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관념론.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관념론. Show all posts

2021/04/02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 프로그람 +박맹수+박치완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

Globalogy: The Humaniti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

구분 시간 발 표  및  내 용 진행

개회

기조강연 09:00~09:10 등록/접수 원영상 

09:10~09:20 【개 회 사】 박맹수(원불교사상연구원 원장/ 원광대학교 총장)

09:20~09:40 【기조강연】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박치완(한국외국어대학교)

제1부 해외의 지구인문학

09:40~10:00 【1. 지구재난학】 지구살림의 영성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토호쿠대학) 조성환

10:00~10:20 【2. 지구예술학】 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아오모리현립미술관)

10:20~10:40 휴 식

10:40~11:00 【3. 지구종교학】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토론토대학)

11:00~11:20 【4. 지구기학】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 眞, 원광대학교)

11:20~12:00 제1부 섹션토론

12:00~13:00                                  점심식사

제2부 지구인문학 의 이론과 상상력

13:00~13:20 【5. 지구형이상학】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이원진(연세대학교) 이주연

13:20~13:40 【6. 지구인류학】 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차은정(서울대학교)

13:40~14:00 【7. 지구정치학】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역사정치학자)

14:00~14:20 【8. 지구유학】 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통(通)과 균(均)을 중심으로 김봉곤(원광대학교)

14:20~14:40 【9. 지구살림학】 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조성환(원광대학교)

14:40~15:20 제2부 섹션토론

15:20~15:40 휴 식

제3부 지구인문학 의 실천과 연대

15:40~16:00 【10. 지구수양학】 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원광대학교) 김봉곤

16:00~16:20 【11. 지구교육학】 세계시민에서 지구시민으로  

                                               이우진(공주교육대학교)

16:20~16:40 【12. 지구윤리학】 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원광대학교)

16:40~17:00 【13. 지구평화학】 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원광대학교)

17:00~17:30                            제3부 섹션토론 

종합토론 17:30~18:00                                종합토론 허남진

4

【개회사】지구위험시대의 학문의 전환과 대학의 역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번 학술대회를 빛내주기 위해 캐나다와 일본, 그리고 한국의 각지에서 참석해 주신 모든 선생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지구위험시대에 요청되는 학문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의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2020년 4월부터 매 주 <지구인문학 연구모임>을 진행해 왔고, 그 과정 속에서 경계를 넘어선

다는 것,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1년 넘게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지구라는 단 하나의 공동체에서 서로 공생하며 조화롭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학의 사명은 학문적⋅사상적 토대를 확고하게 정 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구’는 전 인류의 삶의 바탕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구성원들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구공동체에 대해 무지해 왔고, 무관심하 게 여겼으며, 번거로워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사는 이곳 지구,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든 가 족들을 위해 겸허히 마음의 자리를 내줄 때가 왔습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지구가 아닌 지구 가 있어 인간이 산다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그 지구적 전환을 위해 준비한 자 리가 오늘의 ‘지구학 학술대회’입니다.

오늘 학술대회에서는 박치완 교수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가타오카 류 교수님의 지구재난학, 오쿠와키 다카히로 교수님의 지구예술학, 조규훈 교수님의 지구종교학, 야규 마코토 교수님의 지구 기학, 이원진 교수님의 지구형이상학, 차은정 교수님의 지구인류학, 김석근 교수님의 지구정치학, 김봉곤 교수님의 지구유학, 조성환 교수님의 지구살림학, 이주연 교수님의 지구수양학, 이우진 교 수님의 지구교육학, 허남진 교수님의 지구윤리학, 원영상 교수님의 지구평화학 등, 다양한 영역에 서 경계를 넘나드는 지구학 발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5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고정 관념과 낡은 방식을 과감하게 바꾼다 는 것을 뜻합니다. 부디 오늘 진행되는 학술대회가 종래의 인간중심주의를 다시 돌아보고 당면한 지구위기상황을 깊게 고뇌하는 성찰과 사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오늘 첫걸음을 뗀 ‘지구학’이 장차 21세기에 한국학이 나아가야 할 학문적 지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선생님들이 앞으로도 끈끈한 학문공동체로서 진지한 학술교류를 이어 나가 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것으로 개회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2021년 3월 19일 

원광대학교 총장 박맹수

 


 

   

 

  차 례

개회사····························································································· 박맹수  4

□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박치완……  9

□ 지구살림의 영성학····························································· 가타오카 류…… 33

□ 꿈꾸는 사과, 지구예술학은 가능한가?··············· 오쿠와키 다카히로(奥脇嵩大)…… 47

□ 지구근대성 시대의 종교 연구······················································· 조규훈…… 59

□ 지구운화 내 공존재(共存在)로서의 인간·························· 야규 마코토(柳生眞)…… 69

□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이원진…… 83

□ 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차은정…… 107

□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김석근……119

□ 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김봉곤……137

□ 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조성환……151

□ 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161

□ 세계시민주의에서 지구시민주의로·············································· 이우진……177

□ 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189

□ 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201

 


 

【기조강연】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 : 지구(인문)학의 연구방법론을 제안하며 박치완(朴治玩)*

요약문   

삶의 공간, 즉 주거지는 그것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위치하건 인간이‘장소-세계(place-world) 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그런데 현대인의 생활공간이 점점 도시화, 상업화, 디지 털화되면서 장소-세계를 잃은, 빼앗긴 실향민들의 수가 매년 늘고 있다. 오직 경제-성장만을 목표로 하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삶의 진원지인 장소-세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 소가 자본화되고, 비인간화된 곳에는 예외 없이 무한 소비를 부추기는 상업공간들이 들어선다. E. 렐프의 표현대로, 현대인은‘장소 상실’이 보편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우리가‘장소’개 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인간 = 장소-내-존재(Being-in-place)>라는 의미를 되새 겨보기 위해서다. E. S. 캐이시에 따르면,“장소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에 비춰보면,‘철학을 한 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사는‘장소를 철학화한다(philosophizing Place)’는 말이다. 실존의 장소를 주체, 의 식의 직접적 대상으로 연구한다는 뜻이다.‘장소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lace)’은 장소에서 발원하고 전개되는 개인과 집단(공동체)의 문제를 응용현상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한마디로‘철학을 장소화한다(placin g Philosophy)’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동안 철학은‘어느 곳’에서나‘언제나’ 적용 가능한 일종의‘기하 학적 공간 보편주의’에 함몰돼 있었다. 제3세계의 철학이 재지성(territoriality)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도 여 기에 있다. 재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제3세계의 철학은 운명적으로 구미 중심의 세계지배적·식민 적 지식체계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00년대를 전후해 이를 자각한 제3세계에서 탈식민적 운동의 일환으로 새롭게 제안한 철학의 디자인이 바로‘지역-로컬 기반의 세계철학(locals-based global philo sophy)’이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에서 이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지구학’을 지역-로컬 기반의 세계 철학 운동과 연대해 어떻게 한국철학을 세계화할 수 있을지 그 방법론에 관한 제안을 하는데 연구 목표가 있다. 주제어 : 장소, 장소 상실, 장소의 현상학, 철학의 장소화, 장소의 철학화, 지역-로컬 기반의 세계철학, 지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차 례 

I. 머리말 : 어디에서 철학을 하는가?

II.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과 그 방법론 

  1.‘지구학’, 용어 선택 또는 번역어의 문제

2. 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의 필요성

3. 로컬과 글로벌, 서구와 비서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E. 두셀의 해법

III. 맺음말 :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대와‘장소감’이 필요한 이유

---

“어디?”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는“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또는“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철 학에 대한 권리에 대한 질문은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어디’는 곧 어디가 철학의 권리를 갖는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철 학의 가장 적합한 장소는 어디인가?” 

- Derrida, cited by B. Janz, In“Philosophy as if Place Mattered”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 E. S. Casey, Getting Back Into Place.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종속된 장소 안에 존재하며, 우리가 장소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장소가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장소는 우리 안에 있고,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다.” 

- E. S. Casey,“Between Geography and Philosophy: What Does It Mean to Be in the Place-World?”

I. 머리말 :‘어디’에서 철학을 하는가?

철학도 과학도 실제“세계에 대해 더 완전한 그림(a more complete picture of the world)” )을 그리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인간’을 잊는 경우가 허다하다.‘인간’이 철학 과 과학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것은 인본(인문)주의가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철 학과 과학이 추구하는‘더 완전한 그림’에서 어떻게‘인간’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는가? 철학 자나 과학자마저‘이해관계’에 따라 마치‘비즈니스’나‘사업’을 하듯 행동하는 것을 더는 지 켜보고 있어야 할까?‘인간’과 무관한,‘인간의 삶’과 거리가 있는 철학과 과학은“우리의 지성 사가 정당한(right)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반증이라 아니 할 수 없다.2) 

M.  맥베스가 철학과 과학에 필요한 것은“인간적 관점(human perspective)”,“인본주의적 규율 (humanistic discipline)”이라 강조하며 인간의 지성 활동이“인간의 삶, 우리의 삶, 그것들의 다양 한 측면”을 탐구하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라고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주어진 현실을‘객관 적으로’,‘과학적으로’,‘절대적으로’ 사고한다고 빙자하며,‘인간’과‘삶’을 망각한 것이 철 학과 과학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 맥베스의 주장인즉, 철학과 과학이 추구해야 할‘더 완전한 그 림’에는 기술-경제의 지배 시대일수록 인간과 인간의 삶을 위한 배려에‘더 많은 고민’을 투자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배려하고 고민하는 학문은“우리가 사고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과 함께 우리가 어디에 존재하는가(where we are)로 부터 시작된다.” ) 

요인즉 철학과 과학은 각자가 존재하는 곳, 즉 삶의 장소에 대한 사고의 촉각을 계발할 때 기술 과 경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잊혀진‘인간’을 삶의 본래 자리, 하이데거의 표현대로,‘세계-내존재(Being in the world)’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세계-내-존재라는 것은 개 인과 사회공동체, 로컬과 글로벌 간에 자유와 평화, 정의와 분배, 인권과 민주주의가 일상의 삶에 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괘를 같이 한다. 철학과 과학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것 과 새롭게 등장한 것, 현실의 작은 조각에 대한 연구와 현실 전체를 통찰하는 연구, 한 지역-로컬 문화에서만 통용되는 지식과 전 지구촌에 이롭고 유용한 지식을 종합하는 노력에 더 많은 공을 들 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학자는 단지 과거의 개념들, 과거의 담론들과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임무를 다한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는 당대에 제기된 물음들과 씨름하는 것이 일차적 임무다. 자신과 씨름하며 자신의 철학을 그가 사는 시대와 장소 위에 새로 운 담론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곧 철학자의 역할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대의 변화에 부합해‘창조된’철학적 결과물이라고 해도 5대양 6대주의 독자를 만족시킨 적은 드물거나 거의 없다. 이는 철학에도 기본적으로‘지리-문화적 색깔’이 배태돼 있다는 방증 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이성-진리-보편학인 철학도 지리(더 정확하게는‘장소’)의 제한을 받는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철학은 그 것이 탄생한‘장소’에서 자양분을 얻는다는 점일 것이다. ) E. S. 캐이시가 장소로 되돌아감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히 말하지만, 재 지성(在地性, territoriality)이 없는 철학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의 재지성은 마 치 개인의 신분증명서와도 같다. 인도에서 출발한 원시·근본불교가 치열한 자기 응시와 직관을 중시하는 한국의 선불교, 염불 수행법을 위주로 하는 일본의 정토 불교, 자비와 이타행(利他行)을 강조하는 티벳 불교와 다른 것도 바로 그것이 탄생한‘장소’의 영향 때문이다. 로컬 지식의 저 자 C. 기어츠의 방식으로 이를 바꿔서 표현하면, 모든 철학은‘로컬 철학’이란 뜻풀이가 가능할 것이다. ) 단적으로 말해, 지리적 환경이 철학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미 숙지하고 있는 바지만, 아테네는 국가의 탄생지이고, 쾨니히스베르크는 순수이성 

비판 등 3대 비판서를 탄생시킨 칸트의 고향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고 믿었던 철학에 이렇게 재 지성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대개는“그럴 리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하 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른 장소(지역, 국가)’에서는‘다른 철학’이 탄생한다는 점이다. 단지 하나 의 가정일 뿐이지만, 플라톤이 만일 곡부(曲阜, 취푸)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는 제2의 공자가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강원도 평창의 판관대(判官垈)에서 태어났으 면 그는 분명 성찰이나 철학의 원리 대신 성학집요나 인심도심설을 남겼을 것이다. 철학 에는 이렇게 개인과 마찬가지로 장소, 번지수가 따라 붙는다.

