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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8

손민석 정세근의 [윤회와 반윤회>

손민석

정세근의 <윤회와 반윤회>, 불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온전히 이해했다 말하기는 머쓱하지만 적어도 주요한 논지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다.

윤회가 지속된다는 건 기본적으로 '나(자아)'의 연속성과 딘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탈(脫)윤회'를 논하는 불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책의 기본적인 논지로 이해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저번에 고양이와 관련해서 고민했던 게 생각났다.

지젝과 밀뱅크의 <예수는 괴물이다>에서 자세하게 다뤄지지만 기독교든 불교든 시작점은 "나"라는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기독교가 '신'이라는 대타자를 부정하고 '믿음의 공동체'로의 귀의를 택한다면 불교는 '나' 자체를 부정해버려 무아(無我)의 상태에 이르는 걸 지향한다.

욕망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개인이 구원과 믿음을 택했을 때 그 끝에 '공동체'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조차 사라져버린 무아의 세계가 있는지에 따라 인류사의 정신세계가 갈라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입증해주는 저작 같아 읽으면서 즐거웠다.

교토학파 이래 그리스적 사유는 유의 사유로, 인도적 사유는 무의 사유로 나누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에 있어 공동체가 남는지 무아의 세계가 남는지는 중요한 것 같다.

이것을 유와 무의 대립으로 치환하는 건 오버라 보고 유한한 개인이 무한한 세계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욕망이라는 형벌에 대응하는 두 가지 정신형태라 생각한다. 반복해서 읽으면서 좀더 깊게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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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윤회와 반윤회 - 불교는 왜 인도에서 사라졌는가? 
정세근 (지은이)CIR(씨아이알)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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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17,6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472쪽

2023/08/26

천부경! 한국 문명의 정신적 뿌리이자 인류의 보경(寶經) - K스피릿 2007

천부경! 한국 문명의 정신적 뿌리이자 인류의 보경(寶經)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천부경! 한국 문명의 정신적 뿌리이자 인류의 보경(寶經)
K스피릿 입력 2007.08.31,  기자명코리안스피릿
 
중국의 국희 ( 鞠曦 )교수, “주역, 도덕경과 견줄 인류의 소중한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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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명권이든지 그 중심과 뿌리에는 반드시 본 문명의 정신세계를 선도하고 이끄는 동력으로서 인정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고전(古典), 혹은 경서(經書), 경전(經典)이라고 명명되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초석(礎石)이며 서양문화의 동력이 되었던 최고의 고전이 성경이라면 동방문명을 이끄는 동력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역경(易經)과 도덕경(道德經), 그리고 유가의 논어(論語)를 들고 있다.

우리 한민족에는 한민족과 한국문명의 정신적, 문화적 뿌리이자 전 인류의 보경(寶經)인 천부경이 있다. 이 경전에는 높은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며 한국문명을 이끌고 인류를 구원할 그런 정신사적, 문화사적 패러다임을 가능케 할 심대한 지도사상이 담겨 있다.

중국학자 국희(鞠曦)는 천부경이 한국철학 원류이며, 중국의 삼교(道, 佛, 儒)이론과 그 원리가 통일돼 있다고 그의 천부경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천부경은 중국의 주역, 도덕경 등과도 견줄 몇 안 되는 인류의 소중한 정신적, 사상적, 문화적 보문(寶文)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특히, 천부경을 해석하면서 천부경의 종교적, 세계적, 문화적, 인문적, 과학적 성질 등을 포함한 사상문화의 현대성과 그 문화적 특징에 주목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여러 병리적 현상들과 문제들을 해결할 인류사회의 귀중한 문화적 가치로 재해석돼야 함을 그는 강조한다.

그는 천부경의 역사가 곧 신라의 최치원이 말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역사라고 보며, 
천부경을 곧 삼교(三敎)를 포함한 고대선사(仙史)의 이론적 본원으로서 소위 ‘접화군생(接化群生)’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경전이라 주장한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무기물 등 우주 만물을 사랑하고 가깝게 사귀고 소통하여 감화, 변화, 진화시켜서 완성 해방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는 천부경이 미래 인류사회를 위한 21세기 세계생명윤리(世界生命論理)의 위대한 사상으로 재탄생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사상과 경전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왜 그동안 천부경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했던 것일까? 사상과 문화 종주국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중국의 어느 학자조차 인정하며 극찬하는 천부경을 우리는 왜 그토록 몰랐던 것일까?

국희 교수, 천부경이 홀대받고 본격적연구되지 못한 점 아쉬워 

국희 교수는 우리의 천부경이 사상적,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가진 위대한 경전임에도 그 동안 우리 역사에서 홀대 받고 연구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각성을 주문하고 있다.

천부경과 역경의 사상적, 문화적 가치와 의의는 같다. 천부경은 매우 풍부한 철학과 그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사상적 원리와 그 문화적 정수를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역경은 ‘신명지덕, 만물지정’의 사상적 원리와 그 문화적 정수를 함축하고 있다. 천부경과 역경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기(傳奇)적 성격과 색깔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체적 이론 가치를 부정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두 경전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역사적 사실과 입장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두 경전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 역경은 복희씨(伏羲氏)가 하늘과 땅의 철리(哲理)를 깨우친 후, 주문왕과 공자의 손을 거쳐 정결하게 정리되어 후세로 전해지고 끊임없이 연구돼 철학성과 과학성을 겸비한 고금의 경전으로 형성됐다. 
  • 반면 한국의 천부경은 고래로부터 그러한 사상적 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지금까지 소박한 철학적 성질만을 남겨 놓은 채 한국사상과 문화의 정제되지 못한 이론적 자원으로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천부경과 중국의 역경을 비교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던 그의 주장이 내 마음에도 못내 큰 아쉬움과 애석함으로 다가오며 많은 상념과 또 다른 각성을 하게 만든다.
                               
임태현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외래학술연구원
우송대학교 중국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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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4

이병철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이병철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대표적 담론가이자 열심한... | Facebook


이병철
58 m ·
 
-이변비중(離邊非中),
매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생각하다/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대표적 담론가이자 열심한 현장운동가이기도 한 사발 주요섭선생이 이번에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정식 이름은 ‘김지하의 사회사상 연구’로, 부제를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학적 쳬계이론을 경유하여’라고 달았다.

아직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내가 무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우선 외우(畏友) 주선생이 이런 역작을 내기까지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이제 학자로서도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앞으로 사발님이 생명운동가이자 학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고 성원한다.

나는 사발님과 이른바 생명운동을 함께 해오면서 선생으로부터 배운 바가 많다. 그가 생명담론을 통해 새롭게 제시하는 여러 견해는 ‘생명’과 ‘생명운동’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발님이 노겸 김지하시인의 생명사상을 깊게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생명담론으로 새롭게 풀어가는 것이 내게도 좋은 공부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금 사발님 만큼 노겸 김시인의 삶과 사상을 깊게 연구하는 학자도 드물 것이라 싶다. 그런 그의 연구작업은 그간 진영의 편파성으로 이해하고 평가해왔던 노겸시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위기의 이 시대, 생명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향 제시와 그 실천에 대해서도 크게 기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는 사발님처럼 나도 생전의 노겸시인에게 대한 마음의 짐이 여전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번 사발님의 논문 가운데, 노겸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여러 키워드가 있지만 그 가운데 나에게 깊게 다가오는 개념 하나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말이다. 이 말, 이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접해오던 익숙한 것인데, 이번 논문과 사발님이 생명운동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제시하는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불속 지부지 
차시 이변비중

(道不屬 知不知 
此是 離邊非中)’. 

우리 집 안방에 걸려있는 액자의 글귀이다. 
오래전에 스승께서 써주신 것인데, 스승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도 어느새 삼십 년이 다 되었으니 사십 년 넘게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글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이 단어를 만나왔음에도 아직도 그 의미를 선명히 깨우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이번에 사발님의 학위 논문과 담론제시를 통해 새삼스럽게 들었다. 오래전에 이 글귀를 써서 주셨을 때는 나에게 이 뜻을 잘 새겨 그렇게 살라고 일러주신 것일 텐데도 여태껏 제대로 새겨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온 것이라는 뒤늦은 자각이라고 할까.

그동안 나는 이 글의 출처가 막연히 도덕경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출처를 찾아보았더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좌계선생 등 한학을 하는 분들께 물어보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 문장은 도가와 불가의 두 개념을 스승께서 하나로 합쳐 만드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中)이란 개념은 유가에서도 중용과 시중(時中)과 같은 중심 개념의 하나이니 포함 삼교(三敎)라는 말처럼 유불선(儒佛仙)을 회통(會通)하는 의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道)가 앎의 영역을 떠난 것이란 말은 도덕경을 통해서도 익숙히 들어온 것이고 어렴풋이 짐작은 되는데, 문제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의미라 하겠다. 이 말을 흔히 불교의 중도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닌 전체적인 차원 변화의 진정한 중도"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풀이 또한 내게는 흔쾌히 다가오지를 않는다.
‘이변비중(離邊非中)’이란 존재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머물러야 하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지금 내게 들어와 있는 한 생각은 그 자리가 ‘매이지 않은 마음자리’라는 한 생각이다.

세계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머무는 자리 또한 고정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편, 저편이라고 하는 이른바 진영논리도 이런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디엔가 머문다면 그곳은 가장자리(변)거나 중앙일 수밖에 없다. 그곳은 결코 이변비중의 자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변비중의 자리를 어디라고 지칭하는 그 ‘매이는 마음을 떠난 자리’라 싶은 것이다. 이는 마치 양자물리학의 이른바 ‘관찰자 효과’에 보이는 입자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전자 등 미립자가 관찰자에 따라 그 모습과 위상이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만 그에 따라 일시적으로 어떤 자리(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다시 다른 사건에서는 또 다른 위치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2023/08/23

신선사상(神仙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선사상(神仙思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선사상 (神仙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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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 서문 및 조판기

도교
개념

속세를 떠나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도교교리. 도교사상.

정의
속세를 떠나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도교교리. 도교사상.

연원


사람은 본래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마련이나, 그런 숙명에서 벗어나 젊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확대되어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신선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사상은 지역·인종·시대 등에 따라 그 개념이나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 등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여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조식(調息)·복이(服餌)·도인(導引)·방중(房中) 따위의 신체단련 내지 생리조절의 방법을 개발하고 불사약을 구하거나 금단(金丹)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방사(方士)가 생겨나 술수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상고시대 민족 형성 내지 국가 창건의 단계에서 신선사상이 형성되었으면서도 천계와의 관련을 중요시하여,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 내고 민족 발전의 방향을 조정하며 개인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목표를 찾아내는 등 공동체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의 신선사상

한국 신선설의 시원

한국 신선사상은 단군의 건국과 연결되는 신관(神觀)에서 전개된다. 이 신관에는 두 계열이 있다. 다 유일신을 숭봉하기는 하나,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을 유일신으로 받든다. 이것을 환인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다른 한 계열에서는 환인(桓因 또는 仁)도 태고의 군장인 감군(監群)으로 다루고 신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따로 있는 것으로 받든다. 이것을 사백 계열로 부르기로 한다.

이 두 계열에서는 사상 전개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환인 계열에서는 환인의 4차례의 명령을 받들어 환웅(桓雄)이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수수십만 년에 걸쳐 천지부판(天地剖判)을 비롯하여 일월성신과 동식만물에 인류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만들고 태백산(太白山)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여 그 군장이 되었다.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한 환웅은 환인이 하늘에 임어(臨御)하는 신향(神鄕)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한국 신선설의 요점 가운데 하나인 공완조천(功完朝天), 곧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는 하늘로 올라간 실례로 꼽힐 수 있는 일이다.

그 뒤를 이어 초대 단군 왕검이 군장으로 추대되어 조선을 창업하고 신시의 법도를 계승하여 국가의 규모를 갖추고 천제를 올리고는 <대고 大誥>를 반포하여 사람이 지킬 도리를 일러준다. 이 단군의 <대고>는, 사백 계열에서는 ≪삼일신고 三一神誥≫로 조정하게 되어, 결국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단군조선은 왕검 한 사람이 1,500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47대의 단군이 계승하였고, 또 반드시 부자상전하지만은 않았다. 사백 계열에서는 최고일신(最古一神)이니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니 하여 유일신을 따로 내세운다.

환인은 그 아래에서 한 감군으로 환국(桓國)을 창건하여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7대를, 제7대 환인 때 서자부의 환웅이 태백으로 파견되어 신시를 세우고 그 군장이 되어 18대를 이어 내려오고, 그 뒤를 이어 단군 왕검이 조선을 창업하여 47대를 계승한 후 부여-고구려-대진(大震:渤海)으로 정통이 이어진 것으로 하였다.

한국 신선사상의 엄격한 기원은 탐색해 낼 문헌자료가 부실하나, 그러한 사상은 한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 유일신을 받드는 신앙에서 추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인 계열의 사상이 순박한 원초성을 띠고 있고 사백 계열은 환인 계열의 사상을 수정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환인 계열의 신관

≪규원사화 揆園史話≫의 <조판기 肇判記>에는, 암흑 혼돈한 태고 시절을 말하고 그와는 별도로 원래부터 존재해 있는 환인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을 부각시켰다.

“상계(上界)에는 따로 일대주신이 있어 그를 환인이라고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한량없는 지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고 그의 거처는 수만 리이고 항시 광명을 크게 드러내고 휘하에는 또 무수한 작은 신들이 있다. 환이라는 것은 광명이고 그 체모를 형상한 것이며, 인이라는 것은 본원으로 만물이 그것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동서 <단군기 檀君記>에는 단군 왕검이 반포했다는 <대고>의 서단인 앞부분에 유황일신(惟皇一神)이 최상일위에 임어함이 강조되고, 하늘의 궁전에 거처함과 만선만덕의 근원임이 밝혀지며, 그 권능과 섭리가 언급되고, 신향(神鄕) 곧 유황일신이 임어하는 고장이 대길상(大吉祥) 대광명한 곳으로 제시된다.

이 신향은 한국 신선가의 궁극적인 지향으로, 성통공완(性通功完)하면 조천(朝天:입궐하는 것)하여 신향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확정지어져 있다. 성통이라고 함은 사람이 타고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이르는데, 유황일신과 불가분의 관련이 내포되어 있다. 공완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받은 사명을 완수함을 이른다.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이 표명되어 있는 기술이다.

