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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3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0호] 2012년 02월 17일 (금)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불교평론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불교평론









[열린논단] 업보윤회설, 그 오해와 진실 / 박경준

2012년 2월 16일 열린논단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업과 윤회의 가르침’에 대한 곡해가 적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곡해는 업보윤회설을 신비주의적 혹은 숙명론적 사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업보윤회설은 3세윤회설로 이해된다. 예컨대, 영화 「리틀 붓다」의 내용 중에 나오는 ‘환생’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윤회설의 내용과 조금 다르지만, 불교의 기본적 윤회사상으로 이해되면서 대중적으로 불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를 확산시켜 왔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누구는 전생에 왕족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든가, 누구는 업장이 두터워 금생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화는 모두 윤회를 전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윤회관 역시 불교를 신비주의적 또는 숙명론적 종교로 곡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아마도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으로 철저한 동기론이라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불교 업설은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와 같이 복잡하고 디지털화된 상황에서 동기론적 윤리사상만으로는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불교 업설에 결과론적 내용은 없는 것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오해는 불교 업설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라는 편견이다.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설해지지만, 사회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共業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 공업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은 올바른 불교이해를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바탕이 되는 근본 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업과 윤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윤회를 변증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에서 행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無我와 輪廻의 모순을 ‘無我輪廻說’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다 보니 업설과 윤회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 작업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업과 윤회의 내용이나 사상사적 전개 과정보다는 업설과 윤회설의 의의에 대해 초점을 맞춰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업설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은 명상의 시대라 할 만큼 명상이 유행인 바, 이것은 결국 행복의 기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과업보를 심리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 업설과 윤회설의 기본 의의



1.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苦와 樂, 행복과 불행,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신(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의 교설로서 ‘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칙을 주장한다. 그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善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惡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그 사람이) 씨앗을 심어 그 사람이 (자신의)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기도나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휴거 등을 믿는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나 점괘가 좋지 않을 때에 자꾸 굿에 의지하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서도 적잖이 발견된다.



인과응보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한다. 이렇게 불교 업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원리이자 기초인 것이다.



2.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을 돌아보면,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 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다.



지구촌 한켠에서는 ‘인간 해방’을 넘어 ‘동물 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한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領群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하다. 석존은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 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法과 律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3. ‘자유와 책임’의 민주주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류가 일구어 낸 역사의 아름다운 꽃이다. 민주주의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며,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책임과 의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결의 원리 때문에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최선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아직까지는 그 대안이 없는, 적어도 차선의 정치제도라 할 만하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인권사상의 발전에 방해가 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결국 불교는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막스 베버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실수는 원천적으로 베버가 불교 업설을 지극히 개인적인 숙명론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불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불교 업설은 ‘자유와 책임’의 원리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 싶다. 불교적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능동적·자율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자유’사상에 통하고, 업보는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책임’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석존의 가르침이 발견된다.



허공 속에서도, 바다 속에서도, 바위 틈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느니라. 악업을 행한 자가 그 과보를 면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나니.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러한 ‘자유와 책임’만이 아니라, 나아가 ‘권리와 의무’의 정신도 이끌어 낼 수 있다. 불교는 국가와 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일종의 ‘사회계약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개인의 권리와 함께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업설에서 ‘자유와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정신과 통한다. 불교 업설은 이렇게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라는,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요건과 정신을 가르쳐 준다.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결코 숙명론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바탕한 도덕적 행위와 창조적 노력을 설하는, 상식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함의한다.



Ⅲ. 불교 共業說의 사회적 의의



근대 인도에서 불교개종운동을 이끌었던 암베드까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는 위에서 언급한 막스 베버처럼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암베드까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과거 업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학대와 잘못된 사회계급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업과 윤회의 형이상학은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이 전생에서 악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폭압적 현실사회에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업과 윤회’의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전통적인 불교의 업설에 따르면,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 질병이 많고 적은 것, 외모가 단정하고 추한 것, 천하고 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 것,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등의 차별은 모두 과거생의 선업이나 악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분별업보약경(分別業報略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성인을 뵈옵고 기뻐하지 않으면

날 적마다 언제나 어리석어서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고

소경이 되어 볼 수 없으리.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절제 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

그는 업에 따라 과보를 받다가

나중에는 까마귀의 몸을 받으리.



이러한 가르침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일종의 숙명론으로 곡해될 여지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다. 불교는 과거세의 업뿐만 아니라 현세의 업도 현실을 규정한다고 설한다. 더욱이 불교업설은 과거의 업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업에 더 비중을 둔다. ��대승열반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의 佛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거니와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다.



이어서 ��대승열반경��은 현재의 과보가 현재의 업에 연유하는 비유를 든다. 즉 어떤 나라의 한 사람이 국왕을 위해 원수를 죽이고 포상을 받는다면, 그는 현재에 선업을 짓고 현재에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善因樂果]. 또한 어떤 사람이 국왕의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그는 현재에 악업을 짓고 현재에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 된다[惡因苦果]는 비유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보이며, 이 사례는 업설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해에 제동을 건다. 이 사례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업의 과보가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회적 ‘법과 제도’를 통해서 공개적이고 합리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국왕의 원수를 제거하여 상을 받고, 왕자를 살해하여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상벌제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현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현되는 인과업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과응보가 법과 제도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선업을 쌓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함께 올바른 법과 제도를 확립하고 그것을 바르게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인과응보의 법칙은 사회 정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불교 업설의 외연은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설에 대한 ��대승열반경��의 이러한 관점은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



