 소감을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책의 저자는 니토베 이나조는 20세기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며 기독교 퀘이커파의 영향을 받은 농학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원래 이 책은 영어로 써졌으며 해외에서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책은 일본인에게 흐르고 있는 무사도 정신을 동서양 사상을 넘나들며 해석을 해 나갑니다.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을 소개하고, 이를 공맹 유교 사상, 불교, 기독교, 그리고 각종 철학 사상을 빌려와서 비교를 하며 무사도가 무엇인지, 정직/의, 용기, 인애, 명예 등 일본인의 가치들을 소개해 갑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어느 나라든지 그들의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가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다. 성서에 나온 내용들과 무사도 정신과도 통하고, 유교와 무사도, 불교와 무사도도 모두 통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하느님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나라의 말로 말씀을 해주신다는 말이 있듯이, (퀘이커 교도인 니토메는) 일본에서도 하느님께서 무사도로서 말씀을 주신 것으로 풀어갑니다. 원류는 같은데 유럽에서는 유럽에 맞는 기독교로, 일본에서는 일본에 맞게끔 변화되어 왔다고 기술합니다.
모든 책을 읽는데는 어느 정도 목적성을 가지고 읽는데, 제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사실 일본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예절, 장인정신, 극기정신을 이해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는데, 많은 부분이 무사로서의 명예와 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예와 충이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고 결국 정신적 원류보다는 어떻게 그것들을 생활화해 왔는지에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교육이 그 중요한 방편이었습니다.
일본은 과거에 지식 공부 이전에 우선 품성교육으로 시작했다고 하고, 소독(素讀, 뜻보다는 글자만 소리내어 읽는 것)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긴 하지만, 우선 고전들을 뜻을 모르더라도 읽으며 외우는, 그것도 맨발로 세워놓고, 하는 교육이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다가 아니겠지만 제게는 그런 것들이 무척 인상 깊었고, 그러한 것들이 오랜 세월 쌓이며 일본인에게 인내심과 꾸준함, 또 이번에 지진 후 보여준 resilience이 기초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 책에는 <무사도>외에 뒤쪽에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김인영의 <’대망’에서 읽는 무사도의 혼>이 같이 수록되어 있는데 같이 읽어볼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다 좋은데 흠 하나가…<무사도>의 본문이 나오고 매 챕터 뒤에 해석이 나오는데, 글 내용을 보면 현대 일본인 철학자 내지는 종교학자인 것 같은데 누구인지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 좀 답답했습니다. 사실 <무사도>의 본문도 좋은 내용이 많았지만 해석에도 좋은 내용이 많았거든요.

공동묘지와 공놀이터 - 김 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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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와 공놀이터
- 김 조년 -

