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0

백승종 동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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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1otSsp1 oongMosaaamyored ·



동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1.
오늘은 "동학농민혁명기념일"입니다. 동학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 청소년들과 동학에 관하여 함께 공부하던 때가 있었어요. 여러 해 전 서울 영등포의 "하자센터"에서 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몇 차례 주섬주섬 설명을 하였지요. 그러고 나면 그때마다 한참 질의응답이 있었지요. 이제와 돌이켜 보면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2.
그때 우리가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를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시간 되시는 벗님들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잘 몰라서 대답을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한 대목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점점 많아집니다. 늙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질의응답>
질의: 현대 서울처럼 수천만 명이 모여 사는 사회는 약점은 많고 장점이 별로 없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런 말씀을 듣고, 도시와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민주화도 문제가 생기고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같다는 염려를 하게 되었어요.
응답: 맞아요. 제 생각은 그래요. 가령 미국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국가는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어렵다고 봐요. 연전에 미국의 퍼거슨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지요. 시민들의 생명과 재신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아무런 총기도 소지하지 않은 흑인 청년을 그냥 쏴서 즉사하게 만들었어요. 미국에는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요. 참고로 그 경찰은 백인이지요.
미국사회에는 아직도 인종 간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교과서에만 적혀 있는 거지요. 시민들의 삶속에 그런 이념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어요. 그래 가지고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상당수 백인들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멸시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이 없는 거죠.
그런데요. 질문자는 어쩌면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또 있을 것도 같아요.
‘교수님. 1000만 명이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데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서 새로 마을을 이뤄야한다는 뜻입니까?’
제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왕에 1000만 명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다시 어디론가 갈 수는 없으니까요. 같은 아파트, 같은 거리에 살고 있는 시민들끼리 연대하고 협동하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한 동네 또는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오가며 서로 인사도 하고요. 함께 길거리 청소도 하고요. 아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내고 함께 돌봐주는 일이 중요한 거지요. 그런데 그처럼 되려면 ‘베드(bed) 타운’은 진짜 ‘배드(bad) 타운’이라고 생각해요. 잠만 자고 다른 지역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면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가 없어요. 되도록 한 지역에서 거주하고, 일하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2000년대 초에 독일 베를린에 잠깐 살았어요. 베를린은 독일 최대 도시여서 인구가 300만 정도였던 갓 같아요. 그 베를린에서 참 재밌는 말을 들었어요. 그곳 시민들이 저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요, ‘베를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어요. ‘무슨 착각이요?’ ‘베를린은 도시가 아닙니다. 선생은 베를린시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의 달렘 마을에 와 있어요.’ 이렇게 얘길 했어요. 제게는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베를린 시민은 존재하지 않은 거죠. 베를린이라고 하는 대도시는 수백 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어요. 국제도시 베를린이 그래요. 으리으리한 명품 쇼핑거리야 물론 우리가 아는 휘황찬란한 국제도시 베를린이지요. 그 나머지는 대부분 마을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도 텃밭 농사도 짓고 그래요.
유럽의 도시에는 어디나 다 농사를 조금씩 지을 수 있는 ‘주말 농장’이 있어요. 유럽의 도시들은 우리의 서울처럼 삭막하게 거대 도시로 탈바꿈한 적이 없는 거지요.
현대 한국의 도시처럼 무미건조한 곳이 다른 대륙에는 거의 없어요. 산업화가 우리보다 100년 이상 빨랐던 서양의 도시들이 우리의 도시보다 더욱 목가적이란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아요?
