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5

알라딘: 넌제로 - 하나된 세계를 향한 인간 운명의 논리

알라딘: 넌제로 - 하나된 세계를 향한 인간 운명의 논리



<넌제로 - 하나된 세계를 향한 인간 운명의 논리>
로버트 라이트 (지은이) 말글빛냄 2009-12-02

출판사 책소개
전작 <도덕적 동물>로 찬사를 받은 저자가 넌제로섬 원리라는 렌즈를 통하여 역사를 들여다본다. 모든 역사와 현상은 한쪽이 이기면 한쪽은 지는 '제로섬'이 아닌, 모두가 이길 수 있는 '넌제로섬'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기본적인 방향을 이 '넌제로섬'으로 설명하며, 인류가 그 기본 방향 속에서는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간다고 말하는 책.

이는 문화의 진화에서나 생물의 진화에서나 적용될 수 있다. 저자는 한 무리의 유전자든 한 무리의 밈(문화 요소)이든, 일단 한 배에 타게 되면 생산적인 조화와 협동에 이바지하지 않을 경우 결국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 '넌제로섬의 논리'로 인류의 문화적 진화 과정에서 봉건주의, 자본시장, 환경문제 등의 역사 진화와 인간 협동을 설명하고 있다. 주요 견해는 역사의 방향성이 결국 예정된 '하나된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며, 그 실례로 UN, EU, IMF, WTO 등 초국가적 형태의 집단의 등장과 형성과정, 그 미래를 진단한다.


목차
서론 폭풍전야

Part ONE 인류의 역사

Chapter 01 문화 진화의 사다리
경향을 부정하는 경향 | 문화의 진화

Chapter 02 그 옛날 우리의 모습
최소 중의 최소 | 유전자의 뿌리 | 넌제로섬 원리의 문제 | 사회적 지위 | 자연의 비밀 계획

Chapter 03 5천 년 동안의 기술 진보
두 부류의 에스키모 | 북서해안의 인디언들 | 시장에 간 대인(大人, Big Man) | 자연의 변종? | 독특한 쿵족 | 진화의 거울

Chapter 04 보이지 않는 뇌
초과근무 | 수정된 ‘보이지 않는 손’ | 대륙의 분할

Chapter 05 전쟁,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우애 | 밀고 당기기 | 평화의 도모

Chapter 06 농업의 필연성
좋은 시절 | 평형 상태에 대한 신화 | 농부가 아내를 데려오고 | 여가 시간 | 투쟁, 투쟁, 투쟁……

Chapter 07 추장사회 시대
폴리네시아의 추장사회 | 추장을 위한 변명 | 밈meme에 대한 몇 가지 밈들 | 넌제로섬 원리 다시 승리하다 | 영혼의 구원자로서의 추장

Chapter 08 두 번째 정보 혁명
운명 예측 | 문자의 진화 | 문자와 신뢰 | 관료적 뇌 | 시체 더미 | 너의 넌제로섬은 나의 제로섬

Chapter 09 문명의 탄생
세 개의 시험접시 | 문명의 요람 | 또 다른 문명의 요람 | 아메리카 문명 | 역사에 대한 반론

Chapter 10 우리의 친구 미개인들
미개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들 | 역사의 평결

Chapter 11 암흑기
밈을 주목하라 | 봉건제도에 나타난 프랙탈의 아름다움 | 세계는 백업 카피를 만들어 놓는다 | 에너지 혁명 | 세계를 안전하게 만든 자본주의 | 자유와 그 밖의 효율적인 기술들

Chapter 12 불가사의한 동양
열광적인 이슬람교도 | 중국의 자본주의 도구들 | 위대성의 가장자리 | 새롭고 향상된 미개인 | 한 발 물러선 중국 | 만남의 광장 | 선(禪, Zen)과 상업적 착취의 기술 | 이슬람의 선물

Chapter 13 현대사회
항의의 기술 | 귀족들의 득세 | 민족주의의 원동력 | 역설의 논리 | 인쇄와 다원주의 | 다원주의와 무임승차 | 중국과 역사의 법칙 | 산업혁명 | 하나의 세계?

Chapter 14 지금 우리 여기에
넌제로섬 원리의 성장 | 진보의 도래

Chapter 15 새로운 세계 질서
통일성의 논리 | 한 곳으로 끌어당기기 | 한 곳으로 밀어붙이기 | 부족주의 | 악(惡)한 부족주의가 선(善)을 낳다 | 운명의 확산

Chapter 16 자유도(自由度)
세포의 삶 | 낙관주의 | 뒤섞인 감정

Part TWO 생명의 역사

Chapter 17 우주적 배경
열역학 제2법칙의 정신 | 에너지와 문화 | 에너지와 정보 | 기적의 접착제

Chapter 18 생물학적 넌제로섬 원리의 출현
원시 수프 속의 연합 | 세포는 어떻게 복잡해졌을까? |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 모두에게 내재된 점균세포적 속성

Chapter 19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되는대로 걷기 | 되는대로가 아닌 걷기 | 좋은 유전자에 나쁜 일이 일어날 때 |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 체험을 통한 학습

Chapter 20 최후의 적응
에스컬레이터의 엔진 | 도구 사용 | 의사소통 | 사회적 사다리 올라가기 | 판다의 엄지 | 진화론적 서사시

Chapter 21 인류는 거대한 전지구적인 ‘뇌’
우리는 하나의 생물일까? | 거대한 전지구적 뇌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 진화의 목적 | 자연선택이 낳은 자연선택

Chapter 22 신의 진화
의미의 원천 | 의미의 성장 | 선의 기원 | 선의 성장 | 선의 미래 | 신의 미래 | 오늘날의 설교 | 태초의 말씀

