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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5

알라딘: [전자책] 영적인 파산

알라딘: [전자책] 영적인 파산

[eBook] 영적인 파산 - 행동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외침
존 캅 (지은이),박만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2014-11-04




종이책
14,000원 13,300원 (420원)
전자책정가
9,800원
판매가
9
종이책 페이지수 328쪽

책소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캅 교수가 출판한 책이다. 오늘날 세속주의라는 광기만이 아니라 종교성의 광기가 인류를 자기파멸로 몰아가는 근본 이유는 성서를 비롯한 종교전통이 시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재구성되지 못하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으며, 그 성스러운 지혜의 전통을 이윤추구의 유물론적 세속주의가 대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서와 고전 문명,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개인과 문화 전체를 변혁하기 위해 철저한 회개로 이끌며 성스러운 영적 전통을 재구성하는 세속화 과정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교를 깨끗하게 만들고 타계적인 신화나 관심사 대신에 선교와 목회에 다시 집중하게 만드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다.


목차


서론 __ 7
1장. 대재앙 앞에서 누가 도울 수 있을 것인가? __ 17
2장. 그리스와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 __ 39
3장. 교회 안의 종교성과 세속화 __ 71
4장. 세속주의의 등장 __ 103
5장. 근대철학의 세속주의적 의도 __ 135
6장. 세속주의적 교육 __ 165
7장. 경제학과 경제지상주의의 승리 __ 197
8장.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 __ 229
9장. 철학에서의 새로운 시작 __ 259
10장. 미국의 세상 변혁적인 기독교 __ 289




저자 및 역자소개
존 캅 (John B. Cobb)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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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예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분이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복무를 마친 후,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배운 후, 과정신학의 개척자가 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32년 동안 30여 권의 매우 중요한 저술들을 발표했다.



최근작 : <예수의 아바 하나님>,<영적인 파산>,<민중신학, 세계신학과 대화하다> … 총 15종 (모두보기)

박만 (옮긴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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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장신대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토론토대학에서 공부했다. 저서는 『최근 신학 연구』,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폴 틸리히』, 『현대신학 이야기』 등이 있으며,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월터 윙크),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존 호트),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고든 카우프만), 『영적인 파산』(존 캅), 『황혼의 사색』(토마스 베리) 등을 번역했다.


최근작 : <현대 신학 이야기>,<폴 틸리히>,<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 총 2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캅(John Cobb Jr.) 교수가 85세에 출판한 책이다. 생태계 파괴로 인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정치, 경제, 교육, 종교계 모두 이 위기를 외면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저자는 어떻게 종교성마저 초자연주의, 개인주의, 내면성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 믿음으로써, 그토록 절박한 위기를 외면하게 만드는지, 인류문명은 어떻게 영적으로 파산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마지막 돌파구를 호소한다. 오늘날 세속주의라는 광기만이 아니라 종교성의 광기가 인류를 자기파멸로 몰아가는 근본 이유는 성서를 비롯한 종교전통이 시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재구성되지 못하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으며, 그 성스러운 지혜의 전통을 이윤추구의 유물론적 세속주의가 대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파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가치중립이라는 명분으로 불구가 되었고, 대학은 우주와 삶의 의미를 가르치기보다 기업과 제국의 하수인이 되었으며, 경제지상주의는 인류를 탐욕스런 장님으로 만들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서와 고전 문명,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개인과 문화 전체를 변혁하기 위해 철저한 회개로 이끌며 성스러운 영적 전통을 재구성하는 세속화 과정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교를 깨끗하게 만들고 타계적인 신화나 관심사 대신에 선교와 목회에 다시 집중하게 만드는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








책을 읽어보니 책 내용이 참 좋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새로운 목회를 위해 꼭 읽어야할 이 시대의 기독교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알라딘에서 책소개를 잘 못하셨어요. 책을 읽어보시고 책소개를 하셨으면 합니다. 존캅교수님이 안그래도 국내에서 이미지 안좋아요.
christa 2014-04-17 공감 (0) 댓글 (0)

알라딘: [전자책] 예수의 아바 하나님



알라딘: [전자책] 예수의 아바 하나님




예수의 아바 하나님 -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존 캅 (지은이),박만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2018-05-28
원제 : Jesus’Abba: The God Who Has Not Fa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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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12,000원 11,400원 (360원)
전자책정가
8,400원
판매가
8,400원 (

제공 파일 : PDF(1.69 MB)
TTS 여부 : 미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251쪽-
-----------
책소개
저자가 90세에 발표한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한 저자 자신의 이해가 평생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증언하며, 저자의 다양한 삶의 경험들뿐 아니라 최근의 역사적 예수와 바울 연구에 기초해서 예수의 ‘아바(Abba)’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변증한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무신론이 팽배한 이유들을 분석하면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가르친 하나님이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과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한 끔찍한 범죄들을 지적하고, 다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통찰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근대세계의 지배적인 과학주의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을 때만 실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애당초 하나님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는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이런 유물론/무신론의 전제들이 어떻게 반박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이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지적하며, 예수의 아바 하나님이 왜 인류의 생존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또한 교회는 오늘날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밝힌다.