저 사람들은 마을의 연합체로서의 도시에 익숙한 것 같아요. 그들은 아직도 마을공동체에서 숨 쉬며 내일을 꿈꿔요.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인 거지요. 가령 강북에 사는 사람도 아침밥 먹고 일찍 강남으로 출근하고, 퇴근시간 되면 만원 전철 속에서 시달리며 강북으로 되돌아가는 식이죠. 이는 참 잘못된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 세력은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대도시 위주로 국토를 재편성했어요.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 주변에는 잠만 자는 위성도시를 여러 개 만들었지요. 결과적으로 생활의 질이 악화되었고요. 만성적인 교통 문제, 교육 문제 등이 덩달아 생긴 것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질의: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면 멋지고 신나는 일이겠어요. 그런데요. 국가를 정치공동체라고 말하지만 실은 경제공동체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국가가 사실상 전부인 것 같아요. 이 국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느낀다면 별로 환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도대체 인간과 사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척 복잡한 것인데요. 새로운 경제공동체가 가능하다면, 그런 정체성의 바탕은 무엇이 되어야 될까요. 오늘날에는 지연도 혈연도 이미 옛말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어요.
응답: 현재로서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사회에서는 누구나 국민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해요. 대통령도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 말을 꺼내기 일쑤지요. 그러나 저는, ‘국민’이란 말은 하루빨리 폐기 처분하는 것이 좋겠다고 봐요.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국민’이라는 표현은 없는 것 같더군요. 국민, 즉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국민이라 부르는 법이 없고, ‘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죠.
알다시피 우리가 쓰는 ‘국민’이라는 용어는 따지고 보면 매우 불쾌한 과거와 직결되어 있어요. 국민이라는 말이 실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준말이라고 봐야 해요. 일본은 천황제 국가여서 ‘황국’이라고 했죠.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들이란 뜻에서 ‘황국신민’이라고 하고요. 그것을 줄여서 ‘국민’이라고 불렀고요.
과거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황국신민을 기르는 학교란 뜻이었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국민학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직 멀쩡한 시민을 여전히 국민이라고 불러요.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여전히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는군요.
한국이란 국가가 있으니까 국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국가의 구성원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이죠.
국민이라는 말은 설사 ‘황국신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도,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 같은 약소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보았어요. 국가에 속해 있음을 강조하는 용어니까요.
국민이란 용어는 시민의 자유와 시민의 자율성과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언어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우리는 국가에 얽매인 존재라기보다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공유하는 자유로운 시민이라고 봅니다. 시민적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서구 사회에서도 시민이란 용어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왤까요? 서양 중세사회에서 자유를 획득한 이들은 도시의 시민이었으니까요.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이런 말도 있었잖아요. 군주의 압제에서 벗어날 권리를 그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한 것이었어요. 시민이란 말이 그만큼 특별했던 거예요. 시민이란 용어가 너무도 서구적이라서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고 항변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편이 국민보다는 100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시민은 반드시 어느 도시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장사를 한다는 뜻의 시민도 물론 아니지요. 자유인이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이 있어야 시민인 것입니다.
자유인은 동학의 가치와도 잘 어울립니다.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존귀한 하늘이니까요. 국가를 우리가 지금 당장 해체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언젠가 국가를 새로운 삶의 공동체로 개조해야 될 것이 아닌가요.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개조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역사적 행로를 그대로 되풀이하자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로서는 서양의 역사에서도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보편적인 가치를 그대로 흡수하고, 거기에 동학을 비롯해 우리의 전통 속에서 이어가고자 하는 가치를 융합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아마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일 테지요. 많은 시민들이 오랫동안 토론하고 합의라는 과정을 거쳐야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언젠가는 그런 큰일을 해낼 줄로 믿어요. 역사를 오래오래 공부하면서 우리 시민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어요.
