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9

알라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알라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 2500년을 뛰어넘는 진보적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이남곡 (지은이) | 휴(休) | 2012-02-15















정가 13,000원
판매가 11,700원 (10%, 1,3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10.0




강의

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우화로 즐기는 장자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좋은마을’ 이남곡의 <논어> 읽기. 논어 전문을 크게 열 가지 범주(탐구, 처세, 정치, 중도, 군자, 품성, 조직, 경제, 인생, 깨달음)로 분류하고, 10장을 다시 세부 주제별로 엮었다. 특히 ‘야마기시 공동체’와 ‘좋은마을’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은 저자의 실천적·대안적 인생 강의와 함께 공자가 당시 사회의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공자의 사상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누구나 인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공자가 말한 인을 단지 품성론이나 윤리론에 가두지 않고 우주 자연계 안에서 진화한 인간이라는 특성을 지닌 생명체가 그 생명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작용이 인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인간의 오랜 노력으로 발전시켜 온 인류 문명이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여러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우주적 생명력을 해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불인不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1장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
無適無莫 義之與比_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學則不固_진정한 위엄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思而不學則殆_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
不如丘之好學也_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폐단
內自省也_어진 사람을 보면 스스로를 살핀다
吾有知乎哉 無知也_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오직 모를 뿐

2장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법
用之則行 舍之則藏_쓰이면 행하고, 안 쓰이면 간직한다
不失人 亦不失言_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법
欲訥於言 而敏於行_말은 더디게, 행동은 민첩하게
管仲之仁_군자와 소인의 차이
和光同塵_세상을 구하고자 지혜를 감추고 속세에서 산다
老者安之 小者懷之_알아주어 등용된다면 무엇을 하려느냐?
事君盡禮人 以爲諂也_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 건 아첨이 아니다

3장 정치는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이다
必也正名_먼저 명名을 바로 세운다
爲政以德_덕으로써 정치를 구현하다
知爲君之難_역할을 즐기는 자와 권력을 즐기는 자
民無信不立_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바로서지 못한다

4장 중도, 조화로운 삶
切問而近思_본질을 묻고 현실을 생각한다
異端 斯害也已_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_불인不仁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을 일으킬 징조다
禮之用 和爲貴_예禮와 화和의 조화가 귀중하다

5장 화합하되 똑같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周而不比_군자는 편파적이지 않다
不念舊惡_지난날의 악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다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_교만하고 인색하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和而不同_화합하되 똑같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驕而不泰_군자는 태연하지만 교만하지 않다
群而不黨_잘 어울리지만 편을 가르지 않는다
君子上達 小人下達_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

6장 널리 은혜를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다
愛之 能勿勞乎_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성장하도록 돕는 데 있다
一以貫之_충忠과 서恕가 있을 뿐이다
克己復禮 天下歸仁_천하가 다 인仁으로 돌아가게 하다
博施濟衆_널리 은혜를 베풀고 대중을 구제하다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_다섯 가지 실천이 인이다

7장 사람들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산다
其愚不可及也_지극한 덕은 칭찬받기가 어렵다
亦不入於室_당堂에는 올라갔지만 실室에는 들지 못하다
先事後得_일을 먼저 하고 성과는 나중으로 미룬다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_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다
苟志於仁矣 無惡也_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이 없다
修己以安百姓_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한다
述而不作_오직 배워서 전할 뿐이다
擇不處仁 焉得知_지혜로운 사람은 인심이 후한 마을을 가려 산다
與共學, 與適道, 與立, 與權_함께 뜻을 세워 실천하다

8장 먼저 먹이고 다음에 가르친다
旣富之敎之_먼저 먹이고 다음에 가르친다
富與貴 不以其道 得之 不處也_정당하지 않은 부귀는 누리지 말라
放於利而行 多怨_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百姓不足 君孰與足_곤궁한 사람은 돕되 넉넉한 사람은 보태주지 않는다
富有 苟美矣_세상에 부는 가졌으되 아름다운 부자는 드물다

9장 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_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마라
切磋琢磨_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함만 못하다
從心所慾不踰矩_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다
好德 如好色_덕德 좋아하기를 미색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益者三樂 損者三樂_유익한 즐거움 세 가지, 해로운 즐거움 세 가지

