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박노자, 한겨레21 06091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박노자, 한겨레21 06091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불교적 신념이 강한 내가 한국 종단의 ‘신도’가 되길 거부하는 이유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동아시아 종단의 치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의 내면적 신앙이 어떻게 돼도 어떤 조직적 종교의 신도로 칭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 조직을 멀리할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야만의 극치에 대한 종교들의 무력함에 따르는 환멸이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가 자행하는 전쟁 행위에 대한 종교 집단들의 협력은 구미 지역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었다.



△ 샤쿠 소엔(왼쪽)은 메이지 시대 선불교의 최고 고승이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근대 학문을 배운 개화 인사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구미 지역의 주류 교단들에 면죄부를 줄 일은 없지만, 구미 지역에서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비주류 교단들마저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의 협력자로 돌변하곤 했다.



일본 퀘이커의 변절



예컨대 구미에서 병역거부·반전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온 퀘이커들을 생각해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일본인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국가와 천황에의 보은’을 앞세워 ‘전쟁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밝혔다. 결국 일본 퀘이커들은 세계 퀘이커 공동체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끊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퀘이커로서 가장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 박사는 1898년에 영문으로 일본 무사도의 찬양론을 쓰는 등 군국 일본의 대외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여호와의 증인 등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퀘이커와 같은 정통 평화 교단들마저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지 못한 게 근대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성경책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국민 총동원’을 상시적으로 실시하는 후발 근대화 사회에서,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아닌 시저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그 제자 함석헌(1901~89) 같은 위인들을 자랑할 수 있다. 서구에서 지금도 ‘전쟁 반대의 종교’로 인식되는 나의 신앙, 즉 불교는 과연 어떤가?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한국의 불교 교단사를 보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불교의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종교적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민초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커 정권에 이용가치가 높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오타니파(大谷派)라는 한 교파의 지도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특히 우리 신도로서 국가에의 충성이 부처님의 절대 진리에 상응되는 세속적인 진리라는 점을 자각하여 국은(國恩)을 갚는 데에 마음을 다 바치라”는 교시까지 내렸다. 그 지도자를 비롯한 오타니파의 성직자들이 ‘국가의 은혜’를 갚느라고 전선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인 위안 방문’을 했고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전쟁 선전의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면 곧 정토 왕생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사자를 위한 추도회까지 현지에서 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한 불교의 여러 교파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총알받이들을 전장에 보내기 위한 정신적인 마약으로 변조하면서까지 열을 올렸음에도, 일본의 상류사회로부터 “기독교인에 비해 전쟁 협조를 덜 열심히 했다”고 빈축을 샀다.



외래 계통의 소수파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그 당시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전쟁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중생을 살려라?



청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의 종군 승려들은 전사자 추도회를 할 때 중국 병사들의 유해까지 함께 장례 치르는 등 ‘적병’에 대한 나름의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에서는 불교계 석학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58~1919)의 말대로 “부처님의 원수”였던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은 광풍 그 자체였다. 주요 종단들이 징병 대상자에 대한 격려와 군영의 위문 방문, 군승 파견을 한 것은 물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참전했던 군승들이 “적들을 무수히 죽여버렸다”고 불교 언론에서 자랑할 정도였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맡았던 샤쿠 소엔(??宗演·1860~1919) 스님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종군 포교사로 파견 중이던 그는 불교에 긍정적이었던 톨스토이가 “교전 중의 양국 대표자로서 반전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자 “공생이 불가능한 존재들 사이의 융화에 도달하자면 전쟁과 살인이 필수적”이라고 대답했다. 승려에게 참전은커녕 칼 찬 사람에의 설법까지 엄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해본다면, 속인 톨스토이의 제안에 “노”를 외쳐대는 ‘고승’의 모습은 괴이하게만 보인다.





△ 화폐 개혁 전 5천원권에는 니토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이미 그때에 불교계는 대량살인을 ‘일살다생’(一殺多生)이라 불렀다.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편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저 해로운 벌레를 죽임으로써 아시아 평화를 도달케 하는 우리 병사”들을 “보살행의 수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황 폐하는 여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명하는 전쟁이란 크나큰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으로 진일보했다.



일본 불교에 거의 편입된 식민지 조선의 주류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이후에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 그는 전쟁 때의 명령이 바로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의 발언



오늘날의 한국 주류 불교 종단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의 군사주의를 그대로 담은 식민지 말기의 ‘호국을 위한 살생 허용’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종단의 신도증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불교적 신념이 강해도 말이다. 아니, 불교적 신념이 강하기에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고 효과의 묘약을 잘못 이용하면 최악의 독약이 되듯이, 가장 고매한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비폭력·반전에 관한 부분을 빼버리면 결국 대중을 국가의 총알받이로 만드는 최강의 마취제로 변하고 만다.



△ 니토베 이나조는 전쟁에 관한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천황폐하의 선량한 신민’으로서의 입장을 택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불교·기독교는 평화의 성현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각각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녀’는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으로 문패를 바꿉니다. 글의 소재를 동아시아 근현대로 확장해 독자 여러분의 역사적 안목을 더욱 높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원 부탁드립니다.



참고 문헌:

1. <논집 일본불교사 8: 메이지 시대>, 이케다 에이(池田英俊) 외 엮음, 도쿄: 유잔가구(雄山閣)출판, 1987, 225~269쪽.

2. , Notto R. Thel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169~174쪽.

3. , Brian Victoria, Weatherhill, 1997.

4. <친일불교론> 상·하, 임혜봉, 민족사, 1993.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 매김과 현대적 의미

 - 박 재 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다석 류영모의 깊고 맑은 삶과 정신과 사상은 오늘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며 빛나고 있다.  다석은 씨 함석헌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씨사상의 밑자리를 놓은 분이다. 함석헌의 씨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류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류영모 사상을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한국적 주체철학, 동서사상의 만남과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자리 매김을 하고 오늘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1.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그 동안 묻혀 있던 류영모의 삶과 사상이 지난 10 여 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기상 교수는 류영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류영모의 사상이 이성, 존재, 인간 중심의 서구사상에 근본적인 도전과 대안이 됨을 밝혔다. “서양 사유의 잘못된 방향정립과 존재자에 대한 탐닉을 바로 잡기 위해서 다석 류영모 선생은 한 마디로 빛을 끄라고, ‘태양을 꺼라!’라고 외친다. 이것은 존재 중심의 철학, 빛의 형이상학에 대한 최대의 도전적 도발이며, 인간 중심의 철학, 의지의 해석학에 대한 방향전환 요구이며, 물질중심의 과학, 욕망의 주체학에 대한 강한 반성의 촉구이다.”1)

  다석은 물질(色界)과 이성의 빛보다 허공과 영의 어둠을 추구했다. 1922년에 이미 우주세계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크고 근원적임을 갈파했다. “우주는 호대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쫓아보았는가?”2)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3)

  어둠에 대한 다석의 통찰은 래리 라스무센이 1995년에 생명신학과 생명윤리의 새로운 상징으로 어둠을 제시한 것보다 70년 이상 앞선 통찰이었다. 또한 한=환(환하고 밝음), 백(白: 밝음), 배달(밝은 땅)에서 보듯이 밝음을 추구한 한국민족문화를 최남선이 ‘한밝문명론’으로 제시한 것4)을 뒤집고 삶과 존재의 깊이를 추구한 것이다.

  다석에게 어둠은 욕망을 자극하는 물질의 빛, 존재와 관념을 분별하는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세계이고 차원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없음(無)과 빔(空)의 세계이다. ‘하나’는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깜깜한 세계이고 우주의 허공이 그렇듯이 없음과 빔은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깜깜한 단일허공(單一虛空)이다. 허공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집과 집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원자와 원자 사이...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5)

  어두운 허공을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던 류영모는 “어둠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6)으로 알았다. 물질과 이성의 빛을 넘어서 어둠, 한(하나), 공허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려 했던 다석은 이성과 기술의 빛,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사유의 틀과 논리, 물질적 존재의 힘과 현실에 집착한 서구사상에 큰 도전을 줄 뿐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바탕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사유와 삶의 길을 제시했다. 다석은 세속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길을 갔고 가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수도의 길을 열었고, 나라와 겨레의 역사 속에서 한얼나라, 하늘나라를 이루려 했다. 또한 그는 생각과 말이 끊어진 어둠과 하나와 공허의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생각과 말과 한글로 진리체험을 표현하려 힘씀으로써 깊고 독창적인 많은 생각과 글을 남겼다. 이로써 다석은 불립문자의 세계에 매몰된 선승들과도 다르고, 논리와 개념에 집착한 서구철학자들과도 다른 사상의 경지를 열었다.



