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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6

Hun Jung Cho 늦봄 문익환목사의 사상과 신학

(17) Facebook: Hun Jung Cho

Hun Jung Cho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늦봄 문익환목사(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의 사상과 신학

 - 목차 -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2) 시 신학 (Poem Theology)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 

(2) 시 신학 (Poem Theology)

  1) 문익환의 다양한 신학 훈련 

 문익환은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윤동주 그리고 반 박정희유신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상계의 주필 장준하와는 명동 은진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퇴학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신학교에 입학한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이후 학병 거부로 인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가 해방 후 1947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문 목사는 교회를 섬기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접고 귀국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일하다 휴전 후 1954년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다.
 이후 한빛교회 초대목사로 봉직하는 가운데,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사상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설교와 글을 발표한다. 이어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공부한 신학교만 만주 일본 미국의 모두 저명한 다섯 개 학교이다. 당시 이렇게 다양한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이는 문익환이 처한 시대의 난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는 그의 신학 또한 영혼처럼 자유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성서번역가 문익환

 문 목사는 51세가 되던 1968년, 개역한글판 번역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독자에겐 이해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세계 최초, 개신교•가톨릭 공동성서번역 작업에 책임위원으로 8년간 참여한다. 성서번역에 매진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히브리 성서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56세에 『새삼스런 하루』라는 첫 시집을 낸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은 제국들의 침략과 압제 그리고 추방 속에서도 야훼 신앙을 고백했던 시편 기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펼쳐가야 할 신앙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체계 조직신학, 다른 말로는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는 백과사전적 조직신학(encyclopedia systematic theology)에 대비되는  ‘비체계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신학 혹은 ‘이야기 조직신학(Narrative systematic theology)’ 등으로 명명된다. 히브리성서나 헬라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물론 모세 율법의 상당부분도 역사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전전승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비유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으며, 복음서 기록 이전 순회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문학은 크게 이야기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야기 신학에 비교하는 ‘시 신학(Poem Theology)’라는 용어는 아직 신학 세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시인이었다는 주장은 많지만, 시 신학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신학(Theo + logos)’이라는 학문 자체가 ‘logos(말 곧 논리성)’를 기반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반드시 논리학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의 논리성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때문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 치환하려는 서구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예수보다는 바울을 선호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신학’이라는 말은 없어도 ‘바울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의 절대 영역을 인간의 상대 영역인 언어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문 목사님은 시야말로 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시작이란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그 이미지로 표현된 감정의 빛깔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에 맞는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이점에 있어서 시는 철두철미 과학적이에요. 시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이 없으면 새 말을 만들어도 돼요.”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삼민사 1991 139쪽

 인간 역사 속에서 시와 종교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내려왔다. 예배의 무게 중심이 개신교에서는 설교에 있지만, 이를 제외한 찬송과 기도는 모두 시어(詩語)이다. 복음서의 헬라어를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역번역했을 때, 학자들은 예수의 언어가 본래 시어였다고 논증한다.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의 언어들은 대표적이다.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빠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저 들에 피는 꽃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시어체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비유 곧 이야기로 분류되는 예수의 짧은 비유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대비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야기가 아닌 시인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과 예언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편이다. 히브리 성서의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예언서 중 후기예언서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시어체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40%가 시다. 성서의 시 신학을 오늘에 몸소 재현한 이가 문익환 목사님이다.

 왜 목사님은 시를 그토록 사랑했는가? 시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시는 대부분의 설교가 지향하는 일방적 방식인 가르침과 설득보다는 읽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백이 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하나 둘 셋의 삼단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입을 닫는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성찰 단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상대를 이끌어낸다. 그건 시인들 자신들이 경험하는 그 영적 혹은 신비의 세계가 언어로 결코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서구의 전통신학의 훈련을 받은 신학자이긴 했지만, 본래 그의 품성이 갖고 있는 이상형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틀을 깨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직신학 서적으로 분류되는 『히브리 민중사』도 매장마다 종국에는 시로 끝맺고 있다. 혁명은 감성이 주도하는 시적 통찰력에서 일어나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3) 시편 1편 번역 비교와 우리말로 신학하기  

 시편은 무엇인가? 시편은 삶의 현실 앞에서 김정을 표현하는 운율을 담은 시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기도이다. 시편은 새 역사를 향해가는 믿음 위에서 출발하며, 시편 속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 가운데 현존하면서 생명과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게 함으로 청중 자신들의 삶과 역사 안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시어(詩語)가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순수 우리말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문 목사님 또한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1편을 공동번역과 이전 개역한글과 비교해 보자.

(공동번역)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은 노래로 하는 시이자 기도이다. 반복되는 운율과 박자가 중요하다. 시는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하나의 단어가 갖는 함축성은 더욱 중요하다. 시에서 단어 하나는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개역과 공동번역의 첫 단어는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면서 하나의 서술체로 변해가는 단어와 그냥 “복 되어라!” 하는 선언의 차이는 단순한 단어가 차이가 아니라 시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 않는가?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개역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여 ‘묵상하는 자로다/ 하리로다/ 같도다/ 못하리로다/ 망하리로다’ 곧 ‘다.’ ‘다.’로 끝나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중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 되어라!” 하는 축복 시어로 시작하고 또 중간에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하는 감탄 시어로 연결되면서 ‘다’(보살피신다)라나 결어는 끝에 딱 한번 나온다.  

 문법적으로 보더라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려면 1절의 의인이 악인의 길에 가까이 다가가는 세 개의 형용구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개역은 ‘좇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한 어조가 맨 앞에 등장하므로 이후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반면 공동번역은 ‘가지 아니하고,’ ‘거닐지 아니하며,’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점진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역동감을 더하고 있다. 
 끝으로 시어를 보자. 개역의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리고 공동번역의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를 비교하면 후자가 주는 표현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없다.

 이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도 개역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겨가 ’흩날린다’는 문구와 ‘까불린다’는 문구를 비교해 볼 때, ‘까불린다’는 표현이 우리말의 강점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겨가 악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신학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 발제자가 시무했던 향린교회는 홍근수 목사시절부터 지난 25년 동안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얘기할 게 많지만, 시편에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예배 시에 시편교독문을 읽는데, 본인은 원시편이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이를 국악풍의 짧은 가락으로 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부르는 형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담당 교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공동번역 시편이 없었더라면 많은 부분 생동감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2013년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에서 “The Korean Traditional Hymn in Connection with Ecumenical Spirituality”란 워크샵을 향린교회 단독으로 주최한 바 있었다. 당시 보통의 워크샵은 많아야 2, 30명인데, 여기에는 200명이 참가 신청을 하고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었다. 예배 전체 틀을 국악으로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시편 교독문이라도 국악풍의 가락에 공동번역의 시어를 사용하면 한국교회 개혁에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학교 문예지 편집 일을 맡았던 윤동주가 목사님에게도 시 한편을 써내라고 하여 한편을 보냈더니 ‘이게 어디 시야’하면서 되돌려 받게 되면서 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번역에 참가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상상하기를 만약 동주가 살아 있어 시편 번역을 도와주었더라면 자신은 영영 시를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문익환, 『혁명의 해일』 청노루 1988 118쪽)
 문 목사님께서 히브리 성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조선인의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함으로서 투명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한 것을 생각할 때,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문익환의 짧은 시 두 개를 읽어보자.

- 예수의 기도 6 -

새벽 하늘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와락 다가서시는이시여
가까워지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로
이 새벽에도 이 외로운 감방으로 찾아오시는이시여
당신은 오직 사랑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진실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희망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자유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우리의 노래만 들어도 목이 메이시죠
우리의 기도만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시죠
아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슬픔에 얻어맞으며
노래도 잃고 기도도 막히는 바닷가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는가요
익히 잘 아는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의 시작 부분이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감옥신학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문 목사님의 삶을 생각할 때,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에 실험삼아 붙인 용어이다. 감옥은 마치 성서의 예언자들이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음성을 더 깊이 듣고 깨달았듯이 오늘의 시대에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현존의 장소이다. 그래서 감옥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장소이지만, 오히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영혼의 자유를 훈련하고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1975년 공동성서번역 작업을 마쳤을 즈음, 문익환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반대운동에 핵심 인물이었던 죽마고우 장준하의 의문에 찬 죽음을 맞게 된다. 그때 그는 장준하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갈 것을 다짐한다. 다음은 장준하의 3주기에 그를 추모하며 감옥에서 쓴 시이다.
......
우리는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부끄러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 되리라
네 마음으로 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죽으리라
부나비처럼
불 속에 뛰어들어
너를 얼싸안고
신나게 춤추며 죽으리라
어둠과 탐욕을 비웃어 주면서
통일 조국을 목이 터지게 노래하면서

      <산중 고혼아> 중에서 김지형 김민희 『통일은 됐어,,』 지성사 1994 134쪽

 1976년 문익환은 3.1명동구국선언 성명서를 작성하는 주역을 담당함으로 첫 번째 옥고를 치른다. 나이 59세였다. 그의 호는 '늦봄'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역사에 대한 늦은 자각을 고백하는 언어였지만, 동시에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부름을 상징하는 호이기도 하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인해 5번의 옥고를 더 치렀으며 이후 17년간 이어진 투쟁의 삶 가운데 감옥 안의 기간이 11년 반, 감옥 밖의 기간이 5년 반이었다. 
 사실 문 목사님 자신이 존경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저항의 신학이 남한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신은 70년대 민족과 민중을 사랑했던 신학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서와도 같은 역할을 했는데, 80년대 신학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문익환의 옥중 글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영복, 서승 선생을 비롯한 여러 옥중 글들이 우리 시대의 역작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문 목사님의 옥중서신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본다. 고난이 삶의 열매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1973년 첫 시집을 낸 이후 나온 10여권의 저서 모두가 감옥생활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감옥신학은 새로운 용어로 들리지만, 사실 바울서신의 일부가 감옥 안에서 쓰였기에 성서 일부 자체가 감옥신학이다.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았던 시절의 남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글이 감옥신학의 일부이고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관련 글들 또한 감옥신학의 일부이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었을 때, 생겨난 모든 글들이 감옥신학이다. 옥중서간은 관제봉합엽서로 제한되기에 아무리 작게 쓴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압축적일 수밖에 없으며 엽서이기에 공개서한의 형식을 갖는다.

 감옥에서 봄길 아내에게 보낸 글의 일부이다.

