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3

알라딘: 메이지의 그늘 - 영혼의 정치와 일본의 보수주의 이찬수

알라딘: 메이지의 그늘
메이지의 그늘 - 영혼의 정치와 일본의 보수주의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3-01-31































Sales Point :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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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현재의 자민당 중심의 보수 일색 정치의 일본이, 메이지 시대 이래로 문화, 철학(종교) 사상에 눌어붙은 짙은 그늘을 여전히 간직한 체제라는 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지난 200년간 일본인의 종교적 내면부터 사회적 정서, 정치적 문법까지 종합함으로써 일본 전체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이를 통해 일본이 주변국에 대한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 한국인으로서는 궁금한 문제들을 명쾌하게 다룬다.

메이지, 신도(神道), 호국영령, 천황제, 멸사봉공, 혐한, ‘일본회의’, 국민(國民) 등의 키워드를 근간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사죄하지 않는 전범국가, 종교적 천황주의, 보수주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같은 속성으로 채워 근현대 일본의 속살들은 단지 ‘호전적인 일본인의 침략 근성’으로 설명되는 역사적 사건의 개념어가 아니라 철저한 종교철학적 토대 위에 구축된 체제라는 발견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는 그간 한국인이 주로 역사적인 맥락에 집중하여 일본을 파악해 온 것과 달리, 심층에서의 일본 이해를 가능케 한다. 특히 일본의 보수주의란 진보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이 아니라,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메이지 시대 ‘영혼의 정치’ ‘제사하는 국가’의 전통과 정서를 승계하는 집단적 사고방식이자 태도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것이 일본이 왜 이웃국가와 국민들에게 정성 있는 사과를 함으로써 과거사를 벗어나서 미래로 향하는 길을 택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렇게 일본을 깊이 알아야만, 비로소 한일관계의 해원과 동북아 평화 체제 모색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목차


서문

Ⅰ. 메이지 시대와 그 그늘
한국과 일본, 왜 꼬였나 / 일본 보수 세력의 탄생 /호국영령과 애국주의 / 신도의 국가화와 영혼의 정치

Ⅱ. 영혼의 정치학: 메이지 시대와 종교적 정치
귀신 담론의 정치성 / 메이지유신과 호국영령 / 국학과 제사 문화 / 종교적 정치성과 영혼의 사회화 / 재앙신 신앙과 혼령의 인격화 / 현창신 신앙과 ‘천황교’ / 국가, 확대된 가족 / ‘무종교’라는 종교 / 행위의 모호한 주체

Ⅲ. 천황제의 현재: 새로운 종교로 이어지는 제사 문화
제사와 위령의 나라 / 영계에 대한 강조 / 신종교의 선조공양 / 수직적 국가주의의 거부 / ‘영혼’은 해석적 실재

Ⅳ. 제사의 정치, 영혼의 거처
국가의 제사 / 살아 있는 사자(死者), 영혼의 국가화 / 종교적 정치와 제사의 문화화 / 전쟁국가와 천황교 / ‘천황교’의 이중성

Ⅴ. 오오야케(公)와 와타쿠시(私): 일본 너머는 공(空)하다
공(公)과 사(私)라는 것 / ‘와타쿠시(私)’와 ‘혼네(本音)’ / ‘멸사봉공’으로서의 공공성 / 조화를 일치로 이해하다

Ⅵ. 불교와 천황제: 불교는 어떻게 국가주의에 기여했나
니시다의 철학과 공(公)에 포섭된 공(空) / 논리에만 충실한 스즈키 다이세츠 / 군국주의에 공헌한 불교계 / 이념화된 감정, 희생시킨 이들의 정당화 / 선과 의지: ‘하고자 함’과 ‘함’의 간격 / 니토베 이나조의 경우 / 선(禪)과 현실, 다시 스즈키 비판 / ‘상(相)’을 간과하다 / ‘종의 논리’와 타나베 하지메 / 여전한 한계와 근본적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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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8~9가령 일본의 총리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는 소식은 거의 어김없이 한국과 중국의 뉴스에도 등장한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과거의 불법적 침략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사과할 줄 모른다며 어김없이 비판한다. ... 그런 관례나 정서의 근간을 찾아가다 보면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도달한다. ... 메이지 천황 이후 세 명의 천황을 더 거쳤지만, 오늘날 일본 문화의 전반에는 여전히 ‘메이지의 그늘’이 걷히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시대를 보면 현대 일본의 어두운 속살이 보인다는 뜻이다. - 서문 접기
P. 70~71일본인은 이른바 ‘일본교도’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도 ‘한국교’라고 불릴 만한 문화 안에서 그 문화에 어울리는 삶을 자신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지만, ‘일본교’의 경우는 그 삶의 방식이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그 ‘일본교’의 내용을 천황제가 강화시켜 온 것이다. 1945년 패전 이후 천황의 신적 차원[人神]은 공식적으로 포기되고 상징적 존재가 되었지만, 상당수의 일본인이 그 상징성을 어떤 이유에서든 유지하는 것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천황제의 영향력이 일본인의 내면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영혼의 정치학’ 접기
P. 106패전으로 국가적 영광에 상처를 입힌 사건의 희생자들은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과 교전을 벌였던 오키나와에서 무수히 희생된 자들은 국가가 제사지내지 않는다. 고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키나와만이 아니다. 제사드려지지 않는 국내외의 무수한 사자(死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일본인의 마음’을 속여 국가와 야스쿠니가 연속적이라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허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 … 국가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으나 제사드려지지 않는 안팎의 무수한 사자(死者)들에게는 야스쿠니의 존재 자체가기만일 것이다.” - ‘제사의 정치, 영혼의 거처’ 접기
P. 131일본은 오랜 과거부터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했지만, 특히 메이지 시대에 신도를 국가적 정책 속에 융합시켜 천황 중심의 ‘국체(国体)’를 확립시켜 가는 과정은 멸사봉공적 공공성을 잘 보여준다.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 국민에게는 국가라는 ‘오오야케’를 위해 진력해야 하는 멸사봉공적 자세가 강력했던 탓에 각종 전쟁까지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가 일본에서는 문지방 안의 자가(自家)의 세계(집·가정·자신)로서 그 영역을 인정받고 있었던 만큼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사’에게는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국민은 ‘국가=공’을 위해 가족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렸으며, 자신의 재산과 생명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리고 전쟁에 종사했던 것이다. - ‘오오야케(公)와 와타쿠시(私)’ 접기
P. 194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일본인이 한국 등 이웃 국가가 겪은 상처를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발생한다. 20세기의 일본 역사를 객관적으로 공부해보지 않은 탓이 크다. 그리고 일본의 우익에게는 메이지 시대 이래 국가화한 제사 문화와 그에 따른 군사주의적 팽창이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어 있다시피 한 탓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도 비록 군국주의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일본인 대다수가 의식하지 못한 채 ‘영혼의 정치’ 또는 ‘제사의 정치’적 역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연결된다. 이렇게 일본의 보수는 문화화한 ‘종교적 정치’ 혹은 ‘정치적 종교’의 정서를 유지해 오고 있다. - ‘반일과 혐한, 그 역사와 전복의 가능성’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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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더보기

최근작 : <메이지의 그늘>,<보훈과 교육>,<보훈, 평화로의 길> … 총 6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메이지 시대를 보면 현대 일본의 어두운 속살이 보인다
일본국민은 모두 ‘천황교(天皇敎)’ ‘일본교(日本敎)’의 신자로 살아간다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나 제사 드려지지 않는 무수한 존재가 있다
멸사봉공에 볼모로 잡힌 일본, 일본인, 일본사를 들여다본다
20세기 일본사를 객관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철학 차이 - 한일청구권 협상에 개인 배상이 포함되는가 아닌가

현 정부의 일본 손들어주기 - 비극의 역사 재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역사의 ‘그늘’을 되돌아보는 공동의 시간을 더 만들어야 한다

악의 평범성, 일본과 독일의 차이점과 동질성

언제나 ‘일본의 사과와 배상’ 문제의 비교 대상이 되는 독일의 경우를 돌이켜 보며 ‘독일과 일본’의 차이점을 말하지만, ‘전범국가’라는 면에서 보면 독일과 일본의 유사성이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두드러진다. 일찍이 나치 체제하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의 실무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한 한나 아렌트는 취재기를 모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이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악마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아렌트의 이러한 통찰은 탁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은 ‘전시 체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도처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일 터이다.

‘일본의 평범성’ ―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고력 결핍증
이 말을 그대로 일본의 경우로 가져와 보면, 일본의 경우 동아시아 일대를 전화(戰禍)로 내몰고 수백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행위를 행하고서도 오늘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오불관언하는 것은 그들이 그 문제에 관한 한 ‘사고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잘못을 저질렀지만 사과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지 못하는 판단력 결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1차적으로 20세기 전후의 역사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데서 비롯하지만, 근본적으로 메이지 이래 ‘일본 영광론’을 한 번도 떨쳐 버리지 않았던 ‘일본국의 근대 사상, 철학, 정교, 문화’에 두루 걸쳐 있는 ‘메이지의 그늘’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침략의 역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이나 중국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일본만 기억하거나, (한일청구권협상 등에 따라) 배상이 끝난 ‘위안부’나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를 새롭게 들고 나오고, ‘(한국의) 법원조차도 정치적인 판결을 하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국가와 국민’으로서 한국을 멀끔히 쳐다볼 뿐이다. 그들이 ‘정상국가 일본’을 그토록 갈구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평범한 일본의 본래’ 모습이라고 여기는, ‘일본의 평범성’에 대한 갈구에 다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인)으로서는 국가(정부)든 국민이든 간에 ‘국가 간에 협상(한일협상)’이 끝난 문제를 ‘국민적인 반발’을 이유로 ‘뒤집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정신이 천황이며, 따라서 국가의 결정은 ‘신(神)’의 명령과 같은 것이며, 우리(일본)이 그러하니, 다른 나라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그러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일본인에게 한국인은 ‘몰상식’하고 ‘평범하지 못한’ 미개인으로 비치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의 ‘영혼의 정치’와 ‘제사하는 국가’
아이히만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일본(국가)나 일본인(국민)의 ‘사고력 결핍’은 결국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점의 교육체계가 빚어낸 의식화(세뇌)의 산물이다. 아이히만이 ‘나치즘’이라는 이념의 사생아라면, 일본은 메이지 이래 일본이 치달아온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 ‘국가신도’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 체제 전체의 종교화와 깊이 관련된다.
이 책에서는 메이지 정부가 오랜 민중 신앙인 신도(神道)를 국가적 통치 시스템의 근간으로 삼는 과정, 즉 부모에 대한 효행을 선조에 대한 제사와 연결시키고 제사의 대상을 일본의 신화적 기원인 아마테라스에까지 확대시켜서,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천황을 숭배하게 하고, 그를 통해 천황 중심의 통일 국가를 성립시켜온 과정에 대해 조목조목 정리한다.
특히 전몰자의 혼령, 즉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제사함으로써 국민의 호국적 자세를 강화하고, 그를 통해 국민의 정신적 통합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전략을 이 책에서는 ‘영혼의 정치(학)’이라 명명한다. 죽은 자(조상신, 호국영령 등 귀신 전반)가 산 자를 움직이는 일본 특유의 ‘영혼과 제사의 정치’의 특징을 역사적 흐름과 주제를 따라가며 설득력있게 분석한다.

‘천황교’의 탄생, 오오야케(公)·와타쿠시(私)

메이지 시대 이른바 제사의 정치를 중심으로 사실상 ‘천황교’가 탄생했다. 일본인은 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의식중에 거의 ‘천황교 신자’가 되었다. 이 천황교는 공과 사를 분리하는 일본식 ‘오오야케(公)’와 ‘와타쿠시(私)’의 개념을 더 강화시켰고, 이것이 이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일본적 대인관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일본이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이유, 인류 보편의 가치보다는 내부의 가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일본에는 왜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지, 한국과는 상이한 일본인의 ‘하늘’관 등을 밝힘으로써, 일본의 문화적 정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한일 간 소모적 갈등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전투기를 헌납하는 종교와 전쟁을 옹호하는 철학

왜 일본 최고의 지성들이 천황제 안에 머물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기만 했는지 그 철학적 논리와 오류를 밝힌다. 서양 사상가들을 일본 연구로 끌어들였던 니시다 기타로, 스즈키 다이세츠, 타나베 하지메와 같은 일본 최고의 철학자들은 물론 여러 종단들이 천황제를 찬양하고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된 배경과 논리,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일본적 ‘그늘’ 혹은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한일기본조약, 종군위안부, 강제징용 문제 등에 대한 한일 간 해석의 차이가 왜 이렇게 큰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치즘이 ‘민주주의적인 절차’(국민투표)에 의해 권력과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마침내 반민주주의적 독재(총통) 체제를 달성해 냈다면, 일본의 경우 메이지 이래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일본교(日本敎)’ 체제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나가고, 종교적(정서적, 신념적)으로 교화해 나간 결과물이다. 일본인들이 한반도와 만주-중국대륙을 침략하고, 태평양 전쟁을 발발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을 향해 종교전쟁을 벌이며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마녀사냥으로 세계를 정화(淨化)하는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으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천황(神)을 위해 순교(殉敎)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메이지의 그늘, 천황의 발 아래 ‘가스라이팅 된’ 일본, 일본인, 일본 역사이고, 그 본질은 현재의 일본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동아시아와 세계를 전화(戰禍)에 휩싸이게 한 역사는 되풀이될 것인가

현 정부 들어 노골적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버티기로 말미암아 온전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절망적인 ‘해체’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억지를 부리며 버텨 온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실질적으로 국내 법(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며, 국제적인 상식(‘위안부’ 문제)마저도 무시하면서, 결과적으로 일본을 위한 정치외교를 펼쳐나감으로써, 국민적 자괴감, 분노, 허탈감을 촉발시키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국민적 좌절감이나 우려라는 정서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 역사의 과오를 돌아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오히려 과거 역사를 되풀이할 빌미와 동력을 제공하는 측면이다. 일본은 최근 ‘선제적 방어’라는 희한한 개념을 들고 나와 ‘공격(침략)전쟁 가능’ 국가로의 실질적인 전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이든, 배후에 있는 강대국(미국)의 ‘버튼 누르기’에 의해서든, 일본은 여차 하면 (실질적으로는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두고) 북한에 대한 국지적인 혹은 전면적인 도발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을 완비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분노 조절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을 제대로 알 때다
일본의 무뢰함과 무식함과 무책임함을 욕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수십 년을 되풀이해 온 방법으로 한일 관계에 대처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인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알지 못하여 이렇게 말하는지, 그들이 무엇에 홀려서 다시 죽을 구덩이(군국주의 부활)를 열심히 파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메이지의 그늘: 영혼의 정치와 일본 보수주의��는 “‘국민’보다 ‘국가’와 ‘국가주의’가 상위에 있던 일본적 ‘공기’”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을 앎으로써 일본을 이기고, 일본을 이김으로써 일본을 화해의 광장으로 맞아들이는 멀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을 위한 일이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과거의 식민 역사에 대한 기억의 상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의 상처를 씻는 길이며, 한-일 관계의 건전한 발전은 곧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행복한 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관련 학자들은 이 책을 이렇게 평가한다

“일본이라는 산맥의 전체상을 조망하면서 일본 사상의 심연까지 과감히 파헤친다. 일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종교적 일상의 공기와 정치적 그늘의 음습함을 일깨워준다.” - 가미야마 미나코(나고야가쿠인대학 준교수)

“메이지의 ‘그늘’은 어두운 그림자뿐만 아니라 시원한 그늘이나 보호막으로서의 그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영혼의 정치’에 깔려 있는 ‘모순’에 대한 일본인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낱낱이 풀어헤쳐 보여준다.” - 박규태(한양대 일본학과 교수)

“현재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한 ‘발명’이며, 말 그대로 ‘메이지’는 아직도 역사화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종교관, 정치관, 역사관,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간행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 김경묵(와세대다학 문학학술원 교수)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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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시대의 그늘을 제사문화와 천황교라는 종교 시각에서 풀어냈다. 흥미로운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실마리가 보인다. https://www.betulo.co.kr/3199
자작나무 2023-02-08 공감 (1) 댓글 (0)




하늘신앙이 없는 일본

  •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空)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를 일본인이 최초 번역할 때하늘(天)을 空(そら)라고 번역하는데서 일본의 하늘신앙 부재를 지적하는 저자의 주장이 신선했다.
  • 일본이 한국보다 기독교를 훨씬 먼저 수용했음에도 기독교인 그 숫가 아주 작은 이유 중 하나가 잔인한 박해도 있었지만천황제 중심의 종교이념으로 인한 하늘신앙 부재도 한 이유라는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권용철 2023-02-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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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메이지의 그늘 -영혼의 정치와 일본의 보수주의 < 오현석 일간투데이

[서평] 메이지의 그늘 -영혼의 정치와 일본의 보수주의 < 북리뷰 < 라이프 < 기사본문 - 일간투데이



오현석 (북경대학 일어일문학 박사. 중국 화북전력대학 한국어 교수)


[일간투데이 양보현 기자]

한·일 갈등 뿌리는 서로 다른 의식 구조
日천황, 메이지유신 국가종교 시스템 정점
절대적·시원적 존재로서 무오류·무책임성
머나먼 화해의 길 첫걸음은 상호 이해로부터


“참을성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 앉아 줘. 저쪽 풀밭에 말이야. 그럼 내가 곁눈질로 살짝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거든. 그렇게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앉는 거야.”(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했다. 그리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시간을 두고, 아주 서서히.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단박에 되는 일은 잘 없다. 거리를 두고 말을 아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여우가 했던 말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깊은 사막을 넘어 동아시아의 두 나라에서도 말이다. ‘메이지의 그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일본 연구가 집약되어 녹아 있다. 청년기의 지적 호기심에서 장년기를 거치며 원숙해진 실천적 관심까지. 수많은 논문에서 다져진 생각이 고스란히 농축되었다. 거기엔 신학과 불교학의 언어가, 통일과 평화학의 몸짓이, 레고 블록처럼 짜여있다. 작은 책이지만 결코 작거나 가볍지 않은 이유다.

책의 처음과 마지막 꼭지. ‘한국과 일본, 왜 꼬였나’. 그리고 이루어야 할 ‘다른 정서의 조화’. 양 끝에 배치된 두 개의 소제목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왜’ 갈등하나, 그래서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쉽지 않다. 난제(難題) 중의 난제다. 두 소제목 사이의 거리는 아득하다. 우주의 깊이만큼이나 멀어 보인다. 그 거대한 사이, 틈새마다 곡절이 가득하다. 그 지도리에 일본의 ‘천황제’와 ‘영혼의 정치’가 있다.

저자는 말한다.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은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을 제사지냈다고. 이른바 ‘호국영령’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제사다. 그 제사의 정점에 ‘천황’(天皇)이 있다. 죽어서 신이 된 자들의 계보, 그 꼭대기에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놓인 것이다. 일본 국민이 올리는 모든 제사는 궁극적으로 천황에게 바치는 것이 된다. 종교적 국가 시스템. 메이지 유신이 만들어낸 일본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빚어진다. 메이지 이후 일본인은 세상의 근원이며 절대적 존재인 천황을 넘어서는 가치를 상상하기 힘들다. 양심의 근거 혹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보편적 가치 관념이 약하다. 한국인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느냐!”라고 호통 칠 때의 그 ‘하늘’. 일본인에게는 그 ‘하늘’이 낯설다.


결국,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국토경계선. 거기까지가 일본인이 ‘공(公)’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범위가 된다. 그 토대는 물론 천황이다. 모순은 여기서 시작된다. 천황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지울 수 없다. 세계의 근원이자 존재의 원천이니 오류도 실수도 없다.

