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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2

류영모의 삶과 그가 남긴 『다석강의』 - 에큐메니안

다석 류영모는 왜 한국의 철학자인가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1)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2 18:59
“경전에 이르기를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적의 도(道)로 돌아가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 했다.”(한용운)(1)
지난 호까지 나는 독일의 가톨릭 종교철학자 베른하르트 벨터의 사상 전모를 특히 그의 ‘없음’(무) 사상과 관련해 다루어 보았다. 또한 동양의 ‘없음’(무) 사상과 비교하며 글을 마무리 하였다.
이번 글부터는 한국으로 눈을 돌려 한국의 사상가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석 류영모에 대한 연구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주제가 분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제가 함축하고 있는 방향과 내용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
다석 류영모는 왜 철학자가 아니었나
우선 주제에서 ‘철학적 의미’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한국 철학계의 연구 풍토를 감안할 때 부정적인 배경을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 철학계에서는 아무도 류영모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 드러나면서 몇몇 학자들이 류영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대부분 신학자들이었다.
▲ 다석 류영모 선생님(사진 오른쪽)과 부인 김효정 선생님(가운데), 그리고 제자 박영호 선생님(왼쪽) ⓒGetty Image
그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도 선뜩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그의 일지나 강의 가운데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생각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류영모가 어디에서도 철학적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사상가’로 분류할 수는 있어도 ‘철학자’로 지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듯싶다.
따라서 ‘다석 류영모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 점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류영모가 남긴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잡지에 실린 글은 몇 편 되지도 않고 그나마 그것도 학술지가 아닌 일반 교양지 수준의 잡지에 실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있는 그의 어록이나 명상록 등은 그가 종로 YMCA 연경반에서 행한 강의들과 그가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들을 기록하고 해설한 것들이다.
그의 일기인 『다석일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 형식으로 쓰여 있다. 대충 한시(漢詩)가 1300편, 우리말 시가 1700편정도 실려 있다. 이 시들은 대부분 짧고 함축적이어서 해설이 없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든 형편이다.
류영모의 생각의 큰 얼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은 그의 강의록이다. 여기서의 강의도 대학이나 학술단체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성경연구모임에서 몇몇 사람들을 앞에 놓고 행한 강의일 뿐이다. 이 강의록마저도 그가 준비한 강의원고가 아니고 제자들이 속기사를 시켜 기록하게 한 강의 기록본이다.
이 강의록이 ‘다석어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지만 학술적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2)
류영모는 왜 한국 철학자인가
이와 같은 배경이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의 사상가는 될지 몰라도 철학자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일기와 강의록에 심오한 사상의 단편은 있을지 몰라도 철학적인 주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류영모 철학’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동안 『다석일지』와 그의 강의록들을 공부하고, 다석의 제자들이 해설해서 펴낸 명상록들과 일지 공부들을 연구하면서 다석의 생각들이 단순히 사상의 편린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의 큰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류영모 자신은 신, 우주[세계],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그 함축한 의미를 따라가며 이해하여 해석할 때 다석의 독특한 신론, 우주[세계]론, 인간론을 구축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동안 나는 이런 작업을 하여 몇 편의 글과 책으로 출간하였다.(3)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이 없기 때문에 류영모를 철학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 근거가 없는 셈이다.(4)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하나도 없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철학자로 연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류영모를 철학자로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류영모는 우리말로 사유하고 철학한 주체적인 한국 철학자다.
2) 그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해결하려고 시도한 현대 철학자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서 시대정신의 반영을 읽어낼 수 있다.
3) 그는 동서 통합의 지구촌 시대에 통합적인 사유로 새로운 신론, 인간론, 생명론을 전개한 세계 철학자이다.
4) 그는 무엇보다도 존재이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 철학자이다. 있음의 관점이 아닌 없음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것을 제안한 ‘없음[무]의 형이상학자’이다.
5) 그는 이성중심의 인간관에서 탈피하여 영성중심의 인간관을 제시한 인간학자이다.
6) 그는 생명에서 하늘의 뜻을 볼 것을 제안한 영성가이다.
다음 글부터 나는 좀더 자세하게 위의 주장들을 검토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이원섭 옮김, 운주사, 1992, 119.
(미주 2) 다석학회는 이 강의 속기록들을 검토하여 믿고 인용할 수 있는 강의록으로 출간하였다.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미주 3) 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존재에서 성스러움에로!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모색 ― 하이데거의 철학과 류영모 사상에 대한 비교연구”, 『인문학과 해석학』(해석학 연구 제8집) (한국해석학회 편) (2001. 10월), 247〜300;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 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씨알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살림, 2003;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미주 4) 물론 나는 류영모의 인간론, 신론, 생명론 등을 전개하면서 류영모 자신의 말이나 글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말이나 글이 함축하고 있는 차원과 그 지시하고 있는 방향을 고려에 넣어 이론적인 얼개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많은 철학이론들이 그런 생산적인 대결에서 생겨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류영모의 삶과 그가 남긴 『다석강의』동서통합의 영성적 철학자 유영모 (2)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05.19 19:00
40년을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걸어다닌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칠성판이라고 하는 죽음의 널판자에서 자고 하루의 시작과 더불어 그 위에서 사색하고 공부하면서 하루를 살다가 밤이 되면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다시 죽음의 널 위에서 눈을 감는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루[할우]를 사는 ‘하루살이’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류영모의 삶과 연경반(硏經班) 강의
바로 그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고 설파하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식(食)과 색(色)에 달려 있다고 외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1890〜1981)이다. 그처럼, 그의 주장대로 산다면 21세기 인류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고 걸어다니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암울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갈 삶의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석 류영모, 그는 누구인가?(1) 류영모는 어려서는 서당과 소학교에 다녔다. 17세에는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간 수학하였다. 이렇게 그는 서당교육과 신식교육을 아울러 배운 신지식인이었다.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교사로 2년 간 봉직한다. 그 후 일본에 유학 가서 동경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수학하고 귀국한다. 1921년 31세에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년 간 재직한다.