이 가르침은 업설에 대한 통념을 극복하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준다. 사람들의 고통과 안락의 문제를 과거의 개인적인 근본 업[本業]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대, 시절, 토지, 인민과 관련시켜서 바라본다. 여기서 4대와 토지는 자연 환경을, 시절은 시대 상황을, 인민은 사회 환경을 의미한다. 과거의 본업이 因이라면 자연 환경, 시대상황, 사회 환경은 緣이다. 이러한 인과 연이 결합하여 고통 또는 안락의 과[果報]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경』「교진여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연 환경, 시대 상황, 사회 환경은 모두 器世間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기세간은 자연 환경의 의미로 정의되지만, 사회 환경도 기세간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이 인간을 담는 그릇이라면 사회[또는 문화] 역시 인간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간은 인간의 업과 무관한 것일까. 불교는 놀랍게도 기세간은 共業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공업(Sādhāraṇa-Karma)’이라는 용어는 대체적으로 초기 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부파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업’은 아마도 2세기 무렵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공업은 일체 중생의 집단적 또는 공동의 업으로서 자연환경[기세간]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업 사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불교의 공업 사상은 원론적으로 현대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공동의 공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반드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공동선의 추구가 이루어질 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컨대 환경문제는 우리 인간의 공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류의 팽창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은 어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시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하고 ‘절제 자본주의’와 같은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위기, 생태 위기는 개인적인 경제 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 지구적 합의를 통한 제도적,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당위성은 초기 경전의 하나인 『구라단두경(Kūṭadanta-sutta)』의 내용 중에 제시된 바 있다. 이 경의 요지는, 범죄자를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더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한, 범죄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경제 정책이 시행되어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질 때 국가는 안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빈곤을 사회악의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사회악의 해결을 위해서 개인적 선보다도 사회적 선에 더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공업 사상은 현대인에게 시민사회운동이나 NGO 활동, 공공질서 준수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버스의 예를 들어 보자. 버스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승하차시 등에 우선 개인적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전기사의 노동 환경, 버스 정비 시스템, 신호체계, 도로 사정 등의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다른 차량들도 모두 교통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 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에 대한 점검은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 모두가 연대의식을 갖고 공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공업설은 결국 우리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모두의 안전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Ⅳ. 업설의 결과론적 측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과 구조를 지니며 인간관계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이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조직에 바탕한 대형화, 대량화, 집단화의 사회로서, 그만큼 사회적 리스크도 높다. 이러한 리스크 사회에서는 윤리적 동기론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일정 정도 윤리적 결과론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마음’과 ‘의지’를 중시하는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이나교에서는 오랫동안 불교를 철저한 동기론으로 비판해 왔다. 자이나교의 한 경전[The sūtrakṛtāṅga sūtra]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쌀자루를 사람인 줄 알고 쇠꼬챙이로 찔렀다면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되고, 사람을 쌀자루로 착각하여 쇠꼬챙이로 찔러 죽였더라도 그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며, 불교를 無作用論(Akriyavāda)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불교는 이처럼 극단적인 동기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자이나교에서 비판하는 정도의 동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근거를 밝힌다.



첫째, 故意性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이 『賢愚經』에 나온다. 부처님 당시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 스님(아버지)를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스님을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생에는 죽은 비구 스님이 아들이었고 사미승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결과론에 해당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둘째, 『中阿含』「思經」에서, 석존은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不必受報)”라고 설한다. 이 마지막 부분의 ‘不必受報’는 문법적으로 분명히 부분부정인데도 우리말 번역에서는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라고, 완전부정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면 불교는 동기론과 일정 정도의 결과론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셋째, 10악업 가운데 意業의 하나인 愚癡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10악업 중, 의업에 속하는 악업은 탐, 진, 치의 셋이다. 이 마지막 ‘치’가 바로 우치다. 종종 邪見이라고도 한다. 구사론의 해석에 의하면 사견은 ‘선과 악 그리고 그 업보 등에 대해 그릇되게 생각하고 심지어 무시하는 견해’이다. 우치든 사견이든, 여기에는 분명 ‘고의성’은 없다. 그런데도 이것은 악업이기에 거기에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리석음, 즉 고의성이 없는 악업에 대한 과보를 설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결국 결과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넷째, 석존은 제자들에게 나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늘 가르친다는 점이다. 석존 재세시에, 어느 날 투라난타 비구니가 실수로 디딜방아의 공이를 건드려 잠자던 아이를 죽게 했을 때, 석존은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 바라이죄로 단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이죄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죄에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단 내의 행동 규범과 일반 사회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석존은 투라난타에게 “그러나 남의 방아 공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는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주의 의무’에 상응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현행 형법에서는 고의범보다는 가볍지만 과실범에게도 ‘주의 의무 위반(Verletzung der Sorgfaltspflicht)’이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내리고 있으며, 업무상과실범에게는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이 석존의 뜻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Ⅴ. 인과응보의 심리적 해석



甲이 형편이 어려운 乙을 도와주었는데 을이 훗날 성공하여 갑에게 은혜를 갚았다든가, 병이 정을 구타하였는데 정에게 다시 구타당했다든가, 누군가가 도둑질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갔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인과응보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러한 구체적인 개별 행위에 의한 인과응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업이나 악업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 성격과 인격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전자의 경우를 기계·물리적 인과응보라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생물·화학적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木村泰賢은 전자를 업의 반동적 현현이라 부르고, 후자를 업의 능동적 현현이라 부른다. 그는 업의 능동적 현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慈善心에 의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결과로서 자기의 성격이 점점 유연하게 되고, 드디어 자선 박애의 사람, 더 나아가 절대적 愛他心의 권화인 보살로까지 재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업의)능동적 방면의 현현이고 소위 同類因果에 속하는 것이다. …(중략)… 생각컨대 우리들의 세계는 결국 우리의 성격이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석존의 眞諦的 견지일 것이다.



사람의 성격과 인격은 (유전자 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업의 창조적 역동성과 가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설은 숙명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계물리적인)윤리학적 인과응보보다 (생물화학적인)심리학적 인과응보가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업과 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미래 불교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해석의 하나로 양심에 입각한 인과응보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겉으로 보아, 선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사람이 외견상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한다면 이 역시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양심의 감도가 다르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악을 행하고 법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죄인의 마음이 결코 평안하고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심리적 인과응보의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명상에 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종교를 떠나 직접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도 꾸준한 증가 추세다. 그것은 절대 빈곤을 극복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관, 인생관이 ‘물질’에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의 평화가 행복이자 성공이고, 마음의 고통이 불행이자 실패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음의 평화를 주제로 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연작들이 계속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명상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현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과업보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적절하고 유용해 보인다.



Ⅵ. 윤회설의 의의



정세근은 최근 그의 저서 ��윤회와 반윤회 -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한국불교에 고한다.