“오늘 새벽 무슨 꿈을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한데, 그 꿈이 어제 새벽 꿈의 고민을 풀어 준 것만은 지금도 뚜렷해요. 그게 뭐냐고 하면 이런 거였소. 호세아의 사랑의 고민은 결코 하느님과 사람의 상징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소. 고멜의 배신, 그 배신을 끌어 안는 호세아의 가슴 에이는 아픔,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포함하는 모든 사랑의 실체라는 걸 이틀 새벽 꿈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군요. 이것이 내가 법정에서 말한 성속의 이원론의 완전한 극복인 거죠. 가톨릭에서 생각하듯 그것만이 성체가 되는 것은 아니구요, 밥상에 오르는 모든 밥이 예수의 몸인 거구요, 그리고 그것은 그래도 농민들의 살덩어리, 그들의 피눈물,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그들의 소원인거죠.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소원인 거구요. 호세아서의 해석이 리얼하게 새로워졌으니, 오늘 감방 생활도 또 하나 커다란 축복이 되었군요. 감사 감사.”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202쪽.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1) 제사장적 전통과 예언자적 전통

 로마의 세네카는 일찍이 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했다. “종교는 범인들에게는 진실로 보이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보이며 권력자들에겐 이용의 대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종교의 위험성이 숨어 있다. 종교는 크게 두 개의 기능이 있다. 제사장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분명한 차이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예언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 혹은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찬양과 기도를 하느님께 올리고 개인적인 위로와 축복을 비는 제사장적 전통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약자 보호 우선에 따른 사회 정의 실현을 외치면서 국가 권력과 박제화 된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은 히브리인들의 역사에서 두드러진다. 주위 대부분의 종교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그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옹호하는 국가종교의 형태로 나아갔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노예들이 국가 종교의 틀은 물론 왕권마저 거부하고 계급 없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워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가치 실현 이것이 예언자들이 지향했던 하느님 나라이며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가나안의 축복의 실체인 것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축복 또한 탈도시화에서 이루어지는 유목평등공동체의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복음서 또한 이 점에서 매우 분명하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생전 모습을 띠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에 광야의 예언자로 등장한다. 엘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부유했던 시절인 아합 왕 시대에 국가권력에 저항한 예언자이다. 야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합 가문의 통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로 예언자들을 대표한다. 세례요한 또한 로마제국의 허수아비였던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 옥에 갇히고 끝내 참수형을 당한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국가 권력 비판이라는 예언 활동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나온 시기를 ‘요한이 잡힌 뒤에’(1장 15절)라고 말한다. 곧 마가는 예수를 부당한 국가권력을 비판했던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누가복음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는데,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장 18,19절)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은혜의 해’이다. 이는 레위기에서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에 오는 50년째의 희년(Jubulee)을 말한다. 희년은 처음 분배받았던 땅을 되찾는 해이며 모든 빚을 탕감 받고 노예 또한 해방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는 해이다. 곧 희년은 국가권력에 기초한 불평등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革命)의 해인 것이다. 프랑스의 성서학자 트로크메는 예수는 당시 명목상의 희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였음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문 목사님이 온 힘을 기울여 참여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가는 오늘의 신앙운동이었으며,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예수의 갈릴리 하느님나라 운동의 연장이었다.

2) 고난 받는 예언자 예레미야와 문익환

 40대 초반 목사님이 월간지 기독교사상에 2년에 걸쳐 기고한 글의 제목을 보면 예레미야라는 한 예언자에 완전히 ‘필’(feel)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도 이명박 정권 초기 하늘뜻펴기(설교)를 통해 문서 예언자 전체를 연속하여 다루고 이를 출간한 바 있지만, 예레미야 한 사람에게 2년 동안 몰입했다는 것은 너무나 특이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누구인가?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세워나가는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사람이다. 곧 아버지 문재린 목사님의 뒤를 잇는 문익환 자신의 운명적인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며,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권력자들에 의해 옥고를 치루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하는 예언자이다. 문 목사님은 이미 18년 후에 일어날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본 것은 아니었을까? 

 예레미야가 유대 종교지도자를 향해 피를 토하는 회개를 촉구하였듯이 58년 전 1960년 4.19혁명 직후 <기독교사상>에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독교도 아편이 된다>란 글을 남겼다.
   ‘기독교도 아편이다’라는 단언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 첫 증상은 죄에 대한 불감증이다. 둘째는 움직여야 할 몸이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종교성(religiosity)의 그늘 아래서 인간성(humanity)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종교의 타성(inertia)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참사람-하느님께 지음 받은 대로의 참사람-으로 회복해 주시려고 참사람-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기독교가 이것을 무시하고 자체의 권한과 자리만을 생각하는 한 종파(cult)로 전락해 버리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아편이라는 낙인을 찍혀도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생에서 ‘온통(tatal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우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교회’ ‘옹근 사람’이어야 생명을 건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분열되어 버리고 말았다. 교계의 분열은 한국 교회를 마비 상태에 떨어뜨리고 말지 않았는가?  
   셋째로 지적해야 할 원인은 ‘은총’의 남용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밖에는 구함을 받을 길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생의 태도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부정을 덮는 아름다운 보자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심판도 받기 전에 자신이 다 용서하고 깨끗이 치워버리고는 다른 부정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능글맞은 철면피로 보이는 까닭이 실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율법주의, 타계주의 같은 것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4월 혁명의 무서운 충격으로도 한국 교회가 그 중독증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무서운 충격이 주어지고야 말 것이다.

   지금 남한 교회의 현실이 어떠한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이 급성장한 교회요 세계 최대 50대 교회 중 절반이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한 기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라고 조롱당한지 오래이며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린 지 오래이다. 20년 전 천만 명이 넘는다던 개신교 숫자는 현재 육백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이백만 명 가까운 신도들이 교회 주변을 맴돌며 약속의 땅을 바라는 ‘가나안신자’들이다. 현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고령 신자들이 사라지는 15-20년 후에는 현재의 절반인 3백만 명으로 준다 해도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문 목사님이 60년대에 행했던 예언자적인 외침이 그간 8,90년대 교회의 성장하는 굉음에 눌려있었지만, 남한 개신교의 쇠퇴 내지는 몰락이 분명한 지금 우리는 그의 예언의 소리가 적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민중신학이란 항목은 앞서 언급한 해방의 신학 그리고 예언자신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따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문 목사님의 말년의 역작인 『히브리 민중사』가 지닌 신학적인 독창성과 세계 신학계에서 남미의 해방신학과 더불어 민중신학이 갖고 있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 책이 절판이 되었다가 올해 문 목사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간되었다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다. 
 흔히 제1성서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이해한다. 성서공부를 진행하다 보면 곧잘 신도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놔두고 왜 다른 민족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이 문익환의 『히브리 민중사』이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가 하나의 민족사가 아니라 세계 모든 약소민족이 강대국에게, 또는 한 나라의 밑바닥 민중이 지배권력으로부터 겪는 억압 가운데, 야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해방의 역사를 이끌어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사와 한국 민족사를 민족 수난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었듯이 목사님 또한 유대민족과 한국민족을 ‘히브리’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고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 전체를 민중 해방의 이야기로 풀어낸 역사 파노라마이자 야훼 하느님의 인간 역사 개입의 본질을 드러낼뿐더러 목사님 자신의 고난에 찬 삶을 노래한 가슴풀이이다. 

 우선 히브리라는 단어는 고대 서남아시아에서는 핏줄로 이루어진 하나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닌 밑바닥 계층을 일컫는 사회용어였음에 대해 여러 문헌을 통해 그 사례를 밝히고 있다.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히브리 또한 그 쓰임새를 보면 특정한 사회계층을 일컫는 것을 볼 수 있다.(창 43:32, 고후 11:22) 히브리와 같은 어근을 가진 ‘하비루’라는 용어는 고대 중동의 기원전 18세기 기록에서는 용병 혹은 강도떼로 나온다. 또 15세기 기록에서는 ‘하비루들의 신들’로 등장함으로 국제조약 체결의 증인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애굽의 기록에서는 왕의 전리품으로 혹은 해방 혁명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하비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달리 지칭되면서, 전쟁포로, 노예, 용병, 강도떼, 해방군, 소작농, 떠돌이, 더부살이 등의 다양한 계층으로 말해진다. 목사님은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결국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이자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약자들을 포함하는 총칭”이라고 규정한다.(30쪽 이하) 

 그리하여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하비루 부대와 가나안 내부에서 반애굽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해방군으로서의 하비루가 합세한 해방전쟁으로 이해한다. 목사님은 여기서 ‘난 발바닥으로’라는 유명한 시를 읊으며 하비루의 저항정신을 자신의 현존으로 끌어온다.(42-43쪽)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십계명에 대한 해석은 더욱 놀랍다.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건 모세의 등허리에 패인 열 줄 핏자국입니다. 성난 시나이 산 가슴 터지며 내뿜는 불꽃입니다. 아니, 그건 불꽃처럼 뒹구는 하비루 노예들의 살점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억울하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죄 없이 맞아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살점들의 아우성이 바로 십계명이란 말입니다. 이 아우성이, 이 요구가 바로 야훼 하느님이 모세를 시켜 세우려는 새 공동체의 정신이요 뼈대가 아니겠습니까?”(109쪽)

 이어 유일신 신앙 또한 해방과 자유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신앙 지키기 운동이었지, 이웃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교리가 아니었음을 설파한다. “어렵게 터득한 유일신 신앙이 지배자의 종교가 되면서 배타적인 독선에 빠져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온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도 잘못 이해하면 침략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독재를 뒷받침해 주는 이념이 되는 것입니다.”(114쪽)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열매에 대한 해석 또한 (제국)권력자의 흑백논리의 시각 안에서 보는 점은 정확하다. 곧 (권력자의) 선악 판단이 독선이 되어 (민중) 생명이 이에 짓눌려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인의 아벨 형제 살해 해석에도 같은 흑백논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선뜩 동의하기 어렵다.(144쪽) 오히려 이는 농부로 상징되는 집단정착문명 곧 땅을 사유화하고 부를 확대해나가는 도시의 제국성(가인)이 목자로 상징되는 곧 땅을 공유하고 부의 확대를 스스로 절제해야 하는 ‘유목생명공동체(아벨) 파괴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북방 이스라엘은 62년 동안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고 세 왕이 비명으로 죽어가는군요. 어쩌면 분단 44년에 걸친 이 남쪽의 역사를 보는 것만 같군요. 거기 비해서 남쪽 유다는 세 왕이 세습으로 대를 이어 가거든요. 다윗 왕조가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평양 정권이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온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는 하비루 두목 다윗의 전통이 예루살렘이라는 뚜렷한 상징과 난공불락의 도성과 함께 지속될 수 있었던 반면 북쪽 이스라엘에는 중앙집권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문익환, 『히브리민중사』 2018 152쪽)

 남북왕국의 분열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읽는다.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세웠다고 해서 역사의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김일성주석을 다윗으로, 주체사상을 다윗의 전통으로 보는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다. 역으로 상황주석을 해 본다면 남한이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한 이유가 일제 식민지지배 청산에 대한 불충분과 외세의 간섭으로 본다면 이는 북 왕국의 정치적 혼란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간접 설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무당들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며 머리에 떠오르는 건 웬일일까요? 무당들이란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천대를 받아 가면서도 그걸 탓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짊어지고 그걸 풀어 주는 걸 천칙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든요. (상게서 166쪽)

 목사는 한(恨)의 사제(司祭)여야 한다는 말은 서남동의 말이긴 하지만, 누구의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감옥에서 민중의 한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예언자들의 중요한 점을 신학에서 말하는 말(logos)이 아닌 몸짓, 몸부림으로 보았다.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저항의지의 표현으로 본 것이다. “꿈틀거리는 격정이 먼저이다. 거기서 말이 터져 나오면 그 말이야말로 역사를 변혁시키고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인 거죠.”(169쪽) 필자는 이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이란 다름 아닌 목사님께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29명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었다고 본다. 모든 이를 전율에 떨게 하는 그 외침은 하느님의 몸부림이요 땅의 뜨거운 저항이었다.

