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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퀘이커 추천받은 책들


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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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천받은 책들 중에는 아래와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1. 함석헌전집 15:말씀/퀘이커300년
함석헌 역 | 한길사 | 1986

2.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성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 현대의 선과 퀘이커 신앙(삼민신서 26)
함석헌 | 삼민사 | 1985.11.01

4. 조지 폭스의 일기
조지 폭스 | 문효미 역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2001

5.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김영태 | 인간사랑 | 200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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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 김성수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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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서울모임 자유게시판입니다.

와단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첨부화일1 : 김성수-한국기독교사에서_퀘이커주의와_함.hwp (62464 Bytes)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 성 수*


1. 머리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
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1. 머리말

함석헌은 한국기독교가 제사적인 면에서 벗어나 한국사회의 윤리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종교의 세계는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도덕과 사회정의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지닌 종교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퀘이커주의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함께 했다. 우리는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였고, 월간〈씨의 소리〉를 창간하였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이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1624~1691)는 인간 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 약자를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할 때,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하는 작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국내 학계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1994년 영국 에섹스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함석헌의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에 대한 이해〉(“Sok Hon Ham'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가 최초의 함석헌과 퀘이커주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이다. 이어서 1998년 영국 쉐필드 대학교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유산에 관한 연구 : 20세기 한국 씨알의 소리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An Examination of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 Hon: Voice of the People and Pioneer of Religious Pluralism in Korea”)라는 논문에서 역시 부분적으로 퀘이커 함석헌에 관한 연구를 다뤘다.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최근 논문으로는 2004년 영국 버밍엄-선더랜드 대학교 정지석의 박사학위 논문〈퀘이커 평화증언,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국통일신학〉(Quaker Peace Testimony, Ham Sok Hon's Ideas of Peace and Korean Reunification Theology)이 있다. 국내에서는 퀘이커주의에 대한 1차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에 관한 연구가 그동안 부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지석의 논문은 함석헌의 평화사상과 한반도의 통일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 필자의 석사학위 논문은 도가사상과 퀘이커주의를 비교 분석 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총괄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선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사상이 한국기독교사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평가함으로써, 위에 언급한 논문들과의 차별성을 두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미 역사에 미친 주요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 연구는 현재 퀘이커주의에 관한 연구가 국내학계에 극도로 빈약한 형편임을 고려할 때 그 학문적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에 ‘조직기피증’ 성향의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할 것이다.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퀘이커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심을 사회적 행동으로 표현하여야 한다.……삶의 일부만이 아닌 전체가 거룩하고, 온통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절대자의 사랑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주의는 개신교 신앙에 속한다. 서구의 경우에 각 퀘이커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는 편이다. 현재 영국 퀘이커회는 세계교회연합회와 영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다. 1997년 영국교회연합회는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유니테리언회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입장 밝히기를 꺼려하는 퀘이커회는 기꺼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세계에는 약 303,858명의 퀘이커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미국 103,379명)에 약 155,000명, 아프리카 대륙(케냐 104,500명)에 약 122,000명, 유럽(영국 17,934명)에 약 20,500명, 아시아 대륙(한국 10여 명)에 약 4,592명, 오세아니아에 약 1,766명 정도가 있다. 숫자 면에서는 퀘이커교가 단연 소수 종파임을 알 수 있다.
평등사상의 강조로 인해 목회자의 지도 없이 혼자서 성경공부나 기타 연구를 해야 하는 현대 퀘이커는 다수를 위한 종교보다는 소수 엘리트 종파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양적 성장과 질적 향상의 문제는 앞으로도 퀘이커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한국 퀘이커는 1958년 처음 예배모임을 가진 이래 약 반세기가 다가오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약 1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한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 아니다. 아울러 아직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함석헌에 대해서도 몇몇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호의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기독교계와 사학계로부터 함석헌은 아직 냉대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지 폭스의 사상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즉 퀘이커회)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폭스는 영국에서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그의《일지》는 1694년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의《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내면의 빛(inner light, inspiration 혹은 holy spirit),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
퀘이커들은《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성령)이《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개신교가 성서의 권위를 중요시한 반면, 퀘이커는 성령의 권위를 역설했다. 이 내면의 빛의 신앙은《신약성경》〈요한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참 빛은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인간에게 빛을 준다.” “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자는 누구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내면의 빛과 자라나는 종교

퀘이커주의에서 생명과 진리의 원천은 각 사람의 내면의 빛, 즉 마음속 그리스도다. 17세기 영국 퀘이커들은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종교에는 영구불변한 종교와 늘 새롭게 변하는 종교가 있고 이 둘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것이 퀘이커주의다. 퀘이커들은 성경과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존중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고 책임적일 수 있는 능력이 각 사람 안에 존재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은 성경에 씌어진 문자를 그대로 믿기보다는 그 내용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초창기 퀘이커들이 정규 교육과 성직자 계급을 경시한 결과, 종종 신학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퀘이커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초창기 퀘이커들에게 대학 진학의 길이 제약된 것도 퀘이커들이 대학교에서 ‘퀘이커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보다는 ‘삶 속에서 퀘이커주의를 체현화’시키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퀘이커신학의 부재 탓이건 혹은 퀘이커주의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꺼려하는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누구도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퀘이커교의 공식대변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각 퀘이커는 단지 자신이 이해하는 퀘이커주의가 무엇인가를 개인적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2) 성속이 하나

퀘이커들은 인간사의 모든 일에는 성속에 관계없이 절대자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퀘이커주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전체성이다.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어떤 것도 전체라는 영역에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퀘이커들에겐 성속의 구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그래서 사회문제는 종교문제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시각 때문에 퀘이커들이 기도, 묵상, 혹은 절대자에게 예배할 때, 장황한 말이나 예식보다는 좀더 침묵에 중점을 둔다. 이 점이 퀘이커가, 비록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성악설’이나 ‘원죄’론보다는 ‘성선설’이나 ‘낙관론’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기독교의 시각과 다른 면이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영국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정찰제 소개), 교육 및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사회의 소외된 계급인 여성과 중․하층계급의 주목을 받았다는 면에서 17세기 중반 영국 퀘이커교와 19세기 후반 한국 개신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함석헌이 유교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멸시받던 ‘평안도 상놈’ 출신이고 19세기 후반 상공업자가 많은 평안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가 훗날 퀘이커주의로부터 더욱 사상적 친근감을 갖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짐작된다.

(3) 종교, 과학, 탈민족, 탈국가

절대계뿐만 아니라 상대계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역사를 통해 과학 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특별히 영국의 경우 뛰어난 퀘이커 과학․기술자들이 영국사회에 준 영향과 공헌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무쇠 교량을 설계 건축한 건축설계가 아브라함 다비(1678~1717)와 아브라함 다비 3세(1750 ~1789),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톤(1882~1944), 유전공학자 프란시스 겔톤(1822~1911), 화학자 존 달톤 (1766~1844), 소독약과 방부제를 발명한 조셉 리스터(1827~1912) 등이다.
이렇게 퀘이커 과학자들이 가진 종교적 신앙심은 그들에게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가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 퀘이커는 왕립과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는 확률이 퀘이커가 아닌 다른 학자들보다 50배나 더 많았다. 종교적 신비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결합한 퀘이커들이 과학과 신앙의 갈등으로부터 대체로 자유롭게 되었고, 그 대신 그 점에서 상생의 길을 발견한 것이 퀘이커들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종종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은 타인들의 고난에 외부적 행동으로 참여함으로써 드러났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 퀘이커들은 피난민과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퀘이커들은 세계 최초로 무료식당운동을 전개했다. 더불어 미국의 청년, 흑인, 인디언, 새 이민자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퀘이커들의 범세계적 활동들이 세계주의자 함석헌에게 공감을 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퀘이커들을 절대평화주의자들로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각 퀘이커는 각자의 내면의 빛이나 통찰력에 따라 각자 믿음대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집총을 거부한 퀘이커들이 있는 반면, 애국심의 가치를 평화주의보다 앞세워 전쟁에 참여한 퀘이커들도 많았다. 또한 남북전쟁 중 많은 퀘이커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무력을 통해서라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론을 택하기도 했다.
사회정의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퀘이커들은 사회정의, 빈곤 및 문맹퇴치, 반전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미 퀘이커회는 제 1․2차 세계대전에서 난민 및 그 유가족들을 도와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국제적 평화주의의 중요성을 행동으로서 고취시켰던 공헌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제 2차 대전 후에도 퀘이커들은 국제적 원조, 구제, 재건활동을 지원했다. 특별히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의료봉사활동을 벌였다. 약 2만여 명의 한국전쟁 난민은 영․미 퀘이커의료봉사단의 도움 아래 군산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았다. 1970년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여러모로 도와주었고 1990년대는 영국 대학원에서 ‘함석헌 연구’를 위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필자에게 해 주었다.
퀘이커들은 실천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상대적 사회현실과 절대적 가치인 하나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속한 구체적 한 시대와 영원의 세계, 일치와 다양성, 그리고 최소한의 형식과 무제한적인 생명 등의 문제를 고민해 왔다. 영국 퀘이커교도 잉글 라이트는 그러한 상대세계와 절대세계의 밀접한 연관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퀘이커들의 침묵 예배는 상호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구한말 대다수 그와 동시대인과는 다르게 여섯 살 때인 1907년 함석헌은 기독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기회를 가졌다. 초등학교도 전통적인 서당보다는 장로교 계통의 소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대한제국이 쓰러져가는 20세기 여명에 함석헌이 누린 보기 드문 특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유․불․도가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동아시아의 종교․사상적 전통 속에서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이 동서사상과 종교를 접할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런 함석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퀘이커교도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접하게 된 과정과 그 퀘이커주의가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퀘이커 함석헌이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함석헌은 대외적으로는 약육강식이 판치던 제국주의 시대에 국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상대로 국가 폭력이 난무하는 20세기 한반도에 살았다. 찰스 틸리는 국가의 성립 자체를 조직범죄로 평가하고 국가행동양식을 조직범죄에 비교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취했던 것이 이러한 틸리의 역사사회학적 분석과 동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자국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줄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상대로 착취와 폭력만을 일삼는다면 그런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함석헌은 서구기독교가 로마 콘스탄틴 대제 이후 지배 이념화되고 정치제도권과 결탁함으로써 일반 씨알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었다. 그때부터 영과 운동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 세속권력을 위한 편의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지지하는 한낱 도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를 늙고 침체된 종교로 보았다. 1940년대 이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비판적 입장을 가진 함석헌이 아마도 그래서 국가주의에 물들지 않고 국가종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교에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평가된다.
함석헌은 박정권하에서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민이라는 단어나, 주체보다는 객체로서의 의미가 강한 백성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했다. 민중이라는 단어 역시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고 정치․사회적 의미가 있는 한자라 역시 사용을 꺼려했고, 인민이라는 용어는 레드 콤플렉스가 극대화된 남한정권 아래서 ‘빨갱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역시 사용을 자제했다. 그래서 이런 이념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고자 그는 기꺼이 ‘민’에 해당하는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생각한, ‘씨알’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함석헌이 생각한 씨알은 ‘순수․순박한 사람’, 노자가 이야기한 ‘다듬지 않은 사람’ 혹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최초 퀘이커 조지 폭스가 17세기 영국 장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하고 근엄한 청교도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 것처럼, 함석헌도 20세기 상공업이 발달한 평안도 지역에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그는 3․1운동이라는 정치․사회변혁을 체험하고 경직된 장로교로부터 영적 만족을 못 느끼게 되는 것도 폭스의 영적 행로와 유사성이 있다. 고난의 삶을 살다간 조지 폭스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들 함석헌도 아무런 세속의 매개 없이 절대자와 직접 대면하려던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17세기 영국교회의 세속적 권위에 대항해서 폭스가 주장한 ‘내면의 빛’ 개념이 20세기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퀘이커주의 내면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 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도 폭스처럼 기성교회의 무조건적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탈권위적 성향의 퀘이커주의로부터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1) 퀘이커주의와의 첫 만남

함석헌이 퀘이커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3․1운동 후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이었다. 그때 그는 토마스 카알라일(1795 ~1881)의《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주의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의《일지》를 읽게 되었다. 이 때 함석헌은 퀘이커주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으나 깊은 흥미는 못 느꼈다. 그 후 함석헌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우치무라 간조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1862~1933)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일본 퀘이커들로부터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함석헌이 니토베로부터 별 감동을 못 받은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니토베는 젊은 시절 독일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 갔을 때 일본의 첫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니토베는 훗날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을 방문해 만주침략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강변했다. 아마 니토베의 이런 행동양식이 함석헌에게 별 감동을 못 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에 대한 관심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약 20년 동안 중단되었다. 1947년 함석헌은 북한에서 막 월남한 상태에서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함석헌은 그 당시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듣고 놀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국가 폭력으로부터 세계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더구나 북한에서 맞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소련군정하에서 겪은 야만적 폭력과 수감생활은 그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우쳐 주었다. 더구나 그 후 함석헌은 국가폭력의 절정인 6․25전쟁을 체험했다. 전쟁기간 중 여기저기 피난생활을 하며 그는 온 세계와 민족이 이념을 넘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6․25를 겪은 그는 “이제 일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도 아니요, 민족도 아니요, 계급도 아니다. 세계다”라고 탈민족주의, 세계주의를 선언한다.
이런 와중에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교도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직후 전북 군산에서였다. 1953년 6․25 직후 함석헌은 전북 군산병원(현재 원광대병원)에 한국의 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단으로 온 영․미 퀘이커교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20~30대의 젊은이들로 전후에 과부와 고아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1953년부터 5년 동안 자원봉사를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함석헌은 서구의 젊은 퀘이커들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 직후……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함석헌이 퀘이커주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문헌이나 사상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 때문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지 폭스가 주장한 ‘네 삶으로 말하라’는 퀘이커주의의 핵심이 그대로 함석헌에게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1958년 2월 15일은 한국 퀘이커 역사에서 기록될 날짜이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의 집에서 처음 한국인들을 위한 퀘이커 예배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윤구(1929~ )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으며 이어 1958년 7월 이윤구는 한국의 첫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1959년 8월부터는 세계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가 자신의 집을 퀘이커 예배모임 장소로 제공해 주고 참여했다.