부록 1 _ 넌제로섬 원리에 대해서
부록 2 _ 사회적 복잡도란 무엇인가?
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
P.163
‘문자 = 문명화’라는 공식에 대한 대략적이나마 정당성을 찾아보자면(실제로 어느 정도 정당화의 여지가 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좀 더 기술적인 의미에서 ‘문명화’는 종종 국가 수준의 조직화에 도달한 사회를 일컫는 데 사용된다. 그리고 문자가 국가의 성립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국가의 진화에 도움을 주는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문자는 완전히 새로운 넌제로섬 영역을 열어젖히며 추장사회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전이 과정을 매끄럽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 전 세계에 걸쳐서 국가 수준의 사회들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가 국가 수준으로, 기술적 의미에서 문명화 수준으로 진보해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문명화, 즉 문명화된 행동의 장으로서의 문명화로 나아가는 길을 닦아준다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우리는 엄밀한 의미라기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문자는 궁극적으로 독재자의 권력을 침식해 들어가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데이터 처리 과정의 발달에서 나타난 다른 문턱들, 이를테면 인쇄기나 인터넷의 출현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문자가 애초에 어떻게 진화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쇄기나 인터넷 역시 ─어떤 의미에서─ 데이터 저장 및 전달 방식에 일어난 이 태고의 혁명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7장 두번째 정보혁명)
P.183~184
고대 국가에서 진화되었던 기본적인 정보 기술에는 문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돈(표준화된 통화) 역시 일종의 정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은 개인이 과거에 수행한 노동과 그 노동에 대해 사회가 평가하는 가치를 기록한다. 한편 우리가 돈을 쓸 때 그 행위는 일종의 신호가 된다.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인해주고 비록 간접적이긴 하나 그 정보를 당신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돈은 더욱 큰 보이지 않는 손의 신경계를 흘러 다니면서 공급자에게 수요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돈에 대해 많은 불평이 쏟아져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사람들을 짓밟고 억누르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돈은 오히려 억압에 대한 해법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장 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돈은 읽고 쓸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중앙통제경제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준 셈이다. 만일 어떤 경제적 정보 기술을 당신에게 유리하도록 하려면 대개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 자신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7장 두 번째 정보혁명)
P.235
자, 고맙다, 미개인들이여! 우세한 문명이 정체되고 쇠퇴하여 넌제로섬의 행진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게 되면 ─문화진화론자의 시각으로 볼 때─그 문명에는 골칫거리가 생겨 마땅하다. 그런 다음 그 시스템을 산산조각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미개인들이 문명화된 밈들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드러난 이상, 아예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문화의 재건이 얼마나 자주 필요한지를 생각해볼 때 문화 해체반이라는 미개인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게 부각된다.233p
어떤 의미에서 미개인들은 문화의 진화에서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제로섬 동력의 한 특수한 사례, 즉 이웃한 사회들 사이의 냉혹한 경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쟁은 경직된 사회를 크든 작든 재건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동요하도록 만든다. 그와 같은 사회는 주변의 거대한 문명에 흡수되어 동화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은 미개인의 침입을 받아서 미개인의 손에 의해 해체된 후에 나중에 다시 집결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사회는 재생하여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될 수도 있다. 아놀드 토인비가 강조한 ‘도전과 응전’의 동력에 따라서. 어떤 경우든 요점은 항상 동일하다. 착취, 독재, 자기 권력의 확대의 성향이 아무리 뿌리 깊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성향에 굴복해버리는 사회는 이 세상에 오래 발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10장 우리의 친구 미개인들)
P.277
중국의 수력 방적기에 경탄한 마크 엘빈은 “만일 당시 중국이 보였던 발전 양상이 그 뒤를 이어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갔더라면 중세 중국은 향후 서양보다 400년이나 앞서서 직물 생산 분야에서 진정한 산업혁명을 일구어냈을 것이다.”
중세 말기 세계적 우위를 점유한 중국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마주하고서 끈질긴 유럽중심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자기네 입맛에 맞게 요리했다. 중국이 스스로 산업혁명을 이루어낼 기회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섰는지를 우리 모두 알게 된 이상 실제로 그 기회를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훨씬 더 용서받지 못할 못난 짓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성실하지만 아둔한 학생으로 평가받던 중국은 이제 머리는 좋은데 성적이 안 좋은 학생으로 재분류되었다. 어쨌거나 여전히 낙제점인 것은 변함없다. “불가사의한 점은 중국이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라고 랜즈는 못 박았다.
(12장 불가사의한 동양)
P.288~301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만일 ‘유럽의 기적’의 핵심이 지리적 상황에 있다면, 유럽과 중국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상대적 근접성이라는 지리적 상황의 차이가 아니라 유럽과 중국의 정치적 지형이라는 지리적 상황의 차이에 있다. 유럽은 밈들을 시험할 수많은 독립적인 실험실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중국은 정치적 단일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단일성은 일상적 거래에 있어서는 좋은 자산이지만 기술적 우위를 놓고 벌이는 장기적 경주에서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인쇄기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 혁명을 가져온 정보 기술을 위해 길을 닦아준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쇄기는 그러한 혁명의 전조가 되었다. 독특하고 어떤 면에서 역설적인 결과에 의해 인쇄기의 혁명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icroelectronics 혁명의 최종 국면과 유사하다. 실제로 인터넷이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과거에 인쇄기가 사람들의 정치적·사회적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훌륭한 역사적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현대(오늘날)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근대 초기를 닮았다. 그 정도가 더 클 뿐이다.
(12장 불가사의한 동양)
더보기
추천글
조선일보: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09년 11월 21일자
한겨레 신문: 한겨레 신문 2009년 11월 21일 교양 새책 더보기
저자 소개
지은이: 로버트 라이트 신간 알림 신청
최근작 : <불교는 왜 진실인가>,<신의 진화>,<넌제로> … 총 107종 (모두보기)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공문제와 국제관계, 그리고 진화심리학의 전신인 사회생물학을 공부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진화심리학, 역사, 종교, 전쟁, 기술 등의 주제로 대중과 소통하는 저널리스트의 경력을 쌓아왔다. <뉴요커> <애틀랜틱> <타임> <뉴리퍼블릭> 등 주요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사이언스> 기자로 근무하며 쓴 과학, 기술, 철학에 대한 칼럼으로 ‘미국 잡지상’을 수상했다. 첫 번째 저서인 『세 과학자와 그들의 신』(1989)이 ‘전미 도서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하며 주목받는 저술가로 부상했다. 그의 두 번째 책 『도덕적 동물』(1994)은 12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진화심리학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 밖에 『넌제로』(2001) 『신의 진화』(2009) 등의 저서가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심리학부와 프린스턴 대학 종교학부에서 가르쳤으며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불교와 현대 심리학Buddhism and Modern Psychology>이라는 일련의 온라인 강의를 진행한 바 있다(코세라와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 또 정치, 세계문제, 철학, 과학 등의 주제를 다루는 비디오 블로그 <블로깅헤드Bloggingheads.tv>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대학의 과학 및 종교 객원교수이며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옮긴이: 임지원 신간 알림 신청
최근작 : … 총 41종 (모두보기)
서울대학교에서 식품 영양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인문 과학서를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는 《공기》, 《에덴의 용》, 《진화란 무엇인가》, 《섹스의 진화》, 《스피노자의 뇌》, 《넌제로》, 《슬로우데스》, 《루시퍼 이펙트》, 《급진적 진화》, 《사랑의 발견》, 《세계를 바꾼 지도》, 《꿈》, 《빵의 역사》(공역)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전작 <도덕적 동물>로 찬사를 받은 로버트 라이트가 넌제로섬 원리라는 렌즈를 통하여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역사에 방향성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다. 그는 인류의 문화적 진화라는 독창적이고 광활한 여행지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본적인 도구와 기술의 발달과 농업의 발견, 추장사회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사회 집단, 역사에서 전쟁의 역할, 문자와 인쇄의 의의, 그리고 돈과 거래와 통신의 놀라운 위력 등을 마주하게 된다. 또 봉건주의, 자본시장, 환경문제, 초국가적 조직 등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며 이러한 역사의 진화와 인간의 협동을 ‘넌제로섬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방향성은 결국 예정되어 있는 ‘하나 된 세계’로 향해 나아갈 것으로 보았으며, 그 실례로 UN, EU, IMF, WTO 등 초국가적인 형태의 집단의 등장과 형성과정, 그 미래를 진단한다. 실제로 EU는 2009년 11월 19일 EU대통령과 외무장관을 선출할 예정이고 2009년 12월 1일 정식으로 리스본 조약이 발효된다. 생물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나고,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정교해지는 넌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다. 넌제로섬 원리는 일종의 잠재력이다. 어떻게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손실을 볼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넌제로섬 원리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생명이 나아가는 기본적인 방향에 일종의 추진력을 제공한다. 이 원리는 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경우 생물의 진화가 고도로 지능이 발달한 생명체, 즉 기술과 문화의 다른 측면들을 생성해낼 수 있을 만큼 영리한 존재를 창조해낼 가능성이 높은지 설명해준다. 이 원리는 또한 생물학적 진화의 뒤를 이어 일어나는 기술, 좀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문화의 진화가 그 지능을 가진 종의 사회 구조를 더 풍부하게 하고 확장시켜 궁극적으로 행성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 조직을 형성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지 설명해준다. 저자는 세계화가 증기선이나 전신 장치가 발명된 시점보다도, 아니 심지어 우리가 문자나 바퀴를 발명한 시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생명의 탄생 순간부터 미리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었으며, 그 이후 전 역사에 걸쳐서 넌제로섬 원리의 가차 없는 논리는 해가 갈수록 국가들 간의 관계가 점점 더 많은 넌제로섬을 만들어내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지향해왔다고 강조한다. ▣ 자연의 비밀 계획 18세기 칸트는 「세계주의적 목적을 가진 보편적인 역사학에 대한 관념Idea for a Universal History with a Cosmopolitan Purpose」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놓았다. 이 에세이는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숨겨진 계획’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서 우리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자연에 의해 심어진 씨앗이 완전히 만개하고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운명이 완전하게 실현된 사태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칸트가 상상한 완성된 인간의 운명은 국가들 간에 평화가 지속되고 일종의 세계 정부에 의해 그 평화가 유지되는 상황을 포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수천 년 간의 반목과 ‘비사회적’(비사회적 사회성)다툼에 대한 궁극적인 보상인 셈이다. ▣ 논점 넌제로에서 논의 되는 중점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계 속에서 상호 협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자연 도태를 증명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자연 도태가 발생하는 것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나, 상호협력의 정도 또는 신뢰의 정도가 증가하는 것과는 독립적이라고 쓰고 있다. 이 독립적인 특성은 지능을 말하는데, 인류의 지능은 유기체의 진화과정에서 얻은 최고의 정보들만을 가지고 정점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생물의 역사에서도 정보 처리과정을 통해 생물의 자연 도태가 왜 발생했는가에 대한 증거들이 나타난다. 공격하는 이에게 매서운 화학 물질을 뿌리는 능력을 가진 곤충인 폭격수 딱정벌레를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스프레이 공격을 피하는 능력을 가진 약탈자만이 자연 도태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고 있듯이, “복잡함은 복잡함을 만들어 낸다.” 이런 상황은 종종 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군비 경쟁’의 대재앙으로 묘사되곤 한다. 유기체들이 다른 종과의 경쟁을 통해 얻은 것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증가하는 세계의 복잡함 때문에 지능은 높아질 수밖에 없게 되어있고 심지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와 생물의 역사의 전체를 보았을 때, 라이트는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관점과 전형적으로 대립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굴드는 그의 책에서“인간은 단지 제비뽑기의 행운으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진화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 발가락처럼 필연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도구를 개발하고 발달된 기술을 사용하는 고지능을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는 유기체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또 라이트는 인간의 역사와 생물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것, 즉 단일성이라고 주장했다. 첫째, 두과정이 동일한 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는 단순히 문화적 변화에 대한 그럴듯한 메타포가 아니고, 몇몇 기본적인 수준에서 문화의 진화와 생물의 진화는 동일한 기작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 문화의 진화와 생물의 진화는 동일한 연료를 이용하는데 이것은 제로섬의 힘과 넌제로섬의 힘 사이의 활기찬 상호작용이 이 두 종류의 진화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며 셋째, 두 과정은 평행을 이루고 있어서 같은 방향, 즉 장기적으로 넌제로섬 원리가 증대되고 그 결과로 복잡성의 정도가 더 깊고 넓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실제로 생물의 진화는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지면 문화의 진화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복잡하고 지적인 생물을 낳을 것이라고 보았고, 문화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진화의 총괄적인 경향을 더 심원하고 더 광대한 복잡성을 향해 이끈다고 말한다. ▣ 인간 사회의 복잡함과 넌제로섬 해결 라이트는 인간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넌제로섬의 이익”을 수확할 가능성도 증가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전자통신을 통한 의사소통은 세계적인 수준의 무역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산할 수 없거나 자국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무역이라는 것을 통해 다양한 사회 간에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괜찮은 방법’은 모두에게 이득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유사하게, 세계 정부는 공통의 문제를 같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외계인이 침략한다거나 북극의 빙하가 녹는다거나 하는 문제에서 세계는 그들의 통신 기술을 사용하여 사회를 하나로 묶어 방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은 가이아 이론과도 유사하다. 물론 사회가 결합해서 싸워야할 공공의 적은 항상 북극의 빙하는 아니다. 때로는 다른 인류일 수도 있다. 라이트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었다. 국가 간의 전쟁이 종종 기술과 문화의 진화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은 맨해튼프로젝트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넓게 보았을 때, 궁극적으로 혜택을 줄 수도 있을 원자 에너지를 개발하고, 그와 관련된 기술 개발에 이바지 했다. 더 나아가, 진보된 사회의 국가는 전쟁에서 더 승리할 확률이 많고, 국가 정부 시스템을 하나의 기술로써 전파 할 수도 있다고 역설한다.
---------
마이리뷰쓰기
구매자 (1)전체 (1)
Lulu 2011-08-21
---
     