 아모스 2장 9-12절에 나오는 짧은 구절을 통해 나실인의 해방전승과 예언자들의 해방전승을 비교하고 이를 이사야를 다루면서 유목민들의 해방전승을 언급하면서 이를 장소에 연계하여 언급하는 부분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문 목사님만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혜안을 느낀다. 곧 자원하여 몸을 하느님께 바친 나실인들을 출애굽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사막을 떠도는 반농경사회의 해방운동가로, 예언자들은 주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해방운동가로, 유목민들은 광야의 초원지대에서의 해방운동가로 보는 관점이다.(190-191쪽) 이사야가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사자와 어린 양과 늑대와 염소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는 새 역사 창조의 장소를 사막과 농경지대의 경계선상에 있는 광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광야 유목민이 사막의 나실인 그리고 농경지대의 예언자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못내 아쉽다. 

 구원에 있어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개혁교리는 오늘날 남한교회의 핵심 가르침인데, 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교회의 폐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믿음만의 교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이는 본래 예언자 하박국에 기인하고 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 합2:4) -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공동) 여기서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큰 오해가 없는데, 개역으로 읽으면 이 믿음에 대한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여기서 문익환은 오늘의 교회가 하박국 예언자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 본래 뜻은 ‘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사람들, 힘이 정의라고 믿고 설치는 사람들을 무서워 말라. 힘의 횡포-그건 옳지 않은 거야. 이런 뜻이죠. 하박국은 악에 항거해서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았던 겁니다.’ 곧 하박국이 말하고자 했던 의인 신앙이란 ‘눈 딱 감고 믿는’ 현실 도피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와짝 뜨고 믿는’ 현실 역사 참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69쪽)

 『히브리 민중사』는 예언자들의 해방 전통이야 말로 성서의 일관된 중심 사상임을 밝히고 있다. 곧 ‘서구백인남성 신학자’들이 지난 이천 년동안 애써 외면해온 성서 안의 핵심인 발바닥 민중의 역사를 찾아낸 것이다. 문익환을 통일지상주의자 혹은 그래서 민족지상주의로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하비루 곧 민중해방사상의 실현을 꿈꾸는데 있는 것이다.
 문 목사님의 뒤를 이어 가는 후학들이 담당해야 할 두 가지 신학 작업을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도에서 그친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이후 바벨론 포로기의 에스겔과 제2, 3이사야 그리고 포로 귀환 이후의 에스라와 느헤미야까지 다룸으로 히브리 민중사를 완성하는 일이다. 강연자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바벨론 포로기의 문서들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추구한 바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의 폭넓은 소개와 발전을 위해 『히브리 민중사』를 영어로 번역 출판하는 일이다. 사실 민중신학은 80년대 초 여러 학자들의 짧은 논문들을 모아 영문으로 번역된 책 한권 외에 특별한 책이 없어 매우 아쉬웠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국내외 소장 조직신학자들의 논문을 엮은 『Minjung Theology Today』라는 책이 곧 출판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신학 제1세대 학자들의 역작들이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는 것이다. 제2성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책이 올해 안에 영문으로 출판될 예정에 있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를 번역 출판할 때에 비로서 민중신학의 전체가 소개되는 것이다.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통일의 시급성

 남한은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제1의 자살률국가이다. 국민소득은 계속 올라가고 국가안보는 신무기로 계속 튼튼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전쟁 아닌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반생명 반평화 죽음의 기운이 한반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세계 자살율 2위 국가가 같은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사이프러스임을 알 때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99마리 양보다 우리 밖의 한 마리의 양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교회의 복음 사역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 38년 전 서울대 신입생 환영예배에서 행한 문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들어보자. 

대한민국의 국시가 민주주의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가 아닌가요. 요새 저같이 민족통일을 말하는 사람을 관변측에서는 뉴레프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런 건 일소에 붙일 겁니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때려잡는 칼은 한 번도 우리의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어요. 저는 국토 분단을 고정시키고 민족 분열을 심화시키는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부할 거예요. 이것이 이 땅에서 신앙을 사는 길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휴전선으로 갈려 있는 민족의 통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휴전선의 철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 있는 한, 휴전선의 철폐만으로는 민족이 통일되지 않아요. 민족 통일의 실체는 휴전선의 철폐가 아니라, 우리의 국토인 이 한반도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유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민족의 주체적인 자기주장의 함성 앞에 휴전선은 여리고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문익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민사, 1984. 136쪽.)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들 대부분이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휴전선의 철폐를 넘어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이 통일의 실체라고 하는 목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목사님이 지적하는 일차적 지배자는 미국이지만, 지금은 여기에 동승하고 있는 시장자본주의하의 투자 자본가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빈민들은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되고 있다. 또 목사님의 발언 가운데 우리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부분은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라는 단서이다. 북조선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우선의 NL주의와 민중우선의 PD주의를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합일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학이란 단지 통일의 필연성을 주창하는 신학이 아니라, 남과 북의 이념과 체제가 하나로 통일이 되는 신학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남쪽의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사상과 북쪽의 사회주의에 기초한 평등사상이 만나는 신학이어야 한다. 물론 남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이고, 다수는 성공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의 평등 또한 상당부분 제한적이다. 지역적으로는 평양 그리고 계급적으로는 10%에 해당하는 당원과 관료들에게 부가 편중되어 있다. 97년 처음 평양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것은 자본에 물들기 시작하는 관료들이었다. 지금은 훨씬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 모순에도 불구하고 강연자는 남쪽의 신자본주의와 북쪽의 신사회주의가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새로운 경제체제야말로 이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경제모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이 말한 대로 ‘세계사의 하수구’인 한반도의 수난의 역사는 세계를 구원하게 될 것인데, 강연자는 이 세계 구원은 바로 남과 북이 만나 창출해 내는 새로운 정치사회경제체제라고 본다.

오늘 문 목사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어떤 신학적 작업을 진행할 것인가?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 차례 시도된 바 있지만, 그건 민중신학과 주체사상의 만남이라고 본다. 여기서 필자는 주체사상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80년대 브리태니카사전은 <World Religion> 이라는 항목에서 북의 주체사상을 세계 8위의 ‘주체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필자는 97년 이후 2013년까지 3,4년 주기로 다섯 차례 평양을 다녀온 바 있는데, 곳곳에 붙어 있는 여러 구호들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 이념을 엿보게 된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첫 방문에서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등등의 구호를 보면서 이는 기독교의 부활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도 김정은 위원장이 핵개발 중단 내지 핵폐기를 말하면서 그 정당성의 근거로 김주석의 유훈을 언급하는 것은 북조선이 유사종교 사회체제를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김일성 개인숭배사상’으로 치부하고 마는데, 이는 북에서 기독교를 향해 ‘주 예수 개인숭배사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가 되고 만다. 교회가 이천 년 전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듯이 북 또한 수십 년 전의 김일성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재해석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도 문자 근본주의자가 있듯이 북에도 그런 근본주의자들이 있을 것이다. 남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단들이 있듯이 북에도 그런 이단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극단의 예를 갖고 전체를 속단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며, 탈북자들이 하는 얘기를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북에서 비판하는 기독교는 미국의 제국성을 대변하는 국가종교로서의 비판이 우선이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닌 것이다. 

   2)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

 이제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통일신학의 과제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만남이다. 문제는 북은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으나 남은 ‘빨갱이 덫’에 걸려 주체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순 우리말인 ‘동무’ 대신 한자어 ‘친구’를 사용해야 하고 ‘인민(人民)’이란 좋은 단어 대신에 ‘민중(民衆)’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주체(主體)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비주체성에 휘둘리며 살아온 것이다. 남에서 가장 선호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건 민(民)의 주체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는 곧 주체(主體)의 실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는 오히려 30년 전 한때 해외에서 진행된 적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도 비판할 게 많듯이 주체사상도 비판할 게 많다. 그러나 일단 저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진정한 통일을 이루겠는가? 화해와 평화를 말하면서 내 것만 옳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진정한 통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80년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로 “주체사상과 기독교”라는 과목을 가르친 바 있는 홍동근 목사도 주체사상의 매력을 정치혁명의 맑스주의를 넘은 도덕철학과 종교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주체종교 내지는 주체신학으로 읽는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주의처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생소하지 않다. 해방 직후 맑스주의자들이 무신론과 유물사관을 가지고 기독교를 관념론이라고 조소하고 인민의 아편으로 치부하였을 때 (김일성주석은) 이념적 반대나 적대의식을 표시하지 않았다. 반대로 토착적인 따뜻함과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하여 좋다. 맑스주의도 차이점을 거두고 공통점만을 찾으며 기독교와 사촌사이까지 갈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주체사상과 기독교』 선우학원 홍동근 공저 북미주체사상연구회 1990. 78쪽) (가로 안은 필자의 첨가) 

 이 배경에는 김일성 자신이 어렸을 때, 외가 특히 어머니 강반석 집사의 영향 아래 교회를 다녔으며 아버지 김형직 또한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김형직 사후, 그의 절친인 손정도 목사 가정에서 양아들로 같이 자라났던 이가 김일성이다. 그리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량욱 목사는 초기 수상을 지낸 바도 있다. 적어도 김일성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함께 갈 수 있는 사상이었다. 서구기독교가 세계패권 제국주의와 결별하고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조선의 기독교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김주석은 여러 차례 남에서 온 목사님들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접점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주체사상의 기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상게서 78쪽)

 (1) 사람 중심의 사상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3) 공산주의사회의 열망 (4) 혁명가적 풍모. 1. 주체사상의 사람 중심의 사상은 기독교의 하느님 중심 사상과는 반대개념으로 들리지만, 불트만이 지적했듯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관점에서 얼마든지 접점은 가능하다.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또한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 관점에서 보면 예수 운동의 실체이기도 했다. 3. 공산주의를 논할 때에 원론적 의미에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체를 물질이 아닌 사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는 초기교회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원형이지 않는가? 4. 혁명가적 풍모는 헤롯왕을 여우로 비웃고 유대사회 지배의 근간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뒤집어엎고 종교장사꾼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장악하는 모습이야 말로 과연 혁명가적 풍모가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를 만약 문 목사님의 <히브리민중사>의 민중신학과 인민의 삶을 극대화하고자 하여 사회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는 북조선의 주체신학으로 그 폭을 더욱 좁힌다면 둘 사이의 간극은 훨씬 더 좁아질 것이다. 필자는 목사님께서 지금 살아계신다면 분명 이 작업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통일시대를 바라보면서 한신신학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 연구소”(가칭)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한다. 10년 전 홍근수 목사께서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라는 과목을 개설했을 때, 등록학생 미달로 취소된 바 있지만, 이번의 한신신학의 광맥을 찾아가는 연속강좌가 하나의 행사로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김재준 목사님과 송창근 목사님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의 유지를 이어 반드시 이런 연구소가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 목사님은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 나가면서

