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4

알라딘: 고문서 반납 여행



알라딘: 고문서 반납 여행

고문서 반납 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 | 오래된 책을 찾아 자박자박 1
아미노 요시히코 (지은이),김시덕 (옮긴이)글항아리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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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쪽
140*200mm
383g

책소개
오래된 책을 찾아 자박자박, 첫번째 책. 한 역사학자가 빌린 고문서들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독특한 소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큰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1945년 패전 후 일본 정부는 전국 농어촌에 잠들어 있던 고문서를 대량으로 수집해 사회사 자료관을 세우고자 했다. 매우 야심찬 의욕이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계획은 곧 좌절되고 만다. 연구원들은 제각기 먹고살 길을 찾아 흩어졌고 빌려온 문서들은 방치됐다. 저자인 아미노 요시히코는 1년간 이런저런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문서 도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골 마을을 돌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문서를 빌릴 때는 6개월이나 1년 안에 꼭 반납하겠다고 말했지만, 이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더 이상 누를 끼치지 말자고 다짐한 아미노는 18년에 걸쳐 고문서 반납 여행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문서를 빌리는 일은 1949년에 시작돼 몇 년간 이어졌고 반납이 완료된 것은 1998년이니, 문서 주인들은 50년 만에 책을 되돌려받은 셈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는 문서 제공자와 이를 빌려간 이들의 실명을 낱낱이 기록하면서 학자들과 정부의 지난 과오를 밝히고자 이 책을 써나간다. 처음 여행을 떠나는 심정은 '두려움'이었다. 어떤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 게다가 어떤 문서는 쥐가 파먹어 가느다란 끈처럼 변해 있었고, 일부 문서는 행방이 묘연해져 찾을 수 없었다. 1967년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으니 문서를 대출한 지는 어언 20년이다. 마음 한켠이 지옥 같았던 지난날의 짐을 과연 내려놓을 수 있을까.


목차


옮긴이의 글
들어가며

제1장 웅대한 꿈이 좌절되다
제2장 가깝고도 먼 한반도 ― 쓰시마
제3장 가이후와 호수의 세계 ― 가스미가우라?기타우라
제4장 바다의 영주 ― 후타가미 가문과 후타가미섬
제5장 오쿠노토 지역과 도키쿠니 가문 조사
제6장 오쿠노토 지역과 도키쿠니 가문에서 배운 것
제7장 한신대지진으로 사라진 고야마 가문 문서 ― 기슈 지역
제8장 리쿠젠 지역 여행 ― 게센누마와 가라쿠와
제9장 아베 요시오의 일생
제10장 사도와 와카사 지역의 어촌 문서
제11장 전화위복 ― 빗추 지역 마나베섬
제12장 반납 여행의 끝 ― 이즈모·도쿠시마·중앙수산연구소

맺으며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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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일본이 패전한 1945년부터 1955년까지의 10년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격동의 시기였다.



추천글

아미노 요시히코는 20세기 후반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역사가였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 윌리엄 존스턴

패전 직후, 사회사 자료관을 건설하고자 전국 농어촌에 잠들어 있는 대량의 고문서가 수집되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해 계획은 좌절. 30여 년 뒤,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빌린 채 방치되어 있던 고문서를 반납하는 여행에 나선다.
- 닛케이 신문

기존의 일본사 연구에 이의를 제기하고 비정주민의 세계를 밝혀내 ‘중세사 붐’을 일으키고 새로운 일본상을 그려낸 아미노 요시히코. 그 역사관은 소설과 같은 기타 장르, 나아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 현대사상

훗날 아미노 요시히코가 여러 분야의 연구자와 집필자(소설가, 만화가,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
- 다나카 유코 (호세이대학 총장)

이 책은 문서와 문화 자원 조사·보존·관리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소름끼쳐할 만한 서술로 가득 차 있다. 소장자에 대한 배신, 직원이 고문서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나간 일, 정리하지 않은 채로 사장시킨 일, 쥐가 파먹은 일, 파손, 그리고 분실…… 행정 관청의 사업 파기와 엉성한 사후 처리가 문화자원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다. 아미노는 이 책을 ‘실패사’라고 칭한다. 말 그대로 일본의 아카이브 역사, 사료 보존 운동사에 남을 대실패다. 이 죄를 갚겠다는 의식과,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아미노의 의지가 이 책에 가득 차 있다. 날짜, 인명 등을 상당히 자세히 쓰고 있는 것은, 일종의 기록이자 실록으로서 이 책을 남기고자 한 아미노의 사명감이 발현된 결과다.
- 기노시타 료마 (중세사 연구자)

어느 날 그는 “술자리니까”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핍박받는 사람들에게야말로 인간다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그의 이런 진심이야말로 ‘아미노 사학’의 원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때는 “패해서 사라진 사람들 쪽에, 역사로서 소중한 것이 있다”고도 말했다. 문자에 의지하는 역사학은 승자와 권력자의 관점을 취하기 쉽고 패자나 핍박받은 이들의 관점은 택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미노는 의도적으로 약자와 패자의 관점에 선 것이리라.
- 핫토리 히데오 (전 규슈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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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8년 3월 24일자 '새로 나왔어요'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18년 3월 23일자 '새로나온 책'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8년 3월 23일자 '학술.지성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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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아미노 요시히코 (網野善彦) (지은이)


