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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8

‘신의 나라’ 일본과 ‘무종교’의 일본 - 서정민(徐正敏)|論座 - 朝日新聞社の言論サイト



‘신의 나라’ 일본과 ‘무종교’의 일본 - 서정민(徐正敏)|論座 - 朝日新聞社の言論サイト




‘신의 나라’ 일본과 ‘무종교’의 일본

-‘8백만’의 신과 99.9% ‘무종교인’ 클래스-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2019年04月28日

徐正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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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필자가 한국어와 일본어 2개국어로 집필하였습니다. 일본어판도 함께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재직 중인 메이지가쿠인대학, 일본의 사립대학 중 다수가 기독교계 대학인데, 기독교 대학의 교수, 직원, 재학생 대부분은 ‘무종교인’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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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종교를 가졌는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가

필자는 대학에서 주로 종교사 과목을 가르친다. 매년 개강 후 첫 시간이면, 100명 전후의 클래스에서 질문을 한다.

"종교를 가진 이가 있는가, 아니면 종교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는가?"

돌아 오는 대답은 대개 지난 수년간 다름이 없다. 100명 중, 클래스에 따라 한 사람 정도가 종교가 있다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전무하다. 그리고 100명이면 7-8명 정도가 종교에 관심이 있다고 답하는데, 그 정도도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 필자의 클래스는 더구나 종교의 역사, 혹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학습해야 하는 클래스인데도 그렇다. 그런 면으로 보면 필자는 대단히 불우한 교수이다.

종교도 거의 가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는 학생들에게 일단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다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셈이다. 벽을 바라보고 강의를 하는 형국이라고 할까, 공허한 독백을 늘어놓는 강의라 할까, 아무튼 극한 직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필자의 클래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다수 젊은 세대, 특히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집단일수록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종교가 없는 ‘무종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종교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거나,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정녕 이러한 일본의 ‘무종교’ 대세 현상은 역사적으로 그런 것이며, 일본은 본래부터 ‘무종교’의 나라일까?

‘신의 나라’[神國] 일본

그렇지가 않다.

일본은 종교학자들이 이르기를 전통적으로, 종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신이 있고, 그 신을 섬기는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보통 일본의 신을 8백만으로 헤아린다. 신이 8백만이 있다는 것은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형상도 다 신이 될 수 있다는, 다신교 최고 단계의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종교의 기저가 되는 신도(神道)는 세계적으로도 대표적 다신교 종교인 것이다.

아무튼 근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종교와 더불어 각 지역 군락의 삶이 형성되었다. 곳곳에 남아있는 종교적 제의와 축제가 다 그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외래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도 일본을 기반으로 다시 꽃피어 났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특색과 규모를 뽐내는 일본의 불교문화 역시 세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 종교와 신의 나라요, 그런 문화를 지닌 것을 역사적 측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지속적인 신종교의 생산, 현재까지 횡행되는 일부 종교의 사회적 범람 현상도 일본의 종교문화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일본은 지극히 종교적으로 민감한 사회이다. '신도'는 헤아릴 수도 없는 여러 신들을 섬긴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하여 신이 생산되는 문화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으로 만화의 ‘캐릭터’나 ‘로봇’이 신이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리고 더 하나, 뼈아프게도 1995년 3월 20일 도쿄 한 복판에서 ‘옴 진리교’의 테러, 그런 종교사회적 충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이다.

무슨 이유인지 아사하라 쇼고(麻原彰晃)라는 저급한 종교적 카리스마가 일본의 일부 엘리트 지성과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뇌쇄시킬 수 있는 사회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사실 변방이던 통일교가 일본의 보통 사람들을 다수 현혹시켰고, 그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지금 현재도 일본사회는 새로운 종교적 창안과 활력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수많은 신흥종교가 활동하고 앞으로도 생산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 중 하나이다.

'종교'의 나라에서 ‘무종교’의 나라로

일본의 근대국가는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 강력한 일본의 중앙집권적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로는 최고의 유효성을 지녔다. 그리고 그것은 ‘초종교’의 수준으로 모든 종교적 권위를 초월했다.

'신도'에서 분리된 ‘국가신도’는 ‘비종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 단계는 ‘종교 위의 종교’로 온 국민의 숭앙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일본은 급속히 세속 문명을 받아 들였다. 빠른 속도로 모든 전근대적 사고를 뛰어 넘어 과학과 합리적 이성의 인간문명에 집중하였다.

