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5
Kang-nam Oh | 불교와 성경 1, 2
2021/12/07
산상수훈 8복
산상수훈 8복
우리안
2016. 7. 27.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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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복이란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로써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놓여 자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적인 언어에서 이 단어는 '신들의 행복'을 가리키는 말로써 신들의 상태와 더불어 신들의 행복한 실존을 함께 나누는 자들의 상태를 나타내었다.
헬라어 원어에서 복에 대한 두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세상의 근심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에 대한 원어적 의미는 세상을 통해 얻는 권력, 물질, 형통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구별됨으로써 얻게 되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의 상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즉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은혜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카리오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번영신학에 빠져 있었다.(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복음주의 목회자인 존 파이퍼 목사는 그가 시무하던 교회의 마지막 설교에서 번영신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예배가 수다스럽게 떠드는 라디오 토크쇼같이 취급되며, 모든 것에 대해 명랑 쾌활하게 말하고,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즐겁고 활기찬 느낌을 주도록 기획된 교회 예배에 크게 실망했다. 물론 세상이 행복한 크리스천을 봐야 하지만 그 행복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빚으신, 그리스도가 획득한 행복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줘야 할 것은 그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마카리오스를 ‘복’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번역했다면 지금처럼 기복적인 개념으로 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번역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단어를 가져올 때에는 그 단어에 실린 의미도 함께 따라오기에 번역에 신중했거나 아니면 이를 신학적 적용에 더욱 주의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Ⅱ. 성경이 말하는 복
1. 구원받은 자의 행복
구약에서의 말 하는 복은 죄 사함을 받고 죄의 길에 서지 않는 것(시 1:1, 32:1),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풀며(시41:1), 오직 말씀 즉 여호와께 의지하는(84:12) 것 등을 말한다.
신약의 서신서에서 바울은 죄 사함과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구원받은 자의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4:7; 14:22) 계시록에서 말하는 복은 단호하다. 즉 죄 앞에 부끄럽지 않고 정결하며(계16:15; 22:14) 말씀을 지키고(계22:7), 믿음으로 인하여 죽는(계14:3) 것이 복 받은 자들의 자격 요건인 것이다.
이처럼 신·구약에서 공통적으로 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신앙적인 상태(죄를 멀리하고 정결하며 말씀을 지키고 죽기까지 믿음으로 충성하는)를 말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행 3:26).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이 세상에서 주는 복을 받는다는 말은 없다.
2. 천국 시민이 받는 복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5장(1~12절)에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수훈 중에서 팔복에 관한 말씀이다. 산상수훈은 구원받지 못한 자를 위한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며 제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야 왕국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어로 8복은 마카리오이(Makarioi)라는 형용사로 서술적 용법 즉 ‘복이 있나니’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리말 해석과는 순서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는, …) 복을 받는다."라는 우리말 표현은 어떠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 또는 복을 받는 사람들의 유형을 말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진작 팔복에 말하는 ‘복’은 세상에서 가지는 통념과는 매우 다르기에 역설(paradox)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팔복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나 복을 받는 사람들의 유형을 말하기보다 그들의 특성(거룩한 성품)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팔복을 복을 받는 조건처럼 해석한다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맞는 복을 고름으로써 천국에 자동 입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팔복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해석을 한다면, “복되도다. 이곳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느냐?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강론하는 대상은 병 고침을 받으러 온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천국 시민이 될 제자들에게 천국 시민이 복되며 복된 이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Ⅲ. 천국 시민의 특성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퓨뉴마)은 우리의 영혼을 말하며 가난(프토코스, ptocos)하다는 것은 두려워하여 움츠려든 상태를 말한다. 즉 세상 가운데에서 억압을 받고 개인의 힘으로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도 세 부류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는 단순히 물질적 의미에서 '가난한 자'다. 