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4

알라딘: [전자책] 사서삼경을 읽다

알라딘: [전자책] 사서삼경을 읽다



[eBook] 사서삼경을 읽다
김경일 (지은이)바다출판사201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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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7,680원

7.7 100자평(3)리뷰(4)
제공 파일 : ePub(11.16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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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421쪽
책소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쓴 김경일 교수가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 해석에 도전했다. 기원전 500년에 만들어진 <논어>를 비롯해 약 30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고대 텍스트들을 중국 저잣거리에서 떠돌던 입말식 해석으로 새롭게 빚어냈다.

BC 1111년 주나라가 역사에 정식으로 등장한 이후, 동양인들은 <논어>, <맹자>, 그리고 <주역> 속의 세계를 동경했고, <중용>과 <대학> 속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걸었다. 또, <시경>과 <서경>을 삶의 바탕으로 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늘 날 아시아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이 된 것이다.

김경일 교수는 유교 중심의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고대 중국에서 쓰여진 사서삼경을 '동양의 바이블'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삐딱하게 보기'와 '겸허히 인정하기'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드러난다. 또, 각 저서에 대해 의견도 통일되어 있다기 보다는 뚜렷히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많다.

이 책은 1997년에 출간된 <한 권으로 읽는 사서삼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서삼경 중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려는 의도로, 몇몇 부분은 새롭게 집어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하는 등 전체를 다시 매만졌다. 또, 한자 원문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글로 독음을 달았고, 어려운 글자들의 해석 역시 실었다.


목차


머리말 - 느긋한 글읽기

논어를 읽다
공자, 자기를 말하다 / 공자의 제자들, 그들은 패러디를 꿈꾸었다 / 골라 먹는 지혜 / 여자를 오해하면 / 아버지의 힘 / 부유한 가난 / 입맞춤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 맞춤 / 우리는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仁'이란 다름 아닌 친구를 만드는 법 / 그래도 방법은 있을 텐데 / 공자에게 EQ를 배우다 / 말을 줄이되, 피하지는 말라 / 막힘을 여는 지혜의 열쇠 / 잃어버린 교과서

맹자를 읽다
집을 나서야 여행은 시작되는데 / 신념이 아름다운 건 실패가 있기 때문이고 / 맹자와 마틴 루터 킹 / 넘어져야 일어나는 법을 배울 수 있지 / 당신은 착한 사람인가요? / 맹자식 외국어 학습법 / 여론조사 할 필요 없지! / 왕도정치 / 교육 없이 발전 없다 / 닭을 훔치면 안 되는 이유 / 인재를 키우는 재미

중용을 읽다
동양의 EQ / 둥근 지혜 / 성공하는 지도자의 아홉 가지 비결 / 사고를 잘 치는 세 가직 유형 / 길 떠나는 이유 / 마음대로 하는 마음 / 강한 자와 약한 자 / 학문의 길 / 판단 중지 / 내가 바로 이상형

대학을 읽다
마음을 찾아가는 길 /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세수와 깨달음 / 작은 관찰의 아름다움 / 자리 인생 / 사람을 읽어라! / 민심은 변심

시경을 읽다
젖은 글씨로 쓴 시 / 뻐꾸기는 뻐꾹뻐꾹 울지 않고요 / 나는 잣나무배, 너는 종이배 / 못 볼 걸 보았으니 / 만날 수 없기에 그려봅니다 / 주나라에도 압구정은 있었고 / 신중현과 박정희, 주자와 신혼부부 / 귀뚜라미와 장구벌레, 그리고 인생 / 누가 더 행복한가요? / 썰렁한 노래 모음 Ⅰ / 썰렁한 노래 모음 Ⅱ

서경을 읽다
임금님, 새털을 세 보셨나요? / 정치는 물 다루기 / 혁명의 씨앗 / 노 젓는 지도자 / 미스터리 인물, 기자 /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고 누가 처음 말했을까? / 동양 최초의 법 / 술 한 잔이 망친 나라 / 감동으로 이끄는 휴먼 리더 / 법을 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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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경일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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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중문연구소에서 세계적인 고문자학자 쉬탄훼이 박사로부터 고대문자와 갑골문을 배웠다. 한국인 최초로 갑골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워싱턴대학에서 동양의 고대문자와 문명의 연원에 대한 공부를 계속 이어가는 등 30여 년간 동아시아의 고문자와 동양사상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다. 《갑골문 이야기》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작 : <사서삼경을 읽다>,<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동양사상>,<유교 탄생의 비밀> … 총 30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7.7



