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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希修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결택(決擇)하자 - 홍사성

(20+) 초기불교 공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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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결택(決擇)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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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아함 3권 《가미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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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나란타 동산 장촌나림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가미니라는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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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하늘의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의 사제들은 만일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그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존께서는 법왕이시니 부디 목숨을 마친 중생이 천상에 태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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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대답 대신 가미니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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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연못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크고 무거운 돌을 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와서 합장하고 축원하기를 '돌이 떠오르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면 과연 그 돌이 떠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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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많은 사람들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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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떠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병속에 들은 기름을 연못에 부어 넣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합장하고 축원하기를 '기름이 가라앉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면 과연 기름이 가라앉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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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세존이시여.많은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기름은 가라 앉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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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니의 대답을 들은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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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가미니여,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바르고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열 가지 나쁜 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를 위해 사람들이 아무리 합장을 하고 천상에 태어나라고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그는 연못에 빠진 무거운 돌처럼 악도에 떨어지리라. 그러나 가미니여.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고 열 가지 선한 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 그가 악도에 떨어지라고 저주를 했다고 해도 그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기름을 물에 가라앉히고자 하나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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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건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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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목련 존자는 효성이 매우 지극한 사람이었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나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왕사성에서 알아주는 부자로 항상 착한 일을 많이 했으나 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복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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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창고에 재물이 가득했으나 3년 만에 벌써 창고가 비었습니다. 하오니 저는 이제부터 외국에 나가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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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복은 창고에 있는 돈을 꺼내 셋으로 나누고 한 몫은 어머니께 드려 집안을 보전케 하고 또 한 몫은 삼보께 공양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한 몫은 장사밑천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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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어머니 청제 부인은 나복이 장사를 떠나자 아들의 당부와는 정반대되는 일만 골라서 했다. 수행자들이 오면 공양을 올리기는커녕 몽둥이로 쳐서 내쫓았으며, 재를 올리라고 남겨준 돈으로는 동물을 사다가 잡아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복의 집은 동물의 비명소리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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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이렇게 악행을 하는 동안 나복은 장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큰 돈을 벌어 돌아왔다. 아들을 맞이한 부인은 그 동안 자신이 한 일을 감추고 삼보를 공경하고 착한 일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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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제 부인은 나복이 돌아온 지 이레 만에 갑자기 중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나복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부처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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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복은 열심히 공부해서 신통제일의 목련 존자가 됐다. 목련 존자는 신통으로 어머니가 태어났을 천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목련이 부처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청제 부인이 살아서 인과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었으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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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신통력으로 지옥으로 찾아가니 과연 어머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목련이 부처님을 다시 찾아 뵙고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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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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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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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고 목련이 우란분재를 베풀어 수행자를 공양했더니 그의 어머니는 지옥에서 벗어나 정토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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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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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로 제시한 두 경전을 비교해보면 금방 모순점이 발견된다. 《가미니경》에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돌이 물에서 떠오를 수 없듯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반대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마치 기름이 물에 잠기지 않듯이 악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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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목건련경》은 이와는 정반대다. 목련의 어머니가 나쁜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진 것까지는 인과의 엄숙함을 설하고 있는 것 같으나 결론은 다르다. 목건련이 우란분재를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되어 있다. 어머니가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해 아들이 대신 합장하고 복을 빌어준 공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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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가미니경》이 비유로 든 예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물 속에 가라앉은 돌이 떠오르고 연못에 던져진 기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전인데 발상과 결론이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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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전이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의 기록’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성립한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했다면 불설(佛說)은 일관성, 신뢰성에서 큰 문제가 생긴다. 설사 방편이라 하더라도 결론 자체가 달라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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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여기서 이말 하고 저기서 저말 하는 사람이었던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꾼 적이 없다. 문제는 불설을 표방하고 있는 경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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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경전 중에는 불설을 가탁한 위경(僞經)이 적지 않다. 효도와 관련된 《부모은중경》이나 앞에서 읽은 《목건련경》 등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대표적인 위경이다. 이 위경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 둔갑한 데서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수많은 대승경전도 사상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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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위경을 위경인 줄 모르거나,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폐기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이 된 것이다. 한국불교의 경우 위경에 근거한 종교의례와 법사(法事)가 아니면 사찰운영이 안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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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방편이라 변명해도 이는 불교적 태도가 아니다. 

불교라는 이름의 무속교나 미신교, 또는 불교라는 이름의 유교나 도교적인 민간신앙를 불교라고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동북아 대승불교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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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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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해답은 문제 속에 들어 있다. 그 해답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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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과 비불설을 결택(決擇)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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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택(決擇)은결단,간택(簡擇)(여러가지중 골라서택함)...

홍사성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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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 김종만

[14호] 2003년 03월 10일 (월)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


1.들어가는 말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B.C.623∼B.C.544)이 개창한 종교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

불경은 중생구제의 목적과 방편에 대해 언급해 놓고 있으며 이것이 곧 불교의 교리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제시한 교리를 통해 참된 행복을 추구하고 구원의 길을 걷고자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사실을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최근 불교 내에서 진행된 기복불교 논란에 상당한 오해와 논리적 비약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평론》과 〈법보신문〉이 주도해 온 이 논쟁은 비판과 옹호라는 뚜렷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불교평론》은 2001년 여름호 특집 ‘기복불교를 말한다’에서 기복불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논의를 폈다. 이어 이 잡지의 주간 홍사성은 격월간 〈불교와 문화〉(2002, 1·2호)에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의 글을 실어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기복불교 비판론을 비판하고 옹호론을 전개한 것이 〈법보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1면 머릿기사1)를 통해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라고 보도했다. 이어 기복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인사들의 기고와 칼럼을 지면에 반영함으로써 기복불교 비판론을 비판하고 옹호 논리의 개발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기복불교 비판론과 옹호론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다시금 처음부터 불교의 ‘근본’과 ‘본질’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한국불교에 있어서 기복신앙은 매우 광범하게 퍼져 있는 신앙현상이긴 하다.

〈법보신문〉 ‘데스크 칼럼’에서도 지적했듯 (기복불교 아니면)“포교는 무슨 돈으로 하고 사찰은 어떻게 유지하며, 스님들은 무슨 돈으로 공부해야 하나……. (중략) 기복이 사라진 한국불교의 그 큰 빈 공간에 현실적으로 기복 대신 무엇이 채워질 수 있는지”2) 걱정될 정도로 기복불교는 한국불교에서 절대적 의미를 갖는 신앙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복신앙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극복돼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복불교는 아무리 교묘한 논리를 전개해도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신앙체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복불교에 대한 비판과 옹호론이 맞서면서 대척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안타까움이다. 기복의 문제는 솔직히 말해 논쟁의 대상일 수 없다. 신앙의 행태가 기복으로 흐르고 있는 게 태반이라면 그 현상을 현실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본질 안으로 흡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교리적으로도 타락과 왜곡을 부를 수 있는 사안이라면 반드시 극복 또는 시정돼야 한다. 따라서 기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와 관련해 방법과 대안의 차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어도 비판과 옹호라는 대척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불교의 미래를 위해,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전법도생(傳法渡生)의 역할과 기능을 보다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교조와 교리의 가르침을 환기시키려는 애정어린 비판은 꼭 있어야 한다. 역사의 발전적 동력은 바로 이 같은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인도 재래의 제사와 주술을 멀리하면서 불교를 개창했던 정신을 헤아려보면 이의 이해가 어렵지 않다.

본고는 논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복에 한정해서만 그 옹호론의 잘못됨을 지적하고자 한다. 앞서의 논쟁들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정체성과 교리적 해석, 역사적 전개에 따른 불교의 신앙형태 변이 등에 대해서까지 확대하여 기복의 옹비(擁批)를 논하다 보니 궤도를 벗어나 설득력을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2. 기복불교 옹호론의 제 문제

1) 기복과 작복의 혼동 문제
기복불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많은 논자들은 기복을 매우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일례로 “수행방편과 근기 그리고 아홉 종류의 인간상을 유념하면서 ‘깨달은 즉 정법 아닌 것이 없고, 깨닫지 못한 즉 그가 엮어내는 자칭 정법 또한 삿된 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일깨움을 돌이켜보면 ‘기복신앙’만을 굳이 불교의 근본교리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된다.”3)는 주장과 “어떤 일을 함으로써 그 대가로 복을 받자는 의식구조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신행형태를 기복불교라 정의하고자 한다.”4) 등이 그것이다.

이외 앞의 필자들과 함께 기복을 옹호하는 논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기복신앙이 불교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방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행위가 기복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신앙적 정서에 의지한 기복의 정의일 뿐이다. 문제는 기복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교리적 근거나 해명이 없다는 데 있다. 기복을 정당하다고 하려면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옹호론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궁색하게 기복을 자꾸 작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성철 교수의 글이다.

