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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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상 아리랑 - 북녘에서 맛보는 우리 음식 이야기 
  • 김정숙 (지은이), 차은정 (옮긴이) | 빨간소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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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 리디북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 리디북스



카테고리
일반
로맨스
판타지
만화
BL






인문/사회/역사 인문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0명


김숙진, 김은주 외 12명 저

이성과감성 출판



구매 종이책 정가 12,600원
전자책 정가 12,600원
판매가 1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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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정보
2020.07.03. 전자책 출간
2020.07.20. 종이책 출간
파일 정보
EPUB
17.2MB
약 11.2만 자
ISBN
979115869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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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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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에서 유시 파리카, 그레구아르 샤마유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대표 사상가 스물다섯 명의 논의를 명료한 언어로 해설하는 책이다. 지난 20~30년 사이 지구에는 인수 공통 전염병, 기후 위기, 빅 데이터 감시 등 전례 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 인류의 삶과 행성 전체의 환경을 급격하게 뒤바꾸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내의 많은 사상적 담론은 30년도 더 된 낡은 인식 틀에 의존하고 있다.21세기적 삶의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21세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자면, 20세기 사상으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온전히 전망할 수 있을까? 코로나19뿐 아니라 지구 온난화, 미세 먼지, 플라스틱 쓰레기 등이 야기하는 지속 불가능성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는 21세기적 삶의 조건에 따라 업데이트한 진단과 해법이 필요하다. 새로운 공존의 미래를 위한 해법의 단초가 21세기 사상에,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 담겨 있다.

출판사 서평


◆ 현시대 최신 사상을 본격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대중 기획『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서 소개하는 논의들은 20세기 말 ‘포스트 이론’의 유행이 지나간 뒤 1990년대에 싹트기 시작해 2010년대에 만개한 새로운 지적 흐름이다. 사상가 다수를 동일한 지면에서 소개하는 기획은 지난 수년 간 국내에서도 종종 존재했으나, 대부분 20세기 사상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거나 이를 회고하는 경우가 많았다.『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지금 이 시대를 고찰하는 사상에 주목한다. 신유물론(신유물론적 페미니즘), 존재론적 전회, 객체 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미디어 고고학,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 연구, 인간 너머의 지리학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서 다루는 사상가와 이론은 지난 시대의 사상적 거목인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 등과 이론적‧세대적으로 명백히 구분되거나 적어도 이들을 매우 비판적‧성찰적‧독창적으로 독해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기획과 변별된다.이에 걸맞게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는 그동안 기성 대중 지면에서 보기 어려웠던 우리나라 30~40대 신진 연구자들이 저자로 대거 참여했다. 책에서 소개된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소셜미디어 등으로 자유롭게 교류하며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런 국제적 연결 덕분에 21세기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소개된 유시 파리카는 필자로서도 이번 기획에 참여하였다. 파리카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번 기획을 소개하며 참여 소식을 직접 전하기도 했는데, 이 같은 협력의 풍경은 21세기 사상이 지금도 끊임없이 생동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21세기 사상을 관통하는 탈인간중심주의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격변의 조짐은 이미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대기 중 온실가스가 증가하며 살인적 폭염이 해마다 발생했고 생태계 교란 현상이 악화되었다. 인간은 인공 지능, 인공 신체, 인공 방사능, 첨단 의료, 빅 데이터, 전자 기기, 드론 등 각종 신기술을 개발해 기술 문명의 더 큰 발전을 꾀함과 동시에, 이와 더불어 생겨난 부작용도 함께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코로나19 범유행 사태는 이러한 문제 상황을 인류 모두의 눈앞에 가시화해 놓았을 뿐이다. 빅 데이터와 드론의 감시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었으며, 인간이 거리를 비우자 로봇이 그 자리를 채우고 동물들의 일상이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이 예기치 않은 상황은 인간만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을 깨뜨린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논의는 인간 사회조차 인간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이들 사상가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하며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사상가 개개인은 저마다의 독창적 통찰과 대안적 실천을 통해 혼돈의 현재를 공존의 미래로 전환하고자 한다.이를테면 브뤼노 라투르는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는 과속 방지 턱의 예를 들면서 사회에 간여하는 행위자로서의 사물을 상기시키고, 인간만을 주체로 인정하는 현행 정치 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끼친 시기를 일컫는 ‘인류세’라는 용어에 의구심을 품는다. 인간의 과도한 책임 의식 이면에는 인간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오만이 서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대신 ‘자본세’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생산 활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로지 브라이도티는 근대적 휴머니즘이 배제한 다양한 젠더, 인종, 장애에 주목하고 환경적 타자, 기술적 장치 등 다양한 포스트휴먼 주체와 연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공생하고 공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들어 갈 더 나은 미래21세기 사상은 일상 현실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물질적 문제를 중요하게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론을 새로이 제시한다. 가령 브루스 브라운은 사스 위기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인간 신체와 도시의 존재론에 대해 다시금 고찰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듯, 바이러스의 확산은 진원지와의 물리적 거리와 무관하게 발생한다. 사스는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되었지만 최초 감염자는 미국인 사업가였다. 그런데 증상이 처음 발생한 곳은 베트남 하노이였고, 최초 감염자가 사망한 곳은 홍콩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와 접촉한 의료진, 비행기 탑승객, 호텔 투숙객 등이 감염돼 사스는 단 몇 주 만에 전 세계 37개국으로 확산되었다. 인간은 인수 공통 전염병이 불러온 위기 속에서 동물, 미생물, 항공기, 마스크 등 비인간 행위자의 존재와 도시의 무경계성을 비로소 실감한다.한편 그레구아르 사마유는 원격 감시와 공격 기술의 현대적 결정판인 드론에 주목해 신체와 기술 간의 관계가 전복되고 인간 존엄성이 급진적으로 부정되는 현실을 드러낸다. 전장에 군인을 투입하지 않고도 세계 전체를 잠재적 전쟁터로 재편하는 드론은 전통적 전쟁법과 윤리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해석하는 법적 체계를 위기에 빠뜨린다. 드론은 신체 없는 무기이면서도 사물과 사람이 융합된 모호한 실체로서 유례없는 파급력을 지닌 불안한 존재다.이 밖에도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유해 물질이 몸에 끼치는 영향을 고찰함으로써 전 지구적 경제 활동에 결부돼 있는 환경 피해의 실상을 폭로하며, 유시 파리카는 계획적 구식화를 통해 양산되는 디지털 기기와 전자 쓰레기의 문제에 주목한다. 티머시 모턴은 한 개인이 체감하기에 전체 규모가 너무나 거대한 현상을 ‘거대사물’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해 지구 온난화, 미세 먼지, 인터넷 등 인류사적으로 매우 최근에 등장한 전 지구적 현상을 한층 깊이 있게 숙고하는 길을 제시한다.◆ 동시대 사상의 방대한 지형을 파악하기 위한 최적의 길잡이21세기 사상은 지식의 경계를 종횡으로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에서 그 방대한 지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은 각 사상가들의 핵심 질문에 집중하고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 맥락과 관계망에 대한 설명을 입체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사상에 입문하는 독자들에게 최적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모든 글의 제목은 구체적 질문으로 구성돼 각 사상가가 어떤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는지를 보여 주고, 멀게만 느껴졌던 사상이 일상적 소재와 어떻게 접목되는지를 예시한다. 이로써 동시대 사상가들을 처음 만나는 독자들도 그들의 문제의식을 어렵지 않게 공유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각 사상가들의 핵심 논의와 그것의 시사점을 명료한 언어로 해설하는 것은 물론, 각 장의 말미에 보조 자료를 수록해 사상가의 이력과 주요 저작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 자료에는 사상가의 학문 분야, 사상적 입장, 영향·비판·동료 관계에 있는 인물들, 주요 활동 및 사건 등을 일람표 형식으로 제시했으며 주요 번역본 목록 또한 곁들여 놓았다. 이로써 독자들은 사상가별 기본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원전 또한 한결 수월하게 찾아 읽을 수 있다.◆ 사상가별 논의의 핵심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일러스트, 이정호‧변영근‧이부록 작가 참여『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는 각 편마다 올 컬러 일러스트레이션이 수록돼 있다. 개인 작품집, 단행본 협업, 전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독창적 스타일을 선보여 온 이정호 작가, 변영근 작가, 이부록 작가는 사상가의 핵심 논의를 감각적으로 해석하고 포착해 텍스트마다 다채로운 시각적 이미지와 정체성을 부여했다. 스물여섯 점의 일러스트레이션은 21세기 사상에 대한 시각적 번역물로서 더없이 아름다운 이들 작품은 독자의 소장 가치를 자극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펼쳐보기