1928년 야마나시현 출생. 역사가. 1950년 도쿄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재단법인 일본상민문화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사회과학연구회, 부락해방연구회 등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67년부터 나고야대학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80년에는 가나가와대학 경제학과 및 가나가와 단기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일본상민문화연구소 재건에 노력하는 한편 서양사 연구자들과 함께 계간지 『사회사 연구』를 창간했다. 1993년에 가나가와대학 대학원에 개설된 역사민속자료학 연구과 교수로 일하다 1998년 정년퇴임했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유산이 된 ‘아미노 사학’의 기둥 가운데 하나는 비농업민 연구다. 그는 농업 중심의 사학을 넘어 해민사海民史 중심의 중세사를 내세운 대표적인 학자다. 다양한 비농업민(어민, 산민, 상인, 직공 등)의 존재와 활동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 연구의 시야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구는 또한 문화인류학·민속학을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등 학제간 장벽을 허물고 기존 상식에 꾸준히 의문을 제기했다. 단일민족론과 일국一國 사관, 농경민·정주민·천황을 중심으로 한 기존 일본의 역사상도 철저히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업적은 프랑스 아날학파나 미국의 일본 연구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은 책으로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 『몽골 침략』 『일본 중세의 민중상』 『무연·공계·악』 『중세의 풍경』 『이형의 왕권』 『일본 사회의 역사』 『일본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고문서 반납 여행>,<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일본이란 무엇인가> … 총 86종 (모두보기)

김시덕 (옮긴이)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K 교수로 재직 중이다. 16~20세기 동부 유라시아 지역의 전쟁사가 주 연구 분야로, 특히 임진왜란을 조선?명?일본 간 국제 전쟁으로 바라보는 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문헌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을 살피고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왔다.
일본에서 펴낸 박사학위논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는 2011년 외국인 최초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한국 동방문학비교연구회의 석헌학술상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연구는 2016년에 《일본의 대외 전쟁》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2017년에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본 임진왜란》, 《교감· 해설 징비록》,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전쟁의 문헌학》, 《서울 선언》, 《갈등 도시》 등이 있다.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6세기 전국시대부터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는 일본의 4세기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총 다섯 권의 책으로 갈무리할 예정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인 이야기 1>,<갈등 도시>,<서울 선언> … 총 2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패전 후 일본 정부는 시골 마을들에서 고문서를 대량으로 빌렸다
하지만 국책 사업은 곧 해산!
문서는 방치됐고 문서를 빌린 이들은 ‘도둑’으로 몰렸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빚을 갚고 누명을 벗고자 고문서 반납 여행에 나선다

이 책은 한 역사학자가 빌린 고문서들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독특한 소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큰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1945년 패전 후 일본 정부는 전국 농어촌에 잠들어 있던 고문서를 대량으로 수집해 사회사 자료관을 세우고자 했다. 매우 야심찬 의욕이었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계획은 곧 좌절되고 만다! 연구원들은 제각기 먹고살 길을 찾아 흩어졌고 빌려온 문서들은 방치됐다. 저자인 아미노 요시히코는 1년간 이런저런 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문서 도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골 마을을 돌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문서를 빌릴 때는 6개월이나 1년 안에 꼭 반납하겠다고 말했지만, 이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더 이상 누를 끼치지 말자고 다짐한 아미노는 18년에 걸쳐 고문서 반납 여행에 나서게 된다. 실제로 문서를 빌리는 일은 1949년에 시작돼 몇 년간 이어졌고 반납이 완료된 것은 1998년이니, 문서 주인들은 50년 만에 책을 되돌려받은 셈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는 문서 제공자와 이를 빌려간 이들의 실명을 낱낱이 기록하면서 학자들과 정부의 지난 과오를 밝히고자 이 책을 써나간다. 처음 여행을 떠나는 심정은 ‘두려움’이었다. 어떤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 게다가 어떤 문서는 쥐가 파먹어 가느다란 끈처럼 변해 있었고, 일부 문서는 행방이 묘연해져 찾을 수 없었다. 1967년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으니 문서를 대출한 지는 어언 20년이다. 마음 한켠이 지옥 같았던 지난날의 짐을 과연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앞뒤 재지 말고 일단 빌리고 보자

