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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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안보이고 ‘종북’과 ‘좌파’만 보인다...박유하 비판 인사들
‘제국의위안부’ 비판 측에 진보좌파, 종북좌파 세력 총결집... 주류 언론도 위안부에 대한 ‘또다른 목소리’엔 무관심
이우희 기자 wooheepress@naver.com2016.11.07 22:35:12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교수를 둘러싼 재판이 학자의 양심과 관계된 역사적·학문적 진실 다툼이 아니라 진보좌파 및 종북좌파의 한풀이 내지는 정치공세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 19일, 서울동부지검은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서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출판사 刊)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죄목으로 기소했다. 재판은 1년여를 거쳐 오는 8일 서울동부지법 1호 법정에서 4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간 우리 국민들에게 어디까지나 역사적·학문적 문제이지 좌우 정치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었다. 나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사안으로 평가받고 있었기에 이번 박유하 교수 재판이 특정 정파세력의 선전과 투쟁의 장이 될 것으로 예상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 재판은 법정 안팎에서 박유하 교수를 공박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학계 일부 인사들은 물론, 심지어 검찰 일부 인사까지도 특정 정치 이념에 편향된 전력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피고인의 반대편인 검사와 법조인, 교수, 재일지식인, 시민단체 등이 대부분 진보좌파 세력, 또는 종북좌파 세력과 무관치않아 재판의 공정성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제국의 위안부’ 저서 내용의 역사적·학문적 진위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제 명예훼손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자칫 박유하 교수에 대한 특정 정파 세력의 ‘사상검증재판’, ‘마녀사냥재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서울동부지법 홈페이지와 '제국의 위안부' 표지.


反박유하 측 검사와 법학교수, 진보좌파 단체 및 정당 경력 ‘눈길’


현재 박유하 교수 재판을 주도하고 있는 공소제기 및 공판담당 검사는 서울동부지검 형사부 권방문(權邦文) 검사다. 권 검사는 진보좌파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이 이번 본지 취재결과 드러났다. 검사는 공무원 신분이기에 통상 정치 편향 전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경우다.

권 검사는 노무현 정권 당시 법무부가 배심재판·공판중심주의 강화를 위해 2007년 경력 변호사 가운데 선발한 21명의 특별임용 검사 중 한 명이다. 변호사 시절 그는 진보좌파 시민단체로 분류되는 환경운동연합 법률센터 운영위원을 지냈다. 2006년에는 ‘새만금 생명평화를 위한 시국선언_새만금 생명이여! 희망으로 영원하라!’는 구호가 내걸린 시국선언에도 참여했었다.

박원순 시장이 설립한 ‘아름다운재단‘ 산하 공익법조인 그룹 ‘공감’의 2011~2013년 후원자 명단에서도 권방문 검사의 이름은 등장한다. ‘아름다운재단‘은 공익재단을 표방하지만 사실상 진보좌파의 조직과 자금을 관리하는 본부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공감’은 인권법조인단체를 표방하지만 안경환 교수, 한상희 교수 등 참여인사 면면이나 세월호 침몰 사건 개입, 백남기 씨 사망사건 개입 등 사실상 진보좌파 법조인 단체로 지적받아왔다.


권 검사는 박유하 교수 재판을 맡게 된 경위에 대해 절차에 따른 것임을 밝혔다. 그는 사건을 맡게 된 경위에 대해 단순히 이전 수사 검사의 사건을 승계한 것이라는 취지로만 답했다. 수사가 진행된 이 사건의 취지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느냐는 물음에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경력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빠지지 않고 이번 공판을 방청하고 있는 중견 법조인이자 형사재판과는 별도로 박유하 교수에 대한 민사재판을 주도해왔던 박선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부교수는 꾸준히 진보좌파 정당 정계 진출을 모색해왔던 전력이 눈에 띈다.


박선아 교수는 대구 '삼일'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2003년도에 처음으로 위안부 관련 문제에 뛰어들었다. 이후 박 교수는 후일 노무현 정권의 청와대 참모로 입신한 김준곤 당시 대표변호사의 권유로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박 교수는 18대 총선 때도 역시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으며, 19대 총선 때는 천정배 현 국민의당 의원 지원유세에 나서며 꾸준히 제도권 진보좌파 정치와 접점을 모색해왔다. 현재도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중앙당 선관위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민변 소속 변호사로도 활동하던 박선아 교수는 2008년 8월에 제주대 로스쿨 실무 조교수로 임용됐다. 제주도에서 지낼 당시 박 교수는 제주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강정마을 관련 법률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박 교수는 이후 통합민주당과 새천년민주연합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최재천 전 의원이 대표변호사로 있는 ‘한강’을 거쳐, 현재 한양대 로스쿨 리걸클리닉센터 소장에 이르렀다. 위안부 관련 활동에 뛰어든 이후 이른바 ‘폴리페서’로서도 승승장구해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박선아 교수는 지금도 위안부 관련 언론 인터뷰에 꾸준히 등장해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번 형사재판에서도 검찰 측은 박선아 교수가 한양대 로스쿨 학생들과 같이 수집한 박유하 교수 비토성 자료들을 적극 차용하고 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 박선아 교수는 19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 출신 김재홍 전 의원과 같이 당시 천정배 통합민주당 후보 지원유세를 펼쳤다. 위 사진은 '박근혜 즉사 리트윗'으로 논란을 빚은 좌파운동가 임순혜 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이다.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soonhrim/74 )




▲ 지난 공판에서 휴정 시간에 권방문 검사와 박선아 교수가 긴히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장면이 미디어워치에 포착되기도 했다.

'박유하 죽이기' 참전 재일지식인들도 '종북좌파' 과거 전력 의심돼

한편, 일본 현지에서 박유하 교수를 강하게 성토하고 있는 재일지식인 그룹은 '종북좌파'를 넘어 사실상 '이적단체'로 분류되고 있는 조총련과 무관치않은 재일동포들이라는 점도 이번 본지 취재로 확인됐다. 이들 재일지식인 그룹의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판 논리도 역시 검찰의 박유하 교수 공박에 일부 활용되는 정황이 있어 결코 간단하게만 볼 수 없다는 평가다.