철학의 재지성 및 본토성은 거듭 강조하지만 철학이‘장소’를 기반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증거이고 ), 철학의 적지(適地)가, 데리다가 믿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와 같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즉 철학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세계는 다양한 장소다(C. Geertz)” )라는 말과 같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런 이유 때문에‘하나의 보편적 대답’을 기대할 수 없으 며, 이를 기대하거나 염두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허황된 꿈인지 모른다. 감히 말하지만, 철학은 모든 사람, 모든 공간에 적용되는‘진리(episteme)의 학’이 아니라 개별 장소에서 각기 자신의 ‘의견들(opinions)’을 자유롭게 제시한 학문이었다고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자기 반성, 자기수련이 미족(未足)한 철학자들(philodox)은 여전히 마치‘야곱처럼’, 모두가 동일한 방식, 동일한 목표로 철학을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본고의 논제인 <철학을 장소화하기, 장소를 철학화하기>를 통해 필자가 근원적으로 역문(逆問)하

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은 기하학적 공간 보편주의자들의 믿음처럼 결코 장소와 무관한 학문이 아니다. 우리는 아테네에서, 슈투트가르트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서울에서, 동경

에서 철학을 한다. 철학은 재지적 세계관〔placial(geographic) worldview〕에 기초한 지적 구성이자 동시에 재지적 창조다. 그 때문에 재지성은“철학이란 무엇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골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결과물이 보편적인가 아니면 특수한(지역-로컬적인) 것인 가를 궁추(窮追)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결과물이 축적되었을 때, 즉 추후에 논의할 문제다. 재지적 철 학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런 철학을 실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편성/특수성의 문제가 선머리가 되어 논쟁의 화근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감히 말하지만, 한국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만일 탈장소적/초시대적“‘보편(성)’의 망

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대한민국과 같은 제3세계에서는 철학이 뿌리내릴 수도 시발될 수도 없다. 따라서‘비유럽적 개념화’를 시도해 철학을‘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재건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과제가 있을 수 없다. ) 데리다가 역설한 것처럼, 오로지‘그리스-서부 유럽’만이 철학의 적지인 것인가? ) 데리다 등 서부 유럽의 철학자들이 장소를 강조하면‘보편적’인 것이고, 비구미권의 학자들 또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장소를 언급하면‘상대적인’ 것인가? 

이상에서 필자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물음들을 본 연구에서 일일이 해명하거나 소화할 수는 없 다. 따라서 초점을 좀 더 좁혀 아래에서는 <철학 ≒ 장소(화)>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 제3세계가 중 심이 된 지구학 구성에 대해 논의를 집중시켜볼까 하며, 이는 곧 지역-로컬 철학의 장소화를 의미 하는 것이자‘지구촌’이라는‘장소’를 새롭게 철학화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II.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과 그 방법론 

제3세계의 지역-로컬 철학이 궁극적으로 보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 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D. 슈내퍼도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 구미에서 보물단지처럼 여겨온‘보 편주의’는 철학을 또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염원일 뿐 그것이 완성된 경우를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참된 보편주의’,‘진정한 보편주의’,‘이상적 보편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 이 없다는 뜻이다. N. 스코어의 언급대로, 하지만‘거짓 보편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거짓 보편주의’를 타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제3세계의 지역로컬 철학의 탄생이 사고의 다양성이란 지평 위에서 존재 이유(raison d’être), 정당성을 얻는 이 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미에서는 보편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해 타자, 타문화에 대한 배제를 감행했고, 억압을 정당화했

으며, 불평등을 은폐했다. 구미의‘거짓 보편주의’가 그 명을 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15) 

“ 오늘날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all-inclusive) 보편주의의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 

스코어의 위 언급은 지역-로컬의 장소를 철학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서론에서 우리는 장소를 철학화하는 것은 철학을 장소화하는 것이라 했다. 철학 이 장소화될 때, 철학은‘독일의 관념론’,‘미국의 실용주의’처럼 개별화된다. 현실적으로 철학 은 이렇게 장소를 중심으로 개별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보편’의 휘장을 둘러 스스로를 ‘보편적인 것’이라 속이고 또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많은 지역-로컬의 학자들이 이에 속는다. 

‘코로나19와도 같은’ 서구 유럽의 보편주의는 서구 유럽을 절대화함으로써 ) 타자 및‘다르게 세계를 보는 것(seeing the world differently)’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고의 다양성을 자체를 인정하 지 않고 획일화, 단순화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이 한 지역-로컬 철학(서부 유럽 철 학)이 철학 자체를 획일화, 단순화시킴으로서 다른 지역-로컬 철학이 개별화되는 길이 가로막혔다 는 점이다. 서구 유럽 밖에서 지역-로컬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적 운동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 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맥베스가 철학은“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진정으로 세계적인 철학”이다,“어느 장소에도 속하지 않은 철학은 분석철학이 유일하 다”,“장소를 가졌을 때만이 진정으로 세계적인 철학이다”고 강조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철학은 결국 재지성을 띄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으며, 지역-로컬 철학이 세계화되는 길 도 재지성의 개별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역설 같지만, 구미의 보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지역-로컬 철학의 탄생에 불을 지폈다.‘기 존의 세계철학’의 지형도가 서구 유럽 중심에서 지구촌 전체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는 원인 제공 자가 서구 유럽이라는 것이다.“세계화는 철학을 변화시켰고,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 C. 타운 레이의 언급대로‘새로운 세계철학(global philosophy)’은 이런 와중에 탄생한 것이며, 그는‘새로 운 세계철학(지구철학, 지구학)’의 탄생과 관련해 다음 4가지에 주목하고 있다: i) 비서구적 철학공 동체의 활동이 세계적인 철학적 대화에 있어 두드러진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점; ii) 비서구 철학자 들이‘기존의 세계철학(world philosophy)’에서 노정하고 있는 지적 폭력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 기하고 그 해결책을 새롭게 제안하면서 철학의 중심 무대로 진입하고 있는 점; iii) 새로운 전문학 술지들이 다양하게 출현하고 있고, 철학적 공동체들 간에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 서 철학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신을 요구하고 있는 점; iv) 환경 문제를 필두로 어느 사회, 국가나 할 것 없이 만연해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등 세계적인 이슈와 관련해 초국가적 

보상적 정의(transnational compensatory justice)와 차이를 부인하지 않은 공정한 포용과 인정과 같 은 논제를 제기하고 공유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는 점.

타운레이가 주목한 이 4가지 변화는 그 근저에“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제 더 이상 전 지구촌 

시민들에게“타당하지 않으며, 부분적이고, 잘못 인도된(irrelevant, partial, or misguided)” 것이라 는 함의가 숨어 있다. )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세계철학, 즉‘새 로운 세계철학’을 향한 변화는“유럽으로부터 물려받은 철학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의 심대한 도 전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마디로,“철학을 서구적 전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천해온 (different ways of practicing philosophy)” 제3세계철학자들에 의해 그간의 유럽 중심의 철학의 지 형도가 바뀌고 있는 셈이다. 

1990년을‘워싱턴 컨센서스’와 더불어 본격화된 세계화는 이런 점에서“우리에게 철학의 본질 을 재고하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분명‘역설’에 해당하며 ), 이를 서구 유럽 철학계가 새로운 소통과 대화의 기회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전통을 계속해서 고수할 것인지는 그들의 선택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서구 철학계가 전통을 고수하며‘기존의 세 계철학’을 지켜낼 수 있을까? 봇물은 이미 터졌고,‘기존의 세계철학’은‘새로운 세계철학’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분명 바뀔 것이다. ) 

한국철학의 세계화란 기치로‘지구학(global studies)’,‘지구인문학(global humanities)’을 주창 하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도 바로 이러한 세계철학계의 혁신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연 구의 목표와 방향을 좀 더 분명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며, 철학 대중에게 이 참신한 논의를 확산시 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국철학의 고유성, 독립성을 재지성(장소성)을 견지하면서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서구적 사고틀을 넘어서는‘지구 학’,‘지구인문학’이라는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출발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 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제기한 이념에 걸맞는 방법론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지구학’,‘지구인문 학’의 목표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유영토에만 국한된 물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이 그 대상인 물음이 기 때문에 그렇다. 나아가 지구공동체(global community)에 거주하는 인류가 바로‘지구학’,‘지구 인문학’의‘주인(주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필자의 문제의식을 아래에서는‘지구학’,‘지구인문학’이란 창의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보강해야 해야 할지를 중심으로 본 논의를 전개해볼 계획이다.

1.‘지구학’, 용어 선택 또는 번역어의 문제

제1세계에서 지구학(global studies, 글로벌 연구: 전 세계의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에 관한 연 구 ))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대한민국과 같은 제3세계에서 지구학(지구유학, 지구개벽학, 지구종교 학, 지구재난학 등)에 대해 화제를 삼는 것 간의 차이는 없을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무 엇일까? 제1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중심으로, 즉 세계의 중심부에서 바깥 세계를 관찰하며 어떻게 계속해서 바깥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력을 존속시킬 것인지를 고심한다. 반면 중후진국가나 저개발국가가 대부분인 제3세계에서는 지구학에 대한 본연적 연구보다 제1세계 로부터 주어지는 공적 개발원조(ODA)나 지원 정책들에 동참하고 협력해서 어떻게 하면 경제적 수 혜를 입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만일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나아가 상반되기까지 하는 논리와 방식으로 지구학이 연구된다면, 양 자 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제3세계에서 단지 제3세계적 방식으로 지구학을 연구한다 는 것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 접점을, 앞서 언급한,‘전 지구적 관점(global perspec tive)’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염두하고 있는 전 지구적 관점에서의 지구학은 제3세계가 제1세계와 당당히 맞서 연구 주체로 설 때 비로소 본연적 지구학에 대한 지형도가 그려질 수 있다. 제3세계에서 지구학을 연구하려면 따라서 지역-로컬의 기반학(underlying studies of locals)이 무 엇인지부터 선결(先決)해야 한다. 제1세계와의 문화적 대화나 지적 교류 과정에서 제3세계가 진정 으로 주체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면,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갖추는 것은 일차적 요건이다. 지역 -로컬 기반학이 없거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제1세계의 영향력만이 강화될 뿐 기존의 학문적 지배-종속의 관계는 호전될 수 없다. 냉정한 국제 현실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인 문학, 철학과 같은 순수연구 분야에서도 어김없이 지배-종속의 관계가 적용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제1세계와 비자발적·강압적으로 묶인 학문적 식민성의 매듭을 푸는 주체는 제3세계여야 한다. 제3세계가 주체가 되어야 제3세계의‘지식들(knowledges)’을 제1세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것이 더 유용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선결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기반학을 기점으로 1단계에서 는 제1세계에 의해 전개·전파되었거나 오늘날에도 전개·전파되고 있는 지구학, 즉‘세계지배 학’과 비교문화적·비교철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25)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지식/철학의 비 교 작업이 필수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제국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제1세계에서는 늘 <global studie s>를 실행해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26) 

2000년대를 전후해 나타난 새로운 변화라면, 예전의 국가 간의 교류, 양자 간 또는 다자 간 합의 등을 단일 국가가 중심이 되어 연구했다면, 오늘날에는 글로벌과 로컬들의 관계를 이슈별로 협력 하며 공동으로 연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글로벌과 로컬들 간의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이 중요한 시대적 화두가 되었고, 제1세계에서의 지구학은 이에 부응 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 등의 학제 간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국을 대표하는 글 로벌 문제 전문가를 양성을 목표로 미국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이를 고등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 중이다. 특히 2008년부터 <global studies>는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까지 결성해 매년 기획 컨퍼런스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27) 연구 분야를 특정 <그림1>: 제1세계(유럽→미국) 주도의 세계지배학 모형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 시기, 연구이론, 공동연 구 주제까지 연구자들 간에 공유하면서 지구학에 대한 관심은 제1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28) 

 

25)‘세계지배학’은 필자가 다음 논문을 참조해‘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 이후 제1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세 계를 지배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순수하게 조어한 것이다: M. Thomas & A. 

Thompson,“Empire and Globalisation: from‘High Imperialism’ to Decolonisation”,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36, No. 1, 2014. 19세기의 세계화(globalization)가 <Civilization, Westernization, Europeanization, 

Industrialization, Modernization, Colonization>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면 20세기-21세기의 세계화는 

<Americanization, Dollarization, McDonaldization, Virtualization, New Colonization, Digitalization, Hybridization, Planetization>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돌려 말해 후자는 전자의 21세기적 번역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세계의 중심은 이렇게 지배 형태만 바뀌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26) <global studies>는 2008년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1차 컨퍼런스를 개최했으며〔2009년 2차 대회: 두바 이의 전망 – 걸프와 세계화(두바이), 2010년 3차 대회: 글로벌 재조정 – 동아시아와 세계화(부산), 2011년 4차 대회: 신흥 사회와 해방(리오 데 자네이루), 2012년 5차 대회: 유라시아와 세계화 – 복잡성과 글로벌 연구(모스크바), 2013년 6차 대회: 남아시아의 사회 발전(뉴델리) 등이 개최되었음〕, 2021년 제15차 대회 는“팬데믹 이후의 삶: 새로운 글로벌 생명정치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캐나다의 몬트리얼(Concordia 

University)에서 6월 5-6일에 개최되며(원래는 2020년 개최예정이었으나 COVID-19로 순연된 것임), 2022년 에는 그리스의 국립아테네대학교에서 7월 22~23일 개최하기로 예정돼 있다(https://onglobalization.com/).

