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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2

화엄오교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엄오교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엄오교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은 화엄종의 대성자(大成者)인 당나라의 승려 현수대사 법장(賢首大師 法藏: 643~712)의 저서로서, 자세한 책명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 또는 《화엄일승교의분제의(華嚴一乘敎義分齊義)》이다.[1]

이 책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의 개설서(槪說書)일 뿐만 아니라 화엄종(華嚴宗)의 입장에서 불교 전체를 조직 · 체계화한 불교 개론이라고 할 수 있다.[1] 때문에, 이 책에 의해 사실상 화엄종이 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1]

판본[편집]

법장(法藏)이 30여 세 때 지은 불교서라고 하며, 원본(原本)은 3권이었으나 송대(宋代)에 들어와서 개판(開版)된 송본(宋本) 4권이 있다.[1]

내용[편집]

내용은 10장으로 나뉘며, 앞의 8장(上卷)은 교판(敎判)에 관한 것, 뒤의 2장(중 · 하권)은 교의(敎義)에 관한 것이다.[1]

특히 4장의 5교10종(五敎十宗) 교판은 천태(天台)의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과 함께 중국 불교의 독자성을 나타낸 것으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1]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2021/03/22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열린논단]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 열린논단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기자명 현응스님   
입력 2010.02.21

2010년 2월 18일 17회 열린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배경과 그 사상적 특징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이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가 덧없고 허망한 것을 일깨워주어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게 해주는 효과를 이끌어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파불교,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발전과 정립을 거쳐 더욱 정치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론적 가르침으로부터 삶과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변화시켜 가야 하는지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야 하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즉 초기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은 개인의 삶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목적, 방법, 이유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족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부각된 문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브라마니즘을 위시한 당시의 종교와 사상은 대다수 실재론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무상, 무아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일과 그런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주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소품, 대품 등)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실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우 희유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종류나 형태의 실재성 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실재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 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으며,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과연 삶과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그 해답을 내 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다.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다음과 같은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사람은 일상에서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다스려야 합니까?”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머묾 없이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아, 인, 중생, 수자라는 각종 상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집착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는 결국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명한 ‘응무소주이생기심’의 구절은 ‘응무소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읽어야 대승의 취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중국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일러 ‘묘행무주(머물지 않는 미묘한 행위)’라 해석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머물지 않음)’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을 밝힘’이라 하지만 사실 대승의 가르침은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잠정적, 가상적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의 불교가 연기론을 공관사상으로 발전시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 가, 중이라는 독특한 존재론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관인 것이다.


대승경전과 소승(초기)경전의 내용적 차이는 무엇일까?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표현하면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며, 공, 공관, 유식, 여래장, 법계, 법신, 진여 등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승경전이라고 부르는가? 물론 아니다.

법성, 공성, 연기성, 불성은 다 동의어이며, 나아가 유식성, 법계, 진여, 여래장 또한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공, 여래장, 진여 등의 용어로 세계를 설명하면 대승이라고 보고, 연기, 무상, 무아라는 용어로 설명하면 소승이라고 보는 태도는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조삼모사에 속는 원숭이와 비슷한 꼴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대승경전의 진면목은 무상, 무아 또는 공이나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에 살면서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부분이다.

초기대승경전인 십지경(화엄)에서 나타나는 10바라밀은 이러한 대승의 역사적 실천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인다. 6바라밀에 이은 방편, 원, 력, 지, 이 네 가지 바라밀은 대승불교 회심의 역사적 상상력으로서 연기적 깨달음이 어떻게 역사화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도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절대주의란 잠정, 가설, 의도성의 색깔을 띤 독특한 절대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대승경전을 보면 반야경은 공(연기)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입장에 서면서도(무주) 여러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장엄을 설하는 것이 된다. 공과 연기를 설하는 것은 초기불교 이래로 줄곧 해 왔던 일이다. 대승의 시대에 오면 공과 연기라는 평면적 세계에 불교 특유의 실천론을 덧붙이는 노력을 하게 되며, 그러한 내용들이 모든 대승경전에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은 법계연기나 화엄교관이라는 수행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서서 다양한 바라밀을 행해 법계를 장엄하는 것에 대해 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경전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역사적 실천론인 것이다.