일본의 유서 깊은 집안에는 에도 시대의 문서들이 찬장, 선반, 장롱, 서랍, 궤짝 안에 잠들어 있다. 가늘고 긴 책 상자는 바닥부터 덮개까지 빼곡하며 오래된 가옥의 후스마(장지문)나 병풍 뒷부분에는 고문서가 덧대어져 있다.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이런 옛집은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고 그 과정에서 넝마 같은 문서는 불에 타고 버려졌다. 고문서라면 사냥개 같은 후각을 가지고 달려드는 눈 밝은 연구자들에게 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 이들 자료가 사라지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어떤 마을은 어르신들 중심으로 공용문서를 잘 보관하고 있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순식간에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졌다.
정부는 패전 이후 일본상민문화연구소를 발족해 예산을 배정한다. 이 연구소 가운데 스키시마 분실은 우노 슈헤이치가 수장이 되어 꾸려졌다. 그는 고문서에 대해서라면 천재적일 만큼 뛰어난 감각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분실은 일단 5개년 계획으로 10여 명의 상근 연구원을 채용했고, 이 책의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수장인 아미노는 실력과 가능성을 겸비한 학자였지만, 당시만 해도 풋내기였던 저자를 비롯한 몇몇 연구원은 마음의 준비나 목표도 없이, 근세·근대 문서를 해독할 능력과 경험도 없이 이 사업에 휘말려 들어갔다.
다섯 팀으로 나뉜 연구원들은 각자 맡은 지역을 돌면서 앞뒤 재지 않고 문서를 대량으로 빌렸다. 특히 1951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연구자들은 가스미가우라·기타우라 호수 주변을 중심으로 한 이바라키현의 문서 조사·수집에 매달렸다. 가령 세 명의 연구원이 사흘간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덟 건의 문서를 빌리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아미노가 특별히 이 지역 문서 수집에 열정을 기울인 것은, 짐작건대 서일본의 비와호와 쌍벽을 이루는 동일본의 호수로서 이 지역의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사업 2년 차. 쓰키시마 분실에는 서서히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6개월에서 1년 안에 문서 정리를 마치고 반납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몇몇 연구원이 깨달은 것이다. 1953년, 수장 우노를 향한 비판과 불신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연구소의 역량과 상관없이 무조건 빌려오는 방침은 계속됐고, 더욱이 임금은 제자리인 데다 먼지 가득한 연구실에서 건강보험도 없이 폐결핵에 걸리는 연구원도 생겨났다. 그런 와중에도 시골 마을의 고문서들은 그 귀중한 가치로 여전히 매력을 발산해 저자는 문서 대출 작업을 적극적으로 이어가기도 했다.
이처럼 무모하고 파탄이 예고된 계획을 밀어붙이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여기는 이들로 인해 연구소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파탄과 좌절은 곧 현실이 되었다. 1954년, 마침내 연구소에 대한 예산은 중단된 것이다.
문제는 빌려온 문서의 처리였다. 당시 일본상민문화연구소는 해체되면서 수산청 수산자료관으로 계승되는 모양새를 띠었지만, 채 옮겨지지 못하고 남은 자료만 해도 최소 100만 점. 이 문서들은 사과상자에 담겨 우노가 새로 몸을 담게 된 도쿄여자대학 강당 뒤편 창고에 산처럼 높이 쌓여졌고, 세월은 그대로 계속 흘러갔다.

대범하게 빌려와 안이하게 처리하다

저자는 연구원 직을 잃고 1년 뒤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바쁜 교사생활 중 이따금 문의 전화가 왔는데, 그건 낯 뜨겁게도 과거 빌려간 문서들이 왜 반납되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약간의 예산을 배정받아 몇몇 문서는 반납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되지 못한 빚은 여전히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자 자신이 빌린 문서뿐 아니라 우노 슈헤이치와 외부 연구원이었던 미야모토 쓰네이치, 아베 요시오 등이 빌린 문서에 대한 반납 재촉도 저자인 아미노한테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우노는 암에 걸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저자는 찔끔찔끔 빚을 갚아나가다가 마침내 재직하던 나고야대학을 그만두고 일본상민문화연구소를 인수해준다는 가나가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쓰키시마 분실의 잔무 처리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된다(좋은 직장을 버리고 좀더 낮은 대학으로 옮긴 것은 연구소를 인계해준 데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당시 빌려온 고문서들을 가나가와대학에 모아놓고 보니, 그중 다 부서져가는 종이 상자에 들어 있는 문서가 눈에 띄었다. 그건 우노 선생 댁 창고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열어보니 빗추 지역 마나베섬의 문서였다. 살아생전 우노 선생에게 이 문서를 빨리 반납해달라고 재촉했던 저자는 순간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왜 이토록 많은 문서를 자기 집에 가져다놓은 걸까, 반납도 하지 않고…….’ 물론 저자의 잘못도 있었다. 생활에 쫓긴다며 자기 두 눈으로 반납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아베 요시오는 평소 사람 좋고 순박하기로 이름났다. 그 역시 단고 지역과 기슈 지역에서 대량의 문서를 대출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아베가 빌려간 문서도 반납해달라는 연락을 여러 군데서 받게 된다. 아베의 느긋한 성격이 이런 데까지 발휘된 것일까. 하지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소장자들은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그는 같은 연구원으로서 아베의 이런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대범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아베의 부고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슬퍼하는 것도 잠시, 난제는 독신으로서 하숙생활을 하던 그의 집에서 문서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의 자택에서는 열 상자 분량의 고문서가 발견됐고, 그가 근무하던 릿쇼대학에서는 양복 상자 하나 분량의 문서를 수거했다. ‘아베 선생은 왜 이렇게 집에다 문서들을 갖다놓은 것일까.’ 저자는 머릿속으로 되뇌인다.
저자는 아베의 족적을 밟으면서 ‘정말로 사람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료를 깊이 있게 읽고 학문적으로 엄격하고 면밀한 자세를 추구한 그가 고문서를 반납하지 않고 그리도 태연했던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나는 이 정도로 큰 괴리를 보인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며 저자는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이것은 배신행위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이제야 돌려드립니다”

