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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

徹見 : 네이버 블로그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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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동종(曹洞宗) 묵조선(默照禪)의 수행방법(修行方法) 2
     
    2019.08.11.
    이러한 평등과 차별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진리의 세계(이미,離微)를 굉지 정각은 자신의 저서인 묵조명에서 "묵조(默照)의 도는 이미(離微)를 철견(徹見)하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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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
     
    2020.05.11.
    불교는,ㅡ 삼법인(三法印)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철견(徹見)하는 것입니다. - 만성스님 - 스님작명, 법문, 템플스테이, 천도재, 49재, 반려동물천도재 www....
    불자넷 blog.naver.com/buljanet/221956726997 블로그 내 검색


  •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었다
     
    2018.05.17.
    철견徹見(통할 철)하고 스스로 깨달아 앎 하나에만 집중하는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합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는 달마達磨(?-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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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卍行을 앞두고
    卍行을 앞두고
     
    2019.03.01.
    에고가 본래 없음을 철견(徹見) 하도록...” (이것은 지환 스님이 백봉 거사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백봉 김기추 봄도 왔으니 앞으로 보름, 운 좋으면 한 달 이상 정한 곳...
    수경재 blog.naver.com/su-in100/221477422438 블로그 내 검색


  •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
     
    2020.05.10.
    불교는,ㅡ 삼법인(三法印)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철견(徹見)하는 것입니다.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주말에 코로나 조심하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이...
    심 해(深 海) bum4703.blog.me/221954806541 블로그 내 검색

  • 14. 초기불교 전파 위해 동분서주 각묵스님
     
    2009.11.24.
    철견(徹見),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逆觀) 등을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각묵스님이 여러 대중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렇게 볼 때...
    불교 - 選佛場 blog.naver.com/jajuycj/100093876508 블로그 내 검색

  • 결국엔 '지혜와 자비' 밖에는 없습니다.
     
    2015.05.07.
    관觀하는 힘, 지혜의 힘 키우기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면 개체의 소멸에 대한 불안·우울·초조 등이 따라붙지만, 꿰뚫어 보아(철견徹見하여) 그것의 공성空性을 보기...
    수류화개 水流花開 blog.naver.com/jsd4096/220352282932 블로그 내 검색

  • 계정혜 3학과 팔정도
    계정혜 3학과 팔정도
     
    2019.05.12.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철견(徹見)하는 수행법을 총칭한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모든 존재의 유의사상에 통달하는 것이 지(智)...
    초월(超越) blog.naver.com/liongod90/221535580179 블로그 내 검색

  • 정법안장 강의(한보광 저)
     
    2018.07.17.
    대위선산 "너는 드디어 徹見했구나. . 제악막작(諸惡莫作) 도겐선사의 제악막작 단순히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들려면 수행력이 없어서는 안되고...
    무경계(No boundary... blog.naver.com/mushim0/221321068030 블로그 내 검색


  • 행복을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다
     
    2020.06.09.
    사람과 30년 후에 죽을 사람이 꽃 옆에 있다고 치자. 누가 더 깊고 진하게 감상할까? 참, 질문이 잘못되었다. 무상을 철견(徹見)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를 비교해야 한다.
    경월명리의 사주와 ... blog.naver.com/fangsy/221994058398 블로그 내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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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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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부처님 ・ 2020. 5. 1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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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


    모든 생명은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100년을 살아도 천년을 살아도 십 만년 백 만년을 살아도 언젠가는 결국에 죽습니다.


    우주자연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물질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합니다.


    병고(病苦)없이 오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젊어서는 평생 늙지 않을 것 같았고, 건강할 때는 평생 병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늙어서도 별안간에 죽을 수 있는데,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삽니다.


    그래서 신선(神仙)된다, 불로장생(不老長生)하겠다고 황당한 이야기에 속습니다.