정토, 열반, 법화 등의 대승경전도 같은 취지이다. 즉 대승경전은 마음을 밝히거나 세상을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도의 사회적 실천의 자세, 목표로 삼는 이상사회(정토), 그리고 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설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보디사트바)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보디는 연기적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는 중생계의 삶과 역사를 뜻한다. 즉 보디와 사트바가 결합된다는 것은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왔지만,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읽어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승의 취지는 보살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구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기, 공, 반야”만 강조하는 불교, “개인적인 몸과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불교

불교는 초기불교 이후로 각 부파의 아비달마 시대를 거쳐 기원 전후에 이미 연기론과 역사적 실천을 접목시킨 대승불교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불교가 오히려 초기불교의 문제의식 수준으로 회귀하여 대다수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과정에서 연기, 공, 반야를 설하는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불교가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상실하고 연기론의 범주로 물러나 있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연기론의 적용 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도 정작 연기와 공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일체의 존재현상이 상호 연기적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개인의 몸과 마음이 다른 영역과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사념처라 하여 존재 현상을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크게 보면 모든 존재들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잘 살피자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근자의 불교포교의 방향과 그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불교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중국 등의 소위 북방불교는 물론이고 미얌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나 티벳불교까지 모두 다 연기론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으며, 그 연기론의 적용대상과 범주를 개인의 몸과 마음 문제에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현응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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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7:03 IP삭제
최근에 한국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사념처 수행의 대상이 사회적인 범위로 확대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등은 고결한 안목으로 보인다.
스님의 지적대로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이라" 설명하고 가르쳐왔다. 아마 지금도 대다수의 강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대승경전을 새롭게 읽어내는 스님의 안목은 존경스럽다. 이 글에 대한 찬탄의 소리가 잇달아 나올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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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박나○ (비회원) 2010-02-25 00:24:52 IP삭제
불교평론에 올라온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를 읽었다.

그 동안 어느 강사나 강주나 학자가 쓴 글 보다도 감명 깊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역사를 꽤뚫은 자만이 투시 가능한 서로의 장단점을 그는 읽고 있었으며 그러한 안목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내고 있었다.
금강경을 마음을 일으키라는 '생기심'의 메세지로 읽는 것이라든지 화엄경을 '사회적 실천론'으로 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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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각묵 스님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Ⅰ) : 네이버 블로그

각묵 스님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Ⅰ) : 네이버 블로그





각묵 스님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Ⅰ) 아비담마 / 수행의 길

2017. 7. 22. 8:33



https://blog.naver.com/hrsmc/221057062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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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Ⅰ)



이 글은 초기불전연구원의 아비담마 게시판에 각묵스님께서 2002년 12월 24일부터 2003년 1월 21일까지 기간 동안 올리신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아비담마(Abhidhamma)란 ‘부처님의 가르침(담마)에 대하여(아비)’라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평생 설하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제자들의 노력이 정착된 것이다.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物‧심心의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법(dhamma)이며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dhamma)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사유하여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인 법의 특상을 여실히 알아서 괴로움을 끝내고 열반을 실현하려는 것이 아비담마다.



Δ 7. 아비담마 소개 글들을 올리면서...