나쁜 일이 벌어졌다면 당시의 ‘공기’[구키, 空氣]가 만들어낸 결과다. 일시적으로 형성된 외부적 현상의 산물일 뿐이다. 누군가는 져야 할 ‘책임’은 그렇게 공기처럼 허공에 흩어진다. 이를 이해하면 일본의 많은 것이 보인다. 주변 국가를 침략한 것도, 과거사 반성에 소극적인 것도, 심지어 후쿠시마 오염수를 그렇게 방류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이 책은 쉽사리 ‘화해’를 말하지 않는다. ‘화해’는 괄호 속의 기호처럼 묶여 있다. 기의(記意)는 있으되 기표(記標)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화해는 너무 먼 길이다. 아득하다.

저자의 제안은 간결하다. “서로의 진심을 읽는 공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화해의 첫 걸음은 이해다. 서로를 아는 데서 시작한다. 그들의 몫은 그들에게 두자. 우리는 다만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다시, 사막의 한가운데다. 어린 왕자와 헤어질 무렵이었다. 여우는 말했다. ‘마음으로 보아야 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으로 읽기. 이 책은 그 시작으로 손색이 없다.


양보현 기자 report0330@gmail.com
 

일본 메이지의 그늘, '제사하는 국가'와 '천황교'

일본 메이지의 그늘, '제사하는 국가'와 '천황교'

일본 메이지의 그늘, '제사하는 국가'와 '천황교'by 자작나무숲 2023. 1. 31.

“일본을 알려면 일본의 제사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인권연대가 주최하는 ‘이찬수 교수의 메이지의 그늘’ 기획강좌는 일본에 대한 흥미롭고도 시의적절한 분석을 제시한다. 1월 31일 첫 날 주제는 <메이지 시대의 ‘영혼의 정치’와 제사하는 국가>였다. 이찬수 교수는 메이지유신이 제도화한 ‘영혼의 정치’를 종교학자의 눈으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사를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극단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 “진정한 사과”를 말하지만 일본으로선 그 말의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한일관계 정상화는 죽음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찬수 교수는 “제사를 지내는 건 사실 한중일 공통이지만, 일본의 독특한 점은 죽은 사람은 존엄한 존재인 호토케[佛]가 되고 죽음은 생전의 모든 것을 정화하며, 신에게 책임을 묻는 개념이 희박하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조선인도 합사돼 있다는 걸 바라보는 한국/중국과 일본의 너무나 다른 태도를 생각해보자. 한국/중국에게 천인공노할 짓이 정작 일본에선 왜 문제인지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 정신적 뿌리를 알려면 메이지 유신(維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신은 말뜻을 풀어보면 유지하면서[維] 새롭게 한다[新]가 된다. 유신은 일본의 정신[和魂]을 지키면서 서양 문명[洋材]으로 일본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정신에 해당하는 것이 신토[神道]였다. 이로써 메이지[明治] 체제는 막부에서 천황제로 권력구조를 새롭게 하면서도 실상은 “전근대적 정교일치 국가를 구축(27쪽)”했다. 이로써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서양의 요구를 수용(27쪽)”할 수 있었다. “제사의 대상이 된 ‘귀신’은 제사를 드리는 이들에게 담론의 주체가 되고 문화의 근간으로 작용하며 국가 운영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는 순환적 구조(28쪽)”인 셈이다.







“메이지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각종 전란도 벌어졌다. 이때 죽은 이의 영혼을 국가 차원에서 제사하는, 일종의 ‘제사의 정치’로 사회를 통합하면서 정부의 정책도 정당화해 나갔다(24쪽).” 여기서 생겨난 신조어가 호국영령[護國英靈)이다. “’영령’은 본래 메이지 초기 군대에서 특수하게 사용되던 용어였다가, 일본이 국운을 걸고 벌인 러일전쟁 당시 언론들이 자국 전사자에 대한 존칭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일반명사가 되었다(25쪽).”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있는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에 명기한 “영령을 현창하고 근대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사명은 ‘영혼의 정치’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찬수 교수는 “사실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현충일’에서 보듯 한국도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역시 ‘제사의 정치학’의 연장선이다. “가령 누군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국립묘지에 참배하지 않거나 영혼을 현양하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설령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 이들조차 대통령의 그런 행위를 비판할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높이는 행위가 이미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28~29쪽).”

일본이 한국/중국과 다른 점이라면 메이지 정부가 만든 국가체제에서 찾아야 한다. 메이지 정부는 정치와 종교의 일체화를 통해 천황 중심 국가체제를 만들어 갔다. 메이지 시대 헌법은 천황을 무한한 권리를 갖되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존재로 규정했다. 천황은 헌법의 원천이자 헌법을 초월한 존재로서 말 그대로 ‘신(神)’이 됐다. “물론 천황이 만든 건 아니죠. 메이지 유신 주도세력은 천황을 교조로 하고 교육칙어와 군인칙유를 경전으로 하며 전국에 있는 신사를 교회로 삼는 사실상 ‘천황교’를 만들어낸 겁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은 모두 ‘천황교 신자’가 됐습니다.”

1945년 패전 이후 천황은 ‘인간 선언’을 했다. 이제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됐다. 하지만 그걸로 ‘천황교’는 사라졌을까. 이찬수 교수는 유명한 1988년 당시 텔레비전 화면을 보여줬다. 야구중계를 하는 중간에 히로히토의 체온과 맥박, 혈압을 속보로 내보냈다. 이런 일이 서너달 동안 계속됐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순수한 ‘천황교’의 희생자일까. 이찬수 교수는 “일본인들이 천황교를 이용한 측면도 있다”고 지적헀다.

이런 구조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부산물이 있다. “때로는 전쟁 책임은 천황에 있다는 핑계를 대며 내심 전쟁에 동의했던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일본 국민의 주체성은 희미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유동적이었다(72쪽).” 이찬수 교수는 “행위 주체가 모호해진다. (천황이) 하라고 해서 했으니 자신의 책임은 사라져 버린다”면서 “일본문화론에선 이를 아마에(甘え)와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로 표현한다. 공통점은 책임회피”라고 지적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1921~1991)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이 전쟁범죄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달랐던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일본인들은 모든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어쩔 수 없었어’ 하는 식으로 ‘공기’에 맡긴 뒤, 미국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공기’의 명령에 따르며 전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날 도쿄가 도리어 차분하기도 했다는 것이 이제는 공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데서 오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74~75쪽).” 행위는 있는데 행위 주체가 없는 모호한 상황은 ‘무책임 정치’를 만든다.

‘천황교’는 일본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다음주 화요일(2월7일)에는 오오야케(公)과 와타쿠시(私), 와타쿠시(私)와 혼네(本音)라는 개념을 통해 메이지 시대의 그늘을 짚어볼 예정이다.


쇼와(昭和)천황(1926.12.25.~1989.1.7 재위)이 십이지장암으로 건강이 악화하자 급변사태를 예감하며 일본 방송사들은 병세를 자막으로 내보냈다. 야구중계나 어린이 만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글 검색으로 찾음)

서평 제사의 정치학: 일본국가신도의형성과동아시아의비평화구조 이찬수 [통일과 평화 (5 1 ·2013)]

서평 제사의 정치학: 일본국가신도의형성과동아시아의비평화구조 [통일과 평화 (5 1 ·2013)]

* 子安宣邦, ꡔ鬼神論ꡕ (東京: 白澤社, 2002); 고야스 노부쿠니, 이승연 역, ꡔ鬼神論ꡕ

(역사비평사, 2006).

* 子安宣邦, ꡔ國家と祭祀 - 國家神道の現在ꡕ (東京: 靑土社, 2004); 고야스 노부쿠니, 김석근 역, ꡔ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ꡕ (산해, 2005)

이찬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제사의정치학

이글은일본의문화이론가이자근대사상가인고야스노부쿠니(子安宣邦, 1933~)의책 ꡔ鬼神論ꡕ(귀신론과) ꡔ國家と祭祀-國家神道の現在ꡕ (국가와제사-국가신도의현재에대한서평형식의소논문이다) . ꡔ鬼神論ꡕ은일본의유교관련사상가들이산출한귀신담론의변화과정 을분석하면서귀신담론이어떤의도적해석을거쳐신도 중심의, (神道) 제국주의적정책속에녹아들어갔는지를비평적인안목을가지고설득 력있게풀어나가는책이다이책의방법론적기초는귀신론적언설은. “ 해석학적언설” )이라는짧은문장에집약되어있다 귀신에대한담론. 들나아가귀신제사를통해그제사에참여하는이들을통합시킬수있, 다는정치적제안과정책이그자체로귀신을사회적으로존재하게하는 근간이라는것이다.

ꡔ鬼神論ꡕ의정치학적판본이라고할만한 ꡔ國家と祭祀ꡕ에서는국가와 관련되어벌어진전쟁희생자들을위로하기위한국가적제사가도리어 폭력과배제를정당화하며새로운희생자들을만들어온역설의역사를 냉철하게분석한다 이책에의하면천황을정점으로하는국가주의적. 제사이데올로기이른바국가신도의흐름은사실상여전하며방외자를, , 억압하는근거로작용한다그러면서이러한흐름을방조하거나침묵하. 는사상계에대해서는비판적반성도요청한다.

이두권의책에서는국가운영을위한이데올로기속으로편입된귀 신담론이가정에서의제사를강화시키고전몰자의영혼을국가주도의 제사대상에포함시키는원천으로작용해온역사를비판적으로분석한 다죽은이의영혼이산자를지배하면서성립되어온일본정치사의속. 살을생생하게증언하고있는것이다.

이서평문에서는귀신을국가적차원에서제사하며사회통합의근간 으로삼아온일본정치의역사를제사의정치학이라명명하고서이러“ , 한과정에대해분석해온고야스의학문적입장에대해소개하고자한 다일본의제사정책이동아시아정치의지형을어떻게바꾸었는지동. , 아시아평화의저류는어떻게흘러왔는지상상하는기회로도삼으려한 다서평의형식을띄고있기는하지만고야스의책자체에대한평가라. 기보다는국가적조상제사정책안에담긴정치사적의미와동아시아, 근대사상사의근원적흐름에대해성찰해보려는의도가더큰글이다. 서평을위해일본어원문과우리말번역본을함께읽었으며고야스의, 입장을본문속에직접인용할때는번역문의심한의역을피해가능한 대로원문을직역하며게재했다.

귀신담론의힘

고야스도소개하고있듯이 ), 동양의고전인 논어 에는계로자ꡔ (論語)ꡕ ( 로가스승공자에게죽음과귀신의문제를어떻게이해해야할지질문) 하는장면이나온다 계로가귀신섬김: “ ‘ (事鬼神)’에대해묻자공자가말 했다 사람도잘못섬기면서어찌귀 를섬기겠는가 논어 선진. ‘ (鬼) .’(ꡔ ꡕ )” 공자의관심은사후보다는삶귀신보다는사람에있었다그가귀신, . 자체를부정한것은아니지만공자의이대답은별의심없이귀신을긍, 정하던이들에게귀신의유무및존재방식과관련한논란의원천으로 작용했다공자의영향력속에서사자 의영혼이어떻게산이의삶. (死者) 에관여할수있는지와관련한담론도생겨났다가령주자 는귀신. (朱子) 을부정하지는않으면서공자에게서는발견되지않던이기론(理氣論)의 언어로조상이후손과만나는근본원리를담아내려했다귀신이나사. 람이나기 로이루어져있으되형태가다를뿐이라는입장을펼쳤다(氣) . 이러한해설은한국과일본사상가들의귀신담론및민중의조상숭배 체계에적지않은영향을미쳤고새로운사후담론의또다른기반이되, 었다.

그리고새로운담론의영향하에있는사람들은자신들의이야기를기 반으로다시죽음과그이후에대해생각했고영혼과의교류에대해상, 상했으며조상의영혼에정성스러운제사를지내면서이른바귀신관, , 념을생활화했다이런식으로귀신관념은개인의삶은물론사회체제. 와문화속으로녹아들어갔다.

귀신의존재유무에대한현대인의갑론을박도여전하다 하지만이. 책에서중요한것은귀신의존재유무가아니라유무논쟁을통해제사, 의의미에대한토론을통해어떤형식으로든사자 의세계가산, (死者) 자의사회에영향을미쳐왔고나아가사회와국가를움직이는근간으로, 까지작용해왔다는사실이다귀신론을사회적담론의차원에서이해할. 때귀신은존재유무와관계없이사회를실제로움직이는힘이된다는 것이다.3) 그리고그것이정치적정책과만나면사회통합의강력한근거 가된다는것이다두책의저자고야스는종교나관습정도로치부될만. 한현상에서일본정치가형성되어온과정을힘있는필체로분석해내 고그사회적의미를비판적으로해설하는돋보이는사상가이다, . 고야스는이두책에서종교를정치외적현상으로치부하는이들에 게종교가사회적현상과분리되어있다고간주하는이들에게문화의, , 이름으로종교를은폐하려는이들에게인식의전환을요청한다그에게. 종교정치사회문화등은분리되어있지않으며사상적차원에서하, , , 나로엮여있다 제사라는관습의이름으로벌어지는정치적제국주의. , 사회의이름으로규격화되는종교문화문화라는이름으로정당화되는, 제도적폭력등드러난현상의단면만으로는놓치기쉬운정치적사건들 의의도적복합성을날카롭게분석한다무엇보다제사라는양식을빌어. 국가를위해죽은이들의혼령을집단적으로현양하면서국가적통합을 시도하는일본정치의오랜관행속에숨겨진제국주의적근성을비판적 으로통찰하고솔직하게폭로한다저자의학문적능력과용기가돋보이. 는부분들이다 좀더구체적으로보자. .

국가적제사

고야스에의하면귀신은물론존재한다존재하기는하되다른곳이. ,

 

3) 위의책, pp. 172~173.

 

아닌사람들이하는말속에그리고사람들이지은건물속에존재한“ ” 다.4) 사람들이귀신의유무에대해논하고귀신에대해상상하고또이 야기하게만드는문화혹은담론체계가사실상귀신의처소이다귀신. 은유무논쟁자체는물론가족적혹은국가적제사라는형식을통해이 미그렇게제사를지내는인간적의도에어울리게해석되는방식으로존 재한다는것이다고야스가보기에는귀신은없다는무귀론. (無鬼論)마저 사회적차원에서는유귀론(有鬼論)과비슷한기능을한다.5) 산사람이 만들어가는현실정치속에이른바죽은이의영혼이깊이관여하고있 다는것이다 이러한통찰에저자의방법론적독창성이담겨있다. . 고야스에의하면국가적차원의제사의경우제사를제도화내지문, , 화화하려는이들의의도와해석에따라제사의대상은그제도와문화 속에살아있는실재가된다 담론상의귀신이제도화된문화적형식을. 통해산자들의현실에영향을준다나아가천황에까지연결되는강력. 한문화화과정속에서제사의이념은자연스럽게국가적이데올로기의 근간이된다그것이다른국가에대한침략전쟁도불사하게하는근거. 로도작용한다종교가개입된전쟁의경우가그전형적인사례일것이. 다물론일본의이차대전참전이나한반도및대륙침략을종교전쟁이. ’ 라고보지는않지만실제로 세기동아시아를흔든일본정치안에는, 20 사실상제사를국가적차원으로강화시키면서성립되어온일본식종교 이념이른바국가신도적흐름이강력히작용했다는사실을알수있다, .

그런점에서제사행위는그것이가족안에서이루어지든국가적차, 원에서거행되든현실과괴리된하나의종교에만머물지않는다제사, . 의대상이된귀신은제사를드리는이들에게담론의주제가되고다시,

 

4) , p. 8.

5) , pp. 169~174.

문화와정치의근간으로작용하며나아가국가형성의이념적기초를, 제공하기도한다는점에서이미생생한사회적실재이다, .

이것은담론양식을적절히조율하면살아있는이들의삶의양식도재 편할수있다는뜻이기도하다고야스도이부분에관심을기울이며국. , 가신도를기반으로성립된천황제하의정치구조와현실이이것을잘 보여준다고말한다물론사자 의영혼이산자의의도속으로들어. (死者) 와국가적이데올로기로구체화되고전쟁도불사하게만드는정치적역 학은일본에서만보이는현상은아니다가령국가적희생자 를현양. (忠) 하는 날 이라는한국의현충일(顯 日) ( ) (顯忠日)도죽은이들을드높인다는 외적명분하에실상은정치권력을정당화하고국민의정신적통합을도 모하기위한정치적장치로이용되어온측면이크다정도의차이는있. 지만현충일역시넓은의미에서죽은이의혼령을위로하고받드는제, ‘ 사의정치학의연장인것이다’ .

고야스에의하면일본의토착적정령숭배전통인신도식제사가국가, 적차원으로확대되는과정이야말로제사의정치학의구조와역학을잘‘ ’ 보여준다메이지유신의근간인국가신도야말로귀신에대한제사양식. 의변화를통해조상신을국가주도의담론속에살게하면서조상의정 점인천황중심의국가적통합을도모하는정치적과정이었다는것이다.

국가신도와호국영령

이런맥락에서고야스는호국영령‘ ’(護國英靈)을국가적담론의주제로 삼고국가와국민의제사대상으로재구성하면서천황을정점으로수직, 적통일국가체계를확립하려고했던정치적시도가메이지유신이었다 고규정한다.6) 제사의대상이정말나라를지키다죽은혼령인가와관계 없이호국영령은국가와국민의제사대상으로재구성된일종의담론, ‘ 상의전사자이다’ .7) 국가를위해존재해달라고국가에의해요청된영혼 인것이다국가는담론으로재구성된영혼의의미를정치적으로홍보하. 고교육함으로써국민으로하여금실제로호국적정신을갖게한다그. 래서고야스는이렇게말한다 국가는영령을필요로한다: “ .”8)

물론조상제사로국가통합을이루려는사상적시도들은전부터있어 왔다고야스가정리하고있듯이가령오규소라이. , (荻生徂徠, 1666~1728) 는조상제사야말로국가통합의근간이라는점을강조했고그의사상, 은막부말기부터메이지초기에걸쳐두루영향을주었다그의영향력. 하에있는이들은조상제사를일본의기원에해당하는신에대한제사 와정서적으로연결시킴으로써신의후손인천황중심의국가건설에기 여할수있다고보았다이런주장들이메이지시대정치에반영되면서. , 메이지정부는일본의기원이되는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제사지내던 이세신궁의기능을대폭강화했고국가적전란기에희생당한전몰자의, 영혼을위로한다며야스쿠니신사등을지었다호국영령에대한제사를. 통해국가적통합을시도하고천황에대한숭배로이어질수있도록하, 는장치들이었다 이세신궁과야스쿠니신사는종교적정치혹은정치. ‘ 적종교라는천황제하의일본정치의역학을잘보여준다’ , .

이세신궁과야스쿠니신사

고야스는이세신궁에대해이렇게규정한다.

 

6) 위의책, pp. 17~23.

7) , p. 23.

8) , p. 18.

 

이세신궁은황실의종묘이면서동시에천황이전쟁의개시와그종결이라 는국가의대사를보고하고국가의흥륭 을원하는제국신민들에의해(興隆) 떠받들어지는제국의큰사당 이다황실의종묘이자동시에제국의큰(大祠) . 사당이기도하다는것은이세신궁이야말로국가신도의중심에자리잡고서 국가신도그자체를구성하는최고의신적 시설이라는것을말한다(神的) .9)

문제는이세신궁에대한이러한정의가여전히유효하다는것이다지. 금도연초가되면수상이이세신궁에참배한다야스쿠니신사참배에대. 해서는일본내에서도비판의목소리가있기도하지만이세신궁에참배, 하는일에대해서는그다지문제삼지않는다게다가천황의즉위를기. 념하는제사때는전국의신사가봉축의깃발을내건다일본의자연스. 러운모습이다 고야스는바로이점에주목하면서국가신도는사라진. , 것이아니라여전히살아서진행중이라고본다, .10) 패전이후신도는하 나의종교법인으로격하되었고이세신궁역시법적으로는하나의종교, 시설일수밖에없지만이세신궁은여전히천황중심의국가적통합을, 이루어온일본정치의연장선에있다는것이다.