 출애굽의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야웨흐 아세르 야웨흐’라고 답하신다.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되는 이 말을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백성들 사이에 거하는 신의 현존성’이고 둘째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받지 않는 곧 이름이 없는 신의 자율성’이다. 늦봄 문익환은 이러한 하느님의 본질적 형상을 가장 잘 보여준 분으로 하느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언자였다. 미국의 퀘이커 봉사회는 1992년 문익환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천거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의 평생의 반려자 박용길 장로를 언급한다. 그는 남편의 가는 ‘늦봄’ 길을 함께 가겠다는 뜻에서 ‘봄길’이란 아호를 짓고 명동구국선언에서부터 뜻을 같이 하며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었다. 남편을 대신하여 1995년 김일성주석의 1주기에 방북을 하였고 이로 인해 구속을 당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한반도에 펼쳐 보인 자랑스러운 부부였다.
  《문익환평전》은 다음의 문장으로 문 목사님의 삶을 정리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수치심 없이 저 아득한 21세기의 나날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분단ㆍ전쟁ㆍ국가폭력 같은 두려운 단어들이 아닌 따뜻한 언어로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보여준 그의 업적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다른 눈으로, 더 잘, 더 자유롭게, 더 정직하게 자기들의 시대를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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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Kil Sang Yoon
FB에서 다 읽기가 힘이 드니 원고를 이메일로 첨부해서 보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이미 이것을 복사해서 문서로 보관을 하였어요. 그러나 저자의 원고를 받는 것도 좋겠어요.
 · Reply · 2 d ·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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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Hun Jung Cho
Kil Sang Yoon 제 책 '갈라진 땅에 선 예수'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 Reply · 1 d
Young Lee
감사합니다. 목사님. 논문 마무리하는 저에겐, 가장 큰 응원과 격려입니다.
 · Reply · 4 d

Author
Hun Jung Cho
잘 끝내시기 바랍니다
 · Reply · 4 d
Kyong Yong Song
큰 공부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Reply · 4 d
우증청
솰롬 ~
감사합니다. 노고 많으셨습니다
 · Reply · 5 d
오명동
감사 ~ 정확하게 잘 소개해 주시네요
 · Reply · 1 w
Hyunsil Han
애쓰셨습니다.👏👏👏
어제밤..
여기 저기 펌했어요.
고맙… See more
 · Reply · 1 w
Nam Hong Cho
문목사님의 신학과 삶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끝까지 읽었네요. 새롭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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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ungsun Yoo
감사합니다. 귀한글 업고갑니다.(꾸벅)
 · Reply · 6 d
Youngkook Kim
한번 읽어서는 이해의 근처로 가기에 어려울 것 같아 카피해서 파일로 저장해 두었습니다.
이후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 Reply · 6 d
조정필
목사님
정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Reply · 3 d
오미령
조헌정목사님께서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올려주신 보물같은 글을 공유 드려봅니다.
그리고 소소한 제 느낌도 올려봅니다.… See more
 · Reply · 5 d
조창환
감사합니다 공유할랍니다
 · Reply · 6 d
오미령
새삼스런하루..(주옥같은제목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 입니다(뭘까나? 이 커지는 마음은..)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가능성과 참자유인이 될 용기를 주는 힘이 서린..)… See more

 · Reply · 5 d
신대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
 · Reply · 5 d
Young Ok Park
귀한 글 시간내어 찬찬히 읽으려 제 전화기의 ‘메모’로 퍼갑니다. 고맙습니다.

2021/08/14

김진호 시민의 등장, 신의 추방 1105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 [신들의 사회12]시민의 등장, 신의 추방


[신들의 사회12]시민의 등장, 신의 추방
신들의 사회 2011. 5. 19. 01:08 posted by 한때 올빼미
이 글은 [한겨레21] 861호(2011.05.09)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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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등장, 신의 추방

2005년 통계청이 실시한 인구센서스에서 한국개신교는 1995년과 2005년 사이에 -1.6% 성장했다. 같은 기간에 최대 종단인 불교는 3.9% 증가했고, 가톨릭은 무려 74.4%나 증가했다. 한국전쟁 직후를 제외하면 한국 개신교로선 처음 겪는 마이너스 성장의 경험이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오직 성장을 위해 자원을 총동원하는, 성장 중심적 신앙제도가 여전했음에도, 그 효과는 참혹하게 드러났다. 이제 성장주의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해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개신교의 전반적인 추세는 성찰보다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 글은 최근 한국교회의 성장의 지체 및 감소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이유를 시대의 거시적 변화, 그 구조적 변동의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종교인구, 통계와 해석

먼저 종교인구 통계에 관한 것부터 이야기해보자. 이전 글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1965년부터 1990년 사이에 5년 단위로 개신교회의 교인 증가율이 20~40%나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교인 증가율은 2~3%대로 급락했고, 급기야는 1995년 대비 2005년의 개신교 신자수는 14만여 명이 줄어든 860여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비록 마이너스 성장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마이너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초고속 성장의 기억이 몸에 체현된 한국교회에게는 그 충격파가 컸다. 교회는, 그 지도자들은 대책을 침착하게 강구하기보다 허둥대며 실수를 연발한다. 혹여 이에 대한 비판이 있기라도 하면, 과민반응하며 더욱 당혹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또한 개신교 신자의 총수가 생각보다 훨씬 적었다는 점이 감소를 더욱 심각하게 느끼게 했을 수 있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1천만 신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실상은 860만 명에 불과했다.


각 교단별 통계를 합하면 개신교 신자수는 1천만 명을 훨씬 넘는다. 교단 통계는 교회별 교적부를 합산한 것인데, 교적부 합산치와 인구센서스 결과가 그렇게 다른 것은 아마도, 교회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이들로 인한 중복 교적자가 많은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간 수평이동 교인이 많은 것은 교회의 구심력이 약한 탓이겠다. 그것은 신앙에 관한 욕구와 교회가 주는 만족감 사이의 격차감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글 후반부에서 나는 이 격차감을 1990년대라는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와 관련시켜 이야기할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인구센서스에서 자기가 개신교도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불교 사찰과 개신교 교회, 그리고 천주교 성당 등을 두루 다니는 이른바 ‘멀티신자’가 부쩍 많아졌다. 그들은 대체로 특정 종단의 신앙제도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신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을 일컬어 개신교 열혈신자들은 ‘사이비 신자’라고 비아냥대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존성 강한 멀티신자층이 사회 속에 폭넓게 분포하게 된 것이다. 한데 인구센서스 결과는, 필경 그런 이들 중 다수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종교들 사이를 넘나드는 멀티신자층이 폭넓어졌다는 것은, 다른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불교나 가톨릭에 비해, 폐쇄적인 종교관을 주장해온 개신교에게 있어서는 위기의 징후이다. 그리고 멀티신자들 가운데 다수가 가톨릭신자로서 자신을 표상하고 있다는 점은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뒤에서 나는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와 교회의 위기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할 것이다.

감소에 대한 대응들

교인수 감소를 가장 심각하게 체감한 곳은 신학교였다.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성장감각에 맞추어 각 교단별로 목표치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신학생수를 증가시켰는데, 졸업한 신학생들의 사역지가 협소해진 것이다. 이것은 경영학의 교회적 버전인 ‘교회성장학’의 수요를 급증시켰고, 보다 인문적이고 비평적인 현대신학에 대한 심각한 무관심을 초래했다. 하여 신학생들은 현대사회를 보는 안목이 보다 협소해졌고, 참여와 책임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인식에 더욱 무감각해졌다.

교인수 감소를 격렬하게 체감한 또 다른 장소는 교회, 특히 중소형교회였다. 실제 감소율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교인들의 교회제도에 대한 충성의 이완현상은 훨씬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것은 저조한 교회 출석률로 나타났고, 헌금의 감소로 이어졌다. 악화된 재정은 우선적으로 지출을 줄이는 선택을 강제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영역은 사회적 부조나 각종 사회단체들에 대한 후원금 같은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교인 참석률을 높이고 새신자를 유인하는 성장 프로그램에만 몰두하게 된다. 사회 속에 교회는 ‘고립된 성’이 되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인수 감소에 민감하게 반응한 영역은 각 교단의 총회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같은 교회간연합체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이들 단체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형교회들의 영향력이 주로 여기에서 관철되었다는 점이다.


앞의 글들에서 본 것처럼 이제까지 한국 개신교의 교회정치에서 대형교회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들 교회들은 자교회의 성장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반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진보 담론의 시장으로 인해, 개별 교회 현장보다 좀 더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종교엘리트가 총회본부에서 국내외업무를 주도하곤 했고, 진보적 신학자들의 활동 또한 국내외를 오가며 대단히 활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자체가 점점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3세계 교회들이 WCC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갖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들 지도자들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것처럼, 각 나라에서 매우 보수적인 신학과 이념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WCC를 매개로 하는 진보신학의 활성화는 옛말이 되었다.

한편 1991년 세계적인 종교신학자인 변선환 학장을 보직해임하고 교수직을 면직시켰으며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교적까지 빼앗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감신대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대형교회가 교단과 교단신학교의 권력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제 대개의 교단에서 교단정치는 대형교회의 손아귀에 거의 장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NCCK에 대항하여 1989년 한기총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처음부터 대형교회들이 주도하였고, 기부한 금액의 크기에 비례해서 지분을 행사하는 조직운영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외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NCCK도 대형교회의 기부금이 없이는 거의 운영이 마비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개입하여 교회성장학 관련 과목들의 개설을 강화했고, 진보적 신학을 다루는 연구자들의 활동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단청책에서 더욱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성장주의적인 방식을 강화시켰고, 진보적인 신학 문서들을 사문서(死私文書)화했다. 그리고 교회간연합체의 활동에서도 반공, 친미, 권위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이념성향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그렇게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위축된 교세를 숫자만이 아니라 권력으로도 만회하고자 했다.

군부 권위주의 시대에 교회들이 밀실에서 수행했던 정교간 밀월관계 대신에 기독교 정당을 만들기도 했고, 보수대연합의 일원으로 정치제도 속의 일원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정권창출을 위한 정치과정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시민’과 ‘개인’의 시대, ‘청산된 신’

이제 우리는 개신교 위기의 사회적 배후를 묻고자 한다. 교회를 버린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문제의식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교회를 삭제하였는가? 그러한 문제의식이 자라고 있는 사회적 구조변동의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교회의 성장이 급격히 둔화되기 시작한 때가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거대한 사회변동의 계기가 일어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그 추동 주체로서 ‘시민의 등장’과 얽혀 있다. ‘시민’이란, 군부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국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국가가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내면화한 수동적 주체가 국민이라면, 국가와 거래하고 교섭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민주적 제도를 도모하는 주역이 바로 시민이다.

하지만 시민이 낡은 제도의 벽을 뚫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여 민주화의 시대는 권위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한 시대다.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의 시대감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던 교회는 바로 이 청산의 주요 표적이었다.

앞의 글들에서 본 것처럼 한국교회는 미국적 신앙을 동일시의 대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상상을 미국적 근대화에 대한 상상과 중첩시켰다. 이런 신앙이 한국인의 모던체험을 대표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의 시대, 반민주에 대한 청산의 시대 한국교회는, 새로운 모던 공간의 상징이 아니라, 퇴색된 모던의 장이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교회는 구태스럽고 시대착오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미국의 수호신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미국을 가슴에서 삭제한 것처럼, 미국의 신 또한 삭제하였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호감과 동경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소비사회로의 급격한 이행기에 부상한 존재는 ‘개인’이다. 자본은 숨겨진 개인의 취향을 개발하라고 속삭이며, 그 취향을 위해 시간을 개성 있게 활용하라고 충동질한다. 사적 욕망들이 분출하였고, 그러한 욕망들이 한바탕 놀이를 벌이는 공간인 대중문화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교회에게 대중문화는 하나의 공포였다. 하여 일부 개신교도들은 그 속에서 작동하는 악마의 코드를 읽어내고자 해석을 시도한다. 그들에게 이른바 ‘뉴에이지’는 대중문화 속에 서식하고 그 현상을 이끌어가는 일종의 유사종교현상으로 해석되었다. 이에 종교배타성의 신앙 기조가 작동한다.