너무 방대한 문헌을 다루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summit 2010-11-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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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사서삼경을 가장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의 글. 단점을 꼽자면, 번역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너무 덧붙였다는 거.
엉가스터디 2014-05-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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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자넨 안돼. 이건 너무 어렵다고"




이 책의 저자 서문쯤 되는 '느긋한 글읽기'에 보면 [서경]을 박사학위 논논문으로 쓰려고 했는데 지도교수인 쉬탄훼이 박사가 다음과 같이 만류했다고 한다

"김경일, 자넨 안돼. 이건 너무 어렵다고"
김경일 교수는 정말 제대로된 지도교수를 만난 듯 하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봤을 때 저자가 논어는 한번 읽어 봤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논어를 제대로 한번이라도 읽어 봤다면 절대로 그런 책은 쓰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공자를 죽여야만 했는 지를 대충 알게 됐다.
김경일 교수는 그가 강조하듯 우리나라 최초의 갑골문 박사일지는 모르겠지만, 동양의 사상에 대해서는 그리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경일 교수는 배타적인 기독교신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김교수의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배타적인 자기 아집만으로 똘똘 뭉친 기독교 신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기독교신자 모두를 폄하하는 얘기는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삼키기 좋은 것들만 '골라 먹고' '자신만의 위액'으로 소화해 버린 배타적인 기독교신자들이 저지른 실수를 이 책에서는 그대로 범하고 있다.

삼키기 좋은 것들만 '골라 먹고' '자신만의 위액'으로 소화해 버린다고 얘기해 버렸으니 이 책에 비판을 가할 처지는 못된다. 우물에 독뿌리기식 오류를 범하게 되면 비판을 하고싶은 의욕까지 상실하게 된다. 내 맘대로 해석했으니 너희들은 상관 마라는 식의 발언을 책의 첫머리에 버젓이 해놓고 있으니 비판을 해 봐야 소용도 없다.

그래도 한가지만은 지적해 보겠다. 이 부분이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들 중에 비교적 제일 앞쪽에 나오기 때문에 선택하게 됐다.

28페이지에 [主忠信]이란 말이 나온다.
앞뒤 얘기는 무수한 설들이 존재하니 자신만의 위액으로 소화를 한들 무슨 할말이 있겠냐만은 [忠]을 충성으로, [信]을 무슨 정치가 끼리의 절대 복종 계약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부부유별]을 남여차별적 언사로 이해하는 웃지 못할 오해보다 더욱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 참고로 김경일 교수의 전작에서 말하듯, 유교가 남녀차별을 부추겼다고 하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건 한참 뒤에 삼키기 좋은 것들만 '골라 먹고' '자신만의 위액'으로 소화해 버린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곡해일 뿐이다.

[충성]이란 말은 유교 사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다. 유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곡해해서 근대에나 생겨난 말을 버젓이 [忠]을 해석하는데 써버리는 것을 보면 이건 가장 기본적인 이해도 갖고있지 않다고밖에 볼 수 없다.

[忠]은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마음(心)의 중심(中)을 하나로 하여 절대로 흔들림이 없음을 말한다. 절대로 임금에게 이 한몸 다바쳐가 아니다. 임금이 백성에게 못을 하면 자신의 념에 따라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게 해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忠]이다. 이것은 서양의 사상에 기초를 둔 [충성]의 개념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동양에는 義는 있을 지언정 [충성]은 없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충성]을 찾을 수 있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 역사에서는 충성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관우와 장비도 유비에게 충성을 맹세했는가? 유비에게 의를 지켰을 지언정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다. [도원 결의]지 [도원 충성]은 결코 아니다.

공자 이후, 천년도 몇번씩이나 넘긴 시절에 나온 말을, 그것도 공자의 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말을 공자의 생각인양 얘기하고 있으니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忠, 忠恕(충서),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學을 책펴놓고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읽은 사서삼경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겠다.

* 學은 책을 펴놓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논어 첫머리의 [학이시습지....]란 구절을 우리는 초등학교때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이라는 식으로 우리의 교육실정에 적합한 해석으로 배웠지만, 제대로 된 해석은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맞춰 몸소 실천하여 내것으로 만들면"이 된다. 공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무의미한 암기를 반복하는게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한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호흡법을 배워 뒀는데 물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여 인공호흡으로 죽게된 사람을 살려 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실전에서 써먹어 봤으니 제대로 내것으로 익히게 돼 기쁘고, 사람을 살렸으니 좋은일을 해 기쁘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공자가 즐겁다고 한 말은 후자의 의미이지 전자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김경일 교수는 오직 전자의 의미로만 學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공자 사후 수백년이 지난 후에, 정치적 목적으로 본질은 빼고 껍데기만 남겨둔 정치사상을 유학으로 착각하는 사람, 그것도 동양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서양의 기독교적인 사관을 철저하게 세뇌된 사람이 읽은 사서삼경일 뿐이다. 삼키기 좋은 것들만 '골라 먹고'자신만의 위액으로 소화해 버렸다고 버젓이 얘기하고 있으니 토를 달기도 민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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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word 2004-04-19 공감(3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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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이 멀었다.