  2. 한국적 주체철학



  류영모는 서구의 언어와 개념을 번역한 말과 글이 아니라 우리말과 글로 사유한 사상가이며, 삶과 생각을 통전시킨 생활철학자이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세우는 민족주체철학자였다. 그가 우주와 공허를 말한 것도 매임 없이 곧게 서려는 것이었다. 매임 없이 곧게 서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로 되어야 세상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매임 없이 자유롭고 곧게 서는 주체철학이다.



  1) 신선처럼 자유롭게



  함석헌은 한민족의 종교문화의 근본줄기를 신선사상으로 보았다.7) 세상의 이해관계와 다툼에서 벗어나 자연생명세계와 하나로 녹아드는 신선사상은 자연친화적이고 종교적이며 평화적인 사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신선사상이 한국인의 예술과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다. 물과 바람에 어울리며 삶과 생각을 키우고, 기교와 과장 없는 단순 소박한 도자기, 사람과 자연이 함께 녹아든 그림,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집과 정원에서 신선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파고드는 진리탐구자이면서 초탈한 신선의 모습을 보였다. 민족사학자 문일평이 일제 때 류영모의 집을 다녀가서 지은 한시에 류영모의 집과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둘러싸인 골에 산장을 찾으니 푸른 뫼 속에 집 한 채 서 있고 물 구름 함께 어울려 한 고향이라 숲 속에 꽃은 다시 아름다워라 계곡에 시냇물은 오히려 서늘하고 약초 캐러 다니느라 어둑한 지름길을 뚫었다 씨 소나무는 외딴 집을 둘러 지키고 집 부엌에는 맛좋은 먹거리가 그득하니 상위에는 우유 토마토의 향기로다.”8)

  류영모는 자신의 사는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 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줄여 씀이 죄받는 듯 하여라.”9)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명예와 이익을 우습게 여기는 류영모는 바람과 물을 아껴 쓰면서도 바람과 물을 쓰는 것이 “죄받는 듯 하여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초탈한 삶을 살면서도 자연을 아끼는 다석의 겸허하고 정성스런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나는 1975년 무렵 류영모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80대 후반의 류영모는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듯 했다.

  다석은 “脊柱는 律呂10),  거믄고”(다석일지. 1955, 4.27)라고 했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삶의 기본음(基本音)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를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척주로 보고 척주가 곧고 바르게 조율이 될 때 마음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11)

  다석은 생명과 영을 예술로 보았다. 법과 도덕, 제도와 풍습만으로는 삶과 영이 완성될 수 없다. 예술의 차원과 경지가 있어야 삶은 완성되고 구원된다. “인생은 피리와 같다...피리를 부는 이는 신이다.”12)

  일상의 삶을 영과 예술로 높인 류영모의 삶은 신선의 삶이고 그것을 추구한 그의 사상은 ‘걸림 없는 옹근 삶’(圓融無碍)을 추구한 한국의 고유한 신선사상이다. 그는 신선처럼 욕심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2) 씨 사상: 민주사상



  15세에 기독교신앙에 입문하고 20세 때 오산학교 교사로서 류영모는 남강과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오산을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다. 20세에 노자와 불경을 읽고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에 심취했다. 톨스토이를 통해 19세기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으로서 농사꾼이 되려 했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예수나 바울처럼 민중적 대중적 사유를 한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엄격한 금욕이나 높은 도덕수준을 요구하지 않고 서민대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바울도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복음적 가르침을 폄으로써 일반대중에게 기독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엘리트적 이성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흔적이 톨스토이에게 있다고 보고 이런 경향이 영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금욕적이고 엄격한 다석에게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씨로서 참되게 살려고 했던 다석의 삶과 생각을 움직이는 기본원리는 씨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놓는 민주주의이다. 삶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구도자적 헌신이 그를 씨의 삶과 사상에로 이끌었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그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13)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다석은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14)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15)라고 했다.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노동자 농민을 오늘의 예수로 보는 다석의 사상적 통찰이 씨사상과 민중신학의 기본바탕이 되었다.



  3) 민족 주체사상



  다석은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최남선과는 경성학교 동기생으로 가까이 지냈다. 최남선은 일제말기에 변절했지만 민족문화사상에 대한 그의 연구는 빼어난 통찰과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다석은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다석은 생각한 대로 실천했기에 정인보는 그를 ‘조선에서 두려운 인물’이라 했다고 한다. 20세 때부터 냉수마찰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머리에 찬물을 붇고 냉수마찰을 했다. 32세때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의 의자 등받이를 자르고 평상 위에서 무릎 꿇고 사무를 보았다. 몸과 마음을 곧게 가지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에 굴복한 정치문화의 살림살이, 사대적 굴종을 거부하고 스스로 곧게 서는 삶을 살았다.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남을 나무라고 내몰아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려 한다.“ 다석은 한국을 등걸(단군)이 하늘 열어 세운 나라로 여겼고 등걸을 ”머리 웋인 님 우리님금“(머리에 웋[하나님]을 인 님 우리 님금)18)이라고 했다.

  다석은 한글, 등걸의 정신과 사상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시켰다. 다석은 세종 임금이 내 놓은 바른 소리인 우리글의 모음의 기본인 ㅡ ㅣ 를 예수와 직결시킨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ㅡ ㅣ 를 나타낸 나무이다. 그리고 다석은 십자가를 나무뿌리, 나무등걸을 나타내는 등걸(檀君)님과 연결시킨다. ㅡ ㅣ 를 십자가와 연관시키고 십자가를 다시 한겨레의 뿌리인 단군과 연관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석의 상상력이다. 다석의 이런 풀이는 엉뚱한 말놀이가 아니라 한글의 기본모음에 대한 의미깊은 해석으로 여겨진다.19)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의 뜻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으이’로 나타낸다.20) 그는 한글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곧게 위로 올라간 이다. 하나의 세계, 절대불멸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고디’(直)뿐이다.21) 고디 독립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태양을 사모한다.22) 다석은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라고 했다. 몸이란 활에다 곧은 막대 같은 정신을 화살로 끼워 쏘아 하나님 나라에 똑바로 맞혀야 한다.23) 1956년 1월 21일에 쓴 ‘그리온’이란 글에서 다석은 “그리온 걸 그리우고 드디어 오른이 누구리? 무리여. 거룩할 우리 고디!”라고 했는데 김흥호는 “오른이...고디!”를 그리스도라 보았다. 김흥호에 따르면 다석은 기독교를 貞敎로 보았다.24) 성서는 엄한 죄의식과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서는 다른 모든 종교를 앞지른다. 거룩과 의는 곧음을 뜻한다.

  단군은 우리의 나라님이시다. 단군은 우리 말 둥글(朴) 등걸(璞)을 사음한 것이다. 단군은 우리 겨레의 뿌리(등걸) 되시는 원만하신 둥근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도, ‘두루 이치가 통하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도 둥글고 원만한 정신을 나타낸다.25) 다석은 단군을 나무등걸 나무뿌리로 보고 나무의 둥글고(朴) 소박한 ‘자연’과 연결함으로써 한국정신의 자연친화적 성격을 밝혔다. 곧고 꼿꼿한 나무 막대기, 고디가 자연친화적인 원융합일, 묘합의 한국정신과 만나고 있다.

  다석은 하나님을 고디로 보기도 하고 동글암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속성은 고디다. 의롭고 바른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원만이다. 은 유와 무,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동글암, 원만이다. 곧은 막대기인 사람은 “없시계신 동글암”에로 돌아간다.26)

한국의 종교예술문화에서도 자연친화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다석의 사상에서 곧고 진취적인 기독교서구정신과 둥글고 원만한 한국아시아정신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깊은 죄의식, 믿음만! 은혜만!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을 말하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타협 없는 곧음을 지닌 종교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 하늘, 나무 등걸의 동글암, 원만을 품고 있다. 다석의 삶과 정신 속에서 등걸과 그리스도가 만나고 있다. 둥근 등걸과 곧은 그리스도가 만남으로써 한국은 곧게 선 나라가 될 수 있다.





  3. 동서사상의 만남과 종합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인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평생 하늘의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옥상에 망원경을 만들어 놓고 별들을 관찰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믿음의 진리와 씨의 삶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던 류영모는 낡은 이념과 종교의 틀을 깨고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에 두루 통하는 삶과 생각에 이르렀다.