종교는 ‘비합리’이거나 ‘초점 밖의 요소’가 되었다. 이는 지성적 훈련의 수준에 정비례하였다. 지식인 엘리트일수록 종교는 열외이고, 이성과 과학이 중시되었다. 종교는 점점 전통으로서 문화의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머물렀다.
아직도 국가신도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필자 제공


‘무종교’라고 부르는 하나의 종교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영역이다.

자신을 ‘무종교’요, 종교에 관심이 없는 존재로 여길 때 종교의 개념은 대단히 좁은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신도, 토속종교, 신종교 등등, 그런 구체적 현상종교 집단에 소속되었느냐 아니냐, 그런 종교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종교를 조금 넓은 범주로 본다면, 자신에게 종교가 없다는 무종교인에게는 바로 그 ‘무종교’가 그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종교’라고 하더라도 ‘유신론적 무종교’와 ‘무신론적 무종교’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인간은 종교적 존재인데, 그것을 단순히 좁은 의미의 신앙이나, 종교적 생활에만 기준이 있지 않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적 가치의 바탕과 더하여 궁극적 가치관, 그리고 최종적 삶의 선택, 죽음에 대한 견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 이해와 행동 준거,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등등을 모두 종교라는 관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더욱 현실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은 현재 세계적으로 ‘무종교' 정체성을 지닌 인구가 많은, 더구나 젊은 세대 대부분이 그런 자기인식을 지닌 국가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경을 나서는 순간, 이웃 한국은 반수 이상의 인구가 종교를 가졌다고 답하는 상황이다. 그 또한 열의 깊은 신앙심으로, 종교적 가치가 스스로의 삶을 좌우하는, 궁극성의 지수가 높은 종교 신앙인이 다수 편재한 나라이다. 중국의 경우는 많은 인구가 여러 요인에 의해 종교 인구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깊이 연관된 아시아 일대에서는 ‘무종교’라고 하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구의 거의 전체가 종교 내의 영역에 편재되어 있다. 불교와 이슬람교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힌두교가 전체를 주도하는 큰 인구의 인도, 이슬람교의 종주인 서아시아 중동이 잇닿아 있다.

혹시 일본의 젊은 세대와 유사한 종교적 인식이 많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미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볼 수는 있으나, 역시 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정체성에 다수가 철저히 근거하고 있어서 경우가 다르다.
즉 일본의 대세인 ‘무종교’를 하나의 종교라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일본문화의 세계적 소통, 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심각한 장벽이 가로놓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도 일본의 ‘무종교 현상’을 하나의 독특한 ‘종교 현상’으로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는 '종교' 없이는 설명이 안 된다

세상과 역사를 ‘정치’로 볼 수도, ‘경제’로 볼 수도, ‘문화’로 볼 수도, 그리고 ‘종교’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밖에도 볼 수 있는 영역이 많다.

그래서 그들 각 분야의 ‘눈’은, 역사에서 각각 ‘사관’을 만든다. 사관이란, 단순한 물리적 시점(視點)에만 머물지 않고, 때로는 신봉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간혹 세상과 정치를 종교의 관점으로 본다. 혹자는 말한다. 종교로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특히 종교적 가치가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대문명의 시대에서 누가, 아니 다수가 종교 같은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이런 논조는 일본에서 더욱 팽배하다. 아예 종교에는 관심이 없다. ‘무종교’, 아니 더 나아가 ‘무신론’ 사회이다.

그런데 그 ‘무종교’와 ‘무신론’을 하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해 본다.

‘종교적 신념’이란, 제한된 개인의 영역에서 복을 빌고, 윤리를 세우고, 죽음 이후의 불확실성을 담보하는 분야, 즉 ‘생명보험’ 같은 개념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치’의 ‘내면’이 되고, ‘경제’의 ‘동력’이 되며, 보이지 않게 ‘문화’의 ‘우상’도 된다. 그리고 극한 ‘전쟁’의 ‘배경’도 되고, 비극적 ‘인류 파국’의 원인도 된다. 부정적 ‘예언’의 근거도 되며, 빛나는 ‘미래’의 비전(vision)도 된다.

찬찬히 돌아보자. ‘정치’를 ‘정치’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종교적 신념’의 현상으로 설명하기가 더 쉬운지. 아랍 도처에서 진행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 꽃잎 같은 청년들의 ‘자살폭탄’, 천황 폐하의 은덕을 구가하며, 대양에 흩어져 날리던 눈발처럼 가녀린 몸을 날린 ‘가미가제(神風)특공대’, 오히려 종교적 신념 보다 더한 ‘분노’로 형제와 부모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 ‘동족상잔’의 전쟁, 정치적 카리스마라고는 도저히 해석되지 못할 수많은 역사의 ‘독재자’들과 그들을 향한 ‘군중의 함성’, 그리고 ‘반역’, 도대체 그것을 정치만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결국은 그것이 ‘종교’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유사종교’에 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렇게 점철되었다.