'사서삼경을 읽다'에서 저자는 사서삼경은 인간의 사유가 닿을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동시에 이들 책이 동양에 준 영향은 역사의 관성이 되어 그 역사는 그 관성이 파 놓은 정신의 골짜기를 따라 오늘날까지 흘러내려 와 있고 또 내일로 흘러가려 한다고 했다. 또한 고전들이 도덕과 윤리를 담는 그릇만은 아니며 희로애락 등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고 담아낸 일기로 볼 수도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난 글머리에 서술된 저자의 생각에 무척 동감하며 이 책을 선택했다.




사서삼경은 동양문화의 큰 줄기로 시대 저편에 서성이는 방관자가 아니라 여전히 문화적 당사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신랄하게 한문을 푼다.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 재기발랄한 시선으로 시원스럽게 글을 전개한다. 그 덕에 글은 술술 읽힌다. 그리고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애드립은 실소(?)를 금치 못 하게 한다.




이 작가, 아무리 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흥분의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내용의 반은 공자 비판하기, 공자 파헤쳐 늘어놓고는 좀 잔인하다 싶을난도질하고 비판을 가한다. 사실 글 앞 부분, 공자사상에 대한 비판 - 책 내용의 삼분의 일이상은 혼자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 글자 한 글자 한 글자에 딴지를 건다. 이 부분에서 심한 반감을 느끼며 책을 덮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기도 했는데 작가의 반감은 나에게 까지 전해져.. 작가님 작가님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시나 제가 한번 끝까지 지켜보지요 하는 심정으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책을 읽었다.




물론 우리 문화의 병폐를 유교의 가치체계에서 찾았던 모습과는 다른 인식체계, 이데올로기로서 공자를 버리는 것과 옛 기록으로서의 고전을 가치중립적으로 읽어내는 일은 전혀 별개의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며 더불어 공부는 자유스럽게 하지만 검증은 공개 상태에서 받고 싶다며 ꡐ삐딱하게 보기ꡑ와 ꡐ겸허히 인정하기ꡑ라는 두 종류의 시선을 통해 사서삼경을 설명하려는 그 만의 자유 시선을 모르는 것 아니다.




하지만, 짚고 갈 건 짚고 넘어 가자.




비판,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고집 스런 작가는 비판의 의미를 잠시 했는지 공자죽이기의 흥분을 아직 죽이지 못했는지 동양 사회를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적 판가름으로 이끈 것은 공자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굉장히 편파적이다. 그에 비해 맹자에 대한 시선은 너무 심하게 관대하다. 나 역시 행동학자인 맹자의 날카롭게 후벼 파는 강력하고도 직설적인 화법으로 세상을 비틀어 꼬집은 사람 이라는 거 그 비틀림, 그 왜곡의 시선에서 짚어보는 진정한 의미의 시선에 강력히 동의하지만 작가는 분명 균형을, 중심을 잃었다. 공자를 비판하고 맹자를 살리고 싶었으면 사서삼경을 읽다를 쓸 것이 아니라 공자를 죽이고 맹자를 살리자를 썼어야 했다. 균형을 잃는 건 진정한 비판자의 태도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용 부분에서 작가는 중용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아주 맛 배기만 살짝 보여주긴 하지만.....




물론 말 안에 말을 다 담을 수 없고 글 안에 글을 다 담을 수 없다.

혹시 내 글을 작가가 본다면 자신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있다고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공자도 이 책을 보면 똑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의 글속에 녹아있는 말투와 자신의 이야기를 미루어 보아 그 작가는 자기 자신이 시대의 쾌도난마 맹자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형식과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캐쥬얼 복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타난 누군가에게 박수를 보내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이렇게 외친다. 왜 교수들이 넥타이에 정장을 해야하는가 !! ....하하하

과연 그게 옳고 그른게 있을까 ??

거기에 과연 원칙이라는 게 적용되는 것 일까 ?

거기에서 자유를 운운할 꺼리가 있는 것 일까 ?



내가 볼 때는 없다.