    필자도 20~30대엔 불로장생한다고 신선도 공부했지만,ㅡ 


    불교를 접하고 나서 삼독(三毒)의 소멸(消滅)이 열반이며 해탈이라는 것을 알았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소멸은 집착을 놓는 방하착(放下著)에서 시작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癡)는 ㅡ 


    법구 비유경 무상품(無常品)에서 읽었듯이 도살장으로 가는 소가 저 죽는 줄 모르고 풀을 먹으며 뛰노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ㅡ 삼법인(三法印)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철견(徹見)하는 것입니다. 


    - 만성스님 -


    스님작명, 법문, 템플스테이, 천도재, 49재, 반려동물천도재 www.bulja.org

    불자협동조합 네이버카페 https://cafe.naver.com/buljas

    [출처]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작성자 당신도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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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었다  역사   
    2018. 5. 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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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었다

     
     
     
    선종禪宗은 불교의 한 종파로 교종敎宗에 상대되는 말입니다. 선禪은 빠알리어 자나jhā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정신집중의 수행, 즉 선나로 종宗을 삼으므로 선종이라 합니다. 교종이 교리를 위주로 내세우는 데 반해 선종은 을 실현하는 방법을 자각적으로 제시하며 선종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문자로써 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바로 사람의 본래 마음을 가리킨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宗의 강령綱領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 내관자성內觀自性하여 자기 심성을 철견徹見(통할 철)하고 스스로 깨달아 앎 하나에만 집중하는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합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는 달마達磨(?-528?)로 양梁나라와 위魏나라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종지宗旨로서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 불렸습니다.

    선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이 인도에 유입하기 시작한 기원전 1300년경 이전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2800~기원전 1800년경의 인더스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은 기원전 2500년경의 것으로 요가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기원전 2000년경 것으로 보이는 석제 흉상은 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으로, 이러한 사항을 말해줍니다. 기원전 1200~기원전 800년경 편찬된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 성전聖典인 네 가지 베다 가운데 하나로 브라만brahman 사제 계급들이 믿었던 기도문 형식의 시집 <리그베다Rigveda>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바라문교의 철학사상을 담고 있는 일군의 성전으로 인도철학과 종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우빠니샤드Upaniṣad>(우빠니샤드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는다’를 뜻하여 스승과 제자가 가까이 서로 마주앉아 가르침을 전수하는 비밀의 교의를 의미함)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선은 인도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나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 것은 달마에게서 비롯됩니다. 달마는 남북조의 중기, 중국불교가 교학에 기우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해로海路 3년 후, 광주에 닿았습니다. 양나라의 무제를 만나지 않고 몰래 북상해서 위나라의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 제자 혜가慧可(487-593)를 얻어 정법안장正法眼藏(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스스로 체득한 깨달음)을 전하고, 중국선종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달마가 전한 정법안장의 본질은 자각성지自覺聖智,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입니다. 달마가 묵묵히 면벽面壁 수행을 9년 동안 한 것은 유명합니다. 낙양교학의 대세를 차지하는 타파의 학도에 독살되어, 오판의 능이에 장사지내졌습니다.

    혜가가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공부하고 40세에 소림사에서 달마를 만난 일화는 유명합니다. 혜가가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오로지 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며 외면했고, 큰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눈 속에 서서 왼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였으며, 달마를 6년 동안 받들고 선종의 제2대 조사祖師가 되었습니다.

    혜가는 552년 제자 승찬僧璨(?-606)에게 법을 전하고 업도로 나가 34년 동안 설법했으며, 말년에 시기하는 무리들의 무고로 가혹한 형을 받다가 107세에 입적했습니다. 당나라의 태조太祖는 그에게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라 시호를 내렸고, 덕종德宗은 다시 대조선사大祖禅師라 시호했습니다.