-------------

Why Is It Difficult to Get Christians to Care About the Earth?

Why Is It Difficult to Get Christians to Care About the Earth?


COMMENTARY
By Stephen Mattson 3-28-2017
https://sojo.net/articles/why-it-difficult-get-christians-care-about-earth?fbclid=IwAR1u-2-iworF8bwoK0IVI_NIg7tmdCUe2rsnU8SMM1QjJ9bMQoT3peZodUs


As presidential orders and administrative policies continue to scale back environmental protections, it’s important for Christians to realize that this is a vitally important spiritual issue.

Many Christians ignore environmental issues because they don’t view it as an important faith-related concern — but what if environmentalism was essential to evangelism? In many ways, taking care of our environment is a direct form of evangelism, but many Christians have yet to realize — and even reject — this truth.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 — 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 — 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people are without excuse. (Romans 1:20 NIV)

This verse is often referenced to justify the doctrine of Natural Revelation and is the damning biblical evidence used against non-believers for rejecting God — even if they’ve never directly heard the gospel message. Christians point to this Scripture passage to show that God’s existence is visibly obvious through the beauty of creation — but is it really?

READ: Trump Just Signed an Executive Order on the Environment. Here's What You Need to Know.

Theologians have often argued that the splendor and wonder of creation — Natural Revelation — is observable proof of God and God’s awe-inspiring power. But what happens when it’s not visible? What are the spiritual ramifications of destroying our world?

The concept of Natural Revelation is often taught from a privileged and Westernized perspective, where scenes of picturesque mountain ranges, pristine lakes and rivers, beautiful wild animals, and lovely plants are used to portray the sheer majesty of God.When the natural physical existence is heading toward death instead of life, how does it point people to God?

For many of us, this is an easy reality to absorb because we love nature and have access to the outdoors, scenic parks, and unpolluted land. But for many around the world, the idea of Natural Revelation is absurd, and often a theological idea that actually argues against the existence of a God.

Because when water is too unsafe to drink, air too toxic to breathe, and the sheer decay of the surrounding environment endangers you and your family — how is God glorified? When the natural physical existence around you is taken away, broken, or heading toward death instead of life, how does this possibly point people to God?
READ: Christians Affirm the EPA's Clean Power Plan

The sad reality is that Natural Revelation — as we interpret it to be — doesn’t really exist for millions of people living in conditions where their environment is being exploited for corporate and political gain.


The sad truth is that Natural Revelation isn’t equally apparent to everyone, which is why creation care and environmentalism is so important. Because if you really believe that the earth reflects God’s glory, by not taking care of it and allowing it to become corrupted — you’re essentially keeping people from experiencing the goodness of God.

The heavens proclaim the glory of God. The skies display his craftsmanship. Day after day they continue to speak; night after night they make him known. They speak without a sound or word; their voice is never heard. Yet their message has gone throughout the earth, and their words to all the world. (Psalm 19:1-4)

The Bible says that the skies declare God’s craftsmanship, but what happens when people can’t see the sky due to smog and waste?

