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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0

KBS역사스페셜 –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 KB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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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스페셜 –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 KBS 20000506 방송

KBS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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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951 views  Premiered Dec 6, 2021
한국 불교사상 최고의 고승으로 알려져있는 원효의 행적을 살펴보고, 
오늘날 원효의 삶과 사상의 현실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KBS 역사스페셜 –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2000.5.6.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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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만에 알아보는 원효스님의 생애 [길위에 인문학 TV 고승전] 2021




0:04 / 0:15


90분만에 알아보는 원효스님의 생애 [길위에 인문학 TV 고승전]


Korea Buddhist Television Network Official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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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miered Aug 27, 2021 

신라 시대의 승려이며, 원효는 법명이다. 속성은 설(薛)이고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으로,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薛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출가 후 황룡사에서 수도를 하였다. 661년(문무왕 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는 신라로 다시 돌아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Transcript


















0:06개 벽과 같은 역동의 시대 수만 안동 놀이 쏟아져 들어오던 7세기 중반
0:14여러 갈래의 신 흥 무리고 사상으로 보였던 불과 같고 통일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0:20만들어낸다 그 중심에 원효대사가 있었다
0:28모든 형식과 격식을 거부하고 저자거리에서 민중과 함께 춤추고
0:33노래했던 시대의 9 쌓이다 [음악]
0:38원효 성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림없는 그 세계로 들어가 본다
0:47으 신라 불교의 중심지 경주 황룡사 터
0:55다 [음악] 일찍이 신라가 석불의 나라 였다는
1:00신라의 확신 신라 의 불국토 사상이 현실로 구현된
1:05신라 불교의 상징이고 성녀 기달 [음악]
1:13바로 이것이 신라의 서라벌 수도 한복판 입니다
1:18환경 4g 이런 반에도 거창 하지 않습니까 이곳이 바로 황룡사 에구 시민 중 검
1:27당 입니다 중금 당 이라고 하는 것은 1장 6점 즉 3m 80정도 대는
1:34주 불이 있고 좌우에 협 씹을 있으며 그 좌우에 제자 상 10뿌리 또 있습니다
1:42이 주춧돌로 볼 때 추 스토리 10개나 되는 것으로 보아서 아홉 칸 정도의 정각에
1:485 청 이상의 중청 댁 법당 이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1:56황룡사 를 배경으로 수많은 선 지식들이 등장했고 한국불교의 도도한 흐름을 이어갈 신라
2:03불교가 힘을 얻게 된다 으
2:09금당 에 모셔진 장 6 존 산과 협 시보리 모셨던 청와대는 자연석을 평평하게 다듬고
2:16불쌍히 발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홈을 팠다 고정 시켰던 한적도 엿볼 수 있다
2:25진흥왕 때 국 찰 황룡사 를 짓고 자장율사가 의 건의로 선덕여왕 배
2:319층 목탑이 세워졌다 [음악]
2:36ver 9층 목탑을 감상하고 너른 황룡사지 를 한눈에 조망할 쉬는
2:42역사문화 간이 있다 으
2:50저 옆에는 분황사 여기는 황룡사 옆에는 미탄 살아있어서
2:56절과 절 들이 별자리 처음 벌려서 있고 탑과 탑들이 길을 이처럼 날아간다고
3:02일찍이 이런 선사는 삼국유사 에서 사사 성장 타파 반해 이라고 했습니다
3:09이렇게 신라 수도한 버파 4 이렇게 큰 국가대 차리 자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3:15중심으로 신라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거 그리고 이것이 신라의 공력으로 발휘되었다 는거 이런 것들이
3:23신라의 상승이 자 황 용사의 자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3:29즉 9층 목탑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장대 합니다
3:36서랍을 한복판에 우뚝 소선 9층 목탑 은 신라의 자존심이고 구심점이 었다
3:43고려말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기 전까지 나라를 위한 개 꽂아 법회가 이어졌다
3:519층 목탑 에는 불심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후국의 주와 바로 니 담겨있다
3:57이웃나라에 시달림을 막기 위한 것으로 각 층은 일본과 중완 물로 말과 일과
4:03예맥 등 주변국을 상징했다 부처님의 의 실력을 의지한 신심에
4:09탑이 고 신라 통일의 8원 탑이다
4:15아 아마도 신라인 들에 그 신앙심이
4:20아마 이 거대한 목탑을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4:26수미산 을 방불케 하는 그런
4:31전각 입니다 이에 탑 앞에 서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생각에 절로
4:38합장을 하고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4:43기둥은 배흘림 기둥에 지붕과 공포가 있고 이렇게 구청을
4:50이렇게 난간을 따라서 올라갔다 고 생각해 보십시오
4:55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목탑이 못하나 쓰지 않고 이렇게 이곳에서
5:002시 다른가 그리고 신라인 들에 그 마음 한복판의 마치 숨이 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는거
5:09이것이 바로 고대 신라인들의 그 신앙심의 결정체 이고 믿음의 열망이 얼마나 노파는 가를 알
5:17수 있는 어떤 그런 상징이라고 느껴집니다 저마다 불심을 증 장 시키고 갖고는
5:24645 년에 완성된 9층 목탑 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며 장엄 되었다
5:315 신라의 구심점이 어떤 황룡사 9층 목탑 은
5:36서랍을 어디에서나 보였다 으 황용 사를 중심으로 처 첩 곳곳에
5:42수많은 도량이 생겨났고 사찰 마다 기라성 같은 선 지식들이 주 속했다
5:49불심으로 응집된 신라인의 기상 1 삼국 통일 위업을 이루어 냈다
5:55방구 꿀 교도 신라 불교 를 모태로 대승 발전해 왔고 그 흐름을 이어가고
6:00있다 으
6:08사찰은 역사 속의 사라져도 속초 유물론 남아있다
6:14회사 g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간지주 은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의 주석 처단한
6:19증 타다 정 법 안장의 설법 장소라는 상징이다 [음악]
6:271700 양 장구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불도 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6:34시대마다 단기 를 높이 내건 걸출한 선 지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6:40우리나라 불교 4에서 가장 최대의 큰 인물은 역시 월하 가 있을겁니다
6:47그런데 불교사 이슬 원유는 아웃사이더 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6:52과연 왜 그럴까요 아마도 원효의 괴팍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6:59걸림이 없는 원효 대사의 살림살이 가풍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7:04지금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와 분황사 사이에 있습니다 사실은 이 당간지주는 바로 불황 사에
7:11당간지주 입니다 분황사 에그 부랑 은 언어의 버퍼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유를
7:18강하게 부각시켜 줍니다 당시 아웃사이더로 평가받았던 원유가
7:24바로 이 황룡사 배 꽂아 부패 에서 금강 삼매의 경우 추석을 강론하게 써
7:31유아독존 를 개설한 u 와 동료 의사 작을 토 함으로써 시대의 아웃 사이드
7:36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주류로 들어가는 그런 전함 개의 있는 상징적
7:42사건이 바로 백호 작업 됩니다 그러면 원효가 어떻게 살았기에 g
7:47연지를 한번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으
7:55황룡사 에 이어 신라의 국 차로 세워진 불황 사는 당대 신라 인들에게 새벽이라 불려졌던
8:02원효대사의 성지 단 [음악] 지금은 뭐 전탑 일부만이 남아 분황사
8:08에 옛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음악]
8:14신라가 불도를 공인하고 100년 쯤 지난 뒤 한국불교 최고의 인물이 해 선과 같이
8:20나타난다 원효대사 담 이곳 분황사 는
8:27원효대사가 가산 오랜 시간 동안 머문 곳이라고 해서
8:33원효 대사의 버퍼를 불황이라고 불리게 된 그런 인연이 있는 사찰입니다
8:40젊은 씨드 레고 손 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원효 대사는 중 만 년 이후에 이곳 분황사 에서
8:47많은 졌을까 그러니까 100 여부 240 이어 권의 저술을 했습니다
8:53그저 술 도량이 바로 이것 분황사 입니다 그러면 원효대사가 이 사찰에서
9:00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에 대해서 한번 조망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14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 은 선덕여왕 때 불암사 창건과 함께
9:21건립되었다 [음악] 원효대사 도 저술 틈틈이 탑돌이 로
9:27경 행하며 사천왕 처럼 마음을 지키고 사유를 이어가 쓸지 모른다
9:32[음악] 원외 돼서 이곳에서 많은 저술을
9:38쓰였다 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9:44원효사 사항을 뒷받침 안 돼 성기 실론 에 대한 추석 썩 대성 기실 로쏘
9:50* 2기 대 성기 실론 2장 이같은 제품들입니다 오히려 대사는 여기에서
9:572기 실론 사상을 기반으로 사신의 1심에 철학을 구축하게 됩니다
10:04자외선 기술로는 우리의 한마음 1심 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경향성 즉 맑고 깨끗한 측면과
10:13때 묶고 오염된 측면을 중심으로 구성한
10:19어 조직적인 이론과 구체적인 실천을 담고 있는 그런 제어 순입니다
10:25원효 대사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이대성 키 실로 를 발견하고
10:31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심 일하게 고민하면서
10:36놀라운 추석 썰을 펼쳐 냈습니다 그러니 최 속수 를 통해서
10:42동아시아 불교의 크다란 영향을 미쳤고 바로 분 항의 라고 하는
10:47폭포가 성징 않은 것처럼 푼다 리카 란 연꽃 중에 연꽃이 이
10:54분 왕 연꽃 중에 연꽃이 니 황제 의미를 갖는 이곳에서 자신의 철학을
11:01완성하게 됩니다 원효대사 에 대한 경외감 운
11:07일본에서 더 열려라 다 수 님의 가장 오래된 진영 역시 일본의 소장 분이다
11:15[음악] 국내에는 없는 원효 대사의 탑이랑 논을 비롯해 히기 볼이 공개된 차리
11:24일본은 8세기 초 나라 시대에 이미 원유의 처소에 주목했다
11:32독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가의 어떤 원호 퇴사 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1:41[음악]
11:47이곳이 바로 원효대사 이에 피가 서인 곳입니다 하니비 대석
11:55이라고 하죠 입이 넌 걸으실 때 숙종 때
12:00a1000 대사의 추청 에 따라서 원효대사 에게 내려진 어 대성 화제의 곡 싸라고 하는 피가
12:09세워진 바로 이것입니다 b 씨는 역시
12:14일부만 남아 있고 b 개성 많이 있습니다 여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지난 18세기
12:21우리 검색하게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여기 와서 바로 이곳이 원효
12:29대사의 b 가서 이 있던 곳이다 는 글을 여기 지금 새겨 두고 있습니다
12:36원효대사 를 분 왕이라고 하는 그 이유도 바로 이 분황사 ap 때문
12:41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원효 대사의 집필 성 지었기 때문에
12:47원효대사 회포를 분 왕 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12:54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은 3부 유사 에 보면
12:59활용 변 얼 정 의 달 구하는 꿈 물입니다 나당 연합군에 관계가 풀어져서
13:06당 다가가 수십만 을 데리고 신라를 쳐들어 오려고 할때
13:12사천왕사 에 머물던 명량 대사가 이 위급함을
13:17이겨내기 위해서 바로 이것에는 물고기를 0 으로 만들어서
13:23박 나라의 침공을 막아 내려고 했던 그런 유서 깊은 우물이 기도합니다
13:292 설정 2 지금 원형의 가장 각각 가깝다 고 얘기하는 8각으로 이렇게 남아
13:35있습니다 현재 남 이렇게 막혀 있지만 당시 이 신라의 국 차리 어떤분 황사의
13:41대중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우물이 라는 위해서 아주 유서깊은
13:47그런 유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국 차를 위상을 드 날리던 분황사 는
13:53임진왜란 을 거치며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13:58으
14:05신라 경덕왕 때 의 무게가 30만원이 넘나 거대 의 약사여래 불이 조성되었다
14:11[음악] 그러나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불 도 화를 당하고
14:171600년대 대폭 축소 조성한 약사여래 구리 현재 보광전 을 지키고
14:22있다