    승찬은 풍질風疾을 심하게 앓았다고 전해지는데, 문둥병이라고 하는 한센병Hansen's disease을 가리킵니다. 그는 병이 나은 뒤에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지 않아 적두찬赤頭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병고病苦에 시달리던 승찬은 북제北齊(550~577) 말기에 혜가를 찾아가 불법佛法을 구했습니다. 혜가와의 문답問答에서 깨달음을 얻은 승찬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보배처럼 빛난다는 뜻에서 찬璨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혜가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아 선종의 제3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출처] 선종이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었다|작성자 문화메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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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초기불교 전파 위해 동분서주 각묵스님  선지식(善知識)   
    2009. 11. 24.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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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의 핵심, ‘해체’에 있다”

    초기불교 전파 위해 동분서주하는 각묵스님





    부처님 원음(原音)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전해지는 초기불교는 한국불자들에게 낯설다. 한문으로 된 대승경전에 익숙해 있고, 언어 또한 팔리어 ․ 산스크리트어 등으로 되어 있어 초기불교를 접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서적으로도 ‘소승(小乘)’이라며 폄하하는 분위기가 강해 초기불교가 한국토양에 발붙이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최근 20~30여년간 인도나 미얀마, 스리랑카 등에서 공부한 스님과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초기불교는 조금씩 한국불자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은 다양한 초기불교 경전을 번역하면서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11월 초 스님은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를 6권으로 번역해 출간했다. <상윳따 니까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은 경(經)들’이다. 스님은 “<상윳따 니까야>는 팔리어 니까야 가운데 세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직계 제자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으며 평생 두타행을 실천한 가섭 존자의 제자들이 후대로 전승했다”며 “불교의 교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고 밝혔다.

     



    각묵스님

     



    스님은 50권 분량인 팔리어 초기불전을 모두 한글로 옮길 예정이다. 초기불전연구원장 대림스님과 함께 2005년부터 지금까지 24권의 책을 펴냈다. 4부 니까야 중에선 <디가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의 번역을 끝냈고 <맛지마 니까야>만 남겨두고 있다.



    각묵스님이 초기불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고 불교 만대의 표준이며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체계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분석적이고 △초기불전은 부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가 현저히 적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스님은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11월 22일 스님은 백양사 야단법석(野壇法席)에 나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스님은 먼저 불교의 목적이 행복의 실현에 있다고 했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는 것이다. 초기불전에서도 부처님은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 등에 대해 다양한 말씀을 남겼다.



    부처님은 인간이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고 했다. 또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시(布施)와 지계(持戒)를 강조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믿음을 구족하고 계를 구족하고 보시에 대해 관대함을 구족하고 통찰지를 구족하면, 금생에 법답게 재물을 얻고, 친척들과 스승들과 더불어 명성을 얻고, 오래 살고 긴 수명을 가진 뒤,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부처님이 설한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이다. 즉 열반, 깨달음이다. 각묵스님은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 名言]를 해체해서 법(法, 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 하는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은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온(5온) ․ 처(12처) ․ 계(12처와 6가지 알음알이)의 무상 ․ 고 ․ 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逆觀) 등을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각묵스님이 여러 대중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렇게 볼 때, “열반은 궁극적 행복이요, 그 궁극적 행복은 바로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성스러운 경지이고 이러한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문제는 깨달음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된다.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5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무상 ․ 고 ․ 무아의 통찰과 염오-이욕-해탈-구경 해탈지를 통해서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삼법인(三法印)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처절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각묵스님은 “<상윳따 니까야>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 가운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는 연기(緣起)의 이욕-소멸을 통해서이고 세 번재는 사성제(四聖諦)의 통찰을 통해서다. 특히 ‘진리 상윳따’의 여러 경에서는 깨달음을 사성제를 꿰뚫고 관통하고 알고 보아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팔정도(八正道)의 실현과 37보리분법-보리분(菩提分)은 ‘깨달음 쪽에 속하는 것’ 즉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장비라는 의미이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각지(七覺支),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正道)의 37가지 요소들을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러 경에서 강조한다-을 닦으면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각묵스님은 이러한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의 해체’라고 말한다. 부처님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세계는 18계로,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 ․ 처 ․ 계 ․ 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들(諸法, 有爲法, sabbe dhammā)의 무상 ․ 고 ․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며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 ․ 열반 ․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양사 야단법석에서는 청중들의 활발한 토론도 함께 이뤄졌다.