천신에 대한 외경과 순수하고 성실한 노력을 통해 천상에 있는 신향의 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신선가 뿐 아니라 한민족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던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사백 계열의 신관

한민족의 태고시대의 한 국체로 환국(桓國)을 제시하고 최고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음과 그 일신의 성격 내지 상황을 설명하고 환인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일신을 독화지신(獨化之神), 곧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절대자인 신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마치 공행(功行)이 차서 득도 승천한 신선같이 느껴지게 한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三聖記全上>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환이 나라를 세움에, 최고의 일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는데 독화하는 신이다. 그 광명은 우주를 비추며, 변통자재한 변화는 만물을 생성하고, 죽지 않고 오래 살며, 항상 쾌락해질 수 있고, 지극한 기운을 타고 놀며, 자연과 묘하게 합치하고, 작위함 없이 일하며, 말없이 행하고, 매일 동녀 동남 8백을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보낸다. 이에 환인 역시 감군으로 천계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내어 처음으로 익혀 먹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하며, 안파견(安巴堅)이라 칭하기도 한다. 7대를 지내 내려왔으니 그 연대는 알아볼 수 없다.”

사백력은 시베리아(Siberia)를 연상하게 하고 안파견은 ‘아바지’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 흑수와 백산은 흑룡강과 장백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다. 백산은 천산(天山)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다.

사백 계열에서는 유일신을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라 하여 일신이면서 3가지 공능을 발휘한다는 신관을 견지하는데, 그 공능은 다시 5가지로 확대되어 오제설(五帝說)로 이어진다.

삼신의 작용을 ① 천일:조화, ② 지일:교화, ③ 태일:치화로 나누고, 이것이 다시 오제로 분화되어 동서남북 중의 사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용이 분화되나 신이 복수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백 계열에서 내세우는 인류의 시조 이름은 나반(那般), 그 배필은 아만(阿曼)이고, 환족은 나반과 아만의 후손이다. 환국의 초대 군장 환인은 본래 천산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득도장생

사백 계열에서는 초대 환인이 “득도장생하여 온몸에 병이 없다.”고 하였으나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를 일으키고 무기 없이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근면하게 일하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득도장생의 공용성이 강조되었다. 환국이 7대 3301년 또는 6만3182년이라고 하였으니 역대의 환인은 대단한 장수를 누린 것이 된다.

태우의환웅(太虞儀桓雄)은 사람들에게 묵묵히 생각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호흡을 조절해서 정기를 보존하여 장생구시(長生久視)하는 술법을 가르쳐 신선술을 실천하도록 하였다.

신시씨(神市氏)가 본성에 통달하여 참됨을 이룩하는 것을 지향해서 전(佺)으로 수행 재계하게 하고, 청구씨(靑丘氏)가 천명을 알고 선(仙)을 넓힘을 지향하여 선(仙)으로 법을 세웠고, 조선씨가 정기를 보존하여 수명을 연장함을 지향하여 종(倧)으로 왕업을 세웠다고 하는 것들도 다 신선술을 시행한 예이다.

환웅시대의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천신을 제사하는 뜻을 밝힌 송축문(頌祝文)을 지어 삼신즉일상제의 체용과 권능을 설명하였다. 중국 전설의 복희(伏羲)가 그었다는 희역(羲易)은, 발귀리와 동문수학한 복희가 환족의 우사(雨師)가 전하는 환역(桓易)을 본받아 그어 낸 것이라고 한다. 환과 희는 같은 뜻이고, 복희는 한족의 인물이었다.

자부(紫府) 선생은 발귀리의 후예로 득도하여 천계로 날아올라간 신선으로, 칠성력(七星曆)의 시초인 <칠정운천도 七政運天圖>를 제작해 냈다. 이러한 칠성력의 원리와 오행치수법은 신시의 ≪황부중경 黃部中經≫에서 나왔고, 중국 신선가의 <황제내문 黃帝內文>·<음부경 陰符經> 등을 포함한 ≪황제중경≫도 신시씨 이래의 전승이며, 단군 왕검의 태자 부루(夫婁)가 오행치수법을 우(禹)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중국 문화의 연원을 한족에서 구하는 한국 신선가의 논법이다.

단군신화와 환인

신선사상은 산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한 예로, ≪장자 莊子≫의 <재유편 在宥篇>을 보면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장생의 도리를 배우는 대목도 공동산(崆峒山)이라는 산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산악으로 뒤덮인 우리 땅에서 퍽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싹텄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능화(李能和)는 공동산이 우리 나라인 청구(靑丘)의 땅에 있었다고 보고, 중국 도교의 조종 격인 장량(張良)도 우리 나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봄으로써 중국의 신선설 내지 도교의 연원이 우리 땅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에 나오는 단군에 관한 기사는 이러한 산악신앙과 신선사상이 얽혀 있는 예로 들 수 있다.

환인(桓因)은 제석(帝釋) 또는 상제(上帝)로 주석되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또 제석은 천주(天主)라고도 하여 천상계의 통치자로 이해되어 왔다.

천상의 통치자인 환인은 우리 먼 조상들에 의해 매우 친근해질 수 있는 인간성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었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홍익인간’으로 표현되듯이 그 권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행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환인 내지 하느님의 관념은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이 자리잡고 내려오면서 그 공통된 경외심이 외래 종교의 최고신 또는 유일신을 받아들여 합치시키는 경지까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세의 선가(仙家)는 ‘환’은 광명으로 ‘인’은 본원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일대주신(一大主神)으로 한량없는 권능을 가지고 전세계를 통치하지만, 형체는 나타내지 않고 가장 위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 따르면, 사람은 불멸하는 영명한 영혼이 있어서 선을 돕고 악을 멸함으로써 본성에 통달하여 공업(功業)을 완성하면 하늘에 올라 일대주신, 곧 환인의 고장인 신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환웅의 사업

환인의 서자인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3,000도중을 거느린 채 천상으로부터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다. 환웅은 신웅(神雄)이라고도 하고, 그가 건설한 도성을 신시(神市)라 하며, 그곳의 나무를 신단수(神壇樹)라고 부르는 등 ‘신’ 자를 붙인 것은 그것들을 신성시하는 뜻 외에 환웅과 그가 거느린 도중이 지상의 인간들과 달리 장생불사하는 신선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의 기사에는 환웅이 강림하여 신시를 건설하고 단군을 탄생시킨 일만 쓰여 있고 다른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세의 선가들은, 환웅이 이 밖에 ‘궐천세(闕千歲)’로 표현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겨레를 무위자연의 도리에 따라 다스려 만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신선이 되어 천상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하였다.

환웅은 환인의 명을 받들어 하늘과 땅을 갈라 놓고 신시를 건설하여 설교치세(設敎治世)하다가 단군에게 계승시키기까지 수십만 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이 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대라고 하면, 그 이전의 궐천세는 중국 전설상의 시대보다 오히려 오래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한족(漢族)이나 그 밖의 민족과는 별도로 독립된, 그리고 장구한 문화의 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단군의 기사는 극히 간략하지만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환웅의 사업을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사실은 이 땅의 선파들에 의해서 예로부터 전승해 온 것이지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천행사

강화 마리산(摩利山)의 참성단(塹星壇)은 제천을 위한 제단이었다. 단군 왕검 초기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의 옛 이름)가 남이(南夷)의 관경(管境)이었고, 남이가 반란하자 아들 부여(夫餘)를 파견하여 평정하고 축성까지 했는데, 단군 왕검이 남순길에 마리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 단군 왕검의 세 아들(夫餘, 夫蘇, 夫虞)을 시켜 축조했다 하여 그 성을 삼랑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마리산 참성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시대 이후는 도교의 재초(齋醮)의식으로 거행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고, 참성단의 상방하원(上方下圓:상부는 네모나고 하부는 둥금.)의 형모에 대한 의미 부여도 시도되었다.

마리산의 마리는 ‘머리’의 취음으로 보고 마니산(摩尼山)으로도 불리는데, ‘니(尼)’는 후에 고쳐진 것이다. ‘塹星壇’은 본래 삼랑성 안에 개토(開土)하여 만든 제단이라는 뜻의 ‘참성단(塹城壇)’이었고, ‘星’은 후에 도교의 영향을 받아 고쳐진 것이라 여겨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국왕이 마리산에서 제천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에 들어 있는 이맥(李陌)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조에서 마리산에 당도하여 참성단에 올라가 삼신을 제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구려에서 단군 왕검이 시작한 제천행사를 이어받았다는 것이 한국 신선가의 전승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18년(408) 8월에 왕이 남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강화도보다 훨씬 남쪽인 광양만 근처까지였으므로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제천할 수는 있었다. 이맥의 기술에 따르면 호태황이 참성단에서 삼신을 제사할 때 천악(天樂)이라는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천하는 일은 국왕의 권한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복희(伏羲)도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제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복희는 후에 서토(西土, 지금의 중국 중부)로 진출하여 수인씨(燧人氏)를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고구려 영양왕(590∼617 재위) 때 침입한 수나라의 대군을 격멸한 명장인데, 경건한 마음이 있어 입산수도 끝에 꿈에 천신이 현몽하여 대오 각성하기에 이르렀고, 매년 3월 16일에는 마리산에 달려가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경배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하였다는 것이다.

단군과 선파의 도맥

단군 왕검은 태백산정의 신시에서 내려와 정식으로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다. 왕검은 현실적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아사달(阿斯達)로 천도하였고, 1500년 뒤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아사달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단군은 거기서 산신이 되었고, 무려 1,908세의 수명을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일설에 신선이 되어 죽지 않았다고도 한다. 단군 47대설이 있기는 하나 단군이 2,000세에 가까운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선설을 연상시키기에 족한 일이어서 이 땅의 선파에서 환인·환웅과 함께 단군을 도맥의 조종 가운데 하나로 편입시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다.

≪청학집 靑鶴集≫에 따르면,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된 뒤에 문박씨(文朴氏)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살면서 단군의 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또 ≪백악총설 白岳叢說≫에 인용된 영랑(永郎:向彌山人)과 남랑(南郎:南石行)의 말에 따르면, 문박씨는 환인의 도의 원류를 터득하고 결청지학(潔淸之學:깨끗하고 맑게 사는 가르침.)을 전하였고, 환인은 본래 대왕씨(大往氏)를 시켜서 ≪시서 始書≫를 저술하게 하고 자기는 ≪종서 終書≫ 1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시서≫는 풍우·오곡·음식 및 연양(練養)의 도를 주관하고 무엇보다도 성신(誠信)과 불투불음(不偸不淫)을 인간의 선한 일로 쳤다는 것이고, ≪종서≫는 일월·성신·천지·산천의 이치, 성명(性命)의 본원 및 신도(神道)와 묘덕(妙德)의 교훈을 주관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대왕씨를 시켜 중외의 선관(仙官)들에게 ≪종서≫를 반포하게 하였고, 대왕씨는 그 도중들과 함께 환인을 문조씨(文祖氏)로 불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환인의 도는 그 책들과 함께 문박씨에게 전해지고, 다시 을밀(乙密)·영랑·안류(晏留)·보덕(普德) 등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악총설≫의 저자는 그 책들을 태백산인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렇듯 환인과 환웅을 계승한 단군은 신선이 되었고, 그 교훈은 결청지학으로 요약되어 문박씨를 거쳐 신라 사선(四仙)의 인물에게로 전해 내려간 것으로 되었다. ≪제왕운기≫에서는 “이 땅의 모든 군장들이 누구의 후예인가 하면 그들의 세계는 역시 단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의 신선사상

해모수와 동명왕

고구려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그 건국에 얽힌 신이한 사적이 적지 않다. 고구려는 동맹(東盟)이라는 풍습이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숭상하는 기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조 동명왕 고주몽(高朱蒙)은 천제(天帝)의 손자로 되어 있고,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는 천제의 태자로 기원전 59년에 천제에 의하여 부여왕의 고도(古都)로 파견된다.

해모수가 천상에서 강림할 때 오룡(五龍)의 수레를 탔고, 흰 따오기를 탄 수행인원이 100여 인이나 되었다. 하늘에는 채색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 속에서 음악이 울려 나왔다.

이 경우에도 웅심산(熊心山)이라는 산악에 강림하여 10여 일이 지나서야 지상에 내려와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물녘에는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 해모수는 유화(柳花)의 몸에 주몽을 잉태시키고는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천제의 손자인 주몽은 많은 이적(異蹟)을 행하였는데, 그 자신 개사수(蓋斯水)에서 어별교(魚鼈橋)를 얻을 때와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천제의 손자임을 내세웠다.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여 18년 동안 재위하다가 40세 되던 해 가을에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였던 유리(類利:瑠璃)는 부왕 주몽이 남기고 간 옥편(玉鞭)을 용산(龍山)에 묻어 장례를 지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해모수와 주몽의 신이성(神異性)은 단군에 관련된 그것과 얼마쯤 유사한 점이 있다. 천제 내지 상제의 자손을 칭하면서 국가의 시조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이적에 대한 순박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겨레가 하늘을 숭경하고 천제와의 혈연을 믿어 긍지를 지니고 산 일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모수가 천상에서 많은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하강하는 상황은 마치 도교에서 신선의 거동을 형용하는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동명왕 주몽은 단군 왕검같이 지상에서 장수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렇듯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단군신화와는 별도로 신선사상과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의 한 지파가 세운 백제도 해모수와 주몽의 고사(故事)를 전승하였다고 하겠다.

신라 사선과 선풍

신라시대에는 선풍(仙風)이 성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군에 의해 전해진 환인 이래의 도를 문박씨로부터 계승했다는 영랑(永郎)은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함께 신라 사선으로 불린다. 이들은 영남인 혹은 영동인이라고 하여 종잡을 수 없고, 일설에는 신라 이전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결청지학이라는 이 땅 고유의 선풍을 계승한 영랑은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다니는데, 90세가 되어서도 신색이 어린아이 같고 행색이 기괴했다고 한다.

사선의 유적은 장연(長淵)의 아랑포(阿郎浦), 지리산의 영랑호(永郎岵) 등에도 있으나 고성(高城)의 삼일포·사선정·단혈(丹穴), 통천의 사선봉, 개성의 선유담·영랑호, 금강산의 영랑봉, 강릉의 한송정 등 주로 영동에 몰려 있다. 한송정에는 신선이 선단을 연조하던 돌아궁이와 돌절구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이들 사선은 대낮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고 한다.