목차


서문 __ 7
1장. 예수의 아바 하나님 __ 35
2장. 아바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__ 77
3장. 아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 __ 97
4장. 과학은 아바 하나님과 공존할 수 있는가? __ 143
5장. 아바 하나님은 기독교 배타주의를 요청하는가? __ 185
6장. 위기에 처한 세상은 아바를 필요로 한다 __ 215
후기 __ 249


책속에서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성경은 정확하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곧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우리의 삶과 생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이 전체(the whole)에 대한 충성이 필요하다. 실상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한 충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어서, 인류를 완전한 대재앙으로부터 ... 더보기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 신뢰성(credibility) 문제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 유신론자들에게는 이런 신뢰성 문제 외에 또 다른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곧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편한 말로 여기게 된 데는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끔찍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는 문제이다.
우리의 순진한 생각,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사람들이 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기보다 자신들의 편견을 강화시켜주시는 분으로 믿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예수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과 관계 맺을 것을 주장한다. 물론 기독교는 항상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하나님 및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쳐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해온 것과 예수가 “아바”에 대해 이해한 것은 분명코 다르다. 내가... 더보기
사람들이 하나님을 군주처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도 많은 기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고 있음을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실상 하나님이란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대신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전능자(the Almighty)’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능자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고통에 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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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존 캅 (John B. Cobb)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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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예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분이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복무를 마친 후,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배운 후, 과정신학의 개척자가 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32년 동안 30여 권의 매우 중요한 저술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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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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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장신대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토론토대학에서 공부했다. 저서는 『최근 신학 연구』,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폴 틸리히』, 『현대신학 이야기』 등이 있으며,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월터 윙크),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존 호트),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고든 카우프만), 『영적인 파산』(존 캅), 『황혼의 사색』(토마스 베리) 등을 번역했다.


최근작 : <현대 신학 이야기>,<폴 틸리히>,<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 총 2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에서 묻는 질문들

기독교 전통의 하나님은 왜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과 전혀 다른 모습인가?
교회의 하나님은 어떻게 전지전능하며 우주의 통치자, 심판자가 되셨는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하나님 이해는 각각 어떤 결함이 있는가?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는가?
무신론자들의 불신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이 예수의 하나님인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 통찰은 무엇이며, 또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유대인들이 믿던 초자연적인 능력의 하나님을 예수는 어떻게 수정했는가?
왜 아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무시당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왜 용서하는 하나님보다 보상과 심판의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가?
오늘날 교육을 지배하는 근대 과학주의는 어떻게 눈뜬장님을 양산하는가?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유물론과 무신론은 어떻게 반박되고 있는가?
예수가 믿고 가르쳤던 아바 하나님의 특성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여전히 믿을 수 있는가?
아바 하나님에 대한 헌신 역시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왜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해 결정적인가?
오늘날 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왜 중요하며, 무슨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예수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희망은 무엇인가? 접기


2019/10/01

오강남 -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오강남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오강남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종교학)

들어가는 말


제가 함석헌 선생님을 뵌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받은 강력한 인상으로 인해 이런 만남들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8월 대광 고등학교에서 시국 강연을 하실 때 수많은 청중에 끼어서 흰 두루마기를 입으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뵈었고, 그 후 대중 강연 때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특히 1978년 제가 캐나다 에드먼튼에 있는 알버타 대학에서 가르칠 때 친구 김영호 교수의 주선으로 함 선생님이 알버타 대학 강당에서 교민들을 위해 강연하시고, 그 날 밤 저의 집에 묵으시고, 다음날 교수회관에서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화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김영호 교수, 황필호 교수와 함께 우이동 댁으로 찾아 뵈었을 때 동경 유학시절 겪으셨던 관동지진 때의 경험을 들려주신 것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몇 번의 행복한 만남에도 불구하고, 또 함 선생님의 글을 열심히 읽은 편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전문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이 모임에 참석했다가 박재순 교수님과 김성수 교수님이 저에게 이번 강연을 맡으시라고 강권하시는 바람에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얼떨결에 수락하였다가 지난 1년 본격적으로 충분히 연구할 여유를 얻지도 못한 채 1년 내내 걱정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이렇게 여러 전문 연구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전문가로서 말씀드리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저 평소 제가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문제와 연관해서 함 선생님 사상의 종교사적 의의를 부각시켜보려고 합니다. 제가 발표를 한다기 보다 그저 말머리를 트고 여러분의 고견에서 많은 것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몇 마디 말씀드리는 것이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무엇보다 먼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나 심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많은 종교학자들이나 사상사 전공인들이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 1870-1940)나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 1970-1966))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류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에 대한 연구도 이에 못 미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서울신대의 최인식 교수가 미국 종교학회에 참석했을 때 저는 그분에게 미국종교학회 연회에 함석헌 패널을 하나 만들어 함석헌 연구자들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최인식 교수의 노력도 불구하고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곧 그런 일이 성사되기 빕니다.


