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30

Meaning of Life 시리즈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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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2003


[지성의 나무]<20·끝>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2003-09-01 
유년시절 병고를 이겨내고 한국유학에 관한 연구를 통해 생명외경 사상에 다가간 윤사순 교수는 정년퇴임 후 ‘강단철학’의 구속에서 벗어나 더욱 자신의 철학을 모색해 가고 있다. -이훈구기자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67)는 광복 후 한국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한국철학의 실상을 밝히고 한국 전통사상 연구를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세계 철학계에 소개해 왔다. 그는 한국철학을 발전시켜 갈 후학들을 양성하며 현대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 한국철학의 독자성과 보편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병마의 시련 딛고 철학의 세계로



그는 본래 자연과학을 더 좋아했다. 중학생 때는 생물반에서 친구들과 함께 곤충을 채집하고 동식물 관찰하기를 즐겼다. 선생님들은 자연과학에 소질이 있는 그에게 대학에 가서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경복고 1학년 때 갑자기 닥친 ‘다발성 신경염’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신경을 손상시켜 몸의 각 부위를 마비시키는 이 병으로 인해 쾌활하고 활동적이던 소년 윤사순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극도의 좌절감을 경험해야 했다. 그것은 “목숨을 끊고 싶어도 손발을 움직일 수 없어 포기해야만 했던 절망의 경험”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병상에 누워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소설책이나 당시에 발간되던 시사월간지 ‘사상계’를 읽으며 혼자서 세상 사는 길을 찾아 헤매야 했다. 다행히 3개월 만에 팔은 회복됐지만 다리가 회복되는 데는 2∼3년이 더 걸렸다. 그 절망적 상황을 딛고 병상에서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그의 생각은 이미 크게 변해 있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에 있던 천안농고에 편입해 공부하다가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그는 철학 이외에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극도로 침체돼 우울증에 가까운 상태로 몇 해를 지낸 그를 보아온 가족들은 철학과 진학을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상계’에서 보았던 고려대 철학과 교수들의 글을 떠올리며 1957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 무렵에는 실존주의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전후의 폐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에서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현실 속의 내 삶을 내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은 매력적인 말이었지만,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중 아프리카에서 인술(仁術)을 펼쳤던 슈바이처의 자서전을 읽다가 “인식론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낙관적이다”라는 구절을 보며 세계에 대한 슈바이처의 희망이 생명의 존귀함에 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존중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뒷날 유학(儒學)을 공부하면서 ‘생명외경(畏敬)’의 사상이 바로 슈바이처가 말한 형이상학의 의미였음을 체득하게 된다.







● 이상은교수 강의 들으며 동양철학 관심



대학 시절에 한창 유행하던 실존철학에 관한 책을 즐겨 읽기는 했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을 끌어준 것은 영국 출신의 철학자 A N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 관한 박희성 교수(고려대·영미철학)의 강의였다. 명쾌한 논리로 영미철학, 인식론, 논리학 등의 과목을 강의했던 박 교수는 철학의 명증성과 논리성을 가르쳐줬다. 또 손명현 교수(고려대·유럽철학)의 수업시간에 함께 읽었던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單子論·Monadologia) 등도 윤 교수가 철학하는 방법을 익히는 기반이 됐다. 특히 손 교수는 “철학논문이란 수학처럼 공리를 전제로 해서 연역적으로 증명해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동양철학 연구자 중 유난히 논리정연하고 명료한 글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윤 교수의 철학적 글쓰기는 이때부터 그 토대가 마련됐던 듯하다. 그는 “특히 손명현 선생님을 통해서 글이 수미일관하게 논리정연하고 정합성을 이뤄야 철학논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시절 이상은 교수의 중국철학 강의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이 교수는 “실존철학 운운하지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반성과 같은 내용은 동양고전에서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이야기”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철학과 교수들 사이에서도 “철학이라고 하면 서양철학이지 한국철학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한국철학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소장학자였던 고려대의 최동희, 신일철 교수 등이 선배학자인 이상은(고려대) 박종홍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사상’이란 반년간지(半年刊誌)를 내면서부터 한국철학에 관심을 갖는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나게 됐다.



윤 교수는 대학원에 진학해 이상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한국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교수도 관심만 가졌을 뿐 아직 한국철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 당시에는 박종홍 교수가 ‘한국사상’에 ‘한국철학사’를 연재하면서 철학 전공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사상을 이론적 체계를 갖춘 철학으로 연구하는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윤 교수는 현상윤 선생의 ‘조선유학사’와 ‘한국사상사’(‘아세아저널’에 연재)를 읽어 한국사상사의 맥락을 익히면서, 한국사상을 인식론적 기반을 가진 ‘철학’의 수준에서 연구하는 방법을 모색해 갔다.







● 한국철학의 특수성과 보편성



한국 전통철학의 원류를 무속사상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윤 교수는 “비판을 통한 원리추구의 정신을 내포한 철학이론을 찾으려면, 외래의 유교 불교 도가 사상이 한국인의 창의적 사고력에 의해 비판적으로 증감되고 변화된 부분 속에서, 그 독창적 ‘특수성’을 찾는 작업이 긴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사관의 시각에서 한국사상 부재론을 공공연히 역설했던 일본 관학자들의 주장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맞서 한국철학을 복원하는 일은 그 시대의 과제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도덕적 연관성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천명(天命)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지운(鄭之雲),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의 천명 연구에서 ‘심성(心性) 위주의 연구 경향’이란 한국철학의 특수성을 찾아냈다. 나아가 순수한 도덕적 본성이 어떻게 악한 감성으로 표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관한 문제를 논의한 ‘인성물성론(人性物性論)’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 성리학이 심성 연구의 측면에서 중국의 유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더욱 깊이 있게 발전해 왔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런 한국철학이 세계 철학계에서 의미 있는 철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특수성만 강조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윤 교수는 한국철학 속에서 세계 철학계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주제에 천착했다. 그는 1981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이황의 저작 중 도덕의 법칙과 실천의 문제에 관해 탐구한 논문 ‘존재와 당위에 관한 퇴계 이황의 일치시(一致視)’를 발표해 세계 철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윤 교수가 논점으로 삼은 이황의 이론은 바로 철학계에서 오래도록 논란이 돼 온 선험적 윤리설과 경험적 논리설을 종합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 후 ‘퇴계 이황의 성선관(性善觀)’, ‘인성(人性) 물성(物性)의 동이(同異) 논변에 대한 연구’ 등을 세계 학계에 발표하며 한국철학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 후 소장학자들을 이끌고 ‘사단칠정론’(1992), ‘인성물성론’(1994), ‘실학의 철학’(1996) 등의 공동연구서를 통해 한국철학의 쟁점들을 정리하면서 한국철학 연구의 흐름을 인물 중심에서 문제 중심으로 바꿔 나갔다. 특히 2001년 고려대 정년퇴임을 앞두고 편찬한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은 한국철학사상 연구를 위한 기본자료집으로 한국철학 연구를 확산 심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1989년 ‘신실학의 지평’이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유학의 현대적 재해석과 활용을 주장했던 윤 교수는 이제 ‘강단철학’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철학을 모색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한국철학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밝힘으로써 한국철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이제 보편성을 찾는 방향으로 한국철학 연구의 중심이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철학이 더 보편적 가치를 갖고 현대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 죽음을 마주했던 절망감, 슈바이처의 생명존중 사상 등을 기억하는 그는 최근 ‘주역(周易)’을 비롯한 동양철학 저변에 깔려 있는 생명사상을 통해 새로운 그의 철학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나와 타인-자연이 조화이룰때 이상적 삶 ▼



인간에게 자기 발견으로부터 제기되는 첫 철학적 의문은 ‘나는 어떤 존재(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과거와 현재의 인간이 아닌 미래의 인간이라고 해서 이 의문이 없어지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의식 작용이 자기 분열적 자아의식으로서 작용하는 한 이 의문은 여전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의문에 대한 전통사상의 해답은 미래의 사상을 여는 데에도 일조(一助)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전통사상의 해답은 ‘인간인 나는 유한한 존재이고, 유한한 기간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타인과는 화해로운 질서를 유지하고, 나아가 자연과도 조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컨대 윤리적 도덕적 질서를 지키고 자연과의 조화를 기하는 태도가 이상적 인간 생활이라는 말이다.



