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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5

도올논어강의 20장 신종추원 (제사의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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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추원(愼終追遠)
2015.08.11 16:19 재휘애비溢空총루
카테고리논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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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논어강의 20장 신종추원 (제사의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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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논어강의 22장 제사와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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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특질

○ 모든 생명은 끝이 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질이다.(生滅이 있다)

○ 유기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이 특질이다.





□ 愼終追遠(신종추원)

○ 愼 : 삼간다, 신중하게 한다.

- 삼간다는 동사의 주체를 죽는 사람 당사자로 볼 수도 있으나

- 愼의 주체는 그 후손에 해당되는 것임

- 喪에는 복상의 기간이 따른다. 공자는 3년喪의 실제적 창립자였다



○ 終 : 喪 : 인간의 생명의 終焉을 의미, 삶의 마감, 곧 죽음

-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끝이라고 하는 것을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 혹자는 주어를 죽는 사람 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음

- 그러나 대개는 죽은 자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의 태도로 봄 : 喪禮를 신중하게 하라 - 상례 : 흉례에 속함

- 모든 생명은 끝이 있다.

- 모든 유기체는 시작과 끝이 있다.



○ 遠 : 나에게 멀리 있는 조상

- 한 인간이 죽은 시점에서 3년까지의 복상기간을 喪의 기간으로 본다면

- 3년이 지나게 되면 이 죽은 사람은 나에게서 멀리 있게 된다

- 그 때는 愼의 대상이 아니라 追, 즉 추모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오스왈드 슈펜글러(Oswald Spengler, 1880 ~ 1936)

○ 독일의 역사학자, [서구의 몰락(Der Undergang des Abendlandes)]으로 유명

토인비에게 영향을 줌

○ 역사(문명)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그 문명은 태어나고 죽어야 한다.

○ 모든 유기체(organism)는 시작(生)과 끝(滅)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기체의 최대 특질이다











□ 四禮(사례)

○ 冠婚喪祭 : 冠婚(성인식, 결혼식) = 가례(嘉禮)

(관혼상제) - 冠禮를 거쳐야 士가 됨 그래서 士冠禮라고도 함 , 字를 받음

- 婚禮는 본래 昏임 , 결혼식은 음과 양이 엇갈리는 시간에 혼례를 올림

혼례의 원래 의미는 결혼례라는 뜻이 아니고 황혼례라는 뜻임,

음과 양이 교접되는 하루의 황혼 시점에 예를 올린다.

중국에서는 終身大事라고 함

- 喪禮 : 흉례(凶禮) : 사람이 죽었을 때가 喪

1. 빈례(殯禮) : 빈소 차리는 예, 草墳의 경우

2. 장례(葬禮) : 무덤을 만드는 예

- 祭 : 길례(吉禮)

상례를 거치고 나면은

죽고 나면 나로부터 멀어진다.(遠, 조상들)



○ 신종(愼終) : 상례(喪禮)

○ 추원(追遠) : 제례(祭禮)







□ 예로부터 나라에서 행하던 의례를 다섯 가지 예로 분류

1. 길례(吉禮) :

2, 흉례(凶禮)

3, 군례(軍禮)

4, 빈례(貧禮) : 사람이 죽으면 빈소를 차림, 마당에다 썩힘, 나중에 뼈를 골라 묻는 것을 장례

5. 가례(嘉禮)







□ 종교란 무엇이냐?

○ 종교의 주제

-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주제를 神이라고 생각하는데

- 이러면 종교란 문제를 풀 수가 없다

- 모든 종교의 주제는(the main theme) 신(God)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 (Death)이다.

죽음은 곧 유한성(Finitude)의 문제이다.

- 이러한 유한성의 인간이 이러한 유한성에 만족하면 되는데 그렇지를 못 한다는데 종교의

문제가 대두

- 인간에게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은 언어이다.

“아이고 좋아 죽겠네” “아이고 맛있어 죽겠네” “귀여워 죽겠네” 등

우리 언어생활에 죽음이라는 것이 깊게 깔려 있음.

- 언어가 생겨나면서 죽음이라는 문제가 보편화되었다

- 인간의 유한성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다.





○ 인간의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 : 시간관점

1) 시간 밖에서(beyond time)해결하는 방법 : 기독교, 천당(生滅이 없다)

- 인간이라는 것은 원래 시간 밖에서 온 존재인데 죽고 난 다음에는

시간 밖으로 다시 가는 것이다 : 유한성이 해결 됨

-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죽음과 동시에 해방되어 하나님 아버지한테 감.

- 모든 고대 종교의 유한성해결 방식





2) 시간 안에서(within time)해결하는 방법 : 유교

-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그러나 유한한 존재의 연결은 무한하다.

- 바로 제사라는 방식은 이러한 시간 안에서의 해결 방법이다.

- 나는 죽지만 후손들에 의해서 愼終追遠된다.

- 나는 죽지만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손들에 의해서 영속성을 持續한다 : 유한성이 해결됨







○ 인간의 죽음을 해결하는 방법 : 공간적 관점

1) 개인적 해결(individual solution)하는 방법 : 기독교, 불교

- 나의 業을 나 혼자 해탈하여 간다





2) 집단적 해결(collective solution)하는 방법 : 유교

-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 - 주역, 곤괘문언 -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아 돌아 가는 복이 있다.

- 인간의 구원을 家단위로 생각하고 있다.

- 조상의 묘를 잘 쓰면 그 자손들이 다 잘된다.(집단적으로 해결)







□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 1903)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 진화론적 사고에 기초하여 모든 학문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 Ancestor worship is the root of every religion.

모든 종교의 뿌리는 조상제사이다. - 스펜서의 사회학 원리 중에서 -

-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야훼)은 유태인 종족의 신

-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된다. 여호와는 구약의 하나님이다.

-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낡은 약속(舊約) 속의 폐기되어야 할 하나님이다. - 도올 -

- 기독교의 하나님의 유대교의 율법 속에 갇혀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

- 곧 야훼도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다윗의 하나님이다

- 결국 그 계보를 따져 올라가면 야훼도 어떤 조상신의 전화형태 일 것이다.

- 야훼도 결국 유대인들의 조상신일 뿐이다

- 개별적 조상의 숭배(individual cult)이든, 민족전체의 조상숭배(national cult)

그것은 사실 조상숭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 모든 종교는 다신론에서 출발

- 多神論(polytheism) → 一神論(monotheism)

- 십계명에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속에는 다신론을 인정

하는 것임

- 유일신으로의 신의 통일은 항상 지상에서의 권력의 통일의 시기와 일치됨

- 부족국가시대에는 유일신은 있을 수 없다, 유일신의 출현은 제국(Empire) 성립 이후의 사건이다.

- 중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통일국가가 형성된 진시황 때 와서야 상제라는

통일된 신의개념이 생기는데 다신론의 모체는 모두가 조상숭배를 바탕 으로 함

- 유에메리즘(Euhemerism) : BC300년 전후에 활약한 신화작가 유에메로스의 주장

모든 神의 계보는 역사적 영웅, 지배자, 종족의 추장, 전사의 혼령에서 비롯 되었다





○ 多神論 → 一神論 → 無神論 : 佛敎

- 불교는 절대적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종교진화의 최종단계이다

- 콘체(Edward Conze) -

- 불교는 심리학이다,. 그 심리학의 궁극은 멸집(滅執)이다 - 도올 -

- 諸法無我, 色卽是空, 空卽是色(제법무아, 색즉시공, 공즉시색)

- 불교의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인 무아론과 윤회의 이론적 상반성이다.





○ 종교라는 것은 이렇게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임.

- 일신론 종교를, 또는 다신론 종교를 택할 수 있는 것이다.

- 종교란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









□ 無我論 과 輪廻(Transmigration)(무아론와 윤회)

○ 윤회(輪廻) :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범어로 삼사라(Samsara)라고 한다.

- 죽어도 영혼은 그 자체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로 다른 육체로 들어감

- 그렇다면 영혼의 自我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無我論과 배치됨

- 불교가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







○ 제사(祭祀) : 4대봉사(四代奉祀)

- 인간은 하늘과 땅이 합쳐진 것임

- 인간은 氣덩어리인데 하늘적 기(魂)과 땅적인 기(魄)로 구성되어져 있다.

- 동양인에게는 인간의 영혼의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전신에 골고루

섞여 있는 것임

- 죽는다는 것은 골고루 섞여 있던 하늘적 기(魂,혼)과 땅적인 기(魄,백)이

완전히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 죽으면 하늘적인 기는 하늘로, 땅적인 기는 땅(무덤)으로 가게 됨

- 喪禮의 기본은 땅적인 기를 모시는 것이고

- 무당들은 하늘적 기를 다스림



- 땅적인 기가 쇠하여 가면서 하늘적 기도 쇠하여 가면서 동시에 죽으면 安樂死이나

- 갑자기 자동차에 치여 하늘적인 기는 그대로 있는데 땅적인 기만 죽게 되면 액귀가 되는데

이러한 액귀를 다스리는 것이 무당들 임

- 이때 하늘적 기가 하늘로 간다는 것은 서양인들 같이 시간 밖으로 가는 것 이 아니고 동양적

사고로는 시간 안에 있는 하늘에 있으며 이러한 시간 안 의 영혼이 윤회를 하게 됨

- 이러한 영혼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돌게 되면 윤회가 되는데

-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도 하늘 밖으로 나가는 윤회가 아님

- 유교사상은 하늘적 기도 땅적인 기가 없어지면 결국은 흩어지게 된다

즉 동양인의 세계관은 영혼의 독자적 영속성(identity)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신멸론(神滅論)이라고 부른다

- 하늘적 기는 지속성이 강하여 대개 4대(120년)걸쳐 흩어지기 때문에 4대봉사(四代奉祀)하는 것이다.

- 하늘적 기가 살아있는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는 것이 고대인들의 관심 이었는데 죽은 영혼이 인간에게 악한 방향으로 작용하면 악귀 , 좋은 방향 으로 작용하면 善鬼라고 하는데

- 제사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혼령과의 화해시키는 의식이다.

- 제사의식은 동양 사람들에게 깊은 역사의식을 주었다.

- 나의 행위가 자손만대에 영향을 주므로 나의 삶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불천위(不遷位) : 4대를 넘어서 영원히 모시는 신위(神位) : 퇴계선생 등





○ 사당에 4대 신주를 모심.

- 사당에 모셔진 혼들은 한 가족(Family)의 개념에 속한다.

그래서 어데 나갔다 들어오면 어른한테 보다는 먼저 사당에 가 조상들에게 인사를 올리게 됨

- 매조(埋祖)

사대봉사 후에 신위를 땅에 묻는 제식,

이것은 백(魄)이 아니라 혼(魂)을 묻는 것이다.

- 혼(魂)을 모시는 것이 제사이다.

인간의 역사는 귀신들로 인하여 연속성이 보장되게 된다.





○ 동양사상에서는

- 인간의 사후의 세계를 인정한다고도, 안 한다고도 말할 수 없음

- 인간의 혼백(魂魄)을 제례로서 인간의 역사성속에서 생각했는데

- 기독교는 백(魄)이라는 것에 대한 역사성을 인정하고 혼(魂)은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음.

-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

- 서양 사람들은 영혼의 독자성을 인정

- 서양 사람이 말하는 영혼, 이성은 초시간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집착





○ 희랍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데아(Idea)는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고향이다.

- 서양인은 영혼의 독자성을 인정, 시간을 초월하는 곳에 있음

- 인간의 영혼을 초시간적성을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기독교와 불교는 일맥상통(윤회인정 시)

- 언어적으로도 불교는 산스크리스트어, 팔리어를 기독교는 히브리어,

희랍어를 기초로 하고 있다.(사유형태가 비슷하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인도유러피안어군의 주부, 술부관계 속에 매여 있다.

- 불교에서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moksa) 이라고 한다.

- 인도인의 열반(Nirvana), 희랍인의 이데아(Idea), 유대인의 천국(Kingdom of Heaven)은 동일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 묘법연화경(법화경)

○ 불교의 신행의 제일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다.





○ 법화경의 제2편 방편품에 보면

- 부처가 “여기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다 나가라”고 하니

- 5,000여명의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재가신자들까지 모두 나가버림

- 그러자 “부처가 아 이제 그놈들이 없어 참 좋다”

- “저 놈들은 깨달지도 못하고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이다.”





○ 불교의 목표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 기나긴 윤회의 세월을 거쳐야 되는데 일시에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불교의 제일의 목표는 긴긴 윤회 굴레 속에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보시(報施)하여야 하는데 저 혼자만 깨달았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불교의 제일 신행의 목표는 해탈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보살행이다





○ 윤회라는 것은

- 불교에서는 해탈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있기 때문에 해탈하려는

도덕적 노력이 이루어진다.

- 불교는 윤회론을 포기하지 못한다.

- 윤회론 속에 인간의 도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 종교에 있어서 신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 서구의 근대정신은 모두 무신론(atheism)에 기초하고 있다.

무신론은 유신론(theism)의 한 형태이다.

- 신이 없어도 종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 기는 끊임없이 취산(聚散)한다.

기철학적 세계관은 영혼의 지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취산하는 한 고리일 뿐이다.





○ 동양인의 神은 歷史이다.

- 떳떳한 이름을 역사에 남기겠다.

-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하여 영원히 남겠다





.





□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 ~ 1610)

○ 이태리 출신의 제수이트 신부로서

- 중국에 30년을 살면서

- 동서문명의 회통에 크게 기여

- 그의 대표작은 [天主實義, 1603]는 우리나라 개화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조상 제사 허용론자였는데

- 그 뒤에 들어온 프란시스칸, 도미니칸 들이 금지





○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

- 1628년 중국 강소성 종교회의에서 시작되어

- 1704년 크레멘트 2세의 칙령으로 마무리 된 논쟁인데 4백년을 끌었다.

天主卽上帝說, 孔子崇拜, 祖上崇拜(천주즉상제설, 공자숭배, 조상숭배)를 금지

.



○ 1939년에 로마교황청은 조상제사를 공인





○ 제2차 바티칸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2-1965)

토착적 의례를 천주교의 전례로 할 수 있다고 선언











□ 김창숙(金昌淑, 1879 - 1962)

○ 경북 성주 출신의 유학자, 호는 심산(心山),

- 평생을 항일투쟁과 반독재투쟁에헌신

- 1946년 성균관대를 설립 , 유학발전의 결정적 계기 마련





○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상을 받음

- 겸허한 자세

- 심산 선생의 묘소에 가서 참배할 때 2번 절을 올림

- 기독교 정신은 하느님에 대한 효로부터의 下向이고 , 유교정신은

인간에 대한 효로부터의 上向이다 - 김수환 추기경

-





□ 民德歸厚矣(민덕귀후의)

○ 역대의 모든 주석가들은

- 신종추원을 천자로부터 諸侯, 大夫, 士에 이르는 喪祭로 해석

- 즉 지배자들이 喪禮와 祭禮를 후덕하게 하면 민심이 후덕하게 돌아간다 해석



○ 논어에서 民의 용법은 분명히 庶人의 뜻으로 한정되어 쓸 때도 있지만

- 막연하게 “보편적 인간” 즉 제후나 대부, 사, 민의 구분을 초월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쓸 때가 많다



○ 다산은 어떻게 喪祭가 천자, 제후, 대부, 사에게만 있고 민에게는 없단 말인가?

民은 죽지도 않고 제사도 안 올린단 말인가? 며 반박



○ 죽은 자에 대한 喪祭가 단순히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산 자의 덕성을 후하 게 한다는 것은

죽은 자의 삶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인문주의적 비약을 상징하는 증자의 명언이다.