“우리는 초기불전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를 대하실 때 해탈의 가르침 이전에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베푸셨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부른다. 또, 대열반 이후 사리탑의 관리를 재가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발복을 권하셨다.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물을 올리고 탑을 조성하며 사원을 건축하는 것이 복을 짓는 행위임은 초기불전 곳곳에서 발견된다.”5)

김교수의 이 글은 기복을 작복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복=작복’이라는 오해를 부른다. 이러한 잘못은 이미 조준호 박사에 의해 지적되었다. 조박사는 “초기불교 도처에서 기복과 작복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는 김교수의 주장은 기복과 작복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중략) 이제까지 그의 다른 글을 통해서도 두 개의 용어를 같은 뜻으로 혼용해 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6)고 말함으로써 기복과 작복의 구분을 명확하게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기복과 작복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교계신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복불교 논쟁과 관련해 〈만불신문〉은 사설에서 “복 짓는 행위는 신앙행위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금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복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복 짓는 행위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7)고 주장하고 있는데 ‘복 짓는 행위’를 기복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복과 작복에 대한 개념의 혼동과 이해부족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복이 무엇이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작복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두 용어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게 파악돼야 올바른 기복 논쟁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은 말 그대로 복을 받기 위해 절대자의 가피를 바라는 기도행위를 말한다. 불교는 교리적으로 기복의 방법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교에선 초월적 신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이(특히 비불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스승이자 성인이지 중생들에게 그 어떤 초월적 능력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 보살들이 각각 중생구제의 서원을 밝히고 있는데 그 구원의 힘은 초월적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뼈를 깎는 정진과 원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신과는 그 성격부터가 다르다. 기복은 이들 제불보살을 신격화하는 그릇된 신앙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는 중생이 종교에 의지하는 기본 목적인 행복추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복이 신에 의지하는 여타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불교에선 작복(作福)과 수복(修福), 그리고 구복(求福)이 있다. 작복이란 말 그대로 행복해지고자 하거든 복 받을 일을 하라는 것이다. 불교는 연기사상을 골격으로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명한다. 내가 짓는 복도 인과응보요 연기의 법칙에 적용된다. 지극 정성으로 기도했는데 영험이 나타났다는 말은 초월자의 힘에 의해서 가피를 받았다기보다 복 받을 만한 행위를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작복인가. 그것을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로 말씀하셨다. 보시가 나눔의 행복추구라면 지계는 절제와 금도를 통해 한결같은 평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끝없이 솟구치는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자칫 유루복(有漏福)에 흘러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무루복(無漏福=새지 않는 복)을 닦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고 있다.

구복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보통 사람에게 행복이란 재산과 건강, 사랑과 장수, 명예와 같은 조건이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 행복은 유한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루복에 해당하므로 어디까지나 다함이 없는 영원한 행복인 무루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불교에서 유루복을 무조건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복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 자체를 잘못됐다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경전에서는 복덕을 구족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대목도 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하나인 아니룻다가 정진에 몰두한 나머지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친히 그의 옷을 꿰매주며 복덕을 짓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구복의 한 좋은 예다.

불교에선 이처럼 복을 짓거나 닦고 구하는 행위를 권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덕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기복을 권하는 구절은 경전의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의 도리는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거나 누리는 방법’이 그릇된 사견과 수단을 동원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서글픈 일이다. 어쨌든 불교의 교리를 일탈하면서까지 기복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기복불교’가 아닌 ‘기복신앙’일 뿐이다. 기복은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복불교라는 용어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방편론은 자기를 기만하는 변명이 아닌가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논자들은 대부분 기복이 불교의 본질은 아니더라도 방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근기에 따라 행해지는 기복을 인정하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작복불교로 이끌어 가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는 논지를 편다. ‘기복도 공덕 짓기의 한 방편이다’고 주장하는 성태용 교수의 글8)이나 “기복적 신행은 누구나 거쳐가는 일종의 과정이다. 기복이라는 뗏목을 택하여 불교에 입문했다고 해도 바른 공부가 이어지면 결국 저절로 소멸되는 운명을 지닌 신행행위라는”주장9)이 그것이다.

이 같은 논지는 일견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변명이 포함돼 있다. 즉 기복의 현실론에 빠져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목적이나 원칙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방편이 불교의 교의에 충실하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이는 참된 방편이 아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기복으로 출발해서 정법으로 돌아온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실제 사찰에서 기복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방편이 잘못 적용되고 쓰여질 때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비불교적 신앙행태도 ‘불교의 것’인양 동화돼 버린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방편이란 이름을 앞세워 ‘점쟁이’도 포교의 전위대로 포장되는가 하면 ‘굿’과 ‘역술’마저 용인되는 현상까지 부르게 한다.
방편은 무지몽매한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어떻게 일러주느냐 하는 문제다.

미혹한(無明)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내는 수단이 방편이다. 그래서 불교는 ‘사람을 바꾸는’ 역할과 기능을 가져야 한다. 불교입문은 바로 그러한 ‘사람 바꾸는’ 단초이며 시작이다. 그런데 ‘사람 바꾸는’ 역할 대신 미혹함으로 몰고 가는 행태가 바로 기복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방편을 쓴다 하더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것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 오히려 중생을 더욱 미혹 속으로 몰아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방편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방편은 범어 우파야(upa?a)의 번역으로 (깨달음에)‘접근하다’ ‘도달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좋은 방법을 써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교화방법’이라고도 하고 차별의 사상(事象)을 알아서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를 일컫는다는 것이다.10)

《법화경》 〈방편품〉이나 〈비유품〉에 따르면 우매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불난 집에서 철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희유하고 얻기 어려운 장난감’이 있다며 구출해내는 장면이 그것인바 이도 역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과 비유의 예화다.

하지만 어느 경전에서도 기복을 방편으로 내세워 중생을 교화하는 예는 없다.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아함 《가미니경》에 나오는 얘기를 함께 음미해 보자.

부처님이 가미니라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의 촌장이 부처님을 찾아와 “어떤 종교인들은 기도를 하면 병든 사람도 고칠 수 있고 악한 일을 한 사람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데 당신도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고 물었다. 부처님은 그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촌장이여, 가령 저 호수에 어떤 사람이 돌을 던졌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 주변에 모여 합장하고 ‘돌맹이여, 떠올라라’ 하고 기도를 했을 때 과연 돌맹이가 떠오르겠습니까?” 촌장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물었다. “촌장이여, 저 호수에 어떤 사람이 기름을 부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모여서 합장하고 기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기름이 가라앉겠습니까?” 촌장은 역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그에게 말했다.

“촌장이여, 그와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돌맹이는 떠오르지 않고 기름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처럼 기도를 한다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이 천상에 태어나거나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촌장은 이를 바로 알아 이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 신비와 능력을 기대했던 가미니의 촌장에게 부처님은 어떤 것이 정법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일깨워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 《가미니경》의 얘기가 들려주는 교훈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기복은 절대 방편으로 수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편이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뗏목’같은 것이라면 강을 건넜을 때 뗏목은 버려야 된다. 하지만 기복은 뗏목의 구실조차 할 수 없는, 차라리 신기루에 가깝다. 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뗏목이 방편일 수는 없다. 기복은 강을 건너 주지 못하는 뗏목이자 중생을 나약하게 만드는 신기루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방편이란 이름으로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까지 포용하려는 일부 주장에 대해 다음 지적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던져준다.

“불교라는 깃발을 들지 않는다면 모를까 불교를 불교이게 하려면 폭넓은 관용주의 못지 않게 무엇이 원칙이고 진리인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방법과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무당과 점쟁이가 포교의 첨병’이라는 식의 발상은 무책임하고 백해무익하다. 목적이 좋다고 수단을 무시하거나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원칙을 포기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것이 원칙을 넘어서는 것일 때, 목적과 상관없는 것일 때,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난다. 대승불교의 포용주의가 무당불교가 되고 선불교의 자유주의가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11)

‘기복을 넘어 작복’으로 가자고 하는 주장에는 방편론이 들어 있다. 그러나 처음부처 빗나간 방편론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한국불교의 경험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기복을 방편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목적이나 원칙보다는 현실과 대중의 구미만을 생각하는 대중추수주의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방편은 깨달음과 관련한 훌륭한 교화방법에 가까운 것이지 기복과 주술 등 타력(他力)에 의존하자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3) 일부 사례를 들어 기복불교를 옹호하는 논리의 문제점
기복과 관련해 불자를 현혹시키는 또 다른 문제는 일부 사례를 들어 기복불교를 옹호하는 자세다. 과거에도 기복신앙의 흔적이 있었다거나 남방상좌부도 기복신앙이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기복신앙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요, 그러니 괜찮다는 식의 논리다.