10장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子不語怪力亂神_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天之未喪斯文也_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아니 하니
毋意, 毋必, 毋固, 毋我_네 가지를 끊고 대자유에 이르다
未知生 焉知死_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






저자 : 이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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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합작과 연정은 시대정신이다>,<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비워야 산다>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45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했다. 중학교까지 함평에서 마치고, 1960년 서울 경기고에 입학했다. 처음 서울 땅을 밟은 그해 겪은 4. 19 혁명으로 시대에 눈뜨기 시작했다. 1963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변혁운동에 나섰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지하운동에 가담했다. 1972년부터 농촌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농촌운동과 함께 교사운동을 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을 전후로 그의 사상은 큰 전환을 하게 되는데,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사상이나 운동론은 이때 그 틀이 형성되었다. 이런 바탕에서 불교사회연구소 등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그 즈음 무아집·무소유·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山岸〕 사상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연찬회에 참석한 게 인연이 되어, 1996년부터 8년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여기에서 그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향해온 새로운 사상, 즉 ‘자본주의와 아집(我執)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여러 면에서 새로운 통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직은 일반화할 수 없는 무소유사회보다는 지금 사람들의 실태로부터 출발하여 더 보편적인 실천을 해보고 싶어, 전북 장수에 자리잡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마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을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 《중용》을 ‘연찬’하고, 서로 자기성찰과 소통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며 내일을 함께 설계하고 있다. ‘마음과 물질이 함께 풍성한 사이좋은 마을’?이것이 장수에서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마을이다.
또한 새로운 운동에 대한 그의 꿈은 전북 익산의 ‘희망연대’에서 젊고 새로운 시민운동가들과 만나게 했다. 그가 2009년에 냈던 《진보를 연찬하다》에 실린 내용들은 야마시기 시절의 경험과 이 단체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일관되게 지향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현상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 자기변혁과 세계변혁이 둘이 아닌 하나로 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라 파악하며,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인문운동가의 길을 가고 있다. 현재 ‘연찬문화연구소’의 이사장 직을 맡고 있다.





이상사회를 향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던 모험가,
2,500년의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논어》에서 답을 찾다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저자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에 앞장섰고, 1970년부터 농촌 지역에서 8년간 ‘교육실천연구회’ 활동과 같은 교사운동을 하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4년간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법륜 스님과 함께 불교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에 대해 사상적·이념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직접 모델사회 실천을 위해 아내 서혜란 여사와 무소유공동체 생활을 시작,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면서 무소유 사회가 아직은 보편적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장수에 정착하여 장류醬類 사업을 하며 보다 보편적인 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몇몇 가까운 벗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서로 소통하며, 지향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과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고 실천하기 위하여 고전을 함께 연찬·강독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이 자리에 《논어》가 선정되었다. 이후 2년 여간 매주 1회 거의 빠짐없이 강독회를 가지면서 공자라는 위대한 인간을 발견하였다.
저자는 젊은 시절 공자에 대해 ‘봉건제와 군주제 그리고 가부장제의 옹호자’로 막연히 거부감을 가진 적도 있었으나 《논어》 연찬을 계속하면서, ‘아집이 없는 자유인, 실사구시의 과학적 인간,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현실참여적 인간 그리고 소통의 달인’으로서 공자를 만나게 되면서 마을공동체 정착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좋은마을’ 이남곡의 실천적·대안적 《논어》 읽기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사는 이치, 교육, 정치, 경제, 처세,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이야기들을 묶었다
이 책은 논어 전문을 크게 열 가지 범주(탐구, 처세, 정치, 중도, 군자, 품성, 조직, 경제, 인생, 깨달음)로 분류하고, 10장을 다시 세부 주제별로 엮었다. 특히 ‘야마기시 공동체’와 ‘좋은마을’에서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얻은 저자의 실천적·대안적 인생 강의와 함께 2,500여 년을 경과하면서도 여전히 탁월한 견해로 보이는 공자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공자가 당시 사회의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공자의 사상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누구나 인仁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공자가 말한 인을 단지 품성론이나 윤리론에 가두지 않고 우주 자연계 안에서 진화한 인간이라는 특성을 지닌 생명체가 그 생명력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작용이 인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인간의 오랜 노력으로 발전시켜 온 인류 문명이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여러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우주적 생명력을 해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불인不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 수많은 성현들이 있지만 공자가 그들과 달랐던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현실 속에서, 그것도 당시 주류 사회 속에서 실천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상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가 통합되어야 하는 현대적 과제에 많은 영감을 준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의 인생을 비춰 보고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침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몇 가지 메시지
①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
사람들은 보통 상대의 출신, 부모, 고향, 학교 등을 통해 판단하고, 과거의 꼬리표를 붙여 재단한다. 선입견이란 것이 참 무서워서 한 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영원히 나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공자는 사람을 평가할 때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반드시 살피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즉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 사람은 틀렸다”라고 비난해도 ‘정말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을 공자는 ‘필찰必察’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필찰은 뭔가 흠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과 아집으로 잘못 판단하기 쉬운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을 살펴볼 때도 중요하다.