저자 소개


김숙진: 건국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있다.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연과 사회 관계, 인류세, 문화 지리, 세계 유산에 관심을 두고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통한 과학과 자연의 재해석」(2010), “Mad Cow Militancy: Neoliberal Hegemony and Social Resistance in South Korea”(공저, 2010), 『네트워크의 지리학』(공저, 2015), 「아상블라주의 개념과 지리학적 함의」(2016) 등을 썼다.김은주: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로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와 브라이도티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학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2019), 「들뢰즈의 존재론적 시간과 ‘우발적 미래들’의 역설」(2020) 등을 쓰고, 『트랜스포지션: 유목적 윤리학』(공역, 2011), 『페미니즘을 퀴어링!: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공역, 2018)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김종갑: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이자 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수사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몸에 대한 이론, 포스트휴머니즘, 생태학, 인류세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혐오, 감정의 정치학』(2018), 「감정 노동과 감정 착취: 약함의 공동체와 강함의 공동체」(2018), 「외모 지상주의와 타자의 아름다움」(2019), 『당하는 여자, 하는 남자: 침대 위 섹슈얼리티 잔혹사』(2020) 등을 쓰고,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 정의』(공역, 2018)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김종미: 코번트리대학교 문화미디어학과 부교수로 있다. 런던정경대학교에서 한국의 여성성과 소비문화를 글로벌 미디어와 정체성 변화의 관점에서 연구해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여성성, 성형 수술을 중심으로 한 의료 관광, 초국가적 가족, 디지털 미디어에 관심을 두고 있다. “Is ‘the Missy’ a New Femininity?”(2011), Women in South Korea: New Femininities and Consumption (근간) 등을 썼다.김지훈: 영화미디어학자이며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다. 뉴욕대학교에서 영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 이론, 실험 영화·비디오·다큐멘터리, 디지털 영화·미디어, 무빙 이미지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차원적 이미지의 미디어 고고학: 전-영화적 테크놀로지, 비디오, 디지털」(2014), Between Film, Video, and the Digital: Hybrid Moving Images in the Post-media Age (2016)를 쓰고,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 영화를 읽는 강력한 사유, 〈시네마〉에 대한 예술 철학적 접근』(2005), 『북해에서의 항해: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예술』(2017)을 우리말로 옮겼다.김환석: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명예 교수로 있다. 런던대학교 임페리얼칼리지에서 과학 기술 사회학으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 유네스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 위원,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과학 기술 사회학과 현대 사회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있다. 󰡔과학 사회학의 쟁점들󰡕(2006),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과학 기술학의 도전: 비인간 행위성의 문제를 중심으로」(2012), 「과학 기술과 사회 연구의 동향과 전망」(2014), 󰡔생명 정치의 사회 과학󰡕(편저, 2014), 「사회 과학의 ‘물질적 전환’을 위하여」(2016), 「코스모폴리틱스와 기술사회의 민주주의」(2017), 󰡔모빌리티 시대: 기술과 인간의 공진화󰡕(공저, 2020) 등을 썼다.노고운: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조교수로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중국을 묶는 다문화주의 및 초국적 이동,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벌어지는 동물, 생태, 환경 문제에 대한 현상 및 담론 분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Mass Media and Transnational Community: The Sense of Belonging Beyond State Borders among Korean-Chinese in the Yanbian Korean-Chinese Autonomous Prefecture”(2018), “Ecological Nationalism and the Demonization of ‘Invasive’ Animal Species in Contemporary South Korea”(2019) 등이 있다.박세진: 제주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사회 인류학 및 민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물과 이름: ‘근본적인 인정 행위’로서의 증여」(2016), 「마음에 대한 믿음을 문제화하기: 몸의 은유와 마음의 삼각형」(2018), Parenté, écologie et histoire (2019, 공저) 등을 썼다.서보경: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있다. 인류학자로서 몸의 경험을 중심으로 삶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보건 의료, 빈곤, 이주 노동, 젠더와 섹슈얼리티, 교환 및 가치 이론에 관심을 두고 태국과 한국에서 현장 연구를 해 왔다. 대표 논문으로 “Patient Waiting: Care as a Gift and Debt in the Thai Healthcare System”(2016), “Caring for Premature Life and Death”(2017)가 있으며, 돌봄의 윤리와 정치적 함의를 분배 정치의 맥락에서 다룬 책 Eliciting Care: Health and Power in Northern Thailand (2020)를 썼다.송원섭: 전북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로 있다. 퀸스대학교 벨파스트 지리학과에서 지역적 근대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화·역사 지리학, 문화 경관, 지리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경관 지리학에서 경치 지리학으로: 영미권 문화·역사 지리학 경관 연구 패러다임의 전환」(2015), “Peace as a Precarious Process: Interpreting Local Conflict through Lineage‐based‐Villages of Korea”(2016), 「한국 동족 마을의 경관 변화: 경상북도 달실마을의 숨겨진 지리적 차원을 중심으로」(2019) 등이 있다.심효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전영화사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디어의 문화적·사회적·자연적 순환을 관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인류세와 21세기 간학제적 접근론: 차크라바르티, 파리카, 해러웨이를 중심으로」(2020), 「채플린 동작의 비규칙성: 20세기 포스트휴먼의 한 가지 경우」(2018) 등을 쓰고 『평행한 세계들을 껴안기』(공역, 2018), 『미디어의 지질학』(근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엄태연: 파리낭테르대학 인식·언어·모델화연구소 박사 과정에 있다. 베르그손 철학에서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 양자 사이에서 인간학이 수행하는 역할 등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시간과 절대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2017), 『정신적 에너지』(2019)를 우리말로 옮겼다.유시 파리카: 사우스햄튼대학교 기술문화미학과 교수로 있다. 투르쿠대학교에서 컴퓨터 웜과 바이러스에 대한 미디어 고고학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디어 문화의 물질성, 과학·기술·예술의 고고학, 문화 이론에 관심을 두고 전자 쓰레기, 생태학, 디지털 예술과 문화를 연구한다. Insect Media: An Archaeology of Animals and Technology (2010), What Is Media Archaeology? (2012), A Geology of Media (2015)를 썼다.유현주: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다. 훔볼트대학교에서 독문학과에서 디지털 미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매체 이론 및 문화 이론에 관한 연구를 주로 진행하고 있다.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2017), 「키틀러와 젠더: 담론의 채널에서 여성은 매체와 어떻게 결합하는가」(2019), 『프리드리히 키틀러』(공저, 2019)를 쓰고, 『보이지 않는 것의 경제』(2008),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 당신은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공역, 2015), 『축음기, 영화, 타자기』(공역, 2019)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이동신: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있다. 텍사스A&M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스트휴머니즘, 현대 미국 소설, SF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A Genealogy of Cyborgothic: Aesthetics and Ethics in the Age of Posthumanism (2010)을 펴냈으며, 주요 논문으로 「좀비 반, 사람 반: 좀비서사의 한계와 감염의 윤리」(2017), 「좀비라는 것들: 신사물론과 좀비」(2017), 「망가진 머리: 인공 지능과 윤리」(2018) 등이 있다.이준석: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기초학부 초빙 강의 교수로 있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에서 뇌과학 실험실의 융복합적 과학 지식 창출 메커니즘을 행위자-연결망 이론으로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위자-연결망 이론과 객체 지향 존재론 및 신유물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행위자-연결망 이론과 사변적 실재론의 접점: ‘해석적 유연성' 개념으로 본 ‘책임 있는 연구와 혁신」(공저, 2016), 「사회이론의 물질적 전회: 신유물론, 그리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과 객체 지향 존재론」(공저, 2019) 등이 있다.임소연: 숙명여자대학교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 교수로 있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에서 과학 기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페미니스트 과학 기술학, 인간 향상 기술과 몸, 성형 수술, 이공계 여성 연구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ᅠ『과학 기술의 시대 사이보그로 살아가기』(2014), “The Anxious Production of Beauty: Unruly Bodies, Surgical Anxiety, and Invisible Care”(2016), 「과학 기술과 여성 연구하기: 신유물론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 안-사이에서 “몸과 함께”」(2019) 등을 썼다.정찬철: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한양대학교 영화학과에서 포스트시네마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 기술 및 문화, 미디어 고고학, 미디어 기술의 문화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포스트시네마로의 전환」(2015), 「완전 영화의 테크놀로지: 바쟁, 시네마스코프, 공간 영화」(2019), 『디지털 시각 효과에 관한 짧은 역사』(2018) 등을 쓰고, 「키틀러 이후: 최근 독일 미디어 이론으로서 문화기술학에 관하여」(2018), 『미디어 고고학이란 무엇인가』(공역, 근간)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주윤정: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선임 연구원을 지냈다. 사회사, 질적 연구 방법론, 문화, 청년, 장애, 인간-동물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의 해방과 기다림의 정치」(2018), 「탈시설 운동과 사람 중심 노동: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법과 장애인 협동조합 운동」(2019) 등이 있다.차은정: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방문 연구원, 히토쓰바시대학교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지구화 시대의 문화 정체성』(2016)을 쓰고, 『숲은 생각한다: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2018), 『부분적인 연결들: 문명 너머의 사고를 찾아서』(2019), 『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공역, 2020)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최명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류세연구센터 연구 조교수로 있다. 옥스퍼드대학교 환경지리학과에서 한국 생태 관광의 통치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 너머 지리학과 정치 생태학의 접근법을 이용해 야생 동물 보전, 생태 관광, DMZ 보전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다중적 고래: 한국 장생포 고래 관광의 공간 형성」(2017), 「인류세 연구와 한국 환경 사회학: 새로운 질문들」(공저, 2019), 「다중적 환경 주체: 한국 증도 생태 관광의 통치성 분석」(2020) 등이 있다.황희선: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 과정에 있다. 토종 작물과 사람들이 맺는 다종적 역사와 관계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의 탄생: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2010), 『가능성들: 위계·반란·욕망에 관한 에세이』(공역, 2016),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공역, 2016),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2019)를 우리말로 옮겼다.변영근: 수채화를 통해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의 경계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 『낮게 흐르는: Flowing Slowly』(2018)을 비롯해 독립 출판물을 다수 펴냈다. 그 밖에 알마의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 등 그림이 필요한 다양한 매체와 협업하고 있다.이부록: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인사미술공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예술의 새로운 시작: 신호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 2009), 《개성공단 사람들: 교토 익스페리먼트 2019》(교토아트센터, 2019)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기억의 반대편 세계에서: 워바타』(2012), 『세계 인권 선언』(2012) 등 책 작업에도 참여했다.이정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와 책에 그림을 그렸으며, 2016년 직접 쓰고 그린 첫 작품집 『산책』으로 영국 일러스트레이터협회(AOI)가 주관하는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에서 최고영예상을 수상했다. 2019년 두 번째 책 『시간』을 펴냈다.펼쳐보기