‘제국의 위안부’ 비판서인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부제: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를 출간한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부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조총련계 지식인이다. ‘조선적(籍)’으로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강연회를 지난 6월 우리나라에서 열려다 입국불허 통고를 받았다. 대학 1학년때 밀입북하여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10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종북·이적 전력 때문이다.

정영환 교수가 입국불허 통고를 받자 당시 박노자 교수와 김창록 교수, 그리고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등 일부 진보좌파 세력들은 정 교수의 입국불허가, (그의 종북·이적 전력 문제가 아니라) 마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 때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동에 나서 다른 양식있는 진보좌파 인사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정 교수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국내 입국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적을 고수하고 있다. 조선적은 일본 출입국관리법상 국적이 ‘조선’으로 적혀있는 동포다. 이들은 조선적을 유지하는 대신 무국적자 대우를 감수한다. 정 교수는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이사 직함도 갖고 있다.

역시 박유하 교수를 강하게 비난하며 주목을 받은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조총련계 학교 출신임은 확인되지 않지만, 스스로를 ‘재일조선인’이라고 칭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서 교수의 두 친형은 간첩혐의로 투옥되었던 서승, 서준식으로 두 사람 모두 북한에 밀입북했던 적이 있다.


서 교수는 1974년 일본 와세다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6~2008년 3년 동안엔 한국에서 진보좌파 지식인이 많기로 유명한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후쿠시마 5년…파시즘 국가로 질주하는 일본’라는 제목의 2016년 3월 9일자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서 교수는 박정희 정권 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두 형의 옥바라지와 구명 운동을 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과 남북 관계, 한일 관계, 국가폭력과 인권, 현대성과 문명 등에 관심갖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일본 가나가와대학 윤건차 교수는 2009년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유하 교수를 ‘사이비 우파 심정주의자’라고까지 비판한 재일지식인이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의 전작인 ‘화해를 위해서’에서 전개된 박 교수의 한일화해론에 대해서 “논리 전개는 조잡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해·곡해가 많다”고 깍아내렸었다.


윤 교수는 밀항선을 타고 밀입북한 후 북한에서 군사교육까지 받은 전력까지 있는 종북·이적 전력 인사임이 취재결과 확인됐다. ‘고단하고 고독한 한의 세월 70년’ 제목의 2016년 9월 27일자(1194호) 주간경향 기사에 따르면 윤 교수는 교토대학 재학 중에도 조총련 산하 학생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수령론을 학습받기도 했다. 윤 교수는 그래도 조선노동당 가입만은 거부했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 일본 가나가와대학 윤건차 교수는 밀입북 전력, 북한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전력을 최근 고백했다. 2016년 9월 27일자 ‘주간경향’(1194호), ‘고단하고 고독한 한의 세월 70년’



‘박유하 공박’ 시민단체 정대협, ‘제도권 종북의 몸통 중 하나’라는 소리까지 들어


박유하 교수를 이번 형사법정에 세운 핵심세력 중에 핵심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대 위안부 지원단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위안부 지원을 표방하고 있으나 애국진영으로부터는 통합진보당과 더불어 ‘제도권 종북의 몸통 중 하나’로 지적받고 있다. 위안부 문제 북한 연대론을 주장하며 북핵위기에도 아랑곳없이 대북지원 등에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오고 있는 것이 종북 비판을 받고 있는 핵심 요인 중 하나.


윤미향 정대협 대표의 종북 이력은 이제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제법 잘 알려져 있다. 윤 대표는 ‘종북 대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을 기려 제정된 '늦봄통일상' 수상자다. 윤 대표는 잦은 종북 의혹으로 2013년에는 경찰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이메일 압수수색을 받았었고, 2016년에도 국정원과 경찰로부터 통신자료 관련 내사를 받는 일까지 있었다.

윤대표의 남편이자 '수원시민신문' 대표인 김삼석 씨는 ‘남매간첩단사건’ 당사자로 유명하다. 김 씨는 지난 1993년 여동생인 김은주씨와 함께 재일간첩에 포섭돼 공작금 50만 엔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었던 전력이 있다. 김 씨는 최근 재심을 받았으나 형량만 다소 줄었을 뿐 ‘국보법 위반 일부 유죄’는 변함이 없었다. 김은주 씨의 남편은 역시 ‘일심회’ 간첩사건으로 복역한 전력이 있는 최기영 씨다. 김삼석 씨와 최기영 씨는 모두 통진당 이석기 전 국회의원의 한국외대 직계 후배이기도 하다.


‘미래한국’ 보도에 따르면 윤미향 정대협 대표 외에도 정대협을 주도하는 여성인사들의 배우자들이 하나같이 ‘종북’을 넘어 ‘간첩’ 전력까지 갖고 있다. 손미희 정대협 대외협력위윈장의 남편 한충목 씨의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신미숙 정대협 이사의 남편 최동진 씨는 이적단체인 범민련 출신으로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서 일부는 윤미향 대표의 남편인 김삼석 씨의 대전형무소 복역 당시 면회 신청을 하고 심지어 탄원서까지 써줬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정대협 관련 인사들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활동에 순수성을 의심케하는 극명한 사례 중 하나다.





▲ '정대협 후원의 밤'에서 두손을 꽉잡은 이석기 전 의원과 김삼석 씨. 둘은 한국외대 선후배 사이다. 이 사진은 이석기 전 의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이다. (사진출처 : http://bluesky-sk.tistory.com/84)



진보좌파 및 종북좌파 진영 총공세에 흔들리고 있는 ‘진실 재판’

박유하 교수가 조명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또다른 목소리’가 조금씩 국민적 관심을 얻어가면서 박유하 교수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 진보좌파, 종북좌파 성향을 띤 학자와 법조인, 정치인, 재일지식인 그룹이 총집결한 상황이다. 대다수 언론은 ‘민족’을 내세운 진보좌파, 종북좌파 활동가·지식인들의 선동성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기만 하면서 역시 여성주의 계열 진보좌파 지식인인 박유하 교수에 대해 일방적 비난성 논조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학문적 진실에 대한 한 학자의 양심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현실인 것이다.