둘째는 몸이 병들고 약하거나 사회적으로도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차별당하고 억압을 당하는 사람,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셋째는 세상적인 물질과 권력, 명예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심으로는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라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음에도 그 영혼이 움츠려든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똑같은 바리새인이면서도 니고데모와 같이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 있었고, 또한 부자인 세리장이면서도 영적인 가난을 깨달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세상의 권력과 부를 탐하면서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 권세를 붙잡고 또한 그것을 탐닉하기에 그 양심이 굳어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예배의 자리에 있거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의 형식만 남아있고 그 안에는 교만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구걸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구에게 구걸하느냐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삭개오 그리고 욥과 같은 자가 가난해서 구걸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갈급함을 알기에 하나님 집 앞에서 구걸하며 그의 베푸심에 의존하는 것이다. 세리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외쳤는데,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외침인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만난 자만이 자신의 영혼이 가난한 상태를 깨달을 수 있다. 마치 거울을 본 자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자들의 모습은 겸손함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청년 예수를 보고 자신의 무력함, 세상의 권세와 물질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가난에 처했을 때 예수님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었다.(막 5:22)
천국은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의 부자나 교만한 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천국은 오직 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며 자신의 영혼의 가난한 상태를 깨닫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순종하는 심령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2. 애통하는 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가져야 할 경건한 슬픔이 있다. 그것은 곧 죄에 대해 갖는 슬픔이다. 애통하는 자란, 자신의 본성적인 부패성과 또한 실질적인 갖가지 범죄들을 슬퍼하는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해 슬퍼하며, 또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려는 열심으로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가운데 분출되는 애통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애통해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보다 나 자신의 부요함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자신의 작은 소유조차도 아까워하지 않는가? 우리 주변에서 애통해하는 많은 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은 자로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가 위로를 받는가? 당연히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하느냐는 것이다. 세상 가운데 아등바등 살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애통해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함으로써 애통해하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애통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힘들 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나 친구로부터 받는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때 비로소 가족이나 친구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가족이나 친구 등으로부터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인생의 위기에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위로해 주시는 단 한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 주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애통해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위로로 격려할 수 있는 것이다.(요16:3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반면 예수님의 대적들은 모두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과 슬픔은 잠시였고 이내 역전이 되고 말았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자들, 즉 애통을 경험한 자들에게 기쁨의 위로를 주시는 것이다.
3. 온유한 자
온유함이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순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셨다. 마치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이 반항하지 않듯이 말이다.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친히 산 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다시 부활하심으로 산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 즉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구원이요 그분의 사심은 우리의 부활과 영생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로써 자신을 기념하라고 하셨다(눅22:19). 그러므로 천국 시민은 늘 생명의 말씀과 십자가의 보혈을 기억함으로써 예수님의 온유함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늘 말씀 앞에 낮아지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온유함의 두 번째 의미는 범사에 모든 사람에게 언행으로 나타나는 품성과 태도다(딛3:2). 즉 화를 돋우는 일이 있어도 화내지 않고 침묵하거나 부드럽게 대답할 줄 아는 자요, 불쾌함을 나타내 보이되 예의를 잃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격렬한 감정을 나타낼 때에도 침착할 줄 아는 자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온유함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 시민으로서 온유함의 특성은 무엇인가?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위스(prawis)인데 이 말은 동물에 관해서는 길들여져 유순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천적으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은 거칠고 급하고 인내심이 없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섬김으로써 나타나는 순종인 것이다. 즉 주님의 성품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모세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다혈질적인 혈기로 사람까지 죽였던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완전히 길들여진 사람이 되었다. 성경은 그를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민12:3).