이때 함석헌과 운명적으로 만나 평생 그의 스승이 된다. 1928년부터 약 35년 간 YMCA에서 성서를 포함한 동서양의 경전을 연구하는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한다. 1939년 51세의 나이에 깨달음을 얻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금욕생활을 실천한다.
1955년에 일년 뒤인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한다. 일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한다. 1959년 노자 도덕경을 우리말로 완역하고 그밖에도 다른 경전의 중요부분들을 우리말로 옮긴다. 1981년 2월 3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하루살이의 삶이 3만 3천 2백일을 채운 날이다.
2006년에 출간된 책 『다석강의』(2)는 다석이 1956년 10월 17일부터 1957년 9월 13일까지 약 일년 간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에서 한 강의를 속기록에 바탕해서 복원한 강의록이다. 다석 강의의 속기록 전문이 출간되기는 처음이다. 이 강의록을 보고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먼저 일 년이 채 안 되는 강의의 기록이 천 쪽 가량의 방대한 분량이라는 사실이다. 서양의 저명한 사상가의 두 학기 강의록에서도 이만한 분량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한국의 무명 양봉가(養蜂家)가 해낸 것이다.
그 다음 그 내용이 그야말로 깊은 사색과 명상, 그리고 엄격한 자기수련에서 갈고 닦아낸 삶의 지혜라는 것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대화록, 공자의 가르침, 간디의 어록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주옥같은 말씀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이 타오른다. 35년의 연경반 강의에서 일 년 치 강의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동서양 종교에 대한 통합적 사유의 길
“이 사람이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의 경전도 먹고 불교의 경(經)들도 먹습니다. 살림이 구차하니 정식으로 먹지 못하고, 구걸하다시피 여기서도 얻어먹고 저기서도 빌어먹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이 사람의 깜냥[消化力]으로 소화시켜 왔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하여 내 건강이 별로 상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나 유교 경전을 보나 불교의 경을 보나 그리스의 지(智)를 보나 종국은 이 ‘몸성히’, ‘맘뇌어’, ‘뜻태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3)
이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류영모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아우르는 ‘무엇’인가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그의 독특한 언어관에 바탕해서 펼쳐나갔다. 그에 의하면, 언어[말]는 하느님의 마루[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류영모는 우리말에 담긴 존재의 소리 또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간관, 생명관, 신관을 펼쳐보이려 시도하였다.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말로 철학하려 시도한 최초의 한국 사상가인 셈이다.
다석 사상의 뛰어남 가운데 하나는 그 동안 언문, 암글이라고 무시되고 천시받아 온 ‘한글’로서 학문할 수 있고 철학할 수 있음을, 아니 철학해야 함을 보여준 데 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 오고 있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고 믿었다. 바로 우리말 속에 우리의 독특한 삶의 방식, 사유방식, 철학이 들어있음을 강조하였다.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이 글이요, 글이 말이다. 하느님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이다.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나타내자는 말이요, 하느님을 그리는 뜻[思慕]을 나타내자는 글이다.
“이렇게 몇 자가 분열식을 하면 이 속에 갖출 것 다 갖춘 것 같아요,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말도 정말 이렇게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같이 남에게(외국어)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돼요. 글자 한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 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어요.”(4)
다석은 우주의 영원한 생명줄이 이어 이어 내려와서 지금 여기의 나의 몸에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이제긋’이라고 이름한다. 무한한 생명이 이어져 내려와 그 끄트머리가 나에게까지 닿은 것이 ‘이긋’이고, 이제 그것을 지금 여기의 내가 이어받아 이어나가야 할 끄트머리로 삼을 때 ‘제긋’이다. 이렇게 ‘하나’인 우주생명은 ‘이제긋’으로서 나의 몸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웋일름[하늘의 뜻]을 따라 하늘로부터 받은 속알[바탈]을 태워 다시 ‘하나’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입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다니는 것밖에 없습니다.”(5) “‘우’를 쳐다보면서 올라가는 것만이 거룩하게 되는 길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항상 하는 소리입니다.”(6) “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늘 하나입니다. ‘하나’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가 신입니다. 하늘을 왜 믿습니까? 간단히 ‘하나’를 믿는 것이 옳지 않나요?”(7) “이 사람이 드릴 말씀은 사는 날까지 하느님을 더 알고 더 연구하고 싶고, 덕(德)이라는 것을 더 붙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덕’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8)
우리말로 철학한 최초의 사상가
배움과 말의 관계에 대한 다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배운다는 것은 말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 사귀게 합니다. 물건과 물건 사이를 설명해주고 밝혀주는 것도 또한 말입니다. 말은 ‘너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 할 때에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이치상관(理致相關)이라 물건과 물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치를 밝혀주는 것입니다.”(9)
다석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실존을 찾아갈 수 있고 하느님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사람 노릇을 못한다.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또 말을 알지 못하면 무엇을 갖고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도(道)라는 것도 말의 길을 안다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이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과 연락하는 것, 곧 신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한다면 신과 연락이 되어야 한다.(10)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을 보고 나온다. 거의 들리지 않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씀이 나온다. 정말 믿으면 그 사람에게서 말씀이 나온다. 말씀이 나오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언젠가는 우리가 말씀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결단이 난다. 하느님의 얼이 끊어지면 그렇게 된다. 생각하는 데 하느님이 계시고,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은 짐승이다.(11)
다석은 우리말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계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한자말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별(別) · 의(義) · 친(親) · 정(正)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닳(별) · 옳(의) · 핞(친) · 밣(정)’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야 우리말로 문화예술의 사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려워도 안 되고 간단히 뜻을 나타내야겠는데, 그러한 표식이 없고서는 큰 사상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문으로 적어 놓으면 설명하여야 하고, 자꾸 설명하다 그만두게 됩니다.”(12)
“진 · 선 · 미, 이것도 우리말로는 없습니다. ‘참(眞) · 좋(善) · 곻(美)’으로 나타내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해놓아야 후세 사람도 그 뜻을 알고 이어서 다시 큰 사상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13)
다석은 자신이 여기서 이렇게 시험 삼아 말하지만 후에 우리나라 철학이 있게 되면 이 말들이 잘 쓰일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 민족에게 철학이 필요하면, 누가 되었건 우리말로 철학 용어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있어서 우리 몸이 있는 것같이, 우리가 쓰는 말도 꼭 필요한 자식처럼 필요한 말이 마침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쓰는 말을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무리가 되더라도 만들어야 할 때는 만들어야 합니다.”(14)