(2) ‘죄인’ 함석헌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서구 퀘이커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를 중시하는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아 나중에 퀘이커 회원이 된다. 물론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결국 그 자신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로부터 ‘여성문제’로 여전히 비난받고 있는 상태였고, 보수적 한국교회의 교단으로부터는 격렬하게 배척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함석헌이 고독감에 친구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인 1950년대 후반, 그런 그에게 친구가 되고자 서구 퀘이커들이 나타났다. 훗날 함석헌은 무엇이 그를 서구 퀘이커들과 극도로 가깝게 만들었는지 술회했다.

내가 퀘이커주의를 공부한 후 퀘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갈 데가 없게 된 나는 퀘이커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그 당시 함석헌은 외로운 ‘죄인’으로서의 어려운 심정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내가 죄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죄인 한 사람이 사회 전체로부터 어떻게 전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체험했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용서에 대한 함석헌의 태도를 통해서 그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외로움은 커져 갔고, 그때 그가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죄인으로서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나를 볼 수 있다.

친구들도 나 용서 아니 하나 봐요. 그래서 맘을 걷어 잡을 수 없어요. 죽겠어요!……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 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1960년 10월 9일.

함석헌의 이러한 고뇌에 찬 체험은 훗날 그에게 개인과 전체와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 그 중요성을 깨우치게 한다.




(3) 왜 퀘이커가 되었나?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 주의와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퀘이커 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주의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기존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의 서구 퀘이커에 대한 관심은 그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서구 퀘이커들도 흰 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은 ‘신비한 동양의 현인’ 같은 함석헌의 모습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들은 아마도 6․25전쟁 후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나라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며 무더운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주의가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서양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톤이 [퀘이커주의를]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동양 고전사상 사이에 많은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함석헌과 서구의 퀘이커리들이 왜 그리도 급속한 ‘열애’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만하다.
1962년, ‘열애’에 불붙은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연구소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도 그를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술회했다. 1990년에 우드부룩에서 필자가 만난 나이가 지긋한 한 영국퀘이커는 필자에게 “함석헌의 영어발음이 당신의 영어발음 보다 좋았었던 것 같던데요”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펜들힐과 우드브룩에서 함석헌은 퀘이커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구미 퀘이커연구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그도 퀘이커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고 많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대선언」 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종교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계속 가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그는 태평양 퀘이커 연회 초청으로 미국 북캐롤라이나의 세계퀘이커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비로소 퀘이커회의의 공식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퀘이커들의 우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퀘이커주의는 신비파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이렇게 불확실하지만, 열린 태도로 함석헌은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었다. 퀘이커주의는 신비주의적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으나 신비주의가 간과하기 쉬운 사회․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므로 퀘이커주의를 ‘윤리적이고 상식적 신비주의’의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면에 함석헌은 매료되었던 것이다.

(4) 퀘이커와 씨알의 소리

그래서 1967년 함석헌은 정식으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벌써 함석헌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퀘이커들의 잡지〈프랜드 저널〉에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회원과 참석자들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1950년대 후반 미국인 퀘이커 아서 미첼을 처음 만났을 때 미첼이 함석헌을 놓고 한 증언이 그러한 퀘이커들의 태도를 반영해준다. 미첼은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그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당신은 퀘이커교도가 되기 전에 이미 퀘이커였습니다.” 미첼의 함석헌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비형식주의, 반교리주의, 검소함, 평등주의, 세계평화, 사회개혁적인 태도 등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이전에 함석헌은 벌써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자격으로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둘러앉아, 그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 계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 됐거나 못 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퀘이커에 대한 그의 위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가 퀘이커의 평등주의와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에 애착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퀘이커주의의 평등사상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과 다른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 모임의 평등사상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퀘이커주의는 1960년대 이후 함석헌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의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서구 퀘이커들은 그의 민주화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박정희의 잇단 긴급조치 발동과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6년 함석헌이 다른 재야인사들과 함께 참여한 ‘3․1민주구국선언’은 긴급조치 아래서 하강기에 빠져 있던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권에 의해 구금당하고 있었을 때, 영국 퀘이커 주간지인〈프랜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함석헌 감금되다 ; -- 함석헌은 ‘3.1 구국선언’에 이어 다른 8명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함석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세계퀘이커협의회는 박대통령과 재영 한국대사에게 함석헌을 비롯한 다른 구금자들을 조속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주의와 그의 인도주의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언급했다. 미국퀘이커협의회 또한 박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냄과 동시에, 포드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내 남한의 인권이 극악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박대통령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3․1민주구국선언’ 후 함석헌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빼앗기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계속해서〈프렌드〉지는 ‘3․1민주구국선언’ 이후 함석헌이 겪는 재판과정을 보도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은 다른 17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서울에서 열린 공판에 회부되었다.……모든 피고인들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함석헌은 8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선언서를 통해서 서명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기하고, 국회를 복원시킬 것과, 사법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 선언서는 박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국경제구조를 철저히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75살의 함석헌은 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죄로 8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계류상태에서,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서간을 보냈다. 다음 서간은 그의 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내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76년 8월 9일 새벽 4시……지난주 기도예배를 드리던 중 나는 오는 8월 11일 법정최후진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열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기소한 검찰 측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알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은 함석헌이 재판을 앞두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에게조차 얼마나 훈훈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아울러 내면의 빛을 강조하는 퀘이커주의를 통해서, 그가 외적 탄압을 넘어서 어떻게 내적 평안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자유를 위한 서구 퀘이커들의 국제적 활동이 서구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여간 이 글을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형 집행정지가 되었다.
함석헌이 민주화 운동을 위해 영․미 퀘이커들이 보여준 국제적 차원의 지지와 후원을 동아시아의 도가협회나 불교회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아마도 그래서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데 서구의 실질적 영향력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그는 현대세계에 서 서구의 두드러진 영향력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 …… 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되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서구적인 지성이란 것은 17세기 18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데, 그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결국, 서구 퀘이커들의 지속적인 국제적 지지를 받아가며 함석헌은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과학적․이성적 종교

함석헌이 종교의 신비주의와 상식주의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한 만큼 그는 퀘이커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함석헌에게서 합리적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광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종교 가운데 하나만 택하는 상황이 오면 차라리 과학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의 세계는 과학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상호보완적인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동서 문화의 차이와 역사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퀘이커들의 종교관과 그 자신의 신앙관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함석헌이 1955년 쓴, 기독교인에게서 기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씨앗이 각 씨알 속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은 퀘이커들의 신앙관인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온 삶 자체의 신성함’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기도하란 말은 말로 하란 말이 아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기도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기도는 몸으로 살림으로 하는 기도다.
나는 하나님은 아니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자라 하나님에게까지 갈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다.

서구 퀘이커들이 고정된 교리보다는 다양하게 변해가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 것처럼, 함석헌 또한 그의 영적 행로를 통해서 경직된 교리나 형식주의보다는 유연하고 초월적 양상이 강한 내적 신앙을 중요시했다. 그가 퀘이커주의를 가까이 알기 전인 1953년,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리에 그저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 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는 ‘영원의 미완성’이라 노래했고 그래서 고정된 교리를 갖지 않은 퀘이커주의와 근원적 공명을 느낀 것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은 현대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도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르는 관념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을 태아와 그 어머니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거기를 탈출하여야 된다는 지혜가 솟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를 빠져나오면 일순간에 새 살림이 시작됩니다.

그의 이런 비유는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적용되지 않고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질식시키는 사슬과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준다.

(6) 보편적 역사의식과 평화주의

그의 말년인 1979년과 1985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추구해 온 비폭력 철학의 근원은 노장의 평화사상과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된다. 퀘이커주의는 두 가지 측면 즉,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봉사와 세계평화의 실현을 특별히 강조한다. 함석헌 또한 ‘역사적’인 것에 뜨거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의식을 중요시했기에, 그는 퀘이커주의의 ‘내면의 빛’을 ‘속의 소리’ 즉 ‘양심의 소리’로 해석했고, 이 양심의 소리는 함석헌에게 곧 ‘하느님의 소리’이자 ‘역사의 소리’였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을 총체적이자 일체적 존재로 이해했는데 역사적 보편주의 입장에서〈신약성경〉을 예로 들어 자신의 역사관을 이야기 했다.

예수는 자기 말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보내신 이란 보통 말로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예수를 가지고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고, 누가는 아담의 자손이라 하였고, 요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라 했다.

그는 또〈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사야나 아모스만이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라 동양의 공․맹, 노․장도 모두다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역설했다.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절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도 표현했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객관적으로도 평가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에 맞먹는 냉철한 이성을 가져야 하는데, 한 종교에 열렬히 외골수로 몰입하면서 그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절대적 표현과 상대적 표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함석헌의 종교적 신앙고백이 때로는 그가 속해 있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석헌에게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퀘이커들의 뚜렷하고 폭넓은 역사의식에 많은 공감대를 느꼈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주의를 좋아하는지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자기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1959년에 쓴 함석헌의 글을 보면 그가 주장한 종교인의 역사의식과 사회참여론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그는 ‘속알 밝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퀘이커주의의 근본사상인 ‘내면의 빛’과 아주 흡사하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낱 사람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아무도 제 인격을 온전히 이루고 혼을 기르는데 역사적 사회를 떠나 외톨이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도로서 필자는 다른 여러 종교 또한 내 종교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의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의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져 간다고 느낀다. 인간정신은 획일적인 데서보다는 다양성 속에서 최고 가치를 발휘한다. 절대자는 문자 그대로 어디서나 존재한다. 퀘이커들은 이것을 ‘신적인 어떤 요소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고 표현한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며 퀘이커교도인 폴 오스트리쳐는 “선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독점되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과 여러 근본정신에 이미 큰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의 세계평화주의에 대한 갈망은 결국 민족주의를 배타적인 감정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1930년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쓸 때의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체험한 함석헌은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자로서 성숙된 세계평화의 길을 왜 인류가 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역설한다.