예를 들면 울만 파트리크(미국 UCLA 강사) 씨는 〈법보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도 기복신앙은 있었다’12)고 밝히면서 한국불교의 기복현상도 나무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송위지 교수는 최근 《불교평론》에 기고한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이란 글에서 “상좌부 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었다.”13)고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인용한 김성철 교수도 〈법보신문〉 기고문에서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의 흔적이 전해진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대로 복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기복형태를 띤 신앙행위가 초기불교시대에 있을 수도 있다. 시대가 흐르고 경제관념이 바뀌면서 복전에 대한 인식변화도 있었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또 비교적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남방 상좌부에도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현상의 흐름을 놓고 기복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례로 불전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배반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데바닷타가 몇 차례에 걸쳐 부처님을 위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불교에서 배반을 정당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기불교 혹은 부파불교 시대에 기복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기복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기복신앙 문제를 종교현상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예를 들면 김용표 교수는 초기불교에도 기복신앙이 있었다는 주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종교사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종교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 사상은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앙하는 이들의 마음은 초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현대종교학은 ‘신앙의 존중’과 ‘다른 신앙형태에 대한 구조화된 감정이입’이라는 방법론을 견지하면서 종교현상을 이해하고자 한다.”14)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불교신앙에서 나오는 여러 잡다한 신앙행위까지 종교사학적 안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교수의 이 주장은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종교사학적 관점이란 종교현상에 대한 배경과 의미를 분석할 뿐,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떤 입장에 서서 ‘현상학적으로 그러니 옳다’라며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기복 옹호론자들의 논지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있었으므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요 보편적이고 괜찮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그것의 ‘옳고 그름’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하나의 현상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후유증과 부작용 등 역기능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불교의 신앙형태는 불교의 정법에서 일탈해서 비법이 아니면 불교를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지 오래다. 본말전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기복불교에 대한 일말의 옹호론은 거듭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왜 초기불교에 주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유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원칙과 상식 수준의 궤도를 일탈해 있는 현실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학원을 설립해도 건학이념이 있게 마련이다. 한 단체를 창립해도 개창정신과 설립지표를 내세운다. 이것은 훗날 관련단체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의 현실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불조의 혜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마땅히 초기불교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3.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제언

1) 교리에 따른 신행활동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설법하기를 결심하고 밝힌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증일아함경》 10권 〈권청품〉에 의하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낡은 믿음을 버리라.”
부처님이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낡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당시 인도사회는 대개의 종교가 그렇듯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숙명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숙명론(宿命論), 전능한 신의 뜻에 결정된다는 신의론(神意論), 모든 것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우연론(偶然論)이 그것인데, 부처님은 기존의 이런 관념과 인식을 배격하고 있다.15)

낡은 믿음에 대한 배격은 인도사회에서 신불교운동을 제창했던 암베드카르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암베드카르는 불교신자로 입문할 때 계율의 준수 등을 선서하는 의식을 동반하는데 , 그 선서는 마라디어로 22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처음 8항목은 “나는 브라흐마, 비슈누, 마헤슈와라(창조 유지 파괴를 맡고 있는 힌두교의 세 신인데 이 가운데 마헤슈와라는 시바신을 말한다)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숭배하지도 않는다.”는 등 힌두교와 그 관습을 거부하는 서약이었다. 이러한 옛 신앙의 부정 위에서 불교도로서의 올바른 생활을 서약했던 것이다.16)

암베드카르의 이 같은 서약은 과거 인도불교가 힌두교에 동화돼 차츰 쇠망의 길로 접어든 교훈을 거울삼은 것이다.

암베드카르는 미래사회에 알맞은 종교의 조건으로 ① 도덕성을 기초로 할 것, ②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지 않을 것, ③ 사회생활의 기본적 신조인 자유·평등·우애를 인정할 것, ④ 빈곤을 축복하지 않을 것(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사상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상이다)의 4개항을 제시했다.17)

이중 ② 항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은 최근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국불교의 신행 현실은 어떠한가.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복을 비는 기복신앙은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기복주의 요소가 얼마만큼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기복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불교평론》(2002, 여름·가을호)에서 마성 스님은 ‘초기-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를 통해 만해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해 논지를 전개했다. 필자도 한때는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암송하고 다닐 만큼 ‘불교의 변화’를 강렬히 원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만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이 교계 현실에선 그저 ‘고전’ 속의 구호로만 취급되고 있는 현실을 접하고 낙담을 금치 못했었다. 만해는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만 만족해야 했지 그가 염원했던 불교혁신의 꿈은 거대한 절벽에 부닥쳐 사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만해와 암베드카르가 훌륭한 인물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기존 ‘낡은 종교(관념과 인식이라고 해도 좋다)’를 배격한 데 있다. 불교의 본질을 회복시키려는 그들의 의지와 뜻이 절대로 중단돼서는 안 된다. 본질로의 회복은 그 어떤 것을 변화시키고 혁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국불교의 신행 현실로 보아서는 분명 그렇다.

기복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불교의 근본교리와 괴리돼 있다는 점이다. 앞서 예로 든 《가미니경》의 지적처럼 아무리 기도를 해도 호수에 빠진 돌은 떠오르지 않고 기름은 가라앉지 않는다. 한국불교가 기복의 신행형태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같은 부처님의 말씀(교리)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사찰마다 교양대학을 개설해 운영하고는 있으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기복을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 말해 기복이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시도 자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리의 체계적 습득은 부처님의 일대기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부처님의 생애를 모르고 《지장경》이나 《화엄경》이나 《능엄경》을 공부한다는 건 초등과목을 건너뛰고 대학원 수준의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생애를 알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상과 가르침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신도들을 상대로 한 교리교육을 위해 관련 커리큐럼을 마련하고 교리와 신행을 함께 가도록 하는 지침 제정도 검토해볼 일이다.

2) 사찰재정의 투명화와 보시의 공덕
기복불교를 탓할 때 가장 염려하는 문제의 하나가 사찰재정이다. 기복이 부정됐을 때 사찰재정이 압박을 받을 게 명약관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계종단뿐 아니라 군소종단의 대부분 사찰에서는 기복을 조장하는 각종 재와 기도, 역술과 부적 등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여기에 기와불사, 인등불사, 입시기도, 영가천도, 생전예수재 등 기복불사들이 기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만일 사찰들이 신도들의 길흉화복을 빌어주는 기복불사를 하지 않으면 사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할 정도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기복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지는 이 점에 착안해서 기복을 불교의 경제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법보신문〉의 데스크는 기복불교 척결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며 “그럼 포교는 무슨 돈으로 하고 사찰은 어떻게 유지하며 스님들은 무슨 돈으로 공부하나. 기복불교를 타도하자고 하기에 앞서 한국의 모든 사찰이 어떤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하는지, 기복이 사라진 한국불교의 그 큰 빈 공간에 현실적으로 기복대신 무엇이 채워질 수 있는지를 현실성 있게 제시했으면 한다.”18)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복이 없으면 절에 돈이 들어오지 않고 각종 불사도 되지 않으니 입 다물라는 주장이다. 이는 한마디로 억지 주장이자 비불교적 발상이다. 부처님은 청정수행과 설법으로 교단을 운영했다.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분들은 부처님이 사주나 관상, 기복을 가르쳐서 교단을 운영하지 않았음을 왜 외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불교는 부처님을 모델로 하는 종교다. 형식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정신이나 내용이 바뀌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이 했던 그대로 정법에 의한 방법으로 교단이 운영된다면 교단재정 확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따라서 사찰재정의 위협을 내세워 기복을 옹호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포교문제도 마찬가지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교단재정은 포교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재정이 풍부하면 그만큼 복지 교육 등 제 분야에 걸쳐 건실한 투자를 기할 수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사찰재정이 기복을 중심으로 한 물량주의로 흘러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걸식(탁발)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했다. 재가불자들 역시 수행자들에게 기꺼이 음식을 보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행해지는 자비였고 수행자에 대한 존경과 귀의심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후대에서처럼 어떤 거래적 조건이 부가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지면 사찰재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시대에서 사찰재정과 연계해 기복을 옹호하는 것은 물량주의의 확대와 다를 바 없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주장이 아니다. 대신 불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덕목이 불자들 사이에 폭넓게 주입돼야 할 것이다. 보시와 자비는 다름 아닌 ‘현실세계의 극락화’라는 대승불교의 지향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보시의 지계를 사찰재정과 결부해 일정형식으로 제도화하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3) 정법의 불교를 하자
우리 나라 근·현대의 교육영향도 있겠지만 흔히 종교와 구원에 대한 개념과 정의를 대부분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기복과 관련해서도 ‘개신교와 카톨릭도 기복이 성행하는데 불교계에서만 유독 문제삼는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경우도 나온다.

이는 불교를 여타의 종교와 동질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릇된 견해다. 여타의 종교가 신에 의지해 자신의 구원과 행복을 비는 일은 문제삼을 게 없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불보살을 신으로 간주해 복을 비는 행위는 불보살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불교는 서양종교와는 달리 ‘이성과 과학’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낡은 믿음’을 버리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것이 정법의 태도다. 정법을 지키지 않은 불교의 모습은 인도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땅 인도에서 불교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 이성과 지혜의 종교였던 불교는 인도 재래의 주술주의와 기복주의를 ‘중생구제의 방편’이란 말로 받아들이면서 변질과 왜곡을 거듭하다가 결국 힌두에 동화되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했던 주술과 기복에 훗날의 불교도가 빠져들면서 불교의 역사를 단절시킨 것이다.

이를 교훈 삼아 한국불교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정법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정법대로 신행되지 않는 불교는 겉모습만 불교일 뿐 그것은 사이비에 다름 아니며 타락한 불교다. 정법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않고는 불교 본래의 기능을 수행해 내기란 어렵다. 정법이란 비법(非法)이 아니란 뜻이다. 정법은 모든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부처님의 뜻에 따른 진리의 교시다. 따라서 정법이 신앙의 수단이 되고 믿음의 방편이 돼야 한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기복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이의 극복방안에 대해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종교는 이 같은 인간의 바람과 염원을 실현시키려는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 설법을 하신 사성제와 팔정도의 내용도 바로 괴로움을 끊고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길을 밝히신 것이다.