14:29군 황사의 또 다른 전각의 주인이었던 원이 5 태사 원효 대사는 미 곳에서 새로운 전기를
14:37맞이한다 [음악]
14:42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이론 또 한번의 깨달음과 행보 낮고 천 4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14:48울림을 주는 대승 불교의 핵심 철학이다
14:55원유 되서는 이곳에서 문자 양과 석 연기가 가득한 달리
15:00말하면 아마 책의 뭐 켜니 가득하고 또 체계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서
15:08화엄경 10 회 향 품에 추석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14이 골방에서 물론 현재 정가 이 없습니다 많은 그 집필 실에서
15:2010 회 양품 을 추석 하다가 부설 끊고 뛰쳐나가서 중생 교회에 길을 드리운
15:28곳이 바로 이 사찰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민중과 만날 수 있는 그런 첫출발 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는
15:36것으로 상징되는 곳이죠 그런 의미에서 원효사 상에 기반 달리
15:42말하면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남 아미타불이 라고 하는 일념으로
15:49예 험 역을 하면 중생도 부채가 될 수 있다 라 이런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진 곳이 이
15:56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화엄경 의 사상이 정토 사상과 만나는 출 발 지 이기도
16:03하다는 의미 해서 이것은 바로 원효 대사의 사상 1심 점토 1심과 점토가 만나는 그런
16:10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원효 대사는 이곳에서 새롭게
16:17태어 났고 새롭게 자기 사상을 정비할 수 있는 그런 주요한
16:22어 성소가 이 집필 성진 바로 분황사 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6:29솔고 가 그렸다는 신묘한 관음도 사람 더 이상 볼 순 없지 뭐
16:34원효대사가 남긴 수많은 저사람 1700년 한국불교의 법황 이고
16:40나침반이 되었다 아 이곳 분황사 에서 오랫동안
16:46머물면서 많은 저술을 1원 요대 쌀까 만년에는
16:51인근에 있는 혈 살아도 하는 절에서 입주를 하게 됩니다
16:57잎새 칸 시신을 답이 하고 그 화장은 뼈를 모아서
17:02흙으로 소 조상을 빚어서 이곳에 모시게 됩니다 살아서 불황 4 에
17:08머물던 원효 대사는 입자 칸이 후에 다시 분황사 로 돌아오게 된 것이죠
17:15이소 조상을 모신 앞에서 아들 설정이 아침 선 역으로 신서 번쩍 달리
17:23말하는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고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깔아 드렸던 그 지극한
17:29마음이 어느 날 원효대사 소조 사에게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
17:36하루는 그 소 조상이 돌아보게 되었고 그 돌아본 소 조상이 회고 상 이란
17:43이름으로 이곳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져 4일 이런 선사 의
17:49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성산
17:563 공유 사원 요 부디 편에서 회 보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8:02언제 어느때 소실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보는 회고 상은 아름 나온 화두다
18:12[음악] 원효 대사는 왜 설총 을 돌아 본
18:17것일까 세속의 부자 지정이 아니라며 그는 무엇을 돌아 본 것일까
18:27그렇다면 원효 대사는 어떻게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18:34에 원효대사와 요소 꿍 주에 사연이 깃든 곳 월 정도다
18:42신라의 불심이 움 집된장 남산과 서라벌 을 이어주는 문 청 교가 있던 곳이다
18:53아 저기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 있죠 저게 바로 월정교 라고 합니다
18:58일찍이 원효대사와 6과 에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 이기도 합니다 사실은요
19:03앞에 있는 돌다리 요 돌다리가 아 문 청 교회 전신 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돌다리가 바로
19:11월정교 를 탄생시켰다 고 보입니다 원효대사가 하루는 범 날이 되어 가지
19:17고추 니가 통해서 저 남산에서 그런 내려오면서 수험 올가 부 아작 지천
19:23주라고 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바로 시경에 빈 풍 편에
19:28나오는 벌 가시를 패러 대한 노래입니다 누가 자료 없는 토끼를 내게 주겠는가
19:34내가 하늘도 바칠 기둥을 가 끓인 이런 그 어 상당히 전망치 칸 그럼
19:42계산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노래가 저자 거리의 회자가 되면서 신라 모험하게 까지 들어
19:49갔다는 겁니다 무연 하면 원효대사가 바로 귀 보인 을 얻어서
19:54훌륭한 후손을 낳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알아듣고 사신을 보내서
20:00마침 남산에서 내려오는 원효대사 를 2달이 문천 교회에서 만나게 됩니다
20:07원효대사 스스로가 눈처럼 겨 다리 밑으로 빠졌다고 얘기도 합니다만은
20:12그래서 원료 대해서는 옷을 말리기 위해서 거 옆에 있는 요설 0 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20:19요셉과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원효대사가 불렀다는
20:24잘 없는 도끼 아연 무엇을 말할까요 그리고
20:30아 도끼는 과연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으
20:35신라 진평왕 대인 610 7년 원효 대사는 이곳 경산시 자인면 에서
20:41태어났다 [음악]
20:46삼국유사 에는 원효대사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살던 집의 각각 절을
20:52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음악]
20:57원효 대사의 어린 시절 기록은 거의 없지만 당시 밤나무 꼬리 어떤 이곳은
21:03소년원 여 에게 특별한 사색의 장 소 였을 지도 모른다
21:10어머니를 일찍 이어 이었기 때문이다 아
21:16온유 되서 어머니께서 왜 연사를 임신 하시고 친정으로 출산 할 땐 하다가
21:21갑자기 3기를 느껴서 주변에 있는 사라 사단은 나무 밑에서 산천을 만들고 태어났습니다
21:30그래서 온유 대해서는 나중에 자신이 테너 이사가 수 아래의 살아 사람 저를 세우게 됩니다
21:37그리고 자신이 어 살았던 집을 촉의 사라는 절로 만들게 됩니다
21:43이 지역 일대 자이는 일대 아마 산호사 와 촉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1:49그쵸 개사 보다는 그 태어난 살아 사자 아마 이곳 재 석사 인근에 있지
21:54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 소속사에서는 원효 대사의 탄생 소다 이건데 에서
22:01최근 r12 는 이래 원효 대사의 탄생 성지로 어 조성에 가고 있습니다
22:10재 석사 에서는 해마다 원효대사 탄신 달의 죄를 봉양하고 있다
22:17으 일찍이 인생무상을 절감 햇던 소년
22:22원효는 장성한 교회 또 한 번 깊은 무상을 경험하게 된다
22:30woo 백제와의 전투에서 동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22:365 그 충격으로 29세 무려 세속을 떠나
22:42출가 한다 5
22:48재 접사 의 특별한 청각 원효 섬 사전이다 으
22:53어 원효대사 관련된 모든 어서 라 들을 집약하고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할 수
22:58있죠 마치 부처님의 일대일 을 8 상 성도 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8가지 그림으로
23:05이렇게 거래로 코 더 설을 담은 곳이기도 합니다 [음악]
23:13원효 대사의 좌상 을 중심으로 벽면은 남달랐던 원효대사의 승리를 한 눈에
23:19볼 수 있는 일대기가 그려져있다 그
23:245 어 탄생부터 특별했던 깨달음의 순간을
23:32물론 이 아 아
23:37요석궁 좋아 의 이념과 소 선거 4로 자칭하며 무의 춤을 추고 아들을
23:42두었던 인간적인 삶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23:52원 여성 사전에 이 모습은 원효 대사의 전세계를 집약적으로
23:57모아 놓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불황 사에 소 조선과 달리 바로 이 곳에는 원효 대사의 어좌 상을 이렇게
24:05모셔놓고 있는 그런 원 여성 사전 이라는 의미에서 어 원효대사 에서 성역화 더 원효
24:12대사의 탄생 제 란 의미가 아 본격화 된 곳이라고 볼 수 있는
24:17것입니다 [음악] 5
24:24행장의 여백이 많은 원 호텔 사지 뭐 걸림없는 자유인으로 왜 춤을 추기
24:29까지 원효 대사의 치열했던 9 도 10은 그의 저술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24:35[음악] 원효 대해서는 1300여 년 전에
24:41이곳 자인 일대에서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출가를 했습니다
24:47이 때문에 원효 대사의 관련된 젊은시절의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24:53그래서 원효대사의 젊은 시대 기록은 그가 선발 심수 행장의 채란 수에게
24:59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어져 라는 무렵이 얼음처럼 차더라도
25:04불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굶주린 창자가 끌어 지더라도 밥을 구하려고 하는 생각이 없어야
25:10된다고 하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열심히 소외됐던 그런 무대가 바로 이 일대가 아닌가
25:16하는 생각이 듭니다 1300여 년 전에 원효 대사의 행적이 비록 미미하지만
25:23이재 석사 에 조성된 원 효성 사장 그리고 이 일대의 분위기 그리고 문화
25:30유적을 통해 서남아 원효 대사의 젊은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25:35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 으 으
25:43우직하고 치열했던 원효 대사는 파괴 승이 되어 다시 경산 으로 돌아온다
25:49[음악] 으 요소 꿍 주와 설총 이 머물렀던 8
25:55용사 다 [음악] 으
26:02원효대사가 활동하던 7세기 중반 신라 불교 는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26:07유학파 승려들이 중심이었다 [음악]
26:14원효대사 도 의상 대사와 함께 유학을 시도했으나 두번째 유학길에 서 포기하고 돌아온
26:20뒤 요소 꽁 좋아 인연을 맺는다 [음악]
26:29어 6 공주는 신라 태종 무열왕 에 따님이 셨 죠
26:35아 원래 김헌 물이라고 하는 하나에게 어 시집을 갔지만
26:41어 일찍이 전사에서 요소 꿍 의 과부 공주로 살고 있었죠
26:47그러다가 원효대사와 인연을 맺고 설 총을 나왔습니다
26:53설정 원 회동 유학 그러니까 우리나라 유학의 b 조 이기도 합니다
26:58그 설총 이 이곳에 어릴 때 어머니 6 공주의 안겨서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는
27:05그런 셈입니다 이발 용사는 태종무열왕 2 아따 림 6 공주와
27:12아 손자인 설 청을 만나러 오기도 했다 는 그런 유서깊은 절입니다
27:18여기서 말하는 발 용 이라는 것도 바로 용 달리 말하면 왕이 어 기반을 다진
27:25곳이라는 것이고 동시에 신라의 기반을 다 신고 시간 의미도 있습니다
27:30이런 발 용 이라는 곳이 전국에 세 곳이 있죠 평양의 도 있고 또 고구려
27:36지역에도 있고 또 여기 신라 얘기도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원래 압도 꾹 출신 이었죠
27:43압도 꾹 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혁의 경산 입니다 영상의 암향 이라는 지점이 바로 원효대사가
27:50어 자랐던 이 자의 밀 대라고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음악]
27:57발 용사 뒤편으로 이어지는 언어 끼는 경주 로 통하는 옛 길이다
28:04임금이 너무 길이라 하여 왕제 라 불리는데 무열 왕과 왕 소가 발 형사의 있는
28:10딸과 손자를 보기 위해 넘었던 길이다
28:15왕 제로 오르는 길목에 요소 꽁 주 의 마음 세계처럼 관음보살 상이 모셔져 있다
28:25[음악]
28:32요소 꿈 주 와 인연을 맺고 아들 설 총을 낳았지만 원효 대사는 달 용사 에만 머물지
28:37않았다
28:44백성들과 함께 춤추고 마시는 저자 거 리에 소송 거 사이였다 [음악]
28:52발 용사는 신라 왕실의 기온 4 차리기도 했다
28:58고려시대의 보험 길을 거쳐 조선시대까지 대 가람 의 위용을 떨치던 아 용사의
29:03흔적은 흩어진 속초 유물로 남아있다
29:09으 [음악] 임진왜란으로 소실 되기 전까지 창
29:15대했던 발 용사의 기억이다 [음악]
29:21원유 되서 와 6 공주 의 인연은 잘 알다시피 삼국유사에 따르면
29:27어느 봄날 휴 니가 통해서 그러니까 봄 바람이 불어서 어느 대사가
29:33갑자기 되어 자들이 나타나서 수험 올가 부 아작 지천 주 누가 자로
29:39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 뜨 받침 기둥 을까 끄리
29:45또는 1을 떠받치는 기둥 을까 끄리 이렇게 두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많은 자로 없는 도끼 이것을 시 경빈 풍
29:53편에 나오는 펄 가라는 c 에 나오는 아 시 를 패러디한 겁니다
29:58자로 없는 토끼라고 하는 것은 과부 공주를 말아 줘 그리고 하늘도 받침 기둥 또는 하늘도
30:05받칠 기둥 1 훌륭한 후손을 상징한다고 하니 해석합니다
30:10그렇게 태어난 설 총이 바로 이곳에 6 공주 어머니에게 안겨서
30:18이 절에 와서 머무르면서 원효대사 를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30:24원효 대사는 분황사 에서 절필 이후에 대중들과 만나게 됩니다
30:30달리 말하는 사회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설악을 저자 거리의 들어가서 맘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많은
30:37대중들을 만나게 됩니다 화엄경 에 나오는 일도 출생 4 일체
30:43무예인 이 일도 출생 4 라는 구절이 줘 그러니까 일체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30:50생사의 길을 넘어 쓴다 이런 그 외침을 펼치면서 저자들이 에콜 이게
30:57어 여러 무지랭이 들 에게 까지도 어떠한 사람이 다 하더라도
31:03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남 아미타불을 열
31:09번만 부르면 서방 극락 정토에 왕 생 알 수 있다
31:14이런 사상을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원효는 이제 소선 그 살아도 하는
31:21어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출가 자 어디 5가 아니다
