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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예수가 재림한다면 믿겠습니까, 넷플렉스 영화 '메시아' - 아주경제



[빈섬 이상국의 알바시네]예수가 재림한다면 믿겠습니까, 넷플렉스 영화 '메시아' - 아주경제


요르단에서 상영 금지 요청…무엇이 문제였나


[영화 '메시아'의 한 장면.]


'종교란 무엇인가' 묻는 영화

넷플릭스 영화 '메시아' 시즌1 10편을 본 뒤, 무엇인가 기록을 남기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신문(아주경제)에 연재하고 있는 '다석 류영모 시리즈'의 주제들과 메시지가 겹치면서,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복잡한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세기 벽두의 동서양 문명충돌 속에서 1800년된 기독교의 급속한 동방 전파가 이뤄졌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의 다석 류영모,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는 동양적인 지혜와 안목으로 기독교의 심각한 변질을 읽어냈다.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류영모는, 우치무라의 동양적(일본적) 기독교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이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면서 신성에 대한 심오한 확장을 이뤄낸다. 동양적 성찰과 예지가 서양기독교를 거듭나게 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메시아(Messiah)는 구세주란 뜻으로 쓰이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구약에서는 예지를 지닌 이스라엘왕을 뜻한다. 영화 촬영을 허락한 요르단 왕립영화위원회는 작품을 내놓기 이틀 전에 영화내용을 확인한 뒤 요르단에서의 스트리밍을 자제해줄 것을 넷플릭스에 요청했다. 종교의 신성함을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 요르단의 법규를 위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붙였다.

허구의 내용이라고 밝힌 영화가 이렇듯 종교국가의 난색을 불러일으킨 것은, 영화가 내놓고 있는 질문인 '종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메시아'처럼 행동하는 이란 출신의 남자 '알마시히(메흐디 데흐비 역, 알마시히는 메시아란 뜻으로 그를 따르는 대중이 붙인 별칭이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긴장을 자아낸다. 그는 과연 메시아인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이가 있고, 부정하는 이가 있다.



[영화 '메시아'의 한 장면.]

물위를 걷는 기적, 예수를 떠올리다

영화 속의 군중들이 바라보는 관점들이 있지만, 영화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관점도 있다. 영화 밖의 관객이라면, 영화 감독이나 작가의 생각을 기웃거리려 하거나 영화의 시나리오나 영화가 추구하는 의미를 짐작해보려할 것이다. 처음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던 알마시히가 갈수록 메시아의 심증을 높이는 건, 곳곳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다.

우선 미사일 폭격을 앞둔 시리아에서 군중들에게 겁없이 설교를 펼치며 기적의 모래폭풍으로 전쟁을 물리치는 이적이 이뤄졌고, 군중이 모인 한복판에서 총을 맞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있었고, 중동에서 미국으로 순간을 이동을 했고, 토네이도 속에서 교회 하나와 소녀를 구했으며, 사람들 앞에서 물 위를 걸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과 행적을 알고 있었으며, 격추된 비행기 속에서도 멀쩡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이미 추락사한 사람도 살려냈다.

영화는 이런 기적들을 섣불리 믿지 못하도록, 그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다. 그가 마술을 터득한 사람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는 정신적 '장애'를 겪어온 과거가 그의 형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그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기적을 흉내내서 사회혼란을 꾀하려는 '신종 영성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흘린다. 그의 '테러'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높여놓기도 한다.



[프랑코 제퍼렐리 영화 '나자렛 예수'(1977).]

신은 인간에게 기적을 보여 설득할 이유가 없다?

알마시히의 기적들을 눈으로 보며, 사람들은 메시아의 재림을 확신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대목은, 현재의 대중이 '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예수 시대의 기독교가 어떻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톨스토이와 류영모는, 신이 '기적(초자연적인, 초인간적인 행위나 사건)'을 통해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기적은, 후세의 인간들이 신의 힘과 존재를 좀더 강력하게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삽입한 '특수장치'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예수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기적으로 신앙을 끌어모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 존재다. 오직 인간에게 자신의 메시지인 '극기와 사랑'을 전파하기만 했으며, 그 자연스럽고 순수한 메시지로만 인간은 신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

신이 인간을 놀라게 하기 위해 '초능력'을 보이는 일은, 극히 인간적인 발상들이 조잡하게 '가필'된 결과라는 것이다. 류영모는 신은 '절대적 세계'의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세계에 숨쉬고 있는 인간이 동일한 '존재'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황된 것이라는 입장에 선다. 하느님은 '없이 계시는' 존재라고 그는 표현한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것은 절대세계에 들어서는 그 순간이라고도 한다. 깨달음 또한 그 지점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영성'을 무기로 삼는 테러리스트가 될 때 더 끔찍

영화 '메시아'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을 연상케 하는 초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이 오랫동안 잘못 지녀온 절대자에 대한 왜곡된 믿음들을 재현해 보여준다. 인간이 지니고 있지 않은 초능력을 가진 존재는 신이 되는가. 신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까지 덩달아 던진다. 기적을 보여준 존재라도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또다른 확인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영화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을 무기로 한 더 끔찍한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알마시히는 예수의 풍자인가 조롱인가 재림인가. 영화 속의, '믿음에 대한 혼란'들은 이 수상하고 대단한 남자가 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알마시히의 능력이 눈속임이나 가짜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메시아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적을 품고 왔느냐, 그 사랑의 힘으로 영성의 파탄지경에 이른 인간들을 다시 일으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 나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가 전직 사기꾼으로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 성서의 산상수훈에서 말했던 신의 메시지들이 흘러나온다면 그는 메시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

(알마시히가 진짜 예수로 재림할 수 있는)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박홍규 옮김, 2016. 들녘출판사) 고 말한 이는 톨스토이다. 그가 가장 이 영화의 본질과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사상가인지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

“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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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

‘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기사입력: 2020/03/12 [19:5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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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이자 영성 철학자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인간으로서의 에고(몸나, 맘나), 곧 ‘제나’에서 벗어나 영(靈)이 주인이 되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 선구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 중에서







다석 류영모의 생애



다석 류영모는 1890년 3월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 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중국 송나라 휘종 때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중 대요를 뽑아 만든 역사서)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 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고,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의 양평학교에서 한학기 동안 교사로 일했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 정직한 노동, 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 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 다석 류영모   





1915년 김효정과 결혼했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했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류명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 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류명근이 차려준 솜 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했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지만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개신교에 입문한 이후 도그마에 물들지 않고 진리 탐구에 매진,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하나로 꿰는 ‘동서통합의 영성철학자’로 거듭났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불·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다석의 가슴속에서는 동서양의 종교가 만나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했다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몸과 맘의 ‘제나(ego)’에서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 자체인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같은 ‘겨레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 종교사상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 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 에든버러(Edinburgh)대학교에서 강의되었다.







●류영모와 김효정의 결혼







다석 류영모는 "결혼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순 없다. "만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완전을 이룬다면 한번 하는 것이 좋아요. 결혼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류영모의 주위에는 등장하는 여인이 없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동경물리학교 유학을 다녀온 류영모이지만 비혼(非婚)을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까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듯 사귀어본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독신인 그를 지켜본 목사 김필성이 중매에 나선다. 김 목사는 자신의 친구인 김건표의 누이동생 김효정(金孝貞)을 소개한다. 김건표는 류영모보다 7살 위로 전주 신흥학교 교사와 군산 우체국장을 지냈다. 신부가 될 김효정은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성(金顯成),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 위로 오빠 건표가 있고, 3살 아래의 동생 숙정(淑貞)이 있다. 김현성은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이 김옥균·박영효와 함께 개화운동에 가담했고 뒷날 전남과 목포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김효정은 아버지와 오빠의 직장을 따라 광주·목포·전주·군산·이리 등 호남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효정과 숙정 자매는 군산에서 소학교 3년, 중학교 3년 과정의 학교를 다녔다. 여학생이라고는 두 자매뿐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에는 덮어 쓴 장옷으로 잔등에 땀띠가 나 고생을 하였다. 나이 많은 남학생 틈에 자매가 학교에 다닌다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자매가 도중에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학교 측에서 집으로 찾아와 자매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두 사람이 도중에 그만두면 앞으로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자매는 다시 학교에 나가 졸업을 했다.







동생 숙정은 서울에 와서 경기고녀를 졸업한 뒤에 교사가 되었다. 효정의 부모는 오빠와는 달리 신랑감 류영모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부친은 사위도 자신처럼 건장한 무인형(武人型)을 바랐다. 류영모는 작은 체격에 지적인 면모의 선비형이다. 류영모는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앞으로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효정의 모친이 싫어했다. 사위 될 사람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면 체력이 약한 맏딸이 농사바라지를 감당해낼 수 없을 거라고 걱정했다. 남편 따라 밭이랑에서 김 매고 오줌항아리를 이고 나르고 마당질에 도리깨질을 해야 할 터인데 효정의 체력으로는 역부족이란 것이다.







●어긋날 뻔한 혼담 성사시킨 류영모의 서신







김효정은 나중에 팔순이 되었을 무렵, 류영모와 혼담이 있던 처녀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오빠의 말씀이 신랑 될 사람은 학식이 깊고 생활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하였어요. 사람은 참되게 살려면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드시 국산품을 쓰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류영모는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신부감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중매하는 김필성의 얘기만 듣고 참한 규수라 하여 혼사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인·장모될 분들이 완강하게 반대를 한다니 난감했다.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혼담이 그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영모는 생각 끝에 장인이 될 김현성에게 허혼(許婚)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효정의 집에서는 류영모의 편지를 받고 술렁이었다. 사위가 될 사람으로부터 장인 될 사람에게 편지가 왔으니 그때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사윗감 류영모의 편지를 읽고는 그 문장과 글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둘째 딸 숙정이를 불러서 읽어보라고 했다. 언니 효정이 사랑방에서 나오는 숙정에게 편지에 무슨 말이 씌어 있더냐고 물었다. 숙정의 대답은 이러했다. "붓글씨로 쓴 편지글이 논어를 읽는 것 같았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어." 당시 숙정은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았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학교 교사도 못 읽는 글이라니, 대체 뭐라고 썼기에 그랬을까? 그렇다고 아버지께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류영모는 이 편지 한 장으로 혼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풍속은 신랑이 장가(처가집)를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랑 류영모는 신부에게 시집(시가)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임금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친영례(親迎禮)와 같이 잔치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굳이 양가를 오가는 이중잔치를 벌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시댁으로 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서로 이런 논란이 오가던 끝에, 신부 집에서 양보를 했다. 장인 김현성은 혼례에 오지 않았고 오빠인 김건표가 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신부 김효정은 목포항에서 인천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탔고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경인선 기차를 탔다. 신부는 배멀미와 차멀미를 연속으로 했다.