저는 이 논문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세계 종교사에서 면면히 흐르는 ‘신비주의’의 맥락에서 한번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그 의의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함 선생님이 스스로를 신비주의자로 의식하셨는지, 혹은 정말로 신비주의자이셨는지, 저로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거기 모인 사람들과 매일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30분씩 명상의 시간을 가졌고,1) 또 퀘이커 교도로서 적어도 매주 한 시간씩의 침묵 예배, 곧 명상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훌륭한 종교라면 그 속에 ‘신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고,2) “나는 지금도 ‘그이’가 내 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세계 종교 전통의 심층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글에서 신비주의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제가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네 가지 관점에서 함 선생님의 사상이 어떻게 신비주의 전통들과 맞닿아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네 가지 관점이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완전히 독립된 항목들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냥 네 가지 정도로 간추려 보는 것뿐입니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일쑤입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의 애매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라는 말 대신 ‘영성’이라는 말이라든가, 라이프니츠가 창안한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쓰는 이도 있지만 이런 말들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3)

이런 애매함이나 모호함을 덜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smu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매, 육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 등 초자연 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Mystik’이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때 제가 말씀드리는 신비주의는 물론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로 중세 이후 많이 쓰이던 ‘cognitio Dei experimentalis’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입니다.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안다’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추론이나 개념이나 논리나 교설이나 문자를 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권위 있는 말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영적 눈이 열림을 통해, 내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종교에서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4)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생각하시면, 일단은 그것을 ‘심층 종교’나 ‘열린 종교’ 등으로 바꾸어 읽으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1.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에서 자라가라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5)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6)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일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7) 신학자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신비 체험의 네 가지 특징 중 하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ineffability)’이라고 하였습니다.8) <도덕경>1장 첫머리에 언급된 것처럼 “말로 표현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러 신비 전통에서는 언제나 표피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를 분간하고 표피적인 의미를 지나 심층적인 뜻을 간파하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경전이나 의식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특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종교적 진술의 뜻을 좀 더 세분하여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의 가르침입니다.9)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혹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1) 물리적(physical, hylic, 땅) 차원,
2) 심리적(psychological, psychic, 물) 차원,
3) 영적(spiritual, pneumatic, 공기=영) 차원,
4) 신비적(mystical, gnostic, 불) 차원입니다.



첫째 차원은 종교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일상적 차원입니다. 이른바 육이나 땅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데 따라 극히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둘째 차원으로 들어가는데, 이 단계에서는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의 종교적 진술이나 이야기를 ‘문자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심리적 기쁨이나 안위를 얻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외적 비밀(the Out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 등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셋째 차원의 뜻, 곧 ‘은유적(allegorical)’ 혹은 ‘신화적(mythical)’ 혹은 영적 의미를 파악한 영적 사람이 됩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내적 비밀(the Inn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불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는 신비 체험에 이르고, 더 이상 문자적이나 은유적이나 영적인 차원의 뜻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10)


함 선생님은 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삶의 단계 혹은 의식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명에는 세 단계가 있다. 맨 밑은 물질이고 그 다음은 마음이고 맨 위에 영 혹은 정신이다. 우리의 생명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에까지 자라는 것이다. 육체에는 자유가 없다. 온전히 물질에 의존한다. 영은 순전히 자유하다.

“평화운동은 전체의식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활동의 근원이 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11)

저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즐겨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산타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동네에 500집이 있는데,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지금 오스트랄리아에는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기 아빠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올라갑니다.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싼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더욱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싼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사회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의 신비적 의미를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됩니다.

물론 이 예화에서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발전단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깊은 신앙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함 선생님의 기본 가르침이 이처럼 문자주의를 극복함으로 종교의 진수에 접하라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함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성서를 읽되 문자적으로 읽기를 거부하고 성서에서 그 당시 조선인들에게 성서가 줄 수 있는 더 깊은 ‘뜻’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동서고금의 종교 문헌을 섭렵하면서 그런 문헌의 문자 뒤에 담긴 뜻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문자주의의 제한성을 넘어서 종교적 진술이나 예식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문자주의를 극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계속 자라나 “완전한 데” 이를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2. 참나를 찾으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민중이요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산 힘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12)


영국 사상가로서 The Perennial Philosophy 라는 책을 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을 열거하면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tat tvam asi,” 곧 범아일여(梵我一如) 개념을 첫 번째 항목으로 들었습니다.13) 헉슬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신비주의 전통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신이 내 속에 있다,” “가장 깊은 면에서 신과 나는 결국 하나다” 하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신관은 신의 내재(內在)만을 주장하고 신의 초월(超越)을 무시하거나 신과 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입장은 나와 신을 구별하여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의 내재성을 함께 수납하는 이른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 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범재신론은 다른 모든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 “나의 바탕은 신적인 것이다”, “나의 가장 밑 바탕은 신의 차원과 닿아 있다”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변증법적 유신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14) 세계 신비전통에 나타나는 이런 유형의 신관 몇 개 만 예로 들어 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사상입니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잠재적 요소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덧붙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을 두고서도 여기의 ‘나(我)’란 ‘고타마 싯다르다’라는 역사적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불성, 혹은 ‘참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 참나야 말로 천상천하에서 오로지 높임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런 풀이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 ‘나’도 결국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던 그리스도, 그의 바탕이 되는 신적 요소, 그의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15)