국가주의․민족주의는 인간이 아직 어린 시절 한때 우리를 이끄는 선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정도를 지나쳐 자랐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것이 죄악이다. 청산해버려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제 민족주의 시대가 지나갔음으로 인류가 유아기 시절의 민족관을 버리고 민족을 넘어서서 세계를 포용하는 세계와 우주 전체관을 가져야 할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전체는 곧 함석헌에게 운명공동체인 인류사회 전체이자 절대자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7) 미래의 종교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새로운 종교는 아니지만 새 종교의 탄생을 위해 태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그는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 퀘이커들의 명상과 동양의 명상인 참선이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브린톤의《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그는 퀘이커들의 단체 및 공동체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퀘이커 300년》에서 브린톤이 퀘이커들의 ‘내면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단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석헌은 퀘이커주의가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퀘이커들이 제기한 공동체 정신은 계급․인종․종교․국가의 기원에 무관하게 사람들이 팀워크로 상호 협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퀘이커 신비주의는 개인에 머물지 않는 단체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는 것이다.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퀘이커주의는 함석헌 생애 후반기인 1960년대 이후 그의 종교․사상관 그리고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의 무소속 구도자와 종교적 ‘이단자’로서 함석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서구의 퀘이커들은 그에게 심적․물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국 그는 퀘이커로서 삶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항시 추구하는 ‘영원한 미완성’의 구도자였다고 느껴진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 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나는 현장에서 잡힌 갈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민족․국가 그리고 종교의 벽을 극복하고자 했던 함석헌. 그러면서도 결국 자신은 한국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인’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의 사람.
그렇다. 그는 철저한 모순의 사람이었다. 성속, 민족과 세계, 과학과 종교, 한 종교와 여러 종교,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갈망하고 추구한 그는 모순의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위선자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완전과 지고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철저히 모순된 존재다. 그리고 이 모순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희망이 있다. 완전한 절대자와 합일을 끝없이 갈망하고 추구하는 불완전한 상대자가 인간이고,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철저한 자기모순의 인간이었다. 어느 종교적 종파나 정당에도 가입하기를 꺼려했음에도 퀘이커교의 회원이 되고, 더러운 정치판에 말로 할 수 없는 환멸과 비애를 느끼면서도 장준하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함석헌!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모순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진리의 본질은 외양적 종교교리나 정치강령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양심 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20세기 한반도는 국가주의라는 가치가 전지전능한 가치였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존재의 생사를 너끈히 위협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작은 한 개인과 거대한 국가의 대립이라는 개념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절대적 국가권력에 대해 한 개인이 스스로 세워놓은 이상적 원칙에 따라 저항한다는 것은, 곧 그 개인과 가족의 필연적 희생을 의미했다.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한 함석헌은 그래서 ‘바보새’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 편협성과 정치․사회적 압제가 팽배했던 지극히 제한된 한국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함석헌이 최소한의 조직을 갖춘 퀘이커교의 교도가 된 것은 그런 열악한 외부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최소한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의 위치와 의미를 필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퀘이커 함석헌은 ‘내면의 빛’을 추구하며 혼란의 시대 ‘한국의 양심’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난세에 종교인으로서 사회참여를 통해 그는 한국기독교의 영성을 더욱 심화시켰고,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새롭게 펼쳐보였던 것이다. 둘째, 이제 한국교회도 교회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양적인 규모에 걸맞는 질적인 성숙함을 한국기독교계가 갖추어야만 한다는 본을,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셋째,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목회자에 대한 의존도를 지양하면서, 평신도가 스스로 이끄는 신앙생활을 지향하는 데,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하나님이 항상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한 것처럼, 그는 퀘이커로서 역사의 ‘지금 여기에서’ 일할 것을 강조했고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여기가 곧 하늘나라였던 것이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그의 뜨거운 비판은 곧 그의 종교인으로서 신앙고백․양심선언이자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공의의 추구였다. 전체적인 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믿었던 그는 씨알과 더불어 기꺼이 고난의 길을 택했다.
퀘이커주의는 함석헌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더욱 일깨워 주었다. 아마도 진리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인종, 성, 문화, 국가, 이념, 생각, 얼굴, 모든 것이 다른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에 있지 않을까.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을 보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발과 별,’ 즉 현실과 이상의 조화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도 현실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원대한 이상이 없는 근시안적인 현실은 인간 정신을 메마르게 할 뿐이다.
한국기독교인의 종교관도 외골수적이거나 편집광적인 획일성에서 벗어나 폭넓은 보편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의 영향 등으로 경제적 단위는 물론이고 문화․정신적으로 더욱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각 국가, 문화간의 긴밀한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 공동체의 사회구조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변화 되어간다. 자기민족 중심주의는 이제 인류가 청산해야 할 과제다. 이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한 민족의 미래는 인종․문화․종교적 다양성과 여러 집단 간의 상호존중에 있다. 내가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의 다름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곧 독선이고 아집일 뿐이다. 함석헌과 퀘이커주의는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선민의식을 극복하고 다른 종교나 이념에 대해 관용을 갖고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주었다.
편식이 몸의 건강에 안 좋듯이 균형을 잃은 편향된 사상이나 종파심은 인류의 건강한 정신발달에 안 좋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내가 가진 이념이나 신앙이 최고 불변의 가치이고 생명보다 소중할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그런 관점과 자유를 존중해주지 않고서는 인류가 영원히 흑백논리와 독선, 그리고 끝없는 죽음의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타인, 타민족, 타국가의 신앙과 이념을 서로가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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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접수일 : 2005년 7월 25일 / 심사완료일 : 2005년 8월 1일)


국문초록

1960년대부터 1989년까지는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던 시대였고, 동시에 그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알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하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월간지〈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무엇이 1950년대 후반 ‘스캔들’ 등으로 처절한 낙심에 빠진 ‘죄인’ 함석헌을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모시켰을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 된 경위의 배후에는 퀘이커주의가 있다. 퀘이커주의의 선도자였던 조지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인간평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사회의 약자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다. 함석헌이 ‘항시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퀘이커교도로 마감한 것을 고려하면서 퀘이커주의가 함석헌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평가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사상사적 입장에서 서구 퀘이커주의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퀘이커주의가 서구에서 소수 기독교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 역사에 미친 주요 공헌과 영향을 분석했다. 둘째, 이러한 퀘이커주의의 ‘조직기피증’ 성향에 함석헌이 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후반기 삶과 사상에 어떤 밀접한 사상적․실제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으로써, 함석헌에게 한국인으로서 퀘이커교도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 함석헌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했다.

주제어 : 내면의 빛, 기독교, 종교, 성속, 평등, 과학, 민족과 국가, 퀘이커, 역사, 세계평화.


Abstract

The Position of Quakerism and Ham Sok-Ho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Kim Sung-Soo

Ham Sok Hon had a close connection with the Western Quakers from 1960 until he died in 1989. During this period he was actively engaged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South Korea, vigorously protesting against the military dictatorship. At the height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1970, Ham also established a monthly magazine, Voice of the People. What turned Ham, the downhearted man of the end of 1950s who was involved in a scandal, into a relentless freedom fighter?
From at least the 1960s onward, Quakerism was always behind Ham whenever he was active in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George Fox, early leader of the Quaker movement, also emphasized the equality of men and women, and respect for each individual, not only under the law but also before God. Fox said that religion means looking after the social underdog and standing by him. Ham, always a man of doing rather than a man of being, ended his life as a Quaker. I will therefore examine and evaluate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Ham and Quakerism.
In this paper, firstly I will look into the philosophical aspect of Quakerism as seen through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In particular, I will closely examine the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Quakerism to English and American history. Secondly, I will analyze how and why Ham became interested in Quakerism, and how his thinking was influenced by Quakerism. By doing so, I will look into what it meant to be a Quaker to Ham as a Korean. In addition, I will also examine what kind of role Ham fulfilled as a Quaker in relation to Korean Christianity.

Key-words : Inner Light, Christianity, Religion, Secred and Secular, Equality, Science, Nation and State, Quaker, History, and the World Peace.








201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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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위해 6년간 ....... "그의 글 지키고 싶어"
작성자 바보새 19-01-03 14:54 조회295회 댓글0건


할아버지 위해 6년간 무보수 작업... "그의 글 지키고 싶어"
[인터뷰] '함석헌문집' 전자책 42권 펴낸 함석헌 선생 외손자 정현필씨
19.01.01 21:57l 김성수(wadans)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시절, 함석헌의 차남 우용씨, 며느리 양영호씨, 외손자 정현필씨(오른쪽부터). ⓒ 정현필

지난 2009년 <함석헌저작집> 30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 저작집은 지난 1980년대 발간된 <함석헌전집> 20권을 증보해 30권으로 발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작집에 오류가 상당수 발견돼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한길사에 판매금지를 요청했다. 그 후 한길사와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수차례 회의 끝에 저작집 30권 판매를 중지하고 책방에서 모든 책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함석헌(1901~1989) 사상에 목말라 있는 독자들 중엔 기존 전집과 저작집이 절판, 판금돼서 시중에서 아예 구할 수 없다는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18년 12월 30일 <함석헌문집> 전자책 42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 문집을 펴낸이는 함석헌 선생의 외손자이자 주캐나다 동포 정현필씨다.

정씨는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질문을 받았다. "함 선생님을 공부하려 해도 책을 구할 수 없다, 언제 전집이 나오느냐?" 그래서 그는 지난 2013년부터 자신이 캐나다에서 운영하는 'ssialsori.net'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함석헌의 글을 접하기 원하는 독자는 누구든지 방문해 볼 수 있다. 특히 함석헌을 연구하는 학자나 공부하는 학생에게 정씨는 제한적으로 이번에 그가 만든 <함석헌문집> 전자책을 공개하고 있다.

기자가 이런 정씨에게 물었다. "함석헌 할아버지의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아서 지난 6년간 무보수로 이런 엄청난 일을 했나?"

"지난 1985년 나는 위급한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함석헌 할아버지는 수술 중인 나를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시면서 수술이 잘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저 애는 부활했다'고 말씀했다.

지난 1986년 캐나다로 이민왔다. 2년 후인 1988년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했을 때 한국의 병원에서 뵈었다. 당시에는 정신이 분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나를 보고 알아보셨다. 첫마디가 '현필이 너 뭘 할래?'라고 하셨다. 그 두 말씀은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다. 할아버지를 통해 내게 주시는 하늘의 소리라 믿는다. 그 두 말씀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결국 그는 할아버지 함석헌이 손자인 그에게 한 말, '저 애는 부활했다'와 '현필이 너 뭘 할래?'에 사로잡혀 지난 6년간 혼자 힘으로 <함석헌문집>을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씨름한 것이다.

함석헌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교수, 박사, 변호사 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감히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하지 못했던 <함석헌문집> 42권을 아이러니 하게도 자영업자 생활인인 그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가 보내 준 자료를 읽어 봤다. 각고의 정성을 곳곳에 느낄수 있었다. 그는 지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 잠시 돌아와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정 선생과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 정현필 선생이 펴낸 <함석헌문집> 전자책 중 일부ⓒ 정현필

- 전자책을 만드는 데 무려 6년이 걸렸다. 처음에 이 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동기가 무엇인가.
"지난 1986년 캐나다로 이민와 자영업을 하다 1999년부터 캐나다에서 함 선생님에 대한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이일이 인연이 돼 지난 2007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문영(1927~2014) 이사장의 부름으로 그해 서울로 나가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게 됐다. 그때 서울을 나갈 때는 기념관 (건립)을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한길사에서 <함석헌저작집> 30권을 출판했다. 그러나 출판 과정에서 함 선생님의 글이 원문과 다른 오류가 있음을 알게 돼 판매를 중지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함 선생님의 전집을 새로 출판해야 한다는 뜻이 모아졌다.

그동안 자료실을 만들어 관련 자료들을 다양하게 모아 놓은 것과 각 도서관과 중고책방을 뒤져 함 선생님의 글을 찾았다. 또 자료 중에 있는 녹음테이프를 녹취해 출판을 위한 기본 자료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사무국장으로 일을 시작할 때는 함 선생님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자료를 모으던 중, 한길사에서 출판된 저작집이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그때 생각을 고쳤다.

유품이나 전시하는 기념관보다는 함 선생님의 정신이 지켜지고 살아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생전에 남기신 글이 온전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이사장이 다른 분으로 바뀌면서 사무국장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자료실에 모아진 함 선생님의 글과 녹음자료 등을 컴퓨터 파일로 준비하여 지난 2012년 캐나다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전집 작업을 계속했다. 지난 2016년에 전집출판을 위해 작업된 것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해 함석헌기념사업회에 전집출판을 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 사정으로 이 일이 진행 못됐고 나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서 계속해 전집 출판을 위해 편집을 했고, 지난해 12월 전자책 42권을 완성했다. 책을 한 권씩 만들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바보새함석헌(ssialsori.net) 웹사이트에 공개해 함석헌 선생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부분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생활로 가르치신 분"


80년 대 함석헌ⓒ 정현필

- 어려서부터 보아온 외할아버지 함석헌은 어떤 분이었나? 특별히 생각나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손주들에게는 남들과 같은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었다. 항상 주위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우리 손주들은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화를 내거나 손주들에게 혼을 내는 일은 없었다. 화를 낸다는 것은, 글 쓰실 때 아이들이 떠들면 조용히 하라는 정도였다. 언젠가 미국에 사는 누님과 대화 중에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없으나 할아버지는 그분의 삶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는 말을 하면서 한 예를 들었다.

교회의 여러 어른들과 어떤 자리에서 지난 50~60년대 옛날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남녀평등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할아버지네 집에서는 찾아온 손님이나, 아이들이나, 여자나, 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나 모두 한 밥상에 할아버지와 함께 둘러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고 했는데, 그 말에 놀라는 분들이 있었다고.

그때까지도 어른과 아이들은 구별되고, 남자와 여자, 주인과 일하는 분들은 같은 밥상을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놀랍다고 했다 한다. 그때 누님 말은, 우리는 그런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는데 그런 것이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큰 선물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나 또한 같은 마음이다. 그때는 멋모르고 자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삶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자유와 평등을 생활로 가르치신 것 같다."

- 이 책을 만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다만 아쉬운 것은 평소 함 선생님이 우리말 쓰기 운동을 많이 하셨으니 제목을 우리말로 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한문을 잘 모른다. 굳이 한문을 쓸 경우 우리말 뒤에 괄호로 표기하면 젊은이들이 더욱 쉽게 함 선생님 글에 접근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집의 제목을 만들 때 고민을 했다. 우선 1980년대 <함석헌전집>과 2009년 <함석헌저작집>과는 구별돼야 했기 때문이다. '信天翁咸錫憲文集'이라 했는데 특별이 한자를 쓴 것은 별 뜻이 없다. 전집, 저작집이란 말을 다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집(文集)이라 했다. 함 선생님의 호가 신천(信天)이어서 신천을 넣자고 하다 보니 한자표기가 됐다.