진정한 자유주의는 진정한 원칙주의의 이해로부터 나오고 통통 튀는 엇박자도 정박자로부터 나온다. 뜻대로 말하는 것 도 좋고 뜻대로 행동하는 것도 좋다. 공을 무시하면 사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판도 중용의 도를 지나면 설득력을 잃는다. 더불어 그가 글 속에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작가도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도 남 욕할 거 하나도 없다.



「대학」「논어」「맹자」「중용」등 사서(四書)와 「시경」「서경」「주역」을 일컫는 삼경(三經)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그의 의도도 좋고 시선도 좋다. 현대적인 뜻풀이와 구어체 강독도 쉬워 좋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 지나쳤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그의 입심에 휘둘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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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0-20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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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 책




이틀 전에 알베르트 망구엘의 <나의 그림 읽기>(세종서적)과 김경일의 <사서삼경을 읽다>(바다출판사)를 사서 기분내키는 데로 번갈아가며 읽고 있다. 이 책들을 그렇게 읽어도 괜찮은 책들이다. 책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구성상 독립된 부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두 책 모두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은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책이다. 한 쪽마다 새로운 정보와 참신성이 넘쳐난다. 게다가 그림을 소개하는 책이니 흥미도 만점이다. 이 책은 사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나의 <예술 강좌>에 보탬이 될까 해서 산 책인데 굳이 그러한 실용적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야만했던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경일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책제목으로 한 때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교수이다. 이번의 <사서삼경을 읽다>는 그의 이전 책과 같이 대중적인 문체로 쓰여진 것인데, 고전의 원문해석 역시 고리타분하지 않고 참신하다. 예를 들어 <논어>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를 평범하게 번역하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히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가 되겠지만, 저자는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미련을 떨게 되고, 생각만 키운 채 배우지를 않으면 사고 치기 십상이다.”로 번역해 놓는다. 이러한 번역의 문제는 저자가 그저 자신을 튀게하기 위하여 고안해 놓은 수사학이 아니라 당시 문화의 흐름을 중시하는 이른바 ‘추체험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도처에 이러한 해석이 널려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통쾌함을 느낀다. 게다가 ‘사서삼경’이라는 경서를 현실의 적실성 여부에 맞춰 비판하는 모습에서 신뢰를 보낸다.



오늘날 고전의 문제는 해석의 진위 여부도 중요하겠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자라는 세대 누구도 고전을 읽지 않다는 데 있다. 김경일의 책을 청소년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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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뚱 2004-03-10 공감(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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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을 맛보다




우선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머릿속에 남아있던 오래된 질문에 깔끔한 답을 주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사서삼경 중 알맹이부분을 당시 사회배경과 함께 유쾌한 현대어로 바꿔주신 노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 글은 한번 읽고 쓰지만 앞으로 몇번 더 읽어야겠다. 아직 소화가 안된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운명적인 몇개의 문장을 만났을 때 참 기분 좋다. 그것들을 삶에 녹여 요리한다면 더 좋구. 필요할 때 답을 주는 책을 만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개인적으로 울림이 있던 부분은 '작은 관찰의 아름다움', '동양 최초의 법', '법을 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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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 2004-03-1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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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김흡영

알라딘: 왕양명과 칼 바르트
왕양명과 칼 바르트 -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김흡영 (지은이)예문서원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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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3,000원

368쪽
책소개
저자의 영문서 Wang Yang-ming and Karl Barth: A Confucian-Christian Dialogue를 번역하여 출판한 것으로, 저자의 신학 연구의 시작이자 그동안 주장해 온 ‘도의 신학’의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왕양명과 칼 바르트를 통해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16세기 중국의 주요 유학자이자 장군이며 행정가였던 왕양명은 지행합일론을 주창하며 실천한 독창적인 사상가요, 유교사상사의 위대한 개혁자이다. 20세기 스위스의 신학 교수였던 칼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래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양명과 바르트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조우에 있어 역사적 관계성과 구성적 중요성이 있으며, 그들은 각 전통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들로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한 적절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들의 공통 관심인 인간화 또는 어떻게 참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그들의 교의(신유교의 수신론과 그리스도교의 성화론)에 초점을 맞춘다.