지난 수십 년 동안만 해도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그렇게 심했으나, 시민들의 힘으로 넘어섰습니다. 그 뒤 전두환이라는 악랄한 군인이 세상을 쥐고 흔들었으나, 용감한 대학생들과 ‘넥타이 부대’라 불린 시민, 회사원의 힘으로 쫓아냈어요.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고, 적폐라 불리는 고질적인 폐단이 도처에 많아요. 그래도 우리 시민들은 ‘촛불시민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역사적 경험이 있어요. 누구도 도저히 바꿀 수 없어 보이는 역사의 난제도 하나씩 해결한 것이 바로 우리 시민들의 지난 역사였어요.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꿀 강력한 힘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질의: 옛날 사람들은 동학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을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무엇인가가 있었으니까요. 교리를 배울 기회도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현재의 상황은 많이 다르거든요. 우리 청소년들이 교육 현장에서 동학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아요.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응답: 아주 훌륭한 질문이에요. 맞아요. 19세기 말에는 청소년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배울 기회가 분명히 있었어요. 포와 접이 운영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제도권 학교가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동학은 관헌의 탄압을 받고 있었지요. 나중에는 천도교 본부도 있고 지부도 있어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초기에는 ‘포접제’라는 일종의 비밀결사 안에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죠.
포접제라는 것은 접주를 말단조직으로 하고, 그 위에 대접주가 있었지요. 접주라는 이는 마을사람인 거죠. 그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중심으로, 이웃의 여러 마을을 아울러 ‘접’으로 삼은 거죠. 접주의 책임 아래 교도들에게 교육을 한 것입니다.
동학에 육임제라고 하는 직제가 있었어요. 동학의 말단 조직은 간부들이 여섯 가지 임무에 종사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교수’라는 직책도 있었어요. 현재도 1894년에 최시형이 어느 마을에 사는 누구를 접주 또는 교수로 임명했다는 문서가 남아 있어요.
마을, 또는 이웃 마을의 평민지식인 가운데 교리를 아는 선생이 있어서 그에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공부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만약 우리가 오늘날 그런 정신을 되살리려고 하면 비공식적인 마을학교가 있어야 되겠어요. 마을에 뜻이 있는 어른들이 모여서 배움터를 만들고, ‘얘들아, 이 책도 한번 같이 읽어보자. 이것도 한번 토론해보자. 이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학교는 반드시 정규적인 학교라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대학 입시공부만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뜻있는 어른과 청소년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있어야겠어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 동학에 국한될 이유는 물론 전혀 없는 것이고요. 우리에게 동학이란 지나간 시절의 동학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출처: 백승종,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들녘, 2019)
덧붙이는 말: 저는 동학의 등장이 갖는 의미를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관계의 질적 전환"이라고요. 기성의 제도와 관습에서 자유로와진 너와 네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데 동학의 참 뜻이 있다고 봅니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사람과 우주 ... 이런 모든 관계를 지배와 소유로서 보는 것이 아니죠. 사랑의 눈으로 이 모든 관계를 혁신하려는 데에 동학의 참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을 대표하는 이가 해월 최시형입니다. 틈만 나면 제가 늘 강조하는 "평민지식인"의 전형이었습니다. 해월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던 전봉준 선생도 세상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전환하기에 노력한 분이었지요. 우리는 이 분을 장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저는 "선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실제로 이분의 직업이 선생님이기도 하였고, 목숨을 걸고 실천한 바도 선생의 역할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전봉준 선생은 농민에게 땅을 되돌려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두를 자립적이고도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되살리고자 하였어요. 그 점은 전봉준 선생이 적에게 처음 붙잡혔을 때 하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도 "관계의 질적 전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제도와 관습으로, 우리는 왜곡된 관계망 속에서 질곡을 겪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풀어헤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438Yuik Kim, 강길모 and 43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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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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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주