31:26소성 그 사 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원효 스스로도
31:33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교하 에 이르게 됩니다
31:38정토사 산을 배경으로 1 심 사상을 배경으로 새로운 불교
31:44운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출발지가 어쩌면 불황 사기도 하고
31:51이발 용사 이기도 한 것이죠 [음악] 저자 거리로 나온 원효 대사의 불교는
31:57쉽고 즐거웠다 으 그를 알거나 모르거나 아이에서
32:04얼음까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노래처럼 따라했다 으
32:10[음악] 원효대사가 추었다 는 무해 춤을 보고 난 것이다
32:16으 표주박을 두드리며 화엄경의 이치를
32:21노래 하기도 하고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터트리기도
32:27했다 왕실 불도 가 저자 거 리 의 생활
32:32불교 0 민 종 불교가 된 것이다 5
32:39무의 자재 햇던 5녀 대사의 삶은 포항 5 사에도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32:46오지의 법 거 량 선 하단
32:52아 이 오지는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5 4 앞에 있는 년 곳입니다
32:59원효 대사는 당시 서랍을 에서 많은 저작 활동을 하게 됩니다
33:05그러다가 조금 의문이 생기면 지금의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33:11이포 아노 사에 찾아와서 여기에 머물고 있던 당대 구성인 해
33:17공 선임과 함께 아 토론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33:23아 저술을 보강하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또 선임이 서로 벗
33:30거야 범려 카 투기를 하게 되는 거죠 그때 두 선이 먼
33:36마침 뛰어 노는 물고기를 먹고 바지를 내리고
33:42변을 보았습니다 해공 대사는 물고기를 누고 원효 대사는 똥을
33:48넣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훗날에는
33:53오히려 거꾸로 해 공 대 사자 또 글 누웠고 원효대사가
33:58물고기를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과연 어느 분이 덮 업력이 있었던
34:04것일까요 서로 물고기를 누워 따는 법 거 량
34:10전설로 사찰 명도 5 4 로 바뀌었다
34:16진평왕 때 창건된 5 4에 애초 이름은 항 사사 이었다 으
34:23수려한 경관과 성근 도량으로 신라 때부터 고승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34:28역사도 랍니다 으
34:37우리나라에는 참 많은 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설 중의
34:42하나가 바로 이 5 삽니다 5 4 에는 7세기에 당대의 구성인 원효대사 하고
34:51해 공 대사가 노 문 차립니다 이 절에는 오지 라고 하는
34:57연못이 있고 2호 지어서 이루어진 법 그랴 도서 님의 볶을 양 얘기는 널리 알려져
35:03있습니다 원효대사가 물고기를 누고 5 해공 대사가
35:10똥을 없다는 얘기는 어서 로 원래 사실과는 다른 것이긴
35:15하지만 아마도 원효대사가 전국구 인 반면 해 공 대사는 지역구 라는
35:20지명도 때문에 후대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5 [음악]
35:27낮은 곳으로 흐르고 모이는 물처럼 저자 꺼리를 좋아했던 두고 승에 법
35:32거 량 이야기는 당시의 권위 불교 지식 불교를 꼬집기 위한 누군가의 해약 인지도 모를
35:39일이다 [음악]
35:48원효 대사의 걸림없는 생애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물이 남아있다
35:53으 [음악] 5 4 경례 유물전시관 이다
36:01으 오사가 원효 대사의 2년 도량 임을 증명 하듯 진영이 모셔져 있다
36:12옆에는 해 공 대사의 진영을 나란히 모셔 마치 2 분수 님의 유쾌한 거 거
36:17량이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음악] 아 원효대사 를 둘러싸고 주변의 많은
36:26선후배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 공 대사와 언어 대 사회
36:32관계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대사가 죄수를 할 때마다 좀
36:38막히거나 궁금한 점이 쓰는 들 이해 공대에서 를 찾아서 서로 묻고 토론하면서 저술에 완성도를
36:45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공 서림 자신도 기록에 보면 짓나 보살의 후 신이라는
36:52원효대사 마찬가지로 성조 대사의 후 신이라는 의미까지 를 갖는 그런
36:58분입니다 그래서 두 분의 사이가 이렇게 마격 하다는 것은 우리 불교의 성취 7세기
37:04중엽에 신라 불교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영자가 이곳에 이렇게 모셔도 니까
37:115 4에 의미가 더 드러나고 2 선임에 법 그냥 의미까지도 천진난만한
37:17진리를 향한 그 법 그냥 의미가 더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음악]
37:22a 원효 대사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37:28특별한 6월 사까시 다
37:36원효대사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7세기 중반 신라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37:43불안한 백성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보살의 유물이다
37:49원효 테사 a 삿갓은 데고 성들이 남기고 있는 뭐유 칸 장이나 지팡이나
37:56바르나 어여 여러가지 유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사까 슬 남기고
38:02있다는 것은 원효대사 자신이 대중 교화를 위해서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38:07이사 갓을 쓰고 그들에게 남 아미타불이 라고 하는 가르침을 널리 펼쳤다는 사실을
38:13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나무 아미타불이 라는 6자 만
38:20지극한 막 치 심으로 10번 외치게 되면 모두가 정토에 왕 생 알 수
38:26있다 점토의 태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강조했던 원효대사 를 연상케 합니다
38:32원효대사의 사상인 1심 사상이 어떻게 점토와 만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38:38중요한 점검 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음악]
38:46222 나무아미타불 6장 연구 룬 거듭되는 전쟁으로 불안했던 은
38:52백성들에게 원효대사 많이 줄 수 있는 안심 번 문이고 희망의 선물이었다
39:00으 [음악]
39:06되게 훌륭한 분들의 에 전기 일을 쓰는 방식 에 따르면 그 성이나
39:12아버지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원효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39:19보성 겨레 보게 되면 무산 4호 특수성이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39:24보건학부 종사 배움에 있어서 일정 아스 성을 따르지 않았다 이런 표현들이 보입니다
39:31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 를 둘러싼 몇명의 고성 들이 보입니다
39:36이곳 5 4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해 공대에서 그리고 또 당대 똑 뽀송이 어떤 해외
39:42숙소 님 그리고 대항 선이 또 고구리 에서 막내 왔던 오덕 회사 이런분들이 원효
39:49대사의 소성 에 준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고성 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39:55원이 오라고 하는 위대한 어 철학자이자 사상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40:02생각이 듭니다 유지 바로 우리나라 불교 한국 불교의 위대한 성취의 배경이 됐다고
40:08생각합니다 첨 400여년 전 백기를 이용해서 역으로 떠났던 구법
40:14등 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것이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도 이 곳을
40:21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온에어 대사는 떠나지 않았다
40:27[음악] 그곳에 새겨진 5녀 대사의 깨달음의 스토리는 한국불교의 역사 와 함께 천년
40:342000년 전해지며 후 대인 의 각성을 견인하고 있다
40:41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의 현장 원효 대사의 깨달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40:48[음악]
41:00욕 쌕 이 중 반 관 산 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다음 포쾌 척의 나섰고
41:07진흥왕 이후 당은 본 신라 초대 교육함으로써 로 대외 무역의 중심지 었다 559
41:17삼국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 어떤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문화 투 뭐야 한다
41:28마흔 네 살의 원효대사와 36살의 의상 대사도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으
41:34너무 3 2로 아름답게 펼쳐 에서의 바다가
41:39보 있습니까 이곳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공평한 입니다
41:45아마도 7세기 의 원효와 의상이 이 곳을 향해서
41:50유학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아마 이 일대가 당은 포가
41:56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어서 게 600 50년의 원유와 의상은
42:02중국땅 나라 로 돌아온 현장 법사 에 신유 식을 더 뭐해서
42:09유학을 시도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고려의 영토를 지나서
42:14요동 까지 갔다가 요동 해서 오려 술라 꾼 에게 세작 즉 간첩으로 오인 받아 가지고
42:21감옥에 갇혀 씁니다 다시 풀려 난 이후에 신라로 돌아옵니다
42:27교류 660 일련의 이번에는 이 바닷길을 향해서 2차 유학을 시도하게
42:32됩니다 원유와 이사는 아마 6월 20일 제로 당시 아마 장마철 로 추정됩니다 많은
42:40이 서에 당은 포를 향해서 2차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뭔지를 걷다가 장마 비가
42:47내리기 때문에 비를 피해서 1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42:54물론 첫날에는 딱 막 이라고 하는 곳인 막장으로 들어가서 잠을 느꼈습니다 근데 그 다음날 아침에
43:00보니까 무덤 이었죠 그런데 b 는 7월 같이 내렸기 때문에 다시 하루를 더 3자 하게
43:07됩니다 3월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43:13갑자기 원년 을 외치게 되죠 그래서 어젯밤 잠 짜리는 딱 막
43:18위에서 매우 편한 했는데 오늘 밤 잠자리에 면 무덤 이어서 매우 뒤숭숭 하구나
43:24아 쟤 또 가 마음이 생겨 남으로 가지가지 현상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 박과 무덤이
43:29둘이 아니다 삼재는 오직 유심히 요 내 마음속에 있고 맘 또 돈 오직 매일 식 속에
43:37있다 내 마음 밖의 어떤 현상이 없는데 어디에 가서 따르고 알이
43:42나는 당간을 가지 않겠다 라는 5 도성을 외치고 바랑 을 매고
43:48원유와 의사는 서로 헤어집니다 원효는 신라 슬아 블로 돌아가고 의상은 이곳 방음 포에서
43:54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게 됩니다
44:05원효 대사는 경전 속에 문구용 이론이 어떤 사상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5도에 순간을 맞게
44:12된다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열망했던
44:17원효 대사는 유학을 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악
44:24원효 대사의 5도 송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은 의 상태 4 였을 것이다
44:31그러나 각성은 나눠줄 수도 전해준다 고 받을 수도 없는 내면의 일이다
44:42당시 당은 본 으 당함 성에 관할 지역이 없다 다음 성 으로 추정되는 당성 이다
44:54역사 속에 묻힌 당함 성의 흔적을 찾고 연구하는 상토 4 학자가 있다 [음악]
45:015 예 화성이 봄과 풍경이 썼습니다 이쪽이 선방 만성이
45:09여기에 6개가 있음도 어찌 그리고 폭우도 여기에 화성시 전체
45:15폭우가 좀 스물 일곱 개인데 이 근처에 있는 포부가 역시 6개가
45:20있어 쓰 여기가 되게 당성 또는 당성 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45:25어 이 경기도 화성에 있으면서 중국으로 가는 한 아이가 통로 회상
45:32통로 이어서 상당히 여 층 지어서 얼쑤 어 3국 일찍이 특히 고구려 백제 또 신라 백제가 많이 갈등 안
45:40그런 곳이라고 알고 있으면 이 당선 또는 다양성이 돼서 한번 말씀해
45:45주시죠 이쪽에는 춤 4배 97년에 고구려가
45:50비추어 그 적극 100대 백제를 침략하기
45:56이전까지는 여기에 백제의 지역입니다 예 백제 지역인데 그 뒤에 백제 하고 신라가 또 합해
46:04가지고 고구려를 그 분리 층계가 아 550 3년입니다
46:12그리고 약한 80 년 간은 이 지역이 그 신라 하고
46:17백제 하고 의 공동 그런 죄기 되겟습니다 선덕여왕 1000회 아끼고 하니까요 예 그래서 이제 고구려는
46:24그때 저 임진강이 이쪽에 재미 치고 있고 예 해다 보니까 이쪽으로는
46:32이 신라 에서도 그 고승들이 나 무역로 가 이쪽 밖에 없습니다 예 당
46:38양동이에 [음악]
46:45대담 구역에 관문이 어떤 당황 성은 배꼽에 때는 국운이 달님 군사 요충지였다
46:50[음악] 오래된 섬마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46:58있지만 당함 성이 더 각별한 것은 원효대사가 개벽의 순간을 맞이한
47:03곳이기 때문이다 [음악] 수많은 구법 숨 들이 이 성곽 위에
47:09올라 유학의 꿈을 다 졌을 것이다 육수 역 자체가 얘기가 상당히 그
47:15어떤 2 해상 항로 로서 의 취역 자체는 그 굉장합니다 2 쪽인 예 그렇게 모임에
47:22예 이쪽에 굽어 부터 로 알려져 있어서 왜 원전 고성 들이 1에게 당나라
47:29유학을 날 이렇게 이제 호수나 때까지 또 트위터 남북조시대 까지
47:34이쪽 관 물을 통해서 나은 거로 되게 알려져 있습니다 저쪽에 바로 건너서 이게 바로 밑에 가원 꼬리 되겠습니다
47:41워 예 그 다음에 건너다 보이는 데 이제 화련 치 되는데 에 나루터 화란
47:47친히 거기에는 작은 수분 처음 그 절 제사가 있던 됩니다 이게 그 다음에