사성제란 괴로움의 현실을 알고(苦諦)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야 하며(集諦) 괴로움이 멸한 상태를 증득해야 하고(滅諦) 괴로움을 멸하는 도를 닦아야 한다(道諦)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중생들이 영원한 행복을 이루려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 같은 행복의 길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자들이 지나치게 기복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복은 앞서도 말했지만 그 어떤 초월적 신에 의지해 행복을 갈구하는 행위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른 종교와는 입장을 달리 취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신의론(神意論)에 의지하는 여타의 종교에서나 있을 법한 기복신앙이 지혜와 이성을 앞세우는 불교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일부 기복신앙 옹호론자들은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도 기복신앙은 있었다’거나 다른 나라에도 기복신앙이 있으므로 한국불교의 기복현상도 나무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현상의 반영이지 불교가 그것을 용인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 어디에도 기복을 권장하는 가르침이 없다면 이런 주장들은 옳지 않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복을 문제삼는 데 대해 한국불교 안에 있으면서 한국불교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그 수준을 의심케 한다. “한국불교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문제 있는 한국불교 내부에서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고 초기불교 지상론을 편다면 그 행위는 과연 옳은 것인가? 비겁함이고 이율배반이다.

그들은 응당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불교 내에서 한국불교 때문에 누리고 있는 알량한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19)거나 기복을 비판하는 이들을 ‘몬스터’(괴물을 말함)로 지칭하며 “기복을 타도하려고 주장하려거든 기복불교로부터 오는 일체의 혜택에서 벗어나는 자세를 꼭 보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몬스터’라는 소리가 듣고 싶지 않다면.”20) 등 상식 이하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문제는 누가 지적해야 하는가? 이교도들이 해야 하는가? 다른 외국 사람들이 지적해야 하는가? 이들의 주장은 이교도가 하면 괜찮고 불교인이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인지 묻고 싶다.

또 ‘혜택받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까지 곁들이고 있는데 이 충고의 저의가 비판론을 재갈 물리고 기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불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 치졸한 논리는 마치 개발독재시대의 경제적 성장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그때의 문제점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옹비론을 지켜보며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나 정법의 수레바퀴를 바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제2·제3의 만해 스님이나 암베드카르 같은 인물들이 계속 배출돼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정법의 당간이 바로 서느냐 이대로 비법이 횡행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서다. 거듭 강조하건대 정법으로의 회귀는 이 시대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무다. ■

김종만
대전대학교 국문과 졸업. 〈불교신문〉 취재편집차장을 거쳐 〈법보신문〉 편집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月刊 佛陀〉 대표로 있다. 논문으로 〈오도송(悟道頌)에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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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8

Sooho Jang 불교

 



Sooho Jang



9 Apr · Public · [ 불교 불만 ] 

불교도이지만 불교도는 타종교와 달리 교조의 말씀에도 얼마든지 이의를 가질 수 있다. 한국에 이상구 박사 등의 고기는 나쁘다 건강법이 수 십년을 지배했고 황수관 박사는 저염식을 주장했는데 최근 몇 년 해외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필육식, 저탄수화물, 저당류 건강법이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아는 승려분들 중에도 매일 보신탕 먹는 게 아닌가 오해받는 분들이 있다. 이게 사실 고기를 못 먹어 곡식만 먹어 찐 살인데 말이다. 이로서 불교의 불살생 교리는 완패인가? 그렇다면 다른 교리인들 완전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생명을 죽여 잡아먹어야 하는 숙명을 거부하고 자손번식까지 금한 불교 성자들의 뜻은 존중한다. 이 세계의 질서를 어느 새디스트가 만들었는지 짜증이 밀려온다.


Sooho Jang
13 Jun · Public · [ 잔혹한 조선인들에게 불교 마인드가 있었을까? ] 

조선은 유교국가로 유교화되었다고들 알고 있으나 그것은 국가시책이었을 뿐이고 사대부라도 부녀자, 평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었다. 이는 조선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불교가 뭔가? 윤회전생을 믿는 쪽이 다수파인 종교다. 다수파 불교는 만물이 억겁의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동안 서로서로 부모자식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조선인은 그 누구보다 약자와 동물에게 잔혹한 민족이다. 자비는 개뿔... 아마 승려들을 제외하고 불교의 자비를 이해한 조선인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직 부처라는 신에게 복을 빌었던 것이지

조선인의 잔혹함의 최고봉은 유교의 '인'으로 무장했다는 양반 지배계급이다. 그들은 첩이 낳은 자식들도 인지를 거부하고 노비로 팔아넘긴 희대의 냉혈한들이었다. 퇴계 이황, 황희 정승 같은 이들은 노비의 수가 1천~3천 명에 달했다. 반면 기독교는 애시당초 동물을 영혼이 없는 존재라 하고 천국에 들지 못한다고 했다. 개신교는 더욱 그런 사상을 통일했다. 그러나... 그들이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며 함께 지내는 모습은 종교사상이 생활윤리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는 종교, 윤리는 윤리 얼마든지 따로 놀 수 있나 보다.


Sooho Jang
10 hrs · Public · 부태 불교도 캡장의 지멋대로 불교 이야기 4화 

반야심경 초간단 해설 
반야심경이 엄청난 진리와 Matrix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믿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배운 것은 조금 다르다. "사리자야(제자 중 한 사람) 내가 최상의 신묘한 주문을 알려주지. 어쩌고 저쩌고 중얼중얼, 암튼 이 주문을 외우면 모든 괴로움에서 정신승리할 수 있어 아재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사바하" 그러니까 앞의 해설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고 뒤의 산스크리트어 주술이 핵심인 것이다. 
실제로 원효대사, 일본 밀교 역시 주문만 열심히 외우는 수행을 강조하는데 대승불교를 모르는 분들은 경전 해설을 하고 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이 메인인줄 오해한다. 

그러면 두 번째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럼 대승불교의 경전 은 전부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것일까? 정확한 자료는 인도의 불전과 중국불전들을 비교대조해야 하나 스리랑카 출신 승려를 직접 인터뷰한 결과 다른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물론 인도에 남아있는 초기불전들 조차 석가모니의 실제 설법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차결집이라고 하는 불전정리가 석가모니 사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종교란 것이 대체로 그렇다. 기독교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학설도 있을 정도니까 생년미확인인 석가모니는 조금 나은 편이다.
Sooho Jang
24 May · Public · [ 불교 방등경의 간단 요약 ] 

매를 맞으면 정신을 차린다. 매를 안 맞으면 시건방이 생겨 정신을 못 차린다. 매 맞기 전에 잘 좀 하면 안되겠니?


Sooho Jang
26 Dec 2019 · Public · [ 캡장아버지 불경해설: 불교 방등경과 고려연방제 적화통일 ] 

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느니 = 공산독재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산독재가 없으면 자유에 감사하지 못하는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느니 소련곰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도 타락해 가는 남조선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감사함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석가세존의 깊은 뜻이 아닐까?

Sooho Jang
23 Jan · Public · 해외유학 중이신 용운 스님 불교 용어 해설
 [무아(無我)는 과연 맞는 번역인가?] 

빠알리어 단어인 anattā에 대한 번역 중에 무아(無我)가 맞느냐 비아(非我)가 맞느냐라는 질문을 최근 한 스님께 받았습니다. 일단 제가 속한 상좌부불교권에서는 빠알리어 단어 그 자체를 선호하구요. 굳이 영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하자면 비아(not-self)보다는 무아(non-self)가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무아는 빠알리어로 anattā, 산스끄리뜨어로 anātman라고 불리는데요. 영어권에서 불경이 번역될 때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무아인 non-self가 선호되고 있습니다. 비아는 not-self로 번역이 되는데요. 무아보다는 온전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어려운 자료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아래 anattā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를 보면 피터 하베이 교수가 인용되어 왜 무아가 비아보다 좋은 번역인지 설명되고 있습니다. "불교와 연관된 영문학에서는, 아나따(anattā)는 비아로 번역이 된다, 그러나 이 번역은 온전하지 못한 의미를 표현한다고 피터 하베이는 주장한다; 더 완전한 번역으로는 무아가 있는데 왜냐하면 일찍이 아나따 교리는 아(我)라는 게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아에 대한 믿음은 고(苦)의 원천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In Buddhism-related English literature, Anattā is rendered as "not-Self", but this translation expresses an incomplete meaning, states Peter Harvey; a more complete rendering is "non-Self" because from its earliest days, Anattā doctrine denies that there is anything called a 'Self' in any person or anything else, and that a belief in 'Self' is a source of Dukkha (suffering, pain, unsatisfactoriness). 