어떻게 하면 아비담마를 조금 더 쉽게 설명해볼 수 있을까 고심하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전에 미얀마에 있을 때 아비담마 입문서를 만들어보자면서 몇 십 쪽 글을 써둔 것이 떠올라 노트북의 파일들을 확인해보았는데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지금 부터 하나하나 올려보려 합니다. 거칠기도 하고 잘못 적은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읽다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시면 알려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까페 법우님들의 아비담마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각묵 합장



Δ 8. 준비운동



아비담마는 차디찬 얼음물과 같다. 여기서 차다는 말은 냉냉하다, 냉정하다, 감정이 없는 냉혈인간과 같다, 그래서 재미없고 무미건조하다는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차디찬 얼음물을 건너가야만 한다. 다른 경치 좋고 따뜻하고 사람을 끄는 물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물에는 반드시 악어나 상어나 뱀들이 또아리고 있어서 산천경계에 속고 따뜻함을 즐기는 사이에 저 언덕은 고사하고 그 물에서 죽임을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니 이 차디찬 물을 건너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쉬운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미얀마 사야도께서는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것이 최신형 보잉777 비행기의 수퍼퍼스트 클라스 자리에 열반행涅槃行 티켓을 예매해 두는 것이라고 침을 튀기며 말씀하시고 나서 이것은 농담 같지만 진담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 차디찬 얼음물에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발가락정도 담그고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차디차고 냉엄한 맛을 즐기기란 도저히 어려울 것이다. 아니 마음으로는 뭐 이런 게 있나, 아이 골치야, 아이 재미없어, 차라리 어려운 의학서적을 읽는 게 낫겠어, 옛날 남방 스님들이 날은 더워 밖에 나가기는 싫고 절간에서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이런 골치 아픈 것을 만들어 사람을 괴롭히네, 이게 불교 수행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머리로 알음알이를 굴리는 짓거리지, … 등등 온갖 불선법不善法을 다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사전 준비운동이 아주 필요하다 하겠다. 그 준비운동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여기서 꼭 하고 싶은 말은 아비담마 공부를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이 통밥을 굴려보라는 것이다. 한참 통밥을 굴리다가 조금 지나면 이제 통밥도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처음 아비담마를 접하며 수 없는 알음알이가 일어나 무수한 통밥을 굴리면서 대림 스님을 괴롭혔다. 대림 스님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잘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통밥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통밥으로는 도저히 아비담마의 냉엄함은 해결이 되지 않음을 마침내 절감했다. 나로서는 아주 중대한 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좌정하고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기로 들며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적용시켜 보았다. 길이 보였다. 법우님들도 좌정하고 앉아서 차근차근 아비담마의 가르침대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시라. 그러면 거기서 길이 보일 것이다. 일단 이해하고 나면 아비담마보다 쉬운 게 없다 싶을 것이다. 진리란 알고 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란 것을 나는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감상(監)하고 나 자신을 닦으면서(修) 재삼 느꼈다. 어쨌든 준비운동은 많으면 많을수록 얼음장과 같은 이바담마의 차가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급적 감정(=온기, 열기)을 많이 담은 준비운동을 도와주는 글을 써야겠다고 고심하다가 대화체로 적는 것이 제일 읽기 쉽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이 법우님들께 조그마한 길잡이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준비운동이 필요 없는 분은 곧바로 저 얼음물로 들어가서 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시기를!



Δ 9. 아비담마와 아비달마



문: 스님, 요즘 초기불교니 근본 불교니 남방 불교니 아비담마니 위빳사나(vipassanā)니 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알던 불교 즉 대승불교나 선불교를 위시한 북방 불교 전통과는 다른 불교 체계를 알게 되면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과연 북방에는 이때까지 전혀 소개되지 않은 것인가요?