Pollution, destruction, and the exploitation of our world isn’t a victimless crime — it’s intentionally hiding God from others, and the act of making our earth less desirable is blinding others to the goodness of God.

If Christians seriously want others to experience God, they should start making the earth a better place — ultimately reflecting the magnificence of God.


Stephen Mattson


Stephen Mattson is the author of The Great Reckoning: Surviving a Christianity That Looks Nothing Like Christ. You can follow him on Twitter (@mikta) or on Facebook.

Listening Deeply for Peace -- Thich Nhat Hanh - Lion's Roar

Listening Deeply for Peace -- Thich Nhat Hanh - Lion's Roar



Listening Deeply for Peace

Without deep listening and gentle loving speech it is very difficult to move towards peace. Peace will only become a reality, says Thich Nhat Hanh, when world leaders come to negotiations with the ability to hear the suffering at the root of all conflicts.

Buddha holding a flower
Photo by Brenkee.
A traditional Vietnamese Zen garden is very different from a Japanese Zen garden. Our Zen gardens, called hon non bo, are wild and exuberant, more playful than the formal Japanese gardens with their restrained patterns. Vietnamese Zen gardens are seriously unserious. For us, the whole world is contained in this peaceful place. All activities of life unfold in true peace in the garden: in one part, children will be playing, and in another part, some elderly men will be having a chess game; couples are walking; families are having picnics; animals are free to wander around. Beautiful trees are growing next to abundant grasses and flowers. There is water, and there are rock formations. All ecologies are represented in this one microecology without discrimination. It is a miniature, peaceful world. It is a beautiful living metaphor for what a new global ethic could bring.
War is not a necessary condition of life. The root of war, as with all conflicts, is ignorance, ignorance of the inherent goodness—the buddhanature—in every human being. The potential for ignorance lives in all of us; it gives rise to misunderstanding, which can lead to violent thoughts and behavior. Although ignorance and violence may not have manifested in your life, when conditions are sufficient, they can. This is why we all have to be very careful not to water these seeds and not to allow them to develop roots and grow into arrows.

The Roots of War

When one country attacks another, it is out of great fear and a kind of collective ignorance. For instance, the French fought to keep Vietnam as their colony, because they thought that if they possessed Vietnam, they would be happy. So they sent many young men to Vietnam to kill and to be killed. We know, when we look deeply, that happiness does not come from possessing something or someone; it comes from kindness and compassion, from helping to ease suffering.
If the American people had sat down and practiced looking deeply, they would have seen that the Vietnam War was entirely unnecessary, that their own lives could not be improved through the suffering of another country or the suffering of their own young men. The United States senselessly wasted many lives in this war when it could have supported both North and South Vietnam in their different models of development, helping the Communists and the non-Communists alike to rebuild their societies. This would have been much wiser than supporting one side and fighting the other. If France and the United States had yielded autonomy to Vietnam, Laos, Cambodia and Thailand, helping these countries to develop instead of waging war, all sides would have profited from such a friendly relationship. After a long period of suffering, these countries are finally moving in this direction, but this could have happened much earlier without the terrible loss of life.
All violence is injustice. We should not inflict that injustice on ourselves or on other people. Historians and teachers as well as politicians should look deeply at the suffering caused by wars, not just at the justifications that governments give for them. We have to teach our children the truth about war so they learn from our experiences and understand that violence and war are not the right way, that they are not the right actions to take. We have to show our children that people on both sides of war—the French and American soldiers in Vietnam as well as the Vietnamese people—were victims of the ignorance and violence rooted in their societies and governments. Remember, there were no winners.
As long as we allow hatred to grow in us, we continue to make ourselves and others suffer. As we look deeply at the wars in our recent history, we have to transform our hatred and misunderstanding into compassion. We have to recognize that those who have made us suffer are also victims. Many who had a father, brother or friend killed in the Vietnam War have been able to transcend their suffering and to reconcile with the other side, Vietnamese and American. They have done this for their own sake and for the sake of their children.
How can we as individuals influence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of our nations and move in the direction of peace? We do this by uprooting the roots of violence and war within ourselves. To prevent war, we cultivate nonviolence. We practice mindfulness in our daily life so that we can recognize and transform the poisons within us and our nation. When we practice nonviolence in our daily life, we see the positive effects on our families, society and government.

Peace Is Possible

In the summer of 2001 in our community in Plum Village, France, about eighteen hundred people came and practiced with us. Among them were a few dozen Palestinians and Israelis. We sponsored these people hoping they could have the opportunity to practice walking meditation together, to share a meal together, to listen to the teachings of mindfulness practice and to learn the act of deep listening and gentle, loving speech. The Israelis and Palestinians spent two weeks with us and participated in all activities.
At the end of their stay, the whole community gathered together and our visitors stood up and gave a report. After only two weeks of practice, they had transformed very deeply. They had become a community of brothers and sisters, Palestinians and Israelis. They said to us, “Dear community, dear Thich Nhat Hanh, when we first came to Plum Village we couldn’t believe it. Plum Village did not look real to us because it is so peaceful. In Plum Village, we did not feel the kind of anger, tension and fear that we feel constantly in the Middle East. People look at each other with kind eyes, they speak to each other lovingly. There is peace, there is communication and there is brotherhood and sisterhood.” One member of the delegation said, “We spent two weeks in paradise.” Another person wrote to me after he returned home and said, “This is the first time that I have believed that peace is possible in the Middle East.”
What did we do to make the third truth—that well-being and peace are possible—real to them? Honestly, we did not do much. We just embraced these friends from the Middle East as brothers and sisters. They learned to walk mindfully with us, to breathe in and out mindfully with us, to stop and be there in the present moment with us, and to get in touch with what is pleasant, nourishing and healing around them and within themselves. The practice is very simple, but supported by a practicing sangha, they were able to succeed more quickly than on their own and to touch the peace and happiness within each of them.
Together we all followed the basic practice: to do everything mindfully. We established ourselves in the here and now in order to touch life deeply. We practiced mindfulness while we breathed and walked and talked and brushed our teeth and chopped vegetables for meals and washed dishes. That is the basic daily practice that our friends learned. We in the sangha offered our support, sitting with our visitors and practicing listening with compassion with them.
We trained them to speak in such a way that the other side could hear and understand and accept. They spoke in a calm way, not condemning anyone, not judging anyone. They told the other side of all the suffering that had happened to them and their children, to their societies. They all had the chance to speak of their fear, anger, hatred and despair. Many felt for the first time that they were listened to and that they were being understood, which relieved a lot of suffering within them. We listened deeply, opening our hearts with the intention to help them express and heal themselves.
Two weeks of the practice of deep listening and using loving speech brought a lot of joy to our visitors and to all of us in Plum Village. We were reminded, hearing these stories, that during the Vietnam War, we Vietnamese, too, had suffered terribly. Yet our practice allowed us then and allows us still to see that our world is beautiful, with all the wonders of life available every day. This is why we know that our friends from the Middle East, too, can practice in the middle of war around them.
There were moments during the war when we wished so hard that there would be a cease-fire for just 24 hours. We thought that if we had only 24 hours of peace, we would have been able to breathe in and out and smile to the flowers and the blue sky. But we did manage to breathe in and out and smile, even then, because even the flowers had the courage to bloom in the middle of war. Yet still, we wanted 24 hours of peace during the war. We wanted the bombs to stop falling on us.
During the war in Vietnam, young people came to me and asked, “Do you think there will be an end to the war?” I could not answer them right away. I practiced mindful breathing, in and out. After a long time I looked at them and said, “My dear friends, the Buddha said everything is impermanent, including war.”
Before going back to the Middle East, our friends promised us that they would continue the practice. They told us that on the local level they would organize weekly meetings so they could continue to walk together, sit and breathe together, share a meal together and listen to each other. Every month they have had an event to do this. They practice true peace even in the midst of war.