독일의 북부지방에 해당되는 곳에 바트 피르몬트(Bad Pyrmont)라는 작은 요양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철분이 섞인 물이 나오는 곳으로 요양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것 말고 독일 퀘이커들에게는 고향과 같이 느끼는 퀘이커하우스가 있다. 1792년부터 퀘이커들이 이 지역에 살게 되면서, 영국의 퀘이커가 헌금한 돈으로 지금의 퀘어커하우스를 지었다. 시의 변두리, 봄베르크가(Bombergallee)에 자리 잡은 아주 아담한, 사치스런 장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집이다. 여기에 퀘이커사무실이 있고, 도서관이 있으며, 잠잘 수 있는 곳과 관리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들과 부엌과 작은 모임방이 있다. 물론 큼지막한, 원형은 아니지만 원형 비슷한 느낌을 주는 모임장이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나무로 벽을 둘렀을 뿐이다. 가운데는 상황에 따라서 자리를 바꿀 수 있도록 비어 있고, 빙둘러 가면서 서너계단 정도의 약간 높은 턱 진 자리가 있다. 참여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서 둘러앉거나 마주 바라볼 수 있게 의자를 조절할 수 있게 돼 있다.
바로 이 퀘이커하우스에는 독일 퀘이커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퀘이커하우스의 정원 마당과 같이 생긴 곳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와 비슷한 높이로 돼 있고, 그 길을 받친 축대를 씨멘트로 처리하였다. 그 축대에 이어서 푸른 잔디나 작은 민들레가 피는 풀밭으로 평평하게 된 곳이 있다. 축대 벽은 거무스름하게 돼 있다. 이 벽에는 편지지만큼 큰 동판이 많이 붙어 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의 이름과 그가 출생한 날과 장소, 죽은 날과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부인의 경우에는 그가 결혼하기 전 성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어떠한 일을 하였으며,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영예를 가졌었다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곳에 그렇게 이름판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독일 퀘이커들로서 죽은 뒤에 화장하여 그 재가 이 공동묘지에 뭍이거나 뿌려진 사람들이다. 퀘이커의 조상들이 뭍인 거룩한 곳이다.
그런데 이 장소에서 항상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바트 피르몬트 퀘이커하우스에서 모임이 있을 때, 즉 퀘이커들의 계절모임이나 연회가 있을 때는 가족들이 함께 온다. 어린아이들도 함께 올 때가 많다. 그 아이들은 돌보는 친우들에 의하여 산과 시내와 들로 다니면서 아주 즐겁게 놀고 게임을 하고 노래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지도하지도 않는 일이 벌어진다. 어린이들은 원래가 창의력이 출중하기에 스스로 놀이를 꾸미고 조직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 중 하나는 공이다. 아이들이 공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논다. 바로 이 공동묘지의 풀밭에서, 돌아가신 퀘이커들의 재가 뿌려지거나 뭍인 그 풀밭에서 신나게 뛰며 공놀이를 한다. 공놀이뿐만 아니라,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여러 가지를 즐긴다. 어디에도 죽음과 관련된 거룩함이나 엄숙함과 숙연함이 없다. 그냥 신나게 자기들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그것을 보는 어른들의 눈은 매우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한 어른이 모임에서 말하였다. 공동묘지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통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도 공동묘지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놀게 하는 곳이 없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감동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다.
옛날 내가 어려서 살던 고향 학산의 순양 마을 뒷동산에, 뒷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동산에 큰 무덤들이 여럿 있었다. 소나무나 다른 나무들이 없던 그곳은 양지바른 곳으로, 산이 순하였기에 잔디가 잘 살아 있었다. 그 무덤 옆에는 아주 오래 된 큰 소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었다. 단오 때가 되면 동네사람들이 짚을 모아 동아줄을 틀어 그곳에 그네를 매었다. 내 어린 손으로는 두 손으로 잡아야 굵기를 잴 수 있는 굵은 동아줄이었다. 그것을 큰 소나무에 매고 그네를 뛰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뛰지 못하지만, 저녁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이나 어른,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그곳을 즐겼다. 밤늦게까지 그네 뛰는 소리가 마을을 즐겁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주 힘이 좋고 잘 연습이 된 사람은 까마득히 높이 올라가면서 앞가지에 달려 있는 솔잎을 입으로 따오기도 하였고, 궁둥이로 뒷가지를 치기도 하였다. 쌍그네를 뛰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걸작이었던지. 그러다가 단오날에는 그네뛰기 내기도 하였고, 하루를 아주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는 그날 밤 그네 줄을 끊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그네를 뛰지 않았다. 뛸 수가 없었다. 농사에 바쁜 때이기에 더 이상 그런 놀이가 불가능하였다. 또 큰 어른이 높게 그넷줄을 잘랐기에 어린 아이들의 손이 닿지가 않았다. 높은 나무에 두 줄 잘려진 그넷줄이 밑으로 내려뜨려져 있을 뿐이다. 그것을 볼 때는 섬뜩한 생각도 들었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끊어진 그넷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 도달하기 불가능한 먼 하늘나라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그 그네가 매달렸던 나무 옆에 있는 몇 상부의 산소들이 우리 어린아이들이 아주 즐겨서 놀던 놀이터였다. 그 산소의 주인은, 아니 그곳에 뭍인 분의 친척이나 후손들은 다른 동네에 살았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그렇게 신이 나게 놀아대도 아무도 와서 꾸중하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패를 갈라 온갖 놀이를 다 벌였다. 어느 무덤 꼭대기를 서로 차지하는, 일종의 진지나 고지 탈환전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봉분은 여지없이 우리 어린아이들의 발에 짓밟히고, 잔디들은 잎을 잃고 잔디뿌리만 밖으로 내보이기도 하였다. 어린 우리들은 뒹굴기, 구르기, 밀어내기, 깽깽이치기, 잔디썰매타기 따위 온갖 놀이를 그 무덤에서 하였다. 무서운 생각도 없었고, 그 밑에 누가 있어서 힘들어하거나 노여워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놀았다. 옷은 찢어지고, 단추는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꿰맨 잇으매들은 타개지고. 잠자는 그 분은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평상시에, 아니 살아계실 때 아이들을 좋아하였던 분일까? 아니면 아주 싫어했던 분이었을까? 모른다. 그러나 유독히 그 무덤에는 아이들이 들끓었다. 놀기에 아주 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당이었다.
어느 날 내가 고향을 찾을 때, 그곳을 둘러보았다. 옛날 같이 놀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곳에 지금은 나무들이 무성하여졌고, 잔디가 좋던 그 무덤가에는 겨우 햇볕을 받아 잔디라는 명맥만을 잇고 있었다. 전에 없던 비석과 상석이 놓였고, 매우 정성을 드린 듯한 느낌이 드는 무덤단장이 있었다. ‘효심’이 발동한 후손이 돈을 벌어 조상을 섬긴 것일까? 그 무덤 가 어디에서도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떠난 무덤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거룩하게 느껴졌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어떤 괴기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무덤이 아늑하거나 따뜻한 기운을 잃어서도 그러겠지만, 그곳에 와서 신나게 즐기고 놀 아이들이 그 마을에는 이제 더 없다. 60-70명 씩이나 되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겨우 10여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놀이패 한 짝을 짓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시골이지만 시장에서 사온 장난감이 방안에는 늘비하게 많고, 알프스의 하이디를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방안에 놓여있다. 자연이 주던 장난감은 상품제품에 자리를 빼앗겼고, 푸르거나 금빛 나는 잔디에서 푸른 하늘을 벗삼아 놀던 열정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산록을 누비는 하이디를 방영하는 그것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바트 피르몬트 퀘이커하우스 앞 공동묘지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놀던 고향 뒷동산의 무덤가를 비교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죽음과 삶이 한 곳에 있는 곳, 가고 옴이 따로 있지 않는 곳, 죽어 잠잠함과 살아 약동함이 함께 있는 곳. 그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짓밟고 놀던 그 무덤의 주인은 기뻐서 날뛰었을 것이 아닐까? 지금 저렇게 푸른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면서 노는 철모르는 아이들을 그윽하고 흐뭇하고 기쁜 맘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이 있듯이. 무덤과 이이들은 가까워야 하는 것인가? 놀이터처럼 편안해야 할 무덤, 그 무덤을 안방이나 안마당처럼 생각하는 아이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수염을 쥐뜯고, 지엄한 할아버지 얼굴을 핧히고, 등과 어깨를 타고 넘던 손자들. 마치 무덤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러한 것들이지 않았을까?(05.11.07. 照)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2 일본 유학과 감옥의 생활