답: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이런 가르침은 중국불교를 통해서 이미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기불교는 아함경(阿含經, Agama)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것이고, 아비담마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ativada)라던지 특히 구사론(阿毘達摩俱舍論, Abhidharmakosa)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것이고 위빠사나는 관觀이란 말로 즉 사마타(samatha)-위빠사나(vipassanā)는 지관止觀이란 말로 잘 알려진 것들입니다. 증도가證道歌로 유명한 영가永嘉 현각玄覺 스님의 영가집에서 이런 사마타와 위빳사나와 우필차upekkhaa, 사捨라는 말이 4장과 5장과 6장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와 고려를 지나서 조선조 오백 년 간 엄청난 탄압을 받으며 선불교만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 보니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천년 이상을 깊이 사유해오던 이런 불교 용어들이 그만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슬픈 현상이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아직 살아있는 남방에서 생생하게 전승되어오다 보니 남방불교라 이름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우리 선조들께서는 천년이상을 심도 깊게 사유하고 생활 속에서 실현하려하시던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문: 그렇군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줄곧 아비담마란 용어를 쓰시는데 한문권인 우리나라에서는 아비달마阿毗達摩란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까. 또 아비다르마란 용어도 쓰는 것 같은데요. 그리고 남방 불교 국가에서 수행하신 분들은 스님처럼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하시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들 단어들이 차이가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한문 아비달마阿毗達摩는 산스끄리뜨 Abhidharma(아비다르마)를 음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용하는 아비담마는 빠알리 Abhidhamma를 한글로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 원 의미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굳이 아비담마란 빠알리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제가 지금 설명하고자하는 체계가 남방불교 즉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서 특히 미얀마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구사론을 번역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비다르마 꼬샤(Abhidharmakosa)나 아비다르마 구사론 혹은 아비달마구사론이라 표기하겠지요. 구사론은 북방에 전승된 부파 불교 소전의 산스끄리뜨로 표기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방 소전의 아비담마를 소개할 때는 아비담마라는 용어를 사용해야하고 북방소전의 아비다르마를 소개할 때는 아비다르마란 용어를 사용해야만 오해의 소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다르마가 큰 줄거리는 같지만 용어의 정의나 제법諸法(dhamma)을 분류하고 그들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견해의 차이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하는 체계는 남방 아비담마(Abhidhamma)이기 때문에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Δ 10.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1)



문: 그러면 아비담마 불교가 초기불교나 근본불교입니까? 요즘 남방불교를 근본불교라 소개하고 위빳사나 수행법을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고 아주 강한 톤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요.



답: 너무 중요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자면 ‘아니다’입니다. 우리가 초기불교나 근본불교 혹은 원시불교 기본불교 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는 현존해 있는 남방의 4부 니까야 즉 디가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āya, 中部)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相應部)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 Nikāya, 增支部), 숫따니빠따(Suttanipāta, 經集), 담마빠다(Dhammapāda, 法句經), 우다나(Udāna, 自說經), 이띠웃따까(Itivuttaka, 如是語經)와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북전北傳의 4아함 즉 장아함長阿含, 중아함中阿含, 잡아함雜阿含, 증일아함增一阿含과 의족경佛說義足經 법구경 등과 남북전 율장 중 초기 전승 등에 제한되어야 합니다.