목차


· 들어가며: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김환석)· 브뤼노 라투르: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김환석)· 도나 해러웨이: 지구에서 어떻게 삶의 지속을 추구할 것인가? (황희선)· 메릴린 스트래선: 전체론으로는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는가? (차은정)· 프리드리히 키틀러: 매체는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바꾸는가? (유현주)· 필리프 데스콜라: 자연과 문화의 대립 바깥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가? (박세진)· 나이절 스리프트: 도시는 물리적 관계로만 이루어지는가? (송원섭)· 지크프리트 칠린스키: 올드 미디어는 어떻게 뉴 미디어와 연결되는가? (유시 파리카, 정찬철)· 애나 칭: 비인간 생물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노고운)·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은 어떻게 전 지구적 공동체의 바탕이 되는가? (김은주)· 캐런 버라드: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낙태를 어떻게 다루는가? (임소연)· 제인 베넷: 호수와 나무에도 법적·정치적 권리가 주어져야 하는가? (김종미)· 아네마리 몰: 질병은 어떻게 실체가 되는가? (서보경)· 세라 와트모어: 콩은 인간의 작물 재배와 소비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최명애)· 뱅시안 데스프레: 인간과 동물은 어떻게 함께 사유하는가? (주윤정)· 볼프강 에른스트: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정찬철)· 스테이시 앨러이모: 물질의 행위는 몸에 우발적 영향을 끼치는가? (김종갑)· 브루스 브라운: 도시는 동물 없는 인간만의 공간인가? (김숙진)· 캉탱 메이야수: 인간은 인간 이전의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가? (엄태연)· 그레이엄 하먼: 인간과 비인간을 객체로 일원화할 수 있는가? (이준석)· 티머시 모턴: 지구 온난화는 자연의 문제인가? (이동신)· 에두아르도 콘: 생명은 어떻게 사고하는가? (차은정)· 웬디 희경 전: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통제와 자유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김지훈)· 유시 파리카: 디지털 기기는 어떻게 지구를 황폐화하는가? (심효원)· 그레구아르 샤마유: 드론은 어떻게 전쟁의 전통을 교란하는가? (김지훈)· 제이미 로리머: 지구의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자연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최명애)펼쳐보기