     



    그래서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 느낌 ․ 마음 ․ 심리현상들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 ․ 고 ․ 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빠사나)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각묵스님의 법문은 명쾌했다. “해체하여 볼 때 깨달음과 불교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도 초기불교 자체의 생소함 때문이어서인지 대중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스님 역시 차분하면서도 충실하게 답변을 해나갔다.



    이렇게 질의 응답이 오가는 사이 대중들의 표정도 한결 여유롭게 변했다.

    한국불자들이 좀 더 쉽게 초기불교를 접하고 이해하고 실참(實參)할 수 있을 때까지 각묵스님의 지난한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출처] 14. 초기불교 전파 위해 동분서주 각묵스님|작성자 jajuy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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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엔

    지혜와 자비’밖에는 없습니다

     

    글 : 강소연 불교미술사학자·홍익대 겸임교수

     

    관세음·대세지 보살을 생각하는 관


    기도나 수행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잘 되다보면, 먼저 몸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몸과 마음을 다해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무명無明의 장막이 걷히고, 막강한 치유의 에너지가 돌기 시작한다. 막히고 울체되었던 곳은 뚫려서 아프던 허리도 안 아프고, 환절기 마다 찾아오던 비염증세도 없어지고, 관절염으로 쑤시던 여기저기도 시원해진다. 참선 방석에 앉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앉은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오롯이 집중하던 어느 시점,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소용돌이 기운이 몸을 돌며 순식간 아픈 곳을 다 고쳐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 관세음보살님이 오셨구나.’

     
    ​  

     
    사진 2(좌). 대세지보살(지혜智慧)을 생각하는 관. 보우당 탱화(정면에서 보아) 아미타불의 왼쪽 부분.

    사진 3(우). 관세음보살(자비慈悲)을 생각하는 관. 보우당 탱화(정면에서 보아) 아미타불의 오른쪽 부분.

      
     
    봉은사 보우당 ‘관경16관변상도 탱화' 전도. 아미타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 대세지보살님, 오른쪽 관세음보살님

     
     
    나를 살리는 청정 에너지, 관세음보살

     
    견성에 들기 전에, (만약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먼저 만나게 되는 청정한 힐링 파워가 관세음보살이다. 화두에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기 시작하는데, 마치 검은 커튼이 걷히고 찬란한 빛이 눈부시게 들어오듯, 그렇게 막강한생명의 에너지가 퍼지기 시작한다. 무거웠던 어두웠던 몸을 맑히고 밝히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님은 아미타부처님(깨달음의 세계)에게로 가는데 있어 안내자 같은 역할을 한다.’라고, 강의할 때 습관적으로 말하곤 했지만, 실제 체험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절절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체험도 잠시, 우리는 예전의 습성 그대로 돌아가 다시 윤회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수행의 힘, 지혜의 힘이 아직 약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로 된‘삼법인三法印’이 바로 세상의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줄 알고, 상대가 있는 줄 알고, 사회가 있는 줄 알고, 세상이 있는 줄 알고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속에서) 여태껏 열심히 살았는데, 모두 무상無常하며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결과는 고苦일 뿐이고 또 무엇보다도 나라는 것의 실체가 없다니. 자아를 중심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모두 무상한 줄을 얼핏이라도 깨달았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차피 부질없는 인생 아닌가‘. 있다·없다‘’속세다·깨달음의 세계다’등의 이분법적 생각 속에 있다면, 자칫 이렇게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로 빠질 수 있다. 자아(에고)의 눈이 아닌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기란, 초보 수행자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 수많은 선사님들은, 제각기 다른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게 다양한 수행법을 밝혀 놓으셨다.