이러한 온유한 자에게는 땅이 기업으로 주어진다. 마치 길들여진 짐승에게 목초지가 주어지듯 말이다. 그 목초지에는 풀이 풍성하고 또한 목자의 보호 아래 쉼이 있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땅에서 주님의 보호 아래 풍성한 생명의 꼴을 먹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주리다는 것은 헬라어 원어(페이나오, peinao)로 굶주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서 자기가 통치하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통치자의 책무였다(예: 애굽의 바로). 통치자들은 식량을 공급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에 헬라 세계에서 신과 같은 영예를 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양식이 없음으로 굶주리지만 천국 시민은 의로 말미암아 굶주린다. 왜냐하면 회개함으로 심령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난 내면의 영이 정의를 갈급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육신의 양식에 불과하며 영의 양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의 양식인 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내 몸과 피를 먹과 마시라고 하신 것이다(눅 22:19,20). 그렇다. 의에 굶주린 자는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써 영적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옷,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에 굶주린 자는 거룩한 욕구로 가득 찬 사람이다. 따라서 날마다 영의 양식을 갈망한다. 살아있는 몸이 언제나 새로운 음식의 공급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의 신선한 공급을 갈망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에 필요한 만나가 날마다 주어졌듯이 의에 굶주린 자는 날마다 신선한 만나를 구하며 그것으로 배부른 자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날마다 의를 공급받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즉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무시로 기도하며, 늘 기쁨으로 찬양하며 예배를 사모하는 자인 것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경건한 사랑을 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돕고 구해 주는 자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눅 10:29-37).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 있었음에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다. 그들은 왜 지나쳤을까? 아마도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봉사 때문에 급히 가야 해서 강도를 도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도 그의 볼 일을 보러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제사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히13:16).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율법을 자신의 해석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은 ‘고르반’ 맹세를 악용해 부모 공양 의무를 피하면서 자기 소유는 그대로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았듯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딤후 3:5)”의 모습이 바로 강도 만난 자를 회피하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였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은 우리를 약탈하고 우리의 옷을 벗겨갔으며 우리에게 상처를 입혔다. 결국 우리의 영혼은 피폐해져서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자였다. 율법의 사역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고 우리를 구해주지도 않았지만, 즉 율법은 우리를 도울 힘도 없어 피해 지나갔지만(롬 8:3) 찬송 받으실 예수, 저 사마리아인(유대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이 오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피가 흐르는 상처를 싸매어 주신 것이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함을 입은 자다. 즉 긍휼의 은혜에 빚진 자이기에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자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긍휼은 세상 사람들의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또한 주님의 긍휼을 덧입는 것이다.
6. 마음이 청결한 자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가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도 지성소에 들어가면 발에 방울을 매달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자신을 나타내셨다. 바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으되 깨닫는 자가 없었다(요1:5). 죄로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두운 자는 비록 육신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나 영적인 하나님은 볼 수 없었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바로 그러한 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자는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예수님께 향유를 뿌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던 여인,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처럼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바로 그러한 자였다(눅7:48; 눅5:20).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회개함으로써 육신의 정욕과 부정한 생각과 욕심으로부터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회개에 이르러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십자가의 보혈로 양심의 죄 씻음을 받은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요. 이러한 자는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자다(요14:9).
7. 화평하게 하는 자
이 말씀에서 화평은 단지 마음의 상태가 평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 말씀의 핵심은 화평보다도 화평하게 하는 중재의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화평하게 한다는 것인가?
아담이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죄의 담을 넘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앞서 언급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율법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화평하게 할 수 있는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쌓인 담을 허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친히 그 담을 허물어 주시는 것이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은 하나님도 일방적으로 허물 수 있는 담이 아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죄의 담을 허물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며, 평강의 왕이신(사 9:6)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평을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화평)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 것이다(고후5:18-21). 그렇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세상을 화평하게 한 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직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이 말씀은 팔복 중에서 가장 큰 역설이요,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것이다. 팔복의 결론이기도 하다.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 받는 것이요(마5:1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마5:11). 그는 의의 일에 관심을 두시기 때문에 의의 원수는 곧 그리스도의 원수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팔복의 결론이 예비 된 고난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직면한 것은 세상의 복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욕과 조롱을 당했다. 심지어 바울처럼 사십에 하나가 감해진 매를 3번이나 맞기도 하였다(고후 11:2).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십자가의 고난, 부활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진 자들이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은 아무나 체험할 수 없는 특별함과 영광이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순교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가장 복된 것이지만 그 길은 핍박과 고난의 길이 되는 것이기에 천국이 보장되는 길인 것이다.