.
쿠로즈미 교수의 집을 들어가며 장서에 대한 충격,채옹(132-192)의 만권의 서가 생각, 후한말기, 왕삐가문에 이 책이 흘러들어감[따라서, 왕삐(王弼)가 16살에 노자를 주를 달고 주역을 해석한게 우연한 천재성으로 인함이 아니라 윗대에서부터 쌓이고 쌓인 내력이 왕삐에 의해 표출됐을 것]
이번시간은 신종추원 이 다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종추원(愼終追遠), 민덕귀후의(民德歸厚矣).
[신종: 喪례, 추원: 祭례]

지난번 20강 종교란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한 강의입니다 케베스에서 20강단위로 판다고 하는데 하여튼 그 강의내용은 치밀이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의 대상은 신이아니라, 죽음이다라고 했는데
제 20강은 굉장히 중요한 강의였고 오늘 강의는 따라서 그 강의의 뒷풀이로 하겠습니다
.프래이져라고 저명한 인류학자죠
이사람이 종교를 어떻게 정의내렸냐 하면
.
By religion, then, I understand a propitiation or conciliation of powers superior to man
which are believed to direct and control the course of nature and of human life
-프래이져(Sir James G. Frazer, 1854 ~ 1941)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그러니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초월한 어떠한 힘과의 화해라 그말이죠, 이게 프레이져의 정읜데, 자, 결국은 이러한 데서 제사란 것도 나왔고, 기독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제사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은 유교의 이 명제(신종추원 민덕귀후의)의 위대한 것은

증자는 충서(忠恕)로 지은죄를 신종추원 한마디로 대속했다고 했는데, 무슨말이냐 하면 신종추원이라고 하는 이것 자체가 어떠한 수직적 관계의, 이 수직적인 힘(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 즉 신)과의 문제 때문에 신종추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종추원을 왜 하냐
제사를 왜 하냐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덕성이 후덕해지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제사는 신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 끼리의, 인간들 관계에 덕성이 후한데로 가기 때문이라는 거죠.
얼마나 휴메니스틱한,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인본적 해석이 없습니다.
(자막:수직적 공포관계를 수평적 연대감으로 바꾼 인문주의적 명언이다)


내가 죽으면 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후손들이 나를 기억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사는 마음 자체도 후덕해 질 것이다.
상제(喪祭)라고 하는 것은 어떤의미에서 귀신들의 문제라기 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제라.
제사라는 게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내가 요즘 조영남씨하고 가깝게 지내는데, 그양반이 예산에서 살았는데, 디귿자집의 밑을 팔았는데 그 집이 옥분이네 집, 헌데 옥분이네 집은 제사로 망했다 일년동안 어이어이 하다가 망했다. 조영남씨가 어린마음에 우리나라가 제사때문에 망하는 구나,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제사 안 지내는 걸 고맙게 생각했대요

지금 제사때문에 얼마나 피 보는 사람이 많냐, 아무리 민덕이 귀후라 하지만,
자 이런 문제를 생각을 해보려 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얘기 할려 그래요


근대성! 우리민족의 근대성은 사상사적으로 동학입니다. 그리고 이 동학의 핵심은 바로
제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제도사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조선사회의 성립을 이미 근대의 출발로 볼수가 있다. 그러나 동학이야말로 정신사적 근대성의 출발이다. 동학의 인간관은 데카르트의 코기탄스에 비견할 수 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제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사자, 귀신에 대한 숭배 아니요,
이것을 동학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나, 동학하면 뭘 아세요

인내천, 이게 핵심적인 사상인데
사람이 곧 하늘이다.

(자막: 천주, 동학에서 '하늘님'이라는 우리말을 한역한 표현으로 서학의 천주와 구분되는 독특한 개념)

천주라는 인격적인 말인데, 이 동학의 가장 이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물론 최수운선생, 최제우라고 이사람이 어리석은 세상을 구하겠다고 제우라고 고친거요.

(자막: 최제우(1824~1864)동학의 창시자, 호는 수운, 1860에 득도, 1861년부터 포교, 1864년 3월1일 대구장대에서 참수형으로 순도)

어디사람? 동학은 전라도 꺼 같죠, 아니예요, 경주에요 경주는 우리나라 근대 사상의 발상지요
경주 월성군 가정1리 315번지 동국대학교에서 북쪽으로 더

공부를 많이 한분, 굉장히 지식이 높음, 동경대전을 손수 씀(최수운이 득도해서 남긴 한문으로 쓰여진 글, 사후 해월에 의하여 1880년 강원도 인제 갑둔리에서 간행되어 동학포교의 기폭제가 됨)

20세쯤 집을 떠나버려 14년간인가 기나긴 방황. 그때쯤 우리나라와 관련되어 일이 하나 있죠, 아편전쟁(1839년 임칙서가 아편판매를 금지한 것으로부터 시작, 1842년 8월 영국에 굴복, 불평득조약인 남경조약 체결)이 뭐요, 중국이 전부 아편으로 쩔어가지고 양놈들이 아편으로 어마어마한 중국놈들을 아편쟁이로 만든거요



우리나란 대륙의 질서, 뭐니뭐니해도 중국이 자기를 떠받치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 갑자기 이것이 paper tiger, 지호, 종이호랑이가 된거요, 갑자기 무릎을 꿇으니까 조선민중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아세요,

지금 미국이 완전히 섬멸당했다 막막하실거요 그런느낌

19세기 초 대륙이 무너진 후 방황감. 난과 역질, 기근에 중국까지 무너짐 사람들이 전부 집을 떠나 방황함. 그때 유명해진 게 계룡산이요 그때부터 굴형상이래서 가장 안전하다더라 도사, 최수운선생도 갔을 거요, 점서들, 정감록이니 여러 점서들이 유행, 말세적 감정에 휩싸임. 기독교 들어오고 말세에 대한 위안을 줬죠

(자막:용담유사에 하늘님, 한울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표현은 모두 후대의 변형된 표현이다. 원래 우리말은 그냥 하늘님이다)

그런데 동학은 하늘님을 재해석해 들어갔어요

경주 용담으로 돌아오고. 오두막으로 들어가고 도를 닦는데, 36세(1859)
어느날 홀연히 나타남 뭔가, 몸이 떨리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지敎)

봐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의아해 했는데 수심정기해서 용기를 내서 물었어

넌 누구냐

시지불견 청지불문 心常怪訝
수심정기이문왈 何爲若然也?

그때 대답이 그 유명한 대답이 뭐냐면, 그 상제가 아니, 하늘님 소리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 인간들이 이것을 어찌 알리

(吾心卽汝心 人何知之) (지천지이무지귀신 귀신자 오야)

천지를 알면서 귀신을 알지 못하니 귀신이라는 것이 바로 나다(論學問)

뭐죠! 내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그랬죠

인내천 나의 마음이 네 마음이라 곧 뭐죠 내가 곧 하늘님이다
무신론, 기독교,불교 도 아니라 동학사상은 특이해요

이것을 포교하니까 몰려드는 거죠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뭐 용한 사람이 났다드라 해서 모이지만 뭐 별얘기 아니요 그당시엔. 1861년에 대각을 했는데
(잠시 쉼, 그리고 이어서 진지하게)

그 동네서 멀지 않은 검등골이란 화전골, 최경상이라고 하는, 해월, 서너살 연하 (자막,사진,최경상 (1827~1898), 경주시내 황오리, 해월이라는 분인데
나는 이세상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해월선생이 안계셨더라면 이 땅에
나는 한국에 안 살았을 지도 몰라요

내가 해월선생을 발견했다는 것이 내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내인생에 결정적인 자각적 계기요,
해월선생이 이땅에 뿌린 피가 있는 한 내가 이땅을 안 떠난다는 각오를 했어요.
그렇게 위대한 분이요.
이분은 말이요 재밌는게, 저번에도 말했듯이 지식이라는게 우습다고, 해월선생은 화전민으로 일자무식꾼이요. 공부도 안했고 한문모르고 지식인도 아뇨.
그러나해월선생이야 말로 우리나라 단군이래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요.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요나는 아직 내 인생에서 해월이상의 위대한 분을 못봤소

여러분들 말이죠 마하트마 간디를 생각하시면 깡마른 사람이 이렇게 말이요 물레를 돌리면(웃음) 성자 같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은 말이죠 인도에는 저런 간디같은 멋있는 성자가 있는데, 왜 우린 없냐고 하실진 모르지만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 위대해요 우리 해월선생은, 최경상선생은.
이분은 말이죠 평생습관이 새끼를 꼬는게, 멍석을 꼬는게 일이요. 새끼를 꼬는 데 도사요(간디는 물레를 돌리는 성자의 모습이고, 해월은 새끼를 꼬는 성인의 모습니다) 그 관군을 피해 다니며 접주조직을 만들고 도망다니면서도 항상 새끼를 꼬시는 데 그러다가 꼴 새끼가 없으면


다시 풀어(청중 웃음)
그래서 주변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다시 푸십니까


하늘님은 쉬는법이 없다 - 해월
(至誠無息(하늘의 성실함은 쉬는 법이 없다-중용))

어찌내가 쉴 수 있으리
그러고 멍석을 깨끗하게 말아놓고
관군 들 닥치기 전에 방을 깨끗이 정리해 두시고, 사는 곳곳마다 사과나무 등 다 정성껏 깨끗하게 해놓고 도망간단 말이야

인생의 자세가 자기 제자가 감옥에 가면 자신은 이불 안덮고 자 맨몸 냉방에 주무셔
인격이라는 것이 말할 수 없어, 실천의 역사요

해월선생의 일생을 세밀히 추적했어요 영화를 만들려고

[개벽, 1991, 감독 임권택, 각본 김용옥, 이덕화 이혜영, 그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등 5개부문 석권했으나 도올이 평하길 작품이 기대이하였다고 함, 자신의 각본대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음]


이분과 눈물을 흘린 얘기가 너무너무 많아
일자무식인 이 양반이 검등골에서 용담골로 걸어가면 8~10시간 걸려 갔겄지
(최수운이)포교시작한지 한두달있다가 (해월이)찾아가(1861년 6월)
사람 많고 난리가 났겄지

최수운선생이 이상하게 말이지 일자무식인 해월선생를 보자마자 뭔가를 간파를 하는데

동학이라는 게 뭐 별게 아니고 궁흘부적이란걸 그리는게 그게 뭐 태극형상이 된다 그거요 종이에 그려서 말려서 태워서 물에 타 먹어 희던머리가 검어지고 뭐 몸이 좋아졌다 그거야 지금은 숯가루도 먹잖아요 옛날 먹이란게 좋은거고 종이도 닥지로 만들었으니 몸에 좋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주문을 외워요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외는데 사람들이 천어, 사람들의 말씀이 들린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거지
해월선생이 어떻게 해야지 하늘님말씀이 들립니까 하고 물어요 수운선생한테.

무식하잖아요, 무식한 사람이 소박하잖아요 진실하고 거짓이 조금도 없는
해월이, 아무리 지기금지..해도 안들린다 이거야 그런데 너들은 어떻게 들리냐?

그당시 사람들이 모여들면 모함을 받게 되듯이 모함받아 도망가요 수운선생이, 전라도 교룡산성 한 울을 보네여 음해하고 가짜다 에 질려갖고 그당시 경상도에서 전라도에 가는건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수운선생이 가기전에 해월보고, 수심정기하고 타악 앉아 주문을 외워 봐라 고 말해요


내가 거기 가 봤어요 아직도 남아 있어요
거기 화전리 꼭대기에 딱 앉아서 한겨울 내내 앉아서 거적 쳐놓고 밤낮없이 주문만 외는 거요
하~ 도를 딲는데


하늘님소리가 들리긴 뭘 들리냐 이거야
안들려가지고 해월선생이 동지섣달 겨울에 화가나가지고 그 추운겨울에 빨개벗고 개울에 그냥 풍덩 들어갔던 모양이야 얼마나 답답했으면

찬물에 퐁당 들어갔는데

들린거요, 갑자기, 까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뭐라 그러냐 하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눈에 힘, 입은 일자로)

"찬물에 급히 들어가는 것은 몸에 해롭나니라!" (큰소리로 웃음)

분명히 그런 소리가 들렸단 말이야 그 소리가ㅡ,찬물에 급히 들어가는 것은 몸에 해롭나니라,
그게 이상한거요, 이 순진한 사람이,이게, 이 사람이 그거를 듣고, 겨울을 나,
그리고 그 이후론 아무소리도 못들었어, 아무리 앉아있어도(웃음)

그래가지고 (최수운)선생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극진했던지

수운선생이 봄에 경주로 몰래 아무도 모르게 곽대오(?)라는 사람의 집에 돌아왔는데, 얼마나 마음이 극진했으면 괜히 거기가 가고싶은 거요 그래서 갔더니 와 계시잖아 울면서, 먼길왔으니, 절하니까,

최수운: 하늘님 소릴 들었냐
해월>듣긴 들었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찬물에 들어가는건 몸에 해롭다고

언제쯤이더냐
동짓달 어느날인 듯해요

몇시쯤이더냐냐
새벽 한시쯤 됐습니다

옳다 내가 요새 내가 도인들이 냉수마찰을 좋아해서 안되겄기에

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찬물에 급히 들어가 앉았으면 몸에 해롭다.

동경대전,修德文)를 마침 썻나니라 그리곤 답답해서 크게 읊었나니
라 그때 그걸 니가 들었구나(웃음,박수)

여러분들 이게 동학사상의 원좁니다
너무 웃기죠

무슨 얘기냐 하면
수심정기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마음이 통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천지가 한 생명(Oneness of Cosmic Life)이라
는 자각이요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찬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 는
보통사람의 이야기가 하늘의 소리라 이말이요(톤이 절제되고 높다가 떨어짐)
응! 이것이 바로 종교의 궁극이다 이거요

이 이상의 하나님의 소리가 없다고 하는게 수운선생의 해월선생에의 가르침이요
(자막:사람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다
Man`s voice is God`s voice) (박수)

우리역사에서 이 한마디 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높여준 말씀이 없어요

평상시 얘기대로, 찬물에 급히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고 쓴 그말이 바로 내귀에 하늘의 소리로 들렸다 그말이요, 이 이상 인간의 소리에 존엄성을 높인 명제가 어딨습니까 이것이 우리 민족의 근대적 각의 출발이요 근대성의 출발

우주에 대한 자각이, 선생이 어디에 있던 경주에서 들을 수 있다

수운선생이 도끼로 1864 수운 참형을 당해요 모함으로. 그 당시 별거 아님 동학이라는게

경주의 동학 풍지박산나고 삼천명이 흩어지요, 이것을 해월이 다시 조직 합니다. 1864~1894 30년간
전국의 그 어마어마한 세포조직을 해월혼자 만든 거요

그걸 만든 힘이 뭐냐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그 신념 하납니다(목소리 낮게 까리고 무거움, 조용)

해월선생이 청주를 지나가 손병희(서택순)집앞을 지나는데 베틀소리가 들려요

누가 베틀을 짜냐 -제 메눌아기입니다 다시물어요 >누가짜냐 -제 며눌아깁니다 또물어요 > 누가 짜느냐

그러고 그냥 떠나셔 한참 가다가 아무리 해결이 안돼 제자가 물어
그건 하늘님이 짜고 있는 것이더라

며느리가 곧 하늘님, 그 소리가 하늘의 소리, 부녀자의 노동이 하늘의 노동

하찮은 부녀자의 노동도 하늘님의 노동으로 생각하고 존중해줌 이게 동학사상입니다, 물타아(勿打兒), 그당시에 어린애를 그리 때렸거덩, 어린이야 말로 하늘

이게 인내천 사상이요 근대의 시작이요 인간의 평등을 외친 우리나라의 위대한 사상입니다.

손병희가 해월에게 지극함 손병희 사위 방정환 어린이 말 만듬 늙은이란 말은 있어도 어린이란 말은 없었음 어리석은 사람뿐. 어린이 는 곧 하늘 동학사상이 어린이란 말을 만듬

1894년에 비참하게 공주우금치전투에서 비참하게 패합니다

(자막:1894년 10월 25일 ~11월11일, 남북접 10만대군이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 불과 500명이었다)
우리조총은 2~30미터가 유효사거리고, 일본 조총 100미터 조준입니다 게임이 안되요
그냥 죽는 거요 (숙연)

해월선생은 또다시 도망칩니다. 1864에서 죽는1898년까지 계속 도망만 친거요, 한번도 다리뻗고 주무신 적이 없어(숙연)
이렇게 처절하게 산 사람이 없다고 우리 역사에 최장기 도바리꾼이었다고(조용한 웃음)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음죽군 앵산동(현 이천군 설정면)에서 마지막 설법하신 것이 그 유명한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거요(1897년 4월5일)

제사를 지내며는 벽에 밥을 놓고 제사를 지내죠

제사는 신을 맞고 즐기고 보내는(迎신 娛신 送신)구조로 되있습니다. 모든제사의 기본 스트럭쳐입니다.

옛날에는 뭐냐면 향벽설위, 벽 저쪽에서 하늘님, 귀신이 저쪽에서 온다는 전제로 벽을 향해 제사상을 차립니다. 설위를 벽쪽으로 숟갈도 그쪽을 꽂죠
(향벽설위)

해월선생이 향아설위, 뭐냐면, 나를 향해서 제사상을 차려라
밥을 내가 이쪽에 놓고 돌려놓고, 향아설위를 하라,


이말이 뭐요!!
내가 곧 귀신이다
제사를 지내는 내가 곧 귀신이다
그 귀신은 이미 내게 이어졌다

(부모지사후혈기, 存遺於我야)
너가 귀신이 있는 자리라 이거요


그리니까
니가 귀신이다. 니가 먹어라(웃음)
제사는 자기가 차려놓고 자기가 먹는거
귀신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네가 밥을 먹고 싶다는, 배고프다는 그것이 바로 귀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생명력 그것이 바로 너의 신이다
(인지욕식지념, 즉천주감응지심야)

상기(喪期)는 어떻게 합니까, 삼년상을 지냅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심喪백년, 인지거생시. 불망부모지념 차시영세불망야
심상으로 백년해라

마음으로 잊지만않으면 되는거지 삼년이고 육년이고 그것이 뭔 X이냐(웃음, 박수)
상은 어떻게 차립니다

상은 냉수 한 그릇으로 족하니라 다만 정수 한 그릇이라도 지극한 정성만 있으면 최고의 제사니라
(단청수일기, 극성치성, 가야)
천지가 하나의 일첸데 청수 한그릇이 그것이 제사상의 전부니라, 이게 동학입니다

이런 위대한 말씀을 남기고, 다음해, 해월선생은
단성사 뒷켠에서, 교수형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때의 고문당하고, 처참한 모습이, 사진으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1898년 6월2일 단성사 뒤 육군법원에서 교수형으로 뜨다. 당년 72세)

이렇게 위대한 분을, 우리는 죽여온 역사예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자리에서
여러분들이, 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분들의 혼령이, 우리 마음에 살아있기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이 강의를 듣고 있는겁니다(박수, 인사,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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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제사를 드릴 때는 조상이 앞에 계신 듯이 드려야 하고, 신령께 제사를 드릴 때는 신령이 앞에 계신 듯이 드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제사에 몸소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다."(3-12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 "吾不與祭, 如不祭.")