     
    우리는 왜 앉는가? 관觀하는 힘, 지혜의 힘 키우기

     
    스스로를 개체로 인식하면 개체의 소멸에 대한 불안·우울·초조 등이 따라붙지만, 꿰뚫어 보아(철견徹見하여) 그것의 공성空性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저절로 자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엔 지혜와 자비밖에는 없습니다.”라고, 국내에서 위빠사나 수행 최고 지도자로 손꼽히는, 김열권 법사님은 말씀하신다. 간단한 말씀이지만, 여기에 수행의 핵심이 모두 녹아들어있다. 불자님들이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가장 앞 구절 내용도같은 맥락의 것‘. 관자재보살이 반야지혜로써 비추어보니, 오온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일체의 고액을 모두 뛰어넘었다(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지혜’는 팔리어 panna 빤야(반야)로‘, 통찰지·혜慧·아는 마음·알아차림·마음챙김’등으로 번역된다. 선가에서는 이를‘아는 놈’이라고도 한다‘. 아는 마음(지혜)으로 일체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니 → 그것의 생멸生滅, 일어나고사라짐이 여실하게 보여서 → 그것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즉, 공성空性을 깨닫게 되고) → 나아가 나와 세상의 공성도 보이게 되고 → 모든 것이서로 인연하여 일어남(연기緣起)을 알게 되고 → 하나의 운명공통체임을 깨닫게되어 → (자타 분별심이 없어지니) 절로 자비심이 나오게 된다.’는, 깨달음의 공식이다. 이러한 과정은 통찰하는 힘인 아는 마음(지혜智慧)에 의지하여 가능하였기에,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것에 의지하며 깨달음에 들었다(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반야심경> 마지막 부분에 다시 반복 강조된다. 그러니 게으름에 떨어지지 않고‘지혜를 부단히 키워나가는 것’이 깨달음의 실천으로 가는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협시보살이 대세지·관세음인 이유는

     
    아미타불의‘아미타’라는 용어는 아미타바(Amitabha)와 아미타유스(Amitayus)에서 유래하는데, 아미타바는‘무량한 빛’을 뜻하고, 아미타유스는‘무량한 생명’을 뜻한다. 그러니까 아미타는‘생명의 본체, 즉 원천이자 그 작용’을 말한다. 그렇다면 본체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바로‘지혜와 자비’로 작용을 한다. 본체의 성품은 지혜와 자비’,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아미타불은 좌우 협시보살로‘, 지혜’를 상징하는‘대세지보살’과‘자비’를 상징하는‘관세음보살’을 두고 계시다. 아미타-대세지-관세음, 삼위일체를 이루어‘아미타삼존’이라고 지칭한다. 아미타-대세지-관세음의 삼존불은 우리나라 불교 조형미술의 맥락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붉은 법의를 걸친 후덕한 모습의 아미타불의 좌측(정면에서 보아)에 대세지보살님이 보관에 보병寶甁을 얹고 지물로 경책을 얹은 긴 연꽃 줄기를 들고 계신다(사진2 참고). 관세음보살님은 보관에 아미타 화불化佛을 얹고, 정병淨甁을 얹은 연꽃 줄기를 잡고 계신다(사진3 참고). 책은‘법法’의 진리를 상징한다.


    대세지보살은‘지혜의 빛(지혜광智慧光)’으로 무명 속에서 헤매는 중생을 법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관세음보살은 청정한 자비의 에너지로 어둠 속의 중생을 구제하기에, 청정수(또는 감로수·정화수)가 담긴 정병을 지물로 들고 있다.


    그렇기에‘청정자비 관세음보살’로 지칭된다. 이렇게 자비의 힘으로 맑히고 지혜의 힘으로 통찰하여, 우리는 아미타가 계신 저 피안으로 갈 수 있다.

     
    출처 : 봉은사 봉은판전 2014.11월호
    [출처] 결국엔 '지혜와 자비' 밖에는 없습니다.|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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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글 계정혜 3학과 팔정도  불교 佛敎   
    2019. 5. 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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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팔만사천 교설과 가르침은 모두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분하면 팔정도로 귀결된다.

    계학(戒學)은 율장이며 실천적 노력에 의해 지켜야 할 바른 행동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덕행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계는 자율적이며 율은 타율적이다. 재가불자의 오계,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등은 선을 쌓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어 지계로써 마음을 편히 머물게 하는 자리를 말한다. 