하나, 불교를 힌두교와 구별하라. 우리 불교는 인도의 전통 힌두교와 지나치게 뒤섞여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다르다. 불교를 인도철학으로 죽이지 마라. 나아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별하라. 윤회가 있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다.…(중략)…

넷, 윤회를 부정하라. 윤회는 힌두교의, 자이나교의 것이다. 윤회가 설명하는 것이 계급질서이고 태생의 한계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런 관념은 일찍이 버릴수록 좋다. 나도 모르는 윤회의 법칙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앞서, 그의 책 제6장 ‘무아와 윤회 논쟁’에서, 윤호진, 정승석, 김진, 한자경, 최인숙, 조성택 등의 주장과 논평,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비교 분석 비판을 통해 이른바 불교의 ‘무아윤회설’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는 이 문제를 무아윤회와 유아윤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무아연기의 철칙 아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는 연기를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無 또는 무아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설해진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체적인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我’는 크게 實我(실체아, ātman), 假我, 眞我로 구분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實我가 없다’는 의미지 假我와 眞我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연기무아설은 나를 온통 부정하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설의 무아도 ‘나’는 없지만 아주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없지만 그러나 아주 없지 않다는 그러한 뜻을 담은 중도적인 무아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은 이러한 나를 ‘거짓 나(假我 prajñaptyātman)’라고 하고, 그러한 ‘나’는 실로는 없지만 거짓으로는 있음이 허용되며, 이러한 거짓 ‘나’의 허용은 지혜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설과 윤회설은 모순 관계에서 벗어난다.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아윤회는 가능하다. 가아(오온)는 존재하고, 하나의 가아가 지은 업이 남긴 업력이 다음 가아를 형성하면, 그 가아들 간의 연속성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는 오온(가아)과 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무아윤회론은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라고 본다.



가아의 개념을 통해 ‘무아윤회’의 난점은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아의 윤회방식은 여전히 궁금하고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윤회설은 불교 사상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수많은 전생담은 말할 것도 없고 붓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인 宿命通 또는 宿命明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해탈의 가르침도 윤회를 떠나서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윤회를 단순히 교화방편설로 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한 ‘윤회’는 3세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일어나고, 한 찰나에도 일어난다고 종종 해석되기 때문에 윤회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生滅이 없지만 세속제의 범부중생에게는 死後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특히 신체적으로나 삶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뭔가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얻고 싶어 하여 윤회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도 대개는 생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 윤회론은 이러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있다. 윤회에 대한 확신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윤회설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한 적극적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사회에서는 더러 우연적인 요소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인 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세윤회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선을 행하고 악을 그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기 때문이다.



Ⅶ.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의가 여간 크지 않다.

첫째, 불교의 업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karma)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인간의 귀천 역시 오직 인간의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바, 이것은 곧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업보윤회설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며,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요청되는 시민정신이라고 하겠다.



둘째,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인 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共業을 강조함으로써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지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공업은 자연환경까지를 규정한다고 하는 바, 오늘날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공동의 노력은 물론, 그 무엇도 쉽게 체념하지 않는 도전 정신을 일깨운다.



셋째, 불교 업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의지를 강조하는 윤리적 동기론의 입장에 서 있지만, 결과론적 윤리 사상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글로벌 리스크 사회에 유용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불교 업설은 단선[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평면[사회]적 차원, 그리고 공간[심리]적 차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심리적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불교 업보윤회설은 이미 훌륭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과학의 발전과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문과 그에 대한 창조적 해석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善과 惡의 개념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졌을 때, 업보윤회설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유전자 과학이 첨단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윤회는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선악의 개념은 자연이 아닌 사회적 개념인 바, 인과응보는 필연적 자연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사회법칙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윤회하는 중생의 개체수는 언제나 동일한가, 아니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가? 축생의 선업과 악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업보윤회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명쾌한 응답을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2019/03/26

종교포럼 1회 -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 : 조성택 철학자

[펌] 화쟁, 평화롭게 싸우기 / 조성택 | Homo Dialogus



[펌] 화쟁, 평화롭게 싸우기 / 조성택 | Homo Dialogus




[펌] 화쟁, 평화롭게 싸우기 / 조성택



조성택 대표
‘화쟁’은 한국사회에서 분쟁과 갈등 상황을 해결하려고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그런데 이 화쟁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화쟁은 갈등과 다툼이 없는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화쟁은 평화롭게 싸우는 법이다.
잘 알려진 대로 화쟁은 원효(617-686) 고유의 용어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의 쟁론’이지만 각각의 장님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자신의 손으로 코끼리를 만진 직접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자신 또한 장님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모두 옳다”(개시, 皆是)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주장이 모두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효는 또한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어느 한 주장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이다. ‘나의 옮음’이 ‘저들의 틀림’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다를 뿐이다.
이제 코끼리의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코끼리 아닌 것을 만지고 코끼리라 주장하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각자는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 갈 수 있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주장들이 한 자리에 펼쳐지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조금씩 코끼리의 전모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옮음’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저들의 옮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더 큰 진리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 이견과 갈등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를 드러내는 기회이자 에너지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사회에 절실한 ‘화쟁의 정치학’이다.

조성택 ㅣ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고려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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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쟁시민칼럼 1호, 2015. 02. 17 www.hwajaeng.org

불교평론

불교평론

   
지율 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성택 
(본지 주간)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막기 위한 지율 스님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다. 지율 스님은 2003년 2월 1차 단식을 시작한 이래 2005년 2월 3일까지 네 차례에 걸친 총 241일 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여론 악화에 몰린 정부가 마침내 지율 스님이 요구한 환경영향 재평가를 약속한 것이다.

지율 스님의 ‘도롱뇽 살리기’는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수경 스님의 ‘삼보일배’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한국불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새롭게 바꾼 사건이다.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또 그 동안 주요 국책 사업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던 환경영향 평가의 엄밀성과 구체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면이 있다.

지율 스님의 행동은 이러한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 방향과 환경 운동에서의 종교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율 스님의 행동의 한계는 곧 한국에서의 환경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지율 스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인을 포함한 한국 사회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래의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해 먼저, 지율 스님에 대한 세간의 몇몇 비난들이 과연 정당한 비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지율 스님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몇몇 잘못된 비난의 논거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측과의 합의로 지율 스님이 단식을 중단한 이후 스님에게 쏟아진 많은 비난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사 중단으로 인해 2조 5천 억에 달하는 국고의 손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식이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일부 대중 언론 매체들과 네티즌들이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지율 스님을 비판하고 있으나, 이는 정당하지 못한 비난일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위험이 있다.