그러나 책 내용은 한자를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한글로 표기를 했고 한자를 표기해야 하는 경우는 괄호를 사용했다. 함 선생님의 글은 1930~1950년대에는 한자 표기가 많은데, 그 이후는 동양고전이 아닌 경우는 모두 한글을 쓰셨다."

"다양한 할아버지의 글을 발로 뛰면서 새로 찾아냈다"


정현필 선생이 운영하는 ssialsori.net 웹페이지. 이곳에서 <함석헌문집>을 볼 수 있다. ⓒ 정현필

- 이번의 <함석헌문집>과 기존의 <함석헌전집>, <함석헌저작집>과의 가장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전집과 저작집에도 포함되지 않은, 미처 수록되지 못한 글이 이번 문집에 상당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글은 주로 어떠한 글인지? 또 왜 그런 함석헌의 글이 기존의 전집과 저작집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인가.
"<함석헌문집>은 평균 350쪽 분량의 책 42권으로 되어 있다. 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존 전집이나 저작집에 수록이 되지 않은 글이 상당량이 있다. 기존의 전집이나 저작집엔 초기 함 선생님이 <성서조선>에 발표하신 글 중에 몇 개가 빠져 있고, 김교신 선생님의 글을 함 선생님 글이라 해서 전집과 저작집에 수록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

또한 옛글자인 깉다('남다'라는 뜻)를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여러 곳에 나온다. 논리(論理)를 윤리(倫理)로 잘못 표기하는 편집에 실수가 여러 곳에 있고, 1970년대 <씨알의 소리>에 발표한 글은 당시 정권에 의해 삭제된 부분을 살리지 않고 그대로 낸 경우도 있다. 새로 찾은 시, 새로 찾은 좌담, 특히 1963년 7월 <사상계> 주최 귀국강연회 원문은 어디에서도 없었는데 녹음강연을 구해 녹취 후 이번 문집에 수록했다.

그 외에 외국 방문 중 현지에서 강연하신 녹음을 구해 녹취 후 수록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셨던 글도 새로 찾아 수록했고, 중앙신학에서 요한복음 강의하신 내용도 녹취해 3권 분량으로 수록했다. 또 출판사가 자의로 고쳐 편집한 내용을 가능하면 발표하셨던 초고대로 복원해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편집했다.

함 선생님과 서신을 나누신 분들이 편지를 기증해 많은 양의 편지가 이번 문집에 수록돼 기존의 한 권에서 두 권으로 편집했다. 또한 한국에 있을 당시 국회도서관, 국립도서관, 대학도서관등 주요 도서관을 검색해 다양한 함 선생님의 글을 발로 뛰면서 새로 찾아냈다. 아직도 미처 찾아내지 못한 함 선생님의 글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함석헌은 어느 한 단체의 함석헌이 아니다"


정현필 선생, 부인과 함께ⓒ 정현필

- 이 전자책을 종이책으로도 출판하면 독자들을 위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전자책을 종이책으로도 출판할 계획은 없는지?
"이 전자책을 만든 이유는 최종적으로 종이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함석헌 선생님은 어느 한 단체의 함선생님이 아니다. 이제는 흩어져 있는 단체들이 뜻을 모아 총력을 들여서 이 전집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일을 몇 년간 해온 목적은 이 자료가 기초가 돼 전집 출판에 밑거름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편집 작업을 해오면서 느낀 점은 지난 2009년 한길사에서 출판된 저작집의 오류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함 선생님의 글이 지켜지고 후세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 출판될 모든 함석헌 선생의 글에 '표준 기준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책을 출판할 때에 따라야 하는 여러 기준을 세우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세우고 변질되지 않게 잘 지켜내는 기준서를 준비하여 이에 따라 전집이 출판돼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내가 만든 '전자책'과 '연대별 목록', '전집-저작집-문집 비교목록' '함 선생님 고유 어휘사전'등이 이 기준서를 만드는 기초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해 2019년 2월에 전집 출판을 목적으로 한국 방문을 계획 중이다. 지금 현재는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아무 계획도 없고 이에 따르는 재정도 전혀 없다. 함께 일을 할 동지도 없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부딪쳐 보고자 한다."

-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함석헌전집을 다시 출판해야 한다는 뜻을 세웠으나 지금까지 전혀 진행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참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나를 포함 그 누구도 함석헌 선생님의 모든 것을, 전체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고 생각한다. 이제 선생님을 따르는 모든 분들이 그런 점을 인정하고 자기만이 진정한 제자라는 오류에서 벗어나 힘과 뜻을 합쳐서 그분이 말씀하신 씨알을 말로만 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내기를 희망한다. 사심(私心)을 버리시기를 바란다."

- 지난 6년간 타향에서 혼자 힘으로 이 문집 만들기 작업을 하면서 심한 어려움과 고초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힘든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애로사항과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몇 가지 소개하면?
"왜 이 전집 출판을 해야 하는지, 왜 중요한지를 이해 못하는 것, 함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자칭 말하는 분들이 자료를 소중하다고 꼭 지키고만 있지 그것을 통해 다른 무엇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하는 것, 장자 노자 테이프를 녹취해 글로 출판해야 하는데 '형산에 박옥'이라 하며 쳐다만 보고 있는 것 등이 마음 아팠다."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갈 길을 밝혀 보여준 함석헌의 사상"


생전의 함석헌ⓒ 정현필

- 한국에는 지금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연구소, 씨알사상연구원, 씨알재단 등이 있고 미국에는 함석헌사상연구회 등이 있다. 이런 단체들이 향후 <함석헌문집> 종이책 발간을 위해 지원할 길이 있다면?
"이 일을 하면서 캐나다에 있기 때문에 직접 자료를 찾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다. 지금이라도 함 선생님과 관련 단체에서 이 점을 고려해서 글을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시간과 재정을 투자한다면 더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서신과 녹음테이프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기증 받으면 더 많은 자료가 나올 것이다.

함석헌기념사업회에 조의영, 조형균 두 분이 기증해 보관하고 있는 노자 장자 테이프는 하루빨리 녹취작업을 해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 함 선생님의 후기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돼야 한다. 함 선생님 관련 여러 단체에서 행하는 어느 행사보다도 이 전집을-노자 장자를 포함-출판해 그분 사상이 온전히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 선생님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 하셨을 때 그 '뜻'을 제대로만 이해하고 실천 한다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 '뜻'만 모아지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룰 수 있다. '뜻'을 팔 생각은 그만하고 이제는 '뜻'을 세울 때다."

- 21세기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가 왜 20세기를 살다간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삼사십 년 많게는 오십 년 전에 쓰신 글을 읽다보면 현세대를 놓고 하시는 말씀이란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남긴 고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갈 길을 밝혀 보여주시는 함석헌의 사상이 가깝게는 남북의 갈등문제, 평화통일, 더 나아서는 인류의 평화에 대해 분명 우리 젊은이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함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로 돌아 앞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글을 통해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우로 돌아 앞으로!'는 함석헌의 표현으로 "떨어졌던 자가, 행렬에 '우로 돌아 앞으로'의 명령이 내릴 때는 앞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 성경에 나오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와 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2500344&PAGE_CD&CMPT_CD&fbclid=IwAR2tBDtLNxSAutU0L-yznaRRNuaR8QNNq5juKTa5ENWmKEJxd6nRg3EYfCM

2019/10/01

오강남 -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오강남 > 연구논문 | 바보새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오강남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종교학)

들어가는 말


제가 함석헌 선생님을 뵌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받은 강력한 인상으로 인해 이런 만남들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8월 대광 고등학교에서 시국 강연을 하실 때 수많은 청중에 끼어서 흰 두루마기를 입으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뵈었고, 그 후 대중 강연 때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특히 1978년 제가 캐나다 에드먼튼에 있는 알버타 대학에서 가르칠 때 친구 김영호 교수의 주선으로 함 선생님이 알버타 대학 강당에서 교민들을 위해 강연하시고, 그 날 밤 저의 집에 묵으시고, 다음날 교수회관에서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화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김영호 교수, 황필호 교수와 함께 우이동 댁으로 찾아 뵈었을 때 동경 유학시절 겪으셨던 관동지진 때의 경험을 들려주신 것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몇 번의 행복한 만남에도 불구하고, 또 함 선생님의 글을 열심히 읽은 편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전문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이 모임에 참석했다가 박재순 교수님과 김성수 교수님이 저에게 이번 강연을 맡으시라고 강권하시는 바람에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얼떨결에 수락하였다가 지난 1년 본격적으로 충분히 연구할 여유를 얻지도 못한 채 1년 내내 걱정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이렇게 여러 전문 연구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전문가로서 말씀드리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저 평소 제가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문제와 연관해서 함 선생님 사상의 종교사적 의의를 부각시켜보려고 합니다. 제가 발표를 한다기 보다 그저 말머리를 트고 여러분의 고견에서 많은 것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몇 마디 말씀드리는 것이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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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먼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나 심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많은 종교학자들이나 사상사 전공인들이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 1870-1940)나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 1970-1966))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류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에 대한 연구도 이에 못 미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서울신대의 최인식 교수가 미국 종교학회에 참석했을 때 저는 그분에게 미국종교학회 연회에 함석헌 패널을 하나 만들어 함석헌 연구자들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최인식 교수의 노력도 불구하고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곧 그런 일이 성사되기 빕니다.


저는 이 논문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세계 종교사에서 면면히 흐르는 ‘신비주의’의 맥락에서 한번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그 의의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함 선생님이 스스로를 신비주의자로 의식하셨는지, 혹은 정말로 신비주의자이셨는지, 저로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거기 모인 사람들과 매일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30분씩 명상의 시간을 가졌고,1) 또 퀘이커 교도로서 적어도 매주 한 시간씩의 침묵 예배, 곧 명상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훌륭한 종교라면 그 속에 ‘신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고,2) “나는 지금도 ‘그이’가 내 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세계 종교 전통의 심층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글에서 신비주의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제가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네 가지 관점에서 함 선생님의 사상이 어떻게 신비주의 전통들과 맞닿아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네 가지 관점이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완전히 독립된 항목들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냥 네 가지 정도로 간추려 보는 것뿐입니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일쑤입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의 애매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라는 말 대신 ‘영성’이라는 말이라든가, 라이프니츠가 창안한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쓰는 이도 있지만 이런 말들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3)

이런 애매함이나 모호함을 덜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smu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매, 육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 등 초자연 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Mystik’이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때 제가 말씀드리는 신비주의는 물론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로 중세 이후 많이 쓰이던 ‘cognitio Dei experimentalis’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입니다.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안다’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추론이나 개념이나 논리나 교설이나 문자를 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권위 있는 말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영적 눈이 열림을 통해, 내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종교에서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4)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생각하시면, 일단은 그것을 ‘심층 종교’나 ‘열린 종교’ 등으로 바꾸어 읽으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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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1.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에서 자라가라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5)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6)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일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7) 신학자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신비 체험의 네 가지 특징 중 하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ineffability)’이라고 하였습니다.8) <도덕경>1장 첫머리에 언급된 것처럼 “말로 표현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러 신비 전통에서는 언제나 표피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를 분간하고 표피적인 의미를 지나 심층적인 뜻을 간파하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경전이나 의식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특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종교적 진술의 뜻을 좀 더 세분하여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의 가르침입니다.9)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혹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1) 물리적(physical, hylic, 땅) 차원,
2) 심리적(psychological, psychic, 물) 차원,
3) 영적(spiritual, pneumatic, 공기=영) 차원,
4) 신비적(mystical, gnostic, 불) 차원입니다.



첫째 차원은 종교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일상적 차원입니다. 이른바 육이나 땅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데 따라 극히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둘째 차원으로 들어가는데, 이 단계에서는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의 종교적 진술이나 이야기를 ‘문자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심리적 기쁨이나 안위를 얻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외적 비밀(the Out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 등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셋째 차원의 뜻, 곧 ‘은유적(allegorical)’ 혹은 ‘신화적(mythical)’ 혹은 영적 의미를 파악한 영적 사람이 됩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내적 비밀(the Inn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불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는 신비 체험에 이르고, 더 이상 문자적이나 은유적이나 영적인 차원의 뜻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10)


함 선생님은 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삶의 단계 혹은 의식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명에는 세 단계가 있다. 맨 밑은 물질이고 그 다음은 마음이고 맨 위에 영 혹은 정신이다. 우리의 생명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에까지 자라는 것이다. 육체에는 자유가 없다. 온전히 물질에 의존한다. 영은 순전히 자유하다.