뉴스앤조이



함석헌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2
일본 유학과 감옥의 생활
2012년 02월 27일 (월) 23:56:24김백형 (kbh153)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923년 함석헌은 동경에 도착합니다. 그의 동경 생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집 한 칸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빠가야로,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동경고등사범에는 약 50명 정도의 조선 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비공산주의계 기독교 학생으로서 급진적인 좌익계 학생 그룹으로부터 질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함흥농업학교 졸업생 김교신(1901~1945)을 만나게 됩니다.

김교신은 1919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와서 1920년 11월부터 1927년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우치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22년에 이곳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습니다. 김교신은 석헌에게 우치무라의 성경 공부 모임과 일본 무교회 운동 모임을 소개했습니다.

뒤이어 석헌은 우치무라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에 대해 개방 정책을 취하고 근대화 운동을 추진할 당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는 유명한 성서 해석자였습니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언론인으로 일하며 기독교 평화주의의 입장에서 러일전쟁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우치무라의 그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우치무라는 스스로는 무교회 원칙에 입각한 기독교도라고 자신의 모임을 칭하였습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 운동은 표면적 형식주의와 교회만의 경건함을 부인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적인 고정 관념을 부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는 교회가 건물이나 제도는 아니라고 아님을 주장하며,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열망했습니다.

함석헌은 이러한 우치무라와 무교회 운동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석헌은 우치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우치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퀘이커 모임에서 석헌은 별로 뚜렷한 인상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서 얻은 가르침을 두고 나중에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동경 유학 시절 우치무라가 이끌었던 것과 같은 성경 공부 모임, 무교회 운동 모임을 서울에 만들었습니다. 함석헌 역시도 무교회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교신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잡지의 이름에서처럼 <성서조선>은 성서와 조선, 즉 하나님의 말씀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고자 한 잡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경찰로부터 <성서조선>은 검열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서조선>에 실린 함석헌의 글들을 삭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황국신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 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 학계의 최고 두뇌들을 총동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합니다. 그리고 1925년 6월에는 그 이름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기에 이릅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총 35권, 전체 2만 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16년에 걸쳐 제작하였습니다. 제작 비용으로는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였습니다. 이 일은 일제에 있어서 조선 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의 국가사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제의 계략 아래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를 다시금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저술하게 됩니다. 석헌은 한국 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려 했습니다.