True Peace Negotiations

When you come to any negotiation, whether at work or in a meeting with other parents, teachers or neighbors, you have hope for peace. When your representatives go to a negotiation table, they hope for peace. But if you and they do not master the art of deep listening and loving speech, it is very difficult to move toward peace in any situation or to get concrete results. If we have not transformed our inner block of suffering, hatred and fear, it will prevent us from communicating, understanding and making peace.
I beg the nations and governments who would like to bring peace to the Middle East and other countries to pay attention to this fact. We need our governments to organize peace negotiations so that they will be fruitful. A very important factor for success is creating a setting where true communication can be practiced, where deep listening and gentle, loving speech can occur. It may take one month or two just for people to learn how to listen to each other, to talk so that the other side can hear and understand. It is important not to be in a hurry to reach a conclusion or an agreement about what to do for peace to be possible. One month or two is nothing compared with years of pain and suffering. But if we have a great determination, then five days may be enough to restore communication between people. Two weeks were enough for our Palestinian friends and our Israeli friends to begin to understand and to accept each other as brothers and sisters, to begin to practice and create peace. Two weeks were enough for them to have hope.
Too often in the past, peace conferences have been environments where people came and fought each other, not with weapons but with their fear. When we are carried away by our fear and prejudices, we cannot listen to others. We cannot just bring two sides together around a table to discuss peace when they are still filled with anger, hatred and hurt. If you cannot recognize your fear and anger, if you do not know how to calm yourself, how can you sit at a peace table with your enemy? Facing your enemy across a table, you will only continue to fight. Unable to understand yourself, you will only continue to fight. Unable to understand yourself, you will be unable to understand the other person.
The secret of creating peace is that when you listen to another person you have only one purpose: to offer him an opportunity to empty his heart. If you are able to keep that awareness and compassion alive in you, then you can sit for one hour and listen even if the other person’s speech contains a lot of wrong perceptions, condemnations and bitterness. You can continue to listen because you are already protected by the nectar of compassion in your own heart. If you do not practice mindful breathing in order to keep that compassion alive, however, you can lose your own peace. Irritation and anger will come up, and the other person will notice and will not be able to continue. Keeping your awareness keeps you safe.
Peace conferences must create environments that can help people calm down and see that they are suffering and that the other side is suffering also. Many leaders have tried to sponsor talks and discussion, but theirs was not the way of practice. They did not practice to transform anger and fear into deep listening and loving speech. When leaders do practice, there will be a chance for true reconciliation. After the practices of deep listening and kind and loving speech have dissolved bitterness, fear and prejudice, people can begin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Then reaching peace will be much easier. Peace will become a reality.

Practicing Deep Listening with Other Countries

If America invests all her heart and mind into this practice, then other people will also be able to tell her about their suffering. If America goes back to herself and restores the spirit of her forefathers, America will be truly great. She will then be in a position to help other countries establish similar forums, to invite other groups and countries to express themselves.
The setting must be one of safety and love. Countries from around the world can come together not as enemies that bomb and destroy each other but as wise people sponsoring sessions of deep listening. All nations could come and help with the practice; people from different cultures and civilizations would have the opportunity to speak to one another as fellow human beings who inhabit the same planet. In addition, people who are not just politically minded but humanists who understand the suffering of others could be invited—people who know how to sit and listen calmly, with compassion. These people would know how to create an atmosphere of peace without fear so that others can have the chance, the inspiration, and the desire to speak. We must be patient. The process of learning about each other’s suffering will take time.
If such an international forum were broadcast around the world, everyone could participate and have the chance to learn about the causes of suffering. The first and second noble truths of the Buddha, the awareness of suffering and the awareness of the causes of suffering, could be practiced together by billions of people.
The first and second noble truths will lead us to the third and fourth noble truths; namely, the awareness that there is a path out of suffering and that that path consists of certain concrete steps, such as right understanding, right thinking, right speech and right action.

Creating Peace in the World

The antidote to violence and hatred is compassion. There is no other medicine. Unfortunately, compassion is not available in drugstores. You have to generate the nectar of compassion in your heart. The teaching of the Buddha gives us the means to generate the energy of compassion. If we are too busy, if we are carried away every day by our projects, our uncertainty, our craving, how can we have the time to stop and look deeply into the situation—our own situation, the situation of our beloved one, the situation of our family and of our community, and the situation of our nation and of the other nations? Looking deeply, we find out that not only do we suffer but also the other person suffers deeply. Not only our group suffers but the other group also suffers. Once awareness is born, we know that punishment, violence and war are not the answer.
The one who wants to punish is inhabited by violence. The one who endures the suffering of the other person is also inhabited by the energy of violence. Violence cannot be ended with violence. The Buddha said that responding to hatred with hatred can only increase hatred a thousandfold. Only by responding to hatred with compassion can we disintegrate hatred.
The future is a notion. The future is made of only one substance, the present. If you are taking good care of the present moment, why do you have to worry about the future? By taking care of the present, you are doing everything you can to assure a good future. Is there anything else you can do? Live the present moment in such a way that peace and joy may be possible here and now—that love and understanding may be possible. Dwelling happily and peacefully in the present moment is the best thing we can do to ensure peace and happiness in the future.
We have to practice looking deeply as a nation if we want to get out of this difficult situation of war and terrorism. Our practice will help the other nations to practice. I am sure that America is very capable of punishing. The United States can send bombs; the whole world knows she is very capable of doing so. But America is great when she acts with lucidity and compassion. I urge that when we are suffering, when we are overcome by shock, we should not do anything, we should not say anything. We should go home to ourselves and practice mindful breathing and mindful walking to allow ourselves to calm down and to allow lucidity to come, so we can understand the real roots of our suffering and the suffering of the world. Only with that understanding can compassion arise. America can be a great nation if she knows how to act with compassion instead of punishment. We can offer peace. We can offer the relief of transformation and healing.
It is my deep wish that the American people and the people of other countries become spiritual allies and practice compassion together. Without a spiritual dimension and practice, we cannot really improve the situation of the world. We can come together as a family in order to look deeply into our own situation and the situation of the world.
Practicing peace is possible with every step, with every breath. It is possible for us to practice together and bring hope and compassion into our daily lives and into the lives of our families, our community, our nation and the world.

From Creating True Peace by Thich Nhat Hanh © 2003 by the Venerable Thich Nhat Hanh. Reprinted by permission of The Free Press, a division of Simon & Schuster, Inc., NY.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 Massimo Pigliucci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 Massimo Pigliucci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April 24, 2019Massimo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s recently published a volume edited by Radin Dardashti, Richard Dawid, and Karim Thebault entitled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I have contributed a chapter to the effort, on “Philosophy of science and the string wars: a view from the outside,” which is available as free download here.

This is the description of the book: Do we need to reconsider scientific methodology in light of modern physics? Has the traditional scientific method become outdated, does it need to be defended against dangerous incursions, or has it always been different from what the canonical view suggests? To what extent should we accept non-empirical strategies for scientific theory assessment?

Many core aspects of contemporary fundamental physics are far from empirically well-confirmed. There is controversy on the epistemic status of the corresponding theories, in particular cosmic inflation, the multiverse, and string theory. This collection of essays is based on the high profile workshop ‘Why Trust a Theory?’ and provides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on empirical testing in fundamental physics from leading physicists, philosophers and historians of science. Integrating different contemporary and historical positions, it will be of interest to philosophers of science and physicists, as well as anyone interested in the foundations of contemporary science.