선단 연조나 백일승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세속적인 일에 상관하지 않고 호방불기하게 산수간을 오유(娛遊)하는 것이 결국은 사선의 행태라고 하겠는데, 속세에 얽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들 사선은 추종자가 많아 도중 3,000인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이 3,000의 도중은 환웅이 강림할 때 거느린 도중의 수와 같다. 이들 도중 역시 속세로부터 초탈하여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수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청지학으로 요약된 선도체득(仙道體得)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화랑도와 신선사상

사선이 일으킨 선풍은 신라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굳건한 전통을 이루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 鸞郎碑序> 첫머리에, 신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그것을 풍류라 하고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 仙史≫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풍류도가 있었고, 그 기원이 선가의 역사를 다룬 책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풍류도는 결국 신라 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내지 기본 사상이었다. 신라의 ≪선사≫가 전해지지 않아 풍류도의 내용을 적확하게 알아보기는 힘드나 풍류라는 말뜻만을 가지고 본다면, 세속적인 일에서 초탈하여 고상하게 산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어, 풍류도는 그러한 정신을 내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도는 결청지학과도 의미상으로 합치되고, 신라 사선의 행태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어쩌면 한국의 멋의 연원도 이 신라의 풍류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576년(진흥왕 37)에 시작된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고 거기에 유·불·도의 덕목들을 보충하여 인재 양성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선·지선·선랑 등의 별칭이 있는 화랑은 많은 낭도를 거느리고 원근의 산수에 노닐면서 도의도 연마하고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니 사선의 행태와 매우 방불하다. 그래서 후세에는 사선까지도 신라의 화랑으로 여기는 사례가 생겼다.

신선사상이 화랑의 단계에 와서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의 제도에 수렴되어 이전의 소극적인 의의를 지양하고 신체의 단련, 무예의 연마, 대의의 각성, 관용과 희생을 앞세운 기개의 함양 등 적극적인 방향으로 그 수련내용이 확대되었다.

선풍과 선속

공완조천의 관념을 생각해 본다면, 인재의 선발이나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와 연결하여 신라의 화랑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 13대 단군 흘달(屹達) 무술 20년조에 미혼 자제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고 그들의 행색을 두고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다만 진흥왕(眞興王, 539∼576 재위) 때 화랑도가 비로소 제도화되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고구려의 고국천왕 13년(191) 을파소(乙巴素, ?∼203)가 국상(國相)으로 선인도랑(仙人徒郞)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양성한 사례가 있어 화랑제도의 선성이 되었다는 것이 사백 계열의 견해이다. 을파소의 선인도랑제도는 교화[文]를 다루는 참전(參佺)과 무예[武]를 다루는 조의(皁衣)로 2분되어 있다. 정사에도 고구려의 선인 관직이 나온다.

을지문덕(乙支文德)도 신선가 계통의 인물로, 도로 천신을 섬기고 삼신일체의 기운을 받아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도리를 터득함.)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말한 바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선의 유풍을 계승하여 이렇게 조정된 신라의 선풍은 고려시대에까지도 이어져 내려갔다. 예종은 1116년 5월 경진일에 내린 제서(制書)에서 신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되게 받들 것과 국선, 즉 화랑의 일을 대관의 자손을 시켜 행할 것을 명하였다. 의종도 1168년 3월 무자일에 신령(新令)을 반포하고, 그 제5조에서 선풍을 숭상하도록 명하였다.

신라 선가의 특색

이곡(李穀)의 <동유기 東遊記>에 신라 사선이 오유한 강릉 경포대에서는 달밤이면 사선이 즐기는 생소(笙簫)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사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 여전히 악기를 연주하고 명승지를 소요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선의 유풍을 이어받은 화랑도 그 도중과 함께 노래와 음악을 즐겼다. 이렇듯 신라의 선가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선의 중심 인물인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는 여류선가 보덕(寶德)은 거문고[琴]를 안고 다니며 그것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보덕은 선녀로도 불렸는데, 용모가 물에 뜬 연꽃 같았고 바람을 타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가락국왕에게 자연의 순리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감시선인(旵始仙人)은 금선(琴仙) 또는 칠점선인(七點仙人)이라는 별칭도 있는데, 한옥(寒玉) 같은 용모를 지닌 그는 역시 거문고를 안고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내해왕(재위 196∼230) 때의 공신 물계자(勿稽子)도 나중에 속세를 버리고, 거문고를 안고 사체산(師彘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효공왕 때 도선(道詵)이 금강산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눈같은 살결을 하고 물병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어 나이를 알아보았더니 800세에 가까웠다고 하였다.

거문고[玄琴]의 창제자인 옥보고(玉寶高)는 경덕왕(재위 742∼764) 때 사찬(沙粲) 공홍(恭汞)의 아들로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워 선도를 터득하였는데, 학금선인(學琴仙人)·옥부선인(玉府仙人) 등의 별칭이 있다.

가야금의 명수인 우륵(于勒) 또한 신선으로 지목된다. 이 밖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일로 향가(鄕歌)와 그 신통력으로 알려진 월명사(月明師)와 융천사(融天師)의 작가고사(作歌故事)가 있다.

<도솔가 兜率歌>로 두 개의 태양이 나타난 괴변을 소멸시켰다든지, <혜성가 彗星歌>로 성괴(星怪)를 양제하고 침범해 온 왜병을 제 발로 돌아가게 했다든지 하는 고사는, 신라 사람들의 음악관 내지 가요관의 독특한 면을 나타낸 사례이다.

신라시대의 음악이 드러내는 이러한 예술적 신비성과 선도가 지닌 초월적 오묘성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기풍은 허황된 방술의 미망(迷妄)을 초극하여 세련된 새로운 의식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우리 겨레의 예술인에 대한 순직한 경애심을 함양하는 힘이 되었다고도 하겠다.

이 밖에 신라의 왕손이었던 대세(大世)는 신라가 좁다고 생각하여 중국의 오월(吳越) 땅으로 건너가 환골탈태하고 신선이 되는 길을 배우기 위하여, 586년(진평왕 8)에 그의 벗인 구칠(仇柒)과 함께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 이들도 선가의 인물로 꼽히고 있다.

접기/펼치기신선사상의 변천

수련적인 도교와의 습합


대세·구칠이 신선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을 향해 떠난 것은 이미 중국 도교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교는 본래 신선설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된 종교이므로 한국 고유의 신선사상과 습합하기가 쉬웠다. 통일신라 이후 당나라와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 도교와 접촉이 깊어지면서 도교의 내단(內丹:丹學) 수련법도 도입되었다.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 등의 기록을 보면, 신라 말에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記)·최치원(崔致遠), 그리고 승려 현준(玄俊)·자혜(慈惠) 등 유당학인(留唐學人)들이 중국의 수련적인 도교를 이 땅에 도입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수련도교가 우리 고유의 선풍과 혼합되면서도 선파의 맥락은 그대로 유지된 사실이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다. 그는 고려시대의 선파 인물로 이명(李茗)·곽여(郭輿)·최당(崔讜)·한유한(韓惟漢)·한식(韓湜) 등을 비롯하여 혜륵(惠勒)·아도(阿道)·흑호(黑胡)·혹산(翯山)·정호(丁皓) 등 승려까지 합하여 여럿을 꼽고 있다.

다만, 강감찬(姜邯贊) 같은 경우는 거란 토벌이라는 큰 공도 있고 하여, 문곡성(文曲星)의 현신이라느니, 호환(虎患)을 물리치는 방술을 지녔느니, 또 선도를 터득하여 대낮에 등선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84세의 장수를 누린 그가 어느 정도의 선도 수련을 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도서(道書)를 애독하여 그 계통의 양생법과 의학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런 계층과는 달리 몰락한 선비나 비천한 지식인들이 도술의 수련을 빙자하여 산수간을 오유하면서 시를 읊는 등 세속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의 낙방거사 조여적(趙汝籍)도 그런 부류의 하나인데, 그가 편술한 ≪청학집 靑鶴集≫에는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10여 인이 모여 지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선파(仙派)들은 도술도 뛰어나 수련도교를 신봉한 듯한 일면이 있으나, 환인을 동방선파의 조종으로 받들고 환웅과 단군을 높이며, 단군의 후예가 박(朴)·백(白)의 성을 쓰기도 하므로 신라의 박혁거세도 그 후예일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여 수련도교의 도맥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선파의 역사관

조선시대의 선파들은 당시 유가 계통의 지식인들과는 판이한 역사관이나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륙과 일본 각지를 편력하여 대국(大局)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명나라의 멸망과 만주족의 발흥을 예견하였고, 한족(漢族)에 대하여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가 당병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것을 통박하고, 한문화를 숭상하는 해독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당시 임진·병자의 두 큰 난리를 겪어 국력이 쇠진한 데다가 한문화에 기대어 성리의 공론에만 매달려 지도력을 상실한 상층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구세의 이념을 선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천운이 동북에 있었으나 장차 그것이 백두산 이남으로 옮겨지면 우리 나라가 일본을 병탄하고 중국을 제압하여 천하를 평정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글에 빠져 쇠약함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도는 버리고 송유(宋儒)의 여타(餘唾)를 씹으며 자기의 임금을 깎아 내려 외국의 신복(臣僕)에 견주고 있다.”고 당시 지도층의 사대주의적인 패배의식을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대두하여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일으킨 것도 이러한 선파의 사고방식을 계승, 발전시킨 데서 얻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영·정조시대의 사학자 이종휘(李種徽)는 사대적인 패배의식을 탈피하여 자주적인 사관을 확립하려고 노력한 점에서 선파의 역사관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산집 修山集≫ 가운데 <단군본기>·<신사지 神事志> 등에서 단군의 사적을 속설까지 수합하고 마니산 제천을 곁들여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이를 국사의 발단으로 삼아 고유 문화의 긍지를 보였고, 단군 이래의 구강(舊疆) 내지 고구려·발해의 판도 회복에 대한 의욕이 없음을 개탄하는 한편, 역대 사가들의 사대적 근성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패배의식을 배격하고 주체성을 고양하려는 선파의 사관은 한말의 사가들에게도 받아들여졌으니, 박은식·신채호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접기/펼치기중국의 신선설

신선설의 발생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후기(기원전 403∼221)부터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초사 楚辭≫, ≪한비자 韓非子≫ 등에 불사도 불사약 연년불사 무사 등의 말이 나온다. 중국 신선설은 일반적으로 북방인 연·제(燕齊) 지방에서 나온 것으로 보나 신선설은 당시 중국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러한 신선설은 중국의 원초 신앙형태인 무술, 자연숭배 등 다소간 초능력적인 요소들과 혼합되어 불사약을 연조하고 죽은 혼령을 불러내고 하는 등의 방술과 그것을 행사하는 방사가 당시 중국 상하에 두루 알려졌다.

선(僊)과 선(仙)의 의미


송무기(宋毋忌)·정백교(正伯僑)·충상(充尙)·선문고(羨門高) 등 방선도(方僊道)를 따르는 신선가들은 다 연 출신이었으나 제에도 방선도를 따르는 신선가들이 많았다.

한편, 신선설은 산악신앙과 관계가 깊다. 산악은 상제가 임어하는 천계와 가깝다는 관념에서 산악신앙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僊人’의 ‘僊’은 가볍게 들려 올라간다는 뜻으로, 천상을 유행함을 이르는 말이고, ‘仙人’의 ‘仙’은 ‘屳’으로도 쓰는데 산의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천계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신선과 천상이 연결되는 것은, 죽음과 노쇠와 곤고를 부정하는, 피안사상이 희박한, 현세적인 이익의 영속을 지향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사후생활로의 전이와 연결된다.

불사약

신선은 본래부터 따로 있는, 선천적인 특이한 존재로 여겨서 그들에게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하는 영약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삼신산의 전설이 있다. 삼신산은 산동 연안에 연결된 발해 가운데 있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라는 3개의 산으로 된 바다섬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삼신산은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이고 불로초나 불사약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처음에는 방사 서불(徐巿, 또는 徐福)을 시켰다가 다시 방사 노생(盧生)을 시켜 각각 다수의 수종인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삼신산이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같이 알려진 것은 산동 연안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상상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물론 ≪산해경 山海經≫ 같은 선진시대의 환상적인 지리서에는 곤륜허(崑崙墟)의 신선 서왕모(西王母)와 불사약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가까운 발해에 있다는 삼신산이 주의를 더 끌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도 역시 방사를 시켜 바다에 들어가 봉래산을 찾아 불로초를 구해 오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무제는 건장궁(建章宮)에다 20여 길이나 되는 높은 누대를 세워, 무위로 끝났으나, 방사들로 하여금 신선의 강림을 기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진시황과 한무제는 다 봉선(封禪)이라는 대규모의 제사를 지내 신선이 되기를 기원했다.

불사약의 수탐과 아울러 방사들은 불사약인 선단의 연조를 계속 시도하였다. 선단의 연조방법은 후한 때 좌자(左慈)로부터 갈현(葛玄)과 정은(鄭隱)을 거쳐 진(晉)의 갈홍(葛洪)에게까지 전승되었다.

또 후한 때 오지방 사람 위백양(魏伯陽)은 선단을 연조하여 그 선단을 먹고 진인(眞人)이 되어 제자와 애견과 함께 선계에 올라갔고, 그 방법을 기술한 ≪주역참동계 周易參同契≫는 도교경전의 하나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도, 실효는 거두지 못했으나 도사들에 의해 선단이 연조되기는 하였다.

유하(流霞)는 신선술로, 한 잔만 마셔도 기갈이 없어진다고 한다. 항만도(項曼都)는 신선을 만나 유하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기갈을 느끼지 않고 10년 만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천주(天酒)라고도 하는 감로(甘露)는 하늘에서 내리는 맛이 단 이슬로, 마시면 하고 싶은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감로를 받으려고 금속 선인장을 설치하였다.

선도(仙桃)는 곤륜허에 수천 리를 덮고 도사려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3천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蟠桃)라고도 하는 복숭아로, 7월 7일이면 서왕모가 선도를 따다가 잔치를 베푸는데 주목왕(周穆王)이 그 잔치에 나가 선도 4개를 먹었다고 한다. 한무제의 방사 이소군(李少君)은 선인 안기생(安期生)이 선과(仙果)인 참외만한 대추를 먹더라고 했다.

불로장생을 위한 수행과 방기

불사약을 먹고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것은 외물에 의한 방법이다. 외물의 힘이 아닌,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얻는 방도가 강구되었다. 노자의 ≪도덕경≫ 제59장의 장생구시지도(長生久視之道)는 낭비하지 않는 뜻인 색(嗇)의 수행으로 불로장생을 얻는 방법이다.