  1) 동서의 융합



  서구문명과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에 나서 살았던 류영모는 서구의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하나님을 향한 솟아오르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성서의 사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공(空)의 세계를 추구한 동양사상과 결합되었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욕구가 주도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류영모도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보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다석도 식욕과 육욕이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식색(食色)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심리학자와 내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육욕을 끊고 자유로운 영적 세계, 초자아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을 성욕(性慾)으로 번역한 것을 어이없는 짓으로 못 마땅해 했다. 性은 인간의 본성, 바탈로서 하늘, 하나님과 통하는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을 육욕에다 붙이냐는 것이다. 또 ‘미성년자 불가’라 해 놓고 어른들이 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했다. 미성년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면 어른들은 더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밖에서 ‘나’를 규제하고 지배할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이성과 도덕의 규정과 질서를 거부한 것은 하늘과 땅, 동서남북의 좌표와 규정을 폐지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나’를 규제할 것은 없다. 지금 여기의 나가 중심이고 주체이다. 원초적 생명의 힘을 추구했다.

  류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류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2)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의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철학에서 ‘나’, ‘너’는 개체적 실재이다. 타자, 만물과 구별된 실체이다. 실존적 자아도 만물과 구별되는 독립된 실체다. ‘나’는 바깥세계, 타자와 긴장과 갈등 속에 있다. 다석은 ‘나’에 집중하지만 ‘나’는 자연과 타인과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열리고 뚫린 것이다. 말씀을 깨달은 인간은 섬기는 존재다.

  (2) 깊은 영성의 사상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류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하나됨에로의 돌아가는 귀일(歸一),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3) 속세의 기독교 선승이다. 해혼(解婚)하고 하루 한끼 먹고 온종일 널빤지에 무릎꿇고 앉아 생각에 몰두한 류영모는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기독교 선승이다.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생각은 끊고 절대의 사유 세계에 접어든 산 속의 선승들과 다르다. 가정에서 민족사회 안에서 사유하고 명상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성적 과학적 사유에 힘썼고 말과 개념을 닦아냈다는 점이 다르다.

  (4)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사상의 결합이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동학을 연구한 흔적이 없는데 기본사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런 기본사상이 매우 한국적인 사상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8)

  동학과 다석은 많은 점에서 상통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이는데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다.

  다석의 사상은 민족사학인 오산의 정신과 사상의 맥을 잇는 사상으로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의 기독교적 민족정신운동의 흐름 속에서 함석헌의 씨사상으로 이어진다. 일제 아래서 민족정신과 독립을 추구한 대종교 교주 윤세복,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와 함께 주체적인 민족사상과 정신을 추구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사상과 단절됨으로써 해방 후 한국사상계는 사상의 뿌리를 잃고 말았다. 다석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뿌리를 밝혀준다.

  (5)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마음을 마음대로”는 말 그대로 모든 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고 마음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하는 경지를 뜻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든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내 삶이 달려 있다. 몸을 강조하고 결정론을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에서의 삶에 집중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고 삶의 우발성을 강조한 서구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한다. 그러나 다석이 의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초월적 영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6)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종교원주의다. 70여년 전에 존 힉보다 먼저 종교다원적 신앙을 펼쳤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의 고갱이는 성서, 예수에게서 왔다. 그의 사상과 영성의 내용과 특징은 유교, 불교, 도교에서 왔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머리 속에서 개념적으로 논리적 이론 정리되고 전개된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혼으로 체득한 종교다원사상이므로 살아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삶이 숨겨 있고 담겨 있다.

  (7) 다석은 종합적인 사상가이다. 한겨레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크고 하나임, 밝고 환함)이다. 한국인의 사상적 천재성은 하나로 꿰뚫는데 있다. 최치원, 원효, 지눌, 율곡, 수운, 해월, 다석, 함석헌은 모두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다석은 주관과 객관, 상대와 절대, 유와 무, 인간과 신에 대한 서구의 이원론적 경향과 동양의 일원론적 경향을 통합했다. 안과 밖을 꿰뚫었다. 초월자 하나님이 내 바탈 본성 속에 있다고 보았다. 영원한 생명의 줄이 내 숨 속에 내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야 하나님을 만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절대자를 말하고 동양에서는 마음, 본성이 곧 하늘이고 도라고 보았다. 내면 속에 영원한 궁극의 실재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 바탈을 닦으면 궁극적인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나’의 밖의 하나님,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다. 거기에 영원이 있고 구원의 나라가 있다. 류영모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솟아올라야 한다고 보았다. 내 속을 파고들면서 끊임없이 위로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오르려 했다는 것은 동양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이 결합된 것이다.

  몸과 정신,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꿰뚫은 사상이다. 류영모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고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다시 류영모 사상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과 동양종교의 창조적 만남을 이루고 하나로 꿰뚫었다는 데 있다. 동서 사상과 종교와 정신의 회통과 통전은 지구화시대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2) 앞으로는 풀뿌리 민주시대와 서비스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섬김의 철학으로 다석과 함석헌의 사상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다석은 삶의 사상가이고 생각과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 사상가이다.

  3)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속성과 발전을 논구해야 한다. 다석에게 배우고 다석을 깊이 안 이는 함석헌이다. 다석사상이 뿌리와 싹이라면 함석헌 사상은 줄기와 꽃과 열매이다.

다석의 비상한 삶은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혼돈과 어둠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다석사상을 연구함으로써 함석헌의 씨사상도 더 밝아지고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에게서 실천적으로 힘차고 활달하게 펼쳐진 씨사상의 깊은 뿌리와 높이가 드러나기 위해서도 다석의 사상이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1)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I. 솔, 2001. 669쪽.



2) 류영모. 다석어록. 153-4쪽.



3) 같은 책. 156쪽.



4) 최남선, 불함문화론, 신동아. 1972. 1. 다석도 최남선이 한민족의 본질을 ‘밝기’로, 인간의 본질을 광명으로 본 것을 알았다. 다석일지공부 2. 616-617쪽.



5) 다석어록. 161쪽.



6) 이기상, 같은 글. 683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 1.365쪽.



8) 박영호 지음,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두레, 2001.  359쪽.



9) 같은 쪽. 360쪽.



10)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옛날에는 새 나라를 세우면 법과 제도, 도덕과 풍습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음악의 기본음을 정하고 기본음에 맞추어 악기들을 조율하고 가락을 정했다. 옛날에는 음을 측정하는 기계장치가 없으므로 기본음을 정하고 이 음에 따라 악기들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했다. 강증산은 죽기 전에 “율려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근에 김지하가 율려를 내세워 새로운 미학과 사상운동을 펼치고 있다.



11) 다석은 呂와 은 등뼈를 그린 것이라고 보았다.(진2, 40)



12) 류영모,  “밀알(1)”,  柳永模 先生 말씀上. 817쪽.



13)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204쪽.



14) 류영모, “짐짐”. 柳永模 先生 말씀 上, 789-92쪽.


알라딘: 다석 유영모 - 창조적 생명 철학자,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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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 -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박재순 (지은이) | 현암사 | 200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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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는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설서로 그의 생애와 사상적 특질이 형성된 배경을 밝히고,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더불어 전체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 했다.



그의 사상은 전통 사상과 현대 사상의 결합으로서 함석헌의 씨알 사상, 민중 신학, 종교 다원주의 사상, 토착화 신학, 생명 철학의 선구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한다.



머리말

일러두기



1.우리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창조적으로 철학하다

현대 철학으로서의 유영모 철학



2.통합으로 가다

신교육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갖다 (1890~1913)

오늘살이에 충실한 생명 철학을 갖다 (1914~39)

숨과 기독교 신앙에 집중하다 (1939~43)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다



3.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로 가다

죽어야 산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다

죽음 : 영원히 날개를 펴다



4.하루를 영원처럼 살다

하루를 영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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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생각을 '신과의 소통과 연락'으로 보았다. 다석에게 신, 하느님은 '절대 하나'이고 '전체 하나'이다. 다석 사상의 핵심과 목적은 '하나'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는 단일 허공, 하나의 세계는 인식론적으로 "깜깜한 세계"라 했고 "하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고 했다.

다석에게서 생각은 앎(지식)을 넘어서 모름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모름직이'란 말을 '모음을 지킴'으로 풀이한다. "사람은 모름을 꼭 지켜야 한다." 모르는 것을 지켜야 아는 것, 알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190~91쪽, '7.생각: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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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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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다.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경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의 지도 아래 카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공부했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경주석서를 번역하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고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씨알사상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보람과 사명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냈으며,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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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의의

다석 유영모는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이고,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더불어 전체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 했다.

다석 유영모의 사상은 우리 전통 사상과 현대 사상의 결합으로서 함석헌의 씨알 사상, 민중 신학, 종교 다원주의 사상, 토착화 신학, 생명 철학의 선구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한다.