미주

(미주 1) 다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길잡이 글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박영호, 『씨알.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홍익재, 1985;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다석사상전집 1, 문화일보사, 1995;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전2권), 두레, 2001; 박재순, 『다석 유영모. 동서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현암사, 2008.
(미주 2) 류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975.
(미주 3) 류영모, 『다석강의』, 606.
(미주 4)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131/2.
(미주 5) 류영모, 『다석강의』, 607.
(미주 6) 류영모, 『다석강의』, 667.
(미주 7) 류영모, 『다석강의』, 103.
(미주 8) 류영모, 『다석강의』, 110.
(미주 9) 류영모, 『다석강의』, 48/6.
(미주 10)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96/7.
(미주 11) 참조. 류영모, 『다석강의』, 100.
(미주 12) 류영모, 『다석강의』, 132.
(미주 13) 류영모, 『다석강의』, 133.
(미주 14) 류영모, 『다석강의』, 678.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2016/11/09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매김과 현대적 의미(박재순)

류영모 사상의 자리 매김과 현대적 의미

 - 박 재 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다석 류영모의 깊고 맑은 삶과 정신과 사상은 오늘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며 빛나고 있다.  다석은 씨 함석헌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씨사상의 밑자리를 놓은 분이다. 함석헌의 씨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류영모의 정신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류영모 사상을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한국적 주체철학, 동서사상의 만남과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자리 매김을 하고 오늘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1. 서구사상에 대한 반성과 대안