‘신실학 사상론’ 중에서



지성의 나무
<19>뚝심과 정열로 민족사 복원 신용하 교수
<18>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7>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對談 김충렬(연세대 명예교수) ·윤사순(고려대 철학과) : 월간조선 2001

對談 김충렬(연세대 명예교수) ·윤사순(고려대 철학과) : 월간조선


08 2001 MAGAZINE

對談 김충렬(연세대 명예교수) ·윤사순(고려대 철학과)

탄생 500주년 맞은 朝鮮유학의 巨峯 李退溪·曺南冥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慶北의 退溪는 誠으로, 慶南의 南冥은 義로써 선비정신을 완성했고 그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칼을 들고 나서 나라를 구했다


金 忠 烈 교수
1931년 강원도 원주 출생. 대만大 철학과 졸업. 중화민국문화大 철학박사·同대학 전임강사, 경북大·계명大·고려大·대만大 교수, 고려大 대학원장.

尹 絲 淳 교수
1936년 충남 홍성 출생. 고려大 철학과 졸업. 同대학 동양철학박사. 同대학 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孔子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사회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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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世 지향 종교만으론 오늘의 문제 해결 어렵다


사회 南冥 曺植(남명 조식)과 退溪 李滉(퇴계 이황)은 朝鮮儒學(조선유학)의 거대한 두 봉우리였습니다. 退溪와 南冥은 동갑(1501년生)으로 같은 영남 출신이었고,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死後에 모두 영의정으로 추존된 인물입니다. 금년은 마침 두 대학자의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이제 와서 500년 전의 性理學者 退溪와 南冥을 왜 거론해야 하는지로부터 말머리를 풀어갔으면 좋겠습니다.

金忠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나 불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儒敎 또는 儒學은 사실상 작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교는 천년의 세월에 걸쳐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지도역량인데, 그것을 왜 팽개쳐 둬야만 하는가, 사회발전에 쓸모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안들 가운데 불교나 기독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가 現世와 관련한 인간의 문제입니다. 기독교나 불교는 각각 來世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만큼 現世를 부차적으로 봅니다. 초월세계로 가는 종교만으론 인간세계의 많은 갈등과 부작용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회 儒敎는 종교라기보다는 現世의 문제를 인간 중심으로 해결해 나가는 사상체계죠.

金忠烈 그러니 이제야말로 儒敎가 다시 일어나서 인간의 문제를 다뤄 나가는 데 유용하게 쓰여야 합니다. 東아시아 세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中庸(중용)의 문화를 지녀 왔는데, 오늘날 우리 교육을 보면 中庸을 깨뜨렸습니다. 너무 물질과 외형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까? 정신 수양, 인격 도야는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바른 心性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儒敎를 올바로 정립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사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선비像의 대표적 존재인 南冥에게서 얻을 교훈은 적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尹絲淳 현대는 사상적으로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의식 속에는 儒學的인 것이 많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외래사상에도 물론 좋은 것이 많겠지만, 어떤 것이 우리를 경쟁력 있게 하는 사상이냐는 차원에서 儒學은 再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는 우리 못지않게 외국 학자들도 退溪學(퇴계학)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상의 수출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남의 것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것을 놓치고 남이 우리의 것을 더 잘 아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開國 주체세력의 핵분열


사회 조선왕조는 排佛崇儒(배불숭유)를 國是(국시)로 삼은 체제였습니다. 신흥 사대부 계급이 朝鮮王朝 건국의 주체세력이었거든요. 南冥과 退溪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적 상황과 儒學의 변천과정을 짚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金忠烈 太祖 李成桂(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朝鮮王朝를 창업하자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두 갈래의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즉, 고려왕조에 의리를 지켜 새 왕조를 인정하지 않은 세력과 새 왕조의 건국에 참여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東아시아 세계에서는 새 왕조가 설 때 前 왕조로부터 禪讓(선양)을 받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朝鮮王朝의 창업은 고려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분이 약했습니다. 杜門洞(두문동) 72賢(현)이라 일컬어지는 고려왕조의 지식인들은 朝鮮王朝를 부정한 끝에 太祖의 아들 李芳遠(이방원)의 火攻(화공)을 받아 불에 타 죽는 사태까지 빚어졌습니다.

사회 고려왕조는 말기가 되면 이미 특권화된 소수 귀족과 불교세력에 의해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토지가 겸병되는 등 이미 사회통합력을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조선왕조 開國 당시 심한 저항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金忠烈 고려 말기에 도입된 性理學(성리학)은 의리를 매우 중시하는 학문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것은 중국의 漢族(한족)이 북방의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의 유목국가에게 잇달아 침탈과 수모를 당했던 北宋과 南宋 시대에 정립된 사상체계였습니다. 국가나 민족이 위태로울 때는 강력한 이념이 필요해지게 마련입니다. 性理學이 민족주의적, 역사주의적 색채가 강렬한 까닭입니다. 朱子가 집대성했다고 해서 朱子學(주자학)이라고 하지요. 그런 朱子學이 고려 말기에 도입되면서 節義(절의)를 중시하는 지식인들이 배양되었는데, 그런 지식인들이 朝鮮王朝에 저항한 것입니다.

尹絲淳 朝鮮王朝 개국 직후 주체세력들 사이에도 핵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결국 정안대군 李芳遠(이방원:후일의 태종)이 개국 제1의 공신이며 집권파인 鄭道傳(정도전)을 죽이는 王子의 亂으로 표출되었습니다. 臣權主義(신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鄭道傳이 王權主義(왕권주의)를 추구하던 李芳遠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李芳遠은 世子이며 이복동생인 芳碩(방석)을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그가 太宗입니다. 太宗은 인륜상의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신생 왕조의 기반을 다진 뒤 왕위를 世宗에게 물려주었습니다. 世宗代에 이르러 朝鮮王朝는 제도적·경제적 측면에서 안정을 찾고, 儒敎정치를 본궤도에 올렸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좌절


사회 그러나 世宗 이후가 문제였죠.


尹絲淳 世宗의 후계자인 文宗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나이 어린 端宗(단종)이 즉위했는데, 야심만만한 숙부 首陽大君(수양대군:후일의 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명분은 臣權을 꺾고 王室을 강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靖難功臣(정난공신)이 되어 勳舊派(훈구파)를 형성했습니다.

사회 그 바람에 朝鮮王朝의 정통성이 약화되었죠.

金忠烈 그 폐해는 폭군 燕山君(연산군)의 등장으로 터져 나오고 맙니다. 燕山君代에 일어난 戊午士禍(무오사화:1498)는 왜곡된 정치를 議政(의정) 중심으로 되돌려 놓으려던 士林派(사림파)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에 대해 王權과 勳舊派가 감행한 피의 숙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史」字를 넣어 史禍라고도 부릅니다. 그런 난세인 燕山君 7년 6월26일에 南冥, 11월25일에 退溪가 태어났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甲子士禍(갑자사화)가 또 일어나 선비들이 다시 한번 수난을 당했습니다.

사회 南冥과 退溪는 최악의 시기인 士禍期(사화기)에 탄생했군요. 두 분의 출신배경은 어떠합니까.

