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9

장공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장공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장공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5김거성 한국기독교장로회 구민교회 목사 | 2022-03-19 10:27:52

김구학회(대표 한동우)의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 중 10편을 골라 주 2회(수, 토요일)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김구, 조봉암 등 선열들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겨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모든 글은 선열들이 남긴 기록들, 행적들, 역사적 사실들 등을 토대로 하여 필자의 의견을 가미했다. 연재 순서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 블로그 '의열지사 넋두리한마당'에는(https://blog.naver.com/tongwoohn/222631939375) 2020년 7월 이후의 모든 연재 글( 25편)을 볼 수 있다.



1. 김구 선생 마이크 잡다

2. 죽산 선생 마이크 잡다

3. 마륵사(마륵사) 선생 마이크 잡다

4. 일곡(유인호) 선생 마이크 잡다

5. 김재준 목사 마이크 잡다

6. 강원룡 목사 마이크 잡다

7. 스코필드 박사 마이크 잡다

8. 서인주 도사 마이크 잡다

9. 이지 스톤 마이크 잡다

10. 땅 속 운동권 마이크 잡다

▲장공 김재준 목사

평화: 남과 북의 민중을 공통분모로

이 범용자(凡庸者)가 태어난 해가 1901년이니, 올해로 만 120살이 된다. 조선 말기와 일제 침략 시기, 그리고 남북 분단 시기를 살았다. 해방 후 고향인 함북 경흥 창꼴을 끝내 가보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남과 북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무기 경쟁, 전쟁 연습에 몰두하는 현실이 한스럽다. 관광객 피살사건이나 전단 살포 등 남북 당국이 구실 삼으려면 자잘하건 크건 무엇이든 다 핑곗거리가 되는 일 아닌가. 물론 나 자신도 한국전쟁 등으로 말미암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큰 그림에서 미래를 향해 먼저 서로 마음을 열고 가슴속의 철조망부터 걷어내 통일을 찬찬히 준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남과 북의 공통분모인가. 바로 남과 북의 민중 아닌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남한 동포나 북한 동포나 모두 인간이요, 이웃 아닌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닭싸움처럼 눈을 붉힌다면 언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념이나 체제나 사상 이전에 서로가 상대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와 자유를 서로 인정하며 사랑으로 피차 존경하는 바탕 위에서 먼저 교류와 협력을 굳게 세워나가야 한다. 평화통일의 밝은 내일은 바로 오늘의 지향과 실천 속에 움트는 것이다."

정의: 혐오와 차별, 탐욕, 거짓을 벗어나야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나를 목사직에서 제명할 당시의 논거는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부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전부터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국내외 신학 교육기관에서는 성서비평학을 가르쳐왔고, 해당 교단 신학교도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했다. 결국 지난 2016년 10월 해당 총회가 그 목사직 제명을 철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사참배 참회가 7~80년 지나서 나오기도 했으니 66년이나 걸린 것도 다행히 아니겠는가.

나를 향한 공격이야 그저 뜬구름과 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꾸했었지만, 지금도 한국 개신교계에 이와 유사한 차별과 혐오의 잘못이 여전하여 마음이 아프다. 미국 교계에서 한때 낙태 반대를 마치 천국의 열쇠인 것처럼 주장하던 목소리가 있었는데, 한국 교계에서는 지금 ‘차별금지법’ 반대, 타 종교 배척과 혐오 등으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성차별 또한 여전하여 아직까지도 주요 교단의 총회장직은 모조리 남성이 차지해오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얼마 전 어떤 원로 신학자는 동성애 주제의 논설로 목사직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또 어떤 신학 교수는 한 근본주의자가 불교 법당에서 벌인 훼불행위를 사과하고 그 복구 비용을 모금했다고 하여 파면당했고, 해당 신학교는 지금까지 법원의 복직판결조차도 무시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속이 쓰리다. 이러고도 세계 교회에 나가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차별을 반대하는 세계의 모든 교회와는 관계를 끊고 앞으로 영영 척지고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해외 대부분의 신학교에 유학을 다녀와서도 자신은 아닌 체하고 가면을 썼던 사람들처럼, 회칠한 무덤과 같이 앞으로도 쭈욱 위선에 절어 있을 터인가. 독재에 기생하고 맘몬에 아부하면서도 나는 반공이니 주초(酒草)에서 자유로우니 하면서,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답습할 것인가. 이런 잘못은 또 얼마나 지나야 제자리로 돌아올까. 혐오나 차별은 그 자체만으로도 악행이거니와 거기에 온갖 거짓까지 동원되니 이중적인 잘못이다.