47:54안쪽으로 가면 은 이제 남경 프란은 또 푹 아이스 비해 예후가 그러니까
47:59이 이 당성 주변에서 푸가 6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굉장히 중요한
48:06그이 이수로 2 그 부부가 되겠습니다
48:13[음악] 회동에 끝 짜라
48:19신라의 유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구법 의 길을 떠났다 일찍이 육로 이 땅의 실패한 원효와
48:26의상 은 11년 뒤 해상로를 선택했다
48:31그 원효대사 나 그 의상 돼서 께서 그 정도 확실히 있는데 어떻게 에
48:39단가라 곰 월별로 가시라고 또 위협까지 오셨는지 그렇게 삼아서 이제 그 당시에 견 당사 나 유학 성들을
48:47통해서 아마 소 물을 제패했던 거로 생각합니다 중국의 선진 문물 특히 중국의 당
48:52나라의 대표적 고성이 어떤 현장 없어요 인도로 17년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48:59많은 격론을 번역하고 새로운 유식한 글 이제 펼치고 있다는 소문을 남아
49:05견 당 싸 해지는 경당 그 생 들 또 유 악성 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던
49:11으로 납니다 그래서 직접 호기심이 강했던 의상이 아마 원효대사 에게
49:17치안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요 1차 유학 때에는 고리로 갔다가 제작해서 돌아오기 때문에 실패했고
49:24다시 2차 유아가 660 일련의 이쪽을 향해서 이제 이번엔 바닷길로 가기 위해서 이쪽으로 왔던 걸로
49:31보입니다 아 여기가 그런 새로운 화합물을 배우로 나갈 수 있는 그
49:37항구가 되게끔 없습니다 예 그렇게 발생할 정리할 새로운 문물에 운명에 어떤 거 수용
49:44철 기도하고 또는 출고 차이기도 않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음악]
49:51오직 배움과 깨달음의 대한 열망으로 떠났던 원효와 의상의 당나라 유학 게요
49:59그러나 두 사람의 동행은 여기까지 었다 아
50:05다음 성으로 가는 길목에 야상 20여년 전 이곳에서 의미있는 발굴이
50:11이루어졌다 1 때가 무덤들이 많이 있는
50:18공동묘지를 않은 것이 앞에서 예 그래서 이 쪽에 가 어 무덤이 2매
50:232등 섬 의 무덤이 있는 걸로 그 중심은 하게 뭐해서 1997년에
50:29발굴한 보고서가 있는데 예 거기에 보면 은 그 무덤 자체 모양이나
50:34이 석축으로 싼 모양 자체가 그대로 부어서 에는 좀 남아 있습니다 예
50:41그러니까 이제 일대가 공동묘지 무도 1 여러 가지 예 정확하게 어딘가 비정하게 참 고려했습니다 많은
50:48어떻든간에 무덤이 많다는거 예 성인의 성인 남자 두 사람이 에 들어가서
50:55하루 동안 이 터를 잘 수 있는 무덤 이 일대 돼 있었다는 거예요 예 2 살지만 알더라도 내게 중요하지 않을까
51:01생각이 되고 더욱 또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이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가 매일 그리고 더이상
51:08유학의 필요성을 못 먹겠다는 겁니다 단순한 공간 이동 이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는 그
51:15무대가 바로 이 일대 였다는 사실 이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 그렇습니다 예
51:22무덤 군이 발견된 내 꿈 9분 방송으로 가는 길목이다
51:28[음악]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대사의 5도 처로 보는 까닭이다
51:37여기서 그 깨우쳤다 는 일체 이 순조가 예 어떤 그 의미를 가지고
51:43있는지 교수님의 좀 예 뭐 일체 의심 저는 화엄경 에 나오는 말이죠
51:50모든 현상은 아 내 맘이 만들어낸다는 그런 말이긴 합니다 하는
51:56온에어 도 소 의 근거에서 보면 어젯밤 잠 짜리는 참 땅 막 이어서
52:02매우 편한 했는데 오늘밤 잠자리에 는 무덤 속 이어서 매우 뒤숭숭하다 는 이런 얘기를 하지
52:09않아요 예 어젯밤 이라고 하는 편안함 예 오늘 밤 이라고 한 어떤 두려움 2분 *
52:16예 우리 마음에 맑고 해 맑고 깨끗한 마음이 있는 반면에 또한 그 물들고
52:23때묻은 측면이 있는 건데 이 어제와 오늘의 2 3 극적인 대립적인 분별의
52:29그건 원에 있는 큰마음 더 큰 마음의 한 마음을 다 알게
52:35됐던 거죠 그런 마음을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이 허상의 더 이상 유학의
52:40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옴 신라로 과감하게 돌아간 것이 1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뭐 좋은 말씀입니다
52:50시들지 않는 배움의 의지 5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52:56고생스러운 여정 속에 우연처럼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을 맞게 된다
53:04화도 처럼 일체유심조 를 품고 있었기에 벼락처럼 강렬했던 깨달음
53:10새로운 존재로 탐색하는 각성의 순간이었다 5 [음악]
53:17원효 대사는 그렇게 무덤가에서 대 광명 의 실상 을 깨우친 다
53:23법계에 주인공이 된 것이다 깨달음을 나눌 수는 없지만 후대 이는
53:31고성 들의 깨달음을 딛고 각성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53:36원효의 깨달음으로 영감을 주는 도량이 있다 [음악]
53:43어 화성 당황 성을 향해 길을 떠났던 원 여와 의 상태 사는
53:49아마 이 일대 특히 평택 화성 이 일대를 남아 지나갔을 가능성이
53:54있습니다 어 경기도 화성과 평택 일때는
53:59신라 당시 충 구로다는 광물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중에 특히 다양성이 있는 화성은
54:07원효의 5도 철학 오 허니 늘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평택 또 역시
54:14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원효와 의상의 깨달음의 계기를
54:20마련한 화성과 평택 일대의 사찰 은 이를테면 화성의 신흥사 나
54:26평택에 수도사는 원효대사 이에 깨달음의 내용을 뒷받침
54:31하기 위해서 열심히 개선과 저술 작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54:36특히 이거 평택 수도사 는 원효 대사의 5도 깨달음을 체험할수
54:43있는 체험관을 걸레 세웠습니다 그러면 처음 간 으로 옮겨 가서
54:48어떻게 깨달음을 체험 할 수 있는지 그 느낌을 한번 우리가 직접 경험해
54:55보도록 하겠습니다
55:021400년 전 원효대사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55:10체험과 내는 연 대표를 비롯한 각종 시청각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이웃
55:17원효대사 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 의 폐경 치열했던 구법 여정을 가늠해 볼 수
55:23있다 으 으
55:29경주 분황사 에서 서해 당함 선까지 원효대사가 걸었던 구법 루트와
55:351심 사상 을 비롯해 흉내낼 수 없는 보살 행의 경지 무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55:44[음악] 그러면 깨달음의 순간은 어떠했을까
55:51칠흑 같은 어둠 속 돌무덤 을 체험관으로 구현해 놓았다 [음악]
56:03아 여기가 평택 수도사 회에 조성된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 입니다
56:10이렇게 만들어 보니까 아 초중고생 들 일반인들에게 교육관으로
56:17쓰 효과가 상당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원효대사가 이 이와 같은 무덤 속에서
56:24하루를 차면서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잤는데
56:29또 하루를 더 자게 되면서 여기서 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깨달아
56:34머리는 허니 1심의 발견이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근데 j1 심히 라는 게 과연 뭐냐
56:40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56:46중생과 부처가 하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냐 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냐
56:52하는 문제가 바로 1심 과 관련됩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길은 바로
56:581심 을 발견하면 길이고 원효 대사는 바로 이 무덤 속에서
57:03어젯밤에 편안한 상태 오늘밤에 뒤숭숭한 상태의 권원 에
57:09자리한 1심을 발견함으로써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공간이 바로
57:15이렇게 마련된 5도 체험관 이라는 것이죠 이곳이 정확히 원효가 오드 한 공간
57:22이라고 하는 비전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평택 수도사 에서는 이곳을
57:28의료가 깨달았다는 공간으로 재현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57:33교육의 효과 체험을 효과를 누리도록 배려했다 고 생각합니다
57:38그런 의미에서 사찰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57:46불자들에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57:51여기 5도 챔 간의 와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58:01깨달을 수는 없어도 분위기를 느끼고 사유의 볼 수 있는 공간이다
58:13원효대사가 깨 침을 놓고 난 이후에 슬아 블로 돌아가서 하는 저장을 하게
58:19됩니다 백부 240 2억원 가까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많은 현재 라는 저서로 나
58:2622 어정 조금 더 됩니다 그나마 있는 어 져 기술들 속에서나마
58:31원유 5 철학의 핵심인 1심의 체 락이 후끈하게 잭은 되고 있다는
58:37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대사가 한국사 상사에서 또는 한국
58:43철학사에서 1심의 차량을 굳건히 확립함으로써 불교 특히 대성 불교는 크다란 나의
58:51정리가 되었다 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사에서 원유의 1 심원 이후에 친 울 선사 의 아 진심
58:59외쳐라 그리고 태고의 자 심 엄마 홍의 무심
59:05그 다음에 차가 휴정 의 선 10 경허 에 조심 만에 유심 성철의 돈
59:12심이라고 하는 중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사상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59:18되게 한 철학자 의사 상대 키워드는 그 1 10 3 말을 통해서
59:23전 사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됩니다 원 여 열심 1 불교의 대장경을
59:29마음 짜리 심자 로 정의할 수 있는 것처럼 이후에 불교 사상을 총 집대성한 의미로써
59:371심을 촘촘하게 정했고 그 영향은 동아시아사 상사 특히 한국사 상사에서
59:45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한국 뿌리와 가지는 장점이자 강점이 되고 있다고
59:50생각합니다 원효의 1심 철학은 단지 개인의 철학으로 끝나지
59:55않았습니다 그의 열심 철학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미쳤고
1:00:00후대 사람들은 거 영양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아 재현해 갖습니다
1:00:06원효 역시 자신의 1심 철학을 단순히 일어로 만 남기지 않고 그저 긴
1:00:12실천과 접목해 갖습니다 정토 사상과 결합하면서
1:00:17보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리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붙여 다운
1:00:24삶을 살 수 있는가 이것을 고민하면서 더불어 나누고 더불어 함께 했습니다
1:00:36[음악] 도량 마다 전설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만
1:00:41내원사 의 이야기는 다이나믹한 다
1:00:47순수 국내파 원효대사 에도 력은 국경을 넘어 펼쳐진다
1:00:53참 성 삶도 화원 벌도 원효대사의 법력을 나온 지명이다
1:01:01월요 대사의 신통력 은 어디서 왔는가 전설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는 현장과
1:01:07젊은 시절의 원효를 만나본다 [음악]
1:01:28한국산 에보 우리 이름에는 불도 관련 농어가 많다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천성산 동 사
1:01:35니 이름 을 비롯해 원효봉 과 화엄 벌 등 원효 대사의 노력과 가르침이 지명으로
1:01:41남아 있다
1:01:47몰 맑고 경관이 좋기로 유명한 매 원사 계곡이다
1:01:57어이 것은 어 천성산 입니다 선 성사는 천명 의 성인이 낫다는
1:02:03살인 데요 원효 대사의 법력을 따라서 원효대사 에게 공부할 5000명의
1:02:09고성 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해서 천성산 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02:16그러면 원유 대선을 따라왔던 1000명의 고성 들이 왜 이곳에 모여들어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1:02:22하겠습니다 [음악] 오오오
1:02:30손 고성 전에는 원효대사가 당나라 스님 천명 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1:02:36그 때 원효 대사 를 도운 산신이 있었다 [음악]
1:02:423종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 심각 이지만 위치가 여느 사찰과 다르다
1:02:48어 여기가 유명한 내원사 살 양각 입니다 내게 산신각 이라고도 풀었는데
1:02:55되게 절에 구조는 어 상단 중단 하단 님께 3단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일주문 에서 하단
1:03:02그리고 법당 중심의 중단 그리고 저 상단은 살 연가 금 3 기술 3
1:03:08철학의 있습니다 그런 구조를 보면 사실 살려 안가던 상단에 있어야 3차 하겠는 상단이
1:03:14있어야 맞는데 이적은 특별하게 하단 일주문 쪽에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1:03:21아마 이렇게 배치가 된 것은 원효 대사의 법력을 따라서 중국에서 건너온
1:03:27천명 의 고성 들이 이 천성산 자라 까지 이르렀습니다 근데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몰라서
1:03:33고민하고 있을 때 때마침 이 천성산 살 실력이 나타나서
1:03:39어이 첨에 고승들이 갈 길을 안내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것을 기념해서 바로 일침은 이곳에
1:03:46살려 생각을 조성하고 어 모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3:51[음악] 어려워 대사는 산신이 안내해준 이곳을
1:03:57중심으로 89 암자를 짓고 천명 의 당나라 스님들을 머물게 했다