리뷰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 munhwa.com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 munhwa.com: 문화일반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24일(火)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A : 다원주의 ‘전체속 부분’만 인정… 부분간 ‘평등한 관계’ 봐야 ④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1941~) 서구중심 ‘절대진리’ 비판에 다원주의 흡수하면서 부분적 진리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전체론 못벗어나 유럽 형이상학 지배한 신체 초월한 로고스로는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놓고 위계적 질서도 해체 못해 쏟아지는 정보홍수 속에서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가 중요 “사방이 적입니다.” 한 학생이 내게 한 말이다. 최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제목의 인기 웹툰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 학생만 하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컫는 줄임말로, 타인과 나누는 행복보다는 혼자서 즐기는 행복에 가까운 의미이다. 이제는 정녕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개념, 즉 인간은 타자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로는 더 이상 인간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다’에 등장하는 고시원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바로 이 감각,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학문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비서구의 ‘타문화’를 탐구해 왔던 서구 인류학에서는 이 감각이 학문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1980년대까지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서구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비서구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자 그 기술이 ‘서구의 시선에 의한 비서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됐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위안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의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일제강점기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중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반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과도 잘 지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일


문화일반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24일(火)
Q : 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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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다원주의 ‘전체속 부분’만 인정… 부분간 ‘평등한 관계’ 봐야

④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 1941~)

서구중심 ‘절대진리’ 비판에
다원주의 흡수하면서
부분적 진리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전체론 못벗어나

유럽 형이상학 지배한
신체 초월한 로고스로는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놓고
위계적 질서도 해체 못해

쏟아지는 정보홍수 속에서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가 중요

“사방이 적입니다.” 한 학생이 내게 한 말이다. 최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제목의 인기 웹툰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 학생만 하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일컫는 줄임말로, 타인과 나누는 행복보다는 혼자서 즐기는 행복에 가까운 의미이다. 이제는 정녕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개념, 즉 인간은 타자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로는 더 이상 인간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다’에 등장하는 고시원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바로 이 감각,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학문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비서구의 ‘타문화’를 탐구해 왔던 서구 인류학에서는 이 감각이 학문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1980년대까지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서구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비서구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자 그 기술이 ‘서구의 시선에 의한 비서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됐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에서 비근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위안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일본 정부의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일제강점기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중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반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과도 잘 지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조선인들이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을 이야기하는 시도는 조선인들이 실제 처했던 현실을 간과한 채 일본인의 편향된 이해를 보여 주는 데 그치기 쉽다.

서구 인류학도 연구 대상인 비서구를 알 수 없다. 20세기 인류학은 서구가 어떻게 비서구를 알 수 있을지를 해명하고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를 흡수했다. 인류학자들은 비서구에 대한 자신의 기술이 객관적이며 이것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인정했지만 ‘부분적 진리’로서는 학문적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부분적 진리란 보통 비서구가 아닌 서구 자신의 이야기로 귀착되고 만다. 타자는 거울이고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인식이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이론적 종착점이었던 셈이다.

◇다원주의는 왜 자가당착에 빠지는가?

다원주의는 저마다 다양하고 무수히 많은 세계를 논하려 하지만 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되는 걸까? 영국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다원주의가 여전히 ‘전체’를 상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다원주의자들은 더 거대한 차원의 세계(전체)가 있고 그 하위에 작은 세계(부분)가 무수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체에 포괄된 부분들은 아무리 탈중심화하고 이질화하고 파편화한다 해도 끝내 전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전체의 중심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원주의의 자가당착은 세계를 전체로서 구상하고 이해하는 서구 문명 특유의 사고방식인 전체론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체론의 관점이 근대에 이르러 시각화(신체화)됐다는 점이다. 17세기 유럽에서는 광학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발명돼 인간 시야의 규모를 조정할 수 있게 됐고, 감각 기관을 통해 시야가 생겨난다는 점 또한 인지하게 됐다. 인간의 수정체는 그것을 본뜬 인공 기관인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렌즈와 결합했다. 그러나 인간 개개의 시각을 뛰어넘어 확장된 인공 시야는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인간 문명의 본원적 한계 또한 드러냈다. 인간은 고도로 발전된 전파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관측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전파 영역의 빛 너머가 미지의 세계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138억 년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은 기껏해야 빛이 전달해 주는 38만 년의 우주만을 볼 뿐이다. 나아가 우리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들이 있을 것이라는 다중 우주론도 가설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따라서 전체가 과연 존재하느냐는 인식론적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이 전체의 존재를 알 수 없다면, 전체로 구상된 것들이 실은 전체 없는 부분 그 자체이지 않을까?

스트래선은 이러한 발상을 통해 근대 유럽 중심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집으며 전체론에서 발동되는 전지전능의 시야를 문제시한다. 서구 유럽의 전체론적 시야는 비서구를 주변으로 밀어낸다. 스트래선에 앞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전체론적 사고가 위계적 질서의 원천임을 통찰한 바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유럽 형이상학의 중심에는 ‘로고스’라는 절대적 법칙이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가 서구와 남성을 중심에,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에 위치시켜 왔다고 논했다. 유럽 형이상학은 세계를 전체로 구축하기 위해 초월적 중심을 상정했고, 음성이나 남근으로 이 중심을 상상적으로 구축함으로써 ‘객관성’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세계를 중심과 주변으로 구조화하는 위계적 질서를 해체하려면 로고스를 탈구축해야 한다.

반면 스트래선은 로고스(음성이나 남근)를 탈구축한다 해도 유럽 형이상학의 초월성(탈신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위계적 질서를 해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의 사고를 더 급진화한 것이다. 유럽 형이상학에서는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의 중심에 로고스를 둠으로써 객관성을 보증했다. 그러나 스트래선이 보기에는 로고스가 아니라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스트래선은 신체의 부분적 감각을 계속 주입함으로써 전체론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세계에 대한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 놓는 것이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부분들은 부분적으로 연결된다

전체론은 인류 문명사의 측면에서 낡은 사고방식이다.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많은 문제의 유발 원인으로 지목되는 인간 중심주의는 전체론과 궤를 같이한다. 근대 과학 기술 역시 발전을 거듭하며 자신의 전체론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어쩌면 전체론이 문명적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약 5000년 전 도시 혁명 이래로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 즉 힘의 불균등한 관계를 용인하면서 힘 있는 자의 시야를 세계에 대한 앎과 등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와 시선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이제는 새로운 관계와 앎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 속에서 세계를 구축한다. 20세기 사회 과학은 전체를 ‘사회’로 표상했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개인’이 전체가 됐다. 그렇지만 세계가 전체를 포괄하는 일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실현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 인간은 각자의 세계에 갇힌 채 타자를 욕망할 뿐인 에로스로 스스로를 불태우며 그 고통을 잠시 잊으려 한다. 하지만 스트래선은 저마다의 세계 속으로 흩어지는 대신 무수한 세계들이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되묻는다. 저 유한한 존재들이 한시적 에로스로 자신을 소진하는 것으로는 미래 인류를 위한 지식의 소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라고 구상되는 세계 속에 타자가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타자의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의 궤적은 그 각각의 세계가 무수한 관계들에서 나왔음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전체로 구상하는가에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이며 그 속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에 있다. 스트래선은 21세기의 지식을 캐내는 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으라고….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 궤도 바깥의 사회들에서는 관계가 사물의 반대편을 능수능란하게 해명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낼 것이다. 요컨대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차은정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메릴린 스트래선은

분야 - 인류학-멜라네시아 민족학

사상 - 존재론적 전회·비전체론

주요 활동·사건 - 영국 사회인류학 비판, 존재론의 인류학으로 이론적 갱신을 선도

약력 - 1941년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웨일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교사이자 1세대 페미니스트인 모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을 접했다.