함석헌이 저술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한국 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역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이 책을 통해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써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직하여 일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드는 '신도주의'를 조선의 기독교인들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조선어 사용과 조선사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결국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사 자리를 사임해야 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사임한 함석헌은 한동안 오산학교 인근의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3월 함석헌의 후배인 김두혁은 자기가 경영하던 평양 근교 송산 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함석헌에게 부탁합니다. 석헌은 이를 받아들여 교육, 경영, 관리, 농사일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모두 밖에 나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세 가지 분야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육, 기독교 신앙, 농사일'

그런데 1940년 8월 김두혁이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경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함석헌이 일하던 농사학원 역시도 일본 경찰로서는 공산주의 성격의 학교로 인식되었습니다. 게다가 함석헌은 1940년 2월부터 일제의 의해 시행된 '창씨개명'에도 협조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1940년 8월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함석헌을 대신해 김교신, 송두용 두 친구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결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함석헌은 석방됩니다. 그러나 그 후 1942년 3월 <성서조선>은 15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당합니다. 그리고 두 달여 후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성서조선의 발행 관계인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장기려, 유달영 등을 포함한 <성서조선>의 독자들 역시도 붙잡혀 구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감옥 내에서 많은 독서를 하면서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특히 '러스킨'과 '톨스토이'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 안에서 반야경, 법화경, 무량수경, 금강경 등 다양한 불경들을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교도관에게 읽을 만한 책을 달라고 하니 그 교도관이 불교도였던 터라 불교 서적 등을 건네주어 불교 서적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함석헌은 감방 대학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 근본에서 하나라는 나름의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년의 감옥 생활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노자'와 '장자'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점차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은 이후 1940년대 초반에 와서 자신의 생각과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크게 3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였습니다.

△ 첫째 그는 무교회 모임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화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함석헌이 보기에 무교회 운동에서 회원들은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실 세계나 세속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했습니다.

△ 둘째,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관한 이해가 '우치무라 간조'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 우치무라의 속죄론이었습니다. 반면 함석헌은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즉 속죄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의 인격적 일치 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신앙의 대상으로 주님을 그저 믿기만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내적인 신앙심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어떤 종교적 규칙이나 특정 종교 지도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거나 의지하지 않고 사람마다 스스로 예수와 독창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셋째,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점령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경 대지진 직후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관이 무교회 운동과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당시 함석헌이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고전 철학은 노장사상이었습니다. 특히 석헌은 노장사상의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정념의 순화 같은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장사상의 영향인지 함석헌은 종교 혹은 사상의 지나치게 기교적인 체계화 그리고 첨예하게 조직화한 힘이나 제도화된 인위적 권위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조직화한 힘이나 첨예화된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인류의 모든 주요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힘썼습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석헌에게 노장사상, 그리고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에서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데 있었습니다.

1945년까지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네 번에 걸쳐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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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EcoPeace) 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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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평화운동에 대한 단상

http://ecopeace.pe.kr/index.php?pl=30

작성자 : 박성용(EcoPeace)
sungyongpk@yahoo.com
전직 - 유네스코/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시민사회실장, 사업조정자
현직 - 생명평화 훈련 교육기획 및 대안교육 운동가(자유직)

작성일 : 05/11/11 18:09





내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Pendlehill(www.pendlehill.org)에 가을학기를 지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내가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먼저 한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이는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는 법이 없다. 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인 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 “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 (the way of life)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권한부여 empowerment ...)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 “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 2005. 11. 10. - 

충북인뉴스 까칠한 농부 홍종철씨의 항변

충북인뉴스



퇴직공무원에게 웬 군민대상?
“절임배추 개발, 면장 아니라 주민이 한 것”
2008년 05월 28일 (수) 11:01:39이재표 기자  gajadia@naver.com
까칠한 농부 홍종철씨의 항변

도내 시·군들이 시·군민대상 수상자를 찾지 못해 허덕이는 것과 관련한 최고의 해법은 ‘상을 받아서 마땅한 인물’을 어떻게 해서라도 발굴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아예 시상부문을 비워두는 것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뻔한 사람’에게 상을 줄 경우 추락된 권위를 회복하기 어렵고, 함께 상을 받은 사람들의 명예도 동반 실추되기 때문이다.