1:04:05[음악] 맑은 계곡물을 끼고 올라가면 천성산 깊은 골에 자리한 유속이 뿐
1:04:11도량 내원사 가 나온다 [음악]
1:04:20원효 대사의 가르침으로 천명 의 성인이 탄생한 성스러운 기운이 기쁨 곳
1:04:26시대마다 당대 고승들이 즐겨찾던 선 수행 도량 이다
1:04:32으 6.25 때 전소된 것을 재건에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으로 자리매김
1:04:39하였다 [음악] 참 성산 일대와 네온 4 에 전해지는
1:04:45원효대사의 이적 이야기는 원효대사가 천성 3 넘어 훗날 첫판
1:04:51암 으로 불려지는 작은 암자를 짓고 머물고 있을 때 일이다
1:04:57[음악]
1:05:03원효 되서 c 들에 담 나나 운제산 착하게 있는 대 차례에서
1:05:09때마침 천명 의 대중들이 저녁 공양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05:15이상한 비행물체 같은 것이 그 경내의 하늘에 떠서 빙글빙글 돌면서 소리를
1:05:22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저게 무슨 소린가 하고 공양을 멈추고
1:05:28나와서 물체를 봤더니 물체가 이동하면서 어 그 경내에 마당은 외곽으로
1:05:36어 서서히 대중들을 이동 시켰습니다 나중에 그 대중들을
1:05:42멈추게 하고 소바니 떨어졌는데 그 서 발에 새긴 글을 보니까
1:05:48해동 사문 쳐 판 구 중 이라는 글씨를 보게 됩니다 때마침
1:05:54장마철이 었어 그 대중들이 이상한 물체를 따라서 나오는 순간
1:06:00저런 무너졌고 덕분에 대중들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1:06:06그 소반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 해도 에 헌 선임인 원효대사가 우리
1:06:12대중들을 살리기 위해서 잇어 반을 더 졌구나 하다는 사실을 알고 원효 대사의 범려 게 크게 감복한
1:06:18대중 천명 은 이제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이 해동 으로 가서 신라의 원효 대사의
1:06:26게 공부를 하려고 발 심 하게 됩니다 그 천명 의 대중들이 이곳 천성산 으로 모여 들었지요
1:06:33그래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중들은 큰 rc 뭐라고 하는 심을
1:06:40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던진 재판 고 중에 있어 라는 과연 무엇을
1:06:46의미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깨달음을 아 우리에게 주고 있을까 [음악]
1:06:55으 원효대사가 날린 것은 솝 아니었을까
1:07:00만 법 그 일에 1심이 었을까
1:07:05적한 9종 설화나 원효대사 를 이해하는 상징이자 실마리로 후대 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1:07:12자극하고 있다 [음악] 관념 불도를 타파하는 원효의 살아있는
1:07:19글 도어 상생의 화엄 실천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1:07:24[음악] 원효 대사의 법력을 따라서
1:07:32이곳으로 모여든 천명 의 에 당나라 스님들은 이 천성산 저 넓은 벌판에 모여
1:07:40들었습니다 원래 이쪽 도량이 좁고 경매가 좁아서 2층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1:07:46공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천성산 쳐 넓은 벌판에 모여서 화엄 사상 을 공부했던 겁니다
1:07:54이 때문에 그것을 천성 벌 내주는 화엄 버린 라고도 합니다 일찍이 원효 대사는
1:08:01분황사 에서 화엄경의 십회향품 을 추적하다가 문장과 석 원기 즉 문자의 향기와
1:08:09책의 기운이 가득 차있는 골방에서 중생을 향한 회 향이 불가능하다는
1:08:15사실을 알고 부설 끊고 뛰쳐나가서 거리에서 많은 대중을 만나게 됩니다
1:08:22그래서 원효 대사는 대중을 만나서 화엄 1 심 사상과 점토를 결합하는
1:08:27큰 어 강론은 큰 불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있는 것처럼 원효 대사는
1:08:34이 화엄 사상 을 2000 성산에서 첨 매개의 대중들에게 에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8:42화엄 사상 은 알려진 것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불 세계를 연
1:08:48화장 화장 상 음색의 연꽃으로 장엄한 장대한 세계를 서라고 있습니다 수
1:08:54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그 깨침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1:08:59하나하나 어 설명하면서 부처님에게 제가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09:04그런 강 노를 들었던 청명의 고 손들은 이곳에 모여 소
1:09:09그야말로 천명 의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죠 아 12명은 어여 12 비행중에 4명은 문지영
1:09:17$4 산으로 가서 부처가 되었고 또 여덟 명은 대구 팔공산 으로 가서 부채가
1:09:22되었다고 해서 988 명이 이곳에서 모여서 다 부처가 되어서 선물했다는 그런 것이
1:09:30그런 내용이 전해 오는 것입니다 창건 당시 내원암 은 상 중 하로
1:09:37나누어 진 협소한 도량 이어 딱 으
1:09:43해발 750m 의 8부 능선에 펼쳐진 너른 평지 원효 대사는 이곳에 야단법석을 펼쳤다
1:09:56당나라에서 찾아온 천 명의 스님들을 이곳에서 원효 대사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1:10:03일거에 천명 의 손이 난 5도 성진아 [음악]
1:10:08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화엄 말에 새겨진 원효 스님의 이야기는 더 이상 전설이 아니다
1:10:16[음악] 이야기에 담겨있는 원효 대사의 정신 화엄의 도리가 3 방 방석 위에서도
1:10:23현실에서도 가슴을 치기 때문이다 [음악]
1:10:31경주 박물관 에는 원효대사의 젊은 날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유물이 남아있다
1:10:36[음악] 원효대사가 주 서캐 땅 고선 4g
1:10:423층 석탑이다 천년 넘게 원효 대사의 도량을 지키고
1:10:47있던 석탑은 어쩌다 박물관 뜰에 남게 된 것일까 [음악]
1:10:55원효대사 u 잭을 찾아보면 참 많지가 않은데요 4 특히 이제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고 손 4a 삼층석탑 또
1:11:03군항 4m 오정선 타미 두 탑이 떠오르게 됩니다 근데 감은사 의에 탑과 비교해 볼 때
1:11:10어떻습니까 감옥 탑과 너한테 정진으로 매우 초기 이 문예 한국성 삽을 대표하는 예
1:11:18탑으로 알려져 있네요 감은 사탕 만큼 화려하지 만성동 잠이란 지금 기본적인 틀은 그
1:11:24전통적인 내가 통일신라 스템 피스를 확실히 담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1:11:29그 예 마치 그 원이 호텔 사회 본시 를 보러 같은 느낌이 경제 방법에 올때마다 있겠습니다 예
1:11:36유일한 나라에는 유물 같기도 하고 한데 우리 탑이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1:11:42원래는 그곳에서 터가 2자리 있었는데 그 70 년대 에 덕동 땡 세워지면서
1:11:491975년 도에 이 탑을 옮겨서 이 자리로 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탑이 아무래도
1:11:55그 땐 때문에 이제 20 될 것을 우려해서 이동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1:12:01네고 순사가 20 될 때 2타 뿐만 아니라 서당 화상 탑비 그
1:12:07기부가 이쪽으로 옮겨 왔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 탑들은 바로
1:12:12위 탑 옆면에 지금 현재 뭐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쪽으로 가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볼타
1:12:18할까요 예 고선 사이는 삼층석탑을 비롯해
1:12:25원효 대사의 행장이 적힌 빗물이 있었다 아 아
1:12:31원효대사가 입적한 지 백 이십 년 뒤에 세워 줬다는 서당 화상 답변은 사라지고
1:12:36지대 석과 귀부 많이 남아있다 [음악]
1:12:42서당은 원효 대사의 아 명으로 동방의 손 스러운 아이 란 뜻이다 [음악]
1:12:54마치 보니까 여기 그 기부가 있는 어 어 혼 적이 있는데 이게 곳은 4
1:13:00에서 온 게 맞습니까 이거 이 모든 연구를 들은 정복 우선 4 그래서 뭐 터에서 이제 가져온 경우
1:13:07드리고요 그 특히 이 그 귀부 같은 경우는 2위에 어 서당 화상 다 피가 첫 화상 피가
1:13:14있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예 비가 아무래도 이제 그 원료 대 4p 가 두 차례 세워 지잖아요
1:13:21그 신라 애장 왕 때 세워진 고순 사요 피하고 또 지금 분황사 에 남아있는 고려 숙종 도 때 그 화제
1:13:29국산 라는 시호를 받고 명종 조 때 세워진 불안 4p 가 있는데 거기 b
1:13:34또 없어졌고 여기도 없어요 서 다만 b 의 일부 할짝 그 학번 한
1:13:39곡의 전에 제가 지고 아 원저 도싸 행장을 좀 알 수 있긴 합니다만 은 일단 여기가 보니까 마치
1:13:46수몰된 느 곳은 살을 어 어 다시 이렇게 상상하게 하는 공간 이군요 네 맞습니다 아까 전에
1:13:53말씀 하신대로 그 원 6 에서의 행적을 담은 헌화 상 비 같은
1:13:59경우에는 어 1915년 외에 그 조선총독부 에서 이제 발견을 해가지고 한 부분이 어
1:14:06국립중앙박물관의 포장이 돼 있고 나머지 1968 년 도에서는 민가에서
1:14:11한국군 임도가 기능 겁니다 아마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 그 좀 확
1:14:17어떤 확보 했던 것을 나중에 민가에서 획득을 한 것 같은데요 여튼 그러한
1:14:22것들이 민간에서도 발견되고 결국 이렇게 한번 이렇게 회사가 된 다음에
1:14:27좀 유물들이 흩어져 버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여줘서 안타까움을 좀 갖게 되죠
1:14:34그렇습니다 폐사된 사찰들이 복원 되기는 참 어려운데 이런 유물들을 통해서 한번 고순 사회의 복원도 한번
1:14:41희망의 봅니다 무의 행을 펼치며 민중들과
1:14:47동고동락했던 원효대사 를 당대 권 승 들로부터 배척 받았다
1:14:54백보좌 터 폐도 초대받지 못하는 파괴 스승이며 권력의 아웃사이더 였다
1:15:03그러나 고성 4 시절부터 원효대사 람 민중들과 함께 었다
1:15:12젊은 시절 원효대사가 추서 캤던 고성 사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으
1:15:18으 경주 식수원 으로 애미 건설되며 마을과 함께 숨을 되었다 으
1:15:29물에 성품 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며 민중들을 품었던 원이 5 태사
1:15:39무상한 세월과 함께 3000 마저 편했지만 원효대사가 고 선사에서 살아 보였던
1:15:45젊은 날의 어느 하루는 천년 세월을 가로질러 지금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1:15:53[음악]
1:16:00어 이곳은 벽 똥 때입니다 1975년 경주 상수원 보호 지역으로
1:16:07책정이 되기 이전에 까지만 해도 바로 이것은 어 많은 사람들이 살던 말이었습니다
1:16:14이것 한복판에 고선 사철 트가 있었지요 원래 대사는 젊은 지 들에
1:16:20이곳 고성 사에서 머무르면서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16:255 녀의 생애를 크게 둘로 나눠 보면 전반기는 되게 이고 선사 후반기는
1:16:31분황사 로 집약 됩니다 젊은 시절의 원 외에 관련된 얘기는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1:16:38아마 이고 선사 중심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 마을에 살던 사복 일하는
1:16:44젊은 친구와 가까이 했던 것으로 압니다 삽 어기는 태어나서
1:16:49걷지를 못해 가지고 열두 살까지 그야 기어다니면서 말도 잘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16:56이 때문에 4 보기는 되게 뱀 보기 이렇게 돼 있고 이런 사는 삼국유사 에서 사복 부른 이라고 4보기 말하지
1:17:04않았다 또는 말하지 못했다 라는 종목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1:17:10이 사법과 가까이 했던 원효 대사는 어느날 4보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1:17:16원효를 청해서 명복을 빌게 합니다 원효는
1:17:22어머니 시신 앞에서 태어나지 말지어다 중로 베시 괴롭다 죽지 말지어다
1:17:27표현하는 것이 괴롭다 라고 축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4 보기가 웬 말이 그렇게
1:17:34짓이오 좀 간단히 하시오 이렇게 일하니까 뭐 회사가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 라고 말을 정도 했다고 합니다
1:17:42그러면서 원효대사가 4보기 에게 져 어머니는
1:17:47우리가 전생에 함께 공부할 때 우리가 읽었던 경을 이끌던 암소 였다 라는
1:17:54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사 복과 원효의 관계는 이후에 신라의 최초의 4 차림 대왕
1:18:01헝 유사 에 모셔진 은 신라 시편 아 아까 10 현 중에 이현 탈
1:18:06성입니다 8 성은 출가 고서 이고 이현은 제가 아 차이죠 그중에 4
1:18:12복도 원유와 당당한 단열에 들어갑니다 그만큼 사복 은 중요한 인물이 고
1:18:19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원이 와 사본 바로 그 젊은 시절의 이곳을 중심으로
1:18:25어울리면서 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 복과 원유의 이라는 삼국 유사
1:18:33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얘기 중에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음악]
1:18:394 북과 원효의 이야기를 간직한 고성 사진은 퇴사 후 오래도록 방치 되어 있었다
1:18:47민중들과 함께 한 원효대사 처럼 삼청 석탄 많이 웅 건 안 차 태로 마을을
1:18:53지키고 있었다 [음악] 원 여원 은 이것에서
1:18:58어 비문에 나오는 것처럼 5 섬 대사 5 3화 상이라고 나오는 것처럼 이곳에서
1:19:04전반기를 살았습니다 그가 만년에 이룩한 1심 철학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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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元曉
원효대사
성씨
설(薛)
본명
사례(思禮)/ 서당(誓幢)/ 신당(新幢)
법명
원효(元曉)
자칭
소성거사(小性居士)
시호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골품
종교
출생
신라 금성 압량군 불지촌
(現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사망
686년(신문왕 5) 4월 28일[1] (향년 69세)
아버지
담날(談捺)
부인
자녀
아들 설총