우리 사회는 동양의 전통 종교 문화를 지니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고, 오랜 식민지 생활, 남북 분단과 전쟁,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세계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 사상계는 해방 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 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 사상과 단절됨으로써 그 뿌리를 잃고 말았다.

이제 우리 근·현대사의 값진 경험으로부터 인문학적 부흥이 일어나고 동서 문명을 아우르며 세계 평화 시대를 여는 철학이 나와야 할 때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과 세계 개방성, 평화 지향성은 세계화 시대에 상생과 평화의 철학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다석 유영모는 우리 고유의 천지인 합일 사상, 기독교 사상 그리고 ‘생각’을 중심에 놓는 서구 근대 철학을 결합함으로써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현대적 사상을 형성했다. 그의 사상은 두루 통하는 종합적인 ‘한국 사상’으로 우리 사상의 뿌리를 밝혀 준다. 동서 문화를 아우르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은 지구화와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상생 평화의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인류에게 자극과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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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과 특징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설서이다.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그의 사상적 특질이 형성된 배경을 밝히고,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다석 유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오롯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정말 장애가 되는 것은 그의 글귀가 난해하다는 데 있다기보다 그의 혼과 삶의 세계를 가늠해 보고 헤아려 보는 정신적인 안목과 체험이 부족한 데 있다. 그의 사상은 동서 문명의 만남과 우리 역사와 문화의 큰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 책은 총 13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각 장마다 다석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명제들을 뽑아 심도 있게 해설하였다.

1. 우리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 유영모 사상의 전반적인 특징과 다석 사상이 주류 철학계에서 외면당하는 이유-기존 혹은 새로이 형성된 학맥으로부터 벗어남, 근·현대 서구 학문에 부합하지 않은 자유로운 글 형식, 종합적이고 방대한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 등-에 대하여 개괄하였다.

2. 통합으로 가다 :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네 시기-신교육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시기, 오늘살이에 충실한 생명 철학을 갖게 된 시기, 숨과 기독교 신앙에 집중한 시기,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은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3.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로 가다 : 다석의 영성은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형성된다. 그에게 죽음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사변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현실의 문제였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실천적인 삶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4. 하루를 영원처럼 살다 : 다석은 어제에 매이지 않고 내일의 걱정에서 벗어나 하루를 영원처럼 살았다. 인간의 하루는 늘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을 ‘오! 늘’이라 풀이했다.

5. 밥 철학과 깨끗한 삶 : 다석은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과 정신을 완성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해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방식과 태도, 이유와 목적을 밝힌 다석의 밥 철학을 살펴보고 그가 밥을 먹고 살아 낸 아름답고 깨끗한 삶의 모습을 알아본다.

6. ‘가온 찍기’로 무등 세상을 열다 : 시간과 공간의 참된 주체와 주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 여기의 ‘나’를 한 점으로 찍어서 영원한 삶의 자유에 이르는 ‘가온 찍기’의 하루살이에 대해 설명하였다.

7. 생각 :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다 : 다석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솟아올라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늘 자신을 불태우고 새롭게 형성하는 ‘생각’에 집중하였다. 생각함으로써 자기 삶의 한가운데를 찍어서 위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가며 영원한 우주적 생명,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다고 한다.

8. 숨은 생명과 얼의 줄 : 다석은 생각을 ‘말씀 사름’, ‘말 숨 쉼’으로 이해했다. 생각은 이성의 일일 뿐 아니라 영의 일이다. 또 생명의 일이고 몸과 목숨에서 나오는 행위다.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숨과 영성에 대한 논의를 함으로써 다석 사상의 생명 철학적 기초를 밝힌다.

9. 우리 말과 글로 철학하다 : 다석은 우리 말과 글을 닦아 내고 살려 내려고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철학적 언어로 다듬어 내고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펼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말마디 속에서 하느님의 이르신 뜻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만났다.

10. 예수와 함께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하다 : 다석은 신앙 체험 속에서 예수를 새롭게 만나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일이 하늘 일을 하는 것이고 하늘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요한복음?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1. 기독교·유교·불교·도교의 회통 : 빈탕한데 맞혀 놀다 : 다석은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동양 종교와 통하는 사상의 종합에 이를 수 있었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으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 사상을 갖게 되었다.

12. 하나로 돌아가다 : 다석 사상의 중심에서 전체를 꿰뚫고 이끌어 가는 것은 ‘하나’이다. ‘하나’를 찾고 ‘하나’로 돌아가자는 것이 다석 사상의 시작과 끝이다.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하나’ 속에서 물건과 인간의 생명이 완성되고, 자유와 공평의 대동 세계가 열리고, 상생 평화의 통일 세계가 시작된다.

13. 동서 정신문화를 융합하다 : 다석은 한국과 동양의 정신과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정신과 이성 중심의 서구 근대 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을 아우르는 대종합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다석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서구 현대 사상의 정신과 풍토를 형성하게 한 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의 사상에 비추어 설명하고, 우리의 주요한 전통 사상을 주창했던 다산 정약용·동학·함석헌 사상과 비교, 분석하였다.



다석 유영모에 대하여

다석 유영모는 천문·지리·서양철학·동양철학·불경·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賢者)요, 우리말 우리글로 사고를 한 진정한 한국의 사상가다.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되어 30년이 넘도록 연경반 강의를 하였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하였으며, 노자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이루었다.

순수한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우리말이 들온말(외래어)에 밀려 없어지거나 푸대접받는 걸 몹시 언짢아하였다.

160센티미터가 못 되는 체구에 서민적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눌변도 달변도 아닌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지가 번뜩이는 시문(詩文)이요 진언(眞言)이었다.

얇은 잣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루에 한 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였는데, 세 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했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맨손체조와 냉수마찰을 평생 동안 했다. 일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만든 손가방에 명상의 일기 공책을 들고 다녔다. 시계도 차지 않았지만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은 제 먹거리는 제가 장만해야 한다면서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잔심부름 시키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지켜 밥상을 손수 부엌 마루에 내놓았다. 걸어다니기를 즐겨 북한산에 자주 올랐고 강의하러 갈 때도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새벽마다 지구를 사타구니 밑에 깔고 우주를 한 바퀴씩 돌면서 우주 산책을 한다면서 세계의 명산, 깊은 바다의 이름과 높이?깊이를 모조리 기억하였으며, 지구와 별들과의 거리도 외웠다.

나이를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가까이 따르던 사람으로는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현동완(玄東完), 이현필(李賢弼), 김흥호(金興浩), 류달영(柳達永) 등이 있다.

감탄할 만한 명문장가였는데도 평생 '다석일지'만 남겼다.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함석헌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 함 석 헌