“평화운동은 전체의식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활동의 근원이 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11)

저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즐겨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산타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동네에 500집이 있는데,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지금 오스트랄리아에는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기 아빠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올라갑니다.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싼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더욱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싼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사회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의 신비적 의미를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됩니다.

물론 이 예화에서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발전단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깊은 신앙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함 선생님의 기본 가르침이 이처럼 문자주의를 극복함으로 종교의 진수에 접하라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함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성서를 읽되 문자적으로 읽기를 거부하고 성서에서 그 당시 조선인들에게 성서가 줄 수 있는 더 깊은 ‘뜻’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동서고금의 종교 문헌을 섭렵하면서 그런 문헌의 문자 뒤에 담긴 뜻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문자주의의 제한성을 넘어서 종교적 진술이나 예식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문자주의를 극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계속 자라나 “완전한 데” 이를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2. 참나를 찾으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민중이요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산 힘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12)


영국 사상가로서 The Perennial Philosophy 라는 책을 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을 열거하면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tat tvam asi,” 곧 범아일여(梵我一如) 개념을 첫 번째 항목으로 들었습니다.13) 헉슬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신비주의 전통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신이 내 속에 있다,” “가장 깊은 면에서 신과 나는 결국 하나다” 하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신관은 신의 내재(內在)만을 주장하고 신의 초월(超越)을 무시하거나 신과 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입장은 나와 신을 구별하여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의 내재성을 함께 수납하는 이른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 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범재신론은 다른 모든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 “나의 바탕은 신적인 것이다”, “나의 가장 밑 바탕은 신의 차원과 닿아 있다”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변증법적 유신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14) 세계 신비전통에 나타나는 이런 유형의 신관 몇 개 만 예로 들어 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사상입니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잠재적 요소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덧붙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을 두고서도 여기의 ‘나(我)’란 ‘고타마 싯다르다’라는 역사적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불성, 혹은 ‘참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 참나야 말로 천상천하에서 오로지 높임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런 풀이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 ‘나’도 결국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던 그리스도, 그의 바탕이 되는 신적 요소, 그의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15)


물론 예수님도 직접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성의 내재라는 신비주의적 특색을 강조하는 저류가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런 신비적 흐름이 억눌리고 문자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득세하는 비극이 초래되기는 했지만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중세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도 “영혼 속에는 창조되지도 않았고 창조될 수도 없는 무엇이 있다”고 했고 그 외의 많은 신비주의 그리스도 사상가들이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씨앗, 그리스도의 탄생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특히 지금까지 기독교 신비 전통의 한 가닥을 이어가고 있는 퀘이커교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를 ‘신의 한 부분(that part of God)’ 혹은 ‘내적 빛(inner light)’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이슬람교에서조차 신의 내재를 동시에 역설하는 수피(Sufi)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내 “우리의 핏줄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라는 쿠란의 말을 근거로 하여 신의 내재성과 ‘신에로의 몰입’을 주장합니다. “만물 안에 내재한 그 일자(一者)를 보라”고 가르칩니다.

동양 사상 중 특히 ‘우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혹은 내재적 하느님 사상을 학생들에게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물론 얼마간의 무리와 오해의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몸이 하나가 아니고 몸은 ‘나’라고 하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소유자, 주인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나인가?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주인이 아니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더 근본적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아닌 그 근본 주인, 그 소유자,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참 나,’ 혹은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 ‘내 속의 하느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설명해 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제노아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느님이다. 내 하느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16)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17)


물론 이런 이론적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명상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가만히 보면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그 또 하나의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관찰자를 의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기에 이쯤에서 일단 이렇게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고, 이 또 하나의 나는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나와 다른 나가 아닌가, 이 나가 하느님의 일부이든가 아직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면 하나님에 가까운 나, 혹은 내 속에서 하느님과 맞닿은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시간·공간을 다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될수록 순수하게, 잡념을 없애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씨알’이라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18) 물론 ‘씨알’이라는 말이 때 묻지 않은 ‘맨사람,’ 근본을 잃지 않고 인위적인 것으로 덧씌워지지 않은 민중을 뜻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씨알의 알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하늘은 한 얼이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알이다.”19)하는 말이나 “정말 있는 것은 ‘알’ 뿐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뿌리로 알려져 있다.”20)고 한 말을 보면 적어도 씨알의 ‘알’은 우리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신적 요소, 혹은 신과 인간이 맞닿아 있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라 이해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몇 가지 관점에서 볼 때 함석헌 선생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세계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신인합일, 신인무애(無礙), 신과 만물의 융합, 라틴어로 ‘unio mystica’의 사상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여 틀 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 함 선생님의 이런 사상이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압축된 것 같아 인용합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3. 우주공동체에서 평화를 체현하라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21)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 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 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 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 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 라고.”22)


물론 이런 사상을 가장 극명하고 조직적으로 개진하는 사상체계는 중국 불교의 화엄종(華嚴宗)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에서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는 기본 원칙을 강조합니다.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理)와 개별적 사물로서의 사(事)가 아무 거침이 없이 서로 융통한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생각을 기초로 하여, 이제 모든 사물 자체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는 것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고치면 모든 사물은 상호연관, 상호의존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와 하느님만이 하나가 아니라 나와 너, 나와 만물이, 만물과 만물이 궁극적 차원에서는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유기체적(organic), 통전적(holistic) 세계관입니다.


함 선생님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일체가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만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도 다 티끌까지도 다 나임을 믿어야 한다.”23)


저는 이런 유기체적이고 통전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자기 뺨을 만져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부모님을 발견하고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나아가 수없이 많은 조상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공기, 물, 비, 구름, 햇빛, 음식,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 도구를 만든 사람들, 그들이 농사짓는데 필요했던 토양, 씨앗, 시간과 공간 등등 이런 모든 것이 지금 내 뺨에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온통 나 아닌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개인은 이 모든 것과 상즉상입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저는 이렇게 온 우주가 서로 연관되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주 공동체’를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라 주장합니다.


이렇게 나와 너, 만물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실제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여러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단순히 논리 정연한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견 복잡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교설들도 사실은 이른바 ‘구원론적 의도(soteriological intent)’를 가진 것입니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은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입니다.24)


이런 통전적, 유기적 세계관에서 어떤 실제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만물의 일체감에서 세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자비(compassion)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이런 아픔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평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위해 힘쓰게 된다는 점을 특히 부각하고자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운동이 감상적이거나 윤리적 차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고 보는 더욱 근본적인 우주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평화운동은 전체의식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 활동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25) 고 한 말이나 “사랑은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둘인 줄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면서 하나인 줄을 모를이만큼 하나여야 할 것이다.”26)고 한 그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 됨으로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남이 아플 때 나도 아파하는 일종의 보살 정신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제창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처럼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참여의 정신입니다. 함 선생님은 제가 보기 ‘행동하는’ 신비주의를 몸소 보이주고 실천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4. 종교 상호간의 보완과 조화를 중시하라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 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27)

앞에서 말한 우주공동체에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특히 종교다원주의적 자세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자기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 주장이 별로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에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은 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전혀 없다, ‘비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상 체계입니다. 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사물을 더욱 깊은, 더욱 높은, 더욱 넓은, 더욱 많은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관점에서 본 한 가지 의견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가 무한히 크면서 동시에 무한히 작다고 하는 ‘역설’의 논리가 무리 없이 수용됩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 중 원숭이 훈련사의 경우처럼 양쪽을 다 보는 ‘양행(兩行)’의 태도를 보입니다. 똑 같은 커피 잔이 위에서 보면 둥글지만 앞에서 보면 네모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요즘말로 바꾸면 시각주의(perspectiv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어느 시각,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함 선생님처럼 “글쎄요”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28) 하나의 시각, 하나의 관점을 절대화할 수 없고 다원적인 시각의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뿐입니다.


이런 태도를 다종교(多宗敎) 현상에 적용하면 자연스럽게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종교의 가르침만을 절대적 진리라 주장하는 배타적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됩니다.29) 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 혹은 나무와 그 열매와 같은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 선생님이 세계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말은 함 선생님은 세계 종교들을 다룰 때 다원주의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30)


여기서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하는 대신 함 선생님의 말씀 하나를 인용하고 그칩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됐거나 못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안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좋지 않습니까?”31)


나가는 말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진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21세기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 차원으로 심화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어찌 그리스도교뿐이겠습니까?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는 결국 신비주의적 차원이라 확신합니다.32)


물론 지금까지 이런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한 종교인들은 그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거의 모든 종교의 신도들이 문자주의적, 교리 중심적, 기복주의적, 자기중심적, 배타주의적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종교가 이를 수 있는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이런 비극적 사태가 개선되므로 더욱 많은 이들이 종교의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2003)는 최근에 펴낸 그의 The Silent Cry: Mysticism and Resistance  라는 책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며,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창했습니다.33)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이번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함 선생님의 신비주의적 사상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며, 함석헌 선생님이야 말로 이런 ‘신비주의의 민주화’에 앞장서신 분이었구나 하는 확신을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함석헌 선생님의 비교사상사적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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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수, <함석헌 평전> (삼인, 2001), p. 105 참조.

2) “하워드 브린튼이 퀘이커리즘을 서양에서 난 종교들 중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함석헌 전집15>p. 51), 김성수, 위의 책 p. 126에서 재인용.

3) 또 다른 분류법으로 종교의 ‘표의적(exoteric)’ 차원과 ‘밀의적(esoteric)’ 차원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필자도 다른 글에서는 표피적(surface) 차원 vs. 심층적(depth) 차원, 닫힌 종교 vs. 열린 종교로 분류했다. 졸저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현암사, 2002), Frithjof Schuon, The Transcendent Unity of Religions (New York: Quest Books, 1984) 등 참조.

4) 필자는 이 말을 대학 시절 읽은 김하태 박사의 글에서 접하고, 그 이후 신비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비주의와 신비체험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 방면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William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ce (New York: Collier Books, 1961), Aldous Huxley, The Perennial Philosophy (New York: Harper & Row, 1944) 외에 최근의 책 John Macquarrie, Two Worlds Are Ours: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Mysticism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pp. 1-34 등을 참조할 수 있음.

5)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명상집>(오늘의 책, 2003), p. 160에서 인용.

6) <함석헌 전집 9>, p. 200.


7) 문자주의의 문제성과 해독에 대해서는 졸저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pp. 63-115 참조.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Laughing Jesus (New York: Harmony Books, 2005)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자주의의 해독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8) 다른 세 가지 특성은 ‘얼른 지나감(transiency)’ ‘직관적(noetic quality), ‘피동성(passivity)’이라고 했다. 그의 앞의 책 참조할 것.

9) ‘Gnosticism’을 보통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번역하는데 필자는 이를 “깨달음주심주의”라 번역하고 싶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서 여기서는 그대로 ‘영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영지주의에 대한 최근의 책으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 Karen L. King이 쓴 What Is Gnosticism?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그리고 일반 독자를 위해 읽기 쉽게 쓴 Richard Smoley, Forbidden Faith: The Gnostic Legacy (San Francisco: HarperSanFranscico, 2006)을 참조할 수 있다.

10) 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New York: Three Rivers Press, 1999), pp. 127-129 참조.

11) 김진, 앞의 책, p. 74-5에서 인용. 인간의 의식 발달을 물질, 마음, 영의 세 단계, 이른바 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subject/object consciousness, 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로 분류한 예는 Ken Wilber, Up From Eden (Boston: Shambala, 1983)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2) 각각 김진, p. 129, 172, 95에서 인용.

13) Aldous Huxley, 앞의 책, pp. 1-21 참조.

14) 이 용어는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자인 John Macquarrie가 채택한 용어다. 범재신론을 다루는 책으로 최고로 좋은 그의 책 In Search of Deity: An Essay in Dialectical Theism (New York: Crossroad, 1985) 참조.

15) 함 선생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셨다. “그러면 ‘나[自我]가 곧 나라’요, ‘나[自我]를 본 자가 아버지[民族, 世界, 하늘]을 본 것이다.’ 그 나는 새삼스러이 있을 것도 아니요 없을 것도 아니요, 보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도 아니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는 나’, 참 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나다.” 김진, 앞의 책 241에서 인용.

16) Huxley, 앞의 책 p. 11에서 재인용.

17)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자기의 작은 자아가 없어지고 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에서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를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18) ‘씨알’의 다중적 의미와 씨알 사상의 ‘바탕생각’에 대해서는 김경재, “21세기 씨알사상과 그 운동”(http://soombat.org) 참조. 함 선생님은 ‘씨알’이란 말이 류영모 선생님이 <大學> 첫머리에 나오는 “大學之道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한 배움의 길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무름에 있나니라.”고 한 데서 나왔다고 했다.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아카넷, 206), pp. 193-194, 이정배,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 나타난 ‘민족’ 개념의 신학적 성찰” ) 씨알사상연구회 2006년 5월 월례발표회 논문, p. 11.

19) 김진, p. 115.

20) <함석헌 전집 3> “씨알의 설움”

21) 김진, p. 135.

22) Huxley, 앞의 책, p. 57에서 인용.

