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9

김재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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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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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
1981년 당시 미국 평화의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김재준
원어이름金在俊
당교회한신대학교 교목
기타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개인정보
출생1901년 9월 26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흥
타계1987년 1월 27일(85세)
대한민국 서울
교파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재직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전직신민당 당무위원 겸 대표전임고문
학력미국 웨스턴 신학대학원

김재준(金在俊, 1901년 9월 26일 ~ 1987년 1월 27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형성과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장로교 목사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인 신학자이다. 호는 장공(長空)이다.

생애[편집]

개신교 입교와 조선신학교 설립 참여[편집]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청년기에 개신교를 입교했다. 그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일본에서는 카가와 토요히코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여 구약성서학으로 학위(S.T.M.)를 받았다.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김재준은 1940년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책임을 맡는다. 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 때문에, 서양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을 세우려고 계획한 선각자 김대현 장로의 부름을 받고 김재준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선다. 하지만 성서비평학 수용여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35년 '어빙던(Abingdon) 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 목사와 함께 신학자들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며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의해 장로교 목사직을 제명당했다. 1953년 대한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씨는 제 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 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하였다.[1] 이에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편집]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교계의 원로목사들은 목사가 왜 정치에 관여하냐며 비난했다. 하지만 교계원로목사들이 교회의 민주화운동참여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적인 대다수의 개신교계에서는 5.16 군사정변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하며,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설교를 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격의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진보인사들을 정치목사취급하거나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대학생선교회(KCCC)의 총재인 김준곤 목사는 대학생선교회 설립으로 학원선교에 기여했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할 반공주의적인 정권'이라고 찬양하는 과오를 범하였으며,[2]구약성서 출애굽기에 근거, 민중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주체로 해석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던 민중신학자들을 한국교회에서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3]

하지만 그는 개신교 목사의 양심상 성직자의 의무인 예언자 역할을 버릴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 단체에 다니며, 군사정권의 연장을 뜻하는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러한 국민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개헌안은 기습적으로 통과 되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재준은 자신의 예언자적인 양심실천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 서남동안병무등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를 계승한다.

 참고로 김재준 목사는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1966년 작사하였는데 개신교 찬송가에는 582장(통 261장)에, 성공회 성가에는 568장에 있다.<ref>어둔밤 마음에 잠겨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속에 새롭다 이빛 삶속에 얽혀 이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2.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 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하늘 새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되어 타거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편집]

장공 김재준은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되어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f>[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장공 김재준 목사… 교회개혁 비전 제시한 선각자 2002년 12월 30일자 국민일보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대한장로회 총회 제38회 총회록》p238
  2.  "한국교회의 과거사 고백,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기독교 사상,대한 기독교서회)
  3.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발족 기념설교문에서 발췌

외부 링크[편집]

김재준 - 나무위키

김재준 - 나무위키

김재준

최근 수정 시각: 
다른 뜻 아이콘  KBS 2TV의 드라마 굿 닥터의 등장인물 김재준에 대한 내용은 김재준(굿 닥터) 문서
,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 김재준에 대한 내용은 쓰레기(응답하라 1994) 문서
 참고하십시오.
장공 김재준
이름
김재준 (金在俊, Kim Jae Jun)
본관
국적
출생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골마을#
사망
1987년 1월 27일 (향년 86세)
장공 (長空)
직업
학력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석사)
웨스턴 신학교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비판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3.2. 친일논란
4. 여담



/image/005/2006/...[2]
[3]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이자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 (기장)과 조선신학교(훗날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01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서삼경 등 동양고전을 수학하였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와[4]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1940년에는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장로회 중 진보적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 중 하나인 경동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김장환한경직 등은 김재준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평양에서 장로회 목회자를 양성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거부 등의 이유로 폐쇄되자, 선각자 김대현 장로와 뜻을 모아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한다. 이전의 평양신학교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과 달리 조선신학교는 조선인 신자들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학교로 계획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이렇게 새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교단 신학교로 승인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문제로 인해 교단 내 보수파와 갈등을 겪게 된다. 교단 내 보수파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하고 별개로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운다. (이 신학교가 예장합동의 주요 신학교인 총회신학대학교와 예장통합의 장로회신학대학교가 된다.) 1935년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 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 한경직 목사와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이 가르치는 소위 '고등비평'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재준은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제명했다.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 하였다. 이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독립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형성하였다. 이후 군사독재 반대 및 민주화 운동 참여를 계기로 오늘날 기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불린다.