물론 일본상민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의 작업은 엄청난 열정과 끈기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벌레 먹어서 방망이처럼 딱딱해진 수십 통의 문서를 대나무 주걱으로 살살 벗겨 펼쳐서 목록 작성을 하는 것은 웬만한 성실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표해두었던 작업 일정은 자꾸만 뒤로 미뤄지는 가운데 넝마 같은 조각을 한 점 한 점 정성스레 봉투에 담는 작업은 허무하고 쓸데없는 노력인 것만 같아 마음이 여러 번 흔들리기도 했다(하지만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고 이는 나중에 빛을 발하게 된다). 뼈아픈 실수도 했다. 고문서를 발굴한 기쁨에 창고에서 꺼내는 데 열중하다가 보존 상태를 기록하지 못했고, 출처를 엄밀히 분류하지도 못했다. 한번 위치를 이동시키면 그 문서의 내력은 온데간데없이 실종되는데 말이다.
어쨌든 과거의 열정이 까마득한 기억이 되어버린 1967년. 뉘우치는 심정으로 나선 첫 반납 여행의 목적지였던 쓰시마. 저자는 심한 질책을 들을 거라며 단단히 각오한 채 마을의 담당 연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태껏 문서를 가져갔다가 되돌려주러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이것은 미담이자 쾌거입니다.”
한숨 돌리게 된 저자는 그러나 문서를 반납하지 않는 것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듣자 하니, 고문서를 몇십 년 동안 대출해줬다가 겨우 돌려받은 가문들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후로는 문서를 공개하는 데 매우 신중해졌다고 한다.
문서를 빌려준 이나 반납하러 간 저자나 피차간에 머리숱이 적어져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다. 게다가 한 가문의 어르신은 “몇십 년 전 소중한 문서를 빌려간 젊은이가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다”며 한탄을 했다.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니 그 한탄의 대상은 마음 아프게도 바로 저자 자신이었다. 그동안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세월, 저자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문서를 돌려드리고자 사죄의 발걸음을 하게 된다.

고문서가 바꿔놓은 학문세계

고문서 수집과 필사 작업은 단순노동이 아니었다. 연구원들은 공부 모임을 조직해 문서 한 점 한 점을 소리 내어 읽고 상세히 해독하는 것을 7~8년간 지속하기도 했다. 문서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저자를 비롯해 연구원들은 기존 사관에 커다란 빈틈과 왜곡이 있음을 처절히 깨달아나간다. 특히 아미노는 자신이 청년 시절 실증적 사료를 바탕으로 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닌, 이념적 운동 차원에서 써내려간 글을 혐오하며 학자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령 농업과 토지 소유의 진전이야말로 사회의 진보라 여겼던 그의 상식은 근본부터 무너져내렸다. 특히 오쿠노토 지역과 도키쿠니 가문의 문서를 조사하면서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즉 ‘사농공상’은 완전히 허구적인 개념이며, 사회의 실상을 크게 잘못 보도록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임을 깨닫게 된다. 농업을 우선시하는 흐름 속에서 호숫가 주민들의 생활이 퇴화하기도 했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감에 따라 역사 기술이 왜곡됐던 것이다.
아미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 사학계에서 ‘아미노 사학’을 형성하게 된다. 아미노 사학의 기둥 가운데 하나는 비농업민 연구다. 농업만을 가지고는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어민, 산민, 상인, 직공들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그는 피지배층을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관을 확립해갔는데, 즉 권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변부, 변경, 저변 민중을 장악했다는 역설을 제시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문서 한 점 한 점이 한 사람의 역사관과 한 국가의 역사관을 바꿔나가는 과정을 밝힐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고문서를 다루는 이들에게 자성의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당신은 문서를 정직한 과정을 거쳐 입수했고, 선입견 없이 해석하고 있는지? 문서 소장자의 진심을 알아주고는 있는지?’ 하고 말이다. 접기


북플 bookple





수십년 만에 문서를 돌려주겠다고 나선 연구자의 패기가 놀랍다. 이런 열정과 끈기가 있는 나라, 일본이 부러웠다.
파블로네루다 2018-07-31 공감 (1) 댓글 (0)