물론 예수님도 직접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성의 내재라는 신비주의적 특색을 강조하는 저류가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런 신비적 흐름이 억눌리고 문자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득세하는 비극이 초래되기는 했지만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중세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도 “영혼 속에는 창조되지도 않았고 창조될 수도 없는 무엇이 있다”고 했고 그 외의 많은 신비주의 그리스도 사상가들이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씨앗, 그리스도의 탄생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특히 지금까지 기독교 신비 전통의 한 가닥을 이어가고 있는 퀘이커교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를 ‘신의 한 부분(that part of God)’ 혹은 ‘내적 빛(inner light)’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이슬람교에서조차 신의 내재를 동시에 역설하는 수피(Sufi)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내 “우리의 핏줄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라는 쿠란의 말을 근거로 하여 신의 내재성과 ‘신에로의 몰입’을 주장합니다. “만물 안에 내재한 그 일자(一者)를 보라”고 가르칩니다.

동양 사상 중 특히 ‘우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혹은 내재적 하느님 사상을 학생들에게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물론 얼마간의 무리와 오해의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몸이 하나가 아니고 몸은 ‘나’라고 하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소유자, 주인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나인가?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주인이 아니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더 근본적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아닌 그 근본 주인, 그 소유자,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참 나,’ 혹은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 ‘내 속의 하느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설명해 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제노아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느님이다. 내 하느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16)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17)


물론 이런 이론적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명상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가만히 보면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그 또 하나의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관찰자를 의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기에 이쯤에서 일단 이렇게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고, 이 또 하나의 나는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나와 다른 나가 아닌가, 이 나가 하느님의 일부이든가 아직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면 하나님에 가까운 나, 혹은 내 속에서 하느님과 맞닿은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시간·공간을 다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될수록 순수하게, 잡념을 없애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씨알’이라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8) 물론 ‘씨알’이라는 말이 때 묻지 않은 ‘맨사람,’ 근본을 잃지 않고 인위적인 것으로 덧씌워지지 않은 민중을 뜻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씨알의 알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하늘은 한 얼이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알이다.”19)하는 말이나 “정말 있는 것은 ‘알’ 뿐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뿌리로 알려져 있다.”20)고 한 말을 보면 적어도 씨알의 ‘알’은 우리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신적 요소, 혹은 신과 인간이 맞닿아 있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라 이해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몇 가지 관점에서 볼 때 함석헌 선생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세계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신인합일, 신인무애(無礙), 신과 만물의 융합, 라틴어로 ‘unio mystica’의 사상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여 틀 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 함 선생님의 이런 사상이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압축된 것 같아 인용합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3. 우주공동체에서 평화를 체현하라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21)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 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 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 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 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 라고.”22)


물론 이런 사상을 가장 극명하고 조직적으로 개진하는 사상체계는 중국 불교의 화엄종(華嚴宗)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에서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는 기본 원칙을 강조합니다.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理)와 개별적 사물로서의 사(事)가 아무 거침이 없이 서로 융통한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생각을 기초로 하여, 이제 모든 사물 자체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는 것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고치면 모든 사물은 상호연관, 상호의존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와 하느님만이 하나가 아니라 나와 너, 나와 만물이, 만물과 만물이 궁극적 차원에서는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유기체적(organic), 통전적(holistic) 세계관입니다.


함 선생님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일체가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만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도 다 티끌까지도 다 나임을 믿어야 한다.”23)


저는 이런 유기체적이고 통전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자기 뺨을 만져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부모님을 발견하고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나아가 수없이 많은 조상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공기, 물, 비, 구름, 햇빛, 음식,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 도구를 만든 사람들, 그들이 농사짓는데 필요했던 토양, 씨앗, 시간과 공간 등등 이런 모든 것이 지금 내 뺨에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온통 나 아닌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개인은 이 모든 것과 상즉상입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저는 이렇게 온 우주가 서로 연관되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주 공동체’를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라 주장합니다.


이렇게 나와 너, 만물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실제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여러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단순히 논리 정연한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견 복잡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교설들도 사실은 이른바 ‘구원론적 의도(soteriological intent)’를 가진 것입니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은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입니다.24)


이런 통전적, 유기적 세계관에서 어떤 실제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만물의 일체감에서 세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자비(compassion)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이런 아픔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평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위해 힘쓰게 된다는 점을 특히 부각하고자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운동이 감상적이거나 윤리적 차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고 보는 더욱 근본적인 우주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평화운동은 전체의식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 활동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25) 고 한 말이나 “사랑은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둘인 줄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면서 하나인 줄을 모를이만큼 하나여야 할 것이다.”26)고 한 그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 됨으로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남이 아플 때 나도 아파하는 일종의 보살 정신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제창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처럼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참여의 정신입니다. 함 선생님은 제가 보기 ‘행동하는’ 신비주의를 몸소 보이주고 실천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4. 종교 상호간의 보완과 조화를 중시하라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 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27)

앞에서 말한 우주공동체에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특히 종교다원주의적 자세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자기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 주장이 별로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에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은 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전혀 없다, ‘비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상 체계입니다. 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사물을 더욱 깊은, 더욱 높은, 더욱 넓은, 더욱 많은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관점에서 본 한 가지 의견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가 무한히 크면서 동시에 무한히 작다고 하는 ‘역설’의 논리가 무리 없이 수용됩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 중 원숭이 훈련사의 경우처럼 양쪽을 다 보는 ‘양행(兩行)’의 태도를 보입니다. 똑 같은 커피 잔이 위에서 보면 둥글지만 앞에서 보면 네모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요즘말로 바꾸면 시각주의(perspectiv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어느 시각,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함 선생님처럼 “글쎄요”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28) 하나의 시각, 하나의 관점을 절대화할 수 없고 다원적인 시각의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뿐입니다.