맹의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효란 무엇입니까?" "어기지 않는 것이다." 번지가 마차를 몰자 공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맹손(맹의자)이 나에게 효를 묻길래 나는 '어기지 않는 것이다'고 말해주었다." "무슨 뜻입니까?" "살아계실 때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례하고 예로써 제사하라는 것이다."(2-5 孟懿子問孝. 子曰 :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 "何謂也?" 子曰 :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주희에 따르면 "조상 제사는 효성이 위주이고 신령에 대한 제사는 공경함이 위주이다. 자기가 응당 제사해야 할 때 혹시라도 다른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그것을 주관하게 하면 귀신이 마치 앞에 계신 것과 같은 성의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이미 제사를 드렸다고 하더라도 이 마음은 석연치 않은 것이 마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이 있게 되고 정성이 없으면 조상의 신도 없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음은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은즉 정성이 실질이고 예는 허상이다."(『논어집주』)

또 공자는 "마치 조상의 귀신이 앞에 계신 듯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귀신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제사도 귀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사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란 후손으로서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추념의 예식일 따름이다. 따라서 제사는 자신이 직접 드려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남에게 시켜서 대신 제사 지내게 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공자가 말하였다. "자기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2-24 子曰 : "非其鬼而祭之, 諂也. […]")

계씨가 태산에 여(旅 : 천자나 제후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드리자, 공자가 염유에게 말하였다. "네가 막을 수 없었는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 태산의 신이 임방만도 못한 줄로 여긴단 말인가?"(3-6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 "女弗能救與?" 對曰 : "不能." 子曰 : "鳴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공자가 말하였다. "체 제사는 강신주를 부은 뒤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3-10 子曰 :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혹자가 체 제사의 내용을 묻자, 공자는 "모른다. 그 내용을 아는 자는 천하에 대하여 마치 이것을 보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손바닥을 가리켰다.(3-11 或問禘之說. 子曰 :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공자에 따르면 도리상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귀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즉 사회에 아무런 긍정적 의미가 없고 오히려 파괴적인 작용을 할 따름이다. 대부인 계씨가 제후만이 드릴 수 있는 태산에 제사를 올리자 공자는 탄식하였다. 공자가 보기에 그런 행위는 마치 오늘날 도지사나 군수가 국가 원수나 행할 수 있는 의전행사를 행하는 것처럼 참람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귀신도 예에 맞지 않는 제사는 흠향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그런 참람한 짓은 조상도 역겨워할 내용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제사를 올릴 자격이 없는 제사는 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제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다. 즉 천자만이 드릴 수 있는 체(禘) 제사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조차 거부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거친 밥에 나물국을 먹을 때도 반드시 제사를 드렸고(고수레를 하였으며), 반드시 재계처럼 엄숙했다.(10-11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공자가 삼간 것은 재계, 전쟁, 질병이다.(7-13 子之所愼 : 齊, 戰, 疾.)

공자는 벗이 보내준 물건은 그것이 비록 수레나 말이라고 하더라도 제사 고기 말고는 절하지 않았다.(10-23 朋友之饋, 雖車馬, 非祭肉, 不拜.)

공자에게 있어서 제사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의 표명"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설명하기를 "옛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종류마다 조금씩 떼어내서 두간 사이에 두어 선대에 처음 음식을 만든 사람을 제사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재계는 엄숙하고 공경하는 모습이다. 공자는 박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제사는 반드시 공경을 다했으니 성인의 정성이다." "재(齊)의 의미는 정돈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모시려면 정돈되지 못한 사려를 정돈하여 신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지성을 모으는지 여부와 신의 흠향 여부는 모두 여기서 결정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것이고, 질병은 또 자신의 몸의 생사존망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건과 제사 (공자 『논어』 (해제), 2005,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공자가 말하였다. "우임금은 내가 비난할 데가 없다. 거친 음식을 드시면서도 귀신에게는 효성을 다했고(致孝乎鬼神), 허름한 의복을 입으시면서도 제사 예복은 아름답게 꾸몄고, 궁궐은 낮게 지었으나 치수 사업에 진력하셨으니, 우임금은 내가 비난할 데가 없다."(8-21 子曰 :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증자가 말하였다. "부모상에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면 사람들의 덕이 두터워진다"(1-9 曾子曰 :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제사란 무엇인가? "귀신에게는 효성을 다하는 것(致孝乎鬼神)", "존재의 시원을 추모하는 것(追遠)"이 제사이다. "귀신에 효성을 다한다 함은 선조 제사를 풍성하고 정결하게 한다는 것이다." (주희) 공자는 말하기를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敬而遠之)"고 하였다. 멀리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공경해야 하는가? 거기에 인간의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귀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공경을 표하는 일이 곧 제사이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순자를 거쳐 한대(漢代) 『예기』에서 체계적인 제사관으로 확립되었다. 『예기』에 따르면 "예에는 오경(五經)이 있는데, 그중에 제례가 가장 중요하다. 제사란 밖으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마음이 슬프기 때문에 예로써 받드는 것이다. 밖으로 제물을 극진히 마련하고 안으로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 이것이 제사를 올리는 마음가짐이다."(「제통(祭統)」) 『순자』에 따르면 "제사란 추모하는 마음의 표현으로서, 참마음과 믿음, 사랑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예절과 격식의 성대함이다. 군자는 제사를 인간의 도리(인도)로 여기고, 백성은 귀신에 관한 일(귀사)로 여긴다. 제사는 죽은 분을 살아 계신 듯 섬기고 없는 분을 있는 듯 섬기는 것인바, 제사 대상은 형체도 그림자도 없으나 격식을 완수하는 것이다."(「예론」)

그리고 "신종추원(愼終追遠) 민덕귀후(民德歸厚)"라는 증자의 말은 유교의 상례와 제례를 언급한 대표적인 말로 전해오고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신종(愼終)은란 초상에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이고, 추원(追遠)은 제사에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 민덕귀후(民德歸厚)는 아래의 백성들이 교화되어 그들의 덕 또한 순후해지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임종(終)이란 사람이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인데도 능히 근신하여 모시고, 선조(遠)는 사람이 망각하기 쉬운 일인데도 능히 추모하게 되는 것이 순후함의 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스스로 행하면 자신의 덕은 순후해지고 아래 백성이 교화되면 그들의 덕 또한 순후해지게 된다."

그러나 증자의 말은 공리주의(功利主義)의 혐의가 있다. 백성이 순후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상례와 제례를 지내면 이로움이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자의 이러한 설명은 공자의 본뜻이 아니라고 풍우란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인간의 마음의 진실된 발로는 예에 맞기만 한다면 바로 지극히 좋은 것이다. 그것을 행위로 옮긴 것이 과연 이로운 결과를 낳을지의 여부까지 꼭 따질 필요는 없다. 사실상 마음의 진실하고도 예에 맞는 발로가 행위로 표현되면 사회에 이익이 되면 되었지 적어도 해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다만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예컨대 3년상제는 증자가 말한 '부모 상에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면 사람들의 덕이 두터워진다'는 설로써 이론적 근거를 부여할 수도 있었겠으나, 공자는 그저 3년상을 행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행하면 편하다고만 말했을 따름이다. 이 제도가 비록 '인민의 덕을 두텁게'하는 이로운 결과를 내포했다손 치더라도 공자는 그것으로써 3년상제의 이론적 근거로 삼지 않았다는 말이다. 공자가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지 않은 사실은 그의 일생 행적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로는 공자의 입장을 설명하여 '군자가 벼슬함은 자기의 의(군신의 도리)를 행하는 것일 따름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18-7)"(『중국철학사』 상, 125-6쪽)


[네이버 지식백과] 제사란 무엇인가? (공자 『논어』(해제), 2005,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증자가 말씀하시기를 상례를 정성껏 하며 제사를 정성껏 지내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마침을 삼가히하는 것 (喪事)에 그 예를 다하는 것이 요 먼 것을 추모한다는 것은 祭事에 그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終者, 喪盡其禮. 追遠者, 祭盡其誠. 民德歸厚, 謂下民化之, 其德亦歸於厚. 蓋終者, 人之所易忽也, 而能謹之; 遠者, 人之所易忘也,
而能追之: 厚之道也. 故以此自爲, 則己之德厚, 下民化之, 則其德亦歸於厚也.



신종이라는 것은 상사에 그 예를 다한 것이여. 추원이라는 것은 제사 지낼 때 그 성의를 다한 것이여. 民德歸厚라. 백성의 덕이 후한데로 간다는 것은 원덕이고 民德歸厚가 있어 위하민화지하야 기덕역귀어후(謂下民化之, 其德亦歸於厚)라.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서민이 화해 가지고 감해 가지고 그 덕이 또한 후한데로 돌아간다. 전부 백성이 화해가지고 ● 군자의 덕은 태풍이요 군자의 덕은 풍과 같다. 바람과 같다. 소인의 덕은● 라. 바람이 불면 확 누어 가지고●

蓋終子는 개 자는 의문이여. 아마 종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소홀하기, 홀 자는 소홀할 홀 자여. 소홀하기 쉬운 것이로되 능히 근신하고, 遠한 자는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말이여. 遠한 자는 사람마다 잊기가 쉬운 것이로되 ● .능히 추모하는 것은 후하게 하는 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차자위즉(以此自爲則) 위에 있는 사람이 이것으로써 스스로 실제로 자기가 실제로 행위를 하면 기지덕후(己之德厚)여. 자기 덕이 후해지고, 하민화지즉(下民化之則) 아래 서민들이 화해 가지고, 한즉 그 덕이 또 후한데로 국가의 덕이 전부 후한데로 돌아간다.

2019/02/15

11 <생명평화마당> 9월 정기 월례포럼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11 <생명평화마당> 9월 정기 월례포럼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일 시: 2011년 9월 6일 (화) 늦은7시

장 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지하 이제홀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 회: 조언정 목사 (마실교회)

발 제:

√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 지역공동체 세우기를 중심으로”................................. p. 3



√ 이원돈 목사 (새롬교회)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작은 교회를 주목하자!”........ p. 15



√ 양재성 목사 (예수살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예수살기>의 교회운동”............................................ p. 23



9월 포럼을 준비하며



늦더위가 한창입니다만, 이제 곧 가을을 맞이하게 될 터이고 금년 하반기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작년 뜻을 모으고, 올해 조직체를 구성하여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생명평화마당>도 이번 가을에 소정의 결실을 맺고, 장단기적 안목과 계획을 가지고 내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월례포럼은 <생명평화마당>의 근간을 이루는 사업입니다. 꾸준하게 펼쳐지는 월례포럼을 통하여 바라기는, 앞으로도 생명과 평화의 담론을 형성하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의 빛으로 빛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의 빛깔을 내시고 계시는 여러분! <생명평화마당> 월례포럼에서 여러분의 빛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9월 포럼 취지



한국교회는 목이 마릅니다. “추락하기만 하는 한국교회, 왜소해져만 가는 교회운동, 대안이 없다는 말인가?” “예수 정신을 구현하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교회모델이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운동의 방법론은 없는가?” <생명평화마당> 9월 포럼은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묻고자 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퍼뜨려야 할 1차 영역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사실, 생소한 주제도 아니며 이번에 단발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그동안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교회갱신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현장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논의를 해왔습니다. 이번 9월 포럼은 그것의 첫 걸음입니다. 무릎을 탁 치며 여럿이 뜻을 모으는 것이 희망의 빛이라 믿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9월 포럼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림



1. 오늘 순서를 맡아주신 분들과 9월 포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 모임안내1 : <교회위원회> 목회자모임 : 9월18일 (주일) 6시, 양평

3. 모임안내2 : “WCC 부산총회 준비를 위한 ‘생명정의평화’ 진영(JPL) 4차모임

: 9월23일 (금) 5시, 기사연 이제홀

4. <생명평화마당> 공식카페에 가입, 활동을 바랍니다. (http://cafe.daum.net/2010declaration)

5. <생명평화마당> 후원회원이 되어주십시오. (자동이체, CMS - 문의: 김지목 간사)

6. ‘2011 교회의 날’ 행사 : “평등한 교회 상상하기” 9월29일(목)-10월1일(토), 100주년기념관/이화여대

7. 이후 포럼 계획 (매달 둘째주 화요일 저녁7시, 기사연 이제홀)

-10월11일 : “교회와 사회변혁을 향한 신학의 개혁” / 발제-Philip Clayton (클레어몬트신학교 학장)

-11월 8일 : “종교개혁과 여성신학(가안)” / 발제-(미정) / 사회-이은선박사

-12월13일 : “기후붕괴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과 전망” / 발제-김준우박사 외



<생명평화마당> 실행위원회

권진관(성공회대 교수), 김경호(들꽃향린교회), 김기석(성공회대 교수), 김정숙(감신대), 김영철(새민족교회), 김은규(성공회대 교수), 김희헌(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박명철(연세대 교수), 방인성(뉴스앤조이 이사장), 손은정(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양재성(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윤인중(인천평화교회), 이원돈(부천새롬교회), 이은선(세종대 교수), 장윤재(이화여대 교수), 정상시(안민교회), 조언정(양평 마실교회), 조헌정(향린교회), 최소영(교회여성연합 총무), 최헌국(예수살기 총무), 한경호(횡성영락교회)

문 의: 김희헌 총무 (010-2250-2157) / 김지목 간사 (010-2213-9412)











“한국 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 운동[1]

- 지역공동체 세우기를 중심으로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 종교사회학)





1. 지역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



현재 한국교회는 안팎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3대 종교 중에 개신교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 이후 특히 권위주의적인 교회 운영에 실망한 젊은 층이 급격하게 교회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 또한 교회 간 불균형과 쏠림 현상으로 작은 교회는 더욱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교회에 대한 공신력이 약화되어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공신력 약화는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상실한 데에 기인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세 확장과 교회 건물 건축, 교권 유지 등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만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일련의 일들에서 볼 때 개신교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이익집단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를 보여왔다.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더 이상 기존의 성장주의 패러다임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성장주의식 패러다임의 전환을 심각하게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에 내실을 기하며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 공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이다.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심지어는 다른 교회 교인이라도 우리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는 사회 부조리를 혁파하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날의 개신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 공공의 선이나 선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야 한다. 성숙한 기독교인의 관심은 마땅히 공공으로 확장되고 공동체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성숙한 공동체는 자신의 존재를 두고 있는 더 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향해 열린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인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중앙 중심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지역으로 권력이 분산되고 풀뿌리로부터의 참여가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시민 사회 관련된 의제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시민 사회에 관한 의제들을 제기하는 노력에 참여해왔으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활동은 교회 안에 있는 일반 교인들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주로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기독교 운동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 특히, 시민 사회는 시민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이고, 풀뿌리로부터의 실제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울타리 밖의 사회와 의사소통하며 참다운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거나 기껏해야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교회 구성원들이 시민 사회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의 의제와 현안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시민 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공동체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으로 지역 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 사회의 경제·정치·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 공동체 세우기’(community building)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통적인 촌락공동체는 붕괴되었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조직 구조의 거대화와 관료주의화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친숙성이 어렵게 하며 비인격의 인간관계를 초래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성과 인격의 상호성 또한 약해지고, 인간은 결국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는 예전의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공동체 안에 안주하려는 욕구가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지역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이 ‘새로운’ 지역 공동체는 교회와 시민사회가 만나는 지점을 제공한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는 증대하는 대신에 정부의 예산부담은 줄여야 하는 추세가 뚜렷하므로 결국 기대어야 할 곳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부문뿐이라는 기대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교회 역시 시민 사회에 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적, 물적, 제도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가 한 축을 감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교회는 종래 시민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사회적 제도―학교, 가족, 정부, 회사, 근린집단, 전근대적 교회 등―가 제대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생긴 사회적 공백을 메우고 지역공동체를 재조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당위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그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교회와 지역 공동체



지역사회라는 용어는 영어로는 ‘community’라고 하는 것으로 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사회학 개념이다. 이 community는 ‘공동’의 뜻을 가진 ‘common' 또는 ‘communal'과 하나로 통합을 이루게 하는 ‘unity'와의 합성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를 간단하게 정의 내린다면 “지리상의 근접성(지역성)과 사회 차원의 단일성(공동의식) 및 문화 차원의 동질성(공동규범)을 가지는 공동의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역사회는 동질성을 가진 일정한 인구가 자연, 생태, 지리상으로 한정되고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역사 유산을 공유하여 단일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협동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회이다.