이렇게 교회는 이렇게 소비사회화의 빠른 변화 속에 몸을 내맡기지도 해석하지도 못하였다. 교회의 시간은 너무 느렸고, 교회의 ‘성도’는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을 너무나 빼닮았다.

하여 시민들과 개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교회에 투사했던 기대를 철회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는 낡은 근대의 잔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1990년대 초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신이 추방되기 시작했다.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이 퇴화한 신학과 교회

교인들의 증가가 멈춘 시대, 아니 감소하고 있는 시대, 위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뿌리 깊은 구조적 사회변동의 산물이다. 지난 시대 몸에 익은 방식으로 위기는 해소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몸에 익은’ 관행들이 문제다.


이제 교회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한데 ‘새 옷’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또 다시 시대에 편승하는 것, 대세를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대세를 비평하는 ‘다른 신앙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인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교회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참여와 책임의 가능성을 묻는 신학적 모색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데, 앞에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도, 참여와 책임에 관한 문제인식도 현저히 퇴화하였다. 나아가 대부분의 신학과 교회는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출처: https://owal.tistory.com/124?category=337370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2021/07/21

현대 한국의 안티 종교운동 강돈구



J. Daesoon Acad. Sci. 2017; 29:241-278

pISSN: 1598-3439

DOI: https://doi.org/10.25050/jdaos.2017.29.0.241
Article
현대 한국의 안티 종교운동
강돈구
1 , * , †
Anti-religious Movements in Contemporary Korea
Donku Kang 1 , * ,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

Received: Oct 12, 2017 ; Accepted: Oct 30, 2017

Published Online: Dec 31, 2017
초록


이 논문은 한국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의 대대적인 표출 현상(안티 종교운동)을 정리하고 유형화한 뒤 그 의미를 분석한 글이다. 이를 위해 먼저 현대의 범세계적인 종교변동부터 살폈다. 세계종교는 지구촌 의식 출현에 영향을 받아왔다. 그 결과 그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한 채 여러 종교의 공통 기반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려들거나, 전통을 재창조하려하거나 혹은 현대에 맞게 변용시키거나, 혁신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거나, 민족주의와 결탁하거나 하는 여러 유형으로 중첩되어 나타나곤 한다.

세계종교에서 살필 수 있는 이러한 변동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관찰되는가? 대체로 현 시대의 한국 종교상황은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나 혁신 요구, 소수종교에 대한 공격, 학계와 언론의 종교 개혁 요구, 종교무용론 전파, 유튜브 등 인터넷과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종교 비판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교 비판은 안티 종교운동으로 읽혀진다. 종교 외적으로는 서구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종교무용론이나 과학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종교 비판 이론이 서점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종교 내적으로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자신의 내부를 반성하고 새로운 초종교적 영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과거에도 물론 종교 일반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그 내용과 맥락에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운동은 분명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개신교가 주요 대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변동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classify broadscale anti-religious movements in Korea based on critical public sentiment and analyze the meanings of these movements. To carry out the research, global religious changes that have occurred in modern times were closely looked into first. The world religions have had an influence on the world’s religious awareness. As a result, they intend to acquire universality on their own individual grounds while keeping consistency with the past. This phenomenon used to appear to retain the identity, recreate tradition, transform itself to fit in the present times, pursue innovation, or even become overshadowed by other forms of thought such as when religions have collided with nationalism.

How does Korean society perceive the changes that emerged in world religions? In general, the circumstances that Korea faces in this era tend to manifest themselves via the Internet, multimedia, and Youtube wherein they sound off on religion and this includes criticism of Christianity, demand for reformation, attack on minor religions, pro-reform academic circles and media, and the propagation of anti-theism. Criticism of religion is interpreted as an anti-religious movement. The secularism and anti- theism brought up by some Western scholars and critical theories of religion from scientific or historical perspectives are being spread through bookstores. Christianity is prone to reflecting on itself and trying to emphasizing a meta- religious spirituality. This in short, characterizes anti-religious movements in Korea.

Indeed, criticism against particular religions has also emerged in the past. However, anti-religious movements that have recently come into existence in Korea are in some regards unprecedented when compared to that of the past in terms of their patterns and context. Especially, the active anti-Christianity movement in general is definitely a new phenomenon. This research mainly focused on Christianity, but on-going anti-religious movements will be a major topic for further research that aims to understand the religious changes unfolding in Korea.


Keywords: 종교변동; 종교비판; 종교 대안운동; 종교 개혁운동; 무종교; 안티종교; 무신론; 진화론; 종교권력
Keywords: Religious change; religious criticism; secular-humanist movements; the Reformation; irreligiousity; anti-theism; atheism; the theory of evolution; religious authority/power

Ⅰ. 머리말

본 논문의 목적은 미디어와 책자 등을 통해서 현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의 대대적인 표출 현상을 살피고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웃 종교들 사이의 상호 비판적인 견해의 표출, 특정 종교의 자기 개혁적인 견해의 표출은 이전 시기에는 그다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교 유입 때 신라에서 있었던 전통 종교와의 갈등,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 전 시기에 있었던 불교에 대한 유교 측의 비판, 조선 후기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유교 측의 비판, 20세기 초 유교 전반에 대한 비판, 1920년대 사회주의 측의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다. 그리고 개신교 유입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보이지 않는 상호 견제와 비판이 있었고, 이후에도 개신교의 전통종교와 소위 이단에 대한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 분위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양과 질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수준에 있다. 20~30년 전에만 해도 전혀 있을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를 ‘개독교’로 지칭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그리고 ‘가나안 성도’1)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개신교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전반적인 개혁 의지 또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유럽과 영미권에서도 이미 살필 수 있다.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보면 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이 유럽과 영미권에서도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 전반에 대한 비판 서적들은 대체로 영어권에서 발간된 책들의 번역본인 점을 감안해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종교 비판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경우도 함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일단 국내의 경우만을 살피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자 한다. 차후에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우리나라의 경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티 종교운동’이라고 하면 도킨스(R. Dawkins) 등의 무신론 운동이나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개신교2) 운동을 주로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들 이외에 종교 일반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특정 종교에 의한 자기 개혁적이고 대안적인 종교 내적 비판, 그리고 특정 종교가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이웃 종교에 대한 비판 운동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안티 종교운동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범세계적인 종교의 변동 추세를 개괄적으로 살필 것이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제를 염두에 두고 보다 좁혀 우리나라의 종교계의 현실을 개괄적으로 살필 것이고, 본 논문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Ⅳ장에서는 안티 종교운동의 내용을 유형별로 정리해 볼 것이다.

Ⅱ. 종교변동의 세계적인 추세3)

이제는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그 어느 나라의 종교도 세계적인 변화 추이와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종교의 변동에 대한 인식은 세계종교의 변동을 아울러 고려할 때 보다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종교의 변동 가운데 특히 우리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종교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상 변화는 항상 있어 왔으며 21세기 초반부인 현재도 예외는 아니다. 단지 요즈음의 변화는 대체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전방위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변화의 양상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그 이전 시기와 달리 생태, 핵전쟁, 인구, 식량, 빈부의 차 등 그야말로 전지구적인 위협에 전면적으로 대처하여 그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의식이 증대하였다. 따라서 현재는 지구상의 그 어느 구석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구적인 시각에서 그 발생 원인을 찾고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지구촌 의식의 출현은 세계종교의 변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지구촌 의식의 출현과 함께 이제는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려는 경향도 동시에 증대하고 있다. 최근까지는 서구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종교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느 종교도 우위적이고, 강압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다. 서구도 이제는 여러 지역 가운데 하나로, 그리고 기독교도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점차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에는 세계종교(world religions)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대교, 힌두교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이제는 중국종교와 일본종교가 포함되어 적어도 종교와 관련해 볼 때 동아시아가 보다 주목을 끄는 관심 지역이 되었다.4)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가 이제는 서구권이 아니라 제3세계에서 더 영향력이 커가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를 특징짓는 또 다른 개념으로 우리는 여전히 근대성(modernity)과 탈근대성(postmodernity)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근대성과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논쟁을 소개하거나 또는 그러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은 의도는 없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종교와 근대성’, 그리고 ‘종교와 탈근대성’이라는 주제 아래 요즈음의 세계종교의 변동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종교와 근대성의 관계를 친화성(embrace), 비친화성(ambivalence), 배타성(exclusion) 가운데 어느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세계종교의 변동에 대한 인식은 각기 다르다.5) 그리고 현대종교의 변동을 탈근대성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현대종교에 대한 이해도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새로운 종교운동의 출현을 탈근대성의 증후로 설명하든지, 또는 특정종교의 입장에서 탈근대성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스스로의 종교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 등으로 전개될 수 있다. 비록 최근에 근대성과 탈근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세계종교의 변동 추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비생산적이라는 지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6) 이러한 담론이 세계종교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현재 기독교는 거의 모든 나라에, 불교와 힌두교는 80여 개 국에, 유대교는 110여 개 국에, 그리고 이슬람교는 160여 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다.7)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또는 다른 종교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보다 쉽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다른 종교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간 상호 이해의 증진이나 교류, 그리고 생태, 인권, 평화 등을 위한 공동 모임이나 기도회의 개최 등을 현대 세계 종교상황의 특징으로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사상적인 면에서도 과거에는 특정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제는 여러 종교의 공통 기반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스미스(W. C. Smith)8), 힉(J. Hick)9), 슈온(F. Schuon)10), 길희성11)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이유로 인해 현재 세계종교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한 채 다양한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종교의 이러한 변화 양상은 아래와 같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주변 상황의 변화를 완전히 외면하고 자기 종교전통의 테두리 안에 끝까지 머무르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종교이다. 서구 기독교와 이슬람교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주의 운동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종교(cult, sect 등)와 우리나라 개신교의 대부분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둘째, 전통을 창조적으로 복원하려는 양상을 보이는 종교이다. 대체로 이들 종교도 역시 보수적이고 우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전통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별개의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현대 힌두교운동과 개혁적 유대교운동, 그리고 불교에서 성지를 복원한다든지, 또는 수행 방법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셋째, 주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사상이나 의례, 조직 등을 적절히 변용시키는 종교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종교는 물론 다른 종교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천주교가 미사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생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교리에서 생태 관련 부분에 주목하는 것 등을 이 유형에 포함시킬 수 있다.