金忠烈 南冥의 家門은 고려 때 명문으로서 조선조 건국시기에 비협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 후 李成桂와 자웅을 겨룬 曺敏修(조민수)와 같은 昌寧曺氏(창녕조씨) 집안이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조선조 개국 이후엔 큰 벼슬이나 학자를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南冥의 탄생 후에야 아버지 曺彦亨(조언형)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숙부 曺彦卿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개국 후 1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미 기성체제가 굳어져 있었던 만큼 南冥의 집안이 현달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군수를 살았고, 삼촌은 吏曹佐郞(이조좌랑)을 지냈습니다.

尹絲淳 退溪의 집안은 아버지가 진사를 해서 시골에서 겨우 체면을 유지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여 退溪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성장했습니다. 兩班(양반) 가문이긴 했지만 6대 전에는 衙前(아전)을 지냈다고 합니다.


官學派가 평가절하되고 鄭夢周가 떠오른 배경


金忠烈 燕山君은 재위 18년 만에 일어난 中宗反正(중종반정)으로 폐위당했습니다. 즉위 초의 中宗은 反正功臣 집단의 위세에 휘둘려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습니다. 朴元宗(박원종) 등 反正功臣들이 차례로 사망한 뒤에야 中宗은 士林派의 영수인 趙光祖(조광조)를 기용하여 개혁정치를 시도합니다. 조광조는 儒敎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至治主義(지치주의)를 역설했습니다.

이 무렵에 이르면 선비사회에서 儒學의 道統에 관한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조선조 개국 이래 官學派(관학파)의 대표적 학자였던 陽村 權近(양촌 권근)의 文廟從祀(문묘종사)가 좌절되는 반면에 고려왕조의 충신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가 文廟(문묘:공자를 제향하는 사당)에 配享(배향)되었습니다.

尹絲淳 그것은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朝鮮儒學의 道統을 官學派의 대표인 陽村이 아닌 고려의 충신 圃隱으로 삼았던 것이니까요. 陽村의 손자가 바로 世祖의 靖亂功臣(정난공신)인 권람이었습니다. 세조의 오른팔 韓明澮(한명회)도 陽村의 제자였습니다. 선비들은 陽村의 사당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世祖의 癸酉靖亂(계유정난)도 평가절하된 것입니다. 그것이 大勢였습니다.

사회 太祖와 太宗 시대는 어떠했든 後代 왕으로선 圃隱과 같은 충신이 필요했겠지요. 그러나 道學政治(도학정치)를 추진했던 趙光祖의 士林派는 「趙光祖가 왕이 되려 한다」는 勳舊派의 모략과 급진 개혁에 염증을 낸 中宗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趙光祖 일파가 무더기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勳舊派가 다시 정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벼슬길에 나선 士林派에 결정타를 가한 이 사건이 中宗 14년(1519)의 己卯士禍(기묘사화)였습니다. 己卯士禍 당시 南冥과 退溪는 19세였습니다. 그때 두 분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金忠烈 南冥의 삼촌인 曺彦卿은 趙光祖와 함께 사약을 마시고 별세했고, 아버지 曺彦亨은 제주도로 좌천되었는데, 부임을 하지 않아 삭탈관직을 당했습니다. 당시 南冥은 經傳子史(경전자사)와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남아가 갖춰야 할 학문을 두루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스물에 生員試(생원시)와 進士試(진사시)에서 장원과 2등으로 각각 급제했습니다.

사회 南冥이 大科인 文科를 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金忠烈 文科에 한 번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사실, 己卯士禍 이후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갈 길을 山林으로 확정한 것입니다.


心經을 嚴父처럼 섬겼다


사회 그렇다면 굳이 進士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金忠烈 그 시절에는 生員·進士는 해놓아야 上疏(상소)를 하고 士類(사류)에도 끼어들 수 있었어요. 그러니 生員·進士試는 일종의 자격시험이에요. 그래서 당시 名門의 자제들은 부정이나 인맥이 개입되는 文科를 기피하면서도 生員이나 進士 자격만은 따놓으려고 했습니다.

尹絲淳 退溪는 南冥에 비해 좀 늦었습니다. 경상도 禮安(예안:지금의 安東)의 시골집에서 글공부를 하고 여가에 농사도 지어야 했습니다. 23세가 되어서야 서울로 올라와 成均館(성균관)에 입학했습니다. 27세 때 비로소 경상도 鄕海進士試(향해진사시)에 2위로 합격했고, 28세 때 서울서 進士會試(진사회시)에 급제했습니다.

文科에는 서너 번 낙방한 끝에 34세 되는 해 3월에 기어코 급제했습니다. 文科 급제 이후의 진급은 빨랐던 것 같습니다. 4월에 종9품 藝文館 檢閱(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뒤이어 承文院 副正字로 겸직발령을 받았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는 承文院 正字로 승격됨과 동시에 정8품인 著作을 거쳐 정7품인 務工郞博士(무공랑박사)로 영전했습니다. 한 해 동안 세 등급을 뛰어오를 정도의 빠른 승진이었습니다.

사회 그 이유가 뭘까요.

尹絲淳 실력을 인정받은 데다 워낙 성실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退溪는 주로 학자에게 적합한 弘文(홍문) 계통의 淸職(청직)을 역임했습니다.

사회 退溪와 南冥은 우리나라 性理學의 두 거봉인데 性理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尹絲淳 退溪는 成均館에 입학한 후에야 心經附註(심경부주) 한 권을 처음으로 얻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마음의 수양을 위하여 성현들의 심오하고 치밀한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心學(심학)에 관한 대표적인 저술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註가 모두 程子(정자)와 朱子 등 宋나라 학자들의 말을 기록한 어록으로 되어 난해했어요. 退溪는 문을 닫고 그 뜻을 캐고 사색하기를 여러 달이나 반복한 끝에 독파하게 됩니다. 退溪는 후일에 『心經을 얻어 읽고 나서 비로소 心學의 연원과 心法의 精微(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믿기를 神明과 같이 하며 이 책을 공경하기를 嚴父(엄부)와 같이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朱子全書도 성균관 儒學시절에 처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떨어진 士林의 기운을 응집시킨 중심인물


金忠烈 南冥은 25세 때 性理大典을 처음 보았다니까 그 무렵부터 性理學 연구에 뜻을 세운 것 같습니다. 시골에 살았지만, 비교적 유족하여 책을 많이 소장할 수 있었습니다. 南冥은 나이 서른에 처가가 있는 金海로 이사하여 18년 동안 머물면서 山海亭(산해정)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山海亭은 바로 南冥의 연구소였습니다. 여기에 成大谷, 李淸香堂, 李黃江, 申松溪 등 名流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로써 南冥은 己卯士禍 이후 떨어졌던 士林의 기운을 응집시키는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학문과 인격을 닦는 이외에 학생들도 가르쳤으니까 南冥으로서는 진정한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재력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입니다.

尹絲淳 南冥은 장가를 잘 들었던 것 같아요.

金忠烈 그렇지요. 南冥의 처가가 金海의 만석꾼이었습니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이 일어나 경제가 어려워지기 전까지 조선시대의 상속제도에선 남녀평등이었습니다. 南冥이 士林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경제력이란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 공부하는 방법에서도 退溪와 南冥은 대조적이지요.


尹絲淳 南冥은 性理學뿐만 아니라 老莊(노장)사상과 불교에서 병법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습니다. 반면 退溪는 性理學을 깊게 궁구했지요.

金忠烈 그렇다고 南冥의 학문이 넓지만 얕고, 退溪가 깊지만 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南冥은 新儒學에 관한 120家의 학문에 모두 천착했고, 退溪는 천문, 지리, 의학 등에 관해 심오하게 연구했습니다.