케임브리지대 거튼칼리지에 입학해 사회인류학의 거목 에드먼드 리치와 마이어 포테스에게서 케임브리지 정통 인류학을 배웠다. 1964년에는 동료 인류학자 앤드루 스트래선과 결혼했고, 파푸아뉴기니로 현지 조사를 떠났다. 그때부터 1976년까지 호주와 파푸아뉴기니를 오가며 멜라네시아의 친족과 여성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저서 - 1976년부터 케임브리지대 비전임 연구원으로 재직했고, 영국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에 대한 강의를 5년 동안 진행했다. 이전까지는 사회 인류학 정통에 입각한 연구를 했지만, 영국에 돌아온 직후 시대사상에 둔감한 케임브리지 인류학계의 분위기에 한계를 느껴 당대의 사상적 조류인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두루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는 21세기의 새로운 인류학을 예고하는 기념비적 저작 ‘증여의 젠더’(1988)와 ‘부분적인 연결들’(1991)을 출간했다.


특히 ‘부분적인 연결들’에서는 1980년대 페미니즘과 미국 인류학의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근대 유럽 중심의 전체론적 사고를 넘어서는 ‘탈전체론’을 획기적으로 시도했다.

이 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출간 당시 인류학계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제 의식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한편, 맨체스터대와 케임브리지대 사회인류학 교수로서 부지런히 후학을 양성했다. 그 결과 ‘부분적인 연결들’은 2000년대 이후 인류학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존재론적 전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파의 시초로 재평가됐다.

현재 케임브리지대 명예 교수이며, 팔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왕성한 학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총 15권의 단독 저술, 44편의 단독 논문, 57권의 공동 저술을 발표했고 지금까지도 21세기 인류와 공명하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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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 - 조나단프리드먼 - Goog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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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

조나단프리드먼
당대, 29 Dec 2009 - 4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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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나단 프리드먼(Jonathan Friedman)은 1946년 영국 출생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사회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스웨덴의 룬트 대학 사회인류학 교수이자 프랑스 고등연구원(Ecole Pratique des Haute Etudes)의 전임강사로서, 지구화의 이론가(a theorist of globalization)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40여년간 지구체제(Global systems)의 헤게모니적 현상으로서 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ies/ethnics), 식민과 탈식민(colonial/postcolonial), 이주(migration), 통합과 탈통합(integration/disintegration) 등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으며 150편이 넘는 논문과 20권에 달하는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북유럽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전공과 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한 연구자간의 주제별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저술로 결실 맺는 그의 독특한 활동방식은, 시공간적으로 방대한 그의 연구영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Current Anthropology(1985-6), Culture and History(1987-1991), Journal of World Systems Research(1995-현재), Anthropological Theory(1999-현재) 등이 그가 주도한 프로젝트이며, 최근 그는 인류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1600페이지가 넘는 《Anthropological Theory》출간을 예정하고 있어(Sage Publication, 2011년 1월), 앞으로 그의 지구화 이론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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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오창현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관련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현재는 어업과 어촌문화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학위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옮긴 책으로는 모리스 고들리에(Maurice Godelier)의 『증여의 수수께끼』(새물결, 2008)가 있다.

역자 : 차은정
역자 차은정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큐슈대학교 한국연구센타 방문연구원으로 일제식민기 조선의 전통적 상인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Bibliographic information

Title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
Author 조나단프리드먼
Translated by 오창현, 차은정
Publisher 당대, 2009
ISBN 8981631492, 9788981631499
Length 47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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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서의 탈서구중심주의 : 데스콜라의 우주론과 스트래선의 탈전체론을 중심으로 - 서강인문논총 -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논문 - DBpia, 연구를 돕는 똑똑한 학술콘텐츠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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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서의 탈서구중심주의 : 데스콜라의 우주론과 스트래선의 탈전체론을 중심으로
De-Westcentrism in Anthropology: Focusing on Descola’s Cosmology and Strathern’s de-Wholism

차은정(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58輯2020.08299 - 329 (31 pages)KCI등재
DOI : 10.37981/hjhrisu.2020.08.58.299

초록
200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서구중심주의를 둘러싼 논의는 독자적인 이론 생산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주요한 경로가 되었다. 그것은 유럽 중심의 역사서술을 벗어나 인류의 문명사를 다양한 문화의 교류사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을 추동하는 한편, 주변부 지식인의 식민성을 들추어내고 한국 현실을 스스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이론 생산의 문제의식을 견인해내었다. 강정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비교정치사상의 방법론으로서 탈서구중심주의의 다중심성을 제시한다. 김동하는 서구중심주의가 타자에 대해 문화적 인식구조의 비대칭성을 띠면서도 바로 그 타자로 인해 그것을 스스로 지양하게 된다고 말한다. 본 논문은 타자와의 다중심적 공존으로서 최근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복수의 존재론’을 검토하고 한국 인류학계의 독자적인 이론 생산의 방법론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20세기 인류학은 서구 문명의 패권주의가 양산한 전형적인 지식생산기획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의 본원적 속성인 유럽의 자민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서구와 비서구 지식의 불균형한 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21세기에 이르러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데스콜라의 우주론과 스트래선의 탈전체론은 탈서구중심주의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들의 탈서구중심주의 전략은 중심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중심성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수많은 관점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점의 세계들을 숙고하는 방식을 논하는 것이다. 여기서 수많은 관점의 세계들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인공물, 사물, 이미지, 죽은 자, 귀신, 인공지능까지도 포괄된다. 탈서구중심주의는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들을 타자화하는 21세기 지식환경에서 탈중심주의를 시사한다.