  
▲ 괴산의 귀농 농부인 홍종철씨는 10년 전 퇴직한 공무원에게 군민대상을 준 것과 관련해 상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사진은 괴산산업단지 조성에 반대하는 1인 시위 광경.
그러나 그동안의 시상에 대해 뒷말만 무성했을 뿐 대안을 제시하거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에 반해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에 사는 홍종철(52)씨는 2007년 9월 시상한 괴산군민대상과 관련해 군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한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홍씨는 당시 홈페이지에 올린 질의서를 통해 괴산군 문광면장을 지낸 A씨가 절임배추를 개발하고 브랜드화한 공로로 지역경제부문 군민대상을 받은 것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가며 부당성을 지적했다. 

주장의 요지는 “국가의 녹을 받으며 공무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한데도 퇴임 후에 영예로운 상까지 준다면 군민대상의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상을 받은 A씨가 절임배추를 개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브랜드화에도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씨는 또 “A씨가 절임배추 개발 당시 문광면장이었을 뿐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고, 특히 퇴임 후에는 절임배추 사업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반바지, 고무신 신고 의회방청도하지만 괴산군은 “누구에게, 어디에서, 어떠한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심사위원이 제출된 공적내용에 대하여 충분히 탐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출된 공적조서와 다를 바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홍씨는 이에 대해 “나 역시 청안면의 절임배추 작목반 회원이고 이는 공론화된 얘기”라며 군의 주장을 일축했다.

강화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라고 자영업에 종사하다가 2003년말 청안면으로 귀농한 홍씨는 사실 시민단체가 없는 괴산군의 반골(?)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논 4000평과 밭 600평을 빌려 농사를 짓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군의회를 방청할 정도로 지역의 감시자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씨는 반바지에 고무신차림으로 의회를 방청하려다 제지를 당하자 당시의 복장을 사진으로 찍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을 정도.

기독교의 갈래 가운데 침묵 예배, 명상 등을 신행의 근간으로 삼는 퀘이커 교도인 홍씨의 블로그는 각종 종교, 생태농업 등과 관련한 내용 외에도 환경과 관련한 각종 민감한 사안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홍씨는 지난 4월 창립한 괴산군 운하반대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홍씨는 특히 조천리 인근에 들어서는 괴산첨단산업단지 조성과 관련해 주민들과 함께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홍씨는 이에 대해 “첨단산업단지는 마을 바로 옆에 들어오는 것이고 주민들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사안이기 때문에 좌시할 수가 없다. 군 관계자들은 나 때문에 골치가 아프겠지만 나는 괴산군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괴산군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홍씨는 인터넷 귀농사이트를 통해 귀농지를 정했으며 블로그 아이디가 마리선녀인 아내와 노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홍씨의 아이디는 마리산인.  

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Nitobe Inazo]

Daum 블로그





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Nitobe Inazo]


1862. 8. 3 일본 모리오카[盛岡]~1933. 10. 15 캐나다 빅토리아.

일본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의 사상가·농정학자(農政學者)·교육자.

도쿄 영어학교를 거쳐 16세 때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에 들어가 W. 클라크로부터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때 일본의 대표적 그리스도교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1884~91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삿포로 농학교의 교수로서 농정학·농학사·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병으로 사직하고 요양을 겸해 1898~1901년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으며 그사이 영문으로 〈Bushido:The Spirit of Japan〉(〈무사도 武士道〉)를 집필해 1900년 미국에서 출판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후 타이완 총독부를 거쳐 1903년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의 교수에 취임하여 이때부터 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1906년에는 제1고등학교 교장이 되어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1913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전임교수로서 식민정책 강좌를 담당했다.

한편 1911년에는 최초의 미·일 교환교수로서 미국의 6개 대학에서 강의했다. 1920~26년에는 국제연맹 사무국 사무차장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귀국 후에는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회원,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태평양문제조사회(IPR) 이사장으로서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도쿄여자대학 초대 총장도 역임했다. 1933년 캐나다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일본대표부의 위원장으로 출석했으나, 회의가 끝난 후 병으로 쓰러져 빅토리아에서 객사했다.

그는 학자·교육자·국제인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고, 그의 활동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정신은 동서양의 융화에 대한 신념과 실천이었다. 그는 동서문화의 융합에서 서양문명의 일방적 수입이 아니라 일본문화를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영문저서를 다수 집필하여 일본문화를 널리 소개했다. 문하에서 학계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정계의 마에다 다몬[前田多聞] 등 일본의 지도적 인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농업본론 農業本論〉(1898)·〈수양 修養〉(1911) 등을 비롯한 많은 저서는 〈니토베 이나조 전집〉(16권, 1969~70)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