사회 退溪는 43세 때 벼슬이 成均館 司成(성균관 사성)에 올랐는데, 이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이 허락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尹絲淳 학문연구에 전념하는 것이 退溪의 염원이었습니다. 그런 염원은 明宗 즉위년(1545)에 일어난 乙巳士禍(을사사화)로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士林들이 또다시 많은 피를 흘렸는데, 退溪의 중형 이해도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던 도중 장독으로 죽었습니다. 退溪도 삭탈관직을 당했는데, 곧 복직되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사직하려 했지만 번번이 明宗이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외직을 희망하여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지냈습니다. 文科를 한 관리는 임금의 허락이 없으면 벼슬을 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52세 때 외직에서 돌아와 홍문관 교리, 成均館 大司成을 역임했습니다.

사회 그 무렵 南冥은 어떠했습니까.


왕의 잘못을 견제하는 것이 지성의 사명



金忠烈 48세 때 南冥은 18년 간 머물던 金海를 떠나 고향인 陜川 兎洞(합천 토동)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士林에선 그를 영수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에서는 士林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南冥을 벼슬의 길로 나오도록 종용했지만, 南冥은 불응했습니다.

사회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金忠烈 왕이 벼슬을 내려도 달려가지 않는 선비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南冥의 생각이었습니다. 士林을 규합, 왕권이나 조정의 秕政(비정)을 견제하는 것이 민생을 위한 지성의 사명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사회 退溪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무렵에 南冥은 明宗에게 그 유명한 丹城疏(단성소)를 올립니다. 丹城疏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金忠烈 관리의 행패, 왜적의 출몰, 민생의 악화, 그리고 文定大妃(문정대비)의 정사 간섭과 그녀의 동생 尹元衡(윤원형) 등 외척의 발호를 지적했습니다. 또한 외적이 침략해오면 나라가 土崩瓦解(토붕와해: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짐, 즉 亡國)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왕이 왕 노릇을 하라고 충언을 했던 것입니다.

사회 상소문 중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慈殿(자전:문정대비)은 밖의 소식이 막힌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先王(선왕)의 한 나이 어린 고아일 뿐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이에 대한 退溪의 코멘트가 재미있습니다.

『南冥의 상소는 참으로 今世에 얻기 어려운 바이나 말이 지나쳐서 비방에 가까우니 마땅히 임금께서 보고 노하시겠다』

아니나 다를까 明宗이 발끈하여 南冥을 잡아 올리라고 했습니다.

金忠烈 그것이 재야를 고수했던 山林儒(산림유)와 관직에 나갔던 廟堂儒(묘당유)의 차이점입니다. 南冥을 처벌하려 했던 明宗의 뜻은 경연관 등의 반발에 부딪쳐 꺾이고 맙니다. 明宗實錄에 의하면 경영시독관 鄭宗榮(정종영)은 『曺植의 疏(소)가 이토록 直截(직절)함은 이 나라 선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오니 또한 나라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직언했습니다. 이에 明宗도 자신의 경솔함을 시인하고 治罪(치죄)의 命(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사회 대통령이 한 말씀하면 모두 한 목소리가 되는 오늘날의 정부 여당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군요.


金忠烈 그런 면에서는 요즘이 옛날보다 훨씬 못합니다. 조선왕조 때 言官의 말은 면책특권이 있었습니다.


理性이 感性을 다스려야 사회가 발전한다


사회 退溪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尹絲淳 退溪는 朱子學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性理學으로 대성시켜 놓았지요. 朱子學의 심오한 理氣(이기), 心性(심성)의 원리를 철저히 규명하여 朱子철학의 체계를 뚜렷하게 세운 것이지요. 退溪의 저서들인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 心經講解(심경강해) 같은 책이 바로 그러한 노작들입니다.

사회 退溪의 理氣二元論은 무엇입니까.

尹絲淳 거칠게 말하면 理란 理性(이성)을 말하는 것이고, 氣란 感性(감성)을 뜻하는 것이죠. 退溪學에 의하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理性과 感性을 함께 타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理性도 무시할 수 없고 感性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理性이 感性을 다스려야만 그 사회가 무법적·퇴폐적으로 흐르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理帥氣卒論(이수기졸론)이라 부르기도 하죠.

사회 退溪는 그의 나이 57세 때 高峯 奇大升(고봉 기대승)과 四端七情(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합니다. 그후 8년 간 계속되는 그 논쟁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尹絲淳 高峯은 退溪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理와 氣는 관념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결코 理·氣를 구분할 수 없다는 理氣共發論(이기공발론)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한 退溪의 四端七情說은 이렇습니다. 四端인 仁(인)·義(의)·禮(예)·智(지)는 모두 理에서 나온다, 반면에 七情은 喜(희)·怒(노)·哀(애)·懼(구)·愛(애)·惡(오)·慾(욕)으로 氣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理와 氣를 겸하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理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氣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러니 인간은 善한 理로써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 오늘날을 흔히 感性의 시대라고 합니다. 感性의 시대에선 高峯의 理氣共發說이 오히려 더 어필하는 것 아닙니까.

金忠烈 栗谷 李珥도 理氣共發說을 뒷받침하여 理氣二元論的 一元論을 주장했습니다. 退溪의 理氣二元論은 대학자의 理想論이고, 栗谷의 理氣二元論的 一元論은 국정당무자의 현실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嶺南學派와 中畿(畿湖)學派가 갈려 200년 간 논쟁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회 栗谷은 退溪보다 35세 연하입니다. 23세의 栗谷이 58세의 退溪를 陶山書堂(도산서당)으로 찾아가서 큰 절을 올리고 사흘을 묵으면서 배우고 간 일이 있습니다. 그후에도 退溪에게 편지를 올려 학문상의 의문을 질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栗谷을 退溪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尹絲淳 栗谷의 나이가 그때 23세라지만, 陶山書堂을 방문하기 직전의 진사시에서 天道策(천도책)이란 명답안을 써서 장원 급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退溪는 栗谷을 소장학자로서 매우 예우했습니다. 栗谷이 나중에 西人의 宗匠(종장)으로 추대되었던 만큼 사제관계라고 말하기는 어색합니다.


實踐儒學의 實體는 理가 아니라 心이다


사회 南冥은 61세가 되자 지리산 天王峯(천왕봉)을 바라보는 德山(지금의 山淸郡 덕산면)에 일생의 마지막 道場인 山天齋(산천재)를 짓고 그동안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정신·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英才들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山天齋의 南冥과 陶山書堂의 退溪는 평생 만난 일은 없지만 편지를 교환하면서 서로 상대를 泰山北斗(태산북두)라 높이기도 했지만 라이벌 의식도 가졌던 것 같습니다. 四端七情 논쟁에 대한 南冥의 시각은 어떠했습니까.


金忠烈 4대 士禍의 참화가 수습되지 않았고 三浦倭變(삼포왜변) 등 외환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四端七情 논쟁 같은 것은 不要不急(불요불급)한 사변적인 논쟁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모든 행위를 명령하는 것은 心이며, 心을 말하지 않고 理發(이발)이니 氣發(기발)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 退溪가 南冥에 대해 『中庸의 道를 기대하기 어렵고 老莊에 물들은 병통이 있다』고 비난하자, 南冥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虛名(허명)을 훔친다』고 응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南冥學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金忠烈 南冥 性理學의 특징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학문입니다. 이론 탐구를 중시할 때 그 학문 추구의 경향은 사변적인 形而上學(형이상학)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實踐躬行(실천궁행)을 宗旨(종지)로 삼을 때의 학문 추구 경향은 日用事物과 나누거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道와 下學上達(하학상달)의 工夫에 치중하게 됩니다. 때문에 實踐儒學(실천유학)의 實體(실체)는 理가 아니라 心이라는 것입니다. 南冥은 宋代 성리학, 아니 전체 유학의 교리와 宗旨를 敬(경)과 義(의), 두 글자로 집약하고, 그것을 至上의 標識(표지)로 내걸었던 것입니다.

사회 南冥은 평소 그가 차고 다니던 劍(검)에도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銘文(명문)을 새겼다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金忠烈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敬이고, 敬의 外的 發現(외적 발현)이 義라는 뜻입니다.