▲ 류영모·김효정 부부   





●"남녀는 최선 다하라" 주례사에서 읽은 성경구절







서울 종로구 당주동 신랑집 마루에서 혼례가 올려졌다. 목사 김필성이 주례를 맡았다. 신부도 14살 때부터 교회에 나간 기독교 신자라 교회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신랑 류영모는 주례에게 예식 때 읽을 성경구절을 미리 지정해 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였다.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 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혼례를 올린 때가 1915년 9월, 늦더위가 느껴지는 초가을이었다. 25살의 신랑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22살의 신부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혼례복으로 입었다. 김효정에게 오빠 김건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남편은 훌륭한 분이다. 네가 남편의 뜻을 거스르면 너와 나 사이에 남매의 의를 칼로 자르고 소금을 치듯 끊을 것이다."







58년 전의 얘기를 80살이 된 김효정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의 말을 깊이 품고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신랑 류영모, 첫날밤 실종 사건





혼례식을 올린 류영모는 그 길로 호남선 목포행 열차를 타고 목포에 있는 처가로 향했다. 신부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는 감히 신방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부는 신랑이 신방에 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신랑이 행방불명이 된 셈 치고는 집안이 너무 잠잠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장가든 날 신부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했다. 신식 혼례를 올렸으니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하는 족두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옛말에 집안이 쓸쓸하면 맏딸 시집보낸 집 같다고 한다. 22살이 되도록 고이고이 기른 딸을 멀리 서울로 시집보내고 부모는 쓸쓸한 마음과 온갖 걱정을 보태면서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새신랑인 사위 류영모가 목포 처갓집 대문 안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기겁하듯 놀랐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마땅히 서울에서 신부와 함께 있어야 할 신랑이 홍길동처럼 목포에 나타났으니 예삿일은 아니다. 사위 류영모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신부를 혼자 두고 이곳에 왔는가?” 이렇게 묻자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장인·장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기 전에 어찌 신방에 들 수 있겠습니까?” 이걸 나무라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장인·장모는 난감한 표정 속에서도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신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다니 고맙구려.”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기 위한 청년의 선택







그렇게 장인·장모의 대화는 오래 이어졌고, 사위의 식견 속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장인은 문득 이런 말을 꺼낸다. "여보게, 자네 얘기들이 실상을 꿰뚫고 있고 나라의 뒷날까지 깊이 걱정하고 있는 대장부의 기개까지 느껴지게 하네. 우리 둘째 딸 숙정이가 있네. 자네 부인이 된 첫째와는 세 살 터울일세. 맏사위가 둘째의 인연도 한번 찾아주심이 어떻겠는가?"







그러면서 경탄을 이어갔다. "5척 단구(短軀)에서 어떻게 그런 기개와 담론이 나오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네." 키가 작다는 건, 장인이 처음에 그를 마뜩잖아 했던 이유가 아닌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5척의 키나 8척의 키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겠습니까. 신체의 자잘한 것에 얽매여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우주를 살피지 못한다면, 그 눈이 어찌 높고 큰 것이겠습니까. 학교에 있을 때 천문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가르쳐, 세상을 이루는 보다 큰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니 소소한 차이들에서 마음을 쓰는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단구와 생각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에 호쾌한 무골인 장인의 입이 하릴없이 닫히고 말았다. 류영모는 처가의 큰 대접을 받고 귀경하는 길에 관촉사에 들러 은진미륵보살입상을 구경했다. 논산의 대장간에 들러 솥을 만드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신부를 두고온 신랑으로선 속 터질 만큼 느긋한 행보였다. 서울의 김효정과 재회한 것은 첫날밤이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대체 왜 이토록 사랑의 입방(入房)을 늦췄을까. 그가 직접 이에 대해 말한 바는 없지만, 젊은 나이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고 사랑의 이름을 빌린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고자 함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결혼 2년 뒤인 1917년에 첫아들 의상(宜相)을 낳았다. 1919년엔 둘째 자상(自相)을, 1921년엔 셋째 각상(覺相)을 두었다. 아들 셋의 이름에 항렬 자 상(相)을 빼면 의자각(宜自覺)이 된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으라. 그는 별 뜻 없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가 아들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1926년에 낳은 딸의 이름은 월상(月相)이었다. 음력 보름에 낳았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이어보면 의자각월(宜自覺月)이 아닌가. '마땅히 스스로 깨닫아 달처럼 환해져라',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환해지는 일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핏줄에 대한 애착을 담은 말도 아니다. 태어난 이상, 스스로 그 정신의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진정어린 애정의 충고이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돋으라







류영모는 자식을 잘 길러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고 보았다. 자식은 결국 육신이 품는 희망일 뿐이다. 후손이 끊어질 것을 고민하던 나라가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정신이 끊어지지 않아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육신을 이어주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런 면모를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이름 속에 넣어놓은 '의자각월'은 '정신 잇기'의 염원이 아닐까 싶다. 육신으로는 내가 낳았지만 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너희 스스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돋아 오르는 달이 아닌가. 류영모의 결혼생활은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김효정과 회혼(回婚)을 넘기며 백년해로했다.



류영모의 처가, 즉 김효정 친정집안의 뒷날을 훑어보면 이렇다. 류영모의 처남 김건표는 뒤에 서울에 와서 살았다. 만년에는 출판사에서 청탁하는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출판사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는 처남의 권고로 당시의 도량형에 관한 책을 편술하여 이름을 『메트르』라 하였다. 류영모는 처남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했던 것인데, 나중엔 아예 개성사(開成社)라는 출판사를 열게 됐다. 개성(開成)이란 역경(易經)의 계사전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만물의 뜻을 열어 천하의 일을 성취함)를 뜻한다. 『메트르』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출판사를 경영하는 일본 사람이 자사 출판서적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해 왔다. 도량형의 원기(原器)를 실은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도량형의 원기는 인류 공동의 표준기기로 표절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요, 일본 사람의 소송이라 패소한다. 개성사는 책도 내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처남 김건표는 자녀를 못 두었기에 처가의 손(孫)은 끊어졌다. 김건표의 아내(류영모의 처남댁)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류영모가 사준 땅에 지은 전주 동광원에서 살다 돌아갔다. 처제 김숙정은 혼인하여 오류동에서 거주했다.







류영모와 김정식·조만식·우치무라와의 만남







1912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22세의 다석 류영모는 길 위에 서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가을 오후 교사로 2년을 근무했던 교정엔 마른 잎들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제 나무를 버린 저 잎들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리라. 그에게 지난 2년은 다양한 동서양 학문을 접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이승훈, 여준, 이광수, 안창호, 신채호, 윤기섭 등 당대의 지식인·교육자·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지식과 신념에 감화를 받던 때였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은 그에게 사상적인 격동기이기도 했다. 이 학교에 교리 기독교를 전파했던 류영모는 톨스토이와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로서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했음)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적 성찰을 심화한다. 성서와 톨스토이 저서, 불경과 도덕경을 숙독하면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미 시스템화 돼 있는 교회와 교리의 종교체계에 대한 깊은 의문을 키워갔다.







이 의문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되었고,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적 신념체계들과의 뿌리 깊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머문 지 1년이 되었을 때 두 살 아래 동생 류영묵의 죽음을 겪었고, 생사관(生死觀)에 대해 고심참담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을 탐문해 들어가고 있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교를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엔 학문과 사상의 갈증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국내엔 대학이 없었기에 일본 유학을 택했다. 류영모는 지식을 더 다져 다시 오산학교에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학교사가 필요한 그곳을 생각하며, 대학의 전초단계 과정(예비학교)이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물리학교에 들어간다. 1912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귀국한다.







●깊어진 사상의 갈증 그리고 세 사람







갑작스럽게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류영모는 이 무렵(일본 재학)이 인생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고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학문을 계속하는 일이 그의 사상과 신앙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자가 되는 일보다, 당시의 그에겐 신학사상가가 되어 식민지 조국의 정신성(精神性)을 일신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데에는 일본 체류시절 느꼈던 도쿄의 어떤 '공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도쿄에서 그의 생에 큰 영감을 준 세 사람을 만난다. 김정식과 조만식,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다.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1862~1937)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류영모에게 예수를 알게 해준 일생일대의 은사이다. 1905년 15세의 류영모는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만났고 그를 통해 성경을 읽게 됐다. 김정식은 대한제국 시절 경무관을 지냈는데,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1902년 국사범(國事犯)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선교사 게일이 감방에 넣어준 신약성경을 읽는다. 4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몹시 억울한 상황에서 예수가 취한 의연한 태도는 성스럽게 여겨졌다. 김정식은 성경을 7번 읽었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무죄 석방이 된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는 절절하여,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나는 육신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내 불쌍한 사정을 고할 곳이 없으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지극히 친절하시고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형님께 고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앵사는 나이 10살도 안 되었을 때 두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로마교황(가톨릭) 양육원에 보냈으니, 때때로 부모를 찾아 부르짖을 생각을 하면 뼈가 저리고 오장이 녹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없었고 지금 이같은 깨끗한 마음을 얻은 사람도 나 혼자뿐입니다. 차후 어떤 지경에 처할지라도 이 은혜를 잊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전날에 지은 죄로 오늘 이 같은 긍휼(矜恤, 가엾이 여김)을 받기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 몸이 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 중에서







●다석, '믿음의 은사' 김정식과 재회







감옥에서 나온 김정식은 캐나다인 게일 선교사(James Scarth Gale, 奇一, 1863~1937)의 권유를 받고 연동교회와 YMCA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연지동,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있었던 애린당(愛隣堂, 이웃사랑의 집)에 살았다. 감옥에서 출발해 신앙 입문 3년차에 이른 43세 김정식은 15세 류영모에게 자신을 그토록 놀랍게 바꾼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류영모는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도 애린당에 찾아가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함께 지냈던 ‘믿음의 스승’를 류영모는 7년 뒤에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다.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도 반갑던 시절에, 이국땅에서 '믿음의 스승‘을 만난 일은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식은 류영모의 손을 잡고 가족에게로 데려갔고 사진도 찍었다.



김정식은 어떻게 도쿄에 와 있었을까.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잡는다'는 암암리의 공감대가 커지면서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늘어났다. YMCA는 한국 유학생들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쿄에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세운다. 1906년 8월 서울 YMCA에서 일하던 김정식이 파견되어 도쿄 총무직을 맞는다. 이 건물은 1919년 2월8일 그 유명한 재일유학생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곳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 김정식의 지원을 받았다. 조만식, 안재홍, 김규식, 송진우, 장덕수, 신익희, 김병로, 이광수 등 쟁쟁한 명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메이지대 법대생 조만식과의 만남







김정식은 ‘신앙의 제자’ 류영모에게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1950)을 소개해준다. 재일본 유학생들은 종파를 초월한 연합교회를 만들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에서 류영모는 조만식을 처음 만났다. 조만식은 같은 평안도 사람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을 알고 있었기에 오산학교 교사로 지낸 류영모를 더욱 반가워했다. 그의 하숙집이 류영모가 기거하는 곳에서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류영모는 메이지(明治)대학교 법과 졸업반이던 조만식을 자주 찾아가 얘기를 나눴다. 훗날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으로 남게 된 위대한 인물 조만식은 그때 눈빛이 형형한 청년에게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







"요강을 잘 닦으시오."