야스쿠니신사의상황도비슷하다주지하다시피야스쿠니신사는메이. 지유신을위한내전희생자들의혼령을모시고국가적차원에서제사지 내기위해창건된신사이다그뒤청일전쟁과태평양전쟁등에걸친전. 몰자들의영혼을합사해제사함으로써국민으로하여금호국의정신과 자세를갖게하는데기여해온국가주의적신사이다.

하지만모든전몰자들이모셔져있는것은아니다실제로야스쿠니신. 사에는일본정치의제국주의화에부합한다고판단된혼령들이선별적 으로모셔져있다 특정한의도적해석이개입되어창건되고운영되고.

 

9) 子安宣邦 國家と祭祀 國家神道の現在 東京靑土社, ꡔ ꡕ ( : , 2004), pp. 31~32.

10) , p. 10.

있는신사라는뜻이다 영령을현창하고 근대사의진실을밝힌다야. “ ” “ ”( 스쿠니신사내유취관의설립목적지만일본의국가주의정신을고취‘ ’ ) , 시킨다고해석되었을때에야아름다운영혼 이되고근대사의진‘ ’(英靈) ‘ 실이되는것이다 죽은이를영령 으로선별하고제사의신으로’ . “ (英靈) 받들려면어떻든역사해석과역사관을필요로하기마련이다” .11) 패전으로국가적영광에상처를입힌사건의희생자들이국가적제사 의대상이되지못하는것은어쩌면당연하다가령이차대전당시미국. 과의최후교전이벌어졌던오키나와전투에서의죽음은결코국가가제 사지내지않는다.

오키나와만이아니다제사드려지지않는국내외무수한사자 의입. (死者) 장에서생각해보면 일본인의마음을사칭하여국가와야스쿠니가연속적, ‘ ’ 이라는말은이데올로기적인허언에지나지않다는것이명백하다 국가.… 에의해죽음에이르렀으나제사드려지지않는안팎의무수한사자 들(死者) 에게는야스쿠니의존재자체가기만일것이다.12)

전쟁을정당화하는국가

고야스에의하면국가적제사는외견상의종교적숭고함이나순수한, 정책과는거리가멀다그것은도리어국가가전쟁을정당화하고상대국. 을배타하는자기중심적행위일뿐이다이에따라고야스는국가가제. 사를지내는것은국가가전쟁을한다는것과동일하다고까지말한다. 그에의하면근대국가는대외전쟁을수행할수있고국민이국가를위“

 

11) , pp. 59~60.

12) , pp. 189~190.

해죽을수있는국가로서성립된다그리고국가는국가를위해죽은이. 를국가의영속을지지하는초석으로떠받들어제사지낸다 이런맥락.” 에서근대일본국가는신도적인제사를지내왔으며“ ”13), 그제사의제상 이이른바호국영령이었던것이다고야스에의하면 전쟁하는국가란“ . , “ 영령을만들어내는국가이며영령을제사하는국가이다.”14)

국가가제사한다는것은국가가전쟁하는것과함께차별적이고배타적인 자기중심적행위이다 국가가자신을위해서만제사를지낸다 오키나와에. . 서집단자결한주민들에게는숭고한희생정신이라는미사여구를부여할‘ ’ 뿐국가는제사를지내지는않는다미사일을맞아죽은이라크의아이들을. 미국은자유를위한피치못할희생이라며무시할따름이다‘ ’ .15)

이러한국가적제사의원리속에전쟁의피해국인한국이나중국의경 우는간과되어있다 일본인이야스쿠니신사참배라는형식으로전쟁을. “ 기억하려는것은야스쿠니가한국과중국사람들에게고통의기억일뿐 이라는사실을무시하는처사가아닐수없다타인의고통을망각하고. 외면하면서그저자신의국가와민족의영광만지속되기를바라는마음 이란독선일뿐이다 그러면서고야스는그것은역사를자기만의것으.” “ 로보는역사수정주의자들의주장에다름아니라고지적한다” .16)

실제로고야스는일본이과거사를정당화하거나희석시키고야스쿠니 신사참배를주장하는역사수정주의자들에대한비판적투쟁을위해 ꡔ國家と祭祀ꡕ를썼다고밝히고있다.17) 그에의하면역사수정주의자들, 은국가신도개념을패전후점령군들이만든허상으로본다일본에국.

 

13) 위의책, p. 27.

14) 위의책, p. 192.

15) 위의책, p. 190.

16) 고야스노부쿠니김석근역 야스쿠니의일본일본의야스쿠니 산해, , ꡔ , ꡕ ( , 2005), p. 6.

17) , p. 7.

가신도라는것은없었으며일본은오로지신의큰길, (唯神大道)”을걸 어왔다는것이다그런점에서신도는로버트벨라가말하는시민종교. ’ 혹은 국민종교로서의역할을해왔다고역사수정주의자들은주장한‘ ’ 다.18)

하지만고야스에의하면 신의큰길이라는말자체가오히려그들이, “ ” 국가신도의이념을확인해준언어가된다고본다역사를재해석한다고. 해서일본이근대국가를형성하면서벌여온침략전쟁까지사라지는것 도아니다그것이이른바국가신도의현주소라는것이다고야스가국. . 가신도를제도사적연표상에서더듬어볼수있는실체적개념으로생“ 각하는것은아니지만”19), 그가보건대국가신도의흐름은여전히진행 중이다일본의정치가들이아직도국가신도적인이세의주술에매어있. “ 는것도그증거라고그는본다” .20)

그는이런자세로죽은이의영혼을특정이념에따라정치화하면서 국가를통합해온저간의장치를냉철하게분석하고설득력있게폭로한 다 년현재 세를넘긴나이지만고야스의문체에서는비판의식. 2013 80 , 으로무장된청장년분위기와기백이훨씬강하게느껴진다그의책을. 읽다보면죽은자를제사하는방식으로산자를통제하는제사의정치, “ 학은동아시아에서평화학을연구하는이들에게피할수없는주제로” 다가온다제사의정치학이오늘날의동아시아비평화적구조에끼친영. 향이자연스럽게읽히기때문이다 나아가일본은제사의사회학으로. “ ” 규명이가능한사회이기도하다이런식으로제사의정치학을통해획. 득되는사회성은제사의사회학으로자신도모르는사이에전몰자의“ ” , 넋을위로하며형성되는문화적장치는 제사의문화학으로명명해볼“ ”

 

18) 子安宣邦 國家と祭祀 國家神道の現在, ꡔ - ꡕ, pp. 21~23.

19) , pp. 26~27.

20) , p. 32.

 

수있을것이다근대국가형성과정에드러난국가적제사성혹은종교. 성문제에천착하는고야스의저술에서동아시아적갈등의지형을좀더 깊이있게읽고평화의지도를좀더생생하게만들어갈수있는안목을 얻을수있게된다.

이찬수 (Yi, Chan-Su) 

서강대학교화학과를졸업하고같은대학원종교학과에서불교학과신학으로각각석사학 위를비교종교학으로박사학위를받았다강남대교수 일본 평화연구소중앙학술, . , ( )WCRP , 연구소객원연구원등을지냈고현재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로재직하고있, HK 다 종교로세계읽기 한국그리스도교비평 일본정신 불교와그리스도교깊이에. ꡔ ꡕ ꡔ, ꡕ ꡔ, ꡕ ꡔ, 서만나다 종교근본주의 공저 외다수의책을썼다ꡕ ꡔ, ꡕ( ) .


일본불교의 특성과 실상 < 특집 < 불교평론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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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대진재 이후 일본의 참여불교와 시민사회운동 시민사회운동 / 이현경
기자명 이현경   입력 2021.06.27 
 
1. 시작하는 글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46분 동일본대진재(東日本大震災)가 발생한 지 올해로 10년이 지났다. 대규모 쓰나미 발생으로 인해 해안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 다수의 해안지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도 6 이상이 발생한 미야기(宮城), 후쿠시마(福島), 이바라키(茨城), 토치기(栃木), 이와테(岩手), 군마(群馬), 사이타마(埼玉), 치바(千葉) 등 8현(県)을 중심으로 재해구조법이 적용된 곳만 해도 241시구정촌(市区町村)에 이른다.

2020년 3월 1일 현재, 동일본대진재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729명(재해 관련 사망 포함), 행방불명 2,559명, 가옥 121,996채가 전괴(全壊)되었다. 한편, 동경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부터 10년이 지난 올해 2021년 4월,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 탱크에 보관 중인 방사성 물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로 결정했다.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내 압도적인 반대 여론에도 해양 방류를 강행한 것이다. 동일본대진재로 큰 피해를 입고 아직도 복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동북지방에는 필자가 이 글을 집필하는 2021년 5월 1일 오전 10시 반경에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긴급속보가 발표되었다.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은 나라가 일본이지만, 동일본대진재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일본사회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동일본대진재는 피재(被災) 지역의 복구 및 피재민들에 대한 지원부터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켰고, 일본인들의 자신감 상실, 빈곤과 사회적 고립 등의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또, 작년 초부터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19’의 확산세가 멈추지 않으면서 일본사회의 빈곤과 사회적 고립은 가정폭력, 아동학대, 자살률 증가 등의 결과를 초래하면서 한층 더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반면, 동일본대진재는 일본인, 일본사회 나아가 종교자 및 종교단체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사회공헌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일본 종교계 및 종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 급속히 약화된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 체계에 대한 종교적, 종교 연구적 차원에서의 대응 마련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종교의 공공성, 즉 종교의 사회참여 및 사회공헌 관련 연구 모임이 늘어났다. 이러한 연구 모임들이 동일본대진재 발생 이후 재해 지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재해 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피재지(被災地) 및 피재민(被災民)들을 위한 ‘경청(傾聴) 볼런티어’ ‘마음의 상담실(心の相談室)’ 운영, ‘임상종교사(臨床宗教士)’ 탄생 및 활동 확대 등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1995년 ‘한신 · 아와지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 때도 ‘마음 케어’가 주목받았지만, 당시에는 주로 정신과 의사와 임상심리사가 피재민들의 마음 케어를 담당하였다. 이에 반해, 동일본대진재 이후 종교자의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현재 종교자들이 피재민들의 마음 케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점이 큰 변화 중 하나이다. 이뿐만 아니라, 진재 이후 일본 각지의 빈곤 및 사회적 고립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아동 인구 7명 중 1명이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이 아동 빈곤 문제를 해결을 위해 시작된 ‘어린이 식당(子ども食堂)’ 개설 및 운영에 불교단체와 교회가 다수 관여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본대진재는 종래 종교단체의 재해지원 활동의 범위를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면서도 특히 일본인의 불안에 대응하고자 마음 케어 활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또 과거 재해 발생 시와 비교해 볼 때 종교자와 종교단체의 활약이 다수 매스컴을 통해 보도, 주목받은 점에서 동일본대진재는 차이점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요 불교단체의 동일본대진재 발생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지원활동에 대한 검토를 통해 지원활동의 특성과 일본사회에서 불교단체의 공적 역할에 대한 기대 및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동일본대진재와 종교의 사회공헌

현대 일본사회는 ‘포스트 전후사회(Post-Postwar Society)’로 일컬어지는데 이 포스트 전후사회가 위기적 국면을 맞이한 것이 바로 1995년이었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 · 아와지대진재와 옴진리교 사건은 버블경제 붕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면서 포스트 전후사회의 위기를 드러냈다. 이 1995년을 기점으로 일본 종교연구 분야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컬트 연구가 종교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한편, ‘포스트 옴 종교현상’으로서 2000년 이후 대두한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 붐’에 종교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1995년 한신 · 아와지대진재는 일본 종교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1995년 이래 ‘진재와 종교’ 관련 연구성과가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연구성과 중에서도 한신 · 아와지대진재와 동일본대진재에서의 종교자 및 종교단체의 활동에 대한 비교 검토가 다수 이루어졌다. 특히, 미키 히즈루(三木英)는 동일본대진재 피재 지역에서 한신 · 아와지대진재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시도가 이뤄진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들 활동을 구체적으로 (1) 장기적 지원, (2) 마음 케어, (3) 연대라고 하는 3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한신 · 아와지대진재 당시, 긴급지원을 필요로 하는 피재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피재자 자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지원활동이 약 1년 만에 종료되었다. 하지만 긴급지원 종료 이후 피재자 중 자살, 고독사,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문제로 나타났다. 이후 피재자에 대한 지원은 진재 직후 혼란한 시기에 끝내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과 함께 오히려 긴급지원 활동이 끝난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지원활동의 시작점이라는 인식이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인식은 종교자 및 종교단체의 지속적 지원활동으로 이어졌고, 동일본대진지에서는 현지에 본부를 설치하여, 현지 상황을 숙지하는 활동 스태프를 현지에 장기적으로 파견함으로써 피재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적극적 노력이 이어졌다.

둘째, 이 같은 지원활동을 통해 피재 지역 주민들의 마음 케어에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종교단체가 처음부터 강하게 의식하고 임한 활동 중 하나이다. 많은 종교단체들이 독자적 혹은 연대를 통해 현지에서 ‘위령(慰霊)의식’을 집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음의 치유를 경험한 희생자 유족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색이 짙은 위령의식뿐만 아니라, 종교색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형태로 실시된 ‘경청 활동’에도 종교자 및 종교단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 경청 활동은 긴급지원이 종료된 이후 현재까지도 피재자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 중 하나이다.

셋째, 동일본대진재에서는 종교단체 간 연대 및 지자체, NPO와의 협동이 실현되었다. 한신 · 아와지대진재 당시 종교자가 한데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의식을 제외하면 종파 간 연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동일본대진재에서는 대진재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종교, 종파의 경계를 초월하여 종교자가 집결한 것을 시작으로, ‘전일본불교회(全日本仏教会)’와 ‘신일본종교단체연합회(新日本宗教団体連合会)’도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피재지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종교자와 종교시설에 대해서는 종교, 종파를 구분하지 않는 광범위한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또, 종교단체와 지자체 및 NPO 단체, 대학과 연대도 이뤄졌다.

이와 같은 연대가 실현된 배경에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의 보급이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SNS를 통해 구호물품이 과잉집중한 곳에서 구호물품 지원이 충분하지 못한 지역으로 물자 및 인원을 재배치하는 단체 간 조정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동일본대진재에서는 종교 연구자도 크게 관여하였는데, 연구자들이 ‘종교자 재해구원 맵(宗教者災害救援マップ)’을 페이스북에 개설하여 피난소로 지정된 종교시설 및 구원활동 거점으로서 기능하는 종교시설에 관한 정보를 입력하여 검색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종교 및 종파 간 연대를 위한 플랫폼을 마련했다. 이 ‘종교자 재해구원 맵’에 관여한 연구자를 중심으로 이후 ‘종교자 재해지원 연락회’가 2011년 설립, 종교계 전체로 확대하여 구원활동을 위한 정보교환의 장으로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얻는 정보 및 의견 등이 SNS 등을 통해 일반 사회로 발신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처럼 동일본대진재는 피재 지역 및 피재자에 대한 지원에서 종래의 종교단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신 · 아와지대진재 당시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다방면에 걸친 연대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행정기관에서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영역을 포함하여 긴급지원에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또, 과거 긴급지원 종료 이후 썰물 빠지듯이 피재지에서 철수하기 마련이었던 종교단체들이 지금까지 장기간에 걸쳐 피재 지역 피재민들에게 다가가 마음 케어에 노력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동일본대진재에서 불교단체의 지원활동을 (1) 장기적 지원, (2) 마음 케어, (3) 연대로 구분하여 지원활동의 특성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3. 지역자원으로서 불교 종교시설과 종교자

한신 · 아와지대진재에 비해 동일본대진재의 경우 구원 · 지원활동에 임한 종교자 및 종교단체에 관한 기록이 조사보고서 및 자료집으로 발행되었다.

 

① 전일본불교회 〈동일본대진재 중간보고서(제1차~제2차)〉(2011)

② 전일본불교회 〈동일본대진재 중간보고서(제3차~제5차)〉(2012)

③ 전일본불교회 〈동일본대진재 지원보고서(제6차~제7차)〉(2013)

④ 오카모토 마사히로 〈동일본대진재 18종교교단의 피재자 · 피재지지원활동 조사에 대하여: 조사보고와 약간의 고찰을 덧붙여〉(2014)

⑤ 전일본불교회, 일본불교사회복지학회 감수 〈동일본대진재에 있어서의 일본불교 각 종파의 활동에 관한 앙케트조사〉(2015)

⑥ 전일본불교회, 일본불교사회복지학회, 불교NGO네트워크(BNN) 감수 〈피재지 사원의 교훈을 금후 사원방재에 활용하기 위한 조사표(앙케트조사) 보고서〉(2015)

⑦ 전일본불교회, 일본불교사회복지학회, 불교NGO네트워크(BNN) 감수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진재에 있어서의 불교계 각종 단체의 진재 지원에 관한 앙케트조사 보고서〉(2015)

 

이 중에서도 ④는 일본NPO학회와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보고 개요를 정리한 논고이다. 위 논고에 따르면 18개 종교교단을 통해 약 10만 명 이상의 볼런티어가 지원활동에 참여, 163억 원 규모의 기부 및 의원금 지출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8개 종교교단 중 불교계 천태종(天台宗), 고야산 진언종(高野山真言宗), 진언종 지산파(真言宗智山派), 진언종 풍산파(真言宗豊山派), 정토종(浄土宗), 정토진종 본원사파(浄土真宗本願寺派), 진종 대곡파(真宗大谷派), 임제종 묘심사파(臨済宗妙心寺派), 조동종(曹洞宗), 일련종(日蓮宗)의 10개 교단과, 신사신도 신사본청(神社本庁), 기독교 가톨릭교회, 일본기독교단의 2개 교단, 신종교 금광교(金光教), 진여원(真如苑),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 천리교(天理教), 창가학회(創価学会)의 5개 교단이 참여했다. 상기 18개 교단 중 10개가 불교계 단체로 전체 종교 교단 중에서도 동일본대진재 관련 지원활동에서 불교가 공헌한 역할과 비중이 매우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④ 보고서 가운데 불교 10개 교단을 중심으로 불교 교단이 실시한 지원활동의 개요 파악 및 특성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1) 장기적 지원