국민학교는 고쳤는데 국민은 못 고쳤습니다. 말과 생활과 의식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바꿀 수 있지 싶습니다. 박사님 역할이 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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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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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식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공감합니다. 오늘도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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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철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듯 국민은 시민으로 불려야하고 구청장 뽑듯 동장 , 통장,반장도 직선제 되어야 합니다.
주민자치의 풍토가 마련되어
동네문화와 주민자치가 함께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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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ahnung

중학교시절 심하게 사춘기를 앓고, 그때부터 '왜 사는가?' '내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가 중요한 화두가 되어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습니다.
그 가시를 처음 뺀 것은 대학교 1학년 겨울이었습니다. 대학엘 가면 모든 것이 알아질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알아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1년 내내 절망적인 방황을 했습니다. 제게 제일 큰 고민거리는 '제가 어쩌지 못하는 제 감정들', 우월감과 열등감, 그리고 욕망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겨울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회화', 제가 사회화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절망과 방황속에서 읽고 또 읽었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 책의 어느 구절에 '인간은 사회화된 존재'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벼락같은 번쩍임이 생각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사회화 된 것이구나!' 내 이성도, 감정도 다 사회화된 것이구나'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사회화 과정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근대사들을, 어린 시절을 찬찬히 복기해보면서 내가 어떻게 자랐고 사회화 되었는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방안에 앉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저의 사회화과정을 하나하나 생각했습니다.
제 열등감, 우월감, 욕망들도 다 제 사회화의 산물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공부잘하는 아이로 칭찬받고 사랑받으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우월감이었고, 그 우월감의 그림자로 열등감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는 철저한 경쟁사회였고, 경쟁의 승리자는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밀려나는 자는 열등감을 가지도록 되어 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묻기 시작했습니다.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자유롭게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결심을 했습니다. "내 삶과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과거의 나는 이 사실을 몰랐기때문에 세상이 나를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화 시켰지만,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 나를 사회화 시켜가겠다"로요. 동시에 우리를 특별한 방향으로 사회화 시켜가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사람이 '자유롭게, 더불어함께' 자기길을 찾아가는 것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게 바로 저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때 이후에도 여러번 막다른 길에 서기도 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
자본주의는 우리를 끊임없이 divide시킵니다. 분업이라고 해도 좋고, 전문화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체제는 (자본)효율을 위해 우리를 잘게잘게 나누고 경쟁시키며,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분업으로 몰아갑니다.
divide의 결과는 서로의 단절이며, 전체성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저는 건축이라는 일을 통해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으며, 건축속에서 전체성을 회복하는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전체성이란 혼자서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누가 혼자서 하고, 누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의 시대를 돌아보면 우리는 '함께'하는 방식이 많이 옅어진 것 같습니다. '자유'는 결코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오직 '더불어 함께'할때만 획득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더불어함께와 동전의 양면처럼 닿아 있습니다. 홀로설줄 아는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법니다.
**
동학을 깊이 만나면서, 수운선생의 깨달음과 해월선생의 삶이 참으로 깊은 깨달음이며, 진실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동학에 헌신했던 수 많은 분들이 원했던 것은 '사람다운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이 하늘이고, 우주 만물이 하늘이고, 서로를 하늘로 섬기고, 진실되게 대하는 것이 동학의 깨달음의 종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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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숙

관계의 질적 전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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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정호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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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남

이 아침 마음을 깨우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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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Tae Kim

도시 속 마을, 국민이 아닌 시민 개념을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중요한 일깨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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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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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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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ungsun Yoo

감사합니다. 오늘도 또 배웁니다. 업고 가서 공유하겠습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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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공동체가 급속히 와해된 건 산업화 탓도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행복하지 못한, 사실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기억, 트라우마가 다들 큰 탓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남자어른 남자아이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는 전제를 깔고 구성된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원한을 품고 썩어갔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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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duk Park

관계의 질적 전환!
동학의 아침, 그 가르침 새롭게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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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영

네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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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철

며칠전 어린이날이었는데 99년 전 어린이날을 처음 만들었던 방정환선생이 동학지도자셨던 의암 손병희선생 사위였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습니다...저는 당연히(?) 소파 방정환선생이 서학이나 개신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ㅎ....동학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겠습니다

The Four Feathers (2002 film) - Wikipedia

The Four Feathers (2002 film) - Wikipedia

The Four Feathers (2002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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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 Feathers
The Four Feathers 2002 movie.jpg
Theatrical release poster
Directed byShekhar Kapur
Screenplay byMichael Schiffer
Hossein Amini
Based onThe Four Feathers
1902 novel
by A. E. W. Mason
Produced byPaul Feldsher
Robert Jaffe
Stanley R. Jaffe
Marty Katz
StarringHeath Ledger
Wes Bentley
Kate Hudson
Djimon Hounsou
Michael Sheen
CinematographyRobert Richardson
Edited bySteven Rosenblum
Music byJames Horner
Production
companies
Miramax Films
Jaffilms[1]
High Command Productions Ltd.[1]
Distributed byParamount Pictures
(United States)
Buena Vista International (International)[2][note 1]
Release date
  • 20 September 2002
Running time
130 minutes
125 minutes (TIFF)
CountriesUnited States
United Kingdom
India
LanguageEnglish
Budget$35 million[3]
Box office$29 million

The Four Feathers is a 2002 war drama film directed by Shekhar Kapur and starring Heath LedgerWes BentleyDjimon Hounsou and Kate Hudson. Set during the British Army's Gordon Relief Expedition (late 1884 to early 1885) in Sudan, it tells the story of a young man accused of cowardice. This film, with altered plot events, is the latest in a long line of cinematic adaptations of the 1902 novel The Four Feathers by A.E.W. Mason. Other versions of the story have been set in the 1890s, with different battle events.

Plot[edit source]

Harry Faversham, a young British officer completing his training, celebrates his engagement to Ethne, in a ball with his fellow officers and father. When the Colonel announces that the regiment is being dispatched to Egyptian-ruled Sudan to rescue the British General Charles "Chinese" Gordon, young Faversham has serious ethical reservations about the war, and resigns his commission. Harry's father disowns him. Perceiving his resignation as cowardice, three of his friends and his fiancée each give him a white feather, the symbol of cowardice. Ethne breaks off their engagement.