우선, 중단된 공사로 인한 국가 재원의 손실을 지율 스님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먼저 실시된 환경영향 평가가 철저하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면,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정당성을 정부가 자신할 수 있었다면,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지율 스님의 단식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공사 전에 실시된 제1차 환경영향평가가 행정 절차상 요식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보다 공정하고 철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해야 한다는 스님의 주장을 반박할 아무런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사 시작 전에 당연히 했어야 할 환경영향 조사를 철저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국가 재원의 낭비는 마땅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 측과 지율 스님이 합의한 대로 제2차 환경영향 평가에서 환경에 영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소위 ‘2조 5천 억’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재조사를 위한 공사 중단과 그것으로 인한 국고의 손실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다는 것은 부당하며, 그것은 정부의 잘못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세간에서 ‘단식은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고 지율 스님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 단식은 극단적이다. 더구나 ‘시위’용이나 ‘협박’용이 아니라 정말로 주장의 관철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이라면 극단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 수행자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던지겠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살행의 실천이다.

그래서 보살행을 실천하고자 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단식’은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수행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라고 본다. 보살의 이타행이 레토릭이거나 헛된 구호 정도인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고자 한 지율 스님의 ‘단식’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불교인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는 보살행의 실천인 것이다.

물론 환경 보호라는 대전제는 옳은 일이지만, 반드시 지율 스님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환경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율 스님과 일부 환경 단체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점에서 지율 스님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중생 구제라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한 ‘단식’ 그 자체를 두고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이라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릴 뿐 아니라 온당치 못하다고 본다.

한편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지율 스님이 단식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했다는 비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단식은 ‘정치적 행위’이며, 정치적 약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한 유효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경우 나라를 잃었을 때,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식이라는 저항 수단을 택했고,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

지율 스님이 2003년 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만 3년 간 네 차례의 단식을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스님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실언과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 파기에 항의하는 유일한 수단은 어쩌면 단식 이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왜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지율 스님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단식은 그 방법 중의 하나고, 이전에 했던 일에 비해 극단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음부터 무작정 단식을 했던 것도 아니고 농성과 항의 그리고 법정 투쟁 등 제도권 내에서, 그리고 법치라는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의 막강한 힘과 정치인들의 빈말에 대한 좌절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법정의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환경 보호에 관한 한국 법률 구조의 후진성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책임하에 환경 평가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며 허술한지 몰라서 하는 얘기다. 민주화 과정에서 단식 투쟁이 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적 상식과 일반 대중의 여론에 호소한 것처럼, 지율 스님은 막강한 공권력과 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의 허술한 구조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한 방법으로 단식이라는 투쟁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단식에 이르는 일련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지 않고, 만약 단식의 극단성만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면 환경 보호에 관한 허술한 제도적·법률적 환경 그리고 정치인들의 빈말의 남발이 허용되는 한국 정치문화의 고질병을 간과하게 되어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고 낭비’ 그리고 ‘단식’ 그 자체가 지율 스님을 비판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미래를 전망할 때, 지율 스님의 행동은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으며 그 잘못된 점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생을 구하고자 한 수행자의 순수한 동기를 생각할 때 단식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기의 순수함만으로 단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생떼를 쓰는 단식도 있고, 민주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단식도 있듯이 단식의 정당성은 그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정당성에 있다. 환경 보호는 공익적인 것이다. 따라서 환경 보호를 위한 단식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천성산의 자연 환경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 지율 스님의 주장이 반드시 옳으냐의 문제이다. 환경론자라고 해서 무조건 개발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론자라고 해서 환경 파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환경론자인지 개발론자인지의 구분이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환경’과 ‘개발’이 상호 충돌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느냐 하는 공리적인 사실 판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장 불편해도 미래를 위해 ‘환경’을 택한다든지 아니면 당장 많은 사람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가는 ‘개발’을 선호한다든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 운동은 일방적 주장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의 작업이 요청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근거한 두 주장이 합의점을 찾기란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환경 운동이 제대로 정착된 미국이나 독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대화와 설득, 계몽, 교육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지율 스님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설득과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는 과정이 생략되었거나 아니면 있다 하더라도 부족했다. 지율 스님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또한 그 한계는 한국 환경 운동의 한계이며 한국 사회의 한계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지율 스님과 환경 운동가 혹은 환경 단체가 천성산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와 민주, 공권력의 남용과 그에 대한 민중적인 저항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로 환경과 개발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환경 담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 터널공사의 무모함에만 항의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개발을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일방적인 자기 주장 때문에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 가지 못하는 환경 운동의 현실에 대해서도 항의를 했어야만 했다.


지율 스님의 행위가 종교 근본주의적으로 비춰지고 산승의 순진한 무모함으로 비추어진 것은 환경에 관한 스님의 입장이 중도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지상주의의 흑백의 논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권화된 현대 사회에서 환경 운동이 운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편향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종교인의 행위는 세속의 사회 운동 단체와 달라야 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한 집단의 정체성이나 특정 입장을 넘어서는 초월성이다. 그렇지만 환경과 개발을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있는 현재의 환경 담론의 한계를 지율 스님은 뛰어넘지 못했다. 더구나 불교의 입장은 중도가 아닌가? 중도가 어정쩡한 중도 봉합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교적 중도는 흑백의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환경을 지키자면 개발을 포기하는 것이고, 개발을 하자면 환경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금의 환경 담론의 해독을 극복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이다.

또 스님은 자신의 극단적 희생을 강조한 나머지 환경 운동이 대중적이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망가라든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엘리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를 더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구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기간의 단식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오히려 대중들의 천박한 호기심만 자극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물론 사태가 그 지경으로 간 것에는 스님의 책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언론의 책임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그러한 행태는 어제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 운동과 같은 중요한 사회 운동에 있어 한 사람의 희생이라든지 영웅적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고, 지율 스님에게보다 신중한 처신을 부탁하는 것이다. 중생 구제를 위해 수행하는 승려의 경우 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까운 것일 수는 없고 당연히 칭송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안에 따른 방편적 지혜가 요청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근본주의자의 순진한 무모함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이 있다.

스님이 단식을 풀면서 “저의 미숙함으로”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방편적 지혜의 부족함을 참회한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수행자는 앞서 가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 장수가 되기보다는 다소 방향이 틀리고 속도가 늦더라도, 무리에 어울려 함께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것은 자연 환경만이 아니다. 자연 환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사회 환경이란 일방적 주장과 흑백의 논리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절차적 과정을 말한다. 보다 바람직한 삶을 보장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자연 환경 못지 않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우리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자 사회 환경을 해치는 일은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율 스님은 사회 현안에 못지 않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불교계 내부에 대한 비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불교 사찰이 무분별한 증축과 개축으로 자연 경관과 환경을 훼손하는 일이 많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계의 일이라 세간의 언론이나 일반 여론은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우리 불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집안’ 일에 대한 자성과 비판을 게을리할 때, ‘바깥’ 일에 대한 비판의 도덕적 정당성은 적을 수밖에 없으며 그 비판에 대한 공감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삼보일배’ 그리고 지율 스님의 ‘단식’으로 불교계는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불교계 바깥만이 아니라 우리 ‘집안’ 일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자성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중생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불교 본래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족이지만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것은 지율 스님의 단식을 폄하하는 조갑제에 대한 불교계의 논평에 관해서이다.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명의로 나온 이 성명서는 그 내용이 참으로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그 표현이나 언사 또한 막말과 욕설이 오가는 시정잡배의 싸움질 수준이다.