    정학(定學)은 경장이며 체험적 수행으로 선정에 들어 심의식(心意識)의 흔들림을 그치고 고요하고 편안한 경지를 성취하는 수행법이다.

    집중과 통찰을 방해하는 정신적 더러움을 불태워 삼매에 들어서는 자리를 말한다.

    혜학(慧學)은 논장이며 올바른 견해를 가진 지혜를 말한다.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철견(徹見)하는 수행법을 총칭한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모든 존재의 유의사상에 통달하는 것이 지(智)이고 무위의 공리(空理)에 통달하는 것이 혜(慧)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구도자 고타마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악마를 물리치고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인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후 처음으로 설한 법을 초전법륜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을 굴리기 위해 녹야원으로 가 그 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에게 중도의 가르침을 펼치시며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 괴로움의 사라짐[滅]과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가르치자 그들은 모두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면 계정혜 3학과 팔정도의 진리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원효의 대지도론에 따르면 팔정도는 세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정견(바른 견해). 정사유(바른 생각)는 혜학이며,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직업)은 계학이고,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마음 챙김). 정정(바른 집중)은 정학으로 구분하여 도성제의 바른 길을 설명했다.

    중국 선종5조 홍인대사의 문하에는 쌍벽을 이루며 자웅을 겨뤄야 할 두 제자가 있었다. 한 분은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에 매료되어 출가한 남종선이 시조이신 6조 혜능이며 돈오를 표방했다. 이에 대적 할 다른 한 분은 북종선이 시조이며 옥천사 왕사이신 신수로서 점오를 표방했다.

    점오점수는 순서를 밟아 수행하여 높은 단계의 경지로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돈오돈수는 단계적인 수행과정이 없이 순간적으로 얻는 찰나의 깨달음을 뜻한다. 마치 원효가 해골바가지 안의 물을 마시고 얻은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드디어 신수와 혜능은 홍인의 의발 전수를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 먼저 신수의 게송을 들어보자.

    “몸은 보살이 열리는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을 거는 틀이니 / 부지런히 닦고 쓰면 먼지 앉는 일이 없으리라“

    신수의 게송은 점오를 강조한 것으로써 깨달음은 지속적인 수행으로 마음에 먼지가 제거한 뒤에야 깨끗함을 볼 수 있다는 논리다.

    다음은 혜능의 답시로써 게송은 이러하다.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었고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닦이고 먼지 앉으랴“

    혜능이 게송은 수행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습을 병행할 것을 의미하며 망념을 홀연히 제거하므로 써 깨닫는 즉시 먼지도 함께 제거 된다는 논리로 돈오를 강조하며 신수를 압도한다. 결과적으로 홍인은 자신의 후계자를 혜능으로 결정하여 의발을 전하였으니 6조가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북종선을 표방한 신수의 문하는 혜능이 남종선 문하에 밀려 자연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를 잇지 못한다.

    신수와 혜능은 계정혜 3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수는 계학을 온갖 악을 짓지 말고[諸惡莫作] 정학은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中善奉行]혜학은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自淨其意]는 칠불통게로 설명했다.

    반면 혜능이 설명은 이러하다.

    “깨닫고 앎이 같지 않으므로 지견이 빠르고 더딤이 있다. 모름지기 일체 만법은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알라. 마음자리에 잘못이 없음이 계학이요, 마음자리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정학며, 마음자리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혜학이라고 설파 하셨다.