박정희 시절,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자행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또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쓴다”라거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며 거짓을 유포했던 악한 권력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광주민중항쟁에 북한의 사주 운운하는 선전선동이 있다. 교회나 정파, 재벌, 또는 국가 등 어떤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든 간에 자기들만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짓밟는 일은 용인될 수 없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위나 권한을 남용하며, 더욱이 거짓까지 꾸며 공격하거나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결단코 용납될 수 없는 악행이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해야 마땅하다."

아프간 사태의 교훈: ‘무엇이 중요한가’

최근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다시 넘어간 까닭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프간 정권의 부패와 무능함에 대한 지적이 적지 않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뿐일까.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시각과 접근방법에도 매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까닭이 9.11 테러범들을 체포하고 그곳이 미국에 대한 공격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사상자 수는 너무나 크다.

쏟아부은 1조 달러도 부채로 조달했다니 그 이자까지 더하면 또 얼마나 되겠는가. “전쟁은 끝났지만, 비용은 계속된다”라는 표현처럼, 아프간과 이라크 참전군인에 대한 지원비용 등 또한 추가될 것이다. 그처럼 어마어마한 희생과 비용을 치렀지만, 미국 입장에서 테러 위협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더욱이 아프간에서의 민주주의도 거의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으니 이런 비관적인 상황을 왜 미리 내다보지 못했을까.

9.11 당시 급하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 후에라도 정책을 바로잡지 못한 치명적 잘못의 결과 아닌가. 1975년 월남이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 나는 물량과 신무기를 신주처럼 믿어온 미국의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한 바 있다. 그렇지만 물리력 즉 군사력이면 금방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은 지금까지도 여전한 것 같다. 말 그대로 ‘눈먼 미국’의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기에 그런 엄청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쓴 엄청난 비용 대부분은 군사비였고 재건사업 비중은 5%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니. 그 가운데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교육 등에 사용한 비용이 과연 얼마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의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바탕을 위해 군사비의 절반이라도 투여했었더라면 하는 회한을 품는 사람들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물론 금액 규모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 종교나 문화를 무시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기독교화, 서구화했어야 한다는 뜻도 결코 아니다.

물량을 쏟아붓는 방식, 단지 전투에서의 승리나 미국의 눈앞의 국익만을 좇아간 것 같아 안타깝다. 오히려 여성을 포함한 인간 존중, 생명 살림, 지속 가능한 사회 추구 등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를 추구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먼저인가에 대해서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혼’을 넣어주는 교육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일제하 조선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그래, 교육 밖에는 없다’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후진들에게 뭔가 ‘혼’(魂)을 넣어줄 접촉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금융조합을 사직하고 소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 유학에도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또 조선신학원에서 젊은이들을 키워나가고자 했다. 해방 후에도 민주화, 통일, 평화와 인권 등 실천 지성을 양성하고자 했다.

교육이 혼 없이 지식이나 기능 위주로 흘러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것은 미래 불행의 전조일 뿐이다. 개인적 차원의 좋은 ‘인성’을 넘어, 진정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도록 이끌어내는 일, 이는 후세를 위한 지금 우리의 마땅한 책임이다.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 발전은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민주시민교육을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입학, 채용, 승진 등에서 오로지 시험 성적만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것이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유의 시험에 익숙한 사람들만 실력자라고 평가될 뿐이다. 획일적 평가가 아닌 개인의 다양한 능력과 재능이 인정되어야 한다. 나아가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과 실천이 인정되고 그러한 자세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미래가 속히 도래하기를 소원한다. 그 바탕으로 ‘민주시민교육지원법’도 제정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체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힘차게 실천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계훈제, 장준하, 함석헌, 이병린과 함께

민주주의는 이제부터

나는 민주적 기본질서가 파괴된 현실 속에서 늘 신앙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려고 했다.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수많은 희생과 피의 아우성에 하늘이 응답한 것이라 하겠다. 1987년 함석헌 옹과 더불어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 적었던 바와 같이, 정치는 주권재민의 민주화를 이룩하고, 민중 생존권을 확립하며, 자주 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서야 하는 큰 사명이 있다.