이런 태도를 다종교(多宗敎) 현상에 적용하면 자연스럽게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종교의 가르침만을 절대적 진리라 주장하는 배타적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됩니다.29) 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 혹은 나무와 그 열매와 같은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 선생님이 세계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말은 함 선생님은 세계 종교들을 다룰 때 다원주의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30)


여기서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하는 대신 함 선생님의 말씀 하나를 인용하고 그칩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됐거나 못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안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좋지 않습니까?”31)


나가는 말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진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21세기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 차원으로 심화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어찌 그리스도교뿐이겠습니까?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는 결국 신비주의적 차원이라 확신합니다.32)


물론 지금까지 이런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한 종교인들은 그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거의 모든 종교의 신도들이 문자주의적, 교리 중심적, 기복주의적, 자기중심적, 배타주의적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종교가 이를 수 있는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이런 비극적 사태가 개선되므로 더욱 많은 이들이 종교의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2003)는 최근에 펴낸 그의 The Silent Cry: Mysticism and Resistance  라는 책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며,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창했습니다.33)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이번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함 선생님의 신비주의적 사상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며, 함석헌 선생님이야 말로 이런 ‘신비주의의 민주화’에 앞장서신 분이었구나 하는 확신을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함석헌 선생님의 비교사상사적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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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2001), p. 105 참조.

2) “하워드 브린튼이 퀘이커리즘을 서양에서 난 종교들 중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함석헌 전집15>p. 51), 김성수, 위의 책 p. 126에서 재인용.

3) 또 다른 분류법으로 종교의 ‘표의적(exoteric)’ 차원과 ‘밀의적(esoteric)’ 차원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필자도 다른 글에서는 표피적(surface) 차원 vs. 심층적(depth) 차원, 닫힌 종교 vs. 열린 종교로 분류했다. 졸저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현암사, 2002), Frithjof Schuon, The Transcendent Unity of Religions (New York: Quest Books, 1984) 등 참조.

4) 필자는 이 말을 대학 시절 읽은 김하태 박사의 글에서 접하고, 그 이후 신비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비주의와 신비체험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 방면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William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ce (New York: Collier Books, 1961), Aldous Huxley, The Perennial Philosophy (New York: Harper & Row, 1944) 외에 최근의 책 John Macquarrie, Two Worlds Are Ours: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Mysticism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pp. 1-34 등을 참조할 수 있음.

5)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명상집>(오늘의 책, 2003), p. 160에서 인용.

6) <함석헌 전집 9>, p. 200.


7) 문자주의의 문제성과 해독에 대해서는 졸저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pp. 63-115 참조.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Laughing Jesus (New York: Harmony Books, 2005)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자주의의 해독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8) 다른 세 가지 특성은 ‘얼른 지나감(transiency)’ ‘직관적(noetic quality), ‘피동성(passivity)’이라고 했다. 그의 앞의 책 참조할 것.

9) ‘Gnosticism’을 보통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번역하는데 필자는 이를 “깨달음주심주의”라 번역하고 싶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서 여기서는 그대로 ‘영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영지주의에 대한 최근의 책으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 Karen L. King이 쓴 What Is Gnosticism?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그리고 일반 독자를 위해 읽기 쉽게 쓴 Richard Smoley, Forbidden Faith: The Gnostic Legacy (San Francisco: HarperSanFranscico, 2006)을 참조할 수 있다.

10)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New York: Three Rivers Press, 1999), pp. 127-129 참조.

11) 김진, 앞의 책, p. 74-5에서 인용. 인간의 의식 발달을 물질, 마음, 영의 세 단계, 이른바 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subject/object consciousness, 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로 분류한 예는 Ken Wilber, Up From Eden (Boston: Shambala, 1983)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2) 각각 김진, p. 129, 172, 95에서 인용.

13) Aldous Huxley, 앞의 책, pp. 1-21 참조.

14) 이 용어는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자인 John Macquarrie가 채택한 용어다. 범재신론을 다루는 책으로 최고로 좋은 그의 책 In Search of Deity: An Essay in Dialectical Theism (New York: Crossroad, 1985) 참조.

15) 함 선생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셨다. “그러면 ‘나[自我]가 곧 나라’요, ‘나[自我]를 본 자가 아버지[民族, 世界, 하늘]을 본 것이다.’ 그 나는 새삼스러이 있을 것도 아니요 없을 것도 아니요, 보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도 아니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는 나’, 참 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나다.” 김진, 앞의 책 241에서 인용.

16) Huxley, 앞의 책 p. 11에서 재인용.