사회 敬을 바탕으로 한 義를 중시한 南冥學은 知行合一(지행합일)을 강조한 陽明學(양명학)과 상통하는 면이 있군요.

金忠烈 南冥은 朱子學 일변도가 아닌 儒學 전반을 會通(회통)한 학자였는데, 그것 때문에 朱子學만을 정통으로 믿은 당시 학계에서 불순하다는 비판까지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 그렇다면 退溪學의 요체를 글자 두 개로 집약한다면 무엇입니까.

尹絲淳 敬과 誠이라고 할 수 있겠죠.


知性人이 가는 두 갈래의 길


사회 明宗의 부름에 응하지 않던 退溪가 다시 출사하여 공조판서(66세)를 맡았고, 宣祖 즉위 후에는 우찬성(68세), 홍문관과 예문관의 兩館 대제학을 역임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尹絲淳 학문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임금의 거듭된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정세도 바뀌었습니다. 明宗 20년(1565)에 文定大妃가 죽은 직후 尹元衡이도 숙청되는 換局(환국)이 이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벼슬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서울에는 며칠만 머물다가 낙향했습니다.

金忠烈 그 무렵엔 南冥도 布衣(포의)로 明宗을 독대하여 治國의 방안을 진언했습니다. 그럼에도 南冥은 明宗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山林을 고수한 南冥에 대해 일부에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선비의 본령은 修己(수기: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일)를 한 뒤에 治人(치인:국정참여)인데, 南冥은 治人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金忠烈 이에 대해 南冥은 『嚴光(엄광)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嚴光은 後漢(후한)을 세운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의 옛 친구였는데, 창업 후의 光武帝가 아무리 벼슬을 하라고 권유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낚시질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南冥의 말은 자신이 嚴光처럼 세상을 등진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국정 참여도 修己를 한 선비의 할 바이지만, 山林에 남아서 국정을 비판하는 일도 선비가 할 일이라는 얘깁니다.

尹絲淳 세상에서 잘못 알고 있었던 거죠. 山林에 있다고 해서 은둔이 아닙니다. 退溪가 經筵(경연)에 나가 임금에게 帝王學을 가르친 것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국정참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金忠烈 退溪가 자주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던 것도 중요한 정치행위이고, 적극적인 저항입니다. 그것이 임금에 대한 선비사회의 평판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지요.


土崩瓦解의 위기를 예언


사회 明宗은 재위 22년 만인 1567년에 32세의 나이로 별세하고 16세의 宣祖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宣祖에 대한 退溪의 시각은 어떠했습니까.


尹絲淳 退溪는 王師(왕사)라는 의식을 가지고 어린 宣祖에게 戊辰六條疏(무진6조소)를 올리고 聖學十圖를 바쳤습니다(聖學十圖는 儒賢들의 聖學에 대한 圖說을 모아 해설을 가한 책). 宣祖는 聖學十圖를 병풍으로 만들어 놓고 익혔습니다. 退溪는 그의 나이 69세 때인 宣祖 3년(1569) 3월에 최후의 낙향을 하는데, 宣祖는 좋은 말을 남기고 갈 것을 청합니다. 이에 退溪는 다음과 같이 진언합니다.

『지금은 정치가 잘 되어 태평한 세상 같으나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외적의 침범이 염려되는 터이요, 백성들이 고달파하는데, 나라의 창고는 비어 있으니 장래가 근심되거니와 졸연히 사변이라도 일어나면 土崩瓦解(토붕와해)될 징조가 없지 않으니 임금으로서 백성과 마음을 같이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회 土崩瓦解라는 말은 南冥의 丹城疏에도 나왔던 문구입니다. 南冥과 退溪, 두 분 모두 先見之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栗谷도 이보다 10여 년 뒤에 10만 養兵論(양병론)을 주장합니다.

尹絲淳 退溪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에 부정자와 정자로 일했고, 35세 때는 호송관으로 임명되어 포로가 된 왜구를 동래까지 호송하여 귀국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저런 관계로 東아시아 세계의 정세 변화에 밝았던 것 같습니다.

사회 南冥도 宣祖에 대해서는 기대를 좀 가지지 않았습니까.

金忠烈 즉위 초부터 宣祖가 南冥을 거듭 불렀지만, 南冥은 사양했습니다. 南冥의 나이 이미 칠순이었습니다. 벼슬에 나아갔던 사람도 물러가야 할 나이였던 것입니다. 南冥은 宣祖가 좋은 군주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南冥의 걱정은 宣祖의 나이가 어린 데다 정통성이 미약한 데 있었습니다. 宣祖는 明宗의 후사가 없어 방계에서 들어온 왕이었지요. 그래서 南冥은 宣祖의 帝王學을 북돋우기 위해 마지막 疏를 올립니다.

그 핵심 요지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남에게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임금 자신이 善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 그 要本(요본)이 있다』는 것인데, 南冥의 상소문들 중 가장 요긴적절한 헌책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宣祖는 이 상소문을 退溪의 聖學十圖처럼 병풍을 만들어 놓고 읽었습니다.


士林 優待정책의 효과


사회 宣祖는 4대 士禍에 희생된 士林을 복권시키고 士林을 중용하는 등 士林 우대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습니까.


金忠烈 退溪, 南冥의 諫言(간언)을 명심했던 거죠. 이건 壬辰倭亂(1592)이 일어나고 宣祖가 압록강변의 의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의 얘깁니다. 피난조정이 渡江 망명파와 고수 항전파로 나눠져 宣祖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三南(삼남)에서 선비들이 앞장선 의병이 들고일어나 왜적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의주에 전혀지자 宣祖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내가 그동안 士林을 우대했는데, 이제 그 덕을 본다』고 말하면서 항전을 결단했습니다. 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각 지역의 선비들이 일어나 의병을 규합함으로써 민심이탈을 막은 것입니다. 壬辰倭亂은 士林이 주도한 의병의 활약이 없었다면 극복하기 어려웠던 전쟁이었습니다.

사회 退溪는 69세에 낙향하여 이듬해(1570) 12월에 별세했습니다. 별세하기 직전 문병 온 제자들에게 비명에 「退陶晩隱眞城李公」(퇴도만은진성이공)이라고 쓰도록 유언했습니다. 『늦게 도산으로 물러난 隱逸(은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南冥은 退溪의 出處(출처)와 관련해서 「退陶晩隱」이란 문구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합니다.

金忠烈 그건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얘긴데, 南冥文集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그 얘기를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사회 南冥도 宣祖 5년(1572) 2월에 72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退溪보다 1년 남짓 더 살았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南冥은 死後 칭호를 處士라고 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南冥은 山林處士의 모델로 추앙받는 분인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忠烈 南冥은 왕조시대에 국정을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山林, 즉 재야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南冥의 노력에 의해 그의 死後에 벼슬아치보다 山林處士를 우대하는 士尊官卑(사존관비)의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벼슬도 종전과는 달리 처음부터 6품관을 제수했고, 정승까지 승진시켰습니다. 사건이 일어나 조정 내부에서 그 처리를 둘러싸고 견해가 엇갈릴 때는 山林處士를 司憲府(사헌부)의 핵심 요직인 掌令(장령:종4품)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를 隱逸掌令(은일장령)이라 불렀지요.

隱逸掌令은 是是非非(시시비비)를 가린 뒤 곧장 山林으로 돌아갔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오늘날의 特別檢事(특별검사)였어요. 朝鮮王朝의 관료시스템은 위계보다 직책을 중시하는 職本主義(직본주의)였습니다. 隱逸掌令에 걸려들면 영의정도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조선왕조가 500년 넘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정계 주도권 잡은 士林의 분열


사회 退溪와 南冥의 死後에 士林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그러다 士林은 東人·西人으로 분열했습니다. 退溪와 南冥의 제자들인 嶺南士林은 東人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東人의 영수 金孝元은 南冥의 제자였지요. 栗谷이 조정에 나섰으나 東人으로부터 西人에 기울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壬辰倭亂 9년 전에 栗谷은 10만 養兵論(양병론)을 주장했지만, 東人이 非현실적이라고 반대했습니다. 栗谷은 西崖(서애:柳成龍의 호)와 같은 인물까지 반대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栗谷의 10만 養兵論은 허구라는 주장도 있더군요
.

