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9

손민석 장신기 선생의[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를 읽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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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선생의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를 읽는데 굉장히 잘 읽힌다. 좋은 연구서이면서 대중서라 생각한다. 다만 몇몇 지점에서 불만이라고 해야 할까, 의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있다. 예를 들어 장신기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의 박현채 버전과 유종근 버전 간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김대중 정부 시기의 최장집 등이 간여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적 발전'이라는 구호에 맞춰서 해석해버린다. 생산적 복지와 시장경제 중시론으로 묶어서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해석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김대중의 사상은 계속해서 변해왔고 박현채가 깊이 관여한 대중경제론과 유종근의 조력이 들어간 대중경제론은 완전히 그 내용과 지향이 다르다. 박현채의 대중경제론은 단순히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개발방식만을 비판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를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가 담겨 있다. 환경문제와 연결된 농민 문제, 중소기업 문제까지 모두 아우르는 건 그런 맥락이다.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보수우파 측에서는 역시나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겠지만 이건 당대의 경제학사 차원의 맥락도 있다.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라 본다. 최상오였나 주익종이었나 연구논문 분석한 게 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초기 김대중은 아무리 보아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민족사회주의 계열에 가깝다. 시장경제를 중시한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마지노선으로 시장경제를 채택하는 방향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의 주도권을 중소기업 등의 '민족자본'이 차지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박현채는 통일전선적 인민민주주의 단계를 고려하면서 김대중과 이론적 접점을 이루고 있다. 설사 김대중이 비록 자유주의적이 색채가 있었을지라도 통일전선적 인민민주주의 단계 내에 포섭된 자유주의로서 집권기의 자유주의와는 색채가 많이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본래 김대중은 여운형 계열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한국 정치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유주의자로 스스로를 재편해나간 정치인이다. 이것을 반공주의에 대한 자기검열로만 해석하는 것도 오류이고,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물이라 해석하는 것도 오류라 본다. 김대중이 민족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여운형계 정치인에서 출발해 어떻게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조로 점차 변모해갔는지를 추적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민족주의의 황혼을 예비한 최후의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거대한 면모가 더 잘 드러난다고 본다.
근데 뭐.. 김대중을 각잡고 연구한 게 아니라 전집 몇 개 읽어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더많은 저작을 내주시길 바라며 많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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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om Chang Kang
    여운형과 김대중
    인간적 매력과 국제적 시야를 갖춘
    한국 현대 정치의 첫 거인과 마지막 거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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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민석
      여운형이 거인인 건 맞지만 과연 실무적으로도 그랬을지.. 별명이 은도끼였다지요.. 보기는 좋은데 막상 쓸 데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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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h
  • 장신기
    손민석선생님, 제 책을 읽어주시고 이렇게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의견주신 내용에 대해서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제 책이 김대중 관련 주요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두었고 그렇다보니 한참 작업을 하고 나니깐 너무 양이 방대해져서 전체적으로 줄여야했고 그와 동시에 부분별 균형도 고려해야 해서 대중경제론 관련 부분에서도 일부 반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쪽에는 좀 약해서 같은 양을 적으려고 해도 더 많은 학습이 필요했었을 것이라고 결과적으론 제게 다행(?)이기는 했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와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니 2공화국 장면 정권 시절 주요 인사들의 경제관을 경세사적 관점에서 정리한 글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앞의 문제제기 정도만 읽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보려고 했다가 위에서 설명드린대로 양을 조절해야 해서 더 파고들진 않았었는데요. 전 그글을 보고 김대중의 경제관이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추정을 했었습니다. 민주당 신파는 관료들이 많았고 특히 친미적 성향이 두드러졌으니깐요. 김대중의 외교관도 보면 김대중이 해방공간 시절 좌우합작노선 + 신파의 친미적 성향 두가지가 잘 조화를 이룬 것에서 보듯 경제관도 그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김대중이 1950년대에 쓴 여러 글에는 그의 경제관을 알 수 있는 글도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55년 사상계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입니다. 이런 글들을 보면 김대중은 경제개발에 있어 국가의 역할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만 정경유착 및 관권통제 등이 시장경제발전을 저해시키고 불평등을 강화시킨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민주당 신파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외국자본에 대해서는 열린 자세 + 능동적 수용을 통한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현채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책에도 썼지만 1971년 김대중씨 대중경제 100문 100답의 경우 박현채 등 당시 반박정희 입장에 따라 김대중과 결합했던 지식인들이 작성한 책입니다. 김대중은 50-60년대 여러 글과 연설 등에서 그의 경제관을 알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박현채 등도 그것을 감안했는지 이 책은 실제 김대중 경제관과 실제 박현채 경제관이 어정쩡하게 믹스된 면이 있습니다. 근데 50-60년대 김대중 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고 그리고 김대중에 대한 박현채 영향력이 강했다고 인식한 진보 경제학자들이 훗날 김대중의 경제관을 비판하려는 입장에서 그와 같은 전제를 했었던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구요.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시한번 제 책을 읽어주시고 여러의견 주신 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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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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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민석