Ⅳ. 결론
8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8가지 복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8복의 주인공은 하나다. 즉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며, 회개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 또한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다. 십자가를 대면하여 죄에서 돌이킨 자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 즉 의에 대하여는 산 자다. 죄에 대해 죽은 자는 곧 마음이 청결한 자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닮은 자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가 경험하는 복이며 천국 시민의 품성인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복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구원받은 자, 즉 복음에 빚진 자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명을 가진 자에게는 마귀가 대적함이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그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고난과 핍박이 따르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2)”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8복의 결론은 세상에서 얻은 복으로 기뻐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로써 구별된 삶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산상수훈
#팔복
#마카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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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교회 김광열 목사(기독교한국침례회, 침례신학대학원 M.Div)의 개인 블로그입니다. 이곳을 찾으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웃추가
2021/11/30
제 2 과 성 경
제 2 과 성 경
제 2 문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사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셨습니까?
답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1) 어떻게 우리가 그를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 2)
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 3:16).
2)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드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실 터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에서 무엇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라" (계 22:18,19) I. 인간 스스로 알 수 없는 놀라운 세계
이 세상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상하게도 주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란 무엇을 말하나요? 그것은 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참 진리를 진정 알아야 할 지성인들이 사실상 그 참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참 진리를 자동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히려 그 지식의 교만으로 참 지식을 보는 눈을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이 아무리 뛰어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교육도 잘 받지 못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참 진리를 아는 참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미지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풍선을 불면 불수록 사방으로 팽창되듯이 인간의 학식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경이스럽고 끝없는 신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별의 신비를 연구하기 위해서 새롭고, 보다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발명했다고 합시다.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아마도 인간이 또 다시 연구해야 될 수백만의 새로운 별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이론은 부단히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발견하면 할수록 알지 못하는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결국 만족하지 못하며, 또한 어떤 것도 온전하게는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 뿐 아니라 철학, 의학, 인문학, 수학 등 모든 경지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들을 완전히 알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자력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참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도 죄로 인하여 마음이 부패하고 희미하여 짐으로 인하여 다 잃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II.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지식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확실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이라 부를 수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이 지식은 태초부터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왔습니다.
1) 자연계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첫번째 방법은 흔히 말하는 자연계시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말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즉 모든 만물, 그의 피조물 세계에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계시하셨습니다. 자신의 위대함, 자신의 섬세함, 자신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창조주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이 범한 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과 양심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은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스스로 이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보는 인간의 시력이 더 이상 사실을 바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2) 특별계시
결국 하나님으 인간에게 특수한 방법으로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라고 해서 특별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두 번째 방법은 특별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낙원에서도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어울러 그의 말씀도 가졌습니다. 아담은 자연을 봄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무에서 과일을 따먹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일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아담은 “하나님 말씀의 빛 아래서” 자연의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그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식하고 행동을 결정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뱀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지식을 근거로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때에 어떤 것이 옳은가를 말해 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행동 하였습니다.
대신에 그는 진리를 발견하려는 소위 “과학적 방법”, 즉 시행 착오의 방법을 시도하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담과 모든 그의 후손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자들 외에는 흑암 속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불완전하여 어떤 “어둠”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은 아직도 그가 만드신 만물에 밝게 비치고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 죄 없는 아담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없이는 자연의 “빛”을 이해할 수 없었을진대 하물며 오늘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범죄한 후의 우리 인간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특별히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경에만 계시되어 있습니다. 자연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을 그 상태대로 버려 둔다 해서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자연 계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특별계시인 성경에서만이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특별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III. 무오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이 특별계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록 과정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구약은 선지자를 통하여, 신약은 여러 사도들을 통하여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과 성격, 삶의 배경을 전혀 무시하지 않고 활용하시면서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가능케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 3:16).