17)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자기의 작은 자아가 없어지고 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에서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를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18) ‘씨알’의 다중적 의미와 씨알 사상의 ‘바탕생각’에 대해서는 김경재, “21세기 씨알사상과 그 운동”(http://soombat.org) 참조. 함 선생님은 ‘씨알’이란 말이 류영모 선생님이 <大學> 첫머리에 나오는 “大學之道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한 배움의 길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무름에 있나니라.”고 한 데서 나왔다고 했다.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아카넷, 206), pp. 193-194, 이정배,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 나타난 ‘민족’ 개념의 신학적 성찰” ) 씨알사상연구회 2006년 5월 월례발표회 논문, p. 11.

19) 김진, p. 115.

20) <함석헌 전집 3> “씨알의 설움”

21) 김진, p. 135.

22) Huxley, 앞의 책, p. 57에서 인용.

23) 김진, p. 84.

24) Huxley, 앞의 책 p. 5.

25) 김진, pp. 74-75.

26) 같은 책, p. 202.

27) 김성수, 179-180 재인용.

28) 필자가 함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글쎄요”라는 말을 아주 많이 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도덕경> 45장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입니다(大辯若訥)”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 도에 입각한 말은 판에 박힌 이분법적 달변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글쎄요’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풀이한 것이다. 졸저 <도덕경>(현암사, 1995), p. 197.

29) 종교간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논의하는 책으로 Paul F. Knitter, Introducing Theologies of Religions (Maryknoll: Orbis Books, 2002) 참조. 여기에서 Knitter는 네 가지 기본태도를 논하는 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남의 종교를 내 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대체론(Replacement model), 2) 남의 종교의 모자람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충족론(Fulfillment model), 3) 서로의 공통점을 찾자고 하는 상호론(Mutuality model), 4) 서로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배우자고 하는 수용론(Acceptance mode).

30) 신비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의 관계,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신비주의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졸저,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pp. 340-355 참조. 함 선생님의 다원주의적 태도를 좀 더 상세하게 다룬 것으로 김성수, 앞의 책, pp. 179-185를 참조할 수 있다.

31) <함석헌 전집 8> pp. 377-378. 김성수, 앞의 책, pp. 130-131에서 재인용.

32) 종교를 분류할 때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 등 각각의 전통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런 종교 전통 중에서 그 심천을 기준으로 하여 표의적 종교와 밀의적 종교로 나눈 슈온의 분류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Schuon, 앞의 책 참조할 것.

33) The Silent Cry: Mysticism and Resistan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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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오강남
작성자 바보새 
1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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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1

2012 [전자책] 내게 찾아온 은총 by 송기득 / 오강남 / 김경재



알라딘: [전자책] 내게 찾아온 은총 by 송기득 / 오강남 / 김경재

내게 찾아온 은총 - 깨달음을 통한 주체적 신앙 
송기득,오강남,김경재 (지은이)
한국기독교연구소2012-11-28 


종이책 페이지수 350쪽


책소개
신화적이며 획일적인 교리들과 폭력적인 교권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이단 사이비 집단에 현혹되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학자들까지 설익은 무신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신앙적인 혼란을 부채질한다.
 따라서 다양한 깨달음들을 통해 체험하게 된 믿음과 사랑의 은총을 함께 나누고자 이 책을 펴냈다.


목차


1부 하나님을 찾아서

구미정 - 여성신학자
김경재 - 한신대 명예교수
김영민 - 철학자
김정희 - 재일 한국어 교사
김준우 -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박 총 - <복음과 상황> 전 편집장
양재성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윤석철 - SOOA 회장
장회익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헌정 - 향린교회 담임목사
차흥도 - 감리교농촌선교훈련원 원장
한성수 - 순천 하늘씨앗교회 담임목사

2부 예수님을 찾아서

강인혜 - 새날여성쉼터 대표
배근주 - 데니슨대학교 종교학과 기독교윤리 교수
송기득 - <신학비평> 주간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이정훈 - 성실교회 담임목사
임보라 - 향린교회 부목사
정경일 - 뉴욕 유니온신학교 박사과정
최만자 - 여성신학자
최순님 - 숲해설가
한인철 - 연세대학교 교목
한희철 - 역곡 성지교회 담임목사
홍정수 - 갈릴리신학대학원 설립자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송기득 (지은이)

연세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원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로서 은퇴했다.(1999) 은퇴 이후 계간지 『신학비평』을 창간(2001)하고 주간으로 있으면서 사람다움을 지향하는 인간화 신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인간화를 틀로 삼아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역사의 예수에게서 사람다움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은 책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 나의 신학평전 3』 (2015)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 나의 신학평전 4』 (2012)
『역사의 예수 : 그는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엇인가?』 (2009)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 나의 신앙평전 2』 (2009)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 나의 신앙평전 1』 (2006)
 
『하느님의 두 아들 :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의 만남』 (2003)
『사람살이가 구도의 방랑길입니다』 (1999)
『그리스도교 신학과 인간 해방』 (1998)
『사람다움과 신학하기』 (1997)
『살며 믿으며 바라며』 (1993)
대결에서 협력으로 -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엮고 함께 씀, 1991)
『끝내 사람이고자 - 그리스도교 신학과 민중 구원』 (1990)
『예수와 인간화』 (1989)
『신학개론』 (1985)
『인간』 (1984)