김재준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했지만 결국 1969년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 통과되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공은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1987년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공의 민주화운동과 신학발전에의 기여를 기려 2002년 12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5]

3. 논란 및 비판[편집]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편집]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에 대한 한겨레 조현 기자와 김경재 목사의 대담

김재준에 대한 신학적 반대파는 김재준이 성경에 대한 소위 고등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재준은 성경을 마치 세상의 문학작품 등과 같이 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하고 이는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하는 성경유오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란에 의해 김재준은 교단에서 파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이 김재준에게 씌운 '고등비평'이라는 레이블은 실상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이었으며, 이후 예장통합의 신학교인 장신대에서도 성서신학 커리큘럼에 포함하는 주류(mainline) 개신교 신학의 경향이다. 김재준을 오해한 유연하지 못한 신학관은 50년대 당시 한국 장로회가 아직 미성숙한 시기였던 탓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장로교단에는 해외 선교사들의 지원과 영향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김재준의 무고한 파문 소식을 듣고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단을 포함한 많은 해외 선교단체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특히 캐나다 연합교회는 적극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조선신학대학교 유지비용을 선교회 차원에서 충당해주었다. 이러한 계기로, 캐나다 연합교회와 기장 교단은 오늘날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한신대 출신 목회자들이 유학을 갈 경우 캐나다 연합교회 계열 신학교인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Emmanuel College)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김재준 파문 이후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미국장로회(PCUSA)는 오늘날 예장(통합)과 형제교회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과 대한 파문은 당시 교단 내 보수파와의 갈등에서 빗어진 오해였으며, 이에 대해 예장통합은 2016년 공식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기사 CBS뉴스 영상

3.2. 친일논란[편집]

조선신학교 설립 당시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개인의 자유로 맡기자'는 투로 사실상 방관 내지는 허용했다. 민족 신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라고 포장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명백한 친일행위였다.[6]

나무위키의 한국기독교장로회 항목 중 친일행위 단락에도 언급되었다시피, 김재준을 포함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적통을 잇는 한국 장로교 교단들 모두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장로회 교단 중 이러한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예장 고신파 정도 뿐이다. 예장 고신은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후 출옥한 소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

이와 같이 친일은 한국 개신교의 광범위한 치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교단을 떠나 과거 친일 논란을 대놓고 공론화시키는 것을 꺼리는 추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자신들의 친일논란, 특히 김재준을 포함한 자기 교단 지도부에 대한 친일논란이 교단 내부에서 나오는 곳은 기장뿐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즉, 애초에 친일행위에 대한 인정과 사과요구가 오직 에큐메니안이나 뉴스엔조이 등 기장측 성향의 진보적 기독교 언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안은 기장총회 행사를 홍보하거나 새로 교단 집행부가 들어설 경우 집행부 인터뷰를 보도할 정도로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교단이다. 뉴스엔조이 역시 한신대학교 출신 기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언론사답게 기장에 대한 기사를 많이 내보내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과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기장에게 돌아오고 따라서 이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지정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김재준에 대한 사과를 기장 총회와 한신대학교에 요구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안 기사 뉴스엔조이 기사

4. 여담[편집]

  • 찬송가 582장(새찬송가, 통일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김재준 목사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이다. 주로 통일, 국경일 예배시에 사용되는 곡이다.
  • 경동교회의 장공채플은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 한신대학교의 본관인 '장공관'과 신학대학원 도서관인 장공도서관은, 마찬가지로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1] #[2] (출처: 국민일보 기사#)[3] (경동교회가 제작한 김재준 관련 사진 및 클립 모음)[4] MARCH에 속하는 그 아오야마가쿠인이다. 신학부는 2차대전 이후 도쿄신학교로 이관되었다.[5] 상훈법 상 사유는 '국민화합 및 국가발전유공자'로 기록되었다. 자세한 내용 및 기타 대한민국 상훈기록 관련은 상훈기록 검색 사이트 참조#.[6] 또한 조선신학교 설립 공동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채필근 송창근 목사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후보에 올랐다.기사 그러나 채필근 송창근의 경우 서울 조선신학교 설립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도 조선신학교와 관련된 사유 때문이 아니라 후평양신학교 건립에서의 행적으로 인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평양신학교가 수업을 중단하자 일제에서 곧바로 이름만 빌려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채필근과 송창근은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다.

How To Live Japanese Spirituality

(Yutaka Yazawa) How To Live Japanese | Vajrayana | Okinawa Prefecture


Spirituality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to Japan was very 
much a ‘top-down’ affair. It was an imported religion 
of immigrant technocrats, officially adopted by the 
emperor, who was aided and abetted by powerful 
factions in the governing elites. 
The first wave of Buddhism reached its zenith in 
752 with the building of a giant Buddha statue at 
Tōdai-ji (東大寺), in the then capital city of Nara 
(奈良). It is made of bronze, measures around 16m 
in height, and weighs in at a whopping 250 tons. 
Emperor Shōmu (聖武天皇701–756) was a fervent 
believer, and ordered the construction of the giant 
Buddha as an act of appeasement in the hope of 
alleviating a smallpox epidemic and halting the 
natural disasters which blighted Japan during his 
reign. He also ordered the construction of a 
Buddhist temple in each of the provinces 
throughout his realm. However, this had more to do 
with efficient taxation for a massive construction 
project in the capital city than evangelism. 