1. 개요2. 생애
2.1. 입당 시도와 깨달음
3. 평가4. 대중매체에서5. 기타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2]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元曉大師)고,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少性居士)다.
나타나는 모습이 천백 가지라지만,
마치 손바닥 같은 모습뿐이다.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ㅡ 동문선 제50권 소성거사찬. 이규보 작.



삼국시대 중기 신라의 승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고승 의상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모든 건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해골물 일화로 유명하며 파계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 고대사ㆍ철학사ㆍ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이다. 삼학에 능통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를 두고 만인지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국통일기에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통일신라의 탄생을 봤다.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해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원래 중국 삼론학[3]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백제 삼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근거는 6세기 말 편찬된 백제의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로 백제 승려 혜균(慧均)의 생각과 많이 닿는다는 평가가 있다. 삼국 통일에는 사상적 통합이 선행됐고 원효가 토대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분황사에 원효의 유골에 흙을 붙여 만든 원효회고상이 전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려 중기 여몽전쟁 때 몽골군이 경주시에 불을 지르면서 분황사도 타버렸는데, 그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원효 생전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신 문서 최상단에 있는 초상화가 남아있다. 일본 교토의 고잔지(高山寺)에 원효와 의상의 초상화를 소장하여 현대까지 보존한다. 이 그림들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에(明恵)[4]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원효를 존경해 신라 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한 것이다. 지금은 신라의 원본이 멸실되었으므로, 묘에의 이모작이 당대의 원효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라고 여긴다.