옮긴 책
『파울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2005)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2004)
『무신론과 해방』 (함께 옮김, 1991)
『달라진 세계와 철학』 (1984) 접기


최근작 : <탈신학 에세이>,<사람살이가 구도의 방랑길입니다>,<사람, 아직 멀었다> … 총 22종 (모두보기)

오강남 (지은이)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종교학과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있다.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 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과 『장자』를 비롯하여 『오강남의 작은 도덕경』,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심층을 보다』, 『또 다른 예수』, 『... 더보기


최근작 : <종교, 심층을 보다 (개정판)>,<고전 강연 2>,<도덕경 (큰글씨책)> … 총 65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김경재 (지은이)

한신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에서 현대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듀북 대학 신학원과 클레아몬트 대학원 종교학과를 거쳐,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에서 문화신학·종교 신학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 퇴임했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한신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폴 틸리히 신학 연구』, 『해석학과 종교신학』, 『이름 없는 하느님』, 『김재준 평전』,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 등이 있다.


최근작 : <틸리히 신학 되새김>,<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 … 총 3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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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내가 기독교 교리들을 받아들이는 데 부딪친 난관들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주체적인 믿음을 어떻게 얻었는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얻기까지 광야 길에 찾아온 은총은 무엇인가?

특히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과 같은 다종교적인 문화 전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근본주의와 배타주의, 기복주의적인 신앙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인습적 신앙 단계로부터 주체적이며 성찰적 신앙 단계로 도약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신화적이며 획일적인 교리들과 폭력적인 교권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이단 사이비 집단에 현혹되는 현실입니다. 더군다나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학자들까지 설익은 무신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신앙적인 혼란을 부채질하는 현실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전통 교리들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성찰하여 자신의 주체적인 신앙을 확립하지 못하면, 삶의 여러 위기를 맞이하여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믿음이 ‘반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교회의 전통 교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믿고 싶어도 쉽게 믿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움 앞에서, “생각하는 신앙”과 “실천하는 영성”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 수기들을 모았습니다. 

“신앙의 빛”을 찾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주체적이며 성찰적인 신앙, 나아가 전통적 신앙과의 접속적 단계, 한 발 더 나아가 보편적인 신앙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표피적 종교가 아니라 심층적 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깨달음들을 통해 체험하게 된 믿음과 사랑의 은총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의 은총을 경험하기까지 각자가 어떤 광야 길을 헤매었는지, 그 솔직한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 편집자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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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쓰기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에세이 - 박총의 "젖가슴 달린 하나님, 아기로 오신 하나님"

"예배시간이면 대개 장난이나 치던 아이들과 달리 눈을 반짝이며 설교 말씀을 들었기 때문일까, 내 어린 믿음은 시나브로 커갔고 하나님도 철부지의 기도에 꼬박꼬박 성실히 응답해주셨다. 특히나 흑백 티브이로 당시 인기 절정의 고교야구를 시청할 때 내가 응원하는 고향 팀이 질 때마다 방문 뒤에 숨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던 나를 들으시고 몇 번이나 기적적인 역전승을 연출해주시는 하나님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합을 위해 개고생을 하며 흘린 야구선수들의 피땀은 어쩌자는 거냐 싶고, 또 내 맘대로 경기 결과를 바꿔달라는 기도는 이 산을 들어 저 산으로 옮겨달라는 기도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기도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시려는 듯 어린 내 응석을 다 받아주셨다. 이후로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내 기도는 의심의 찌끼가 없었고, 하나님은 여전히 내 부탁이라면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는 맘 약한 아버지시다."

이 어여쁜 신앙고백은 디자인만 예뻤다면 올해의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내게 찾아온 은총>에 나온 박총원장님의 것입니다. 요즘 당진에 있느라 수도원에 참석을 못하는 게 늘 아쉬운데, 수도원의 침묵과 독서, 나눔과 배움도 그렇지만 박총원장님의 때묻지 않은 신앙의 언어를 들을 수 없는 것도 크게 아쉬운 것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인지 모릅니다. 저는 신앙은 늘 인격을 통해 전해진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격적이라고 해서 꼭 근엄하거나 젊잖아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인격은 그 어떤 인격 못지 않게 훌륭한 인격이고, 본받을만한 인격입니다. 또 그런 인격을 통해 훌륭한 신앙은 전수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박총원장님의 새 책이 나왔습니다. <내 삶을 바꾼 한 구절>이라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저도 한 권 구입해서 다음에 만나뵈면 덕담 한 마디 적어달랠 셈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좋은 책이 <내게 찾아온 은총>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디자인이라 감추인 보석같은 책이니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읽을 수 있게 한 권 구입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문단은 더 감동적이고, 재밌고, 공감이 됩니다. 저도 고3시절에 손으로 직접 글자 하나 하나를 채워야하는 학생회 주보를 만든다고 후배 한 명 데리고 토요일 마다 교회에 모여서 하루 온종일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뻔뻔한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몇 년간 발길을 끊었던 교회로 돌아간 것은 사춘기인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남들은 순적하게 넘어가던 사춘기를 무에 그리 독하게 앓았는지 고1 때는 헤비메탈 밴드를 한다며 기타와 LP를 끼고 살았고, 고2 땐 시인이 되겠다며 로트레아몽과 보들레르를 읊고 살았다. 머리를 홀딱 밀었다가 교무실에 불려가 '반항하냐?'는 얘길 듣기도 했고 연애질은 또 얼마나 열렬하게 했는지, 한 번 편지를 썼다 하면 공책 한 권을 다 채워 수십 장은 써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입시 준비 외에 아무것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고3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심야 영화 보고 새벽에 집에 오다가 골목길 트럭 짐칸에서 잠을 자는 등 기행을 일삼았고, 역사상 대입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던 해였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몇 장씩 일기장을 채워나갔다. 더구나 자기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하는 처지에, 밤 11시 자율학습이 끝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당시 공고 다니면서 대학에 가려던 교회 후배들을 돕겠다며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가르치는 등 오지랖 넓은 짓을 많이 하고 다녔다. 버스가 끊어져 매일 집에 걸어왔지만 나를 바래다주던 후배들과 함께 하던 그 밤길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걸음이었다. 그렇게 하고픈 일을 다 하면서도 대학에 보내달라는 내 뻔뻔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셨다."