      아닙니다. 좋은 책에서 많이 배울 기회가 있어 제가 감사드리죠. 김대중에 대한 좋은 연구서가 필요한 참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위에서 드린 말씀을 약간만 보족하자면 선생님께서는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맥락에서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위치시키다보니 대중경제론의 핵심이자 그것이 구현하고자 하는 기본 목적을 "복지"에 두고 계신데 저는 그것은 물론 중요한 맥락이고, 이 책에서 대중경제론을 다루는 부분이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온전히 분석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그 기원적 탐구를 행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소급해서 독해하는 것 자체에 동의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역시나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과의 대결 속에서 나온 내포적 공업화 전략으로 보아야 하며, 복지는 그 내포적 공업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공업화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독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부분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김대중이 1960~70년대에 대중경제론으로 수렴되는 경제적 지향을 제시한 맥락과 1998년 집권 이후의 경제 상황에서의 그의 지향점을 별다른 구별 없이 등치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고 봅니다.
      예컨대 저는 김대중의 1960~70년대 수출주의와의 대결 혹은 비판은 외자도입에 기초한 수출주의, 즉 한미일 삼각안보 - 무역체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도출된 거시적 관점이었다면 1998년 이후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론은 기존의 삼각무역구조가 해체되는 상황 속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 등을 꾀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국제분업관계의 재구성이라는 거시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큰 질적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전자가 한국 경제가 미일 중심의 세계시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한 입장이라면, 후자는 한국 경제가 놓인 국제분업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고민한 입장인 것이라 봐요. 이 맥락 위에서 보아야 남북관계개선뿐만 아니라 동북아공동체론에 대한 선생님의 강조도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봅니다.
      경제학사의 맥락에서도 1950년대 이후의 후진국 개발론의 입장을 좀더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마 보신 게 박태균 선생이 정리하신 1950년대 경제개발론 연구들 같은데 중요한 연구임은 분명하지만 이 일련의 연구들은 말씀하신 정치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된 것이기 때문에 정치사, 혹은 정책사적 맥락의 성격이 강합니다. 국제적으로나 한국의 경제학 수준에서나 당대의 후진국 개발론은 라울 프레비쉬(Raul Prebisch)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에서 도출된 넓은 의미의 수입대체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박현채 등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민족경제론자들까지도 외자도입이나 시장경제의 활용을 거부하는 이는 없습니다. 수입대체화와 수출주도형 간의 차이를 내자동원 대 외자동원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여 보는 것은 김일영, 이영훈 등의 보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김일영은 이 맥락에서 김대중의 정책이 무책임한 이상론에 불과했으며 그의 낙선이 한국 경제의 차원에서는 축복이었다는 식으로 말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비판하시는 김대중=신자유주의론을 주장하는 진보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뉴라이트 식의 논리로 넘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진영의 김대중=신자유주의론에 대한 핵심적 반론은 당대의 한국 경제가 김대중이 비판했던 것과 같은 관치경제, 권위주의적인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의 폐해로 외환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자유화 하는 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자유화와 구조개선 과정 속에서 한국 경제가 고도화 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당대의 상황에서 관치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자유화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너무 의식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봅니다.
      반대로 저는 김대중과 박현채는 신자유주의론과 내자동원형 경제개발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을 논파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의 핵심적 논지는 외자도입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김대중이 경부고속도로 반대를 위해 건설현장에서 누웠다는 식의 거짓이 퍼지는 것처럼 박현채의 주장도 그런 식으로 곡해되고는 하는데요, 박현채의 주장의 핵심은 한국경제가 "외국자본의 재생산"의 한 부분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국내의 수요, 민중의 요구 등이 아니라 외국 자본의 축적욕망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수불가결했다고 인식하는 지점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김대중의 민주주의론과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민족자본, 한국인의 자본에 기초해서 경제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경제개발의 성과가 민주주의를 통해 향유되지 못하고 외국 자본의 재생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는데 김대중과 박현채의 박정희 비판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봅니다. 즉 만약 김대중의 입장을 1960~70년대로 소급할 수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긴밀한 연결이야말로 경제개발의 참뜻을 구현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김대중의 복지국가론을 단순히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선취한 것으로만 보기 어렵게 합니다. 김대중의 복지국가론은 단순히 생산적 복지론을 넘어서서 민주주의야말로 민중의 욕구를 드러내는, 경제개발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적 발전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이 시장경제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김대중이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지, 김대중이 단순히 한국형 복지국가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그의 독창성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독창성의 차원에서 박현채가 초기에 기여한 지점이 크다는 것 또한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한테 문자 가르친다고 김대중 연구자이신 선생님께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게 건방지지만 읽고 느낀 바가 많이 이리 길게 적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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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신기
      손민석 우선 이렇게 상세한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고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경제사 관련 내용은 선생님께서 훨씬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의견을 드리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네요. 우선 상세한 댓글을 남겨주신 것에 대한 에의 차원에서 말씀드리구요, 남겨주신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다시 고민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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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민석
      장신기 아유, 아닙니다. 저보다 선생님께서 훨씬 많이 아실텐데요. 제가 많이 배웁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신 것도 있지만 일종의 김대중에 관한 백과사전식 책이라 필요한 부분만 쏙쏙 골라 볼 수 있어 더 편리합니다. 핸드북과 같은 편리함과 내용의 풍부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읽어보니 편집하신 김대중전집을 꼭 구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도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연구를 더 많이 내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은 별 게 아니니ㅠ 독자의 소감정도로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ang-nam 코로나 이후의 한국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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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nam Oh · 
코로나 이후의 한국 종교