현재 공판도 이번 재판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하는 박유하 교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달 11일 열린 공판에서 검사 측은 책 여러 군데의 서술을 묶어 추정을 통해서 박 교수의 고의성을 재단했다. 이에 박 교수 측은 한 개인의 사상을 검증하는 자리가 아니라며 재판부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박유하 교수에 반대하는 한 방청객은 흥분한 나머지 사적인 질문을 던지려다 재판부에 의해 제지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8일 열릴 공판에서는 학문적 근거와 역사적 진실을 다투려는 박유하 교수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는 29일에는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이 박유하 교수를 대상으로 3시간 가량의 피고인 신문을 할 예정이다.










검찰이 진보좌파 인사 및 종북좌파 인사의 자료와 서적을 박유하 재판에 동원하고 있는 근거



지난 10월 11일에 열린 세번째 공판에서 권방문 검사와 박유하 교수의 공방을 살펴보면 검찰 측이 박선아 한양대 교수와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자료와 책을 참고해 박유하 교수를 공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유하 교수 관련 후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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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방문 검사 : 박선아 한양대 교수가 학생들과 이 책을 검토한 보고서를 두고 피고인은 ‘학생의 리포트’로 폄훼하지만, 학생들의 감상은 일반인들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명예훼손이 된다.


박유하 교수 : 박선아 교수는 나눔의집의 고문변호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나눔의집의 의뢰를 받
아 학생들을 시켜 분석한 내용이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일반인’적 감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검토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지원단체가 유포한 지식 외엔 위안부문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똑같은 책을 두고 익숙하지 않았던 인식제기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이 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할머니의 아픔’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한 일반인은 적지 않다. 발간직후 신문등의 서평, 인터뷰 기사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고, 언론 반응이야 말로 ‘일반인’의 대표적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오마이뉴스는 이 책이 ‘군대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조’를 ‘보편적인 여성문제로 제기’한 책이며 ‘제국의 가장 무서운 점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는 점’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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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방문 검사 : 피고인은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다르게 쓰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쓰고 일본을 향해서는 사죄를 했다고 썼다.

박유하 교수 : 그 얘기는 재일교포연구자 정영환씨가 자신의 책에서 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 대부분이 원문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한 거짓말이다. 정영환의 그 지적이 실은 의도적인 ‘오독 혹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작가 장정일씨가 일본어 가능한 이의 도움을 받아가며 확인 후 지적한 글이 있다. 검사의 지적 역시 근거 없는 중상일 뿐이다.



영화 '귀향'의 주인공도, 다수 출연진도 조총련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의해 ‘물리적으로 강제연행’되는 장면을 연출하며 북한의 ‘프로파간다’라는 의심을 낳으며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던 영화 ‘귀향’. 이 영화의 출연진들 역시 상당수가 북한과 관계된 사실상의 ‘이적단체’인 조총련계 재일동포들로 파악되고 있다.

‘영화 ‘귀향’의 주연 여배우의 日本 내 '출신학교' 확인’이라는 제목의 5월 9일자 조갑제닷컴 기사에 따르면, ‘귀향’의 주연 여배우 강하나 씨는 일본의 조총련계 학교인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에 재학중인 재일동포 4세다.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학교는 국내 ‘한겨레’신문도 자주 조명해주는 일본의 북한 관련 학교 중 하나로 위안부 김복동·길원옥 할머니가 격려 방문을 하기도 하는 등 정대협과 연관성도 의심받고 있다.

김 씨의 어머니인 배우 김민수 씨는 1974년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조선대’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에는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가 있다. 김씨가 졸업한 조선대가 한국과 일본 어디에 있는 대학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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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박노자, 한겨레21 06091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박노자, 한겨레21 060919)

부처님은 죽이라고 했는가



불교적 신념이 강한 내가 한국 종단의 ‘신도’가 되길 거부하는 이유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동아시아 종단의 치부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의 내면적 신앙이 어떻게 돼도 어떤 조직적 종교의 신도로 칭하지 않으려 한다. 종교 조직을 멀리할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야만의 극치에 대한 종교들의 무력함에 따르는 환멸이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가 자행하는 전쟁 행위에 대한 종교 집단들의 협력은 구미 지역에 비해 훨씬 가시적이었다.



△ 샤쿠 소엔(왼쪽)은 메이지 시대 선불교의 최고 고승이자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근대 학문을 배운 개화 인사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물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제동을 걸지 못한 구미 지역의 주류 교단들에 면죄부를 줄 일은 없지만, 구미 지역에서 전쟁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비주류 교단들마저 놀랍게도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의 협력자로 돌변하곤 했다.



일본 퀘이커의 변절



예컨대 구미에서 병역거부·반전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온 퀘이커들을 생각해보자.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일본인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국가와 천황에의 보은’을 앞세워 ‘전쟁 지지’와 ‘적극적인 협력’을 밝혔다. 결국 일본 퀘이커들은 세계 퀘이커 공동체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끊어야 했다. 또한 일본인 퀘이커로서 가장 유명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1862~1933) 박사는 1898년에 영문으로 일본 무사도의 찬양론을 쓰는 등 군국 일본의 대외 홍보에 일익을 담당하게 됐다. 여호와의 증인 등 극소수만 제외하고는 퀘이커와 같은 정통 평화 교단들마저도 병역 거부를 선언하지 못한 게 근대 동아시아의 현실이다. 성경책에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나오지 않았던가?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국민 총동원’을 상시적으로 실시하는 후발 근대화 사회에서, 내가 살인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아닌 시저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동아시아 기독교는 그나마 러일전쟁을 비판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그 제자 함석헌(1901~89) 같은 위인들을 자랑할 수 있다. 서구에서 지금도 ‘전쟁 반대의 종교’로 인식되는 나의 신앙, 즉 불교는 과연 어떤가?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한국의 불교 교단사를 보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불교의 교리를 왜곡해가면서 종교적 전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민초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커 정권에 이용가치가 높았던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오타니파(大谷派)라는 한 교파의 지도자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으로서 당연히 용감하게 싸워야 하지만 특히 우리 신도로서 국가에의 충성이 부처님의 절대 진리에 상응되는 세속적인 진리라는 점을 자각하여 국은(國恩)을 갚는 데에 마음을 다 바치라”는 교시까지 내렸다. 그 지도자를 비롯한 오타니파의 성직자들이 ‘국가의 은혜’를 갚느라고 전선에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인 위안 방문’을 했고 병사의 사기를 고취하는 전쟁 선전의 책자도 만들어 배포했다. “전장에서 쓰러지면 곧 정토 왕생된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전사자를 위한 추도회까지 현지에서 열곤 했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한 불교의 여러 교파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총알받이들을 전장에 보내기 위한 정신적인 마약으로 변조하면서까지 열을 올렸음에도, 일본의 상류사회로부터 “기독교인에 비해 전쟁 협조를 덜 열심히 했다”고 빈축을 샀다.