기력이나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왕성한 활기를 쉽게 되찾는다는 것으로, 뿌리를 깊이 밖고 열매꼭지를 단단하게 하여 무한한 저력을 가꾸어 불로장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자≫ <재유>편의, 광성자(廣成子)가 황제에게 장생의 지극한 도리를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수일처화(守一處和)로, 한결같은 자연의 도를 지켜 만사에 조화롭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광성자는, “1천2백 년 동안 몸을 닦았는데도 내 몸은 전연 노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행을 통해 불로장생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자력을 통한 추구여서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준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끝없이 오래 산다는 일은 실현하기 어렵고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생불사에 대한 욕구는 단념하기 어렵다.

신선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고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려고 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약칭:漢志)≫의 마지막 <방기략 方技略>에는 신선가에 앞서 의경(醫經)·경방(經方)·방중(房中)이라는 3가지 방기가 나온다.

의경은 의학의 이론이고, 경방은 대증을 치료하는 방법이고, 방중은 성생활을 조절하는 방법인데, 다 무병장수를 이룩하는 방편이다. 신선가도 방기인데, 앞의 의경 등 3가지까지 포괄할 수 있다.

≪한지≫의 신선가에 대한 해설은, “신선이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서 그 밖의 여기저기서 무엇인가를 찾는 방법이다. 잠시 그것으로 생각과 마음을 가라앉혀 죽음과 삶의 경지를 같게 하여서 가슴속에서 두려움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주안점은 생명의 진실을 보존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

≪한지≫ 신선가의 책이름에는 ≪황제잡자보인 黃帝雜子步引≫·≪황제잡자지균 黃帝雜子芝菌≫·≪신농잡자기도 神農雜子技道≫·≪태일잡자황야 泰壹雜子黃冶≫ 등이 나온다.

‘步引’은 ‘步捨游引’의 준말로 혼백이 육신에서 걸어 나가 천상 선계를 유행하다가 시신 등 남겨 두었던 것을 끌어가서 신선이 된다는 시해(尸解)와 유사한 방법이다. 기도는 글자 그대로 기예의 방법이다. 황야는 단사를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다.

≪한서≫ <교사지 郊祀志>에 따르면, 제지방 출신들인 이소옹(李少翁)·공손경(公孫卿)·난대(欒大) 등은 다 한무제의 방사로 황야를 향했다. 갈홍은 선단 연조의 재료를 준비할 재력이 없어서 연조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불로장생이나 무병장수에도 재력이 필요하므로 황야의 방술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밖에 또 ≪황제기백안마 黃帝岐伯按摩≫가 있는데 안마는 몸을 누르고 문지르고 하여 적절한 자극을 주어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는 기예이다. 남이 해주는 안마와는 달리 자신이 하는 운동으로는 도인(導引)이 있는데, 몸을 여러 가지로 굽혀 가며 호흡을 하는 도수체조 같은 것이다.

신선가들이 행하던 주요한 기예 중에는 또 태식(胎息)과 벽곡(辟穀)이 있다.

태식은 태아가 모태 안에서 탯줄을 통해 배로 숨쉬는 것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뱃속에 가두어 오래 참아내는 폐기법(閉氣法)으로, 건강에만 좋을 뿐 아니라 잘하면 불로장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벽곡은 곡식을 먹지 않고 음수 식기(食氣)를 위주로 하고 백출(白朮)·산약(山藥:마)·황정(黃精)·거승(巨勝:흑임자)·복령(茯苓)·영지(靈芝) 등의 보조약품을 복용한다.

≪황제잡자지균≫의 지균은 몸에 좋은 버섯을 가려서 먹는 방법으로, 고래로 영지 자지(紫芝) 같은 것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가능케 한다는 버섯이 있다. 이 밖에 두꺼비·박쥐·거북·제비 같은 동물 가운데서도 가려서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 하여 그런 것을 육지(肉芝)라고 부른다. 도교 성립 후에도 이러한 방기가 받아들여졌다.

선화

신선이 된다는 것은 황당하기는 하나, 인간은 크게는 불로장생을 작게는 무병장수를 바라는 생각을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선 이야기에 관심을 모아 왔다. 서왕모는 천상에서 금령(金靈)의 기를 주관하고 서방을 다스리는 천선으로, 황제에게 병부(兵符)와 도책(圖策)을 주어 치우(蚩尤)를 이기게 해 주었고,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준 불사약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달로 달아났다는 등등의 설화가 전해진다.

황제는 도인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끝에 득도하여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에서 보정(寶鼎)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 선단을 연조하여 그것을 먹고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정호(鼎湖) 가로 내려보낸 용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올라타고 선계로 올라갔다.

노자는 ≪사기≫ 본전에 따르면 춘추 말기 주실(周室)의 주하사(柱下史, 국립도서관장 격)로 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주실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서쪽 땅으로 가 버렸다. 신선가들은 노자를 태초부터의 신선이라 하고 노자 ≪도덕경≫ 81장에 준하여 노자의 변화를 말하기까지 하였다.

노자호화설(老子胡化說)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선계의 높은 지위에 있던 신선으로 살고 있었다. 황제와 노자는 신선가들 사이에서 황로사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신선들을 다룬 유향(劉向)의 ≪열선전 列仙傳≫, 간보(干寶)의 ≪수신기 搜神記≫, 갈홍의 ≪신선전≫, 심분(沈汾)의 ≪속선전≫ 등이 나왔고, ≪도장≫의 ≪역세진선체도통감 歷世眞仙體道通鑑≫과 장군방(張君房)의 ≪운급칠첨 雲笈七籤≫에도 선화가 많이 들어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청학집(靑鶴集)』
『수산집(修山集)』
『홍만종전집(洪萬宗全集)』더보기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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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도교의 기원
2.1.1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
2.1.1.1. 원시 종교2.1.1.2. 신선방술(神仙方術)
2.1.2. 도가 사상2.1.3.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
2.2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2.3. 도교의 변천사
2.3.1위진남북조시대2.3.2수나라 - 당나라 시대2.3.3송나라 도교의 부흥과 전진도의 등장2.3.4. 근세 도교의 쇠퇴기2.3.5. 현대의 도교
3. 도교의 핵심 사상
3.1. 도가와의 차이?3.2. 민간 도교의 모습
4. 신화
4.1. 신적 존재4.2신선4.3. 관련 개념
5. 경전
5.1. 도장(道藏)
6. 분파7. 한국의 도교8. 일본의 도교9. 기타

1. 개요[편집]

도교(道敎)는 중국의 민족종교이다. 중국 본토는 물론 한국일본동남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도가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가는 사상이고 도교는 여기에 당대 중국의 여러 토속신앙을 혼합하여 이것을 종교로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선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엇갈린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 황제와 도가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사상' 또는 '황로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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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에 있는 도관(道觀)[1] 청양궁(靑羊宮)의 모습. 청두 시내 서북쪽 두보초당 근처에 있어서 중간에 들리는 관광객들도 많다. # 도관 외에도 묘(廟)라 하여 우리나라의 마을 입구의 서낭당[2]이나 일본의 지장보살처럼 일반인들이 간단한 참배와 기도를 올리는 시설도 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종교로서의 유교와 함께 우리에겐 약간 생소한 개념이지만[3] 국외에서는 확실히 종교로 파악한다. 적어도 유교보단 종교적 색채가 훨씬 진한 편으로, 유교처럼 종교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진 않는다. 도가 자체가 세속적인 유가와 달리 탈속적인 특성이 있는데다, 다양한 중국 신앙까지 집대성해 담아놓았기에 확연히 종교임이 드러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太平道)와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4]를 시초로 하여 남북조시대에 구겸지가 지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실제 자신들을 도교라 지칭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이며 당나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로서 힘이 세지기도 했다. 현대 도교는 크게 전진교(全眞敎)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다.

중국 외에도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과 화교의 세가 매우 강한 지역에서는 이 종교의 사원 또는 도교와 관련된 장식을 민간 건물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상할 만큼 기세를 못 펴는 종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재래의 토착 제천신앙/신선 사상과, 이미 토착신앙과 융화를 이루던 불교에 흡수되었고, 일본에서는 음양도와 슈겐도 형성에 일부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도교 자체가 특별히 독립교단으로 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민간신앙에는 의외로 꽤 많은 도교적 요소들이 녹아 있다.

1990년대 말~2000년도에 들어서는 도교 자체를 중국만의 민간 신앙보다는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의 자연주의 사상/토착, 민간신앙과 문화의 교류 측면으로 연구하는 관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문화교류사의 발전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5]

2. 역사[편집]

2.1. 도교의 기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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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관 내부의 모습.#

도교의 시작은 간단하지 않다. 흔히 노자(태상노군)가 창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고, 기본적으로 원래 구성되어 있던 샤머니즘의 토양 위에 도가 사상의 몇몇 내용이 덧붙여져 도교가 발생하고 이후 도가 사상을 지속적으로 흡수해 발전하고, 추가로 유교와 불교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보통 도교의 시작을 오두미도(五斗米道)로 보므로, 오두미도 이전과 오두미도까지를 도교의 기원으로 설명하고 오두미도 이후는 도교의 변천사로 설명한다.

2.1.1. 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편집]

도교의 기원은 크게 중국의 원시 토착 종교와 신선방술(神仙方術), 도가사상의 세 가지로 나뉜다.
2.1.1.1. 원시 종교[편집]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나름대로 자연 현상을 설명해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애니미즘샤머니즘토테미즘과 같은 원시 종교들이 생겨났다. 이 중 도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시 종교 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의 원인을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고, 자연에는 정령 혹은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영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의 이런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팔신제(八神祭) 혹은 강산제(江山祭) 등 의례를 행하고 도신(跳神: 굿), 점복(占卜), 금기(禁忌), 조험(兆驗: 재앙이나 큰 사건의 징조를 알아채는 것), 참위(讖緯: 예언), 부주(符呪: 부적과 주문)와 같은 무속문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는 민간신앙에 머무르다가 오두미도의 성립으로 도교에 흡수되어 부록파(符籙派)를 형성했다. 특히 원시 종교에서 비롯된 도교의 부록파의 내용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여 민간도교의 중심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교 부록파의 우리나라 판 베스트셀러(?)는 정감록이다.
2.1.1.2. 신선방술(神仙方術)[편집]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이미 중국에는 신선방술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것을 방선도(方仙道)라고 하고 방선도를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방사(方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선도의 목표는 도교가 형성될 때 도교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또 이런 본능에 충실한(?) 목표 덕분에 도교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할 수 있었고 상류층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목표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늙지도 않으면서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듯. 어쩌면 민간의 백성들에게는 오래사는 것만큼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방선도의 방사들은 크게 두 계파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심선파(尋仙派)와 수선파(修仙派)다.

심선파는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신선을 찾아가서 신선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영약도 전수받자!"는 파벌로, 삼신산 같은 신선들이 모여사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낸 것도그렇게 진시황을 포함한 여러 제왕들을 낚아서 울궈먹은 것도 이들이며 이들은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의 오악(五岳)과 같은 명승지와 심산유곡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어 이들을 찾아 불로장생약과 신선술을 전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선파는 명산대처에 은거한 뒤 스스로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방파이다. 이들은 연구를 통해 도교의 신선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심산유곡에 들어가 각종 광물과 약초 등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하여 신선으로 만들어주는 불로장생약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나 불로장생약 제조법은 이후 중의학(中醫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여러 사상적 보완을 거쳐 외단을 제조하거나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쳐 도교의 단정파(丹鼎派)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심선파와 견주면 여러모로 생산적인 편이었지만, 시대상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지 수은을 불로불사의 약으로 여기고 장기간 복용하다가 단명하기도 했다.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방선도의 방사들은 이후 장생불로(長生不老), 육신성선(肉身成仙: 육신을 신선으로 만든다)와 같은 도교적 생명관의 기초를 마련하고 도교의 수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단(外丹)과 내단(內丹)' 개념의 형성[6]과 발전에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당시의 선술은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나, 마왕퇴한묘의 백서(비단에 적힌 글)에 그려진 도인법 그림 등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방선도 측의 이론을 보면 중국 본토보다 삼신산, 봉래산 등 한반도와 만주, 발해만 일대를 포함한 동북방 일대가 성지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방선가들의 주 출신/활동지역이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방선도는 동북방 지역 사머니즘과의 유사성이 짙으며, <태평경>은 <열선전>에 따르면 조사(祖師)인 백화(淸和)를 요동인으로 적었고, 그 후계자인 간길(干吉)[7], 궁숭(富崇)등도 이민족 문화가 강한 발해만 연안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행적으로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감 잡았겠지만, 당시 방선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의사 겸 무당들이었다.[8] 한마디로 '위치닥터(Witch doctor, 주의呪醫)'. 이때에는 신선이란 존재도 방사의 선행과 기도에 응감해 선약을 전해주는 신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신종교 중 특히 증산계가 종교의 성격적/교리/교단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이 강해 종교학계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2.1.2. 도가 사상[편집]

도가 사상은 도교의 교리와도 연결되는 도교의 핵심 사상이며, 도교의 발전과 함께 도교의 개념과 사상은 계속해서 신선의 수련법에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도교가 도교라고 불리는 이유도, 도교가 도가 사상의 세계관이라든가 핵심 사상을 받아들이고 함께 발전해나갔기 때문이다.(물론 도교의 발전 = 도가 사상의 발전이라는 공식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이 덕분인지, 노자(老子)는 도교의 최고 3신인 도덕천존 혹은 영보천존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가끔 원시천존 그 자체로도 여겨진다. 또 장자열자문자항상자 등 도가 철학자들은 도교의 신선 혹은 조사(祖師)로 받들어진다.[9]
人能修至道,身乃作真仙
사람은 능히 도에 이를 수 있으며, 이에 몸은 진정한 신선을 이룬다.

송휘종 어제 보허사(步虛詞) 4수 중에서

도가 사상의 핵심 개념인 (道)는 일단 도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녔으며, 도를 얻으면, 즉 득도하면 신선이 된다. 또 도교의 이론 체계와 신앙은 도가 사상을 통해서 정립되었다.

2.1.3.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편집]

무축도는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황로도는 황로학파와 방선도가 결합한 것인데, 황로학파란 당시 각 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자유롭게 학문을 토론하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생겨난 학파로, 황제(黃帝)의 황과 노자(老子)의 노를 딴 것이다. 도가의 사상에 유가와 묵가의 적극적인 사회, 정치참여 정신을 흡수하여 도가의 소극적인 은퇴사상을 극복한 학파였다. 황로학파는 도가 사상의 원칙에 따른 정치술을 주장하였으나 한 무제 때 유학 위주 정치체제에 밀려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방선도와 영합하게 되어 노자와 황제를 신격화하는 종교인 황로도가 되었다.
그리고, 동한 순제 때에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도(=천사도)를 창시하고, 영제 때 우길의 진전을 물려받은 장각이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본격적으로 도교가 성립하게 되었다.