오늘 오후 한국종교학회 추계대회 Zoom 모임에서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회의 전체 주제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한국종교>라는 것이어서, 주제에 따라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의 일단을 펼쳤습니다.  30분 정도 이야기한 것인데 중요 내용을 간략하게 추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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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1.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탈종교현상이 두드러진다.  (한국 비종교인이 60%)
2. 탈종교화 현상 중 특징적인 것은 젊은이들과 교육수준이 높은 이들 사이에서 종교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
3. 이런 탈종교화 현상이 코로나 사태로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종교에 더욱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4. 코로나 이후의 종교적 변화 네 가지를 들면 1) 사상적 변화, 2) 윤리적 변화, 3) 종교아닌 종교의 등장, 4) 종교의 심층화

I. 사상적 변화

1. 기복 신앙이 줄어들 것이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신이라든가 기타 초자연적인 힘에 매달려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인과응보 사상이 힘을 잃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는다.  잘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코로나에 걸릴 확률은 똑 같다.
인과응보 사상이 희박해지면 사후 상벌 사상도 흔들릴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극락/지옥 같은 불교의 가르침을 “넘어야 할 대상”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도 마커스 보그 같은 신학자는 “천국/지옥 기독교”는 인습종교에서나 주장하던 것으로 새로 등장하는 기독교에서는 “변화(transformation)”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

3. 이런 사상적 변화는 자연스럽게 신관(神觀)의 변화를 가져온다.  선한 신이 어찌 이런 병이 창궐하도록 하느냐, 왜 자기를 믿고 찬양하기 위해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코로나에 더 걸리도록하느냐 하는 등의 의문.  결국 종래까지의 유신론은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demise of theism)”.  유신론 대신 신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 더욱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절대적인 존재의 내재(內在)에 눈을 돌려 내 속에 있는 신성, 불성, 인성, 도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II. 윤리적 변화

1.  코로나 바이러스의 근본 원인이 자연 파괴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는 신의 명령을 편리한대로 믿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이라 보기에 이제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Jeremy Rifkin이 지적한 것처럼 “보호하고 보살피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생명경외”를 외쳤지만 동학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 경천, 경인과 함께 경물(敬物)을 가르친다.  동식물과 무생물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가르침은 오늘 절실히 요청되는 생각.