이러한 지역 사회를 공동체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의 공동체 개념은 공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장소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은 커뮤니티와 구별하여 지역 공동체는 일정한 지역을 공유하는 인간집단이라는 면에서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local community'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곽현근: 128). 산업화의 결과로 전통의 공동체들이 와해된 상황에서 삶의 기반을 공유하는 지역 사회에 공동 의식에 터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는 과거에 자연발생으로 형성된 촌락공동체와 같은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서 공동의 목적과 이념,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도적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한다(신명호 외: 53). 따라서 지역 공동체는 일정한 지리적 영역 안에 거주하는 지역의 구성원들이 목적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구축해 나가는 일련의 조직화된 활동을 전제로 한다.

교회 역시 교회가 터하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기업, 주민 등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주요한 구성원이다.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실존의 근거가 바로 지역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지역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지역사회의 쇠퇴는 지역교회의 쇠락으로 이어지며, 지역사회의 발전은 어김없이 지역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90년대 수도권 신도시개발 붐을 타고, 구도시지역 교회들이 신도시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지역사회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태생적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역사회의 욕구와 당면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하며, 그 해결을 위해 지역사회의 여러 구성원들과 다양한 형태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에 주목한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참여’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체주의 운동 활성화가 필요해지면서, 지역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다양한 기관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형성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개인주의 사회가 경쟁을 앞세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원리가 지배한다면, 공동체 운동은 배려와 관심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을 만들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 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마을 만들기 운동은 일종의 주민자치운동으로 여기서 ‘마을’이란 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고 공동으로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장을 총칭한다. 대부분의 도시 계획이나 도시 재개발 사업이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면, 마을 만들기는 관 주도의 지역 개발 운동에 오히려 저항하며 주민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가장 큰 대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관변식, 학술적 한자어를 피하여 ‘마을’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이명규: 268-273).

그리고 ‘마을 만들기’란 그 공동의 장을 시민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는 ‘눈에 보이는 마을 만들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 만들기’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마을’이란 말 그대로 물질로 구성되어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형성되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 만들기’는 ‘사람 만들기’를 포함하는데, 곧 시민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개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시민의식은 기독교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며,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CHE 선교회와 같이 지역사회를 선교 대상으로 보는 관점도 등장하고 있다(스탠 롤랜드: 1장). CHE는 Community Health Evangelism의 줄임말로 총체적 지역사회 선교의 관점으로 특히 위생 환경이 열악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우물을 파주는 일 등을 통해 선교 지역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제3세계 빈곤 국가에서는 이러한 지역 사회 개발이 중요한 선교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 개발보다는 공동체 마을 만들기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다만 도시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은 촌락 지역에서는 개발 전략이 함께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교회는 일차로 예배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민공동체이기도 하다. 하나의 의례행위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위 지향성이 삶의 무대인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교회 내부 결속력은 강하지만, 다른 교회와의 협력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연계 활동은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제도 자원이 지역사회를 위해 효과 있게 활용될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다른 교회나 시민 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시민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지역사회가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3.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 공동체 모델



지역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를 주도해나갈 주민주도형의 협력 체계 곧 결사체 거버넌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결사체 거버넌스는 지역의 내생적 발전에 필요한 주요 자원을 동원하는 자발적 자원동원 체계이다. 이러한 자원 동원 체계로서 결사체 거버넌스의 원활한 작동은 참여주체자들 사이의 사회 자본의 크기에 달려 있다. 사회 자본은 조직 구성원들 상호간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조정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본 동력인 신뢰, 규범, 가치 등을 의미한다(로버트 푸트남: 281). 그리고 이 사회 자본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Rosemary Leonard·Jenny Onyx). 따라서 이 사회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 요구된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공동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타결하는 참여민주주의 훈련과 주민자치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들을 배양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지역 실정에 맞는 적절한 마을 만들기 사업을 발굴하고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는 힘이 바로 신뢰와 협동, 자치와 참여라는 사회 자본이다(김영정: 14). 여기서 교회가 하나의 사회 자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운동 경기를 보듯이 모여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공공의 문제를 토론하는 사회관계를 발전하게 된다면, 시민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자본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모델을 도식화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먼저 운동의 제1 주체는 시민 곧 지역 주민이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지역 단체와의 협력은 필요하다. 행정 기관의 역할은 공동체 역량구축을 위한 조력자이자 지원자로서의 역할이다. 행정기관은 지역 내 공동체의 실체와 그 역할을 파악하고, 지역의 각 공동체 역량을 상호연결해주는 ‘네트워크 연결자’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역량은 내부 역량들을 상호 연계하고 결집했을 때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김구: 74-75).





<그림>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모델



























지역 공동체 운동은 주민, 행정기구, 지역 단체가 함께 하는 파트너십이 중요하다. 여기서 지역 단체의 역할은 공동체 운동 주체들의 파트너십 속에서 이 운동의 지속성을 견인하는 성실한 중개자이자 매개자이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역 단체 활동가들은 관련분야를 폭넓게 학습하고 종전의 감시형, 비판형, 이슈형의 행동양식보다는 참여형, 창조형, 대중형의 행동양식으로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 지역 단체에는 지역 교회가 포함된다. 지역 교회 역시 지역 단체의 하나로서 교회가 가진 다양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지역 공동체 운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4. 지역 공동체 형성 전략



이제까지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교회의 노력이 전혀 없던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져왔고 또한 사역을 실천해 왔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개 사회사업, 사회봉사,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러한 활동들이 매우 의미 있고 우리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많은 경우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여겨져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복음전도의 접촉점을 마련하고자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도덕적 우월감 위에서 시혜를 베푸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시혜자와 수혜자라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수혜자를 대상화해온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는 특정인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지 않고, 주종의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도 다양한 지역사회 구성원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다른 구성원들을 존중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에서만이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가치 창조’이다.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산업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성장과 개발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 생존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왔다. 그러나 탈산업화 시기에는 환경 보존과 지속가능한 성장이 중시되고 경쟁과 배제보다는 배려와 포섭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탈산업화 시기의 가치는 기독교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가치를 창조하여 활성화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역 공동체 세우기 전략은 지역 주민들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의식을 형성하고 주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인 과정과 전략들은 꿈 그리기, 보물찾기, 사람 세우기, 공통의 의제와 일감 발굴하기, 관계 만들기, 민주적으로 협의하기, 더불어 나누기 등으로 나누어진다.[2]

지역 공동체 세우기는 먼저 ‘꿈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일본에서 일평생 마을 만들기에 헌신한 전문가는 마을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꿈을 그리는 것’을 꼽았다. 꿈은 공동체의 회복, 아름다운 동네, 편리한 시설, 생태적 삶 등을 소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꿈을 그리고 전파하는 단계가 마을 만들기의 시작이자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기독교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꿈을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기독교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보물찾기’는 특정 지역이 가지고 있는 보물(흔히 쓰는 표현으로 자원)을 찾는 것인데, 이러한 보물을 찾는 경우 매우 큰 추진력과 탄력을 받게 된다. 보물을 소재로 하여 마을의 성장가능성을 발견하고 지향성을 설정하기도 한다. 마을이 전통적으로 구심점으로 삼아온 역사나 자랑거리가 마을의 보물이 될 수 있는데, 기후나 자연 경관과 같은 풍토적 가치와 역사 사건이나 문화유산과 같은 역사적 가치,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이나 행사, 축제와 같은 행위적 가치로 구분된다(다무라 아키라: 70:74). 특히, 비도시지역의 경우 지역 특산물이, 도시 지역의 경우 잊혀진 역사나 문화 유적 등이 좋은 보물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에코뮤지엄’이라는 개념이 활용되고 있다. 에코뮤지엄이란 프랑스에서 1960년대 후반에 생긴 개념으로 불어의 에코뮈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에코뮤지엄이라는 개념은 스웨덴의 스칸센 야외박물관으로 시작한 생활사 복원운동의 전시기법에서 처음 생겼고, 생활 전체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집의 박물관’이라는 아이디어에서 기인했다(오하라 가즈오키: 19). 우리말로 번역하면 ‘생태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에코뮤지엄은 단순히 생태학에 관한 박물관이 아니라 박물관 그 자체가 지역에서 환경생활의 친화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환경보전형 마을만들기’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윗글: 21-22).

이렇게 보면, 마을에는 공동체 운동의 자원이 되는 다양한 보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유후잉 마을은 한국 언론에도 많이 소개된 사례이다. 녹음이 우거진 분지형태의 온천지대에 위치하여 습온 식물의 보고였던 이 지역에 골프장 건설 붐이 불게 되었을 때 주민들은 ‘유후잉의 자연을 보호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자연 보호를 주장하며 폭넓은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규모 자본과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고, 료깐(여관) 경영자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힘으로 친환경적인 생활형 관광지를 만들어 마을 자체가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박물관이자 관광지로 만든 것은 환경보전형 마을만들기의 매우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사람 세우기’는 현장 일꾼의 역할을 하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주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참여자를 교육하는 것을 포함한다. 성실성과 공평성을 가진 일꾼도 중요하지만, 모든 공동체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없이는 공동체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주민 대표가 주도하는 운동이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민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 모두 주인 의식을 갖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구성원의 합의와 관심의 최대 공약수로서 공통의 의제와 일감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의 의제와 일감은 가능하면 많은 수의 구성원이 지지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폭넓은 지지와 참여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의제와 일감을 설정하지 않고, 공공의 관점에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해관계를 중시할 경우, 주민 운동이 자칫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례로는 동네 하천 살리기, 생태 농업과 같은 자연 생태 운동이나 마을 공유지 마련, 공동 자산, 트러스트 운동과 같은 공동체 회복 운동을 참고할 만하다.

‘관계 만들기’는 이웃 사이의 관계, 구성원 간의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공동체 회복을 강하게 지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공동체로 단순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 함께 꿈을 나누며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인격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에서 바자회 같은 활동을 할 때에도 교인들끼리 하기보다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주민들을 단순히 손님으로 부르기보다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함께 기획하여 진행할 수 있도록 하여 활동의 공동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태도이다.

다음으로 ‘민주적으로 협의’하는 것은 주민자치센터나 반상회 같은 정부 주도의 행정기구가 아니라 주민 위주의 자발적으로 풀뿌리로부터 참여하여 협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의사결정 기구로서의 민주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더불어 나누기’는 마을 만들기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정부 중심의 지원정책이 신뢰를 상실한 가장 큰 이유는 공평한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운동의 성과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참여자들 사이에 공평한 나눔이 이루어져야 하고, 필요한 재정 역시 투명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역 사회 활동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구성원들의 지역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과 참여 의향을 조사하여 지역 사회활동을 전담할 수 있는 전략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소그룹을 TF팀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교회 전체가 지역 사회 활동을 하기는 어려우나 각종 소모임들이 지역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더 자발성이 있고,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하게 되어 많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소그룹 TF팀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 조사하고 구체적인 공동체 세우기 전략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운동 사례



지역 공동체 운동의 내용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히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약해져가는 현대 사회의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고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단순한 봉사나 구제 활동보다는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모임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참고할 만한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1) 생태 공동체 운동

1980년대 생협운동과 함께 벌어진 환경과 생태공동체 운동은 생태적 환경파괴가 급증한 최근까지도 높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생태 공동체는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지역의 순환경제체계를 만들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 거대 사회를 대체하는 대안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의 산물이다.

생태공동체운동센터에서는 생태성, 공동체성, 영성의 세 가지 기준을 강조한다. 여기서 영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생태성과 공동체성 만큼이나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생태공동체의 중심에 영성이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 그 내용이 아무리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회 체계와의 차별성은 없어질 것이므로 공동체적 영성, 생태적 영성, 더 나아가 우주적 영성에까지 자아를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생태공동체가 종교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은 종교와 깊이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적 생태공동체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의식적 노력과 자각을 강조한다(홍성태: 4).

웰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갈수록 커지면서 생태공동체의 가치는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이른바 신토불이와 유기농업만이 한국 농업의 실제 희망이라고 한다. 생태공동체는 이 희망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농촌은 공업적 농업으로 심하게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멋을 잃은 척박한 곳이 되었다. 생태공동체는 한국의 농촌이 지니고 있던 생태문화적 경관을 되살려야 한다. 한농복구회나 함양 두레마을, 한생명공동체 등은 생태공동체의 좋은 보기가 되고 있으며 지역 경제에도 상당히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강원도 화천의 토고미 마을과 충남 홍성의 문당리 마을도 환경 농업의 대표 사례로 뽑힌다.



(2) 녹색 가게 운동

1991년 서울YMCA 생활협동운동으로 과천생협 공동체가 형성되어 환경교육 및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보급을 위한 생협활동이 발단이 되어 시작한 녹색 가게 운동은 생활용품을 다시쓰고 바꿔쓰는 생활문화운동이다. 녹색가게는 우리 주위의 소비물품들을 교환하고 순환시켜 자원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여 녹색지역사회건설에 힘쓰는 지역 공동체 운동이다. 이러한 녹색가게는 구체적인 개인의 실천을 유발하며 개인의 실천이 사회공동체화 하도록 돕는 지역 공동체 운동의 센터로 주부 및 청소년, 직장인, 노인 등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녹색가게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민주성과 투명성의 원칙아래 지역 주민 스스로 펼쳐가는 생활 환경 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4]

또한 기아대책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자선가게라고 할 수 있는 <행복한 나눔>은 지역의 자원을 통해 운영되는데, 교회와 단체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기부하여 매장을 열고, 각 지역 기관과 주민들의 자원봉사와 물품 기부로 운영된다. 각 지역 매장의 수익금의 50%는 지역의 필요를 리서치하여 진행되는 지역 복지 사업을 위해 사용되며, 50%는 기아대책의 해외 사업장을 통해 전세계 빈곤 퇴치를 위해 사용된다. 또한 지역 매장에서는 지역 내의 취약 계층(특별히, 여성)을 고용하여 지역의 고용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5]

그리고 한국 교계의 사회적 기업 중의 하나인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중고물품들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싼값에 판매하고 수익금은 전액 공공복지에 사용한다는 100년 역사의 영국 채리티 샵의 운영 방식과 정신을 이어 한국에 접목한 가게이다.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새 옷을 싸게 구입해 80% 이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의류회사들이 스톡세일(stock sale·일명 땡처리)을 하는 이월상품이기에 가능하다.[6]



(3) 커뮤니티 비즈니스

지역 공동체 세우기의 한 사례로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지역공동체 세우기 전략의 하나로 ‘보물찾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 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로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1994년부터 일본에서 만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한 일본식 영어이다. 일본은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오사카를 중심으로 황폐화된 지역이 증가하는 등의 일본형 도시 공동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하여 도시 내부 문제 연구에 몰두하여 나온 것이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단어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건강하게 만드는 주민 주체의 지역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나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주민 스스로 지역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비즈니스로 전개하려는 것이다(호소우치 노부타카 엮음, 20-21).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일반 기업과 크게 다른 점은 ‘지역을 위해서’ 또는 ‘사람을 위해서’ 일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영리추구를 제일의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사회적 기업이 있다.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적을 추구하여 영업활동을 수행한다.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기업은 이타적 동기를 추진 동력으로 하여, 사회적 공헌을 사업으로 하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이 저소득 계층의 빈곤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지역 사람들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효과는 다양하게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참여자의 일하는 보람과 자아실현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 다양한 지역사회 문제의 해결, 지역 문화 계승과 창조, 경제 기반의 확립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하면서 적자를 내지 않고 기업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기업이 흑자를 내지 못하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성공하고 지속적으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정신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가격과 품질만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공헌과 환경보호, 인권존중 등을 고려해 이를 소비해 주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조직,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이 두루 인정받고 이들이 서로 격려하고 연대하여 힘을 모아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지역공동체 운동의 사례로서 굳이 비즈니스를 논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기업의 개념이 지나치게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자본 곧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의미하고, 기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 양 이해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의 사상마저도 아전인수로 왜곡시킨다. 흔히 아담 스미스의 사상을 나타내는 저서로 「국부론」이 얘기되지만, 그의 사상은 「도덕 감정론」에 더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를 등장시킨 청교도 윤리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7]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 기업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자를 존중하는 태도로 기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최근에 기존의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동체 자본주의’이다. 공동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성경적, 시대적 대안으로, 경제자유와 경제정의의 유기적 조화를 지향한다. ‘다 같이 더 잘 사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약자의 천부인권과 정직(Integrity)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정의 하에서 개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최대한 보장되고, 창의적 방법에 의한 자발적 나눔이 문화가 되는 자본주의가 공동체 자본주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 자본주의는 지역 공동체 운동의 전략적인 요충지가 된다. 왜냐하면 지역 사업조차도 지나치게 자신이 속한 지역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전개된다면,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기여보다는 자기 지역만을 위한 사업으로 전락하여 자칫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본주의 정신은 지역 사업이 사회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데 기여하도록 지침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자본주의는 곧 청교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근대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태동되었음과, 처음 태동될 때부터 이미 공동체 정신을 그 핵심요소의 하나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자본주의에 터한 지역 공동체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본래 청교도 윤리에서 유래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되찾고, 왜곡된 자본주의로 인해 피폐화된 현대인들에게 공동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운동을 교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를 포함한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해서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지역을 활성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교회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관건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제시할 수 있는 사례가 아직은 거의 없으나 임실치즈마을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인 1960년대에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와 예장 통합 교단의 심상봉 목사가 의기투합하여 마을의 빈곤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시작한 치즈 사업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임실치즈마을은 그 시작부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운영위원회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으며 민주적인 의사결정으로 마을을 운영해 하고 있다.