동일본대진재는 피재 지역의 종교단체가 관련 시설을 널리 개방함과 동시에 시설을 거점으로 지원활동을 전개한 측면에서 종교의 사회공헌적 측면이 언론 보도를 통해 일반 사회로 널리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표 1〉에서 보다시피 불교 교단별로 시설개방에서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앙케트 조사가 실시된 2012년 기준, 대부분의 교단이 해당 지역 종교시설을 개방하여 직접적인 지원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피난소 및 시신안치소, 유골보관소, 볼런티어 활동 거점본부, 귀택곤란자 일시 수용 등 다방면에 걸쳐 종교시설이 활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종래 일본에서는 종교단체 및 종교시설의 공공성을 둘러싸고 행정기관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재해 지원을 거부하는 사례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동일본대진재 이후 재해 발생 시 피난소 및 활동거점으로서 종교시설 활용 기능성을 행정부처에서도 인식하게 되면서, 일본 각 지자체에서는 종교시설과 재해협정을 체결하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종교교단은 전체적으로 행정시설보다 훨씬 방대하고 기본 설비를 갖춘 시설체계를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전국의 종교단체 수는 215,090개 단체, 이 중 신도계 87,322개 단체, 불교계 84,329개 단체, 기독교계 8,546개 단체, 기타(諸教) 34,893개 단체가 있다. 다만 전화번호 안내사이트 ‘타운페이지’에서 업종 검색 키워드를 ‘종교’로 할 경우 88,323곳, ‘사원’ 58,903곳, ‘신사’ 10,021곳, ‘불교’ 1,118곳, ‘신도’ 1,805곳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종교 교단이 관할 당국에 보고하는 종교단체 수와 실제 활동 중인 종교시설과는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전국의 편의점 수 55,924, 초 · 중 · 고교를 합한 수 35,327과 비교해 볼 때, 편의점 수보다 종교시설이 훨씬 많고, 초 · 중 · 고교 수보다 두 배 정도 많다. 물론 종교시설의 규모가 학교보다 크지 않고 상주하는 직원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종교계가 거대한 시설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해당 지역에서 중요한 사회자원인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한편, 전국 1,916개 지자체(이 중 유효 회답 수는 1,184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종교시설과 재해협정 및 협력 관계에 대한 실태 파악 조사에 따르면, 2014년 7월 현재 재해협정을 체결한 지자체는 95곳(종교시설 399곳, 이 중 지정피난소는 272곳), 협정체결 없이 협력 관계가 있는 지자체는 208곳(종교시설 2,002곳, 이 중 지정피난소는 1,831곳)으로 나타났다. 즉, 종교시설이 피재민 수용피난소로서 678곳, 일시피난소로서 1,425곳이 지정, 합계 2,103곳의 종교시설이 지정피난소로 지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상기의 협정체결과 협력 관계를 모두 포함하면, 재해 발생시 303개 지자체와 2,401개 종교시설이 연대 가능한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재해협정을 체결한 95개 지자체의 종교시설 399곳 가운데, 불교시설이 189곳, 신종교시설이 27곳, 신사 26곳, 기독교 6곳, 기타 불명 순으로 나타났다. 전체 종교시설 가운데 불교가 약 47%를 차지하여 재해협정을 가장 많이 체결하고 있으며, 시설개방에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재해협정을 체결한 시기를 보면 동일본대진재 이전, 진재 발생 이후 2011년 12월 말까지, 2012년, 2013년, 2014년으로 분류, 399개 시설 중 167개 시설이 진재 발생 이후 협정체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동일본대진재 이후 긴급지원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도 지원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현재도 장기적인 지원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페이지 〈표 2〉의 전일본불교회가 발행한 〈2019년도 재해등 지원보고서(제18차~제19차 지원)〉에 따르면 교단 본부 혹은 개별단위 사원 및 단체가 경청 볼런티어, 교류회, 식사 제공, 여가/문화 활동 지원, 방학을 이용한 어린이 캠프 지원, 위령제 등등 다방면에 걸친 지속적인 활동이 확인된다. 이처럼 동일본대진재는 이전 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피해 규모가 막대하고 오늘날까지 지원활동이 계속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2) 마음 케어

(1) 독경 볼런티어

독경 볼런티어는 불교를 중심으로 실시되었지만, 실제로는 신도, 기독교, 신종교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실시, 종교, 종파를 넘어 공동으로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이 독경 볼런티어는 진재 직후부터 피재지 안팎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이루어졌다. 이 활동은 그 영역에 따라 ‘진재 직후 혼란기에 소속 사원과 연락을 할 수 없는 신자들에게 종교적인 장송(葬送)을 제공한 활동으로 화장터 등이 활동거점이 된 경우’와, ‘신원미상의 시신, 여러 사유로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안치소에 방치된 시신의 공양을 위한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화장터에서의 독경 볼런티어는 ‘센다이 불교회(仙台仏教会)’가 진재 발생 4일 뒤인 2011년 3월 15일에 센다이시 담당자와 화장터에서 독경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여 17일에 센다이 시영 화장터 내에서 독경 볼런티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마음의 상담실’ 부스를 화장터 내에 설치하여 누구나 언제든지 상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초 센다이시와의 협의에 따라 4월 말까지 화장터에서 독경 볼런티어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마음의 상담실은 조직개편을 통해 이후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면서, 경청 이동식 카페 ‘카페 데 몬쿠’와 ‘라디오판 카페 데 몬쿠’, 전화 상담, 강연회, 매달 11일 장례를 볼런티어로 실시해왔다. 한편, 후자의 시신, 유골 안치소에서의 독경 볼런티어는 ‘정토진종 본원사파 동북교구 재해볼런티어센터’가 구호물자 배부와 함께 방문한 지역의 시신안치소에서 독경을 실시했다. 3월 23일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福島県南相馬市)의 시신안치소에서 독경 볼런티어를 시작으로, 이후 미야기현(宮城県), 후쿠시마현, 이와테현(岩手県) 내 14곳에서 8월 14일까지 단속적으로 실시되었다. 해당 안치소 담당자(경찰, 소방, 시정촌 직원, 볼런티어)의 허락을 구한 뒤 제단 및 개별 관, 유골함 앞에서 독경을 실시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안치소에서 환영받았다고 한다. 진재 발생 직후 각 안치소에서는 독경을 읊어 줄 승려가 방문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들이 다수 보고되었는데, 독경 볼런티어가 피재민들의 마음 케어에 일조한 것을 엿볼 수 있다.

 

(2) 위령비 건립과 추도식

위령비 건립의 목적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며, 영혼을 위로하는 이유는 ‘불안정한 영혼을 안정시킴으로써 살아남은 자가 안심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케어에서 이 위령비와 추도식은 간과되기 쉽지만, 실제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 내의 승려와 신직(神職)의 보고에 따르면, 진재 후 1년 정도 ‘유령이 나오니까 어떻게 좀 해달라’는 내용을 포함하는 공사 관계자들의 지진제(地鎮祭) 및 주민들의 공양 의뢰가 쇄도했다고 한다. 유령의 유무를 떠나 유령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공사 관계자와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각 지자체에서는 위령비 건립을 실시하여 공사 관계자와 거주민들의 불안을 감소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이 위령비 앞에서 묵도 및 헌화, 위령제, 추도식이 이루어졌다. 다만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우는 시정촌 주최의 식전에서는 가능한 한 특정 종교를 연상시키지 않도록 무난한 형식의 추도식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피재자 및 유족들이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까지 행정 당국에서 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실제로 위령비와 추도식은 종교자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위령비, 추모비가 건립됨으로써 그곳 자체가 종교적인 장소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곳으로서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종교자도 종교단체도 다수 관여하고, 종교 · 종파에 제약되지 않는 곳으로 승화되어 간 것이다. 이러한 위령비의 건립은 희생자의 진혼(鎮魂)과 진재의 기억을 후세에 ‘영원히 기록하는 것’인 동시에, 지원해 준 이들에 대한 감사와 우호의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3) 마음의 상담실과 ‘카페 데 몬쿠’

‘마음의 상담실’은 센다이에서 진재 직후에 설립된 연합체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미야기현 종교법인연락협의회 소속 단체 종교자들이 장례식장에서 합동으로 ‘위령(慰霊)’에 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센다이에서 오래전부터 종말기 간호, 특히 재택 완화 케어 활동을 전개해 온 고(故) 오카베 타케시(岡部健) 의사를 실장으로, 동북대학교 종교학 연구실에 사무국을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종교자, 의료자, 종교학자, 그리프 케어(Grief care) 전문가 등이 협력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마음의 상담실’의 활동은 매달 시영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는 합동위령제, 종교자에 의한 무료 전화 상담, 경청 카페 ‘카페 데 몬쿠(Café de Monk)’, 라디오 카페 데 몬쿠 방송 등이다.

이동식 경청 카페 ‘카페 데 몬쿠’는 승려들이 경트럭에 카페 도구 일식을 싣고, 피재 지역 가설주택 등을 순회하며 피재민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을 제공하는 활동이다. 영어 ‘Monk’는 승려를 가리키며, 일본어 ‘몬쿠(文句)’는 말, 고충, 불평, 불만, 푸념을 가리킨다. 이 카페에 모여 함께 고충과 푸념, 불평, 불만을 발산, 공유를 유도하기 위해 만든 장이 바로 이 ‘카페 데 몬쿠’이다. 이 활동에 참가하는 종교자는 마음의 상담실에서 작성한 ‘채플렌(chaplain) 행동규범’을 준수하며, 특정 종교를 선전하는 등의 직접적인 전도 포교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라디오 카페 데 몬쿠 방송은 당초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현에서 FM으로 방송되었는데, 201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마음의 상담실과 경청 카페에서 보듯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지원활동은 마음 케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다가가기’의 자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4) 임상종교사

‘임상종교사’는 서구의 병원 및 복지 관련 시설에서 마음 케어를 담당하는 ‘채플렌(chaplain)’을 모티브로 한 ‘일본형 채플렌’으로서 ‘임상종교사’를 육성하기 위해 시작된 연수 프로그램이다. 동일본대진재를 계기로 동북대학교에 ‘실천종교학 기부강좌’ 개설을 요청하여, 2012년 4월에 동북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이 강좌가 개강하게 되었다.

임상종교사 연수 프로그램의 특징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청’과 ‘스피리추얼 케어’의 능력 향상, 둘째, ‘종교 간 대화’ ‘종교 협력’의 능력 향상, 셋째, 종교자 이외의 기관과의 연대 방법을 배우는 것, 넷째, 폭넓은 ‘종교적 케어’의 제공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첫 번째 ‘경청’과 ‘스피리추얼 케어’ 능력 향상이 매우 중요시된다. 특히,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종교자는 스스로의 종교 · 종파의 교의나 세계관을 전제로 대상자를 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듣고, 슬픔을 공감하며,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종교성을 존중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현장의 실천 및 그룹워크를 통해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케어를 제공하는 측이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케어를 제공받는 측의 주체성을 배우는 것, 고통과 슬픔에 가득 찬 이들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기다려 주는 것, 이를 위한 계기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자세를 철저히 배운다. 2016년에는 전국 조직인 ‘일본임상종교사회’가 설립, 2018년 3월부터 자격인정이 시작되었다. 종교 · 종파를 불문하고 2018년 9월까지 159명이 자격인정을 받았다. 이들 임상종교사들은 전국의 병원, 복지시설, 재택 방문 단체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본대진재에서는 일본불교의 저력이 재평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흔히 일본불교를 가리켜 ‘장식(葬式)불교’라 하여, 삶(生)보다는 죽음(死)과 관련된 종교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한신 · 아와지대진재에 대한 반성과 특히 동일본대진재 이후 불교계의 적극적인 지원활동은 기존의 죽은자를 위로하는 역할과 더불어 산 자를 위로하고 지원하는 역할이 첨가되면서 일본 불교가 공공성 확보에 주력한 결과 공공재로 자리매김하는 일면을 엿볼 수 있다.

 

3) 연대: 종교 · 종파 간 연대 및 NPO와의 협동

동일본대진재를 계기로 슬픔을 함께 나누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기도의 힘이 재평가되었다. 재해 지역에서 승려와 목사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재해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일본대진재는 타 종교 종교자들이 연계하여 지원하게 되는 적극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여기에 종교 연구자도 연구자와 연구대상이라는 틀을 넘어 지원활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종교 간 연대가 이뤄지게 된 요인으로는 크게 3가지 들 수 있다. 첫째는 대규모 재해라는 경험을 통해 다수의 종교자가 함께 기도하고 지원하기 위한 공통의 장이 마련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네트워크 조직으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는 지원활동을 통해 다가가기(寄り添い)와 경청(傾聴) 활동이 중요시된 것도 다른 종교자 간에 연대를 촉진한 요인이 되었다. 기존에 종교자가 실시해 온 자살대책, 자살 유족 지원, 말기환자 케어 등에서 다가가기, 경청 등의 축적된 경험이 발휘되었다. 셋째는 재해 지역 종교시설의 복구 및 종교단체에 의한 재해자 지원에서 정교분리의 장벽이 공통문제로서 인식된 것도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시신안치소에서 승려의 독경이 행정직원으로부터 거부된 경우나 쓰나미 피해지역의 구획정비사업, 복구도시건설, 원발사고 피난구역 보상 등에서 재해 피해를 입은 종교시설의 복구가 고려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문제에 대처하고자 종교 간 연대가 활발해졌다.

한편, 주요 불교 교단의 지원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불교(정토진종 대곡파, 본원사파, 정토종, 조동종, 천태종 등)는 지진 발생 직후 대책본부를 설치하여 실시간으로 재해 지역 이외 교구에 지원물자를 요청하고, 사찰의 피난소 등록 협조요청을 하는 동시에 재해 지역 사찰의 피해 상황 파악에 주력했다. 재해 지역 현지에 복구지원을 위한 본부를 설치한 경우도 다수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피재지, 피재 지역민에 다가가려는 교단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원물자 배부 및 식사제공, 잔해 정리 등은 현지 본부와 교단 내 하위 부문인 청년 신도 조직 등이 중심이 되어 담당하였다. 일본 최초의 푸드뱅크(food bank) NPO법인 세컨드 하버스트 재팬과 연계하면서 구호물자 지원 및 식사제공 등을 한 정토종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전일본불교회의 활약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단체는 2021년 현재 59개 종파 3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불교회, 그리고 10개 불교단체, 총 106개 단체가 가맹한 일본 전통불교계에서 유일한 연합조직이다. 이 단체는 진재 발생 후 재빨리 가맹단체에 대해 피재지 지원에 관한 정보제공을 요청하여 이를 반영한 정보제공을 본 단체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 또 승려에 의한 피재지 지원 볼런티어 결성 협조, 피재자 수용, 피재지 파견 지원활동에 대한 협조를 발신하는 등 종파, 단체의 틀을 넘어 난국을 극복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또 수집한 지원금의 활용 방법으로서 종래의 일본적십자사와 같이 일부를 위탁하는 방법과 함께 실제 피재지에서 지원활동을 하는 직접지원 단체 및 피재지에서 피난소 등을 제공하는 직접 지원 사원에 활동조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직집 지원은 종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지원 형태로서 크게 주목받았다. 또, 〈표 3〉과 〈표 4〉에서 볼 수 있듯이 타 종교, 타 종파와의 연대, 지자체 및 NPO, 재단/사단법인, 사회복지협의회, 행정부서, 대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연대 및 협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동일본대진재 이후 전국 곳곳에서 교단 내 연대 및 종교 · 종파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시가현(滋賀県) 정토종 청년회 소속 470개 사원은 신도들로부터 시주받은 쌀을 전달하는 ‘오미 쌀 한 되 운동(近江米一升運動)’을 진재 전 2010년부터 생활곤궁자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는데, 진재 이후 피재 지역으로 확대하여 가설주택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시중에 파는 쌀과는 달리 부처님의 자비와 단가의 마음이 담겨 있어 현지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가마쿠라(鎌倉)에서는 신도, 불교, 기독교 세 종교가 만든 ‘가마쿠라종교자회의(鎌倉宗教者会議)’가 매년 ‘동일본대진재 추도 부흥기원제-가마쿠라’를 개최하고 있다. 매년 불교 사찰, 기독교 교회, 신도 신사 장소를 옮기면서 실시하고 있다. 2019년 3월 9회째 기원제에는 100명을 넘는 종교자와 시민 약 1천 명 이상이 참석하는 등 꾸준히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4. 맺는 글

종교 및 종교자의 역할은 약자의 편에 서서 다가가는 것, 행정기관의 지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지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동일본대진재 이후 신문 등 매스미디어에 주목받은 불교 활동의 대부분은 현지에서 실시된 직접지원단체에 의한 활동이었다. 동일본대진재는 일본 전통불교의 저력이 재확인,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사 페스티벌(寺社フェス), 절 카페(寺カフェ), 비구니 바(尼僧バー) 등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불교단체와 승려가 관심을 모으게 되는 계기로도 이어졌다. 2011년 동일본대진재가 발생한 이래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사사페스’는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종파를 초월하여 기획되었다. 해가 갈수록 참가자 수가 증가하여 6천 명이 넘게 참가한 해도 있었다. 동일본대진재를 계기로 불교가 장식불교를 탈피하여 사회에 열린 종교단체로서 성격이 확대되고, 일반인들의 인지 또한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동일본대진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불교사원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극히 ‘보통’의 절이었다. 선조 공양 및 사자(死者) 제사를 집행하고 지역 불교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2012년 가을부터 진언종 풍산파 피재 사찰 10곳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다수 신도들은 “우리는 돌아갈 수 없지만 절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한다”고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40) 이들에게 고향이라는 개념은 선조의 묘와 이를 지켜온 절, 그리고 이를 이어온 사연(寺縁)은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를 형성하며 일본사회에 뿌리 내려 온 것이 잘 드러난다. 이 사연을 잇는 역할을 승려가 담당하고 사라져버린 고향일지라도 그것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해당 지역 승려가 담당하기를 원하는 것이다.41)즉, 진재 이후 신도 및 지역주민과 강한 연대감이 형성되면서, 그동안 내재하여 있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서 사원의 존재가 대진재로 인해 재조명된 것이다.42)

그럼에도 동일본대진재에서 일본 전통불교의 지원활동에 대한 사회 일반적 관심은 여전히 단편적 혹은 한정적이다.43) 재단법인 니와노평화재단이 실시한 종교단체의 사회공헌 활동에 관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불교 교단의 장의, 의례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으며, 전혀 모른다고 대답한 회답자가 50% 이상으로 나타났다. 정당한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활동과 일반 사회에서 인식의 폭을 좁혀나가는 것이 금후의 과제 중 하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일본대진재가 일본의 전통불교 교단을 포함한 종교단체 및 종교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이끈 계기가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결과 불교 사원이 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 NPO단체, 지자체, 전문 조직 등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다 폭넓은 지원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모처럼 고조된 일본 전통불교의 사회참여적 성격이 후퇴하지 않도록 제반 단체들과의 협동과 연대를 통해 동일본대진재의 성과 및 교훈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

 


이현경 azumani119@tsc.u-tokai.ac.jp
일본 홋카이도대학교(北海道大學校) 문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離島奄美大島における宗教とトランスナショナリズム〉 〈韓国キリスト教と日本社会〉 〈韓国の政教関係と社会参加仏教の展開〉 〈日韓における宗教文化交流の再考〉 등이 있다. 현재 일본 도카이대학교(東海大學校) 문학부 준교수.

 이현경 azumani119@tsc.u-tokai.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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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物)공양: 불교문화 콘텐츠의 일본적 변용 / 박규태
일본불교의 특성과 실상
기자명 박규태   입력 2021.06.27 
 

1. 들어가는 말: 개와 로봇에게도 불성이 있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주자학이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불성을 내세운다. 일찍이 정조는 다산에게 개와 소와 사람의 성이 본연지성인지 기질지성(氣質之性)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주자학적 이원론 자체를 해체시키면서 “사람의 성은 사람의 성이고 개나 소의 성은 금수의 성일 따름”이라 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했다. 하지만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라는 일본의 공학자는 동물을 “틈새가 없는 기계”라고 보면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로봇학회 명예회장이자 로보콘(로봇 콘테스트)의 창시자인 모리는 인상적인 방식으로 불교와 테크놀로지의 통합을 지향하는 현대 로봇공학에 대한 불교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로봇 안의 불성(The Buddha in the Robot)》(1981)이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도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안에도 불성이 있다. 또한 나와 내 동료들이 만드는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 진실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붓다의 마음과 일치한다. 제어하는 것과 제어 받는 것은 모두 불성의 현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리는 이처럼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상호 호혜성(reciprocality)’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연기설이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설(事事無碍說)을 떠올리게 한다.