실제로 화풍에서 일본풍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므로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다고 추정한다. 족좌에 신발을 벗어놓은 것이 옛날 형식이고 더부룩한 수염과 검은 피부의 담대한 인상이 문헌 기록에 남은 원효의 파격적인 행적과 걸맞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고려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어진이 현대까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중일 불교계에 걸친 원효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속성은 경주 설씨(薛氏)[5], 이름은 사례(思禮),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었다.

불립문자 주장으로도 유명하다. 본인은 역설과 비유를 활용한 많은 저작을 남겨 말로 표현 못할 진리를 전하려 노력했다.[6]

2. 생애[편집]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7]에서 내마(奈麻)였던 담날(談捺)[8]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9]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10]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는 추정일 듯.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원효에 대해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는 송고승전에서 관채지년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11] 29살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알려져 있지만 문헌적으로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은 1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지선사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는 굴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지선사의 가르침을 청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이 낭지선사라는 사람이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에 영취산(靈鷲山)에 법장을 열었다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으로,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취사를 지어서 머물었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보아도 도무지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었다는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하며, 애초에 이 두 문화재의 발견부터가 반고사터를 발견하기 위한 폐사지 답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번의 입당 시도를 하다가 실패,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12]으로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13][14]

다만 원효의 아내가 요석궁의 과부 공주라는 이야기는 일연이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당전, 행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대신에 향전에서 한 두가지의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송고승전이나 서당화상비, 삼국사기 등에서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석 공주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15]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니거나,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혹은 산,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원효는 파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었고 여러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 교화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16]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 참석을 반대했다.

왕비가 병이 나자 약을 찾아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바다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얻어 돌아왔다. 그런데 용왕이 준 불경은 처음부터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인 데다 내용도 어려워서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왕명을 받고 순서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안 또한 "불경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승려는 원효 한 사람뿐"이라며 풀이하기를 사양했다.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달라는 왕명을 받고 를 타고 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4일만에 소(疏, 해설집) 5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4일만 더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3권을 써서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친 뒤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70세의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7]

2.1. 입당 시도와 깨달음[편집]

젊을 적 원효는 촉망받는 유능한 승려로, 의상과 함께 나라로 유학을 가려 했었다. 첫 번째 입당은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입당 시도에서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져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차에 동굴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 잠결에 목이 말라 웬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벌컥 들이키며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서 주변을 보니 충격과 공포. 동굴은 파묘()[18]된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건 해골 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경악한 그는 구토를 했는데, 직후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고는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 이 때 같이 가던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화엄종을 연구한 뒤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바로 이 일화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누구나 다 안다는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이다. 해골물 일화에서 파생된 드립으로 인터넷상에선 '~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니었다.''~인 줄 알았을 땐 만족했는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니까 화난다.'는 내용을 줄여서 해골물이라고 한다. 미미쿠키가 대표적인 예. 원효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 중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졌고, 이런 고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층의 드립에서도 종종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해골물을 검색하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별 상관 없지만 어감 때문인지 고인물 드립에 응용하기도 하며, 와 샌즈! 드립이 확대된 이후로는 샌즈물 드립도 생겨났다.

다만 이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는 송나라 말기에 저술된 임간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꽤 후대에 등장하는 요소다.

원효의 깨달음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송고승전의 의상전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원효와 의상이 입당을 시도하였는데 비가 와서 어느 토감(土龕) 사이에 머물러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본인들이 묵은 장소가 해골이 있는 오래된 무덤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비바람이 불고 땅이 질척여 무덤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그런데 무덤인 것을 알고 나니 두려운 귀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원효는 전날에는 평범한 토굴인 줄 알아서 편하게 잤었지만 지금은 해골이 널부러져 있는 무덤인 것을 알고는 귀신을 보게 되었다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그가 비를 피해 토굴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니, 다음 날 그 토굴이 반쯤 무너진 무덤이라고 알게 되자 그날 밤엔 도깨비가 우글거려서 '모든 것이 마음 먹기 달렸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이야기가 합쳐진 버전, 그러니까 동굴인 줄 알았던 게 무너진 무덤이고 해골물도 마셨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원효가 사실은 의적(혹은 의상)과 더불어 중국에 단기간이나마 유학하였고, 유학 기간 동안 삼장법사 현장의 밑에서 공부하는 한편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다.(관련 기사)

3. 평가[편집]