②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가 바로 인仁이다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기 쉽다.
지금의 실정을 보면 제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이 뒤처지는 불균형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물론 제도도 계속 발전시켜 가야 하겠지만,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이상 정치 실현의 중심 과제라 하겠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숙제는 의식의 진보이고, 이때 진보 의식이란 공자가 말한 덕을 가리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주변의 흐름이 덕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순리다.
공자는 “인은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사람 위에 놓으면 굽은 사람도 능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이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인데, 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배치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③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
공자는 아집을 경계했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혹시 허물이 있더라도 아집이 없는 사람은 허물을 고칠 수 있지만, 완고한 사람은 허물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 완고한 사람의 경우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완고함이 더해질 뿐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 이 문장을 읽다 보면 공자 같은 사상가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말을 했을까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가 대하기 쉬운 사람과 사귀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을 사귈 때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배우려는 자세로 사귀어야 자신의 허물을 지적 받고 그것을 고치기 쉽다. 공자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요즘 “스승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하지 않는 완고한 내 마음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이켜볼 일이다.

④ 쓰이면 행하고, 안 쓰이면 간직한다
세상에 ‘쓰임’을 구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선거든 임용이든 취직이든 창업이든 뜻대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고, 잘 나가다가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령 낙선한 정치인이 ‘이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연예인이 인기가 떨어지면 ‘이제 대중은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깨달아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
이때는 내면으로 돌아가 진실한 힘을 키우는 것, 즉 사지즉장舍之則藏이 필요하다. 실제로 자신의 쓰임새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다.

⑤ 세상을 구하고자 지혜를 감추고 속세에서 산다
장저와 걸익이 함께 밭을 갈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공자께서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 있는 곳을 물어보게 하셨다.
이때 장저가 “저 수레에 앉아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하고 묻자, 자로가 대답하였다.
“공구孔丘이십니다.”
“저 사람이 바로 노나라의 공구라는 분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루터쯤은 알고 있을 텐데…….”
자로가 다시 걸익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걸익이 다시 자로에게 “당신은 뉘시오?” 하고 묻자 “중유올시다”라고 대답했다.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은 걸익이 밭가는 일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도도한 물결에 온 천하가 다 휩쓸려 있거늘 이를 누구의 힘으로 바꾸겠소? 당신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인물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해 사는 인물을 따르는 게 어떻겠소?”
자로가 가서 이 말을 전하니 공자께서 길게 탄식하면서 말씀하셨다.
“새나 짐승과는 함께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으면 누구와 함께 산단 말인가?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는 구태여 바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제18편 미자 6장)