모리는 연기설과 무아설의 관점에서 로봇이 우주의 원소를 구성요소로 삼아 연기(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사물이라고 설한다. 그러니까 로봇을 포함한 인공물들은 모두 지구나 자연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형성하는 힘, 즉 오온의 하나인 행(行, 산스카라)에 의해 형성된 사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모리에게 모든 ‘있음’은 단지 상이한 차원에 속한 것일 뿐 동일한 우주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대립은 잘못된 구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리의 발상은 실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일본문화 전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사물(物)을 일본어로는 ‘모노’라고 읽는데, 일본문화는 한마디로 ‘모노의 문화’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모리는 모노 그 자체가 되어 ‘나’와 ‘모노’의 대립까지 넘어선 곳에서 로봇과 동물과 인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런 모노가 무엇인지를 알면 일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2. 모노(物)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모노라는 말은 크게 ① 형태가 있는 물체 일반 ② 사람(者) ③ 대상을 명시할 수 없어 추상화한 ‘어떤 것’ ④ 생각이나 의식 등 마음 작용과 관련된 어떤 것 등의 네 가지 용례로 요약될 수 있다(《日本國語大辭典》). 이 네 가지는 다시 물질적 형태가 있는 유형의 모노(物)[① ②]와 그렇지 않은 무형의 모노(もの)[③ ④]로 대별된다. 그중 현대 일본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모노의 용법이 형태가 있는 물체나 물건 일반과 관계가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일본은 흔히 ‘모노즈쿠리(物作り, 물건 만들기)의 나라’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노는 바로 대상으로서 물체나 물건을 의미한다. 과연 일본인은 모노를 대상화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노가 반드시 사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종종 사람도 ‘모노(者)’라고 말한다. 이처럼 모노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는 일본인의 발상은 매우 흥미롭기 짝이 없다. 더 나아가 용법 [③ ④]와 같이 모노가 종종 정신적 혹은 영적 존재의 의미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은 더욱 일본적인 특징이다.

세계를 생명 없는 사물이나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모노의 정신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식은 일본의 신화, 종교, 민속, 예술, 미의식, 생활의 영역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정신성을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라는 말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상 내용에서 스피리추얼리티와 종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일본인의 종교심이나 스피리추얼리티는 ‘모노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 일본인은 ‘종교’라는 말에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근래 일본사회에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진행되어 온 ‘스피리추얼리티 붐’에서 잘 엿볼 수 있듯이 스피리추얼리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매우 남다르다. 그리하여 스피리추얼리티라는 말은 오늘날 일본에서 비단 신화나 애니미즘의 세계를 비롯한 종교=주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의료, 케어, 복지, 생명윤리, 임사 현장, 사생관, 테라피, 교육, 에콜로지, 젠더, 경영관리에서 다도, 화도(꽃꽂이), 서도, 무사도, 유도, 검도, 연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가령 일본 신화 속에 나타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에 관해 생각해보자. 고대 일본어에 ‘모노시로(物實)’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모노의 영성이나 영력을 상징하는 물건을 가리킨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가 서로 모노시로(칼과 구슬)를 교환하고 그것을 입안에 넣고 씹어 뱉어서 신들을 낳았다고 나온다. 이 모노시로는 생명을 낳는 씨앗이자 근원적인 힘이다.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하사했다는 칼(草薙劍), 거울(八咫鏡), 구슬(八尺瓊曲玉) 등 천황가의 왕권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三種の神器)도 모노시로의 일종이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에 속하는 오미와(大神)신사의 제신인 오모노누시(大物主神)에서 모노란 절체 불명의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모노의 위대한 주인’을 뜻하는 오모노누시는 가장 두려운 신이다. 거기서의 모노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다루기 힘든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런 모노를 체현하는 신 오모노누시를 제사 지내는 것이 국가의 안태에 불가결했던 것이다. 오모노누시의 본령은 법칙, 원리,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을 나라의 중심인 미와산(三輪山)에 부동의 신앙대상으로 제사 지냄으로써 비로소 나라 만들기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학자 사이토 히데키는 이와 같은 오모노누시를 ‘모노가미(もの神)’라고 부른다. 그에게 신도가 말하는 ‘팔백만 신’이란 대부분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양의성을 가진 이런 모노가미를 뜻한다. 모노가미에서 모노란 벌거벗은 타물(他物)로서의 모노이자 형태가 없는 모노 즉 ‘무언가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사물이나 사상(事象)과 비슷해 보이지만, 항상 무언가 일탈한 이형(異形)으로 출현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본적 사례로 ‘원령(怨靈)’을 뜻하는 모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원령으로서 모노 관념은 나라 시대 및 헤이안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널리 깊게 뿌리내린 관념이었다. 가령 《에이가모노가타리(栄花物語)》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과 같은 당대 문헌에는 빙령 현상과 관련된 ‘모노구루이(もの狂い)’라든가 ‘쓰키모노(憑き物)’ 혹은 ‘모노노케(物の怪)’라는 말이 빈번히 등장한다. 일종의 요괴라 할 수 있는 모노노케의 모노는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재액을 초래하는 사령(死靈)이나 생령(生靈) 등의 원령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크게 자랑하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六條御息所)의 생령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오이노우에(葵の上)를 괴롭히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유가오(夕顔)를 죽인 모노노케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또한 《마쿠라노소시》에도 산악행자[修驗者]가 호법동자를 이용해서 모노노케를 퇴치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은 원령신앙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야스쿠니(靖国)신사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거기에서 행해지는 전몰자들에 대한 제사의 배경에는 비정상적으로 죽은 자들의 원령이 산 사람들에게 뒤탈을 부를 수 있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나아가 미의식과 예술 속에 나타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에 관해서는 일본인의 대표적 미의식이라고 말해지는 ‘모노노아와레(物哀)’와 전통 예능인 노(能) 및 일본 현대미술의 독창적 유파인 ‘모노파(もの派)’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가령 종교학자 가마타 도지(鎌田東二)가 창안한 이른바 ‘모노학(モノ学)’에 따르면, 국학의 대성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논한 모노노아와레는 ‘영적 위상(モノ=靈, 영혼)’ ‘인간적 위상(者=心, 인간성)’ ‘물질적 위상(物=體, 물질성)’이라는 세 가지 위상이 조화 · 연결 · 결합된 콘텍스트의 장 안에서 발생하는 감동 · 감정 · 감각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안에는 영성으로서 모노의 위상이 침투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발동시킨다. 이처럼 마음과 영혼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모노가 항상 일본인에게 모노노아와레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노의 집대성자 제아미(世阿彌)가 펴낸 《풍자화전(風姿花傳)》 제2장의 제목은 ‘모노마네(物学)’이다. 여기서 ‘모노’란 물질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와 양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모노에서부터 노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우환(李禹煥)에 의해 시작된 현대 일본의 모노파는 모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모노파는 숯, 유리, 돌, 종이, 철판, 혹은 그러한 것들이 혼합된 것을 거의 가공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모노’로서 늘어놓았다. 1970년 2월호 《미술수첩》에 실린 좌담회 〈‘모노’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사회: 이우환) 기사의 인사말 중에는 “그들(모노파)은 일상적인 ‘모노’ 그 자체를 비일상적 ·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반대로 ‘모노’와 관련된 개념성을 벗겨내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자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의 ‘일상적인 모노’가 작가에 의해 우연히 선택된 숯, 유리, 돌 등의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킨다면, 그것들을 “비일상적 ·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열어 보이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만들지 않은 것’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모노’의 세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노는 현상적으로는 늘 ‘하나의 모노’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분명히 돌인데도 돌 이상으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그 ‘하나의 모노’는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모노’로 경험되면서 기존의 닫힌 세계를 열린 상태로 드러나게 하는 어떤 정신성을 내포한다.

모노파가 추구한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모노’는 실은 일본인들에게 결코 낯선 관념이 아니다. 일본인은 자기 주변에 ‘살아 있는 모노’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존중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관 속에 고인의 애착 어린 물건을 넣는다거나 혹은 고인의 유품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는 가타미(形見)의 관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하에서 다루고자 하는 모노 공양도 ‘일상 속에 살아있는 모노’의 경험과 관련이 깊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는 이와 같은 ‘살아있는 모노’의 경험에는 깊은 종교성의 기반을 이루는 스피리추얼리티가 깔렸다고 말하면서, 그런 ‘살아 있는 모노’와 사랑의 관계를 읽어냄으로써 병든 마음과 병든 사회를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

 

3. 현대 일본사회의 모노 공양

이상과 같은 일본적 ‘모노의 문화’에서는 예로부터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 등을 모두 포괄하는 ‘모노’에 대해 생명과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여 외경과 감사의 염을 표한다든지 혹은 미련이나 애착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전통을 ‘모노 공양’이라 한다. 오늘날 일본 전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모노 공양의 대상은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예컨대 파소콘(퍼스널 컴퓨터) 공양이나 핸드폰 공양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대상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매우 다양한 모노 공양의 유형을 크게 사물 공양과 동물 공양으로 나누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을 표로 만들어 이 글의 마지막 페이지에 별첨하였다.

모노 공양 가운데 일본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민속행사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바늘 공양(針供養)을 들 수 있다. 전교대사 사이초(最澄)가 북동쪽 방각에 바늘을 모아 진호의 지제(地祭)를 드린 것이 바늘 공양의 기원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북동쪽은 히에이잔(比叡山) 방향을 가리킨다. 오늘날 바늘 공양의 주체는 통상 재봉교실 교사조합이나 복식전문학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양 장소는 불교사원과 신사가 많지만, 전문학교에 종교가를 초빙해서 거행하기도 하며 학교 안에 공양 무덤을 건립한 곳도 있다. 12월 8일 혹은 12월과 2월의 8일에 행해지기 때문에 ‘고토요오카(こと八日)’ 또는 ‘요오카부키(八日吹き)’로 불린다. 이 밖에 ‘야쿠시바라이(薬師払い)’나 ‘우소바라이(嘘払い)’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늘을 공양하는 이날에는 지역에 따라 ‘바람이 부는 날’ ‘거짓말을 축출하는 날’ ‘약값을 치르는 날’ 등 약간씩 상이한 의미가 추가로 부여되기도 한다. 전국 공통으로 이날은 바늘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부러진 바늘이나 오래된 바늘을 공양한다. 한편 바늘을 금속신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지역도 있다. 이는 바늘 공양이 원래 제철신을 제사 지내는 행사였음을 시사한다.

이에 비해 가장 최근에 새롭게 생겨난 것으로 펫 공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인간의 장례식이 점차 간략화되는 반면, 펫 공양이 마치 인간의 장례의례처럼 발전하고 있다. 가족의 개인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펫의 존재가 오히려 자녀 이상의 존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펫 이름 앞에 가문의 성씨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펫용 의복에 가문의 문장을 새기기도 한다. 심지어 펫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도 있다. 펫이 죽으면 통상 펫 전용 영원(靈園)에 공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요즘은 가족묘에 펫을 함께 매장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물론 펫을 가족묘에 매장하는 것은 아직 법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묘지가 판매되기 시작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펫에 계명(戒名)을 부여하는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으며, 실제로 펫에 계명을 부여하는 사원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일본에서 동물 공양은 이전부터 행해져 온 전통적인 습속 중 하나이다. 일본의 불교사원에서는 대개 마두관음(馬頭觀音)을 ‘동물수호관음’으로 여겨 본존으로 삼으면서 동물의 명복과 성불을 기원하는 공양을 거행해왔다. 심지어 일본불교의 대표적 성지 중 하나인 고야산(高野山)에는 사단법인 ‘일본시로아리(白蟻)대책협회’가 구제 박멸한 흰개미들의 명복을 위해 공양한 ‘시로아리 공양탑’까지 세워져 있다. 이에 비해 펫 공양의 경우는 성불을 원해서라기보다는 펫을 떠나보낸 심각한 상실감에 대한 ‘마음의 케어’를 제공하는 서비스 차원에서 행해지는 측면이 많아 보인다.

전통적인 민속행사로 거행되어온 바늘 공양이나 인형 공양 또는 돈도야키에 비해, 연필 공양 · 간지 공양 · 부채 공양 · 젓가락 공양 · 인감 공양 · 유품 공양 · 피규어 공양 · 펫 공양 등 모노 공양의 대다수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이는 모노 공양이 전통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 모두에 관련된 습속임을 보여준다. 그 배경에는 다양한 시대적 · 환경적 변화 요인이 깔려 있다. 가령 유품 공양의 사회적 배경으로 핵가족화와 고령화에 따른 고독사 및 자살자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주거환경의 변화를 배경으로 돈도야키가 보다 광범위한 지역의 이벤트로서 재편되고 있으며, 맨션 생활의 보급 등 주택 사정의 변화에 따라 대형 불단의 처리에 곤란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남으로써 불구 공양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의해 전통적인 붓 공양 대신 연필 공양이 새롭게 등장했고, 농경적 우마 공양으로부터 농업기계 공양으로의 변화도 가속화되었다. 근래 도시 주택가에서는 환경과 안전상의 문제로 전통적인 연기물 공양이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모노 공양의 개최 장소는 통상 학문의 신(붓 공양), 눈의 신(안경 공양), 예능의 신(부채 공양) 등 각각의 모노와 인연이 있는 사찰이나 신사에서 거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최는 관련 업계나 단체인 경우가 많다. 이때 공양 행사는 해당 회사나 조합의 친목을 도모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한편 모노 공양의 주체는 보통 소비자나 사용자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조업체나 판매점이 공양을 대행하는 경우도 있다. 모노 공양의 시기는 특히 연말연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밖에 각각의 모노와 연관된 날을 기념하여 행해지기도 한다. 의치 공양 · 안경 공양 · 고서 공양 · 카메라 공양처럼 재활용 자원이 되거나, 모노 공양을 거행하는 사찰과 신사의 경영에 보탬이 된다든지 특히 인형 공양을 장례식장이 영리활동으로서 행하는 등 모노 공양은 경제적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와 같은 모노 공양을 행해 온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앙케트 조사 등에 따르자면 모노 공양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해당 모노에 신불(神佛)과 영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혹은 쓰레기로 버릴 경우 신불이나 영의 뒤탈(다타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양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모노에는 그 사람의 기억과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든가, 감사하는 마음 때문 혹은 예의상이라든가 이별의 의례로서 또는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등 다양하다. 이런 다양성은 전술한 모노의 다양한 속성을 반영함과 아울러 모노 공양의 전통성(애니미즘)과 현대성(소비사회 · 스피리추얼리티)을 반영한다.

현대 일본사회에서 모노 공양이 성황을 이루는 사회적 배경에는 대량생산 · 대량소비사회의 확장이 있다. 거주 공간은 협소한데 생활재는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모노를 폐기할 필요성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신불이나 영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모노 또는 애착을 가진 모노를 단순한 쓰레기로 처분할 수는 없다. 그런 심리적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장치로써 모노 공양이 성행하고 있다.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현대사회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비사회의 진전에 따라 모노는 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와는 별도의 기호론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모노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현대인에게 보다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모노를 처분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미 부여)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모노 공양의 현대적 의의이다.

한편 동물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양하는 관습은 동물과 인간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고대 일본인의 애니미즘적 자연관 위에 불교의 불살생 윤리 및 윤회사상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동물 공양은 진혼의례로서 그 자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활동의 증대에 따라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거나 기계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하고 실험하는 현대 일본사회에서 동물 공양은 동물 생명의 수탈이라는 죄를 소멸 또는 탕감해주는 편리한 죄책 소거 장치가 되었다. 가령 동물실험장에 건립된 공양탑은 실험의 잔학성에 대한 죄의식을 정화시켜주고 동물실험의 윤리성이라는 문제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과의 공생 에토스를 드러내는 모노 공양은 우리가 동물을 포함한 모든 모노에 대한 외경의 염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기만적인 윤리적 책임회피 장치가 되기 십상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모노 공양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일본불교 사상에 관해 생각해 보자.

 

4. 모노 공양과 일본불교: ‘제법실상’과 ‘본각사상’

일본인은 추상적인 《화엄경》보다 현실적인 《법화경》을 더 편애한다. 그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후대에 이 구절은 중국 천태대사 지의(智顗) 등의 해석에 의해 ‘제법의 실상’이 아니라 ‘제법은 실상’이라고 읽히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에서 제법실상은 ‘제법의 궁극적 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모노의 일반적 존재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불교의 핵심적 개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로써 《반야심경》의 현실부정적인 ‘오온개공(五蘊皆空)’ 즉 ‘제법은 공이다’라는 명제와 《법화경》의 현실 긍정적인 ‘제법은 실상이다’라는 명제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불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본래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오온과 공, 제법과 실상이라는 상반된 것의 일치야말로 불교의 진리라고 이해하는 해석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다.

일본에서 이런 제법실상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시킨 자가 헤이안 시대 일본 천태종을 개창한 사이초(最澄)이다. 사이초 교학의 근간은 지의에 의해 대성된 천태사상이다. 천태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삼천 가지의 현상적 세계가 존재한다. 이른바 공(空) · 가(假) · 중(中)의 진리는 길이가 있는 시간 안에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즉 일념 안에서 직증(直證)된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의가 그것이다. 이때 일념이란 마음의 작용과 객관적 현상을 하나로 묶은 일순간의 염을 가리킨다. 천태사상은 이러한 일념삼천이라는 발상을 통해 제법실상의 명제를 파악한 것이다.

사이초에게 제법실상론은 한마디로 ‘현상 즉 본질’을 가리킨다. 현상의 깊은 안쪽에서 현상과는 구별되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 이외에 본질은 없다는 발상이다. 현상을 진실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깨달음과 미혹의 구분을 강조하기보다는 양자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강조한다. 나아가 사이초는 생래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했다.

사이초 이후 일본 천태종에서 지배적이 된 ‘본각(本覺)사상’은 바로 이런 제법실상의 발상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각’이란 《대승기신론》에 처음 나온 개념인데, ‘본래(本)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는 깨달음(覺)’을 의미하는 말로 내용상 불성과 거의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열반경》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고 그것이 작동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미’ 붓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불교에서는 통상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는 본래 불성이 갖추어져 있는데, 오염된 마음 즉 번뇌로 인해 그 불성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번뇌를 제거하면 숨겨진 불성이 드러나 빛나게 될 것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오염된 마음을 제거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라고 설해 왔다.

이처럼 각각의 인간(중생) 안에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발상은 원래 ‘여래장(如來藏)사상’이라 불렸다. 쇼토쿠 태자가 지었다고 말해지는 《승만의소(勝鬘義疏)》에는 “여래장은 자성청정(自性淸淨)하여 미혹 가운데 있다 해도 생사로 인해 오염되는 일이 없다. 단지 숨겨져 있을 따름”이라든가 “여래장과 법신은 일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후에 일본불교에서 널리 설해진 여래장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발상은 인도의 초기불교, 부파불교, 초기 대승불교에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3, 4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하여 점차 퍼져나갔지만, 인도 대승불교의 중핵이 되지는 못했다. 티베트불교의 경우에도 여래장사상은 일관되게 이단시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불성 혹은 여래장이 개개의 인간 안에 존재한다면,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에게 공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불교의 중요한 전통인 공(空)사상과 모순된다. 게다가 여래장 사상의 경우 수행 과정에서 부정되는 것은 오염으로서의 번뇌이며, 오염을 포함하지 않는 상주의 여래장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용수의 공사상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의 대상이며, 여래장 같은 상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불성사상이나 여래장사상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천태본각사상이 헤이안 시대 말기(11세기)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사회는 1052년을 기점으로 말법 시대가 시작된다는 말법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 사이에서도 정토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본각사상과 정토사상이 결합하고 거기에 밀교적 요소가 첨가되면서, 이 세계가 그 자체로 정토이고 만다라이며 나아가 인간은 물론 산천초목 모두가 성불한다는 이른바 ‘초목국토 실개성불(草木國土 悉皆成佛)’ 관념이 널리 퍼지기에 이르렀다.