외래 계통의 소수파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그 당시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전쟁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을 죽여 많은 중생을 살려라?



청일전쟁 때만 해도 일본의 종군 승려들은 전사자 추도회를 할 때 중국 병사들의 유해까지 함께 장례 치르는 등 ‘적병’에 대한 나름의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에서는 불교계 석학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1858~1919)의 말대로 “부처님의 원수”였던 러시아에 대한 적대심은 광풍 그 자체였다. 주요 종단들이 징병 대상자에 대한 격려와 군영의 위문 방문, 군승 파견을 한 것은 물론,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참전했던 군승들이 “적들을 무수히 죽여버렸다”고 불교 언론에서 자랑할 정도였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맡았던 샤쿠 소엔(??宗演·1860~1919) 스님의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종군 포교사로 파견 중이던 그는 불교에 긍정적이었던 톨스토이가 “교전 중의 양국 대표자로서 반전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자 “공생이 불가능한 존재들 사이의 융화에 도달하자면 전쟁과 살인이 필수적”이라고 대답했다. 승려에게 참전은커녕 칼 찬 사람에의 설법까지 엄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해본다면, 속인 톨스토이의 제안에 “노”를 외쳐대는 ‘고승’의 모습은 괴이하게만 보인다.





△ 화폐 개혁 전 5천원권에는 니토베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이미 그때에 불교계는 대량살인을 ‘일살다생’(一殺多生)이라 불렀다.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는 편하기 짝이 없는 논리다. “저 해로운 벌레를 죽임으로써 아시아 평화를 도달케 하는 우리 병사”들을 “보살행의 수행자”라 칭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르러서는 “천황 폐하는 여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가 명하는 전쟁이란 크나큰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으로 진일보했다.



일본 불교에 거의 편입된 식민지 조선의 주류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이후에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 그는 전쟁 때의 명령이 바로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의 발언



오늘날의 한국 주류 불교 종단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의 군사주의를 그대로 담은 식민지 말기의 ‘호국을 위한 살생 허용’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종단의 신도증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불교적 신념이 강해도 말이다. 아니, 불교적 신념이 강하기에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고 효과의 묘약을 잘못 이용하면 최악의 독약이 되듯이, 가장 고매한 종교의 교리 체계에서 비폭력·반전에 관한 부분을 빼버리면 결국 대중을 국가의 총알받이로 만드는 최강의 마취제로 변하고 만다.



△ 니토베 이나조는 전쟁에 관한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천황폐하의 선량한 신민’으로서의 입장을 택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불교·기독교는 평화의 성현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각각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 ‘박노자의 동아시아 남녀’는 이번호부터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으로 문패를 바꿉니다. 글의 소재를 동아시아 근현대로 확장해 독자 여러분의 역사적 안목을 더욱 높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성원 부탁드립니다.



참고 문헌:

1. <논집 일본불교사 8: 메이지 시대>, 이케다 에이(池田英俊) 외 엮음, 도쿄: 유잔가구(雄山閣)출판, 1987, 225~269쪽.

2. , Notto R. Thel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 169~174쪽.

3. , Brian Victoria, Weatherhill, 1997.

4. <친일불교론> 상·하, 임혜봉, 민족사, 1993.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 매김과 현대적 의미

 - 박 재 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다석 류영모의 깊고 맑은 삶과 정신과 사상은 오늘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며 빛나고 있다.  다석은 씨 함석헌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씨사상의 밑자리를 놓은 분이다. 함석헌의 씨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류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류영모 사상을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한국적 주체철학, 동서사상의 만남과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자리 매김을 하고 오늘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1.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그 동안 묻혀 있던 류영모의 삶과 사상이 지난 10 여 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기상 교수는 류영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류영모의 사상이 이성, 존재, 인간 중심의 서구사상에 근본적인 도전과 대안이 됨을 밝혔다. “서양 사유의 잘못된 방향정립과 존재자에 대한 탐닉을 바로 잡기 위해서 다석 류영모 선생은 한 마디로 빛을 끄라고, ‘태양을 꺼라!’라고 외친다. 이것은 존재 중심의 철학, 빛의 형이상학에 대한 최대의 도전적 도발이며, 인간 중심의 철학, 의지의 해석학에 대한 방향전환 요구이며, 물질중심의 과학, 욕망의 주체학에 대한 강한 반성의 촉구이다.”1)

  다석은 물질(色界)과 이성의 빛보다 허공과 영의 어둠을 추구했다. 1922년에 이미 우주세계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크고 근원적임을 갈파했다. “우주는 호대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쫓아보았는가?”2)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3)

  어둠에 대한 다석의 통찰은 래리 라스무센이 1995년에 생명신학과 생명윤리의 새로운 상징으로 어둠을 제시한 것보다 70년 이상 앞선 통찰이었다. 또한 한=환(환하고 밝음), 백(白: 밝음), 배달(밝은 땅)에서 보듯이 밝음을 추구한 한국민족문화를 최남선이 ‘한밝문명론’으로 제시한 것4)을 뒤집고 삶과 존재의 깊이를 추구한 것이다.

  다석에게 어둠은 욕망을 자극하는 물질의 빛, 존재와 관념을 분별하는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세계이고 차원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없음(無)과 빔(空)의 세계이다. ‘하나’는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깜깜한 세계이고 우주의 허공이 그렇듯이 없음과 빔은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깜깜한 단일허공(單一虛空)이다. 허공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집과 집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원자와 원자 사이...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5)

  어두운 허공을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던 류영모는 “어둠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6)으로 알았다. 물질과 이성의 빛을 넘어서 어둠, 한(하나), 공허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려 했던 다석은 이성과 기술의 빛,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사유의 틀과 논리, 물질적 존재의 힘과 현실에 집착한 서구사상에 큰 도전을 줄 뿐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바탕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사유와 삶의 길을 제시했다. 다석은 세속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길을 갔고 가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수도의 길을 열었고, 나라와 겨레의 역사 속에서 한얼나라, 하늘나라를 이루려 했다. 또한 그는 생각과 말이 끊어진 어둠과 하나와 공허의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생각과 말과 한글로 진리체험을 표현하려 힘씀으로써 깊고 독창적인 많은 생각과 글을 남겼다. 이로써 다석은 불립문자의 세계에 매몰된 선승들과도 다르고, 논리와 개념에 집착한 서구철학자들과도 다른 사상의 경지를 열었다.