尹絲淳 그런 설이 있어 朝鮮王朝實錄을 검토했더니 栗谷의 10만 양병론과 관련한 기사가 여러 군데에 걸쳐 기록되어 있더군요. 朝鮮王朝實錄엔 정파의 이해관계가 얽혀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西崖도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9년 전에 별세한 栗谷을 「眞人」(진인)이라고 추모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栗谷의 10만 養兵論은 사실로 보입니다.

사회 東人은 栗谷 사후인 宣祖 18년(1585)경부터 집권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壬辰倭亂 3년 전에 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東人이 된서리를 맞게 되죠.

金忠烈 그 때문에 己丑獄事(기축옥사)가 일어나는데, 이 獄事를 다루는 委官(위관)이 西人의 강경파 宋江 鄭澈(송강 정철)이었습니다. 당시 崔永慶(최영경), 李潑(이발), 鄭介淸(정개청) 등이 억울하게 연루자로 몰려 매맞아 죽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南冥 계열의 인물들이었습니다. 宋江은 東人, 특히 南冥 계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宋江이 世子를 세우는 일로 宣祖의 노여움을 사고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宋江의 처벌 문제를 놓고 東人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집니다. 온건파는 柳成龍 등 退溪 계열로 南人이 되었고, 강경파는 李山海· 鄭仁弘 등 南冥 계열로 北人이 되었습니다.


國亂 극복 위해 PK와 TK가 똘똘 뭉쳐


사회 鄭汝立과 南冥 계열과는 사상적 공감대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金忠烈 鄭汝立은 원래 栗谷의 제자였는데, 栗谷 사후에 東人으로 돌아 李潑 등과 친교가 있었습니다. 南冥學에는 孟子(맹자)의 放伐論(방벌론:德을 잃은 임금을 내쳐도 거리낄 바 없다는 사상)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鄭汝立도 『천하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사회 개국 후 200년에 이른 조선왕조는 更張(경장: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이미 도달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倭國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지요. 그래서 倭國의 허실을 살피기 위해 宣祖 23년에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귀국보고가 당색에 따라 달랐습니다. 정사 黃允吉(황윤길:西人)은 倭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했고, 부사 金誠一(김성일:東人)은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 했죠.

金忠烈 거기서 주목할 점은 서장관 許筬(허성)의 보고입니다. 許筬은 東人이면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東人 중에서도 北人 계열이었습니다.

사회 그러나 南人 계열인 柳成龍도 위기의식을 느껴 壬辰倭亂 직전에 權慄(권율)과 李舜臣(이순신) 장군을 기용하도록 추천했습니다. 조정에서도 嶺南 지역의 성곽을 보수하는 등 왜군의 침입에 대비를 했습니다. 문제는 전국시대를 거친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하여 초전에 너무 날카로운 데 있었던 같습니다.

金忠烈 壬辰倭亂은 우리가 비록 초전에서는 대패했지만, 그후 잘 싸워 이긴 전쟁입니다. 柳成龍은 도체찰사로서 全局을 지휘했는데, 그의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金誠一은 경상우도(지금의 경남) 관찰사 겸 초유사로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활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경상좌도(지금의 경북) 관찰사로 전보발령을 받은 그를 경상우도 사람들이 유임운동을 벌여 기어이 유임시키기도 했습니다. 국란을 맞아 退溪 계열과 南冥 계열, 오늘날로 치면 TK와 PK가 똘똘 뭉친 것입니다.


壬辰倭亂 때 義兵의 중심은 南冥 제자들


尹絲淳 壬辰倭亂을 극복하는 데 있어 南冥 제자들의 활약은 발군이었습니다. 南冥 문하에서 의병장이 70명이나 나왔으니 그 점에서는 退溪 문하를 압도했지요.

사회 南冥 문하의 의병장들이 잘 싸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忠烈 南冥학파는 義를 중시했는 데다 병법을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郭再祐(곽재우)는 매복유인작전, 疑兵(의병)작전을 구사하여 정암진 전투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鄭仁弘은 합천에서 일어나 왜적을 각개격파하여 嶺南의병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南冥 문하 의병장들에 의해 평양까지 진출한 왜적의 보급로가 끊어졌습니다. 바다에서는 李舜臣 장군이 제해권을 장악, 왜적 水軍의 북상을 저지해버렸습니다. 그것이 평양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西人 쪽 의병장도 봉기했지만, 병법에 약해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尹絲淳 왜군이 가장 두려워한 홍의장군 郭再祐는 南冥의 외손서였습니다.

金忠烈 의병을 일으키려면 재력도 있어야 했습니다. 郭再祐는 의령지방의 부호였습니다.

尹絲淳 退溪학파의 경상좌도보다 南冥학파의 경상우도가 경제력이 훨씬 나았어요. 비옥한 땅이 많았거든요.

사회 7년 전쟁은 왜군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싸움이 끝나면 柳成龍이 실각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金忠烈 원래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운 신하는 평화시대를 맞으면 烹(팽)되지 않습니까. 도체찰사로서 柳成龍의 전쟁지도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柳成龍은 왜국과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宣祖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鄭仁弘·李爾瞻(이이첨) 등 北人들은 主和誤國(주화오국)을 했다고 탄핵했습니다. 그런 판에 柳成龍은 변무사로 明나라에 다녀오라는 왕명을 받고 노모의 병환을 내세워 거절했습니다.

宣祖 조정이 明나라에 변무사를 보내야 했던 것은 조선에 나와 있던 明의 經略(경략) 丁應泰(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明을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를 하여 이를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柳成龍은 鄭仁弘 등 北人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했습니다. 2년 후 柳成龍은 복관은 했지만, 벼슬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南人과 北人이 부딪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北人정권, 大北과 小北으로 분열


사회 壬辰倭亂이 끝난 후 北人정권이 들어서지요.


尹絲淳 국난 극복에 대한 論功行賞(논공행상)으로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집권 北人은 곧 光海君을 지지하는 大北과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지지하는 小北으로 분열합니다.

金忠烈 그건 宣祖가 노회해졌기 때문입니다. 光海君은 壬辰倭亂 때 몽진중인 宣祖에 의해 평양에서 世子로 세워졌습니다. 光海君은 分朝(분조)를 이끌고 전라도까지 남행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 등 혁혁한 공로를 세워 衆望(중망)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宣祖의 마음은 光海君에서 점차 멀어져갔습니다. 젊은 仁穆王妃(인목왕비)에 새 장가를 들어 그 사이에 永昌大君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宣祖는 강보에 싸인 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小北의 柳永慶(유영경)을 영의정으로 기용했습니다.

이에 鄭仁弘은 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귀양을 떠났지요. 그런데 마침 宣祖가 재위 41년(1607)에 갑자기 별세하고 光海君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귀양 가던 도중에 鄭仁弘은 서울로 되돌아와 대사헌으로 복직했습니다. 大北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尹絲淳 大北정권은 柳永慶과 永昌大君의 외조부 金梯南(김제남)을 제거했습니다. 永昌大君까지 군불을 세게 넣은 방안에 가두어 쪄죽였습니다. 비정하고 참혹한 일이었지만, 왕가에서는 형제간의 살육도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先王의 적자 永昌大君은 서자인 光海君에게는 왕위를 위협하는 잠재적 라이벌이었습니다. 儒敎국가에서 光海君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책은 永昌大君의 생모인 仁穆大妃의 존호를 깎고 西宮(지금의 덕수궁)에 유폐한 것이었습니다. 光海君은 仁穆大妃가 연하의 계모이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의리가 있었던 만큼 綱常(강상)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사회 光海君 2년에 南人과 北人이 文廟從祀 문제로 다시 한 번 격돌하게 되지요.