2.2.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편집]

도교의 시작은 보통 오두미도로 보고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으로 보는데, 태평도가 있음에도 주로 오두미도만을 도교의 근원으로 보는 이유는, 태평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썰리고 썰려서 사라지고 결국에는 천사도(=오두미도)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태평도는 장각이 태평경(太平經)을 얻어 창시했다. 태평경은 도덕경을 계승하여 '도를 천하의 어머니로 삼고, 도는 만물을 낳는다'는 사상과 함께 불로장생의 방술과 신선이 될 수 있는 신선술 그리고 무격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태평경에 언급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를 태현양사(太賢良師)라 칭하였으며 제자나 신도들을 받아들일 때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여 사죄하게 하였고, 부적을 내리고 주문을 외우면서 질병과 재앙을 소멸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렇게 교화를 시작한지 십 수년 만에 수십만 명이 가담하여 조직을 종교와 군사의 합일 조직인 36방(方)으로 만들고 방마다 거수(渠帥)라는 통속자를 두었다. 그 뒤 장각은 교도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10개월 만에 진압되어[10]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사도(=오두미도)에 가담했다.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리웠는데, 태상노군[11]이 장도릉을 삼천법사정일진인(三天法師正一眞人)으로 봉했다고 하여 그를 장천사[12]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오두미도라고 불린 이유는 입교할 때 신도들에게 쌀 다섯 되를 받았기 때문이다.

천사도, 즉 오두미도의 교조는 노자, 주요 경전은 도덕경이며, 장도릉은 특별히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지어 교리를 정하였다. 노자상이주에서 장도릉은 도는 하나(一)이고 "하나의 형체가 흩어지면 기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이 된다."라고 하여 노자를 '도道의 화신'으로 규정하였다. 또 도서(道書) 24편을 저술하여 천사도의 심오한 뜻과 교도들의 행동강령을 가르쳤다.

교구를 24개 치(治)로 나누고 제주(祭主)를 두었는데, 제주는 한 구역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신도의 교화와 제사 등을 주관하는 법사(法師)의 역할을 했다. 또 그는 정실(靜室)을 설치하여 신도가 재계하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삼았다.

천사도의 1대 교주 장도릉은 122세(!) 되던 해에 교의 최고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천사의 직위를 아들 장형에게 넘겨주고, 더불어 역대 천사는 그의 적손들에게 전승토록 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삼국지의 장로다. 이후 천사도는 용호산을 본산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지만,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대만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명맥을 잇는다.

2.3. 도교의 변천사[편집]

천사도 이후로 도교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했는데, 도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꾸준히 이론을 보완, 발전시켜왔고 유교와 불교의 삼교가 서로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도교의 변천사를 여기에 모두 적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도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로 인한 도교의 변화의 흐름만을 간략하게 적도록 한다.

2.3.1. 위진남북조시대[편집]

천사도 이후 도교가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해나가는 시기다.

위촉오 삼국시대에 오나라에는 갈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태극갈선옹(太極葛仙翁)이라고 불렀다. 그는 천태산(天台山)에서의 다년간의 수련을 통해 득도한 후 상청(上淸), 삼동(三洞), 영보(靈寶) 등의 경전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증손자 갈소보가 영보파(靈寶派)를 창립하였다. 이 세 경전은 이후 여러 후인들에 의해 발전되어 도교의 중요한 맥을 이루었다.

동진 때에 있었던 도교 역사상 첫 번째 여도사이자 여학자인 위화존은 명문가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신선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천사도에 가입했다. 위화존은 도교의 양생이론을 깊게 연구하여 삼단전(三丹田), 팔경(八景), 이십사진(二十四眞) 등 양생이론을 만들었고, 수련 경험을 글로 남겼다. 또 팔색은서, 태상보문, 태동진경, 황정, 치정제귀법등의 경전을 수집, 연구 끝에 일련의 완성된 교리와 교의를 갖추었는데, 후에 모산파[13]는 위화존의 이론을 기초로 삼고 위화존을 자신들의 시조로 받들었다. 위화존 덕분에 도교의 양생술과 여러 수련법은 의학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고, 각 교파의 조사들이 변형하여 다양한 양생법이 세상에 나왔다.

동진 때의 저명한 도학자인 갈홍은 연단과 의학에 정통했다. 그는 종조부 갈현의 호인 갈선옹을 따라 소선옹小仙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스승인 정은에게 연단비술(煉丹秘術)과 갈현의 비법을 남김없이 전수받았다.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14] 나부산에 들어가 득도를 하고 연단과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특이하게도 갈홍은 신선방술과 유가의 삼강오륜을 결합하여 충효와 인을 근간으로 삼아야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그때까지 전해오던 도교의 신선이론과 수련방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연단의 이론과 방법 및 연단의 제조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두어 수나라당나라시기의 연단술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 저술로 포박자가 있는데, 그의 포박자 내편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교이론과 방술을 집대성하여 도교의 신선학이론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남북조 시기에는 장로가 죽고 난 후 천사도가 크고 작은 반란에 연관되어 지배층의 견제를 받자 천사도 조직은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교들이 난립하였다. 하지만 이 때 육수정구겸지도홍경으로 대표되는 도교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중구난방이던 도교의 이론 체계를 재정비하고 도교를 다시 진작시켰다. 사상과 관념, 각종 의범을 제대로 갖추고 미신 등의 사상을 개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천사도가 '북천사도(北天使道)'와 '남천사도(南天使道)'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남북조 시기에 도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로서의 의례 등이 명확히 갖추어지고 신선 이론의 체계적인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마음수련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교에서 이러한 마음의 수련의 비중은 이후 점점 확대되어 전진교나 무당파에 이르러는 외단을 도외시하고 내단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육수정은 남북조 유성 시대의 저명한 도사이자 남천사도의 창립자인데, 어려서 유학을 배웠으나 도교의 장생술을 보고 속세를 등지고 도가 높은 스승을 찾아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는 여산에서 수도하며 제자들을 거두어 포교활동을 했으며, 천사도를 진작시키기 위해 도교 경전의 목록을 삼동경서(三洞經書)로 총괄하여 정리했다. 그는 도교의 제도와 복식, 계율과 의식을 정비하고 등을 정비하고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재초, 즉 몸의 정갈함을 위해 목욕과 금주를 하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음식을 피하고 마음의 정갈함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속세에 얽매이거나 불결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재’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를 중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예배, 송경, 사신의 삼법으로 마음과 행동을 정결히 하면 득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육수정 덕에 도교의 위세가 크게 넓어졌는데, 그가 개혁한 교단을 ‘남천사도’라고 부른다.
구겸지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도를 신봉하였다가 숭산에서 수도한 뒤 위나라의 수도로 가 태무제로 하여금 도교를 위나라의 국교로 삼게 하고 도교를 개혁하였다. 그는 먼저 이전에 있었던 부조리한 법도와 쌀로 세금을 받던 제도를 없애고 신도들에게 계율을 준수하고 열심히 예배하고 수련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도교 신선의 계보를 정리[15]하였고 도교를 개혁하여 사회 각 계층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종교로 바꾸었다.[16] 이렇게 구겸지가 개혁한 교단을 '북천사도' 혹은 신천사도(新天使道)라고 한다.

도홍경은 모산종의 창시자이다. 그는 유불도 삼교의 이론에 정통하였고 불교와 도교의 수련을 모두 실천하며 불교와 도교의 융합을 도모하고, 모산에서 외단과 상청파의 양생술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도홍경은 무엇보다 양생을 위해 마음과 몸의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가 창시한 모산종이 상청파의 중심세력이기에 후일 상청파를 모산파라고도 불렀다.

그 외에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백가도이가도삼황파누관파상청파영보파 등이 주요 도파로 꼽힌다.

2.3.2. 수나라 - 당나라 시대[편집]

이 때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여 이론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특히 수나라 이후 당나라 초기까지 연단술, 즉 외단 제조에 대한 이론이 엄청나게 발전했고 덩달아 중국의 화학 기술 수준도 급성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발전한 외단 제조술의 결과인 단약은 수은을 주 재료로 하여 만든 극약이어서 불로장생하겠답시고 단약을 먹어댄 제왕 및 도사들은 불로장생은 커녕 정상적인 수명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도사 소현랑은 외단이 아닌 몸 안의 내단을 키워야 한다는 내단론[17]을 주장하였다.

당나라 때의 도사 소현랑은 스스로를 청하자라고 불렀는데 태역太易[18]과 단도丹道를 발명하여 ‘보장론(寶藏論)’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영지靈芝(=영약=외단=불로장생약)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할 수가 없다고 하자 “영지는 너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외부에서 불로장생약을 찾기보다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 내단內丹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도교의 내단 수련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육체와 마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법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내단수련의 핵심이 됨과 동시에 도교의 수련법을 신체를 단련하는 연형煉形에서 정신을 단련하는 연심煉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도교와 불교는 종교적 주도권을 얻으려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서로에게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한편,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의 이론을 공격하고자 연구를 거듭하게 하였다. 결국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은 불교와 도교 양측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결과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이론 및 체계를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또한 이 때의 논쟁으로 인해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9]

결국 당나라 때 도교는 불교의 이론과 사상들을 대거 흡수하고 도사 소현랑의 내단도內丹道를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나라 때는 손사막, 장만복, 이전, 오균, 두광정, 팽효, 담초 등의 뛰어난 도교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내단이 도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하고 내단의 수련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을 들어 노자를 당나라 황족의 시조로 받들었다. 666년 당고종이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올렸고, 그후 당나라 황제들이 존호를 추가하거나 바꾸다가 754년 당현종이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존호로 바꾸었다.

2.3.3. 송나라 도교의 부흥과 전진도의 등장[편집]

수당 시대 이후 송, 원 대에는 도교가 크게 부흥하였고 내단론이 계속해서 발전하여 도교의 주류 이론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발전을 거듭했다.

송나라 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인해 모산파와 화산파, 천사도가 크게 흥하였고 당시의 유명한 도사 진단은 전통적인 도가 학설을 중심으로 유가와 불가의 사상을 두루 융합하여 체계적인 내단 이론을 만들었으며, 특히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도가의 문화에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였다. 또한, 남송 대에 왕중양은 전진도(全眞道)를 창시하였다.

전진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을 필수 경전으로 삼았는데, 처차식과 부귀공명을 버리고 육식이나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면서 내단을 연단하여 고통스러운 유한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진도는 이전의 도교에서 주장한 육신의 불사를 부정하고 단지 양신(陽神)만이 불사한다고 주장하여 부록[20]을 사용하지 않고 내단의 수련만을 중시하였다. 이후 명나라 대에 이르러 전진도는 쇠락하였다가 청나라 대에 잠깐 중흥하였다.

금나라 초 북방에서 소포진이 창시한 태일교는 부록을 중시하고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고자 했으며, 정명도는 특이하게도 도교의 정명, 불교의 대승, 유가의 충서 등 삼교의 세 가르침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엔 한 곳으로 귀착된다 하여 충효를 실천하고 마음을 맑게 비우면 신과 통하지 않아도 득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원나라 때 숭도 정책은 사라지지 않아 용호파, 각조파, 모산파의 삼산부록파[21]와 전진도, 태일교, 진대도가 일어났으며 여러 유파들이 있었으나 결국 수 많은 부록파들과 천사도를 합하여 만들어진 '정일도'와 '전진도'로 나누어 흡수되어 천하가 양대 도파로 정리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내단 이론도 또한 양호한 발전을 이루었다.

우당산 중국
무당산에 영락제가 세운 금전. 본래 건물 전체가 도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명 대에는 명 태조 주원장부터 도교를 숭상하였으며, 랍탑도인 장삼봉이 무당산에 무당파를 창립하였다. 장삼봉은 전진의 도사였다가 종남산에서 내단을 만드는 비결을 얻고 무당산에서 수련하였다.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내단을 수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武'를 강조했다. 그래서 장삼풍은 무당권법을 창안했으며 육합신권을 수련하여 내가권법(內家拳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수 많은 도교의 이론과 내단 수련법을 무술에 접목한 것이었다. 이후 무당내가권은 크게 발전하여 형의권팔괘장태극권이 만들어지고 이후 수 많은 무술과 유파가 발생하여 그 유명한 중국권법이 형성되었다카더라.

사실은 장삼봉은 시대별로 같은 이름이 여럿 나오는 불분명한 인물이며, 장삼봉과 무당산은 명나라대 정치적 목적으로 국가에서 띄워준 케이스다. 또한 중국무술 운운은 완벽한 후대의 날조다. 소림권이 달마에게 유래했다는둥 XX 전통무술은 고구려/화랑이 익히던 호국무술이라는둥, 기원을 과거로 잡을수록 권위가 선다는 착각에서 비롯한 것. 실제 태극권은 명말 진왕정, 형의권은 명말 희제가, 팔괘장은 청나라말 동해천을 시조로 한다. 내가삼권은 근대에 탄생한만큼 각자 계보를 정확히 밝히고 있으며,[22] 무당산 쪽에서 멋대로 장삼봉 이름을 팔아 사기치는 것이다.전격 대륙의 상술

그러나 명나라는 공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교를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는 나라였기에 비록 황족의 후원이 있기는 했으나 국가운영의 중심사상은 도교가 아닌 유교에 두고 있었고, 불교와 도교를 반반씩 중심 사상으로 잡던 당송 시대와 달리 도교의 힘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때부터 국가 중심의 관방도교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민간신앙에서는 송, 원 시기부터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민간도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옥황상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들이 하부에 위치하는 도교의 신화세계도 이 시기를 거치며 완성되었다.

2.3.4. 근세 도교의 쇠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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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같이 섬기는 도관도 있다* 심지어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 같은 중공 개국 시조들을 섬기는 도관도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는 원래 자신들이 주로 믿던 불교(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억제하였다. 중국 역사 내내 유교, 도교, 불교는 항상 긴장상태에 있었으며, 유교는 중국의 전통 통치기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억압할 수 없었지만, 도교와 불교는 군주의 성향에 따라서 한쪽은 우대를, 한쪽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청나라의 국교는 티베트 불교였기 때문에 도교가 탄압을 받은 것이다. 청 초에는 한인들을 달래기 위하여 정일도를 비호하고 교주를 정일진인으로 임명하여 2품으로 삼았으나, 결국에는 숭불억도 정책으로 인해 천사라는 이름이 진인으로 격하되고 품계도 2품에서 5품이 되었다.