 http://www.quakerseoul.org/

A Grief Observed - Wikipedia

A Grief Observed - Wikipedia

A Grief Observe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 Grief Observed
Agriefobservedcover.jpg
First edition
Author C. S. Lewis
Country United Kingdom
Language English
Published 1961 (Faber and Faber)
Media type Paperback
Pages 160
A Grief Observed is a collection of C. S. Lewis's reflections on the experience of bereavement following the death of his wife, Joy Davidman, in 1960. The book was first published in 1961 under the pseudonym N.W. Clerk as Lewis wished to avoid identification as the author. Though republished in 1963 after his death under his own name, the text still refers to his wife as “H” (her first name, which she rarely used, was Helen).[1] The book is compiled from the four notebooks which Lewis used to vent and explore his grief. He illustrates the everyday trials of his life without Joy and explores fundamental questions of faith and theodicy. Lewis’s step-son (Joy’s son) Douglas Gresham points out in his 1994 introduction that the indefinite article 'a' in the title makes it clear that Lewis's grief is not the quintessential grief experience at the loss of a loved one, but one individual's perspective among countless others. The book helped inspire a 1985 television movie Shadowlands, as well as a 1993 film of the same name.
Contents [hide]
1 Summary
2 Reactions
3 A Grief Observed and The Problem of Pain
4 References
5 External links
Summary[edit]
A Grief Observed explores the processes which the human brain and mind undergo over the course of grieving. The book questions the nature of grief, and whether or not returning to normalcy thereafter is even possible within the realm of human existence on earth. Based on a personal journal he kept, Lewis refers to his wife as "H" throughout this series of reflections, and reveals that she had died from cancer only three years after their marriage. The book is extremely candid, and it details the anger and bewilderment he had felt towards God after H's death, as well as his impressions of life without her. The period of his bereavement was marked by a process of moving in and out of various stages of grief and remembrance, and it becomes obvious that it heavily influenced his spirituality. In fact, Lewis ultimately comes to a revolutionary redefinition of his own characterisation of God: experiencing gratitude for having received and experienced the gift of a true love.
The book is divided into four parts, each headed with a Roman numeral, and each a collection of excerpts from his journals documenting scattered impressions and his continuously evolving state of mind.
Reactions[edit]
Lewis exhibits doubt and asks many fundamental questions of faith throughout the work. Because of his candid account of his grief and the doubts he voices, some of his admirers found it troubling. They were disinclined to believe that this Christian writer could be so close to despair. Some thought that it might be a work of fiction. Others, such as Lewis’s critics, suggested that he was wisest when he was overcome with despair.[2] When Lewis was first attempting to publish his manuscript, his literary agent, Spencer Curtis Brown, sent it to the publishing company Faber and Faber. One of the directors of the company at the time was T.S. Eliot, who found the book intensely moving.[3] Madeleine L’Engle, an American author best known for her young adult fiction, wrote a foreword for the 1989 printing of the book. In the forward, L’Engle speaks of her own grief after losing her husband and notes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She makes a point similar to Douglas Gresham's— each grief is different even if they do bear similarities.[4]
A Grief Observed and The Problem of Pain[edit]
The book is often compared to another book by Lewis, The Problem of Pain, written approximately twenty years before A Grief Observed. The Problem of Pain seeks to provide theory behind the pain in the world. A Grief Observed is the reality of the theory in The Problem of Pain.[5] It was more difficult to apply the theories he posited to a pain with which he was so intimately involved. At first it is hard for Lewis to see the reason of his theories amidst the anguish of his wife's death but through the book one can see the gradual reacceptance of these theories, the reacceptance of the necessity of suffering.[2]
Lewis' difficulty is specifically reflected in the following passage from the book: "Is anything more certain than that in all those vast times and spaces, if I were allowed to search them, I should nowhere find her face, her voice, her touch? She died. She is dead. Is the word so difficult to learn?"[4] And Lewis' ultimate resolution of his dilemma is in part articulated in the book, as follows: "I will not, if I can help it, shin up either the feathery or the prickly tree. Two widely different convictions press more and more on my mind. One is that the Eternal Vet is even more inexorable and the possible operations even more painful than our severest imaginings can forebode. But the other, that '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 shall be well'. "[4]


References[edit]

Jump up ^ Hooper, Walter. C.S. Lewis: A Companion and Guide. San Francisco: HarperCollins, 1996. Page 196. Print.
^ Jump up to: a b Talbot, Thomas. "A Grief Observed." The C.S. Lewis Reader's Encyclopedia. Ed. Jefferey D. Shultz, John G. West Jr.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8. Print.
Jump up ^ Hooper. Page 194.
^ Jump up to: a b c Lewis, C.S. A Grief Observed. New York: Harper & Row, 1961. Print.
Jump up ^ Walsh, Chad. The Literary Legacy of C.S. Lewis. New York: Hardcourt Brace Jovanovich, 1979. Page 238. Print.
[show] v t e
Works by C. S. Lewis
External links[edit]
A Grief Observed.(Canadian public domain edition)

알라딘: 미야모토 무사시

알라딘: 미야모토 무사시

미야모토 무사시
시바 료타로 (지은이) | 김성기 (옮긴이) | 창해 | 2005-01-24 | 원제 宮本武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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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 에도 시대를 풍미한 검객이었다. 그는 혼란의 시대에 검술 하나로 이름을 얻은 범상치 않은 인물. 그는 쌍검을 사용하는 '니토류'를 개발했으며, 검술을 불교의 선을 바탕으로 한 도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다. 무사시가 직접 집필한 <오륜서>는 <손자병법>과 함께 동양의 2대 병법서로 유명하다.

일본 역사소설계의 거장 시바 료타로는 강건한 문체와 시원시원한 구성으로 무사시의 일대기를 그려나간다. 작가가 무사시의 고향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과 각종 일화들, 일본 전역을 유랑하고 다닌 무사시의 족적을 냉철하게 조명하는 작가의 시선이 눈에 띈다.

작가 특유의 철저한 고증과 현장 답사가 돋보이며, 각 장면마다 각종 사진과 그림 자료들이 추가되었다.

1권

1. 성장 과정
2. 요시오카 검도장
3. 이치조 사의 결투
4. 호조인 유파
5. 별난 시합
6. 무소 곤노스케
7. 사사키 고지로
8. 제비를 베다
9. 교토에서 보낸 나날들
10. 고쿠라
11. 소귀나무
12. 결투
13. 간류지마 이야기
14. 오사카 전투
15. 호조 우지나가
16. 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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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는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기헤에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에 재빨리 몽둥이를 집어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상대에게 숨돌릴 틈을 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사시는 상대의 깨진 머리에서 흰 점액이 흘러나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쳤다. 이윽고 허리를 굽혀 상대가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동작을 멈추었다.
이런 잔인한 행동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다른 뭔가에 의해 움직여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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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
수상 : 1959년 나오키상
최근작 : <패왕의 가문>,<료마가 간다 세트 - 전8권>,<료마가 간다 8> … 총 130종 (모두보기)
소개 :
1923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 오사카 외국어 대학 몽고어학과를 마치고, 1959년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문학상을 받았다. 이어 1966년 발표한 <료마가 가다>로 기쿠지칸 문학상을 받았다. 1972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1983년 요미우리 문학상, 1984년 신초 문학상, 1987년 일본 예술상 등을 받으면서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1987년 이후에는 일본 재계 최고경영자 상담역을 맡기도 했다. 1996년 생을 마쳤고, 1998년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다.

지은 책으로 <시바 료타로 전집>(전50권), <꿈꾸는 열도>, <막말의 암살자들>, <명치라는 국가>, <몽골의 초원>, <미야모토 무사시>, <세계속의 일본 일본속의 세계>', <세키가하라전투>, <소설 풍신수길>, <언덕 위의 구름>, <올빼미의 성>, <제국의 아침>, <타올라라 검>, <풍운의 성채>, <한나라 기행>, <항우와 유방>, <황제를 낚는 풍운아>, <나라 훔친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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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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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혜 ㅣ 2014-04-04 ㅣ 공감(0) ㅣ 댓글 (0)

어릴 적에 제가 무사시,무사시...운운하면 주변에서 빈축을 보냈지요.
마르고 허약한 여자애가 일본 최고 검객의 이름을 입에 자주 올리는 것이
어른들은 정말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같아요.
게다가 우리와 일본의 갈등은 지금도 거의 운명적인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철저한 사무라이의 생애를 어설픈 책으로나마 읽어본 체험이
어설프고 의지가 나약한 저에게는 일종의 강력한 자극이 되었어요.
목숨은 신명에 맡기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 해본다는 마음가짐이
한동안 정신 없이 휘몰아친 고난의 시기를 견뎌내게도 해주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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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형식을 빌린 무사시의 주요사건정리 새창으로 보기
transient-guest ㅣ 2013-03-10 ㅣ 공감(4) ㅣ 댓글 (2)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이 낳은 수많은 검객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동시대를 살았던 야규집안의 신카게류나 다른 유파들만큼 인정을 받고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검법이 교습을 통해 학습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그 개인의 천재성에 기인한 탓으로 보느니만큼, 당시 최고의 검객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싶다. 검법을 일대일의 기예를 넘어서서, 병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오렸다고도 볼 수 있는데, 요시오카 집안과의 대결이나 저 유명한 간류지마에서 사사키 고지로오와의 대결을 보면, 확실히 검술이상, 그에게는 적의 심리와 지형지물을 이용한 종합적인 병학자로서의 냄새가 나기는 한다.

한창 무술을 좋아하던 시절, 특히 검도를 하던 때에는 오륜서를 끼고 살았더랬다. 그래봤자 무슨 깨달음을 얻은건 없고, 일종의 겉멋이었지 싶다. 스토리로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유명한 판본을 여러 차례 읽은 바 있어서,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본다.

시바 료타로도 일세를 풍미한 일본의 유명한 이야기꾼이라고 하겠는데, 이 책은 소설보다는 fact를 중심으로 무사시의 검생에서 중요한 일화들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풀어낸 작품이다. 소설의 요소도 분명히 있지만, 르포에 더 가까운 듯, 이 책의 무사시는 일체의 신격화나 신비화가 덜어진, 소위 'down to earth'로써, 아마도 실제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는 무사시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또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한 귀절을 읽다가 드보르쟙이나 준석이, 수조같은 애들이 생각났다.
'...무사시는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전설적인 존재로 가꾸려고 했다. 전설은 이런 기이한 행동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전설이 결국 당사자를 존귀한 존재로 치장해준다...'