아비담마는 분명 불멸후에 발전되어 오다가 남방불교 국가에서 전승 발전되어온 체계입니다. 그러니 남방불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남방 상좌부 불교의 이론적이 토대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이론체계를 갈고 닦아서 이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전승해온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법도 분명히 후대에 발달한 기법입니다. 물론 위빳사나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빠알리어이고 그 용어들은 대부분 초기 경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법 자체를 부처님의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 하는 것은 무리가 큽니다. 부처님 당시를 포함해서 B.C. 3세기경에 불교가 스리랑카로 전래되어 남방에서 역사적으로 전해내려 오던 수행 기법은 청정도론淸淨道論(Visuddhimagga)의 정품에서 40가지 명상주제로 체계화되고 혜품慧品에서 10가지 혹은 14/16가지 위빳사나냐나로 철저하게 이론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남방에서 위빳사나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는 몇 가지 기법들 즉 마하시 사야도께서 주창하신 기법이나 레디 사야도께서 체계화한 기법이 우바킨 거사님에게로 전해지고 그것을 인도의 고엥카 거사님이 전 세계적으로 유통시킨 수행기법 등은 모두 청정도론淸淨道論에는 나타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해서 더 후대에 미얀마에서 완성된 기법입니다. 청정도론이야말로 아비담마 교학체계에 입각해서 경장을, 그 중에서도 4부 니까야를 중점적으로 주석한 주석서이니 남방불교의 실체가 아닙니까. 여기에 뿌리를 두고 더 후대에 발전되어온 수행 기법을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이라 한다면 너무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Δ 12.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인가? (2)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어떤 수행기법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출입식념出入息念(anapanasati)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격찬을 하고 있고 이 출입식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 당시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출입식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도와 과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수행 방법과 명상주제는 벌써 그 사람의 기틀에 따라서 부처님 당시부터도 다양하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방의 간화선이나 묵조선 나아가서는 염불선까지 아니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까지도 그리고 남방의 위빳사나와 사마타 기법은 물론이고 이 모든 수행법들이 불교의 가르침 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이라면 자기에 맞는 방법을 택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고 봅니다. 거기서 오는 문제점은 여러 경들이나 논서들을 보면서 점검하고 널리 다른 수행하는 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탁마하면 된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에서도 벌써 40가지로 명상주제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절에서 일상으로 행하는 염불, 기도, 간경, 축원 보시 등의 모든 실천이나 수행이나 의식이 이 40가지 안에 다 포함된다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남방의 의식이 있는 스님들은 결코 아비담마를 부처님 직설이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비담마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집대성한 가르침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담마를 몇 천 년 전승해온 자기 전통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불교역사에서 남방 아비담마보다 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수행을 염두에 두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노력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간화선이야말로 불교의 최상승 수행이라고 주장하려면 튼튼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전승되어오는 간화선이야말로 부처님 수행법의 골수 중의 골수라고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감사합니다, 스님. 제가 너무 외람되이 주제넘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 한편이 시원하기도 하고 뭔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스님께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시는 게 남방에서 전승되어 발전되어온 아비담마 교학체계라는 것이지요?



답: 그러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비다르마나 아비달마란 용어대신에 아비담마란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Δ 13. 아비담마와 위빳사나는 어떤 관계가 있나?



문: 또 주제넘게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궁금한 게 많거든요.



답: 좋습니다. 무엇이던 질문해보세요. 단 아비담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 스님, 남방에서 발전되고 지금까지 잘 전승되어온 이 두 체계 즉 아비담마와 위빳사나는 서로 연관이 있습니까? 아비담마는 남방의 교학체계고 위빳사나는 그런 남방 교학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일거라는 생각이 스님과 대화하면서 강하게 드는데요?



답: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렇습니다. 아비담마 없는 위빳사나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즘 상당수의 한국 분들이 아비담마에 대해서 전혀 사유해보지도 않고 위빳사나를 체험위주의 신비주의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아비담마를 배울 기회가 없어서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위빳사나는 극단의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법에서는 인터뷰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절대 비방이 아님) 한국에서 위빳사나를 지도하는 분들 가운데서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는지 걱정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온 몸에 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든지 몸속이 보인다든지 힘을 몸의 특정부분으로 모을 수 있다든지 하는 경계에 빠져 그런 유희를 즐기는 것쯤으로 위빠사나를 호도하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해대는 분들이 많거든요. 또 잘못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삐띠(pīti, 喜悅)이라느니 행복(sukha, 幸福)라느니 평온(upekkhā, 平穩)이라느니 초선初禪의 경지라느니 이선二禪 ... 사선四禪 ... 무소유처無所有處라느니 하면서 인터뷰하는 분들이 오히려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요.