류영모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날 동네 부잣집 머슴이었소. 내가 할 일은 요강 닦는 일이었지요. 나는 매일 있는 힘을 다해 요강을 닦고 또 닦았소. 어느 날 주인이 나를 불러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내게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작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을지 모른다. "애국 애족하는 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있어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은 쓰지 말라고 하고 싶소. 다만 큰 눈을 두 개 그려주면 좋겠습니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한 눈으로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려 합니다." 고당 어록에 있는 말들이다. 23세 류영모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 고당 조만식 





인연은 오묘하다. 조만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옥중에 있던 이승훈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로버트 교장이 들어온 뒤 기독교 신앙통제가 심해진 오산학교를 민족정신의 성지로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만식은 뜻이 그러하니 석달만 맡아 수습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9년간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의 기풍을 제대로 갖춘 큰 교육인으로 길이 남았다. 그는 오산학교 기도회에서 이렇게 교장설교를 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겨레를 사랑합시다. 옳은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를 믿읍시다."







이런 조만식의 뒤를 이은 교장은 류영모였다.







다석에게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얘기다. 류영모가 일본에 갔던 1912년 우치무라는 51세였다. 그는 한 살 아래인 김정식(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과 친구처럼 지냈다. 우치무라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신앙의 벗인 경성의 김정식군 방문이 있었다. 3년 만에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일하지만 그 신앙에 물들지 않았음을 알고 기뻤다. 그가 고국의 일을 말할 때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기도를 같이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1919년 5월19일)







●김정식과 절친이었던 우치무라의 강연







"오래간만에 조선 김정식군이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빛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뻤다. 그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본과 조선의 합동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정치가나 군인이나 실업가는 모른다. 나는 일본인이고 김정식은 조선인이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형제이다. 김군은 나의 신앙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걸 감사한다."(1922년 11월7일)







이 엄혹한 시절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는 누구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를 저격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다(잡지 '성서의 연구', 1909년 12월호).







"나는 조선을 위해 이 일을 기뻐한다. 이 나라는 지금 실제적으로 국토를 잃고 정부를 잃고 독립을 잃고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다. 자비로운 하느님이 지상에서 이들 조선인의 손실에 대해 영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보상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의 하느님은 또한 조선인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후하시고 그들에게는 박하실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가지고 조선인의 지상에서의 손실을 메워주실 것이다. 지상에서 저주를 받았으면 하늘에서 은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은혜로운 아버지에게 자비를 입을 것을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 표방하는 평등과 사랑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탄력을 받던 시기에 일본 지식인이 자국의 통감 피살 사건에 대해 이같은 논평을 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히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 우치무라 간조   



●주체적인 기독교 교리해석을 고민하다







김정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회에 우치무라를 강사로 자주 초빙했다. 류영모는 도쿄물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우치무라가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를 그대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교회와 교리 문제, 일본 국가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문제 등에선 일정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가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정착 과정에서 주체적인 '교리 해석'에 눈뜨게 했고 독립운동과 같은 국가적 현실논리의 신앙적 구현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사적 존재감은 지금도 상당해 보인다. 류영모가 우치무라의 신앙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청년시절 '영성(靈性)의 주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를 우치무라에게서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우치무라 '무교회'는 서양식 기독교에 대한 반대







우치무라의 경우, 삿포로 농학교에서 놀라운 형제애를 체험했던 '7인형제의 작은 교회'의 함의(含意)를 신앙적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교회와 목사 중심의 서양 기독교가 아니라,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평등하며 자발적인 형식으로 움직이는 '교회 아닌 교회'를 실천한 것이다. 일본 기독교에 서양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뿌리 깊은 애국적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無敎會)’는 교회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제도주의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시스템이다. 믿음 안에서 신도들은 철저히 평등하다는 얘기다. 또 신앙을 형식에 가두거나 교파적 신조가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 혹은 배타주의를 비판했다. 예수 이후에 생겨난 인위적인 형식과 구분들이 본질적인 신앙을 오히려 훼손하거나 왜곡한다고 본 것이다.







성례전주의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세례는 죄를 정화시키는 기적적인 힘이 있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형제·자매로 거듭나는 신앙행위라고 해석했다.







우치무라는 말했다. "나에게 교회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내게도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나의 교회다." 그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새롭게 읽을 것을 제안했고, 그것이 '성서연구회'다. 기존의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연구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경이었다. 







●임종 때에도 인류의 행복과 일본 융성을 말한 우치무라







우치무라 간조는 70세인 1930년에 눈을 감으며 "인류의 행복과 일본국의 융성과 우주의 완성을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와 일본을 늘 함께 생각했던 애국적인 신념을 드러낸 유언이었다. 그가 일본을 비판할 때도, 거기엔 깊은 애국심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남긴 사상인 '무교회주의'는 평생 투쟁적으로 살았던 신앙적 삶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 남겨놓은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무교회주의는 나의 신앙이다. 혹자가 감리교회 신자이고 혹자는 침례교회 신자이고 혹은 성공회 신자이고 회중교회 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교회 신자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류영모가 교회를 탈피하면서 주창했던 비정통 기독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은 류영모 신앙이 지닌 독보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돋을새김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류영모는 톨스토이의 신학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교회' 자체가 성서에는 없는 기업적 시스템이며, 예수의 초인적 면모나 '기적' 또한 믿음을 돋우고자 후세에 덧붙인 가필일 뿐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형성하고 그밖의 신앙행위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서양기독교의 골격에서 스스로 이탈하고자 했다. 그는 정통을 표방하는 교회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나와 성서 속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려내고 동양적 통찰과 함께 적용하여 그 보편성을 실천하는 길을 걸었다.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한 김교신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기독교를 계속해서 새롭게 표현하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 우치무라의 주장들을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었다. 복음의 진리를 일본 역사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우치무라는 그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예언자로 여겨졌다. 그는 1927년부터 조선성서연구회 5명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한다. 이 잡지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다. 그는 이 잡지에서 '조선산(朝鮮産) 기독교'를 주창했다.                       





▲ 김교신   





일본은 김교신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해 감옥으로 보냈다. 1944년 전염병에 걸린 조선노동자를 간호하다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선 무교회'는 친구였던 함석헌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함석헌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격랑 속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역사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우치무라는 당시 조선에 대해 과감한 우호적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3·1독립운동의 일제 탄압과 관동대지진의 대학살에 대해선 침묵했다. 김교신이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영국과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적 평등관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일본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보편적 투철함은 지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치무라는 조선의 영적인 세계까지 노리는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가"라는 맹렬한 국내 비판(김린서)까지 받기도 했다.







류영모는 비교적 우치무라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자신과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 정신에 입각해 교회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우고자 했죠. 나와 톨스토이는 (교회를 벗어난) 비정통신앙입니다." 







톨스토이 사상을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한 류영모



●20세기 한국 문명을 깨운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는 영변의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고려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물리친 귀주대첩으로 유명하다. 귀주(龜州)는 정주의 옛 이름이다.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갈 때 사흘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곳도 이 일대였는데, 관군이 난을 진압한 뒤 정주는 ‘반역향(叛逆鄕)’으로 찍혀 정원현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 500년간 과거 급제자를 280여명이나 배출하여 한양을 제외하고는 합격자를 가장 많이 낸 학향(學鄕)으로 손꼽혔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정주역이 생겼고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다. 오산학교가 설립되던 1907년 정주군의 인구는 4만2000여명으로 북적이는 도시였다. 이곳은 근대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20세기 초기 근대화를 이끈 요람'으로 손꼽힌다. 문학가 백석과 이광수, 종교인 문선명(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언론인 방우영(전 조선일보 회장)의 고향이다. 특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주에서 3개 교회를 개척한 문선명 총재의 종조부 문윤국 목사는 오산학교 설립에도 뜻을 같이했다, 문 총재는 생전에 펴낸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 문 목사를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문 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문 목사는 정주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3.1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문 목사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물러나자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이 거사 실패 후의 후사를 당부하고 민족대표 명단에 빠짐으로서 그의 명성은 자연히 묻히게 됐다.                       





▲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주도로 설립된 오산학교(정주군 갈산리 오산)에는 여준·윤기섭·류영모·장지영·이광수·염상섭·김억이 교사를 지냈고, 교장으로는 백이행·이종성·박기선·조만식·류영모·주기용 등 뛰어난 교육자들이 학교를 키워냈다(류영모는 교사와 교장을 모두 지낸 오산학교의 핵심 교육자였음). 백인제·김홍일·함석헌·이중섭·김소월이 이 학교 출신 학생이며, 김기석·주기철·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를 나왔다. 학생 7명에 교사 2명으로 부랴부랴 창설했던 이 작은 학교(4년제 중등과정)가 일제 치하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주체적 종교운동의 산실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1907년 12월24일 학생과 학부모를 합해 20여명이 참석한 개교식에서 이승훈이 발표한 개교사는 이렇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내려온 이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내맡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들을 가리켜 만분의 일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한데 모아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재학시절 교사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2년 《개벽》지에 실린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란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 일대(영변 약산 제일봉과 학벼루)의 아름다운 풍광은 황폐한 식민지 민족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향수를 아로새겼다. 또 다른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백석을 낳은 것만으로도 오산학교는 '위대한 시의 메카'로 불릴 만하다.





●춘원 이광수와 교대한 물리선생 류영모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1910년 10월1일이었다. 8월29일이 국치일(國恥日)이었으니 한달 남짓 지난 무렵. 빼앗긴 들에도 계절은 오고 있었다. 평북 정주엔 곱기만 한 단풍이 들고 산들바람 속에서 갈잎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사 류영모가 간 오산학교엔 아직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4년제 학교에서 아직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때다. 1907년 12월 24일에 설립했으니 3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모두 합쳐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옥이었던 오산학교에는 딴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합숙을 했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이었다. 교사 류영모는 당시 3학년이던 김여제, 이인수와 한 방을 쓰며 기거했다. 교사와 학생이 나이도 어슷비슷했다.







한해 전에 먼저 온 선생으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있었다. 과학 교사를 맡고 있던 이광수는 18세였고, 류영모는 두살 위인 20세였다. 류영모는 이광수를 만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공명을 느껴 금방 동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몇 백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평생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알려질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와서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춘원은 오산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이후 류영모가 수학과 물리화학, 천문학을 맡게 된다. 류영모가 당시 교재로 쓰던 물리교과서는 서울 종로에 있는 출판사 보성관에서 번역한 한자투성이의 책이다. 우선 한자부터 가르쳐야 읽기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산학교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학생들은 새벽 기상종에 맞춰 일어나 열을 지어 구보를 하며 황성산(黃城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오산동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누런 점토로 축조한 토성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교가를 제창했다.