국민을 먹여 살리는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는 기업주와 공생(共生)하여 그 이익을 만들어내고, 또 그 이익이 정의롭게 분배되도록 힘써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바르게 깨닫고 제 임무를 다해야 한다. 선전에 속아 부화뇌동하거나 횡포를 용인하는 일이 없이 자유와 정의를 향한 힘찬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상대방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서 온갖 인권의 침해와 착취가 일어난다.

"성별, 연령, 피부색이나 출신, 종교, 취향, 장애 여부 등의 장벽을 넘어 서로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의 바탕이다. 그런데 교리만의 종교가 백골과 같은 것처럼, 절차에서만의 민주 또한 허무일 따름이다. 내 눈에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화의 종착점이 아니라 내용적 민주주의를 향한 시발점일 뿐이다."

생명살림

오늘날 기후변화와 환경, 생태계의 위기가 화두다. 나도 젊은 시절부터 열 가지를 정하여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산하(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와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가 있었고, 늘 “생명, 정의, 평화”를 기도했다. 자연은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자연과 환경의 보전은 후세를 위한 우리 세대의 마땅한 책임이다. 그 가운데 핵발전, 핵무기 등의 극복이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고 있다.

"아울러 전쟁으로 말미암은 인명의 대량 살상은 물론 이려니와, 평시에도 이 땅에서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자살 등으로 말미암은 안타까운 죽음들을 막아야 한다. ‘생명살림’이란 이 늙은이의 호소에 교육, 국방, 건설, 산업, 정치, 시민사회 등 각 부문이 응답하기를 바란다."

▲ⓒ

‘잊지 않도록!’

끝으로 말하련다. 이 땅의 흙은 억울한 피에 절었다. 최제우, 최시형 등 탁월한 종교 창시자를 죽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총수 전봉준을 일본군대에 청 넣어 죽였다. 이승만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여운형, 김구, 조봉암 등등 쟁쟁한 지도자들이 암살당했다. 그뿐인가. 4·19 때 의로운 학생들의 피, 광주학살에 억울하게 희생된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들, 1987년 박종철, 그리고 이한열을 비롯한 수많은 의로운 피가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다.

‘불망비(不忘碑)’는 역시 필요하다. “그들을 잊지 않도록(Lest We Forget)!”

김재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재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재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재준 목사
1981년 당시 미국 평화의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김재준
원어이름金在俊
당교회한신대학교 교목
기타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개인정보
출생1901년 9월 26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흥
타계1987년 1월 27일(85세)
대한민국 서울
교파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재직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전직신민당 당무위원 겸 대표전임고문
학력미국 웨스턴 신학대학원

김재준(金在俊, 1901년 9월 26일 ~ 1987년 1월 27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형성과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장로교 목사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인 신학자이다. 호는 장공(長空)이다.

생애[편집]

개신교 입교와 조선신학교 설립 참여[편집]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청년기에 개신교를 입교했다. 그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일본에서는 카가와 토요히코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여 구약성서학으로 학위(S.T.M.)를 받았다.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김재준은 1940년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책임을 맡는다. 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 때문에, 서양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을 세우려고 계획한 선각자 김대현 장로의 부름을 받고 김재준은 조선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선다. 하지만 성서비평학 수용여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35년 '어빙던(Abingdon) 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 목사와 함께 신학자들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며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의해 장로교 목사직을 제명당했다. 1953년 대한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씨는 제 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 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하였다.[1] 이에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편집]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교계의 원로목사들은 목사가 왜 정치에 관여하냐며 비난했다. 하지만 교계원로목사들이 교회의 민주화운동참여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적인 대다수의 개신교계에서는 5.16 군사정변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하며,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설교를 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격의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진보인사들을 정치목사취급하거나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대학생선교회(KCCC)의 총재인 김준곤 목사는 대학생선교회 설립으로 학원선교에 기여했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할 반공주의적인 정권'이라고 찬양하는 과오를 범하였으며,[2]구약성서 출애굽기에 근거, 민중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주체로 해석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던 민중신학자들을 한국교회에서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3]