23) 김진, p. 84.

24) Huxley, 앞의 책 p. 5.

25) 김진, pp. 74-75.

26) 같은 책, p. 202.

27) 김성수, 179-180 재인용.

28) 필자가 함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글쎄요”라는 말을 아주 많이 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도덕경> 45장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입니다(大辯若訥)”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 도에 입각한 말은 판에 박힌 이분법적 달변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글쎄요’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풀이한 것이다. 졸저 <도덕경>(현암사, 1995), p. 197.

29) 종교간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논의하는 책으로 Paul F. Knitter, Introducing Theologies of Religions (Maryknoll: Orbis Books, 2002) 참조. 여기에서 Knitter는 네 가지 기본태도를 논하는 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남의 종교를 내 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대체론(Replacement model), 2) 남의 종교의 모자람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충족론(Fulfillment model), 3) 서로의 공통점을 찾자고 하는 상호론(Mutuality model), 4) 서로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배우자고 하는 수용론(Acceptance mode).

30) 신비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의 관계,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신비주의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졸저,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pp. 340-355 참조. 함 선생님의 다원주의적 태도를 좀 더 상세하게 다룬 것으로 김성수, 앞의 책, pp. 179-185를 참조할 수 있다.

31) <함석헌 전집 8> pp. 377-378. 김성수, 앞의 책, pp. 130-131에서 재인용.

32) 종교를 분류할 때 힌두교, 불교,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 등 각각의 전통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런 종교 전통 중에서 그 심천을 기준으로 하여 표의적 종교와 밀의적 종교로 나눈 슈온의 분류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Schuon, 앞의 책 참조할 것.

33) The Silent Cry: Mysticism and Resistan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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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오강남
작성자 바보새 
1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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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CBS-TV 8·15특집 다큐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조호진(mindle21) 기자






▲ CBS-TV 8·15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타이틀.

ⓒ2004 CBS-TV

해방 이후 59년간 금기시 돼왔던 한국 기독교의 친일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CBS(기독교방송) TV본부가 8.15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PD 김동민)'를 통해 그들의 친일 역사를 최초로 방송,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들이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십계명과 정면 배치되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남에 따라 친일 목사에 대한 재평가 및 한국기독교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김동민 PD(35·시사 프로그램 'CBS저널' 담당)는 12일 "CBS저널에서 '한국교회, 친일의 추억'이라는 꼭지를 진행했다"며 "정치권의 친일진상규명 논란과 네티즌에 의한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등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일문제를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됐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김 PD는 또한 "기독교계가 금기시 했던 친일 행위에 대해 기독교방송이 스스로 보도한다는 게 의미가 있다"며 "한국기독교가 친일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채널 162)을 통해 네 차례(13일 밤 11시30분, 14일 낮12시, 15일 낮12시·밤 12시) 방송된다. 라디오방송에 주력했던 기독교방송은 2002년 TV 시범방송을 시작으로 위성방송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친일 목회자가 교단 지도자로 추앙 받는 한국교회... 친일문제 금기시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2004 CBS-TV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제작팀은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친일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었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며 교계 지도자로 건재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방송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일 정도로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까지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파쇼화 체제로 돌입,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기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항복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양주삼 초대 총리사는 1936년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또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기독교의 친일 행위가 본격화됐다.

당시 장로교총회 부회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는 각 노회 임원들을 인솔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또한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鐘)을 떼어다 바쳤다. 심지어 교회를 통폐합 한 뒤 교회 건물과 부지를 일제에 상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부차장을 지내다 귀국한 정인과 목사는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의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일제는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거나 재림에 대한 찬송가를 일체 금지시켰으며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찬송 또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기미가요가 울려나왔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결의한 감리교는 1940년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감리교 감독은 교회의 철문을 뜯어 헌납하고 교회 통폐합을 실시해 일제의 전승을 위한 물질 지원에 앞장섰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전도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참가를 독려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일제 초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기독 청년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모는 친일 주력인사들이 됐다.

친일 목사인가 독립유공자인가? 민문연, 독립유공자 이승길 목사 재심청구




▲ 장로교가 헌금해 만들어진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신문 보도 사진

ⓒ2004 CBS-TV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월 국가보훈처에 20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재심을 요청했다. 이들 재심 대상자에 이승길 목사와 김응순 목사가 포함됐다. 이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과 평양노회 등의 노회장을 지낸 인물로, 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05인이 구속된 사건에 가담한 공로가 인정돼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승길 목사의 소속 교단 대학인 총신대학교 백년사는 이 목사가 친일파 오문환에게 포섭된 것으로 기록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를 회유하기 위해 평양기독교 친목회를 이용했는데, 친목회원이던 이승길과 김응순 등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변절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하던 기독교신문 '복음신보'는 1938년 8월 이 목사가 교회에 국기게양대를 최초로 세운 인물로 소개하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군인들에게 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주동한 인물로 이 목사를 지목하고 있다.

이 목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개교시키면서 1941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총신대 백년사에서는 이 목사의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오문환 등 친일 세력이 학교를 장악한 친일교육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수 교수는 평양신학교가 "복음이 우선이기 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천왕이 앞에 나오게 되기 때문에 변질된 신학교"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는 일본적 기독교의 사역자 양성기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평양신학교가 일본화에 합당한 기관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평양신학교가 순수한 교육기관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해방 이후에 김구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목사의 아들로 광복회 인천지부장을 지낸 이준경 장로는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친일 목사들 이승만 정권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




▲ 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 총회록에 실린 신사참배 결의문.

ⓒ2004 CBS-TV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면서 친일청산이 무산됐듯이 기독교계 내의 친일청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친일 목사들이 이승만 정권과 군정을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감리교 초대총리사를 지내면서 시국연설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양주삼 목사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곧 무죄로 풀려난다. 해방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양 목사는 6.25 당시 납북돼 현재 행적을 알 수 없다.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한 장로교의 전필순 목사는 친일활동에 대한 신임을 묻었고 교인들은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냐'며 신임에 동의했다. 전 목사는 해방 이후에 총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연세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펼쳤던 김길창 목사는 반민특위로부터 황민화정책의 수뇌부 역할을 한데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 목사는 '말씀따라 한평생'이라는 회고록에서 친일 활동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목사는 해방 후 고향 부산에 내려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설립하며 교육사업가와 지역유지로 등장하며 교계의 노회장을 지냈다. 고신의 전호진 총무는 "(김 목사는) 그야말로 학교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교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며 "친일,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어른이 해방 후에 교계 주도적인 역할 (하는데 대해) 교인들은 실망했다"고 밝혔다.

성결교는 일제의 강요의 의해 자발적인 형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는 등 교리에 대한 폄하 등의 문구가 담긴 성결교 해산 성명서를 발표한다. 당시 성결교 총회장 이었던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 해산에 앞장섰으며 교단 해체 이후에도 일제 부역에 협조했다. 그러나 성결교 인물전에서 이 목사는 과(過)보다 공(功)이 많은 위대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고 한경직 목사 "신사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 교단 차원의 공개적 회개는 전무




▲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기독교 성도들.

ⓒ2004 CBS-TV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는 지난 2002년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 주일을 맞아 자신의 조부인 고 조승제 목사의 부일 행적을 열거하며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를 고백한다고 밝혔다. 조승제 목사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이라는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다.

조헌정 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에 대해) 저 자신에게 괴로운 부분이었고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아픔이 있다"며 "당시 많은 지인들과 목사들이 일제에 항거해 투옥과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일제 전쟁의 승리를 빈 조부님의 부일 행각은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임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단 차원의 친일 고백과 회개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로교가 1948년 총회에서 1938년 일제하에서의 이루어졌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재차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데 그쳤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에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결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참회와 고백을 찾을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장로교는 1958년 제43차 총회에서 김 목사의 책이 교단을 모독했다며 출판금지 결정을 내리는 등 친일청산에 대한 비판마저 차단시켰다.

'한국교회 친일을 말한다'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숨진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깃든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한켠에 자리한 권언호 전도사를 통해 신앙 회복을 촉구했다. 작은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했다가 천황모독 등으로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다.

권 전도사의 사위인 조명호 목사(평택 제일교회)는 장인의 평전을 펴냈다. 조 목사는 장인이 "삼천리강산이 다 감옥인데 내가 감옥에서 나간다고 풀려날 리도 없고 난 우상 숭배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며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한 신앙인의 승리를 후대에게 전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 교리를 부정한 친일 목사들의 승승장구로 인해 친미, 반공화 되면서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빛과 소금의 사명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한국교회, 물량적 팽창으로 각종 권력을 갖게 된 한국교회가 진정한 국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친일 고백과 청산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2004/08/13 오후 11:44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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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미리내 | 2004/08/18 16:22 | 기독교의 개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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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ruthking at 2004/08/26 13:17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와 삼신론이단옹호세력[1]색출 및 <뉴스앤조이>본질파악하기


<뉴스앤조이>본질파악하기 !! <뉴스앤조이>본질파악하기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

Ⅰ서론

일제 말기 한국 개신교를 오늘 이 시점에서 볼 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전통과 유산,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할 오점은 무엇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계속 살려가야 할 것이고 부끄러운 것은 그것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연구는 일제의 식민통치 말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통치의 실체와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제 말 한국교회의 행태에 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는바, 그것은 이 시기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등을 강요함으로써 '참담한 수난' 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일제의 박해와 한국교회의 순교정신을 부각시키고자 한 연구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개별적 친일 행위에 주목하면서 이 시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성향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외적 요인과 함께 교회구조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는 충실한 사실을 제공하는데 힘써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는 관점으로 이 시기의 '영광과 치욕'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자 한 실증주의적 연구이다.

이상에서 보듯 기존의 연구들은 훌륭한 연구 실적이지만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오욕의 역사' 이기에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적 사고로써 다른 시기 연구보다도 소략한 연구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는 이 시기의 부일 연구가 신사참배 문제에 편중되어 있어 부일의 전체적인 연구 실적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점에서 유념하여 연구하였다.

연구자료로써는 일본말기 친일행위를 소상하게 담고 있는 <기독교신문, 각 교단에서 발행한 신문, 신앙지>, <각 교단의 총회록> 등을 이용하고자 하며, 기타 관련 논문을 이용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상의 자료와 기존의 연구를 주의로 하여

Ⅱ장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라는 제목과 함께 친일행위의 개념과 구한말 일제시기 초기에 건너온 선교사들의 한국의식을 알아보겠다.

Ⅲ장에서는 기독교의 친일행위라는 주제 아래에서 황국신민화의 첫 걸음으로써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한국교회의 갈등, 그리고 이 정책에 협조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실태를 살폈고, 일부 친일적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황국신민화 사상을 고취를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며, 한국교회가 종전 이전 침략 전쟁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으로 징병과 징용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이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헌금, 출정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위문 행위, 군수품 헌납등의 규모에 관하여 기술하려 한다.

끝으로 일제 말 한국교회의 이러한 친일적 행태를 실증적 작업을 통하여 검토하려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비판이 없는 역사는 환상으로 그 자체를 잃어버릴 것" 이라는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사 연구에 한 사례를 제공하고자 하며, 기독교를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볼 것을 미리 이야기한다.



Ⅱ.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

1. 친일행위의 개념

우리 민족사에서, 일제 말엽의 친일행위는 학문으로든 감정으로든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최근에는 많은 서적이 나왔지만 그들의 친일행위를 나타낸 것이지 '친일파란 어떤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간의 막연한 반응으로 나타난 친일행위에 대한 내용들을 몇 가지를 알아보면,

첫째, 오욕의 역사니까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이다. 그러나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또한 오욕으로 말하면 임란·호란 국치와 분단이 전부가 오욕이다. 계절에 사계가 있듯이, 민족사에도 영욕의 소장은 있는 것이다. 3·1 운동이 여름의 무정한 기록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당자나 가족의 체면을 위해서 덮어두었으면 하는 인정론도 있다. 그러나 사를 위해서 민족사를 파묻어 버릴 수 는 없다.

셋째, 친일행위를 인식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이다.

그럼 친일행위란 무엇이고 친일파는 무엇인가? 건국후 우리 나라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을 당한 후 독일에 접근하여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완벽하게 처리를 하고 나라를 정립했던 것 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반민특위이다. 이 반민특위는 당시 소장파 의원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초기에 활발히 움직이다가 이승만의 집요한 술책에 의해 결국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인하여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이 친일파로 규정한 내용이 나오는데,

①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모한자. ② 한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이를 모의한 자. ③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④ 일본 국회의 의원이 된 자. 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 ⑥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또는 참의가 된 자. ⑦ 칙임관 이상의 관리가 된 자 ⑧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⑨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기관의 중앙간부를 지낸 자. ⑩ 군경으로 악질행위를 한 자. ⑪ 국내에서 비행기 또는 탄약공장을 경영한 자. ⑫관리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⑬일본국적의 취득을 위한 각 단체의 간부 중 악질 행위를 한 자. ⑭ 종교·문화·사회·경제의 각 방면에 걸쳐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자. ⑮ 반민 언론 또는 저술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자 및 특별히 개인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로 규정을 하였다.