  그 동안 묻혀 있던 류영모의 삶과 사상이 지난 10 여 년 전부터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기상 교수는 류영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류영모의 사상이 이성, 존재, 인간 중심의 서구사상에 근본적인 도전과 대안이 됨을 밝혔다. “서양 사유의 잘못된 방향정립과 존재자에 대한 탐닉을 바로 잡기 위해서 다석 류영모 선생은 한 마디로 빛을 끄라고, ‘태양을 꺼라!’라고 외친다. 이것은 존재 중심의 철학, 빛의 형이상학에 대한 최대의 도전적 도발이며, 인간 중심의 철학, 의지의 해석학에 대한 방향전환 요구이며, 물질중심의 과학, 욕망의 주체학에 대한 강한 반성의 촉구이다.”1)

  다석은 물질(色界)과 이성의 빛보다 허공과 영의 어둠을 추구했다. 1922년에 이미 우주세계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크고 근원적임을 갈파했다. “우주는 호대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쫓아보았는가?”2)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3)

  어둠에 대한 다석의 통찰은 래리 라스무센이 1995년에 생명신학과 생명윤리의 새로운 상징으로 어둠을 제시한 것보다 70년 이상 앞선 통찰이었다. 또한 한=환(환하고 밝음), 백(白: 밝음), 배달(밝은 땅)에서 보듯이 밝음을 추구한 한국민족문화를 최남선이 ‘한밝문명론’으로 제시한 것4)을 뒤집고 삶과 존재의 깊이를 추구한 것이다.

  다석에게 어둠은 욕망을 자극하는 물질의 빛, 존재와 관념을 분별하는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세계이고 차원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없음(無)과 빔(空)의 세계이다. ‘하나’는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깜깜한 세계이고 우주의 허공이 그렇듯이 없음과 빔은 물질과 이성의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깜깜한 단일허공(單一虛空)이다. 허공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물건과 물건 사이, 집과 집 사이, 세포와 세포 사이...원자와 원자 사이...이 모든 것의 간격은 허공의 일부이다. 허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5)

  어두운 허공을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던 류영모는 “어둠 속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6)으로 알았다. 물질과 이성의 빛을 넘어서 어둠, 한(하나), 공허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려 했던 다석은 이성과 기술의 빛,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는 사유의 틀과 논리, 물질적 존재의 힘과 현실에 집착한 서구사상에 큰 도전을 줄 뿐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 바탕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사유와 삶의 길을 제시했다. 다석은 세속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길을 갔고 가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수도의 길을 열었고, 나라와 겨레의 역사 속에서 한얼나라, 하늘나라를 이루려 했다. 또한 그는 생각과 말이 끊어진 어둠과 하나와 공허의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생각과 말과 한글로 진리체험을 표현하려 힘씀으로써 깊고 독창적인 많은 생각과 글을 남겼다. 이로써 다석은 불립문자의 세계에 매몰된 선승들과도 다르고, 논리와 개념에 집착한 서구철학자들과도 다른 사상의 경지를 열었다.



  2. 한국적 주체철학



  류영모는 서구의 언어와 개념을 번역한 말과 글이 아니라 우리말과 글로 사유한 사상가이며, 삶과 생각을 통전시킨 생활철학자이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세우는 민족주체철학자였다. 그가 우주와 공허를 말한 것도 매임 없이 곧게 서려는 것이었다. 매임 없이 곧게 서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하나로 되어야 세상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매임 없이 자유롭고 곧게 서는 주체철학이다.



  1) 신선처럼 자유롭게



  함석헌은 한민족의 종교문화의 근본줄기를 신선사상으로 보았다.7) 세상의 이해관계와 다툼에서 벗어나 자연생명세계와 하나로 녹아드는 신선사상은 자연친화적이고 종교적이며 평화적인 사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신선사상이 한국인의 예술과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다. 물과 바람에 어울리며 삶과 생각을 키우고, 기교와 과장 없는 단순 소박한 도자기, 사람과 자연이 함께 녹아든 그림, 풍수지리에 어울리는 집과 정원에서 신선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파고드는 진리탐구자이면서 초탈한 신선의 모습을 보였다. 민족사학자 문일평이 일제 때 류영모의 집을 다녀가서 지은 한시에 류영모의 집과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로 둘러싸인 골에 산장을 찾으니 푸른 뫼 속에 집 한 채 서 있고 물 구름 함께 어울려 한 고향이라 숲 속에 꽃은 다시 아름다워라 계곡에 시냇물은 오히려 서늘하고 약초 캐러 다니느라 어둑한 지름길을 뚫었다 씨 소나무는 외딴 집을 둘러 지키고 집 부엌에는 맛좋은 먹거리가 그득하니 상위에는 우유 토마토의 향기로다.”8)

  류영모는 자신의 사는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의식(衣食) 않은 것 우리 집 자랑이요 명리(名利)를 웃 보는 게 내 버릇인데 아직껏 바람 물 줄여 씀이 죄받는 듯 하여라.”9)검소하게 먹고 입으며 명예와 이익을 우습게 여기는 류영모는 바람과 물을 아껴 쓰면서도 바람과 물을 쓰는 것이 “죄받는 듯 하여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초탈한 삶을 살면서도 자연을 아끼는 다석의 겸허하고 정성스런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나는 1975년 무렵 류영모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80대 후반의 류영모는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듯 했다.