6. 나가는 말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교회의 모습도 변하게 된다. 시대마다 특정한 역사 상황에서 특정한 교회의 생활과 형식이 나왔고, 역사상 특정한 신학자들이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교회관이 있었다. 따라서 근본으로부터 교회라는 개념은 주어진 각 시대의 교회의 형태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스 큉은 교회의 본질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형이상학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 가능한 역사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관은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 상황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요구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습은 교회 자체와 더불어 필연으로 계속되는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새로이 시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시대를 개혁하기 위해 성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시험하고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그 당시의 문제에 답하는데 전력을 쏟았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현재의 상황에 맞는 교회관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사회가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시민의 덕성을 중시하는 시민 사회의 성격을 강조한다고 할 때, 교회 역시 이러한 시민 사회에서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나치게 물질을 중시하는 경제주의식 사고와 약육강식의 무한 경쟁 체제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현존의 가치를 초월하여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가치 및 규범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교회가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가치와 규범에 따라 지역 사회에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때에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공공성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한국의 교회들은 대부분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조차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더 이상 지역 교회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교인들도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오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지역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라고 하지만, 외부와는 단절된 채 안으로의 결속에만 집중한다면, 교회는 더욱 더 게토화 되고 ‘끼리끼리’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종교성의 추구는 설사 그들만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다원화된 현대 사회의 지평에서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교회는 지역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역에 대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교회가 속한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이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에 처한 이웃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여 좁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정재영]





도움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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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작은 생명 교회를 주목하자!”



이원돈 목사 (부천새롬교회,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





한국교회의 상황은 드디어 도저히 눈뜨고 볼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쓰나미 이후 간절히 선한 목자를 바라는 시대 이 시대의 백성들은 지금 내몰림과 따돌림이라는 처철한 목자 잃은 양떼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두 개의 한국 교회



한국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대형 교회 그리고 대형 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교회 성장에 매몰된 한국 교회의 세태를 꼬집는 예리한 진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교회가 최근 큰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미국 성장주의형 대형교회의 대명사인 미국의 수정교회가 파산을 목격하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의 초대형 교회 중에도 몰락 직전의 모습을 보임을 우리는 지금 다 함께 지켜보고 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 부러워하던 수정교회 그래서 한국 목사님들의 미국순례관광의 필수코스였던 성공적인 교회성장의 모델 수정교회를 앞으로 목사님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이렇게 하면 교회가 파산한다는 교회성장주의 운동의 몰락의 현실을 배우는 필수 코스로 자리 매김하여야할 처참한 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한국 교회의 이미지: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노르웨이에서 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테러가 발생한 가운데 붙잡힌 테러범이 자신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밝히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노르웨이의 그는 근본주의자라고 한다, 그러면 근본주의자란 누구인가?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걸핏하면 가스통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계시고 단군 상의 목을 짜른다든지 지하철에서 거품을 물고 예수천당 지옥 불신을 외치는 이런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분들을 우리는 대게 극우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불교 사찰에 들어가 불상에 십자가를 그려 넣는다든지 사찰 땅 밟기를 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분들을 우리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두렵게 하는것은 한국 개신교는 광신도, 십자군, 초딩, 개독교, 짝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보수'적 경향을 넘어서 근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한주간의 사회적 이슈는 무상급식 선거이었다. 이번 선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 서울시 무상급식 선거는 한국사회 진보측의 보편적 복지대 보수측의 선별적 복지의 한판 승부이었다. 그런데 결론은 진보측의 보편 복지의 한판승으로 결론이 났다. 무상급식 선거날 제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후배글이 하나 올라왔다,

“이번 투표 최대의 패배자는 한국 개신교회다”

왜 한국 교회가 이번 선거의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는가? 이번 선거에서 대형교회들이 무상급식 전면 시행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것은 시장이나 회사처럼 사적기관이 아닌 공적인 기관인 교회가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일은 교회 스스로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적 이익 집단임을 자임하는 행위를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저지르고 있는것을 의미 한다. 과거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약자들 편을 들며 민주화운동에 나섰을때는 이런 욕을 먹지 않았다. 비록 기득권 보수진영으로부터 정치목사라는 말은 들었어도 국민전체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놓고 가진자 기득권자들 편을 드는 일부 대형교회 보수 목사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세상의 비웃움과 조롱거리가 되어버리는 세태가 되어버렸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무상의 원리를 공격하고 무상의 원리가 확산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 들과 집단이 바로 대형교회의 보수목사들임을 보고 이들이 이번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투표를 선동하고 보편적 복지와 무상 급식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을 볼때 이들 이야말로 인간에게 무상의 은혜를 무한히 주시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며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내년 총·대선 앞두고 조용기목사와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김삼환 명성교회 목사등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을 내세운 우파 성향의 기독교 정당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고를 들을때 이들이 도대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 중 일부 대형교회들이 권력과 돈과 신도 수와 교회건물의 크기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교회가 공적이고 보편적인것을 잃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선별적이 될때 교회가 정의를 잃어 버릴때 어떠한 심판이 임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기후 생태계처럼 한국 교회 생태계도 급변하고 있다



최근 엄청난 폭우가 또 쏟아진다. 이렇듯 전례 없는 집중폭우는 기후변화의 양상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처럼 지금 지구촌의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들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는 올해 들어 산업화 시대란 무한경쟁 / 승자독식의 시대이었는데 그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카이스트학생의 자살 모습을 보면서 이 산업화시대의‘생존경쟁-효율-속도-성과주의’가 파산하여 우리 모두를 자살로 몰고가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미국 성장주의형 대형교회의 대명사인 미국의 수정교회가 파산을 목격하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의 초대형 교회중에도 몰락 직전의 모습을 보임을 우리는 지금 다 함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생태계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지금 산업화 시대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대는 산업화시대를 넘어서 있는데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대형교회 신드롬에 옵티마이즈 되어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3-1. 교회생태계의 변화



① 우리는 한국대형교회의 몰락과 기독교정권의 몰락 이후의 저성장시대의 한국교회를 준비해야 한다.



실천 신학 대학원의 은준관 박사님은 최근 한국교회를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한 싸움이 아니라 교인을 쟁탈해야 하는 무서운 종교 전쟁터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교회 성장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학적 색맹이 되어 이 흐름의 비밀을 읽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스스로 영적으로 살려고 젊은이와 지식인이 교회를 조용히 떠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제 메가 처치와 작은 교회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미래의 싸움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세대들과 교회가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설사 2050년에 한국교회 교인 수가 400~500만으로 축소되는 불운이 온다 해도, 중요한 것은 그 400~500만 명이 하나님나라를 존재 이유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창조적 소수가 되어 역사를 변혁해 가는 남은 자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린다.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교회의 크기가 몰락하고 한국교회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기독교정권의 몰락 이후의 저성장시대의 한국교회를 준비해야 한다.



② 사회적으로 소셜 테이너라고 하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목양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의 경쟁형 인간 이후에 이제 어떠한 인생이 들이 다시 탄생하고 있는가? 지금은 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의 경쟁형 인간에서 이제 돌봄과 나눔과 섬김의 목양적 인간으로 돌아서며 그러한 인간형이 존경 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운데 이 돌보고 나누는 목양적 인간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교회의 목사인가, 장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교회인가?

소셜테이너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가? ‘소셜테이너’는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최근 주목받는 소셜테이너는 단연 배우 김여진씨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개념찬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고 한다.

그녀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 소식을 듣고 홍익대학교 본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농성 중이던 이 학교 청소·경비노동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녀는 트위터로 부지런히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소식을 실어 날랐고, 반찬을 실어 날랐으며, 트위터로 뜻을 모은 시민들과 함께 청소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또 다른 분으로 정혜신 박사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이분은 자살의 위기에 직면한 쌍용 자동차 노조원을 심리상담을 하여 주었는데 그녀가 상당하는 동안에 그분들의 아이들을 바깥에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정말로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평택 쌍용차 해직자 가족을 찾은 가수 박혜경씨와 레몬트리 공작단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최근 신문기사에서 영화배우 김여진과 가수 박혜경씨 그리고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박사를 보며 이들이야 말로 파산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시대의 신자유주의의 인간형이후 고치고 싸매고 치유하는 목양적 인간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태일 이후 185일을 고공농성을 하여 3만 명이 부산으로 집결하게 만든 김위원장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 피조물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셜테이너라고 하는 사회의 새로운 목양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교회도 성공만을 바라보고 서로 경쟁하는 낡은 시대의 삶의 가치를 버리고 서로 나누고 섬기고 돌보는 내양을 치는 목양적 삶을 사는 부활한 인생들로 새롭게 거듭나 부활 이후의 서로 나누고 섬기고 돌보는 삶을 신나게 출발하는 생명목회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③ 2013의 한국교회 WCC 총회 유치로 교회의 새로운 마당이 준비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인의 올림픽이라고 하는 2013 WCC 제 10차 세계 총회 부산에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 부산에서 열리는 제 10차 WCC 세계 기독인 대회는 우선 그 주제부터가 주목할 만다. 생명 정의 평화가 총회의 주제로 결정된 것은 바로 생명 정의 평화를 절실히 요구되는 바로 아시아와 한국의 상황이 반영된 주제로 환영할 만한 주제가 선정되었다.

둘째로는 아프리카의 파다레(열린마당)와 남미의 뮤티라오(Mutirao)에 이어 한국대회는 마당이라는 개념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 부산 총회때 우리가 활용했으면 하는 우리 한국의 마당이란 무엇을 뜻하는 개념인가?



첫째로. 마당은 열린 소통 구조 이다. 한국 사회에서 마당이란 우선 가족공동체와 마을과 지역사회과 만나는 열린 소통 공간이듯이 이 마당 공간에서 어떻게 가족과 교회와 마을뿐만이 아니라 세계와 만날 수 있는가하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마당 공간이 펼쳐져야 할 줄로 믿는다.

둘째로 한국의 마당에는 판이 벌려지고 그 판에는 해학과 소통과 해방의 맛이 있다.

셋째로 한국의 마당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갑자기 구경꾼과 관중이 무대에 뛰어들기 시작하고 배우과 관객이 어깨동무하고 하나가 되어 대동의 세상을 이루는 그야말로 해방의 절정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우리는 이번 10차 세계 WCC 총회때 이 마당의 진행 절정에 관객들이 무대로 뛰어들고 주최측과 참여자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새로운 우주와 새로운 세상과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 드라마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5. 새로운 에큐메니즘 즉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교회 생명망을 짜기와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의 가능성이 있다.



한국교회는 목이 마르다. “추락하기만 하는 한국교회, 왜소해져만 가는 교회운동, 대안이 없다는 말인가?” “예수 정신을 구현하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교회모델이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운동의 방법론은 없는가?” <생명평화마당> 9월 포럼은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묻고자 한다.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퍼뜨려야 할 1차 영역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그동안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교회갱신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현장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논의를 해왔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지금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5가지 부분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운동을 생태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그려보고 그것을 발전시켜 보려고 한다.



1. 지역사회 복지형 2. 교회시민사회형 교회 3. 생명생태형 교회 4. 도시창조형 교회 5. 교회 2.0 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 생명 평화 마당 교회 위원회에서는 이번 종교개혁주일 이후에 오늘 한국 교회의 생태계의 변화를 진단하며 대형교회 시대 이후 중소형 생명교회의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과 생태계를 제안하려 하는 것이다.



1. 지역 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지역 사회 생명형 교회:

우리가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를 생각할 때 가정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이제 교회를 지역과 사회에서 분리 격리 고립된 한 개교회의 단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스스로 고립되고 자폐된 한 개체 교회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지역과 마을과 자연과 우주와 생태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태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에서 이제 교회는 마을속의 지역 속에 교회가 되어야 하고 목회자는 교회의 목회자인 동시에 지역과 마을을 목회하는 지역 생명 목회자로 적극 나서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와 마을과 지역을 잇는 영적인 동시에 복지. 교육. 문화적인 지역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공부방, 도서관, 복지관, 주민자치 센타 등의 복지 교육 생태계를 만들고 이러한 복지 문화적 생태계들을 교회의 영적 그물망과 서로 연결 소통할 때 교회는 마을과 지역을 살리는 영적 생명의 구원 망으로 다시 설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교회일수록 지역 사회의 교회가 되어야 하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한, 지역의 교회나 마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개 교회 목사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목사가 되어야 하며 지역 사회에 있는 자원을 연결하고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정보화시대의 다품종 소생산체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화 다품종 소생 산의 시대의 미래 교회는 작고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다윗과 같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윗과 같은 미래 교회들은 작지만 아름답고, 작지만 자유롭고 창조적인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은 에큐메니칼한 생명 교회들은 창조적 작은 교회들로 작은 생명 생태망으로 지역을 파고들면서 실핏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덩치는 작지만 수많은 작은 다윗들로 분화하기도 하고 다시 연합 연대하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에큐메니칼한 영성으로 무장된 작은 지역 생명 생태형 교회로서 작지만 강력한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는 지역 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생명 생태적 영성의 생명 교회들이 될 것이다.



2. 공적 영성 상실로 게토화되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시민 사회형 교회 :

많은 한국 교회들은 개교회주의·기복주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서 기독교 영성과 사역의 공적 측면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공적 영성의 미발달은 크게는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였으며, 작게는 성도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시민의 역활을 감당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많은 신앙인들의 착각은 한국 개신교의 위가 개인적인 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개인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 개인이 가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지만, 교회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사역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 경건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사역을 이끌어줄 시대적 세계관 신앙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목회자 혹은 교회라고 해서 공적 영성의 결핍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신학적인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패러다임을 기복적·성장지향적·개교회주의적 영성에서 공적 영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한국 개신교의 영성 코드에 공적 영적을 담아내는 신학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지향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학준 교수 / 뉴브런스윅신학교)

우리는 향린교회 새민족교회 등 지금 이러한 교회의 공적 영성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교회들이 탄생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건강한 의미에서 교회도 성장하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교회의 공적 영성과 사회적 책임이 최근 ‘2012 생명평화 기독교행동’으로 출범하며 새로운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3. 농촌 지역 생명 생태 환경형 교회 : 생명농업포럼



"생명농업과 농촌교회 그리고 지역공동체"



한국 교회의 농촌교회에서 이미 생명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생명농업과 생명목회는 단순히 농법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의 문제이고, 생명문화의 문제이고, 세계의 관계를 생명적 관계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복음사역에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과제가 된다고 보는 생명 농업 포름이 존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생명 생태 목회가 준비되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최근 기후문제를 중심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맞이하며 이러한 생명 생태형 농촌교회들의 존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이러한 생명 생태형교회에 대한 관심이 농촌교회에서 출발하여 도시교회로 그리고 마을과 지역의 생명 생태 살리기 운동으로 확산되어 감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20-30명밖에 안 되는 농촌교회라도 목회자가 마을의 목회자로 생각하면, 목회적, 선교적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WCC 총회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공론화하고 공감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피조물, 다른 인종, 다른 종단과 함께 사이좋게 잘 사는 것,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다시 한 번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는 농촌교회 좌담회 중 이태영 목사)



4. 도시지역 도시 창조 목회형 “지역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도시목회”

(Creative Urban Ministry for Local Community)



지금 한국의 도시 교회의 일각에서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와 마을 만들기"를 통해 도시 교회 공동체와 창조목회를 연구하는 공동체가 “도시 공동체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대표적인 그룹으로 도시 공동체 연구소는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지역공동체를 세우는 지역교회운동에서 찾고자 새로운 도시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도시공동체 연구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변혁적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역사회를 섬기고 지역의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발생하는 모든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신앙의 공적 책임에 대한 인식부재로 인해 나타난다고 보고, 우리 연구소는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지역과 삶의 현장으로 겸손하게 내려가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며 지역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공적 표현, 실천, 공공신학의 구체적 실천, 교회의 정치적 책임, 사회와 지역에 대한 공적인 의사소통 등의 문제를 다루고 함께 토론하면서 앞으로 연구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지, 또 한국교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5. ‘교회2.0목회자운동’



= 교회 목회도 2.0 시대, “개방, 참여, 공유, 소통”해야

: 참여 공유 연대 web 2.0 매체 혁명 소셜 네트웍크형 교회=



나도 이러한 교회를 다니고 싶다는 교회 소비자 운동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에 교회도 참여 공유 연대로 민주화 하여야 한다는 교회 민주화 운동이 젊은 목사님들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들 젊은 목회자들은 목회자 중심의 독단적인 교회 운영에서 벗어나 평신도 교인들이 교회 내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하는 민주적 교회 운영을 제일 큰 목회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상호 평등한 의식과 협력적인 팀 사역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지도력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결론:



최근 성공회 신학대학의 신용복 선생님이 한 신문사와 대담을 하셨는데 거기서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늘 새로운 창조성은 늘 변방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가 대단히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중심부는 언제나 기득권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중심부에서는 창조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인류역사의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문명의 중심부는 늘 변방으로, 변방으로 옮아왔다.

