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8

Donghak - Wikipedia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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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가 창건한 조선 말엽의 사상이다.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계승되어 발전한다.

배경[편집]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한편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 또는 쇠퇴하여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성립[편집]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 동학이라 이름 짓고 종래의 풍류 사상과 (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21자의 주문 '至氣令至, 願爲大峰,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태워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제병장생(濟病長生),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전파[편집]

한편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적서제도(嫡庶制度) 등을 부정하는 현실적·민중적인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4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 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조직[편집]

동학의 교회 조직은 최시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즉 전국 각지에 세포 조직인 포(包)를 설치하여 접주(接主)로 통솔케 하고,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도접주(都接主) 또는 대접주(大接主)라 하여 여러 포를 통솔하는 한편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6가지 직분을 두었다.

영향[편집]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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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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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hak
Hangul
동학
Hanja
東學
Revised RomanizationDonghak
McCune–ReischauerTonghak

Donghak (formerly spelled Tonghaklit.'"Eastern learning"') was an academic movement in Korean Neo-Confucianism founded in 1860 by Choe Je-u. The Donghak movement arose as a reaction to seohak (lit.'"Western learning"'), and called for a return to the "Way of Heaven".[1] While Donghak originated as a reform movement and revival of Confucian teachings, it gradually evolved into a religion known today as Cheondoism in Korea under the third patriarch Son Byong-hi.

History[edit]

Joseon dynasty, which patronized Neo-Confucianism as the state ideology, saw an increasing polarization between orthodox Confucian scholars and efforts by other Confucian scholars to revive social ethics and reform society. The increasing presence and pressure from the West created a greater sense of urgency among reformers, and thus Choe Je-u first penned his treatise, Comprehensive Book of Eastern Learning, or Dongkyeong Daejeon (동경대전東經大全). This treatise marked the first use of the term "Eastern Learning" and called for a rejection of God (in the Christian sense), and other aspects of Christian theology.[1]

Choe was alarmed by the intrusion of Christianity (천주교Cheonjugyo; Catholicism), and the Anglo-French occupation of Beijing. He believed that the best way to counter foreign influence in Korea was to introduce democracy, establish human rights and create a paradise on Earth independent of foreign interference.

He started a peasant rebellion by converting them to Donghak and, along with other anti-government civic activists, took over parts of southern Korea from 1862 to 1864 until Choe was executed.[2]

The movement was continued by Choe Si-hyeong (1829–1898), who systematized its doctrine. He too was executed.

In 1898, following the execution of Choe Si-hyeong, the leader of Donghak, Son Byong-hi, sought political asylum in contiguous Japan. After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he returned to Korea and established the Chinbohoe ("progressive society"), a new cultural and reformist movement designed to reverse the declining fortunes of the nation and to create a new society. Through Donghak he conducted a nationwide movement that aimed at social improvement through the renovation of old customs and ways of life. Hundreds of thousands of members of Donghak cut their long hair short and initiated the wearing of simple, modest clothing. Non-violent demonstrations for social improvement organized by members of Donghak took place throughout 1904.

Under the third patriarch of the Donghak movement, Son Byeong-hui, the movement became a religion called Cheondogyo, or Cheondoism, which is followed today in both North and South Korea.

Choe Je-u[edit]

Choe Je-u's treatise argued a return to the Confucian understanding of Heaven, with emphasis on self-cultivation and improving one's nature. As Choe wrote, the Way of Heaven was within one's own mind, and so by improving one's nature, one also attained the Way of Heaven.[1]

Donghak was not accompanied by a specific agenda or systematic doctrine. Choe believed in improvising as events occurred. He had no practical plans or visions of how one would go about establishing a paradise on Earth, let alone what paradise meant except that all people were equal. Nevertheless, Choe's advocacy of democracyhuman rights and Korean nationalism struck a chord among the peasant guerrillas and Donghak spread across Korea rapidly. Progressive revolutionaries waded in and organized the peasants into a cohesive fighting unit.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c Yao, Xinzhong (2000). An Introduction to Confucia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21–122. ISBN 0521644305.
  2. ^ A Handbook of Korea (9th ed.). Seoul: Korean Overseas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December 1993. p. 143. ISBN 978-1-5659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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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최제우[崔濟愚]동학의 창립자 2 득도와 포교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근대
최제우

최제우[崔濟愚]동학의 창립자


1824년(순조 24) ~ 1864년(고종 1)



제세주법상 최제우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출생과 수학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는 1824년(순조 24)에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처음 이름인 초명은 복술(福述), 관명은 제선(濟宣)이었다. 제우(濟愚)는 그가 세상의 모든 사람인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한 수도를 하면서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1860년 경 바꾼 이름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자는 성묵(性默)이고, 호는 수운(水雲)이다.