  2. 한국적 주체철학



  류영모는 서구의 언어와 개념을 번역한 말과 글이 아니라 우리말과 글로 사유한 사상가이며, 삶과 생각을 통전시킨 생활철학자이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세우는 민족주체철학자였다. 그가 우주와 공허를 말한 것도 매임 없이 곧게 서려는 것이었다. 매임 없이 곧게 서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로 되어야 세상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매임 없이 자유롭고 곧게 서는 주체철학이다.



  1) 신선처럼 자유롭게



  함석헌은 한민족의 종교문화의 근본줄기를 신선사상으로 보았다.7) 세상의 이해관계와 다툼에서 벗어나 자연생명세계와 하나로 녹아드는 신선사상은 자연친화적이고 종교적이며 평화적인 사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신선사상이 한국인의 예술과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다. 물과 바람에 어울리며 삶과 생각을 키우고, 기교와 과장 없는 단순 소박한 도자기, 사람과 자연이 함께 녹아든 그림,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집과 정원에서 신선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파고드는 진리탐구자이면서 초탈한 신선의 모습을 보였다. 민족사학자 문일평이 일제 때 류영모의 집을 다녀가서 지은 한시에 류영모의 집과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둘러싸인 골에 산장을 찾으니 푸른 뫼 속에 집 한 채 서 있고 물 구름 함께 어울려 한 고향이라 숲 속에 꽃은 다시 아름다워라 계곡에 시냇물은 오히려 서늘하고 약초 캐러 다니느라 어둑한 지름길을 뚫었다 씨 소나무는 외딴 집을 둘러 지키고 집 부엌에는 맛좋은 먹거리가 그득하니 상위에는 우유 토마토의 향기로다.”8)

  류영모는 자신의 사는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 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줄여 씀이 죄받는 듯 하여라.”9)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명예와 이익을 우습게 여기는 류영모는 바람과 물을 아껴 쓰면서도 바람과 물을 쓰는 것이 “죄받는 듯 하여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초탈한 삶을 살면서도 자연을 아끼는 다석의 겸허하고 정성스런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나는 1975년 무렵 류영모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80대 후반의 류영모는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듯 했다.

  다석은 “脊柱는 律呂10),  거믄고”(다석일지. 1955, 4.27)라고 했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삶의 기본음(基本音)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를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척주로 보고 척주가 곧고 바르게 조율이 될 때 마음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11)

  다석은 생명과 영을 예술로 보았다. 법과 도덕, 제도와 풍습만으로는 삶과 영이 완성될 수 없다. 예술의 차원과 경지가 있어야 삶은 완성되고 구원된다. “인생은 피리와 같다...피리를 부는 이는 신이다.”12)

  일상의 삶을 영과 예술로 높인 류영모의 삶은 신선의 삶이고 그것을 추구한 그의 사상은 ‘걸림 없는 옹근 삶’(圓融無碍)을 추구한 한국의 고유한 신선사상이다. 그는 신선처럼 욕심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2) 씨 사상: 민주사상



  15세에 기독교신앙에 입문하고 20세 때 오산학교 교사로서 류영모는 남강과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오산을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다. 20세에 노자와 불경을 읽고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에 심취했다. 톨스토이를 통해 19세기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으로서 농사꾼이 되려 했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예수나 바울처럼 민중적 대중적 사유를 한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엄격한 금욕이나 높은 도덕수준을 요구하지 않고 서민대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바울도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복음적 가르침을 폄으로써 일반대중에게 기독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엘리트적 이성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흔적이 톨스토이에게 있다고 보고 이런 경향이 영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금욕적이고 엄격한 다석에게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씨로서 참되게 살려고 했던 다석의 삶과 생각을 움직이는 기본원리는 씨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놓는 민주주의이다. 삶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구도자적 헌신이 그를 씨의 삶과 사상에로 이끌었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그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13)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다석은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14)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15)라고 했다.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노동자 농민을 오늘의 예수로 보는 다석의 사상적 통찰이 씨사상과 민중신학의 기본바탕이 되었다.



  3) 민족 주체사상



  다석은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최남선과는 경성학교 동기생으로 가까이 지냈다. 최남선은 일제말기에 변절했지만 민족문화사상에 대한 그의 연구는 빼어난 통찰과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다석은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다석은 생각한 대로 실천했기에 정인보는 그를 ‘조선에서 두려운 인물’이라 했다고 한다. 20세 때부터 냉수마찰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머리에 찬물을 붇고 냉수마찰을 했다. 32세때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의 의자 등받이를 자르고 평상 위에서 무릎 꿇고 사무를 보았다. 몸과 마음을 곧게 가지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에 굴복한 정치문화의 살림살이, 사대적 굴종을 거부하고 스스로 곧게 서는 삶을 살았다.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남을 나무라고 내몰아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려 한다.“ 다석은 한국을 등걸(단군)이 하늘 열어 세운 나라로 여겼고 등걸을 ”머리 웋인 님 우리님금“(머리에 웋[하나님]을 인 님 우리 님금)18)이라고 했다.