제 생각으로는 무아든 비아든 의미를 통용하는데는 큰 차이가 없으나 무아는 틀렸고, 비아는 맞다는 다른 분들의 주장에는 수긍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일전 단톡 공부방에서 삼귀의 번역에 대한 논쟁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스님들은 기존 삼귀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면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가 아닌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빠알리 불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빠알리어로 승가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광범위한 의미의) 일반 스님들'과 '4향 4과 이상의 성도한 스님들'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빠알리 불교에서 삼귀의를 할 때는 '4향 4과 이상의 성도한 스님들' 즉 '거룩한 스님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삼귀의 번역에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en.wikipedia.org
Anatta - Wikipedia

Sooho Jang
24 Dec 2019 · Public ·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불교 교리가 증명되는가 했더니... 고통받는 자와 쾌락을 향유하는 자가 별개임...
헬조선 늬우스's post
헬의 필러

Sooho Jang
12 Apr · Public · 한국 불교 고승의 말씀중 제가 가장 감탄한 문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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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Jang 이민] 
20. 법정스님 법문, 
진실없는 자에게 진실하면 벌을 받는다 -그렇군요. 저는 한국정부+국민80%와 연을 끊겠나이다


Sooho Jang
9 Apr · Public · 연쇄교육 불교 투어 부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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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팔이의 아르카디아 : 네이버 블로그


Sooho Jang
9 Nov 2019 · Public · [ 연쇄교육 일본어 회원권독: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슬람... 신도의 승리 ] 일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졌거나 아시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제외하고 여행이라도 몇 번 와본 외국인들, 비지니스로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 아시아를 연구하고 아시아와 교류하는 사람들. 거의 이구동성으로 가장 살고 싶어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는 해외진출 영어강사들의 희망근무지만 봐도 그렇다. 그 유명한 로버트 할리등 선교사들도 원래 파견 희망지는 일본이었다. 구소련 외교관들도 극찬한 사회주의(?) 국가 역시 일본이었다. 삶의 만족도, 인간에 대한 배려, 생명존중, 치안, 법치, 민생, 적절한 복지, 높은 교육수준에 인구 부양력으로 보면 5천만 이상 국가 중 일본을 능가할 국가는 많지 않다. 종교가 현세의 사람들에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평안을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고 전제하면 수많은 종교들 중 현재 승자는 일본 신도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부 한국팬들이 좋아하는 환빠식 설명 좀 보태자면 환국을 계승하여 삼족오를 숭배하는 나라는 일본일 것이다. 나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지만 연일 시끄럽게 싸우고 포교하고 전쟁하며 서로 잡아먹는 각국의 종교들을 보면 차라리 신도를 믿고 싶다. 외국인인 나조차 일본을 공부해 보면 경외심이 생기는데 자국민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들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도자이며 신관에 해당하는 천황의 존엄성을 저절로 우러러 보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물론 어떤 나라의 살인과 고문으로 최고존엄으로 불리는 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존엄이다.

Sooho Jang
8 Jul · Public · …얘기 절대로 안 하신다. 불교 방등경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나니"의 산 증인 같은 분임


Sooho Jang
17 Aug 2018 · Public · [불교- 가장 평화에 근접한 종교 혹은 사상] 얼마전에도 이스라엘의 중동정책을 지지하는 미국 개신교인을 만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였는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이 선량한 친구가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전쟁과 학살을 지지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 역사학자는 불교로 인한 종교전쟁은 한 건도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검증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느 것을 종교전쟁으로 볼 것인가라는 개념정리부터 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도가 주축이 되어 참전한 전쟁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도 똑같다고 말하지만 하나 하나 따져보면 종교전쟁과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소한 불교로 인한 종교전쟁은 다른 어떤 주류 종교보다 적었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도가 참전한 전쟁은 종교교리 보다는 경제적 목적, 민족갈등이 주된 요인이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이 사람이 보면 불교국가 일본과 유교국가 조선의 종교전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한 것도 아니고 개종을 강요하거나 타종교인에 대한 학살과는 무관한 것으로 종교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도 미일간의 종교전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세계대전 중 미개한 이교도와 성전을 한다고 생각한 것은 기독교인들 쪽이었다. 그들의 구호 "Ride with pilgrims."가 이를 증명한다.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일신 종교들은 그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자체로 같은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왔다. 나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종교가 소멸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불교마저도 생활철학으로 남아야 하지 신에 대한 숭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새로운 시대에 악의 축이다.
Sooho Jang
26 Jun 2019 · Public · 이런 건 사람 사는 세상이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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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린포체의 성추행···한국인 여성도 #미투(Me Too)


Sooho Jang
24 Mar · Public · [ 기독교에서 목회가 성직이라니? ] 내가 볼 때는 한량인데 신학과, 신대, 목사자격증으로 개척교회(근데 예배참석자는 거의 가족뿐)를 하는 오랜 친구들이 여럿 생각나서 쓰는 글이다. 즉, 그들의 전도활동에 의한 효과는 무에 가깝고 내가 매년 외국인 교회로 데려오는 사람이 훨씬 많은 상황이다. 나는 교회사를 알지 못하고 성경에서 본 것과 그들의 주장이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말하고 싶다. 예수: 채찍의 달인인 목수, 의술에도 능했다는 설이 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어부 마태: 세리 빌립 등 나머지: 확인된 바 없으나 랍비 같은 사제계급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예수 사후 사도 바울로였는데 전도 여행을 하면서도 천막직조 장인으로 스스로 고부가 가치의 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탁발과 동냥을 승려의 당연한 행위로 보는 불교, 브라만교의 대다수 종파와는 다르게 보인다. 또한 예수는 유대교의 사제계급을 그토록 부정하였는데 오늘날의 천주교, 개신교가 성직신분을 그대로 두는 것도 모자라 이를 신성시하며 다른 생산활동을 일체 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제계급을 만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다.


Sooho Jang
13 Apr · Public · …한문은 기본이고, 삼국지 원문과 불교 경전 일부까지 해석 가능한 나에게조차 너무 버거웠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진도를 나갈 때는 피눈물이 났다. 살아서 처음이자 마지막 보게 될 한자들이 한 페이지에서만 40~50개씩 쏟아졌다. 노자도덕경 해설을 두고 그 친구와 논하던 나는 처음에 공대가 뭔 한자를 알겠나 생각했는데 도덕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 놀랐고 내 한문2 교과서를 꺼내 친구를 시험에 들게 했다. 아니,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탁월하게 해석했고 과거 같은 과목을 수강하고 높은 학점을 받았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나는 납작 엎드렸다. 이 친구의 능력이 단순히 개인의 천재성이나 대학교에서 열심히 해서 어느날 갑자기 해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식 낳으면 큰일 날 사람들이다. 내 집안도 비교적 높은 수준의 공부법 노하우와 학구적인 분위기를 겨우 이어온 집안인데 그 친구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책 한 자 보지 않는 다수의 서민, 졸부 집안은 어떠한가? 올 해로 사교육업 24년차이다. 아직도 학교 공교육, 메이저 교육 방송이 시킨 대로 암기하는 것 외에는 공부법과 원리이해가 무엇인지 감도 못잡는 원시사회에서 공부 얘기를 하자니 내 자신이 비참하다. 글자가 없어 수 백권의 경전을 암송했던 드루이드 사제들이 웃고갈 교육문화에서 열심히만 해서 머하노?
Sooho Jang
29 Jan · Public · …아기짓하는 어른들도 많지 않은가? 불교 경전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를 읽어보고 느낀 개인적 감상은 타종교의 표현을 빌리면 왕중왕, 어른 중의 어른이 부처, 보살, 수행자가 아닌가 한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욕구들을 초월하는 수행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그로인해 발생하는 고통을 바라보며 돌봐 준다. 다만, 여기서 돌봐준다는 것이 무한정 그 욕구충족을 거들고 채워주는 설탕 같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도움을 끊고 춥고 배고프게 만들며 심신을 괴롭게 하기도 할 것이다. 한편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어른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강제적으로 이런 기회를 가지는 경우들이 있는데 바로 부모가 되는 경험이 아닌가 한다.


Sooho Jang
30 Oct 2019 · Public · …공유하지는 않는다. 

3. 티벳 불교 텁탄 초결 스님 1997년 기사보면 남편, 한국 종교들이 자식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이상하다라고 언급했다. 4. 도올 김용옥,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분인데, 차범근에게 이런 얘길했지. 경기전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 이게 원칙론이라 본다. 다만 차범근이나 운동선수, 감독, 코치 등의 시합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기도하는 거 정도는 이해하고 개인의 자유로 남겨두는 게 좋았다고 본다. 즉, 도올의 오지랖이라고 본다. 5. 속세의 목적으로 기도하는 거라고 해도 건강, 안전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그건 누가 누구와 대결해서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 호주인 성경공부 지도사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분은 잘라 말했다. 그런 기도는 한국적인 문화현상일 뿐이다. 호주 외에도 다른 영어권에서 그런 식의 기도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한국개신교의 그런 기도와 설교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7. 내가 속세에서 승리하게 하는 주님이라면 그는 결국 누구누구 죽게 해 주세요. 누구누구 망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에 응답하는 지역 토착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물질적 재화는 한정된 자원이므로 나의 속세의 승리는 곧 다른 이의 패배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나의 물질적 승리에 대한 기도는 결국 타인의 패배와 몰락을 염원하는 '저주'를 담은 '주술'이 된다. 8. 아예 이럴 꺼면 솔직하게 돈 따게 해주세요. 누구누구 벼락맞아 죽게 해주에쇼. 누구누구랑 섹X하게 해주세요. 기도를 하려무나. 공개 설교에서도 섹*하는 삶, 살해하는 삶, 적을 쳐죽이는 삶, 복권당첨되는 삶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정리하면 속세의 목적을 위해 신의 소환을 너무나 손쉽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나는 그들 신의 가벼움을 얘기하고 싶다. 자신들의 돈벌이와 이익, 출세를 위해 승리를 하게 해달라고 부르는 신은 고대전쟁에서 동네, 민족의 수호신 레벨이지 전지전능한 절대자, 온 우주의 창조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신을 모르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물질적 불이익을 주는 그 쪼잔함을 생각하면 결코 절대자라고 부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Sooho Jang
5 Feb 2019 · Public · [ 가상현실과 불교 ] 

현실이 누군가가 만든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을 이제야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매트릭스에서 소개되긴 했지만 우주적인 규모로 가상현실이라는 주장은 요즘에나 나온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미 그런 얘기를 했다. 나는 불교가 2500년을 앞서 그 진리를 알고 있었다고 종교적인 찬양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리고 아니고 간에 2500년 전에 불교가 무색성향미촉법, 무안이비설신의 등의 문구를 통하여 오관의 작용으로 세상을 인지한다는 발상이 가상현실 개념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부처를 신격화하는 이들에게는 거부감이 생길지 모르겠으나 이는 인간사유와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기대와 경탄, 그리고 희망을 준다.