왜 그러냐면 중심부는 늘 보수적 저항이 완고할 뿐 인데 반해, 변방은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있는 창조의 지반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변화는 변방에서 오고 모든 새로운 에너지는 밖에서 온다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밖에서 변방에서 불어온다.

안철수 교수가 한국기업이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동물원에 갇혀있다고 하였듯이 한국교회도 지금 대형교회의 동물원에 갇혀있다. 이 동물원에서 탈줄해야 하고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변화와 혁신의 벤쳐 생태계가 탄생해야 하는데 그것이 중소형 생명형 교회들의 탄생이다.

혹시 우리 교회만 낡은 산업화 시대의 대량생산 체계를 닮은 대형 교회의 모습을 흠모하고 닮으려하여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작고 빠르고 창조적인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며 세상과 새로운 소통을 꿈꾸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생태계는 급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산업화 시대에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대형교회 중심의 교회 성장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급격한 쇠퇴를 경험하고 있고 새로운 교회 생태계로서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는 그 덩치는 크지만 이미 그 믿음과 도덕성과 사회성과 영성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큰 걱정과 근심과 진통을 앓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서 오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두려움이 없는 교회라, 작지만 아름답고, 작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인 교회들이 될 것이다.

이처럼 미래에서 오는 교회는 크고 멍청한 골리앗이 아니라 작지만 창조적이고 영향력 있는 다윗과 같은 교회로 올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를 준비해야할 때이다.

첫째로 "산업화 시대의 개교회 성장 패러다임"을 넘어 정보화 시대에 창조적으로 지역과 소통하는 "지역 섬김형 생명 목회 패러다임"의 교회의 탄생을 기도해야할 때이다,

둘째로 나도 이러한 교회를 다니고 싶다는 교회 소비자 운동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에 교회도 참여 공유 연대로 민주화 하여야 한다는 교회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 되어야 할 시기이다,

셋째로 최근 발생하는 모든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신앙의 공적 책임에 대한 인식부재로 인해 나타난다고 보고, 지역공동체 세우기와 마을 만들기"를 통해 도시 교회 공동체와 창조목회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지역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할수 있는 새로운 에큐메니칼한 공적 영성을 준비할 시기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를 준비하는 우리로서 가장 중요한 인식의 전환은 이제 교회는 교회와 마을과 지역과 지구촌을 잇는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를 준비해야 할 시기임을 자각하고 준비하여야 할 때라는 것이다.[이원돈]











































































“<예수살기>의 교회운동”



양재성 목사 (예수살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예수살기 창립선언문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역사적 현장을 유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개인화해버렸다. 역사를 외면하고 단지 종교 영역 안에 갇혀버린 기독교, 삶을 간과하고 단지 말의 잔치로 숨어버린 기독교는 지금 극심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이 추락해버린 한국교회 모습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 예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우리들의 허물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예수 살기의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감히 ‘예수살기’라 이름 하였지만 우리가 예수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반성과 뉘우침에서 이 모임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는 자리에서 예수를 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믿기는 예수 알기에서 시작하여야 하며 예수 따르기, 예수 살기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수는 우리의 전 존재가 자신을 따라 나설 것을 요청하셨다. 부자가 되기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부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신다. 예수가 가르친 구원은 개인의 심리적 위안이나 죽은 후에 타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만이 아니다. 예수의 구원은 개인의 경건과 사회적 성화, 더 나아가 우주적 성화까지 지향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듣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갇힌 자가 놓임을 받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치유와 해방의 메시지였다. 그는 개인을 억압하는 부당함과 사회를 억압하는 불합리와 생명을 억압하는 불의함에 맞서 싸우셨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생명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역사의 진보에 발을 맞추어 책임 있는 행동을 해나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참된 기독인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과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의 순수성을 지켜온 양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할 무렵 기독교는 민족의 자주적 의지를 키워가는 온상이었다. 일제가 기독교신앙을 타계적, 초월적, 개인적 신앙으로 변절시키려는 의도에도 당시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불과한 기독인들이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살해, 구속, 부상당한 피해자 중 기독교인이 과반수를 넘어설 만큼 기독교는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의연하게 순교의 길을 가기도 하였다. 1970년대 유신 정권이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할 때에 기독교는 산업선교 등을 통해 이 땅에 고난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였고, 이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으며, 고난의 현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을 꽃피웠다. 한편 한국사회가 통일문제를 금기시하던 때에 한국교회는 해외에서 남북 교회가 만나 화해와 교류를 선언하고, 마침내는 1988년 한국기독교의 통일선언과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으로 이어지는 선도적 투쟁으로 통일운동의 물고를 트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독교는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고비마다 신앙 양심을 지켜온 사건들에 주목하고 이들에 의해 유지해 온 예수를 살아가는 전통을 계승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일제 강점기에 신사에 참배한 잘못, 해방 후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잘못, 유신군부독재의 인권 유린ㆍ억압ㆍ학살을 묵인하고 동조해온 죄악, 아울러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동참하여 이웃나라에 고통을 가하는 죄악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며 민족 앞에 사죄한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평가는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이며, 한국교회가 참된 교회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민주화되었고 조금씩 사회의 성숙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비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반사회적,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길을 가고 있으며, 결국은 교회 내 윤리는 실종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자신이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삶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과 연대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이에 역사에 책임적 자세로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기독인들이 모여 새로운 기독인의 모임 “예수살기”를 세운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통하여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고자하며 다음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나아가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출애굽을 통해 히브리 민중이 이룬 해방된 공동체를 추구한다.

독재와 억압의 표본이었던 애굽의 바로 아래서의 종살이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였고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신음하던 떠돌이, 가난뱅이들, 노예들을 대표하는 히브리 민중들을 내 백성이라 칭하시며 그들을 해방시킬 것을 선포하셨다. 마침내 애굽과의 투쟁을 통하여 고통과 억압에서 히브리 민중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은 해방자이며 그들이 이룩한 히브리 공동체는 해방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된다. 즉 민중을 섬기는 일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그것이 참된 기독인과 거짓 기독인을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인간화, 반생명성을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하며 인간과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의 중심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간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다.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의 태어나심, 삶, 죽으심, 부활하심과 가르침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 예수가 평생 붙들고 사신 것은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여기에 충실했다. 그의 죽음도 십자가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천사들은 예수의 태어나심이 하늘엔 영광이고 땅엔 평화라고 노래하였다. 예수는 생명을 주러왔고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긴 자를 고치시고, 소외당한 자를 세우시는 등, 생명을 살리고 일으키고 보전하는 일은 예수의 중심 사역이었다. 생명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이 시대에 생명을 살리는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한 예수는 평화를 주러왔다고 자신을 규정하셨다. 때문에 예수는 거짓 평화인 로마제국에 빌붙은 예루살렘 체제와 대결하여 성전을 숙정하셨다. 예수께서 평생을 두고 씨름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의 두 기둥은 생명과 평화인 셈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생명과 평화의 나라다.



셋째,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정체성을 이룩하여 나간다.

초대 교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성령이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하셨고 예수를 따르게 하셨다. 성령은 사람들 안에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여 하나되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는 우주가 하나님의 몸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지체로 한 형제요, 한 자매임을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임받은 공동체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종과 자유인, 이방인과 유대인, 여자와 남자가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갈라진 것들이 하나되는 화해는 공동체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오만을 회개하고 그들과 자매, 형제 관계를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성령은 무력한 자들을 일깨워서 세상을 변혁하도록 역사의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하신다.



넷째, 우리는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보전에 앞장선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그 중심 과제를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보전과 폭력극복운동에 두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이 과제에 충실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고 평화공동체를 건설하고 창조질서를 보전하며, 폭력에 반대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살기 신앙고백문



우리는 해방의 역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신론)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기독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생명과 평화의 영임을 믿는다. (성령론)

우리는 예수의 몸인 교회가 생명, 평화 그리고 정의의 세상을 여는

하나님의 일꾼임을 믿으며 (교회론)

성서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가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론)

우리는 모든 생명이 자유로이 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임을 믿는다. (제자도)





예수살기 행동강령



<개인>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을 성찰한다. (말씀)

우리는 날마다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보전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에 순명한다. (순종)

우리는 만물을 하나님께 하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한다. (정체성)



<교회>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화하지 않는다. (공교회)

우리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성례에 참여한다. (경외)

우리는 올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개혁)



<사회>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 (이웃/봉사)

우리는 겨레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쓴다. (통일)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며 생명, 평화를 위해 일한다. (평화)

우리는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힘쓴다. (평등/정의)

우리는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힘쓴다. (인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와 위선에 저항한다. (정의/저항)

우리는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과 연대한다. (연대)

우리는 지구를 살리는 창조질서보전에 힘쓴다. (생태)

우리는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이웃종교와 대화 연대)





예수살기 운동 및 모임 수칙



1.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깊은 동지적 이해와 사랑을 가진다.

2. 우리는 운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므로, 어떤 전체주의나 자율성을 침체시키는 요소를 경계한다.

3. 우리는 운동의 통일성을 추구한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힘을 합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4. 우리는 운동의 역사성에 주의한다. 올바른 역사흐름과 거슬러 흐르는 운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성찰과 분별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5. 우리는 서로 다른 교파나 종교 단체에 대해서 포용성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대화하며 역사의 공동과제를 위하여 협력한다.

6. 우리들은 각자가 모임에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한다. 우리는 실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월정 회비를 성실하게 납부하여 회원의 의무를 다한다. 매주 목요일을 기도의 날로 정하여 정해진 시간에 회원 상호간 기도의 만남을 가지며 매주 홈페이지(www.withjesus.or.kr)에 들어와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건강한 신앙과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학습을 열심히 한다.

7. 우리는 시간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유물이므로 정확하게 지킴으로 남의 시간을 늦추거나 빼앗지 아니한다.[예수살기]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과 역할

<생명평화마당>은 그동안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에서 그 위상이 어떠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 왔습니다. 우선 월례포럼을 활동의 근간으로 두고, 신학위원회를 중심으로 대중을 확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차근히 내용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사회와 한국기독교의 모순과 폐단을 지적하며, 차세대 개신교의 개혁을 위하여 진지하게 자성하고 생명과 평화의 사역을 펼쳐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구현하기 위하여, 한국교회 영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교회위원회의 활성화에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

1. 한국교회는 개혁과 새로운 대안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포스트 메가처치의 대안으로 중소형교회가 할 수 있는 교회개혁의 건강한 모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는 지역사회형 교회모델, 시민사회형 교회모델, 생명생태환경형 교회모델, 도시창조목회형 교회모델, 교회2.0목회자운동 등의 시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생명평화마당>이 지향하는 교회모델 또는 교회운동모델을 개발하고 확산시켜 나감으로써, 한국교회, 특히 중소형교회에 활력을 주고 목회의 신명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2. 작금에 있어서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근본에 자리한 신앙관부터 개혁하고 진정성 있는 고백에서 기인한 본질적 개혁이어야만 한다. 외연만 그럴싸하게 바꾸는 시늉으로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도출하고 실현가능하여 주효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3.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중소형 교회(농어촌, 도시빈민)모델로써, 실제적인 교회개혁을 이루어간다는 목표로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을 설정해야 한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역할과 활동계획

1. 우선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역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대안에 목말라하고 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며 힘겨운 목회를 하고 있는 중소형교회의 목회자들과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목회방안을 연구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나가야 한다. 그 같은 자료들을 엮어서 신학위원회나 사회선교위원회와 함께할 논의자료로 제시할 수 있다.

2. 교회위원회 중소형교회의 모델정립의 완성도를 위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생명평화마당> 월례포럼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월례포럼이 신학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꾸려가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교회위원회와 사회선교위원회가 번갈아서 주도해야 한다. 그럴 때 ‘신학-교회-선교’라는 삼각구도 안에서 내실 있는 포럼이 될 수 있다.

3. 교회위원회의 활동의 결과로 얻은 성과는 전국단위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확산시켜 내야 한다. 이를테면 ‘생명과 평화를 향한 교회개혁 선언’을 선포하고 전략적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함께 뜻을 가진 동역자들의 규합을 도모해야 한다.

4. 또한 이미 우리와 비슷한 내용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 단체들과 동지적으로 연대하여 ‘생명평화의 목회’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

5. 목회자 동지들과 끈끈한 정기모임을 기반으로 하고, <생명평화마당>의 내용과 조직을 바탕으로 하며, 연구하여 도출한 생명평화의 교회모델 또는 교회사역모델을 전국단위로 확산해 나가는 활동을 교회위원회 역할로 규명하고자 한다.

6. 창조적이면서 독창적인 모델을 연구하고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적 대안을 마련하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환경을 서서히 형성해가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1] 이 글은 정재영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의 이론적 기초,” 정재영·조성돈, 「더불어사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서울: 예영, 2010)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이 내용은 이종수, “공동체와 마을 만들기,” 이종수 엮음, 「한국사회와 공동체」(서울: 다산, 2008)의 23-30쪽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3] 생태공동체운동센터 홈페이지(http://www.commune.or.kr)에서 인용.


[4] 녹색 가게 운동 홈페이지(http://www.greenshop.or.kr)에서 인용.


[5] 행복한 나눔 홈페이지(http://www.giversmart.or.kr)에서 인용.


[6]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중고물품들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싼값에 판매하고 수익금은 전액 공공복지에 사용한다는 100년 역사의 영국 채리티 샵의 운영 방식과 정신을 이어 한국에 접목한 가게이다. ‘사랑의 줄잇기 가게’ 홈페이지(http://www.lovingline.org/)에서 인용.


[7] 이것은 막스 베버가 자신의 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세계, 1988)에서 전개한 핵심 논제이다.

2018/11/06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나무위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나무위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최근 수정 시각: 2018-11-01 00:58:54


분류
1983년 테러
제5공화국/사건사고
김일성 시대
미얀마의 역사
북한의 대남 도발사




관련 문서: 북한의 대남 도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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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두환미얀마 방문3. 테러4. 사망자 명단5.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6. 수습 및 후속 조치7. 후폭풍
7.1. 대한민국7.2. 북한7.3. 미얀마7.4. 국제 사회8.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9. 그 밖의 이야기들10. 관련 자료
10.1. 중앙일보 청와대비서실 (1993.8.13 ~ 8.20일자 연재)



1. 개요[편집]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국명은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일행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폭탄 테러. 간혹 아웅 테러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초기에는 '아웅산 폭파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부르면 아웅 산이 폭파 테러를 일으키거나 아웅山이 폭발한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오해가 없는 명칭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Rangoon Bombing', 즉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라 부른다.

2. 전두환미얀마 방문[편집]




1970~1980년대는 남북한의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절하고 자기들과 수교하라고 조르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가며 온갖 선물을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었다.

특히 70년대를 기점으로 남북한의 국력 격차가 서서히 남한의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남한의 외교전은 전보다 더 거세어졌다. 미얀마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전두환은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순방에 미얀마를 추가하며 첫 번째 순방국으로 결정했다.

사실 가을 해외 순방국에 미얀마가 추가로 결정되기까지 정부 핵심 관료들 사이에서 반대가 상당했다고 한다. 협소한 국가 규모 및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거의 외톨이 같은 국제적 위상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친북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다.

또한, 북한에 의한 암살/테러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 등 세계 정세에 정통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피력되었다. 하지만 전두환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심[1]으로 반대 의견을 뒤로 한 채 미얀마 순방을 추진하였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김포국제공항을 떠나 미얀마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미얀마 양곤공항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얀마 순방 결정까지 참모진의 반대의견이 좀 많았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해외 순방이 워낙 많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미얀마 순방 또한 평범한 해외순방으로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다.

3. 테러[편집]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였다.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들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한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전두환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있었다. 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맨 앞에서 선도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도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하자,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곧 오실 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 대사의 말에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한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하는 등 부산했다.



위의 사진은 이렇게 부산한 가운데 촬영된 한국 정부 수행원들이 참배를 위해 도열한 모습을 담은 것으로, 테러가 발생하기 불과 몇 초 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즉 이것이 희생된 수행원들의 마지막 모습. 얼핏 보면 사고현장에서 건져진 사진답지 않게 매우 깨끗하고 선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당시 매우 훼손이 심각했으며 위에 있는 사진은 복원한 것이다.

이날 예정되었던 참배 대형은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보았을 때 아래와 같으며, 참배 대형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는 인물들 중 전두환을 비롯한 굵은 글씨로 표기된 이들만 생존했다.



최재욱
공보 비서관

하동선
해외단장

황선필
대변인
(미도착)

김재익
경제수석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김용한
과기처 차관

강인희
농산부 차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이기백
합참의장

심상우
국회의원[2]

함병춘
비서실장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경제 부총리


전두환
대통령
(미도착)


그러니까 미도착한 사람 빼고 15명 중에서 가장 구석에 있던 2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다 죽음을 당한 것이다.

수행원들이 도열을 마치고 난 직후 나팔수들이 진혼곡을 1~2소절 연주하다가 아직 주빈인 전두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아직 참배가 시작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진혼곡을 멈춘다. 참배인원들 사이에서 나팔수의 실수를 두고 '인제 와서 새삼스레 예행 연습을 하는 건가?', '아직 전두환이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왜 진혼곡이 울리는 거야?' 등 설왕설래가 오가는 순간...