조갑제의 글 자체는 불교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하고, 또 비판을 받아 마땅한 글이다. 그렇다고 “창자가 없는 인간” “오장육부가 비틀린 인간”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신 이상자”라는 감정적이며 막말 수준의 성명서는 도저히 중생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임하는 종교계에서 나올 수준이 아니다.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보편적 불성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무한히 참고 베푸는 보시와 인욕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근본이 아닌가?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따끔하게 지적하되 그 근본에는 관용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번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성명서에는 그러한 불교 본래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글의 형식적 요건도 중요하다. 한 개인의 푸념이 아니라 불교계를 대표해서 나가는 글이라면 명문(名文)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법에 맞는 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

2005년 봄

"한국 불교, 전태일 '자비로운 분노' 실천할 때" - 매일노동뉴스



"한국 불교, 전태일 '자비로운 분노' 실천할 때" - 매일노동뉴스




"한국 불교, 전태일 '자비로운 분노' 실천할 때"전태일재단·조계종 화쟁위 '전태일 정신과 불교' 토론회 열어

배혜정
승인 2016.10.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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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재단과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주최로 2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전태일 정신과 불교 토론회. 정기훈 기자


한국 불교가 전태일 열사의 삶에서 드러난 '자비로운 분노'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왔다.

전태일재단(이사장 이수호)과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 공동주최로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국 불교, 노동을 마주 보다-전태일 정신과 불교' 토론회에서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태일은 고통받는 어린 여성노동자의 삶에 대한 사랑·자비의 정신과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비인간적 사회현실에 대한 강력한 분노를 함께 가졌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전태일의 정신은 생명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존중, 인간해방 사상"이라며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부처의 말씀처럼,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노동기본권을 억압당했던 사회에서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한 위대한 각성이자 선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극한 인간사랑, 중생에 대한 자비심, 자비에 기반을 둔 보시와 실천, 깨달음이야말로 한국 불교가 전태일 정신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철학과)는 '시민보살'의 정치적 각성을 주장하며 "불교가 세상을 변혁하는 종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시민보살은 불교의 가르침을 종교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영역으로 확대하고 실천하는 존재"라며 "불교는 시민보살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지난 세기 한국 불교는 역사와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다"며 "이에 대한 반성과 함께 불교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불교적 사명을 자각하고 시민사회와 함께하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도법 스님은 이날 토론회에 앞서 "비록 불교계가 전태일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늦게 마련됐지만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면서 그동안 간과한 부분을 새롭게 해석하고 시대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배혜정 bhj@labortoday.co.kr

05 지율 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불교평론




지율 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성택 
(본지 주간)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막기 위한 지율 스님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다. 지율 스님은 2003년 2월 1차 단식을 시작한 이래 2005년 2월 3일까지 네 차례에 걸친 총 241일 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여론 악화에 몰린 정부가 마침내 지율 스님이 요구한 환경영향 재평가를 약속한 것이다.

지율 스님의 ‘도롱뇽 살리기’는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수경 스님의 ‘삼보일배’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한국불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새롭게 바꾼 사건이다.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또 그 동안 주요 국책 사업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던 환경영향 평가의 엄밀성과 구체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면이 있다.

지율 스님의 행동은 이러한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 방향과 환경 운동에서의 종교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율 스님의 행동의 한계는 곧 한국에서의 환경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지율 스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인을 포함한 한국 사회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래의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해 먼저, 지율 스님에 대한 세간의 몇몇 비난들이 과연 정당한 비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지율 스님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몇몇 잘못된 비난의 논거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측과의 합의로 지율 스님이 단식을 중단한 이후 스님에게 쏟아진 많은 비난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사 중단으로 인해 2조 5천 억에 달하는 국고의 손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식이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일부 대중 언론 매체들과 네티즌들이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지율 스님을 비판하고 있으나, 이는 정당하지 못한 비난일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위험이 있다.

우선, 중단된 공사로 인한 국가 재원의 손실을 지율 스님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먼저 실시된 환경영향 평가가 철저하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면,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정당성을 정부가 자신할 수 있었다면,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지율 스님의 단식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공사 전에 실시된 제1차 환경영향평가가 행정 절차상 요식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보다 공정하고 철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해야 한다는 스님의 주장을 반박할 아무런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사 시작 전에 당연히 했어야 할 환경영향 조사를 철저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국가 재원의 낭비는 마땅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 측과 지율 스님이 합의한 대로 제2차 환경영향 평가에서 환경에 영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소위 ‘2조 5천 억’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재조사를 위한 공사 중단과 그것으로 인한 국고의 손실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다는 것은 부당하며, 그것은 정부의 잘못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세간에서 ‘단식은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고 지율 스님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 단식은 극단적이다. 더구나 ‘시위’용이나 ‘협박’용이 아니라 정말로 주장의 관철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이라면 극단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 수행자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던지겠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살행의 실천이다.

그래서 보살행을 실천하고자 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단식’은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수행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라고 본다. 보살의 이타행이 레토릭이거나 헛된 구호 정도인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고자 한 지율 스님의 ‘단식’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불교인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는 보살행의 실천인 것이다.

물론 환경 보호라는 대전제는 옳은 일이지만, 반드시 지율 스님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환경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율 스님과 일부 환경 단체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점에서 지율 스님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중생 구제라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한 ‘단식’ 그 자체를 두고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이라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릴 뿐 아니라 온당치 못하다고 본다.