27) <global studies>를 학제로 운영 중인 대학으로는 미국의 피츠버그대학교, 미네소타대학교, 캘리포니아대 학교 등 49개 대학이 참여하고 있고, 유럽에는 영국의 런던경제대학,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스페인의 살라망카대학교 등 18개 대학, 캐나다의 경우는 턴대학교 등 6개 대학, 일본의 아키타국제대학, 도시샤대학 등 8개 대학, 홍콩은 홍콩대와 홍콩중문대 2개 대학, 중국은 중국정법대와 상하이대 2개 대학, 그리고 한국은 유일하게 부산대학교만이 연구 네트워크(Research Network)에 참여하고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28) 학제간 연구를 기초로 하는 <global studies>에서는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인류학, 사회학, 종교, 기술, 철학, 건강, 환경, 인종 등을 포괄하는 연구를 시도하며, 연구 시기는 그리스/로마 제국의 초국적 활동에

이러한 상황인식은 2020년부터 지구학, 지구인문학, 지구주의을 주창하며 공동(집단)연구를 시작 한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직시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29) 제3세계에서 연구자 몇 명이 모 여‘지구학’을 외친다고 해서 <global studies>가 비약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라 예측되지 않기 때문 이다. <global studies>를 단지 한글로‘지구학’이라 번역해 사용하는 것만으로 제1세계의 세계지 배학이 제3세계를 위한‘지구생명보호·배려학’으로 일신될 수 있을까?‘지구학’이 만일 제1세 계가 지적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지배학과 연구목표나 연구 대상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는 것 서부터 유럽의 식민주의 시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기 등 다양하다. 연구이론은 포스트 식민주의론, 포 스트 비판이론, 다문화주의 등이 주로 활용되고 있으며, 주요 연구 키워드는 상호의존성, 상호연결성, 교 차문화적 지식, 인권, 사회정의, 로컬/글로벌의 관계 및 작용, 글로벌 인지, 정치적 참여, 글로벌 교육, 글로벌 경쟁력, 참여적 민주주의, 세계시민, 효과적 시민의식, 국제테러, 국가안보, 기후변화 및 환경 파괴 등이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29) 주지하듯,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근년 들어‘개벽학’을‘지구학’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시도로‘지구인문학’이란 신개념을 만들어 다양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필자의 연구도 그 일환이 라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다소 우려스러운 것은 <globalization>을‘지구화’로 <global studies>를 ‘지구학’으로, <global humanities>를‘지구인문학’으로, <globalism>을‘지구주의’로 번역하며 한나 아 렌트, 데이비드 하비, 맨프레드 스테거, 울리히 벡 등의 이론을 전거(典據)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벡이 지구화의 길에서 정확히 언급하고 있듯, 지구화는 정확하게‘위험한 자구화’를 의미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지구화, 즉 세계화는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제1세계의 경제적 세계의 확장, 즉 신자유주의 의 전면화에 그 본의가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벡이 지구화를‘위험하다’고 했던 것이고, 아렌트나 하비도 전 지구촌이 자본 중심의 세계화의 메커니즘 하에 놓이는 것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세계화(지구화)

는 결국 제1세계가 주도해온 식민지적 세계시스템(colonial world-system)의 강화 논리(I. Wallerstein)에 다름 아니다. 만일‘지구인문학’에서 이러한 세계지배학의 논리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의도와는 상반되게 위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한국학, 한국철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개벽학’에서 찾고, 이 개벽학이‘지구학’으로 확장되는 것에는 필자도 이견이 없다. 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한다(이상은 조성환, 「장점마을에서 시작하는 지구인문학」, 文학 史학 哲학  제63호, 2020a, 216~220쪽; 조성환, 「현대적 관점에서 본 천도교의 세계주의: 이돈화의 지구주의와 지구 적 인간관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4호, 2020b, 88-89쪽 참조).‘지구인문학’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조성환이 다른 글에서 정확히 짚고 있듯,“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 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래의 개념 세계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조성환, 「다시 개벽을 열 며」, 다시 개벽 제1호, 2020c, 25쪽) 정확히 이런 의도로 지구학,‘지구인문학(Earth-centered Humanities)’을 주창한 것이라면, 이미 구미에서 비판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인 <globalization>, 

<globalism> 안에 儒學, 東學, 西學을 포괄하는 새로운 학문을 담아내겠다는 시도 자체가 엇박자라 생각된 다. 본론에서 언급하겠지만, 가능하다면 더 늦기 전에 제3의 개념(이미 연구팀에서 사용하고 있는‘지구개 벽학’이나‘천지공생학’과 같은)을 창안해 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수순(手順)이 아닐까 싶다. 만일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봉착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일례로,‘지구인문학’은 최근의 다중우주론과 관련해서 보면 자칫‘지구중심주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지구인문학’은 다중우주론자들 에게는 지동설을 천동설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여기에다가‘지구학’은 <Earth Science>란 영어 번역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Earth Science(Geoscience, Geology)>는 주지하듯 지구 행 성(Planet Earth)과 관계된 자연과학의 모든 연구 영역을 포괄한다(https://en.wikipedia.org/wiki/Earth_science). 최근에는 지구(자연)환경 파괴, 빙하 붕락 등과 관련해 세계인들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으며, 네 분야(암석, 물, 공기, 생명)의 주요 연구 영역 중 특히 생명권은‘지구학’과 직결돼 있으며, 환경 통찰력 개발 (development of environmental insight), 지리윤리(geo-ethics)를 포함해 사회적 웰빙(social wellbeing), 자연적 이고 본능적인 동기, 학습 본능의 생물학적 측면, 효과적인 의사결정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 영역을 다변화하고 있다 – N. Orion,“The future challenge of Earth science education research”, Disciplinary and Interdisciplinary Science Education Research, Vol. 1, No. 3, 2019, pp. 1~8 참조. 이런 까닭에 필자는 차제에 <global studies>를‘지구학’이라 그 의미를 특별하게 부여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거듭 제안하는 바이다.

이라면, 이는 결과적으로 제1세계에서의 기존 연구에 편입 또는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좀 더 효과적인 연구결과의 도출을 위해서라면, 이미 국제적으로 연대해서 활동 중인 기존 연구 (자) 네트워크와 협력하는 것도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들과 같은 무대 위에서 새 로운 주장을 펼쳐야 독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그들과 다른 무대 위에서 아무 리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만일 독자 대중이나 관객이 없거나 적다면, 이 연구는 빛을 발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과 같은 무대 위에 다른 내용을 함께 올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그때 더 효과적으로 다른 내용을 전할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인문학의 제3지대인 대한민국의 소장학자들이 의기투합해 세계지식계를 겨냥해 지구학 또 는 지구인문학이라는 나름의‘글로벌 지식 디자인’을 그려보고 또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충 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미 관련 연구가 10여 년 이상 축적 된 데다 전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이미 <global studies>를 학과로 운영하고 있는 상태라는 점을 간 과한 채 외길을 고집하는 것은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데도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global studie s>를 굳이‘지구학’ 또는‘지구적 연구(global researches)’라 할 양이면, 제1세계에서의 기존의 연구와 변별점이 무엇인지를 지금보다 훨씬 더 예리하게 벼리는 작업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안목 은 거시적으로 갖되, 주제는 미시적으로 잡아 연구하는 것이 한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 다.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마치 과거의 유럽이 그랬고, 현재의 미국이 그러하듯(<그림1> 참조), 제3세계의 연구자가‘새롭다’고 주창한 지구학을 과연 제1세계의 학자들이 거들떠보기나 할 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2. 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의 필요성 앞서 우리는 제3세계에서 지구학을 연구하려면 지역-로컬의 기반학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언급했 다. 같은 논리로 제3세계에서는 제1세계와 비교되는 제3세계의 관점을 방법론적으로 분명히 제시 할 필요가 있다. ) 돌려 말해 제3세계에서 발흥된 지구학은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에 대한 정확한 분석-비판-극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 

제3세계가 요구하는 지구학은 제1세계에서처럼“신의 관점을 가진 지식(God’s eye-view knowle dge)”을 재생산하는 것이 목표일 수 없지 않은가.31) 부언컨대, 모든“관점을 초월하는(the point-z ero perspective)” 방식에서 ) 모든 관점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지구학에 접근해야 한다. 지구촌의 현실을 탑-다운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텀-업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하는 것이 지구학의 기본적 출발 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텀-업 방식으로 세계지배학과 변별되는 지역-로컬 기반학을 독립적 관점으로 구성했다면, 2단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세계지배학 내에 결여돼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연구주제들에 대해 새롭게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2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제1세계 내에 결여된 제3세계의 지식/철학을 맞세워 변증법적으로 이 양자를 융합시키는 작업이 관건이 될 것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제3의 지식’을 탄생시키는 것이 가능해야만 비로소 제3세계에서 주창한‘지구학’은 새로운 이론/학문으로 그 가치를 범지구 적 차원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서구의 기독교성/ 개인주의/ 성경 기반의 서구지배학을 동양의 유 불선 사상의 종합이론, 집단주의, 유불선의 다양한 경전들을 새롭게 융합해‘글로벌 공공선’에 기 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철학을 제안하는 것도 하나의 연구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2단계에서는 제1세계와의 지적 대결이 필수조건이다. 이를 피한다면, 진정한“지구적 비판의식(planetary critical consciousness)”33)이 발현된 지구학 연구라 할 수 없다. 제1세계와의 지적 대결이 불가피한 것은‘모든 관점을 배려하는 방식의 지구학’의 구축은 기본적으로 제3세계 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34) 

탈식민적 인식론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같은 무대(세계지식계) 위에서 새로운 주장을 펴는’ 

데 있어 단계적으로 요구되는‘지적 전략’이다. 정치적 투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 안 되는 것 처럼, 지구학을 제1세계의 관객이 없는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욱이 최근 들어 제1세계나 제3세계나 할 것 없이 기존의 사상들에‘새로운(new)’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neo-liberalism, neo-Marxism, neo-Christianism, neo-Islamism, neo-Slavism, neo-Afric anism, neo-Judaism, neo-Eurocentrism, neo-Confucianism, neo-Hinduism 등35)). 따라서 지구학은 단

 

33) W. Mignolo,“DELINKING: The rhetoric of modernity, the logic of coloniality and the grammar of de-coloniality”, Cultural Studies, Vol. 21, No. 2~3, 2007, p. 500.

34) 본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제3세계’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불유쾌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대한 민국이 어찌 제3세계 수준이냐?”는 반문도 예상된다. 하지만 필자는 감히 대한민국 국민의‘국학(한국

학)’에 대한 관심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 연구 자체를 꺼리는 경향도 없지 않고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국제적 수준의 담론 생산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것도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지구학’을 이야기하는 이 자리에서 필자가 이렇게‘제3세계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i) 이들 제3세계의 연구자 네트워크와 연대해 한국 학, 한국철학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 며, ii) 무엇보다도 탈식민적 인식론에서는 제1세계(구미)를 겨냥해 엄연히 구미와‘다른 세계들(worlds)’ 이 존재하고, 따라서 구미에서 추구하는 지식과는‘다른 지식들(knowledges otherwise)’이 존재한다는 사 실을 끝없이 전 세계 지식계에게 환기시키며 나름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들과 연대해 한국학, 한국철학의‘다름’, 즉 특수성, 재지성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면 최소한 제1세계의 거부감 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iii) 게다가 아래에서 두셀의‘초-근대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탈식민적 인식론은 모든 지역-로컬의 지식/철학의 비위계적(non-hierarchical), 자기-조직적(self-organic)인 ‘헤테라키(heterarchy, 지식체계 내의 이질적 요소들 간의 관계의 다양성 존중)’를 지향한다. 부언컨대 제3세계주의자들이 꿈꾸는 지식/철학은 동일성, 동질성의 위계(hierarchy)에 근간한 제1세계의 지식/철학 체계와 달리 차이와 바로 이 다양성을 실천(practices of difference, diversity)하면서“더 정의롭고 지속가 능한 세계(worlds), 유럽중심적 근대성〔식민성〕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원리를 통해 정의되는 세계

(worlds)”이다 - A. Escobar,“Beyond the Third World: Imperial Globality, Global Coloniality and Anti-Globalisation Social Movements”, Third World Quarterly, Vol. 25, No. 1, 2004, pp. 220~222 참조.  본고

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것은 탈식민적 인식론은 모든 지역-로컬 지식/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재건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이며,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점점 미시화되고 있는‘제국적 세계성(imperial globality)’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35) W. Mignolo(2007), op. cit., p. 500. 이 자리에서 우리는 미뇰로가 왜 자신의 논문의 부제에‘근대성의 수지‘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과거로, 국가·지역중심주의로 회귀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 분되어야 한다. 지구학은 학문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며, 모든 지역-로컬을 배려하고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제1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36) 미뇰로가 탈식민적 인식론을 위해서는‘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제1세계의 문법을 따르는 것으로 지구학은 세워질 수 없다. 지구학의 구축을 위해‘제3세계가 중심이 된 탈식민적 인식론’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며, 미뇰 로가 그의‘탈식민적 인식론’을‘지구적 비판의식’과 함께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언컨대, 지구촌 전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철학에 대한 기존 논의를 다르게(새롭게) 