Harry learns that his best friend Jack and his former regiment have come under attack by rebels. Undertaking the perilous journey into the Sudan alone, he strikes up an alliance with Abou Fatma, a mercenary warrior. Harry disguises himself as an Arab. Harry and Abou Fatma follow a group of army workers he believes to be Mahdi spies, and reach the garrison of Abu-Klea, which they realise has been overrun. Harry begs Abou Fatma to warn his friends that their destination is under siege and an attack is likely.

The regiment stopped its march to bury a group of British killed by the Mahdi. Abou Fatma is captured by Egyptian soldiers; believing he is an enemy scout, they bring him before the British officers. He tells the British that he has been sent by a British officer to warn them of the Mahdi's attack. He says that Muslims always bury their dead and that of the enemy, but that these bodies have been left to keep the British occupied. Faversham's comrades are worried, but ultimately they disregard Abou Fatma's warnings and he is flogged as a suspected spy.

The British and Egyptian troops are not prepared for battle. The Mahdi rebels attack with spearmen, riflemen and cavalry, while the British forces form a defensive square. Firing volley after volley, the British repel the initial Mahdi assault just as they spot British cavalry reinforcements in their distinctive red uniforms. A force of skirmishers is sent to pursue the retreating Sudanese, but they are ambushed by Mahdi rebels and forced to fight on foot. Soon the British discover that the cavalry who they thought were reinforcements are Sudanese disguised in British uniforms. Among them is Faversham. The British square reorganises and fires a few volleys, in the process killing several skirmishers who have not yet returned to the square, including Edward Castleton, who had earlier given Harry a feather. Jack attempts to rescue Castleton in the process but is blinded when his rifle misfires. The British issue an order for retreat.

Harry finds Jack during the battle and protects him after he was blinded. Harry finds letters from Ethne to Jack, but cares for his friend without identifying himself. Never knowing his rescuer, Jack is transported to England. He asks Ethne to marry him, but she does not answer and discusses it with Harry's father.

Tom, another officer, arrives to tell Jack that Harry had visited him in Sudan. During the encounter, Harry confirms that he had sent Abou to alert the British of the Mahdi attack, and is bitter that his friends ignored the warning. Abou tells Harry that he believes Trench lives on in the notorious Mahdi prison of Omdurman. Upon learning this, Harry says he is determined to rescue him. Abou advises Harry against this venture, which is all but certain to lead to his death. Undeterred, Harry allows himself to be captured and imprisoned at Obdurman.

In the prison, Harry finds Trench. They suffer greatly as they are starved and subjected to hard labor. After a failed escape attempt, they concede the hopelessness of their situation. Later Abou rescues Harry and Trench by giving them a poison to fake their deaths. A suspicious guard follows the removal of the bodies, along with three other guards. Harry and Abou kill the four. Abou returns to the desert, and Harry escorts Trench back to Britain. Harry is acknowledged by his father and Ethne reclaims her feather, as Harry has proven his bravery. She has become engaged to Jack.

Jack learns that Harry was his rescuer when he happens to touch his face; he releases Ethne from their engagement. After a ceremony of remembrance, Harry and Ethne hold hands and are engaged again.

Cast[edit source]

Production[edit source]

Three supporting artists were injured in an accident on set during filming in Greenwich.[4]

Release[edit source]

The film opened in North American cinemas on 20 September 2002 and grossed $6,857,879 in its opening weekend, making number 5 at the US box office. The Four Feathers ended up making $29.8 million worldwide, failing to bring back its $35 million budget.[5]

In 2003, it was issued as a Special Collector's edition on DVD. ISBN 0-792-18961-2

Reception[edit source]

The film received mixed reviews from critics. On the review aggregator website Rotten Tomatoes, the film holds a 41% approval rating, based on 150 reviews, with an average rating of 5.39/10. The website's consensus reads, "Though beautiful to look at, The Four Feathers lacks epic excitement and suffers from an ambivalent viewpoint."[6]

See also[edit source]

Footnotes[edit source]

  1. ^ Since the acquisition of Miramax by ViacomCBS, Paramount owns the worldwide rights to the movie.

References[edit source]

External links[edit source]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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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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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 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