마음속에 이상향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 보는 장저나 걸익 같은 사람들의 삶과 공자의 삶이 고금을 통해 대표적이라 하겠다.
공자는 현실과 이상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결합하려 한 점에서 대단히 뛰어난 성현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웃은 장저와 걸익 같은 노자류에도 대립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유유자적하며 사는 것도 좋겠지만, 저 민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심정이 《논어》 전편에 흐르고 있다.
결국 무도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그를 현실 참여로 이끈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주류사회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세상을 바꿔보려는 공자의 보편적이며 현실적 태도가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공자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꿈을 향해 나아가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상향의 로망을 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새로운 사회나 문명을 보편적으로 지향해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과 함께, 기존의 주류 사회 안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키워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저자는 공자가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봉건군주제라는 사회적 현실에 몸을 담근 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그 체제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안 될 줄 알면서도 헛되이 애쓰는 사람’ 또는 ‘벼슬에 목말라 하는 소인배’ 등처럼 때때로 조롱받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한다면 공자의 지혜를 등불 삼아, 누가 오해하고 비판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라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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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1장에서 여러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됴 반드시 살핀다에서 연찬 방식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나에게도 꼭 필요한 방식이였다. 간만에 만나는 생각하는 힘을 키울수 있는 책임.
튼튼이의 여유 ㅣ 2012-03-23 l 공감(1) ㅣ 댓글(0)








총 : 2편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튼튼이의 여유 ㅣ 2012-03-23 ㅣ 공감(0) ㅣ 댓글 (0)


1장 제목이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좋아하여도 반드시 살핀다.'이다.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이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고, 좋아하면 나도 좋아하고...

예로 인터넷을 물건을 살때도 평이 좋으면 괜찮은가 보다하고 사게 된다.

'살핀다'...어떻게 살펴야 하나?

저자는 공자의 '의'... 무타협을 제기한다.

누가 옳은가?아닌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해야 한다고.



이 책은 공자의 사상을 저자의 식견으로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풀어놓은 책이다.



당분간 이 책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너무 반갑다. 생각을,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만나서.

논어, 참된 인간애를 품는 정수 바보 ㅣ 2012-03-07 ㅣ 공감(1) ㅣ 댓글 (0)


논어는 공자 문하에서 남긴 대화집이다. 일부는 공자가 한 말이고 또 일부는 문하생들이 한 말이다. 예수가 남긴 말도 후대가 남겼듯이 논어도 공자시대엔 경(經)이 될 수 없었다. 공자의 가르침이 성전(聖典)이 된 것은 공자 사후의 일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된 것도 그렇다.

논어는 세상을 사는 정치과 교육, 문화와 경영까지도 담고 있다. 논어를 정치학, 기업경영, 학문의 교본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논어의 근본 바탕은 사람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남곡 선생의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은 그걸 일깨운다.

"성인이 되는 길을 나와 다른 세상의 일로만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한자로 '성聖'을 풀어 보면 耳와 呈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耳를 뜻으로 삼고 정呈을 소리로 삼고 있다. 즉 소통에 막힘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인은 못 되어도 소통의 달인은 한 번 쯤 도전해 볼만하지 않을까. 소통疏通은 인간이 개인화 되고 파편화되고 있는 오늘날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는 화두다. 가정에서부터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소통이 절실한 시대라 하겠다."(320쪽)

이는 논어 제 9편 자한 4장을 풀어가면서 한 이야기다. 이른바 '공인'(公人)을 이야기함인데, 공인이란 단순히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익과 욕망을 넘어선 인간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소아(小我)의 존재론적인 자아를 넘어 대아(大我)의 관계론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는 인(仁)을 주창했고, 참된 소통의 삶을 추구했고, 아집이 없는 대자유인으로 산 까닭 말이다. 물론 시절이 수상하던 춘추전국 시대였으니 무턱대고 무아(無我)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오직 실천적인 언행을 내세웠다.