인식하려면 이를 위한 논리와 문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조성환이 새롭게 밝혀낸 동학 에서의‘자아의 지구성’이나 천도교에서의‘우주적 자아(세계적 자아, 무궁아, 천지아, 한울아) 논 의도, 제1세계에서의 데카르트-훗설 중심의 자아나 주체의 논의와 좀 더 적극적인 대결을 벌였으면 하 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37) 

3단계에서는 이미 탈식민적 연구자들(decolonialist s), 제3세계주의자들(thirdworldists)에 의해‘지방화된 유럽’과‘지방화된 미국’을 포함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에서 최근 새롭게‘정상 지식(n ormal knowledge)’으로 계발·소개되어 전 세계의 지식계에서 널리 수용하고 있는 제3세계의 지식과 의 2차적 결합을 시도해야 한다. 지식/철학의 지역 <그림2>: 지역세계화로서 지구학/철학의 재세계화 개념도 세계화를 목표로 한 이 새로운 밑그림은 <그림2>에서 보듯, 구미(Euro-American)를 포함해 지구촌 의 전 대륙을 포괄하는 지식/철학의‘재-세계화(re-worlding)’가 목표다.38) 

이런 점에서 지구학은 구미 중심의 세계지배학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며 포용적인 철학이라는 점 을 잊어선 안 된다. 그뿐만 아니라 윤리적이며 인륜적인, 평등적이며 분배적인, 미시적이고 지역로컬 배려적인 철학이 우리가 제3세계적 관점에서 구상하고자 하는 지구학의 기본적 설계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한번 더 요약하면, 제1단계에서는 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을 기반학으로 사학’과‘식민성의 논리’에 대응해‘탈식민성의 문법’을 강조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36) A. Escobar, op. cit., p. 219:“제3세계의 이론화는 〔제1세계에 대한, 특히 유럽중심주의〕 비판적 이론이 새로운 지리문화적·인식론적 위치에 포함되고 통합된다는 점에서 제1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37) 자세한 설명은 조성환(2020b), op. cit., pp. 90-96 참조. 이런 점에서 두셀의“Anti-Cartesian Meditations: 

On the Origin of the Philosophical Anti-Discourse of Modernity”, JCRT, Vol. 13, No. 1, 2014, pp. 11~53 참 조.

38)‘재세계화(re-worlding)’ 개념에 대해서는 Chih-yu Shih and Yih-Jye Hwang,“Re-worlding the‘West’ in post-Western IR: the reception of Sun Zi’s the Art of War in the Anglospher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Asia-Pacific, Vol. 18, 2018, pp. 421~448 참조.

구성(constructioin)하고, 제2단계에서는 다른 지역-로컬 지식들과 융합이 가능한 영역 간의 상호구 성(co-construction)을 시도하며, 마지막 제3단계에서는 제2단계에서 새롭게 연구된 지식들이 지구 촌 차원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제3의 지식으로 재구성(reconstruction)해 내야 한다. 이렇게 재구성 된 지식/철학이라야 비로소 제3세계가 제1세계의 주변부가 아닌 제1세계와 동등한·당당한 주체가 된‘지구학’이 탄생할 수 있다. 

지구학의 3단계적 구성(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에 동의한다면, 지구학을 꿈꾸는 우리 모두 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 명칭이‘지구적 영성학’이건, ‘지구적 윤리학’이건,‘지구적 평화학’이건,‘지구적 개벽학’이건, 목표는 제3단계인‘지식/철 학의 재구성’에 이르는 데 있으며, 그 출발은 1단계인‘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의 구성’ 여 부에 달려 있다. 지구학의 <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제3세계에서 단지‘지 구학’이라 목청을 높인다고 제1세계의 지식계가 이에 대해 반응을 하거나 자극을 받을 리는 없 다. 보편주의의 가면을 쓴 제1세계의 패권적 지식/철학의 식민성은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종식된 것 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39)

3. 로컬과 글로벌, 서구와 비서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E. 두셀의 해법 데리다의‘철학의 적지(適地)’,‘철학의 영지(領地)’ 운운이나 하버마스의‘미완의 근대성’이나 할 것 없이 서부 유럽 밖에서의 서부 유럽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수용할 염사(念思)가 전혀 없다는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즉 제3세계에서의‘지구학’ 주창은 명민하면서도 꾀바른 전술이 필요하며, 단독으로‘지구학’을 창안해 전 세계의 지식계에 오랜 시일을 두고 알릴 것인지 아니면 CSG(Center for Global Studies on Culture and Society (CGS) 나 AAGS(Asia Association for Global Studies) 등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40) 좀 더 빠른 시일 안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글로벌 식민성은 갈수록 진화해가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기에 선택은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 

감히 필자는 이 자리에서 국제적 연대가 상책이라 제안하며, 준비 중인 지구학의 인식론적 구성 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서구 유럽으로부터의“‘철학’의 해방”을 통해 탈식민 철학을 완성한 E. 두셀(E. Dussel, 1934~ )의‘초-근대성(trans-modernity)’ 개념을 소개해볼까 한다. 두셀은  

39) 식민주의(colonialism)는 분명 끝났다. 하지만 J. R. 리안도 강조하듯, 과거에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와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 간의 관계에서 식민적(지배/종속의) 관계(colonial relation)는 오늘날에도‘재현’,‘재 생산’,‘변형’의 형태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식민주의‘이후’를 의미하는‘포스트식민주의

(postcolonialism)’라는 용어의 등장과 사용이 무색할 정도로‘신식민적(neocolonial), 신제국적(neoimperial) 통치 형태로 변신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식민지배 형태를 과거의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심지어 는“다중식민주의, 준식민주의, 내부적 식민주의(multiple colonialisms, quasi-colonialism, internal colonialism)”라는 용어까지 등장한 상태며, 이는“미국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대표되는”“제국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다 - J. R. Ryan,“Postcolonial Geographies”, A Companion to Cultural Geography, Blackwell Publishing Ltd, 2004, p. 472. 

40) 본 협회(https://www.asianstudies.org/)는 2005년 결성되었으며, 연 2회 정기간행물, Asia Journal of Global Studies를 출간하고 있음.

자신의‘초-근대성’ 개념을 구미 학계에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으며,“세계현실(world reality)”, 즉“지구 전체(the whole earth)”를 그의 해방 철학의 적 지로 삼고 있다. ) 

두셀에게 철학은“지구 위의 비참한 사람들에게도 또한 현실”인 이 세계현실을 구제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의 탈식민 해방철학 관련 글들은 스페인어권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영어권에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굳이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소개하는 이유는 초-근대성 개념이 갖는 로컬/글로벌, 서구/비서구를 아우르는 탁월 한 방법론적 해법 때문이다. 

3-1) 서부 유럽은 주지하듯 지난 5세기 동안 서부 유럽 밖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기독교-계 몽(이성)-과학(기술)을 앞장세워 자신들의 폭력 행사를 정당화했다. 자세히 논할 공간은 없지만, 19 세기 중후반 서학(西學, 천주교)도 유럽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전통사상을 뿌리 체 뒤흔들며, 조선에‘천학(天學, 天主學)’으로 정착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정신을 지배 하고 있었던 유학을 서학이 일정 부분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두셀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기초교육시스템의 정착 및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역사도, 철 학도, 세계사도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의 관점이 지배적인 현실이라는 점에 대해 개탄한다. 그에게 ‘해방’은 모든 구미적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두셀의‘해방’은 미뇰로의 용어로 바꾸어 보완하면 구미와의‘연계의 고리 자체를 끊는 것’로 부터 시작된다. ) 두셀의 3대 해방서(신학의 해방, 철학의 해방, 윤리학의 해방)는 이렇게 구 미와 연결고리를 끊고‘독립적인 라틴아메리카학’을 탈식민적으로 구축하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제3세계는 두셀이 자신이 소속된 지역-로컬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라틴아메리카와 거 의 같은 상황이고, 거의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각 국가가 일반 교육을 실시한 기간이 70-80에서 100년 가까이 되었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 전 세계 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게 되자, 이 과정에서 세계지배학에 의 해 무엇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왜곡되고 불공평하게 기술되었는지를 자각하는 기회가 지역-로컬 민에게 자각의 기회가 된다. 자신이 소속한 문화, 국가에 대한 위상을 글로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안목, 즉 글로벌 비전에 따라 특히 제3세계에서는 지역-로컬의 식민적 현실에 대한 각성이 일게 되고, 그결과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세계지배학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고개를 들게 된다.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도 이런 배경과 문맥에서 탄생한‘반세계지배학’의 전형이 라 할 수 있다. 앞서 <그림2>을 통해 간략히 필자가 구상하고 있는 지구학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 했듯, 유럽이 지방화되었다는 것은“유럽은 유럽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되며 ), 이는 유럽이 세계 철학의 적지가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국(물론 러시아, 호주를 포함해)과 함께 지식/철학의 미래, 즉 모든 지역-로컬이 상호적 구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철학의 재구성에 동참해 야 한다는 말과 같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해, 서부 유럽 철학만이 보편주의, 민주주의, 휴머니즘, 평 화의 상징이라는 편견, 착각일랑 이제 접으라는 것이다.

3-2) 이렇게 전 세계의 지식/철학을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로 통제하던 유럽이 지방화됨으로써 이 제 각 지역-로컬은 자신의 고유 지식/철학을 자긍심을 살려 기반학(토대학, 지역-로컬 고유의 인문 학)으로 창설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서부 유럽 철학의 특수성과 유일신론적 편견을 보완할 수 있 는 대안이 모색된다.‘새로운 지구철학’을 위한 아젠다에 지역-로컬의 기반학을 포함시키려면 무

엇보다도 신개념, 신방법론(‘de-coloniality’,‘divesality’,‘pluriversality’나‘東學’과 같은)으로 

기반학을 세워 세계학계에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부 유럽 철학을 겨냥해“소리만 지르고 규 탄만 할 게 아니고 새로운 사유 질서를 만들겠다면 어떤 질서를 잡을 건지 구상을 해야 한다”44) 는 뜻이다. 

새로운 사유 질서(New order of philosophy)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개념에 담아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세계를 담아 타자에게 전달하는데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은 100여 개국 이상의 철학자들이 참여하는 세계철학자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 등에서 발표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참을 독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45) 철학의 중심 이동이나 새로운 중 심에 대한 고민을 세3세계의 학자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3-3) <그림2>에서와 같이 각 대륙이 고유한 기반학으로 제안한 지식/철학이‘새로운 세계철학’ 으로 재구성될 수 있기 위해서는, 앞서‘제3세계적 관점에서의 방법론 모색’을 논하며 강조한 바 있듯, <구성 → 상호구성 → 재구성>이라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래에서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림3>은 두셀이 자신의 초-근대성(trans-modernity) 개념을 구미 중심의 세계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46) 이 그림의 핵심은‘전체성(식민지배의 주범인 구미의 중심성, 근대성)’과‘외재성(라틴아메리카를 대표로 하는 비구미, 탈근대성)’ 개념의 이해가 관건이다. <그림3>에서 근대성(A)은 본 연구와 연관해 구미가 과거에(또는 현재에도 여전히) 전 세계를 상대 로 전개·전파했고, 오늘날에도  전개·전파하고 있는 지식/철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림3>을 자 세히 들여다보면, A 밖에 B, C, E, F가 있고, D는 A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D는 결국 지역-로컬 

 

84집, 2020, 109-144쪽 참조.

44)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박윤철 엮음,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6, 318쪽 – 이는 백낙청 교수가 2016년 데이비드 하비와 창비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하비의 글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읽은 것이라 밝힌 내용을 간접 인용한 것임. 

45) 대한민국은 2008년 <동서문명의 향연>이란 주제로 아시아 최초로 제22차 서울세계철학자대회를 개최했 으며, 제1차는 프랑스 파리 대회였다. 

46) 그림에 대한 설명은 E. Dussel,“World-system and“trans”-Modernity”, Nepantia(View from South), Vol. 3, No. 2, 2002, pp. 234~236 참조. 두셀은 자신의 이 논문이 1960년대 이후부터 고민해온 것들이 집적된 것이라 강조하고 있다.

고유의 지식/철학이면서 지속적으로 A와 상호 교류가 가능한, 최소한 A 와 교류경험이나 접점이 있는 지식/ 철학이다. D는 A와 최소한 상호성이 확보된 지식/철학인 셈이다. 반면 B 는 A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비구미적 지식/철학이다. 이를 타운레이의 표현으로 바꾸면,‘새로 운 세계철학’을 지향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A가 어쩔 수 없이 수 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런데 D, B의 작용이 점점 확대되면 <그림3>: E. 두셀의‘외재성’,‘초-근대성’ 개념도 언젠가 A의 테두리 선이 해체될 것이다. 구미에서 오랫동안‘그 밖의 세계(the Rest, the Third wor ld)’의 것으로 명명한 채 방치한 지역-로컬들의 지식/철학이 A 안으로 들어가 A를 구성하는 결정 적 요소가 되고 A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결국 A는 그동안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경계를 강화하는 데만 공을 들였던 모든 것들이 덧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바로 이 D와 B의 역량으로 결국 A의 경계선, 즉 세계지배라는 폭력의 경계선이 와해되고 나면, 두셀이 꿈꾸는, 기존의 지배하고 종속하는 A와 B, C, D, E, F와의 관계, 즉 한쪽에서는 지식/철학의 표준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를 추종하기만 해야 하는 관계가 해체되어 모든 지 역-로컬의 지식/철학이 중심이 되는 초-근대성이 실현된다. 