  다석은 “脊柱는 律呂10),  거믄고”(다석일지. 1955, 4.27)라고 했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삶의 기본음(基本音)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를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척주로 보고 척주가 곧고 바르게 조율이 될 때 마음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11)

  다석은 생명과 영을 예술로 보았다. 법과 도덕, 제도와 풍습만으로는 삶과 영이 완성될 수 없다. 예술의 차원과 경지가 있어야 삶은 완성되고 구원된다. “인생은 피리와 같다...피리를 부는 이는 신이다.”12)

  일상의 삶을 영과 예술로 높인 류영모의 삶은 신선의 삶이고 그것을 추구한 그의 사상은 ‘걸림 없는 옹근 삶’(圓融無碍)을 추구한 한국의 고유한 신선사상이다. 그는 신선처럼 욕심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2) 씨 사상: 민주사상



  15세에 기독교신앙에 입문하고 20세 때 오산학교 교사로서 류영모는 남강과 학생들에게 전도하여 오산을 기독교 학교로 만들었다. 20세에 노자와 불경을 읽고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에 심취했다. 톨스토이를 통해 19세기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으로서 농사꾼이 되려 했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예수나 바울처럼 민중적 대중적 사유를 한 것 같지 않다. 예수는 엄격한 금욕이나 높은 도덕수준을 요구하지 않고 서민대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바울도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복음적 가르침을 폄으로써 일반대중에게 기독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엘리트적 이성주의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흔적이 톨스토이에게 있다고 보고 이런 경향이 영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금욕적이고 엄격한 다석에게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씨로서 참되게 살려고 했던 다석의 삶과 생각을 움직이는 기본원리는 씨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놓는 민주주의이다. 삶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구도자적 헌신이 그를 씨의 삶과 사상에로 이끌었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그는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13)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다석은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14)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15)라고 했다.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노동자 농민을 오늘의 예수로 보는 다석의 사상적 통찰이 씨사상과 민중신학의 기본바탕이 되었다.



  3) 민족 주체사상



  다석은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최남선과는 경성학교 동기생으로 가까이 지냈다. 최남선은 일제말기에 변절했지만 민족문화사상에 대한 그의 연구는 빼어난 통찰과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다석은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다석은 생각한 대로 실천했기에 정인보는 그를 ‘조선에서 두려운 인물’이라 했다고 한다. 20세 때부터 냉수마찰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머리에 찬물을 붇고 냉수마찰을 했다. 32세때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의 의자 등받이를 자르고 평상 위에서 무릎 꿇고 사무를 보았다. 몸과 마음을 곧게 가지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삶을 살았다. 중국과 일본에 굴복한 정치문화의 살림살이, 사대적 굴종을 거부하고 스스로 곧게 서는 삶을 살았다.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



  정치, 사회,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다석은 독립하여 곧게 서는 것의 근거를 종교와 철학의 깊은 데서 찾는다. 다석에게 곧게 서는 것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직립한 인간의 본질이고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성직설(性直說)을 말했다.16) ‘고디 곧게’ 서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곧아야 하나님께 갈 수 있다. 또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만이 곧게 설 수 있다. 말년의 일기에서 “한웋님 뫼셔 스람 스람 스람 따위 드디어 뜻 받드 받드 받듬 이 따위 사람이란요 남으램 예 나라솀”17)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이렇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라 서라 서라. 땅 위에 드디고 서서 하나님 뜻만을 받들어라. 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남을 나무라고 내몰아서 여기에 나라를 세우려 한다.“ 다석은 한국을 등걸(단군)이 하늘 열어 세운 나라로 여겼고 등걸을 ”머리 웋인 님 우리님금“(머리에 웋[하나님]을 인 님 우리 님금)18)이라고 했다.