"<대승기신론>은 대승을 본질로 한다. 그것(대승)은 텅 비어 고요하며, 깊고 그윽하다. 그윽하고 또한 그윽하지만 어찌 만상(萬像)밖을 벗어난 것이겠으며, 고요하고 또한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허나 만상 밖을 벗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5안(眼)으로도 그 형체를 능히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4 변(辯)으로도 능히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적은 것(無內)에도 충분히 들어가며, '작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큰 것(無外)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을 '존재'라고 하자니 진여도 그것으로 인해 공이 되고, '비존재'라고 하자니 만물이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굳이 말로 하자면 '대승'이다."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불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나 혼간지로 유명한 일본의 정토진종(또는 일향종一向宗)도 원효의 책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의 영향하에서 세워진 종파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3번 절했다고 써져 있다. 불교에서 3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19]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20]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21]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원효의 손자인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薛仲業)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자 감격하면서 그에게 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 감동했는데(嘗覽元曉居士所著金剛三昧論)
그 사람을 보지 못해 깊이 아쉽거늘(深恨不見其人)
이제 그 후손과 만나니 기쁘도다(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해야지(乃作詩贈之)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22]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23][24]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지 200년이 지난데다, 1명이 추던 것이 12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3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 같고 목은 여름 자라 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 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고려시대에도 숙종의천김부식이규보일연 등 인물들이 언급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신라 중기의 불교 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이처럼 불교 이론가, 교종으로서의 면모가 매우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인물인데, 민중에게 있어 '불교의 경전은 이해가 어려우니 그런거 너무 신경쓰지 말고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라.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면 된다'는 내용으로 대표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생활 불교인으로서의 면모도 상당한 인물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사실상 '발굴'한 것도 그의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비롯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일제강점기인 1942년 소설가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원효의 이야기를 다룬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이 소설은 원효 사상에 대한 의도적 오독으로 원효를 일제의 전시 동원과 식민 교육을 설파하는 특별한 인물로 조립해낸 전쟁주의와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을 정당화하는 장치에 원효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5]
  • 1962년 장일호와 최금동이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화한 바 있다. 제작/배급은 국일영화사가 맡고 음악은 황문평이 맡았으며 최무룡이 원효 역을 맡았다. 다만 필름은 유실된 상태이다.
  • 1967년 TBC가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요연속극 《원효대사》를 방영한 바 있는데 극본은 최금동, 연출은 서석주가 각각 맡았다. 박병호가 원효 역을 맡았는데 그가 TV에서 처음 맡아 본 승려 역할이었다.
  • 1969년 미시마 유키오의 연작소설 풍요의 바다 제 1권인 '봄눈(春の雪)'의 초반부에서 원효의 해골물 설화 내용이 작중 등장하는 스님의 설법의 내용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 1979년 11월 KBS 《일요사극 맥》 '성사의 길' 편에서 임혁이 원효 역을 맡았는데,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과 요석공주와 맺어지는 줄거리를 담았다. 1995년 4월 1일자 KBS 1TV 《역사의 라이벌》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86년 KBS1에서 방영한 《원효대사》라는 8부작짜리 미니시리즈 사극이 있는데 극본은 김운경, 연출은 최상식으로 전무송이 원효 역을 맡았다. 마지막에 성인이 된 아들 설총이 원효의 절로 찾아가니 원효가 마당을 쓸라고 시켰는데 깨끗하게 쓸고 나니 원효가 그걸 보면서 "가을 마당에 낙엽 1~2잎은 있어야지."라고 하면서 몇 개 흩뿌리는걸로 마무리한다. 이는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설총과 승려로 남은 원효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재생 목록
  •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서학이 연기했다.
  • 2006년 봉준호의 영화 <괴물>에서는 "해골물 처먹은 놈"이라고 언급된다. 그리고 의료진이 해골물을 마신 게 원효대사인지 사명대사인지 병림픽을 벌이는데, 영화판에서는 "원효대교의 원효가 그 원효대사인가?"라는 말에 다른 의료진이 "그럼 반포대교는 반포대사냐?"라고 빈정거리는 걸로 끝나지만, 소설판에서는 짬 높은 의료진이 "원효대사가 아니라 사명대사가 해골물을 마신 거야"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신참 의료진을 찍어누르는 내용으로 나온다.
  • 2013년 푸른거탑 시즌 1 에피소드 8 발렌타인데이의 기적에서 아다리걸린 상태에서 대침투 작전에 투입된 최종훈김재우김호창이 흙 구덩이를 발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들어가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 우연히 이불을 발견하게 되는데 실상은 죽은 멧돼지의 썩은 가죽이었고 추위를 녹일려고 할 참에 갑자기 목이 말랐는데 우연히 어느 바가지에 고인 물을 발견. 바가지의 물을 마셨는데 알고보니 짐승뼈에 고인 물이라는 내용으로 패러디되었다.
  • 2017년 10월 16일 채널A 《천일야史》 43회에서 단편으로 <원효대사의 몰래한 사랑>이 방송되기도 했는데 이대진이 원효를 연기했다.
  • 윤인완-양경일의 만화 <신암행어사>에서는 원효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오지만 이 만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처럼 이 인물 또한 원효라는 이름만 땄다. 원효(슈퍼스트링) 문서로.
  • <개그콘서트> 코너 대화가 필요해에서 장동민이 역사 숙제로 자기 가족의 위인 조사를 위해 김대희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효로 가는 듯 했는데 알고보니 해골바가지가 자기들 위인.
  • 2020년 래원이 '원효대사'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냈다.[26]
  • 샌즈물을 마셨디고 한때 유행했다:원효대사는 깨달음을 얻고 해골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와 샌즈!

5. 기타[편집]

원효는 뛰어난 능력과 특이한 행동만큼 관련된 일화/야사도 많았다. 삼국유사에는 661년 김유신이 평양을 포위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러 고구려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전달해준 군량을 받고 김유신에게 송아지와 난새(鸞鳥)의 그림을 그려서 보냈는데, 원효가 이 그림이 "속히 돌아가라."하는 암호문임을[27] 해석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유신은 돌아오면서 고구려군의 포위 공격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외에도 뛰어난 신통력이나 승려로서의 뛰어남을 자랑하는 설화나 야사들이 꽤 되는 편이다.

이전까진 '나무아미타불'[28]이란 염불을 창시했다고 쓰여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무아미타불 등의 염불을 외우는 것은 원효 이전부터 정토교에서 강조했던 것이며 원효 역시 이 정토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이 원효로 인해 가난하거나 무지몽매한 이들도 나무(염불)을 외우게 되었다고 얘기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만큼 원효에서 따온 이름들도 많다. 서울특별시의 원효대교가 대표적이며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는 일제강점기에는 '모토마치(元町)'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를 광복 후 개명하는 과정에서 같은 한자(元)를 쓰는 원효로로 바꿨다.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원효로 역시 원효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의 46대손이 승려 석우다.# 그러나 의외로 이 부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원효의 행적이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양산형 무협지나 기타 국산 창작물에 등장하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나 도인들은 술이고 개고기고 뭐고 그냥 다 먹는다. 그리고 그게 현실화되었는데… 물론 이런 '자칭'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지만 스스로를 땡추로 지칭하고 파격적인 발언과 행동을 행한 승려들도 제법 많다.

원효결서라는 예언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 발견자라고 하는 말이 어디선가 전달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고, 결국은 남사고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격암유록[29]송하비결 같은 위서라는 의견이 회의주의자 사이에서 대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둘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떡밥이 되기라도 했지 원효결서는 그냥 묻혔다. #

해골물 일화가 하필 해골물 이다보니 언더테일 이후 와! 샌즈가 유명해지자 이것과도 엮이기도 했다.

의상자장도선 등과 함께 웬만한 고찰(古刹)들의 창건자가 원효라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다.국내의 원효 관련 사찰분포 척 봐도 원효의 일대기와는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고 원효의 유명세를 빌려서 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절들의 창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 승려들이 평생 절만 세우다가 입적해도 모자랄 판이다.

태권도의 유단자 품새 중 하나이자 마지막 품새인 일여(一如)가 원효대사의 사상을 토대로 엮어졌다.

6. 관련 문서[편집]

[1] 음력 3월 30일[2]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내린 시호. 자기 동생이자 해동 천태종을 연 대각국사 의천의 진언에 따른 것이다. 의천이 원효를 높인 이유는 본인이 추진하는 불교계 통합에 원효의 사상이 유용하다는 정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이때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을 세웠던 받침대만 남았다.[3] 이름은 중국 삼론학이라고 하나 중국 삼론학 역시 5세기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朗)이 시작하였다. 이후 길장(吉藏)이 승랑의 교학을 이어 삼론교학을 완성하였다. 길장의 조상은 안식국 출신으로 그 조상중에는 안세고가 있다.[4] 생몰년도: 1173년 ~ 1232년[5] 원효라는 글자 자체가 '으뜸 원(元)'자에 '새벽 효(曉)'자로 설날의 '설'을 한자로 쓴 것이다[6]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2005, p190[7]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만들어져 있다.[8]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9]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10] 원효와 그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순창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 6부의 촌장 가운데 '호진'의 자식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되었다 하여 가문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11] 관채지년은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올리는 어린 나이를 뜻하는 말인데 이게 15~16세 정도의 시기를 말하느냐, 8~9세 정도의 시기를 말하는냐에 대한 이견이 있다. 어쨌든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는 것이 현재로선 정설이다.[12] 거리에서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무열왕은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 장차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나쁠 것이 없다며 자신의 딸인 요석궁의 과부 공주를 이어준다.[13]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14] 일연은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파계가 아니라 실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게 되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무열왕이 말한 현인 탄생의 필요성 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15] 소성은 마음이 작다는 것, 거사는 재가불자를 의미한다. 즉 원효가 계를 어긴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이다.[16] 태조 왕건에도 인왕백고좌회가 나온다. 나라의 이름 높은 승려들을 두루 모아 여는 법회이다. 여기서는 도선이 법력으로 날씨를 바꾸고 황룡사 목탑을 기울이는 허구가 가미되었다.[17] 고선사 터는 덕동댐이 만들어져 수몰되었고 절터에 있던 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 보관 중이다.[18] 무덤이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19]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20] 산스크리트어(범어)로는 Dignāga, 한자로 뜻을 풀이하여 (대)역룡(大)域龍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21] 고대 덴노의 시호들을 일거에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22] 나머지는 고려 중기의 선승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고려 후기의 승려 야운이 지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23]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24] 이는 달리 말하면 원효가 범어나 범자를 알고 있어 노래 가사를 지을 정도였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원효가 신라 국내파임을 고려하면 당대 신라 불교계의 교육 역량이 범어 교육에도 미쳤음을 보여준다. 참고:삼국시대에 이미 범어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논문[25] 박균섭,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통해 본 전시동원체제와 식민교육의 성격>[26] 물론 가사의 내용들은 모두 제목과 따로 노는 플로우를 자랑한다.[27] '송아지 그림과 난새 그림'이라는 말은 한자로 적으면 화독화란(畵犢畵鸞)인데, 각 글자의 음을 반절(半切)씩 떼서 읽으면 '혹한(ㅎ/ㅗㄱ+ㅎ/ㅏㄴ)'으로 중고한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환(速還)이라는 말과 음이 같다고 한다.[28] 설명하자면 아미타불은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내생을 보장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여기에 관세음보살을 더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한데 동시에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둘을 묶어 염불한다고 해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렇게 묶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29] 현재 전해지는게 필사본이라는데, 그 필사라는게 사실상 천부교측에서 위작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