두셀의“초-근대성 프로젝트”는,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서구가 그것들을 채택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경멸하기까지 했던 지식/철학의 외재성에 해당 하는데, 바로 이 외재성이 보유하고 있던 잠재성이 전체성에 변화를 가해 21세기에 이르러 중요한 의미의 창조적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 두셀의 초-근대성 프로젝트는“지구촌의 다수 문화들(p lanet’s multiple cultures)”이 동참해 세계사(world history),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영원한 중심 이 서부 유럽에 있다는“구미적 근대성을 넘어서는(beyond Western modernity)” 데 있다. ) 두셀

에 따르면, 근대성은“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부터 5세기 동안이나 유지된 세계-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데, 그에게 이는“실패한 제국주의적 세계(관)”일 뿐이다. 따라서“근대성에 의해 제거 된 문화들”,“근대성의 밖(‘outside’ of modernity)”에서 여전히“살아 꿈틀대고, 저항하며, 성 장한 다른 문화들, 즉 외재성”이“21세기를 위한 새로운 문명”의 개발에 앞장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49) 

두셀의 초-근대성 프로젝트는 구미의 전체성의 외재성으로 배치되는 데 그쳤던 것들이 전체성의 

폭력을 단지 비판(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슬기롭게 극복(종합)해 21세기적 전망을 제3세계 적 관점에서 제시한다는 데 있다. 두셀의 프로젝트는 그의 학문적 자긍심과 비전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언급대로“유럽이나 미국 밖에는 수천의 문화들이 존재한다.” ) 이 수천의 문화 들이 존재하기에 인류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의 문화와 다른 문화들에 대 한 존경과 이질적 정체성에 대한 배려는 두셀이 그의 해방의 철학에서 강조한‘세계현실’에 대 한 반영이자‘지구 전체’에 대한 고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대다수의 인류는 그들의 일상에서, 계몽된 지평에서 각기 문화들을 유지하고, 세계성(globality)의 요소들을 쇄신하고 포함할 수 있도록 재조직하며,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 ) 

두셀의 이 주장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두셀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A를 향

한 B, C, D, E, F의 활동력을 높이는 데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보편적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역사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 문화, 보편적 역사에 대한 환원적 요구는 각 지역-로컬이 역사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창조적 능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 기초한다. 모든 지역-로컬(유럽과 미국도 마찬가지지만)은 각기 독특한 문화와 특정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공동의 노력을 통해 되살리고 심화시켜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 식에 기초한 문화관, 역사관, 세계관, 지구관이다. 

지역-로컬의 고유 지식/철학을 기반학으로 구성함에 있어 우리가 굳이 두셀의 초-근대성 개념을 소개한 것은 그의 철학적 주장과 방법론이 본 연구의 화두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 구상은 결국 두셀과 같은 방식으로 중심/주변, 동양(동학)/서양(서학)으 로 지식의 경계를 분할하는 전통의 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로컬의 지식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 로 재구성해야 한다. 모든 지역-로컬이 중심이 된 대안적 세계화, 즉‘지역세계화(localobalizatio

n)’에 대한 자각이 시급한 시점이란 뜻이다. ) 그렇지 않으면 이미 중심을 전유한 <global>이 더욱 강화되고 비대해져 결과적으로 <grobal>이 되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III. 맺음말: 제3세계 지식인들의 연대와‘장소감’이 필요한 이유

오늘날 세계화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국가도 거부할 수 없는“후퇴할 수 없는 삶의 사실”(A. Gi ddens)이다.54)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구학에 대한 관심은 역으로 세계화의 강화로 인해 세계 화의 피해 지역-로컬인 제3세계권에서‘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여전히 경계 심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제1세계에서는 세계지배학의 꿈을 과거에 는 말할 것도 없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세계지배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3세계의 연대가 필요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 리한다면 지역-로컬의‘불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요인즉 단지 세계화에 맞서 지구학이라는 닻을 올린 것만으로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세계화, 세

계지배학의 피해, 불행이 사라질 것이라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W. 미뇰로는 우리에게“식민적 권력 매트릭스는 밖(outside)이 없기에 밖에서 관찰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고 경고한다.55) 즉“우리〔모두는, 구미인이나 비구미인이나 할 것 없이〕는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56) 미뇰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구미와의‘연결고리를 끊지 않고서 는’ 탈식민적 사유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할 정도로 식민성은 자체적으로 계속해 진화를 거듭하며 지배의 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E. 두셀이“탈근대성도 유럽중심주의만은 몰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미뇰로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57) 미뇰로의 목표도 결국 두셀과 마찬가지로 구미를 감싸 안고 포용하는 것 이지만, 바로 이 목표를 위해 현 단계에서는“인식적 불복종, 독립적 사고, 탈식민적 자유”가 불 가피하다는 것이며,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구미가 비구미에 제안한〕 신세계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알고, 감각하고, 믿고, 살아가는 방법들과 공존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부인하며, 파괴하고, 악마화했다.”58) 

미뇰로가 이렇게까지 유럽중심주의, 근대성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세운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이는 세계화, 세계지배학의 위세에 대항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일종의 절망감의 토로가 아닐까? 그에게 세계화, 세계지배학은“제국주의적·식민적 정치학”에 다름 아니 다. 지식/철학에도 그가‘제국주의적/식민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이 유가 여기에 있다.59) 이는 제3세계에서 일고 있는 비판적·대안적 세계화 연구가 지역-로컬 지식

 

참조.

54) 재인용: https://en.wikipedia.org/wiki/Global_studies.

55) W. Mignolo,“Interview”, E-International Relations, Jan. 21, 2017, p. 5.

56) Ibid.

57) E. Dussel(2002), op. cit., p. 233. 58) W. Mignolo(2017), op. cit., p. 4.

의  재건 운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말과 같다. )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 에 맞서 제3세계의 지구학이 지식/철학적‘담론의 복수화와 다원화’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구미로부터의 지식/철학의 독립은 어쩌면 정치적·경제적 독립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 정치나 경제적 저항에 비해 지식/철학의 저항이 약한 것은 물리적 폭력이 정신적 폭력보다 더 직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후자보다 전자에 대해 즉각적 반응을 보인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학에 대한‘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지구학은 인류가 공동의 노력을 통해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당면과제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 외치는‘기존의 세계철학’을 극복한‘새로운 세계철학’, 지구철학에 대한 목소리 가 5대양 6대주를 관통하게 되면, 바텀-업의 방식으로 지식/철학의 재-세계화가 완성되면, <그림3> 에서처럼 비구미의 외재성이 구미의 전체성을 포용하고 감싸는 날이 오면, 타운레이가 제안한‘새 로운 세계철학’으로 중심 이동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면, 두셀의 해방철학은 분명 멀지 않은 장 래에‘지구 전체’에 감로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제3세계권의 실천적 철학자들 덕분에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고 배제된 다수의 목소리를 제1세계 권에서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 음에도,“이성의 지리학이 〔구미에서 비구미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 우리가 긴장의 끈을 놓 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제3세계권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신철학 운동이 아직은 엘리트들의 운동 차 원에서 제기되는 수준이고,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regionalization, localization)를 둘러싼 힘 겨루기는 상당 기간 더 지속될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세(戰勢)는 세계화의 힘이 훨 씬 세기 때문에 지역-로컬이 중심 잡기를 마무리짓기도 전에 <grobal>이 COVID-19처럼 전 세계에 먹구름을 들씌울 확률이 높기에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 

제3세계가 중심이 된 지구학의 구성은 제3세계의‘권리 회복’의 문제이다. 제3세계는‘장소의 

현상학’을 통해 구성해야 한다. 실존의 장소는‘저기 있는 추상적 세계(world-there)’가 아니라 ‘여기 내 앞에 있는(I-here) 구체적 장소’다. ) 바로 이 구체적 장소, 즉 지역-로컬은 인간의 욕 망, 믿음, 사물들, 사람들이 포함된‘특수하고 특별한’ 장소다. 인간의 모든 현상학적 경험은 이렇 게 구체적 장소에서 실행된다. 구체적 장소에서, 그곳이 어디이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데, 이는 곧 장소, 장소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말과 같다. 캐이시가 자아와 장소를 신체로 성찰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캐이시에 따르면 우리는 결국“로컬 장소에서 체화된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며, 소위‘철학’

이란 걸 실천한다. 그런즉“지리적 동물(homo geographicus)” )인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염려를 로컬화하는” )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사항일 수밖에 없다. 이를 D. 모리스의 표현으로 바꾸 면, 인간은“장소에 뿌리를 둔 존재이기에 장소를 위해 염려를 로컬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렇게 자신의 실존적 염려를 로컬화한‘장소-내-존재’에게 장소는 무엇보다도‘장소감(sense of pl ace, 장소 의식)’을 제공한다.‘장소-내-존재’가 장소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장소가 더 이상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서적·실존적 공간, 사회적·문화적 공간으로 장소의 성격이 존재에게 내밀화·내면화되고 복합적 의미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화론자나 신자유주의자들이 기획하는 글로벌-가상 공간은, 캐이시에 따르면, 전 지구촌을 하나로 병합하려는 자들의“획책된 일반론”에 불과하다. 이는“〔지역-로컬의〕 생활세계가 확장된 순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근대성의 신화”를 연장하려는 속셈에 다름 아니다. ) 글로벌-가 상 공간의 제산자(制産者)인 제1세계권에서는 이렇게 모든 지역-로컬을 자신들이 기획하고 있는 글 로벌 공간의 지배하에 두려고 한다.‘내’가 사고하고 노동하고 상상하는 곳이‘구체적 장소’라 는 인식 전환이 수반되지 않으면‘장소감의 결여’로 인해 종국에 우리 모두는‘장소 상실’을 경 험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1세계의 공간병합론자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 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종속적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취미도 욕망도 가치관도 세계관도 오직 그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이 결정할 것이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제3세계국가들은 제1 세계로부터 밀려드는 상품과 자본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상품과 자본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제1세계의 자본력·경제력은“공간과 장소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결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경험하는지도 결정한다.” ) D. 매시가“필연적 반동”으로서“지역-로컬의 장소감(sense of local place)과 그 특수성” )에 대한 인식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의 장소-정체성은 문화적 정체성, 집단-공동체 의 정체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지구학, 지구인문학이 구체적 장소에 천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제1세계의 세계지배학과 독립적이면서 포용적인 지구학, 지구인문학을 구성해낼 수 있다.“내가 생각하는 곳에 내가 존재한다” )는 사실을 망각할 때 기존의 관념론적 철학이 그랬 고, 현대의 데이터 과학이 그러하듯,‘인간’이 잊혀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그렇게 장소에 서 사람들(people)이 잊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각기 자신이 속한 장소를 지켜내 는데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장소를 철학화하는 우리의 과제, 철학을 지역-로컬화는 책무는 장 소-내-존재의 역할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참고문헌

박치완, 「로컬 중심의 대안적 세계화 기획 : 〈세계→지역화〉에서 〈지역→세계화〉로」, 인문콘 텐츠 제58호, 2020.

      , 「지역-로컬 지식의 재건 운동과 지역세계화의 의미」, 현대유럽철학연구 제56집, 2020.

      , 글로컬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토픽,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1(근간).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박윤철 엮음,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6. 조성환, 「장점마을에서 시작하는 지구인문학」, 文학 史학 哲학 제63호, 2020.

      , 「현대적 관점에서 본 천도교의 세계주의: 이돈화의 지구주의와 지구적 인간관을 중심으로 」,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84호, 2020.

      , 「다시 개벽을 열며」, 다시 개벽 제1호, 2020.

Casey, E. S., Getting Back Into Place: Toward a Renewed Understanding of the Place-world, India na University Press, 1993.

      ,“Between Geography and Philosophy: What Does It Mean to Be in the Place-World?”, An 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Vol. 91, No. 4, 2001.

Davis, B. W.,“Dislodging Eurocentrism and Racism from Philosophy”, Comparative and Continent al Philosophy, Vol. 9, No. 2, 2017.

Derrida, J.,“A Europe of Hope”, Epoché, Vol. 10, Iss. 2, 2006.

Dussel, E., Philosophy of Liberation, trans. by A. Martinez and C. Morkovsky, Maryknoll, New Yor k: Orbis Books, 1985.

      ,“World-system and“trans”-Modernity”, Nepantia(View from South), Vol. 3, No. 2, 2002.