  다석은 한글, 등걸의 정신과 사상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시켰다. 다석은 세종 임금이 내 놓은 바른 소리인 우리글의 모음의 기본인 ㅡ ㅣ 를 예수와 직결시킨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ㅡ ㅣ 를 나타낸 나무이다. 그리고 다석은 십자가를 나무뿌리, 나무등걸을 나타내는 등걸(檀君)님과 연결시킨다. ㅡ ㅣ 를 십자가와 연관시키고 십자가를 다시 한겨레의 뿌리인 단군과 연관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석의 상상력이다. 다석의 이런 풀이는 엉뚱한 말놀이가 아니라 한글의 기본모음에 대한 의미깊은 해석으로 여겨진다.19)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의 뜻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으이’로 나타낸다.20) 그는 한글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곧게 위로 올라간 이다. 하나의 세계, 절대불멸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고디’(直)뿐이다.21) 고디 독립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태양을 사모한다.22) 다석은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라고 했다. 몸이란 활에다 곧은 막대 같은 정신을 화살로 끼워 쏘아 하나님 나라에 똑바로 맞혀야 한다.23) 1956년 1월 21일에 쓴 ‘그리온’이란 글에서 다석은 “그리온 걸 그리우고 드디어 오른이 누구리? 무리여. 거룩할 우리 고디!”라고 했는데 김흥호는 “오른이...고디!”를 그리스도라 보았다. 김흥호에 따르면 다석은 기독교를 貞敎로 보았다.24) 성서는 엄한 죄의식과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서는 다른 모든 종교를 앞지른다. 거룩과 의는 곧음을 뜻한다.

  단군은 우리의 나라님이시다. 단군은 우리 말 둥글(朴) 등걸(璞)을 사음한 것이다. 단군은 우리 겨레의 뿌리(등걸) 되시는 원만하신 둥근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도, ‘두루 이치가 통하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도 둥글고 원만한 정신을 나타낸다.25) 다석은 단군을 나무등걸 나무뿌리로 보고 나무의 둥글고(朴) 소박한 ‘자연’과 연결함으로써 한국정신의 자연친화적 성격을 밝혔다. 곧고 꼿꼿한 나무 막대기, 고디가 자연친화적인 원융합일, 묘합의 한국정신과 만나고 있다.

  다석은 하나님을 고디로 보기도 하고 동글암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속성은 고디다. 의롭고 바른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원만이다. 은 유와 무,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동글암, 원만이다. 곧은 막대기인 사람은 “없시계신 동글암”에로 돌아간다.26)

한국의 종교예술문화에서도 자연친화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다석의 사상에서 곧고 진취적인 기독교서구정신과 둥글고 원만한 한국아시아정신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깊은 죄의식, 믿음만! 은혜만!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을 말하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타협 없는 곧음을 지닌 종교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 하늘, 나무 등걸의 동글암, 원만을 품고 있다. 다석의 삶과 정신 속에서 등걸과 그리스도가 만나고 있다. 둥근 등걸과 곧은 그리스도가 만남으로써 한국은 곧게 선 나라가 될 수 있다.





  3. 동서사상의 만남과 종합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인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평생 하늘의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옥상에 망원경을 만들어 놓고 별들을 관찰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믿음의 진리와 씨의 삶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던 류영모는 낡은 이념과 종교의 틀을 깨고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에 두루 통하는 삶과 생각에 이르렀다.



  1) 동서의 융합



  서구문명과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에 나서 살았던 류영모는 서구의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하나님을 향한 솟아오르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성서의 사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공(空)의 세계를 추구한 동양사상과 결합되었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욕구가 주도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류영모도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보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다석도 식욕과 육욕이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식색(食色)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심리학자와 내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육욕을 끊고 자유로운 영적 세계, 초자아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을 성욕(性慾)으로 번역한 것을 어이없는 짓으로 못 마땅해 했다. 性은 인간의 본성, 바탈로서 하늘, 하나님과 통하는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을 육욕에다 붙이냐는 것이다. 또 ‘미성년자 불가’라 해 놓고 어른들이 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했다. 미성년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면 어른들은 더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밖에서 ‘나’를 규제하고 지배할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이성과 도덕의 규정과 질서를 거부한 것은 하늘과 땅, 동서남북의 좌표와 규정을 폐지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나’를 규제할 것은 없다. 지금 여기의 나가 중심이고 주체이다. 원초적 생명의 힘을 추구했다.

  류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류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2)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의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철학에서 ‘나’, ‘너’는 개체적 실재이다. 타자, 만물과 구별된 실체이다. 실존적 자아도 만물과 구별되는 독립된 실체다. ‘나’는 바깥세계, 타자와 긴장과 갈등 속에 있다. 다석은 ‘나’에 집중하지만 ‘나’는 자연과 타인과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열리고 뚫린 것이다. 말씀을 깨달은 인간은 섬기는 존재다.

  (2) 깊은 영성의 사상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류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하나됨에로의 돌아가는 귀일(歸一),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3) 속세의 기독교 선승이다. 해혼(解婚)하고 하루 한끼 먹고 온종일 널빤지에 무릎꿇고 앉아 생각에 몰두한 류영모는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기독교 선승이다.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생각은 끊고 절대의 사유 세계에 접어든 산 속의 선승들과 다르다. 가정에서 민족사회 안에서 사유하고 명상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성적 과학적 사유에 힘썼고 말과 개념을 닦아냈다는 점이 다르다.

  (4)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사상의 결합이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동학을 연구한 흔적이 없는데 기본사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런 기본사상이 매우 한국적인 사상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8)

  동학과 다석은 많은 점에서 상통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이는데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다.

  다석의 사상은 민족사학인 오산의 정신과 사상의 맥을 잇는 사상으로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의 기독교적 민족정신운동의 흐름 속에서 함석헌의 씨사상으로 이어진다. 일제 아래서 민족정신과 독립을 추구한 대종교 교주 윤세복,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와 함께 주체적인 민족사상과 정신을 추구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사상과 단절됨으로써 해방 후 한국사상계는 사상의 뿌리를 잃고 말았다. 다석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뿌리를 밝혀준다.

  (5)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마음을 마음대로”는 말 그대로 모든 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고 마음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하는 경지를 뜻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든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내 삶이 달려 있다. 몸을 강조하고 결정론을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에서의 삶에 집중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고 삶의 우발성을 강조한 서구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한다. 그러나 다석이 의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초월적 영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6)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종교원주의다. 70여년 전에 존 힉보다 먼저 종교다원적 신앙을 펼쳤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의 고갱이는 성서, 예수에게서 왔다. 그의 사상과 영성의 내용과 특징은 유교, 불교, 도교에서 왔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머리 속에서 개념적으로 논리적 이론 정리되고 전개된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혼으로 체득한 종교다원사상이므로 살아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삶이 숨겨 있고 담겨 있다.