건륭제 시절부터는 노골적으로 도교를 탄압했고, 포교를 금지하니 결국 도교는 쇠락하게 되었다. 다만, 그래도 도교의 성직자인 도사한테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고, 기존의 상투머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다.[23]

명청 시기를 거치면서 도교는 국가 제초의례 중심의 관방도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민간신앙적이고 주술적 기복 중심의 민간도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개인의 양생을 추구하는 수행도교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단전 호흡기체조 등으로 유명하다)

2.3.5. 현대의 도교[편집]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다시한번 전기를 맞는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종교를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집권 초기에는 서방세력과 연결된 그리스도교를 빼고는 특별히 종교에 탄압을 하지는 않았다.[24] 도교에 대한 정책도 처음에는 지나친 미신이나 공양등을 규제하는 선이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모든 종교는 탄압을 받았고, 홍위병들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도교 사원을 부수고 도사들도 린치를 당하는 등의 사태가 있었다.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중국 정부가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탄압을 중지하면서 중국에서는 다시 도교가 융성하고 있다. 도교는 사실 기복신앙과도 밀접히 관계있고, 체제에 상관없이 인간의 불안한 심리는 있기 마련이라, 중국의 왠만한 도시에는 대부분 도관이나 사당이 있고 나름 여기 참배하러 오거나 점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 다만 도교라는 것이 사이비 종교로 변질되어 홍건적의 난이나 백련교도의 난처럼 종교반란세력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여러모로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다. 도교계통의 종교인 파룬궁이 철저히 탄압을 받는 것이 바로 예이다.

원래 도교라는 것이 명청 시절부터 이미 원시 도교 시절의 무축적/기복신앙적 성격이 다시 대두된 민간 도교 시대다 보니 자체적인 교단/교리/경전이 있다고는 하지만.[25] 대부분 우리나라의 무당이나 무속 신앙과 섞인 불교 모습과 하등 크게 차이나지 않고,[26] 사람들의 시선도 그다지 좋지 않아 한국인들이 무당보다 스님이나 사제를 더 수준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27] 이 지역에서도 비슷한 취급이다. 특히 동남아는 동남아시아 자체가 상좌부 불교가 발달한 지역이다 보니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져있다.

3. 도교의 핵심 사상[편집]

도교의 목적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불로장생)'이다. 하지만 속세에서 불로장생은 언제나 실패하였기에 속인들과는 육신부터 다른 선인이 되어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도교는 현세의 삶이나 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기독교이슬람 등 종교들과는 달리, 사람을 중시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한줄요약: 살아서 잘되자[28] 중인귀생(重人貴生)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29]의 수련으로 역수반원(逆修返源)[30]하는 성선成仙이론을 확립하였다. 신선은 득도(得道), 도통(道通)하여 영원불멸한 도와 하나가 된 사람으로[31] 수련을 통해 정기신(精氣神)의 셋을 기신(氣神)의 둘로 되고 기신을 신(神)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 신이 도가 되어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불사의 육체를 지니고 장생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몸은 '소우주'이며 우주가 인간의 몸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신들이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깃들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교에서는 태양의 신은 오른쪽 눈에, 달의 신은 왼쪽 눈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정결하지 않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 사람의 몸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신들이 인간의 몸을 빠져나가면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신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들의 정精을 받아먹고 사람의 수명을 깎아내리려 한다. 따라서 사람은 정의 공급원인 곡기를 끊어 나쁜 신들을 잠재우고 마침내 기(氣)만을 호흡하다가 마침내는 기를 한 번 호흡하고는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몸에 담아 몸을 보함으로써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 이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잡념을 지우고 무념무상에 빠져들어 마음을 정갈히 함과 동시에 내관(內觀), 즉 자신의 내부를 고요히 관찰하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들과 우주를 보아야 하고 나아가 그 우주를 이루고 작동시키는 현묘한 질서인 도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도를 알게 됨으로써 도道와 하나 되고 우주(宇宙)와 하나 되어 영원불멸한 우주와 같이 사람도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 생겨나는 덕과 지혜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인데, 자연의 삼라만상에 도가 있음에도 도의 현실화된 모습인 덕과 지혜를 내보인다는 것은 도가 도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32]이요, 따라서 그것은 도를 알지 못하는 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자와 장자가 도를 아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도를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여 물과 같아지는 경지에 이르러야(상선약수) 비로소 '득도했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교 성선成仙 수련 방법의 초점은 도교 초기의 천사도부터 당 초까지는 그 방법으로 도인술(道人術)[33], 선단(仙丹: 불로장생하는 약,)[34]과 같은 '양생법'을 이용하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썪는 곡식이 아닌 영원불멸하는 금속, 그 중에서도 정제된 수은[35]으로 만드는 외단 즉 단약을 섭취하고 곡기를 끊는 육체적인 방법을 통해 영원불멸하고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얻는 명命(육체)의 수련에 맞추어졌었다. 부가적으로 마음의 수련과 윤리의식 고취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양생법, 특히 선단을 이용한 불로장생술로는 신선이 되기 힘들어 보였다.죽어서 승천하기는 쉬운 방법들이다.

그리하여 유교/불교와의 끊임없는 교류는 도교의 신선 수련 방법의 초점을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수련 방식보다 곡기를 점차 끊어 내고 기를 호흡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탁하고 음陰한 기운을 남김없이 털어내어 양신陽神을 이루어 도를 얻고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마음의 수련 방식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이후 내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도사 왕중양은 신선이 되면 육체를 버리고 양신陽神 이 빠져나와 불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전진도 이후에는 아예 내단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기의 도교는 언젠가 썩는 곡식으로 만들어진 몸은 썩어서 죽게 되니까 썩지 않는 금속을 먹자!(육체수련 중심, 외단론 중심)이었던 것이고, 후기의 도교는 수련으로 우주와 합일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자!(심성수련 중심, 내단론 중심)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후기 도교의 경향으로 인해 민간 도교가 아닌 수련 도교에서는 여러 부적술과 제사 의식 또한 단순히 술법으로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비우고 '좌망'(坐忘: 앉은 채로 자신을 잊음)할 수 없을 때에 할 수 없이 몸 안에 있는 신을 바깥으로 불러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요, 이름난 명산을 유람하는 것도 그 곳에 살고 있을 신을 만나 보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3.1. 도가와의 차이?[편집]

도가와 도교는 엄밀히 따지면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도가는 노자 같은 사상가에 의해 나타난 철학사상의 하나지만, 도교는 장각장릉 같은 교주에 의해 확립된 종교들을 출발점으로 본다. 도교가 종교로서 발전하면서 도가사상 등을 끌어들였지만 사상적 지향점은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닐 수 있다. 우선 도가=철학, 도교=종교로 보는 관점부터가 문제가 있다. 과연 철학과 종교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인가? 그것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아니, 시간적으로만 봐도 이 때는 고대다. 수학 과학 연구하던 피타고라스 학파도 종교적 특색[36]을 지니고 있었던 시절이다. 당장 불교만 보더라도 불교 교리를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불교 의례를 종교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 역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종교의 이분법에 따라 사고하는 결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도교가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노자/장자의 사상은 애초에 서로 지향점이 다르고[37], 노/장이라는 범주를 억지로 묶어 만든 "도가 철학"의 지향점 역시 신비주의적 수양론이나 영생, 불멸에 대한 의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노자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한 사람들 중에는 물론 도교 사상에 빠진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그 이전에 법가로 흔히 분류되는 한비자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한비자는 노자의 텍스트 내에 나타난 통치술에 대한 비유를 상당히 정확히 꿰뚫어보았으며,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통치에는 무위(無爲)의 도(道)를 따르는 술책으로 민(民)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노자 주해서를 통해 지적했다.[38][39] 즉, 노자의 사상은 외형적으로나 종교적인 사상으로 보이지, 이러한 외형적 비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 지배 체제를 제안한 엄연한 정치철학이다.

그리고 장자의 경우 일단 노자와도 다른 노선을 걷는데, 장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 관념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념에 따르는 국가나 기타 지배 체제 자체를 혐오했다. "어리석은 자(愚者)들이 꿈(夢)을 꾸면서 군왕이시어!(君乎), 종놈아!(牧乎)라고 외치는데, 정말로 고루하다!(固哉)"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어리석은 꿈이라 지적한 것이 지배자-피지배자가 구분되는 국가 체제라는 것이 명백해지며, 호접지몽 등을 통해 그가 그토록 깨어나라고 강조한 꿈 역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국가 체제를 피해 도교적으로 혼자 영생을 누리거나 산 속에 은거하는 길을 택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양생"이 어쩌고 하는 신비주의적 목적 역시 국가가 내세우는 통치 이념과 다름없는 헛소리라는 것을 장자 본인이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도교 수행자처럼 혼자 영생을 누리겠다는 목적으로 산 속에서 70년을 신선처럼 산 노인이 하루 아침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우화가 괜히 장자에 수록된 것이 아니다. 장자의 수양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物)과 통(通)하라는 이야기는 국가이념 등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세상의 모든 개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라는 이야기지, 절대 자연 속에 틀어박혀서 신선놀음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물론 전 문단의 의견 역시 특정한 경향의 의견에 불과할 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40] 자세한 것은 스스로 공부해 보고 판단하도록 하자. 2000년대 기준으로 도가와 도교를 분리해 놓고 보자는 주장은 주로 일본 학계쪽에서 보는 시각이다. 반면 원조 중국 학계에서는 도가와 도교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쪽에 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도교 문화 - 행복으로 가는 길" 도록에 수록된 논문 참조.[41]

3.2. 민간 도교의 모습[편집]

도교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도교 수련자는 다음과 같은 생활지침을 제시받았다.
1. 벽곡수행을 하면서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버리고 고기도 삼가며 최대한 소식하고[42]
2. 각종 무술과 단전호흡을 비롯한 여러가지 수련방법으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3. 심산유곡 같이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의 여러 신들[43]을 만나고 도를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몰라도 옛날의 평범한 백성들이 이것을 다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도교는 민간인들에게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도교에서 죽은 사람의 혼은 명부로 가서 재판을 받은 뒤 지옥에서 벌 받을지, 천상계로 가 장생불사의 몸이 될지, 다시 환생할지 결정되는데, 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도 말한다. 다만,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악행을 한 번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다행히도 악행을 많이 했어도 도교의 제의를 통해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면 벌이 감해질 수 있다고도 한다. 보통 사람이 중간에 악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선행을 1200번 연달아 하면 죽어서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신선의 중간급인 지선(地仙)의 경우. 천선(天仙)은 1만 2천 번을 연달아 해야 한다.

그 외에 민간 도교는 민간인들이 직접 원하는 기복성이 발달하여, 도교 부록파의 부록술과 여러 의식이 그 뜻이 조금씩 변형되어 복을 부르고 화를 몰아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점복과 참위(=예언) 등으로 민중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으로 불교 등과 섞여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민중 반체제 운동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실 부록파 자체가 민간신앙에서 유래하였기에 변형이라기보다는 원래 형태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맞지만.

4. 신화[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중국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4.1. 신적 존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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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선도(八仙圖)는 도교의 깊은 이치를 체득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洞賓)·장과로(張果老)·한상자(韓湘子)·이철괴(李鐵拐)·조국구(曹國舅)·남채화(藍采和)·하선고(何仙姑) 등 여덟 신선을 각기 독특한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인 도교의 사원에는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이 여덟 명의 신선들을 모시는 팔선궁(八仙宮)을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아마도 이들은 남녀노소, 빈천부귀를 대표하고 있는 데다가 그 출신 성분들이 걸인, 도사, 관리, 황제의 친척, 시인 등 각양각색이기에 도교에서 받드는 다른 신선들보다도 인간적으로 훨씬 더 가깝고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 삼청 - 삼원의 화생인 삼보군(三寶君)[44]이 관할하는 최고의 이상향 3곳[45]이라고 한다. 처음에 일기(一氣)가 있어 대라천이 되고, 일기가 삼기(三氣)로 나뉘어 삼천(三天)이라고 할 수가 있는 청미천,우여천,대적천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3곳은 인간이 도를 닦아 오르는 것이 가능한 최고 천계라고 한다.
  • 사어(四御) - 달리 사대제(四大帝)로 불리는 삼청존신에 버금가는 위치와 격을 지닌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4명의 천제들을 가리킨다. 이곳에 속한 이들로는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옥황상제[49], 중천자미북극대제[50], 구진상궁천황대제[51], 후토황지기(=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 후토를 가리킨다.)가 있다.
  • 영보천존 (태상도군)
  • 현천상제 (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도道의 또 다른 화신이다.)
  • 태극금관제군(太極金關帝君)
  • 무극지존(無極至尊) - 전 우주에는 모든 36천의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라천에 거기한다고 하는 우주최고의 주재자라고 한다.
  • 삼관대제(三官大帝)
  • 태을구고천존(太乙求苦天尊)
    달리 동극청화대제(東極靑華大帝), 태을천성원군, 태을구고천존, 구고천존, 시방구고천존으로 불리는 신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불교에서 나오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신이다.[52] 그러면서, 달리 태일신, 원시천존으로 설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천선의 궁전 중앙에 위치해 동방 장락 세계의 대자대인한 신으로, 천궁에 거하거나, 아니면은 인간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지옥에 거하기도 하며, 위엄 하나로 모든 삿됨을 다스리는 있지 않은 곳이 없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면서, 만물에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여려 형태로 이 세계에 나타나는데, 때로는 선동과 옥녀로, 제군, 성인과 천존, 천인, 금강과 신왕, 마왕과 역사, 천사와 도사, 황인과 노군, 천의와 공조, 남인, 여자, 문무관재, 도대원수, 교사선사, 풍사우사 등등으로 변화를 이루기에, 그 신통함은 가히 광대하고 무소불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때로는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증산도 등에서는 천상 태을궁의 가장 높은 임금인 것은 물론, 천지만물은 이 태을천상원군에 의해 양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태을구고천존의 명칭에 있는 '태을(太乙)'은 도(道)로부터 유래된 천지에 존재하는 법칙으로[53], 천지만물이 생성 및 창조되고 이루어진 근원 아니면은 우주의 본체이자 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그 자체로 삼라만상을 탄생한 것와 같다.
  • 상상태일
  • 무극태상원군
  • 동악대제(東嶽大帝)
  • 천신(天神), 지신(地神), 일신(日神), 월신(月神), 풍신(風神), 우신((雨神), 뇌신(雷神), 역신(疫神), 산신(山神), 재신(財神)[55]토지야[56], 충왕(冲王)/유맹장군(劉猛將軍)[57] 등의 다양한 자연신.
  • 유불도의 삼교가 섞이면서 각 종교의 조사들이나 신적 존재가 신선으로 받들어지는 경우 → 공자석가모니지장보살미륵불탁탑천왕[58], 관음낭랑(觀音娘娘)[59]손오공 외 다수.
  • 북도풍음대제 (한백무림서의 무당마검에 나오는 풍도대제다.)
  • 주문왕무왕(주)태공망진시황, 한 고조, 위 무제, 진 문공, 제환공 등...[60]
  • 보생대제: 의술의 신
  • 이 곳도 참조할 것.