기이한 행동이 모인다고 드보르쟙 같은 사람이 존귀한 존재가 될 리는 없겠지만, 뭐 그렇다는 것이겠지? 자신을 띄우기 위한, 이슈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기.이.한. 행동과 말을 통해 전.설.이 만들어지기는 하겠다. 기.이.한.전.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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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고유한 정기 새창으로 보기
이지리더이원종 ㅣ 2012-10-07 ㅣ 공감(0) ㅣ 댓글 (0)
'료마가 간다' 의 시바 료타로가 직접 미야모토 무사시의 고햐인 오카야마 현의 미야모토 마을에 찾아가 현장 답사를 하며,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듣기도 하면서 무사시의 일생을 정리했다. 전 일본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검객으로 불리는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소설은 많이 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평생 60여 차례의 시합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무사시는 그러나 생각만큼 고상한 인물은 아니었던듯 싶다. 이미 13세때 만만치 않은 검객에게 결투를 신청해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고, 일부러 시간보다 늦게 나타나 상대를 초조하게 하는 등,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느낌도 준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썼고 말년에는 벼슬자리를 욕심내기도 했다는 면면은 지금껏 알고있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의 검술은 검술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의 과제는 검술가로 살면서 성불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생의 결투였던 사사키 고지로와의 대결은 어이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통해 전략을 짜냈는지가 무사시의 방식을 역시 보여준다. 한 방문객이 검술 수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무사시는 이렇게 대답했다.
- (다리의 높이가 달라져도) 다리의 폭은 똑같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건널 수 있겠지만, 두려움과 같은 잡념 때문에 건너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잡념을 떨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검술 수련입니다. (147쪽)
그의 검법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철학이라고 했다. 고지로 역시 기술에서는 대등했을 것이다. 무사시는 벼슬을 원했으나 그를 고용하지 못 한 것은 검법을 타인에게 가르쳐주기가 어려웠던 탓도 있다. 역시 뛰어난 무사였던 효고노스케는 무사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은 개구리보다 민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뱀에게는 고유의 정기가 있어, 단지 노려보기만 해도 개구리는 풀숲에서 정신을 잃고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뱀은 개구리에게 다가가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사시는 그 뱀이나 사자와 같은 인물입니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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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존재는 무사시 해부 새창으로 보기
jiknet ㅣ 2009-01-21 ㅣ 공감(0) ㅣ 댓글 (0)
그 동안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소설들을 보면 무사시가 평범한 인간상은 아니었다.
물론, 한 분야에서 맹위를 떨친 인물이 평범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검술에 맞게 그의 인품또한 도를 깨우친 스님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검선일여라고 해서 검을 통해 선을 깨치려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막상 실체를 해부하고 보니 무사시도 출신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그저 단순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이도류도 많이 과장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들은 거의 이도류를 쓰지 않은 것은 무사사가 이도류를 사용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그것이 미완의 검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용하지 않았다.
무사시에 대한 허상과 허구를 잘 파헤친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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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 미야모토 무사시 새창으로 보기
문화감상자JY ㅣ 2003-06-26 ㅣ 공감(3) ㅣ 댓글 (0)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은 뱀이 민첩하기 때문이 아니다. 뱀은 개구리와 대면한 순간, 단지 노려보기만 한다. 그러나 이때 개구리는 정신을 잃고,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이때 뱀은 개구리에게 다가가 그냥 삼키기만 한다.' 이 글은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의 본문 중에 나오는 말이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이었떤 미야모토 무사시를 설명하면서 작가는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예리한 비유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난세의 영웅들 특히, 어려운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 우리들은 그 진솔함에 귀가 솔깃해진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그 어떤시대 못지않게 난세라고 할 정도로 살아가기가 만만치만은 않은 곳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더욱 우리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책은 아무런 배경도, 후원자도 없이, 자기혼자서 떳떳이 홀로서기하여 입신한 한 로닌(떠돌이무사)의 인생여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삶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과 그 속에서의 성공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 책의 작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중 한 명이자, 최고의 인기작가이다. 이 작품도 이 같은 명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또 내용 설명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의 배경은 임진왜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패권을 자기손에서 잃은후, 새로운 패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장악하기 시작할 즈음인 에도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골서 태어나 이름없이 살던 어린 소년인 주인공이 어린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을 벗어나 무사(검객)로 살아나가는 인생역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일견 평범한 역사 인물중의 한 명인 미야모토 무사시를 작가는 이책에서 다시 한 번 의미있게 바라볼수 있는 대상으로 그려 놓았다. 이 책의 주인공의 삶을 바라모며 다음과 같은 몇가지 교훈을 느낄 수가 있는데, 첫째, 그는 일개 로닌(무사)에 지나지 않은 신분이었지만, 일본 최고 무사가 되기 위해 평생 꿈꾸고 노력한점, 둘째, 에도막부시대의 난세를 살아갔으면서도 치밀한 노력과 적절한 처신을 통해서 시대의 흐름을 충분이 이용하면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사의 길을 가는 동안 최고의 검법을 갈고딱아 최고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 명의 무사신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는 어느 곳에도 평생 소속되지 않고 살다간 뚜렷한 의지와 목표의 인생을 살다간 인물을 그린 이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인생 끝까지 자기 인생 목표를 위해 쉬지않고 노력하기를 독려해주는 것 같다.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려 했던 것 같다. 즉, '타인을 의식하는 목표가 아닌 나 자신만의 목표를 찾아 추구하자. 그리고 그 달성을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자. 그래야만, 진정 역사에 의미있는 삶을 살수 있고, 한번뿐인 인생을 후회없이 멋지게 살다가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한국의 독자들도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 그 못지 않게 힘든 세상의 흐름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삶에 지치고, 암울한 미래의 청사진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럴때, '시바 료타로' 의 <미야모토 무사시> 를 한 번 읽어 보는 건 어떨까? 나약해진 마음과 약해진 우리들의 의지력에 무언가 새로운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에게 이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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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 새창으로 보기
4min4 ㅣ 2003-09-26 ㅣ 공감(0) ㅣ 댓글 (0)
개인적으로 시바 료타로라는 일본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마치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듯 한 느낌을 준다. 그만금 그의작품은 사실성과 역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책 또한 일본 중세기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한 무사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시작해서 그와 대결을 펼쳤던 주변 인물들에 대한이갸기도 하고있다. 아무튼 그동안 제일의 무사니 이도류니 하는 식으로 추상적으로 인식되기만 했던 무사시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형상을 보여주는 이책은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그동안 알려진 그의 행적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들과 그의 행적에 근거가 될만한 사진자료들은 정말이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보다 사실적인 내용의 역사 소설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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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무사시는... 새창으로 보기
노자 ㅣ 2003-11-06 ㅣ 공감(0) ㅣ 댓글 (0)
오래 전 시바 료타로가 지은 <몽골 기행>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의 글에 빠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독행도> (지금 기억으론 정확하지 않다) 를 읽고 나서 최고 고수로서의 품위와 내공이 느껴져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다. 그러던 차 무사시와 료타로가 만났으니 정말 멋진 한 편의 인생 역전 드라마가 나오지 않나 기대 속에 책을 펼쳤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로 실망 쪽에 가까웠다. 왜였을까?

나는 무사시가 최고 검객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인된 살인을 하는 과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그로서는 어차피 제한된 야망을 펼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결투의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과정이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이 종료됬으므로) 그는 무엇을 위해 최고의 검객이 되었던 것일까?

사실 무사시의 인생엔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그는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한 것도 아니었고 의리를 나눈 벗이나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직 최고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비장함만이 있을 뿐이었다.(내가 보기엔) <베가본드>라는 만화에선 오히려 드라마틱한 요소를 살려서 무사시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만화를 보면 사나이다운 그의 냄새가 느껴진다.

지극히 건조하고 딱 있는 그만큼의 사실을 고증하여 그려낸 료타로의 무사시! 아마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그 땐 지금 보지 못한 감동을 찾아내는 눈이 생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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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사실적인 료타료의 무사시 평가 새창으로 보기
teatime ㅣ 2003-09-28 ㅣ 공감(0) ㅣ 댓글 (0)
미야모토 무사시... 이 사람에 관련된 저서는 정말 많다...무협지 비스므레한 책에서 타케이코 이노우에가 쓴 배가본드 만화책까지.. 그리고 올해 NHK사극도 미야모토 무사시..... 각각 보는 관점이 다르고 미화의 정도가 다르다.. 그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무사시에 대한 거품을 뺀 책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는 정확한 고증위주의 책을 쓰는 료타로이니 만큼 무사시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의 책을 통해서 새로운 점이나 내가 잘못알고 있던 점을 정정할 수 있었다..