9세기의 거장으로 유명한 천태종 승려 안넨(安然, 841~898?)은 《중음경(中陰經)》에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할 때 일체의 초목이 모두 불신을 이루나니 몸은 장육이 되어 다 함께 성불한다”는 구절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초목성불’의 정당성을 논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중음경》 자체가 위경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엄밀히 말해 ‘초목성불’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넨 이후 ‘초목국토 실개성불’이라는 그의 표현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잇펜(一遍) 등 중세 가마쿠라 신불교의 고승들도 모두 제법실상과 본각사상에 입각한 초목성불론을 받아들였다. 특히 도겐의 선불교는 세계와 공 및 불성의 관계를 사이초의 본각사상보다도 더 래디컬하게 추구했다. 그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에 대해 ‘실유(존재하는 모든 있음)’와 ‘일체중생’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다시 불성과 동일시하는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모든 있음의 세계를 철저히 성화시키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초목이 불성일 뿐만 아니라 먹고 자고 배설하고 섹스하는 것을 비롯하여 잡다한 일상들이 모두 불성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선(禪)이라는 실천을 통해 제법을 공 혹은 불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공사상과 본각사상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종합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불교사에서 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은 없었을까? 본각사상을 비판한 최초의 천태 학승 쇼신(證眞, 1130?~1207?)은 매우 특이한 존재이다. 1186년 학문적으로 천태종 최고의 지위인 ‘북령탐제(北嶺探題)’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 쇼신은 주저 《법화삼대부사기(法華三大部私記)》 30권 중 《법화현의사기(法華玄義私記)》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본각사상을 비판했다. 가령 그는 식물이 성불한다는 발상에 관해 우선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설령 있다 해도 식물이 마음을 가진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에 초목성불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초목성불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 계기가 없으면 붓다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인간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붓다가 되고자 노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어가 없는 식물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다. 만일 붓다가 될 가능성만 있으면 언어적 계기가 없다 해도 무엇이든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인간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붓다가 된다는 말인데 이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쇼신은 본각사상이 불범불이(佛凡不二)의 주장에 심취하여 성불을 위한 수행을 망실함으로써 외도에 빠졌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쇼신은 본각사상의 무조건적 성불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쇼신의 합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본불교사에 본각사상을 비판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일면 기이해 보인다. 본각사상에는 자기부정이 부재하며 무매개적으로 ‘세계의 성화’를 추구하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존재한다. 가령 ‘번뇌는 곧 그대로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든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같은 ‘제법=실상’의 세계는 본래 치열한 자기부정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경지인데도, 일본불교에서는 그것을 안이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제법은 공’이라든가 ‘제법은 실상’이라는 일본불교의 근본 사상은 만일 그것이 자기부정적 실천을 수반하지 않을 경우에는 상반된 종교의 양극(속과 성, 색과 공, 미혹과 깨달음 등)을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5. 나오는 말: 공양의 일본적 변용과 신불애니미즘

이상에서 우리는 현대 일본사회에 성황 중인 모노 공양의 맥락으로 ‘모노의 문화’와 일본불교의 ‘본각사상’에 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노 공양에는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본적 밑그림이 하나 더 깔려 있다. 신불습합적(神佛習合的) 애니미즘(신불애니미즘)이 그것이다. 예컨대 전술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는 모노 속에 생명이나 영력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애니미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돌과 나무, 숲과 산이 있는 그대로 가미(神)의 모습이라는 감각, 온갖 사물 안에 성스러운 것(정령, 신불)이 작동한다는 애니미즘적 감각이 일본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일본문화는 모노를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간주하는 애니미즘적 관념이나 관행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근래 서구에서는 특히 신도(神道)에 주목하면서 그런 일본적 애니미즘을 ‘테크노애니미즘’이라 명명하는 관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사회 안에 ‘살아 있는 애니미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본에 대단히 풍부한 애니미즘의 유산들이 대부분 신도뿐만 아니라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일본적 애니미즘을 ‘신불(神佛)애니미즘’으로 칭한 바 있다(〈신불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일본비평》 17, 2017).

사물과 기계와 로봇뿐만 아니라 자연물과 생물과 인간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모노를 유기체로 보는 애니미즘적 모노관은 일본불교에서 말하는 ‘초목국토 실유불성’과 상통한다. 가령 신도 의식에 앞서 반드시 거행되는 정화의례에서 재계(齋戒)를 뜻하는 ‘모노이미(もの忌み, 금기)’, 언어를 영력 있는 모노로 간주하는 ‘언령(言靈)’ 신앙, 모노로서의 원령을 믿는 민간신앙, 모노가 요괴로 변한 ‘쓰쿠모가미(付喪神)’ 관념 또한 신불애니미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중 만들어진 지 백 년 이상 지난 모노에는 혼이 깃들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한다는 근세 일본의 쓰쿠모가미 신앙은 모노 공양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도구 혹은 집기들 가령 빗자루, 솥, 악기, 신발, 모자, 방망이, 염주, 항아리, 상자 등에 영력이 깃들어 있어서 함부로 버리면 쓰던 사람을 원망하거나 인간에게 해코지나 복수를 가하는 요괴를 쓰쿠모가미라 한다. 원래는 ‘구십구신(九十九神)’이라 하여 ‘만들어진 지 99년이 지난 도구의 영혼’을 뜻하던 말인데, 후대에 낡은 도구들이 변한 요괴의 총칭이 되었다. 이처럼 함부로 버려진 모노가 요괴로 변한다는 쓰쿠모가미의 발상을 역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요괴로 변하지 않도록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노 공양의 발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신불애니미즘의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종교사의 독특한 신불습합이 존재한다. 일본은 삼림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며 ‘숲의 사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일본문화의 기층으로 말해지기도 하는 조몬(繩文)문화는 인간과 동식물 등 모든 것이 이 세상과 저세상의 끊임없는 순환운동 속에 있다는 공생과 순환의 원리를 내포하며, 도작 농경문화로 이행한 후에도 그런 애니미즘적 자연관이 신도에 계승되었다. 더 나아가 불교 전래 이후에는 천태본각사상의 ‘초목국토 실유불성’이라는 구절이 잘 보여주듯이 애니미즘적 색채가 지극히 농후한 일본불교를 낳았다. 그렇게 일본화된 불교의 사상적 특색은 ‘제법실상’ 즉 눈에 보이는 나무나 바위나 사람이나 동물 등 삼라만상(제법)이 ‘그대로’ 참된 모습(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이런 발상은 나무나 바위에 영이나 가미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든지, 나무나 산 자체가 그대로 가미가 깃들어 있는 ‘고신타이(御神體)’라고 믿는 애미니즘적 신도 신앙과 유사하다.

인도불교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할 때의 중생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중생’을 생명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산천초목 국토까지도 포함시켜 이해했다. 나무도 돌도 불성을 가지고 있어 이윽고 성불한다는 일본불교의 발상이 자연물 하나하나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신도의 발상과 합류하여 신불습합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까 일본불교 여래장사상의 토대에는 일본 고래의 애니미즘과 신도가 준비해 놓은 틀(型)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불습합적 애니미즘의 발상 안에서 형성되어온 모노 공양은 한마디로 공양의 일본적 변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아니 할 수 없다. 공양이라는 보편적인 불교문화 콘텐츠가 모노 공양의 옷을 입을 때 거기서 우리는 일본의 속살을 보게 된다. 거기서 공양은 “모노를 처분할 때 모노의 영적 차원에 작용하는 등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든지 재액초복을 원하여 행하는 종교적 의례”로 변용되었다. 그러니까 모노 공양은 신불습합적 애니미즘과 본각사상을 밑그림으로 삼아 ‘모노의 문화’라는 일본적 특수성과 ‘공양’이라는 불교적 보편성이 만나는 곳에서 새롭게 형성된 하나의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박규태 chat0113@daum.net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동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문학석사). 동경대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문학박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일본정신의 풍경》 등 다수가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박규태 budrevi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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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의 사상과 교학적 성과 / 최용운
기자명 최용운   입력 2021.06.27

1. 머리말

교토학파(京都學派)라는 명칭이 최초로 공적인 기록에 등장한 것은 이 학파의 개조(開祖)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의 제자 토사카 준(戸坂潤, 1900~1945)이 1932년 한 신문에 게재한 〈교토학파의 철학〉이라는 기고문으로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가 지향한 학문적 특성이 불교 또는 일본적 관점에서 서양사상을 해석하고 비교하며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철학, 불교학, 종교학 그리고 신학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두는 학자들이 속한 분야도 다양하다. 이뿐만 아니라 이 학파에 속한 주요 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던 행적으로 말미암아 정치학, 역사학 측면으로도 상당히 주목받았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교토학파와 이에 속한 학자들에 관한 여러 훌륭한 연구 성과가 발표되기는 했지만, 이 분야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안타깝게도 연구자의 층이 두텁지도 않고 이에 따라 연구 결과물 또한 많지 않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교토학파와 여기에 속한 학자들에 관한 연구가 국내 학계보다 더욱 왕성하게 수행되어 왔다.

니시다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를 교토학파의 ‘핵심 3인방’ 또는 소위 ‘빅 스리(Big Three)’로 지칭하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록 니시다와 다나베를 제1세대로 하여 오늘날에는 제4세대에 속하는 학자들까지 거론되고 있고, 이들 모두가 교토학파의 이론적 성장과 외형적 발전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이 글을 통해 그 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이 3명의 학자 각각의 사상 전체를 다룰 수도 없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세 학자의 사상을 검토하며, 그들의 사상이 달성한 불교 교학적 성과를 평가할 것이다. 다만 니시다의 경우 사상의 기초를 형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체적인 사상의 개요를 서술할 것이며, 다른 두 학자의 경우는 불교와 관련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2.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교토학파의 사상적 특징은 당연히 이 학파의 개조인 니시다 기타로를 떠나서는 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후에 소개하게 될 다나베 하지메와 니시타니 게이지를 비롯한 교토학파의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교토대학 철학과가 전 세계 철학계가 주목하는 교토학파로 성장하는 사상적 기틀을 구축함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지닌 일본 최초의 근대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니시다의 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국내의 대표적인 학자인 허우성 교수는 니시다의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철학적 특징을 ‘자각(自覺: self-consciousness)의 철학’과 ‘역사 · 정치철학’으로 구분하며, 전자는 대체로 종교적 · 구원론적인 것으로, 후자는 용어 그대로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분석한다. 이에 더하여 이 두 철학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인데, 그 존재론의 핵심은 행위, 자기한정(自己限定), 일즉다(一卽多)의 논리, 내재즉초월(內在卽超越)의 논리 등으로 구성된 ‘자각의 형식’에 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학자의 경우에서도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와 같은 니시다의 두 가지 철학적 특징 또한 개인적 삶의 궤적과 그것이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으로 인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니시다는 유서 깊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를 사랑하며 앞길을 여는 데 큰 힘이 되어주던 큰누나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큰딸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지켜보며 인생의 큰 비애를 맛보게 되었다. 그의 고교 재학 시기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억누르고 규칙과 처벌 중심의 무단적(武斷的) 교풍을 추구하던 학교 당국에 저항하는 태도로 생활하며 학내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던 중, 결국 ‘독립독행의 길’을 갈 것을 선언하며 자퇴를 하였다. 그러나 독립독행의 길이 결코 쉽게 실현되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좌절을 경험한 후에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산사를 찾아 선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시작한 선 수행은 한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일평생 그의 삶에서 중요한 버팀목이자 학문적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

니시다가 겪은 난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퇴학한 1890년, 일본에 불어닥친 최초의 자본주의적 경제공황으로 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되었고, 장남의 방황을 보다 못한 모친의 간곡한 부탁과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마침내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교를 중퇴한 그에게는 본과가 아닌 제2급의 선과(選科)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던 그가 동경제대 재학 시절 선과 재학생으로서 당했던 차별, 졸업 이후에도 선과 출신이라 취직자리 하나 얻기 어려웠던 시기를 겪으며 느꼈을 실망과 굴욕감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컸을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가 않았다. 25세 때 외사촌 누이와 결혼했고 곧이어 자녀도 태어났지만, 그는 결혼생활에서 별다른 기쁨을 얻지 못했다. 급기야 아내가 갑자기 가출하였고, 이에 분노한 부친의 결정으로 결국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되었다. 비록 약 2년 이후 부부는 재결합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린 자녀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는데, 그가 37세이던 1907년 한 해에만 다섯 살이던 차녀와 출생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5녀를 잃었다. 일평생 자녀 여덟을 두었던 그가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남아 있던 자녀는 겨우 셋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그가 생애 전반에 겪었던 갖가지 고통과 비애의 상황들을 열거한 이유는 그 모든 경험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밑바닥”을 찾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전반기 철학의 모티프라고 할 수 있고, 그 모색의 결과로 획득한 결정체가 ‘순수경험’이고 그다음이 ‘자각’이었기 때문이다.

니시다 철학을 논하면서 ‘순수경험’ 개념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전체적인 기초를 형성하는 주요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불교적 요소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순수경험(pure experience)’으로부터 차용한 이 개념은 니시다 자신의 대표작 《선(善)의 연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서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사상을 체계화해가는 기본 토대로 활용하였다. 그는 순수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순수경험은 직접경험과 동일하다. 자기의 의식 상태를 직접 바로 그 아래에서 즉각적으로 경험했던 때, 아직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지식과 그 대상은 완전히 합일하고 있다. 그것이 경험의 가장 순연한 상태이다. …… 참된 순수경험은 세공된 그 어떤 의미도 없는 사실 그대로의 현재 의식일 따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니시다는 순수경험을 ‘직접경험’ 또는 ‘지적직관’으로도 표현하는데, 주관과 객관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이며 인위적인 세공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위이다. 가령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는 경우나 음악가가 숙련된 곡을 연주할 때와도 같이 전적으로 지각이 연속되는 상태라고 그는 설명한다. 니시다에게 순수경험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선의 연구》 전체를 통해 지향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선(善)의 본질’을 규명하는 핵심기반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선을 학문적으로 설명한다면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참된 선이란 오직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곧 참된 자기를 안다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자기는 우주의 본체인바, 참된 자기를 안다면 비단 인류 일반의 선과 합치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본체와 융합하고 신의 뜻과 어느새 합치하는 것이다. 종교도 도덕도 실로 거기 말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참된 자기를 알아서 신과 합치하는 법은 오직 주객합일의 힘을 스스로 얻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위와 같은 니시다의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참된 선”이란 “참된 자기를 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며, 참된 자기를 알게 되면 인류의 보편적 선과 일치되고 우주의 본체와도 융합하게 된다. 종교와 도덕도 결국 이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바로 개개인 스스로가 “주객합일의 힘”을 얻는 것임이 니시다가 《선의 연구》를 통해 주장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주객합일의 힘은 순수경험의 획득을 통해 달성된다. 따라서 결국 순수경험은 참된 선의 성취로 이어지게 된다는 논리이다.

교토학파 3세대 학자로 분류되며, 소위 “서구의 대표적인 교토학파 대변인”이라고 불렸던 아베 마사오(阿部政雄, 1915~2006)에 따르면 니시다의 사상은 순수경험 이후 계속 발전하며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해 가지만, 일관된 그의 근본적 관심은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으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체계적·조직적으로 파악하며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아베의 설명과 같이, 순수경험을 기초로 한 니시다의 사상은 이후 다른 서양철학자의 사상과 대화하며 점차 발전하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먼저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과 ‘사행(事行, tathandlung)’을 골자로 하는 피히테(J. G. Fichte, 1762~1814)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각’의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직관’을 강조하는 자신의 철학적 특징을 살려 “일체의 작용을 초월한 장소(場所)의 입장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장소의 논리(logic of place, 場所の 論理)’가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던 니시다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사상을 구성하는 ‘이데(idee)’와 ‘절대정신(absoluter Geist)’ 개념을 원용함으로써 ‘절대무(絶對無)’의 개념을 정립했다. 그가 주장하는 ‘절대무’란 결코 단적인 공무(空無, empty nothingness)나 허무(虛無, nihil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존재론적 유 · 무의 구분을 초월한 ‘무’로써,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에 맞닿아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절대무의 자각’으로 확장되며 그의 ‘자각의 철학’이 포섭하는 영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다.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점이 되고 있지만, 니시다는 이처럼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서구철학의 언어로 체계화함으로써 ‘불교적 자각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니시다가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불교철학 내에 한정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점은 넓은 의미에서 대승불교적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국내에서 교토학파에 관한 연구 분야의 또 다른 대표적 학자인 이찬수 교수는 그의 철학에 대해 “대승불교적 입각점에서 동서양의 사상을 서양철학적 언어로 통합해낸 탁월한 성취”라고 평가한다. 일본불교 연구의 권위자인 포르(Bernard Faure) 교수는 니시다 철학에서 그의 종교적 체험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순수경험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니시다의 사상과 선불교와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쨌든 순수경험에 대한 니시다의 공식은 명백히 젠이었다. 니시다가 스즈키처럼 교토(京都)와 카마쿠라(鎌倉)의 여러 사찰에서 1897년부터 10여 년간 젠 수행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03년 여름, 대덕사(大德寺)에서 마침내 어떠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니시다 사상의 토대가 되는 순수경험 이론은 ‘어떠한 사회 · 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독립된 순수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할 수 있다. 심지어 순수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경험은 인식론적 과정의 결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뒤에서도 논의될 내용이지만, 그의 후임자 다나베조차 니시다의 이론에 대해 과도하게 종교적 영역을 중심으로 한 탓에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니시다의 순수경험 이론에 대한 비판도 비판이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니시다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받아온 영역은 그의 ‘역사 · 정치철학’에 대해서이다.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자 그는 조국의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역사 · 정치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대동아공영권을 철학적으로 지지한 것인데,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하였다. 당시 도조 내각은 이것을 수용하여 1943년 11월 5일과 6일 양일간 도쿄에서 열린 중국, 만주, 필리핀, 태국,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하였다. 이로써 니시다는 중국과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지역 제국주의에 빠지고 말았고, 마침내 학자로서 훗날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근대의 세계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구상한 미래 역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끄는 세계였다.

한편 니시다가 자신의 역사 ·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한 것 중 하나가 ‘일즉다(一卽多)’의 논리였는데, 이것이 갖는 화엄교학과의 연관성 때문에 학문적 · 종교적 측면에서 사안은 더 민감해졌다. 그 역시 일즉다 논리의 일례로 화엄교학에 존재하는 사사무애(事事無礙), 사리무애(事理無礙), 혹은 사즉교(事卽敎)를 거론한 적이 있다. 중요한 불교적 가치를 지닌 논리가 전쟁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938년 일본 육군성에서 작성한 〈국방국책안(國防國策案)〉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저명한 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쇄케 한다.

 

3. 다나베 하지메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다나베 하지메
다나베 하지메
다나베 하지메는 니시다와 더불어 교토학파 1세대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가 흔히 니시다의 제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교토학파에 속하는 여타 학자들처럼 교토대학 학생으로서 니시다의 가르침을 받은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에 후배 학자로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니시다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동경제국대학에서 수리철학으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 강사로 재직하던 중 니시다의 《선의 연구》에 큰 감명을 받고 그와 교류하며 배움을 이어나갔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해인 1919년에 니시다의 초청으로 교토대학 문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불교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다나베에게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니시다처럼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 신란(新鸞, 1173~1262)의 사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착안점을 토대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니시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특히 생애 후기 ‘참회도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는 신란의 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둘째, 그는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대체로 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 여겨지는 그리스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불교적 시각에서 상호 대화하며 그것을 해석하고자 했다.