그의 집안은 6대조부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가문으로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 1762-1840)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한 유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집인 『근암집』은 최옥이 재능과 실력을 가진 문사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옥은 첫 번째 부인 정씨(鄭氏)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곧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그는 다시 서씨(徐氏)와 혼인하여 딸만 둘을 얻었다. 이에 동생 최규(崔珪)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도록 하였다. 그런데 최옥은 다시 과부이던 한씨(韓氏)를 맞아들여 63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최제우이다.

최제우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3세에 울산 출신 박씨(朴氏)와 혼인하였다. 당시 75세 고령의 부친이 그의 결혼을 서두른 듯하다. 아버지 최옥은 79세로 사망했는데 그때 최제우의 나이 17세였다. 그리고 최제우에게는 불행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는 중에 집에 큰 화재가 발생해 가옥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이때 최제우는 심정은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에 잘 드러나 있다. “세월의 흘러감을 막을 길이 없어 부친은 어느 날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나는 그 옆에서 슬피 울었다. 외로운 나의 한 목숨이 나이 겨우 열여섯에 무엇을 알았으리오. 어린 아이나 다름이 없었더라. 부친의 평생 사업은 화재를 만나 불 속에서 자취마저 없어지고 자손의 불초한 여한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되었노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어찌 애석치 아니하랴.”

부친의 3년상을 마친 최제우는 21세 때인 1844년 생활터전을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옮기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 집을 떠났다. 이때부터 1854년 울산으로 돌아올 때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장사와 의술·복술(卜術) 등 잡술에도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 시기에 보고 다니며 체험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후기의 혼란한 사회상이었다. 즉 그가 전국을 유랑하며 깨달은 것은 조선왕조의 질서가 붕괴되고 있으며,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도덕·종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1854년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울산으로 돌아온 최제우는 자신이 체험한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창조할 방안을 찾기 위해 수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1855년에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온 승려로부터 신인(神人)에게서 얻었다는 일명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 본격적인 수도를 위한 탐구와 수련을 시작했다. 1856년 여름, 울산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千聖山) 기슭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을 찾아 49일 동안의 기도와 사색을 시작하였다. 최제우는 1857년에 다시 양산 천성산으로 들어가 정상 부근에 위치한 자연동굴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 기도를 드리는 등 계속해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최제우는 1859년 10월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 정착한 후 세상을 구원할 도(道)를 깨치지 못하면 세상에 다시 나가지 않겠다는 뜻의 ‘불출산외(不出山外)’이란 네 글자를 문 위에 써 붙이고 수련을 계속했다. 1860년 봄을 맞은 최제우는 ‘도(道)의 기운이 오래 있으니 사악함이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의 중인(衆人)과 함께 돌아가지 않으리(道氣長存邪不入世間衆人不同歸)’라는 입춘시(立春詩)를 지어 벽에 붙였다.

최제우는 1860년 4월 마침내 일종의 ‘종교체험’을 통해 도를 깨치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온 것이다. 최제우는 이때 자신의 경험을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신년(1860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공격하여 빼앗아 그 교당(敎堂)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의심이 있었더니,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靈符)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이후 최제우는 1년 동안 이때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하였다.