어쩌면 그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젊은 시절 이남곡이 공자를 보수 우익의 원조로 여긴 것 말이다. 함평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던 가운데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옛 시절의 고전 해설들이 시대 정권을 보좌하는 시녀역할을 자처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사회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전북 장수로 귀농한 그는 논어를 달리 읽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치학이나 기업경영 혹은 학문의 교본이라는 시각을 벗어나 참된 인간애를 품고 있는 게 논어의 정수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를 모두 품고 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논어 제 2편 위정 14장을 읽어가면서 참된 군자(君子) 상을 밝혀주고 있다. 이른바 무고정(無固定)의 사람, 무아집(無我執)의 인격으로 결코 편파적이지 않고 보편성을 추구하며 그것을 실언하는 인간을 일컫는다. 그것이 주이불비(周而不比)이자 군이불당(群而不黨)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총선과 대선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야말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이룰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곡남 선생은 주이불비(周而不比)의 정신을 살려 개인이나 특정 세력의 이익을 좇기보다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당부한다. 그것이 곧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치이자, 우리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진일보 할 수 있는 계기이며, 그것만이 사람을 참되게 사랑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더욱이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논어의 관점으로 우리시대의 양극화 해소 방안도 내 놓는다. 물론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서 나름대로 시각차를 보이지만 중요한 건 현실성 있는 재정대책이다. 이에 대해 그는 '관중의 인(仁)'으로 그 해법을 찾는다. 이른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불리할지라도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 놓는 것 말이다. 다만 생산 주체의 의욕이 떨어지지 않는 '합리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공자 사후 2,500년이 지난 오늘이다. 물질과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누가 뭐래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전쟁이 도사리고 있고, 환경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고, 양극화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남곡 선생이 재해석한 논어를 통해 참된 인간애의 정수를 길어 올리길 바란다.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1