허나 이러한 친일파들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시대적 피해자이다. 군대와 결탁한 총독부의 무한대한 권력 밑에서, 황도조선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민족앞에 죄인이 되어 버린 소위 친일파들은 일제 통치의 참담한 제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살기 위해서 어쩔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어 전폐를 주장한 자,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위령제'를 지낸 자, 창씨를 적극적으로 한 자, 선거법위반까지 해가면서 도회·부회 혹은 중의원에 출마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정녕 살기 위해 부일을 한 자들인가?

황민화를 위한 탄압은 남녀노소와 유명 무명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가 똑같이 당하던 악몽이었다. 해방은 되었고 사람들은 황민화의 탄압에서 벗어났고 새로운 나라도 탄생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친일파들이 끼친 해악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고로 연구자는 친일행위라는 개념을 폭 넓게 보고 싶지는 않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 자체가 친일이라는 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김성수 같은 인물은 한편으로 문화재 보호자의 일인자로, 또 다른 면으로는 적극적 친일행위자로 규정한다. 친일행위, 친일파의 개념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삶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행위, 자신의 영달의 위해 자기민족을 죽음으로 내몬 극단적 행위를 친일행위라기보다 반민족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예는 형사, 총독부 관리 등 적극적 부일자들이 해당 된다. 이들은 삶을 위한 행위가 아닌 반민족행위로 동포를 팔아먹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폭 넓은 개념을 사용한 친일행위를 사용하지 않겠다. 자신들의 영달의 위해 자신의 종교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들의 행위를 친일행위 즉 반민족행위를 친일행위로 보고 서술해 나아가겠다.



2.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인식

일제말 개신교의 부일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초기에는 우리 나라 사람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단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따라서 그 교단에 속해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동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교단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들의 평가는 현재 대체적으로 우호적이다. 근대적인 학문을 들여왔으며 그러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고, 병원도 만들었으며 서양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맞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분명 그 당시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리고 배워야만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한번 뒤집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아쉽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많은 미국인 선교사를 가지고 있던 개신교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선교정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친선교사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수습하는 단계였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대군주 폐하 탄일 경축회등의 민족적 행사등 정치적인 사안 등은 자발적으로 거행하였다기보다는 포교를 우선시한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거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행한 업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근대화 운동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근대화 운동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선교수단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등의 행동을 그들이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세웠다기 보다는 대체로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서 가난하고 못난 동양의 한 소국을 교화하는 차원의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를 들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배포하여 민족언어인 한글을 보급하고 그로 인해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개신교의 모든 선교지역에 해당된다. 개신교는 항상 선교지역에서 맨 처음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 개신교가 세계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민족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각 민족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했다기보다는 복음을 폭넓고 확실히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학교의 운영에서도 그들의 행동은 민족교육에서 멀어진다. 사실 각 선교회는 개신교계 학교에 무엇보다도 종교적 교화의 기능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입신 출세와 학문습득을 위해 영어를 포함한 일반교과의 교육을 기대하였다. 즉 학생들이 일차적으로 희망하였던 것은 기독교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 또는 국가와 결부된 근대적 학문이고 근대 교육이며 근대 문명이었다. 하지만 교회측에서는 영어를 정규과목에서 빼는 것을 골자로 한 개편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고, 이에 배재학당은, 교사진의 대부분이 미국인 선교사이고 학생들에게 고등지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예비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교재와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교육제도 및 사회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근대 학교에 어울리는 고등교육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개신교계 학교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창출해내는 기능을 일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친미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교육의 반일적 측면을 곧바로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학 이전의 숭명배청론이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육의 반일·친미적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의 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반봉건이라는 측면에서만 살피고 개신교 활동을 전반적으로 민족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개신교의 반봉건, 즉 근대화운동에 의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상실되었고, 나아가 서구문화에 대한 종속성을 조장해주었다는 이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우리의 독립보다는 단지 그들의 선교가 우선이었다. 즉 일제의 정교분리원칙을 그들은 철저히 따르는 자세를 가지는 데, 그리하여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들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복종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 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그리고 피셔(J.E.Fisher)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이란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정책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을 비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초기의 개신교가 부분적으로 '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교분리 정책이 확립되면서부터는 전반적으로 민족구원의 신앙형태보다는 비정치적 개인 구원의 신앙형태로 전개되어갔다. 따라서 근대 개신교의 정교분리 정책은 결과적으로 개신교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장부터는 이러한 사상을 가졌던 교단이 일제말 어떻게 부일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Ⅲ.기독교의 친일행위



1.신사참배 강요문제와 기독교



a.기독교내의 갈등

처음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처음 거부하였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민족적인 저항의 형태의 논리가 아니라 단지 십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에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 신사참배를 하였던 것을 정교분리의 형태의 종교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친일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행했던 행동들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첫째로 신사참배를 '국민의 의례' 라고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우상종교라고 거부하는 것은 불경죄에 가깝다." 고 주장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계속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목적인 종교적인 변절보다는 친일화로의 유도에 더 주력하여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건설>을 위한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을 마련하고 그 거점으로 신사참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신사란 일제 황실의 조신인 태양신(天照大神)과 나라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들인 전열장병에 참배하는 것인바, 일본인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행위, 국가의식이라기보다는 보양을 하는 즐거운 행각이었다. 따라서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前) 까지만 해도 한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주사변은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본정부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게 하였고, 아세아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 이어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므로 일제에 대한 한인의 충성과 헌신이 긴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인을 보다 더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한 가지 수단으로써 일제는 모든 한인이 신사에 참배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의 목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국민정신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의례로서의 신사참배가 천황 중심의 침략전쟁을 위한 사상 통합이었고, 이것을 군국주의자들이 주체가 되어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 파시스트의 정신적 상징인 신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세워진 것은 1925년 10월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이다. 일제는 1919년 제국의회에서 조선신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한 후, 이 신사를 약 4년의 기간과 157만원의 돈을 들여 완공하였다. 그후 조선신궁은 총독의 공적 신사로써, 또는 국가행위에 사용하는 목적을 가졌기에 일황에 대한 충성의 장소가 되었다.

그후 1933년까지 신사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1935년 11월 평안남도 지사(知事) 안무직부(安武直夫)가 기독교 학교들에게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교회는 대체로 거부하였다. 이때 정면으로 거부한 평안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맥퀸은 1936년 1월 20일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숭의여학교 교장인 스누크여사는 추방되었다.

이러한 강열한 저항에 부딪친 일제는 1936년 1월 29일 윤치호와 양주삼이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 갔을 때 국장인 도변(渡邊)은 " 신도의식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이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라는 설명을 통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해시켜 주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신사참배가 계속해서 교인들 사이에 문제화될 때, 감리교 통리사(通理使) 양주삼은 감리교보 제 39호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으로부터 통보받은 내용을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①신사의 봉사(奉祀)는 종교가 아니다. (신사와 종교의 주관부서가 다르다. 종교는 문부대신이 관장하고 신사는 내무대신이 관장한다.)

②각 개인의 신교는 자유다. (신사참배는 신앙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인바, 양통리(梁通理)는 신사참배가 신앙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示唆)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7년 그해 10월 모든 학교와 기관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를 호창 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신도의식에 참가시키기 위한 일제의 강요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고도의 제국주의적 정책인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한국교회내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의견의 분열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써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인정하듯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 또 설사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 교회를 폐쇄시키면서까지 참배에 거부 할 까닭이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사참배가 애국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제의 회유 때문에 한층 더 깊어 갔다. 선교사들의 태도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는바, ㄱ.감리교회 선사들은 미온적인 태도 표명 ㄴ.미국 북장로교회 선부 소속 선교사들은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 ㄷ.언더우드등 일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결의는 당연한 것이다." 라는 표명을 하였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내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민족의 긍지를 가진 채 적극적인 투쟁을 하였다.



b.기독교 신사참배의 실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기독교와 시국>이라는 글에서는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황국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생략-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총리사가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공문으로 신사참배를 묵인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은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는 국가의식' 이라 하여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가장 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기독교친목회> 지도인물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을 초청하여 평양시내에 있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평양 기독교친목회를 통하여 신사참배 결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또한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들을 사전에 검속(檢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렸다. 회무중(會務中)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 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결의를 하였다.

「아등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통후(統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成)을 다하기로 기함.」

결국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져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참배 결정과 행동에 대해 강한 반발이 일어났는 바, 장로교총회중 크로더스 목사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헌법에 위배된다." 는 항의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7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검거한 수가 2,000여명이나 되었고, 50여명이 순교하고 나머지는 해방후 풀려났다.

감리교회에서는 목사직을 파면, 면직, 정직, 강제로 사임케 된 목사들이 50여명 있었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강하게 나타나자 「청년」지 주필인 강백남은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님> 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근래에 국가의식 즉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조선교회에 막대한 동요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전제한 후, 「-생략-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배함이 당연할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 애지심국(愛之心國)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 집니다. 그런 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죄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 하므로 신사참배 논쟁은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의 한국교회는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고로 교회의 최고 상회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하므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모순을 낳았다.

이후, 새로운 단계의 신사참배의 형태로 변하는바,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 참배자의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 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郞)은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동조동근론>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천황, 제명천황, 천지천황, 신공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

이 신궁 건설에 한국 지도자들을 노력 동원케 하는 일제의 의도는 노력 동원으로 작업의 큰 진전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을 노렸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노회총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 이름으로 부여신궁 근로봉사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대표 앞으로 보냈고 동년 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봉사대원은 경성노회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회 73명 이었다.

감리교 또한 1941년 10월 9일 경기교구를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노동봉사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연맹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구와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교구외 다른 교구의 목사, 신도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봉사 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노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기독교 제 1회총회에 참석하여 윤세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참배를 떠나므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상에서 나타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정리를 하면

①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회유되고 매수되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② 신사참배는 신앙양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행위가 곧, 일제에 투항, 친일을 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후 갖가지 친일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식된다.

③ 흔히 신사참배 거부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항거이라고 하지만 일제의 계속적인 회유로 인하여 부일의 밑거름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④ 하지만 또한 많은 목사들과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기도 하여 일면으로 기독교가 신사참배에 관하여 무저항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2.황국신민화 정책과 기독교



a.기독교의 황국사상의 고취

일반적으로 지배국의 식민지 민족에 대한 사상적 세뇌는 토착민의 민족적, 문화적 독자성을 멸시 내지 말살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 되고 있다. 일제는 한민족에 대한 통치정책을 소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전쟁 정책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일을 위해 철저한 사상통합을 진행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사상통합의 정책을 조직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제 7대 총독 미나미(南次郞)이었다. 그는 1936년 8월 총독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관동군사령관이었었고 일본정부내 군국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는 바, 1938년 2월 22일 도지사회의중 말한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조선인의 완전한 황국신민화에 의한 내선일체를 조선 지배의 근본으로 하고 그것에 의하여 조선을 대륙병점기지화하여 아세아 침략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에 그는 더욱 황민화의 실질적 집행을 위하여 광분하였다. 미나미(南次郞) 일명 <조선통치 5대 지침>의 정강을 발표하였는바, 이 지침은 국체명징, 내선일여, 교거진작(敎擧振作),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별신(庶政刷新) 등으로 일제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실천방법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宮城遙拜), 국가국기의 존중, 일본어의 보급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하여 황국정신의 현양(顯陽),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생활혁신, 전시경제정책에 협력, 근로보국, 생업보국, 군인원호강화 등을 부르짖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조직 강요에 1939년 9월 8일 장로회는 신의주 제 2 교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결성식(궁성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황군장병 및 동양평화를 위한 기복)을 갖고 선서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정부는 종교를 대함에 있어서 정책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ㄱ.종교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종교로 하여금 기존하는 정부의 기본적 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킨다. ㄴ.종교를 통해 그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게 하려는 기능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한다. 일제는 이러한 종교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1)신앙지와 교계신문

「활천」(성결교회 신앙지)은 1939년 12월 <팔굉일우의 대원리>이란 사설에서 「팔굉일우의 대이상은 일본제국의 건설 정신이요, 이상이다.」라고 정의 한 후, 일청, 일로전쟁과 만주사변을 이 사상을 사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미나미 총독이 강조하는 내선일체도 바로 이 정신을 고조하는 것으로서 이 정신이 황도정신이요, 동시에 성경정신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1940년 2월호 <황기(皇紀)이천육백 기념식년에 당하여>란 사설에서는 「우리는 황기이천육백년을 당하여 황조황가의 성덕을 흠향(歆饗)하며 천황폐하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봉축하는 동시에 -생략- 더욱 조국 정신을 발양하며 황운부익(皇運扶翼)의 실을 거함으로써 국운무한의 발전에 진할 것을 맹서하자」고 하였다.