"뒷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비에나 눈에나 변함 없이/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사랑하는 학교 우리 학교"







이 교가 소리에 맞춰 마을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교가를 지은 사람은 교사 여준이었다. 그는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다. 열심히 구령을 부르며 구보하는 학생을 이끄는 교사는 서진순이었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육군 연성학교를 나왔기에 학생들의 체조와 훈련을 담당했다. 깐깐한 교사로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구보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은 여준 선생에게 글도 배웠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승훈에 대해서 오산학교 출신인 함석헌이 지은 시조가 남아 있다.







"남강(이승훈의 호)이 무엇인고 성(誠, 정성)이며 열(熱, 열정)이로다 / 강(剛, 굳셈)이며 직(直, 곧음)이러니/의(義, 옳음)시며 신(信, 믿음)이시라/나갈 젠 단(斷, 단호)이시며 그저 겸(謙, 겸손)이시더라/일천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 가 머무느냐/황성산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 만년의 운치)만 높았네"







●오산학교 '톨스토이 신앙' 탄압사건







1910년 11월7일 이후 류영모는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러시아 대문호, 사상가) 사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서는 '톨스토이 신앙탄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12월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통해 조선에서 사망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와 가까워졌다. 그간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이 만주로 떠나자 로버트 선교사에게 교장을 맡긴다. 이듬해 2월엔 이승훈은 안명근 사건으로 감옥에 갔고 로버트가 학교를 관리하게 됐다.







로버트는 오산학교를 기독교 장로회 학교로 만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하게하고 교회교리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이광수는 이런 방침과 충돌하다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난다. 류영모는 어떻게 됐을까. 1912년쯤 이 학교와 결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것만도 고통스러운데 선교사에게 사상 감시를 받는 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그마(dogma, 기독교 교리)로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한다면 거기에 진리가 살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1912년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그는 교회 교리 신앙도 떠난다. 오산학교에 정통 기독교를 심었던 류영모는 그 정통 기독교의 배척을 받아 자기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면 톨스토이는 류영모에게 어떻게 다가온 것일까. 우선 통일복음서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했다. 이것을 '요약복음서' 혹은 '통일복음서'라 부른다. 그런데 그는 복음서를 요약하면서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를 빼버렸다







●성경 내용을 재정리한 '통일복음서'의 충격







세례요한의 수태와 출생, 투옥과 죽음을 빼버렸고, 예수의 출생과 가족계보, 이집트(애급) 탈출 부분을 잘라냈고,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펼친 그리스도 기적과 악마 축출, 바다 위를 걷는 기적,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 치료, 죽은 이의 소생을 제외시켰다. 또 예수의 부활과 예수 예언의 성취 같은 부분도 없앴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힘주어 전파해온 성서의 부분들을 잘라낸 셈이다. 통일복음서 서문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경전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복음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신성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는 무지한 군중에게 설교했다. 예수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에 대해서 들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5만종의 기록물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고 한 가지 요한복음을 더 골랐다. 성경 복음이 모두 성령으로 보내진 것이라는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톨스토이는 교회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년시절 처음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이며 악에 대해 선으로 대하라는 메시지였다. 내겐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었다. 내 마음이 회의와 절망 속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교회에 귀의했다. 그런데 교회가 믿는 신조 속에 나를 감동시킨 기독교 본질이 보이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였던 게 교회에선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는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의 내적인 진리에서 이탈해 외적인 독단의 신념만을 인정하고 있었다."(톨스토이 '종교론' 중에서)

     

●톨스토이 “교회는 죽었다”







톨스토이는 “교회는 죽었다”고 말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교회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둘 가운데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 규율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의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택했을 때 남아 있는 교의가 하나도 없었다."(톨스토이 '나의 신앙의 요체' 중에서)                         





▲ 레프 톨스토이





류영모는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자기의 사상을 정리해 나갔을 것이다. 무엇이 정통신앙인가. 교회를 버렸다는 톨스토이가 비정통인가. 예수의 진정한 정통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기초로 마르코(마가)가 쓴 마르코복음에는 톨스토이 통일복음서처럼 동정녀 탄생도 없고 예수 육신부활도 원래 없었다(예수 부활은 2세기초 아리스티온이 증보한 것에 들어갔음).





류영모는 토인비와 헤르만 헤세의 글들도 읽었다.







"나는 기독교 전통적 신앙이 초보적인 검증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수준이란 것을 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육신 부활 승천이 특히 그렇다.'(토인비의 '회고록' 중에서)







"나는 종교 없이 산 적은 없다.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교회 없이 살아왔다. 찬란한 가톨릭교회는 가까이 다가가면 유혈폭력과 정치, 비열함의 냄새가 풍긴다."(헤르만 헤세의 '인생론')







성령의 생명은 어디 있는가. '정통'이라고 지켜온 저 위경(僞經)의 구절들에 있는가. 기독교 본질에 벗어난 독단의 신념에 있는가. 무엇이 정통인가. 이 깊은 문제의식이 젊은 류영모를 치열하게 이끌었을 것이다.     

           

●나와 톨스토이는 우치무라와 다르다







류영모의 말을 대신해준 것은 에드윈 헤치('허버트강연집')였다.







"예수의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불과 100년 사이에 다른 종교가 됐다. 정치화하고 세속화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기도로 가르쳐지며 읽혀지지만 산상수훈은 심지어 교회에서 읽혀지는 복음 구절에서도 제외되고 그래서 전체 복음서가 읽혀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집회에서 신도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기독교인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산상수훈과 사도신경이 이렇게 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지인지, 그것이 지니는 논리적 갈등이나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석명(釋明)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감히, 왜 저런 질문을 던져 1800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참메시지는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성경 마태복음 5~7장을 가리키는 성구이다. 산상수훈은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며, 예수가 선교활동 초기에 갈릴리의 작은 산(가버나움)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한 설교이다. 이 설교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기본적인 기독교 윤리지침으로 꼽힌다. 내용은 '8개의 복(八福)'과 사회적 의무와 자선행위, 기도, 금식,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된 신앙생활의 내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순종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배부를 것이요 /연민을 지닌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연민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맑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느님을 볼 것이요 /평화롭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 <'산상수훈' 중에서>







'복이 있나니'의 앞에 있는 8가지 조건들은 역설에 가까운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내가 잘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 팔복은 모두 남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공동체나 집단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것을 덜어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팔복을 말한 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세상'이라고 표현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며, 소금과 빛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을 말한다. 소금의 역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과 세상의 맛을 내는 역할이다. 빛의 역할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과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현재의 역할과 미래의 역할을 겹친 비유로 말하고 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거나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면서, 예수는 소금답고 빛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말해준다.







●사도신경, 신앙 '이단'의 판단 근거







사도신경은 사도(apostle)가 전해준 신경(creed)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규범을 가리킨다. 사도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들을 말한다.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의 믿음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전해져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0세기에 완결된 형태로 서방종교에서 사용된다. 사도신경은 사도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전승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므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판단하는 기초근거가 된다.







사도신경은 이런 형식을 지닌다. (1)나는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를 믿습니다. (2)나는 그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장례 지낸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4)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와 교제와 죄를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지금 여기서 믿는다'는 실존적 신앙을 강조하고 그 믿음이 전승되어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이단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단은 예수를 통해 계시해준 하느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믿음 위에 세운 신앙이라는 논리다.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는 점이 이단을 가르는 핵심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1800년 전 이교도들이 사는 고대 로마세계 한가운데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났다. 이 가르침은 예수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옛 종교의 모든 규칙 대신 오직 내면적 완성과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을 내세웠다. 이 가르침은 그 내면적 완성의 결과, 즉 예언자들이 예언한 외면적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다. 이 가르침에는 진리, 교리와 진리의 일치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이 가르침에는 사람을 변호하여 정당화하고 그를 구원한다는 행위는 없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의 내면적 완성과 사랑만이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오늘날의 '교회'가 없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실존적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예수가 말한 '무욕과 사랑'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과 다른 초인적인 기적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재확인하는 내용들만 담겨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라는 현재의 개념이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딱 두 차례 나오는데, 단순한 모임을 가리킬 뿐 신앙의 기관이나 시스템을 가리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교회를 문제 삼는 더 큰 까닭은 스스로를 무오류로 주장하고 '이단'을 설정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추구를 억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자임했던 '사람과 신의 중재자'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르침을 인간 각자에게 알려주러 왔는데 왜 또 다른 중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교회가 세워놓은 교리들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임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놀랄 만한 발언을 쏟아낸 이가 대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인 톨스토이였다. 이 땅에서 톨스토이의 이같은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다석 류영모였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우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의 가슴 속에선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고 자라나 꽃을 피웠다. 기독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종교일원론자(宗敎一元主義者)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신적인 큰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자’로,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과 맘의 거짓된 제나(ego)를 벗어나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이신 한얼님(니르바나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다음은 다석 연구의 최고 권위자 박영호가 엮은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의 내용 중 일부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







“탐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도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개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예수와 석가가 가리켜 보이는 바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두 성인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싸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 불교인들에게 사랑의 실천이 불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수행이 불충분하다는 것 등이 체감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찾고 또 찾아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동일하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신의 성품(혹은 부처님 성품)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 것. 이 지향점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비단 기독교와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도 다 마찬가지다. 종교다원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 다석 류명모 어록 중에서







●하늘아버지, 땅아버지





"눈을 감고 나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면 머리는 물론 온몸이 시원해진다. 이 다섯 자(尺)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 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예수만큼 효도를 다한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부터가 남다르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른 사람이 예수가 처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몸속의 피가 용솟음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있다. 십자가 소리보다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하라. 언제나 염천호부(念天呼父)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화두이며 공안(公案, 석가의 말과 행동)이다. 일요일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머리, 말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 땅에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 하는 아들은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에 악인은 없다. 유교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버리고 땅의 아버지만 찾다가 땅의 아버지조차 버리게 된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먼저 찾아야 땅의 아버지도 찾게 된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안잊으면 섬기는 것“ 



   

“사람이 우주의 비롯인 맨첨(太初)을 잘 모른다. 우리 사람은 온통(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 온통(전체)으로 온전(완전)한 한얼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이요 온전인 한얼님을 그리워한다.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얼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한 삶이다. 우리가 여기 왜 있나? 이 까닭을 알자면 한얼님 아버지에게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한얼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할 것 없다. 한얼님을 뚜렷이 한얼님 아들로 뚜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한얼님을 섬기는 데는 물질이 안 든다. 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을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몸나로』 엮은이 박영호는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에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바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으며,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 마침보람”이라고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그의 저서로는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강의』, 『다석 씨알 강의』, ,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등이 있다.

   

류영모의 '지금·여기·나' 철학







류영모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은 '소년' 잡지 편집을 돕던 이광수가 어느 날 최남선과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함께 오산학교 교사를 3년 지낸 이광수는 류영모를 잘 알고 있었다. 1914년 7월 최남선이 잡지 '청춘'을 창간할 무렵이었다.