목차


펴내는 말
서론
제1부 유교 패러다임: 왕양명 유학의 수신론
제1장 서설 / 제2장 근본-메타포: 성誠 / 제3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4장 인간화: 치양지로서의 수신 / 요약
제2부 그리스도교 패러다임: 칼 바르트 신학의 성화론
제5장 서설 / 제6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7장 인간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의 성화 / 제8장 근본-메타포: 사랑(Agape) / 요약
제3부 유교-그리스도교의 대화
제9장 대화 방법론 / 제10장 만남의 양상들 / 제11장 인간성 패러다임 / 제12장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결론: 새로운 우주적 인간성의 도를 추구하기 위한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
부록: 왕양명
후기: 새로운 우주적 인간성의 도道
참고문헌 / 김흡영 교수의 주요 출판 목록 / 찾아보기



책속에서


첫문장
서양 근대문명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이래, 유교는 멸시되고, 망각되고, 무시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저자 및 역자소개
김흡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홈페이지: http://www.heupkim.com

▶ 학력
- 1987-1992, Graduate Theological Union, 철학 박사(Ph.D)
- 1986-1987,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신학 석사(Th.M)
- 1984-1986,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교역학 석사(M.Div)
- 1967-197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항공공학, 학사(BSE)
- 1964-1967, 경기고등학교

▶ 현... 더보기


최근작 : <왕양명과 칼 바르트>,<가온 찍기>,<도의 신학 2> … 총 6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최근 세계 신학계는 동양종교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원만한 관계를 추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신학적 시도를 해 오고 있다. 그리스도교만이 최고의 종교라고 믿었던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동양종교전통의 가치와 깊이를 인식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이러한 시도는 종교 간의 대화를 필두로 여러 이름을 가지며 진화되어 왔다. 토착화신학, 문화신학, 종교신학 등으로부터 출발해,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비교신학이 기세를 잡는가 하더니, 최근에는 종교 간의 담을 헐고 신학하자는 담 없는 신학 또는 초종교적 신학이라는 명칭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와 권위주의에 신물이 난 열린 서구인들에게도 신(God)을 언급하지 않고도 할 말을 하는 유교사상이 상당히 매력적인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의 영문서 Wang Yang-ming and Karl Barth: A Confucian-Christian Dialogue를 번역하여 출판한 것으로, 저자의 신학 연구의 시작이자 그동안 주장해 온 ‘도道의 신학’(theo-dao)의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왕양명王陽明과 칼 바르트(Karl Barth)를 통해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16세기 중국의 주요 유학자이자 장군이며 행정가였던 왕양명은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주창하며 실천한 독창적인 사상가요, 유교사상사의 위대한 개혁자이다. 20세기 스위스의 신학 교수였던 칼 바르트는 종교개혁 이래 서구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양명과 바르트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조우에 있어 역사적 관계성과 구성적 중요성이 있으며, 그들은 각 전통들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들로서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위한 적절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들의 공통 관심인 인간화 또는 어떻게 참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그들의 교의(신유교의 수신론과 그리스도교의 성화론)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다음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한다. 첫째, 유교와 그리스도교 교의의 해석: 유학의 수신론과 신학의 성화론을 구성한다. 둘째, 종교 간의 대화: 양명유학의 수신론과 바르트신학의 성화론에 기초하여 유교-그리스도교의 대화를 발전시킨다. 대화를 통해서 이 두 다른 종교문화 패러다임 사이에 서로 상응하는 개념들을 비교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한다. 셋째,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종교문화신학의 구성: 이러한 유교-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를 통하여 깨달은 통찰들을 기초해서 그리스도교 종교문화 구성신학을 위한 몇 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은 우리의 오랜 핵심적 전통인 유교와 이제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가교가 되어, 두 전통들이 서로를 바로 알고, 대화하고, 소통하여 우리 신학과 유학 그리고 종교문화의 발전에 일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접기

알라딘: 다석 강의 다석학회 (엮은이),류영모

알라딘: 다석 강의

다석 강의   
다석학회 (엮은이),류영모 (강의)교양인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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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1006쪽

책소개

<다석 강의> 개정판. 다석 류영모는 종로 YMCA에서 35년 동안 연경반 강의를 맡았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에서 <성경>과 <논어>를 비롯한 사서삼경, <법화경> 같은 동서양의 고전과 자신이 쓴 시조나 한시 등을 풀이하며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본질, 세계의 원리 같은 철학적인 주제부터 교육, 민주주의, 인권 같은 현실의 삶까지 두루 다루었다.

<다석 강의>가 출간되기 전까지 다석에 관한 책은 다석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였다. 다석의 제자들이 연경반 강의 기록을 간추려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속기록을 그대로 옮긴 책은 없었다. 그러다 2005년 2월 25일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고, 다석학회가 주도하여 연경반 강의 일 년 치 속기록 전문을 다듬어 2006년에 <다석 강의>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에 10년 만에 출간되는 <다석 강의> 개정판은 초판과 속기록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대조하고 확인하여 속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한자와 오.탈자를 비롯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다석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43편의 강의를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능통한 석학이자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목차
머리말