      ,“Anti-Cartesian Meditations: On the Origin of the Philosophical Anti-Discourse of Modernit y”, JCRT, Vol. 13, No. 1, 2014.

Escobar, A.,“Beyond the Third World: Imperial Globality, Global Coloniality and Anti-Globalisation Social Movements”, Third World Quarterly, Vol. 25, No. 1, 2004.

Geertz, C., Local knowledge. Further Essays in Interpretive Anthropology, New York: Basic Books, 1983.

Kather, R. ,“Continental Contributions to Philosophy of Science”, Prolegomena, Vol. 5, No. 2, 2006.

Macbeth, D.,“The Place of Philosophy”, Philosophy East & West, Vol. 67, No. 4, 2017.

Massey, D.,“A Global Sense of Place”, Marxism Today, June 1991.

McDougall, J.,“Reterritorializations: Localizing Global Studies in South China”, Global-E, Vol. 10, I ss. 20, 2017.

Mignolo, W.,“I am where I think:  Epistemology and the colonial difference”, Journal of Latin A merican Cultural Studies, Vol. 8, Iss. 2, 1999.

      ,“DELINKING: The rhetoric of modernity, the logic of coloniality and the grammar of de-c oloniality”, Cultural Studies, Vol. 21, No. 2-3, 2007.

      ,“Interview”, E-International Relations, Jan. 21, 2017.

Morris, D.,“Review Essay”, Continental Philosophy Review, No. 32, 1999.

Mouzelis, N.,“Modernity: a non-European conceptualization”,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Vol. 50, Iss. 1, 1999.

Ndlovu, M. & Makoni, E. N.,“The globality of the local? A decolonial perspective on local econom ic development in South Africa”, Local Economy, Vol. 29, Nos. 4~5, 2014.

Orion, N.,“The future challenge of Earth science education research”, Disciplinary and Interdisci plinary Science Education Research, Vol. 1, No. 3, 2019.

Relph, E., Place and placelessness. London: Pion Limited, 1976.

Ritzer, G.,“Rethinking Globalization: Glocalization/Grobalization and Something/Nothing”, Sociologic al Theory, Vol. 21, No. 3, 2003.

Roudometof, V.,“The Glocal and Global Studies”, Globalizations, Vol. 12, Iss. 5, 2015.

Ryan, J. R.,“Postcolonial Geographies”, in James S. Duncan, Nuala C. Johnson, Richard H. Schein (eds.), A Companion to Cultural Geography, Blackwell Publishing Ltd, 2004.

Schatzki, T. R.,“Subject, Body, Place”,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Vol. 91, No. 4, 2001.

Shih, C-Y. and Hwang, Y-J.,“Re-worlding the‘West’ in post-Western IR: the reception of Sun Zi’s the Art of War in the Anglosphere”, International Relations of the Asia-Pacific, Vol. 

18, 2018.

Schnapper, D.,“La transcendance par le politique”, in E. Badinter (ed.), Le piège de la parité, H achette Littérature, 1999.

Schor, N.,“The Crisis of French Universalism”, Yale French Studies, No. 100, 2001.

Stevenson, O. et al., Geography of Missing People: Process, Experiences, Responses, University of Glasgow, 2013.

Thomas, M. & Thompson, A.,“Empire and Globalisation: from‘High Imperialism’ to Decolonisatio n”,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36, No. 1, 2014.

Townley, C.,“Recent Trends in Global Philosophy”, in W. Edelglass and J. L. Garfield (ed.), The Oxford Handbook of World Philosophy, Oxford Universoty Press, 2011.

Velázquez, G. L.,“The role of philosophy in the pandemic era”, Bioethics UPdate, No. 69, 2020.

Williams, B.,“Philosophy as a Humanistic Discipline”, Philosophy, Vol. 75, No. 294, 2000. 

 

【지구재난학】


2021/03/13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인류세 Anthropocene 와 주체세 Juchecene
<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기자명 김상일   입력 2020.06.02 
 
SNS 기사보내기SNS 기사보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머리말

‘코로나19’와 함께 인류의 임종이 가까워 오지 않나 하는 우려와 두려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 엘리자벹 큐버러스가 주도하는 인간의 ‘죽음학 thanatology’ 혹은 ‘임종학’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란 죽음의 침상에서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관찰하는 것 정도라고 한다. 지금 지구촌 70억 인구가 거의 모두 지구의 종말과 함께 죽음의 침상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자. 죽음학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침상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태도와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할일일 것이다.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지구의 암석층에는 그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멸종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고 이러한 층을 연구하고 거기에 이름을 매기는 학회를 ‘국제층서학회’(혹은 층서학회)라고 한다. 층서학회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과거 일만 년 동안의 살기 좋던 홀로세 holocene를 끝내고 다른 세로 접어들고 있는 데 크뤼천란 학자는 이를 ‘인류세 anthropoocene’라 불러야 한다고 한다. 이에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이상북스, 2018)에서 한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임종학을 다루고 있다. 

해밀턴은 인류의 임종을 막으려는 네 부류의 운동을 말하면서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시한다. 신인간중심주의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다른 세 가지 운동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데서 해밀턴의 주장이 분명해진다. 물론 해밀턴이 그렇게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신인간중심주의가 그 내용면에 있어서 주체사상의 그것과 같다고 보아 인류세에 대한 ‘주체세 Juchecene’라는 층서명을 독자적으로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세가 인류가 멸종한 다음 미래의 암반에 기록될 명칭이라면 주체세는 다가올 임종을 막아보자는 처방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해밀턴은 자기 책의 마지막 끝 단어를 ‘두 번 다시 아니어야 never again’로 끝내고 있다. 지구에 두 번 다시 이런 재앙이 오지 않게 하는 처방전은 과연 무엇인가? 

‘인류세’란 무엇인가?

‘에를레프니스 erlebnis’란 말은 ‘갑자기 우연히 생긴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별안간’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방식대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에 별안간 나타난 엄청난 균열의 규모를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특정한 사회현상을 뛰어 넘어 인간의 조건과 지구상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한다.”(해밀턴, 102쪽) 

이제 겨우 5000여 년도 안 되는 인간의 역사를 말하기엔 간에 풀칠 할 정도라고 봐야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아닌 층서학자들이 지구의 지질을 연구할 때 사용하던 절age, 세epoch, 기period, 대era, 누대eon 같은 용어들이 더욱 실감나게 되었다. 코로나가 인류 대멸종의 전조가 아닌지 지구촌이 함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의 가장 큰 원인이 지구의 기후 변화에 있다면 질병의 원인을 지방, 인륜, 세회(사회), 세시(우주변화)의 네 가지로 분류한 이제마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인간의 질병이 오존층 파괴에 의한 기후변화와 코로나19가 무관하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존층 파괴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바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파울 크뤼천 박사는 2000년 "인류 전체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질시대의 가장 큰 단위가 신생대, 중생대 같은 대(代)이고, 중간이 페름기, 쥐라기 같은 기(紀)이고, 가장 작은 단위가 홀로세, 플라이스토세 같은 ‘세(世)’이다.

인류세가 다른 세와 다른 점은 세의 주인공인 인류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란 점이다. 충적세와 홍적세 그리고 홀로세 등이 있지만 공룡이 자기 살던 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세는 스스로 인류 자신이 ‘인류세’를 만들었고 이름마저 스스로 붙여 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대로 임종의 침상에 지금 누워 있다.

크뤼천 박사가 ‘인류세’란 명칭을 붙인 다음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운명’을 단행본으로 논하고 있다. 과학은 물론 철학과 신학을 망라한 시각에서 멸종 앞에 선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치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인류세’에 대하여 반론으로 ‘인간세’, ‘자본세’ 등 다른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인류세 대신에 ‘주체세’를 논해 본다. 그것도 해밀턴이 말한 신인간중심 사상이 주체사상의 ‘사람중심’과같이 들리기 때문에. 

1945년과 인류세의 시작

역사시대가 아닌 지질시대 구분법에 따라 인류문명사를 구분하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생대 Cenozoic 제4기에 속하는 홀로세 Holocene이다. 신생대가 시작된 지는 6600만 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제4기가 시작된 지는 고작 258만 년 전이다.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부터 홀로세에 들어섰다. 그런데 바야흐로 그 홀로세가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끝나고 인류세도 인위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크뤼천이 1945년을 찍어서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원자폭탄이 투척된 이래로 지구촌 곳곳에서 핵실험의 결과로 10만 년이나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방사성 동위원소가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말름(Andreas Malm) 같은 사람은 인류세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본세 Capitalocene’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여성해방 운동가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본주의란 궁극적으로 부유한 백인 남성중심 문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와 대척점에 있는 술루(Chthulu)를 따와 ‘술루세(Chthulucene)’라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인류세를 정의하는 제 관점에서 볼 때에 인류세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어 보인다. 1945년과 자본주의, 그리고 백인 남성 문화가 인류세 정의의 중심에 등장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북이 같이 인류세보다 더 적합한 용어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관점에서 홀로세 다음에 급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이에 대처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지구과학자들이 홀로세가 끝나고 인류세가 시작되었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와 그로 인한 지구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 영향 때문이라 한다(해밀턴, 16쪽).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지구 시스템에는 급격한 혼란이 조성되었다. 변화의 속도와 파급력이 인류 역사상 전체를 통해 볼 때에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거대한 가속도의 시대’라 부른다. 100만 년 이래의 암석 기록들을 보면 1945년 원자폭탄 피폭 이후 지표면에 퇴적된 방사능이 급작스럽게 쌓이게 되었고 이를 ‘밤 스파이크 Bomb spike’라 부른다.

이 ‘밤 스파이크’와 함께 일본은 패망하였고 우린 해방과 함께 분단이 되었다. 우리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에 인류세도 자본세도 술루세도 다 옳다. 1945년이 인류문명사에서 새로운 의의를 갖는 이유는 ‘자연’이란 개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인간이 어떻게 어거할 수 없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는데 1945년 이후부터는 인간이 자연을 만들고 있으며 그 만들어 놓은 자연에 인간 자신이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세먼지 같은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결과이지만 인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자연, 곧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과거 1만년 홀로세 동안 인간은 따뜻한 기후, 그리고 맑은 공기와 물을 즐기며 잘 살아 왔다. 다시 말해서 홀로세가 주는 제1의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가자’고 구가하면서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인류세의 도래와 함께 제2의 자연, 즉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연을 향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을 수 있겠느냐 이다. 우리에겐 돌아 갈 자연은 없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공기도 공기이지만 앞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물이다. 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이 점점 부족해져 간다는 것이다. 미국 엘에이 근처 빅 베어란 산정에는 산정호수가 있다. 오랜만에 방문을 했을 때에 그 많던 물이 거의 다 사라지고 바닥만 드러나 있었다. 과연 물부족이란 사태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엔 마실 공기가 없고 땅엔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멸종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제2자연의 도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와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전도시키고 말았다. 1세기 전, 아니 30여 년 전만 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해밀턴은 경고하고 있다. “지구 경로의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변화가 우리의 미래이며, 역사적 균열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사고방식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이다”(해밀턴, 70쪽).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잘났다고 자랑하던 그러한 관념부터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GNP나 GDP를 자랑하고 매년 경제성장률이나 각국마다 비교하는 사고방식을 언제까지 더 유지할 것인가?

인류세 앞에 잘못 진단한 운동가들 

그럼 인류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던 것인가? 당장 1989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질 때에 자본주의의 만수무강을 외치고 공산주의의 영원한 패망을 선전하던 사람들이 지금 인류세에 대하여 무슨 언질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가 화석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부르짖고 있을 것인가? 

‘인류세’의 저자 해밀턴은 인류 멸종의 위기 앞에 임종의 병상에 처해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족속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위기는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주장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② 이제 인간에게 해결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환경운동가들과 생태학자들-‘포스트휴머니즘’, ③ 인간에게 위기 극복의 강한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에코모더니스트’, ④ 인간의 강함과 지구의 강함을 더욱 강화시켜 양자가 맞물리게 해야 한다는 ‘신인간중심주의’가 그것이다. 표로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들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인류의 임종의 침상에 나타나 너도 나도 자신들이 해결사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일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인간중심주의를 제외하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④번째로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the new anthropocentrism)를 대안으로 들고 있다. 이 마지막 부류의 주장은 환경 파괴자들이든 보호론자들이든 자기들의 힘을 과신하고 남용해 무절제하게 사용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을 절제 있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해밀턴은 ‘새로운 인간 중심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다. 다만 반자본주의, 반백인남성주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서양 철학과 신학 전반에 걸쳐 비판적이다. 서양 철학의 주류가 된 이원론적 사고 구조와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구조를 만들어 결국 환경 파괴 주범이 되었다.