류영모는 그 다음호인 8월호에 글을 싣는다. '청춘'에 처음 기고한 글은 '나의 1234'(1914년 8월1일 청춘 2호)였다. 이후 꾸준히 글을 실었다. '활발(活潑)'(청춘 6호), '농우(農牛)'(청춘 7호), '오늘'(1918년 6월 청춘 14호), '무한대(無限大)'(청춘 15호) 등이다. '활발'이란 글은 당시 중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전재되었다. '청춘'에 이어 나온 주간지 '동명(東明)'에 '남강 이승훈전'을 싣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실린 류영모의 글들 중 하나인 '오늘'이란 글이다. 28세 때의 생각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는 힘있는 충고이다.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 살이에 있다 하노라. 오늘 여기 '나'라 하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함께 났으나 이름이 다른 것)이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 하는 뜻이로다. 무수지점(無數地點)에 광겁시간(曠劫時間)에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된 나,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의 위함이 되도록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삼가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잡지 ‘청춘’에 실린  다석의 기고문 중에서







종교는 저마다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수많은 종교들의 메시지를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뭘까. 강조하는 방식이나 수식어가 다를 수 있지만 핵심은 "사랑하라"이다. 사랑한다는 일은 자기의 에고(ego)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에게 타자를 향한 사랑은 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이웃과 이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무아(無我, 자기를 초월함)'의 경지를 갖는 것이 이상적 신앙의 원형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 폐단인 양극화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을 더욱 버겁게 만들었고 희망의 싹을 잘라버렸다. 거기에 디지털 문명의 급진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변동은 기존 삶의 질서들을 심각하게 흔들어놓고 있다. 이같은 시대야말로 신앙적 가치 회복이 절실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듯 맹렬한 욕망의 대열에 줄을 선 듯하다.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거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조차도 그 원관념을 잃고, 오직 욕망의 거래나 득실의 저울질로 뒤바뀌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결혼은 더욱 '의문시되는' 행위가 되어간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회생활을 하고 개별적인 소득을 내는 시대에, 서로 삶을 합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득의 합산’을 통해 삶의 수준을 높이는 장점만을 높이 살 뿐이다. TV드라마가 날마다 보여주듯 권력과 금력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미줄일 뿐이다. 거기에 사랑은 한가한 '장식품'이 되어 있다. 이것이 행복하거나 의미 있는 삶의 구현인가. 종교가 내놓는 '사랑'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 채, 생활의 방편을 얻기 위해 하는 결혼식들. 그리고 그런 것에 환멸을 느껴 비혼(非婚)을 택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종교와 사상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남녀는 성별(聖別)을 해야 결속이 깊어”







"연애를 옛날에는 상사(相思)라 하였어요. 서로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연애가 장사처럼 여겨집니다. 별 타산(打算)이 다 꿈틀거립니다.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 당신의 종이 되어도 좋다, 당신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것은 다 흥정을 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남녀가 교제를 황망히 해선 안 됩니다. 성별(性別, 남녀간의 구별)이 뚜렷해야 상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별(聖別, 성스러운 거리)이라 합니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 죄를 대신해 구해줌)이 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서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간격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급하게 사귀는 것은 경솔입니다. 좋다고 달려가고 곱게 보인다고 곧바로 가까이 하면 상사의 마음이 굳세지 못합니다."

-류영모의 연애론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 이뤄지고 있어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교인인가? 오케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오케이. 그러나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의 반쪽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나 마르코 폴로가 세계일주 항해를 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나 그리스도인에만 머문다면, 당신은 아직 정신적인 세계일주를 하지 못한 채 동양인이나 서양인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차원 위성지도(내비게이션)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평면 지도책만을 고집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이후, 지구촌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면서, 종교 간의 활발한 교류를 넘어서서 이제는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統攝)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동일한 달을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들이라는 것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차원적 세상에서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되었듯이,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그것을 사용하게 된 자의 자유와 풍요로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닐까.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2019/04/16

알라딘: 일본정신 -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이찬수

알라딘: 일본정신 -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일본정신 -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0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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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00자평(0)리뷰(3)

208쪽

책소개

일본 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문화의 형식과 내용 전반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다. 일본의 종교문화를 현상적으로 일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름대로 ‘일본정신’이라는 보편적인 담론으로 재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종교’를 매개로 해서 일본의 정신문화의 근본 바탕을 찾아나선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기독교, 천주교 등 서구 전통의 종교는 거의 없다시피한 일본 정신문화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보면 오늘의 일본은 물론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향점까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목차


Ⅰ. 일본 종교, 어떻게 볼까
1. 무엇을 어떻게 쓸까

II. 신도와 일본의 근대
2. 일본인의 비종교적 종교성 
3. 일본 문화의 다른 이름, 신도
4. 근대의 신도와 야스쿠니 신사 
5. 근대 천황제와 귀신 담론
6. 그리스도교를 보는 일본인의 시각

III. 일본의 불교와 근대 문화
7. 신불습합을 넘어 일본적 불교로 
8. 일본의 장례문화와 불교
9. 일본 불교를 세운 이들 
10. 법화경의 후원을 받아 온 나라
11. 일본의 그리스도교와 불교

IV. 애국주의와 신종교
12. 일본의 신종교, 그리고 소카가카이 
13. 종교 간 대화를 선도하는 릿쇼코세이카이
14. 기성종교, 신종교, 그 이후

V. 조상숭배와 유교 문화
15. 불교적 형식, 유교적 내용 
16. 일상화한 축제, 마츠리

VI. 종교와 일상성
17. 사무라이와 일본인의 혼 
18.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문물
19. 나가는 말 -- 평범한 개인, 비범한 사회



책속에서



P.20
비록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종교’라는 낱말이 주는 비일상성 때문에 종교문화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하기도 하지만, 유교적 질서와 정서, 또 불교 사상과 사찰 등 문화재를 빼고 한국적인 것을 설명할 수 없듯이, 불교와 신도적(神道的) 종교성을 제외하고서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P.30
일본의 보통 사람에게 종교는 특정 종단 안에 가입해 초월적 존재를 향해 정기적인 의례를 하는 비일상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런 종교 행위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낯설어 한다. 그러면서도 외견상 모순 같지만, 일본인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 속에는 종교적인 행위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일본인은 무의식 중에 종교적 행위를 한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특정 종단 ... 더보기
P.54
한국인이 스스로를 유교인이라고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유교적 질서에 따라 살아가듯이, 한국의 대형 개신교회의 정서 속에 오랜 무교적 전통이 신자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있듯이, 신도도 마찬가지이다. 신도가 하나의 종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오늘날, 자신의 종교를 신도라고 밝히는 일본인은 3~4%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곤란한 일을 만나면 신사를 찾거... 더보기
P.68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큰 나무의 잔가지와 같다. 꺾어지고 말아도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일본인은 그리스도교를 보면서 신도와 같은 자신의 전통적 정체성을 더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일원이 될 사회적 이유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더군다나 특정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어 정기 종교의례에 참여하는 식의 문화는 일본인에게 여전히 낯설다. 그저... 더보기
P.101
일본 불교의 특징이 있다면, 세계종교로서의 보편성보다는 자기 집단을 세운 개조(開祖) 내지 법주(法主)에 대한 신앙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세계에 두루 통하는 불교적 보편성이나 석가모니불보다는 자신에게 신앙의 세계를 알려준 개조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일본인의 현세적, 그리고 자기집단 중심적 경향의 반영이기도 하다. 보편성이나 추상성보다는 특수성이나 구체성에 집착하는 경향은 불교만이 아니라 일본 종교, 아니 일본 문화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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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종교문화를 현상적으로 일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름대로 ‘일본정신’이라는 보편적인 담론으로 재구성해 보여주고 있다.‘종교’를 매개로 해서 일본의 정신문화의 근본 바탕을 찾아나선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기독교, 천주교 등 서구 전통의 종교는 거의 없다시피한 일본 정신문화가 형성되어 온 과정을 보면 오늘의 일본은 물론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와 지향점까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칼 라너(Karl Rahner)와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를 비교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종교철학에 기반한 평화인문학의 심화와 확장을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저서로 『평화와 평화들: 평화다원주의와 평화인문학』,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내통』,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가: 사형폐지론과 회복적 정의』(공역), 『아시아평화공... 더보기


최근작 : <한국인의 평화사상 2>,<한국인의 평화사상 1>,<인간은 신의 암호> … 총 4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민주당 정권 출범, 일본은 과연 변화하는가?
 
일본 민주당 정권이 일본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54년간 일본 정치를 주도해 온 자민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새로운 일본>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민주당을 선택하였다. 일본인 자신은 물론 전 세계인들이 이번 선거 결과에 놀라고 있다. 단순히 자민당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지난 54년간 유지되어 온 자민당 일당 독주 체제의 그림자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변화”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낯설고, 또 불편한 것이기에, “변화”를 선택한 이번 선거 결과는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국민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무라카미 류는 “일본이 마침내 어른이 되고 있다”는 말로 이번 선거의 의미를 극찬하기도 했다. 무라카미는 이번의 선거 결과는 민주당 정권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라, 일본인이 더 이상 국가나 정치권에 자기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 두지 않게 되었다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과연 일본은 변화할 것인가? 그 변화는 일본 자신에게, 혹은 일본을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자민당 정권에 비해 주변국가와의 선린 외교나 불행한 역사의 청산에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끝내 그러한 방향으로 일본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주변에 놓인 국가들이 겪어 온 일본의 정체는 한두 번의 선거 결과로 흔들리거나 변화하리라고 믿기엔 너무도 견고하고 독특하기 때문이다.

변하는 일본, 변화하지 않을 일본정신
동북아시아 제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체화하였던 일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수백 년, 수천 년 이상을 이어 온 어떤 정신적인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짧게는 2, 3백년 전, 길게는 3, 4백년 전부터 바로 그러한 일본의 모습에 서양인들은 열광하였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일본의 실체는 어떻게 들여다 보아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민족성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일본인의 속마음을 진정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떠한 도구가 필요할까?
이 책 일본정신은 바로 그러한 물음에 답하고 있다. <일본정신>은 오늘의 일본이라는 외형을 이룩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종교’라는 관문을 통해 접근하여 해부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의 종교, 문화, 사상을 다룬 책들은 많았으나, 대부분 일서의 번역서이거나, 일본적인 틀과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정신은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와 분량이지만, 일본정신의 이해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비로소 일본인의 속마음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을 기다리는 일본인들이 많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은 어떻게 일본이 되었나
일본정신은 일본인의 정신세계의 특질을 다음 몇 가지 관점으로 해부하여 보여 준다.
첫째, 한국은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교단 종교>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번성하면서도 그 반면에 반종교적인 정서도 강하다. 반면에 일본인은 스스로를 무종교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한국인에 비해 성향이나 행태가 종교 지향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일본인에게 있어 종교란 생활, 삶과 유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측면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경우 특정 종단에 가입해 초월적 존재를 향해 정기적인 의례를 하는 종교 행위는 지극히 낯선 문화이다. 왜 그렇게 되었고, 그것은 일본문화를 어떤 식으로 특징지우고 있을까? 그것이 일본의 기독교 세력이 미미한 이유와 어떻게 연관이 있을까?
둘째, 한국은 전통종교 등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 변질되었으나 일본은 전통종교나 문화를 버리기보다는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그들의 본성에 충실하게 자기의 문화를 온존, 계승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이 <패전>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도 일본을 오늘의 일본으로 만든 힘이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전통 문화의 보존> 성향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있을까?
셋째, 한국인은 대체로 한 가지 종교만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인은 한 집안에서 여러 신을 모시는 이중적인 종교생활을 한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이다. 개인의 취향과 그때의 형편에 따라 고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신만을 숭배하는 일만큼 일본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없다. 이 점은 사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기도 하고 유사점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경우에도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신앙 행태는 “무속적(기복적)”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 “신도”를 훌륭한 정신적 유산, 문화적 자산으로 계승 발전시켜 낸 반면, 한국에서의 “무속”은 적어도 공론의 영역에서는 대체로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러한 한국인의 이중성은, 일본의 경우에 빗대어 보면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그 차이는 일본과 한국의 현재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까?
넷째, 한국은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에 얽매이지만 일본은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다.“일본인은 무의식 중에 종교적 행위를 한다. 특정 종단에 가입해 있지 않아도 종교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누린다.”
이러한 특성은 예컨대, 한국이 세계적으로 열성적인 종교인들이 많은 국가,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기적의 국가(기독교의 입장에서)이면서도, 종교인들에 의한 일상적인 폐해가 역시 세계적인 이유와 어떻게 연관이 될까?