제1강 _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
제2강 _ 날마다 세 가지로 제 몸을 살피다
제3강 _ 실없는 말은 무지(無知)다
제4강 _ 못된 짓을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다
제5강 _ 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제6강 _ 온통 하나가 되는 지혜
제7강 _ 진리의 정신을 알면 끌려다니지 않는다
제8강 _ 방심(放心)이 안심(安心)이다
제9강 _ 인과율과 하늘의 법칙
제10강 _ 밝은 게 전부 빛은 아니다
제11강 _ 몽땅 놓아야 자유롭다
제12강 _ 주역의 가르침 : 팔괘(八卦)
제13강 _ 생각의 불꽃이 있어야 사람이다
제14강 _ 하늘의 섭리로 쥐덫이 마련되다
제15강 _ 얇기로는 시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제16강 _ 신비 아닌 것은 과학이 안 된다
제17강 _ 우리에게는 체(體)와 면(面)이 많다
제18강 _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다
제19강 _ 하늘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제20강 _ 대학의 가르침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제21강 _ 간디의 가르침 : 진리파지(眞理把持)
제22강 _ 허공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제23강 _ ‘빈탕 한데’의 주인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제24강 _ 인생관이 다르면 시비(是非)도 다르다
제25강 _ 상대 세계가 있는 한 대속(代贖)은 계속된다
제26강 _ 혈육의 근본은 흙이고 정신의 근본은 하늘이다
제27강 _ 삶의 참목적은 하늘에 있다
제28강 _ 말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다
제29강 _ 성령과 악령
제30강 _ 탐내고 미워하고 음란한 것, 그것이 원죄다
제31강 _ 늘 보아 좋은 상(像)
제32강 _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
제33강 _ 산다는 것은 새롭게 되는 것이다
제34강 _ 물건에 걸리지 않으면 마음은 언제나 제대로 있다
제35강 _ 영원한 사상을 가지려면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제36강 _ 우리가 보는 것은 빛깔이지 빛이 아니다
제37강 _ 속알을 밝혀야(明德)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제38강 _ 곧이(貞)여야 이웃에 이롭다
제39강 _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제40강 _ 정신이 만족하는 것은 상대 세계에 없다
제41강 _ 영(靈)을 알려면 먼저 못난 ‘나’를 깨달아야 한다
제42강 _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큰 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제43강 _ 알몸보다 얼맘으로 살다

부록
● 나의 스승 류영모 _ 김흥호
●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 _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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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 선생의 거룩한 삶과 뜻을 기리고 선생의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며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2005년 2월 25일 창립하였다. 앞으로 다석 사상 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달마다 '다석강의' 공부 모임과 강좌·특강을 개최하고, 다석낱말사전, 다석학회지, 영문판 다석사상선집 등을 펴내는 등 다석 선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일을 할 계획이다.
최근작 : <다석 강의> … 총 2종 (모두보기)
류영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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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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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참말씀을 알고 참말씀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가슴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사람입니다.
자꾸 일어나는 불꽃이 있습니다. 자꾸 이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참을 아는 사람은 말을 뱉고 싶어 합니다.”(류영모)

일평생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석학 류영모,
동서회통, 일원다교의 사상을 생생한 육성으로 듣는다!

함석헌과 김흥호 등 20세기 한국 기독교 사상계를 이끈 거인들의 스승이자,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35년 동안 이어진 종로 YMCA 연경반(硏經班) 강의에서 다석은 스스로 지은 시조와 한시, 유교 경전, 성경, 불경의 경구를 직접 모조지에 써서 칠판에 붙여놓고 강의를 하였다. 다석의 강의는 예수와 붓다와 공자, 삶과 죽음, 절대 세계와 상대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을 넘나들었다.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이 어우러지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고, 때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석 강의》는 제자들이 속기록으로 남긴 43편의 강의를 다듬어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다석의 철학과 사상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석 류영모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종로 YMCA에서 35년(1928년~1963년) 동안 연경반 강의를 맡았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에서 《성경》과 《논어》를 비롯한 사서삼경, 《법화경》 같은 동서양의 고전과 자신이 쓴 시조나 한시 등을 풀이하며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본질, 세계의 원리 같은 철학적인 주제부터 교육, 민주주의, 인권 같은 현실의 삶까지 두루 다루었다.
다석은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석 강의》가 출간되기 전까지 다석에 관한 책은 다석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이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였다. 다석의 제자들이 연경반 강의 기록을 간추려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속기록을 그대로 옮긴 책은 없었다. 그러다 2005년 2월 25일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고, 다석학회가 주도하여 연경반 강의 일 년 치 속기록(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 전문을 다듬어 2006년에 《다석 강의》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에 10년 만에 출간되는 《다석 강의》 개정판은 초판과 속기록 원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대조하고 확인하여 속기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한자와 오.탈자를 비롯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다석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43편의 강의를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능통한 석학이자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의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한 이 책은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류영모 선생의 말숨은 빛과 힘과 숨의 구현이다. 눈을 뜨고 일어서고 날아가는 통일ㆍ독립ㆍ자유의 세계이다. 또한 선생의 세계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너무도 신비하고 오묘하여 하나로 같이 통하는 세계이지 분석하고 따지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고 실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분석하는 세계가 아니라 같이 기뻐하고 같이 즐거워하는 생명의 세계이다. _ 김흥호, ‘나의 스승 류영모’ 중에서