  다석은 한글, 등걸의 정신과 사상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시켰다. 다석은 세종 임금이 내 놓은 바른 소리인 우리글의 모음의 기본인 ㅡ ㅣ 를 예수와 직결시킨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ㅡ ㅣ 를 나타낸 나무이다. 그리고 다석은 십자가를 나무뿌리, 나무등걸을 나타내는 등걸(檀君)님과 연결시킨다. ㅡ ㅣ 를 십자가와 연관시키고 십자가를 다시 한겨레의 뿌리인 단군과 연관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석의 상상력이다. 다석의 이런 풀이는 엉뚱한 말놀이가 아니라 한글의 기본모음에 대한 의미깊은 해석으로 여겨진다.19)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한글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는 ‘아가야 어서 오너라, 위(하느님 아버지께로)’의 뜻이다. 이것을 줄여서 ‘오으이’로 나타낸다.20) 그는 한글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곧게 위로 올라간 이다. 하나의 세계, 절대불멸의 진리에 도달하려면 ‘고디’(直)뿐이다.21) 고디 독립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태양을 사모한다.22) 다석은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라고 했다. 몸이란 활에다 곧은 막대 같은 정신을 화살로 끼워 쏘아 하나님 나라에 똑바로 맞혀야 한다.23) 1956년 1월 21일에 쓴 ‘그리온’이란 글에서 다석은 “그리온 걸 그리우고 드디어 오른이 누구리? 무리여. 거룩할 우리 고디!”라고 했는데 김흥호는 “오른이...고디!”를 그리스도라 보았다. 김흥호에 따르면 다석은 기독교를 貞敎로 보았다.24) 성서는 엄한 죄의식과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 거룩과 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서는 다른 모든 종교를 앞지른다. 거룩과 의는 곧음을 뜻한다.

  단군은 우리의 나라님이시다. 단군은 우리 말 둥글(朴) 등걸(璞)을 사음한 것이다. 단군은 우리 겨레의 뿌리(등걸) 되시는 원만하신 둥근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도, ‘두루 이치가 통하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도 둥글고 원만한 정신을 나타낸다.25) 다석은 단군을 나무등걸 나무뿌리로 보고 나무의 둥글고(朴) 소박한 ‘자연’과 연결함으로써 한국정신의 자연친화적 성격을 밝혔다. 곧고 꼿꼿한 나무 막대기, 고디가 자연친화적인 원융합일, 묘합의 한국정신과 만나고 있다.

  다석은 하나님을 고디로 보기도 하고 동글암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속성은 고디다. 의롭고 바른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원만이다. 은 유와 무, 없음과 있음을 아우르는 동글암, 원만이다. 곧은 막대기인 사람은 “없시계신 동글암”에로 돌아간다.26)

한국의 종교예술문화에서도 자연친화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다석의 사상에서 곧고 진취적인 기독교서구정신과 둥글고 원만한 한국아시아정신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깊은 죄의식, 믿음만! 은혜만!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을 말하는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타협 없는 곧음을 지닌 종교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 하늘, 나무 등걸의 동글암, 원만을 품고 있다. 다석의 삶과 정신 속에서 등걸과 그리스도가 만나고 있다. 둥근 등걸과 곧은 그리스도가 만남으로써 한국은 곧게 선 나라가 될 수 있다.





  3. 동서사상의 만남과 종합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인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평생 하늘의 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옥상에 망원경을 만들어 놓고 별들을 관찰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믿음의 진리와 씨의 삶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던 류영모는 낡은 이념과 종교의 틀을 깨고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에 두루 통하는 삶과 생각에 이르렀다.



  1) 동서의 융합



  서구문명과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에 나서 살았던 류영모는 서구의 정신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하나님을 향한 솟아오르고,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성서의 사상이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공(空)의 세계를 추구한 동양사상과 결합되었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며, 종교와 철학, 이성과 신앙의 통전이다.

  서구근대철학과 류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서구철학에서 생각하는 이성과 자아가 동일시되었고, 이성과 자아의 주체성은 자명하게 전제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주관정신이 객관정신과 절대정신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자아는 자명할 뿐 아니라 발전되고 실현될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사유와 인식, 삶과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고, “자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서구철학과 정신문화의 바탕에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충동과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정복주의가 깔려 있다. 서구언어에서 주어가 술어와 객어를 지배하는 것도 “자아”에 대한 반성의 결여로 이어진다.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아의 권리가 법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에 대해 정복적인 관점을 지녔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27)