《고문서 반납 여행》 감춰진 역사를 바로잡는 여행


여행 에세이일 줄 알았는데 짐작과 달리 '고문서 반납'에 중점을 둔 인문 교양서에 가까운 책이다.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 정부가 1949년에 세운 사회사 자료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회사 자료관에는 일본 정부가 전국 농어촌에서 수집한 엄청난 양의 고문서가 있었는데, 얼마 후 사회사 자료관은 재정난으로 인해 문을 닫고 저자도 고등학교 교사로 이직하면서 고문서는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저자는 한동안 고문서의 존재조차 잊고 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서 도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문서를 빌려 갈 때는 반드시 돌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여태까지 돌려주지 않았으니 도둑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리하여 저자는 무려 18년에 걸쳐 일본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고문서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고문서 반납 여행을 한다. 고문서를 빌려준 주인 입장에서 보면 1949년에 빌려준 문서를 1998년에야 돌려받았으니 50년 넘게 걸린 셈이다.




저자는 고문서를 돌려주러 갈 때마다 주인에게 쓴소리를 들을 것을 각오했는데, 놀랍게도 고문서를 돌려받은 주인 대부분이 고문서를 돌려줘서 고맙다고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심지어는 정부나 기업, 학교 등에서 일하는 '높은 사람들'이 고문서를 빌리고 돌려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이니 고문서 외의 영역에서는 민간에 대한 횡포(갑질)가 얼마나 심할지 짐작이 된다(한국은 어떨까).




저자는 고문서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개념이나 역사 이론에 허구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농공상'이 대표적인데, 저자는 농업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기존 역사학의 관점은 잘못이며, 어민, 산민, 상인, 직공 등 그동안 천시된 '비농업' 분야의 경제인들이 일본 경제의 성장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고문서를 반납하기 위해 쓰시마(대마도)를 방문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가 쓰시마의 전통 가옥이 일본의 전통 가옥과 다른 모습임을 깨닫고 그 이유를 묻자, 같이 방문한 연구자가 쓰시마의 전통 가옥은 제주도 또는 한국 남부 지방의 전통 가옥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답한다. 대체 얼마나 비슷할까. 궁금해서 쓰시마의 전통 가옥 사진을 검색해봤더니 일본의 전통 가옥을 연상케하는 사진만 나온다. 직접 가서 봐야 알 수 있는 걸까. 반납할 고문서는 없지만, 언젠가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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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8-05-0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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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를 찾고 읽고 해석하는 보물찾기.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 중세시대의 역사를 농경민 혹은 지배층이 아니라 흔히 비주류로 여겨지는 어민을 위시한 비정주민의 어업경제를 중심으로 읽어내리는 '아미노 사학'을 주창한 역사가다. 이 책은 이런 그의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간접적이나마 그의 관점을 알 수 있을 뿐더러 어떻게 고문서 자료를 조사하고 보전하고 관리하는지, 여러가지로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은 그가 연구에 의지한 변방 어촌마을의 고문서들을 전후무렵에 빌리고 우여곡절 끝에 길게는 40여년이 지난 시점까지 이르러 기어이 반납하는 모험담처럼 읽힌다. 그는 이를 사료 조사와 보존, 관리에 대한 실패사로 규정짓고 가차없이 반성하며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관련 영역의 연구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반성과 교훈의 지점보다는 1차 사료의 조사와 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생생함이 우선이다.

일본의 잘 알려진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변경, 오지처럼 여겨지는 바닷가 마을에서, 오래된 고택의 창고에서, 또 창호문에 덧대어진 폐지에서 발견하는 수백년 전의 기록들. 보물이라도 찾은 듯 환호하고 나서는 일일이 복구하고 해석하는 수십년간의 지난하고도 섬세한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런 자료를 매개로 마주치는 그 후손들의 신실한 삶과 조상을 기리는 마음가짐이 귀하다.

아, 해양사를 중심으로 다시 쓰여지는 일본 중세 역사란 건 한반도 역사에도 꽤나 큰 반향이 될 것 같다. 그저 굶주린 도적떼로 여겨졌던 '왜구'가 의외로 바다의 영주라 불릴만큼의 조직과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거나,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지역이 일본열도와 해상 무역권으로 크게 묶여 흥성했다거나 등. 게다가 삼면이 바다라느니 하면서도 늘 '농업적 근면성'을 내츄럴본 민족성인 양 내세웠던 한국사에도 그의 사관이 되짚을 부분이 적잖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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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2018-04-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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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시미즈 미츠루 지음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 녹색평론