  (7) 다석은 종합적인 사상가이다. 한겨레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크고 하나임, 밝고 환함)이다. 한국인의 사상적 천재성은 하나로 꿰뚫는데 있다. 최치원, 원효, 지눌, 율곡, 수운, 해월, 다석, 함석헌은 모두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다석은 주관과 객관, 상대와 절대, 유와 무, 인간과 신에 대한 서구의 이원론적 경향과 동양의 일원론적 경향을 통합했다. 안과 밖을 꿰뚫었다. 초월자 하나님이 내 바탈 본성 속에 있다고 보았다. 영원한 생명의 줄이 내 숨 속에 내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야 하나님을 만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절대자를 말하고 동양에서는 마음, 본성이 곧 하늘이고 도라고 보았다. 내면 속에 영원한 궁극의 실재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 바탈을 닦으면 궁극적인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나’의 밖의 하나님,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다. 거기에 영원이 있고 구원의 나라가 있다. 류영모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솟아올라야 한다고 보았다. 내 속을 파고들면서 끊임없이 위로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오르려 했다는 것은 동양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이 결합된 것이다.

  몸과 정신,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꿰뚫은 사상이다. 류영모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고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다시 류영모 사상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과 동양종교의 창조적 만남을 이루고 하나로 꿰뚫었다는 데 있다. 동서 사상과 종교와 정신의 회통과 통전은 지구화시대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2) 앞으로는 풀뿌리 민주시대와 서비스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섬김의 철학으로 다석과 함석헌의 사상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다석은 삶의 사상가이고 생각과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 사상가이다.

  3)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속성과 발전을 논구해야 한다. 다석에게 배우고 다석을 깊이 안 이는 함석헌이다. 다석사상이 뿌리와 싹이라면 함석헌 사상은 줄기와 꽃과 열매이다.

다석의 비상한 삶은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혼돈과 어둠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다석사상을 연구함으로써 함석헌의 씨사상도 더 밝아지고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에게서 실천적으로 힘차고 활달하게 펼쳐진 씨사상의 깊은 뿌리와 높이가 드러나기 위해서도 다석의 사상이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1)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I. 솔, 2001. 669쪽.



2) 류영모. 다석어록. 153-4쪽.



3) 같은 책. 156쪽.



4) 최남선, 불함문화론, 신동아. 1972. 1. 다석도 최남선이 한민족의 본질을 ‘밝기’로, 인간의 본질을 광명으로 본 것을 알았다. 다석일지공부 2. 616-617쪽.



5) 다석어록. 161쪽.



6) 이기상, 같은 글. 683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 1.365쪽.



8) 박영호 지음,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두레, 2001.  359쪽.



9) 같은 쪽. 360쪽.



10)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옛날에는 새 나라를 세우면 법과 제도, 도덕과 풍습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음악의 기본음을 정하고 기본음에 맞추어 악기들을 조율하고 가락을 정했다. 옛날에는 음을 측정하는 기계장치가 없으므로 기본음을 정하고 이 음에 따라 악기들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했다. 강증산은 죽기 전에 “율려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근에 김지하가 율려를 내세워 새로운 미학과 사상운동을 펼치고 있다.



11) 다석은 呂와 은 등뼈를 그린 것이라고 보았다.(진2, 40)



12) 류영모,  “밀알(1)”,  柳永模 先生 말씀上. 817쪽.



13)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204쪽.



14) 류영모, “짐짐”. 柳永模 先生 말씀 上, 789-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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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다석 유영모 -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다석 유영모 -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박재순 (지은이) | 현암사 | 2008-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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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는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설서로 그의 생애와 사상적 특질이 형성된 배경을 밝히고,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더불어 전체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 했다.



그의 사상은 전통 사상과 현대 사상의 결합으로서 함석헌의 씨알 사상, 민중 신학, 종교 다원주의 사상, 토착화 신학, 생명 철학의 선구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한다.



머리말

일러두기



1.우리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창조적으로 철학하다

현대 철학으로서의 유영모 철학



2.통합으로 가다

신교육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갖다 (1890~1913)

오늘살이에 충실한 생명 철학을 갖다 (1914~39)

숨과 기독교 신앙에 집중하다 (1939~43)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다



3.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로 가다

죽어야 산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다

죽음 : 영원히 날개를 펴다



4.하루를 영원처럼 살다

하루를 영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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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은 생각을 '신과의 소통과 연락'으로 보았다. 다석에게 신, 하느님은 '절대 하나'이고 '전체 하나'이다. 다석 사상의 핵심과 목적은 '하나'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는 단일 허공, 하나의 세계는 인식론적으로 "깜깜한 세계"라 했고 "하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고 했다.

다석에게서 생각은 앎(지식)을 넘어서 모름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모름직이'란 말을 '모음을 지킴'으로 풀이한다. "사람은 모름을 꼭 지켜야 한다." 모르는 것을 지켜야 아는 것, 알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190~91쪽, '7.생각: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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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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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다.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경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의 지도 아래 카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공부했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경주석서를 번역하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고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씨알사상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보람과 사명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냈으며,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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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의의

다석 유영모는 우리 근·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이고,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더불어 전체 하나의 세계를 이루려 했다.

다석 유영모의 사상은 우리 전통 사상과 현대 사상의 결합으로서 함석헌의 씨알 사상, 민중 신학, 종교 다원주의 사상, 토착화 신학, 생명 철학의 선구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한다.

우리 사회는 동양의 전통 종교 문화를 지니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고, 오랜 식민지 생활, 남북 분단과 전쟁, 군사 독재를 거치면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세계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 사상계는 해방 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 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 사상과 단절됨으로써 그 뿌리를 잃고 말았다.