하지만 그는 개신교 목사의 양심상 성직자의 의무인 예언자 역할을 버릴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 단체에 다니며, 군사정권의 연장을 뜻하는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러한 국민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개헌안은 기습적으로 통과 되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재준은 자신의 예언자적인 양심실천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 서남동안병무등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를 계승한다.

 참고로 김재준 목사는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1966년 작사하였는데 개신교 찬송가에는 582장(통 261장)에, 성공회 성가에는 568장에 있다.<ref>어둔밤 마음에 잠겨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속에 새롭다 이빛 삶속에 얽혀 이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2.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 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하늘 새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되어 타거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편집]

장공 김재준은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되어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f>[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장공 김재준 목사… 교회개혁 비전 제시한 선각자 2002년 12월 30일자 국민일보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대한장로회 총회 제38회 총회록》p238
  2.  "한국교회의 과거사 고백,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기독교 사상,대한 기독교서회)
  3.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발족 기념설교문에서 발췌

외부 링크[편집]

김재준 - 나무위키

김재준 - 나무위키

김재준

최근 수정 시각: 
다른 뜻 아이콘  KBS 2TV의 드라마 굿 닥터의 등장인물 김재준에 대한 내용은 김재준(굿 닥터) 문서
,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 김재준에 대한 내용은 쓰레기(응답하라 1994) 문서
 참고하십시오.
장공 김재준
이름
김재준 (金在俊, Kim Jae Jun)
본관
국적
출생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골마을#
사망
1987년 1월 27일 (향년 86세)
장공 (長空)
직업
학력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석사)
웨스턴 신학교

1. 개요2. 생애3. 논란 및 비판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3.2. 친일논란
4. 여담



/image/005/2006/...[2]
[3]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이자 대표적인 진보적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장로회 (기장)과 조선신학교(훗날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01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사서삼경 등 동양고전을 수학하였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와[4]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1940년에는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장로회 중 진보적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공헌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 중 하나인 경동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김장환한경직 등은 김재준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평양에서 장로회 목회자를 양성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거부 등의 이유로 폐쇄되자, 선각자 김대현 장로와 뜻을 모아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한다. 이전의 평양신학교가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과 달리 조선신학교는 조선인 신자들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학교로 계획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이렇게 새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교단 신학교로 승인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문제로 인해 교단 내 보수파와 갈등을 겪게 된다. 교단 내 보수파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하고 별개로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운다. (이 신학교가 예장합동의 주요 신학교인 총회신학대학교와 예장통합의 장로회신학대학교가 된다.) 1935년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 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 한경직 목사와 일부 보수 신학자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이 가르치는 소위 '고등비평'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재준은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제명했다.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 하였다. 이에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독립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형성하였다. 이후 군사독재 반대 및 민주화 운동 참여를 계기로 오늘날 기장은 대한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불린다.

김재준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했지만 결국 1969년 9월 14일 개헌안이 기습 통과되어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공은 민주화를 보지 못하고 1987년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공의 민주화운동과 신학발전에의 기여를 기려 2002년 12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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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란 및 비판[편집]

3.1. 소위 '고등비평' 논란[편집]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에 대한 한겨레 조현 기자와 김경재 목사의 대담