2014.11.07.
덴마크라는 나라, 무엇이 다른가
이계삼


시미즈 미츠루 지음
녹색평론사, 2014년

늘 꿈꾸었던 것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달리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혁명기 소비에트나 ‘김 주석’이 통치하는 북한을 동경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는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소개되었지만, 의문이 남았다.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거느렸고 거대한 수탈과 살육의 바탕 위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가 대체 무얼까, 똘레랑스는 결국 ‘강자의 도덕’ 아닌가. 그리고 프랑스가 세계 2위의 원전대국임을 알고 나서부터 그 나라에 대한 동경은 싹 사라졌다. 근대세계 속에 우리의 푯대가 되어줄 다른 체제, 모델은 없는 것 같았다. 근대 이전의 풀뿌리 민중세계를 되살리는 것 말고 우리가 선택할 길은 없어 보이는데, 이미 후기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떻게 그런 세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그리고 덴마크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슴이 뛰었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를 어떻게 맞았느냐는 것은 그 나라 민중의 현재적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사실을 덴마크를 보면서 깨달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강제로 근대세계로 편입당했고, 거의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수탈과 살육을 겪고, 그 반작용으로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를 강요당한 채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을 지내야 했다. 우리의 근대 100년은 부국강병과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극심한 경제성장으로 내달려 오면서, 오직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에 마음의 자리를 다 빼앗겼다. 그런데 덴마크는 전혀 달랐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대만이 원전 중단을 결정해서 칭송을 받고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원전을 짓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원전은 중앙집권주의, 지역차별, 민중 배제의 상징이며, 거대자본과 권력의 유착관계로써 유지된다. 그 어마어마한 위험과 미래세대에까지 전가되는 부담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 반민주주의의 상징이다.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겪고, 세계가 너도나도 원전으로 몰려갈 때 덴마크는 전혀 다른 사회적 과정을 거쳤다. 덴마크에는 ‘시민합의회의’라는 전통이 있어서 수준 높은 토론들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에너지를 풍족하게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제로까지 이어진 심도 깊은 토론들을 거쳤고, 곳곳에서 반원전운동이 불붙었다. 그중 특기할 움직임으로 ‘트빈스쿨’이라는 폴케호이스콜레(‘국민고등학교’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그런 표현으로는 의미를 담아낼 수 없어 이 책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다 ― 필자 주)에서 추진한 에너지 자립운동의 일환인 풍차 제작 프로젝트가 있다. 몇몇 전문가들이 거들기는 했으나 거의 비전문가들이 함께 연구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응용하고 중고 부품을 이용해서 제작했다. “정부가 60만kW 원전 1기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3만 대의 풍차를 만들어서 민중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정신으로 출발해, 연인원 10만 명이 참여한 대중운동이었다. 결국 덴마크정부는 1985년 원전 건설을 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덴마크의 공식 종교는 루터파 복음교회인데, 그 기원이 되는 종교개혁 지도자 마틴 루터는 유대인을 배신 민족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시너고그(유대인 회당)를 불질러 파괴하라”고 선동한 사람이다. 그런데 덴마크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에서와 달리 박해를 일절 받지 않았고, 19세기 초부터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5년간 덴마크를 점령했던 독일은 덴마크정부에 유대인(7,000명가량)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덴마크정부는 즉시 시너고그에서 신년예배를 드리던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서, 이들이 중립국 스웨덴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했다. 시너고그에 남겨진 유대교 성전은 코펜하겐의 복음교회에 감추어졌고, 이들의 집과 직장도 그대로 보존되었고, 심지어 뜰의 잔디도 이웃들이 깎아주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덴마크에는 이슬람계 이민자 학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소수자 학교가 있다. 종교기관, 노동조합, NGO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학교 설립도 제한하지 않는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똘레랑스’는 덴마크 민주주의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다른 근대,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과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인가? 일본그룬트비협회 간사로 주민운동가, 교육철학자인 시미즈 미츠루(清水滿)의 책 《삶을 위한 학교》는 한마디로 그룬트비의 사상과, 이를 구현한 폴케호이스콜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룬트비의 사상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1783―1872)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유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향 우드뷔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머니와 교회에서 부양하는 의지가지없는 노인들이었다. 어머니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대지의 언어’ 그리고 노인들이 들려주는 전설과 옛이야기의 세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또한 당시 관행에 따라 라틴어학교에서 수학했지만, ‘모든 사람을 쓸모없게 하고 나태하게 하고 썩게 만드는’ 라틴어학교의 권위주의와 지식 중심의 일방적 학교문화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젊은 시절 연상의 기혼 부인을 사랑하고 비련의 고통을 겪으며 그는 ‘인간’의 감정에 눈뜨게 되었고,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보다 사랑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감정의 우위를 설파하는 문예사조에 감화되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기성 교회에 순응하지 못했고, 형식과 강제에 의존하는 지식인 성직자를 혐오했다. 유년기의 영감을 좇아 북유럽 설화와 민중적 고전을 탐구하여 많은 책들을 번역·편찬했고, 그 깨달음의 기쁨을 시로 노래했다. 그는 급진적 인민주의의 길에 다가섰고, 끝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에서 최종의 답을 찾았다. “진리는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모여든 회중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었던 것은 사도들, 원시 기독교 교단,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성서는 종이 위의 죽은 문자에 불과하며, 그 말씀이 되살아나는 것은 교회에 모여든 경건한, 가난한 ‘신도들 사이에서’라는 것이다. ‘민중들의 살아있는 말’, 그것이 바로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우리 국민 모두는 죽음의 학교를 알고 있다. … 설령 (성스러운 문헌처럼) 천사의 손이나 별의 펜으로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문자는 죽어있다. 모든 책의 지식도 죽어있다. 그것은 독자의 삶과 결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이나 문법만큼 마음을 파괴하고 죽이는 것은 없다.
― 그룬트비, 〈삶을 위한 학교〉(1838)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지만 신으로부터 받은 녹색의 대지를 보살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친구”를 참된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의 생각은 기존 교단으로부터 배격당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농민과 개혁파 목사들이 타락한 국교회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은 뒤 가난한 노인들을 부양하는 구빈원 겸 병원에서 목사로 종신토록 근무했다.
그룬트비 사상의 핵심 개념은 폴케오프뤼스닝(folkeoplysning: 민중의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기피했다. 그룬트비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선거제와 의회는 부자와 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허구의 기제라고 보았다. 그는 민중과 엘리트,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상호작용하며 포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폴케오프뤼스닝을 자신이 주창한 시민대학인 폴케호이스콜레의 목적으로 삼았다. 라틴어를 폐지하고, 배울 의지를 가진 누구라도 모여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말’로 상호작용하며 삶의 신비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학교를 제안했다. 관료, 상인, 수공업자, 농민의 자제들이 칸막이 없이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폴케호이스콜레를 제안한 것이다. 그룬트비는 시험을 배격했다. 시험은 “젊은이가 자신의 경험의 범위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을 반복함으로써만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써 연장자가 젊은이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보았다.