한편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지율 스님이 단식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했다는 비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단식은 ‘정치적 행위’이며, 정치적 약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한 유효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경우 나라를 잃었을 때,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식이라는 저항 수단을 택했고,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

지율 스님이 2003년 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만 3년 간 네 차례의 단식을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스님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실언과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 파기에 항의하는 유일한 수단은 어쩌면 단식 이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왜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지율 스님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단식은 그 방법 중의 하나고, 이전에 했던 일에 비해 극단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음부터 무작정 단식을 했던 것도 아니고 농성과 항의 그리고 법정 투쟁 등 제도권 내에서, 그리고 법치라는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의 막강한 힘과 정치인들의 빈말에 대한 좌절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법정의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환경 보호에 관한 한국 법률 구조의 후진성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책임하에 환경 평가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며 허술한지 몰라서 하는 얘기다. 민주화 과정에서 단식 투쟁이 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적 상식과 일반 대중의 여론에 호소한 것처럼, 지율 스님은 막강한 공권력과 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의 허술한 구조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한 방법으로 단식이라는 투쟁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단식에 이르는 일련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지 않고, 만약 단식의 극단성만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면 환경 보호에 관한 허술한 제도적·법률적 환경 그리고 정치인들의 빈말의 남발이 허용되는 한국 정치문화의 고질병을 간과하게 되어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고 낭비’ 그리고 ‘단식’ 그 자체가 지율 스님을 비판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미래를 전망할 때, 지율 스님의 행동은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으며 그 잘못된 점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생을 구하고자 한 수행자의 순수한 동기를 생각할 때 단식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기의 순수함만으로 단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생떼를 쓰는 단식도 있고, 민주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단식도 있듯이 단식의 정당성은 그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정당성에 있다. 환경 보호는 공익적인 것이다. 따라서 환경 보호를 위한 단식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천성산의 자연 환경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 지율 스님의 주장이 반드시 옳으냐의 문제이다. 환경론자라고 해서 무조건 개발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론자라고 해서 환경 파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환경론자인지 개발론자인지의 구분이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환경’과 ‘개발’이 상호 충돌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느냐 하는 공리적인 사실 판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장 불편해도 미래를 위해 ‘환경’을 택한다든지 아니면 당장 많은 사람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가는 ‘개발’을 선호한다든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 운동은 일방적 주장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의 작업이 요청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근거한 두 주장이 합의점을 찾기란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환경 운동이 제대로 정착된 미국이나 독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대화와 설득, 계몽, 교육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지율 스님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설득과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는 과정이 생략되었거나 아니면 있다 하더라도 부족했다. 지율 스님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또한 그 한계는 한국 환경 운동의 한계이며 한국 사회의 한계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지율 스님과 환경 운동가 혹은 환경 단체가 천성산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와 민주, 공권력의 남용과 그에 대한 민중적인 저항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로 환경과 개발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환경 담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 터널공사의 무모함에만 항의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개발을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일방적인 자기 주장 때문에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 가지 못하는 환경 운동의 현실에 대해서도 항의를 했어야만 했다.


지율 스님의 행위가 종교 근본주의적으로 비춰지고 산승의 순진한 무모함으로 비추어진 것은 환경에 관한 스님의 입장이 중도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지상주의의 흑백의 논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권화된 현대 사회에서 환경 운동이 운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편향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종교인의 행위는 세속의 사회 운동 단체와 달라야 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한 집단의 정체성이나 특정 입장을 넘어서는 초월성이다. 그렇지만 환경과 개발을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있는 현재의 환경 담론의 한계를 지율 스님은 뛰어넘지 못했다. 더구나 불교의 입장은 중도가 아닌가? 중도가 어정쩡한 중도 봉합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교적 중도는 흑백의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환경을 지키자면 개발을 포기하는 것이고, 개발을 하자면 환경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금의 환경 담론의 해독을 극복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이다.

또 스님은 자신의 극단적 희생을 강조한 나머지 환경 운동이 대중적이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망가라든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엘리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를 더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구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기간의 단식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오히려 대중들의 천박한 호기심만 자극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물론 사태가 그 지경으로 간 것에는 스님의 책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언론의 책임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그러한 행태는 어제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 운동과 같은 중요한 사회 운동에 있어 한 사람의 희생이라든지 영웅적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고, 지율 스님에게보다 신중한 처신을 부탁하는 것이다. 중생 구제를 위해 수행하는 승려의 경우 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까운 것일 수는 없고 당연히 칭송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안에 따른 방편적 지혜가 요청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근본주의자의 순진한 무모함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이 있다.

스님이 단식을 풀면서 “저의 미숙함으로”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방편적 지혜의 부족함을 참회한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수행자는 앞서 가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 장수가 되기보다는 다소 방향이 틀리고 속도가 늦더라도, 무리에 어울려 함께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것은 자연 환경만이 아니다. 자연 환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사회 환경이란 일방적 주장과 흑백의 논리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절차적 과정을 말한다. 보다 바람직한 삶을 보장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자연 환경 못지 않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우리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자 사회 환경을 해치는 일은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율 스님은 사회 현안에 못지 않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불교계 내부에 대한 비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불교 사찰이 무분별한 증축과 개축으로 자연 경관과 환경을 훼손하는 일이 많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계의 일이라 세간의 언론이나 일반 여론은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우리 불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집안’ 일에 대한 자성과 비판을 게을리할 때, ‘바깥’ 일에 대한 비판의 도덕적 정당성은 적을 수밖에 없으며 그 비판에 대한 공감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삼보일배’ 그리고 지율 스님의 ‘단식’으로 불교계는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불교계 바깥만이 아니라 우리 ‘집안’ 일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자성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중생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불교 본래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족이지만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것은 지율 스님의 단식을 폄하하는 조갑제에 대한 불교계의 논평에 관해서이다.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명의로 나온 이 성명서는 그 내용이 참으로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그 표현이나 언사 또한 막말과 욕설이 오가는 시정잡배의 싸움질 수준이다.


조갑제의 글 자체는 불교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하고, 또 비판을 받아 마땅한 글이다. 그렇다고 “창자가 없는 인간” “오장육부가 비틀린 인간”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신 이상자”라는 감정적이며 막말 수준의 성명서는 도저히 중생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임하는 종교계에서 나올 수준이 아니다.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보편적 불성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무한히 참고 베푸는 보시와 인욕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근본이 아닌가?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따끔하게 지적하되 그 근본에는 관용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번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성명서에는 그러한 불교 본래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글의 형식적 요건도 중요하다. 한 개인의 푸념이 아니라 불교계를 대표해서 나가는 글이라면 명문(名文)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법에 맞는 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

2005년 봄

2016/10/12

유사 마음수련 홍수… 禪 참의미 알리자 - 현대불교신문

유사 마음수련 홍수… 禪 참의미 알리자 - 현대불교신문

유사 마음수련 홍수… 禪 참의미 알리자한국불교의 변곡점, 다불교&탈종교
③ 탈종교 현상과 명상 대중화
신성민 기자  |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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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0  13: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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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단체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 명상 대중화는 반가운 일이지만 무분별한 수행법 범람은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현대불교= 신성민 기자] 한국사회의 종교가 가지는 공통된 문제 현상은 ‘탈종교화’이다.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젊은 층들의 종교 이탈이 심각한 문제다.