Since the 2000s, Westncentrism has become one of the ways to explore ‘an original theory’ in the academic world of Korean social science and humanities. It has suggested the historical awareness of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human civilization as the history of communication with various cultures beyond Eurocentrism, and has leaded a theoretical approach t hat explains a nd i nterprets Korean r eality on its own. Kang Jung-In g oes further than this, p roposing t he m ulti-centrality of de-Westcentrism as a methodology of comparative political thought. Kim Dong-ha argues that Westcentrism has an asymmetrical cultural perception of others while because of the others it goes beyond its centrality. As multi-centrality of coexistence with others, this paper reviews ‘multi-ontology’ which has recently developed in anthropology.
Anthropology in the 20th century has relied on Western intellectual enterprise b y the h egemony of Western civilization. B ut L évi-Strauss criticized its nature, the ethnocentrism of Europe, and attempted to correct this problem of proportion between Western and non-Western. This ‘spirit’ of Lévi-Strauss connected to the 21st century and contributed to the theoretical movement of ‘Ontological turn’. Among all, Descola’s cosmology and Strathern’s de-Wholism suggest the anthropological methodology of de-Westernism. Descola criticizes the asymmetry between West and non-Western in Western epistemology and its privileged status. According to him, it is relationships between human and non-human in the earth including the Western culture that are distinguished four modalities-naturalism, totemism, animism, and analogism. Strathern argues that the transcendental vision of Western civilization has produced a hierarchical order in the single world. She goes beyond its wholism through the artificial extension of the body. Their strategy is not to evade the problem of the centrality, but to generate the multi-centrality. This covers not only humans but also animals, plants, artifacts, objects, images, the dead, ghosts and artificial intelligence. De-Westernism suggests de-centrism in the knowledge environment of the 21st century, which typifies various beings other than human beings. This leaves us with the task of how we would take seriously other worlds that Western intellectual enterprise hasn’t take seri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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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문초록〉
1.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2. 대칭성의 인류학: 데스콜라의 우주론(cosmology)을 중심으로
3. 다수성의 인류학: 스트래선의 탈전체론(de-wholism)을 중심으로
4. 탈중심주의 인류학을 향하여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진흙속의연꽃 -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흙속의연꽃

마치 물속에서 생겨나 성장하는 흰 연꽃처럼, 물에 더럽혀지지 않고, 사랑스런 맑은 향기를 내뿜는다. (Thag.700) 문의메일: bolee591@hanmail.net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흙속의연꽃

2015. 10. 20.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한국불교에서 이상한 풍조가 있다. 그것은 불교와 과학을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공즉시색’을 양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을 탐독하였다. 현대물리학자 프리쵸프 카프라 교수가 지은 이 책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70년대 말에 출간 되어 80년대 많이 익혔던 책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검증되어 스테디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여러 번 읽었다.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던 시절 서양의 종교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현대물리학이 동양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에 관심이 컸다. 더구나 이어지는 카프라 교수의 저서에서는 미래에는 동양사상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이에 크게 고무 되기도 하였다.

더 이상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접목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였기 때문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원음을 접하다 보니 색즉시공공즉시색이 양자역학과 유사하다는 공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괴로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와 과학의 접목

과학과 불교를 접목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주로 학자들이다. 그것도 과학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자들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사이트에 가 보면 수 많은 강연을 볼 수 있다.

이미 종영 된 것이지만 사이트에 보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불교와 과학의 만남, 초끈이론과 화엄사상 박문호특강 <137억년 우주의 진화> 등 이 있다. 심지어 어느 원로의원 스님은 ‘힉스’발견에 대하여 “그 힉스라는 소립자는 그냥 공이 아니고 이 공은 다른 에너지를 만난다든지 하면은 물질화 되는 공이에요. 이런 공은 여태 이야기 안했어요. 불교말고는 안했어요. 그래서 소위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화 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있는 이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자성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하고 거기 언젠가는 발견이 되겠지요.” (고우스님, 백년의 가르침 성철스님 백일법문<법사 고우스님>, 제2회 1.불교의 본질-깨달음의 종교2, 불교TV 2013-02-25) 라고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원로스님은 힉스발견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면서 반야심경에 표현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가르침을 증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과연 과학불교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까?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상

불교를 과학과 접목하려는 시도는 요새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 포항공대 수학과 강병균 교수는 ‘진화연기론’을 들고 나왔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하여 진화론적 관점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 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 작성된 환망공상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과 다른 사상과 남의 종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깊이 사유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에 걸리지 않으며, 이미 걸렸다면 깨어날 수 있다. 거룩한 모습을 한 종교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상, 황량한 바람이 마른 땅을 훑으며 모래를 퍼 올려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환망공상의 사막이다. 인간은 누구나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건너간, 악령이 들끓는, 고비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지밀(至密)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당사자도 모른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위대한 이유이다.

(족외혼: 정신적 유전자의 혼합,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70. 불교닷컴 2015-10-19)

한마디로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상이라 볼 수 있다.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근본주의라는 말이다. 이 근본주의에 대하여 광신이라는 수식을 하였다. 그렇다면 광신적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를 지칭하는 것일까? 주어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종교가 해당 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명확하다. 그것은 초기불교주의자들을 말한다.

뭐? 광신적 근본주의자라고?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을 기반으로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 다른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경전위주이다. 그런데 강교수 마치 초기불교 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주의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 그것도 광신적 근본주의라 한다.

근본주의는 나쁜 것일까? 타종교의 근본주의를 보면 악한 것임에 틀림 없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근본주의 특징은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수 많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칼에 의하여 전파 하였다.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유일신교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마치 불교에도 근본주의자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것도 광신적이라 한다.

강교수가 말하는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어떤 것일까? 이는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이라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근본주의자들은 경전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바이블의 한구절 한구절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초기경전 한구절 한구절을 믿는 것이 나쁜 것일까?

경전을 믿고 따르는자 들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 특히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불교근본주의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위험한 것일까? 강교수 말대로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라고 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비판의 대상이다. 이는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에 따른다. 그러다 보니 지난 역사가 증명하듯이 수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 그렇다면 불교근본주의자들도 유일신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까? 아쉽게도 강교수는 동일시 하는 것 같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열렬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면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님의 가르침이 평화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 역사적으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전도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칼로서 또는 폭력으로 개종 시킨 적이 없다. 왜 그런가? 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 어디에도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병균 교수는 어떤 근거로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이라거나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라는 말을 하였을까? 더구나 “어떤 이들은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환망공상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능욕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강병균 교수는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왜 필요한가? 이에 대하여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2015-06-02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을 올리게 된 동기는 어느 법우님이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라는 글을 보내 왔기 때문이다.

조성택교수 말하기를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또 모두 연결되어 있어서 뺄 수도 없다. 그럼에도 경전적 도그마에 빠졌다느니 경전을 맹신한다는 자들의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과연 한 번 읽어 보기나 하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다. 그럼에더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등따습고 배부른 자의 환망공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회의론자들은 의심으로 경전에 대하여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선별해서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러다 보니 경전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불교철학자라 말하는 조성택 교수도 그런 케이스이다.

불교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불교학자 조성택 교수는 경전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빠알리니까야에 대하여 그렇다. 조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라 하였다. 심지어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라 하여다. 일부는 동의할 수 있지만 모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전의 전통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종교창시자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는다. 말을 하면 제자들이 기억하였다가 전하는 방식이다. 8만 4천 법문이라는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구전 된 것이다. 그러다 후대에 문자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후대에 편집되었다느니 조작 되었다느니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는 것은 가르침을 대하는 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과학불교

대체로 학자들은 경전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전에 의지 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로 몰아 세우고 경전을 광신한다고 폄하한다. 한마디로 그들의 눈에는 초기불교주의자들은 광신적 불교근본주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에 과학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불교를 말한다.