40여명이 넘는 저자들이 1600년에 걸쳐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무식자, 유식자, 농부, 어부, 군인, 왕, 학자, 의사 등 참으로 다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마치 한 사람이 기록한 것 같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저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하심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이성과 합리주의를 근거로 이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지만 기적과 같은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신화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말을 통하여 정리하자면 성경에서 남는 것은 도덕적인 교훈 몇가지와 성경 껍데기만 남습니다. 왜나햐면 성경은 처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소위 신정통주의자, 또는 바르트주의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들은 "성경이 인간이 기록한 것이고 오류가 당연히 많지만, 우리 마음 속에 감동으로 다가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일 된다(to become)"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많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인간의 말인 성경을 읽을 그때, 하나님은 이 인간의 말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말인 성경을 아무튼 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임하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갑에게는 성경의 한 부분만이 말씀하고, 을에게는 성경의 저 부분만이 말씀으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드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실 터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에서 무엇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실 것이라"(계 22:18,19)
우리가 믿는 견해를 개혁주의적 견해라고 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므로 우리가 이해를 지금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낱말 하나까지 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증거를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설령 설령 불신자가 성경을 읽는다 하더라도, 또는 우리가 일시적으로 그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성경은 그대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IV. 하나님의 믿음과 삶의 유일한 규칙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전적이고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신뢰를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우리는 성경이 무오(無誤)함(Infallibility)을 믿습니다.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문맥이나 말들의 상황을 떠나서 성경의 모든 진술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53:1에는 “하나님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단지 진술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말만 꺼내어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직입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에 그 부분은 진리이다라는 말입니다.
그 진술의 모두를 읽자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입니다.
성경 전체를 읽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 할 때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술이 무오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은 명료(Clarity)하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적 훈련이나 교육을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직접 말씀하십니다.(엡 6:1-3).
어떤 교회는 이것을 부인하면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은 사제나 학자들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알반 사람들에게 성경을 마음대로 읽는 것을 금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많은 것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박식한 학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님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아주 분명히 이해하도록 인도하실 수 있고, 또 인도하십니다.
구원의 길을 보일 뿐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3) 성경은 충족(Sufficiency)하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위해 알아야 될 바를 알기 위해서 성경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강조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가 이것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많은 그릇된 혼합주의적 종교가 이것을 부인합니다. 성경외에도 다른 계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카토릭에서는 성경을 믿지만, 마찬가지로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공적 말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대주의자들은 성경과 아울러 ‘과학의 발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계 22:18-20).
성경은 스스로 말하기를 성경을 가진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하다.”고 말합니다.(딤후 3:15-17).
그러면 신조나 신앙 고백,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서 등은 어떻게 생각하여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는 이것들이 성경보다 훨씬 아래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경과 동등시 되어서는 안 되며, 또 되려고 의도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성경을 가르침에 있어서 편리한 요약으로 사용 할 뿐이며, 주석과 같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리 문답만을 믿는다.”고 말한다거나 그것에 결코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은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교리 문답의 가르침이 올바르다고 입증됨을 항상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은 인정될 수 있고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 문]
1) 교육을 많이 받은 현자는 교육을 받지 않은 범인, 즉 보통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 더 나은가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자연계시와 특별계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보십시오. 왜 우리에게 특별계시가 필요한지를 함께 설명하여 주세요.
3)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사물을 판단하였던 인간이 이제 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는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4) 자유주의 와 신정통주의, 그리고 개혁주의 성경관에 대하여 차이점을 간단히 설명하여 보세요.
5) “성경이 무오하다.” “성경이 명료하다.” “성경이 충족하다.”란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보세요. 그리고 누가 이것을 부인하는지 말해 보세요.
6) 성경이 충족성을 가졌다면 왜 교리 문답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