Sooho Jang
28 Aug 2019 · Public · [ 캡장의 외국어산책- 예수천국 불신지옥 왜 죽음을 부르는 말인가? ]

 한국에서 수많은 모욕이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부모와 조상욕을 최악으로 치는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고 그냥 재수없게 생각하고 지나간다. 이것은 문화차이이기 이전에 다른 배경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한국인들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불교, 토속신앙 문화 DNA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지는 별도 칼럼에서 설명하겠는데 사후의 세계를 영원으로 인식하기 보다 윤회전생의 과정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곳, 그러니까 지옥에 가도 영원성으로 접근하지 않고 한시적으로 벌 받고 나오는 교도소 비슷하게 인식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다르다. 파스칼의 정리에 의하면 사후의 시간은 영원이므로 살아서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갖고 바르게 살며 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했다. 그런 서양인의 입장에서 Go to hell은 최악의 저주를 담은 모욕이 된다. 이것은 나바호 인디언의 '평생 DDR해라.'(평생 시집강가 못 갈 것이다), 한국의 부모욕을 포함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등의 한시적 저주를 훨씬 뛰어넘은 것으로 한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고통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최강의 저주가 된다. 영어권에서도 한국처럼 생식기와 성관계를 욕설에 집어넣는 것은 흔하고 what the hell are going on?같이 지옥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말이 농담으로 쓰이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보기에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말을 뱉은 자는 공공연한 모욕행위로 처벌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사람에게 물리적 테러를 가하는 것은 형법상 감경사유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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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ho Jang
26 Jun 2019 · Public · !
lungta.kr
좌탈입망 후 몸이 점점 줄어드는 '칠채화신'을 보인 티베트 불교 스님

Sooho Jang
24 Jul 2017 · Public · [현대물리학과 불교] 세상은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라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누가 만들었든 세상은 허상에 불과하고 내가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


Sooho Jang
1 Dec 2019 · Public · [ 연쇄교육 뒷북 공지 - 울산 다운동 외국인 교회 추수감사절 예배 및 만찬 가실 분 ] 시간: 금일 12시 장소: 댓글 혹은 문자 준비물: 각자 음식 혹은 10,000원 (내 주머니로 가는 거 아님) 유의사항: 전도목적 아님, 가족동반 가능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이 한 개도 없습니다. 올 해는 초대장 돌리지도 못했네요. 저는 개신교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 영어교, 일본어교 신자입니다. 점심 계획 없으신 분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시면 되겠습니다.


Sooho Jang
26 Aug 2019 · Public · …민족개조의 주인공이다 ] 불교 방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나니. 문재인을 너무들 과소평가한다. 나는 문재인이 이 나라를 친중세력에 넘기고 중공의 위성국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민족개혁의 시작이다. 이 나라의 썩을 대로 썩은 정신은 공산치하에서 죽도록 일하고 매맞고 착취당하고 배를 곯아보면 개조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가 좋은 것이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원래 물과 공기도 없어봐야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중공치하는 이 민족에게 새로운 힘을 심어줄 것이다. 문창극 서울대 교수가 그러지 않았나? 일제시대와 한국전쟁도 다 주님의 뜻이었다. (아버지 불교도) 원래 조선민족은 미리 대비하는 법이 없고 닥치면 하는 주의다. 즉흥과 임기응변 애들립의 민족. 꼭 매를 맞으면 그제서야 아픈 줄 안다. 그래서 역사도 온탕과 냉탕을 확실히 오가는 화끈한 민족이다. 이제 문통의 빅픽쳐가 보이는가? 그는 박정희, 전두환 보다 더 확실한 민족개조론자이며 개혁의 열쇠이다. 그는 5천만 국민을 중공이라는 삼청교육대로 보낼 지도자이다. 중국의 3대 명문대 북경대, 청화대, 삼청대! 이제 미국, 일본이라는 문명세계와의 교류가 곧 끝이 날 것이다. 중공과 소련치하에서 극기훈련 한 번 화끈하게 받아보자. 모두들 홧팅홧팅 !


Sooho Jang
23 Jan 2017 · Public · [불교계유감] 불교 스님들마저 탄핵반대 운동에 나서다니요? 한 두 분도 아니고. 불자로서 실망입니다.


Sooho Jang
25 Feb 2019 · Public · …작가님!!! 이쑤신은 유교 불교 이교도의 수괴에요. 고니시 유끼나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장군을 응원해야지 이 무슨 이단스러운 말씀이세요? 임진왜란은 영적 전쟁이라구요. · This content isn't available at the moment


Sooho Jang
7 Feb 2019 · Public · [ 기동전사 Z건담 속의 불교, 연쇄교육 대표 장수호 ]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를 소리대로 한자로 차음하여 '아함경'이라 하였다. 그 뜻은 '전승' 즉 부처의 말씀을 기록해 전래됐다는 것이다. 물론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는 이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으나 아-가마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에 일본에서도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던 아함경에 대하여 토미노 요시유키 역시 알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Sooho Jang
4 Nov 2019 · Public · …참피와 같이 끔찍하고 무섭다. 불교 수행에 뜻을 둔 분들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까?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욕망이라는 전차에 매달려 끌려다니는 것에 환멸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런 환멸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거나 타인들과 함께 욕구를 통제하거나 혹은 타인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그도 아니면 탐욕스런 인간의 욕구충족 행위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참피 같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들 자신도 참피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 속인들이 감히 속세를 떠나 수행자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가끔은 눈앞의 쾌락을 내려놓고 좀 더 큰 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Sooho Jang
21 Aug 2017 · Public · [불교의 변질]

조길태 인도사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인도인들에게는 세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 우파니샤드, 불교, 공산주의가 그것이며 인도인들 스스로 카스트제도에서 벗어날 기회를 차버렸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걸 읽고 나서 괜히 인도인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물론 불교의 브라만교화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카스트제도의 존속에 대하여 불교의 변질보다는 인도인들에게서 어떤 문제를 찾으려는 서술이 그 책에서는 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야 교수님 글을 보니 아...이게 인도인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자체 문제이고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합니다.더하여 초기불교 경전부터 시작해서 후대로 갈수록 수많은 힌두신들 위에 군림하는 석가모니불에 대한 묘사가 늘어납니다. 브라흐마(범천), 인드라(제석천) 등이 경배하는 왕중왕으로 나오는데 브라만교와 갈라섰는데 왜 굳이 그런 서술을 해야했나라고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수님을 글을 보니 힌두교화 되면서 힌두교와 경쟁해야 했던 불교의 자체모순에 기인한 것이구나!라는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Sooho Jang
2 Nov 2017 · Public · [한국개신교의 불교현상 해석 맞을까?]

1.우담바라는 전부 물잠자리 알이고 그런 건 없다. 2.채식을 하면 사리가 생긴다. 3.불교 만자가 나치철십자다


Sooho Jang
18 Jul 2018 · Public · …종교전쟁이라 부른다면 임진왜란은 불교 유교의 종교전쟁, 사상전쟁이 되는 것인가? 미얀마나 스리랑카, 인도에 대해 현지인들을 만나 조금 얘기만 들었을 뿐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 모르겠다. 다만 홍목사님의 공유게시물만 읽은 현재로서는 종교적인 요소가 개입된 민족분쟁이지 종교전쟁이라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마찬가지로 모든 종교가 똑같이 종교전쟁으로 발전할 위험성의 정도가 같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이번 건 로힝야족과 미얀마족은 아마도 조사를 해보면 서로가 피아식별을 하는 기준은 종교가 아닌 민족과 문화이며 결국 언어가 되지 않을까 한다. 만일 미얀마족에도 이슬람교도가 있고 로힝야 족 중에도 불교도가 있는데 이들을 허용하거나 살려둔다면 내 주장은 증명되는 것이다.