이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해 깨진 환상 두 가지... 평범한 지게 로닌이지만 딴 서적에선 그가 권력에 전혀 미련이 없는 듯이 행동했던 것으로 나와 이었으나 료타로는 다르게 보았다. 또 한 가지..숙적 사사키 고지로와의 결투에 대하여 무사시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그는 쓰고 있다..하필 저번주 무사시(NHK) 에서 간류지마 결투가 나왔는데 무사시는 어쩔 수 없이 결투에서 고지로를 죽이나서 그를 꺼안고 잠시 괴로워 했던 것으로 나온다..

소설이란... 드라마란 이런 것이다.. 비록 무사시에 대한 환상은 조금 금이 갔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 역시 료타로의 저서는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NHK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왜 우리나라 사극엔 대궐이 나오지 않음 이야기가 안되는 걸까.. 주인공은 늘 왕, 왕비, 신하... 맨날 왕 나온다.. 맨날 경복궁 나온다.. 우리나라엔 평민 영웅이 없는 것인가. 없진 않을텐데.. 왜 다루지 않는 걸까..

비교하는 것 같아 좀 뭐하지만... 무사시를 보면서 늘 그런 기분이 든다. 물론 무사시엔 초기 에도시대이니 만큼 도쿠까와가 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인 절대 아니다.. 내년엔 에도말기의 신선조가 주인공이란다.. 왜.. 우리는 장희빈 아니면 연산군..뭐.. 이런 시리즈의 연속일까... 아쉽다.. 이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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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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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
시바 료타로 (지은이) | 김성기 (옮긴이) | 창해 | 2005-01-24 | 원제 宮本武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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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 에도 시대를 풍미한 검객이었다. 그는 혼란의 시대에 검술 하나로 이름을 얻은 범상치 않은 인물. 그는 쌍검을 사용하는 '니토류'를 개발했으며, 검술을 불교의 선을 바탕으로 한 도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다. 무사시가 직접 집필한 <오륜서>는 <손자병법>과 함께 동양의 2대 병법서로 유명하다.

일본 역사소설계의 거장 시바 료타로는 강건한 문체와 시원시원한 구성으로 무사시의 일대기를 그려나간다. 작가가 무사시의 고향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과 각종 일화들, 일본 전역을 유랑하고 다닌 무사시의 족적을 냉철하게 조명하는 작가의 시선이 눈에 띈다.

작가 특유의 철저한 고증과 현장 답사가 돋보이며, 각 장면마다 각종 사진과 그림 자료들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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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 과정
2. 요시오카 검도장
3. 이치조 사의 결투
4. 호조인 유파
5. 별난 시합
6. 무소 곤노스케
7. 사사키 고지로
8. 제비를 베다
9. 교토에서 보낸 나날들
10. 고쿠라
11. 소귀나무
12. 결투
13. 간류지마 이야기
14. 오사카 전투
15. 호조 우지나가
16. 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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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는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기헤에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에 재빨리 몽둥이를 집어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상대에게 숨돌릴 틈을 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사시는 상대의 깨진 머리에서 흰 점액이 흘러나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리쳤다. 이윽고 허리를 굽혀 상대가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동작을 멈추었다.
이런 잔인한 행동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다른 뭔가에 의해 움직여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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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
수상 : 1959년 나오키상
최근작 : <패왕의 가문>,<료마가 간다 세트 - 전8권>,<료마가 간다 8> … 총 130종 (모두보기)
소개 :
1923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 오사카 외국어 대학 몽고어학과를 마치고, 1959년 '올빼미의 성'으로 나오키 문학상을 받았다. 이어 1966년 발표한 <료마가 가다>로 기쿠지칸 문학상을 받았다. 1972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1983년 요미우리 문학상, 1984년 신초 문학상, 1987년 일본 예술상 등을 받으면서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1987년 이후에는 일본 재계 최고경영자 상담역을 맡기도 했다. 1996년 생을 마쳤고, 1998년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다.

지은 책으로 <시바 료타로 전집>(전50권), <꿈꾸는 열도>, <막말의 암살자들>, <명치라는 국가>, <몽골의 초원>, <미야모토 무사시>, <세계속의 일본 일본속의 세계>', <세키가하라전투>, <소설 풍신수길>, <언덕 위의 구름>, <올빼미의 성>, <제국의 아침>, <타올라라 검>, <풍운의 성채>, <한나라 기행>, <항우와 유방>, <황제를 낚는 풍운아>, <나라 훔친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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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혜 ㅣ 2014-04-04 ㅣ 공감(0) ㅣ 댓글 (0)

어릴 적에 제가 무사시,무사시...운운하면 주변에서 빈축을 보냈지요.
마르고 허약한 여자애가 일본 최고 검객의 이름을 입에 자주 올리는 것이
어른들은 정말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같아요.
게다가 우리와 일본의 갈등은 지금도 거의 운명적인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철저한 사무라이의 생애를 어설픈 책으로나마 읽어본 체험이
어설프고 의지가 나약한 저에게는 일종의 강력한 자극이 되었어요.
목숨은 신명에 맡기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 해본다는 마음가짐이
한동안 정신 없이 휘몰아친 고난의 시기를 견뎌내게도 해주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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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형식을 빌린 무사시의 주요사건정리 새창으로 보기
transient-guest ㅣ 2013-03-10 ㅣ 공감(4) ㅣ 댓글 (2)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이 낳은 수많은 검객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동시대를 살았던 야규집안의 신카게류나 다른 유파들만큼 인정을 받고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검법이 교습을 통해 학습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그 개인의 천재성에 기인한 탓으로 보느니만큼, 당시 최고의 검객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싶다. 검법을 일대일의 기예를 넘어서서, 병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오렸다고도 볼 수 있는데, 요시오카 집안과의 대결이나 저 유명한 간류지마에서 사사키 고지로오와의 대결을 보면, 확실히 검술이상, 그에게는 적의 심리와 지형지물을 이용한 종합적인 병학자로서의 냄새가 나기는 한다.

한창 무술을 좋아하던 시절, 특히 검도를 하던 때에는 오륜서를 끼고 살았더랬다. 그래봤자 무슨 깨달음을 얻은건 없고, 일종의 겉멋이었지 싶다. 스토리로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유명한 판본을 여러 차례 읽은 바 있어서, 매우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본다.

시바 료타로도 일세를 풍미한 일본의 유명한 이야기꾼이라고 하겠는데, 이 책은 소설보다는 fact를 중심으로 무사시의 검생에서 중요한 일화들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풀어낸 작품이다. 소설의 요소도 분명히 있지만, 르포에 더 가까운 듯, 이 책의 무사시는 일체의 신격화나 신비화가 덜어진, 소위 'down to earth'로써, 아마도 실제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보이는 무사시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또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한 귀절을 읽다가 드보르쟙이나 준석이, 수조같은 애들이 생각났다.
'...무사시는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전설적인 존재로 가꾸려고 했다. 전설은 이런 기이한 행동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전설이 결국 당사자를 존귀한 존재로 치장해준다...'