과학불교를 말하는 자들은 불교를 과학적으로 재해석한다. 과학적 지식으로 불교를 까발려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대표적으로 진화연기론 같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과학불교는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과학 자체가 물질을 기반을 둔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론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부처님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십이처와 십팔계의 가르침을 말하였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의 물질과 정신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강교수류의 과학주의자들은 우주를 도입하고 식물이나 광물을 끌어 드린다. 또 지렁이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강교수의 환공망상 시리즈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물질-정신현상 외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말룽끼야뿟따가 우주에 대하여 물어 보았을 때 침묵한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물질에 기반을 두고 존재론에 기반을 둔 과학으로 불교를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인식의 지평을 열어야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오온에 대한 탐구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는 다른 아닌 인식론이다. 오온을 탐구하여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로 귀결된다. 이는 인식의 확장이다.

불교는 인식론이다. 왜 인식론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접하면 인식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접하기 전에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밖에 몰랐지만 가르침을 접함에 따라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이는 사성제의 진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자중에 사성제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것은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생노병사 등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부처님이“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였을 때, 누군가 “아니요,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괴로움의 진리를 말하였을 때 누구나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수레 바퀴는 콘단냐의 깨달음이후 지금까지 굴러 왔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요약 되어 있는 것이 ‘초전법륜경(S56.11)’이다.

반야심경 대신 초전법륜경을

초전법륜경을 법회시간에 독송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대승불교의 정수 반야심경 을 초기불교의 정수 초전법륜경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은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가르침이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압축적으로 표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 한 것은 대승경전 전체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초전법륜경은 초기경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초전법륜경을 늘 수지독송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강교수는 “어떤 이들은 전 세대가 뱉어낸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 라 하였다. 과연 초기경전을 읽어나 보고 한 소리인지 의문이다.

백인백색의 불교

초기불교경전 즉,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이다. 그럼에도 후대에 편집되고 조작된 것이라 하여 불신하는 회의주의자들이 있다. 특히 좀 배웠다는 학자들이 그렇다. 스님들과 함께 불교의 기득권 세력이라 볼 수 있는 학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폄훼하고 능멸하는 것이다.

강교수는 “자기 종교만 옳다거나 경전의 말은 한 구절도 빠짐없이 문자 그대로 모두 옳다는 망상”라 하였다. 강교수 말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망상일까?

한국불자들은 불교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경전을 믿지 못하고 경전을 무시하고 경전을 부정하다 보니 백인백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인에게 백가지 불교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불교는 스님 수 만큼이나 불교가 있고, 학자 수 만큼이나 불교가 있다.

어떤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힌두교 교리를 듣는 것 같다. 또 어떤 스님은 부처님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교회에서 목사들이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한국불교는 복홥화 되었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로 한국불교힌두종 또는 한국불교기독종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을 무시하고 자기이야기만 하다 보니 백인백색의 불교가 되었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불교에서는 자기이야기 하는 사람을 인정해 준다. 경전에 근거해서 말하는 사람을 덜 깨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소식 했다는 사람들의 법문을 들어 보며 모두 자기이야기이다. 거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매우 다양한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강병균교수의 진화연기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불교가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바이블을 맹신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평화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가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자들은 경전에 의존해야

불자들은 경전에 의존해야 한다. 아무리 깨쳤다 해도 경전에 쓰여 있는 가르침을 능가할 수 없다.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경전에 의지하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다. 그런 초기경전은 방대하다. 그렇다고 다 읽을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초전법륜경에서와 같이 사성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발자국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이 포섭된다. 마찬가지로 사성제는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포괄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에서 사리뿟따존자는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M28)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성제 하나만 이해해도 팔만사천 법문을 아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럼에도 강교수는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의 환망공상을 공부하느라 평생을 허비한다.”라 하였다. 대체 사성제를 알고나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경전을 읽어나 보고나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

초기경전을 멀리함에 따라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철저하게 경전에 의존한다. 그런 경전에는 평화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불교근본주의자가 된다고 하여 이슬람원리주의자나 기독교근본주의자를 연상케 하는 “광신과 근본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표현은 무지의 극치이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는 자의 환공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백인백색의 불교가 된 것에는 경전을 무시해서 발생한 것이다. 경전을 폄하하고 무시하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힌두교인지 기독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부처님이 한번도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기도가 성행하는가 하면 돈으로 매수 하는 듯한 천도제가 유행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부스님들의 막행막식은 도를 넘었다. 스님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은처하는 등 온갖 범계행위가 만연 되어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그것은 경전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가르침을 망상으로 여기는 한 한국불교는 진화연기론 같은 혼란으로 빠질 것이다. 경전을 멀리 하였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담마위자야(Dhammavijaya)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평화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소까 대왕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아소까대왕이 있다. 아소까대왕은 깔링가전투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한 후 전쟁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진하였다. 그것이 담마위자야(Dhammavijaya)이다. 왜 담마에 의한 정복인가?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아소까대왕은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였다. 불국토로 만들기 위한 동기는 첫째로 온 세상을 전쟁 없는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둘째로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셋째로 이웃나라와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었고, 넷째로 세상의 평화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동기로 담마위자야 즉,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추진하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지금까지 굴러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 이렇게 막강한 사군을 거느린 군대가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이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네 가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이를 부정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 왔다. 그래서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가능하다.







Dhammacakka


우리는 왜 담마의 정복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불교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이다. 다음과 같은 아소까비문으로 알 수 있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아소까 바위 칙령13)


2015-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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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이쁜하마2015.10.20 10:44

불교를 과학적 시각에서 본 것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큰스님의 입에서 불교의 과학적 분석이 거론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달라이라마 같은 경우도 불교를 최신과학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연구하는데 아주 호의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티벳스님들의 명상상태를 심리학 뇌과학의 입장에서 연구하는 논문이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나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에서는 윤회의 과학적 근거로서 서구에서 환생했다고 자처하는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거론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불교에서의 윤회의 근거가 니까야 경전 도처에 존재하고 주석서에서는 아주 많이 거론되는데 굳이 서구의 환생스토리를 성철스님께서 얘기하신 것은 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큰스님 조차도 초기불교 니까야 경전을 잘 모르고 계셨다는 반증이 아닐까 해서 그렇습니다.

아뭏든 불교를 과학의 토대에 올려놓고 해부하고 분석하는 것은 저 개인적으론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교학적 지식이나 수행의 경험이 있지 않은 범부가 오로지 자신의 과학적 견해와 타이틀 만을 믿고서 가타부타 하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 때를 묻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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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015.10.20 11:17

왜 부처님 원음말씀이 들어있는 근본불교경전들이 있는데.. 어려운 한자로된 대승경전류로 불교를 말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읽으면 너무나 쉬운 초기근본경전들이 있는데 근본경전을 무시하고 뭐를 하자는 건지.

금강경의 공사상 중생구제(제도) 또한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수행정신에 다 녹아있다 생각되며 사성제 팔정도 수행과정속에 실현되는 문제이지 근본을 무시하고 중생구제를 대승의 전유물인양 인식하며 부처님 원음말씀을 소승이라 폄해하는 한 한국불교는 더욱더 부처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천도제나 지내면서 복을 비는 종교로 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좋은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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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화지혜2015.10.20 12:09


가장 오해받고 잘못 쓰이는 말이 근본주의입니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종교의 근본인 진리와 선,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경전에 매여 어떻게 광신자가 될수 있나요?
오히려 모든 종교는 진리와 선, 조건없는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늘 되돌아가야 합니다.