Sooho Jang
11 Jul 2013 · Public · 한국인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다!!! <기초노령연금 기사에 대한 어느분의 댓글> 솔직히 태어나는 선택권이 있다면 난 안 태어나고 싶다 사치하는것도 아닌데 혼자라도 월 200으로도 빠듯~~ 근데 뭔 결혼? 뭔 출산,육아? 내 몸뚱이 하나도 이 지옥에서 지켜내기가 힘들다 일체개고의 깨달음을 얻으신 듯 고통->진리->불교
Sooho Jang
27 Oct 2016 · Public · …되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불교 신자로 알고 있었는데 놀랍다.불교든 기독교든 뭐든 한국인의 의존적이고 나약한 정신상태에 의하여사이비화 되는 듯 하다. ... 더보기 http://blog.naver.com/neozion7/220847178986
blog.naver.com
[캡장뉴스] 192. 최태민 목사, 박근혜 첫 공식석상 KBS 보도영상 입수 (1970년대)

Sooho Jang
12 Sep 2018 · Public · [나는 이스라엘신을 믿느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 예전에 한국 개독교회에 갔는데 목사가 그랬다. 보세요 여러분 주님을 믿지 않는 나라들은 가난, 공산주의, 전염병이라는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보세요. 주님을 믿는 나라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내가 물었다. 목사님 일본은요? .... 좌중 침묵....기독교, 이슬람 등 세상에 종교가 많고 많지만 결국 일본 신불(신도+불교)의 승리가 아닌가? 나는 일본인들의 물질적 풍요라는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일본인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주님의 징벌이라 비하하지는 않는다. 인격적으로도 그들은 여느 한국의 개독보다 우월하다. 제국주의 학살? 훗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 검색이나 하고 비교할 걸 비교해라.

Sooho Jang
9 Apr · Public · 의사선생님 진리의 말씀 공유합니다. 앞으로 영적(?) 지도자는 의사선생님들이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지식의 정석's post
공포의 채식주의자들 출처 : MBC 다큐스페셜 채식의 함정
공포의 채식주의자들

출처 : MBC 다큐스페셜 채식의 함정

Sooho Jang
1 Aug · Public · 윤회를 부정하는 불교도 상대적으로 일반적이지 못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던 필자는 어릴 때는 다음생을 사는 꿈을 꾸고 행복해하다 잠을 깨고 엉엉 울었던 적이 있다. 그런 류의 꿈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그 정도로 윤회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대신 꿈에서 천국이나 예수를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호킹박사의 내세부정론을 듣고 의문을 갖다가 올해 두 차례 대수술받고 최장 18시간 마취를 경험했는데 말그대로 꿈 없는잠이었고 완전한 블랙아웃을 경험했다. 윤회는 소설일지도 모른다...생각하니 이제 하루하루가 천금보다 귀하게 느껴진다.

Sooho Jang
26 Oct 2019 · Public · [ 종교인들이 방금 집에 왔다감 ] 소위 말하는 전도사 분들인데, 앞으로 조건을 내걸고 전도하는 얘기를 들어야 겠다. "당신들은 특정종교 전도사인데 나는 외국어 공부법을 전도하는 사람이오. 내 외국어 컨텐츠를 유료로 이용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의 외국어 공부법을 담은 자료를 들어보거나 읽어보지 않을 거라면 나도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부처님의 용화세계 같은 내용들은 듣지 않겠소. 나 역시도 무료로 전도자료를 제공할 용의가 있는데 왜 나만 당신들 얘기를 들어야 되고 당신들은 내 얘기를 듣지 않는 것이오? 나의 大東亜共英語圏、大東亜共日語圏사상, 영어교 일본어교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을 거면 썩 나가시오. 나의 공부법은 내게는 신념이고 사상, 종교란 말이오."
Sooho Jang
16 Feb · Public · [ 누구나 어릴 때는 새가슴이지 않았을까? ] 새가슴 진단표 1. 여성에게 말걸기가 어렵다 2. 여성에게 구애가 거절당하면 엄마에게 버림받은 느낌이다. 3. 주로 SNS에서 여자를 찾는다 4. 세상 여자들이 나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5. 겉으론 태연하고 점잖은 척 한다. 6. 운동 안하거나 못한다. 7. 운동 못한다는 소리들을까봐 더 못한다. 8. 자신의 학력, 경력, 직장 자주 부풀린다. 새가슴들은 여기 거의 다 해당될 거다. 엄청 많은데... 나중에 생각나면 추가... 어려서 부터 패기만만한 남성은 별로 없다. 자라면서 얻어터지며 배우는 거지. 그런데 성장의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애써 멀리한 사람들도 있다. 추가 항목 9. 취미는 게임, 온라인 영상매체 말고 소셜한 것이 없음 10. 틀렸다 잘못했다는 지적받거나 반대에 부딪히면 표출하건 안하건 몹시 떨린다.

Sooho Jang
8 Nov 2018 · Public · [ 개독교 목사들이 손쉽게 여성들에게 빤쓰를 벗게 한 힘의 근원 ] 

내가 미국 골수 개신교 백인 여성과 교제할 때였다. 그 여성이 물었다. "너 주님이 왜 여성을 창조한 지 아니?" 나도 성경공부좀 했지.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남성, 그러니까 남편을 즐겁게 해주라고? 맞어?" "그래 맞아!!!" 성경해석에는 여러가지 관점이 있는데 무오설, 유오설, 문구그대로 축자적으로 해석, 통섭적으로 맥락을 이해하자는 것등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다수교회와 미국남부 교회 다수는 무오설+축자적 성경해석이 대세다. 이해가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한 치의 오류도 없고 그리고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야 하며 시대적, 문화적 이해, 비유적 표현에 따른 다양한 해석은 모두 거부된다. 그냥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들이 한국에서는 주류인지 모르겠으나 전세계적으로는 글쎄다. 누가 다수교파냐 논의는 그들의 몫이니 알아서들 해라. 보통 기독교 = 개독 함부로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독교 여러 교파들 중 무오설+축자적 해석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외 다른 교파나 성경이해를 부정하는 기독교인들로 개독을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그 여성이 참으로 무섭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아마 이런 여성들이 목사가 성경해석에 신도는 빤쓰를 벗어야 한다고 해괴한 말을 하면 빤쓰를 내릴 것이고 돈 천만원 갖고 와야 된다고 했다면 전재산 갖다 바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0년전에도, 전전 여자친구가 목사에게 2천만원을 갖다 바쳤고 그 목사는 많은 여성신도를 부터 걷은 돈 수억을 들고 날랐다. 나는 국적을 초월해 이 두 여성이 똑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뭔가 낌새를 차렸는지 몇 일 뒤 그 여성이 내게 물었다. "성경을 얼마나 믿니?"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고 나는 위에 적은대로 털어 놓았고 그 여성은 자신의 남편은 자신과 신앙이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린 그렇게 합의깨짐을 택했다. 한국에서도 수없이 많은 개독을 만났지만 미국 개독도 참 답이 없구나 생각했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유교와 성리학을 비난하고 공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허나 나는 유교나 성리학 보다 개독교가 더 고리타분하고 가부장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작금의 목사들의 성착취 전횡이 가능했던 것도 기독교 혹은 개독교가 가진 강력한 가부장제 이념이 여성들에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떤 유교나 성리학적 마인드도 그토록 여성들의 빤쓰를 쉽게 벗기지 못한다. 그것은 개독교만이 할 수 있는 신의 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 성리학, 공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교회 그것도 개독교회를 신봉하는 것은 자기모순이고 서양문물, 백인들의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Sooho Jang
20 Jul 2019 · Public ·

 [ 좌파 골수 반일주의 & 일본동맹파 이승만 지지자의 공통분모는 기독교 ] 