  20세기 신학의 새 흐름을 열었던 칼 바르트는 “Cogito, ergo sum"을 뒤집어 “Cogitur, ergo sum"을 원리로 삼았다. 생각과 사유의 주체를 하나님과 영으로 보고 “나”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되어질 존재, 새로워질 존재였다. 바르트는 자아의 죄성, 불가능성, 무력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주도권을 강조했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인간이성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말하고 인간의 수동성과 신앙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과 영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절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류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28) 한국과 동양에서 다석의 치열한 사유는 예외적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분석·논리적 추론이나 생각을 파고드는데는 게으른 편이다. 함께 술 먹고 노래하고 흘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치와 동화, 천인합일, 원융합일을 강조하는 사유경향도 쉽게 추리적 사유에서 초월적 명상으로 넘어가게 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생각에 집중했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류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탐구하는 사유가 아니라 물체들의 본질을 꿰뚫고 그 존재의 근원과 배후를 탐구하고 그 근원과 배후로 들어가는 사유이다. 생각은 이성적 자아의 한 기능이 아니라 자아를 형성하고 세우는 근본행위이다. 류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을 형성하고 끌어올린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류영모에게서 성숙은 서구 계몽주의의 성숙개념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속한다. 다석에게서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29)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가라앉고 거울같이 빛나게 된다...그것이 얼이라는 것이다. 얼은(어른: 성숙한 이)이 되면 망상이 깨지고 實相이 된다...내가 없는 마음이...얼이요 얼은이다.”30) 생각은 하나님, 진리, 영원한 생명에 이름이다.

  다석의 생각은 나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르고 ‘내’가 생각의 주체로 남고 나의 주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도 다르다. 다석의 생각은 이성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이어지고 영의 성숙을 추구한다. 다석은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주제인 ‘생각’을 사상의 중심에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한국의 영성적 바탕에서 ‘생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심화시켰다.



  2) 회통



  유동식은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 율곡, 함석헌을 꼽고 이들이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고 다른 종교들과 회통했으며, 이론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실천궁행했음을 지적했다.31)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이며 ‘한’에 바탕한 사상은 서로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두루 꿰뚫는다. 크게 종합하는데 한국인의 사상적 재능이 발휘된다. 최치원(고운), 원효, 율곡, 수운, 다석, 함석헌은 다른 종교들을 품을 수 있었고 여러 다른 사상들과 요소들을 크게 종합한 사상가들이다.

  다석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내 속에 온 하나님의 씨”를 그리스도라고 보았다.32) 이어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몸으로는 죽어도 독생자인 얼로는 멸망치 않는다...영원한 생명은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폭포수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33)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 “폭포수 같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과 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원자이고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가 오늘 우리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때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고 얼이다.

  ‘속의 얼’을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와 통하는 종교사상을 갖게 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모두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고 바로 세우는 종교이므로 기독교와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속의 얼과 하나님을 잇는 한국·아시아의 주체적 종합적 종교사상을 세웠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욕구가 주도하는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류영모도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보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다석도 식욕과 육욕이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류영모는 식색(食色)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심리학자와 내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육욕을 끊고 자유로운 영적 세계, 초자아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했다. 다석은 ‘육욕’(리비도)을 성욕(性慾)으로 번역한 것을 어이없는 짓으로 못 마땅해 했다. 性은 인간의 본성, 바탈로서 하늘, 하나님과 통하는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을 육욕에다 붙이냐는 것이다. 또 ‘미성년자 불가’라 해 놓고 어른들이 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라 했다. 미성년자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면 어른들은 더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밖에서 ‘나’를 규제하고 지배할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이성과 도덕의 규정과 질서를 거부한 것은 하늘과 땅, 동서남북의 좌표와 규정을 폐지하고 ‘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있다. ‘나’를 규제할 것은 없다. 지금 여기의 나가 중심이고 주체이다. 원초적 생명의 힘을 추구했다.

  류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류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2)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의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철학에서 ‘나’, ‘너’는 개체적 실재이다. 타자, 만물과 구별된 실체이다. 실존적 자아도 만물과 구별되는 독립된 실체다. ‘나’는 바깥세계, 타자와 긴장과 갈등 속에 있다. 다석은 ‘나’에 집중하지만 ‘나’는 자연과 타인과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열리고 뚫린 것이다. 말씀을 깨달은 인간은 섬기는 존재다.

  (2) 깊은 영성의 사상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류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하나됨에로의 돌아가는 귀일(歸一),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3) 속세의 기독교 선승이다. 해혼(解婚)하고 하루 한끼 먹고 온종일 널빤지에 무릎꿇고 앉아 생각에 몰두한 류영모는 세계사적으로 독특한 기독교 선승이다.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생각은 끊고 절대의 사유 세계에 접어든 산 속의 선승들과 다르다. 가정에서 민족사회 안에서 사유하고 명상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성적 과학적 사유에 힘썼고 말과 개념을 닦아냈다는 점이 다르다.

  (4)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사상의 결합이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동학을 연구한 흔적이 없는데 기본사상이 일치한다는 것은 이런 기본사상이 매우 한국적인 사상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38)

  동학과 다석은 많은 점에서 상통하지만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이는데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다.

  다석의 사상은 민족사학인 오산의 정신과 사상의 맥을 잇는 사상으로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의 기독교적 민족정신운동의 흐름 속에서 함석헌의 씨사상으로 이어진다. 일제 아래서 민족정신과 독립을 추구한 대종교 교주 윤세복,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와 함께 주체적인 민족사상과 정신을 추구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면서 닦아낸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민족사상과 단절됨으로써 해방 후 한국사상계는 사상의 뿌리를 잃고 말았다. 다석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뿌리를 밝혀준다.