    「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
小山 哲司
内村鑑三

内村鑑三
     本日の私の話のタイトルは、去る8月に開かれた三愛講座の主題である三つの愛、即ち、「神を愛し、人を愛し、土を愛す」をお借りしました。8月には三愛精神に沿った学びを致しましたが、三愛精神自体については余り触れられませんでしたので、一年の締めくくりでもあるクリスマスの時期に三愛精神の歴史を辿り、三愛精神の過去、現在、そして未来を展望してみたいと思います。副題を「今に生きるデンマルク国の話」としましたが、これは日本における三愛精神は内村鑑三の「デンマルク国の話」を出発点としており、しかも、今から90年近くも前に語られ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今に生き、そして、未来に命を保つ話であると考えるからです。
     この「デンマルク国の話」は、明治44年(1911年)1月22日に柏木の今井館で行われた講演をまとめたものであり、「信仰と樹木とをもって国を救いし話」というサブタイトルが付けられております。その粗筋は、ドイツ、オーストリアとの戦争に敗れてシュレスウィヒとホルスタインの2州を奪われたデンマークの復興を願う工兵士官ダルガスが、デンマークの領土の半分以上を占めるユトランドに植林を行って沃土となし、外に失った国土を内に求めようとする苦心を描いたもの。ダルガスの苦心の結果、ユトランドの荒野には樅の木が繁り、木材が収穫できるようになったばかりか、気候自体が大きく変化して、良き田園となったのです。
     1911年に内村が今井館で行った「デンマルク国の話」は、その年の「聖書之研究」第136号に掲載され、内村は、それ以後も1924年に「木を植えよ」を「国民新聞」に発表し、さらに、「西洋の模範国 デンマルクに就て」を同新聞に発表するなど、デンマークに対する高い評価と強い関心を示していきます。やがて「デンマルク国の話」は小中学校の教科書にも掲載され、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て参りますが、国民一般に広く読ま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点で、内村の著作としては「後世への最大遺物」と並んで双璧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こうした内村の影響力と当時のトルストイの流行とによって、「理想の農業国 デンマーク」ブームが起きて参ります。
     ところで、内村の札幌農学校時代の友人に渡瀬寅次郎(1859~1926)という人物がおりました。渡瀬寅次郎は静岡県沼津市の出身で、内村よりも1年早く第一回生として札幌農学校に入学し、クラーク博士の薫陶を受けてキリスト教を信じる様になります。卒業後は、まず北海道開拓史として官界に入り、次いで教育界に身を転じ、明治19年(1886年)には旧制水戸中学校(現在の茨城県立水戸第一高等学校)の校長として水戸に赴任しております。明治21年(1888年)には茨城県立師範学校の校長に転じ、明治22年(1889年)にその職を辞した後は、活動の場を実業界に転じて「東京興農園」という種苗の販売会社を設立します。東京を中心にしながら札幌や信州上田に農園を作り、また、静岡県の沼津に柑橘園を作ります。やがて、千葉県、埼玉県、山梨県などの各地に採種場を設けていきますので、農業分野の実業家としては成功した人物であったといえるでしょう。
     大正15年(1926年)に渡瀬が亡くなったとき、内村鑑三は札幌時代の旧友を代表して次のような追悼の言葉を述べております。
              「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
     我等の旧き友の一人なる渡瀬寅次郎君は永き眠につかれました。悲しみに堪へません。
      (中  略)
     渡瀬君の霊魂は天にまします神の懐に帰りました。しかしながら君のこの世における事業はまだ完成されません。神を信ずる者の事業は自分のための事業ではありません。国のため、人類のため、神のための事業であります。そして君はよくこのことを解してゐられたと承つてをります。丁抹(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てる農学校を起こしたいとは、君の年来の志望であつたと承ります。もし君がなほ十年生存せられたならば、この理想が君の直接の監督の下に実現したらうと思ひます。しかしながら、このことなくして逝かれしは、残念至極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尊ぶべき理想は実現を見ずして已むべきではありません。その実行の責任は今や御遺族とわれら友人の上に落ちているのであります。
     日本はたしかにかかる農学校を必要とします。基督教を基礎とするものでありますから、これを日本政府の設立に待つことは出来ません。これは渡瀬君の如き人物を待って初めて実現さるゝものであります。もし丁抹の農聖グルントウイツヒの精神がわれらの旧友渡瀬寅次郎君の名によって、わが日本に実現するにいたりますならば、君は天上の祝福を得しと同時に、地上の栄光を得らるゝものであると思ひます。私は旧札幌農学校の同士を代表し、こゝに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の希望を述べます。これ亡き君に対し、君の遺族と友人とが尽くすべき最大の義務であると信じます。
      (内村鑑三全集第30巻(岩波書店 1982年 P183~185)
     この追悼の言葉で触れたように、渡瀬寅次郎はデンマーク流の、基督教の基礎に立った農学校を作ることを望んでおりました。渡瀬が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を建設することを思い立った経緯については、当時、デンマークから帰国した直後のデンマーク研究家平林広人(1886~1986)が、「デンマルク」(文化書房 昭和3年発行)の中で次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山形縣自治講習所長として十年の貴い経験を有し、再度丁抹に遊び欧州各地の農村教育を視察された、吾人の先輩加藤完治氏は、石黒忠篤氏、山崎延吉氏、井上準之助氏、及び小平權一氏その他の知己、同情者によりて組織された日本国民高等学校協會によりて茨城縣支部に我國最初の高等學校を創立し、昭和二年の春既に開校しておられ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
     然るに大正十五年四月丁抹訪日飛行機の歓迎準備講演として、著者(平林)の東京放送局に於てせる「丁抹の文化について」と題せる放送を、病床に在って聴取し共鳴せられたる故渡瀬寅次郎氏の遺志によって更に一つの国民高等學校が生まれることになつてゐる。(「デンマルク」121~2P)