MBC 정치부 문진영 기자[3]가 촬영한 테러 당시 영상. 18초 부분에서 폭탄이 터진다. 사고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4]
4. 사망자 명단[편집]


한국(17명)[5] : 서석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6], 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상공부장관), 서상철(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주 미얀마 한국 대사), 김재익(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재무부차관)[7],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한(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국회의원)[8], 민병석(대통령 주치의), 이재관(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 사진기자)[9], 정태진, 한경희(대통령경호실 경호관)

미얀마(7명) : 4명(+3명, 테러리스트 검거작전 중 순직자)

북한(1명) : 공작원은 총 3명이었는데 신기철 상위는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고 2명은 체포되었다.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미얀마의 형법에 의거해 김진수 소좌는 1984년 사형당했고, 강민철 상위는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 5월 18일에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했다.[10]

1989년부터 강씨와 같이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에 출옥한 미얀마 야당 정치인이자 언론인의 증언에 의하면, 강씨는 생전에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2007년 말 북한-미얀마 간의 외교가 수복되자 기대를 가졌지만, 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했고, 남한은 극악한 테러범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해서, 결국 미얀마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은 당시나 지금이나 "독재자 전두환을 제거하려던 남조선 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북한이 개입한 게 아니다" 이고 따라서 "강민철은 북한 사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5.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편집]


여러 모로 명백히 전두환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히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가지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져 살아남았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전두환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이 탑승한 승용차가 운행 도중에 길바닥에서 고장이 나 버렸다.

문제는 당시 미얀마사회주의 국가인데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여서 길바닥에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는 것. 운전기사는 주변을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된다. 이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은 도착해 있을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무장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는다. 국빈인 국가 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또 그럴 경우 외무장관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전두환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은 격려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인사를 끝까지 했고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오전 일정이 우리나라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닌지라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을 살린 것이다.

한편 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에 묘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이계철 대사가 머리 스타일이 전두환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고 또한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려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마치 전두환인 것처럼 오인될 수도 있었다.

좀 다른 버전도 있는데 통상적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은 전두환과 함께 한다. 그런데 그날은 참배할 묘지의 행사장이 좁다는 이유로 장세동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 함병춘 비서실장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함병춘 실장도 대머리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이계철 미얀마 대사 또는 함병춘 실장을 전두환으로 잘못 봤든지 아니면 관례처럼 비서실장이 도착하니 전두환도 당연히 도착했다고 생각되어 폭탄테러를 감행했다고 한다.[11]

어찌 됐건 이를 본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고 연주를 시작해 버린 것이다. 이 대사가 대통령이 아닌 것임을 알고 이내 진혼곡 연주를 중단했으나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고 곧바로 폭탄이 작동했다. 스케줄 지연과 함께 전두환이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 나팔수가 착각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하여 저술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이라는 책에서는 테러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팔수의 오인보다는 당시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씨가 시간적 여유가 있자, 나팔수들에게 미리 불어보라는 손짓을 하였고, 나팔수가 나팔을 불자 폭탄을 터트린 것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전두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2가지는
1.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 펑크 + 후진국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어 택시를 타는 게 늦어짐 +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아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 = 스케줄이 늦어지게 됨
2. 그곳에 있던 주 미얀마 한국 대사가 전두환과 비슷한 용모 / 비서실장이 전두환보다 미리 도착, 나팔수들이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해 진혼곡 연주, 나팔소리에 맞춰 폭탄을 터트린 테러범들이 전두환이 도착하기 전에 터트려버림
이 기막힌 우연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이 외에도 노신영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이 미군과의 연계를 통하여 항로를 변경하는 예리한 판단[12]으로 전두환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단순히 미군과의 연계를 위해 항로를 변경한 것이지 이걸 가지고 직접적으로 해당 사건으로부터 전두환을 구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항로 변경으로 미루어진 스케줄로도 전두환은 죽을 뻔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을 부정하기 위해 이 항로수정안을 가지고서 노신영장세동이 계획한 전두환 암살 작전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경호실장 장세동은 전두환과 늘 같이 다니기 때문에 묘소 방문 일정이 그대로 굴러갔으면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게다가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 노신영은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접점이 없다. 그래서 둘이 힘을 모아서 일을 꾸밀 확률은 매우 낮았고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서는 권력 때문에 다투었다. 이에 대해서 국가안전기획부 항목 참조.

6. 수습 및 후속 조치[편집]




미얀마 랑군(양곤)에는 2개의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2명 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만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치료는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랭군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들이 동원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한편 테러를 저지른 북한 공작원들은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며 양곤강으로 향했다. 여기서 대기 중인 쾌속정을 타고 북한 화물선에 숨어 북한으로 귀환한다는 게 탈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곤강에 도착해보니 대기하고 있어야 할 고속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들은 다시 산개해 북한 화물선까지 갔으나 그마저도 없었다. 결국 북한은 처음부터 그들을 탈출시킬 생각 따윈 없었던 것.

결국 공작원 3인 중 신기철은 총격전 중 사살되었고, 강민철과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다 안전핀을 뽑는 순간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이 던지려던 수류탄 2개가 동시에 이런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애초에 안전핀이 뽑힌 순간 수류탄이 터지도록 몰래 조작해 놨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북한이 수류탄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 정도의 공업 수준을 가진건 아니기 때문.

폭발로 팔 하나와 눈 한쪽을 잃은 김진수는 계속 진술을 거부하다 처형되었으나[13],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 강민철은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북한의 암살 위협에 괴로워하다 2008년 5월 18일 간암으로 옥중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당시 테러범 검거를 담당했던 미얀마 경찰이 33년 만인 2016년에 미얀마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김진수는 아웅산 테러범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검거했다"고 밝혔다.[14]

7. 후폭풍[편집]

7.1. 대한민국[편집]









사실상 한판 붙어보자는 선전포고[15]였다. 상대가 한국이 아니라 다른 국가였다면, 그리고 미국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16] 진작에 군사적 작전이 시행되고 양측은 피를 봤을 것이다.

이 사건은 행정부를 노렸다는 점에서 북한의 목적이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의 무력화와 국가적 분열에 있었다. 물론 명목상이긴 하지만 박정희 때부터 마련된 7.4 남북 공동 성명 등 여러 남북 평화 통일 방안들이 있었고, 북한은 자기들의 범행이 아니라고 발뺌했으므로 혼란을 틈타 군사적 공격을 가하는 것은 이전의 국제적 선언을 자기들 발로 차버릴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조건 및 외교사적 전례를 제쳐놓고도 이건 대놓고 남조선 니들 엿 먹어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이 이미 1.21사태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등으로 이미 암살을 시도한 전례가 있지만, 적어도 그 두 사건은 오직 국가원수만을 노린 것이었고 한국 내부에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각각 비밀특수부대와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 문세광을 활용한 일이라 전자는 "좌경맹동주의자들이 헛짓한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일"라고 발뺌이 가능했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 핵심 인물을 모두 없애고,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제3국에서 저지른 테러다.

사망자 명단만 봐도 부총리, 장·차관에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대한민국 최고위층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부상자까지 확대해보면 장·차관이 몇 명 더 있고, 합동참모의장을 비롯한 장성까지 들어갔다. 제대로 터졌다면 국가 행정부, 군 지휘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설치했던 폭탄 중에서 하나만 터지고, 다른 하나는 불발이었다. 그나마 소이탄이 불발되어서 망정이지, 이것마저 터졌으면 섭씨 4,000도가 넘어가는 열기 때문에 사망자가 더 나왔다.

그리고 전두환이 살아남았다는 게 오히려 한국 국민들에겐 다행이었다. 전두환이 독재자였다고 해도, 당시에 전두환까지 죽었으면 대한민국은 국가적인 혼란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17] 실제로 이 사건으로 군부에서 "북한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하자 로버트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경악했다. 이에 전두환은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고 일갈하는 한편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나 강경한 태도를 보인 덕분에, 겨우 전방 장교들이 진정해서 사건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즉,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암살당했다면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명령의 공백 속에서 전두환의 친위세력인 하나회 소속 장성이나 다른 장성들이 '복수'를 이유로 북한에 국지전이든 특수작전이든 보복 공격을 감행하려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 전면전까지는 미국과 중국 및 소련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18]

이 사건으로 미국은 당시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까지 테러 발생 1달 뒤에 전격 방한하여, 이례적으로 최전방까지 시찰하는 등 한·미 동맹 결의를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국군에서 북한을 때려잡자는 강경 분위기에 대해서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워커는 테러행위가 북한이란 것을 확신하지만 보복공격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에 전두환은 "우리 정부와 군은 본인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국의 대통령에게 확실히 해두고 싶다. 우리는 귀국 정부와 충분하게 의견을 조율하기 전에 섣부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19]

한편 미국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단했던 지대지 백곰 미사일의 개발을 대북 위협용으로 재개했는데 그 결과물이 현무 미사일. 그런데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켰던 것도 전두환 본인이다.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정권을 차지한 신분이라서, 동맹국가인 미국일본에서 자꾸만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도 전두환은 미국과 일본을 진정시키려고 엄청 애썼다.
7.2. 북한[편집]


테러의 당사자인 북한(지휘는 장성우(장성택의 친형)가 주도)은 이중적 태도를 취했는데, 북한은 당해 10월 8일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을 대화 상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종전의 대외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기했다고는 평가받았으나, 이를 도모한 이유는 베일에 싸여져 있다.[20]
7.3. 미얀마[편집]


말 그대로 나라가 뒤집어졌다.

주권국가인 미얀마의 영토 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으니 이는 미얀마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기한 대로 미얀마 사람들도 많이 죽고 다쳤다.

게다가 이 테러로 미얀마에서 성역으로 대접 받는(대한민국에 비유하자면 국립 현충원 이상으로 중요한) 아웅 산 장군의 묘소가 박살이 났다. 미얀마에서 아웅 산은 단순한 건국 공로자의 위치를 넘어서, 신성불가침 수준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미얀마는 국제 사회에서도 체면을 크게 깎이는 굴욕을 당했다. 타국의 국가 원수가 방문할 때는 자국의 국가 원수 수준에 맞춰 보안 조치를 하는 것이 외교적 관례이자 상식인데,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온 귀빈들이 죽고 국가 원수가 위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은 그만큼 미얀마의 치안 유지 및 사전 조치가 허술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얀마는 이전부터 북한과 연결이 있었으므로, 잘못 꼬이면 미얀마가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유인해서 암살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테러범이 명확했고, 미얀마 정권이 자기네 민족의 성지를 제 손으로 때려부수는 자살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대한민국 측에서도 이해했기 때문에 별 말 안 듣고 끝나긴 했다. 미얀마의 대통령인 우 산유는 물론, 당시 미얀마의 실권자인 우 네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도 사건 당일 오후에 이례적으로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할 정도였으니 미얀마 측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심각히 여겼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테러 발생일로부터 25일째가 되는 1983년 11월 4일, 미얀마 정부는 마침내 테러범이 북한군 특공대원임을 밝히고 "범죄 집단인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며 한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21] 이 사건 이후 미얀마에서는 '국내에서 외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해도 자국의 국가 원수를 살해한 죄와 똑같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보니, 법이 미처 이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해서 발생한 해프닝이다. 오쓰 사건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논쟁이 되었던 일이 있었다.

정부 관계자들이 사망한 일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본다면 2016년 방글라데시 다카 베이커리 테러가 있을 것이다. 당시 IS의 지령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학살이 일어난 홀리 아티산 제과점(레스토랑)에서 내국인 뿐 아니라 여러 외국인 관광객들이 피해를 입고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는 테러에 나라망신까지 콤보로 뒤집어쓰고 한동안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후 방글라데시에선 국가 주도로 추도식을 벌이고 각 관광객들이 속한 나라의 총리들도 와서 대거 참석하는 등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다.

2017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아웅산 묘소 테러를 관한 판결한 판사의 딸이 일본에서 의문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돼 북한의 보복성 암살이라는 추측도 제기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7.4. 국제 사회[편집]


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친북 성향의 제3세계 국가들이 전격적으로 북한과 단교하였다. 제 나라도 대한민국도 아닌 제3국에서, 그것도 그 나라의 제일 중요한 장소에서 그 나라가 국빈으로 맞아들인 사람들한테 폭탄 테러를 저지른 놈들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색이 우방국인 미얀마에서도 저렇게 깽판을 치고 다니는데 자기들이 안 당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로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제3세계 남북외교전은 북한의 장렬한 자폭으로 인해 북한의 몰수패로 끝나게 되었다. 2014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한몫 했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군부에선 "북한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분노했지만, 전두환이 이를 막고 외교적으로 수습하여 무력사태로 키우지 않았다.

결국 북한은 스스로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역사학자 한홍구조차 '전두환의 과오에 대한 평가는 계속 진행돼야 하지만, 이것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며 당시 전두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북한은 "테러범들이 북한 사람들도 아니고 북한과 관계 없다"며 범행 사실을 잡아 떼었고, 뒤에서 미얀마와 이면 교섭으로라도 붙잡힌 테러범들을 구출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었다. 미얀마는 친북 성향의 국가이기에, 북한이 보이지 않게 외교적으로 손을 쓸 여지는 있었다. 그럼에도 아웅산 자체가 미얀마의 국부급이다 보니, 미얀마 국민들의 반감은 장난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망명한 황장엽 前 북한노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1983년 당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관련해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예전의 1.21사태와 같이 "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 "절대 부인해야 된다"고 강경하게 대립하였다가,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리발 모드로 나간 것이라고 한다.

8. 만약 테러가 성공했다면?[편집]


앞서 설명했듯 국가 원수가 사망했으니 한국은 혼란에 빠졌을테고 이러한 틈을 타 북한이 남침에 준하는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를 노리고 저지른 테러일 수도 있다. 내부를 단단히 결속시키는데 전쟁 분위기보다 더 좋은 건 없다. 그러나 북한이 실질적으로 국지전 이상의 전투를 벌였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크게 혼나봤기 때문에.. 게다가 먼저 벌인 도발, 그것도 상대국의 행정수반을 테러로 모조리 날리고 시작하는 전쟁은 전쟁을 벌이는 정당한 명분 자체가 싹 사라지기 때문에 한국전쟁처럼 거의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기 충분하고 중국과 소련조차도 북한을 다시 지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때는 전력이라도 북한군이 확실한 우세였지, 이 때는 국군이 현대화된 전력을 갖추기 시작했는데다가 남한도 북한 못지 않은 병영국가였기 때문에 남북이 1:1로 전면전을 해도 북한군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남침으로 인한 적화통일은 자신들의 망상에 가까웠다.[22] 뭐 구소련과 중국마저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명백한 북쪽 잘못이기 때문에 실드치는 걸 포기했지만...

이 사건도 김정일이 벌인 후계자 승계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테러가 성공적이어서 전두환까지 죽였다고 해도 김일성이 마냥 기뻐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이 이때보다 젊었을 때도 박정희를 죽이려 든 적은 있었지만 후에 표면적 간접적으로나마 사과를 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후로 스케일이 정도 이상을 넘는 대남 도발의 경우 김정일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파 숙청과 주체 사상 제창 등 북한 체제를 완전히 쥔 김일성 입장에서는 권력의 안정과 말년의 편안함을 원하기 때문에 아들의 무리수를 타이르거나 뒷수습하는 것에 짜증이 났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위 항목에 서술된 황장엽의 증언만 봐도 김일성이 김정일식의 도발에 대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두환까지 죽어 작전이 완전 성공이었어도 혼자 좋아하는 김정일을 뺀 다른 북한 고위층들은 급작스런 전쟁 대비에 비상이 걸리고 한편으로는 남한과 미국에 저자세로 나가며 중국과 소련에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자문 구하느라 더 바빴을 가능성이 높다. 잘못하다가는 휴전선 북쪽이 아예 황무지로 변해버렸을 수도 있었다.

물론 미얀마는 강력히 북한을 싫어하게 돼 남한과 북한 도발에 공조했을 지도 모른다.

9. 그 밖의 이야기들[편집]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애초에 버마가 방문지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고 전두환 본인 또한 사회주의 국가 아니냐면서 영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지만, 허문도 문화공보부 차관이 "네윈 장군의 섭정을 벤치마킹하는 게 좋다."고 건의하고 이에 전두환이 혹해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참고로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노신영 안기부장은 버마가 친북 성향인데다 동남아에서 그다지 영향력이 큰 국가도 아니라는 점을 들며 전두환의 방문을 말렸다고 나온다.

아웅산 묘소와 폭파 사건 이야기. 테러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으니, 관련 자료를 확인할 요량이라면 한 번 보도록 하자.



1984년판 보도사진연감에 실린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희생당한 정부 수행원들의 영결식.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행했다.

수행원 영결식 및 관련 소식들을 정리한 당시의 대한뉴스 영상 링크.