장담컨데, 이 다음 문장들은 안 읽으면 후회할만큼 더 흥미롭고, 유익하고, 은혜롭습니다. 다른 분들의 글도 그러합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339079

2019/09/04

알라딘: [전자책] 영적인 파산 by 존 캅 (지은이) / 박만



알라딘: [전자책] 영적인 파산 by 존 캅 (지은이) / 박만




[eBook] 영적인 파산 - 행동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외침
존 캅 (지은이),박만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201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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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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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캅 교수가 출판한 책이다. 오늘날 세속주의라는 광기만이 아니라 종교성의 광기가 인류를 자기파멸로 몰아가는 근본 이유는 성서를 비롯한 종교전통이 시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재구성되지 못하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으며, 그 성스러운 지혜의 전통을 이윤추구의 유물론적 세속주의가 대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서와 고전 문명,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개인과 문화 전체를 변혁하기 위해 철저한 회개로 이끌며 성스러운 영적 전통을 재구성하는 세속화 과정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교를 깨끗하게 만들고 타계적인 신화나 관심사 대신에 선교와 목회에 다시 집중하게 만드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다.


목차


서론 __ 7
1장. 대재앙 앞에서 누가 도울 수 있을 것인가? __ 17
2장. 그리스와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 __ 39
3장. 교회 안의 종교성과 세속화 __ 71
4장. 세속주의의 등장 __ 103
5장. 근대철학의 세속주의적 의도 __ 135
6장. 세속주의적 교육 __ 165
7장. 경제학과 경제지상주의의 승리 __ 197
8장.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 __ 229
9장. 철학에서의 새로운 시작 __ 259
10장. 미국의 세상 변혁적인 기독교 __ 289




저자 및 역자소개
존 캅 (John B. Cobb)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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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예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분이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군복무를 마친 후, 시카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배운 후, 과정신학의 개척자가 된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32년 동안 30여 권의 매우 중요한 저술들을 발표했다.



최근작 : <예수의 아바 하나님>,<영적인 파산>,<민중신학, 세계신학과 대화하다> … 총 15종 (모두보기)

박만 (옮긴이)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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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장신대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원,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토론토대학에서 공부했다. 저서는 『최근 신학 연구』,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폴 틸리히』, 『현대신학 이야기』 등이 있으며,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월터 윙크), 『다윈 이후의 하느님: 진화의 신학』(존 호트), 『태초에 창조성이 있었다』(고든 카우프만), 『영적인 파산』(존 캅), 『황혼의 사색』(토마스 베리) 등을 번역했다.


최근작 : <현대 신학 이야기>,<폴 틸리히>,<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 총 2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캅(John Cobb Jr.) 교수가 85세에 출판한 책이다. 생태계 파괴로 인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정치, 경제, 교육, 종교계 모두 이 위기를 외면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저자는 어떻게 종교성마저 초자연주의, 개인주의, 내면성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 믿음으로써, 그토록 절박한 위기를 외면하게 만드는지, 인류문명은 어떻게 영적으로 파산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마지막 돌파구를 호소한다. 오늘날 세속주의라는 광기만이 아니라 종교성의 광기가 인류를 자기파멸로 몰아가는 근본 이유는 성서를 비롯한 종교전통이 시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재구성되지 못하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으며, 그 성스러운 지혜의 전통을 이윤추구의 유물론적 세속주의가 대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결국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파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가치중립이라는 명분으로 불구가 되었고, 대학은 우주와 삶의 의미를 가르치기보다 기업과 제국의 하수인이 되었으며, 경제지상주의는 인류를 탐욕스런 장님으로 만들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서와 고전 문명,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 개인과 문화 전체를 변혁하기 위해 철저한 회개로 이끌며 성스러운 영적 전통을 재구성하는 세속화 과정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것은 종교를 깨끗하게 만들고 타계적인 신화나 관심사 대신에 선교와 목회에 다시 집중하게 만드는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