南冥學派와 退溪學派의 격돌



尹絲淳 그해 6월1일에 金宏弼(김굉필), 鄭汝昌(정여창), 趙光祖, 李彦迪(이언적), 李滉 등 士林5賢에 대한 문묘 종사가 결정되었습니다. 儒敎국가에서 孔子를 모시는 文廟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학파나 가문에겐 최대의 영광이었습니다. 鄭仁弘으로선 참을 수 없었습니다. 晦齋(회재:이언적)와 退溪에 비해 南冥에 대한 예우가 형편이 없는 데 불만이었던 겁니다. 鄭仁弘은 이듬해 4월 晦退辨斥疏(회퇴변척소)를 올렸습니다. 晦齋와 退溪를 文廟에 배향할 수 없다는 상소였습니다.

金忠烈 萊菴(내암:鄭仁弘)이 돌출행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대번에 성균관 유생 500여 명이 들고 일어나 鄭仁弘의 이름을 儒籍(유적:선비들의 인명록)에서 삭제해 버립니다. 鄭仁弘은 이에 맞서 서울에다 南冥을 모시는 백운동서원을 크게 짓고 南冥의 문묘종사운동도 벌입니다. 그리고 光海君 7년에는 南冥이 死後 43년 만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사회 그러다 光海君 15년(1614)에 仁祖反正(인조반정)이 일어나 光海君이 폐위당하고 大北정권이 몰락했습니다.


반정에 성공한 西人정권은 광해군이 형제를 살해하고 인목대비의 존호를 깎은 데다 明나라를 배신했다는 데 쿠데타의 명분을 두었습니다. 北人정권의 핵심인물인 鄭仁弘과 李爾瞻은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金忠烈 鄭仁弘으로선 억울합니다. 鄭仁弘은 永昌大君을 죽이는 일이나 仁穆大妃를 폐비하는 일에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鄭仁弘은 北人정권의 영의정으로 있었지만, 光海君 재위 15년 동안 거의 합천 가야산으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大北정권의 실력자는 李爾瞻(이이첨)이었습니다. 鄭仁弘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가 영의정 벼슬을 지닌 채 낙향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서울과 가야산 사이로 驛馬가 달려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李爾瞻은 鄭仁弘의 뜻을 왜곡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反正 직후 88세의 鄭仁弘은 서울로 끌려와 국문도 받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변명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것입니다.


침략 자초한 西人정권의 尊明사상


尹絲淳 光海君의 등거리 외교는 국가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방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後金(후금:나중에 국호를 淸으로 고침)과 漢族국가 明의 쟁패전에 중립을 지켰던 光海君의 북방정책은 현명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仁祖反正은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공연한 尊明(존명)사상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을 불러들인 겁니다.

金忠烈 仁祖反正으로 집권한 西人정권은 丙子胡亂 때 그 약점이 드러났습니다. 壬辰倭亂 때처럼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西人정권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였습니다.

사회 어떻든 仁祖反正 이후 大北은 몰락했고, 그 중에 南人으로 편입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南人은 正祖와 肅宗 때 잠시 집권하기도 했지만, 정계의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도 嶺南 南人이 아닌 畿湖 南人이었습니다. 집권 西人은 老論과 少論으로 분열하는데, 정계의 주류는 老論이 차지하게 됩니다. 南冥, 退溪, 栗谷 등 先賢들이 각 당파에서 떠받드는 宗匠으로 회자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尹絲淳 退溪와 南冥은 黨爭과는 무관한 분입니다. 朋黨(붕당)정치에 따른 黨爭도 나쁘게 볼 것이 아닙니다. 朋黨정치는 제도화되지만 않았을 뿐 오늘날의 정당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를 병들게 한 것은 黨爭이 아니라 純祖 이후에 등장한 世道정치였습니다. 그야 어떻든 退溪를 받드는 嶺南학파는 우리나라 학맥의 本山을 이루었습니다.


학맥의 本山, 조선조 제1의 교육가


사회 退溪學은 도쿠가와(德川)시대의 일본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죠.


尹絲淳 天命圖說(천명도설), 自省錄(자성록),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 등 退溪의 저서가 도쿠가와 시절의 일본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碩學(석학)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오쓰카 다이야(大塚退野) 등은 퇴계학을 강론했으며, 퇴계의 저서를 「神明과 같이 존숭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梁啓超(양계초:淸末의 개혁가)도 孔丘(공구=孔子)를 孔夫子라 하듯 退溪를 李夫子(이부자)라고 높였습니다.

金忠烈 南冥의 공적은 뭐니뭐니 해도 朝鮮 선비정신을 확립하여 그것을 후세에 남긴 것입니다. 천하의 英才들을 모아 義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양성한 것입니다. 그것이 미증유 국란인 壬辰倭亂에서 의병 활동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南冥이 「조선조 제일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되는 까닭입니다.

사회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짬] 시집 낸 원로 철학자 윤사순 교수 : 한겨레

“팔순 넘어 ‘철학노트’에 ‘컬러사진’ 한 장 넣듯 시를 쓰죠” : 학술 : 문화 : 뉴스 : 한겨레


“팔순 넘어 ‘철학노트’에 ‘컬러사진’ 한 장 넣듯 시를 쓰죠”

등록 :2019-09-17

[짬] 시집 낸 원로 철학자 윤사순 교수



윤사순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만 선임기자“자기 도취죠.”

한국철학계 원로이자 학술원 회원인 윤사순(83) 고려대 명예교수에게 ‘노년의 시 창작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 뭐냐’고 묻자 한 말이다. “남이 볼 때 별것도 아닌데, 내가 비유해 내놓은 말이나 어법에서 창조의 기쁨을 느껴요. 철학 논문도 칭찬받을 정도로 잘 쓰면 학문적 창조의 기쁨이 있지만 시간도 많이 걸리고 반응도 느리죠.”

2001년 고려대 퇴임 전까지 시 한 편 쓴 일 없다는 윤 교수는 작년과 올해 잇달아 <길벗> <선비>란 이름의 시집 두 권을 냈다. 그는 81살에 시작한 시쓰기 체험의 소중함을 두고 “평생 지녀 오던 다 낡은 ‘흑백의 철학노트’ 갈피에 분명 ‘오색이 화사한 컬러사진’ 한 장을 끼워 넣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역 근처 카페에서 윤 교수를 만났다.

“어려서부터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퇴임 뒤) 강의도 안 하고 다급하게 쓰고 싶은 책은 다 냈으니 여가를 이용해 옛날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죠.”


그가 쓴 시들엔 60년 가까이 세상의 이치를 파고든 철학자의 깊은 사유가 스며있다. ‘사람사이-인간’이란 시에선 인간의 두 번째 한자인 사이 간(間)을 두고 “사이란/ 썩 가깝게도 썩 멀리 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거지만 늘/ 산울림 되어 오는 내 본래의 그림자인 듯”이라며, 사람을 인간이라고 명명한 뜻을 새겼다. ‘꿈의 형이상학’에서는 일시의 유한과 영원의 무한이라는 양립불능한 이분법을 뛰어넘을 길을 ‘꿈꾸는 힘’의 생명력에서 찾았다.