이 책 일본정신은 한국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고 있지만, 한 페이지마다, 한 행마다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러한 비교를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일본의 정체에 대한 내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본은 우리에게 여전히 불친절한 이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에 대한 부러움, 동경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에 대한 극단의 증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나에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요, 일본은 일본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일본을 딛고 세계로 나아가고, 일본을 벗어 던지고 가장 우리다운 우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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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배우자!!

일본드라마를 보고, 일본노래를 들으며, 일본만화와 일본소설을 읽는 것이 일상화된 요즘 가끔씩 드는 의문은.. 일본인은 왜 집안에 불단이 있을까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나 명탐정 코난을 읽을 때엔 살인사건이 있은 뒤 피해자의 집에 방문한 형사들이 먼저 집에 있는 불단을 찾으며 향을 올리고, 식탐정을 보면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매일 불단의 음식을 정성스레 바꿔올리는 모습이 어느새부터인가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일본여행을 하며 느낀, 가정집 옆에 있는 묘지들의 모습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종가집을 보면 위폐를 모셔놓는 사당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 가정의 이야기이고, 집에 불단이 있기보단 납골당이나 묘지를 직접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만약 가정집 주변에 묘로 빽빽히 들어찬 묘지가 있다면, 대번에 집값이 떨어진다며 집을 사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집을 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텐데..

분명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는 똑같이 억압을 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우리나라와 많은 것이 비슷하다고 하는 일본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나라였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엔 그리스도교가 얼마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온갖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어 동네마다 여러개의 교회와 지역마다 여러개의 성당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경우 민족 종교인 불교를 이용하여 철저히 억압 1%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자들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다고 하였다..

두번째 차이점은 무교든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한 가지 종교를 가지며 그 종교에 맞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사람들은 딱히 불교를 믿는 사람도, 유교를 믿는 사람도 없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정월초하루엔 신사에 가서 일년의 복을 빌고, 우리나라와는 달리 휴일이 아닌 크리스마스에 케익의 초에 불을 붙이고, 캐롤을 들으며, 결혼식은 교회의 예배당에서 하며, 죽어서는 사찰을 향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도 딱히 그리스도교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산에 올라서는 사찰을 구경은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아닌 사람이 성당이나 교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종교와 상관없이 사찰에서 장례를 지내는 것이 아닌 종교에 따라 장례방식도 달라지기에 일본인의 모습은 조금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일본인의 종교이면에 신도와 융합된 불교가 있으며,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정신과 "도"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정신이 융합된 독특한 세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문물을 받아들이며 전통을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전통을 중시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일본인의 정신세계.. 이렇게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다 보니 50여년 동안 일본을 종식하고 있던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했던 것이 큰 이슈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한권을 통해 일본인의 정신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도 못하겠고, 일본을 안다는 말도 아직은 못하겠지만 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전통을 중시하고 새로운 것을 융화시키려 했던 그런 정신은 배워야할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이야 전통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은 전통보단 신문물에 열광을 하며 전통을 소홀히하고, 잃어버린 전통을 나중에가서야 후회하니 말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표지는 좀 촌스럽다.. 아무리 일본정신이라곤 해도빨간 표지에 사무라이만 그려놓을 것 까지야.. 촌스럽기도 하고 부담없이 집기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표지였다..
몽자&콩자 2009-10-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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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

일본은 과연 어떠한 나라일까? 우리 한국과는 가까우면서도 굉장히 먼 나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여러모로 차이점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국가적 차원의 사상과 개인적 차원의 사상까지도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만은 않다. 이러한 일본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면밀하게 연구하고 공부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상과 종교적 사상을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과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시는 사람들 출판 이찬수 지음의 일본정신은 그야 말로 간단명료함을 보이는 책이다. 일본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그들이 추구해온 사상 즉 일본정신이 무엇인지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만의 독특한 사상과 종교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소개 한다. 한국과는 아주 상이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온 일본인들. 그들이 가진 정신적 세계의 모습과 그들이 우리 한국에 끼치는 특이한 현상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게 평가 할 만하다.

일본정신은 한마디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제국주의적 사무라이 정신이 돋보이고,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신도사상이 두각을 드러낸다. 무인 정권이라 해도 무색할 에도시대와 메이지유신 시대를 지나면서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자연스레 무사정신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1300년을 지켜온 천황을 위시한 신도사상은 일본만이 가진 특유의 종교관이다.

일본의 종교는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신도사상이라 일컫는다. 일본인의 대부분이 종교가 없는 무교라 말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삶속에 모두 숨겨져 있다. 일본인들은 무언가에 구속 되는 것을 싫어하는데,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생활의 모든 부분들 종교적 성향으로 꾸며져 있는 것이 일본이다. 이러한 것을 비종교적 종교성이라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일본하면 야스쿠니 신사가 떠오른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전범들(세계대전 참전자)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 유교적 분위기의 위패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때때로 이 문제는 국제적 문제로 야기되어진다. 세계대전의 피해를 생각하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범들의 위패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에게 반색을 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여한 일이 아닐까?

일본은 불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도 자세하게 설명되어져 있지만 불교가 대중 속에 깊게 뿌리 내려진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 생각 된다. 일본의 불교 계파중 묘법연화경을 위시한 일련교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남묘호렌계교 즉 SGI로 들어 와 있다. 이것은 낯설지 않은 일본종교로 일본을 대표하는 불교종파라 이야기 한다.

얼마 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와 맞물려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이 얇은 책으로 일본을 다 이해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참담해 던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잘 준비하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한번쯤 읽어 보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즘 잘 알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여 민족주의자라 말할지 몰라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예르미아빠 2009-10-2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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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본질적 정신 세계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특히 조선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살육 당하고 핍박받았던 역사적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어서 일본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창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사고가 일본을 더 자세히 바라보고 경계할 수 있는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근대화는 단적으로 ‘서양화(西洋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서양화는 우리가 곧바로 서양을 본받아 온 것이 아니라,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서양을 접하고 서양을 본받아 온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들 즉,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등 이런 말이 일본이 서양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고, 우리는 지금 이 말들을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우리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으로 선진문물을 전수했으며, 그들은 ‘왜놈’이라는 야만인들로 우리보다 하위의 종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그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현재 세계 경제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북아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역량을 볼 때 우리나라와 더 긴밀히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정확한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일정한 날에 특정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종교 행위가 매우 낯설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대체고 거의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매우 종교적인데, 이것을 ‘비종교적 종교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축원하고, 결혼식은 교회식으로 치루며, 죽으면 화장하여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절의 공동묘지에 묻힌다는 것이다. 또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조상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면 유교적 전통이 우리나라보다도 오히려 더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종교성의 특징이라면 ‘현세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이나 ‘사후세계’와 같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제일의 종교는 바로 ‘신도’라고 할 수 있는데, 신사를 찾아가 기도하는 것도 거의가 현실 세계에서의 건강 기원과 소원 성취라고 한다.

‘신불습합’이라고 할 만큼 불교와 신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일본의 불교는 주로 ‘법화경’을 신봉하고 추구하는데, 일본식 불교하고 할 수 있는 ‘일련교(日蓮敎)’에서는 ‘나무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花經)’만을 외우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종교 운동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거의 일련교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현실 지향적인 결과 거의 기독교가 없다고 한다. 1% 미만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화, 근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전통을 중요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오히려 서구 문화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다. 즉, 전통적인 ‘전근대’는 익숙하고 질서적인 것이며, 서구에서 온 ‘근대’는 낯설고 무질서한 것으로 파악하여, 비록 서구와 근대가 갖고 있는 물질적 우수함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더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를 단순히 근대 이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운동과 같은 구호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근대화를 가장 선도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사고는 오로지 서구화와 근대화가 절대선인 양 추구하였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본인의 정신적 특징으로 또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범성’이다. 일본인은 사회 전체적인 조화를 매우 중시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인데, 이러한 정신적 특징 때문에 어떤 사회적 과업을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정신적 특징은 과거에 그랬다시피 지도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더라도 일본국민은 그것을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서로 교류와 협력을 그만 둘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들을 더 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 협력이 가능하고, 만일에 있을 그들의 야욕을 먼저 파악해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은 비록 많지 않지만 일본의 종교성과 정신세계를 군더더기 없이 충분히 잘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가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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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저자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감신대, 서강대, 성공회대, 원광대, 이화여대, 한신대, 일본 코세이가쿠린 등에서 불교학.종교철학.비교종교학.종교신학.한국문화 등을 강의했으며, 현재 강남대 교수 및 종교문화연구원장,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생각나야 생각하지』, 『인간은 신의 암호』, 『종교신학의 이해』, 『종교로 세계 읽기』,『일본정신』 등이 있고, 역서로 『절대, 그 이후』, 『지옥의 역사』,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토라의 길』,『화엄철학』 등이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는 똑같이 억압을 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우리나라와 많은 것이 비슷하다고 하는 일본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나라였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엔 그리스도교가 얼마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온갖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어 동네마다 여러개의 교회와 지역마다 여러개의 성당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경우 민족 종교인 불교를 이용하여 철저히 억압 1%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자들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다고 하였다.. 두번째 차이점은 무교든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한 가지 종교를 가지며 그 종교에 맞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사람들은 딱히 불교를 믿는 사람도, 유교를 믿는 사람도 없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정월초하루엔 신사에 가서 일년의 복을 빌고, 우리나라와는 달리 휴일이 아닌 크리스마스에 케익의 초에 불을 붙이고, 캐롤을 들으며, 결혼식은 교회의 예배당에서 하며, 죽어서는 사찰을 향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도 딱히 그리스도교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산에 올라서는 사찰을 구경은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아닌 사람이 성당이나 교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종교와 상관없이 사찰에서 장례를 지내는 것이 아닌 종교에 따라 장례방식도 달라지기에 일본인의 모습은 조금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일본인의 종교이면에 신도와 융합된 불교가 있으며,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정신과 "도"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정신이 융합된 독특한 세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문물을 받아들이며 전통을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전통을 중시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일본인의 정신세계.. 이렇게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다 보니 50여년 동안 일본을 종식하고 있던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했던 것이 큰 이슈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의 정신적 특징으로 또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범성’이다. 일본인은 사회 전체적인 조화를 매우 중시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인데, 이러한 정신적 특징 때문에 어떤 사회적 과업을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정신적 특징은 과거에 그랬다시피 지도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더라도 일본국민은 그것을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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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go******|2009.10.29|신고/차단
7.5
일본정신

일본은 과연 어떠한 나라일까? 우리 한국과는 가까우면서도 굉장히 먼 나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여러모로 차이점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국가적 차원의 사상과 개인적 차원의 사상까지도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만은 않다. 이러한 일본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면밀하게 연구하고 공부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사상과 종교적 사상을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과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시는 사람들 출판 이찬수 지음의 일본정신은 그야 말로 간단명료함을 보이는 책이다. 일본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그들이 추구해온 사상 즉 일본정신이 무엇인지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만의 독특한 사상과 종교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소개 한다. 한국과는 아주 상이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온 일본인들. 그들이 가진 정신적 세계의 모습과 그들이 우리 한국에 끼치는 특이한 현상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게 평가 할 만하다.