가장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 대상은
경전이 아니라 자기견해입니다.

경전이 수많은 사람의 검증을 거친 일종의 집단고백이라면
자기견해는 검증을 거치지 않고 무지와 편견에의한
독단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종교의 근본을 항시 생각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분명히 알고
수행과 실천을 통해 정진하는 가운데
올바른 자기견해를 정립해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종교관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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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2015.10.20 16:04 신고

지당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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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티2015.10.20 17:06 신고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사성제 하나만 진리로 받아들여도

부처님의 8만 4천법문을 모두 인정할 수 있습니다.

육도윤회,천신 등의 개념도

사성제 논리로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당연한 논리입니다.

다만 후대 주석가들이 법구경을 설한 인연과 같은

설화이야기는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사성제의 틀에서 벗어난 가르침은 없습니다


즉 사성제만 인정하면 되는데

대부분의 한국 불자들은

'공'사상을 불교의 핵심교리로 보기 때문에

윤회도 공덕도 부정하고, 단멸론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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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sha2015.10.21 09:42 신고

사두__()__사두__()__사두__()__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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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10:38

비밀댓글입니다답글
수정/삭제

여기로...2015.10.21 16:05


가보세요. ~ http://cafe.naver.com/jetavana/702

초전법륜경 독송용 파일과 mp3파일의 첨부파일들을 다운 받을 수가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은 니까야 경장 속에 들어 있는 경입니다.

지금 이 사이트에서 초전법륜경으로 검색을 하시면 관련 글들을 읽으실 수가 있으며

네이버 검색으로도 초전법륜경 단독으로 출간된 책들이 몇 권 있는 것을 찾을 수가 있네요……


수정/삭제

강진바다2015.10.30 06:40 신고

질문하나
연기와 무아인데
고정되지도 영원하지도 않는 무아 어떻게 윤회가 성립됩니까?
궁금합니다답글
수정/삭제

2015.10.30 06:41

비밀댓글입니다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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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댓글 5  진흙속의연꽃

2015. 6. 2.
http://blog.daum.net/bolee591/16156400
--
근본주의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주로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다보면 흔히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경전을 맹신한다는 비판이다.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연꽃님 글을 애독하고 있지만 가끔은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있는 것같기도 합니다. 경전은 100% 옳지는 않습니다.”

경전의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충고의 글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가 100%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녹음해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빠알리 니까야를 100% 확신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단어하나, 문구 하나, 문장 하나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에 빠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2011년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을 주도 하였던 고려대 조성택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조성택교수, 법보신문,2009-09-30) 

 대체로 학자들은 경전 전승과정에 의문을 표현한다. 학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 경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교수는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깟사빠존자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 하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라고 하여 결집을 주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대중들이 합송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빠알리 니까야가 성립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담마 아닌 것이 섞여 들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로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문자로 보전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전승과정에서 편집이 있을 수 있지만 큰 틀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 부처님의 말씀이 종횡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담마 아닌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짜여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빠알리 니까야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열반후에 500명의 아라한이 합송한 것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이미 제자들에게 암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남아 있는 ‘사띠’의 뜻이라 볼 수 있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필기구도 없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이를 되새겨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45년 동안  부처님 재세시 제자들은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는 일이 일상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좋은 예가 숫따니빠따의 제4장(Aṭṭhaka Vagga)과 5장(Pārāyana Vagga)을 주석한 닛데사(Niddesa)를 들 수 있다.

닛데사는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처님 재세시 폭 넓게 암송 되어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되새기고 사유하고 암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대에 편집되거나 조작 되었을 것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불교가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꺄야 원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단어 하나, 구문 하나, 문장 하나에 이르기 까지 원문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여기에 다른 해석이 달라 붙으면 안된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경전적 도그마라고 해도 상관 없다. 왜냐하면 경전에 의존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원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원음을 멀리 함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어 왔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비불교적 행위나 사상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멀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불교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불교근본주의자들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장 평화로운 자들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시대에 니까야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별적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전승과정에서 다른 사상이 혼입 되었다든가, 편집자의 생각이 실렸다든가 하여 100% 부처님의 원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자신의 깜냥으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초월적 존재나 신비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의론자들의 말대로라면 니까야에서 이것 저것 다 빼고 나면 수행과 관련된 몇 개의 경만 남는다. 또 회의론자들이 늘 하는 말이 “부처님은 현세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였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윤회와 업에 대하여 서슴없이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 내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물론적 단멸론자들이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경전을 신뢰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적 근거 없이 남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모두가 빠알리 니까야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2015-06-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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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海山 김 승규
2015.06.02 13:34 신고
깊은 성찰의 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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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평화지혜
2015.06.02 15:23
[세존]

수행생들이여,
세상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 응송, 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우지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아서 성찰을 얻지못하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배우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생들이여 가르침에 대하여 잘 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생들이여,
세상에 어떤 훌륭한 사람들은
경, 응송, 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잘 규명하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여 성찰을 얻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배우지 않으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한다.

그들이 잘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생들이여 가르침에 대하여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M 1-3 뱀에 대한 비유의 경


오늘도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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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sa-soo
2015.06.03 00:59 신고

1700 여년전 중국을 거쳐 이땅에 들어온 붓다의 가르침이 이제 비로소 지난 일이십년 동안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과 "같다 할수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니까야를 읽어 나가면 나갈수록 매우 다르다 .. 극명하게 다르다 라는 사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한사람의 가르침이라 할수 있을런지 회의하게 합니다

백가지 이야기중에 매우 중요한 핵심이 열가지이고 아흔가지가 주변이라 할때

그 주변 아흔 가지가 같을 뿐 중요한 핵심 열가지가 다르다면 그것을 같은 것이라 할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그 둘이 다 맞든 또는 둘다 틀리든 아니면 어느 하나가 맞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근본 교의상의 차이점이 있는 두 가르침이 둘다 맞든 둘다 틀릴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논점 ..혹은 종교적 교의..가르침의 핵심에서 빈번하게 180도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에 경악하였습니다

저의 이러한 개인적 소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강하게 비난하실 분들이 꽤나 있으실줄 압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1700년전 전래되어 현재에 다다른 붓다의 가르침과 이십년전부터 전래된 붓다의 가르침 그 둘을 병립하고 병존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가르침에 회색은 있을 수 없으니 그 둘을 임의로 섞어 놓아서도 않되는 것이며 이것도 불완전하고 저것도 불완전하니 그런 시시비비랑은 말고 그냥 좋게 묻어 가자는 말들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20년간 읽어 왔던 중국을 통하여 전래되어 온 붓다의 교설이 담긴 책들을 송두리채 뒤로 미루고 이제 당도한 일이십년 상간의 붓다의 교설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로 매진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입니다

늘 연꽃님의 친절한 가르침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늘 경안하십시오 ..감사합니다 ()...

김종랑
2015.06.14 19:36 신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방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방편이 너무 난무를 하면은 부처님의 기본 사상과 배치가될 위험성이 큽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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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ksha
2015.10.2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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