4.2. 신선[편집]

4.3. 관련 개념[편집]

5. 경전[편집]

5.1. 도장(道藏)[편집]

도교에도 불교의 대장경에 해당하는 집성된 경전이 있는데, 이를 도장(道藏)이라 한다. 대표적으로는 명나라 시기에 1445년과 1607년에 각각 정통도장(正統道藏)[61]과 속도장(續道藏)[62]이 간행되었다. 이전 시기 간행된 도장은 소실/훼손되어 전질이 보존된 것이 없는 반면, 정통도장과 속도장 세트는 서적이 보존되고 있어 중시된다

청나라 가경제 시기엔 도장집요(道藏輯要)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도장(道藏) 사용의 편의를 위한 축약본으로 정통도장에서 200여 종의 도서를 발췌해서 만든 발췌본이자 축약본이다.

6. 분파[편집]

후한말
태평도  오두미도(천사도)
위진남북조/수당
북천사도  남천사도  상청파  영보파
북송
신소파  청미파
남송/금
전진교  태일교  진대도교
정일도  정명도
용문파  오류파

7. 한국의 도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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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
한국의 도교에 대해서는 크게 자생설과 도입설, 중도설이 있다.

자생설은 중국의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체적으로 독립 교단화된 도교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도교서적인 해동이적이나 청학집[63]에서 약간 등장하며, 일제시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서는 아예 이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들이 대부분 국내 문헌 위주의 주장인데다, 문헌 기록 해석에서 지나친 자의주의적 관점을 가진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도입설은 중국의 도교 교단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 도교가 퍼졌다는 주장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조 해동전도록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도교의 성립기에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배제하고, 중국 중심주의적인 해석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 원시도교의 문헌인 태평경이나 포박자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샤머니즘 신앙이 도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 종교학적으로도 원시도교(방선도)는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도교사를 언급할 때는 아직 완전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방선도 부분을 빼버리거나 대충 넘어가고 태평도와 오두미교부터 도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도설은 현재 사학계/종교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으로, 단군신화나 한국 토착신앙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무속신앙/신선신앙/제천의식 등의 원시도교와 유사한 토착신앙이 존재했고, 이러한 신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도교가 융합하여 현재 한국의 민간신앙/신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현재까지 나온 설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뒷받침이 잘되어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 영류왕 때로,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에 의해 기존 고구려 왕실/귀족층과 결합한 상태이던 불교계를 억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고 장려하였으며,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구려 내의 분열을 오히려 부채질하여 고구려 멸망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교적인 신들과 신수들의 모습, 별자리 신앙,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기반으로 그 이전부터 한국에 원시도교적인 토속신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시절의 도교(특히 외단도교)와 관련된 약재/의례용품류의 유물을 전시한 바 있다.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의 발언 기록이나 도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대향로 등 조형물, 도교의 토지신(토백)이 등장하는 무령왕 매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도교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추정은 있으나 고구려처럼 직접적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유입되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하면서 주금사나 도교의 술법인 기문둔갑에 대한 책들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을 통해 고구려 못지않게 도교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동시에 풍류도로 대표되는 토착신앙과의 융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자연히 도교는 독립된 교단이 아니라 불교/토착신앙과 융합하는 형태로 한국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 우리나라 불교와 무속 신앙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성격을 가진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불자들이 애독하는 경전 중 하나인 <북두칠성연명경>[64]을 보면 불경이라고는 하지만 칠성신에게 비는 것은 토착신앙/도교적인 요소며,[65]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아니라 중국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66]이 주연으로 언급된다.[67]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해동이적에서도 '원래 불교와 도교[68]는 주문을 읽고 부적을 쓰는 데서[69] 유사점이 많은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섞여 어느 게 불교고 어느 게 도교인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남궁두에 대한 기록에서 남궁두의 스승이 스님이면서 신선술을 연마한 도사로 기록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적극적으로 도교를 수입한 예종 때 최초로 도관 복원궁이 세워지고 중국에서 파견된 도사들이 초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도교가 아닌 제초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재초)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의 참성단 초제 정도만이 남게 된다. 이때부터 도/불 융합적인 민간신앙의 발달과 몇몇 지방 양반가에서 가풍으로 내단수련과 선행을 중시하는 이른바 내단파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의 도교의 수행이론 역시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70] 현재 국내의 여러 단학 수련단체에서 중요시하는 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등의 서적이 모두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책들이다.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불교/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71]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및 구세주를 자처하는 민간 반란 세력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72] 유교/도교의 사이에서 심성을 닦고 선행을 중시하며, 삼교의 어느 극단에 치우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73]

조선시대 종교적 도교의 경우, 관성제군 신앙이 선조 이후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다. 이러한 관성제군 신앙은 조선말 무상단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상단은 삼성을 중시했는데, 삼성은 관성제군 문창제군[74]부우제군[75]이었다.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 때 들어서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76]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남학[77]정역파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증산교단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에 상제라는 표현이 나온다.*)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78]과 원시/민간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의 다양한 도교적 관념과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 신종교의 사상은 중국 도교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79]

8. 일본의 도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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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현존하는 도관의 모습.#

일본에 처음 도교가 전래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 주금사(呪禁師)[80]가 있고, 무왕 3년(602)년에는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여러 책을 전했는데, 그 중에 도교와 관련된 역서(曆書), 둔갑(遁甲), 방술(方術)에 대한 책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에 도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서기에 상세(常世)신앙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도교가 흥하게 된 시기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직접적으로 유학승/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중국이 제초도교가 들어와 점을 치고 개인의 구복을 비는 방기주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일본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미신적인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처럼 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도교서적을 수입한 자들도 있었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 화려한 귀족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면서 그 유명한 음양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에 백성들은 귀족들의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을 꿈꾸었고, 도교의 은둔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은 민중들에게도 잘 맞아 민중들과 민간신앙에도 파고들었다. 중앙정부의 관청인 음양료에 속하지 않은 음양사들인 외법사들 역시 많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 교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교의 주술 위주로 일본에 들어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고, 또 그런 집단들이 주류로 인정받는 상황이었다. 외법사들의 경우 통제의 대상이었고, 민간신앙에 흡수된 도교는 일본에 들어올 때부터 기복적인 주술 위주로 들어와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밀교가 발달하면서, 타 종교와의 융합에 있어 한국만큼 널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귀족 중심적이던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본 도교계는 된서리를 맞는다.[81] 항상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사계급들에게 있어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 사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82] 오히려 이들에게는 생사를 초탈한다는 사상을 가진 불교가 더 구미에 맞았고, 당시 일본의 종교계에서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도교보다는 당연히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도교는 귀족들의 몰락과 더불어 주류 무대에서 밀려나고, 궁중의 음양사는 민간에서 떠돌이 주술사로 일하는 박사로 변하였다.[83]

이후 일본의 도교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신토슈겐도)과 불교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이루지는 못한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중국 도교의 경전들과 더불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민간 도교가 전래되나, 이 역시 독립된 교단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도교는 민간 신앙과 불교의 일부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9. 기타[편집]

도교 교세는 쇠퇴하는 중이다.[84] 교리도 경전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아직 원시 종교에 가까운데다 구 영국령인 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는 유럽의 영향으로 신비주의가 대세라 20대 및 30대 청년층과 청소년층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거나 무종교/무신론으로 전향했다. 중화권은 기독교가 한국과 달리 쫓겨나서 아시아에서 가장 무신론 비중이 높으며 유불선 3교가 오늘날 한국의 고사처럼 역사에 기록된 것이 아직 많이들 남아서 홍콩의 소방서는 관우상을 갖다 놓는다. 무신(武神)으로서 경찰이나 소방관 등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이다.

화상이 하는 가게는 어디나 1월1일에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고사를 지낸다. 물론 젊은 층으로 오면 세속주의가 대세라 미신이라고 여긴다. 기껏해야 대만에서만 선전하지만, 이 동네도 도사들이 많이 세속화하여 일본 정토종계 승려들이나 신토의 아르바이트 무녀들처럼 평소에는 일반인으로 살다 초제 요구가 들어오거나 하면 그럴 때만 도사복을 입고 도교의례를 하는 등 수도자로서의 도사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알바 도사 중국 본토에서도 대형 도관들을 소림사처럼 무술공연자 양성 학교로 쓰고 공산당 휘하 조직에서 도관들을 관리하는 등 영 상황이 좋지 않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는 더러 서원 혹은 향교가 국내 각지에 지나치게 많은 현상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중화권 각지에 산재하는 다양한(관운장마조 등) 도교 사원 및 3자균형(三者均衡)의 모습을 동경하기도 한다.

베트남도 도교의 영향이 적지 않아 응우옌짜이응우옌빈키엠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도교를 배타적 요소가 전혀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대안이 도교라고 인식하는 부류도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유,불이 거의 휩쓸다보니 도교에 신선감이 더 가기는 하다.(근세에 전래된 가톨릭은 별론으로 하자.)

선단을 만드는 기술인 연단술은 아직도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하는 사람이 있다.

도교에서는 신(神)의 대우가 좋지 않은데, 도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신들은 아직 득도를 못해서 수련 중이다. 물론 이들은 도에 대해 평범한 인간보다 엄청 많은 것을 깨달았으며 신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도와줄 수도 있고 인간의 스승이 되어 도에 대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들도 도를 얻지는 못했기에 인간을 득도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물론 득도를 한 사람도 도가 사상에 의하면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줄 수 없긴 하다.) 물론 도교의 모든 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원시천존 같은 고매한 존재들은 이미 그 경지를 훨씬 넘어선 존재들이다. 다만 그만큼 일반인들과의 거리감도 커서 역사적으로도 도사님들을 숭배했고, 민간도교에도 열중이다.

따라서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도사는 마음을 정갈히 하고 부적이나 제사를 통해 신들을 초청해 득도하는 방법을 묻기도 하지만, 결국 나중에 가면 좌망이나 내관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이라는 스승'을 뛰어넘어 우주 전체를 관조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도를 깨우쳐 우주의 질서와 법연을 확고히 하여야한다. 참고로 도교의 사원은 도관(道觀), 남자 수도자는 도사(道師)나 건도(乾道), 여자 수도자는 여관(女冠)이나 곤도(坤道)라 한다. 당나라의 양귀비도 한때 여관이었다.

현재 중국 도교 종파 중 하나인 화산파 남천문의 장문인은 한국인이다. 곽종인이라는 여성분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절밥처럼 도교 역시 도교 요리라는 고유의 요리법이 있다. 도교의 사상과 목적을 살려 도교 역시 음양과 오행사상을 기반으로 차가운 음식과 뜨거운 음식의 공존과 조합을 만들었다.