일본정신은 한마디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제국주의적 사무라이 정신이 돋보이고,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신도사상이 두각을 드러낸다. 무인 정권이라 해도 무색할 에도시대와 메이지유신 시대를 지나면서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자연스레 무사정신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1300년을 지켜온 천황을 위시한 신도사상은 일본만이 가진 특유의 종교관이다.

일본의 종교는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신도사상이라 일컫는다. 일본인의 대부분이 종교가 없는 무교라 말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삶속에 모두 숨겨져 있다. 일본인들은 무언가에 구속 되는 것을 싫어하는데,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생활의 모든 부분들 종교적 성향으로 꾸며져 있는 것이 일본이다. 이러한 것을 비종교적 종교성이라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일본하면 야스쿠니 신사가 떠오른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전범들(세계대전 참전자)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 유교적 분위기의 위패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때때로 이 문제는 국제적 문제로 야기되어진다. 세계대전의 피해를 생각하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전범들의 위패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에게 반색을 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여한 일이 아닐까?

일본은 불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도 자세하게 설명되어져 있지만 불교가 대중 속에 깊게 뿌리 내려진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 생각 된다. 일본의 불교 계파중 묘법연화경을 위시한 일련교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남묘호렌계교 즉 SGI로 들어 와 있다. 이것은 낯설지 않은 일본종교로 일본을 대표하는 불교종파라 이야기 한다.

얼마 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와 맞물려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이 얇은 책으로 일본을 다 이해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참담해 던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잘 준비하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한번쯤 읽어 보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즘 잘 알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여 민족주의자라 말할지 몰라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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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ja******|2009.10.29|신고/차단
5
디자인은 상당히 깔끔했다. 한 손에 들고 다니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스타일이랄까.
그러나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뭐랄까... 책의 출판이 다소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점이라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작가가 직접 경험한 여러 일들이 이 책에 녹아있다다.
'아 이건 이렇더라' 하는 식의 추측성 글이 아닌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점이 고스란히 녹아있달까
직접 찍은 사진 자료들도 독자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또한 일본의 일반 대중들의 생활방식도 알 수 있었다. 종교에 대한 그들의 시각, 그리고 종교가 환영받지 못하는 세속적인 풍토들을. 그러면서도 삶의 구석구석에서 종교에 의지하는 그들의 모습들을.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아 이거 아까 했던말이잖아' 하고 생각했다. 물론 큰 틀에서 여러 사항을 설명하고 그것을 다시 작은 틀에서 세부적으로 얘기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얘기들이 계속 반복된달까.
 
 많은 지식을 쌓고 싶은 분에게는 그닥 좋지 않겠지만 반면 이런 반복은 핵심적인 단어가 머리에 남도록 해주는 효과는 있었다. 과연 이것이 작가의 의도일지 아니면 우연일는지는 직접 읽으면서 판단하시길.
 
 그리고 역사적인 설명이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과거에 종교에 대한 진행이 확실히 설명된 다음에 현실에 대한 설명이 되었으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
 
 
일본의 정신, 타인의 것을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배제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화혼양재
종교의 삶적 체득.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일본의 정신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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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ky****|2009.10.29|신고/차단
7.5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특히 조선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살육 당하고 핍박받았던 역사적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어서 일본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창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사고가 일본을 더 자세히 바라보고 경계할 수 있는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근대화는 단적으로 ‘서양화(西洋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서양화는 우리가 곧바로 서양을 본받아 온 것이 아니라,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서양을 접하고 서양을 본받아 온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들 즉,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등 이런 말이 일본이 서양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고, 우리는 지금 이 말들을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우리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으로 선진문물을 전수했으며, 그들은 ‘왜놈’이라는 야만인들로 우리보다 하위의 종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그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현재 세계 경제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북아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역량을 볼 때 우리나라와 더 긴밀히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정확한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일정한 날에 특정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종교 행위가 매우 낯설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대체고 거의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매우 종교적인데, 이것을 ‘비종교적 종교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축원하고, 결혼식은 교회식으로 치루며, 죽으면 화장하여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절의 공동묘지에 묻힌다는 것이다. 또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조상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면 유교적 전통이 우리나라보다도 오히려 더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종교성의 특징이라면 ‘현세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이나 ‘사후세계’와 같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제일의 종교는 바로 ‘신도’라고 할 수 있는데, 신사를 찾아가 기도하는 것도 거의가 현실 세계에서의 건강 기원과 소원 성취라고 한다.
‘신불습합’이라고 할 만큼 불교와 신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일본의 불교는 주로 ‘법화경’을 신봉하고 추구하는데, 일본식 불교하고 할 수 있는 ‘일련교(日蓮敎)’에서는 ‘나무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花經)’만을 외우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종교 운동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거의 일련교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현실 지향적인 결과 거의 기독교가 없다고 한다. 1% 미만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화, 근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전통을 중요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오히려 서구 문화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다. 즉, 전통적인 ‘전근대’는 익숙하고 질서적인 것이며, 서구에서 온 ‘근대’는 낯설고 무질서한 것으로 파악하여, 비록 서구와 근대가 갖고 있는 물질적 우수함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더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를 단순히 근대 이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운동과 같은 구호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근대화를 가장 선도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사고는 오로지 서구화와 근대화가 절대선인 양 추구하였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본인의 정신적 특징으로 또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범성’이다. 일본인은 사회 전체적인 조화를 매우 중시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인데, 이러한 정신적 특징 때문에 어떤 사회적 과업을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정신적 특징은 과거에 그랬다시피 지도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더라도 일본국민은 그것을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서로 교류와 협력을 그만 둘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들을 더 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 협력이 가능하고, 만일에 있을 그들의 야욕을 먼저 파악해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은 비록 많지 않지만 일본의 종교성과 정신세계를 군더더기 없이 충분히 잘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가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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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tu*****|2009.10.27|신고/차단
7.5
일본인에 대해서 어설프게 알고 있던, 흔히 말하는 고정관념과 주변에서 하는 얘기들에 의한 근거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생각들을 가지고 이 책 일본 정신을 읽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종교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알게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그 단체들에 대한 뿌리를 알게되었다.
 
또 한가지 일본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교가 거의 없다는 사실, 전체인구의 약 1%정도도 안된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특이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에는 불교, 그리스도교가 가장 큰 종교을 이루고 있기에 더더욱 그 의미가 참 궁금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또 정치적으로 박해를 당하면서 세력을 넓히기도 줄기고 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점을 볼 때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박해가 있어왔지만,  정치세력에 의해 박해를 당했왔어도 일본처럼 그 세력이 미미하지만 않다.
 
어쩌면 저자의 말처럼,  에도시대에 사찰을 통해 개인의 종교 여부를 확인하고 개인의 신상을 사찰에 등록하게 하는 제도(宗門改製度-종문개제도)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유도한 정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인들이 그의 신상을 공개하기를 꺼렸던 점에서 점점 신도의 숫자가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컸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점점 늘어나는 지역축제들을 일본에서는 '마츠리'라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 종교의례를 점점 신사나 사원 내지 지역상점회등에서 주체하는 일종의 축제가 되어서 모든 참가자들이 즐길 수 있게 행사를 접하고 있다...사찰이나 교회안에 갇혀있는 종교의식이 아닌 지역축제와 같은 행사로 즐기는 것이다.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사고는 이런 종교의식 속에 내재되어 유지되고 있다.
 
극히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은 실상은 지극히 종교적이며, 이런 종교적 사고들은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 녹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들과 구별되려고 하지 않고, 굳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기존 내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오랜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일본의 '화혼(和魂)'정신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된다...그들의 그 친절함, 결코 튀지 않는 행동들...
 
이 책을 통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인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일본종교들에 대한 지식들도, 어설프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들을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와 우리의 생각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이해하지만, 앞으로도 이웃해 있는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적절히 대처할 수 없음을 느낀다...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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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 이찬수, 도서출판 섬기는 사람들, 2009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책이었다. 일본의 종교에 대해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용은 알찼고, 두꺼운 책에 빼곡한 글씨가 가득했다면 읽기가 많이 버거웠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종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의 종교를 이해하리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러나 굵지만 핵심만 간추린 이 책으로 인해 일본의 종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책의 마지막에 일본의 연표와 더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한 정보는 독자를 위한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얇은 책 한 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듯이 다른 책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본의 종교는 ‘신도’라고 불린다. 신도의 세계관은, 본래 인간은 깨끗한 존재인데 거기에 무언가 더러운 것이 덧붙여져 깨끗한 상태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깨끗함이 선이라면 더러움은 악이다.
특히 관심이 갔던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이야기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의 위패가 모셔져있는 신사를 참배하는 문제 때문에 늘 시끄러웠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조차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논란의 대상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신도 좋아한다” 는 말이었다. 일본인에게 종교는 삶 ‘밖’에 있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복잡한 종교의례를 치르지 않고, 전통과 새로운 문물을 합하여 받아들인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의 ‘온고지신’ 정신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지금도 몇 십 년 된 음식가게나 장인들이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것은 지키고, 도움이 될 만한 남의 것들은 받아들인다.
제사로서의 마츠리가 일상적인 축제문화로 자리 잡혀 있는 것은 우리 종교문화에도 받아들이면 좋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종교라고 해서 딱딱하게 예를 갖추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루는 것이 아니다. 함께 어울리는 축제 같은 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나왔듯이 우리의 연등축제도 좋은 예이다.
일본인들은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을 종교에 의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다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단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책을 통해 비추어진 그들의 종교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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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ls****|2009.10.24|신고/차단
10