불자 중 4%만 간화선 수행
유사수련 경험자도 많아져
종교 사사화 경향 확대일로


수행, 자기 위안 활용 세태
명상 대중·상업화 明暗봐야
종단 수행체계 개발 필요해

종교의 나라 미국에서 무신론자가 점차 늘고 있다. 미국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최신 보고서 ‘엑소더스: 미국인들은 왜 종교를 떠나는가, 그리고 왜 돌아올 것 같지 않은가’에 따르면 미국에서 ‘믿는 종교가 없다’ 혹은 ‘나는 무신론자다’는 응답률은 지난 8월 말 기준 25%이다. 1986년 7%, 1996년 12%, 2006년 16%였던 미국 ‘비종교 인구’ 비율이 또다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신을 믿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연령대별 ‘비종교 인구’ 비율은 18∼29세 39%, 30∼49세 29%, 50∼64세 17%, 65세 이상 13%였다. PRRI는 “30년전 20대 가운데 10%에 불과했던 비종교 인구가 4배 가까이 폭증한 것”이라며 “종교에 있어서도 세대간 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설문에 응답한 사람 중 60%가 “종교적 가르침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이 같은 탈종교화 현상은 세속화와 탈제도종교화로 세분돼 나타난다. 불교에서 이 같은 현상과 맞닿아 나타나는 사례가 명상의 대중화이다.


  
 
명상의 대중화는 불교에는 큰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기업들이 서로 앞 다퉈 자신들이 설립한 연수원에 명상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있고, 명상 수행에 대한 정보와 수련장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기실, 참선이나 명상 수행은 특정 종교나 종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을 수행하는 재가불자 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2013년 발간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불자 중 70.4%가 실천 중인 수행법이나 기도법이 ‘없다’고 답했다. 그나마 ‘있다’고 답한 불자들 중에서도 대부분 염불(21.3%)과 호흡명상(21.3%)이 주류를 이뤘고, 간화선을 수행한다고 답한 불자는 4%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불교사회연구소가 올해 9월 발간한 〈조계종 수행 현황과 과제 연구 보고서〉는 “현재 조계종단의 크고 작은 갈등도 종단 구성원들이 수행에 무관심하거나 수행상의 혼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종단 구성원들 사이의 불교관과 수행관의 불일치가 다양성을 뜻한다면 환영할 일이나 그렇지 않다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탈종교화 현상은 명상의 대중화와 함께 유사 불교 수련법의 범람도 함께 가져온다. 이는 종교적 수행을 사사화(私事化)·세속화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실제 한국갤럽이 2015년 발간한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마음 수련 참여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중 25%가 불자였고, 개신교인이 33%로 가장 많았다. 가톨릭은 23%로 비슷해 모두 대동소이한 수치를 보였다.

종교보다 개인적 수련에 관심이 많다’는 응답에는 불자가 33%로 가장 많았고, 개신교인은 25%, 가톨릭인은 29%였다. 

이에 대해 한국갤럽은 “종교계에서도 사사화 경향이나 얽매임에서 탈출하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는 한국인들의 신앙이 제도 종교 중심의 신앙 생활에서 개인 중심의 신앙 생활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탈종교화 현상으로 인한 종교의 사사화, 세속화는 종교적 수행문화를 소비문화로 환치 시킨다. 김성건 서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 ‘종교의 미래:사회학적 전망’에서 “글로벌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 변동은 △제도 종교에서 소비적 영성으로 전환 △종교의 사사화와 상품화로 요약된다”면서 “이는 종교인과 종교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성찰적 신앙에서 세속적 건강과 부(富)의 숭배로 전환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명법 스님은 대중들이 좇는 명상 대중화의 환상을 경계했다. 명법 스님은 “사람들이 종교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위로’나 ‘만족’ 위주가 됐다. 사찰에 법회를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나 경연장에서 만족을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며 “예전엔 스님들에게서 직설적이나 핵심을 찌르고, 현실서 가치 없다고 판단된 부분을 파격적으로 언급하는 태도를 기대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가르치는 스승에게서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고 현 세태를 평가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원래 명상이나 불교적 수행은 단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은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나만의 행복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가치관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밝혔다.

간화선 대중화를 위한 조계종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부터 조계종 교육원은 전국선원구좌회와 협의해 ‘간화선 지침서’ 편찬을 추진했고, 2005년 〈간화선-조계종 수행의 길〉을 간행해 2만권 이상 출간하는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이렇다 할 노력이 없고, 2010년 이후에는 종단 차원의 간화선 종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세계적인 명상 열풍과 인성교육 강화 시류에 맞춰서 불교계 안에서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명상 포교 현장 지도자들이 네트워크를 위해 2015년 4월 21일 한국불교명상지도자협회를 출범했고, 올해 5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현재 협회는 협회 명의의 명상지도사 자격증을 국가 등록으로 놓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조계종 포교원과 불교상담개발원은 ‘조계종 명상지도사’ 양성 과정을 2년 째 진행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불교사회연구소가 9월 발간한 〈조계종 수행 현황과 과제 연구 보고서〉는 의미가 큰 연구 성과이다. 보고서는 현재 조계종의 수행 현황부터 역사와 전통, 문제점과 전망·과제까지 총체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보고서는 “종단 차원의 수행체계와 이에 맞는 수행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하는 사이 다양한 유사 종교 수련단체들이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면서 “불자들이 사찰이나 부처님 교법서 마음의 고통을 해결 못하고 종단 밖의 수행·수련 단체로 가서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면 그것은 불교와 종단의 본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종단 차원의 사부대중 수행체계 정립과 수행종책 수립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또한 이런 종무행정을 담당할 수행 전문 부서와 기구 설립도 주장했다.