2019/04/24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 - Daum 카페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 - Daum 카페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무교회자료]
박상익|조회 306|추천 0|2009.06.29. 09:15http://cafe.daum.net/nonchurch/Tikv/110



2009년 4월 23일 풀무고등학교 강당에서 행한 개교51주년 기념강연입니다.
김현자 선생님께서 녹취록 작성에 애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풀무학교에 대해 궁금한 분은 여기로 가보세요.
http://www.poolmoo.or.kr/

http://www.poolmoo.net/

====================================

김교신 선생과 무교회 정신


풀무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의미로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삶을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그리고 김교신 선생 한 분만이 아니라 김교신 선생의 스승이신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선생의 제자가 되는 노평구 선생, 이 세 분의 믿음과 사상, 삶의 모습을 함께 살피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4월은 김교신 선생의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교신 선생은 1901년 4월 11일에 태어나셔서 45년 4월 25일 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4자가 많이 들어있지요, 한국 사람은 4를 좀 싫어하죠? 그러나 이 ‘사’자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사에는 ‘선비 사(士)’자도 있거든요. 김교신 선생에게는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라는 별명이 있어요. 조선 선비 김교신 선생이 그리스도를 만나 기독교인 김교신의 삶과 믿음이 나왔다는 얘기죠. 풀무 개교기념일은 김교신 선생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두 날 사이에 끼어 있죠? 모쪼록 풀무 출신 중에도 김교신 선생 같은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가 많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축’(軸)이란 말을 아시지요? 자동차 바퀴의 가운데 끼는 기둥을 축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추축시대’(axial ag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 말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라는 분이 한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류 역사의 근간이 되는 종교와 사상은 기원전 5세기경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사야, 부처, 공자, 이 네 분이 추축시대를 만든 분입니다. 세계사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이 공교롭게도 이 때 동시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기원전 5세기를 추축시대라고 한 거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분들이 살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지만 정신적, 영적, 도덕적으로 그 시대를 결코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러면 ‘풀무의 추축’은 무엇인가요. 저는 김교신 선생으로 대표되는 무교회 기독교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추축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하지, 왜 김교신이냐고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요즘 어디 가서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일반인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문, 어떤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함께 서양사를 공부한 후배 가운데 목사가 셋이 있습니다. 교파도 다양해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이렇게 모두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장로교 목사 후배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김진홍 목사 아시죠? 그 분이 오래 전에 한국 기독교 역사 100년을 기념해서 고전이 될 만한 책 10권을 출간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첫 번째가 『김교신 전집』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결국 10권을 채울 수 없었답니다. 기독교 100년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10권도 안 됐다는 것이죠. 한국 기독교 역사가 자그마치 100년, 기독교 인구 1,000만인데 말입니다. 한심하지 않습니까? 일본 대형서점에 가면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무교회 신앙인들의 저서가 서점 한쪽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0년 세월에 길이 남을 고전 10권도 못 만드는 기독교입니다. 그래도 교회에 속한 분들 중 김진홍 목사는 이례적으로 김교신 선생 얘기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동영상 설교를 봤는데, 그분 말씀이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가 아닌 교회 안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더군요. 하지만 뭘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만일 김교신 선생이 교회 안에 머물렀다면 <김교신 전집> 같은 저작도 못 냈을 것이고, 그런 훌륭한 삶을 살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애도했습니다. 천주교는 전교 200년 만에 김 추기경이라는 인물을 열매로 배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 한 분이 타계했을 때 온 국민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 이것이 개신교의 문제 아닐까요? 김수환 추기경 같이 민족과 사회의 ‘어른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개신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20세기 전반을 살다 가신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인 중 드물게 그 시대의 ‘어른 노릇’을 한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과 신앙과 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김교신 선생의 삶과 신앙을 4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무교회는 민족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죠? 김교신 선생에게 이웃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조국과 민족이었어요. 그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사셨어요. 늘 겨레와 동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셨습니다. 선생은 젊은 날 3․1만세운동 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배의 갑판을 발로 구르며 “아무래도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정체성을 절실히 자각했던 것입니다.

2008년부터 전 세계가 경제위기라고들 야단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엔 이런 위기를 미리 간파하고 경고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외국의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경제학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수백 명인데, 왜 그럴까요? 그들 대부분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답니다. 국내 학술지 아닌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점수를 몇 배나 더 받거든요. 그런데 미국 학술지는 편집위원이 모두 미국 학자겠죠? 그러니 미국 편집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로 그들의 성향에 맞는 논문을 써야 한국 대학에서 점수를 많이 받아서 교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고 승진하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국 경제에는 관심이 없고, 미국 학술지 편집위원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해 연구해서 그들 눈에 들 생각만 합니다. 참 희한하지요? 한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 가르치면서 월급 받아가며 살지만 한국 경제와 한국 현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그런 연구 안 해도 교수 생활 하는데 지장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 인정을 받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이 안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적들을 여러 명 맞아 싸워 이기는 얘기 알죠? 헤라클레스의 적 가운데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있습니다. 안타이오스의 어머니가 지신(地神) 테라입니다. 테라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 누구와 싸워도 이기지요. 그러나 결국 누가 이겨요?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를 번쩍 들어 올려 목을 졸라 죽였어요. 안타이오스는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만 힘을 쓸 수 있어요. 헤라클레스는 그 약점을 알았던 거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요, 안타이오스가 발을 굳게 땅에 딛는 것, 그게 바로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철저히 우리 현실에 발을 딛고 산 분이었습니다. 요즘 경제학 교수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일제의 극한적 압제 아래에서도 끝까지 친일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대 일제의 단말마적 억압으로 당시 거의 모든 민족 지도자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바로 그 때, 김교신, 함석헌, 장기려, 유달영 이런 분들이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만 일 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가장 악랄한 억압이 있던 그때에 민족에 대한 충절과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경찰은 김교신 선생과 동지들에게 “너희 놈들은 가장 악질적인 부류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혼을 심어서 백년,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될 터전을 마련하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연세대 신학과 서정민 교수는 교회사 전공을 한 분인데, 󰡔성서조선󰡕을 일컬어 ‘이 시기에 이만한 민족적 신앙 양심을 지키며 나온 간행물을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과 조국에 대한 정절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낸 김교신 선생의 신앙은 바로 정체성 확립을 바탕에 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 기독교는 주체적 기독교입니다.



두 번째, 무교회는 우주교회입니다. 온 우주가 다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실, 논밭, 직장 이 모든 곳이 교회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교회 장로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그분의 소속 정당 내부에서조차 우려할 정도로 축재 과정에서 갖가지 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이 없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다니던 소망교회에서 일요일마다 ‘헌신적으로’ 주차장 안내 봉사를 해서 장로가 되었다고 하네요.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지극정성으로 봉사해서 ‘성도(聖徒)’ 소리 들어가며 인정을 받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면 안면을 싹 바꿔서 탈세, 불법, 비리를 저지르며 사는 것이 교회 신앙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소의 삶이야 어떻든 교회 출석만 잘 하면 만사형통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따로국밥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양두구육(羊頭狗肉) 신앙을 견딜 수 없어서 등장한 것이 무교회 정신, 무교회 신앙입니다.