넷째, 현재의 세계적인 상황이 매우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비록 과거의 전통과 단절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좀 더 혁신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이러한 혁신적인 변혁을 추구하기에는 성격상 어려움이 많은 종교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예수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로 신관을 혁신시키려는 움직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실패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유교의 종교화 운동12)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다섯째,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해서 기존의 종교전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이다. 아프리카의 수 천 개의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 일본의 신종교, 기독교 컬트와 섹트, 그리고 서구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종교가 이 부류에 속한다. 새로운 종교는 역사상 항상 있어 왔지만 근래 세계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종교의 발생 빈도는 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여섯째, 지구촌 의식의 증대로 종교간 교류가 활성화되는 한편으로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종교의 토착화, 지역화, 지방화 현상을 모두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그 지역에서 종교와 민족주의의 결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과 여러 소수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중국 등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세계종교의 변동 유형은 엄격히 구별된다기보다는 중첩적이다. 따라서 한 종교전통 내에서도 여러 유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유형들을 중심으로 세계종교는 과거 전통과의 연속선 위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종교도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유형을 중심으로 그 변동의 추이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현대 한국종교계의 또 다른 현실

일반적으로 최근 한국종교계의 현실로는 신도 수의 변천을 중심으로 개신교와 불교가 쇠퇴하는 반면 천주교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거나, 또는 개신교 교회의 대형화 추세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밖에 현대 한국종교계의 또 다른 현실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몇몇 현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도 이광수 등에 의해 개신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으로 예를 들어서 한국 교회가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고, 목사들의 교육 수준이 낮으며,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의 내용들이 많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기는 하다.13)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특정종교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 개신교의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의해 일제하의 친일 문제, 그리고 이승만 정권 때의 정교유착 등이 제기되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지적은 학문의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현재 안티 개신교 사이트와 서적 등을 통해서 제기되고 있는 바이블과 교리, 조직 등 개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개신교 내부의 개혁적이고 대안적인 방안이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지금까지 개신교는 성장 위주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한완상, 오강남, 길희성, 김용옥을 위시해서, 이제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을 중심으로 개신교 전통 교리의 재해석뿐만 아니라 소위 대형교회의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실험적인 교회 운동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소위 소수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다른 나라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개신교와 유사성이 있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개신교 중심의 집요한 공격은 몇몇 잡지와 목사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물론 과거와 달리 공격을 받는 소수 종교의 입장에서 현행법에 의거하여 방어를 하고 있어 개신교 중심의 공격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개신교와 유사성이 있는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적인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소수종교의 탈퇴자들에 의한 해당 종교에 대한 비판도 역시 해당 종교의 현행법에 의거한 방어와 해당 종교의 적극적인 대처로 인해 그 양상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종교 관련 학자와 언론인들이 한국종교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14) 과거에는 적어도 종교학자들은 종교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예를 들어서 ‘종교 권력’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종교 전반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학자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종교학자들도 이제는 종교에 대한 애정을 지니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종교들이 그야말로 종교다워지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기는 하나 특히 앞으로 점차 제도종교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는 우혜란의 주장은 이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만 하다.15)

다섯째, 종교무용론을 주장하는 영미권 서적들이 국내에 다량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구에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창조론를 반대하고 진화론을 옹호하는 도킨스, 해리스, 히친스 등이 종교의 비합리성과 해악성을 논하는 전투적 무신론 관련 책들을 출간하였다. 이들의 책이 최근에 국내에 다량으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의 책들이 독자들로부터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근래에 이들 책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니체, 러셀 등 개신교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 서적들도 여전히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영화나 유튜브가 많이 만들어지고 유포되고 있으며, 안티 종교 사이트가 성행하고 있다. 영화는 외국16)뿐만 아니라 국내17)에서도 만들어지고 있고, 유튜브는 주로 미국 쪽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대체로 각 종교에서는 자신들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홈페이지는 주로 각 종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에 비해 안티 종교 사이트에서는 각 종교의 비공식적이고, 비판적인 자료들이 소개되고 있다. 과거에는 각 종교에 대한 지식이 주로 공식적인 홈페이지나 또는 각 종교의 성직자나 관련 학자들이 쓴 책자 등을 통해 유통되었으나, 요즈음은 안티 종교 사이트를 통해 각 종교의 부정적인 모습도 여과 없이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종교에 대한 어찌 보면 조잡하고 왜곡된 지식이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있다는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 본 논문과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세계 종교변동의 상황과 아울러 한국 종교 상황의 또 다른 현실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Ⅳ. 안티 종교운동의 유형별 고찰

1. 종교 일반 비판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서구에서 제기되었고 따라서 주로 신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 또는 ‘종교무용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학자가 쓴 무신론을 소개하는 글이 있기는 하나18),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무용론 관련 서적들은 거의 외국 서적의 번역본들이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 서적들을 중심으로 종교 일반의 비판 내용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합리적 비판

종교와 관련해서 이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학자로 우선 니체와 러셀을 열거할 수 있다. 니체의 『안티크리스트』는 원래 1895년에 출간된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4년(나경인 옮김, 이너북) 그리고 2016년(두행숙 옮김, 2016)에 각각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니체가 직접 작성한 ‘그리스도교 탄압법’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이 책이 여러 차례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책은 니체 자신의 종교 편력, 그리고 니체가 책을 쓸 당시 유럽의 종교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아무리 저명한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종교 관련 주장이 보편적인 주장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셀은 1956년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글을 포함해서 15개의 종교 관련 글들을 묶은 책을 발간하였다.19) 그는 이 책에서 종교가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주었고,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해롭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종교로 인한 폐해는 없어질 것이고, 무엇보다도 열린 가슴과 열린 정신을 가지도록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20) 러셀의 이러한 견해는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의 종교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책으로는 해리스21)와 히친스22)의 책을 열거할 수 있다. 해리스는 기성종교가 비이성적이고 편협한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였고, 히친스 역시 종교의 독선과 불관용의 측면을 비판하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선택한 문화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종교보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합리주의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2) 진화론적 비판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비판의 전형적인 예는 도킨스의 책23)에서 찾을 수 있다. 도킨스는 유전자에 토대를 둔 생명의 진화를 탐구하는 동물행동학,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그리고 발생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The God Delusion』이라는 이 책의 영어 제목에서 살필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망상은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정신장애의 일종인데 신에 대한 믿음이 바로 망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종교의 해악과 무용성을 설파하고, 종교보다 이성과 과학을 신뢰하고 신을 버려야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고, 종교의 대안으로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현재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Richard Dawkins Foundation)’24)을 설립, 무신론자들을 규합하여 무신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도킨스의 또 다른 책들로는 『눈 먼 시계공』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조상 이야기 –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이한음 옮김, 까치, 2005), 『지상 최대의 쇼』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09),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ㆍ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2010),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 종교ㆍ신화ㆍ미신에 속지 말라! 현실을 직시하라!』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12),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ㆍ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바다출판사, 2012), 『에덴의 강』 I (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4),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이한음 옮김, 바다출판사, 2015), 『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최재천ㆍ김산하 옮김, 바다출판사, 2015), 『확장된 표현형 - 이기적 유전자, 그 다음 이야기』 (홍영남ㆍ장대익ㆍ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16),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 생명의 역사, 그 모든 의문에 답하다』 (김정은 옮김, 옥당, 2016),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2』 (김명남 옮김, 김영사, 2016) 등이 있다. 한 사람의 책이 이렇게 꾸준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도킨스의 주장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이 우리나라에 꽤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웨이드의 『종교유전자』25)는 영어 제목 『The Faith Instinct: How Religion Evolved and Why it Endures』(2009)이 암시하고 있듯이, 종교는 인간의 진화적 성공에 필수적이었고, 종교행위는 진화적으로 형성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보이어는 『종교, 설명하기』26)에서 종교는 정상적인 인지능력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부산물이고 신은 결국 인간이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노렌자얀은 보이어와 유사하게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7)에서 종교는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탄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역사적 비판

종교 일반에 대한 역사적 비판은 주로 기독교의 예수를 대상으로 제기되고 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 관련 이야기가 당시에 주변 지역에 존재했던 여러 신화적 이야기들이 유대식으로 각색된 것에 불과하며, 예수는 따라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8) 이들에 의하면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 기독교 초기에는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대세였고, 바울도 원래는 영지주의자였으며, 따라서 바이블의 꽤 많은 분량이 영지주의 입장에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서 문자주의 기독교가 역사적 거짓말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토대는 조만간 반드시 전복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9) 오강남이 예수 관련 이야기를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 신화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오강남의 견해는 이들의 주장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30)

루벤슈타인은 이와 달리 오히려 나사렛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었는데, 4세기의 가톨릭교회가 예수를 신과 가까운 위대한 인간이라는 아리우스의 입장 대신에 예수를 신과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을 선택하면서 비로소 예수가 신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31)

이 밖에 예수는 로마군인 판테라의 사생아라거나,32) 또는 예수는 13세부터 29세까지 인도에서 활동했다거나,33) 그리고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거나,34) 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반쯤 죽은 상태에서 끌어내려졌다고 주장하는 책35) 등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예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4) 비판에 대한 반박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박은 주로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진행되고 있다. 2007년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국내에 소개되자 이 책은 국내에 반기독교적 정서를 부추기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자 몇몇 개신교 관련 학자들이 종교무용론자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개신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종교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이 환상적이라고 주장하는 맥그라스 부부의 『도킨스의 망상』36)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소개되었고 이어서 국내 학자들에 의해서도 도킨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균진은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이 러셀의 과학적 실증주의와 유사하며 별로 새로운 점이 없다고 지적하고, 도킨스의 책이 사려 깊은 학자의 깊이 있는 전문 서적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의 대중 강연 원고들을 묶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도킨스가 신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종교의 모든 긍정적인 기능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문제점만 지적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37)

박일준은 도킨스의 종교 비판이 인격신과 기복적인 믿음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이고, 도킨스가 자연주의적이고 범신론적인 신앙을 옹호하고 있어서 오히려 도킨스의 주장 또한 자못 종교적이라고 말하고 있다.38) 김경재는 니체, 프로이드, 맑스, 도킨스와 윌슨의 종교무용론 및 폐기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고, 이어서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개신교가 권위적 가부장문화에 침윤된 전통종교 모습에서 탈바꿈하여, 자비와 긍휼심을 핵으로 하는 모성적 종교의 영성에로 전화되어야 하며, 권력지향적 국가종교 이데올로기로부터 스스로 해방하여,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해방시키는 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39)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명』40)이 2010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서구에서 도킨스가 인터넷을 통해 무신론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면, 암스트롱은 역시 인터넷을 통해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종교를 통해 인류의 화합을 도모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41) 그녀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신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특정의 신 개념에 대한 부정이었다고 하고, 알카에다와 같은 근본주의자들과 도킨스와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 모두를 비판하면서, 이성과 신앙이 모두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현재 도킨스 등의 종교 비판에 대해 일견 무기력하게 대응해 왔던 국내의 신학자들이 암스트롱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다시 소위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42), 암스트롱의 또 다른 책들43)이 꾸준히 소개되어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적인 정보를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암스트롱의 견해를 수용한 김진호는 비교적 최근에 도킨스 등이 비판한 종교가 유일신에 한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 비판 대상도 ‘잡설’에 불과한 창조론이나 창조과학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내 놓았다.44)