대개 현대 정치를 ‘밥상’을 잘 차려줄 수 있는 지도자에게 대중이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제적 함수’와 ‘정치적 리더십’의 관계를 가장 적절한 상관관계로 해석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원래 ‘민중’에게 ‘밥’은 ‘종교’이다. 그리고 때로는 ‘굶어도, 배부른 환각’이 ‘종교’이다. ‘정치’는 ‘종교적 패러다임(paradigm)’에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필자가 말하는 ‘종교’는 크고, 넓은 개념의 ‘종교’이다. 우리 개인들에게 '종교'가 있던, 없던, ‘종교’로 세상과 역사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생각보다 아주 잘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동력’이다.

대단한 종교의 나라로서 일본


일본의 신종교 ‘행복의 과학’= ‘행복의 과학’ 홈페이지로부터



그런데 개인, 공동체, 문화권의 종교적 감수성이나 성향을 형태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현재의 상황을 최고의 순간으로 인식하고, 가장 좋은 이상으로 현재를 유지, 지속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제하자. 그것을 ‘M 타입’으로 부르자.

그와는 달리 지금 현재는 극심한 고통의 때이고 말도 안 되는 순간이며, 사실은 지나간 어느 때 그 때가 최고였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고 치자. 지난 날의 영광을 부르짖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부류를 ‘P 타입’이라고 부르자.

또 하나 지금의 고통은 말 할 것도 없으며, 지나가버린 때조차 극한의 시간이었고, 오직 언젠가 새 세상이 와서, 천지가 개벽(開闢)할 혁명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부류가 있다고 치자, 그들은 ‘F 타입’이라고 부르자.

과연 이들 중 우리들 자신,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속하는가?

종교적 감수성으로는 그 중 ‘F 타입’이 가장 강력한 타입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메시아’를 기다리고,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카리스마를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천지개벽’을 꿈꾸는 이들이다.

비교하자면 한국 종교문화의 한 특징은 역사로부터 ‘F 타입’이 다수인 특성이 강하다. 그러나 일본도 뒤지지 않는다. 신종교가 득세하는 일본도 ‘F 타입’이 강한 특징이 엿보인다.

일본도 결국 종교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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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者




서정민(徐正敏)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종교사), 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대학원 수료,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박사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신과대학 부학장 역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초빙교수,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정년보장 교수. 아시아종교사, 한일기독교사, 한일관계사 전공. 유학시절을 포함하여 1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아시아의 종교, 문화, 사회, 정치, 특히 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일본기독교의 한국인식』(한울, 2000), 『한국교회의 역사』(살림, 2003), 『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3), 『언더우드가 이야기』(살림, 2005), 『이동휘와 기독교』(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가톨릭의 역사』(살림, 2015) 이외, 한국어와 일본어 저서 50여 권.

2016/10/12

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 - 현대불교신문

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 - 현대불교신문



세계불교 도래·명상 산업화… ‘멜팅폿’ 한국불교한국불교의 변곡점, 다불교&탈종교
① 한국불교, 준비가 필요하다
신성민 기자  |  motp79@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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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0  13: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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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신성민 기자] ‘멜팅폿(Melting Pot).’ 현재 한국불교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다. 흔히 ‘멜팅폿’은 인종과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동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를 한국불교에 적용시키면 ‘세계불교·수행의 용광로’로 표현될 수 있겠다.

각국 불교 백화점된 한국불교
초기불교에 높은 관심 가져와
권위·중심 해체된 다불교 상황


탈종교화, 한국사회 명백한 현상
종교, 사생활의 영역으로 추락해
명상 대중·산업화 明暗 분석해야


현재 한국불교는 ‘다불교’라는 큰 조류를 맞이하고 있다. ‘다불교’는 다문화와 세계화를 통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된다.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태국·스리랑카·캄보디아 등 동남아 지역 불교를 포함해 일본과 대만, 서구화된 불교까지 다양한 국가의 불교가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

해외불교의 한국 진출은 1990년대 시작된 동남아 불교국가 노동자들의 이주현상과 증가, 2000년대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한 테라와다 불교의 전파와 과학화된 서구불교의 역수입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이뤄졌다.