  (5)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마음을 마음대로”는 말 그대로 모든 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얻고 마음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하는 경지를 뜻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든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내 삶이 달려 있다. 몸을 강조하고 결정론을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에서의 삶에 집중한 것은 몸의 느낌을 존중하고 삶의 우발성을 강조한 서구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한다. 그러나 다석이 의지적인 면을 강조하고 초월적 영성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6)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종교원주의다. 70여년 전에 존 힉보다 먼저 종교다원적 신앙을 펼쳤다. 류영모의 영성과 사상의 고갱이는 성서, 예수에게서 왔다. 그의 사상과 영성의 내용과 특징은 유교, 불교, 도교에서 왔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머리 속에서 개념적으로 논리적 이론 정리되고 전개된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혼으로 체득한 종교다원사상이므로 살아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삶이 숨겨 있고 담겨 있다.

  (7) 다석은 종합적인 사상가이다. 한겨레의 정신적 원형질은 ‘한’(크고 하나임, 밝고 환함)이다. 한국인의 사상적 천재성은 하나로 꿰뚫는데 있다. 최치원, 원효, 지눌, 율곡, 수운, 해월, 다석, 함석헌은 모두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다석은 주관과 객관, 상대와 절대, 유와 무, 인간과 신에 대한 서구의 이원론적 경향과 동양의 일원론적 경향을 통합했다. 안과 밖을 꿰뚫었다. 초월자 하나님이 내 바탈 본성 속에 있다고 보았다. 영원한 생명의 줄이 내 숨 속에 내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야 하나님을 만난다. 서양에서는 초월적 절대자를 말하고 동양에서는 마음, 본성이 곧 하늘이고 도라고 보았다. 내면 속에 영원한 궁극의 실재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 바탈을 닦으면 궁극적인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나’의 밖의 하나님,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다. 거기에 영원이 있고 구원의 나라가 있다. 류영모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솟아올라야 한다고 보았다. 내 속을 파고들면서 끊임없이 위로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오르려 했다는 것은 동양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이 결합된 것이다.

  몸과 정신, 신앙과 이성을 하나로 꿰뚫은 사상이다. 류영모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고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다시 류영모 사상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과 동양종교의 창조적 만남을 이루고 하나로 꿰뚫었다는 데 있다. 동서 사상과 종교와 정신의 회통과 통전은 지구화시대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2) 앞으로는 풀뿌리 민주시대와 서비스 중심의 사회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섬김의 철학으로 다석과 함석헌의 사상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다석은 삶의 사상가이고 생각과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 사상가이다.

  3) 류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속성과 발전을 논구해야 한다. 다석에게 배우고 다석을 깊이 안 이는 함석헌이다. 다석사상이 뿌리와 싹이라면 함석헌 사상은 줄기와 꽃과 열매이다.

다석의 비상한 삶은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혼돈과 어둠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등불처럼 빛나고 있다. 다석사상을 연구함으로써 함석헌의 씨사상도 더 밝아지고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에게서 실천적으로 힘차고 활달하게 펼쳐진 씨사상의 깊은 뿌리와 높이가 드러나기 위해서도 다석의 사상이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1)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I. 솔, 2001. 669쪽.



2) 류영모. 다석어록. 153-4쪽.



3) 같은 책. 156쪽.



4) 최남선, 불함문화론, 신동아. 1972. 1. 다석도 최남선이 한민족의 본질을 ‘밝기’로, 인간의 본질을 광명으로 본 것을 알았다. 다석일지공부 2. 616-617쪽.



5) 다석어록. 161쪽.



6) 이기상, 같은 글. 683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 1.365쪽.



8) 박영호 지음,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두레, 2001.  359쪽.



9) 같은 쪽. 360쪽.



10)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옛날에는 새 나라를 세우면 법과 제도, 도덕과 풍습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음악의 기본음을 정하고 기본음에 맞추어 악기들을 조율하고 가락을 정했다. 옛날에는 음을 측정하는 기계장치가 없으므로 기본음을 정하고 이 음에 따라 악기들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했다. 강증산은 죽기 전에 “율려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근에 김지하가 율려를 내세워 새로운 미학과 사상운동을 펼치고 있다.



11) 다석은 呂와 은 등뼈를 그린 것이라고 보았다.(진2, 40)



12) 류영모,  “밀알(1)”,  柳永模 先生 말씀上. 817쪽.



13)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上. 204쪽.



14) 류영모, “짐짐”. 柳永模 先生 말씀 上, 789-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