김재준에 대한 신학적 반대파는 김재준이 성경에 대한 소위 고등비평을 시도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재준은 성경을 마치 세상의 문학작품 등과 같이 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하고 이는 성경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하는 성경유오설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란에 의해 김재준은 교단에서 파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이 김재준에게 씌운 '고등비평'이라는 레이블은 실상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이었으며, 이후 예장통합의 신학교인 장신대에서도 성서신학 커리큘럼에 포함하는 주류(mainline) 개신교 신학의 경향이다. 김재준을 오해한 유연하지 못한 신학관은 50년대 당시 한국 장로회가 아직 미성숙한 시기였던 탓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장로교단에는 해외 선교사들의 지원과 영향이 여전히 존재했는데, 김재준의 무고한 파문 소식을 듣고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단을 포함한 많은 해외 선교단체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특히 캐나다 연합교회는 적극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조선신학대학교 유지비용을 선교회 차원에서 충당해주었다. 이러한 계기로, 캐나다 연합교회와 기장 교단은 오늘날까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컨대 한신대 출신 목회자들이 유학을 갈 경우 캐나다 연합교회 계열 신학교인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Emmanuel College)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김재준 파문 이후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미국장로회(PCUSA)는 오늘날 예장(통합)과 형제교회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김재준에 '고등비평' 논란과 대한 파문은 당시 교단 내 보수파와의 갈등에서 빗어진 오해였으며, 이에 대해 예장통합은 2016년 공식적으로 김재준에 대한 파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기사 CBS뉴스 영상

3.2. 친일논란[편집]

조선신학교 설립 당시 김재준은 신사참배를 '개인의 자유로 맡기자'는 투로 사실상 방관 내지는 허용했다. 민족 신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라고 포장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명백한 친일행위였다.[6]

나무위키의 한국기독교장로회 항목 중 친일행위 단락에도 언급되었다시피, 김재준을 포함한 한국기독교장로회,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적통을 잇는 한국 장로교 교단들 모두 친일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의 장로회 교단 중 이러한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예장 고신파 정도 뿐이다. 예장 고신은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후 출옥한 소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

이와 같이 친일은 한국 개신교의 광범위한 치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교단을 떠나 과거 친일 논란을 대놓고 공론화시키는 것을 꺼리는 추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자신들의 친일논란, 특히 김재준을 포함한 자기 교단 지도부에 대한 친일논란이 교단 내부에서 나오는 곳은 기장뿐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즉, 애초에 친일행위에 대한 인정과 사과요구가 오직 에큐메니안이나 뉴스엔조이 등 기장측 성향의 진보적 기독교 언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안은 기장총회 행사를 홍보하거나 새로 교단 집행부가 들어설 경우 집행부 인터뷰를 보도할 정도로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교단이다. 뉴스엔조이 역시 한신대학교 출신 기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언론사답게 기장에 대한 기사를 많이 내보내곤 한다. 이들에게 있어 과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기장에게 돌아오고 따라서 이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지정 신학교의 설립자였던 김재준에 대한 사과를 기장 총회와 한신대학교에 요구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안 기사 뉴스엔조이 기사

4. 여담[편집]

  • 찬송가 582장(새찬송가, 통일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김재준 목사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이다. 주로 통일, 국경일 예배시에 사용되는 곡이다.
  • 경동교회의 장공채플은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 한신대학교의 본관인 '장공관'과 신학대학원 도서관인 장공도서관은, 마찬가지로 김재준의 호인 장공에서 이름을 따왔다.

[1] #[2] (출처: 국민일보 기사#)[3] (경동교회가 제작한 김재준 관련 사진 및 클립 모음)[4] MARCH에 속하는 그 아오야마가쿠인이다. 신학부는 2차대전 이후 도쿄신학교로 이관되었다.[5] 상훈법 상 사유는 '국민화합 및 국가발전유공자'로 기록되었다. 자세한 내용 및 기타 대한민국 상훈기록 관련은 상훈기록 검색 사이트 참조#.[6] 또한 조선신학교 설립 공동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채필근 송창근 목사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후보에 올랐다.기사 그러나 채필근 송창근의 경우 서울 조선신학교 설립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도 조선신학교와 관련된 사유 때문이 아니라 후평양신학교 건립에서의 행적으로 인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평양신학교가 수업을 중단하자 일제에서 곧바로 이름만 빌려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채필근과 송창근은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