‘다불교’라는 현상적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다. 그는 다불교의 특징을 한국의 전통불교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조성택 교수는 “다문화라는 말의 핵심은 ‘한국문화를 중심에 놓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한국불교에서는 대승불교, 간화선이라는 중심이 존재했는데 이제 그 중심이 해체된 상황을 ‘다불교’라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다불교 현상은 역사적 유례가 없는 사례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는 다불교를 다문화의 확장판으로 보고 세계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봤다. 윤승용 이사는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불교만으로는 현대 불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다수 수용하기 힘들다”면서 “한국불교가 조금 더 개방적으로 나아가고 신도 중심의 불교가 돼야 한다. 기초가 튼튼해야 다불교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다불교 현상의 대표 사례는 광풍에 가까운 초기불교에 대한 열기이다. 2000년대 이후 초기경전 번역과 함께 위빠사나 등 초기불교 수행법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면서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이라고 자신했던 간화선은 적지 않은 도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2013년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발간한 <대국민여론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 불자 중 4%만이 “간화선을 수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는 웰빙·힐링 열풍과 더불어 명상 대중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양에 전파된 불교가 마음 수행 등으로 변화돼 오히려 역수입되고 있다. 실제, 존 카밧진에 의해 체계화된 MBSR 등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과 접목되면서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 기, 마음수련 등 유사불교 형태의 마음 수련들도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은유와마음연구소 대표 명법 스님은 9월 3일 조계종 포교연구실과 불광연구원 주최로 열린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위기인가 기회인가’란 주제의 학술연찬회서 탈종교화와 다불교 현상을 연계시켜 비판했다.

명법 스님은 “명상의 대중화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개인의 사사로운 영역이 되는 것)와 함께 발생한 근대적 현상”이라며 “명상은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소비문화의 하나로서, 명상의 유행과 더불어 오히려 탈종교화와 종교의 사사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업주의와의 결탁은 더 긴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불교 상황은 다종교 상황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불교를 약화시키고 종교를 사생활 또는 취미생활로 여기게 했다”면서 “이제 한국불교는 종교 시장에서 타종교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다른 불교전통과 함께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상품이 된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다불교와 탈종교 현상이 공통적으로 갖는 현상은 바로 ‘탈제도화’다. 이는 기성 종교·종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다불교는 중심 권위의 해체로 기성 전통 종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탈종교 현상은 세속화와 탈제도종교화로 세분돼 나타난다.


  
▲ 태국 방콕의 한 불교사원의 수많은 불상들. 다불교시대를 맞은 한국불교도 다양한 불교를 만나고 있다.
한국갤럽이 2015년 발간한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종교 단체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종교적 믿음을 실천하면 된다’는 질문에 긍정 응답을 나타낸 사람은 83%에 달했다. 불자의 경우 85%가 가톨릭인은 84%가 개신교인은 73%가 종교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행 생활이 가능하다고 봤다. 이는 탈제도화 현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계종 포교연구실의 ‘탈종교화’ 주제 연찬회에 참석한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탈종교화 시대에 세속적 제도들이 종교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종교의 전문영역이었던 분야에 기업들이 나서서 힐링의 산업화를 활발히 도모하고 있고, 영성을 마케팅의 주요 범주로 활용하고 있다. 대중스타에 대한 팬덤은 청소년의 유사종교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1000억원을 투입해 2017년 개원을 목표로 영덕연수원을 건립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1만 임직원을 대상으로 영덕연수원에서 명상교육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동국산업, 동화그룹 등도 명상센터 형식의 연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국선도, 단월드, 마음수련원 등 유사 종교 수련단체들이 전국 조직을 넘어 세계로 진출해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자체 수련법를 개발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대규모 명상센터를 세우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우혜란 가톨릭대 외래교수는 ‘신자유주의와 종교 상품화’ 제하의 논문에서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이전에는 상당 부분 제외됐던 종교 영역을 소비문화로 흡수하면서 상품화의 길을 걷고 있다”며 “현 시대에서 종교문화는 일종의 ‘주인 없는 자원’으로 쉬운 상품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 불교는 이 같은 변화 현상들에 대해 수용할 것인지,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남는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아직 현상 인식과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명법 스님은 “한국불교는 아직까지 다문화, 다종교, 다불교 상황을 수용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상대주의를 허용할 만큼 권위주의도 청산하지 못했다”면서 “불교를 현재적 경험 속에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다시 현재 한국 상황과 접합시키는 시도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승용 이사는 “선종이라는 큰 줄기의 전통을 제외하고 나면, 한국불교는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면서 “현재의 규격화된 불교로는 현대인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기 어렵다. 전통을 중심으로 수용과 보완 작업이 꾸준히 이뤄져야 한국불교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명예교수는 “다불교 현상은 불교 전통간의 상호 교류와 불교의 국제화 운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통해 불교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 “한국불교의 우월성과 정체성만 내세우기보다 서로 배우며 성장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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