     これによれば、平林の講演をラジオで聞いた渡瀬が感銘を受け、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を思い立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また、平林の伝記「祖父 平林広人」(私家版 岩淵文人著 P113)によれば、銀座教会の今井三郎牧師によって内村を紹介された平林が、デンマーク流の国民高等学校が日本にも欲しいと語ったところ、内村は賛成したばかりか、積極的な援助を約束して、平林を渡瀬に紹介したとされています。多分、渡瀬は平林に直接会った上で、放送も聞いたのでしょう。なぜデンマークかという点では、内村鑑三が「デンマルク国の話」で火をつけた、当時のデンマークブームがあったこと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
     こうして、「デンマルク国の話」から15年経った大正時代の末に、内村はデンマークへの関心を深め、渡瀬の遺志を受けてデンマーク流の農学校建設に乗り出して行きます。
     ところで、内村は渡瀬寅次郎の追悼の言葉を「グルントウィツヒの如く」と題し、「渡瀬寅次郎君の名をグルントウイツヒの名が丁抹に残る如く、わが日本に残したい」と述べました。このグルントウイツヒがどの様な人物であり、彼が建設したとされる国民高等学校はどのような学校であったのでしょうか?このことについて、簡単に紹介しておきたいと思います。
     内村がグルントウイツヒと表記した人物は、ニコライ・F・S・グルントヴィ(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のことです。グルントヴィは、牧師の家庭に生まれ、父の跡を継いで牧師になりますが、当時のデンマークの儀礼化したキリスト教会を批判し、「主の言葉はなぜその家(教会)から消えうせてしまったか」という説教集を出版して教会勢力からの非難を浴びます。教会との論争の中で、彼のキリスト教理解は次第に変貌を遂げ、やがては、キリスト教の真理、キリストの言葉は、教会に集う無学だが敬虔な信徒の間によみがえるという理解に至り、これに共感した農民たちが、デンマーク国教会の改革運動に乗り出していきま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農民たちの台頭を楽観的に見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農民たちの実力が高まったとしても、彼等の声が国政に反映され、農民とそれ以外の人々(ブルジョアジーなど)との平等が達成されることが必要であり、それが出来なければ、民主主義は一転して衆愚政治になってしまう。そして、衆愚政治とさせないためには、国民の多数を占める民衆(農民)が高いレベルの学問を身に付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た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自分の理想とする学校の姿を本にまとめ「生のための学校」として世に出します。それによれば、グルントヴィはイギリス留学中にケンブリッジで経験したカレッジをモデルとした学校を考えていたようです。教師と学生が寝食を共にし、親密に生きた言葉によって語り合う中で、それぞれの生が生き生きとしたものとなり、生への期待を喚起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ここで、「生きた言葉」で語り合うと申しましたが、グルントヴィの念頭には、死んだ言葉、死んだ学問の代表としてラテン語学校がありました。グルントヴィ自身は、こうした古典語の素養の豊かな人物でありましたが、かつて通ったラテン語学校での体験が、彼にこうした思いを抱かせたのです。そこでは権威主義的な教師によって無味乾燥な詰め込みの勉強が強いられ、学校の雰囲気自体も窒息しそうなものであって、このラテン語学校のことをグルントヴィは「すべてが人をだめにし、怠惰にさせ、腐らせるもの」と表現しております。グルントヴィの理想が「生のための学校」であれば、さしずめ彼が体験したラテン語学校は「死の学校」とでもいうべき存在であったのでしょう。もし、現在の日本の学校を見たら彼は何というでしょうか?
     「生きた言葉」で語り合い、それぞれの生を深めて行くことが目的であれば、そこに資格や試験、単位などが入り込む余地はないとグルントヴィは考えました。彼によれば、試験とは「年長者が、若者の経験の範囲では答えられず、ただ他人の言葉を繰り返すことで答えとするに過ぎないような質問で、若者を苦しめるもの」なのです。こうした「受験制度」の帰結がどうなるのかを、彼は、150年以上も前に見抜いていたことになります。また、職業訓練を導入することも認め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それは、生のためではなく、利益のためだからです。
     資格も得られず、試験も単位もない学校が、果たして存在できるのでしょうか?受験という目的があるからこそ子どもたちは机に向かい、学力を身に付けて行く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グルントヴィは、学校のシステムは試験に基づくべきではなく、「全ての賢明な学校のシステムは、絶えざる啓発に基づく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ます。こうした啓発は、試験制度では押し殺されてしまうのです。
     グルントヴィは、こうした自分の理想の学校を「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と名付けました。英語では「Folk high school」と表記しますが、日本語に直せば「国民高等学校」とでもいうのでしょうか。こ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44年に最初の学校が作られ、その後、グルントヴィに共鳴する人々によってデンマーク各地に展開されて行きます。
     黎明期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運営は、農村青年の生活に合わせて、冬の6ヶ月を男子学生、夏の3ヶ月を女子学生という学期構成を取り、原則として全寮制として教師も学生と寝食を共にしました。
     当初の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は18才以上の青年を対象としておりましたが、やがて、それ以下の年齢の子どもたちを対象としたフリースコーレ(小学校に相当)が1856年に作られます。フリースコーレを設立したクリステン・コルという人物は、子どもの教育は親と教師がするものであり、国家が介入してはならないと主張して次のように言います。
    「子どもは国家に属するのではなく、親に属するのだ。だから両親は、子どもの一時期に責任があるのではなく、その全ての精神的な成長に渡って、責任があると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
     やがて、フリースコーレとフォルケホイスコーレの間をつなぐ、エフタースコーレという中学校に相当する学校が設立され、現在の体制の原型ができ上がって参ります。
    2へ続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