무교회정신은 기독교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인문학의 위기란 말들 많이 하지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입니다. 교수들이 캠퍼스 안에서만 인문학을 하지, 바깥세상 사람들과는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학교수들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거든요. 여러분 인문학의 원조는 소크라테스지요? 아테네의 광장을 ‘아고라’라고 합니다. 평소엔 시장으로 사용하다가 필요하면 정치토론장이 돼요.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 가서 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문답법, 산파술을 써서 진리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어요. 시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인문학 교수들이 이 시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 교수들은 대학 울타리 안에서만 맴돕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회신앙과 똑같지 않습니까? 정당도 마찬가지죠. 나라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당리당략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무교회 정신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공통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교회 운동은 우리가 서있는 모든 자리에서 바깥세상과 긴밀하게 소통하자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홍성이라는 지역사회와 소통을 긴밀하게 하고 있는 풀무는 아주 돋보입니다. 풀무는 이런 점에서 무교회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셋째,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내셨는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내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독립신앙을 달리 말하면 ‘개인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즘 개인주의라고 하면 대개 좋지 않은 뜻으로 많이 쓰고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개인주의는 귀중하고 이기주의는 비천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존중받아야 하고 이기주의는 배척받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존중하며 자기와 남을 함께 존중하는 마음이므로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이다.” <우치무라 간조 전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회 시간에 자유주의에 대해 배웠죠?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바로 이 개인주의입니다. 그런데 서양역사에서 이 개인주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등장했는지 아세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랍니다. 종교개혁이 개인주의를 싹 틔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서를 따지자면 ‘종교개혁→개인주의→자유주의’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가톨릭 신앙은 사제의 기적적 권능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평신도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결국, 가톨릭에서 사제와 평신도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것을 루터가 깼습니다. 모든 평신도가 들판에서, 공부방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지상주의, 믿음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를 종교개혁의 3대 원리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모든 사람이 독립된 인격으로서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 개개인이 존중받는 신앙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 중 상당수가 가톨릭의 사제주의로 환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등장하면서 가톨릭의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는 교황이 한 명뿐이지만 개신교는 교회마다 교황이 한 명씩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어요.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린 거죠. 독립신앙을 엿 바꿔 먹고 가톨릭 흉내 내기 바쁜 한국 개신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넷째, 무교회 신앙은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글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전도의 정신󰡕이라는 책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도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음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더욱 밝히 알게 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의 비밀을 세상에 보여주는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 우치무라 선생에 의하면 넓고 깊은 지식은 하나님을 깊고 밝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누구보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신앙만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지만, 목수, 미장이, 농민, 학자, 정치가의 지도자는 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특히 네 가지 영역의 지식을 강조합니다.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여야 하기 때문에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직책이기 때문에 그 원리를 밝혀주는 사회과학을 몰라서는 전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계, 물질세계, 우주를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창조의 원리를 알려면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역사공부를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인류 발달의 기록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합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배웁니다. 풍토의 다양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의 사고방식만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미덕입니다.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가의 발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 발전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는 인류가 하나라고 하는 시야를 갖게 해줍니다. 역사는 전 인류, 전 세계를 보는 눈을 열어주기에 전도자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넷째, 훌륭한 전도자가 되려면 원어를 비롯한 성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인간을 알기 위해 사회과학과 역사학을, 자연계를 알기 위해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독교도 몰랐고 공부를 왜 하는지도 몰라서 허송세월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대학 시절 성경을 처음 접하고 나서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도 당혹스러웠어요.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서양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적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간 것을 일생일대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2006년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을 썼어요. 그걸 보고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다셨어요. 제가 장로교 같은 기성교단 소속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분은 거꾸로 아신 겁니다. 제가 무교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쓸 수 있었거든요. 만일 교회에 속했더라면 그런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교회이니까 가능했던 거지요. 저는 무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만난 덕분에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알고 싶은 것,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더군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 믿는다면서 책도 안 읽고, 학문도 등한시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저는 대학생 시절 노평구 선생께 성경을 배웠습니다. 노 선생께서는 “인간을 모르고 어찌 신을 알 수 있는가?”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특유의 말투로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되, 자기 분야에서 최소한 박사까지는 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성경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박사라고 하니까 무슨 껍데기 학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박사학위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세속의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전공 영역을 갖고, 그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지식을 쌓은 다음 성경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에 앞서, 인간을 바로알기 위한, 상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러 해 전 제가 운영하는 무교회 카페에서 알게 된 한 대학생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말이 놀랍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학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더니 목사님, 전도사님이 그런 건 지적 교만이라면서 경계를 하더라는 군요. 그 얘길 읽고 정말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대학생은 공부 않고 무식해도 좋다는 건가요? 무식할 특권이라도 있는 건가요? 무식하려면 저 혼자 무식하고 말 일이지 향학열에 불타는 청년의 학구열에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건 앞 못 보는 장님이 두 눈 멀쩡한 사람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 바로 공부입니다. 노평구 선생께서는 평소 “사회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신앙은 쓸 데 없는 신앙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이웃,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려면 어떤 공부와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를 개교 51주년이 되는 오늘,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네이버 카페



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네이버 카페




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자유게시판


2019.04.23. 23:52




soft103a(soft****)
나눔회원


https://cafe.naver.com/yooyoonjn/1709






마틴 부버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한 20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대인 사상가 중 하나로 알려진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1878년 2월 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다뉴브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았지만 네 살 때 어머니가 가출함으로 어린 마틴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갈리시아에 살던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 솔로몬 부버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도 부유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미드라쉬Midrash라는 성경 주해 방식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유대교 학자이기도 했다. 어린 부버는 열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히브리어 성경, 유대인 구전문학 등을 공부했다.