「청년」(감리교계통의 신앙지)은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사견>이란 글을 실었다. 이 내용은 「현재의 내선일체는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가히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신적인 내선일체는 아직 미흡한 바, 황국신민서사의 2조 "우리들은 합심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한다."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며 또 하난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형제 의식을 갖고 서로 믿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하였다.

「기독신보」(장로회)는 1937년 10월 12일 <기독교인의 국가봉사>라는 사설에서 「기독교인은 여력이 다하도록 황실을 봉재하며 만분의 일 이라도 황은에 봉답하며 국운을 유성하게 함이 의무이다.」라며 황운(皇運)을 부익(附益)하자고 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각 교파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들을 강제 폐간시키고 일제의 정책을 전시하 지시, 전달 하고자 하는 의도로서 <기독교신문>을 창간케 하였다. 동년 4월 18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회의실에서 기독교신문협의회 창간 제 1회 이사회가 열렸다. 창간 이사회는 총독부 경무국 이사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동과 검열계 주임이 참석한 가운데 장노교에서 3명,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구세군(救世軍)에서 1명 등이 참가하여 1942년 4월 29일 창간호를 냈다. 창간된 기독교신문의 강령에서 발행취지와 목적을 열거하고 있는 바, 황민화적 내용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들은

①반도기독교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②종교의 국민정신진흥과 국민사상 계도

③필승체제의 확립에 관한 계도

④내선일체 완성과 국어생활의 철저 등이다.



2) 예배 및 행사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서도 황국신민화적 내용이 포함되어 가는 이질적 현상이 나타난다.

예배에서는 황실융성을 위한 기복, 전승기원예배 등으로 이질적 내용으로, 행사에서는 주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 그리고 시국강연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예배와 회의도 단축 또는 간소화 형태로 진행되었는 바,

제 36회 전북로회에서는 구주탄생일은 대정천황제일이므로 24일로 변경하여 간소한 축하예배만 드릴 것이며, 매주 3번의 집회는 단축하여 당분간 1회만 할 것을 소속 교회들에게 제시하였다. 감리교회는 '교단 규칙 제 108조와 114조에 의한 상임위원회는 총회를 대신하고 구성임원회는 교단회의로 하고, 금년 2월 개최하려던 정기교구회 및 금년 4월에 개최할 정기총회는 무기한 연기한다.' 고 발표하였고 예배시간 단축실시에 관한 이유를 「한 시간이라도 노동시간을 늘여 생산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방법론으로 주일 밤에 모이는 예배를 1회로 단축하고 기타 예배는 그 교회의 사정에 따라하고 당국의 요청에 따라 시간을 변경하는 조치를 교회주관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3)찬송가

1907년 6월 20일에 발행된 「찬미가」는 15곡이 수록된 찬송이었다. 이 찬송 중에는 애국사상을 고취 시킨다는 일제의 생각에 의해 3장의 찬송가가 있었는데, 1장 4절, 10장 2절, 그리고 14장이었다.

그후, 1923년에 간행된 「청년찬송」은 일하러 가세(남궁억), 금주가(임배세) 등이 실려 있었다. 1931년에는 각 교단이 찬송가 합동문제를 논의한 결과 장로회, 감리교 두 교단에서 주관하여 「신정찬송가」를 만들기로 하고 편집, 발행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교단에서는 기존의 찬송가를 보완하여 사용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황민화 현상이 시급해 진 일제는 찬송가를 변형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먼저 '일하러가세'와 '금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신정찬송가도 삭제와 가사를 바꾸게 하였다.

1943년 5월에 조선야소교장노회(朝鮮耶蘇敎長老會) 종교교육부 주관으로 기존의 찬송가를 전체적으로 개편하였는 바, 새로 개편하는 이유와 목적을 「복음이 전파된지 반세기를 넘어 서면서 대동아공영권의 획기적 역사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될 때, 본 성가에 대하여도 국체를 중심으로 한 재 검토의 시기에 이르렀다. -생략- 이러하기에 당국의 지도하에 거의 반년의 세월을 들여 본 성가에 있어도 재삼 검토를 하여 국체에 일치하도록 가사를 수정함은 물론, 특히 권두에 국가(國歌)와 유미유까바, 국경절(國慶節)에 부르는 노래, 국민서사 등을 실어 특수한 집회시마다 국민으로서의 필요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워졌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4)지도노선

감리교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지도노선은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 잘 나타난다.

제1. 사상지도

①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② 기독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에서 구현됨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③ 충군애국정신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제2. 교학진작 ①항 국어보급(國語保給)

제3. 사회교육 ②항 황도의양(黃道宜揚)



통리자(通理者) 정춘주가 각 교회주관자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도

① 매월 8일 대동아 전쟁에 관한 봉재식을 거행할 것

② 예배시간을 노동봉공에 지장을 주지말 것

③ 애국헌금 기타 국민의 의무 수행에 성의를 다할 것 등으로 교단 차원의 일로 협조를 요구했다.

장노회의 지도노선도 「일본기독교조선장노교단 실천요목」에서 잘 나타나는 바,

제1. 국가에 봉공

①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달(完達)을 위하여 사상 완벽을 기할 것

② 전시 체제하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③ 징병 의무 및 정신을 강조 할 것

④ 통후봉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실시할 것

ㄱ)황군상병장병(皇軍傷病將兵) 및 가족 위문, ㄴ)군사지원사업, ㄷ)국민저축실시, ㄹ)귀금속류 헌납, ㅁ)전시노동봉사 ㅂ)매월 일정액 국방헌금 ㅅ)신사참배 및 필승 기원 등을 실천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국사상을 고취시켰던 일들은 주로 교단의 집행부에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b. 한국교회의 일본적 기독교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교회중의 하나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한국에 상륙시켰다. 1913년 8월 15일 서울에서 제 1회 일본기독교조합교회 한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이 교파는 철저한 침략주의에 앞장섰다. 조합교회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재벌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조합교회가 한국내에서 주로 한 일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한일동조론을 내세워 일제의 어용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군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국회에 제출되자마자 통과되었다. 종교단체법의 형식상 내용은 국민정신의 선도에 종교의 역할을 평가하고 종교의 지위를 명확히 하며, 종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교회가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는 일본 교회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상 한국교회와의 통합을 추진케 하였다. 우선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의 교회만을 문무성에 등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결과 일본의 3대 교파인 일기, 조합교회, 감리교와 일곱 교파만이 문무성에 등록케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교파들에게 한국교회와의 합동을 추진케 하였는 바, 이렇게 한 의도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예속시켜 침략전쟁에 순응케 하기 위해서였다.



1)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감리교 총회에서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한 후,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학원안에 있는 해리스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결교회는 「활천」1940년 5월호에서 이사장의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에서 「일본성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전제 한 후, 「동경에 가서 일본성결회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중이다.」라고 보고하였다.



2) 조선기독교 연합회

일본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도로 일제 한국교회 안에서의 교파합동을 위에서와 같은 목적으로 추진하였는바, 먼저 1938년 5월 8일 년 후 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기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임원을 맡은 사람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이며, 81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 바,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기독교회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는 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3)조선기독교 혁신교단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회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이 의장이 되어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는 경성노회에서 혁신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론이 거론되자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역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산상중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내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해졌다.



4)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1942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 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했다.



5)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장로회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학원내에 있는 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당시 총회장 김응순에 의하여 제 31회 총회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그리고 헌법개정위원,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았으나 이본기독교조선교단안이 나오자 논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 날 제 2차 회의에서 규칙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1943년 5월 7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회 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바,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가 되었다.

교단 총회 임원에는 의장에 조승제가 선임되었다.

이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하였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합동에 기함」이란 감리교보사설에서 「교회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1943년 9월 부전(富田, 일본기독교단 대표)은 조선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교회의 합동을 강조하였는바,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들의 회동 이후, 장로회단은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에서 <조선내 기독교 교파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위원 선정은 중앙상치위원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합동을 가결하였는 바, 합동에 관한 명분을 「그리스도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기독교 각파를 합동하여 단일교단을 조직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합동 전권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월 12일 조선기독교 교파 각파 합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 1회 모임을 중앙교회에서 가졌는바, 모인 교단은 다섯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다섯 교파들이 합동키로 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위원 비례 : 장로회(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군(4명)

③ 제 1차 준비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예배당

④ 합동 임시군무소 : 정목장로교회 사무실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 1월 26일과 3월 16일에 열린 두 번에 걸친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모였으나,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속에서도 일제는 재차 교파합동을 요구한 바, 1945년 7월 19일 교파합동 찰핍위원회를 정동교회에서 열어 장로회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루워 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위임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하려 하였으나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동의하였고, 총독부 정무총감 고오도의 치리(治理)를 받게 되었다.



3.전쟁동원과 기독교



a. 징병, 징용에서의 역할

1) 징병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 청년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데 대하여 크나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1938년 8월까지 약 3,500여명의 지원자가 살도(殺到)해서 6.7 : 1 이란 높은 지원율을 기록했고, 징병령이 실시되기 이전인 1943년까지 약 1만 8천 가량의 한국 청년이 일분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시적 흥분으로 철없이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

① 농촌 피폐에 못 견디어 살길을 찾아 지원한 경우

② 일제의 교묘한 술책에 현혹되어 지원한 경우

③ 지원병 제도를 찬양한 이른 바, 지도자들의 강력한 권유로 지원한 경우였다.

①의 상황은 농촌 생활의 궁핍으로 노동 이민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에 간다라는 생각을 하여 지원을 하는 사람들로서 증가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②의 경우는 ㄱ.지원병 축하회등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업 ㄴ.신문등을 동원하여 선전케한 바, 지원병에 입대하여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③항은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주로 강연을 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회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을 각 교회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 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 영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안되는 진실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을 오히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모순도 보이고 있다.



<표1. 미·영 타도 좌담회 참가자 및 화제내용>

<최원규 엮음.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서울: 청아출판사, 1988 p291-341>



1941년 12월 10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보국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국가는 분쇄시켜 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전제 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노(黑奴)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생략-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 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조선동포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자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표명, 감사예배, 결의대회, 감사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자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생략-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우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온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이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 연합으로 승동예배당에서 <징병제감사기독교 신도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대회 내용은 국민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당국에 감사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간 조선 시정(施政)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생략-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황국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전문은 「조선 청년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아등은 감사 감격한다. -생략-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 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주임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제도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전보,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신도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는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 제 31회 총회에서 총간사 정인과가 보고를 한 바, 「1943년 2월중 본부 주최로 대동아전쟁의 목적과 기독교도의 의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연사를 파견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하며 징병령 실시를 철저하게 촉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신문 이사 박인덕은 <징병제 실시와 반도여성의 각오>란 사설을 실었고, 조선구세군본부의 회원정의(檜原正義)도 <열혈남아는 결전장으로 나서자>란 촉구문을 실었다.

<표2. 친일자들이 징병을 위한 활동>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p172-217>





2)징용

일제가 제 2차대전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군대의 증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력 또한 청장년의 대량 진출에 인력난과 군수산업의 폭발적인 노동수요 증가는 1942년부터 '국민동원계획'으로 수정 강화되었고 1943년 10월 8일의 '생상증강노무강화대책요강'은 국민 징용령에 의한 유휴불급(遊休不急)노무의 전면도원의 전용과 근로보국대의 강화, 군 비복무자의 노무동원과 여자노무의 대체이용 강화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징용은 현원징용(現員徵用) 및 친규징용(親規徵用)으로 대별되며, 친규징용은 특수징용과 일반징용으로 구분되는바, 한국에서는 일반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드 끌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연은 상부로부터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면사무소의 노무계 담당자와 마을 구장(區長)등이 계획을 세워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곧바로 징용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일을 일본인도 아닌 말단의 부일한국인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다.

강제로 연행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 방법인 국민동원 계획에 의한 동원을 하였다. 하지만 목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이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최근에 일반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층 및 유산계급 중에서 재빨리 도피하거나 혹은 주거를 전전하는자, 그리고 병(病)에 걸리게 하여 자기의 수족에 상처를 내어 불구자가 되어 징용을 기피하는 자들이 생겼다.」는 보고를 한 사실에서도 파악된다.

이 보고서에서 징용의 처참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 민심의 이러한 동향을 외면하면서 친일자들은 국민개로(國民皆勞) 산업보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징용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내에서도 나타나는 바, 기독교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징용령이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징용
Commented by 송재근 목사 at 2015/04/22 01:56
이런 내용들을 절대로 삭제하지 말아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압력에 굴복하여 많은 참고 자료들이 삭제되어서 너무 안타갑습니다.
일제 말기에 변질되었던 그때 보다 지금은 더 많이 변질되었는데 교회들이 타락의 잠에서 깨어
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을 짓밟도록 인도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분위를 만들어 주고
예수는 구원에 이용이나 하려고 하는 그런 신앙들이 한국교회를 쓰나미처럼 덮어 버렸는데
이글을 읽는 분들은 기도를 하십시요 누가 어떻게 해도 주님은 뜻은 이루어 진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