그룬트비는 그 자신 시인이었고, 이야기를 사랑했다. 그는 산문적인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차이를 통합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시의 정신임을 믿었다. 그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풍토성과 너그러운 개방성을 사랑했다. 그는 시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말’을 되살려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룬트비의 이상은 폴케호이스콜레운동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었다.

크리스텐 콜

그룬트비는 영국 체류 당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았던 모습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이 침식을 같이하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칼리지 형식의 학교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룬트비는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제안은 크리스텐 콜(1816―1870)에게서 심화된 모습으로 실현되었다. 그룬트비는 국민대학을 꿈꾸었지만 콜 이후부터 실제로 창립된 폴케호이스콜레는 오히려 지방의 소규모 학교로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폴케호이스콜레의 농민적 성격을 강화시켰고, 학교마다 특색을 갖춘 다원성을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농민에 의한 사회개혁과 사회의 재조직화를 가능케 했으며, 결과적으로 덴마크의 근대를 농본사회로 이끌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은 가난한 구둣방 집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기부터 깊은 신앙적 고민에 빠져들었다. 유럽을 도보로 횡단하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은 구도자였던 콜은 그룬트비의 사상을 접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무명의 민중의 교사였지만 그룬트비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고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헌신적으로 가르쳐 곳곳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아이들은 부모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국가로부터 되찾자”고 주장하며, 초등 대안학교인 프리스콜레의 기원이 되는 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프리스콜레는 덴마크 전역에 200여 개교가 존재하며, 공교육에 깊은 자극을 주어 덴마크의 초등교육을 사실상 견인하고 있다. 콜은 또한 오늘날 덴마크 교육제도에서 중요한 한 축이 되는 애프터스콜레의 간접적인 창설자이다. 14세부터 18세의 학생을 별도로 받아들여 나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애프터스콜레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동안 공교육 트랙에서 빠져나와 음악, 스포츠, 미술, 목공을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배우게 되는 학교이다. 기숙생활을 통해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풍부한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아 형성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콜이 첫 번째 전형을 만들어낸 이래 150년 동안 애프터스콜레는 덴마크 교육에서 독특한 역할을 해왔고, 현재는 전국에 226개 학교가 있으며, 덴마크 청소년 셋 중 한 명은 이 학교를 거쳐 간다고 한다.

농민과 협동조합

프로이센과 1,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끝난 1864년, 덴마크는 유틀란트 반도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나라 전체가 열패감에 빠져 있었고, 국수적인 민족주의가 발호할 때였다. 그러나 그룬트비의 사상과 폴케호이스콜레의 민중적 교육의 저력은 전혀 다른 방식의 대안을 찾았다. 유럽 문화를 무시하여 전쟁에서 졌고, 산업혁명이 지체되어 기술력과 경제력이 떨어진 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항해서, 뜻있는 그룬트비의 사상적 제자들은 폴케호이스콜레를 창립하여 농민을 위한 민중교육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뛰어난 시인, 신학자, 과학자가 몰려들어 민중교육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달가스(1828―1894)의 “칼로써 잃어버린 것을 보습으로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힘을 키워 무력으로 적국에 대해서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쟁기와 보습을 갖고 남은 영토와 싸워 그것을 전원으로 바꿈으로써 적이 뺏어간 것을 벌충하자는 것이다. 달가스는 히스 황야에 농민들과 함께 방풍림을 조성하고 용수로를 건설했으며, 토지개량, 도로망과 간이 철도를 정비하는 등 농업진흥사업을 도왔다. 끝내 덴마크 농민들은 100만ha의 황무지를 70만ha의 경지로 바꾸었고, 19만ha를 숲으로 만들었다.