류영모 선생이 연경반 강의실로 쓴 건물은 넓이가 서른 평 남짓하였는데, 일자로 된 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맨바닥에 앉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앞에는 교탁이 있었고 중형 칠판도 걸려 있었다. 물론 마이크 장치는 없었다. 그러나 공간이 작고 선생의 음성이 힘차서 강의를 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강의 교재는 류영모 선생이 일기장에 적어놓은 자작 시조나 한시가 주를 이루었다. 아니면 동양 고전의 원문을 다루었다. 강의 방식은 가르칠 내용을 모조지에 손수 붓글씨로 써 와서 칠판에 붙여놓고 읽으며 설명하는 식이었다. 강의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 그리고 오랫동안 쌓은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다. 때로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하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 어떤 어려움에 놓여도 하느님 생각만 하면 기쁨이 샘솟아야 참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보여준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다. 삶은 기쁨이라고 한 선생의 말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_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YMCA 연경반 35년’ 중에서

주요 내용

“말씀을 알자는 것이 인생이고,
말씀을 듣고 끝내자는 것이 인생입니다.”
- 동서 사상의 대통합을 이룬 큰 사상가

다석 류영모는 일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스승이자 삶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으며 좇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다석은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유교가 길은 죄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공자는 덕(德)이라 하고 석가는 법(法)이라 하고 예수는 얼(靈)이라고 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름만 다를 뿐 실체는 같다는 것이다.

류영모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를 얘기한다고 해서 공자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이 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간디나 톨스토이처럼 하느님 말씀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들과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 공자, 석가, 예수, 간디, 톨스토이를 추앙하는 것입니다. 간디가 누구인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지내야 합니다. 현대 사람은 간디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제21강 간디의 가르침 : 진리파지 · 458쪽)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입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은, 종단은 절대인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긴박한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신경쇠약에 걸려서 강박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람일수록 이 강박감을 먼저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절대인 ‘하나’에서 나와서, 마침내 ‘하나’를 찾아 하나로 돌아갑니다. 대사상가나 대종교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 를 구한다는 말이요, 믿는다는 것입니다. 신선(神仙), 부처, 도의(道義)를 얻는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제32강 ‘하나’를 알기 전에는 전부가 까막눈이다 · 763, 764쪽)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름이 ‘대한나라’입니다.”
- 다석 류영모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조건

이 책에는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실정과 동서 냉전 같은 국내외 혼란한 상황에 대한 다석의 생각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연경반 강의에서 다석은 사회 병폐를 비판하곤 했으며, 특히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조건에 관해 여러 차례 강의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참 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대중이 옳은 의(義)를 분별하는 데 민주의 무게가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참으로 무게 있는 민주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의 역할을 강조했다. 국가의 지도자와 관련해서는 “(지도자가) 밑을 밝혀줄 능력이 없으면 올라가 있을 필요가 없”으며,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는 민주주의가 되더라도 잘살게 해줄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원칙이 틀어지면 허명민주(虛名民主)가 됩니다. 이름만 민주주의가 됩니다. 그러면 마귀가 참여하여 세상을 더럽힙니다. …… 이렇게 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만이 심해집니다. 자기 생각을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고, 남의 것은 보잘것없으며, 이 정도면 되었지 부끄러울 게 뭔가 하게 됩니다.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게 됩니다. 자만하고 시위(尸位)합니다. 혼자 잔뜩 부풀어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기말(世紀末)의 마귀들입니다. 이것을 가로되 세기말 현상, 곧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좋은 세상에 그따위 마귀 때문에 귀하고 중한 것을 놓치다니 말입니다. 그냥 장난(作亂)으로 망(亡)하다니 말이 됩니까?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7쪽)