   몇 해 전 배낭형식으로 일본열도를 누빈 경험이 있었는데 그 당시 느낀 점은 1200만 명이 사는 수도 도쿄 중심지임에도 도시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차량은 강물이 흐르듯이 경적 소리 한번 없이 정해진 신호에 따라 정해진 간격대로 움직였고 인파들 역시 도도한 물결을 이루었으나 그 역시 정해진 흐름을 역행하는 법이 없었다.  한 때에는 방송에서도 일본의 정지선 지키기를 배우자는 열풍이 불기도 했었기에 나도 단순히 ‘일본인들은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질서의식이 뛰어나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 찬수박사님의 “일본정신”을 읽고 나서는 단순한 교통규칙 준수나 질서의식 차원을 뛰어 넘는 일본인 특유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내면의 흐름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일본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것이 있다.  기술은 서양에서 빌리지만 정신은 일본의 것을 지킨다는 메이지시대의 모토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고유의 미풍양속을 점차 잊어 가면서 서구의 문물과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풍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잘 사는 나라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말을 자주 들어 왔었는데 일본은 잘 사는 나라인데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전 국민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보다 더 오래전에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미미해진 이유를 이 책에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어느 화재보험회사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만일 집에 불이 나면 무엇부터 꺼내 오겠느냐?”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가장 많은 답변은 예상할 수 있듯이 귀중품이었지만 두 번째로 많았던 답변은 뜻밖에 조상의 이름을 담아 놓은 위패(位牌)였다고 한다.  많은 일본인 가정에는 조상의 위패나 각종 종교와 관련된 상징물 등을 모시는 일종의 사당 역할을 하는 가미다나(神棚)가 설치되어 있다. 불자 집안에서는 부쓰단(佛壇)을 둔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매년 정월, 신사에 참여해 복을 비는 행사를 하고, 건물을 신축하면 신주(神主)를 불러 지진제(地震祭)를 지내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딱히 어떤 특정한 종교를 믿는 것과는 별개이다.  일본인들은 특정한 공동체에 속해 정기적인 종교의례에 참여 하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느낀다.   이렇게 위패 내지 신주를 모시는 것은 조상숭배 전통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문화나 사고방식이 일본인의 보이지 않는 종교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생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사람도 사후에는 사찰의 납골묘원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인의 사생관 내지 장례문화와 관련해서 불교를 빠뜨리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인은 살았을 때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지만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는 결국 불교에 맡기고 산다는 점에서 일본에서 불교는 가장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마츠리(祭り)이다.  마츠리(祭り)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며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가무 등의 의식을 행하면서 신의 음덕(陰德)을 나누어 받고, 그 힘으로 개인의 평안과 공동체적 결속을 도모하는 행위인데 요즈음 들어서는 엄숙함 보다는 세속적 흥겨움이 더 많아져서 이벤트로서의 마츠리(祭り)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문화가 사라져 가는 우리로서는 전통문화가 계승, 발전되고 있는 일본의 마츠리(祭り)를 보면서 타산지석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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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ta******|2009.10.20|신고/차단
7.5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일본을 싫어한다?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것이라 생각한다.가까운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있듯이, 거란족 여진족 몽고 혹은 중국제국들의 침략보다일제강점기가 최근의 일이고 그 자세한 기록들이 알려져 있기때문에 타 동북아 국가에 비해일본은 미운나라가 되어있다.반면에 일본에서 생산한 양질의 제품들, 그들의 문화는 이미 한국에 만연되어있고 추종자들도거느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을 얼마나 알고있는가.일본제국주의, 라면, 만화, 망언, 야구 등...전쟁하면 전투기의 출격장면이나 폭탄투하장면이 떠오르듯, 일본이 주는 이미지 또한 이런 단편적인 것들의 집합이 아닐까?우리나라조차 확실히 모르는데 굳이 일본을 알아야하나...라고 말한다면 제대로된 대답을 할 수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침략자였으며 현재의 경쟁자 미래의 동반자가 될 수있는 일본이라면좀 더 자세히 알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인 '종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의미일까?국사나 세계사를 통해 본 종교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졌고 '현대사회에 종교는 의미가 없다'라는말이 나오는 지금도 종교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지만..종교는 '사회를 보여주는 창' 즉 문화라고 생각한다.
'
일본정신'은 이때까의 기업을 통한 일본알기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본에 접근한 책들과는달랐다.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던 '종교'를 통해 좀 더 깊은 곳에서 그들을 관찰했다.(덕분에 뉴스에서 접하면서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던 '야스쿠니 신사'나 그저 지역축제로만 알고있었던 '마츠리'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되었다.)물론 두번째 읽었지만 아직도 책의 내용을, 일본의 종교를 통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내가 일본인이 아닌이상 완전한 이해는 열번을 읽더라도 힘들것이다.또한 작가가 일본인(일본학자)가 아닌이상, 아니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접근자체가 어려울것이라 생각한다.그렇지만 한국인이면서 일본종교나 세계의 다른종교를 연구한 작가이기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을소개하였고, 그것을 통해 한국의 종교와 문화까지 돌아보게 만들었기때문에 이 책은 '일본알기 그리고 한국 돌아보기'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한다.(작가자신은 어설픈실력이라 했지만 중간중간의 흑백사진들과 주석들도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간략하지만 종교를 통한 일본사연표 또한 한눈에 보여서 쉬운 접근을 허락해주는듯 하다.
과거를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한국과 일본은 어떠한 식이든 밀접한 관계를 맺을것이고, 그들을 아는것은 또다른 역사적 과오를예방하는 방법이면서 더 밀접한 관계를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일본정신'이 소개하는 일본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를 통해 내가 몰랐던일본을 알게되었고 별 생각없이 마주한 '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북로그에서 글을쓰다보니 로그인이 풀리는군요....1시간넘게 쓴글이 날아가서 패닉상태에서 간단하게
서평을 올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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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ku****|2009.10.19|신고/차단
7.5
일본의 정신, 일본인들의 성향, 기질, 습속 등에 관한 저작들은 그네들의 경제력만큼이나 수도 없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중적 저술로서 일본의 종교에 관해 말한 책은 거의 없지 않을까싶다. 이 저술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다양한 문화의 총체”로서, 그리고 “문화 전반을 내다보게 해주는 가장 큰 창문”으로서의 종교를 통해 오늘의 일본, 일본인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려면 그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종교적 관습만큼 유용한 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일본의 거리를 거닐다보면 도처에서 신사(神社)와 사찰을 발견케 되는데, 일상적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는 이러한 모습은 더욱이나 그네들의 정신적 근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종교적이라는 이러한 외부의 시각에 동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단다. 현대 일본인은‘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전반적으로 종교 현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신사와 사찰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집집마다 예외 없이 설치되어있는 불단(佛壇:부츠단)이나 신붕(神棚;가미다나)위의 위패는 무엇일까? 소위 이러한 일본인들의 행위는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오랜 전통적 문화로서 이해되는 것이지,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종교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인은 종교가 없다기보다는“구체적 현실을 향유”하려는 것이 일본식 종교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함을 지적한다. 즉 현세 중심적인 일본인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굳이 초월적인 존재와 현실 밖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로서의 의식화 된 종교에는 거북해하지만 일상의 풍요를 긍정하고 정당화 해주는 근거로서 현세주의적인 일종의 구원문화로서 수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라는 의식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문화화한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수용하는 모습에서 일본의 속마음은 상당히 종교적이다.”라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을 종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인지 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한편 일본인의 무의식적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신의 뿌리인 신도(神道)의 정수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령숭배에 기원을 둔 신도의 배경과 인간의 욕망이 구체화 된 것으로서의 신(神;가미)의 의미, 메이지(明治)시대 국민결속과 부국강병의 국가공식 통치이념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일종의 주술적 정토신앙에 불과하여 자체적인 완결성을 지니지 못하는 까닭에 늘 다른 것의 도움을 받고서야 자기 정체성을 의식하게 되는 불완전한 세계로서의 신도와 불교의 영향을 통해 비로소 형식을 갖추게 되는 경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주술적이고 종교 혼합적인 양상은 조상신과 윤리를 결합하여 표현되고 있는 유교적 제례의식과 불교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불단 안에 위패를 모시는 행위가 이러한 예인데, 이처럼 생활방식은 전형적으로 유교적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불교라는 조직을 통해서 계승시키는 현상은 그네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희망 내지는 욕망을 투사하여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것 이상이 아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결국 그네들의 신도라는 것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주술적 정령신앙이 혼합된 구복(求福)적 문화의 형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그네들의 의식으로부터 일본에서 외래 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외래적인 것은 새롭지만 무질서하며, 자신들의 오래된 전근대가 오히려‘질서적’것이라는 자긍심과 전통에 얹어진 가지에 불과하다는 잡거(雜居)적 사상에서 연원한다. 즉 서양종교도 하나의 문화형상이라는 차원에서 누리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일본인에 비해 마치 자신의 전통은 극복되어야 하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말살해버리고 국적도 없는 표피적 문화에 허우적대는 한국인의 양태는 크게 대비되어 비친다.

물론 사상적 뿌리가 취약하고 물질적이고 극히 속세적인 종교관이라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그네들의 근대화시기인 메이지 시대의 “정신은 일본 전통을 지키면서 물질문명은 서양에서 배운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나, 대화혼(大和魂)이라는 그네들의 조화의 미덕이라는 정신에서 개성보다는 집단의 조화를 중시하는 시스템 사회의 긍정을 발견 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전체를 구성하는 나사나 톱니바퀴가 빠져 삐걱거리고, 저마다 제소리에 열중하는 한국사회, 세계가 주목하는 기이한 현상인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폐기하고 정신은 오간데 없이 물신주의에 허덕이는 양태는 어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기까지도 하다.

“갓난아이가 저도 모른 채 부모의 품에 안겨 신사의 신들에게 신고 되고, 성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교 교회나 교회식으로 꾸민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죽어서는 불교 사찰에 묻히는” 일본인들의 일상과 종교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토속신앙을 정체성으로 하여 외래문화와 조화를 도모하며, 독특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네들만의 사상적 토대는 우리에게 일본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데 유익한 기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삽화와 그네들의 역사, 종교사, 오늘의 신종교와 신신종교까지 다양한 현상이 수록되어 오늘의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향도 예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 정신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유용한 해석이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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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vi********|2009.10.15|신고/차단
5
일본정신이란 제목이 주는 터프한 이미지때문에
기존의 일본 비판서적일거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말그대로 일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종교와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쓰여져있는 책이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권이면서도 조금은 낮선 나라인 일본에 대해
불교, 유교, 신종교, 그밖에 사무라이정신 같은  낮익은 개념들을 통해
이것들이 어떻게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한 지배하여 왔는지
왜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지를 알려주고 있다.
 
만화, 연예인 이야기가 전혀없는 일본에 관한 책이라
좀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깊이 있는 책이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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