또한, 혼돈이라는 것 자체를 모든 것의 근원, 모든 가능성의 총체라는 긍정적 의미로 보았다고 한다.
[1] 도교의 사원. 보통 '00관'이라고 쓰지만, 궁관(宮觀)이라고도 부르며 이때는 궁(宮)자를 붙여 '00궁'이라고도 한다.[2] 사실 서낭당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성지(城池)신앙에서 생겨난 성황당(城隍堂)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고. 실제로 성황당이라는 표현과 혼용된다. 산왕(산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뜻인 산왕당(山王堂)이 변했다는 설도 있고, 서낭당의 다른 이름인 천왕당에 근거해 천신 신앙에 기초해 생겼다는 설, 유라시아 지역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적석단에 기초한 민간신앙설, 절충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서낭당 관련 네이버캐스트 링크.[3] 태극기의 도안 때문인지 중국에서는 한국인의 조상들 중에 도사가 많았거나 혹은 한국 자체가 도사들이 세웠던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며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참고로 실화다.(...) 밑의 본문 내용을 쭉 보면 알겠지만, 한국과 도교는 의외로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하다. 물론 태극기의 형성은 도교와는 직접 관련은 없다.[4] 학술적으로는 천사교(天師敎)라 불린다.[5] 물론 중국에서는 아직 자국주의적 관념으로 도교 문화를 연구하는 경향이 짙다. 사실상 중국의 도교학 논문에서는 교류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고, 찾는다 해도 전래/교류보다는 전파를 위주로 보고 있다.[6] 내단의 경우 방선도의 영향에 대해 말하기는 애매한데, 당나라 때 도사 소현랑이 나타나기 전까지 도교는 내단보다 외단을 중요시하였으며, 수련법도 외단(그나마 외단이라는 용어도 소현랑이 내단론을 주장한 뒤에야 외단/내단으로 구분되면서 생겼다.)에 주목하되 마음의 수련도 병행하는 정도이다. 물론 그 전부터 마음의 수련을 중시하는 경향이 점점 대세를 타긴 하지만...[7] 삼국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우길이다![8] 열선전을 비롯한 도교의 주요 도사들을 다룬 기록을 보면 초기의 도사들일수록 우리가 '도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모습이 아니라 약사나 의사, 무당 등의 모습이었다.[9] 하지만 노자와 비교하면 넘사벽으로 취급이 낮다. 그나마 장자가 남화노선(南華老仙,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불리고 저서가 남화진경(南華眞經, 남화경 혹은 장자남화경)이라는 이름으로 도장경에 포함된 정도.[10] 물론 황건적의 난이 불과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진압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썰리고 썰리다 탈탈 털렸다' 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일단 황건적의 난 자체는 1년만에 진압되었지만 한나라는 결국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촉발된 국가 멸망 테크를 수습하지 못하고 4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 즉, 황건적의 1년은 400년간 이어져 온 거대 제국에 치명타를 입힌 1년이었다. 그리고 중국사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장각을 중심으로 한 태평도의 반란은 <종교로 결합된 향촌 세력(농민) 반란>의 효시였다는 점 역시 생각해야 한다. 장각은 '종교적 비전을 매개체로 삼아 농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거대 제국이라도 멸망에 몰아넣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후 청말 백련교도의 난에 이르기까지 이 사례에 영향을 받은 무수한 농민의 난들이 대부분 중국 통일 왕조들을 괴롭혔고, 그 중 상당수를 무너트렸으며 몇몇 통일 왕조는 이런 농민 반란을 기반으로 성립했던 것. 여기에 태평도의 잔당들이 유입된 오두미도(=천사도)가 이후 중국에서 종교로서 도교의 기반이 된 점까지 생각하면 (삼국지연의의 전근대적, 영웅주의 사관에 기반한 관점과는 달리) 장각과 태평도가 역사에 남긴 흔적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장악하여 결국 선양의 형태로 제위를 찬탈하려 시도한 > 이나 <일시적으로 일부 영토를 지배했으나 결국 통일왕조에 흡수당한 세력들>보다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셈.[11] 도교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부르는 명칭이다.[12] 여기서 '천사'라는 이름은 천사도의 교주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계속해서 내려온다.[13] 상청파(上淸派)[14] 처음부터 뜻이 없었던 건 아니었고 동진 성립 과정에 여러 강남 호족들과 함께 가병을 이끌고 분전했지만 당시 사실상 동진의 통치를 도맡고 있던 왕도가 서진출신 관료와 사대부만을 중용하자 이에 절망하고 이후로 도교 수련에 힘썼다. 그의 대표작 포박자도 순수한 도교 관련 서적은 아니며 절반 정도는 시국 비판의 내용이다.[15] 도교의 많은 신들의 이름은 거의 이 때 정해졌다고 보면 된다. 세세한 스펙이나 모습 등은 크게 바뀌기도 했지만.[16] 이전에는 기복신앙과 여러 자연신을 숭배하는 부록파 위주인 민간도교와 불로장생약을 만들고 신선이 되고자 하는 수련도교 간에 간극이 꽤 있었다.[17] 예를들면 단전호흡과 내공심법(기공)[18] 기(氣)가 분화되기 이전 태초의 상태.[19] 이전부터 갈홍육수정구겸지도홍경 등에 의해 도교는 계속해서 유, 불, 도 삼교의 이론을 조화시키고 불교와 유교의 이론을 꾸준히 흡수해왔다.(물론 음양오행론을 흡수한 신유학이나 도가사상을 받아들인 선불교처럼 반대도 존재했다.) 이는 이후에 유불도 삼교 중 불교는 지나치게 탈속적이고 유교는 지나치게 세속적이니, 그 중간에서 양자의 이점을 두루 갖춘 도교가 가장 뛰어나다는 도교중정론이 출현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20] 부록파에서 사용하는, 부적이나 신기(神器).[21] 三山符籙派, 모산파를 보면 알겠지만 도교의 부록파를 계승하여 그 쪽 계열로 가장 융성하던 세 교파다.[22] 내가삼권의 정식 계승자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함부로 무당산 운운하다간 고소크리 당한다.[23] 사실 청나라의 이러한 도교 억제는 도사에게 변발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변발을 하지 않는 한족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 한 정책일 수도 있다. 도교가 계속 번성하면 도사의 수도 늘어날 텐데, 그런 상황에서 도사에게 변발을 강요하지 않으면 변발을 하지 않을 특권을 누리는 한족들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반면 불교의 승려는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삭발을 하므로 승려의 삭발은 한족의 전통이 아니라서 만주족의 입장에선 굳이 금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24] 공산당 집권후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그리스도교는 자산을 몰수당했고, 외국 선교사는 추방되었다.[25] 사실 도교의 교리/경전 자체가 후대로 갈수록 불교의 영향이 확실하게 두드러진다. 물론 불교 역시 기복신앙적 면에서는 아주 충실하게 도교를 벤치마킹하지만...결론은 장삼이사[26] 중국 본토의 도교와 비교해 도교 사원의 규모도 비교적 작은 데가 많고, 도사들도 도교 사제로서의 일을 전담하기보다는 평소에는 일반인이다 도사로서 일할 때만 도사복을 입고 초제를 지내는 식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도사인지 일반인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세속화된 일본 진언종 계열의 승려들과 비슷하다.[27] 중국에서 씌어진 책인 <도교문화 15강>의 초반부에 중국인들이 도교를 상대적으로 천시하고 무협지로 인한 잘못된 도교 관념으로 인한 폐해를 비판하며, 동시에 중국 내에서조차 불교학이 도교학보다 더 연구가 활발한 상을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도교가 가장 융성했던 당송 시대조차 도교는 불교에 밀려 콩라인이었는데 뭘 새삼스레(...). 사실 도 계통의 종교가 불교보다 천대를 받는 건 일본도 예외가 아닌데, 창작물에서와 달리 현실의 일본인들은 신토 성직자인 신관과 무녀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28] 이 자세만큼은 도가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덕경, 장자 텍스트뿐만 아니라 비슷하게 세트로 묶이는 열자, 양주의 발언 등에도 국가의 대의명분에 휘둘리지 말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음을 생각하면 쉽다.[29]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갈고 닦음[30] 수련함으로써 근본으로 거슬러 돌아감. 도에서 만물이 나왔으므로 만물에서 도로 돌아감.[31] 우리나라의 신종교인 증산교단의 교리에 의하면 득도하면 일원세계(一元世界)가 눈앞에 있고 사해중생(四海衆生)이 마음에 나타나며, 모든 이치가 뚜렷이 드러나고 만상(萬象)이 펼쳐지며 서양에도 마음대로 가고 하늘 끝으로 새처럼 날아오르기도 하며 풍운조화(風雲造化)가 마음대로 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이 하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지며 천지가 내 마음과 일체가 되고 삼교(三敎)를 두루 쓰며,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고 한다.[32] 이게 바로 그 유명한 道可道 非常道[33] 일종의 체조 등을 통한 양생법[34] 실제로는 온갖 중금속 덩어리인 경우가 많아 도리어 명을 단축시키기도 했다. 당나라 때까지 천자들도 단약 먹고 여럿 죽어나가서 결국 유교,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송대 이후로는 단약 섭취를 제외한 다른 수행법들이 부각되었다.[35] 수은이 다른 금속을 감싸서 녹여버리는 도금 공정, 상온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수은의 특징 등등을 보고 옛 중국인들은 수은이 신선의 현묘한 특징을 닮은 금속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썩어 없어지는 곡식 대신 신선의 성질을 닮은 금속을 먹으면 신선을 닮아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간이 허하면 간을 먹고 정력이 허하면 해구신을 먹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이다. 이 사고방식 때문에 진시황 시절부터 당송변혁기까지 수은 중독으로 죽어나간 금단술사들이 불쌍하다[36] 지켜야 할 계율이나 윤회설같은 세계관이 있었다.[37] 쉽게 말해 노자와 장자의 사유 차이는 형이상학vs실존주의국가주의vs아나키즘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지경이다.[38] 만약 노자의 "소국과민" 이나 "병기불상지기" 등의 문장에 혹해서 "노자가 평화롭고 자연주의적인 소규모 공동체, 국가 없는 사회를 꿈꿨구나"라고 생각하면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어찌보면 당신도 노자의 통치술에 낚인거다. 노자의 통치술은 민중이 이렇게 생각하게끔 통치자가 도에 따르는 교묘한 술수를 써서 백성의 복종을 받아내야 한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39] 단 이는 한비자의 견해이지 본래 뜻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경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아나키즘부터 전체주의까지 극단적으로 나뉜다.[40] 도가철학을 아나키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신비주의적인 도교에 결코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애초에 아나키스트 중에 반종교적 정서를 지닌 사람들도 있지만 영성(Sprituality)이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요즈음의 반종교적 정서들에 좌파들이 경계심을 가지는 추세인지라...[41] 요새 중국철학이나 불교철학 전공자들 사이에는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을 아예 무시하며, 동양철학의 실용적, 정치철학적 모습만을 크게 강조하기도 하고, 과학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형이상학적, 오컬트적 서양철학 및 종교를 까는 경향도 많이 보인다. 허나 이에 대해 과학만능주의와 옥시덴탈리즘이 묘하게 혼합된 방어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또 과학만능주의 맹신자들에게는 동서양 철학 자체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로 취급되기도 하며, 불교의 과학성을 열렬히 주장하는 의견은 유사과학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신비주의를 까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다.[42] 자극적인 음식. 특히 오신채와 고기를 멀리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실제로 오신채와 고기를 금하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은 불교 전래 한참 후에 등장한다.[43] 약 3만 6천 위가 있다고 한다.[44] 천보군(天寶君)/영보군(靈寶君)/신보군(神寶君)[45] 원시천존이 사는 대라천(大羅天) 아래 삼천(三天)이라고 한다.[46] 청미천(淸微天),시기(始氣),청(淸)으로, 천보군이 다스리는 성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47] 우여천(禹餘天),원기(元氣),황(黃)으로, 영보군이 다스리는 진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48] 대적천(大赤天),현기(玄氣),백(白)으로, 산보군이 다스리는 신선들이 사느 곳이라고 한다.[49] 도교에서 신봉하는 천도를 총괄하여 집행하는, 삼청에 버금가는 사어의 수석이라고 한다[50] 옥황대제(=옥황상제)를 도와 천경지위, 일월성신, 사시기후를 주관하는 신이라고 한다.[51] 옥황대제를 보좌해 남북극과 천지인삼재를 주관하여 뭇 별들을 통제하고 인간의 병기와 군대를 주관하는 신이라고 한다[52] 천상의 세계에 있는 도안에는 동방의 장락세계의 태일복신을 하며, 괴로움을 구하고 액을 미리막는 대자인자를 한다고 한다.[53] 그러면서 태을구고천존은 이 태을이 구체화된 존재라고 한다.[54] 이외에 황천과 호천을 비롯한 다양한 상제가 있다.[55] 財神.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신이다.[56] 토지의 신.[57] 메뚜기 떼의 신이다. 중국은 메뚜기 재해가 워낙 대륙 스케일이다 보니 이런 신도 있다.[58] 불교의 비사문천을 도교식으로 받아들였다.[59] 관세음보살을 도교에서 부르는 이름. 낭랑(娘娘)은 여신을 말한다.[60] 사후에 '신선이 되었다'라고 추앙받은 경우다.[61] 5305권 480함[62] 180권 32함[63] 단, 청학집의 경우 환인과 헌원의 스승이 둘 다 중국 서방의 공동산의 선인 광성자라고 기록하고 있다.[64] 고려 시대부터 유입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을 주로 사용했는데, 1534년(중종 29년)에 안동 광흥사에서 불공용으로 발행한 북두칠성공양문(北斗七星供養文)에는 칠성청, 불설북두칠성연명경, 칠성하강일, 칠성부(민속에서도 사용하는 부적으로 당나라 때 바라문승이 번역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에 수록되어 있는 부적) 등이 수록되어 있다.(성수신앙의 일환으로서 북두칠성의 신앙적 화현 양상) 링크되어 있는 논문 파일 자료에서는 북두칠설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그냥 일반 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직접 북두칠성공양문의 원문을 보면 "불설" 북두칠성연명경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도 북두칠성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제대로 나왔다.[65] 북두칠성숭배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유서 깊은 토속신앙이지만, 현재의 칠성신앙은 도교적인 요소의 영향이 강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중국과 달리 칠성신을 인간에게 생명과 복을 주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반대로 중국에서 칠성신은 무서운 죽음의 신이다.[66] 노자[67] 사실 이 북두칠성연명경 자체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이며, 노자가 등장하는 점에서 도교의 칠성숭배가 유입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당장 한국 사찰에서 칠성단 예불시 언급되는 존재인 태을신이나 자미대제는 모두 도교의 신이고, 치성광여래는 북극성 신앙과 불교가 혼합된 존재다.[68] 여기서의 도교는 중국식 도교가 아니라 한국의 토착신앙과 결합해 한국화된 도교/도교로 이해된 토속신앙을 말한다. 해동이적이란 책 자체가 중국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신선들의 선맥을 정리한 책인데, 등장 인물들 중 고대의 선인들은 단군해모수 등 초자연적인 권능을 발휘했다고 전해지는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들인 경우가 많다.[69] 엄밀히 말하면 부적을 쓰는 것 자체가 토속신앙의 영향이다.[70] 양반들은 장시간 앉아서 공부를 하다 보니 쉽게 문약(文弱)해졌고, 건강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또한 경신대기근 등의 자연재해와 돌림병의 유행 속에서, 향촌 양반들 사이에 건강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71] 경신일에 삼시충이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자신이 기생하는 인간의 죄를 일러바쳐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동안 잠을 자지 않는 것[72] 종교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신에 대한 저술이나, 천제를 지낸 유적도 남아있다.[73] 대표적인 내단파 인물인 김시습의 경우 중국 내단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에 대해 장수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고, 정렴이나 권극중 등 다른 내단파의 인물들도 정도나 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중도주의를 추구한다.[74] 유불선 삼교일치적 측면에서 중시되었다.[75] 여동빈을 의미[76] 무상단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조선말 교단도교는 민간 자생 교단이기보다, 당대 정부와의 관계속에서 성립, 성장하였다.[77] 다른 이름은 오방불교로 이름은 불교라고는 하지만, 교단의 성격을 보면 도교와 불교, 주역학이 뒤섞인 형태다.[78] 동학에서는 한울님 외에 다른 신에 대해 특별히 다루지 않으나, 증산계의 경우 엄청난 수의 도교계 신령들이 등장한다. 관우, 28수, 28장, 칠성신 등이 모두 도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신격들이다.[79] 참조문헌:<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정재서 저.[80] 주문을 읽어 주술로 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무당 겸 의사(위치닥터)를 말한다.[81] 비슷한 예로 한국의 밀교계가 있다. 한국의 밀교는 비록 순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라 후기/고려시대 동안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나 이후 조선 건국으로 대차게 타격을 입는다. 이후 조선시대에 불교 의례집에 밀교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기는 하나 민간신앙/도교적 요소가 혼합된 현세구복적 잡밀 수준이다.[82] 전국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기독교는 에도막부의 탄압도 겹쳐서 일본에선 널리 퍼지진 못했다.[83] 박사란 활줄을 두드리며 주문을 읽어 재액을 물리치는 일본 주술사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무당도 지역에 따라 박사(博士)라 하나 호칭의 유래와 관련해서 일본의 박사와 관련은 없다. 원래 박사는 옛날부터 전문 지식인에게 주는 벼슬이름이었으니, 나라에 상관없이 존칭으로 붙였다고 보는 게 옳다.[84] 중화권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