이 테러로 희생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기용한 그야말로 21세기 초까지도 비견할 사람이 없는 S급 정부 핵심 참모+행정가들이었다.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법학,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등에서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

법학계에서는 이 사건에서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순직한 것을 아깝게 여기고 있다.[23] 한국법사회학의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는 평.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국 법철학과 법사상사, 법제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몇십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법학도라면, 특히 연세대학교 법학과 학생의 경우 법철학과 법제사 등의 과목을 수강할 때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확립한 체계를 배우게 된다. 법사회학 쪽에선 민법의 곽윤직 교수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경제계 쪽은 서석준 경제 부총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당시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주요 인사들과 경제통들이 한꺼번에 가 버리는 바람에 이후 한국 경제가 기울었다는 관측이 있다. 특히 김재익 경제수석의 경우 전두환 정부의 가장 뛰어난 경제정책통이자 사실상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다만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의 경제 발전 방식은 그 시점에서는 이미 한계였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행정학 및 정치학 측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 외교 안보의 핵심인 이범석[24] 외무부 장관을 높이 치는데, 이범석 장관은 소련, 중국 등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북방정책'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이는 후임 노태우 정부에서 결실을 이루었다. 그 외 이기욱, 하동선 등 그 막장인 군사정권이 경제만은 제대로 부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인 핵심 행정역량들도 높이 평가된다. 그 이후 그나마 행정 먼치킨이라고 평가할 만한 사람은 고건정도.

여담으로 한국의 저명한 원자력 관련 박사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 정근모는 김재익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본인의 상하이 출장, 김재익의 미얀마 출장을 앞둔 밤에 미뤄두었던 전도를 하고자 했다. 참고로 김재익은 천주교 신자이고, 그의 누나 김재순과 김재숙은 성심수녀회 소속의 수녀다.[25] 그러나 나랏일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김재익의 언사들에 틈을 낚아채지 못해 전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각자의 출장길에 올랐다. 그리고 비보를 전해들은 정근모는 그야말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회상을 실었다.

역시 이 사건의 희생자인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은 바로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이다. 사건 발생 직전의 사진을 보면 표정이 굳어 있는데, 심현섭이 훗날 사건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날 따라 말수도 적고 표정도 어두웠다고. 평소 심상우 의원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비서 등의 아래 사람들에게까지도 항상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대하며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쾌활한 성격이었음을 고려하면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을 했었던 것 같다. 여담으로 심현섭이 2002년 보수계열 정당의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지지 선언을 한 이래로 10년 후인 2012년 대선 때까지 줄곧 보수파 계열에서 정치적 지지 행보를 꾸준히 이어가는 근본적인 동기로 분석된다.

아웅산 테러로 사라진 인재들.



당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이기백 대장의 경우 군인 신분이었기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 정복이다보니 이 옷에는 다른 인사들의 일반 정장과는 달리 금속제의 각종 휘장, 약장 등이 붙어 있었고, 이것들이 방탄복 역할을 해주어서 그는 비록 중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때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한 사람이 전 육군 장성전인범 중장이다. 당시 합참의장의 전속부관으로 중위 계급이었던 그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폭파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이기백 장군을 구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받았다. 동아일보 기사.

폭탄 테러 때에 대한 전인범 중장의 회고에 따르면 "두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장군의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 사건의 교훈으로 군인의 두발은 되도록 짧은 것이 좋다는 확신을 가졌고, 훗날 27사단장이 된 후 부대원들에게 이기자컷으로 명명된 모히칸 스타일의 두발을 하도록 규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위의 사진이 바로 이기백 장군이 사건 당시 착용했던 정복으로, 이기백 장군은 귀국하는 즉시 이 정복을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면 전시되어 있는데, 확인해보고 싶으면 육사를 방문하면 된다.

이 사건으로 순국한 언론인 동아일보 이중현 사진기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취재하러 일본 홋카이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지 1달만에 전두환의 해외순방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는데, 출국 전 국가원수의 순방취재가 자주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카메라 렌즈 등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등, 신문 사진 풀기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안타깝게도 버마에서 찍은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카메라가 훼손되는 바람에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참고로 이 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과 장학사업을 목표로 1983년 12월 발족한 재단이 그 유명한 일해재단이다. 이 재단은 결국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에 이용되었고,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전두환은 이와 같은 공격적인 수금을 통해 평생집권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1988년 전두환 퇴임 전날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제정되면서 그의 평생집권 기도 자체가 드러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새세대 육영회, 새마음심장재단,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함께 5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다. 1988년부터 '세종연구소'로 바뀌어 평범한 국가정책연구기관으로 잔존중이다.

또한 당시 유족들과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테러 당시 촬영된 장면이 테러 직후에는 방영되지 않다가, 1년 뒤 9시 뉴스에서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당연하지만 잔인한 장면은 최대한 편집해서 방송했다.



유신정권 때부터의 관례로 대통령이 해외 순방길에 나서면 체신청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연히 해외 순방이 지속될 리가 없었으므로 해당 우표를 회수 후 폐기 처분하였다. 덕분에 아직도 액면가 이하(…)로도 거래되는 순방 기념 우표도 많지만 이 우표는 레어템이 되어 가격대가 꽤나 높은 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우표 이야기.

테러 1주기인 1984년 10월 9일, 파주시 임진각 관광단지에 버마 아웅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을 건립했다. 높이 17m 탑신, 계단 등 각 17개는 희생된 17명의 위령을 상징하며 중앙 1개 지주에는 대통령이 쓴 탑명이 조각되어 있고, 4개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탑 정면에 마련한 "구원의 불꽃" 대는 순국자들의 명복과 영생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경의선 임진강역에서 하차 후에 관광단지 쪽으로 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위령탑 사진.



2006년 한국인 최초로 UN 사무총장으로 내정되어 화제가 되었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월 9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방문 및 참배하여 아웅산 테러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특히 반기문의 참배는 외교관 시절 은인이었던 이범석 외무부 장관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범석 장관이 반기문을 전격 발탁한 일화는, 외교가에서는 상당히 유명하다. 반기문이 주 인도 대사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과 겸손함, 총명함을 눈여겨 보던 이범석 당시 외무 장관이 3급 부이사관급이던 외무장관 보좌관으로 그를 전격 발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반기문은 외교 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테러가 발생하던 1983년 10월 당시에 반기문은 외교부의 지원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아웅산 테러 소식을 전해듣고 그 날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애도 기간[26] 추모의 뜻으로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뉴스만 방영하였다.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앞의 두 사건 때는 예능 프로만 방영이 제한된 반면, 이때는 뉴스를 제외한 전 방송이 스톱되었다. 광고방송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장례식은 생중계되었다.

이러한 방침은 자율적으로 한건 아니고 문공부에서 내린 지시로 그렇게 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KBS3, AFKN도 추모방송을 내보냈다고 한다. 당시 방송사 ID(방송사 고지)의 배경화면도 애도 문구가 삽입되었으며[27] 구슬픈 분위기의 음악이 삽입되었다.

대구MBC에게는 이 사건과 악연이 있었는데, 사건이 터진 다음날인 1983년 10월 10일이 음악FM 개국날이었기 때문이다. 음악FM 개국을 하긴 했는데, 추모 분위기상 당연히 축하한다며 잔칫집처럼 들썩이지 못하고 장송곡만 틀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1년 5월 SBS 수목드라마 시티헌터의 첫 방영분에서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재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도 아니고 그냥 아웅산이라고 나오는건 덤 제작진이 아웅山이라는 지명이 있는 줄 알았나 보다. 그것보다 각그랜저가 거슬린다[28]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는 이러하다. 윤성(이민호 분)의 아버지 박무열(박상민)은 이진표(김상중)와 함께 정부 수행원 자격으로 버마(현 미얀마)에 갔다가, 북한의 테러를 받는다. 두 사람은 곧장 테러에 대한 복수를 나섰으나 정권의 버림을 받고, 박무열은 작전 도중 숨을 거두고, 겨우 살아남은 이진표는 무열의 아들 윤성을 킬러로 길러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당연히(...) 반공 드라마의 소재로 나왔는데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김정일이 광분하면서 꾸민 사건으로 나온다. 다 아는 사실이잖아? 공작원들을 훈련시키고 납치한 최은희에게 자랑하고, 버마로 보내기 전에 여자를 보내서 회포를 풀게 하고 여자를 덮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었다.



2012년 5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1983년 테러의 현장이었던 아웅산 묘소를 방문하였다.[29]

사진에서 보는 묘소의 모습이 1983년 당시와는 많이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때 테러로 목조 건물은 파괴된 데다, 유사 테러에 취약한 점을 감안하여 미얀마 측에서 아예 시멘트로 만든 육중한 기념탑으로 새로 바꿨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콘크리트로 복구한 아웅산 묘소는 보안을 문제로 외부인의 출입과 촬영이 통제되었으나, 최근 다시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되었다.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이 실려 있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교학사가 유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이, 2007 개정교육과정 당시 상당수의 교과서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다루었다. 그런데 2009 개정교육과정에 와서 없어진 것은 교육과정 각론에서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30]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역사교과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성취기준과 학습요소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교과서에 해당 내용을 넣는 것은 각 교과서 집필진과 출판사의 재량에 속한다. 당시 2009 개정교육과정의 사회과 - 일반과목 - 한국사 - 영역 및 학습 내용 성취 기준에 따르면 "(마) 북한사회의 변화와 오늘날의 실상을 살펴보고, 남북한 사이에서 전개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파악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박근혜정부에서 만든 2015 개정교육과정의 사회과 성취기준과 학습요소를 보면 해당 연대의 성취기준 해설에서는(9역09-03) "양자를 서로 갈등 또는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보다 함께 진행되어 온 것임을 이해하도록 하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국가 사회적 과제를 파악하도록 한다."로 규정해 놨으며, 학습요소에는 4.19 혁명,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회 양극화가 제시되어 있다. 즉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논란을 불렀던 박근혜정부에서조차 이 사건은 중요하게 교육내용으로 다룰 생각이 없었다는 소리다.
결론적으로 당시 다른 8종의 한국사교과서들이 2009 개정교육과정과 교육부가 제시한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라는 틀에 충실하게 내용을 서술한 것에 반해, 교학사 교과서는 여전히 교육부가 제시한 틀과 다르게 남북관계에 갈등요소를 적지 않게 서술했다는 것으로 교학사 교과서가 혼자서 문제(...)였다는 것이다.

2014년 4월에 임명되었던 강병규 전 안전행정부 장관이 아웅산 테러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대통령 순방에 따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가자마자 죽을 뻔한 것.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31]은, 아웅산 사건이 나기 1년 전에 가봉에서 전두환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32] 공작원 2명[33]과 고영환 포함 총 5명[34]과 15일간 동행하였는데, 실행 전날에 작전취소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이 작전을 주도했는데, 실행하기 전날 김일성에게 계획을 보고하니, 김일성이 "25년간 아프리카 외교에 힘써왔는데, 이 일로 아프리카 52개국 전원이 북한에게 등 돌리면 엄청난 손해이니 아프리카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서 김정일이 취소 명령을 내렸다. 팀장은 "작전 후 가봉 앞바다 수 km 떨어진 곳에 공작선이 있으니 그곳으로 도망가라"고 했는데, 고영환은 수영을 25~50m 밖에 못하고[35] 동행 중 우연히 공작원 장비를 보니까 스쿠버 장비가 2명분밖에 없었다고...[36] 나중에 아웅산 사건 소식을 듣고, 취소명령을 내려준 김일성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걸 아는 인간이 그 짓을 한단 말인가?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불안했던 김정일이 어떻게든 튀어볼려고 사고친거겠지 욕은 김일성이 다 먹고

그리고 34년 후, 그 다음 대의 김정은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근처 또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또 비슷한 짓을 벌여 국제적으로 엄청 욕을 먹고 현재 해당 국가와 단교 위기까지 가고 있다. 니들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37]
10. 관련 자료[편집]

10.1. 중앙일보 청와대비서실 (1993.8.13 ~ 8.20일자 연재)[편집]



제139회: 1, 2


제140회: 1, 2
[1] 2010년대에 KBS가 제작한 다큐에 출연한 당시 취재기자는 "전두환이 집권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네윈의 통치술을 배우기 위해 버마를 선택한 것이란 의견이 많이 돌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동아 1992년 6월호 기사 <전두환은 '네윈'을 꿈꿨다(이상우 기자)>, 1993년 8월 13일자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박보균 글)> '전씨 「나들이 병」 겹친 과잉 외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실제로 1981년 네윈-우산유 대통령직 이양 이후 서열관계는 <88년 정권교체준비연구>란 문건에 나온 권력구도와도 유사했다.[2] 정확히는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참고로 당시 총재는 대통령 본인.[3]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였다가 후에 MBC로 이직했다.[4] 1991년 MBC 창사 30주년 특집 뉴스데스크에서 테러 당시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사용되었는데 "MBC 뉴스가 단독으로 촬영한 아웅산 사건은 당시 너무 잔혹하다는 이유로 방송되지 못했습니다."라는 해설이 나왔다.[5] 10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전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6] 여담으로 서석준 부총리의 외동딸인 서이영 씨는 12년 뒤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었다.[7] 사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만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사고 4일만에 순직하고 말았다.[8] 전 호남전기 및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명예회장.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9] 이 사건에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 경향신문에서 동아일보로 이직했으며, 1970~80년대 걸작급 보도사진들을 남긴 거장이기도 하다.[10] 강민철 상위의 이름은, 후일 미국에서 나온 한국전쟁 관련 소설에서 스파이의 이름으로 사용된다.[11] <대통령 비서실장론> 함성득, 151쪽[12] 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스케줄이 미루어졌다.[13] 미얀마는 불교국가라 사형제도가 사실상 무의미하나 당시 김진수의 부상이 너무 심각해 고통을 덜어준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다.[14] 아웅산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15] 국제법에서도 국가 원수에 대한 암살이나 암살 시도는 상대국의 선전포고로 간주한다.[16] 실제 대남도발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의 군사력을 작전권 핑계로 일방적으로 묶어놓고 북한을 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미국이었다.[17] 전두환 역시 군부독재자였고, 이 때 죽었다면 민주 선거를 통해 민주화는 87년보다 더 빠르게 올 수 있었고 전두환으로 인해 죽거나 고통 받을 사람들이 줄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5공 헌법이 존속하고 있었고, 따라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여서 법에 따르자면 제대로 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게다가 10. 26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군부가 새로운 독재자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전두환이 이 사건으로 죽었다면 전두환은 북한과 맞서다 죽은 순교자로 영웅화되었을 것이고,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전두환의 악행들에 대한 재평가 자체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18] 그 심각했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도 결국 양쪽 강대국들은 사과를 통한 사태해결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미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는데 미국이 섣불리 군사행동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아래 문단을 더 읽어보자.[19]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6.[20] 원 출처: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27~229.[21] 몇 번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된 지금에 와서는 다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22] 국방부가 21세기가 된 최근까지도 미군없이는 북한군에 진다고 헛소리를 해대긴 하지만 그건 예산 타내려는 시도라는게 중론이고,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북한의 경제력은 정체기에서 쇠퇴의 징조를 보였지만 남한의 경제력은 한창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다가 남한의 국방 상황은 각종 신무기를 도입해서 북한군에 비해 무기 수준이 높았다.[23] 그의 아들 함재봉은 2005년까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미국 대학으로 옮겼다. 이 때문인지 함병춘 비서실장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이 사건의 순국자들을 언급할 때, 유일하게 생애, 업적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24] 독립운동가 이범석과는 동명이인[25] 김재순 수녀는 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에 이어, 성심여자대학교 화학과 교수 및 총장을 지냈다. 피천득의 대표적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김 수녀님'이 바로 김재순 수녀. (함께 언급되는 '주 수녀님'은 중국인 주매분 수녀로, 초창기 성심여중고 교장.) 김재숙 수녀는 박근혜의 성심여중고 시절 은사이다.[26] 10월 9일~13일.[27] 당시 MBC에서의 자막은 '삼가 명복을 빕니다'를 자막으로 냈다.[28] 해당 차종은 1986년 7월에 출시. 그리고 고증오류가 하나 더 있는데 각그랜저 말고 다른 차가 있는데, 링컨 타운카로 리어라이트의 후진등 위치를 보아 2세대로 추정되며 이건 1990년대에 생산된 차량이다.[29] 1983년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얀마에 도착한 후에야 이를 대외에 공개했다.[30] 각론에서 삭제되었다는 것은, 기록해도 무방하지만, 기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각론에 있는 내용이 서술되지 않을 경우 그 교과서는 검정 승인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출판되지 못한다.[31]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32] 고영환의 임무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프리카 여러나라를 육로로 우회해서 가봉으로 가는데 자신의 외교관 신분과 공작금(뇌물)을 이용해서 나머지 팀원들의 여권에 여권도장을 안 찍히게 하는 것이었다.[33] 아웅산 테러 사건에 투입된 공작원 신기철과 강민철.[34] 팀장, 공작원 2명, 운전기사, 외교관[35] 특수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는 순수한 외교관이었고, 갑작스럽게 현지에서 발탁되었다.[36] 아웅산 사건과 같이 당연히 버려질 예정이었다.[37] 차이점이라면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와는 달리 이번에는 남한 고위 정치인을 노린 게 아니라(즉 대'남' 도발이 아니고) 김정은에게 잠재적 위협이 되는 같은 북한 사람인 이복형을 제거했다는 점, 그리고 자국 공작원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이용해서 차도살인의 형태로 암살했고 암살도구로 VX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마 아웅 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이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 때처럼 자국 공작원이 직접 체포되어 모든 게 탄로나 국제적으로 코너에 몰렸던 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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