1840년대부터 1900년경까지 오늘날 덴마크의 기틀을 닦은 세력은 농민이었다. 폴케호이스콜레와 그 자매학교에 해당하는 농업학교에 다니며 인간해방과 평등의식에 눈을 뜬 농민 그리고 그들의 교사들이 농민계몽 지도자가 되었고, 정부에 농촌위원회 구성과 자작농 창설, 소작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근대화를 겪은 국가들의 일반적인 경로와 달리 농민들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내린 농민들의 공동체인 협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낙농, 도축, 원예 협동조합들을 만들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스스로 관장했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이후에야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비자생협이 덴마크에서는 1866년에 만들어졌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주식회사로의 전환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지만, 대자본가가 지배하게 될 것을 예견한 농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협동조합의 농민들은 높은 생산성과 협동력으로 세계 제일의 농민국가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정치개혁을 주도했다. 농민세력은 처음에는 도시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였으나 연대는 깨지고 1870년 ‘좌익당’을 결성하여 ‘우익당’과 맞서게 되었다. 좌익당 지도자들은 모두 폴케호이스콜레 졸업생들이었다. 자작농과 소농이 중심이 된 농민정당은 늘 혁신세력이었다. 보수당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1891년 세계 최초로 연금법을 만들었고, 이로써 덴마크 사회복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01년에는 좌익당이 집권당과 타협하자 다시 ‘좌익개혁당’이 만들어져 도시노동자 중심의 사민당과 함께 노농정권을 수립했다. 농민이 하원 총수의 114석 중 76석을 차지할 정도로 다수당이고, 사민당은 14석에 불과했다. 이 좌익 개혁당이 정권 장악 후 우경화하자 다시 ‘급진개혁당’이 분리되어 1913년 정권을 장악하고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21년에 이미 건강보험제에 해당하는 ‘질병보험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에는 ‘노령연금법’이 제정되었다. 덴마크 현대 정치의 기본방향을 결정한 것은 폴케호이스콜레로 대표되는 농민 중심의 민중운동이었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와 오늘날 우리

덴마크도 2차대전 이후 서서히 산업사회로 재편되면서 농업국가를 고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덴마크 경제 또한 글로벌 경제의 격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덴마크 농민의 비율은 5.8%로 급감하게 된다. 사회복지제도에서 여전히 이상적인 나라로 거론되지만, ‘노동의욕 감퇴 사회’로의 재편은 피할 수 없었다. 오늘날 폴케호이스콜레는 농촌 청년들이 아닌 도시의 젊은이들을 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고, 사회변혁적 정체성은 흐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세계 제1의 도서관 장서 대출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덴마크의 높은 시민적 교양은 유지되고 있고, 복지‘국가’가 아닌 복지‘사회’의 기반은 건재하며,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적 전통은 굳건하다. 덴마크의 다른 근대는 그룬트비와 폴케호이스콜레, 곧 사상과 교육의 힘으로 가능했다. 한편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독일 침공(5년) 정도를 제외한 150여 년의 시간대에 별다른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유럽의 변방에다 매력적인 자원의 산지가 아니었던 지정학적 행운도 덴마크의 다른 근대의 한 요인이리라 추측해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다. 그룬트비의 자리에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크리스텐 콜의 자리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과 《성서조선》의 김교신을, 그리고 폴케호이스콜레의 자리에 구한말과 식민지시대에 이 나라 곳곳에 존재했던 수많은 야학들을 대입시켜보았다. 이를테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대륙으로 건너가기 이전의 윤봉길, 열일곱 나이에 농민을 위한 야학을 열고 계모임과 독서회, 농민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면서 농민들을 위한 교과서 《농민독본》을 저술했던 윤봉길 같은 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근대 이행기에서 최제우와 최시형과 안창호와 이승훈과 김교신 그리고 수많은 윤봉길들은 좌절했고, 수많은 이광수들이 우리의 근대를 이끌었다.

지금 우리는 또다른 이행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이미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술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그것은 학교교육이 지금껏 그 어이없는 파행과 모순 속에서도 그나마 학생들에게 부여해왔던 교육을 통한 물질적 유익이 이제 그 시효를 다한 것에서 일차적으로 유래한다. 그것은, 석유가 생산 정점을 지나고 금융경제가 황혼기에 접어든 세계적 상황에, 부동산 거품이 언제 꺼질 줄 모르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극심해지며,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이 창궐하는 국내적 상황에,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실체적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즉자적인 욕망의 해소에만 골몰하며 각기 인생의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정확히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바라볼 한 푯대로서 덴마크를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언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땀 흘려 노동하는 삶,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존방식, 인생의 의미를 궁구하는 대화와 공동체생활을 복원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주적인 농민으로, 시민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그 출발은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와 같은 작은 교육기관이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선, 나부터 그 길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