Buddhism had more to do with filling the 
government coffers than saving souls at that time. 
To fill the spiritual void, the Japanese had to wait 
for Kūkai (空海 774–835). The son of a minor
nobleman of the aristocratic Saeki family, in 
Buddhism he sought spiritual fulfilment, rather than 
just knowledge. Kūkai managed to squeeze himself 
into the government’s diplomatic mission to Tang 
China in 804 as an official student. There, he 
studied Vajrayāna, also known as Tantric Buddhism, 
which was the latest trend in Buddhist teaching. He 
was instructed by Huiguo (恵果746–805), a Chinese 
monk who was the foremost authority on the 
subject. 

Kūkai returned to Japan in 806, and the country 
soon went crazy for the Good News of Tantric 
Buddhism. It required faith to study and believe in 
the Buddhist Tantras, and to recite exotic-sounding 
utterances (mantras) in Sanskrit as the way to attain 
Nirvana. Faith had been missing from Japanese 
Buddhism until this point. 

Faith is a great leveller. It is not the privilege of 
the elites; ordinary people can have faith in the same 
way as aristocrats, even emperors. Thus, Buddhism 
started on the path to popularisation in Japan. 
As Buddhism broke class barriers, a strange 
phenomenon started to happen in Japan’s spiritual 
landscape: the people started to merge Shinto gods 
into Buddhism’s theological context. They basically
promoted all their various local gods into the new 
popular religion. The Shinto gods became, if not 
‘The Enlightened One’, then at least sidekicks of The 
Enlightened One, with varying classifications in 
accordance with the Buddhist hierarchy attached to 
them. People started to worship Shinto gods 
alongside Buddha. Temples and shrines merged, 
and deities coexisted alongside each other in a 
weirdly comfortable way within Japanese spirituality. 
This trend continued until the Meiji Reformation. As 
the emperors were deemed the descendants of the 
sun goddess, the promiscuous mixing of Shinto 
gods with Indian deities became a bit of a 
theological embarrassment at a time when the role 
of emperor as the head of state came under the 
spotlight. 

Zen Buddhism was another import from China, 
and centred on the teaching of meditation as the way 
to attain Nirvana. It became the religion for the new 
Samurai elites during the 12th century, at a time 
when the popularisation of Buddhism was steadily 
advancing. The life of ordinary people improved 
during the Kamakura period (12th–14th century), 
with advancement in agricultural methods and 
increased commerce aided by the adoption of
currency. The ordinary people, unlike the stoic 
samurai, sought a little more from their religion than 
sitting down and as a result, forms of Buddhism 
gained popularity. These included Jodo Buddhism 
(浄土仏教), or Pure Land Buddhism, which 
promises salvation in return for devotion from 
chanting matras, and Nichiren Buddhism (日蓮宗), 
started by a monk called Nichiren (日蓮1222–1282), 
which teaches salvation through devotion to the 
Lotus Sutra. 

In the Age of Warring States (c.1467–c.1603), 
certain temples and religious groups gained 
considerable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and 
became forces to be reckoned with. Into this 
crucible of religious beliefs, the Jesuits made landfall 
with Christianity in the 1540s. They soon found 
devout followers among both the poor and the rich 
and powerful. Their religion taught equality before 
God. The subversive doctrine of equality was always 
powerful and had been a common theme in all the 
religious beliefs which had come before, but this 
time it was stronger. The Jesuits’ message of 
salvation was front and centre. When the 
persecution of Christians happened in the lat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they did not lack for
martyrs. 

When Tokugawa Ieyasu (徳川家康1543–1616) 
became the first shōgun of Tokugawa in 1603, he 
was keenly aware of the need to contain religious 
zealots if peace was to be maintained. He ordered 
that everybody register with a temple of their choice 
by way of registering their citizenship – in effect, 
delegating civil administration powers to religious 
establishments. As an arm of governmental 
authority, the temples gained a steady source of 
income and lost their zeal for converting people. 
Two hundred and fifty years of peace ensued. 
Nothing saps religious fervour like apathy nurtured 
in peaceful prosperity. 

This irreligiosity continues to this day. Visitors to 
Japan today are often confused by the apparent lack 
of scruples in our religious practices. We claim to be 
Buddhists, but marry in Christian churches, 
celebrate Christmas, and welcome in the New Year 
at Shinto shrines. They may conclude that we are not 
religious, and they may have a point. It has not 
always been thus. People believed, and they did so 
deeply. If I could hazard a guess, our apparent 
nonchalance is only skin-deep, disguised by our 
tendency to subscribe to an ‘every little helps’ 
attitude when it comes to seeking supernatural 
intervention, and a preference of practical solutions 
over dogmatic inconveniences in the matter of faith. 
This can be seen from our merging of Buddhism 
and Shinto in the early days. 

When Emperor Meiji died, there was a surge in 
the number of Catholics in Japan. He had been the 
symbol of modernising Japan and presided over 
unprecedented societal changes. When he was gone, 
people felt insecure and sought spiritual support. 
Everybody has a reason to believe. Even the 
Jap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