경계는 대부분 위빳사나를 하지 않고 집중(禪定)에 맛들이려는 데서 생깁니다. 이것은 사마타의 경지에도 못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런 것쯤은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9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 축에도 들지 못하는 참으로 가소로운 경계입니다. 남방의 제대로 공부하고 수행한 스님들은 아비담마가 위빳사나요 위빳사나가 아비담마라고 거듭 설하고 계십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제일 먼저 출판한 이유도 위빳사나 수행법에 대한 튼튼한 이론 체계인 아비담마를 평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거듭 강조하면서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시는 몇 몇 한국 스님들과 재가 불자님들은 아비담마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위빳사나 수행은 진전이 없다면서 격려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이 없는 아비담마는 그야말로 메마른 고담준론일 뿐입니다. 수행을 통한 확인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어려운 빠알리어나 그것을 그냥 한문으로 옮긴 무슨 뜻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기호들의 나열인 듯한 무미건조한 것이 될 소지가 너무 많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뒷받침 될 때 아비담마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物-심心의 현상에 대입하여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비담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공동번역하면서 제가 절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도 아비담마를 Philosophical Psychology(철학적 심리학)라고 소개하는데 이런 지적 탐구를 자신의 심리상태를 돌이켜보는데 적용시키는 가르침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출처: 초기불전연구원 http://cafe.daum.net/chobul


아비담마란 무엇인가?  아비담마 / 수행의 길   
2017. 7. 20. 7:11
복사https://blog.naver.com/hrsmc/221055443199

아비담마란 무엇인가?

각묵 스님 / 초기불전연구원

 
아비담마(Abhidhamma)는 ‘법法’으로 번역되는 dhamma에다 ‘위로, ~에 대하여, 넘어서’를 뜻하는 접두어 ‘abhi-’가 첨가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래서 일차적인 의미는 ‘법에 대한 것, 법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석서에서는 ‘abhi-’를 ‘뛰어난, 수승한’, 즉 ‘넘어선’의 의미로 해석한다. 붓다고사는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서 ‘abhi-’라는 접두어는 ‘뛰어나다, 특별하다’라는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수승한 법(1)’이란 뜻이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승법勝法’이라 옮기기도 했다. 아비담마라는 단어에서 키포인트는 무엇보다도 담마(dhamma, 法)이다. dhamma(Sk. dharma)는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불교 문헌에서도 예외 없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 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는 「앗타살리니」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ņ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īvatā, 개념이 아닌 것) (주: nissatta-nijjīvatā의 문자적인 뜻은 ‘삿따(중생, satta)도 아니고 영혼(jīva)도 아님’이다. 즉 중생이라는 개념(빤냣띠, paññatti)이나 영혼이라는 개념이 붙을 수 없는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paramattha)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념이 아닌 것’으로 옮겼다. (궁극적 실재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2의 해설을, 개념은 8장 §29를 참조할 것.)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2)

 
이것을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⑴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⑵ 물‧심의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라는 용어도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비담마는 첫째, 부처님 가르침(Dhamma)에 대한(abhi-) 것이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법문法門을 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에서 법문法門이라 번역한 원어는 빠알리어로 담마 빠리야야(dhamma-pariyāya, V.i.40; D1/i.46; M5/i.32 등)인데 빠리야야는 다른 말로 ‘방편’이라고도 번역되었듯이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설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초기경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나는 것[施‧戒‧生天] 을 설하셨고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셨다.(3) 이렇게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이거나 높거나 낮은 단계의 수많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거나 오해하고 호도할 우려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제자들 사이에서 아주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있어왔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아비담마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이해정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붙이지 않고 설한 가르침이 아비담마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빠리야야(방편)가 아닌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āya-desanā, 비방편설)’라고 논장의 주석서들에서는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4)

 
그래서 붓다고사 스님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뛰어난 법과 특별한 법’으로 아비담마를 정의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승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부처님께서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제일 먼저 천상의 신들에게 가르치신 것 예를 들면, DhsA.12-13.이라고 신화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아비담마는 물物‧심心의 여러 현상(dhmma)을 대면하여(abhi-) 그것을 잘 분석하여 그것이 유익한 것[善法, kusala-dhamma]인지 해로운 것[不善法, akusala-dhamma]인지, 그런 현상들은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철저하게 알아서 저 고귀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장 스님이 구사론에서 대법對法이라 옮긴 것이 돋보인다.