기이한 행동이 모인다고 드보르쟙 같은 사람이 존귀한 존재가 될 리는 없겠지만, 뭐 그렇다는 것이겠지? 자신을 띄우기 위한, 이슈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기.이.한. 행동과 말을 통해 전.설.이 만들어지기는 하겠다. 기.이.한.전.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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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고유한 정기 새창으로 보기
이지리더이원종 ㅣ 2012-10-07 ㅣ 공감(0) ㅣ 댓글 (0)
'료마가 간다' 의 시바 료타로가 직접 미야모토 무사시의 고햐인 오카야마 현의 미야모토 마을에 찾아가 현장 답사를 하며,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듣기도 하면서 무사시의 일생을 정리했다. 전 일본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검객으로 불리는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소설은 많이 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꽤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평생 60여 차례의 시합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무사시는 그러나 생각만큼 고상한 인물은 아니었던듯 싶다. 이미 13세때 만만치 않은 검객에게 결투를 신청해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고, 일부러 시간보다 늦게 나타나 상대를 초조하게 하는 등,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느낌도 준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썼고 말년에는 벼슬자리를 욕심내기도 했다는 면면은 지금껏 알고있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의 검술은 검술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의 과제는 검술가로 살면서 성불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생의 결투였던 사사키 고지로와의 대결은 어이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통해 전략을 짜냈는지가 무사시의 방식을 역시 보여준다. 한 방문객이 검술 수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무사시는 이렇게 대답했다.
- (다리의 높이가 달라져도) 다리의 폭은 똑같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건널 수 있겠지만, 두려움과 같은 잡념 때문에 건너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잡념을 떨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검술 수련입니다. (147쪽)
그의 검법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철학이라고 했다. 고지로 역시 기술에서는 대등했을 것이다. 무사시는 벼슬을 원했으나 그를 고용하지 못 한 것은 검법을 타인에게 가르쳐주기가 어려웠던 탓도 있다. 역시 뛰어난 무사였던 효고노스케는 무사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은 개구리보다 민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뱀에게는 고유의 정기가 있어, 단지 노려보기만 해도 개구리는 풀숲에서 정신을 잃고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뱀은 개구리에게 다가가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사시는 그 뱀이나 사자와 같은 인물입니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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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존재는 무사시 해부 새창으로 보기
jiknet ㅣ 2009-01-21 ㅣ 공감(0) ㅣ 댓글 (0)
그 동안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소설들을 보면 무사시가 평범한 인간상은 아니었다.
물론, 한 분야에서 맹위를 떨친 인물이 평범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검술에 맞게 그의 인품또한 도를 깨우친 스님과 유사하게 그려졌다.
검선일여라고 해서 검을 통해 선을 깨치려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막상 실체를 해부하고 보니 무사시도 출신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그저 단순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이도류도 많이 과장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들은 거의 이도류를 쓰지 않은 것은 무사사가 이도류를 사용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그것이 미완의 검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용하지 않았다.
무사시에 대한 허상과 허구를 잘 파헤친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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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 미야모토 무사시 새창으로 보기
문화감상자JY ㅣ 2003-06-26 ㅣ 공감(3) ㅣ 댓글 (0)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은 뱀이 민첩하기 때문이 아니다. 뱀은 개구리와 대면한 순간, 단지 노려보기만 한다. 그러나 이때 개구리는 정신을 잃고,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이때 뱀은 개구리에게 다가가 그냥 삼키기만 한다.' 이 글은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의 본문 중에 나오는 말이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이었떤 미야모토 무사시를 설명하면서 작가는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예리한 비유로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난세의 영웅들 특히, 어려운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 우리들은 그 진솔함에 귀가 솔깃해진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그 어떤시대 못지않게 난세라고 할 정도로 살아가기가 만만치만은 않은 곳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더욱 우리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 책은 아무런 배경도, 후원자도 없이, 자기혼자서 떳떳이 홀로서기하여 입신한 한 로닌(떠돌이무사)의 인생여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삶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과 그 속에서의 성공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 책의 작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중 한 명이자, 최고의 인기작가이다. 이 작품도 이 같은 명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또 내용 설명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의 배경은 임진왜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패권을 자기손에서 잃은후, 새로운 패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장악하기 시작할 즈음인 에도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골서 태어나 이름없이 살던 어린 소년인 주인공이 어린시절 불우한 가정환경을 벗어나 무사(검객)로 살아나가는 인생역정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일견 평범한 역사 인물중의 한 명인 미야모토 무사시를 작가는 이책에서 다시 한 번 의미있게 바라볼수 있는 대상으로 그려 놓았다. 이 책의 주인공의 삶을 바라모며 다음과 같은 몇가지 교훈을 느낄 수가 있는데, 첫째, 그는 일개 로닌(무사)에 지나지 않은 신분이었지만, 일본 최고 무사가 되기 위해 평생 꿈꾸고 노력한점, 둘째, 에도막부시대의 난세를 살아갔으면서도 치밀한 노력과 적절한 처신을 통해서 시대의 흐름을 충분이 이용하면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사의 길을 가는 동안 최고의 검법을 갈고딱아 최고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 명의 무사신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는 어느 곳에도 평생 소속되지 않고 살다간 뚜렷한 의지와 목표의 인생을 살다간 인물을 그린 이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인생 끝까지 자기 인생 목표를 위해 쉬지않고 노력하기를 독려해주는 것 같다. 작가는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려 했던 것 같다. 즉, '타인을 의식하는 목표가 아닌 나 자신만의 목표를 찾아 추구하자. 그리고 그 달성을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자. 그래야만, 진정 역사에 의미있는 삶을 살수 있고, 한번뿐인 인생을 후회없이 멋지게 살다가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한국의 독자들도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해, 그 못지 않게 힘든 세상의 흐름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삶에 지치고, 암울한 미래의 청사진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럴때, '시바 료타로' 의 <미야모토 무사시> 를 한 번 읽어 보는 건 어떨까? 나약해진 마음과 약해진 우리들의 의지력에 무언가 새로운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분에게 이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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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 새창으로 보기
4min4 ㅣ 2003-09-26 ㅣ 공감(0) ㅣ 댓글 (0)
개인적으로 시바 료타로라는 일본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마치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듯 한 느낌을 준다. 그만금 그의작품은 사실성과 역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책 또한 일본 중세기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한 무사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시작해서 그와 대결을 펼쳤던 주변 인물들에 대한이갸기도 하고있다. 아무튼 그동안 제일의 무사니 이도류니 하는 식으로 추상적으로 인식되기만 했던 무사시에 대해서 좀더 확실한 형상을 보여주는 이책은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그동안 알려진 그의 행적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들과 그의 행적에 근거가 될만한 사진자료들은 정말이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보다 사실적인 내용의 역사 소설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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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무사시는... 새창으로 보기
노자 ㅣ 2003-11-06 ㅣ 공감(0) ㅣ 댓글 (0)
오래 전 시바 료타로가 지은 <몽골 기행>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의 글에 빠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독행도> (지금 기억으론 정확하지 않다) 를 읽고 나서 최고 고수로서의 품위와 내공이 느껴져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다. 그러던 차 무사시와 료타로가 만났으니 정말 멋진 한 편의 인생 역전 드라마가 나오지 않나 기대 속에 책을 펼쳤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로 실망 쪽에 가까웠다. 왜였을까?

나는 무사시가 최고 검객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공인된 살인을 하는 과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그로서는 어차피 제한된 야망을 펼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결투의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과정이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이 종료됬으므로) 그는 무엇을 위해 최고의 검객이 되었던 것일까?

사실 무사시의 인생엔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그는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한 것도 아니었고 의리를 나눈 벗이나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직 최고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비장함만이 있을 뿐이었다.(내가 보기엔) <베가본드>라는 만화에선 오히려 드라마틱한 요소를 살려서 무사시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만화를 보면 사나이다운 그의 냄새가 느껴진다.

지극히 건조하고 딱 있는 그만큼의 사실을 고증하여 그려낸 료타로의 무사시! 아마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그 땐 지금 보지 못한 감동을 찾아내는 눈이 생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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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사실적인 료타료의 무사시 평가 새창으로 보기
teatime ㅣ 2003-09-28 ㅣ 공감(0) ㅣ 댓글 (0)
미야모토 무사시... 이 사람에 관련된 저서는 정말 많다...무협지 비스므레한 책에서 타케이코 이노우에가 쓴 배가본드 만화책까지.. 그리고 올해 NHK사극도 미야모토 무사시..... 각각 보는 관점이 다르고 미화의 정도가 다르다.. 그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무사시에 대한 거품을 뺀 책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는 정확한 고증위주의 책을 쓰는 료타로이니 만큼 무사시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의 책을 통해서 새로운 점이나 내가 잘못알고 있던 점을 정정할 수 있었다..

이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해 깨진 환상 두 가지... 평범한 지게 로닌이지만 딴 서적에선 그가 권력에 전혀 미련이 없는 듯이 행동했던 것으로 나와 이었으나 료타로는 다르게 보았다. 또 한 가지..숙적 사사키 고지로와의 결투에 대하여 무사시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그는 쓰고 있다..하필 저번주 무사시(NHK) 에서 간류지마 결투가 나왔는데 무사시는 어쩔 수 없이 결투에서 고지로를 죽이나서 그를 꺼안고 잠시 괴로워 했던 것으로 나온다..

소설이란... 드라마란 이런 것이다.. 비록 무사시에 대한 환상은 조금 금이 갔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 역시 료타로의 저서는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NHK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왜 우리나라 사극엔 대궐이 나오지 않음 이야기가 안되는 걸까.. 주인공은 늘 왕, 왕비, 신하... 맨날 왕 나온다.. 맨날 경복궁 나온다.. 우리나라엔 평민 영웅이 없는 것인가. 없진 않을텐데.. 왜 다루지 않는 걸까..

비교하는 것 같아 좀 뭐하지만... 무사시를 보면서 늘 그런 기분이 든다. 물론 무사시엔 초기 에도시대이니 만큼 도쿠까와가 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인 절대 아니다.. 내년엔 에도말기의 신선조가 주인공이란다.. 왜.. 우리는 장희빈 아니면 연산군..뭐.. 이런 시리즈의 연속일까... 아쉽다.. 이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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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 신선조

바람의 검, 신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