2. 종교의 내적 비판

위에서 살펴 본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이 대체로 종교무용론과 종교폐기론에 가깝다면 여기에서 살피려는 종교의 내적 비판은 종교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여, 종교가 앞으로 진면목을 갖추게 하자는 점에서, 그리고 대체로 종교 내부의 신자들에 의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비판은 종교무용론이나 종교폐기론과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개신교 내부의 비판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개신교에 대한 개신교 내부의 비판으로 우선 개신교 사학자들의 비판을 살필 수 있다. 김승태는 일찍이 일제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친일 협력 사실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일본 개신교가 1967년에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실을 고백하고 반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전혀 반성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45) 근래에 제기되고 있는 개신교 내부의 비판은 특히 개신교의 친정권적 행태에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해방 공간에서 개신교는 반탁과 단정 수립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거나,46) 서북 출신 개신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기회로 남한에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 과정에 주목하여 현재 개신교가 보수 반공주의의 주요 담당세력이라는 점을 지적하거나,47) 또는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등 특히 친개신교적 정권과의 야합을 지적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숱한 병리 현상의 배후에 한국 개신교가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48)

개신교 사학자들의 비판 이외의 개신교 내부의 비판은 다시 크게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신학적 반성과 조직을 비판하는 목회적 반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신학적 반성은 대체로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고, 신격화된 예수보다는 역사적 예수를 선호하고, 종교라는 제도보다는 소위 초종교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길희성은 현재 강화도에서 ‘길희성과 함께 하는 공부와 명상의 집’이라는 심도학사를 운영하고 있다.49) 그의 주장 가운데 우선적으로 관심을 끄는 주장은 대속(代贖)이 아니라 대고(代苦)라는 주장이다. 내가 죄인이고, 정작 나 같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나 대신에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았다는 대고의 개념으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저 높은 곳에 두고 우러러 섬기는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예수의 신앙, 예수의 삶을 따르는 개신교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묻지마 신앙’을 넘어 진정성 있는 신앙을 위해 고민하는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0)

오강남은 2009년에 도마복음 관련 책을 발간하였다.51) 그리고 그의 『예수는 없다』는 2001년에 발간된 뒤 40쇄를 거쳐 2017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독자층이 나름대로 두터운 편이다52) 오강남의 주장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길희성과 비슷하게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내 안에 신의 나라가 있고, 내 안의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용옥이 구약을 폐기하고 원죄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마복음」의 역사적 예수를 역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용옥도 길희성이나 오강남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53) 도(道)의 신학을 주창하는 김흡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며 인간이며, 동시에 우주적 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54) 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개신교가 앞으로 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폴 니터의 주장을 상기시키기도 한다.55) 길희성, 오강남, 김용옥, 김흡영은 모두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고, 개신교와 동양종교의 회통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과거 유영모나 함석헌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측면이 있다.56)

이들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의 구원론에 대해 ‘아르뱅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광은의 주장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57)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아우르는 신광은의 신조어이다. 신광은에 의하면 개신교 각 교파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주권) - 극단적/급진적 칼뱅주의 – 온건 칼뱅주의 – 수정 칼뱅주의 – 웨슬리식 아르미니우스주의 – 자유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 – 펠라기우스주의 – 과정신학/열린 유신론 - (인간의 자유)>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58) 우리나라 개신교의 경우 예를 들어서 장로교는 칼뱅주의, 감리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그리고 침례교는 양쪽 모두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개신교는 ‘아르뱅주의’에 의해 왜곡된 구원론을 신자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다. 왜곡된 구원론은 무슨 짓을 해도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이고, 나의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고 안전하며,59) 신자 자신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에 대한 철통같은 보장은 결국 윤리적 추진력을 소멸시키고, 나아가서 살인 면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60) 신광은에 의하면 아르뱅주의는 주창자가 없는 신학으로,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공동으로 참여해서 만들어 낸 ‘유사신학’에 불과하다.61) 비록 신광은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대안신학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침례교에 몸담고 있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주로 신학적 성찰에 의한 반성으로 주로 개신교의 구원론과 관련이 있다면, 제도적, 목회적 측면에서의 반성을 담고 있는 책들은 주로 개신교의 교회론과 관련이 있다. 교회론을 반성하는 책들은 그동안 의의로 많이 출판되었다.62) 류상태는 천주교인이 비판하는 개신교인의 모습이라는 전제 아래, “하나같이 종교적 교리로 중무장한 아집 덩어리들, 언제든지 싸움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성서를 외우고 공부하며 임전의 그날을 위해 교리의 칼날을 벼르고 있는 상종 못할 싸움꾼들, 평소에는 착하고 모범적인 친구이자 친지들인데, 종교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괴물처럼 돌변하는 무시무시한 싸움꾼들”63)로 개신교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류상태의 이러한 묘사에서 현재 개신교인들의 전형적인 부정적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사실 교회론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개신교의 모습을 반성하는 내용들은 과거 1917년에 이광수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류상태가 언급하고 있는 천주교인에 눈에 비친 개신교인의 이러한 모습이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태여 여기에 덧붙여서 말한다면 대형교회를 비판하면서 150여 명의 신자로 구성되는 규모가 비교적 작은 교회가 적절하다거나,64) 아니면 반메가처치 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65), 또는 제도에 얽매이기보다는 개신교가 소위 영성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 정도가 우리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주장들이다.66)

개신교 내부의 위와 같은 성찰적 반성에 대해 여전히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몇몇 사람들이 재반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대체로 이들은 개신교 내부의 이러한 성찰적 반성들이 주로 인본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소위 ‘잡탕 영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겉모양만 개신교인 ‘짝퉁 개신교’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67)

이상의 내용은 주로 개신교 내부의 발언이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개별 종단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성찰적 진단도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오만과 편견, 배타주의, 타자의 악마화, 권위주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종교권력 등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68) 종교연구는 지금까지 종교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우선적으로 지향해 왔기 때문에 사실 개별 종단의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일을 삼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들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이들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종교들이 그야말로 종교다워지도록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야한다는 종교연구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은 아니다.

3. 이웃 종교 비판

여기에서는 주로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이웃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에는 대순진리회나 증산도 등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이제 좀 열기가 식은 듯하다. 해당 종단에서 적절한 대응을 한 탓도 있고, 또한 해당 종단이 이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는 시선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탈자들에 의한 이전 소속 종교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천지, JMS, 단월드 등에 대한 개신교 측의 비판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으며, 이들 이외에도 근래에 중국에서 들어온 전능신교, 동방번개, 파룬궁에 대한 비판도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다.69) 개신교 측에서 보면 소위 이단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에서 비롯한 새로운 종교들은 끊임없이 개신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것이다. 물론 종교사가 증명해 주듯이 새롭게 등장한 종교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하면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최근에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전피연)’를 중심으로 ‘유사종교 피해방지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전피연은 이 특별법의 대상으로 문선명(통일교), 박태선(천부교), 최태민(영세계), 조희성(영생교), 유병언(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 이만희(신천지), 안상홍(하나님의교회), 정명석(기독교복음선교회, JMS)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전피연 관계자들도 이 특별법의 제정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개신교 측에서 이러한 특별법의 제정을 위해서 현 시점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얼마 전부터 등장한 안티 개신교인들에 의한 개신교 비판은 미디어에서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이러한 집중적인 비판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 스탠딩 코미디언 조지 칼린(G. Carlin)이 기독교를 풍자하는 영상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조지 칼린의 이러한 기독교 풍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종교적 상황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이런 내용의 풍자가 얼마 전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숨겨진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국내 제작 동영상을 인터넷 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70)

개신교를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여러 개가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편이다.71) 비판의 내용은 앞의 4장에서 정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72) 대표적인 개신교 비판 모임인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은 흥미롭게도 ‘바이블 19금 지정 촉구를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정도이다.73) 개신교를 비판하는 서적도 근래에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 저자들은 친개신교인이거나 탈개신교인, 그리고 가명을 쓰기도 하는데, 몇몇 책은 제목만 보더라도 개신교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주된 내용일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게 할 정도이다.74)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의 저자 쥐뿔개뿔은 소위 ‘반기독교선언’에서 개신교와 천주교 등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를 비판한다고 하면서,75) 동시에 대순진리회나 증산도를 기독교의 아류로 아울러 비판하고 있다.76) 그러면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야웨가 아니라 우리 한국 전래의 하느님이라든가,77) 과거에 우리 한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그 하느님은 어떤 외적 형상도 없이 우리 한민족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난 만 년 간 존재해 왔다거나,78) 단군 시조의 역사는 밝혀지는 중이요, 일본 식민사관을 벗어난 학파들이 지금 자료를 모으고 연구중이라거나,79) 개신교의 단군상 철거 운동을 비판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이진구가 안티 개신교 진영의 비판 논리가 ‘문화적 민족주의’와 ‘세속적 휴머니즘’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 점을 아울러 감안하면 필자의 이러한 추측이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80)

물론 안티 개신교 운동에 대해 개신교 측의 대응 방안이 꾸준히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81) 그러나 이전 같으면 적극적이고 전반적으로 그 대응 방식이 제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안티 개신교에 대응할 ‘인터넷 선교사’를 양성하자는 등 현재로서는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이제열이 그간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불교, 기독교를 논하다』82)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유일신, 창조, 섭리, 원죄, 악마, 내세, 천국, 지옥, 율법, 성서, 성령, 삼위일체, 구원, 회개, 부활, 재림 등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들을 불교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고찰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오르려는 산 자체가 다르다고 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분석하여 불교의 위대성을 알리고자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83) 『법보신문』은 불교 신자들을 위한 신문이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법보신문』에 게재되었을 때는 그다지 문제가 생길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책의 발간이 일회적일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글이 책으로 묶여서 불교 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일반 사람들까지 볼 수 있게 된 상황은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을 살펴보았다. 과거에도 물론 종교 일반과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그 내용과 맥락에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적극적이고 전반적인 비판 운동은 분명 새로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개신교가 주요 대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티 종교운동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변동을 살필 수 있는 주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추측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개신교는 급격히 변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인터넷 등 미디어에 대한 손쉬운 접근으로 인해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개신교의 부정적인 측면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으면서, 이제부터는 개신교가 누려왔던 무소불위의 특권이 서서히 해체되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좋든 싫든 앞으로 일반인들과 이웃 종교들의 개신교에 대한 여러 인식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아울러 개신교의 이웃 종교들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도 상당 부분 줄어들고, 따라서 소수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도 서서히 바뀔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 연구를 업으로 삼는 필자로서는 안티 종교운동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물론 어느 한 편을 지지할 수 있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편치 않은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민하면서, 끝으로 안티 종교운동 관련해서 필자의 몇몇 견해를 제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종교관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 비판이 이루어지는 곳과 때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니체와 러셀의 종교 비판은 니체와 러셀이 살던 곳과 때의 종교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그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 비판자들은 대체로 자기 종교, 또는 자기 교파 선호적 입장을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울러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판의 내용만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우선 상대방의 신앙 이력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종교에 대한 비판이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 신앙을 밝히면서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비판의 내용이 적절한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비판자의 신앙을 먼저 전제하고 대화를 진행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둘째, 종교 비판의 대상이 어느 종교인지를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종교 일반 전체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개신교나 천주교, 불교 등 특정 종교가 대상인 경우가 많다. 천주교는 하나의 종단으로 활동하지만, 개신교와 불교는 여러 교파나 종파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가 비판의 대상인 경우에도 구체적으로 장로교인지 감리교인지, 그리고 나아가서 장로교나 감리교에서도 어느 교단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불교의 경우에도 불교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조계종이나 태고종, 천태종 등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어느 종단이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이 초, 중등, 대학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국가의 관련 기관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지식은 개별 종교단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종교 인구를 전체 인구의 대략 50% 정도라고 했을 때 이들은 많게는 1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국가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종교편향 방지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에는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해 종교에 대한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 일반이나 이웃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소위 이단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이 다양해진 반면 비판의 수준은 대체로 피상적이고,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비판은 견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 비판은 조롱, 또는 공격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비판이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권 교육에서 그러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종교 관련 법규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가칭 ‘종교법인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된 적이 있었으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종단들의 반대로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재정비된 종교 관련 법규를 통해 종교 비판이 종교 갈등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제도적으로 종교 전문 법조인과 공무원을 만들 필요가 있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술기관도 신설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5월에 ‘문화헌장’을 공표하였다. 문화헌장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내용은 “모든 시민은 … 종교 등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 “사회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삶의 토대가 될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늘 확인하고 존중해야 한다.”, “문화다양성은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과 자주성의 토대이고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다원성의 원리이며 평화와 공존의 기틀이다 … 시민은 나라 안팎의 다양한 문화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세계의 문화 다양성과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문화적, 종교적 소수자와 소수집단은 자기 의사에 반하는 문화 정체성을 강요받지 않는다.” 등이다.