보고서는 “종단 수행 종책에는 수행이 무엇이며, 목표와 수행 방법, 효과를 담아내면서 프로그램 교재, 매뉴얼 개발과 보급, 지도자 양성 방안, 국내외 수행센터 운영과 지원 방안을 담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종단 지도부와 제방 사부대중은 종단 수행체계의 정립과 실천을 위해 지혜와 역량을 결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간화선이 최상승이라고 아무리 주장한들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소통하지 않으면 공감을 얻을 수 없다”면서 “이제는 간화선이 최상승이라는 전통적인 주장만이 아니라 직지·돈오의 간화선이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보며, 해결할 수 있지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정립해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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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 - 현대불교신문

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 - 현대불교신문



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한국불교의 변곡점, 다불교&탈종교
① 한국불교, 준비가 필요하다
신성민 기자  |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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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0  13: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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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신성민 기자] ‘멜팅폿(Melting Pot).’ 현재 한국불교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다. 흔히 ‘멜팅폿’은 인종과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동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를 한국불교에 적용시키면 ‘세계불교·수행의 용광로’로 표현될 수 있겠다.

각국 불교 백화점된 한국불교
초기불교에 높은 관심 가져와
권위·중심 해체된 다불교 상황


탈종교화, 한국사회 명백한 현상
종교, 사생활의 영역으로 추락해
명상 대중·산업화 明暗 분석해야


현재 한국불교는 ‘다불교’라는 큰 조류를 맞이하고 있다. ‘다불교’는 다문화와 세계화를 통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된다.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태국·스리랑카·캄보디아 등 동남아 지역 불교를 포함해 일본과 대만, 서구화된 불교까지 다양한 국가의 불교가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

해외불교의 한국 진출은 1990년대 시작된 동남아 불교국가 노동자들의 이주현상과 증가, 2000년대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한 테라와다 불교의 전파와 과학화된 서구불교의 역수입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이뤄졌다.

‘다불교’라는 현상적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다. 그는 다불교의 특징을 한국의 전통불교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조성택 교수는 “다문화라는 말의 핵심은 ‘한국문화를 중심에 놓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한국불교에서는 대승불교, 간화선이라는 중심이 존재했는데 이제 그 중심이 해체된 상황을 ‘다불교’라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다불교 현상은 역사적 유례가 없는 사례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는 다불교를 다문화의 확장판으로 보고 세계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봤다. 윤승용 이사는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불교만으로는 현대 불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다수 수용하기 힘들다”면서 “한국불교가 조금 더 개방적으로 나아가고 신도 중심의 불교가 돼야 한다. 기초가 튼튼해야 다불교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다불교 현상의 대표 사례는 광풍에 가까운 초기불교에 대한 열기이다. 2000년대 이후 초기경전 번역과 함께 위빠사나 등 초기불교 수행법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면서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이라고 자신했던 간화선은 적지 않은 도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2013년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발간한 <대국민여론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 불자 중 4%만이 “간화선을 수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는 웰빙·힐링 열풍과 더불어 명상 대중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양에 전파된 불교가 마음 수행 등으로 변화돼 오히려 역수입되고 있다. 실제, 존 카밧진에 의해 체계화된 MBSR 등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과 접목되면서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 기, 마음수련 등 유사불교 형태의 마음 수련들도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명법 스님은 9월 3일 조계종 포교연구실과 불광연구원 주최로 열린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위기인가 기회인가’란 주제의 학술연찬회서 탈종교화와 다불교 현상을 연계시켜 비판했다.

명법 스님은 “명상의 대중화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이 되는 것)와 함께 발생한 근대적 현상”이라며 “명상은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소비문화의 하나로서, 명상의 유행과 더불어 오히려 탈종교화와 종교의 사사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업주의와의 결탁은 더 긴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불교 상황은 다종교 상황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불교를 약화시키고 종교를 사생활 또는 취미생활로 여기게 했다”면서 “이제 한국불교는 종교 시장에서 타종교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다른 불교전통과 함께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상품이 된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다불교와 탈종교 현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현상은 바로 ‘탈제도화’다. 이는 기성 종교·종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다불교는 중심 권위의 해체로 기성 전통 종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탈종교 현상은 세속화와 탈제도종교화로 세분돼 나타난다.


  
▲ 태국 방콕의 한 불교사원의 수많은 불상들. 다불교시대를 맞은 한국불교도 다양한 불교를 만나고 있다.
한국갤럽이 2015년 발간한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종교 단체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믿음을 실천하면 된다’는 질문에 긍정 응답을 나타낸 사람은 83%에 달했다. 불자의 경우 85%가 가톨릭인은 84%가 개신교인은 73%가 종교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행 생활이 가능하다고 봤다. 이는 탈제도화 현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계종 포교연구실의 ‘탈종교화’ 주제 연찬회에 참석한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탈종교화 시대에 세속적 제도들이 종교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종교의 전문영역이었던 분야에 기업들이 나서서 힐링의 산업화를 활발히 도모하고 있고, 영성을 마케팅의 주요 범주로 활용하고 있다. 대중스타에 대한 팬덤은 청소년의 유사종교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1000억원을 투입해 2017년 개원을 목표로 영덕연수원을 건립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1만 임직원을 대상으로 영덕연수원에서 명상교육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동국산업, 동화그룹 등도 명상센터 형식의 연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국선도, 단월드, 마음수련원 등 유사 종교 수련단체들이 전국 조직을 넘어 세계로 진출해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자체 수련법를 개발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대규모 명상센터를 세우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우혜란 가톨릭대 외래교수는 ‘신자유주의와 종교 상품화’ 제하의 논문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이전에는 상당 부분 제외됐던 종교 영역을 소비문화로 흡수하면서 상품화의 길을 걷고 있다”며 “현 시대에서 종교문화는 일종의 ‘주인 없는 자원’으로 쉬운 상품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 불교는 이 같은 변화 현상들에 대해 수용할 것인지,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남는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아직 현상 인식과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명법 스님은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다문화, 다종교, 다불교 상황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상대주의를 허용할 만큼 권위주의도 청산하지 못했다”면서 “불교를 현재적 경험 속에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다시 현재 한국 상황과 접합시키는 시도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승용 이사는 “선종이라는 큰 줄기의 전통을 제외하고 나면, 한국불교는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면서 “현재의 규격화된 불교로는 현대인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기 어렵다. 전통을 중심으로 수용과 보완 작업이 꾸준히 이뤄져야 한국불교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명예교수는 “다불교 현상은 불교 전통간의 상호 교류와 불교의 국제화 운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통해 불교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 “한국불교의 우월성과 정체성만 내세우기보다 서로 배우며 성장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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