2 득도와 포교


최제우는 자신의 도를 ‘동학’이라 하고, 1861년부터 본격적인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용담정으로 찾아왔고, 최제우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에는 당시의 사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는) 포덕(布德)할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지극한 마음으로 치성을 드릴 생각만 하였다. 그렇게 미루어 오다가 다시 신유년(辛酉年)을 맞이하니, 때는 6월이요 절기는 여름이었다. 좋은 벗들이 찾아와 방안에 가득함에 먼저 도 닦는 법을 정하였고,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물었으며 또한 포덕을 권하였다. (중략)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니 그 수가 그렇게 많았고, 자리를 펴고 법을 설교하니 그 즐거움이 매우 컸다. 어른들이 들어오고 나아가는 것이 마치 삼천제자의 행렬 같고, 동자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6,7명의 제자들이 시가를 읊는 것과 같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도 있으니 이것은 또한 나이 많은 자공이 나이 어린 공자를 받든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시를 읊으며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하시던 일이 아니겠는가.” 최제우는 자신의 가르침을 마치 옛날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일에 비유하며, 성공적인 포교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반대로 이를 비난하는 인사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도 그를 원수처럼 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최제우는 이런 상황을 『용담유사』 「교훈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모르는 세상사람 승기자(勝己者) 싫어할 줄 무근설화(無根說話) 지어내어 듣지 못한 그 말이며 보지 못한 그 소리를 어찌 그리 자아내서 향안설화(說話) 분분한고 슬프다 세상사람 내 운수(運數) 좋자 하니 네 운수 가련(可憐)할 줄 네가 어찌 알잔 말고 가련하다 경주 향중(慶州鄕中) 무인지경(無人之境) 분명하다 어진사람 있게 되면 이런 말이 왜있으며 향중 풍속(鄕中風俗) 다 던지고 이내 문운(門運) 가련하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凶言怪說) 남 보다가 배(倍)나 하며 육친(六親)이 무삼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殺父之讐) 있었던가 어찌 그리 원수런고 은원 없이 지낸 사람 그 중에 싸잡혀서 또 역시 원수 되니 조걸위학(助桀爲虐)이 아닌가 아무리 그리해도 죄 없으면 그뿐일세.” 또한 최제우에게 큰 충격과 타격을 입힌 것은 그가 서학(西學)을 신봉하고 있으며, 동학은 사실상 서학과 같다는 중상(中傷)이었다. “가소(可笑)롭다 가소롭다 너희 음해(陰害) 가소롭다 신무소범(身無所犯) 나뿐이다 면무참색(面無慚色) 네가 알까 애달하다 애달하다 너희 음해(陰害) 애달하다 (중략) 요악(妖惡)한 그 인물이 할 말이 바이없어 서학(西學)이라 이름하고 온 동내 외는 말이 사망년(詐妄謰) 저 인물이 서학(西學)에나 싸잡힐까 그 모르는 세상사람 그것을 말이라고 추켜들고 하는 말이 용담(龍潭)에는 명인(名人)나서 범도 되고 용도 되고 서학(西學)에는 용터라고 종종걸음 치는 말을 역력히 못할로다.”(『용담유사』 「안심가」).

이에 최제우는 1861년 11월 전라도로 향하였다. 자신이 깨우친 도를 널리 전파하는 것은 물론 자신에 대한 핍박 등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경주를 떠난 동래, 의령, 성주, 무주를 거쳐 남원에 이른 최제우는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머물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라는 내용이 포함된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文)」이 써진 것도 이때였다.

경주로 돌아 온 후에는 최시형(崔時亨) 등 제자 중에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포교에 힘쓰게 하였다. 이에 동학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자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는 1862년 9월 요술이나 마술 같은 이상한 술법인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 든 동학교도 수백 명은 동학이 본래 백성과 풍속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속히 자신들의 스승인 최제우를 석방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결국 최제우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학교도들은 관에서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놓고 포교할 수 있다는 심정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의 교세는 확산되어 동학교도가 나날이 증가하였다. 특히 경주, 영해, 대구, 청도, 청하, 연일, 안동, 단양, 영양, 신녕, 고성, 울산, 장기 등지에 동학교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최제우는 1862년 12월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였다. 각 지방에 접을 두고 책임자로 접주를 임명하여 관내의 동학교도를 관할하게 한 것이다. 동학의 교세는 계속 늘어나 접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뿐만 아니라 경기도에도 설치되었다. 최제우는 1863년 7월 초순부터 1달간 용담정에서 각지의 접주들을 소집하여 동학의 교리, 접의 조직과 운영 등에 관한 내용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때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여 동학에 대한 일체 사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그리고 8월 14일에는 도통(道通: 정통 계승자)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끝에 어명(御命)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경주로 파견하였다. 경주로 내려간 정운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 만합니다.” 최제우는 1863년 12월 정운구에 의하여 동학교도 2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제우를 서울로 압송하던 중 과천(果川)에서 철종의 승하 소식을 접한 정운구는 그곳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다시 경상도 감영으로 압송하여 죄를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정운구는 1864년 1월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 도착하였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다른 동학교도들과 함께 심문받다가 3월 이단사교(異端邪敎)로 유교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히는 좌도난정(左道亂正)과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요언혹민(妖言惑民)했다는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梟首)당하였다. 최제우의 가르침은 이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로 간행되어 동학의 기본 경전이 되었다

'한국 근대를 다시 묻는다' < 한·일 공동학술대회 - 원불교신문2018

'한국 근대를 다시 묻는다'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한국 근대를 다시 묻는다'
기자명 정성헌 기자
입력 2018.08.23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한·일 공동학술대회 개최
이번 한·일 공동학술대회는 '서구 근대' 개념을 무분별하게 차용해 국가의 잃어버린 고유 근대사 가치를 되찾기 위한 비서구 학계의 시도였다.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도올 김용옥은 우리 역사에 '근대란 없다'고 했다. 500년 동안 중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은 세계적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채, 개화의 틈을 탄 열강들의 침략으로 조선의 근대화는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로 덧씌워졌다.