2. 비대면 사회가 되면서 교회나 성당이나 사찰에 함께 모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  이런 것을 계기로 기계적으로 정해진 형식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종교 의식에 참여하던 것을 일단 중지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이런 의식이나 행동양식이 무엇을 뜻하는가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성직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어느 특정 정치집단을 옹호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독립적 사고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III. 종교아닌 종교

1.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21세기에 바람직한 정신적 자세는 전통 종교에서 떠나 우주에 편만한 신비에 경탄하고 경외심을 갖는 것이라 하고 이를 “Aweism(경외주의)”라고 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Aha!를 연발하는 Ahaism이라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2. 이것이 “종교아닌 종교”라고 했지만 사실 이런 것이 어느 의미에서 진정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자가 아인슈타인.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감정은 신비적 감정이다.  여기에 모든 예술과 참 과학의 씨앗이 들어 있다.  이런 느낌을 모르는 사람, 경탄할 줄 모르고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이런 느낌이 바로 참된 종교적 정서의 핵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나 스스로를 심오한 종교적 인간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IV. 심층을 찾아

1.  많은 사람들이 종래까지의 재래 종교에서 떠나 심층 종교에서 참된 의미의 종교적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 – 전에 많이 논의했기에 생략)
2. 심층을 찾으면 1) 나 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이분법적 배타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다.  3) 문자주의에서 해방됨으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과 평화가 가능해진다.

나가면서

 탈종교 현상이라 했지만 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종류의 종교가 없어지고 어느 종류의 종교가 새로 대두되는가 하는 문제.  없어지는 종교는 표층종교, 등장하는 종교는 심층종교. (지금은 IQ(지능지수)나 EQ(감성지수)만이 아니라 SQ(영성지수)를 논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이렇게 심층종교로 심화되는 과정이 더욱 신속해지고,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깊이가 줄 수 있는 평화와 시원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으로 야기되는 문제가 많지만 그 때문에 사랑과 자비가 더욱 편만한 사회가 앞당겨진다면 그야말로 코로나 팬데믹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가져다 줄 한 가지 축복일 수 있다는 예상 반, 기대반으로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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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omments
Gokin Moo-Young
옮겨두고 찬찬히 다시 보겠습니다.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12/17

Gertrude More - Wikipedia 영원읯 철학

Gertrude More - Wikipedia

Gertrud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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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e Gertrude More.

Dame Gertrude More (born as Helen More; 25 March 1606 - 17 August 1633) was a nun of the English Benedictine Congregation, a writer and chief founder of the abbey at Cambrai which became Stanbrook Abbey.

Life[edit]

More was born in Low Leyton in Essex. Her father, Cresacre More, was great-grandson of Thomas More;[1] her mother, Elizabeth Gage, was sister of Sir John Gage, 1st Baronet of FirleSussexLord Chamberlain to Queen Mary.[2] Her mother died in 1611 and Helen's father, who had trained to be a monk,[3] became responsible for her care and education. Dom Benet Jones, a Benedictine monk, encouraged her to join his projected religious foundation, Our Lady of Comfort, in Cambrai. She was the first of nine postulants admitted to the order on 31 December 1623. Helen More came under the prescriptive influence of the Dominican Augustine Baker and took the religious name of Gertrude.[1] Catherine Gascoigne, one of her peers, was chosen ahead of her by the authorities in Rome as abbess in 1629 because she was older.[2] Gascoigne was more welcoming of Baker's advice. Sister More opposed Baker's approach but eventually gave into his ways - which included writing good books.[1]

Her writing was heavily influenced by the christian mystics such as Julian of Norwich and Teresa of Avila and other spiritual writers[4] and she contributed to the effort to publish their work.[5][6]

The row at Cumbrai continued and Baker was recalled to Douai. Before the row was settled Gertrude died at Cambrai, from smallpox, aged 27.[1]

Posthumous[edit]

Some papers found after her death and arranged by Father Baker, were afterwards published in two separate works: one entitled The Holy Practices of a Divine Lover, or the Sainctly Ideot's Devotions (Paris, 1657); the other, Confessiones Amantis, or Spiritual Exercises, or Ideot's Devotions, to which was prefixed her Apology, for herself and for her spiritual guide (Paris, 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