먼저 첫 번째 특징과 관련하여, 다나베가 니시다의 이론적 토대 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을 이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나베는 한편에서 이런 니시다의 순수경험 내지 절대무의 자기한정 개념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공이 색이 되는 논리가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절대무, 즉 공(空)을 색(色)과 즉(卽)이 되게 해주는 ‘매개’에 관심을 기울였다. 공이라는 보편이 색이라는 개체가 되는 데는 논리적으로 매개가 요청되며,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서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란의 정토사상이 ‘아미타불, 그 본원, 중생의 신심’이라는 세 가지 핵심적 요소로 요약된다고 할 때, 다나베가 주장하는 ‘매개’는 그 셋 가운데 ‘신심’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란의 사상에서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다나베는 진리 체험의 과정을 타력적 차원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추구해나갔다. 이처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태도는 수리철학이나 과학철학과 같이 철학 분야 중에서도 자연과학과 가장 밀접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학문적으로 연마한 경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나베는 ‘참회도 철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속에는 조국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표명한 일종의 개인적 양심선언을 포함하고 있다. 1946년에 발표한 자신의 저서 《참회도로서의 철학》을 통해 표명한 이 사상은 전쟁 기간에 국가의 실책에 대해 어떤 반대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며 철학자로서의 무력함으로 고뇌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참회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고백한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나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의 망설임으로 괴로워하였다. 그러한 교착상태 속에서도 철학적으로는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딜레마에도 적당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심지어 철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나의 망설임은 철학자로서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자격 미달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내면으로부터의 질문과 의문으로 씨름하며 많은 날을 보내며 탈진과 절망의 순간으로 내몰리다가 마침내 철학이라는 숭고한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나 자신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순간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나의 무능함에 겸허하게 나 자신을 굴복시켰다. 나는 불현듯 새로운 통찰에 도달했다. 나의 참회하는 고백-메타노에시스(회개)-는 예상치 못하게 외적인 것들에게서 멀어지며 나의 내면으로 나를 되돌이키게 했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다나베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극심한 고뇌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새로운 통찰은 참회로 이어지고, 이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의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전환은 그로 하여금 자력이 아닌, 타력 구제를 강조하는 신란의 정토사상에 더욱 심취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확실히 이것은 나 자신의 힘(자력)으로 떠맡는 철학이 아니다. 그 힘은 이미 절망으로 포기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힘(타력)에 의해 수행되는 철학인데, 메타노에시스(회개)를 통해 나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게 했고, 나의 순전한 무력함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유도했다. …… 메타노에시스 안에서의 내 전향의 경험, 즉 전환과 부활의 경험은 정토진종의 교설을 수립한 신란(1173~1262)으로 하여금 정토진종의 교리를 수립하게 이끌었던 경험과 동일하다. 아주 우연하게도, 비록 나의 경우는 철학의 영역 내에서 발생했지만, 나는 불교적 수련을 통해 신란이 따라갔던 것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선 수행의 체험에서 비롯된 니시다의 사상이 ‘순수경험’과 ‘절대무’를 기반으로 하는 자력문이라면,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다나베 또한 동일한 사상에서 출발하였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사상의 전개를 이루어갔다. 그는 니시다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한 ‘매개’에 천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전적인 타력에 의지하는 신란의 정토사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학자로서 평생을 통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조국의 실책을 바로잡는 데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을 통해 느꼈던 무력감은 그로 하여금 전적인 타력에 의지하는 사상적 전향을 경험하게 했다.

불교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다나베에게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불교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에 체계적인 이론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앙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시다의 선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절대무’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매개로 자기부정을 실천할 수 있는 절대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관(神觀)과 접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다나베가 직접 ‘무즉신론(無卽神論)’이라고 명명한 이 이론은 절대무의 개념을 활용하여 ‘무에 근거를 둔 신론’ 즉 무신론(無神論)을 펼치는데, 이것은 ‘신이 없음’이나 ‘신의 죽음’을 주장하는 기존의 무신론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유신론과 같이 ‘유의 절대 긍정’을 사용하여 신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 절대부정’을 사용하여 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절대무에서 비롯된 타력은 기존 유신론의 신과 같이 직접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대 존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작용하는 사랑이다. 절대자의 자기부정을 통해 인간의 자기부정이 이루어지는데, 전자의 자기부정이 사랑이며 다나베는 이것을 ‘무즉애(無卽愛)’라고 불렀다.

 

4. 니시타니 게이지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교토학파가 니시다에게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학파로 성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니시타니 게이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교토학파의 성장을 위한 그의 기여는 지대하였다. 그는 스승 니시다로부터 “자기보다 더 자기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스승의 사상을 온전히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의 틀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교토학파를 구성하는 학자들 가운데 불교 중심적인 색채를 가장 강하게 드러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니시타니는 니시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약 3년간 유럽에서 수학하였는데, 바로 일본 교육청의 연구원 자격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하이데거와 함께 연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찬수 교수에 따르면, 니시타니는 특히 하이데거의 허무주의 해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움과 동시에 단순히 하이데거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닌, 그의 사상을 뛰어넘으며 현대적 의미의 불교철학을 시도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가 특별히 하이데거를 자주 거론하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사상을 연구하든 서양사상 가운데 그가 특별히 관심을 쏟았던 영역은 소위 ‘과학주의’와 ‘허무주의’였다. 니시타니가 특별히 허무주의에 천착하게 된 이유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타계하고, 2년 후 자신도 동일한 병을 앓아 일시적으로 학교도 포기해야 했던 절망적인 체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러 에세이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과학주의와 허무주의가 상호연계되며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과학주의는 일체를 철저히 ‘대상화’해서 분석하며, 그 결과를 생명이 없는 법칙에 환원시킨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과학적 법칙에 맞추기 위해 애쓰다가 오히려 그 법칙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며, 마침내 인간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무의미를 보게 되는 허무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주의가 주체를 상실하는 허무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과학주의에 매몰된 시대가 허무주의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분석했던 니시타니가 관심을 집중한 또 하나의 영역이 바로 종교인데, 자신이 체험한 시대적 흐름 속에 담긴 ‘종교적 무관심’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였다. 그가 추구했던 접근법은 서양철학이 도달한 지점인 허무주의를 그대로 두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극단까지 유도해가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 발생하게 함으로써 일체 존재의 긍정을 위한 토대가 형성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서양철학이 시도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니시타니가 서양의 허무주의에 대응해 내놓은 방안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것으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의식의 장(意識の場)’으로 칭하며, 이것과 대비되는 ‘공의 장(空の場)’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였다. 니시타니에 따르면, “나의 근저가 허무”라는 사실에 머물고 만 것이 그간 서양철학에서 발전시켜 온 허무주의였으며, 이때의 허무는 “유(有)의 측면에서 표상된 무”이며, 유에 상대되는 무, 즉 ‘상대무(相對無)’에 불과하다. 니시타니는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 “허무가 다시 ‘공’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때 상대무는 극복되고, 존재와 하나가 된 무, 일체의 대립적 표상이 극복된 지점, 즉 ‘절대공(絶對空)’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아베는 공의 입장을 종교 연구의 새로운 토대로 삼고자 하는 니시타니의 종교철학이 갖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니시타니는 모든 종교들에 공통된 보편적인 본질을 찾던 18세기와 19세기 종교 철학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니시타니는 전통적인 종교 철학들의 입장이 무너지고 인간 존재들 속에 ‘내재한 것(the immanence)’이 돌파한 그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그 장소가 ‘공(空)’이다. 공 속에서 비인격적인 인격성-혹은 인격적인 비인격성-이 확립되고 삶과 죽음의 이중적인 노출이 참으로 가능하게 된다. …… ‘전통의 경계 안과 밖의 입장에 동시에 서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을 장차 존재해야 할 종교의 기초로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과거 종교철학의 입장을 부수는 부정적인 요소와 세계종교의 새로운 구축과 발전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확신을 포괄한다.

아베는 그리스도교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주장했던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과 니시타니를 비교하며, 후자의 학문적 시도를 종교의 ‘비종교화(de-religionization)’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불트만에게 비신화화는 해석학적 문제인 데 반해, 니시타니에게 비종교화는 해석학적 문제가 아니라 모든 자아 중심적 견해를 돌파하며 공(空)의 입장에 서는 주체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을 “삶과 죽음, 존재와 무의 불가분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허무 속에서 분산되고 해체되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존재를 회복하게 되는 장소,” 그리고 “대긍정의 장소”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공의 입장은 니시타니 철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자, 근대 서구의 허무주의 입장과 구별되며 그것을 초월하는 돌파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5. 교토학파의 교학적 성과: 결론을 대신하며

이상으로 소위 교토학파의 ‘핵심 3인방’으로 불리는 니시다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 그리고 니시타니 게이지의 사상을 토대로 교토학파가 갖는 사상적 특징을 검토하였으며, 거기에 내재한 불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해 보았다.

니시다가 학파의 개조로서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며 불교와 서양철학이 조우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구축하였다면, 다나베는 니시다 철학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도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한 이론적 단점을 과감하게 지적하며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참회도의 철학’을 개진하며 학자로서 양심선언을 하는 결단성도 보여주었다. 니시타니는 스승 니시다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이론적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을 통해 서양철학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다. 이들 세 학자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교토학파는 불교 교학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첫째, 비록 교토학파가 서양철학의 사상체계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언어를 원용하며 발전하기는 했지만, 현대 동양철학-그 가운데 특히 불교 교학에 기반을 둔 불교철학-이 서양철학과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하며 상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부분은 세 학자를 위시한 교토학파에 소속된 학자들 모두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달성한 교학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선 수행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종교적 체험은 불교학 내에서조차 정교한 교학적 언어로 체계화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 교토학파에서는 이것을 서양철학자의 사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의 시각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창안하며 그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특히 학파의 개조인 니시다의 노력이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함으로써 달성된 이러한 성과는 철학뿐만 아니라 불교학, 종교학, 신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이론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19세기 서구에서 더욱 팽배해진 무신론적 사조와 ‘신의 죽음’에 연관된 주장들이 더욱 강한 세력을 확보해가던 사상적 맥락에서 교토학파는 새로운 신관을 제시하였다. 즉 ‘절대무’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부정을 실천하는 절대자의 자리에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관을 불교적 차원에서 포섭하는 창의적이면서도 과감한 시도였다. 니시다가 수립한 ‘절대무’의 이론을 다나베가 더욱 진전시킴으로써 정립된 이 교학적 성과는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접목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넷째, 교토학파는 과학주의와 허무주의에 직면했던 서구 사회의 사상적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을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 발견하였다. 과학주의에서 비롯되는 인간소외와 이를 통해 허무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악순환을 탈피할 방안을 ‘공의 입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서구 철학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니시타니 철학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다. 소위 ‘불교적 종교철학’을 추구했던 그의 철학은 불교철학이 서구 철학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서 교학적으로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교토학파는 교학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성과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었던 그들의 자취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교토학파의 위상을 격하시킨다. 오늘날 교토학파에 속한 학자와 그들의 제자들에게는 일본이라는 국가 중심성, 일본인이라는 민족 중심성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가치, 그리고 불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본연의 가치를 얼마나 고수하느냐의 책임이 다른 어느 학자들보다 더욱 요구될 것이다. ■         

 


최용운 yuchoe@sogang.ac.kr
서강대학교 대학원 졸업(종교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을 통해 조명한 한국 간화선〉 〈대혜종고의 사회참여에 관한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 《숭산행원의 생애와 사상》 The Buddha & Jesus(공저)가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연구교수.

 최용운 yuchoe@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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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 교단의 현황 / 제점숙
-정토진종, 정토종, 일련종을 중심으로
기자명 제점숙   입력 2021.06.27

1. 일본인의 종교의식과 일본불교와의 관계

2020년 일본 문화청에서 편찬한 《종교연감》을 살펴보면 일본 종교의 대략적인 현황을 알 수 있다. 이 조사에서는 일본 종교를 크게 신도계, 불교계, 그리스도계, 제교(諸敎)로 대별하여 그 현황을 정리하고 있다. 신자 수를 살펴보면 신도계가 88,107,772명, 불교계가 84,835,110명,그리스도계가 1,907,757명, 그 외의 종교가 7,403,560명에 이른다. 여기서 신도가 종교인가에 대한 학자 간의 이견은 차지하더라도 일본인이 생각하는 대표적 종교가 신도와 불교임은 분명한 듯하다. 또한, 이들 숫자만 더하여도 일본 전체 인구수(현재 약 1억 2,500만)를 훨씬 넘는 수치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종교 사정에는 일본 특유의 종교 문화와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조사 결과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일본인들이 신도와 불교를 ‘일본의 대표적 종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에게는 종교가 없다(無宗敎), 종교가 많다(多宗敎)는 인식을, 명확히 해명해주는 것이 이 종교 조사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일본불교의 구체적 현황을 살펴보자. 정토진종 승려이자 연구자인 다카하시 카즈히토(髙橋一仁)는 일본불교의 현황을 편의점 숫자와 경찰관 수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데, 흥미롭다. 즉, 2019년 일본 불교계 사원의 단체(종교법인 포함)는 76,872개에 이르고, 그에 속하는 교사(종교자)는 355,9494명에 이른다. 이 불교 단체 숫자는 일본 국내의 편의점 점포 총수(55,620개)보다도 많고, 교사의 수는 경찰관의 총수(260,000명)보다 많다고 한다. 이 비유로 일본사회 속의 일본불교 현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불교는 도심 속에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대부분이 불교식 장례식을 치르기에 일상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외부, 특히 가까운 한국불교와 비교하더라도 일본불교는 가족을 이루고 계승도 되며, 도심 속에서 훨씬 자유롭고 풍요로워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일본의 종교, 그리고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먼저, NHK 방송문화연구소가 국제비교조사그룹(ISSP) 일원으로 2018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실시한 ‘종교’에 관한 조사에서, 일본 종교의 현재 현황을 과거 조사와 비교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그 요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앙하고 있는 종교 비율은 변함이 없지만, 신앙심과 신불을 섬기는 빈도는 하락하였다.

둘째, 일본인의 종교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라 여겨온 ‘신이[天道様] 지켜준다’ ‘인지(人知)를 초월하는 힘의 존재다’ ‘자연 신이다’라 생각하는 일본인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셋째, 종교에 ‘치유’ 등의 역할을 기대하는 일본인이 감소하고 있다. 종교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람보다 많다.

넷째, 종교 중에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다른 종교에 비해 높다.

여기서 일본인들이 종교라고 인식하는 종교 비율은 불교가 압도적으로 많은 31%이다. 그 외, 신도가 3%, 기독교가 1%, 기타가 1%, 신앙 종교 없음이 62%, 무응답이 2%였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종교연감》 현황과 비교하자면, 신도의 신자로 등록된 일본인은 그 수가 불교보다 다소 높으나, 이 조사에서는 일본인들이 실제로 종교라고 인식하는 것은 불교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에게 종교란 불교가 대표적인 종교로 정착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앙 종교가 없다고 답한 무종교 62%의 수치이다.

그렇다면, 일본인 중 무종교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를 위해서는 ‘세계가치관조사’ 분석 자료가 참고된다. 이 조사로 일본인의 종교관을 분석한 고바야시 야스히로(小林康洋)는 일본에서 종교 유무를 생각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와 결혼이라고 언급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무종교 분포는 18~39세 68.6%, 40~59세 53.5%, 60세 이상 40.5%로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점차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결혼과 종교의 연결은 직접적으로는 불사(佛事), 구체적으로는 부모 내지는 배우자의 죽음을 통해서 장례식이나 법회 등, 종교적인 의식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고바야시는 언급한다. 기혼자와 이미 배우자를 잃은 자 사이에는 당연히 나이 차이가 있겠지만, 배우자를 떠나보내면서 불교를 선택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로써 앞선 연령별 일본인 무종교 분포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즉, 일본인의 종교에 대한 의식은 젊은 층일수록 개인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보이지만, 결혼 후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짐에 따라 가족 종교로서 종교를 의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때 불교가 일본 종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두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종교 의식은 불교를 기반으로 한 개인 종교(젊은 층) 또는 가족 종교(중 · 노년층)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고바야시는 무종교라 하더라도, 일본인은 잠재적으로 가족의 유대나 선조의 공양을 통해 종교적 감수성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일본인의 종교의식, 종교관은 일본불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근 일본불교 교단의 현황은 어떠할까?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그 내용을 간단히 언급한다.

 

2. 급변하는 사회 속 일본불교의 동향

1988년 NHK에서는 〈절이 사라진다(寺が消える)〉라는 특별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무대는 시마네현(島根縣) 어느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사원 상황을 보도한 것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 절의 문도 수 감소로 사원 경영이 어려워 폐사(廢寺)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찍부터 이 작은 마을에서는 인구 감소로 사원 경영의 어려움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 후,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정토종 승려인 우카이 히데노리(鵜飼秀徳)는 6년 전에 일본 사원의 존속 위기에 대해 단가의 계승, 고령화, 후계자 부족 등, 지역을 일일이 답사하여 《사원의 소멸(寺院消滅)》(2015)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우카이는 2020년 NHK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전국에는 약 7만7천 개의 절이 있으며, 지방 인구의 도시 유입이 이대로 계속되면 2040년에는 지방에 있는 약 2만7천 개의 절이 소멸하는 위기에 당착하게 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인구 감소 문제는 지역의 인구 감소에서 시작하여, 일본 인구 전체의 감소(2050년 1억 명 이하로 예측)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당연히 일본불교 사원도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초고령화, 저출산, 비혼의 증가로 연결되는 일본 사원의 소멸 문제는 일본불교 전 교단의 공통 문제로 인식, 이에 대한 각 교단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현황 파악 및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최근 일본에서는 종교가 가지는 윤리, 실천, 사회, 공공성, 사회문제라는 여러 개념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현대 일본사회의 가치관, 생활양식, 가족 형태의 변화 등 사회구조 변화에 따라 일본 종교가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성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장식(葬式)과 같은 주로 죽은 자를 대상으로 영위해나가는 일본불교는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묻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삶의 공유라는 측면의 중요성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단가제도로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잘 유지해 온 일본불교도, 전통 가족의 붕괴와 1인 가족의 증가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불교 각 종파는, 자체 현황 파악을 위해 조사를 본격화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종교의 사회 실천, 사회 공헌이라는 기조를 바탕으로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개념과 방안을 학계는 물론 교단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일본학계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여 등장한 것이 ‘소셜 캐피탈(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이다. 물론 이 개념에 대해서는 미국의 연구자 퍼트넘(Robert Putnam)에 의해 확산 및 보급되었으나, 이를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붓쿄대학(佛敎大學)의 오타니 에이치(大谷栄一) 교수는 이를 불교에 대입하였다. 그는 이 소셜 캐피탈 개념을 ‘사람들의 협력과 행동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성을 개선할 수 있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와 같은 사회조직의 특징’ 또는 ‘사회적 네트워크, 또한 여기서 파생하는 상호성과 신뢰의 규범’이라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본불교가 얼마나 지역주민과 신뢰를 구축하고 있는지,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가 지역사회, 나아가 일본사회에 효율적으로 연계되어 활동이 전개되고 성과를 올리고 있는지를 사람과의 관계 중심으로 살펴보기 위해, 일본불교의 ‘소셜 캐피탈’ 개념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지역 인구 감소라는 측면에서 지역을 대상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불교형 ‘지역포괄 케어시스템’이라는 개념도 등장하였다. 《2017년도 후생노동백서》에 따르면 ‘지역포괄 케어시스템’이란 의료, 돌봄, 돌봄 예방, 주거 및 생활 지원이 포괄적으로 제공되는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종교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맞춤형 서비스를 실시하는 것으로, 종교의 공공성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하에서는 일본불교의 대표적 종파를 중심으로 조사 데이터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불교 각 종파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대표적 불교 종파는 조동종(曹洞宗), 정토진종 본원사파(淨土眞宗本願寺派),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정토종(淨土宗), 일련종(日蓮宗)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들 중 정토진종, 정토종, 일련종 3개의 종교를 예시로 언급하고자 한다.