부제: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은 부분적으로 유효 1. 서 어제 나는 정치관심자가 아니며 한국에 지지정당이 없으며 단순히 일본문화를 좋아한다고 천명하자 문화전문 페친분들의 신청이 있었다. 또한 나는 일본문화 연구자이며 일본전문 관광통역사 국가자격을 보유하고 관광통역 업체를 운영중임을 추가적으로 말씀드린다. 사실 나의 기업과 현재 직업도 돈벌이 보다는 철저히 취미와 학술의 연장임을 강조드리는 바이다. 내가 만일 돈을 더 벌려고 했다면 이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파든 좌파든 줄을 서서 친한 척 했겠지. 그런데 돈도 많은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야 되나? 나는 이승만이나 기독교, 혹은 문재인, 반일주의 빨면서 장사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따라서 일본문화, 일본어, 영어 등에 공유점이 없는 단순한 국내정치러 페친들과는 거리를 두고자 한다. 어차피 갈 길이 다른 분들과 자꾸 얘기하는 것은 서로 스트레스만 유발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2. 본1 한국우파와 기독교의 관계 최근 내가 좀 헷갈린 분들이 우파의 친일스탠스에 계신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들도 거리를 두고자 한다. 여기서 새뮤얼 헌팅턴을 언급하고 싶다. 이 분은 문명의 충돌은 거의 모든 국가간의 갈등을 문명, 그것도 종교에 기반한 문명 충돌로 이해했다. 경제적 이익, 정치사상의 영향력을 상당히 축소시켜서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작금의 상황을 보면 이것이 부분적으로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파의 어떤 분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박정희, 박근혜, 태극기 부대를 목청높이 지지하며 반공을 외치는 것을 보면 우선 들어가서 종교를 본다. 또한 좌파의 어떤 분이 반일스탠스를 취하는 것을 보면 역시 들어가서 그의 종교를 본다. 일단 우파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기독교다. 여기에는 천주교, 개신교, 심지어는 통일교까지 포함된다. 히틀러의 3K를 아시는가? 아이(Kinder) 교회(Kirche) 부엌(K¨uche)이고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것도 나치독일의 기독교였다. 이하 인용글 교회가 예수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지요.. (교회목사와 신자들에 해당) 정작 이 나라의 교회에는 예수조차 없지요. 소유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유럽의 교회는 특히 2차대전 이후 사람들이 가지 않게 됩니다. 독일의 경우 대표적인데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알게 된 후 더이상 교회를. 교회의 목사들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는 가진자, 권력자들의 친구가 아니었고 오히려 소유하지 못한자들의 벗이었습니다. 마굿간의 출생부터 십자가위에서 죽을때까지 일관되게... -이상 신상*님의 글 인용- 편집자 주석 * 신상*님은 한국오대 독어독문 전공, 독일 프라이부르크 석사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다년간 생활하신 개신교인임 * 예수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그리스 정교)만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종파에서 예수를 지지하였고 현재도 이슬람교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다. * 또한 기독교는 예수가 만든 것이 아니며 성경은 예수가 쓰지 않았다. * 현재의 기독교는 예수 사후 만들어진 수많은 종파 중 몇 개에 불과하다. * 예수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종교를 초월해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다. 나치 독일 역시 유대교를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로 보았고 적그리스도와 비슷하게 취급하였다.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예수를 처형한 유대인들,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유다와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코미디였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우파의 모든 기독교인이 종교적인 이유로 반중, 반공, 친일 스탠스를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80% 이상의 사람이 종교적인 이유를 정치지지에 대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이슬람의 신정국가 마인드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공산주의, 중국식 사회주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우월성 때문에 현 체제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념과 체제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고 역시 종교적인 이유로 반공과 반중을 외치는데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라 본다. 공산당이 인민재판을 즐긴다면 기독교 신정국가와 종교에 기반한 우익집단은 종교재판으로 사람을 학살한다. 실제로 한국의 개신교집단은 이승만에게 충성서약을 하기위해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갖은 학살에 앞장섰는데 이것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성격이 비슷하다. 3. 본2 반일주의와 기독교의 관계 반대로 반일스탠스를 취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반일이라 함은 불매운동에 참가하는 분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팔이 안으로 굽고 일본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가진 분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소위 엘리트 좌파, 골수 반일주의 스탠스는 역시 종교와 얽힌 경우가 많다. 현재 한국은 좌파가 반일스탠스를 취하는 상황이지만 사실 한국의 반일주의는 좌우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우파정당 자한당마저 반일이다. 왜 골수반일주의자들이 기독교가 많을까? 기본적으로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은 기독교인구가 1%에 불과한 일본을 잡귀와 미신, 적그리스도의 나라로 가르치며 대다수 교인들이 여기에 세뇌되어 있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 역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내가 좀 의외였던 것은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도 반일세뇌를 하는가 궁금해진 것 뿐이다. 어느 경우든 천주교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통일교든 이들은 서양종교를 받아들이다 보니 중국문화건 일본문화건 관심이 없고 대체로 잘 모른다. 아마 지금까지 일본문화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 혹은 유사기독교인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4. 결론 - 반일파이든 일본동맹(친일스탠스)파 이든 핵심은 종교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현재 반일을 외치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동맹(친일 스탠스)을 외치는 사람들은 일본문화 연구가인 내 입장에서는 한 부류이다. 1) 대체로 기독교 혹은 유사 기독교이다. 2) 일본어, 일본문화, 일본인, 일본사회에 관심이 없다. 왜냐 이들에게 있어 일본은 전국민적으로 이교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일본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로 결코 일본과의 건설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민간차원에서 일본을 알고 연구하고 교류하는 사람들인데 아마도 기독교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걸 보면 여전히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한국에서 유효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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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Jang 세계사] 21.예수=/=교회, 유럽인들은 교회의 나치독일 부역이후 교회 안 감 (크리스마스 특집, 훈*님 댓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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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고'





김원기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고'
tmSpo3nuso Jnulieyrhedc ·



예전에 이런 글을 썼었다고. 불교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 깨작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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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고'라는 얘기를 페친님의 글에서 읽은 김에. 

물론 '윤회라는 게 존재한다고 하면/하더라도'라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인데, 이 얘기는 모종의 이유로 내게는 매우 친숙한 편이다. 자주 언급하던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것도 카르마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행으로는 택도 없는 것이다.

물론 불교적 세계관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게 얼마나 어렵고 드문 것인지 알 수 있다. 아시겠지만 불교의 세계는 시간적 스케일이 매우 크다. 어지간한 요소들을 고대 브라만 종교에서 받아들여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 그 정도의 스케일이 되면 아무리 낮은 확률의 사건이라도 충분히 많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큰 수의 법칙). 그러므로 대충 인간이 탄생해 살아온 시기를 100만 년 정도의 '작은' 규모로 파악하는 진짜 역사말고 '겁(kalpa)' 단위로 시간을 파악하는 불교적 세계관에서라면 억겁의 세월쯤 지나면 부처가 무진장 탄생해야 정상이 아닐까. 

깨달음을 통해 카르마를 소멸시키고 부처가 되는 것은 비가역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어지간한 것들은 다 순환적이다. 따라서 아무리 무한겁의 시간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탄생한 부처들은 누적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숫자는 매우 적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겠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소망인지 알 수가 있다. 사실 냉정하게 따져서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에 속아서 수행 같은 걸 하는 게 바보다. 100까지의 숫자 중에서 6개 숫자를 뽑는 로또에 당첨되겠다고 전 재산 바치는 것보다 더 허망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당하게 선업과 악업을 쌓는 '카르마 관리' 정도가 우리 중하근기들이 선택하기에 적절한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왠지 허망하잖아. 부처 한 번 되보겠다는 꿈을 꿀 수 없다니. 그래서인지 인도에서 '스승'들이 만들어서 전해준다는 각종 '설화'를 보면 이런 현실을 도외시하고 허황된 꿈을 꾸도록 부추기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비슈누가 시바랑 같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스승'인 척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척보기에도 하찮고 비루해 보이는 거렁뱅이가 와서 물었다. "저 같은 것도 몇 번의 생을 거치면 깨달을 수 있는 희망이 있나요?" 그러자 비슈누가 "당연하지. 좀 오래 걸리겠지만 원칙적으로는 너도 할 수 있어. 희망을 버리지 마."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 거렁뱅이가 기쁨의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그 순간 카르마를 소멸시키고 신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시바가 비슈누에게 물었다. "아무리 불쌍해 보여도, 그런 축복을 해주다니, 넘 한 거 아닌가요?" 비슈누가 대답했단다. "난 암것도 한 거 없어. 희망이 없지 않다는 말에 기쁨이 넘쳐 지 혼자 초월해버린 거라고." 그러자 시바가 오오 하고 감탄했다. 축캐는 따로 있었네.
불교만 이렇지도 않다. 초기 기독교 사막의 교부들도 이런 뻥카를 많이 쳤다. "원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신성의 크기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원해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았다만. 그러니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어떤 고생을 했을지 상상하지 말자.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나.
물론 이런 길고 장황한 이야기의 교훈은, 통계적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부처가 되거나 '해가 뜨고 질 시간 동안 신성의 크기에 도달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런 낮은 확률의 사건이 우리 생에 지구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것조차도 기적인데 우리가 그렇게 되겠다고 마음 먹는 건 말도 안 된다.
결론 : 어차피 다음 생은 축생일 확률이 높습니다. 포기하세요. 그나마 축생을 거쳐야 다다음 생이 편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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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전생에 얼마나 해먹은 게 많아서 현생에 이 고생인가 나는.
Insu Bae, 希修 and 2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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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습니다. 저도 그저 '카르마 관리' 정도가 목표예요. 그런데.. 100년마다 한 번씩 숨 쉬는 눈 먼 거북이가 숨쉬기 위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는데, 때마침 그 물에 떠가는 통나무 조각에 구멍이 나 있어 그 구멍을 통과하여 거북이 머리가 쏙! 나올 확률. 31개의 윤회 차원들 중 맨아래에서부터 5번째밖에 안 되는 인간계에 태어나는 것조차 이 확률만큼 드문 일이라고 하니.. 그래서 이 발버둥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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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르마 관리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사이트 소개. http://kabc.dongguk.edu/ 동국대 한글불교 디지털 라이브러리
    메인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KABC.DONGGUK.EDU
    메인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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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참, 우주의 윤회를 다 통틀어서도 부처 (스스로 길을 찾아 해탈한 사람)의 숫자는 여태 한 자릿수라고 합니다만, 아라한 (부처가 남긴 가르침을 고대로 replicate하여 해탈한 사람)은 초기경전에 종종 나오죠. 뭐 그래도 여전히 언감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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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pophthegmata Patrum으로 알려진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일찍부터 수집, 번역되며 가톨릭 전승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는데, 한국에는 펠라지우스와 요하네스(뻬라지오와 요한)의 판본을 번역한 것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베네딕타 워드 수녀의 알파벳 순 모음집을 번역한 게 있다. 전자는 워낙 오래 전에 본 거라 정확한 저본을 모르겠고, 후자는 영어본만 갖고 있어서 번역본이 어떤지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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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차피 아라한 정도든 심지어 가장 낮은 단계의 해탈이든 결국 또 전생의 근기 따라서 성취되는것이므로 안될거야 우린. 될놈될 안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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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도 자신의 카르마를 제대로 안다고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상근기나 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냥 안 된다고 단언하며 오만 부리시면 안 됩니다. 위악은 나쁜 카르마예요, 토닥토닥. 착하게 사세요, 보살님. (후다다다다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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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기
       흑흑...(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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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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