문화헌장 가운데 ‘문화’를 ‘종교’로 바꾸어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우리나라의 종교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종교학계가 주축이 되고, 관련 기관이나 유관 단체, 그리고 종교계의 의견을 수렴해서 가칭 ‘종교헌장’을 제정, 공포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Footnotes


1. 교회에 ‘안 나가는’ 개신교인을 지칭하는 용어.


2.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를 기독교로 지칭하기도 하나, 종교학에서는 여전히 기독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이 부분은 강돈구, 「세계종교의 변동과 한국종교의 미래」, 『계간 사상』 44 (2000), pp.100-104의 내용을 보완한 것임.


4. 비록 영국에서 발간된 책들이기는 하지만 Jean Holm이 편집해서 출간하고 있는 주제별 종교연구(themes in religious studies)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의 목차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시크교, 중국종교, 일본종교로 구분되어 있다. Jean Holm, ed., Attitudes to Nature (London: Pinter Publishers, 1994) 등 참조.


5. 종교와 근대성이 친화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T. Parsons와 R. Bellah를, 그리고 비친화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P. Berger를, 그리고 서로 배타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로는 B. Wilson을 열거할 수 있다.


6. James A. Beckford, “Religion, Modernity and Post-modernity” in Religion: Contemporary Issues, ed. by B. Wilson (London: Bellew Publishing, 1992), pp.11-23.


7. Pew Research Center, “Many Countries Favor Specific Religions, Officially or Unofficially”, Released Oct. 3, 2017 (www.pewresearch.org 참조).


8. W. C. Smith, Towards a World Theolog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1).


9. 존 힉,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이찬수 옮김 (서울: 창, 1991).


10. F. Schuon, The Transcendent Unity of Religions (London: The Theosophical Publishing House, 1993).


11. 길희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서울: 민음사, 1994).


12. 1990년대 중반에 공자를 교조화하고, 의식과 조직을 일반 종교와 같이 정비하려고 하였던 유교운동. Kang Don-ku, “Traditional Religions and Christianity in Korea”, Korea Journal 38-3 (1998), pp.110-114 참조.


13. 이광수, 「금일 조선 야소교의 결점」, 『청춘』 11, (1917).


14. 이찬수 외,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 – 종교학자가 비판적으로 진단한 한국종교의 현재와 미래』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4); 김근수 외, 『지금, 한국의 종교 – 가톨릭ㆍ개신교ㆍ불교,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다』 (서울: 메디치, 2016) 참조.


15. 우혜란, 「동시대 종교현상으로서 ‘유동적 종교(Fluid Religion)’에 대한 논의」, 『종교와 문화』 30 (2016); 우혜란, 「‘무종교 시대’는 오고 있는가」, 『불교평론』 19-2 (2017).


16. ‘스포트라이트’ 등.


17. ‘밀양’, ‘쿼바디스’ 등.


18. 강대석, 『무신론자를 위한 철학』 (서울: 중원문화, 2015).


19.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옮김 (서울: 사회평론, 2017).


20. 같은 책, pp.13-14.


21.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김원옥 옮김 (서울: 한언, 2005); http://www.samharris.org.


22.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김승옥 옮김 (서울: 알마, 2008); http:// www.buildupthatwall.com.


23.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이한음 옮김 (서울: 김영사, 2007).


24. http://richarddawkinsfoundation.org; https://richarddawkins.net.


25. 니콜라스 웨이드, 『종교유전자 – 진화심리학으로 본 종교의 기원과 진화』, 이용주 옮김 (서울: 아카넷, 2015).


26. 파스칼 보이어, 『종교, 설명하기 – 종교적 사유의 진화론적 기원』, 이창익 옮김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5).


27. 아라 노렌자얀,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홍지수 옮김 (서울: 김영사, 2016).


28. 티모시 프리크ㆍ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 기독교의 신은 이교도의 신인가』, 승영조 옮김 (서울: 미지북스, 2009).


29. 같은 책, p.386.


30. 오강남,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서울: 현암사, 2017).


31. 리차드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 로마제국 말기의 참된 기독교를 정의하기 위한 투쟁』, 한일철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32. 제임스 D. 타보르, 『예수 왕조』, 김병화 옮김 (서울: 현대문학, 2006).


33. 엘리자베스 C. 프로펫트, 『예수의 읽어버린 세월 – 예수는 13세부터 29세까지 어디에 있었나』, 황보석 역 (서울: 동국출판사, 1987).


34. 마이클 베이전트ㆍ리처드 레이ㆍ헨리 링컨, 『성혈과 성배』, 이정임 외 옮김 (서울: 자음과 모음, 2005).


35. 엘마 그루버 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 토리노 성의(聖衣)가 밝히는 부활론의 음모』, 홍은진 옮김 (서울: 아침이슬, 2001).


36. 알리스터 맥그라스ㆍ조애나 맥그라스, 『도킨스의 망상 –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 전성민 옮김 (서울: 살림, 2008).


37. 김균진,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그 타당성과 문제점 –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와 연관하여」, 『신학논단』 53 (2008), pp.97-137.


38. 박일준, 「도킨스의 종교 비판에 대한 종교철학적 고찰 –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74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pp.297-327.


39. 김경재,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 - 현대사회의 종교무용론에 대한 타당성과 부당성의 고찰」, 『종교문화학보』 5 (2008), pp.5-37.


40.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명』, 정준형 옮김 (서울: 웅진씽크빅, 2010).


41. https://charterforcompassion.org 참조.


42. 김웅래, 「무신론자들의 신」, 『누리와 말씀』 38 (2015), pp.191-224.


43. 『축의 시대』, 정영목 옮김 (서울: 교양인, 2010); 『신화의 역사』, 이다희 옮김 (서울: 문학동네, 2011);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권혁 옮김 (서울: 돋을새김, 2012); 『이슬람』, 장병옥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2012); 『성서 - 읽을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최초의 경전』, 배철현 옮김 (서울: 세종서적, 2015); 『바울 다시 읽기』, 정호영 옮김 (서울: 훗, 2017).


44. 김진호, 「종교 근본주의와 과학 근본주의를 비판한다 –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을 읽고」, 『제3시대』 19 (2011).


45.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서울: 다산글방, 1994).


46. 최태육,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 희생과 한국 기독교의 관계 연구」 (목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4).


47.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서울: 한울, 2015).


48. 강성호, 『한국 기독교 흑역사 – 열두 가지 주제로 보는 한국개신교 스캔들』 (서울: 짓다, 2016).


49. http://cafe.daum.net/simdohaksa.


50. 길희성,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51. 오강남, 『또 다른 예수 –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 풀이』 (서울: 예담, 2009).


52. 오강남,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서울: 현암사, 2017).


53. 김용옥, 『요한복음 강해』 (서울: 통나무, 2007); 김용옥,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1, 2』 (서울: 통나무, 2010).


54. 김흡영, 『도의 신학 Ⅱ』 (서울: 동연, 2012); 김흡영, 『가온찍기 – 다석 유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 (서울: 동연, 2013).


55. 폴 니터, 『종교신학입문』, 유정원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56. 강돈구, 『종교이론과 한국종교』 (서울: 박문사, 2011) 참조.


57. 신광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서울: 포이에마, 2014).


58. 같은 책, p.161.


59. 같은 책, p.253.


60. 같은 책, p.250.


61. 같은 책, p.222.


62. 추태화, 「기독교비평서에 나타난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신학과 실천』 27 (2011) 참조.


63. 류상태,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서울: 삼인, 2005), p.58.


64. 오규훈, 『153교회 – 공동체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상적인 교회』 (서울: 포이에마, 2013).


65. 신광은, 『메가처치를 넘어서』 (서울: 포이에마, 2015). 메가처치(Megachurch)는 ‘여러 유료 시설을 부대사업으로 운영하는 기업화된 초대형 교회’ 또는 대체로 ‘주간 예배 참가 신도 수가 2,000명이 넘는 교회’를 말한다.


66.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서울: 삼인, 2009); 양희송, 『다시 프로테스탄트』 (서울: 복있는 사람, 2012).


67. 프랭크 바이올라ㆍ조지 바나, 『이교에 물든 기독교』, 이남하 옮김 (서울: 대장간, 2011); 박태양, 『눈 먼 기독교 – 위기에 처한 현대 기독교 영성의 실체 보고서』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3); 김경집,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 인문학자의 눈으로 본 성서 그리고 한국 기독교』 (서울: 시공사, 2013).


68. 이찬수 외,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 – 종교학자가 비판적으로 진단한 한국종교의 현재와 미래』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4); 김근수 외, 『지금, 한국의 종교 – 가톨릭ㆍ개신교ㆍ불교, 위기의 시대를 진단하다』 (서울: 메디치, 2016); 강인철, 「한국사회와 종교권력 – 비교역사적 접근」, 『역사비평』 77 (2006).


69.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http://www.jesus114.org); 허호익, 『한국의 이단 기독교 – 주요 이단의 계보와 교리 비판』 (서울: 동연, 2016) 등 참조.


70. http://qqkorea.net/220813810410.


71. 김영동, 「반기독교운동의 도전과 선교」, 『장신논단』 38 (2010), pp.366-367.


72. 안티 개신교 사이트의 주요 비판 내용은 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쥐뿔개뿔,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 (서울: 기독교비평카페, 2003)를 참조할 수 있다.


73. http://www.antichrist.or.kr.


74. 이형래,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서울: 일월서각, 2003); 조엘 박,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 (서울: 박스북스, 2008); 블루칼라, 『신 벗어던지기』 (서울: 미담사, 2010);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서울: 글항아리, 2012).


75. 쥐뿔개뿔, 앞의 책, p.20.


76. 같은 책, p.99.


77. 같은 책, p.177.


78. 같은 책, p.197.


79. 같은 책, p.200.


80. 이진구, 「최근 한국사회의 안티기독교 운동과 기독교의 대응양상」, 『한국기독교와 역사』 38 (2013) 참조.


81. 안희환, 「인터넷을 점령한 안티기독교에 대한 대응 방안」, 『성결교회와 신학』 26 (2011); 허호익, 『안티 기독교 뒤집기』 (서울: 동연, 2015) 등.


82. 이제열, 『불교, 기독교를 논하다』 (서울: 모과나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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