윤 교수가 작년과 올해 펴낸 시집들.자연 풍경이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유학의 인본주의적 가치나 자연과 사람은 하나라는 사유 아래 따듯하게 끌어안는 시들도 감동을 준다. 그는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세상을 뜬 국밥집 할머니를 두고 이렇게 썼다. “국밥 같던 분/ 평생의 짐 가난 내려놓고/ 무쇠 솥 위로 오르는 김처럼/ 스러지듯 하늘나라 오르셨단다”(‘국밥집 할머니’ 중)

그는 1975년 퇴계 이황의 사상을 다룬 연구로 모교인 고려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철학을 전공한 국내 1호 박사였다. 퇴계 이황이 존재와 당위를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음을 입증한 이 논문은 세계적인 유학자 뚜웨이밍 등의 극찬을 받았다. 그가 2012년 펴낸 <한국유학사-한국유학의 특수성 탐구>(전 2권, 지식산업사)는 2년 전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철학을 전공한 학술원 회원 다섯 중 유일한 한국철학 전공자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윤 교수는 1957년 또래보다 3년 늦게 고려대 철학과에 들어갔다. 서울 경복고 2학년 때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염을 앓아 3년간 학교를 쉬었단다. “3년 만에 지팡이를 짚고 학교에 갔더니 장기 결석으로 퇴학 처리가 되었더군요. 그때 후유증으로 평생 불편한 다리로 살았죠. 대학 4학년 때 맞은 4·19도 참여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죠.”

노년에 발견한 시작의 기쁨에 대해 더 들었다. “시는 함축적이죠. 여러 말을 지껄이지 않고 한두 마디로 압축해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요. 이런 표현이 상대에게 일정한 감흥을 주면 소통이 됩니다. 딱딱한 논문이 아니더라도요. 또 시는 짧은 한 두 마디 말로 삶에서 느끼는 여러 문제의식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래서 재밌어요. 철학은 합리적 정합성에 맞게 발표해야 하잖아요.”

2집 제목이 <선비>다. 같은 이름의 시엔 이런 구절이 있다. “원래 사지와 몸통의 힘 다 빼면서/ 머리를 한껏 더 푸는 게/ 선비 사자니라.” 그러니까 “머리만 굴리는 게 아니라 사지 몸통까지 다 움직여야 선비”라는 말이다. “자기 전공을 가지고 행동하는 지식인이 바로 선비이죠. 유교의 인간상 중 선비가 오늘날 도움되는 인간상이 아닐까 해서 시로 표현했어요. 선비는 관념의 유희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독서인이고 지식인이죠. 그들은 국가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자기 할 일을 다 합니다.”

옛 선비들에게 시 창작은 삶의 일부였다. 최고로 꼽는 시를 묻자 율곡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화석정’을 꼽았다. “율곡의 시는 대단해요. 재능이 있었죠. 그의 고향인 파주 임진강가 화석정에 올라가면 이 시가 있어요. 어린 나이에 ‘산이 외로운 달을 토해내니/ 강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도다’ 같은 비유를 했다니 대단합니다.”

2001년 고려대 퇴임 철학저술 몰두
“책 다 냈으니 어릴적 꿈 시 쓰고파”
지난해 ‘길벗’ 올해 ‘선비’ 2권 펴내
“비유 어법에서 창조의 기쁨 느껴”

불교·무속까지 ‘한국철학사’ 집필중
“오늘 문제 해법 찾는 ‘신실학화’ 제안”

그는 지난여름부터 <한국철학사> 집필에 힘쓰고 있다. “유학에 더해 불교와 무속신앙까지 포괄하려고요. 욕심 같아선 내년 봄까지는 끝내고 싶어요. 우리 스스로 문화국이라거나 4천년 역사라고 자랑하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한국철학사 한 권 없어요. 오래전 철학자 20여명이 공저한 한국철학사는 있지만 이 책은 체계가 느슨하고 유기적 관련이 부족합니다. 대학생 이상의 사회교양인이나 지식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쓰려고 합니다. 교수 시절 한국사상사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깊이 들어가려고 해요.” 한국 최고의 사상가가 누구냐고 하자 먼저 원효를 이야기했다. “불교는 단연 원효이죠. 한국철학사에서도 원효에게 3개 장을 할애했어요. 가장 긴 분량이죠. 유학보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탓도 있어요. 유학자 중 제가 최고로 꼽는 퇴계나 율곡, 다산도 1개 장만 쓰려고 합니다. 원효 저술 <이장의> <십문화쟁론> 등을 살펴 그의 번뇌, 화쟁, 일심론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윤 교수의 저술 <한국유학사>와 재작년 중국 인민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어판 <한국유학사> 표지.그가 쓴 <한국유학사> 상편은 기원전 2세기에서 18세기 중기까지 다루고 하편은 탈성리학적 실학사상의 선구자인 홍대용에서 시작한다. 18, 19세기 실학사상가들과 항일 의병을 이끈 위정척사 유학자들의 생애를 그만큼 비중 있게 다뤘다는 얘기다. 유학사 서술에 항일 민족주의 관념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일제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어용학자인 다카하시 도루(1878~1967)가 비밀리에 총독부 자금을 받아 작성한 식민사관 논문을 처음 찾아 1976년에 반박 논문을 썼어요. 다카하시는 그 논문에서 조선 민족은 사상적 독창성은 없고 사대성과 분열성만 있다고 했죠.”

그는 유학이 가야 할 길로 ‘신실학화’를 제시했다. “새로운 유학이 되어야죠. 오늘의 문제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선 자유와 평등이 다 필요해요. 둘 다 공존해야 합니다. 유학자들은 공존의 근거를 제시해 공존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유학자들의 과제이죠.” 이런 말도 했다. “성리학을 두고 ‘위기지학’이라고 해요. 스스로 인간이 되려는 학문이란 뜻이죠. 요즘 일부 진보 인사들의 도덕성 문제를 보며 정치 이전에 윤리 도덕을 제대로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조선 시대 왕실 예법으로 당쟁까지 했던 예학의 시절에 가장 부패가 없었다고 해요. 당파들이 서로 감시해서죠.”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좌초했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양반 신분제 사회의 한계로 실학자들의 발언이 하나도 먹혀들지 않은 게 문제이죠. 반계 유형원(1622~1673)의 개혁 사상을 보면 노비철폐론이 나옵니다. 노비도 양반과 똑같이 하늘이 낸 인민이라고 했죠. 교육도 양반과 상놈이 다 같이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이런 평등사상이 17세기에 나왔어요. 유형원은 세제나 과거제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어요. 정조 이후엔 외척이 득세하면서 왕이 로봇이 되었어요. 성리학자들도 개혁안을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실학의 단초를 이룬 율곡 이이를 보세요. 개혁안을 담아 상소문을 얼마나 많이 올렸습니까. 선조는 율곡을 충신으로 인정했지만 개혁안을 채택하지는 않았어요.”

윤 교수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박사 논문을 화제에 올렸다. “애초 화담 서경덕의 사상을 박사 논문에서 다루려고 했어요. 제가 그 뜻을 밝히자 서양철학을 하신 손명현 교수께서 ‘서경덕은 책이 두 권밖에 되지 않아 논문 쓰는 데 시간이 안 걸릴 것 같다’고 농담을 하시더군요. 그 말에 자극 받아 퇴계로 바꿨어요. 퇴계의 글은 화담보다 20배는 많거든요.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말을 이었다. “서양이나 동양철학이나 똑같이 가장 중요한 게 사실과 가치의 문제입니다. 둘이 같은 거냐 다른 거냐를 놓고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철학자들이 계속 고민했어요. 그런데 퇴계문집을 보니 우리 조상들이 이미 이 문제를 다뤘더군요. 고봉 기대승이 퇴계를 찾아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고봉은 나눠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고 퇴계는 분리할 수 없다고 봤어요. 제가 퇴계 글 전체를 다 훑어 사실과 가치를 같이 봐야 한다는 퇴계의 논리를 꾸몄어요.”

사실과 가치의 일치 여부를 따지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할까?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게 중요해요.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고 의리가 개입하면 오류가 납니다. 분별 의식이 없는 경우 역사 해석에 혼란이 생겨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