    김성도<포교사>

    <저작권자 © 제주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http://m.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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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계정혜 3학과 팔정도|작성자 알아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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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멀리서찾는것이아니다
    -지명스님
    내가늙음,병,죽음,이별,좌절,실패등의고통을많이다루다보니,독자들로
    부터질문을받는다.
    "태어남,성장,건강,발전,만남,승리,성공등의기쁨을느끼면안되는것인가요?
    스님은왜어두운허무를주로강조하나요?"
    내가인도하고자하는지향점은"지금바로눈앞에있는것으로부터행복을
    찾아내자"는것이다.
    허무만부각되었다면내본의와달리글을잘못쓴것이다.
    "왜사는가?"에대해서는즉각답이나오지않지만,"어떻게살려고하는
    가?"에대해서는"잘살려고하지요"라고바로답할수있다.
    건강,돈,명예등을얻으려고하는것도잘살기위해서이고,불도를닦아서
    깨달음이나해탈열반에이르려고하는것도잘살기위해서이다.
    '잘산다'는말이막연하다면'이고득락(離苦得樂)'즉"고통을여의고즐거움
    을얻는것"이라는불교의전통적인표현을써도좋다.
    짧게끝나버리는세간의즐거움을가짜라고하고,영원히간직할수있는출세
    간의즐거움을진짜라고구분하는것과관계없이,우리는어떤종류의것이든
    즐겁게살려고한다.
    행복하게살려고한다

    『화엄경』의"모든사물은마음의규정이만들어낸것에불과하다"는
    가르침,"마음은화가와같아서세상의모든것을그린다"는가르침,"마음과
    부처와중생의셋이아무런차별이없다"는가르침을연결지어서보자.
    중생인나와내마음과부처가차별이없다면"지금나의중생심으로행복을
    그려내고지어서볼수있다"는뜻이된다.
    즐거움또는행복을멀리서찾는것이아니라,내주변의모든사물에서발견
    해내라는것이다.
    의상대사는『화엄경』을전문적으로연구한분이다.
    그의'법성게'는"한티끌가운데에시방세계가포함되어있다"든지"한생각이
    바로무량겁이다"라고한다.
    『화엄경』의마음이모든것을지어낸다는말과,마음,부처,중생이하나
    라는말을달리표현한것이니,행복을멀리서찾으려고하지말고,바로내
    곁에있는사소한것에서발견하라는뜻이다.
    작은티끌이온우주를포함하고있다면그티끌이바로우주의견본이다.
    한티끌도견본이라면이세상어느것하나전우주의견본아닌것이없다.
    처처에서행복을발견하고음미하라는것이다.
    그런데행복을찾는데큰장애가있다.
    끊임없이변하는형상과마음이다.
    꽃이피기까지는오래걸리는듯하지만일단피고나면바로시들어버린다.
    사랑이맺어지기까지는꿈처럼아름답지만얼마지나지않아시들해진다.
    사랑과친절은끊임없이쏟고베풀어야한다.
    100번잘해주더라도한번소홀히하면토라질수가있다.
    세상은변하기마련이고인간은변덕의동물이다.
    아무리우리가주변에서아름다움을발견하고싶어도,주변이계속변덕을
    부린다면,세상을아름답게볼수가없을것이다.
    그래서우리가흔들림이없이즐거움을찾으려면피고시들고태어나고늙고
    병들고죽는세상을있는그대로파악해야한다.



    가장친한친구가어느코너에서나와경쟁하는처지가될때도,철석같이
    믿었던사람이배신했을경우에도,그러한 상황은특별한것이아니라자연스러
    운것이라고받아들여야한다.
    모든것의무상함과흔들림을체달해야만세상의급작스러운변화를보고도
    기죽지않을수가있다.
    허망한세상과마음에대한면역력을기르기위해서삶의어두운면을피하지
    말고똑바로들여다봐야한다.
    절집에있으면거의자살직전에이른사람들을많이만나게된다.
    그들이세상의무상함을새롭게되씹고절감하게되면,오히려저허망한세상
    을당연하게받아들인다.
    주변의변덕에실망할것도좌절할것도없다.
    그래서강해진다.
    불교를제대로공부한이가운데자살하는이는없다.
    3일후에죽을사람과30년후에죽을사람이꽃옆에있다고치자.
    누가더깊고진하게감상할까?
    참,질문이잘못되었다.
    무상을철견(徹見)한사람과그렇지
    못한이를비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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