인류세가 반자본주의 그리고 반백인남성주의를 겨냥한다면 미국에 대척점에 서 있는 곳과 나라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고, 그 곳은 ‘북부 조선’ 혹은 ‘북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고. ‘인류세’란 말 자체가 인류의 멸종을 전제한 후의 지구과학에 부쳐진 이름이라면 이 시점에서 이 지구를 구제한다는 전제를 할 때에 그 곳은 당연히 자본주의와 백인남성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될 곳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북부 조선’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자본세와 인류세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제이슨 무어이다. 그는 크뤼천의 ‘인류세’란 말에 반기를 들고 ‘자본세’란 말을 만들어 내었다. 층서위원회는 되도록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려고 한다. 홀로세 다음으로 ‘자본세’가 집중조명 되는 이유는 제2의 자연이 자본주의를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했고, 화석연료 생산업체들의 로비의 영향력으로 1945년 제2차 대전 이후부터 놀랄 만큼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었다. 

1945년, 하필이면 한반도 분단과 때놓을 수 없는 이 기간에 국제층서위원회가 ‘인류세’라고 명명한다면 지구의 종말과 함께 한반도는 지구의 지층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백인남성 그리고 부자 자본주의에 대척점으로 혹자들은 정착토착민(settler colonialism) 즉, 미국 인디언을 손꼽는다. 인류세 담론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백인남성은 1492년 이래로 정착토착민들을 살던 곳에서 추방하고 살해한 후, 거기다 오늘날 자기들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여 드디어 인류세를 도래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세가 말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이 살아 온 방식과 그들의 토착지식과 정신세계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정착토착민을 강화시켜 다른 백인 남성부류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에서 토착민들이 외래인들을 밧줄로 묶어 두면 힘을 못 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외래인들은 밧줄을 끊고 말았다.

토착민들이 백인 부유 남성들과 맞서 싸우기란 바위에 계란 던지기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본주의-백인남성들에 맞서고 인류세를 대신할 수 있는 정체는 없다는 말인가? 

크뤼천은 책의 결론에서 ‘새로운 인간’ 즉, ④‘신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인간상이란 인간의 ‘강해진 힘’과 ‘지구의 강해진 힘’이 결합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신인간상은 인간의 강해짐이 자연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환경 재앙이 왔다는 ②포스트휴머니즘이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한편 ③인간을 강하게 함으로 지구를 약하게 하려는 에코모더니즘도 부정한다.

크뤼천은 “일부의 철학자의 입장은 지구의 강해진 힘만을, 다른 입장은 인간의 강력한 힘만을 인정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두 힘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④“우리가 지구와 인간의 힘 모두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인간이 직면한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인류세의 이율배반이란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욱 강해졌다”와 같다. 인류 문명사란 인간과 자연 간의 힘겨루기이었으며 인간과 지구가 모두 강해지는(win-win) 것이 새로운 인간상인데, 그것은 이율배반적 혹은 역설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중진리’라고 한다. 인간과 자연은 지금까지 대립 구도이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예속 내지 종속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낡은 인간상이다. 그래서 인간과 지구가 모두 동시에 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상이라고 한다. “신인간 중심적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91)

인간이 자연과 매듭같이 맞물린다는 것은 ‘국지적 local’이기도 하고  ‘보편적 global’이기도 한 ‘glocal’이다. 자연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연에 의해 제약받고 있으며, 힘과 자주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주성이 방종에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인간중심적 자아이다.  

신인간중심주의와 다른 견해들의 비교 

해밀턴은 인간과 지구(자연)에 ‘약해진 힘’과 ‘강해진 짐’을 적용하여 위의 표와 같이 네 가지로 지금까지 나타난 이론 혹은 운동을 분류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임종을 앞두고 임종의 침상에서 보이는 네 가지 종류가 일목요연하게 표로서 제시되었다. 우측 하단의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힘도 지구의 힘도 모두 강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른 세 가지 이론과 운동 차원에서 볼 때에 모두 비판의 대상일 수 있다. 

①은 종교적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인간도 자연도 모두 무기력하여 오직 신의 섭리만이 답이라는 주장으로 신천지를 비롯한 기독교의 빛바랜 주장으로서 제일 처음으로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다. ③에코모더니즘 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의 기술이 갖는 힘을 휘두르거나 강화시켜서 지구 자연을 더 제어해 나가야 한다는 모더니즘을 더 강화시키자는 운동이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지구를 인간이 제압해 약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에덴동산을 거니는 아담과 하와가 신으로부터 자연을 잘 다스리라고 부탁 받은 청지기와 같이 지구상에서 행세하려 한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노예에 대한 착한 주인이 없듯이 착한 청지기는 없었다. 에코모더니즘은 이렇게 아직도 홀로세에 인간이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②포스트휴머니즘은 신인간 중심주의 강한 지구 그리고 약한 인간을 대망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영향력을 가장 많이 끼치고 있는 조류이다. 오늘날 위기가 인간의 힘이 비대해지고 지구가 약해진데 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지구(가이아)에 힘을 실어 주고 인간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신유물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청지기 직분을 박탈해 자연에 돌리려 하나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은 오히려 인간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오늘날 주변의 페미니즘과 생태철학 그리고 포스트 식민주의 운동이 모두 포스트휴머니즘 운동에 해당한다. 

신인간중심주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자연을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서로 맞물리자면 인간과 지구(자연) 간에는 서로 균형이 같거나 맞아야지 어느 하나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최근에 와서야 자기 당착에 직면하여 인간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신인간중심주의가 주장하는 인간과 자연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페미니즘이나 생태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교모하고 공허한 말장난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에서 벗어나려하는 모습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뉴턴-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들이 인간과 지구를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④신인간중심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나 정신과 물질의 상호 맞물려 있음을 인지하고 인간도 지구도 상호 강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신인간중심사상 

지금까지 신인간중심주의를 기준으로 다른 세 가지 견해들을 각각 비교해 볼 때에 해밀턴이 말하고 있는 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맞물림 그리고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의 극복이란 관점에서 볼 때에 두 개의 사람중심 사상은 멀지 않고 가깝다.

주체사상이 해밀턴의 인류세의 새인간중심주의와 일치하는 면은 유물론과 관념론 이원론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이 갈망하는 대단원이 이원론의 극복에 있었지만 오히려 더 균열을 강화시킨 면이 있다면 주체사상은 이에 적절히 대처했다. 중국과 구소련이 낫과 망치(유물론)를 당 마크로 삼은 데 대하여 ‘북조선’은 거기에 붓을 넣었다. 이는 상징적으로 유물론과 관념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지구의 힘을 모두 강화시켜야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의 논리에 의하면 세 가지 생명력인 물질적 생명력, 정신적 생명력, 사회협조적 생명력에 의하여 추동된다. 그래서 인간의 3대 생명력의 발전수준에 알맞게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의 수준이 결정된다. 이것은 주체사상이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으로 정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보면 객관적 존재성의 측면만을 물질세계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유물론이나 주관적 측면만을 본질적 특징으로 보는 관념론은 모두 배격된다.

즉,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역사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세계관이 있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힌 것은 없었습니다. 세계를 관념이나 정신의 세계로 보는 관념론자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세계관 1), 지난 시기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본 유물론자들도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세계관 2). 주체사상은 사람을 단순히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종래와는 달리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와 그 발전에 대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였습니다(세계관 3). (괄호 안은 필자의 것임)

그러면 유물론과 관념론을 조화시킬 존재는 무엇인가? 주체사상은 그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게 된다. 사람을 관념으로만 파악하려는 세계관1과 물질로만 파악하는 세계관2의 한계와 잘못을 극복하고 그것을 종합시켰을 때에 사람 그 자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세계관3이다. 여기에 독특한 사람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주체사상에 대한 온갖 오해와 곡해가 발생하게 된다. 

먼저 ‘사람 중심’이란 말이 무슨 새로운 맛과 의미를 갖느냐고 비판한다. 역대 철학으로서 사람을 다루어 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학이 어디 없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부하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르네상스로부터 인본주의 또는 인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세기 계몽기에 이르러서는 존 로크, 루소로부터 대표되는 사회정치 철학이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권리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 등장한 인간 중심 사상은 거의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원시 고대의 자연 종교의 신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면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기 스콜라 철학은 인간을 다시 인격신의 예속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 철학은 인간을 신의 복속 상태에서 해방시키려 했으며, 그 결과 빚은 과오는 인간을 너무 개별적이게 했으며 인간을 원시 동물적 형태로 끌고 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서구의 인간주의는 신중심 아니면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물질 아니면 정신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인간을 자연과 유리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다윈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인간관인 것이다. 인간을 경제적 조건과 성적 본능으로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나 밀의 인간관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만 파악함으로써 인간 소외를 초래했고 이 점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갖고 있는 인간상의 병폐이다. 이러한 인간관을 형성시킨 데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한몫 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창 없는 단자 windowless monad 는 창살 없는 아파트적 공간 속에 인간을 밀폐시키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①종교 근본주의, ②포스트휴머니즘, ③에코모더니즘, ④신인간중심주의를 주체사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먼저 세 가지는 모두 서양 철학이 범한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밀턴이 제시한 ④신인간중심주의는 주체사상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그래서 인류세를 ‘주체세’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밀턴이 아무리 새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서구 전통 속에서 그것을 구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류의 종말이란 임종의 침상에서 그 어느 의사도 환자를 바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색과 구호는 ‘신인간중심주의’라고 하지만 정치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구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이미 역사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이를 해밀턴은 ‘자연과정(natural process)’이라고 한다(책97). 필자는 이를 항일유격대원들이 춥고 굶주림 속에서도 왜 야생동물에 손을 대지 않은 데서 찾으려 한다.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전권에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전향하기는 했지만 김동하란 남부군이 쓴 ‘노고단은 알고 있다’를 읽던 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공이 이현상을 만나러 갔을 때에 막사 앞으로 노루가 지나가는 데 총으로 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한 동료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우리 항일유격대와 야생 동물은 같은 운명이라네. 서로 돕지 않으면 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지”라고 말하는 데서 회고록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산속에서 굶어 죽어도 야생동물을 살상하지 않았다. 자연과정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실로 회고록은 많은 사실을 알게 하지만 야생동물과 유격대원들 간의 공동체 운명 정신은 인류세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 ‘자연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주체사상이 죽어 멸종돼 가는 인류에 희망을 던져 인류세를 대신하는 주체세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서 대동강변 주체탑 옆에 서 있는 당마크는 인류가 멸종된 다음에 이 지구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살았다는 한 표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간과 자연지구의 조화,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조화, 그것 이외에 인간이 다음 세에 남길 다른 것이 무엇일지 아직 모르겠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일 kimsykorea95@daum.net

2021/01/31

Philo Kalia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2) Philo Kalia | Facebook

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Comments
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 Reply · 11 m
Write a comment…

Philo Kalia
YtesterSpoiday rtlSlcahtmutn so1famgre7:td1cod3  · 
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Comments
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 Reply · 1 d
Write a comment…

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Comments
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See more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 Reply · 1 d · Edited
Write a comment…




----
Philo Kalia
17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0g:od38  ·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
이 말씀은 맹목적 믿음과 안심을 키우는 엉터리 상담자의 확언이 아니라 길들여진 사유를 도전하게 하고 현실의 속면을 파고들어 파열하게 만드는 메시아적 메시지이다. 현실은 생명을 해치려는 세력으로 득실거린다. 그 소용돌이 안에서, 생명의 각축장 안에서 그것을 善으로 바꾸는 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힘이 보이는가?
이 힘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적인 것”으로 이어지며 크게 자란다. 메시아적인 힘이고 메시아적인 시간이다. 시간의 종말(끝)이 아니라 종말의 시간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그 시간은 영원을 현재에서 폭발시키는 시간이며, 그 시간은 현실 안에서 현재에 현실태와 다른 線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善은 현실태와 다른 線으로 분할되는 그 순간, 그 지점일 것이다. 생명의… See more
Comments
이신일
그림 : 김형주
Image may contain: one or more people
 · Reply · 2 w
Write a comment…

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16g:od39  · 
다윗은 수금(하프) 연주가이며 우선 시인,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 23:1)이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詩人이란 사실이 얼마나 복된 전통이며 위대한 유산인가! “예술의 본질은 詩다”라고 하이데거가 좀 세게 발언했지만, 성경에 시편이 있고, 그리스에는 철학이 시작되기 전 시인들의 무대였고, 중국에는 시경이 있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는 음악과 함께 미술 그리고 시와 시적 언어가 지배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신성한 것과 하나님을 합리적 사유와 논쟁적 논리를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시는 사물을 분석하기 전에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음미하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시학적 신학(Theologia Poetica)을 적극 수용해야 하며 그 원조는 다윗이다. 고-중세의 영성가나 수도원 신학자들, 경건주의적 기독교의 언어는 시이다. 찰스 웨슬리는 시와 음악으로써 감리교 운동을 전개했음은 잘 알려… See more
Comments
Write a comment…

Philo Kalia
16ctn SnpJaclfolnoscernudalrdaoyu rsSate 08g:od42  ·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창 45:8)
형님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냈다. 처음에는 죽이려고 생각했다가 대상(隊商)에게 팔았다. 얼마나 마음의 의도가 고약하고 비인간적인가? 사람들도 요셉이 이집트에 보내진 것은 요셉의 형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요셉의 생각과 고백을 통해 현상적 사실에서는 감추어진, 사실의 인과관계만을 보는 눈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실제를, 아무리 그 사실을 인과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분석해도 일절 알 수 없는 속면을 감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고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용인으로서의 형님들은 부정된다. 형님들 행위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신 것이… See more
Comments
신동근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 Reply · 1 w
Write a comment…