 
물‧심의 여러 현상을 법이라 한다고 했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더욱더 정확하게 정의한다. 가장 잘 알려진 법에 대한 정의가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에 나타난다. 붓다고사 스님은 ‘자신의 본성(사바와, sabhāva, 고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이라 한다’(5)고 정의하고 있는데 법에 대한 정의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에 대해서 아난다 스님은 ‘전도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본성이다’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6)

 
이것을 종합하면 본성(sabhāva)이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성질’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법(dhamma)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최소 단위로 하나의 마음(citta), 52가지 마음부수(cetasika), 18가지 물질(rūpa), 하나의 열반으로 모두 72가지를 들고 있다.(7)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 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은 개념(빤냣띠, paññatti)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닌 것이다.

 
물론 법(dhamma)이란 의미를 광의로 해석하면 이런 모든 개념(paññatti)들도 모두 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최소단위로서의 법은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paramattha)’으로 강조해서 부른다. 그러나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구경법을 뜻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나’ 밖에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에서부터 부처님께서는 dhamma를 제 육근인 마노(mano, 意)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계신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기능[前五根]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현상일지라도 사실 마노(mano, 意)가 없으면 판독불능이고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겠다.(8)

 
일단 전오식前五識에 의해서 파악된 외부의 세계도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즉시에 마노의 대상인 dhamma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외부세계도 일단 나의 대상이 되어 내 안에 받아들여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외부물질을 다섯 감각기능[根]들의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름도 고짜라(gocara)라고 붙이고 있는 것이다.

 
고짜라는 소(go)가 풀을 뜯기 위해서 다니는(cara) 영역이나 구역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알음알이[前五識]가 움직이고 다니고 의지하는 영역이라는 말이다. 대상이란 보는 것 등의 기능[根]이나 그런 알음알이[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술어라 하겠다.

 
이처럼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강조해서 말하는 법(dhamma)이다. 역자들은 이렇게 법을 내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불교를 이해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런 제일 중요한 측면을 놓쳐 버리면 법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인 법에 대해서 배우고 사유하고 고뇌하고 찾아내어 이를 바탕으로 해탈, 열반을 실현하는 튼튼한 기초를 다져야 하거늘 오히려 법은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저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래서 밖으로만 신심을 내어서 무언가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가 잘 안되면 법은 그냥 불교지식이나 불교상식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매 찰나를 법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법을 내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비법에 온갖 관심을 쏟아 붓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법(dhamma)을 이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부처님 가르침(Dhamma) 역시 의미를 잃고 만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Dhamma)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으로 법은 오직 하나의 의미뿐이다.

 
이런 부처님 말씀을 골수에 새기고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dhamma)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사유하여 무상, 고, 무아인 법의 특상을 여실히 알아서 괴로움을 끝내고 불사不死(열반)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주1: ayam pi dhammo dhammātirekadhammavisesa.t.thena abhidhammo ti vuccati. - DhsA

주2: dhamma-saddo pana ayam pariyatti-hetu-gu.na-nissattanijjīavatadīsu dissati. DhsA.38.

주3: dānakathaā siilakathā saggakathā. D1/i.3; M1/i.56 등

주4: abhidhammakathā pana nippariyāyadesan? - DhsA.222

주5: attano pana sabhāvam dhārentī ti dhammā. DhsA.39

주6: bhāvo ti aviparītatā vijjamānatā, saha bhaavena sabhāvo - DhsMT.25

주7:  28가지 물질 가운데서 10가지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은 최소단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72가지 구경법에 대해서는 6장 §4 해설 참조.

주8: 본서 4장 인식과정의 길라잡이’ 참조. 
[출처] 아비담마란 무엇인가?|작성자 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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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각묵 스님의 아비담마 왕초보 입문 (Ⅰ)|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