마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사항이었다. 어린 마틴은 영문도 모른 채 오랫동안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기다리기를 포기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어느 장교와 함께 러시아로 도망가 거기서 두 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마틴이 서른네 살 때 어머니가 찾아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마틴 부버가 14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그때부터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폴란드 계의 김나지움에 다녔다. 유대 전통에서 떠나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등을 읽었다. 18세가 되었을 때 비엔나 대학에 들어가1년 정도 머물다가 라이프치히, 취리히, 베를린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철학, 고전어, 독문학, 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베를린에 있을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딜타이(1833~1911)와 짐멜(1858~1918)이었다. 20세경에는 베를린에서 시온주의Zionism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시온주의란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의 제안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자는 운동이었다. 부버의 경우 시온주의의 주요 과제는 유대인들의 정신적·사회적 성숙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라 본 데 반해 헤르츨은 그것을 철두철미한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 하나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밀고 나갈 뿐 종교나 문화의 필요성을 무시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부버는 시온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자기의 학업을 계속하여 1904년 비엔나 대학에서 신비주의 사상가들인 야콥 붸메Jakob Boehme와 니콜라스 쿠자누스Nikolaus Cusanus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틴 부버가 시온주의 운동과 결별했지만 그 운동에 참가하므로 얻게 된 수확은 컸다. 무엇보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기의 민족적 뿌리를 재인식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대인 전통, 특히 하시디즘의 가르침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버는 학위를 받은 후 유대교의 신비주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목적으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하시디즘 연구에 몰두하면서 스스로도 신비주의 체험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그 이후 그는 근대 하시딤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에 관한 재료를 모아 1908년 『바알 셈의 전설』 같은 책을 출판하는 등 유대교 신비주의에 관한 책을 내기 시작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09년부터 마틴 부버가 중국 사상,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 말로 된 『장자莊子』 번역서들을 참고하여 1910년 『장자의 이야기와 비유』라는 제목으로 『장자』의 상당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자기 나름대로 풀이한 책을 펴냈다. 그 외에도 『도道의 가르침』(1910), 『중국의 귀신 및 사랑 이야기』(1911)라는 책도 출판하고, 출판은 되지 않았지만 노자 『도덕경』에 대한 강연 모음도 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버가 도가 사상, 특히 『장자』를 접한 것이 후기 그의 사상의 핵심이 되는 ‘나와 너’라는 대화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부버 전문가 허만Jonathan R. Herman에 의하면 부버에 있어서 『장자』는 “그의 ‘나와 너’라는 나비가 나오게 한 유충幼蟲”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12년 이후 부버의 주관심은 신비주의 일변도에서 점차 ‘대화對話’ 쪽으로 넘어갔다. 점차 ‘상호성’이라든가 ‘만남’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된 것이다. 개인적 황홀의 경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몰입보다 인간 상호간, 인간과 신, 나와 너와 같은 인격적 만남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려 한 셈이다. 1916년 대화에 관한 책을 내리라는 계획을 수립하고, 1919년 『나와 너 Ich und Du, I and Thou』라는 책의 초고가 나왔고, 이것이 퇴고를 거듭하여 1923년 완결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와 너』는 짧은 책이지만 마틴 부버의 주저主著라 할 수 있다. 그가 쓴 그 이후의 책들은 어느 면에서 이 책에 나온 기본 사상들을 설명하고 보충해주는 주해서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버는 저술활동 외에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서 유대인의 교사들, 청소년들, 성인들, 랍비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에도 힘썼다. 1935년 나치로부터 공적활동 금지처분을 받고 1938년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1951년 은퇴할 때까지 가르쳤다. 그 후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 다니며 강연과 대담 등으로 여생을 보내고, 80세가 지나 각각 철학과 성서와 하시디즘에 관한 그의 저술을 모아 세 권의 전집을 내었다. 그리고 1965년 87세로 타계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마틴 부버는 무엇보다 그의 책 『나와 너』를 통해 가장 많이 알려졌다. 이 책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와 그것Ich und Es, I and It’이라는 독백monologue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너, Ich und Du, I and Thou’라고 하는 대화dialogue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그 이용 가치로 따져보는 관계이다. 일정 정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사물을 그렇게 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나의 이기적 목적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대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마음으로부터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뭔가 움츠리고 감추려 한다면 삐걱거리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마틴 부버는 이런 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나와 너’라고 하는 대화dialogue 관계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가면이나 체면치레나 가식이나 체하는 일 없이, 심지어는 말하지 않고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서로 통하는 관계를 말한다. 독일어에는 ‘너’ 혹은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로 ‘Du’와 ‘Sie’가 있는데, Du는 친밀한 사람들끼리 쓰는 것이고, Sie는 공식적, 외교적인 관계에서 쓰이는 것이다.




부버가 ‘나와 너’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물론 ‘Ich und Du’였다. 영어의 경우 ‘I and Thou’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현재 Thou라는 말은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번역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말로는‘나와 그대’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너’의 관계는 서로가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함이 없이, 순수한 두 존재가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유대관계에서는 서로서로 북돋아주고 서로서로 자라게 해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두 연인, 고양이와 그 주인, 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 등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나-너’의 관계가 한 번 성립되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끊임없이 ‘나-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넘나든다. 또 의식적으로나 억지로 ‘나-너’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너’는 다시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결국 ‘나-그것’의 관계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너’의 인격적 관계는 경험을 통해서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부버에 의하면 ‘나-너’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관계라고 한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모두 이런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매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부버는 이런 관계를 신에게까지 적용한다. 부버에 있어서 신은 우리의 ‘영원한 그대’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거나 신을 정의하려는 것은 신과 우리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전락시키고 마는 일이다.




‘영원한 그대’에게 무조건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기다리면 그와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이런 관계에 들어갈 때에는 말이 필요 없게 된다. 그야말로 언설을 넘어서는 경지라는 것이다. 신과 ‘나와 그대’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예술과의 ‘나-너’의 관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부버에 의하면 경전은 ‘영원한 그대’인 신과 인격적 관계를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 기록을 읽고 우리 스스로를 비움으로 그런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읽을 때 분석적으로 따지면서 읽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하므로 참된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버에게 있어서 법이 정해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내가 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때 그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바람직한 행동이라 보았다.




부버의 관계철학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만물동체라든가 천지합일, 무극이나 불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나와 그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뭔가 궁극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와 그대’의 대화 관계만 있어도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

















#마틴부버 #장자철학 #근대하시딤나와너IchundDu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예수는 위대한 인간인가? 신인가?

리차드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정병진(naz77) 기자








ⓒ2004 정병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섣불리 설명하려 들지 마세요.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치우치기 마련이라 삐끗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쉽습니다!"

신학대에 다닐 때 교회사 시간에 들은 충고다. 이단으로 몰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삼위일체 교리는 엉터리다"라는 주장을 폈다. 과격한 젊은 신학자이던 그는 이런 자기 견해를 가지고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뱅에게 논쟁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완고하고 잔인했던 칼뱅은 합리적 논쟁 대신 그를 이단자라며 화형에 처하는 것으로 응수해 주었을 뿐이다. 세르베투스 자신은 죽기까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이단자로 낙인찍힌 그는 범죄자나 된 듯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의해 처형되고 만 것이다.(1553)

불행하게도 이런 터무니없고 끔찍한 일들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끊임없이 벌어졌다. 하나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추방하고 더 나아가 숱한 살육까지 서슴지 않았다.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벌인 일이라고 보기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종교적 열광주의가 낳은 비극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논쟁 과정에서 거듭해서 나타났다. 그러니 무슨 진리 수호라는 미명 하에 도그마(교리)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본래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교회는 왜 이다지도 쓸모없이 보이는 도그마 논쟁을 사력을 다해 벌여온 것일까? 박해받는 하층민들의 종교이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러 제국의 종교로 탈바꿈하면서 교리논쟁이 격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예수의 정체성을 둘러싼 교리 논쟁 자체를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헤게모니 다툼을 일삼은 것이라고만 단정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면 그 이전부터 이미 교회 내에서는 예수의 신적 지위에 관한 교리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제들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말이다.

개종한 신자이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로 제국의 정신 통일을 이루기 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불거진 아리우스 논쟁이 교회를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는 엄청난 위기를 야기하는 것을 직시하고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 논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그가 소집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회의인 니케야 공의회는 그렇게 해서 열리게 된 것이다.

예수는 위대한 인간인가? 신인가?

신학자 틸리히에 따르면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에는 구원문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가 피조물이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예수는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심각한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닮은 위대한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인가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을 벌였다. 이에 대해 동방교회는 대체로 아리우스를 따랐고 서방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 책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는 아리우스 논쟁의 양상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처럼 실감나게 재구성해 보여주면서 이들의 논쟁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우스 논쟁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출발하여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 논쟁이 끝났을 때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라는 신관의 확립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넘으로써 유대교와 이슬람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유대인인 저자가 이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파고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아리우스 논쟁이야말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한 어디에서 나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며, 폭력적인 분열상이 미래에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길을 암시해 줄 수 있다.

지금의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는 니케아 신조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는 사분오열한 교회일치를 이룰 수 있는 에큐메니칼 신조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훌륭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니케아 신조를 비롯한 교회의 여러 신조들이 과연 어떠한 사회, 정치, 문화 배경과 역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를 찬찬히 잘 헤아려 볼 일이다.

니케아파를 대표한 아타나시우스가 무려 다섯 차례나 걸쳐 유배와 복귀를 거듭한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니케아 신조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투쟁과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때 아리우스파의 주장도 교회의 공식 교리인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절대불변의 교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교회는 과거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반성하고 오늘의 시대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해야함을 이 한 권의 책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4/05/14
ⓒ 2004 OhmyNews



정병진 기자는 현재 여수에서 솔샘교회(http://solsam.zio.to) 담임 교역자로 일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