인류의 역사는 밤낮 서로 싸움질하고 내려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놈을 물리치면 저놈이 들어옵니다. 소론(少論)이 승하면 노론(老論)은 기회만 보는 형국입니다. 악(惡)의 본(本)으로 서로 다투니 그 중간에서 백성만 부대끼고 못 살게 됩니다. 소위 혁명이 일어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떠들어댑니다만, 혁명이 오면 무엇합니까?
희생자는 오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중에는 개죽음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지도자 밑에서 희생하는 것은 개죽음입니다. 앞문의 호랑이를 쫓으니 뒷문에서 이리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보는 현실입니다. 봉건제도가 없어지고 민주주의가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습니까? 품앗이입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흘러가는 그 짓이 전부 서로 하는 품앗이입니다. (제24강 인생관이 다르면 시비도 다르다 · 547쪽)

“우리말에는 하늘의 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우리말과 우리글로 생각을 펼친 철학자

한학(漢學)의 대가였던 다석은 한자 한 글자에 철학 개론 한 권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자(破字)’를 하여 한자의 생성 원리를 밝히고 거기서 철학을 캐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게 되었다. 다석은 자신이 궁구한 이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서양에서 만들어진 철학 용어나 중국의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 우리 글자에 담아내고자 했다. 다석은 훈민정음 28자에 만족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소리글자인 한글이 마치 뜻글자인 양 글자 하나 하나의 뜻을 곰곰이 새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오!늘’이라고 풀이했다. 오늘 하루가 늘상, 곧 영원이라는 뜻이다. ‘글(文)’은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여기서 이렇게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 역시 죄다 쓰일 것입니다. 이 말 그대로 쓰인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이 나오면 그 말을 쓰고, 그러지 못하면 이 말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687쪽)

‘이이ㅣ수ㅣ’ … …, 예수의 ‘예’는 ㅣㅓㅣ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수’, 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힘입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한글과 뜻이 우연히도 같습니다. 우리말이 웬일인지 하느님의 계시를 필름처럼 나타내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진리가 ‘예’에,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 퍼졌는데, 우리가 사는 ‘수’가 정신에 있다는 그림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이런 글을 궤변이니 불경(不敬)이니 하겠지만,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말로 이보다 더 적절하게 나타낸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41강 영靈을 알려면 먼저 못난 ‘나’를 깨달아야 한다 · 943쪽)

“죽음 공부는 공부 중에서
마지막 공부인 동시에 참공부입니다.”
- 다석의 죽음 철학

다석은 종교의 핵심을 죽음이라고 보았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였다. 또 다석은 ‘오늘 하루살이(일일일생, 一日一生)’의 철학으로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 다석에게 목숨이란 “영혼이 잠깐 동안 이 흙덩어리(몸)에 들어와서 피게 하여주는 것”이었다.

사랑은 믿음이고, 생명을 내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 내가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인(仁)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진다는 뜻입니다. 자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은 이 살신성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죽음의 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만이 아니라 절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이고 생명은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뚜렷해지는 것은 영혼인 생명입니다. (제39강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 911쪽)

생명은 영원한 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어 온 생명을 무한 중에서 잠깐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 꿈을 꾸는 것입니다. 내일 꿈이 깨면 다 그만입니다. 꿈 깨면 다 시원합니다. 부천(富賤)의 차(差)가 없이 난(難)은 다 같습니다. 부잣집 자식이나 대통령의 양자(養子)나 난(難)은 다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해야 하고, 알았으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제29강 성령과 악령 · 700쪽)

“교육은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그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 실천적인 배움을 추구한 교육자

다석 류영모는 일평생 배움의 길을 걷고자 했으며, 정신은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다석은 훗날 연경반 강의에서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교육열은 대단한데 좋은 재목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그냥 몸뚱이를 키우는 일”만 한다고 지적했다. 공부란 본(本, 근본)을 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과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결국에는 “하느님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글자 ‘몸’에서 가로로 그어 있는 것은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죄다 모아 몸이 잔뜩 붓게 되면 앉아 있으려 해도 편히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전제로 공부를 할 바에는, 아예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을 배워 가지고 나온 학생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학교를 나와서 매이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하느님과는 융합이 되지 않습니다. 꿈꾸는 이 세상에서 꿈꾸고 지나가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이처럼 모으는 것과 매이는 것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집어치워야 마땅합니다. (제11강 몽땅 놓아야 자유롭다 · 252쪽)

종국엔 그저 껍데기(몸)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려면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합니다. 다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 뜻의 뜻,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정하려면 그칠(止) 줄을 알아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알고 어려서부터 외곬으로 운동 선수가 되겠다거나 전문 기술에만 능해보겠다는 것은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육은 그 근본을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데 두어야 합니다. 운동이나 전문 기술만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면 그것은 도둑놈의 교육입니다. (제19강 하늘의 길을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 412, 413쪽)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