 

3. 종세조사(宗勢調査)에 나타난 종파 현황

1) 정토진종 본원사

2020년 4월 현재,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현황은 일본 전국 31교구, 10,129개의 사원과 31,907명의 승려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 수가 2014년 10,217개였던 것과 비하면 그 숫자는 해마다 줄고 있다. 현재 공식 홈페이지(https://www.hongwanji.or.jp/info/)에 공개하고 있는 본원사 조직도는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다.


이 조직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문제 현상에 지속적으로 대응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실천하고 있는 조직들이다. 통합기획실을 중심으로 중점프로젝트 추진실과 정토진종 본원사파 종합연구소, 또 최근에 특별 부분으로 추가된 조직들을 들 수 있다. 특별조직인 ‘동일본대진재(東日本大震災) 긴급재해대책본부 사무실’ ‘후쿠시마현 부흥지원 종무사무소’ ‘아이 · 청년층 인연 만들기(子ども · 若者ご縁づくり) 추진실’은 사회문제에 즉각 반응하여 만들어진 사회 실천적 조직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원사파에서는 정기적으로 전 사원을 대상으로 ‘종세기본조사(宗勢基本調査)’라는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1959년 제1회 조사를 시행한 이래 약 5년마다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2015년의 자료가 마지막 자료조사로, 제11회 종세기본조사를 2020년 7월에 실시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부득이 실시하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나스 키미아키(那須公昭) 본원사파종합연구소 연구원, 가와마타 토시노리(川又俊則) 스즈카대학(鈴鹿大學) 교수가 소개한 종세기본조사 내용, 본원사파종합연구소에서 공개하고 있는 자료(《宗報》)를 바탕으로 본원사 교단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009년 종세기본조사를 살펴보면 먼저, 사찰의 위치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시가지 17%, 주택지 28.4%, 농 · 산 · 어촌 54.6%라는 결과가 나왔다. 본원사파 사원의 절반 이상은 농촌 · 산촌 · 어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본원사파 사원이 도시 인구 유입이 활발한 과소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조사 대상자에게 본인이 소속한 사원이 과소지역인지, 아닌지를 물은바 과소지역이라 답한 것이 52.8%로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이하에서는 제9회(2009년)와 제10회(2015) 조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본원사의 현황을 가늠코자 한다.

제9회 조사는 전체 10,280개 사원 대상으로, 회수율 59.1%로 6,127곳이 설문에 응했다. 먼저 주지의 급여와 관련된 항목으로, 사원을 관리하는 주직(住職)이 정기적으로 급여는 받는 경우는 60%이고, 25%는 주직의 급여가 일절 없었다. 근무하는 연령대는 60~70세 미만이 31.2%로 가장 많고, 50~60세 미만이 24.8%, 70~80세 미만이 17.8%, 40세~50세 미만이 13.8%로 대부분이 고령자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원의 연평균 수입을 살펴보면, 100~200만 엔이 25%, 300~600만 엔이 19%, 100만엔 미만이 18.2%, 1,000~2,000만 엔 11.6% 등으로, 도쿄에서는 80%가 600만 엔 이상이고, 사원 수가 많은 시가현(滋賀縣)은 300만 엔 미만에 그쳤다. 참고로, 본원사 사원의 밀도는 시가현 22.9%, 후쿠이현 21.4%, 시마네현 18.8%이고, 도쿄는 겨우 2.1%에 불과하다. 또한, 연 수입 300만 엔 미만 43.2%는 ‘전업 불가능한 사원’, 300~600만 엔은 ‘전업이 어려운 사원’, 600만 엔 이상 37.8%는 ‘전업 가능 사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본원사의 어려운 사원 운영 현황이 짐작된다.

제10회 조사는 전체 사원 10,207개 대상, 회수율 68.1%로 6,952곳의 회답을 얻었다. 연 수입과 관련해서는 9회 조사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사원의 수입으로 지속적인 유지와 운영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사원 호지(護持), 운영이 충분히 가능하다’가 9%, ‘그럭저럭 가능하다’가 41%, ‘어려운 상황이다’가 33%, ‘불가능하다’가 17%로, 본원사 사원 운영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지역별 차이가 보이는데 도쿄, 나가사키현은 운영에 어려움이 없는 곳이 대부분이고, 시가현의 경우는 여전히 운영의 어려움을 나타냈다. 다음은 겸직과 관련된 부분이다. 겸직이 가장 큰 비율은 유치원 어린이집 교직원, 학교 교직원, 다른 사원의 법무, 회사원, 종문기관 직원이었다. 본원사 사원이 집중한 시가현은 90%가 겸직이라 답하였고, 겸업 없이는 사원 운영은 생각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또, 원래 겸업을 했지만 지금은 퇴직연금을 받아 사원 운영에 보태고 있는 주직과 가족 연수입을 합쳐서 사원 운영을 하는 주직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조사 내용의 일부를 언급하였는데, 조사 결과는 본원사 교단 잡지인 《종보》에 공개하고 있으며, 조사보고서를 각 사원에 발송하고 있다. 사원을 개선하기 위해 이 조사를 활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사원 관계자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별도의 설명회도 개최하고 있다. 이처럼 본산을 중심으로 실시한 본원사 종세조사를 통해 인구 감소, 과소지, 저출산, 초고령사회로 인한 사원 존속의 심각성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본원사는 이 통계자료를 교단 내외로도 발신하면서 다각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2) 일련종

2020년 현재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고 있는 일련종 현황은 사원 5,137개소와 승려 7,917명이 확인된다. 일련종에서도 본원사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전 사원과 전 승려를 대상으로 종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사원, 단신도, 교화 활동, 승려, 그 가족의 현황까지 일련종 전반에 걸친 현황 파악을 조사하고 있다. 원래 4년에 한 번 하던 것을 1996년부터는 8년에 1회로 변경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1972년에 제1회 종세조사가 실시되어 2011년 제9회 조사를 실시하였다. 2019년 조사 실시 여부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 조사 결과 역시 《종보》에 소개하면서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일련종 포교사회장(新潟県 西部 布教師会長)인 이케우라 에이코우(池浦英晃)의 2011년 종세조사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일련종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9회 종세조사에서는 그 이전 조사와는 다르게 일련종을 지탱하는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인구 감소 문제와 함께 장례 방식의 변화, 신자 수의 감소, 신앙심 저하 등 사회구조 변화는 일련종뿐만 아니라 일본불교 종교 지형 전체를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한 일련종 현황을 알아보자.

먼저, 단가 증감 현황 정도이다. 일련종에서 단가(檀家)와 신도(信徒)는 각각 사원이 가지는 명부대장에 신고한 신고 · 기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단가’는 사원에 묘지를 가지고 있는 등 귀속 의식이 높은 집안이나 사람으로, ‘신도’는 타 종파 단가로 되어 있어도 일련종 사원에 참배나 행사 참가, 주직에 대한 일상적 상담을 하는 집안이나 사람을 일컬을 수 있다. 단가 증감과 관련된 질문에 ‘감소하였다’고 생각하는 수치를 2004년 조사와 비교하면 22.9%에서 36.6%로 증가하였고, ‘증가하였다’는 수치는 37.6%에서 25.3%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단가의 감소 원인으로는 2004년과 2011년의 조사를 대비해서 보면 ‘이사가 원인’인 것이 53.8%에서 48.2%로 줄어들고, ‘대가 끊어져서(絶家)’가 28.4%에서 71.4%로 대폭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인구 감소, 출산율 하락, 결혼율 저하 등의 인구학적 요인과 직결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외에 사원 이동, 타 종파, 타 종교로 이동한 것이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어 신도 증감의 현황을 살펴보면, 이 수치는 앞서 언급한 단가 증감 추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2004년 조사 결과와 비교하자면 ‘증가했다’고 답한 비율이 24.4%에서 16.6%로 줄어들고, ‘감소했다’고 답한 비율은 21.5%에서 31.1%로 증가하였다. 이 수치를 교구별, 즉 지역별로 살펴보면, 간토(關東) 지역 북쪽인 북관동(北関東) 교구는 단가 수 증가세가 지속되는 반면, 동북(東北) 교구에서는 단가 수 증감은 팽팽하지만, 신도 수의 감소는 현저한 것으로 나왔다. 또, 단가 수, 신도 수가 함께 감소 경향을 보이는 곳은 호쿠리쿠(北陸), 긴키(近畿), 규슈(九州), 주시코쿠(中四國), 홋카이도 5교구이다. 특히, 이 5교구는 2011년도 조사에서부터 감소세가 매우 강하였다. 특히, 이러한 감소는 단가 수가 적은 소규모 사원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후계자 유무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소규모 사원일수록 없다고 답한 비율이 현저히 높다. 1~10호의 단가 수를 보유하는 사원은 64.4%가 없다고 답하였고, 401~500호의 단가 수를 확보한 사원에서는 16.7%, 500호 이상은 25%로 답하였다. 후계자가 없는 이유로는 ‘후손이 없다’가 27%, ‘제자가 없다’가 22.1%, ‘제자, 후손이 있어도 후계의식이 불명확하다’가 12.3%, ‘아이가 있어도 후계 의지가 없다’가 10.7%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서는 ‘후계자가 없어도 대리사원에 일임한다’ ‘폐사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양자를 받아들인다’ ‘종문 후계자 등록 시스템을 이용한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지역 커뮤니티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하고 있지 않다’가 54.1%로 가장 높고, ‘조금 한다’가 27.3%, ‘적극적으로 한다’가 11.3%로 나왔다. 지역민과의 소통이 거의 단절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시하고 있는 활동으로서는 ‘지역 살리기 운동(町 · 村おこし)’ ‘방화 · 방범 · 안전운동’ ‘청소년 교화 활동’ ‘전승 문화와 문화예술 부흥’ 등이다.

이처럼, 단신도의 감소, 후계자 부재, 그리고 지역사회 소극적 참여 등의 수치가 소규모 사원에 편중된 것을 알 수 있다. 지역 활동에 몰두하는 것은 포교에도 연결되고 후계자 육성과도 관계되며, 이로 인한 단가 수 증가는 인구 감소로 인한 사원의 소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음을 이케우라는 지적하고 있다.

 

3) 정토종

정토종도 위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1962년부터 전 지역 사원을 대상으로 종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7회에 걸쳐(1962, 1967, 1977, 1988, 1996, 2007, 2018년) 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들 조사보고서를 통해 정토종 사원 전체 현황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정토종종합연구소가 편집한 연구성과 보고서 《과소지역 사원에 관한 연구(過疎地域における寺院に関する研究)》(2016)에서는 2008년부터 종단 내 과소지역 사원의 조사연구에 착수하여 2015년까지 실제 조사와 인터뷰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하의 내용에서는 상기 보고서 및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중외일보〉 〈문화시보〉에 보도된 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정토종의 현황을 언급하고자 한다.

오타니는 〈중외일보〉(2019.10.4.)에 상기 보고서의 결과를 바탕으로 정토종의 과소지 사원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정토종 사원은 2012년 기준으로 7,032개소, 과소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에 있는 정토종 사원 수는 1,065개소로 전체 사원의 15.1%를 차지하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과소지역에 있는 교구는 7교구(石見 · 北海道第一 · 秋田 · 北海道第二 · 大分 · 長崎 · 愛媛)이다. 또한, 과거 20년간 단가 수가 감소한 비율이 60%나 되었다. 과소지역은 비과소지역과 비교하여 주직이 상주하는 정주직 사원의 비율이 낮고, 다른 업무와 겸하는 겸무사원, 주직이 없는 사원인 무주사원(無住寺院)의 비율이 높았다. 과소지역 사원의 정주직 사원은 약 70%이고, 비과속지역은 80%의 수치를 보였다. 또한, 겸무사원보다 정주직 사원이 일상적인 법화와 교화 · 사회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단가와의 교류도 높은 수치로 나타났다. 이른바, 단가 수의 감소뿐만 아니라 겸무사원, 무주사원의 증가도 정토종 사원 활동의 쇠퇴와 연결되며, 사원의 존속 문제와 직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정토종 종세조사에 나타난 종단 현황이다. 제7회 정토종 종세조사는 2017년에 7,010개 사원 대상으로 실시하여 96.9%라는 높은 회수율을 보였는데, 2018년 10월에 그 통계 결과를 정리하여 2018년판 《종보》에 조사 결과를 게재하여 공개하고 있다. 이 내용을 〈문화시보〉(2019.06.28)와 〈중외일보〉의 기사 내용을 통해 간략히 언급하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국적으로 단신도의 숫자가 감소세에 있으므로 사찰과 주지의 수입이 감소하는 추세다. 주지의 평균 소득은 일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평균 소득과 동등한 정도로 나타났으며, 또한 정기 법회의 상황을 보면, 20년 동안 추선법회(追善法會)나 다나경(棚経) 등 장례식과 관련된 법회가 증가하는 반면, 그 밖의 법회가 감소하여 정토종 교화의 중심이 장례식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장례 건수는 전국적으로 감소 경향이지만, 예를 들면 과소지역인 이시미(石見), 돗토리(鳥取), 이즈모(出雲)의 3개 교구는, 인접해 있어도 지역에 따라 장례 건수의 증감에 불균형이 보였다. 즉, 과소화가 장의(葬儀) 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화의 기본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원에서 멀어져 가는 젊은 세대의 현황에 대해서는, ‘사원 근처에 사는 단가로, 독립하여 거주하는 자녀 세대에게 행사를 알리는가’라는 질문에, ‘전혀 연락하지 않는다’가 35%, ‘모든 단가에 연락한다’가 21.8%, ‘일부 단가에 연락한다’가 33.1%, 그 외 10.1%로 연락을 전혀 하지 않는 비율이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젊은 세대 사원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사원 유지나 존속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역사회와의 소통에 대한 조사로, ‘과거 10년간 단신도 이외의 사람에게 지역사회, 행사, 이벤트 등에 사원을 개방한 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다’가 39.6%, ‘없다’가 57.6%로 훨씬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정토종 역시 수도권 지역에서 증가하는 장례식 문화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별도의 장례 의식 없이 직장(直葬)으로 하거나, 중음(中陰)의 생략 등은 사원의 존속 문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타니는 과소지 사원 문제의 심각함을 피할 수 없는 이상, 다양한 장소에 사는 다세대의 종가, 단신도 이외의 지역주민의 ‘사원과의 관계’를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4. 한국불교에 주는 메시지

이상의 내용으로, 일본불교의 인구 감소와 각종 사회문제, 그리고 일본인들의 생활 가치관 변화로 나타난 어려워진 사원 상황을 각 종파의 종세조사를 바탕으로 가늠해 보았다. 여기서 파악된 문제는 일본불교 공통의 문제로 인식될 수 있으나, 조사 결과는 종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5대 종파인 조동종, 정토진종 본원사파, 진종대곡파, 정토종, 일련종의 과소지 사원 실태를 비교한 아이자와 슈키(相澤秀生)에 따르면, 입지 장소에 따라 조동종과 본원사파는 ‘전국 망라형’으로 나타나고 대곡파, 정토종, 일련종은 ‘지방 집약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과소지에 따른 사원 존속 문제는 교단별로는 상이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일본불교의 전체 현황을 종합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것은, 각 종파의 종세조사 결과를 사회로 공개하고 발신하면서, 해당 교단의 문제만이 아닌 일본사회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이상의 고찰을 통해 일본불교는 불교 사원과 관련된 각종 사회문제를 파악하고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오랜 기간 조사하고 연구를 축적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종파별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종세조사는 어쩌면 교단 내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치욕적인 부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문제들을 일일이 직시하고 결과를 해당 교단 내부 관계자는 물론, 일본불교 전체에 공유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일본불교 각 종파의 충실한 연구 축적은, 어쩌면 불교계 대학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불교에 몸담은 연구자들이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가능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여느 일반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사회 공통의 문제를 고민하고, 또한 여기에 불교라는 종교를 자연스럽게 동참시키면서 불교라는 종교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수용하고 연구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어떠한가? 이 글을 쓰면서 한국불교 각 종단의 상세 현황을 알고 싶어 한국불교 종단 홈페이지와 연구기관을 검색해보았다. 필자가 서툴러서인지 쉽게 검색이 되지 않았다. 일본불교처럼 긴 시간 문제의식을 느끼고 차곡차곡 성과와 데이터를 준비해 온 흔적은 쉬이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불교가 가지는 앞으로의 과제도 산재한다. 사쿠라이는 일본불교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종교는 사회구조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존재해 왔다. 사회적 조건이나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형태로 유연하게 대응해 온 종교조직이 더 많이 생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유연성이야말로, 다른 사회집단과 마찬가지로 서바이벌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구 감소 시대에 개개의 종교로서 본연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요청에도 배려하면서 어떠한 지속적 성숙의 방침과 전략을 가져야 할지, 현대 종교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의 기습처럼 사회가 급변하는 요즈음, 더 이상 종교는 전통적인 모습과 활동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든 일본불교든 일반 사회에 녹아드는 모습으로 이들과 함께 공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첩하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아픔을 공유하고, 그들의 삶에 침투되어야 한다. 한국의 불교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정토종과 본원사의 지역민과의 소통으로 ‘소셜 캐피탈’ ‘지역포괄 케어시스템’이 실현되는 사례를 들고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정토종 ‘개호자 카페(介護者カフェ)’

정토종은 초고령화 문제에 주안을 두고 지역 행정기관과 연계하여 정토종 ‘개호자 카페(介護者カフェ)’를 만들었다. 간병에 지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카페로 현재 각 지역의 사원에서 시작하고 있다. 대본산 조죠사(増上寺)에서 ‘개호자 카페 시작 강좌’(2019년 3월 14일)가 개최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 추세다. 또한, 사원 · 승려는 간호에 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므로 지역의 사회복지협의회, 지역포괄센터와 제휴하여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간병에 지친 나머지 사람을 살인하는 사건도 발생하고 간병인이 이직하는 예도 많아, 이러한 문제를 지자체와 지역민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하고자 열게 되었다. 개호를 받는 쪽은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지원을 해주지만, 간병을 하는 자, 즉 간병인은 지원 범위에 제외되었기에 사원을 비롯한 민간의 지원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서두에 언급한 신뢰로 구축된 ‘소셜 캐피탈’ ‘지역포괄 케어시스템’으로 소멸하는 사원을 지역민과 함께 재생할 수 있는 좋은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토진종 본원사 ‘오렌지 테라스’

‘오렌지 테라스(おれんじテラス)’는 정토진종 본원사의 치매 케어 대책 시스템으로 2017년부터 간사이 사원을 주된 무대로 치매 연수나 다과회를 개최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오렌지’는 일본에서는 치매를 나타내는 색으로, ‘테라스’는 개방적인 테라스와 절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 ‘오렌지 테라스’는 치매 대책의 거점으로 사원을 활용하기 위해, 교토의 젊은 승려들이 프로젝트팀을 결성하여 만든 것으로, 전국 각지에 확산하는 추세다. 고령자와의 접점인 사원을 일종의 사회 기반으로 보고, 이러한 장점을 살려 치매에 고민하는 사람이나 전문가 등이 모여드는, 즉 ‘가케고미 절(駆け込み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시 사람들은 절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도 사원이 높은 관심을 받아, 사원 자체를 ‘소셜 캐피탈’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제점숙 momoko10@naver.com
일본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근대 일본불교 전공. 최근 논문으로는 〈근대일본불교 사회사업의 ‘慈善’에 대한 고찰-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사회사업을 사례로〉 〈동본원사 부산별원, 그리고 대각사-100년을 통해서 본 한국과 일본불교의 ‘공간’의 역사〉 등이 있고, 저서로 《植民地近代という経験ー植民地朝鮮と日本近代仏教》와 역서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공저서 《식민지조선과 종교》 등이 있다. 현재 동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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