15일~16일 열린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원장 박맹수) 한일공동학술대회 '한국의 근대를 다시 묻는다: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은 서구가 독점해온 근대의 개념 속에 왜곡되고 날조된 근대 인식과 한국 민족종교 맥락을 심도있게 짚어나갔다. 지난 1세기 동안 서구 중심 일변도로 치우친 서구적 근대 개념을 넘어서기 위한 '비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고민은 한일 양국 학자들의 오랜 화두로 이번 학술대회의 주된 쟁점이 됐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서구의 근대 개념이 세계에 일률적으로 적용돼 야기되는 대표적인 한계로 미·소 냉전체제에서 찾는다. 소련의 과학적 사회주의 우월성이나 미국의 자본주의도 근대 서양 열강들이 행했던 마구잡이 식민통치와 생명경시의 연장선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개개인이 특정 이데올로기나 거짓종교의 지배를 벗어나는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될 때 왜곡된 서구 근대 개념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토착적 근대'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40년간 아프리카 문학을 연구해온 요카이치대학 기타지마 기신 명예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1970년대 이란의 이슬람 부흥주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남아프리카의 흑인의식운동을 통해 그가 성찰했던 새로운 근대 개념은 '토착문화·사상을 기본 축으로 한 내발적 현실 변혁의 시도'였다. 물질문명으로 세계를 일원화하려는 제국주의들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 개념 속에 드러나지 않았던 또 다른 평화적 상생지향의 근대 개념인 것이다.

원광대학교 조성환 교수에 의해 외래 사상으로부터 오염된 한국 근대사도 재발견됐다. 일본 실학이 조선 실학으로 둔갑한 경우다. 조선후기의 사상사를 실학이라는 범주로 해석하려다보니 외재적인 틀을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학 개념을 차용해버린 것이다. 그의 실학은 일본이 서구적으로 근대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아시아 학문을 벗어나 서구적인 과학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일본 식민통치로 잃어버린 근대를 조선후기에서 찾으려는 일종의 정신적 위안과 욕심이 희대 조작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사회 손꼽히는 4대종교 가운데 원불교를 제외한 3대 종교 모두를 외래종교라 한 인제대학교 강신표 명예교수의 주장도 새롭다. 그 이유는 불교, 유교가 한국화된 중국사상사라서다. 우리의 토착은 동학이다. 그래서 한국 고유 영성과 사상인 동학과 증산도를 이어 탄생한 원불교 탄생은 한국 근대화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 평한다. 그러다보니 한국 근대 개념에는 서구 근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성'이 등장한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로 알려진 교토대학 오구라 기조 교수는 '조선사상 최대의 민중운동이며, 19세기 후반의 조선민중의 심령을 포착하여 20세기 모든 근대성의 토착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도올 김용옥을 말을 인용하며 "동학은 현대사회에 생기넘치는 영성을 아낌없이 제공해주고 있다"고 평한다.

서울대학교 성해영 교수도 한국적인 근대 현상을 동학의 영성 구현 운동에서 찾았다. 그것은 '인간존중'과 '평등'을 한반도에서 찾아낸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민초들의 자발적 영성운동 때문이다. 인간존중과 평등은 현대사회 빼놓을 수 없는 보편적 윤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는 서구 근대화의 저력, 즉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킨 시민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영성적 차원으로 근대적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서구 근대 개념은 물질문명으로 정체기를 겪던 아프리카, 중동세계, 아시아를 놓고 노예무역·식민지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접근했던 패권주의의 산물임을 한일 학자들은 공감했다. 그러기에 서구 근대의 개념은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지녔던 독특한 정치·사회·종교·문화를 획일화시키는 오류를 낳고 현대를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이라고 읽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관련기사 9면

한편,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원불교학 진흥과 신진연구자 발굴을 위해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처음 제정한 제1회 원불교학 신진연구자 학술상 시상식도 함께 진행됐다. 첫 수상자로는 '원불교 개벽사상의 역사적 전개와 특징' 논문을 쓴 장흥교당 정현숙 교무가 수상했다.

[2018년 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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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헌 기자 jung@wonnews.co.kr

EBS 기획특강 : 왜 공공철학인가? / 김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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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인가?

성인이나 신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21세기형 철학, 공공철학을 사유합니다.

김태창

정치학자 겸 철학자로 일본 교토포럼 공공철학연구소장이다. 충북대학교에 재직하였고 1985년 일본 도쿄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 비판』, 『인간·세계 그리고 신』, 『21세기에의 지성적 대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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