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2s3od:mrcecd29  · 
예술신학
1.예술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예술신학이라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성서와 교회전통을 신학의 규범과 자료로 삼지만, 각 시대의 철학과 긴밀한 대화 속에서 신학 사상을 전개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과학과의 대화를 뜨겁게 진행 중이다.기독교 윤리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의 제반 학문과 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예술 및 대중문화와 대화하면서 신학을 전개한 경우는 앞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양이다.
2.예술신학은 예술의 모든 장르 및 대중문화, 놀이와 여가와 대화할 뿐 아니라 오감의 활동을 중시한다. 음악신학, 미술신학이란 말을 써서 특정 예술 분야와의 만남을 부각하듯이, ‘감각신학’이란 말을 쓸 수 있다.… See more
Comments
Youngchan Lee
공부과정에 학생으로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 Reply · 1 w
Write a comment…

Philo Kalia updated his profile picture.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7od:mrcecd13  · 
Image may contain: text that says "예술목회 Institute for Artistic Ministry 원장 심광섭 (신학박사) Mobile_010-8880-0739 www.artmin.org"
Comments
성금란
비장함이 느껴지는 포즈---어울림!
2 w
Philo Kalia
tS1h5 Janhfposouunairnsy aghSiutg o1s3od:mrcecd53  · 
요한복음은 예수 사랑의 신비를 유월절 축제(요한 13장) 이후에 시작되는 수난 이야기의 이야기 배치와 독특한 문학구조를 통해 표현한다. 요한복음의 최고의 과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그 무능력으로부터 해방하여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깨우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전에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이 말씀은 예수의 사랑을 읽는 요한복음의 시각이다. “자기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εἰς τέλος ἠγάπησεν αὐτούς)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저술 동기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의 말씀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에서 완성된다. 이스라엘의 해방의 축제일인 유월절의 시작은 말씀이 육신이 된 참된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끝까지 사랑할 때를 더욱 속 깊게 다지는 시간이다.
누가복음의… See more
---
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Comments
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 Reply · 6 d
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 Reply · 6 d
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

--

Philo Kalia
11tSptoenhsorehds ·



삼위일체론 vs 마르크스주의(4)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삼위일체론을 지향하며 여기서 완성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삼위일체론은 쾌쾌묵은 낡은 신앙의 교리이고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자는 실천론인데... 신앙인 중에 얼마나 이 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리가 의미하는 바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할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믿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친구 니콜라스 페도로프가 한 말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차르의 독재정치와 크로토포킨의 무정부주의를 중재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은 것인데, 삼위의 사귐을 따르는 정교회의 사귐(Sobornost)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생각했다.
신론이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니? 믿음은 애초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 믿음의 대상인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몰트만에게 삼위(성부-성자-성령)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지배’(Herrschaft)가 아니라 ‘사귐’(Gemeinschft)이다. 삼위일체적 사귐은 삼위의 경륜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며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참된 신학적 자유론이다, 기존의 지배권과 복종이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치밀한 사랑의 사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이다. 세계의 변화를 실천하는 철학은 분명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회적 프로그램을 삼위일체론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통해 유물론과 무신론을 대신하여 정의롭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인격들 간의 친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에 의해 삼위일체 사회론으로 발전된다. 보프는 삼위일체적 사귐(communion)을 전면에 내세운다.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 그는 삼위일체적 사귐이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은 인간 안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창조(자연) 안에서 이 사귐의 원리를 실현해 나간다. 이 사귐의 원리는 먼저 정치와 교회에 적용되어 모든 권위주의와 상하 지배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질서로 전환해야 한다. 이 삶의 원리는 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를 넘어서며, 사회로서의 교회에서 사귐의 공동체 교회로 나아가게 한다. 삼위일체론은 가히 완전한 해방을 추동하는 힘이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 밖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오래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 교리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의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이 일치됨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교리이다. 그렇기때문에 1980년도 이후 동서교회의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세계교회가 삼위일체론을 다시 연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들은 고무적이다.
이런 이유로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 교회론(밀로슬라브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으로, 삼위일체 예배론(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경배와 찬미의 신학>)으로, 삼위일체 생활론 및 생태론(곽미숙,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 현재규, <열린 친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적 종교 대화론(Mark Heim, The Depth of the Riches. A Trinitarian Theology of Religious Ends) 등으로 계속 확장되어가고 있다.
나는 삼위일체론이 프로그램 대신 아름다운 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75Paul Dongwon Goh and 74 others
17 comments

9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6 more comments


Sun-joong Kim

또한 "아름다운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꿈꿉니다.

1






Like


·
Reply
· 13 m



Philo Kalia replied
·
1 reply
7 m





Write a comment…






















Philo Kalia
YtesterSpoiday rtlSlcahtmutn so1famgre7:td1cod3 ·



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6767
6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Jae Young Kim

탈형이상학의 하나님, 이 책을 아직도 구할 수 있나요?

1






Like


·
Reply
· 1 d



Jae Young Kim replied
·
2 replies





Write a comment…






















Philo Kalia
2u9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34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2)
몰트만은 1967-68년도에 잠시 반짝했던 시기,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밀란 마코비치(Milan Machoveč)를 제일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은 그를 1966년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가 개최된 함부르크에서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단정하고 젊은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주변의 신학자보다 더 관용적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는 프라하에서도 지적이었고, 박식했으며, 매우 성실했다. 그의 다음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의 정치적 투쟁을 위해 나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성서의 시편을 읽고 성가를 부를 것이다.”
일찍이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작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Jesus für Atheisten)가 안병무에 의해 1974년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사회사적 관점에서 본 예수운동과 별 다를바가 없지만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들인가, 하는 주장에서 다르다.
이 책은 전체 6장이다. 첫 장은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의 정당성을 모색하고, 2장은 자료의 문제, 3장은 예수 이전의 유대 종교를 다룬다. 심장 부분은 4장과 5장이다. 4장은 “예수의 사신”이고, 5장은 “그리스도”이다. 나사렛 예수의 실제 선포의 내용과 예수 사후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가 된 후 예수 선포가 어떻게 변형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고찰한다. 방법론에서 8-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코비치는 예수의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강점으로 ‘올 시대’의 입장으로부터 인간들을 감격시키는 순간적인 요구의 선포자였음을 언급한다. 예수선포 전체의 본질과 의미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회개하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 ‘회개하라’(metanoeite, μετανοεῖτε)는 말의 뜻은 ‘너희 자신을 변화시켜라’, ‘달라져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1:5)로 이어지는 말씀으로 예수사신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말씀이라고 본다.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요구는 타자에 대한 감상성이나 소시민적 노력이나 타자의 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엄격하고 타협없는 요구이다. 이 계명은 요구, 변화, 회심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전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예수의 사신은 모순되지 않고 아주 분명한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철저한 변화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 관용과 인내이다.
예수는 바리새적 위선, 외관, 형식주의, 자기德의 과시, 명예욕, 계급욕, 출세욕 등을 늘 경계하고 비판한다. 바리새주의란 “금요일에 돼지 간장의 순대를 먹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이 그들을 번민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사후 다시 예수를 따르도록 제자들을 모은 사도는 베드로였음을 마코비치는 강조한다. (그는 가톨릭교회 전통이 강한 체코 사람이다). 역사적 예수의 사신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신앙의 근거, 구속자, 선포된 자 그리스도, 즉 신앙의 대상으로 바꾼 바울이나, 예수의 사신을 예수의 자기 증언으로 바꾼 요한은 예수 선포의 순수한 종말론적 성격을 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말씀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정통 기독교의 발전은 단순히 순수 신앙에 근거해서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가중되는 체제화와 교권적 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마르크시트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가 예수를, 특히 전통적으로 교회적-종교적 방식으로 더 잘 신앙하느냐가 오늘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강조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원리를 성취하느냐가 예수의 제자됨의 중요한 관건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헌은 예수 이후 1,800여년 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구약적 메시아주의와 철저한 변화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적 동경을 사실상 계승한 자로서,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의 철저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타당하다. “그대들의 실제적 삶의 순간 순간이 그대들의 이론의 거짓을 벌하지 않는가? 만일 그대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았을 때, 재판에 부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저 사도는 그런 행위를 부당하다고 쓰고 있다. 만일 그대들이 왼편 뺨을 맞으면, 오른 편 뺨을 내밀겠는가? ...... 그대들 대부분의 소송과 대부분의 민법행위가 소유문제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보화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씌여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세계관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 그의 미래와 현재, 그의 승리와 패배, 그의 사랑과 고통, 그의 절망과 지울 수 없는 희망을 문제시한다.
애 책은 1974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행된 책인데 46-7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갈피 끝이 흑갈색으로 변해 종이가 메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독일 도서관에서 300년, 500년 전 인쇄된 고서를 봤을 때의 감격을 전혀 맛볼 수 없는 책 종이의 자격미달이다.








7070
6 comments

1 share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1 more comment


Sun-joong Kim

아, 저 책... 한국에 있는 박스들을 뒤지면 나올텐데... 영역본은 지금 갖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See more







1



Like


·
Reply
· 1 d
·
Edited



Philo Kalia replied
·
3 replies





Write a comment…






















Philo Kalia
2u7rt fSJdSanhutatlSrcepymu aafolt ngls1ord8eod:27 ·



당신의 영혼을 환한 하나님께 맡긴 허심(虛心)한 춤사위다. 성령의 산들바람을 타고 허허(虛虛)롭게 된 몸은 십자가에 붙박일 수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힌 몸의 리듬을 통해 생동한다. 뼈와 근육 그리고 살에서 어떤 긴장이나 아픔도 느낄 수 없다. 신기(神氣)와 같은 생명의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결처럼 흐른다.
십자가라는 가장 거칠고 황량하고 까슬한 외재적 물질세계에 구애됨 없이 풀려나 무궁한 우주적 생명세계에로 들어가려는 춤이다. 춤추는 솜씨가 정말 기가 막히다. 그것은 너무나 허허롭고 무욕(無慾)하며, 바람타고 나는 무애(無碍)한 연(鳶)의 자유로운 헤적임이요, 물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유영(遊泳)하는 물고기의 즐거움 같아서 보는 이의 눈길을 더욱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보면 볼수록 그림은 보는 사람의 해맑은 마음을 움직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의 춤에 합류하게 한다.
[유튜브 실시간 강좌예고]: 2월 1일(월), 오후 5.00…
See more









63songsoonhyun and 62 other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Write a comment…


















Philo Kalia
u25tmctS opfonsJanduolraryi iuatteu g0foidc6:0hm0 ·



기독교-마르크스주의 대화(1)
몰트만의 자서전 <너른 공간>(Weiter Raum) 중 꼭 짚고 싶은 곳이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171-188) 부분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 시절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같은 문제, 같은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나 맑스주의 책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과 동경이 무척 컸고, 마침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이 번역되어(이 책은 이내 금서가 됨) 몇몇 사람들이 모여 통독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누렸다.
난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한 서점을 둘러보던 중 아주 구석에 동독에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W)을 발견하고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그 전집은 누구도 찾지 않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다. 1권과 3권을 구입했다. 서독에서 나온 책에 비해 무척 저렴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책을 가지고 귀국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던 폐쇄적 분위기가 내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시절이다.
제 멘토 알프레드 예거는 박사학위논문을 <신 없는 나라.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Reich ohne Gott. Zur Eschatologie Ernst Blochs, 1969)이라는 제목으로 에른스트 블로흐를 썼기 때문에, 상당한 기일이 지난 어느 날, 구술시험 주제에 대해 논의하던 중 유럽에서 발생한 ‘크리스천-맑시스트 다이어로그’를 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사상도 익히고, 연구를 통해 마르크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공통점과 접점을 찾다 보면 북한의 공산주의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이 대화는 역사적으로 이미 정리되고 끝난 사건이니 지금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내심 매우 아쉬웠지만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 주제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몰트만의 서술이 관심을 촉발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신학자들(몰트만, 윙엘, 큉, 카스퍼, 골비처, 크라우스)의 새로운 신론 탐구에서, 그 이전 60년대 미국의 <신죽음의 신학>이나 70년대 이후의 뜨거운 해방신학과 맑스주의의 대화에서, 그리고 이런 전사(前史)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최근 (좀 오만하다고 생각되는) 유럽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부흥한 바울연구 및 유물론적 신학과 크게 보아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어, 그 출발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이미지 하나는 알지 못하는 책의 표지인데 제목(<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 맘에 들어 싣는다.












90Young Joon Kim and 89 others
10 comments

3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View 3 more comments


Young Joon Kim

아 저는 블로흐 저서들을 읽고 싶습니다. 특히 유토피아의 정신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1






Like


·
Reply
· 6 d



Philo Kalia

Young Joon Kim 희망의 원리는 읽을 수 있지요

1






Like


·
Reply
· 6 d


Young Joon Kim

심광섭 네 희망의 원리도 읽고 싶습니다