이제 우리 근·현대사의 값진 경험으로부터 인문학적 부흥이 일어나고 동서 문명을 아우르며 세계 평화 시대를 여는 철학이 나와야 할 때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과 세계 개방성, 평화 지향성은 세계화 시대에 상생과 평화의 철학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다석 유영모는 우리 고유의 천지인 합일 사상, 기독교 사상 그리고 ‘생각’을 중심에 놓는 서구 근대 철학을 결합함으로써 동서고금을 통합하는 현대적 사상을 형성했다. 그의 사상은 두루 통하는 종합적인 ‘한국 사상’으로 우리 사상의 뿌리를 밝혀 준다. 동서 문화를 아우르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은 지구화와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상생 평화의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인류에게 자극과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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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과 특징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설서이다. 다석 유영모의 생애와 그의 사상적 특질이 형성된 배경을 밝히고, 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다석 유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오롯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정말 장애가 되는 것은 그의 글귀가 난해하다는 데 있다기보다 그의 혼과 삶의 세계를 가늠해 보고 헤아려 보는 정신적인 안목과 체험이 부족한 데 있다. 그의 사상은 동서 문명의 만남과 우리 역사와 문화의 큰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 책은 총 13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각 장마다 다석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명제들을 뽑아 심도 있게 해설하였다.

1. 우리 근·현대사의 특성과 유영모의 철학 : 유영모 사상의 전반적인 특징과 다석 사상이 주류 철학계에서 외면당하는 이유-기존 혹은 새로이 형성된 학맥으로부터 벗어남, 근·현대 서구 학문에 부합하지 않은 자유로운 글 형식, 종합적이고 방대한 정신세계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 등-에 대하여 개괄하였다.

2. 통합으로 가다 : 유영모의 삶과 사상을 네 시기-신교육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시기, 오늘살이에 충실한 생명 철학을 갖게 된 시기, 숨과 기독교 신앙에 집중한 시기,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은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3.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로 가다 : 다석의 영성은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형성된다. 그에게 죽음의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고 사변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현실의 문제였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실천적인 삶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4. 하루를 영원처럼 살다 : 다석은 어제에 매이지 않고 내일의 걱정에서 벗어나 하루를 영원처럼 살았다. 인간의 하루는 늘 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오늘을 ‘오! 늘’이라 풀이했다.

5. 밥 철학과 깨끗한 삶 : 다석은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과 정신을 완성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해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방식과 태도, 이유와 목적을 밝힌 다석의 밥 철학을 살펴보고 그가 밥을 먹고 살아 낸 아름답고 깨끗한 삶의 모습을 알아본다.

6. ‘가온 찍기’로 무등 세상을 열다 : 시간과 공간의 참된 주체와 주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 여기의 ‘나’를 한 점으로 찍어서 영원한 삶의 자유에 이르는 ‘가온 찍기’의 하루살이에 대해 설명하였다.

7. 생각 :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다 : 다석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솟아올라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늘 자신을 불태우고 새롭게 형성하는 ‘생각’에 집중하였다. 생각함으로써 자기 삶의 한가운데를 찍어서 위로 솟아오르고 앞으로 나아가며 영원한 우주적 생명, 하느님과 직통할 수 있다고 한다.

8. 숨은 생명과 얼의 줄 : 다석은 생각을 ‘말씀 사름’, ‘말 숨 쉼’으로 이해했다. 생각은 이성의 일일 뿐 아니라 영의 일이다. 또 생명의 일이고 몸과 목숨에서 나오는 행위다.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숨과 영성에 대한 논의를 함으로써 다석 사상의 생명 철학적 기초를 밝힌다.

9. 우리 말과 글로 철학하다 : 다석은 우리 말과 글을 닦아 내고 살려 내려고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철학적 언어로 다듬어 내고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펼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말마디 속에서 하느님의 이르신 뜻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만났다.

10. 예수와 함께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하다 : 다석은 신앙 체험 속에서 예수를 새롭게 만나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일이 하늘 일을 하는 것이고 하늘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요한복음?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1. 기독교·유교·불교·도교의 회통 : 빈탕한데 맞혀 놀다 : 다석은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동양 종교와 통하는 사상의 종합에 이를 수 있었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으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 사상을 갖게 되었다.

12. 하나로 돌아가다 : 다석 사상의 중심에서 전체를 꿰뚫고 이끌어 가는 것은 ‘하나’이다. ‘하나’를 찾고 ‘하나’로 돌아가자는 것이 다석 사상의 시작과 끝이다.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하나’ 속에서 물건과 인간의 생명이 완성되고, 자유와 공평의 대동 세계가 열리고, 상생 평화의 통일 세계가 시작된다.

13. 동서 정신문화를 융합하다 : 다석은 한국과 동양의 정신과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정신과 이성 중심의 서구 근대 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을 아우르는 대종합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다석 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서구 현대 사상의 정신과 풍토를 형성하게 한 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의 사상에 비추어 설명하고, 우리의 주요한 전통 사상을 주창했던 다산 정약용·동학·함석헌 사상과 비교, 분석하였다.



다석 유영모에 대하여

다석 유영모는 천문·지리·서양철학·동양철학·불경·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賢者)요, 우리말 우리글로 사고를 한 진정한 한국의 사상가다.

16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하였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되어 30년이 넘도록 연경반 강의를 하였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였다. 예수를 절대시하고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하였으며, 노자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이루었다.

순수한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우리말이 들온말(외래어)에 밀려 없어지거나 푸대접받는 걸 몹시 언짢아하였다.

160센티미터가 못 되는 체구에 서민적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눌변도 달변도 아닌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예지가 번뜩이는 시문(詩文)이요 진언(眞言)이었다.

얇은 잣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하루에 한 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였는데, 세 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했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맨손체조와 냉수마찰을 평생 동안 했다. 일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천으로 만든 손가방에 명상의 일기 공책을 들고 다녔다. 시계도 차지 않았지만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사람은 제 먹거리는 제가 장만해야 한다면서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남에게 잔심부름 시키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지켜 밥상을 손수 부엌 마루에 내놓았다. 걸어다니기를 즐겨 북한산에 자주 올랐고 강의하러 갈 때도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새벽마다 지구를 사타구니 밑에 깔고 우주를 한 바퀴씩 돌면서 우주 산책을 한다면서 세계의 명산, 깊은 바다의 이름과 높이?깊이를 모조리 기억하였으며, 지구와 별들과의 거리도 외웠다.

나이를 햇수로 계산하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가까이 따르던 사람으로는 김교신(金敎臣), 함석헌(咸錫憲), 현동완(玄東完), 이현필(李賢弼), 김흥호(金興浩), 류달영(柳達永) 등이 있다.

감탄할 만한 명문장가였는데도 평생 '다석일지'만 남겼다.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

이카루스의 날개에 매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